<?xml version="1.0" encoding="UTF-8"?><rss version="2.0">
	<channel>
		<title>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기념 희년</title>
		<link>https://test2.missa.or.kr</link>
		<description></description>
		
				<item>
			<title><![CDATA[성경인문학]]></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38]]></link>
			<description><![CDATA[2. 성경인문학
 성경은 다양한 인문학적인 관심과 주제를 마주하게 한다. 
 성경은 먼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보편적 가치를 찾게 하고, 나 자신의 내면과 대화하며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하고, 궁극적으로 나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어 준다.
 성경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통해 성찰하게 하고, 그 성찰을 통해 영적 성장을 이루게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게 하며,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며 불안과 고독을 이겨내도록 힘을 준다.
 성경은 문학 속 인물의 신앙적 여정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마주하게 하고, 인물들과 공감하며 공감 능력을 향상시키고, 고뇌와 구원 속에서 전해지는 영적 메시지를 통해 삶과 신앙의 조화를 이루게 하며, 위로와 희망을 전해준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이끌어 주고, 일상 삶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어려움이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와 묵상에로인도하며, 용서와 치유를 체험하게 하며, 죄책감에서 벗어나도록 정신건강에 힘을 준다.
 성경은 지적 호기심과 교양을 성장시켜 다른 문화와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고, 이성과 신앙이 조화를 이루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충만함과 풍요로움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성경은 사랑의 세 가지 유형(아가페, 필리아, 에로스)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하여 공동체에서는 아가페적 사랑을 꽃피우며 용서와 화해, 이웃사랑을 통한 함께 함의 삶을 통해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게 해 준다.

성경 인문학은 다음의 다섯 가지 과정을 거치는 방법론을 통해 성경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하게 하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고 받아들이게 되고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공동체와 소통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게 이성과 신앙의 조화로 전인적 성장과 성숙을 이루며 고난과 위기 속에서도 용서와 위로를 경험하며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과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1단계, 자아의 발견 (Identity):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사회적 역할이나 외부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내면의 자유와 인간 존엄성을 회복하게 한다.
① 성경의 인물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하느님을 만나기 전 그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② 성경의 인물은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어떻게 다가오셨는가?
③ 성인들 중에 성경의 인물과 같은 걸음을 하신 분은 누구이고, 그의 발걸음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④ 나는 나를 어떤 존재로 인식해 왔고, 성경의 인물은 나를 누구로 인식하도록 이끌고 있는가?
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셨는가? 하느님을 만난 이후, 나는 나를 누구로 인식하고 있는가? 성경의 인물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기를 호소하고 있는가?

2단계, 공감과 치유 (Healing): 
성경 속 인물들의 고뇌와 구원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인 자신의 아픔을 투영하고, 심리적 위기와 고독을 이겨낼 힘(Resilience, 실패하거나 좌절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 학습된 무기력의 반대, 높은 회복 탄성력)을 얻는다.
① 성경에서 만난 인물의 고민은 무엇이었고, 그 고민은 그에게 어떤 의미와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가?
② 성경에서 만난 인물은 주변 인물들로부터 어떤 공감과 치유의 영향력을 주고 받고 있는가?
③ 성경에서 만난 인물은 어떻게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에로 나아갔고, 고통과 역경, 즐거움과 놀라움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이끄셨는가? 
④ 고통과 절망속에서 성경의 인물은 어떻게 기도하였고, 기쁨과 희망을 체험한 그는 어떻게 찬미와 감사를 드렸는가?
⑤ 성경은 나를 무기력에서 벗어나 회복 탄성력을 높일 수 있도록 어떻게 자극하고 있으며, 세상을 향해 기쁨을 드러내도록 어떻게 힘을 주고 있는가?

3단계, 관계의 확장 (Love):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에로스, 필리아를 넘어선 아가페적 사랑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고, 공동체 안에서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배운다.
① 성경의 인물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인 후, 이웃을 향한 시각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②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한 사랑은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여 어떻게 드러나고 있으며, 받은 용서를 어떻게 베풀고, 받은 사랑을 어떻게 이웃에게 전해주고 있는가?
③ 성경 인물의 관계의 확장(아가페적 사랑) 안에서 이웃은 어떻게 변화되어 성경의 인물과 함께 하고 있는가?
④ 성경의 인물의 변화를 통해 감동받은 성인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감동시키고 있는가?
⑤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나의 사랑은 어떤 열매를 맺고 있고,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가? 

4단계, 지적·영적 성장 (Growth):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넓히고,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삶의 의미와 풍요로움을 발견하게 한다.
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성장과 성숙은 어떤 모습인가?
② 성경의 인물은 하느님 체험 이후 생각과 말과 행위가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③ 성경의 인물의 성장과 성숙을 통해 통해 주변 인물들의 생각과 말과 행위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④ 성인들의 모습 중에서 성경의 인물의 성장과 성숙을 보여주는 것은 어떤 모습이며, 그 모습은 성인과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감동시키고 있는가?
⑤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내 사고의 틀과 믿음의 그릇은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되어야 하는가?

5단계, Trust (신뢰와 신앙과 구원체험): 
성경에서 자아를 찾은 이들은 성장하고 성숙하며,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과 구원을 체험하게 된다.
① 성경의 인물에게 하느님을 만난 이후 그의 참된 행복이란 무엇인가?
② 확고한 믿음과 행복의 관계는 무엇이며, 그의 참된 행복 안에서 진정한 평화를 어떻게 드러냈는가?
③ 행복과 평화안에서 시련과 고통과 불목은 성경의 인물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④ 성인들에게 행복과 평화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으며, 성인들의 모습은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고 있는가?
⑤ 하느님 체험은 나의 전인적 성장과 성숙을 어떻게 이끌었고, 나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어떻게 열매 맺어가고 있는가?


이러한 성경의 인문학적 접근은 성경을 부담스럽거나 읽기 어려운 경전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자신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정신적 갈증을 해소하고, 삶과 신앙과 지성이 분리되지 않는 전인적인 성숙에로 향하게 된다. 이것을 기억하기 쉽도록 “ L.I.G.H.T (라이트)”라고 하고자 한다.
 L.I.G.H.T (라이트) : "세상의 빛이 되는 성경 인문학“

- 성경 인문학은 나를 비추어 내면의 어둠을 몰아내고 성장과 성숙을 통해 세상을 사랑하도록 삶의 모든 영역을 비추는 빛(LIGHT)이다.

Love (사랑): 아가페적 사랑으로 공동체와 소통함
Identity (정체성): 하느님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발견함
Growth (성장): 이성과 신앙의 조화로 지적·영적 성숙을 이룸
Healing (치유): 고난과 위기 속에서 용서와 위로를 경험함
Trust (신뢰/신앙/구원체험): 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과 구원을 체험

 이 다섯 가지 단계를 통해서 성경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게 된다면 성경안에서 나를 찾고,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에 대한 강력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성경 안에서 공동체를 만나게 된다면 소공동체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가 될 것이고, 하느님 자녀들의 만남은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의 만남처럼 될 것이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24 Mar 2026 09:52:1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9"><![CDATA[성경인문학]]></category>
		</item>
				<item>
			<title><![CDATA[가장 완벽한 고전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37]]></link>
			<description><![CDATA[1. 인문학이란?
 인문이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및 인간의 사상과 문화를 말하며 ‘인문학’이란 인문에 관하여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언어학·문학·역사학·철학·종교학 등의 학문과 직관·체험·표현·이해·해석 등 '인문학적 방법론'을 수용하는 제반 학문 및 이에 기반을 둔 융복합 학문 등 관련 학문분야를 말한다. 인문학은 인간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삶을 성찰하는 융복합적 접근을 통해 삶의 지혜와 사유의 힘을 기른다.

 우리는 흔히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의 용어를 사용하지만 '인문과학'은 자연과학·사회과학과 어조를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인문학이란, 원래 분석적인 학문인 과학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성질상 종합적으로 연구되는 학문이다. 오늘날 인문학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형식과학 및 응용과학 이외의 연구 분야로 자주 정의된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은 인간을 둘러싼 사회계와 자연계의 현상에 대해 귀납법적으로 (경험적으로) 접근하거나, 연역법적으로 보편적인 법칙(당위)에서 특정한 법칙을 유도하는 과학적 방법론을 추구한다. 반면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사변적이고 비판적이며 또한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인간 본질의 정수를 다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음은 프랑스 고졸자격시험(바칼로레아)에서 출제된 문제들이다.
1장 인간(Human)
①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② 꿈은 필요한가?
③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④ 지금의 나는 내 과거의 총합인가?
⑤ 관용의 정신에도 비관용이 내포되어 있는가?
⑥ 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⑦ 행복은 단지 한순간 스쳐지나가는 것인가?
⑧ 타인을 존경한다는 것은 일체의 열정을 배제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⑨ 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⑩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나?
⑪ 행복은 인간이 도달 불가능한 것인가?

2장 인문학(Humanities)
① 우리가 하고 있는 말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것만이 담기는가?
②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③ 철학자는 과학자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④ 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⑤ 역사학자가 기억력에만 의존해도 되는가?
⑥ 역사는 인간에게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에 의해 오는 것인가?
⑦ 감각을 믿을 수 있는가?
⑧ 재화만이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⑨ 인문학은 인간을 예견 가능한 존재로 파악하는가?
⑩ 인류가 한 가지 언어만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한가?

3장 예술(Arts)
①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② 예술 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논할 수 있는가?
③ 예술 작품의 복제는 그 작품에 해를 끼치는 일인가?
④ 예술 작품은 모두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⑤ 예술이 인간과 현실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4장 과학(Sciences)
① 생물학적 지식은 유기체 일체를 기계로만 여기기를 요구하는가?
②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③ 계산, 그것은 사유를 말하는 것인가?
④ 무의식에 대한 과학은 가능한가?
⑤ 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⑥ 이론의 가치는 실제적 효용가치에 따라 가늠되는가?
⑦ 과학의 용도는 어디에 있는가?
⑧ 현실이 수학적 법칙에 따른다고 할 수 있는가?
⑨ 기술이 인간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
⑩ 지식은 종교적인 것이든 비종교적인 것이든 일체의 믿음을 배제하는가?
⑪ 자연을 모델로 삼는 것이 어느 분야에서 가장 적합한가?

5장 정치와 권리(Politics&amp;Rights)
① 권리를 수호한다는 것과 이익을 옹호한다는 것은 같은 뜻인가?
② 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해야 하는 것인가?
③ 법에 복종하지 않는 행동도 이성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④ 여론이 정권을 이끌 수 있는가?
⑤ 의무를 다하지 않고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가?
⑥ 노동은 욕구 충족의 수단에 불구한가?
⑦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가?
⑧ 노동은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가?
⑨ 자유를 두려워해야 하나?
⑩ 유토피아는 한낱 꿈일 뿐인가?
⑪ 국가는 개인의 적인가?
⑫ 어디에서 정신의 자유를 알아차릴 수 있나?
⑬ 권력 남용은 불가피한 것인가?
⑭ 다름은 곧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⑮ 노동은 종속적일 따름인가?
⑯ 평화와 불의가 함께 갈 수 있나?

6장 윤리(Ethics)
①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욕망과 싸운다는 것을 뜻하는가?
② 우리는 좋다고 하는 것만을 바라는가?
③ 의무를 다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④ 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고 하는가?
⑤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⑥ 무엇이 내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 지를 말해 주는가?
⑦ 우리는 정념을 찬양할 수 있는가?
⑧ 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이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가?
⑨ 정열은 우리의 의무 이행을 방해하는가?
⑩ 진실에 저항할 수 있는가?
⑪ 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시험은 제시되는 문제 중에 하나를 골라 쓰는 방식의 시험이고, 자기 개인적인 의견을 쓰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서 담고 있는 철학적인 문제 설정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논리적으로 답변하는 것이 바로 시험의 목적이다. 당연히 자신이 배운 지식이나 고전들을 동원하여 논거로 활용해야 한다. 

 고전을 통해 과거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이를 비판하며 새로운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다. 고전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서의 가치도 있지만, 새로운 생각을 위한 참고로서의 성격은 더더욱 강하다. 혼자 결정을 내리기 힘들면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처럼, 고전은 그런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다. 물론 고전이 무조건 옳다는 식의 교조주의는 인문학의 자멸을 불러오기 때문에 피해야 하며 실제로도 인문학에서 경계한다. 그리고 가장 완벽한 고전 중의 하나가 바로 성경이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Tue, 24 Mar 2026 08:12:3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9"><![CDATA[성경인문학]]></category>
		</item>
				<item>
			<title><![CDATA[3권-여섯. 아산의 인물들, 김옥균, 토정이지암, 강약수, 유광열(요한), 강만수 신부, 오한섭 영농후계자]]></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36]]></link>
			<description><![CDATA[<b>다섯</b><b>. </b><b>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설립인가와 공세리 성당</b>

박수환(요셉)

 
<ol>
 	<li>설립연혁 203</li>
 	<li>공세리성당 부동산 217</li>
 	<li>사립 조성학교 설립과 폐교 후 교사동 처리과정 227</li>
</ol>
① 신교육기관 설치 227

② 사립조성학교(私立朝星學校) 설치와 운영 그리고 폐교. 228

 
<ol>
 	<li><b> </b><b>설립연혁</b></li>
</ol>
<b>1</b><b>차 설립허가 </b><b>: </b><b>대정</b><b>9</b><b>년</b><b>(1920</b><b>년</b><b>) 5</b><b>월 </b><b>8</b><b>일</b>

조선총독부는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설립허가를 대정 9년(1920년)5월 8일부로 설립허가 하였다. 그러나 조선 민사령 시행 이전에 독립의 재산으로 등기상 천주교회 재산이 타인의 소유로 되어 있는 것들이 발견되어 조선총독부의 민법 시행령 제19조 제1항에 의하여 기허가된 법인의 취소와 함께 ‘재설립인가’ 신청을했다. 당시 교회의 <b>총자본금은 </b><b>877,225</b><b>원이었다</b><b>.</b>

 

 

 

<b>조선총독부관보 </b><b>1920</b><b>년 </b><b>06</b><b>월 </b><b>12</b><b>일 정규호 </b><b>2351</b><b>호</b>

<b>1</b><b>차</b><b>. </b><b>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설립허가 </b>

 

 

<b>2</b><b>차 설립인가 </b><b>: </b><b>대정</b><b>13</b><b>년</b><b>(1924</b><b>년</b><b>)10</b><b>월</b><b>27&gt;</b>

조선총독부는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 유지재단의 재인가에 있어 기설립 허가된 재단의 취소와 재인가 신청서를 함께 신청을 받아 조선민사령 제1조 및 민법시행령 제19조 제2항에 의하여 대정13년(1924년) 10월 27일자로 조선총독의 결재를 받아 2차 설립인가를 단행하였다. <b>총자본금은 </b><b>947,147</b><b>원 </b><b>401</b><b>전</b>이었다. 경성구 천주교회 재단 대표이사장은 뮈텔주교였고, 재단이사는 총5명으로 프랑스선교사 4명. 한국인 신부(韓基根) 1명이었다.

<b>조선총독부관보 </b><b>1924</b><b>년 </b><b>11</b><b>월 </b><b>28</b><b>일 정규호 </b><b>3688</b><b>호 </b>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설립 등기 1924.11.10.)

1919년5월8일 기 허가 최소 및 1924.10.27.일자 재인가, 자산총액:947천147원41전,

 

<b>인가신청서에는 </b>법인운영재단 규정이 첨가되었고, 재단이사장은 당연직으로 경성구 주교가 이사장으로 명시되었고, 유고시 부주교가 맡았다. 재단이사 임기는 3년으로 결원 시 주교가 신부 중에서 임명하고, 임기는 잔여기간으로 했다. 재단의 기부금은 재단설립 목적달성을 위해 매년 파리외방전교회에 기부하고, 재산의 처분에 있어서 재단설립과 운영과정에서 재산의 취득, 처분 등은 이사 전원의 동의를 규정했다.

 

여기에 별지로 ① 프랑스영사관 법인설립에 관한 사실증명서, ② 재단법인 이사장 성명서(별지부동산 경성구 천주교회 재산의 확인사항과 프랑스외방전교회, 프랑스 주교회, 조선 천주교회, 경성구 천주교회 등 명의에 대한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자인 뮈텔주교 성명서) ③ 경성지구 천주교 부동산 취득과 미 등기분 천주교 토지목록을 첨부하였다.

 

<b>조선총독부관보 </b><b>1924</b><b>년 </b><b>11</b><b>월 </b><b>28</b><b>일 정규호 </b><b>3688</b><b>호 </b>

<b>(</b><b>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설립 등기 </b><b>1924.11.10.)</b>

<b>1919</b><b>년</b><b>5</b><b>월</b><b>8</b><b>일 기허가 취소 및 </b><b>1924.10.27.</b><b>일자 재인가</b><b>, </b>

<b>자산총액</b><b>:947</b><b>천</b><b>147</b><b>원</b><b>41</b><b>전</b><b>, </b>

-결재선 : 주임- 종교과장- 학무국장- 정무총감- 총독

-협조선 : 외사과장, 총무과장, 문서과장

◯ 설립인가 : 대정13년(1924년)10월27&gt;

 

<b>□</b><b>결재건명</b><b>:</b>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유지재단 설립허가 취소 및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허가의 건

<b>◯ </b><b>지령안</b><b>(</b><b>제</b><b>1</b><b>안</b><b>): </b><b>기허가 취소</b><b>(</b><b>안</b><b>)</b>

- 경기도 경성부 명치정 2정목 1번지

-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이사장 구스타부 뮤치루(뮈텔주교 민덕효)

 

대정9년(1920년)5월 8일부로 학비 제103호 지령 경성구 천주교회유지재단 설립허가를 취소한다.

년 월 일 조선총독

<b>◯ </b><b>지령안</b><b>(</b><b>제</b><b>2</b><b>안</b><b>): </b><b>신규 허가</b><b>(</b><b>안</b><b>)</b>

-경기도 경성부 명치정 2정목 1번지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유지재단 대표자 구스타브 뮤치루(뮈텔주교 민덕효)

대정13년(1924년)4월 8일부로 출원한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유지재단에 관한 건은 조선민사령 제1조 및 민법시행법 제19조 제2항에 의하여 인가한다.

년 월 일 조선총독

 

<b>&lt;</b><b>설립허가 취소신청</b><b>&gt;</b>

<b>□</b><b>건명 </b><b>: </b><b>재단법인설립허가 취소신청</b><b>: </b><b>기안 이유</b>

◯신청내용

대정9년(1920년) 5월 8일부로 학비 제103호에 따라 허가 되었던 경성지구 천주교회유지재단은 사실상 민사령시행 전부터 독립된 재산을 가지는 법인이 되고 이번에 신규로 인가신청에 이르러서는 우측의 조건으로 허가 취소하고 다음과 같이 신청합니다.

대정13년(1924년) 4월 1일

-경성부 명치정 2정목 1번지

-경성지구 천주교회유지재단 이사장 구스타부 무치루(뮈텔주교 閔德孝-민덕효) 신청 싸인, 조선총독 남작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제등실) 결재 싸인

# 조선총독재임 기간 : 1919〜1927년, &lt;일본 해군대장과 내각총리 역임&gt;

<b>&lt;</b><b>설립허가 취소신청</b><b>&gt;</b>

<b>□</b><b>건명 </b><b>: </b><b>재단법인설립허가 취소신청</b>

◯신청내용

대정9년(1920년) 5월 8일부로 학비 제103호에 따라 허가 되었던 경성지구 천주교회유지재단은 사실상 민사령시행 전부터 독립된 재산을 가지는 법인이 되고 이번에 신규로 인가신청에 이르러서는 우측의 조건으로 허가취소하고 다음과 같이 신청합니다.

대정13년(1924년) 4월 1일

-경성부 명치정 2정목 1번지

-경성지구 천주교회유지재단 이사장 구스타부 무치루(뮈텔주교 閔德孝-민덕효) 신청 싸인

-조선총독 남작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제등실) 결재 싸인

<b>&lt;</b><b>설립허가 신청</b><b>&gt;</b>

<b>□</b><b>건명 </b><b>: </b><b>경성지구 천주교회유지재단에 관한 인가신청서</b>

◯ 신청내용

경성지구 천주교회유지재단은 민사령 시행 전보다 독립재산에 있어서 법인이 되었고 민법시행법(령) 제19조에 의하여 민법 제39조 규정 규정사항과 기타에 관한 별지 서면으로 첨부하여 제출하고 허가가 잘 이루어길 바라며 신청합니다.

-경성부 명치정 2정목 1번지

-재단대표자 프랑스인 구스타부 무치루(뮈텔주교 閔德孝-민덕효) 신청 싸인

-조선총독 남작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제등실) 결재 싸인

<b>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관계 규정사항</b><b>(</b><b>정관</b><b>)</b>

 

<b>프랑스 영사관의 재단법인</b><b>(</b><b>경성구 천주교</b><b>)</b><b>설립과 제반사업 운영에 따른 사실증명서</b>

<b>&lt;</b><b>프랑스 영사 증명서</b><b>&gt;</b>

재단법인

◯증명내용

우측 건은 명치45년(1912년) 4월1일 이전 조선에 가톨릭교 전교, 교육과 자선사업에 종사했던 그 사무소, 경성 명치정 2정목 1번지에 설치했던 해당사업과 경영했던 사실상 자체명의와 같은 해당 재단대리로 했던, 개인명으로 했던 토지건물인 사항을 프랑스 영사관 기록과 해당교회 교정(敎正)슈테루씨가 제출서류와 비교하고 기타 확실한 증거(즉 옛 토지문건)은 확실합니다.

해당 별지첨부 토지대장 기초로 본일 소관의 면전에서 해당 재단대표자 교정(敎正)수테루씨가 선서했던 기록을 해당 재단의 본래 토지재산은 사실상 명치45년(1912년)4월 1일 이전에 소유하였고 그리고 전기목적을 위해 사용했던 것은 소관이 알고 있는 범위에서 진실함을 믿고 우측과 같이 증명합니다.

 

대정13년(1924년) 1월 30일

프랑스 영사 000 싸인, 날인
<ol>
 	<li><b> </b><b>공세리성당 부동산 </b></li>
</ol>
드비즈 신부는 공세리성당 소유의 부동산 사실증명서와 별도의 부동산 목록에 기재된 공세리성당 소유 부동산은 경성지구 천주교회 운영재단설립에 대한 사용과 재산상의 명의를 재단의 재산으로 변경하는데 하등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증명서(성명서)를 첨부하였다.

 

<b>① </b><b>천주교 아산공세리성당 부동산 등기 조서</b><b>(</b><b>대정 </b><b>12</b><b>년 </b><b>1</b><b>월 현재</b><b>)</b>

<b>&lt;</b><b>공세리 성당 성명서</b><b>&gt;</b>

◯ 성명내용

별지 부동산 목록에 기재하여 제출된 명의의 부동산은 단순히 제출된 것의 명의를 사용하는 것에 그치고 사실은 경성지구 천주교회의 소유에 상호 위반됨이 없이 하고 경성지구 천주교회의 지도에 따라 어느 때라도 해당 부동산의 명의변경을 하는 것에 어떠한 경우든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성명합니다.

대정12년(1923년) 12월 20일

주소: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애밀리오 드비즈(成一論-성일론)신부 직인 날인

 

 

 

<b>공세리 성당 부동산</b><b>(</b><b>건물</b><b>) </b><b>등기조서</b>

공세리194번지: 목조기와집(조선가옥) 4동 건평54평

취득년도 명치30년(1897년)5월30일 소유:천주교회

 

취득년도: 대정3년(1914년)3월25일 소유자 : 성일론(드비즈)

지번 社寺地(사사지) : 종교부지

<b>② </b><b>1990</b><b>년 공세리성당 부동산 현황</b><b>(100</b><b>주년</b><b>) </b>
<table>
<tbody>
<tr>
<td><b>소재지</b></td>
<td><b>지번</b></td>
<td><b>구조</b></td>
<td><b>건평</b></td>
<td><b>용도</b></td>
<td><b>명의</b></td>
<td><b>소재지</b></td>
</tr>
<tr>
<td>15-04-01</td>
<td>189</td>
<td>793</td>
<td>전</td>
<td>65. 5. 7.</td>
<td>재단</td>
<td>충남⋅아산⋅인주⋅밀두</td>
</tr>
<tr>
<td>-02</td>
<td>26-3</td>
<td>195</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03</td>
<td>15-1</td>
<td>26,876</td>
<td>임야</td>
<td>〃</td>
<td>〃</td>
<td>〃</td>
</tr>
<tr>
<td>-04</td>
<td>15-3</td>
<td>397</td>
<td>임야</td>
<td>〃</td>
<td>〃</td>
<td>〃</td>
</tr>
<tr>
<td>-05</td>
<td>9-1</td>
<td>31,140</td>
<td>임대</td>
<td>〃</td>
<td>〃</td>
<td>〃</td>
</tr>
<tr>
<td>-06</td>
<td>193-28</td>
<td>132</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07</td>
<td>193-30</td>
<td>777</td>
<td>전</td>
<td>〃</td>
<td>〃</td>
<td>〃</td>
</tr>
<tr>
<td>-08</td>
<td>193-33</td>
<td>10</td>
<td>도로</td>
<td>85.11.16.</td>
<td>〃</td>
<td>〃</td>
</tr>
<tr>
<td>-09</td>
<td>193-39</td>
<td>60</td>
<td>대</td>
<td>65. 5. 7.</td>
<td>〃</td>
<td>〃</td>
</tr>
<tr>
<td>-10</td>
<td>193-40</td>
<td>36</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11</td>
<td>193-43</td>
<td>79</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12</td>
<td>195-1</td>
<td>13,650</td>
<td>임야</td>
<td>〃</td>
<td>〃</td>
<td>〃</td>
</tr>
<tr>
<td>-13</td>
<td>217-2</td>
<td>126</td>
<td>도로</td>
<td>85.11.16.</td>
<td>〃</td>
<td>〃</td>
</tr>
<tr>
<td>-14</td>
<td>257-1</td>
<td>23</td>
<td>대</td>
<td>65. 5. 7.</td>
<td>〃</td>
<td>〃</td>
</tr>
<tr>
<td>-15</td>
<td>257-2</td>
<td>13</td>
<td>도로</td>
<td>〃</td>
<td>〃</td>
<td>〃</td>
</tr>
<tr>
<td>-16</td>
<td>257-4</td>
<td>532</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17</td>
<td>258-1</td>
<td>446</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18</td>
<td>294-1</td>
<td>8,988</td>
<td>종교</td>
<td>〃</td>
<td>〃</td>
<td>〃</td>
</tr>
<tr>
<td>-19</td>
<td>292-2</td>
<td>992</td>
<td>전</td>
<td>〃</td>
<td>〃</td>
<td>〃</td>
</tr>
<tr>
<td>-20</td>
<td>155</td>
<td>155</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21</td>
<td>255-3</td>
<td>106</td>
<td>전</td>
<td>85.11.16.</td>
<td>〃</td>
<td>〃</td>
</tr>
<tr>
<td>-22</td>
<td>275</td>
<td>7</td>
<td>대</td>
<td>65. 5. 7.</td>
<td>〃</td>
<td>〃</td>
</tr>
<tr>
<td>-23</td>
<td>302</td>
<td>295</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24</td>
<td>303</td>
<td>324</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25</td>
<td>304-39</td>
<td>1,180</td>
<td>구거</td>
<td>〃</td>
<td>〃</td>
<td>〃</td>
</tr>
<tr>
<td>-26</td>
<td>304-22</td>
<td>635</td>
<td>구거</td>
<td>〃</td>
<td>〃</td>
<td>〃</td>
</tr>
<tr>
<td>-27</td>
<td>198-1</td>
<td>737</td>
<td>전</td>
<td>66. 7. 27.</td>
<td>〃</td>
<td>충남⋅아산⋅인주⋅공세</td>
</tr>
<tr>
<td>-28</td>
<td>256-2</td>
<td>26</td>
<td>도로</td>
<td>65 5. 7.</td>
<td>〃</td>
<td>〃</td>
</tr>
<tr>
<td>-29</td>
<td>258-3</td>
<td>221</td>
<td>전</td>
<td>28. 2. 21.</td>
<td>〃</td>
<td>〃</td>
</tr>
<tr>
<td>-30</td>
<td>40-2</td>
<td>370</td>
<td>제방</td>
<td>85.11.14.</td>
<td>〃</td>
<td>〃</td>
</tr>
<tr>
<td>-31</td>
<td>2</td>
<td>16,760</td>
<td>임야</td>
<td>76.10.27.</td>
<td>〃</td>
<td>충남⋅아산⋅인주⋅냉정</td>
</tr>
<tr>
<td>-32</td>
<td>84-2</td>
<td>50</td>
<td>구거</td>
<td>85.11.16.</td>
<td>〃</td>
<td>충남⋅아산⋅인주⋅신화</td>
</tr>
<tr>
<td>-33</td>
<td>191-2</td>
<td>274</td>
<td>유지</td>
<td>〃</td>
<td>〃</td>
<td>〃</td>
</tr>
<tr>
<td>-34</td>
<td>223-3</td>
<td>79</td>
<td>제방</td>
<td>〃</td>
<td>〃</td>
<td>〃</td>
</tr>
<tr>
<td>-35</td>
<td>8-2</td>
<td>337</td>
<td>구거</td>
<td>〃</td>
<td>〃</td>
<td>충남⋅아산⋅인주⋅역리</td>
</tr>
<tr>
<td>-36</td>
<td>194-2</td>
<td>23</td>
<td>종교</td>
<td>65. 5. 7.</td>
<td>〃</td>
<td>충남⋅아산⋅인주⋅공세</td>
</tr>
<tr>
<td>-37</td>
<td>492-2</td>
<td>704</td>
<td>전</td>
<td>26. 5. 7.</td>
<td>〃</td>
<td>〃</td>
</tr>
<tr>
<td>-38</td>
<td>26-2</td>
<td>248</td>
<td>도로</td>
<td>35. 7. 8.</td>
<td>〃</td>
<td>〃</td>
</tr>
<tr>
<td>-39</td>
<td>26-5</td>
<td>340</td>
<td>도로</td>
<td>〃</td>
<td>〃</td>
<td>〃</td>
</tr>
<tr>
<td>-40</td>
<td>26-7</td>
<td>106</td>
<td>답</td>
<td>〃</td>
<td>〃</td>
<td>〃</td>
</tr>
<tr>
<td>-41</td>
<td>258-2</td>
<td>250</td>
<td>도로</td>
<td>65. 5. 7.</td>
<td>〃</td>
<td>〃</td>
</tr>
</tbody>
</table>
<b>③ </b><b>2024</b><b>년 공세리성당 부동산 현황</b><b>(2024</b><b>년 </b><b>7</b><b>월 </b><b>31</b><b>일</b><b>)</b>
<table>
<tbody>
<tr>
<td><b>번호</b></td>
<td><b>소재지</b></td>
<td><b>지번</b></td>
<td><b>지적</b></td>
<td><b>지목</b></td>
<td><b>귀속일</b></td>
<td><b>명의</b></td>
<td><b>용도</b></td>
</tr>
<tr>
<td>1</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4-1</td>
<td>14,748</td>
<td>종교</td>
<td>65.05.07</td>
<td>재단</td>
<td>성당</td>
</tr>
<tr>
<td>2</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4-2</td>
<td>23</td>
<td>종교</td>
<td>65.05.07</td>
<td>재단</td>
<td>성당</td>
</tr>
<tr>
<td>3</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4-3</td>
<td>28</td>
<td>종교</td>
<td>65.05.07</td>
<td>재단</td>
<td>성당</td>
</tr>
<tr>
<td>4</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4-4</td>
<td>283</td>
<td>종교</td>
<td>65.05.07</td>
<td>재단</td>
<td>성당</td>
</tr>
<tr>
<td>5</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26</td>
<td>522</td>
<td>대</td>
<td>05.04.26</td>
<td>재단</td>
<td>주차장</td>
</tr>
<tr>
<td>6</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27</td>
<td>354</td>
<td>대</td>
<td>04.12.17</td>
<td>재단</td>
<td>주차장</td>
</tr>
<tr>
<td>7</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28</td>
<td>132</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주차장</td>
</tr>
<tr>
<td>8</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41</td>
<td>69</td>
<td>대</td>
<td>05.04.26</td>
<td>재단</td>
<td>주차장</td>
</tr>
<tr>
<td>9</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43</td>
<td>79</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주차장</td>
</tr>
<tr>
<td>10</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30</td>
<td>777</td>
<td>전</td>
<td>65.05.07</td>
<td>재단</td>
<td>주차장</td>
</tr>
<tr>
<td>11</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33</td>
<td>10</td>
<td>도로</td>
<td>85.11.06</td>
<td>재단</td>
<td>도</td>
</tr>
<tr>
<td>12</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39</td>
<td>60</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인주신협</td>
</tr>
<tr>
<td>13</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40</td>
<td>36</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인주신협</td>
</tr>
<tr>
<td>14</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5-1</td>
<td>7,856</td>
<td>임야</td>
<td>65.05.07</td>
<td>재단</td>
<td>성당</td>
</tr>
<tr>
<td>15</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8-1</td>
<td>737</td>
<td>전</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16</td>
<td>인주면 공세리</td>
<td>산 9-1</td>
<td>31,140</td>
<td>임야</td>
<td>65.05.07</td>
<td>재단</td>
<td>묘지</td>
</tr>
<tr>
<td>17</td>
<td>인주면 공세리</td>
<td>산 15-1</td>
<td>26,876</td>
<td>임야</td>
<td>65.05.07</td>
<td>재단</td>
<td>묘지</td>
</tr>
<tr>
<td>18</td>
<td>인주면 공세리</td>
<td>산 15-3</td>
<td>397</td>
<td>임야</td>
<td>65.05.07</td>
<td>재단</td>
<td>묘지</td>
</tr>
<tr>
<td>19</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49-2</td>
<td>704</td>
<td>전</td>
<td>85.11.16</td>
<td>재단</td>
<td>묘지</td>
</tr>
<tr>
<td>20</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99-1</td>
<td>992</td>
<td>전</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21</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6-2</td>
<td>248</td>
<td>도로</td>
<td>88.03-09</td>
<td>재단</td>
<td> </td>
</tr>
<tr>
<td>22</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6-5</td>
<td>340</td>
<td>도로</td>
<td>88.03.09</td>
<td>재단</td>
<td> </td>
</tr>
<tr>
<td>23</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6-72</td>
<td>106</td>
<td>답</td>
<td>88.03.09</td>
<td>재단</td>
<td> </td>
</tr>
<tr>
<td>24</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6-2</td>
<td>26</td>
<td>도로</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25</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7-1</td>
<td>23</td>
<td>전</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26</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7-4</td>
<td>532</td>
<td>전</td>
<td>65.05.17</td>
<td>재단</td>
<td>신협임대</td>
</tr>
<tr>
<td>27</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8-1</td>
<td>446</td>
<td>대</td>
<td>65.05.17</td>
<td>재단</td>
<td>신협임대</td>
</tr>
<tr>
<td>28</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8-2</td>
<td>205</td>
<td>도로</td>
<td>65.05.17</td>
<td>재단</td>
<td> </td>
</tr>
</tbody>
</table>
 

 
<table>
<tbody>
<tr>
<td><b>번호</b></td>
<td><b>소재지</b></td>
<td><b>지번</b></td>
<td><b>지적</b></td>
<td><b>지목</b></td>
<td><b>귀속일</b></td>
<td><b>명의</b></td>
<td><b>용도</b></td>
</tr>
<tr>
<td>27</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8-1</td>
<td>446</td>
<td>대</td>
<td>65.05.17</td>
<td>재단</td>
<td>신협임대</td>
</tr>
<tr>
<td>28</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8-2</td>
<td>205</td>
<td>도로</td>
<td>65.05.17</td>
<td>재단</td>
<td> </td>
</tr>
<tr>
<td>29</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8-3</td>
<td>221</td>
<td>전</td>
<td>28.02.21</td>
<td>재단</td>
<td> </td>
</tr>
<tr>
<td>30</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89-1</td>
<td>75</td>
<td>젼</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31</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89-2</td>
<td>12</td>
<td>전</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32</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17-2</td>
<td>126</td>
<td>도로</td>
<td>85.11.16</td>
<td>재단</td>
<td> </td>
</tr>
<tr>
<td>33</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7-2</td>
<td>13</td>
<td>도로</td>
<td>85.11.16</td>
<td>재단</td>
<td> </td>
</tr>
<tr>
<td>34</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97-19</td>
<td>9</td>
<td>전</td>
<td>16.09.09</td>
<td>재단</td>
<td> </td>
</tr>
<tr>
<td>35</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75</td>
<td>7</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36</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97-20</td>
<td>53</td>
<td>대</td>
<td>16.09.09</td>
<td>재단</td>
<td> </td>
</tr>
<tr>
<td>37</td>
<td>인주면 공세리</td>
<td>302-4</td>
<td>496</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38</td>
<td>인주면 공세리</td>
<td>582</td>
<td>402</td>
<td>답</td>
<td>89.08.09</td>
<td>재단</td>
<td> </td>
</tr>
<tr>
<td>39</td>
<td>인주면 문방리</td>
<td>40-2</td>
<td>370</td>
<td>제방</td>
<td>85.11.16</td>
<td>재단</td>
<td> </td>
</tr>
<tr>
<td>40</td>
<td>인주면 문방리</td>
<td>96-6</td>
<td>1,021</td>
<td>대</td>
<td>12.08.08</td>
<td>재단</td>
<td> </td>
</tr>
<tr>
<td>41</td>
<td>인주면 문방리</td>
<td>99-7</td>
<td>2,766</td>
<td>전</td>
<td>03.09.15</td>
<td>재단</td>
<td> </td>
</tr>
<tr>
<td>42</td>
<td>인주면 문방리</td>
<td>99-18</td>
<td>41</td>
<td>대</td>
<td>03.09.15</td>
<td>재단</td>
<td> </td>
</tr>
<tr>
<td>43</td>
<td>인주면 문방리</td>
<td>113-8</td>
<td>1,316</td>
<td>전</td>
<td>03.09.15</td>
<td>재단</td>
<td> </td>
</tr>
<tr>
<td>44</td>
<td>인주면 냉정리</td>
<td>318-6</td>
<td>665</td>
<td>전</td>
<td>87.12.31</td>
<td>재단</td>
<td>공소</td>
</tr>
<tr>
<td>45</td>
<td>인주면 밀두리</td>
<td>275-2</td>
<td>3</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46</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73</td>
<td>1,805</td>
<td>전</td>
<td>23.12.01</td>
<td> </td>
<td> </td>
</tr>
<tr>
<td>47</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0-1</td>
<td>133</td>
<td>대</td>
<td>22.09.02</td>
<td>재단</td>
<td> </td>
</tr>
<tr>
<td>48</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0-2</td>
<td>704</td>
<td>대</td>
<td>23.08.16</td>
<td>재단</td>
<td> </td>
</tr>
<tr>
<td>49</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8-3</td>
<td>3,107</td>
<td>전</td>
<td>22.04.05</td>
<td> </td>
<td> </td>
</tr>
<tr>
<td>50</td>
<td>인주면 걸매리</td>
<td>60-192</td>
<td>278</td>
<td>전</td>
<td>10.01.19</td>
<td> </td>
<td>걸매교우촌</td>
</tr>
</tbody>
</table>
 

 

<b>건물현황</b>
<table>
<tbody>
<tr>
<td><b>순번</b></td>
<td><b>소재지 지번</b></td>
<td><b>구조</b></td>
<td><b>면적 </b><b>㎡</b></td>
<td><b>등기일</b>

<b>준공일</b></td>
<td><b>용도</b></td>
<td><b>명의</b></td>
<td><b>비고</b></td>
</tr>
<tr>
<td>A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철근콘크리트조</td>
<td>1,088.4</td>
<td>02.10.01</td>
<td>교육관</td>
<td>재단</td>
<td> </td>
</tr>
<tr>
<td>B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철근콘크리트조</td>
<td>458.52</td>
<td>02.10.01</td>
<td>사제관</td>
<td>재단</td>
<td> </td>
</tr>
<tr>
<td>C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철근콘크리트조</td>
<td>73.04</td>
<td>02.10.01</td>
<td>조배실</td>
<td>재단</td>
<td> </td>
</tr>
<tr>
<td>D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조적조+철근조</td>
<td>457.48</td>
<td>02.10.01</td>
<td>성당</td>
<td>재단</td>
<td>도문화재</td>
</tr>
<tr>
<td>E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조적조+철근조</td>
<td>191.1</td>
<td>02.10.01</td>
<td>박물관</td>
<td>재단</td>
<td>도문화재</td>
</tr>
<tr>
<td>F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조적조</td>
<td>44.2</td>
<td>03.07.14</td>
<td>화장실</td>
<td>재단</td>
<td> </td>
</tr>
<tr>
<td>G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철근콘크리트조</td>
<td>387.55</td>
<td>08.09.05</td>
<td>사무실</td>
<td>재단</td>
<td> </td>
</tr>
</tbody>
</table>
 
<ol>
 	<li><b> </b><b>사립 조성학교 설립과 폐교 후 교사동 처리과정</b></li>
</ol>
<b>① </b><b>신교육기관 설치</b>

서구열강으로부터 통상압력에 따라 미국, 일본, 프랑스 등 7개국과의 1886년까지 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 조정은 각국의 선교사들로 하여금 서구의 문명을 접하게 되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고종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조선교육의 근대화라는 정책을 도입하게 되었다. 1894년 7월, 조정의 예부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교육행정기관인 학무아문을 설치하였고, 다음 해 1895년 2월 고종은 교육에 관련된 특별조서인 교육칙어&lt;敎育勅語&gt;를 발표하였다.

고종은 정조의 개혁을 승계한 개방적 인재등용을 담은 &lt;교육칙어&gt;에, 첫째, 나라의 모욕을 막아줄 사람. 둘째, 나라의 불법한 것을 퇴치할 사람. 셋째, 나라의 정치 제도를 끌어갈 사람을 창출하기 위해 조서를 발표하였다.

교육조서를 발표한 후 4월에 최초의 현대식 학교법규라 할 수 있는 &lt;한성사범학교&gt;관제를 설립하였다. 이어서 1904년까지 &lt;외국어학교&gt;관제, &lt;성균관&gt;관제, 소학교령, 한성사업학교규칙, 소학교규칙대강, 보조공립학교규칙, 의학교관제, 중학교관제, 외국어학교규칙, 농상공학교규칙이 공포되어 이들 관제에 해당하는 관립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선교사 중심으로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교회에 사립학교 설치와 각 시군 지식인들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lt;사립의숙&gt; 등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무력 위협으로 ‘을사5조약’을 강요하여 국권을 침탈한 이후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전국 각지에서 한국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청소년들에게 신지식을 교육해서 국권을 회복할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사립학교 설립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불타오른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 8월경까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사립학교가 <b>약 </b><b>3,000</b><b>개</b> 교에 달하였다.

교회와 우리나라의 선각자들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아동들이 민족과 자국의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고, 일제의 ‘황민화(皇民化)’ 정책에 흡수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서당은 일제의 동화교육정책에 대항하는 장소였으며, 민중의 마지막 교육기관이었다. 일제가 보기에 조선인을 서당에서 조선인이 교육한다는 것 자체가 식민지 통치에 근본적인 불안 요소였다. 1918년 2월에 조선총독부령 제18호로 ｢서당규칙｣을 정하여 서당을 통제했다.

 

일제는 한국민족의 신교육 구국 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1908년 8월 26일 사립학교령을 제정·반포하였다. 그 요점은 사립학교 설립의 인가제&lt;認可制&gt;를 만들고, 그 인가 기준으로서 당시 한국 민중들이 갖지 못한 높은 시설 기준을 만들어 심사하도록 한 것이며, 정부나 일제 통감부의 명령에 위배되거나 유해하다고 인정하는 실업학교에 대해서는 이를 폐쇄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b>② </b><b>사립조성학교</b><b>(</b><b>私立朝星學校</b><b>) </b><b>설치와 운영 그리고 폐교</b><b>.</b>

조선 정부의 1895년도 고종&lt;<b>敎育勅語</b>&gt;가 발표에 맞춰 공세리성당 드비즈(成一論) 신부는 각 지역 자발적 교육기관 설치가 성행했던 년도를 감안하면 1906년도에 설치 운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일제는 한국민족의 신교육 구국 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1908년 8월 26일 사립학교령을 제정·반포하여 조선임시통감부를 통하여 1909년 4월6일자로 기독조성학교&lt;基督朝星學校&gt;를 인가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교육과정은 &lt;초등&gt;,&lt;고등보통&gt;교육과정으로 운영되었다. 초등교육은 천주교학, 수신, 국어, 한문, 일어,미술, 체조, 지리, 역사 요리가 개설되었다. 고등교육은 체조, 음악, 도화(圖畵), 이과(理科), 화학, 박물, 수학, 천주교학, 수신, 국한문, 일어, 지리, 역사가 개강되었다. 조성학교의 학교시설 규모는 초가목조건축물로 폐교당시 14칸(間)으로 확인되었다.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강점하자, 식민지 교육체제 수립을 위해 1911년 8월 23일 「조선교육령」을 다음과 같이 제정·공포하였다.

첫째, 초등교육은 사립학교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관공립보통학교로 개편한다.

둘째, 4년제 고등보통학교와 2~3년제의 실업학교는 사립학교를 인정하되

일본 국민이 될 성격을 함양해야 한다.

셋째, 4년제 전문학교는 인정하되 조선에 대학교는 인정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조선 민중의 삶은 억압과 착취, 수탈과 감시, 차별과 빈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한글 폐지 등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일제의 무력 강점이 시작될 무렵 조선의 핵심 과제는 민족계몽과 민족의식 각성이었다. 일제의 교육을 받은 소년들은 일본식 사고와 자신이 일본사람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살았다. 일제강점기 교육은 이 땅의 젊은이들을 식민지에 종속되어 정체성과 민족성을 잃어버린 존재로 성장시켰다.

 

일제는 이 법령에서 구한말에 한국인들이 설립한 2,082개의 사립학교 대부분을 식민지 통치 권력이 접수하여 일제가 지배하는 관공립 보통학교로 만드는 것을 의도하였다. 따라서 공세리성당에 구한말 1909년도 설치인가 된 &lt;朝星學校&gt;도 관내 보통학교로 학생이 진학하게 됨에 따라 입학생의 저조로 폐교를 하게 되었다 1929년 1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공세리성당 복사를 역임한 강두영(姜斗永)의 아들 강태수(姜泰秀)는 주산공립보통학교(珠山公立普通學校) 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휴가차 잠시 고향인 공세리의 집에 와서 밤에 공세리성당 공호여자학원(貢湖女子學院)에서 일본시찰에 대한 간담회를 2시간을 개최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때까지 여학생 반은 운영되고 있었고 공세리성당 내 설치 운영되었던 &lt;조성학교&gt;는 운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폐교에 따라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 1930년에 폐교된 것으로 생각된다.

 

동아일보 1931년 2월 21일자 기사를 보면, 1930년 가을에 폐교된 조성학교 교사 초가목조 14칸(間)을 인주실업청년회가 회관건물이 없는 것을 알고 공세리성당 드비즈(成一論)신부는 인주실업청년회에 회관으로 사용토록 기부하였는데, 청년회의 총회에서 감사의 뜻으로 사례금 150원을 보내왔다. 드비즈(成一論) 신부는 받지 않고, 청년회장 강태수(姜泰秀)에게 그 돈으로 벼 3천 근을 구입하여 공세리 마을의 가난한 가구 73호(259명)에게 1인당 1말씩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그 후 인주실업청년회는 1931년 기부받은 조성학교 건물을 기초로 4백여 원의 경비를 들여 증축하고 &lt;인주실업청년회관&gt;으로 사용하였다.

 

설립 13년 만에 인주실업청년회는 일제의 강압적인 해산의 강요로 인하여 해산 절차에 들어갔다. 동아일보 1935년 9월10일자 보도를 보면, 13년간 회원 80여명이 어려운 지역민의 고용을 돕기도 하였고, 기금도 마련하여 어려운 회원에게 저리로 대부도 하였으나 생활은 피폐해졌고 인심은 해이해져서 더 이상 운영할 수도 없고, 또한 일제의 경찰서에도 해산을 요구하여 부득이 9월 5일에 해산을 선고하고 채권 1,080원 전부를 포기하였으며, 현금은 회원 1인당 4원씩 배당하였고 회관건물 14칸(間)은 3백원에 감가하여 150원은 인주면(仁州面)에 매도하였으며 나머지 150원은 공세리진흥회(貢稅里振興會)에 기부하였다. 당시 진흥회장은 강두영(姜斗永)이었다.

 

1909년에 공식적인 인가 절차에 의하여 설립 운영되었던 &lt;조성학교&gt;는 약 24년 동안 지역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서 크게 기여하였다. 설치운영에서부터 폐교하는 과정의 각종 자료에 관계되는 인물을 살펴볼 때 공세리성당의 설치과정과 &lt;조성학교&gt;설치과정 운영, 폐교, 기부, 청산절차에 공세리성당 복사이며 공세리 마을뿐만 아니라 아산군 전역에 재력과 영향력을 가진 강두영(姜斗永)의 가족들이 주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b>참고자료</b>

 

<b>조성학교 인가서 </b>

<b>1909</b><b>년</b><b>4</b><b>월</b><b>6</b><b>일자 </b><b>&lt;</b><b>조성학교</b><b>&gt;</b><b>인가 조서 </b><b>: </b><b>통감부 조선총독부관보</b><b>1918</b><b>년 </b><b>02</b><b>월 </b><b>19</b><b>일 </b>

 

<b>동아일보 </b><b>1929</b><b>년 </b><b>01</b><b>월 </b><b>10</b><b>일자 일본시찰 강화회</b><b>(</b><b>공세리성당내 공호학원</b><b>)</b>

 

<b>동아일보 </b><b>1931</b><b>년 </b><b>02</b><b>월 </b><b>21</b><b>일자 </b>

<b>(</b><b>사립조성학교 건물 초가목조</b><b>14</b><b>간 </b><b>1930</b><b>년 가을 청년회 기부</b><b>)</b>

 

 

 

<b>동아일보 </b><b>1931</b><b>년 </b><b>3</b><b>월 </b><b>28</b><b>일자 동아일보</b><b>1932</b><b>년 </b><b>9</b><b>월 </b><b>21</b><b>일자</b>

 

 

<b>동아일보 </b><b>1935</b><b>년 </b><b>09</b><b>월 </b><b>10</b><b>일자 </b><b>(</b><b>창립</b><b>1924</b><b>년</b><b>, </b><b>회관건축 </b><b>1930</b><b>년</b><b>. </b><b>해산 </b><b>1935</b><b>년 </b><b>9</b><b>월 </b><b>5</b><b>일</b><b>)</b>

<b>동아일보 </b><b>1933</b><b>년 </b><b>01</b><b>월 </b><b>08</b><b>일</b>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9:30:2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3권-다섯.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설립인가와 공세리 성당]]></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35]]></link>
			<description><![CDATA[<b>다섯</b><b>. </b><b>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설립인가와 공세리 성당</b>

박수환(요셉)

 
<ol>
 	<li>설립연혁 203</li>
 	<li>공세리성당 부동산 217</li>
 	<li>사립 조성학교 설립과 폐교 후 교사동 처리과정 227</li>
</ol>
① 신교육기관 설치 227

② 사립조성학교(私立朝星學校) 설치와 운영 그리고 폐교. 228

 
<ol>
 	<li><b> </b><b>설립연혁</b></li>
</ol>
<b>1</b><b>차 설립허가 </b><b>: </b><b>대정</b><b>9</b><b>년</b><b>(1920</b><b>년</b><b>) 5</b><b>월 </b><b>8</b><b>일</b>

조선총독부는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설립허가를 대정 9년(1920년)5월 8일부로 설립허가 하였다. 그러나 조선 민사령 시행 이전에 독립의 재산으로 등기상 천주교회 재산이 타인의 소유로 되어 있는 것들이 발견되어 조선총독부의 민법 시행령 제19조 제1항에 의하여 기허가된 법인의 취소와 함께 ‘재설립인가’ 신청을했다. 당시 교회의 <b>총자본금은 </b><b>877,225</b><b>원이었다</b><b>.</b>

 

 

 

<b>조선총독부관보 </b><b>1920</b><b>년 </b><b>06</b><b>월 </b><b>12</b><b>일 정규호 </b><b>2351</b><b>호</b>

<b>1</b><b>차</b><b>. </b><b>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설립허가 </b>

 

 

<b>2</b><b>차 설립인가 </b><b>: </b><b>대정</b><b>13</b><b>년</b><b>(1924</b><b>년</b><b>)10</b><b>월</b><b>27&gt;</b>

조선총독부는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 유지재단의 재인가에 있어 기설립 허가된 재단의 취소와 재인가 신청서를 함께 신청을 받아 조선민사령 제1조 및 민법시행령 제19조 제2항에 의하여 대정13년(1924년) 10월 27일자로 조선총독의 결재를 받아 2차 설립인가를 단행하였다. <b>총자본금은 </b><b>947,147</b><b>원 </b><b>401</b><b>전</b>이었다. 경성구 천주교회 재단 대표이사장은 뮈텔주교였고, 재단이사는 총5명으로 프랑스선교사 4명. 한국인 신부(韓基根) 1명이었다.

<b>조선총독부관보 </b><b>1924</b><b>년 </b><b>11</b><b>월 </b><b>28</b><b>일 정규호 </b><b>3688</b><b>호 </b>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설립 등기 1924.11.10.)

1919년5월8일 기 허가 최소 및 1924.10.27.일자 재인가, 자산총액:947천147원41전,

 

<b>인가신청서에는 </b>법인운영재단 규정이 첨가되었고, 재단이사장은 당연직으로 경성구 주교가 이사장으로 명시되었고, 유고시 부주교가 맡았다. 재단이사 임기는 3년으로 결원 시 주교가 신부 중에서 임명하고, 임기는 잔여기간으로 했다. 재단의 기부금은 재단설립 목적달성을 위해 매년 파리외방전교회에 기부하고, 재산의 처분에 있어서 재단설립과 운영과정에서 재산의 취득, 처분 등은 이사 전원의 동의를 규정했다.

 

여기에 별지로 ① 프랑스영사관 법인설립에 관한 사실증명서, ② 재단법인 이사장 성명서(별지부동산 경성구 천주교회 재산의 확인사항과 프랑스외방전교회, 프랑스 주교회, 조선 천주교회, 경성구 천주교회 등 명의에 대한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자인 뮈텔주교 성명서) ③ 경성지구 천주교 부동산 취득과 미 등기분 천주교 토지목록을 첨부하였다.

 

<b>조선총독부관보 </b><b>1924</b><b>년 </b><b>11</b><b>월 </b><b>28</b><b>일 정규호 </b><b>3688</b><b>호 </b>

<b>(</b><b>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설립 등기 </b><b>1924.11.10.)</b>

<b>1919</b><b>년</b><b>5</b><b>월</b><b>8</b><b>일 기허가 취소 및 </b><b>1924.10.27.</b><b>일자 재인가</b><b>, </b>

<b>자산총액</b><b>:947</b><b>천</b><b>147</b><b>원</b><b>41</b><b>전</b><b>, </b>

-결재선 : 주임- 종교과장- 학무국장- 정무총감- 총독

-협조선 : 외사과장, 총무과장, 문서과장

◯ 설립인가 : 대정13년(1924년)10월27&gt;

 

<b>□</b><b>결재건명</b><b>:</b>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유지재단 설립허가 취소 및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허가의 건

<b>◯ </b><b>지령안</b><b>(</b><b>제</b><b>1</b><b>안</b><b>): </b><b>기허가 취소</b><b>(</b><b>안</b><b>)</b>

- 경기도 경성부 명치정 2정목 1번지

-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이사장 구스타부 뮤치루(뮈텔주교 민덕효)

 

대정9년(1920년)5월 8일부로 학비 제103호 지령 경성구 천주교회유지재단 설립허가를 취소한다.

년 월 일 조선총독

<b>◯ </b><b>지령안</b><b>(</b><b>제</b><b>2</b><b>안</b><b>): </b><b>신규 허가</b><b>(</b><b>안</b><b>)</b>

-경기도 경성부 명치정 2정목 1번지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유지재단 대표자 구스타브 뮤치루(뮈텔주교 민덕효)

대정13년(1924년)4월 8일부로 출원한 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유지재단에 관한 건은 조선민사령 제1조 및 민법시행법 제19조 제2항에 의하여 인가한다.

년 월 일 조선총독

 

<b>&lt;</b><b>설립허가 취소신청</b><b>&gt;</b>

<b>□</b><b>건명 </b><b>: </b><b>재단법인설립허가 취소신청</b><b>: </b><b>기안 이유</b>

◯신청내용

대정9년(1920년) 5월 8일부로 학비 제103호에 따라 허가 되었던 경성지구 천주교회유지재단은 사실상 민사령시행 전부터 독립된 재산을 가지는 법인이 되고 이번에 신규로 인가신청에 이르러서는 우측의 조건으로 허가 취소하고 다음과 같이 신청합니다.

대정13년(1924년) 4월 1일

-경성부 명치정 2정목 1번지

-경성지구 천주교회유지재단 이사장 구스타부 무치루(뮈텔주교 閔德孝-민덕효) 신청 싸인, 조선총독 남작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제등실) 결재 싸인

# 조선총독재임 기간 : 1919〜1927년, &lt;일본 해군대장과 내각총리 역임&gt;

<b>&lt;</b><b>설립허가 취소신청</b><b>&gt;</b>

<b>□</b><b>건명 </b><b>: </b><b>재단법인설립허가 취소신청</b>

◯신청내용

대정9년(1920년) 5월 8일부로 학비 제103호에 따라 허가 되었던 경성지구 천주교회유지재단은 사실상 민사령시행 전부터 독립된 재산을 가지는 법인이 되고 이번에 신규로 인가신청에 이르러서는 우측의 조건으로 허가취소하고 다음과 같이 신청합니다.

대정13년(1924년) 4월 1일

-경성부 명치정 2정목 1번지

-경성지구 천주교회유지재단 이사장 구스타부 무치루(뮈텔주교 閔德孝-민덕효) 신청 싸인

-조선총독 남작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제등실) 결재 싸인

<b>&lt;</b><b>설립허가 신청</b><b>&gt;</b>

<b>□</b><b>건명 </b><b>: </b><b>경성지구 천주교회유지재단에 관한 인가신청서</b>

◯ 신청내용

경성지구 천주교회유지재단은 민사령 시행 전보다 독립재산에 있어서 법인이 되었고 민법시행법(령) 제19조에 의하여 민법 제39조 규정 규정사항과 기타에 관한 별지 서면으로 첨부하여 제출하고 허가가 잘 이루어길 바라며 신청합니다.

-경성부 명치정 2정목 1번지

-재단대표자 프랑스인 구스타부 무치루(뮈텔주교 閔德孝-민덕효) 신청 싸인

-조선총독 남작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제등실) 결재 싸인

<b>재단법인 경성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관계 규정사항</b><b>(</b><b>정관</b><b>)</b>

 

<b>프랑스 영사관의 재단법인</b><b>(</b><b>경성구 천주교</b><b>)</b><b>설립과 제반사업 운영에 따른 사실증명서</b>

<b>&lt;</b><b>프랑스 영사 증명서</b><b>&gt;</b>

재단법인

◯증명내용

우측 건은 명치45년(1912년) 4월1일 이전 조선에 가톨릭교 전교, 교육과 자선사업에 종사했던 그 사무소, 경성 명치정 2정목 1번지에 설치했던 해당사업과 경영했던 사실상 자체명의와 같은 해당 재단대리로 했던, 개인명으로 했던 토지건물인 사항을 프랑스 영사관 기록과 해당교회 교정(敎正)슈테루씨가 제출서류와 비교하고 기타 확실한 증거(즉 옛 토지문건)은 확실합니다.

해당 별지첨부 토지대장 기초로 본일 소관의 면전에서 해당 재단대표자 교정(敎正)수테루씨가 선서했던 기록을 해당 재단의 본래 토지재산은 사실상 명치45년(1912년)4월 1일 이전에 소유하였고 그리고 전기목적을 위해 사용했던 것은 소관이 알고 있는 범위에서 진실함을 믿고 우측과 같이 증명합니다.

 

대정13년(1924년) 1월 30일

프랑스 영사 000 싸인, 날인
<ol>
 	<li><b> </b><b>공세리성당 부동산 </b></li>
</ol>
드비즈 신부는 공세리성당 소유의 부동산 사실증명서와 별도의 부동산 목록에 기재된 공세리성당 소유 부동산은 경성지구 천주교회 운영재단설립에 대한 사용과 재산상의 명의를 재단의 재산으로 변경하는데 하등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증명서(성명서)를 첨부하였다.

 

<b>① </b><b>천주교 아산공세리성당 부동산 등기 조서</b><b>(</b><b>대정 </b><b>12</b><b>년 </b><b>1</b><b>월 현재</b><b>)</b>

<b>&lt;</b><b>공세리 성당 성명서</b><b>&gt;</b>

◯ 성명내용

별지 부동산 목록에 기재하여 제출된 명의의 부동산은 단순히 제출된 것의 명의를 사용하는 것에 그치고 사실은 경성지구 천주교회의 소유에 상호 위반됨이 없이 하고 경성지구 천주교회의 지도에 따라 어느 때라도 해당 부동산의 명의변경을 하는 것에 어떠한 경우든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성명합니다.

대정12년(1923년) 12월 20일

주소: 충남 아산군 인주면 공세리

애밀리오 드비즈(成一論-성일론)신부 직인 날인

 

 

 

<b>공세리 성당 부동산</b><b>(</b><b>건물</b><b>) </b><b>등기조서</b>

공세리194번지: 목조기와집(조선가옥) 4동 건평54평

취득년도 명치30년(1897년)5월30일 소유:천주교회

 

취득년도: 대정3년(1914년)3월25일 소유자 : 성일론(드비즈)

지번 社寺地(사사지) : 종교부지

<b>② </b><b>1990</b><b>년 공세리성당 부동산 현황</b><b>(100</b><b>주년</b><b>) </b>
<table>
<tbody>
<tr>
<td><b>소재지</b></td>
<td><b>지번</b></td>
<td><b>구조</b></td>
<td><b>건평</b></td>
<td><b>용도</b></td>
<td><b>명의</b></td>
<td><b>소재지</b></td>
</tr>
<tr>
<td>15-04-01</td>
<td>189</td>
<td>793</td>
<td>전</td>
<td>65. 5. 7.</td>
<td>재단</td>
<td>충남⋅아산⋅인주⋅밀두</td>
</tr>
<tr>
<td>-02</td>
<td>26-3</td>
<td>195</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03</td>
<td>15-1</td>
<td>26,876</td>
<td>임야</td>
<td>〃</td>
<td>〃</td>
<td>〃</td>
</tr>
<tr>
<td>-04</td>
<td>15-3</td>
<td>397</td>
<td>임야</td>
<td>〃</td>
<td>〃</td>
<td>〃</td>
</tr>
<tr>
<td>-05</td>
<td>9-1</td>
<td>31,140</td>
<td>임대</td>
<td>〃</td>
<td>〃</td>
<td>〃</td>
</tr>
<tr>
<td>-06</td>
<td>193-28</td>
<td>132</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07</td>
<td>193-30</td>
<td>777</td>
<td>전</td>
<td>〃</td>
<td>〃</td>
<td>〃</td>
</tr>
<tr>
<td>-08</td>
<td>193-33</td>
<td>10</td>
<td>도로</td>
<td>85.11.16.</td>
<td>〃</td>
<td>〃</td>
</tr>
<tr>
<td>-09</td>
<td>193-39</td>
<td>60</td>
<td>대</td>
<td>65. 5. 7.</td>
<td>〃</td>
<td>〃</td>
</tr>
<tr>
<td>-10</td>
<td>193-40</td>
<td>36</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11</td>
<td>193-43</td>
<td>79</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12</td>
<td>195-1</td>
<td>13,650</td>
<td>임야</td>
<td>〃</td>
<td>〃</td>
<td>〃</td>
</tr>
<tr>
<td>-13</td>
<td>217-2</td>
<td>126</td>
<td>도로</td>
<td>85.11.16.</td>
<td>〃</td>
<td>〃</td>
</tr>
<tr>
<td>-14</td>
<td>257-1</td>
<td>23</td>
<td>대</td>
<td>65. 5. 7.</td>
<td>〃</td>
<td>〃</td>
</tr>
<tr>
<td>-15</td>
<td>257-2</td>
<td>13</td>
<td>도로</td>
<td>〃</td>
<td>〃</td>
<td>〃</td>
</tr>
<tr>
<td>-16</td>
<td>257-4</td>
<td>532</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17</td>
<td>258-1</td>
<td>446</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18</td>
<td>294-1</td>
<td>8,988</td>
<td>종교</td>
<td>〃</td>
<td>〃</td>
<td>〃</td>
</tr>
<tr>
<td>-19</td>
<td>292-2</td>
<td>992</td>
<td>전</td>
<td>〃</td>
<td>〃</td>
<td>〃</td>
</tr>
<tr>
<td>-20</td>
<td>155</td>
<td>155</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21</td>
<td>255-3</td>
<td>106</td>
<td>전</td>
<td>85.11.16.</td>
<td>〃</td>
<td>〃</td>
</tr>
<tr>
<td>-22</td>
<td>275</td>
<td>7</td>
<td>대</td>
<td>65. 5. 7.</td>
<td>〃</td>
<td>〃</td>
</tr>
<tr>
<td>-23</td>
<td>302</td>
<td>295</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24</td>
<td>303</td>
<td>324</td>
<td>대</td>
<td>〃</td>
<td>〃</td>
<td>〃</td>
</tr>
<tr>
<td>-25</td>
<td>304-39</td>
<td>1,180</td>
<td>구거</td>
<td>〃</td>
<td>〃</td>
<td>〃</td>
</tr>
<tr>
<td>-26</td>
<td>304-22</td>
<td>635</td>
<td>구거</td>
<td>〃</td>
<td>〃</td>
<td>〃</td>
</tr>
<tr>
<td>-27</td>
<td>198-1</td>
<td>737</td>
<td>전</td>
<td>66. 7. 27.</td>
<td>〃</td>
<td>충남⋅아산⋅인주⋅공세</td>
</tr>
<tr>
<td>-28</td>
<td>256-2</td>
<td>26</td>
<td>도로</td>
<td>65 5. 7.</td>
<td>〃</td>
<td>〃</td>
</tr>
<tr>
<td>-29</td>
<td>258-3</td>
<td>221</td>
<td>전</td>
<td>28. 2. 21.</td>
<td>〃</td>
<td>〃</td>
</tr>
<tr>
<td>-30</td>
<td>40-2</td>
<td>370</td>
<td>제방</td>
<td>85.11.14.</td>
<td>〃</td>
<td>〃</td>
</tr>
<tr>
<td>-31</td>
<td>2</td>
<td>16,760</td>
<td>임야</td>
<td>76.10.27.</td>
<td>〃</td>
<td>충남⋅아산⋅인주⋅냉정</td>
</tr>
<tr>
<td>-32</td>
<td>84-2</td>
<td>50</td>
<td>구거</td>
<td>85.11.16.</td>
<td>〃</td>
<td>충남⋅아산⋅인주⋅신화</td>
</tr>
<tr>
<td>-33</td>
<td>191-2</td>
<td>274</td>
<td>유지</td>
<td>〃</td>
<td>〃</td>
<td>〃</td>
</tr>
<tr>
<td>-34</td>
<td>223-3</td>
<td>79</td>
<td>제방</td>
<td>〃</td>
<td>〃</td>
<td>〃</td>
</tr>
<tr>
<td>-35</td>
<td>8-2</td>
<td>337</td>
<td>구거</td>
<td>〃</td>
<td>〃</td>
<td>충남⋅아산⋅인주⋅역리</td>
</tr>
<tr>
<td>-36</td>
<td>194-2</td>
<td>23</td>
<td>종교</td>
<td>65. 5. 7.</td>
<td>〃</td>
<td>충남⋅아산⋅인주⋅공세</td>
</tr>
<tr>
<td>-37</td>
<td>492-2</td>
<td>704</td>
<td>전</td>
<td>26. 5. 7.</td>
<td>〃</td>
<td>〃</td>
</tr>
<tr>
<td>-38</td>
<td>26-2</td>
<td>248</td>
<td>도로</td>
<td>35. 7. 8.</td>
<td>〃</td>
<td>〃</td>
</tr>
<tr>
<td>-39</td>
<td>26-5</td>
<td>340</td>
<td>도로</td>
<td>〃</td>
<td>〃</td>
<td>〃</td>
</tr>
<tr>
<td>-40</td>
<td>26-7</td>
<td>106</td>
<td>답</td>
<td>〃</td>
<td>〃</td>
<td>〃</td>
</tr>
<tr>
<td>-41</td>
<td>258-2</td>
<td>250</td>
<td>도로</td>
<td>65. 5. 7.</td>
<td>〃</td>
<td>〃</td>
</tr>
</tbody>
</table>
<b>③ </b><b>2024</b><b>년 공세리성당 부동산 현황</b><b>(2024</b><b>년 </b><b>7</b><b>월 </b><b>31</b><b>일</b><b>)</b>
<table>
<tbody>
<tr>
<td><b>번호</b></td>
<td><b>소재지</b></td>
<td><b>지번</b></td>
<td><b>지적</b></td>
<td><b>지목</b></td>
<td><b>귀속일</b></td>
<td><b>명의</b></td>
<td><b>용도</b></td>
</tr>
<tr>
<td>1</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4-1</td>
<td>14,748</td>
<td>종교</td>
<td>65.05.07</td>
<td>재단</td>
<td>성당</td>
</tr>
<tr>
<td>2</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4-2</td>
<td>23</td>
<td>종교</td>
<td>65.05.07</td>
<td>재단</td>
<td>성당</td>
</tr>
<tr>
<td>3</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4-3</td>
<td>28</td>
<td>종교</td>
<td>65.05.07</td>
<td>재단</td>
<td>성당</td>
</tr>
<tr>
<td>4</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4-4</td>
<td>283</td>
<td>종교</td>
<td>65.05.07</td>
<td>재단</td>
<td>성당</td>
</tr>
<tr>
<td>5</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26</td>
<td>522</td>
<td>대</td>
<td>05.04.26</td>
<td>재단</td>
<td>주차장</td>
</tr>
<tr>
<td>6</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27</td>
<td>354</td>
<td>대</td>
<td>04.12.17</td>
<td>재단</td>
<td>주차장</td>
</tr>
<tr>
<td>7</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28</td>
<td>132</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주차장</td>
</tr>
<tr>
<td>8</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41</td>
<td>69</td>
<td>대</td>
<td>05.04.26</td>
<td>재단</td>
<td>주차장</td>
</tr>
<tr>
<td>9</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43</td>
<td>79</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주차장</td>
</tr>
<tr>
<td>10</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30</td>
<td>777</td>
<td>전</td>
<td>65.05.07</td>
<td>재단</td>
<td>주차장</td>
</tr>
<tr>
<td>11</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33</td>
<td>10</td>
<td>도로</td>
<td>85.11.06</td>
<td>재단</td>
<td>도</td>
</tr>
<tr>
<td>12</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39</td>
<td>60</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인주신협</td>
</tr>
<tr>
<td>13</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3-40</td>
<td>36</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인주신협</td>
</tr>
<tr>
<td>14</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5-1</td>
<td>7,856</td>
<td>임야</td>
<td>65.05.07</td>
<td>재단</td>
<td>성당</td>
</tr>
<tr>
<td>15</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8-1</td>
<td>737</td>
<td>전</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16</td>
<td>인주면 공세리</td>
<td>산 9-1</td>
<td>31,140</td>
<td>임야</td>
<td>65.05.07</td>
<td>재단</td>
<td>묘지</td>
</tr>
<tr>
<td>17</td>
<td>인주면 공세리</td>
<td>산 15-1</td>
<td>26,876</td>
<td>임야</td>
<td>65.05.07</td>
<td>재단</td>
<td>묘지</td>
</tr>
<tr>
<td>18</td>
<td>인주면 공세리</td>
<td>산 15-3</td>
<td>397</td>
<td>임야</td>
<td>65.05.07</td>
<td>재단</td>
<td>묘지</td>
</tr>
<tr>
<td>19</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49-2</td>
<td>704</td>
<td>전</td>
<td>85.11.16</td>
<td>재단</td>
<td>묘지</td>
</tr>
<tr>
<td>20</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99-1</td>
<td>992</td>
<td>전</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21</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6-2</td>
<td>248</td>
<td>도로</td>
<td>88.03-09</td>
<td>재단</td>
<td> </td>
</tr>
<tr>
<td>22</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6-5</td>
<td>340</td>
<td>도로</td>
<td>88.03.09</td>
<td>재단</td>
<td> </td>
</tr>
<tr>
<td>23</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6-72</td>
<td>106</td>
<td>답</td>
<td>88.03.09</td>
<td>재단</td>
<td> </td>
</tr>
<tr>
<td>24</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6-2</td>
<td>26</td>
<td>도로</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25</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7-1</td>
<td>23</td>
<td>전</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26</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7-4</td>
<td>532</td>
<td>전</td>
<td>65.05.17</td>
<td>재단</td>
<td>신협임대</td>
</tr>
<tr>
<td>27</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8-1</td>
<td>446</td>
<td>대</td>
<td>65.05.17</td>
<td>재단</td>
<td>신협임대</td>
</tr>
<tr>
<td>28</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8-2</td>
<td>205</td>
<td>도로</td>
<td>65.05.17</td>
<td>재단</td>
<td> </td>
</tr>
</tbody>
</table>
 

 
<table>
<tbody>
<tr>
<td><b>번호</b></td>
<td><b>소재지</b></td>
<td><b>지번</b></td>
<td><b>지적</b></td>
<td><b>지목</b></td>
<td><b>귀속일</b></td>
<td><b>명의</b></td>
<td><b>용도</b></td>
</tr>
<tr>
<td>27</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8-1</td>
<td>446</td>
<td>대</td>
<td>65.05.17</td>
<td>재단</td>
<td>신협임대</td>
</tr>
<tr>
<td>28</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8-2</td>
<td>205</td>
<td>도로</td>
<td>65.05.17</td>
<td>재단</td>
<td> </td>
</tr>
<tr>
<td>29</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8-3</td>
<td>221</td>
<td>전</td>
<td>28.02.21</td>
<td>재단</td>
<td> </td>
</tr>
<tr>
<td>30</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89-1</td>
<td>75</td>
<td>젼</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31</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89-2</td>
<td>12</td>
<td>전</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32</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17-2</td>
<td>126</td>
<td>도로</td>
<td>85.11.16</td>
<td>재단</td>
<td> </td>
</tr>
<tr>
<td>33</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57-2</td>
<td>13</td>
<td>도로</td>
<td>85.11.16</td>
<td>재단</td>
<td> </td>
</tr>
<tr>
<td>34</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97-19</td>
<td>9</td>
<td>전</td>
<td>16.09.09</td>
<td>재단</td>
<td> </td>
</tr>
<tr>
<td>35</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75</td>
<td>7</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36</td>
<td>인주면 공세리</td>
<td>297-20</td>
<td>53</td>
<td>대</td>
<td>16.09.09</td>
<td>재단</td>
<td> </td>
</tr>
<tr>
<td>37</td>
<td>인주면 공세리</td>
<td>302-4</td>
<td>496</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38</td>
<td>인주면 공세리</td>
<td>582</td>
<td>402</td>
<td>답</td>
<td>89.08.09</td>
<td>재단</td>
<td> </td>
</tr>
<tr>
<td>39</td>
<td>인주면 문방리</td>
<td>40-2</td>
<td>370</td>
<td>제방</td>
<td>85.11.16</td>
<td>재단</td>
<td> </td>
</tr>
<tr>
<td>40</td>
<td>인주면 문방리</td>
<td>96-6</td>
<td>1,021</td>
<td>대</td>
<td>12.08.08</td>
<td>재단</td>
<td> </td>
</tr>
<tr>
<td>41</td>
<td>인주면 문방리</td>
<td>99-7</td>
<td>2,766</td>
<td>전</td>
<td>03.09.15</td>
<td>재단</td>
<td> </td>
</tr>
<tr>
<td>42</td>
<td>인주면 문방리</td>
<td>99-18</td>
<td>41</td>
<td>대</td>
<td>03.09.15</td>
<td>재단</td>
<td> </td>
</tr>
<tr>
<td>43</td>
<td>인주면 문방리</td>
<td>113-8</td>
<td>1,316</td>
<td>전</td>
<td>03.09.15</td>
<td>재단</td>
<td> </td>
</tr>
<tr>
<td>44</td>
<td>인주면 냉정리</td>
<td>318-6</td>
<td>665</td>
<td>전</td>
<td>87.12.31</td>
<td>재단</td>
<td>공소</td>
</tr>
<tr>
<td>45</td>
<td>인주면 밀두리</td>
<td>275-2</td>
<td>3</td>
<td>대</td>
<td>65.05.07</td>
<td>재단</td>
<td> </td>
</tr>
<tr>
<td>46</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73</td>
<td>1,805</td>
<td>전</td>
<td>23.12.01</td>
<td> </td>
<td> </td>
</tr>
<tr>
<td>47</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0-1</td>
<td>133</td>
<td>대</td>
<td>22.09.02</td>
<td>재단</td>
<td> </td>
</tr>
<tr>
<td>48</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0-2</td>
<td>704</td>
<td>대</td>
<td>23.08.16</td>
<td>재단</td>
<td> </td>
</tr>
<tr>
<td>49</td>
<td>인주면 공세리</td>
<td>198-3</td>
<td>3,107</td>
<td>전</td>
<td>22.04.05</td>
<td> </td>
<td> </td>
</tr>
<tr>
<td>50</td>
<td>인주면 걸매리</td>
<td>60-192</td>
<td>278</td>
<td>전</td>
<td>10.01.19</td>
<td> </td>
<td>걸매교우촌</td>
</tr>
</tbody>
</table>
 

 

<b>건물현황</b>
<table>
<tbody>
<tr>
<td><b>순번</b></td>
<td><b>소재지 지번</b></td>
<td><b>구조</b></td>
<td><b>면적 </b><b>㎡</b></td>
<td><b>등기일</b>

<b>준공일</b></td>
<td><b>용도</b></td>
<td><b>명의</b></td>
<td><b>비고</b></td>
</tr>
<tr>
<td>A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철근콘크리트조</td>
<td>1,088.4</td>
<td>02.10.01</td>
<td>교육관</td>
<td>재단</td>
<td> </td>
</tr>
<tr>
<td>B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철근콘크리트조</td>
<td>458.52</td>
<td>02.10.01</td>
<td>사제관</td>
<td>재단</td>
<td> </td>
</tr>
<tr>
<td>C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철근콘크리트조</td>
<td>73.04</td>
<td>02.10.01</td>
<td>조배실</td>
<td>재단</td>
<td> </td>
</tr>
<tr>
<td>D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조적조+철근조</td>
<td>457.48</td>
<td>02.10.01</td>
<td>성당</td>
<td>재단</td>
<td>도문화재</td>
</tr>
<tr>
<td>E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조적조+철근조</td>
<td>191.1</td>
<td>02.10.01</td>
<td>박물관</td>
<td>재단</td>
<td>도문화재</td>
</tr>
<tr>
<td>F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조적조</td>
<td>44.2</td>
<td>03.07.14</td>
<td>화장실</td>
<td>재단</td>
<td> </td>
</tr>
<tr>
<td>G동</td>
<td>공세리성당길 10</td>
<td>철근콘크리트조</td>
<td>387.55</td>
<td>08.09.05</td>
<td>사무실</td>
<td>재단</td>
<td> </td>
</tr>
</tbody>
</table>
 
<ol>
 	<li><b> </b><b>사립 조성학교 설립과 폐교 후 교사동 처리과정</b></li>
</ol>
<b>① </b><b>신교육기관 설치</b>

서구열강으로부터 통상압력에 따라 미국, 일본, 프랑스 등 7개국과의 1886년까지 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 조정은 각국의 선교사들로 하여금 서구의 문명을 접하게 되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고종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 조선교육의 근대화라는 정책을 도입하게 되었다. 1894년 7월, 조정의 예부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교육행정기관인 학무아문을 설치하였고, 다음 해 1895년 2월 고종은 교육에 관련된 특별조서인 교육칙어&lt;敎育勅語&gt;를 발표하였다.

고종은 정조의 개혁을 승계한 개방적 인재등용을 담은 &lt;교육칙어&gt;에, 첫째, 나라의 모욕을 막아줄 사람. 둘째, 나라의 불법한 것을 퇴치할 사람. 셋째, 나라의 정치 제도를 끌어갈 사람을 창출하기 위해 조서를 발표하였다.

교육조서를 발표한 후 4월에 최초의 현대식 학교법규라 할 수 있는 &lt;한성사범학교&gt;관제를 설립하였다. 이어서 1904년까지 &lt;외국어학교&gt;관제, &lt;성균관&gt;관제, 소학교령, 한성사업학교규칙, 소학교규칙대강, 보조공립학교규칙, 의학교관제, 중학교관제, 외국어학교규칙, 농상공학교규칙이 공포되어 이들 관제에 해당하는 관립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선교사 중심으로 가톨릭 성당과 개신교 교회에 사립학교 설치와 각 시군 지식인들이 자체적으로 설립한 &lt;사립의숙&gt; 등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무력 위협으로 ‘을사5조약’을 강요하여 국권을 침탈한 이후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전국 각지에서 한국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청소년들에게 신지식을 교육해서 국권을 회복할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사립학교 설립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불타오른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 8월경까지 한국인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사립학교가 <b>약 </b><b>3,000</b><b>개</b> 교에 달하였다.

교회와 우리나라의 선각자들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아동들이 민족과 자국의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했고, 일제의 ‘황민화(皇民化)’ 정책에 흡수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서당은 일제의 동화교육정책에 대항하는 장소였으며, 민중의 마지막 교육기관이었다. 일제가 보기에 조선인을 서당에서 조선인이 교육한다는 것 자체가 식민지 통치에 근본적인 불안 요소였다. 1918년 2월에 조선총독부령 제18호로 ｢서당규칙｣을 정하여 서당을 통제했다.

 

일제는 한국민족의 신교육 구국 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1908년 8월 26일 사립학교령을 제정·반포하였다. 그 요점은 사립학교 설립의 인가제&lt;認可制&gt;를 만들고, 그 인가 기준으로서 당시 한국 민중들이 갖지 못한 높은 시설 기준을 만들어 심사하도록 한 것이며, 정부나 일제 통감부의 명령에 위배되거나 유해하다고 인정하는 실업학교에 대해서는 이를 폐쇄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b>② </b><b>사립조성학교</b><b>(</b><b>私立朝星學校</b><b>) </b><b>설치와 운영 그리고 폐교</b><b>.</b>

조선 정부의 1895년도 고종&lt;<b>敎育勅語</b>&gt;가 발표에 맞춰 공세리성당 드비즈(成一論) 신부는 각 지역 자발적 교육기관 설치가 성행했던 년도를 감안하면 1906년도에 설치 운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일제는 한국민족의 신교육 구국 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1908년 8월 26일 사립학교령을 제정·반포하여 조선임시통감부를 통하여 1909년 4월6일자로 기독조성학교&lt;基督朝星學校&gt;를 인가하여 운영하게 되었다.

교육과정은 &lt;초등&gt;,&lt;고등보통&gt;교육과정으로 운영되었다. 초등교육은 천주교학, 수신, 국어, 한문, 일어,미술, 체조, 지리, 역사 요리가 개설되었다. 고등교육은 체조, 음악, 도화(圖畵), 이과(理科), 화학, 박물, 수학, 천주교학, 수신, 국한문, 일어, 지리, 역사가 개강되었다. 조성학교의 학교시설 규모는 초가목조건축물로 폐교당시 14칸(間)으로 확인되었다.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강점하자, 식민지 교육체제 수립을 위해 1911년 8월 23일 「조선교육령」을 다음과 같이 제정·공포하였다.

첫째, 초등교육은 사립학교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관공립보통학교로 개편한다.

둘째, 4년제 고등보통학교와 2~3년제의 실업학교는 사립학교를 인정하되

일본 국민이 될 성격을 함양해야 한다.

셋째, 4년제 전문학교는 인정하되 조선에 대학교는 인정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조선 민중의 삶은 억압과 착취, 수탈과 감시, 차별과 빈곤,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한글 폐지 등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일제의 무력 강점이 시작될 무렵 조선의 핵심 과제는 민족계몽과 민족의식 각성이었다. 일제의 교육을 받은 소년들은 일본식 사고와 자신이 일본사람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살았다. 일제강점기 교육은 이 땅의 젊은이들을 식민지에 종속되어 정체성과 민족성을 잃어버린 존재로 성장시켰다.

 

일제는 이 법령에서 구한말에 한국인들이 설립한 2,082개의 사립학교 대부분을 식민지 통치 권력이 접수하여 일제가 지배하는 관공립 보통학교로 만드는 것을 의도하였다. 따라서 공세리성당에 구한말 1909년도 설치인가 된 &lt;朝星學校&gt;도 관내 보통학교로 학생이 진학하게 됨에 따라 입학생의 저조로 폐교를 하게 되었다 1929년 1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공세리성당 복사를 역임한 강두영(姜斗永)의 아들 강태수(姜泰秀)는 주산공립보통학교(珠山公立普通學校) 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휴가차 잠시 고향인 공세리의 집에 와서 밤에 공세리성당 공호여자학원(貢湖女子學院)에서 일본시찰에 대한 간담회를 2시간을 개최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때까지 여학생 반은 운영되고 있었고 공세리성당 내 설치 운영되었던 &lt;조성학교&gt;는 운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폐교에 따라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 1930년에 폐교된 것으로 생각된다.

 

동아일보 1931년 2월 21일자 기사를 보면, 1930년 가을에 폐교된 조성학교 교사 초가목조 14칸(間)을 인주실업청년회가 회관건물이 없는 것을 알고 공세리성당 드비즈(成一論)신부는 인주실업청년회에 회관으로 사용토록 기부하였는데, 청년회의 총회에서 감사의 뜻으로 사례금 150원을 보내왔다. 드비즈(成一論) 신부는 받지 않고, 청년회장 강태수(姜泰秀)에게 그 돈으로 벼 3천 근을 구입하여 공세리 마을의 가난한 가구 73호(259명)에게 1인당 1말씩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그 후 인주실업청년회는 1931년 기부받은 조성학교 건물을 기초로 4백여 원의 경비를 들여 증축하고 &lt;인주실업청년회관&gt;으로 사용하였다.

 

설립 13년 만에 인주실업청년회는 일제의 강압적인 해산의 강요로 인하여 해산 절차에 들어갔다. 동아일보 1935년 9월10일자 보도를 보면, 13년간 회원 80여명이 어려운 지역민의 고용을 돕기도 하였고, 기금도 마련하여 어려운 회원에게 저리로 대부도 하였으나 생활은 피폐해졌고 인심은 해이해져서 더 이상 운영할 수도 없고, 또한 일제의 경찰서에도 해산을 요구하여 부득이 9월 5일에 해산을 선고하고 채권 1,080원 전부를 포기하였으며, 현금은 회원 1인당 4원씩 배당하였고 회관건물 14칸(間)은 3백원에 감가하여 150원은 인주면(仁州面)에 매도하였으며 나머지 150원은 공세리진흥회(貢稅里振興會)에 기부하였다. 당시 진흥회장은 강두영(姜斗永)이었다.

 

1909년에 공식적인 인가 절차에 의하여 설립 운영되었던 &lt;조성학교&gt;는 약 24년 동안 지역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서 크게 기여하였다. 설치운영에서부터 폐교하는 과정의 각종 자료에 관계되는 인물을 살펴볼 때 공세리성당의 설치과정과 &lt;조성학교&gt;설치과정 운영, 폐교, 기부, 청산절차에 공세리성당 복사이며 공세리 마을뿐만 아니라 아산군 전역에 재력과 영향력을 가진 강두영(姜斗永)의 가족들이 주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b>참고자료</b>

 

<b>조성학교 인가서 </b>

<b>1909</b><b>년</b><b>4</b><b>월</b><b>6</b><b>일자 </b><b>&lt;</b><b>조성학교</b><b>&gt;</b><b>인가 조서 </b><b>: </b><b>통감부 조선총독부관보</b><b>1918</b><b>년 </b><b>02</b><b>월 </b><b>19</b><b>일 </b>

 

<b>동아일보 </b><b>1929</b><b>년 </b><b>01</b><b>월 </b><b>10</b><b>일자 일본시찰 강화회</b><b>(</b><b>공세리성당내 공호학원</b><b>)</b>

 

<b>동아일보 </b><b>1931</b><b>년 </b><b>02</b><b>월 </b><b>21</b><b>일자 </b>

<b>(</b><b>사립조성학교 건물 초가목조</b><b>14</b><b>간 </b><b>1930</b><b>년 가을 청년회 기부</b><b>)</b>

 

 

 

<b>동아일보 </b><b>1931</b><b>년 </b><b>3</b><b>월 </b><b>28</b><b>일자 동아일보</b><b>1932</b><b>년 </b><b>9</b><b>월 </b><b>21</b><b>일자</b>

 

 

<b>동아일보 </b><b>1935</b><b>년 </b><b>09</b><b>월 </b><b>10</b><b>일자 </b><b>(</b><b>창립</b><b>1924</b><b>년</b><b>, </b><b>회관건축 </b><b>1930</b><b>년</b><b>. </b><b>해산 </b><b>1935</b><b>년 </b><b>9</b><b>월 </b><b>5</b><b>일</b><b>)</b>

<b>동아일보 </b><b>1933</b><b>년 </b><b>01</b><b>월 </b><b>08</b><b>일</b>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9:28:11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3권-넷. 병인박해와 도굴 사건]]></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34]]></link>
			<description><![CDATA[<b>넷</b><b>. </b><b>병인박해와 도굴 사건</b>

내포학 편집실

 
<ol>
 	<li>들어가는 말 94</li>
 	<li>병인박해의 시작 95</li>
 	<li>병인박해 시기 아산 걸매리의 순교자들 108</li>
 	<li>병인양요 131</li>
 	<li>오페르트 도굴 사건 135</li>
 	<li>도굴사건에 가담한 천주교 신자들 144</li>
 	<li>나가는 말 147</li>
</ol>
 
<ol>
 	<li><b> </b><b>들어가는 말</b></li>
</ol>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1868년 독일의 상인인 오페르트가 통상 요구를 강화하기 위해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지만 그 중심에는 페롱 권신부와 천주교 신자들이 있었다. 1863년 어린 고종이 즉위하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은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을 위해 각종 사회 제도 개혁을 시행했고, 대외적으로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시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서양 세력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더욱 강화하였고, 페롱신부와 오페르트 도굴 사건을 겪으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조정은 프랑스 선교사들과 그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주는 집주인, 복사, 회장, 영향력 있는 남자 신자들을 붙잡아 들였고, 여자들과 아이들에게는 관대했다. 그러나 1868년에 일어난 오페르트와 페롱 신부의 도굴사건은 끔찍한 박해를 불러왔다. 자신의 계획을 확신한 페롱 신부는 상하이에 있던 조선인 신자들을 설득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강제로 그 일을 시행하였지만, 조정에서는 격노하여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다. 결국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병인대박해는 월경지를 벗어나 신자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로 다시 박해가 가중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 세력과의 수교를 거부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결국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병인박해가 마무리되었다.

조선의 주변국 상황이 대원군으로 하여금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강화하고자 하는 자극을 주었지만, 리델신부와 페롱신부의 행동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박해만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ol>
 	<li><b> </b><b>병인박해의 시작</b></li>
</ol>
병인박해는 병인년(丙寅年)인 1866년 발생한 박해를 시작으로 1873년까지 약 7-8년 동안의 박해를 모두 포함한다. 조선은 첫 번째 1866년 봄에, 두 번째로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 번째는 1868년(무진사옥), 네번째는 1871년(신미사옥)에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했다. 병인박해는 우리나라 최대의 박해이고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박해이다. 내포지방은 조선 천주교회 설립초기부터 신앙을 깊이 받아들인 지역이었기에 더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병인박해는 천주교의 뿌리를 뽑아내려는 국내 정치적 측면만이 아니라 급격하게 밀어닥치는 서구 식민세력에 대한 대항이었다는 점에서 1801년의 신유박해나 1839년의 기해박해와는 달랐다.

흥선대원군은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1858년 6월 애로우호사건(Arow號事件)에 따라 톈진조약(天津條約)이 맺어지고 러시아가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게 되면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 뒤 러시아는 자주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게 되는데, 대원군을 비롯한 정부 고관들은 이에 당황하였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천주교 신자들 중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1814-1866)와 김면호(金勉浩, 토마스, 1820~1866)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하여 대원군의 정치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또 승지(承旨) 벼슬을 지낸 남종삼(南鍾三)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서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하고 계시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주교와의 만남을 건의했다.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도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Daveluy, 安敦伊)주교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한 달이 지나서였다.

불행하게도 대원군의 처지는 급격하게 바뀌면서 천주교에 대한 입장도 바뀌게 되었다. 그 이유는 우선 1866년 1월에 도착된 북경사신의 편지에서 영불연합군의 북경함락 이후 시작되었던 양인살육(洋人殺戮)의 사실이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의 소식은 반 대원군 세력으로 하여금 천주교와 접촉하고 있는 대원군에게 정치적인 공세를 취하게 했고, 이에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끼며 쇄국양이와 사교금압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문호개방을 반대하던 조선 지배층은 '금수의 사상'으로 취급하던 천주교를 탄압의 1차 대상으로 지목했다. 더구나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교가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趙大妃)까지 천주교를 비난하기에 이르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결심하고 박해령을 선포하였다. 대원군은 1866년 1월초 국내에 있던 프랑스 신부와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황해도·충청도의 연해를 중심으로 사교도가 왕래하는 뱃길과 선박 등을 감시하고, 조선인으로서 외국과 연락하는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b>먼저 처형한 뒤 보고하라는 천주교 금압령</b>을 내렸다. 그리하여 당시 국내에 있던 주교 등 9명이 체포되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붙잡혔다.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1월 16일 병자 3번째 기사에서는 좌변포도청(左邊捕盜廳)과 우변포도청(右邊捕盜廳)에서 옥에 갇혀 있는 죄인을 의금부로 압송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옥에 갇혀있는 죄인 베르뇌〔張敬一 : Berneux, Siméon François〕 【시메온】 ·백유시도마릐아〔白유시도마릐아〕·볼뤼〔徐沒禮〕 【벨나도】 ·김백다록〔金伯多祿〕 【베드루이다. 이상의 4명은 프랑스〔法國〕 사람이다.】 ·홍봉주(洪鳳周)·이선이(李先伊)·정의배(丁義培)·최형(崔炯)·전장운(全長雲) 등을 모두 의금부(義禁府)에 압송(押送)하여 넘겼습니다.’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1866년) 1월 20일 경진 2번째기사에서는 ‘사교 죄인 남종삼과 홍봉주 및 서양인 4명을 효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금부(義禁府)에서, ‘죄인 남종삼(南鍾三)과 홍봉주(洪鳳周) 등의 결안(結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종삼(南鍾三)의 결안에, 「윤리 도덕을 파괴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화란(禍亂)을 불러일으키기를 좋아하며 감히 딴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른바 양학(洋學)은 아비도 무시하고 임금도 무시하는 사악한 학문인데, 자신이 높은 관리의 반열에 있으면서도 이를 기꺼이 전하고 익혀 오랫동안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양학은 국법(國法)에서 금지해야 하는 것인데도 금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사교(邪敎)는 정도(正道)와 배치되는 것인데도 도리어 사교를 정도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오랑캐나 짐승만도 못한 것입니다. 러시아〔俄羅斯〕에 변란(變亂)이 있을 것이라는 말과 프랑스〔佛浪國〕와 조약(條約)을 맺을 계책이 있다고 한 것으로 말하면, 애당초 명백하게 근거할만한 단서도 없는데 요망한 말을 만들어내서 여러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감히 나라를 팔아먹을 계책을 품고 몰래 외적(外敵)을 끌어들일 음모를 하였으니, 그가 지은 죄를 따져보면 만 번을 죽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모반 부도(謀叛不道)에 대해 확실하게 지만(遲晩)이라고 하였습니다.」하였고, 홍봉주(洪鳳周)의 결안에, 「본래 신유년(1801), 사도(邪徒)의 잔당으로서 대대로 악행을 저지르며 사교에 깊이 빠져 이국(異國)의 무리들과 결탁하였습니다. 멀리 강남(江南)까지 건너가 서양 사람인 장경일(張敬一)을 데리고 와서 그와 한집에 같이 살면서 익힌 것은 사악한 서책이었으며 불러 모은 무리들은 사악한 교도들이었습니다. 러시아에 드러나지 않았던 걱정거리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과 프랑스와 먼저 조약을 맺을 것이라는 말을 장경일과 주고받은 자도 그였으며 남종삼(南鍾三)을 종용한 자도 그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요망한 말을 퍼뜨리고 나라를 팔아먹을 흉악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반 부도에 대해 확실하게 지만이라고 하였습니다.」하였습니다. 남종삼과 홍봉주는 모두 부대 시참(不待時斬)에 해당합니다.’라고 아뢰었다. 또 보고하기를, "남종삼과 홍봉주 등은 이미 지만하였고, 최형(崔炯)과 전장운(全長雲)은 형조(刑曹)에 이송(移送)하여 상세히 조사하도록 하였으며, 서양인 4명은 군영(軍營)에 넘겨주어 효수(梟首)하여 경계하도록 하였습니다. 정의배(丁義培)는 공초를 받은 것 중에 결말을 짓지 못한 것이 많으므로 도로 포도청(捕盜廳)에 가두어 철저히 세밀하게 조사하게 하소서. 보방(保放)한 죄인 이선이(李先伊)는 별로 더 이상 신문할 단서가 없으므로 특별히 방송(放送)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추국(推鞫)을 철파(撤罷)하라고 명하였다.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1866년) 1월 25일 을유 1번째기사에는 ‘천주교 죄인 정의배, 우세영과 서양인 2명을 효수하고 사람들을 경계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좌우 포청(左右捕廳)의 계목(啓目)을 보니, ‘양인(洋人) 신요안〔申妖案〕 【요완】 , 박미가엘 알늑산델〔朴미가엘 알늑산델〕 【이상은 프랑스〔法國〕 사람이다.】 및 사학(邪學)을 한 사람인 정의배(鄭宜培)·우세영(禹世英) 등은 다같이 이미 자복하여 지만(遲晩)하였습니다만, 머무르면서 서로 만나 호응한 자에 대해서는 죽기로 숨기고 있으므로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사악한 무리들이 서로 비호하며 죽기로 고발하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무리들의 완악하고 사특함이 한 꿰미에 꿴 것과 같기 때문이니 지금에 와서 특별히 다시 더 조사할 단서가 없습니다. 하물며 금법(禁法)을 위반하고 남의 나라를 침범해 들어온 것은 역시 일률(一律)에 관계되는 만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정의배가 처음 거짓으로 마구 공술한 것은 조금이나마 시간을 연장시켜 생명을 더 유지해보려는 계책이었지만, 전후의 범죄 사실은 이미 승복한 여러 놈들과 둘이지만 하나와 마찬가지입니다. 우세영과 같이 잠깐 배반하였다가 또 곧 미혹되며 종잡을 수 없이 이랬다 저랬다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제 만약 말감(末減)한다면 훗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요안·박미카엘알렉산더·정의배·우세영 등을 모두 군문(軍門)에 넘겨 효수(梟首)하고 여러 사람들을 경계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2월 8일 무술 2번째기사에서는 ‘좌우변 포도청에서 사학 죄인 황석두, 장주기와 프랑스인 3명을 효수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좌변포도청(左邊捕盜廳)과 우변포도청(右邊捕盜廳)에서, ‘사학 죄인(邪學罪人) 타블뤼〔安敦伊 : Daveluy, Marie Nicolas Antoine〕 【안돈니】 ·오백다록〔吳伯多祿〕 【베드로】 ·민유아욱가〔閔유아욱가〕 【프랑스〔法國〕사람이다.】 ·황석두(黃錫斗)·장주기(張周基) 등을 공충도(公忠道) 수영(水營)에 압부(押付)해서 효수(梟首)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키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8일 갑자 4번째기사에는 프랑스 전교사들을 사형에 처한 문제로 북경에 회답 자문을 띄우게 된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북경(北京) 예부(禮部)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을 보니, ‘전에 프랑스 공사(公使)가 여러 차례 전교사(傳敎士)들이 조선에 나갈 수 있도록 호조(護照) 발급을 청하였는데, 총리 아문(總理衙門)에서 습교(習敎)는 조선에서 원하는 바가 아니므로 호조를 발급하기가 곤란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시 프랑스 공사가 보내온 조회(照會)에 의하면, 고려 국왕이 프랑스의 주교(主敎) 두 사람 및 전교사 아홉 사람과 본지(本地)의 습교인 남녀노소를 모두 살해하였기 때문에 장수에게 군사를 일으키도록 명하여 며칠 안으로 일제히 소집할 것이라고 하였다. 중국이 이미 이 일을 알았으니 중간에서 해명해 주지 않을 수 없는데, 과연 전교사(傳敎士)들을 살해한 사실이 있다고 하면 먼저 이치에 의거하여 조사할 것이요, 갑자기 병란의 단서를 만들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귀국에 알려 심사숙고하여 처리하게 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총리 아문에서 해명해 주려는 것과 예부에서 이자(移咨)한 것에 대해 모두 사의를 표해야 하겠으며, 사실의 자초지종에 대해서도 상세히 갖추어 말을 만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답 자문은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재자관(齎咨官)을 정하여 며칠 이내로 들여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예부에 보내는 회답 자문에, "우리나라에서 작년 겨울부터 흉악한 무리와 도둑의 부류들이 무리를 지어 결탁하고 몰래 반역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마침내 체포해 보니 다른 나라 사람이 8명이나 끼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어느 곳으로 국경을 넘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옷차림과 말하는 것은 동국(東國)사람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간사스러운 여자로 가장하고 자취를 숨기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이 우리나라의 경내에 오랫동안 있었음을 미루어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설령 교리를 전파하고 익히게 하려고 하였다면 어찌 이렇게 비밀리에 하였겠습니까? 다른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 표류하여 온 경우에는 모두 보호해주고 돌려보내 주지만, 공적인 증거 문건 없이 몰래 국경을 넘어온 자들의 경우에는 모두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원래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에 있으므로, 이에 나란히 해당 법률을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이 몰래 다른 나라에 들어가 부당하게 법을 위반하면서, 그릇된 일을 선동하여 그 나라 백성과 그 나라가 피해를 입었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반드시 남김없이 모두 사형에 처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도 마땅히 그에 대하여 한 터럭만큼이라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의 변경을 튼튼히 하고 나라의 금법을 엄격히 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모두 그러합니다.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넓고 큰 바다로 막혀 있어 서계(書契)를 서로 통하지도 못하는데, 무슨 오래 전부터 원망을 가진 일이 있거나 혐의스러운 일이 있다고 온전히 돌려보낼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서 차마 이와 같이 사형에 처하는 조치를 취하겠습니까? 이번에 프랑스에서 주장한 말은 미처 생각해 보지도 못한 문제입니다. 우리나라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전혀 연락을 가질 기회가 없었는데, 다행히도 여러 대인들이 화해를 시켜주는 혜택을 입었고 깊이 생각하여 만전을 기하는 계책까지 가르쳐 주었으니, 이는 진실로 일반 규례를 벗어나 잘 돌봐주고 도와주려는 훌륭한 덕과 지극한 생각입니다. 앞으로 사행(使行) 때 그 정성에 사례하기를 기다리면서 이에 먼저 자세히 갖추어 회답합니다." 하였다.

 

병인박해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천주교는 1886년 한불조약 이후 다시 회복하게 되었으며, 1968년에는 병인박해 기간 중에 순교한 24명이 복자(福者)로, 1984년에는 성인(聖人)으로 오르게 되었다.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은 1890년 주교 뮈텔(Mutel, 閔德孝)이 자료를 모아 간행한 『치명일기』가 대표적이다.

<b>2.1. </b><b>하느님의 종 홍봉주 토마스</b><b>(</b><b>洪鳳周</b><b>, 1814-1866)</b>

내포의 예산 출신으로 신유박해 때 순교하신 복자 홍낙민(洪樂民, 루카, 1751-1801)의 손자이며, 기해박해 때 순교하신 복자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우스 또는 프로타시오, 1780-1840))의 아들이다. 어머니 정소사(丁召史)는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이며 신유박해 때의 순교자 정약종(丁若鍾)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은 그는 1839년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부친과 부인 심 바르바라는 순교했지만, 본인은 석방되어 충청도 예산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1855년 2월 메스트르 신부의 명을 받고 선편으로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그는 조선교구의 제4대 주교로 임명된 베르뇌(Berneux, S. F., 張敬一) 주교를 만나, 그와 푸르티에(Pourthie, J. A.) 신부, 프티니콜라(Petitnicolas, M. A.) 신부를 인도하여 1856년 3월 서울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주교를 전동에 있는 이군심(李君心)의 집에 기거하게 한 후 예산 본가로 내려갔다. 1861년 재혼한 처자가 죽자 음력 3월에 상경하여 베르뇌 주교님과 함께 살며 주교님의 일을 도왔고, 음력 5월에는 주교님의 거처를 전동에서 태평동으로 이전하였다. 그러던 중 1864년부터 러시아가 두만강 근처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고, 조선 정부가 이를 위협으로 느끼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종교의 자유를 얻을 목적으로 김면호(金冕浩)·이유일(李惟一) 등과 상의하였다. 그 결과 러시아 사람을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 및 영국과 조약을 맺는 데 있으며, 이 조약을 맺는 데는 조선에서 사목하고 있는 주교를 통해서 교섭하는 것이 좋다는 방아책(防俄策)을 대원군 딸의 시아버지인 조기진(趙基晉)을 통해서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반응이 없자 천주교인으로 승지 벼슬을 지낸 남종삼 요한에게 그사이의 경위를 설명하고 방아책을 다시 청원하도록 종용하였다. 이에 남종삼 요한은 자신이 직접 작성한 청원서를 대원군에게 제출하였는데, 오히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주교님을 비롯한 많은 성직자와 신자들이 순교하는 병인박해를 몰고 왔다. 대원군은 처음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국외의 상황이 바뀌면서 박해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b>2.2. </b><b>하느님의 종 김면호 토마스</b><b>(</b><b>金勉浩</b><b>, </b><b>또는 계호</b><b>, 1820~1866)</b>

안동 출신으로 어려서 서울 주동(鑄洞)에 이사해 살던 그는 형들로부터 교리를 배워 19세 때 입교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호방하여 놀기를 좋아했으므로 18년 동안이나 교회에 대해 냉담했는데, 1866년 초에 비로소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열심히 신앙을 지켜나갔다. 그는 다른 신자들 앞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씻는 길은 오직 순교로 구원을 받는 길밖에 없다고 공언하고 다닐 만큼 열성적으로 전교에 힘썼다. 1866년 병인박해의 기미가 보이자 이를 막고자 고심하던 중, 때마침 러시아가 남진야욕을 드러내어 조선의 북부국경을 자주 침범하는 일이 일어났으므로, 나라를 구하고 교회를 박해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목적으로 신자들과 함께 베르뇌 주교님을 통해 프랑스의 세력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려는 이른바 방아책(防俄策)을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하는 편지를 올렸다.

 

<b>2.3. </b><b>성 남종삼</b><b>(</b><b>요한</b><b>, 1817-1866)</b>

충주에서 태어나 제천에 거주하며 남인계의 농학자로 충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남상교의 가르침을 받은 남종삼 요한은 22세 때인 1838년(헌종 4)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영해현감(寧海縣監)을 거쳐 철종 때에는 승지(承旨)가 되어 왕을 보필하였다. 또한 고종 초에는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므로 자연 당시의 실권자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친교를 가졌다.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아버지 남상교의 영향이 컸는데,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에는 이유일(李惟一)에게 천주교를 배웠다고 진술하였다.

남종삼 성인의 아버지 남상교 아우구스티노(1784-1866)는 1827년(순조 27)에 북경에서 영세하였다. 동생 남탄교(南坦敎)의 아들 남종삼(南鍾三)을 입양하여 입교시켰고, 천주교 교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아들 남종삼 요한은 새남터에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는 공주 진영(鎭營)의 옥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상교는 정약용, 이학규(李學逵, 1770∼1835) 이후 남인계 시인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자 한시문에 능한 문학가로서 당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남종삼 성인은 입교 후에는 베르뇌(Berneux)주교,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관여했고, 1861년에 입국한 리델(Ridel)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기도 했다. 고종 말에 이르러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점차 미묘해져 가는 가운데 만주(滿洲)의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한 러시아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접하게 되었다. 그러자 점차 통상을 요구하며 자주 국경을 넘어오므로, 조정은 위기감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에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은 사태해결책을 강구하기에 부심하고 있었다. 이 때 남종삼 요한은 홍봉주 토마스, 이유일 안토니오, 김면호 토마스 등 교인들과 상의하여, 국내에서 전교 중인 베르뇌 주교, 다블뤼(Daveluy) 주교 등 프랑스 선교사의 힘을 빌려,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해야 한다는 방아책(防俄策)을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남종삼은 이 방법을 통해 러시아의 남침도 막고, 쇄국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여 신앙의 자유도 구현케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방아책에 대하여 당초 관심을 가졌던 대원군이 주교님들과의 만남 이 늦어지면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북경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는 와전된 정보가 전해지자, 천주교 접근에서 천주교 박해로 돌변하여 1866년 초에 천주교도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남종삼 요한도 3월 1일 경기도 고양에서 체포된 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b>2.4. </b><b>성 우세영 알렉시오</b><b>(</b><b>禹世英</b><b>, 1845</b><b>년 </b><b>~ 1866</b><b>년 </b><b>3</b><b>월 </b><b>11</b><b>일</b><b>)</b>

1845년에 황해도 서흥에서 태어난 우세영 알렉시오는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교리 교사 김기호 요한의 권면으로 천주교 입교의 뜻을 품었다. 우세영은 그의 아버지에게 자신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강하게 거절하였다. 베르뇌 주교는 젊은 우세영을 교리 교사 정의배 마르코에게 보내 세례를 위한 신앙생활과 영성을 배우도록 하였다. 1863년에 주교는 마침내 우세영에게 개인적으로 세례를 주었고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우세영은 세례를 받은 후에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매우 냉혹한 대우를 받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견뎌냈다. 우세영은 그의 아버지에게 자신이 분가하여 살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고, 우세영은 한양으로 상경하여 정의배 회장과 함께 살며, 자신의 가족들의 천주교로의 개종을 위해 기도하곤 했다. 그는 교리 서적들을 번역하였으며 십이단 기도문을 편찬하였다. 그 무렵, 우세영의 아버지가 천주교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다. 우세영은 고향으로 내려가 그의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우세영의 온가족과 이웃을 포함하여 스무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 가족의 종교가 그 지역에 잘 알려진 까닭에, 그들은 평양의 논재로 이사했다.

1866년의 음력 설날에, 우세영은 정의배 회장 찾아가 세배를 하고, 고둔리 공소에서 축일을 보냈다. 그러던 중 포졸들이 그 마을을 습격하여 우세영과 교리 교사 유정률 회장등 6명의 모든 남성 천주교인들을 체포하였다. 당시 평양 감영에서 유정률은 죽을 때까지 매를 맞고 그의 시신이 대동강에 던져졌지만, 우세영은 혹형을 이겨내지 못하고 배교하였다. 그는 즉시 뉘우치고 속죄를 위해 단식하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불태우고, 수감되어 있는 베르뇌 주교를 찾아가 평양에서 배교하였던 죄를 고해하였다. 우세영은 사죄를 받은 후에, 정의배의 집을 파수하던 포졸들에게 자수하여 체포된 후, 용감하게 모든 고문을 견디며, 배교를 거부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형리들에게 배교의 유혹을 받았지만 배교하지 않았다 우세영 알렉시오는 1866년 3월 11일 새남터에서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 정의배 마르코 등과 함께 참수되고 군문효수 되었다. 그렇게 우세영이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22세였다.

 

<b>2.5. </b><b>성 정의배 마르코</b><b>(</b><b>丁義培</b><b>, 1795</b><b>년 </b><b>~ 1866</b><b>년 </b><b>3</b><b>월 </b><b>11</b><b>일</b><b>)</b>

정의배는 1795년에 경기도 용인에서 천주교를 경멸하는 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정의배는 과거 시험 공부를 마치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결혼했지만, 얼마못가 아내가 세상을 떠났고, 자식 없이 여러 해를 홀아비로 보냈다. 1839년에 그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그리고 샤스탕 신부가 순교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정의배는 천주교를 이교라고 생각하였지만, 커다란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그 선교사들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그는 천주교 서적들을 읽었으며, 천주교가 그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한양으로 올라와서 세례를 받았다. 1845년에 조선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는 그를 교리 교사(회장)으로 임명했다. 교리교사 정의배는 죽을 때까지 그의 의무를 매우 충실히 수행하였으므로, 다블뤼 주교는 그가 성인의 삶을 살았다고 공언하였으며, 베르뇌 주교는 천국에서 정의배 회장과 함께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배는 교우들과 예비 신자들에게 모범이 되었으며, 병자들과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는 교우 피 카타리나를 후처로 맞았고, 일부러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들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 피 바오로를 입양하였다. 피 바오로는 그들의 집에 살며 브르트니에르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쳤다. 정의배 회장은 매우 강한 의지력의 소유자로서 언제나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다. 그는 언제나 순교자로 죽기를 원했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미사 때마다 교우들에게 그의 경건한 태도를 칭찬하곤 했다. 1866년 병인년에 박해가 발발하자, 정의배는 다른 사람들을 피신시켰지만, 자신은 피신하지 않았다. 1866년 2월 25일에 그는 체포되었는데, 그것을 매우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72세였다. 그는 감옥에서 수 일을 네 명의 프랑스인 선교사들과 함께 보냈다. 그는 극심한 고문 끝에 1866년 3월 11일에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

 

<b>2.6. </b><b>성 전장운 요한</b><b>(</b><b>全長雲</b><b>, 1811</b><b>년 </b><b>~ 1866</b><b>년 </b><b>3</b><b>월 </b><b>9</b><b>일</b><b>)</b>

1811년에 한양에서 태어난 전장운 요한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의 인도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가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그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전장운은 어릴 때부터 농사와 가죽 가방을 만들며 가족을 부양했다. 1839년에 그는 체포되었지만, 그의 신앙의 깊이가 충분히 깊지 않았기 때문에, 극심한 고문과 박해는 그를 배교케 만들었고, 그는 석방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이후에, 그는 어머니의 격려로 자신의 배교를 뉘우쳤지만, 고해를 받아 줄 사제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전장운은 속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845년에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조선으로 귀국하자, 전장운은 고해성사를 받았고 동료 교우들의 감탄과 존경을 받는 매우 충실한 천주교 신자로 살았다. 전장운 요한은 결혼하여 세 명의 자식을 두었다. 베르뇌 주교는 그를 매우 독실한 신자로 인정하여, 그에게 세례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을 주었으며 최형 베드로와 임치화 요셉과 함께 그를 교회 서적의 출판인으로 임명하였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인쇄소의 주인 임치화는 도피하였지만, 전장운은 그곳에 남아서 목판들을 지키려 하였다. 그는 "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저는 이 목판들을 지켜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도망치기를 재촉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1866년 3월 1일에 포졸들이 그 인쇄소를 급습하여, 전장운은 체포되었고, 목판들은 몰수되었다. 그는 극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고통을 견뎌냈다. 그는 포도청에서 1회의 심문을 받은 후, 의금부에서 9회의 심문과 2회의 형문을 받고 장형 32대를 맞았고, 1866년 3월 6일에 형조로 이송되어, 3월 9일 사형을 선고받아 그날에 서소문 밖에서 최형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는 사형장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목을 자르는 망나니가 과거에 자신과 면식이 있는 전(前) 천주교우였음을 알아보았다. 망나니는 전장운의 목을 자르기를 주저했는데, 전장운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임금님을 따르십시오. 저는 하느님을 따르겠습니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전장운은 참수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b>2.7. </b><b>성 최형 베드로</b><b>(</b><b>崔炯</b><b>, 1814</b><b>년 </b><b>~ 1866</b><b>년 </b><b>3</b><b>월 </b><b>9</b><b>일</b><b>)</b>

최형 베드로는 충청도 공주에서 태어나서 한양의 남문 밖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20세에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최형은 14 때에 부모의 권유로 형제들과 함께 입교하였다. 그의 가족은 모두 독실한 신자로 살았다. 최형은 소년기부터 한문학을 공부하였는데, 집안이 가난해서 농사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하여야 했다. 그의 동생 최방제는 김대건과 최양업과 함께 마카오로 유학하여 사제 수업을 받던 도중 1836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836년에 모방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 최형은 그의 복사가 되었다. 최형은 1839년에 기해박해로 모방 신부가 순교할 때까지 그를 헌신적으로 보필하였다. 1840년에 최형과 그의 아버지는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지만, 포졸들에게 뇌물을 주어 석방되었다. 최형은 김대건 부제와 함께 목선을 타고 황해를 건너 상하이에 김 신부의 서품식에 참석한 천주교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들은 김 신부와 페레올 주교 그리고 다블뤼 신부와 함께 같은 목선을 타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들이 조선에 입국한 후, 최형은 김대건 신부를 보필하였다. 최형은 36세에 결혼하였고 한양의 남쪽 근교에서 살면서 종교 서적을 번역하며 묵주를 만들었다. 그는 비천주교인들에게도 매우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예비 신자와 신입 교우들이 그의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오곤 했다. 최형은 교리 교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뇌 주교는 그에게 세례자의 권한을 주었다. 주교는 또한 그를 인쇄소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최형은 4년 동안 그곳에서 열심히 일하며 많은 천주교 서적을 출판하였다.

베르뇌 주교가 체포될 때, 포졸들은 최형도 체포하려 하였다. 그러나 최형은 그의 딸과 사위와 함께 피신하였다. 그는 나중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그는 용감히 그의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는 극심한 매질로 인해 다리가 부러졌다. 베르뇌 주교가 순교하고 며칠 뒤인 1866년 3월 9일에, 최형은 서소문 바깥의 사형장에서 전장운 요한과 함께 참수되었다. 최형은 다른 순교자들 보다 더 격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최형이 순교하던 때의 나이는 53세였다. 그의 형 최수는 1866년에 절두산에서 참수되었으며, 큰 누나는 평생을 처녀로 살았다.

 

<b>2.8. </b><b>천주교 신자들을 붙잡았을 때 포교에게 상을 줌</b>

포도청에서는 포교가 도적을 체포했을 때 상을 주는 관례가 있었는데, 이는 성종 12년(1481)에 마련된 〈포도사목〉(捕盜事目)을 통해 이미 마련되었다. 이러한 관례는 이후 도적뿐만 아니라 특별한 정치 · 경제 · 사회범 체포에도 적용되었고, 천주교 신자 체포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1839년에 체포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의 경우에는 스스로 자수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선교사를 체포하기 위해 경기도 지역을 오가면서 활동한 포교 손계창과 이를 도운 포교 황계륜에게 상을 내렸다. 아울러 좌·우포청의 수교(首校)와 유진길(劉進吉, 아우구스티노) · 정하상(丁夏祥, 바오로)을 체포한 포교들에게도 특별히 상을 내렸다.

 

비변사에서 아뢰었다.

“지난번 서양인 범가(范哥, 즉 앵베르 주교)를 체포해 온 포교를 상 주는 일을 아뢴 적이 있습니다. 그 후에 그 포교가 또 나(羅, 즉 모방 신부), 정(鄭, 즉 샤스탕 신부) 두 서양인을 체포했는데, 전후의 노고는 실로 장려할 만하여 특별히 상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포교 손계창을 우선 상으로 가자(加資)하여 좋은 곳의 임기가 거의 다 된 변장(邊將)으로 자리를 만들어 보내고, 나·정 두 서양인을 체포할 때 힘을 합쳐 거행한 포교 황기륜도 변장 자리가 나는 대로 보내며, 이번에 사학의 무리를 기찰 체포할 때 좌·우포청의 여러 포교들이 분주히 힘쓴 바가 아주 많으니 또한 마땅히 격려하고 권장해야 하겠습니다. 좌·우포청의 수교(首校) 및 유진길 · 정하상 등을 체포해 온 포교도 아울러 특별히 상을 가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병인박해 때에는 프랑스 선교사와 지도층 신자들을 체포한 좌·우포도청의 군관들에게 그 공로에 따라 1·2·3등으로 구분하여 상을 내렸다. 이러한 포상은 포교들이 경쟁적으로 천주교 신자 체포에 집착하는 이유가 되었고, 월경지를 넘어서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게 된다. 그래서 수원 포교가 천안의 월경지인 여사울에서 신자들을 붙잡아가게 되고, 홍주의 월경지인 원머리에서도 수원 표교들이 신자들을 붙잡아가게 된다.

포교와 포졸들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했을 때 우선 홍사(紅絲)라고도 하는 붉은색 명주실을 꼬아 만든 오라로 결박하는데, 도망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는 결박하지 않고 어깨에 오라를 걸치는 것으로 끝나기도 하였다. 그런 다음 서양 선교사들에게는 일반적으로 머리에 몽두(蒙頭)를 씌우고 목에는 행차칼(行枷, 일명 도리칼)을, 손에는 축(杻)이라 불리는 목수갑을 채웠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몽두를 씌우지 않고 행차칼과 수갑만 채웠던 것 같다. 조선시대 죄인의 머리에 덮어씌우던 형구인 몽두는 죄수의 도포 자락을 잘라 만드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선교사들에게 씌운 몽두는 붉은색이나 누런색의 헝겊으로 만든 차양이 넓은 모자로, 머리에 씌우면 얼굴과 어깨까지 덮을 수 있었다고 한다. 체포된 신자들의 이송 때에는 때때로 마소 위에 얹은 짚둥우리에 앉혀 이송하였다.

 

(안 다블뤼 주교님이) 잡혀서 서울로 올라오실 때 남문 밖에서 보니 말 위에 짚둥우리 타시고, 몽두 쓰시고, 행차칼 쓰시고, 손에 수갑이 채워져 오시는데, 민(위앵) 신부와 오(오메트르) 신부와 황(석두) 루카와 장(주기, 張周基 요셉) 회장 등도 함께 같이 하고 왔습니다. 안 주교와 두 분 신부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고서 오시고, 조선 교우는 몽두를 쓰지 않고 행차칼만 썼습니다.

 

포도청으로 이송된 신자들은 차꼬(着錮, 桎)라 불리는 족쇄를 차고 옥살이를 하면서 차례가 되면 포장 앞으로 나가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배교하도록 강요당하면서 문초를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은 포장 앞에서 당당하게 천주님을 증거하였고, 십계명을 설명하며 천주교의 옳음을 증거하였다.

 
<ol>
 	<li><b> </b><b>병인박해 시기 아산 걸매리의 순교자들</b></li>
</ol>
내포의 입구인 걸매리는 초창기부터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존창 루도비코에 의해 복음화 된 내포지역은 밀양박씨 형제들이 살았던 수원 걸매(현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를 비롯하여 수원 밀두리(즉 밀머리, 현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 아산 쇠재(현 아산시 영인면 성내리), 신창 남방재, 신창 창말(현 아산시 선장면 대흥리), 신창 용당리(현 아산시 영인면 성내리), 신창 남방재, 신창 창말(현 아산시 선장면 대흥리), 신창 용당리(현 아산시 선장면 가산리) 등지에 천주교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병인박해 직후 중국으로 피신하던 리델신부가 한때 머물렀던 방아사골도 신자들이 은거해 살던 마을이었다.

 

아산 지역의 첫 순교자로 등장하는 사람은 ‘하 바르바라’다. 1825년 3월, 아산에서 체포되어 해미에 투옥되었다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한 전교회장 ‘하 바르바라’이다. 그녀는 당진 출신으로 혼인한 뒤 면천에서 살다가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과부가 된 이후에는 전교 회장이 되어 내포 지역 이곳 저곳으로 다니면서 천주교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1825년 3월 아산의 반대마을(Pan tei ma eul)에서 체포되었고, 해미 진영으로 압송되어 꿋꿋하게 천주 신앙을 증거했지만 석방된 후 병사했다. 그녀가 석방될 수 있었던 것은 어차피 죽을 것이기에 밖으로 내보낸 듯하다.

천주교 박해기에 처음 이 지역의 사목을 담당한 선교사는 1852년 8월 조선에 입국한 메스트르(A. Maistre, 李) 신부였다. 메스트르 신부는 1852년 이후 성모승천구역으로 명명된 지역, 즉 아산을 포함하는 충청도 해안에서 경상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담당하였다. 이때 그는 덕산 황무실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활동하다가 1857년 12월 20일에 선종하여 그곳에 묻혔다. 이어 페롱(Féron, 崔) 신부가 성모승천구역을 맡았다. 1860년 성탄절에 페롱 신부는 홍주 거더리 공소를 방문하고 이곳에 모이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랑드르 신부가 덕산 황무실에 사목 중심지를 활동하다가 1863년 9월 15일에 선종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다. 랑드르 신부 선종 이후 이 지역은 다블뤼 주교(1867년 주교 서품)가 사목하게 된다. 다블뤼 주교는 둠벙이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있다가 1857년을 전후해서는 충청동 광천(廣川)에 거처하였고, 1861년 10월 이후 상부 내포지역 본당을 담당하게 된다. 1865년 무렵에는 ‘방사골’(혹은 방아사골)에 거처하였다. 1865년 10월 이후에는 신리를 사목 중심지로 삼고 인근 지역을 순방했는데, 지금의 아산·당진·예산 지역이 이때 다블뤼 주교가 담당했던 사목 관할 지역 안에 속해 있었다.

병인박해는 1866년 2월 23일(음력 1월 9일), 서울의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충청도 지역에서는 1866년 3월 11일(음력 1월 25일), 거더리의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있던 다블뤼 주교가 처음으로 체포되었다. 이어 위앵(Huin) 신부, 오메트르(Aumaitre) 신부, 황석두(루가) 등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제천 배론 신학교의 집 주인 장주기(요셉)가 이들과 함께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들 5명은 3월 30일(음력 2월 14일) 보령 수영으로 이송되어 그곳 갈마진터에서 순교하였다.

 

<b>&lt;</b><b>병인박해 중 아산 지역 출신 순교자 현황</b><b>&gt;</b>

걸매 출신이거나 걸매에 거주하다가 병인박해 이후에 체포된 순교자는 박씨 집안 10명을 포함하여 모두 19명이다. 여기에 밀두리 출신의 순교자 4명, 아산 구말리 출신 순교자 1명, 아산 쇠재에 거주하던 순교자 3명, 아산 등골에 거주하던 1명, 아산 뒷내 출신 순교자 2명, 아산 산소말에 거주하던 기묘박해의 순교자 1명을 더하면 병인박해 이후 기묘박해 때까지 아산 지역 출신 순교자는 모두 31명이다. 또 1825년의 순교자 하 바르바라를 포함하면, 박해기에 순교한 아산 지역 출신 순교자의 수는 모두 32명이 된다.
<table>
<tbody>
<tr>
<td><b>성명</b><b>(</b><b>세례명</b><b>)</b></td>
<td><b>탄생지</b></td>
<td><b>거주지</b></td>
<td><b>순교일</b><b>(</b><b>나이</b><b>)</b></td>
<td><b>순교지</b></td>
<td colspan="2"><b>비 고</b></td>
</tr>
<tr>
<td>박의서

(사바)</td>
<td>수원 걸매</td>
<td>수원 걸매

예산 여사울</td>
<td>1867.3(62세)

* 혹 1867. 8. 8(60세)</td>
<td>수원</td>
<td colspan="2">하느님의 종

회장,3형제의 장남</td>
</tr>
<tr>
<td>박홍갑</td>
<td>수원 걸매</td>
<td>수원 걸매</td>
<td>1866(18세)</td>
<td>서울</td>
<td colspan="2">박의서 회장의 아들</td>
</tr>
<tr>
<td>박원서

마르코</td>
<td>수원 걸매</td>
<td>수원 걸매

예산 여사울</td>
<td>1867. 3 (51세)

* 혹은 1867. 8. 8</td>
<td>수원</td>
<td colspan="2">하느님의 종

박의서 회장의 동생 이 마리아의 남편</td>
</tr>
<tr>
<td>이 마리아</td>
<td>수원 걸매</td>
<td>수원 걸매

예산 여사울</td>
<td>1867. 3

* 혹은 1867. 8. 8</td>
<td>수원</td>
<td colspan="2">박원서의 아내</td>
</tr>
<tr>
<td>박익서</td>
<td>수원 걸매</td>
<td>수원 걸매

예산 여사울</td>
<td>1867. 3 (45세)

* 혹은 1867. 8. 8</td>
<td>수원</td>
<td colspan="2">하느님의 종

박의서 회장의 동생</td>
</tr>
<tr>
<td>박인서</td>
<td>수원 새터</td>
<td>수원 걸매</td>
<td>1867. 3 (38세)

*혹은 1867. 8. 8</td>
<td>수원</td>
<td colspan="2">박의서 회장의 사촌동생</td>
</tr>
<tr>
<td>조 모니카</td>
<td>수원 걸매</td>
<td>수원 걸매

덕산 섬말</td>
<td>1868(50여 세)</td>
<td>수원</td>
<td colspan="2">박의서 회장의 종수

박 알렉산데르의 모친</td>
</tr>
<tr>
<td>박화진

알렉산데르</td>
<td> </td>
<td>수원 걸매</td>
<td>1868(31세)</td>
<td>서울</td>
<td colspan="2">조 모니카의 장남</td>
</tr>
<tr>
<td>박제환

(베드로)</td>
<td>수원 걸매</td>
<td> </td>
<td>1867(18세)</td>
<td>서울</td>
<td colspan="2">보명은 기천

박의서 회장의 제종</td>
</tr>
<tr>
<td>이씨 부인</td>
<td>서울</td>
<td>수원 걸매</td>
<td>1868(약 38세)</td>
<td>수원</td>
<td colspan="2">박의서 회장의 제수

(혹은 종제수)</td>
</tr>
<tr>
<td>김중백</td>
<td>수원 걸매</td>
<td> </td>
<td>1866</td>
<td>수원</td>
<td colspan="2"> </td>
</tr>
<tr>
<td>오인악</td>
<td>수원 걸매</td>
<td> </td>
<td>1868. 6(18세)</td>
<td>수원</td>
<td colspan="2"> </td>
</tr>
<tr>
<td>장원심</td>
<td>수원 걸매</td>
<td>아산 북룡골</td>
<td>1868</td>
<td>수원</td>
<td colspan="2">장팔보의 부친</td>
</tr>
<tr>
<td>장팔보</td>
<td>수원 걸매</td>
<td>아산 북룡골</td>
<td>1868(18세)</td>
<td>수원</td>
<td colspan="2">장원심의 아들</td>
</tr>
<tr>
<td>김 필립보</td>
<td>면천 중방</td>
<td>수원 걸매

신창 남방재

홍주 신리</td>
<td>1868. 8. 3(57세)

* 혹은 1868 7. (50세)</td>
<td>남양</td>
<td colspan="2">하느님의 종

회장, 복사, 중인

박 마리아의 남편</td>
</tr>
<tr>
<td>박 마리아</td>
<td>면천 중방</td>
<td>수원 걸매

신창 남방재

홍주 신리</td>
<td>1868. 8. 3

57세 혹은 59세</td>
<td>남양</td>
<td colspan="2">하느님의 종

김 필립보의 아내</td>
</tr>
<tr>
<td>김홍서

토마스</td>
<td> </td>
<td>수원 걸매</td>
<td>1868. 8

(약 38세)</td>
<td>남양</td>
<td colspan="2"> </td>
</tr>
<tr>
<td>이학습</td>
<td>수원 미리내</td>
<td>수원 걸매</td>
<td>1867. 9

(약 42세)</td>
<td>수원</td>
<td colspan="2"> </td>
</tr>
<tr>
<td>최

사도요한</td>
<td>직산

불그머리</td>
<td>수원 걸매</td>
<td>1869. 8. 25

(45세)</td>
<td colspan="2">수원</td>
<td> </td>
</tr>
<tr>
<td>김장복

짐다리</td>
<td> </td>
<td>수원 밀두리</td>
<td>1867. 1월경

(28세)</td>
<td colspan="2">서울</td>
<td>김씨 부인의 남편</td>
</tr>
<tr>
<td>김씨 부인</td>
<td> </td>
<td>수원 밀두리</td>
<td>1867~1868</td>
<td colspan="2">수원</td>
<td>김장복의 아내</td>
</tr>
<tr>
<td>김지득</td>
<td>수원 새원여(밀두리)</td>
<td> </td>
<td>1867.가을

(약47세)</td>
<td colspan="2">수원</td>
<td> </td>
</tr>
<tr>
<td>김 바오로</td>
<td>홍주</td>
<td>수원 밀두리</td>
<td>미상(52세)</td>
<td colspan="2">수원</td>
<td> </td>
</tr>
<tr>
<td>지 글라라</td>
<td>아산 구말리</td>
<td>아산 구말리

공주 소랑리</td>
<td>1867(58세)

*혹 1868,1877(68세)</td>
<td colspan="2">공주</td>
<td> </td>
</tr>
<tr>
<td>이 요한</td>
<td>면천 가새울</td>
<td rowspan="3">목천 서들골

경기 손골

용인 남성골

아산 쇠재</td>
<td>1871. 3. 19</td>
<td colspan="2">서울</td>
<td>이 베드로의 부친

이 프란치스코 조부</td>
</tr>
<tr>
<td>이 베드로</td>
<td>면천 가새울</td>
<td>1871. 3. 19</td>
<td colspan="2">서울</td>
<td>이 요한의 아들

이 프란치스코 부친</td>
</tr>
<tr>
<td>이

프란치스코</td>
<td>면천 가새울</td>
<td>1871. 3. 19</td>
<td colspan="2">서울</td>
<td> </td>
</tr>
<tr>
<td>장 요한</td>
<td> </td>
<td>아산 등골</td>
<td>미상</td>
<td colspan="2">서울</td>
<td>장주기(요셉)

성인의 재당질</td>
</tr>
<tr>
<td>함선일

요한</td>
<td>아산 뒷내</td>
<td>공주 국실</td>
<td>1867.4.9.(45세)</td>
<td colspan="2">공주</td>
<td>함 베드로의 부친</td>
</tr>
<tr>
<td>함 베드로</td>
<td>아산 뒷내</td>
<td>공주 국실</td>
<td>1867.4.9.(20여 세)</td>
<td colspan="2">공주</td>
<td>함선일(요한)의

아들</td>
</tr>
<tr>
<td>유만여

요셉</td>
<td>안양

수리산</td>
<td>아산 산소말

(현 아산 산정리)</td>
<td>1879. 8월경(28세)</td>
<td colspan="2">서울</td>
<td>배론 신학생

유 안드레아의

동생</td>
</tr>
</tbody>
</table>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아산 걸매리도 박해의 칼날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박의서(사바) 회장의 아들 박홍갑은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자수하여 서울에서 참수로 순교했다. 순교에 대한 열의가 스스로 순교의 길을 향해 나아가게 만들었던 것이다. 순교에 대한 열의는 기도와 영적 체험에서 나오고, 부모와 가정의 충실한 신앙에서 자라나게 된다.

 

수원 박의서(사바)·원서(마르코)·익서는 3형제이다. (박)의서는 본래 수계가 착실하여 회장으로 생활하면서 동네 교우에게 이익을 많이 받게 하였다. (박)익서도 좋은 사람으로 지냈다. (박)원서(1817년생)는 본래 태중 교우로 마음이 우람하여 수계를 잘못하고 노름도 약간 하고 서털구털 지냈기 때문에 그 형이 항상 걱정으로 살았다.

 

위의 내용에 따른다면, 걸매 밀양박씨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한 것은 적어도 박원서가 태어난 해 즉 1817년 이전이었다. 이 시기는 아산만 방조제를 완성한 그의 조부 박종학(1751~1836년)을 비롯하여 백부 장환(璋換), 부친 상환(常換), 계부 동환(東換) 3형제가 생존해 있던 시기였으므로, 밀양 박씨 집안은 박종학 생존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걸매리의 밀양 박씨 집안은 1784~1785년 무렵 이존창 루도비코가 내포에 천주교를 전파하면서부터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 신앙이 걸매리를 넘어 아산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1) </b><b>하느님의 종 박의서</b><b>(</b><b>사바</b><b>) </b><b>회장</b>

1867년에 수원 걸매출신의 박의서(사바) 회장과 일가 친척들이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다.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예산 여사울로 피신 하였지만 체포되었다. 박의서 사바회장, 동생 박원서(마르코)와 그의 아내 이 마리아, 동생 박의서와 사촌 박인서 등 5명이 체포되었다.

① 일기, 387번

회장. (박)의서는 3형제 중 장남이다. 두 아우와 함께 유다스 김영전의 고발로 잡혀 수원에서 치명하니, 나이 62세요, 때는 정묘(1867년) 3월이었다.

➁ 사적, 11-50~51

수원. 박의서·원서·익서니 3형제이다. (박)의서는 본래 수계가 착실하여 회장으로 생활하면서 동네 교우에게 이익을 많이 받게 하였다. (박)익서도 좋은 사람으로 지냈다. (박)원서는 본래 태중 교우로 마음이 우람하여 수계를 잘못하고 노름도 약간 하고 서털구털(말이나 행동이 침착하지 못하고 서투른 모양) 지냈기 때문에 그 형이 항상 걱정으로 살았다. 병인 풍파를 당하여 3형제가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면서 (박)원서가 말하되 “내가 평생에 천주를 공경함이 진실하지 못하였는데,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다” 하며, 즐겁게 장차()에게 말하기를 “나를 이번에 올라가면 졸연치 말고 바로 죽여주면 우리 주모()께로 가서 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형님과 아우를 보고 권면하거늘, (박)의서는 그 아우가 그 전에 한 일들을 생각하고 마음에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면서 자기 마음에는 입을 열고(배교한다 말하고) 살 생각이 있더니, 동생의 모양을 보고 마음을 깨달아 자기도 죽기로 작정하고 아우를 도리의 말로 풀어 이르기를 “동생들어보소. 우리 3형제가 함께 올라가 위주치명하자” 하였다.

조금도 변개함이 없이 3형제가 수원으로 올라가니, 영장이 문 왈 “네가 천주학을 하느냐?” “과연 하나이다.” 그때는 ‘한다’ 하면 문초 없이 내어 죽이고, ‘안 한다’ 하면 살릴 때다. 두말 없이 내어 바로 조사 치명하니, 나이는 (박)의서가 60이요, (박)원서는 51세요, (박)익서는 45세였다. 때는 강생 후 1866년(1867년의 잘못) 경묘(정묘의 잘못) 3월 이었다. 이들 3형제 잡아죽이기는 유다스 김영진이가 잡아죽였다.

 

➂ 사적, 24-12

박 회장 의서 사바와 동생 (박원서) 마르코와 (박)익서와 마르코의 아내 이 마리아 네 사람은 본래 수원 걸매 사람으로, 군난을 피하여 예산 여사울로 가서 살더니, 정묘 4월에 수원으로 서 동일 치명하니, 때는 정묘 8월 초8일이요, 시체를 거둔 이는 지금 함열 용왕동 사는 박 회장 바오로로, (박의서) 사바의 당질이었다.

④ 증언록, 163번 : 사적 24-12와 동일

 

<b>2) </b><b>박홍갑</b>

① 사적, 24-12

박홍갑이는 본시 수원 걸매 사람으로 병인년(1866년)에 자현(자수)하여 본을 포교에게 잡혀 서울로 가 참수 치명하니, 나이는 18세요. 서울 87장(일기 387번을 말함)에 기한 박의서 사바의 아들이다. 치명한 사정을 자세히 들은 이는 함열 용왕동 박 회장 바오로[홍갑의 재종]이다. (치명)일기에 불기

② 증언록, 163번: 사적 24-12와 동일

 

<b>3) </b><b>하느님의 종 박원서</b><b>(</b><b>마르코</b><b>)</b>

① 일기, 388번

(박)의서의 아우이다. 형제가 함께 잡혀 (1867년 3월에) 치명하니, 나이 51세였다

② 사적, 1-34

죄인 고산 한대골 김 요한이가. 『치명일기』 388번에 있는 박원서, 수원 포교에게 잡혀 갈 때 죄인이 친히 보았고, 수원으로 가서 치명함은 그 본동 외교인 이중헌에게 들었습니다. 이중헌은 죽은 사람.

③ 사적, 11-50~51: 박의서(사바)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③ 사적, 24-12: 박의서(사바)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⑤ 증언록, 27번: 사적 1-34와 동일

⑤ 증언록, 163번 : 사적 24-12와 동일

 

<b>4) </b><b>이 마리아</b>

① 사적, 24-12: 박의서(사바)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② 증언록, 163번: 사적 24-12와 동일

 

<b>5) </b><b>하느님의 종 박익서</b>

① 일기, 39번

(박)의서의 아우이다. 두 형과 함께 잡혀 (1867년 3월에) 치명하니, 나이 45세였다.

② 사적, 11-50~51: 박의서(사바)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③ 사적, 24-12: 박의서(사바)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① 증언록, 163번: 사적 24-12와 동일

 

<b>6) </b><b>박인서</b>

①사적, 24-12~13

박인서는 본시 수원 새터 사람으로 영세 예비를 다하였더니, 정묘(1867년) 3월에 저희 사촌 (박)의서 사바 3형제와 한가지로(함께) 본읍 포교에게 잡혀 옥중에서 사바에게 세례를 받고 동일(1867년 3월) 치명하니, 나이 대개 38세라. 지금 함열 용왕동 사는 박 회장 바오로가 그 시체를 거두었더라 수원 38기

② 증언록, 163번: 사적 24-12~13과 동일

 

<b>7) </b><b>조 모니카</b>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대 서천 산막골(현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있던 페롱 신부, 목천 소학골(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있던 칼래(N. A. Calais,) 신부, 공주 진밭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있던 리델 신부 등 3명은 다행히 박해를 피해 살아남아 중국으로 피신하였다. 프랑스 선교사 3명이 중국으로 피신할 때 수원 걸매 출신의 신자인 박덕여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 피신을 돕고, 이후 두 차례나 중국을 왕래하게 된다. 박덕여는 걸매 출신의 순교자 조 모니카의 남편으로, 칼래 신부의 사목 서한도 맡아 놓고 있었고, 리델 신부의 사목 비용도 맡아 놓고 있었다. 조 모니카가 1868년에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하였고, 아들 박 알렉산데르도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① 사적, 24-13

조 모니카는 수원 걸매서 살다가 덕산 섬말로 이사하였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고표에게 잡혀 옥중에서 이점(즉 이질)을 얻어 병들어 죽으니, 나이는 50여세더라. 위에 있는 박(의서) 사바의 종수(사촌 형제의 아내)요, 지금 함열 용왕동 사는 박 도마(토마스)의 모친이다. (치명)일기에 불기.

② 증언록, 163번 : 사적 24-13과 동일

 

<b>8) </b><b>박 알렉산데르</b>

① 사적, 24-14

박 아륵산드리오(알레산데르)는 위에 있는 조 모니카의 장자요, 지금 함열 용왕동 사는 박 도마의 형이다. 수원 걸매서 살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서 서울로 가 치명하니, 나이는 31세더라.

② 증언록, 163번: 사적 24-14와 동일

 

<b>9) </b><b>박제환</b>

① 사적, 24-13~14

박제환이는 본시 수원 길매 사람으로 처가에 갔다가 정묘년(1867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 서울로 가 치명하니, 나이 대개 18세더라. 지금 함열 용왕동 사는 박 회장 바오로의 당질이더라. (치명)일기에 불기.

② 증언록, 163번: 사적 24-13~14와 동일

 

<b>10) </b><b>이씨 부인</b>

① 사적, 24-13

박(의서) 시바의 형수(제수의 잘못인 듯) 이씨 (부인)은 본시 서울 사람으로 수원 걸매로 시집와 살더니, 무진년(1868년)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 본읍으로 가 옥중에서 병들어 죽으니, 나이는 대개 38세라. 지금 함열 용왕동 박 회장 바오로의 숙모더라.

(치명)일기에 불기.

 

<b>11) </b><b>김중백</b>

① 일기, 364번

본디 수원 걸매 살더니, 병인년(1866년) 10월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니라.

② 사적, 60-60

김중백이는 본디 수원 산도면(삼도면의 잘못) 걸매 사람이요 구교우 자손이라. 병인년 10월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간 후 추열 사정과 어떻게 치명한지는 모르나, 시체는 그 사위가 찾아 장사하니라. 이 말은 지금 청주 금관이 사는 오 이시도로 기록하니라.

 

<b>12) </b><b>오인악</b>

① 사적, 24-14~15

오인악이는 본시 수원 걸매 태생으로 무진(1868년) 6월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 본읍으로 가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18세더라. 잡혀갈 때 그 모친이 한가지로 갔다가 (풀려나서) 왔는데, 지금 함열 용왕동 사는 박 회장 바오로가 자세히 들었더라. (치명)일기에 불기.

 

<b>13) </b><b>장원심</b>

① 사적, 24-14

장원심과 장팔보 부자는 본시 신문 교우로 수원 걸매서 병인(1866년) 군난을 피하여 아산 북룡골(미상)로 이사하여 살더니 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부자 한가지로 잡혀 수원으로 가 치명하니, 잡혀갈 때 본 이는 지금 함열 용왕동 사는 박 회장 바오로더라. (치명)일기에 불기.

② 증언록, 163번: 사적 24-14와 동일

 

<b>14) </b><b>장팔보</b>

① 사적, 24-14 : 장원심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② 증언록, 163번: 사적 24-14와 동일

 

<b>15) </b><b>하느님의 종 김 필립보</b>

① 일기, 229번

김 필립보 회장, 면천 중방실 중인이다. 남양 포교에게 잡혀 서울(남양의 잘못인 듯)로 와 치명하니, 나이는 57세요, 때는 무진(1968년) 7월이더라.

② 일기, 418번

충청도 내포 사람이니, 무진년에 남양 포교에게 그 아내와 한가지로 잡혀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50세더라.

③ 사적, 1-27~28

죄인 은진 강경 공소 공소 김 안드레아는 죄인의 조부모, 치명일기 418에 김 필립보, 419에 박 마리아 내외는 충청도 면천 중방 사람으로 수원 걸매로 이사하여 병인 풍파에 신창 남방재로 피신하였더니, 무진(1868년) 7월 16일에 홍주 신리 사는 최중오 는 자기 사위러니, 내외 한가지로 사위 집에 갔다가 5일 후께 동시에 일어나 신공하더니, 마침 찾는 소리 있거늘 필립보 출사 온 줄을 이미 알았으나 안연히 신공을 마친 후 나가니, 출사들이 춤추며 하는 말이 '천주학꾼 잡기 이렇게 쉽다" 하며 달리 들어 ‘재물 내놓고 사람을 대라'고 몹시 치니, 다만 '애고' 소리 높이 하고 다른 말 아니하니, 그 날에 7차로 이 모양 형벌하여 남양으로 갈 때, 그 아내 박 마리아는 그 장부와 포교들이 오지 말라고 하여도 죽기를 도모하여 기어이 따라가서 8월 초3일에 한 가지로 치명하니, 나이는 내외 동갑으로 그때 57세라.

(김홍서) 도마(토마스)는 필립보와 같이 처명하고, 도마의 아내는 살아 나와서 이 위의 사정과 시체 감장(장사를 치름)한 일을 자세히 말하여 전하였고, 잡힐 때 일은 죄인(즉 증언자 김 안드레아)이 친히 눈으로 보았느니라.

④ 사적, 2-33~34

필립보는 본디 충청도 내포 사람이다. 그 조모께 성교 말씀을 듣고 수계할 마음이나 그 부친께 눌려 뜻대로 배우지 못하더니, 후에 그 부친과 한가지로 성교 도리를 배워 영세하고, 열심히 수계하며 자녀를 가르쳐 본분을 지키며, 이웃 외인을 권하여 혹 성교에 돌아오게 하며, 동네 주간함으로 신부 임하시면 모든 일을 돌보며, 교우를 타당히 성사 받기를 배치하여 여러 해를 지내더니, 병인년 군난에 수원서 살 때 동네 교우 많이 잡혔으되 피신하였더니, 그 후 무진년(1868년)에 남양 포교에게 잡혀 혹형하며 당과 그 아들을 대라고 하나 '아는 이는 이미 잡혀 죽고 다시 아는 자 없다' 하며 그 내외를 박 마리아와 한가지로 남양으로 잡아가 옥에 있은 지 한 달 후 내외 다 교하여 죽이니, 나이 50세요, 그 아내 박 마리아는 자원하여 가서 장부와 한가지로 가 죽으니, 나이 50세오.

증인은 그 아들 강경이 사는 김 시리시오(세르지오 혹은 치릴로인 듯)하니, 나이 54세라.

⑤ 사적, 11-48~50

신창 김 필립보는 본디 면천 중방실 중인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순량하고 열심 수계하고 지내다 중년에 노 신부(즉 모방 신부)의 복사를 몇 해를 하고 살다 가는 데마다 회장으로 지명이 되더니, 병인 군난을 당하여 처음에는 예수의 표양으로 피하였다가 군난이 조금 가끔 하므로 돌아와 집에 있으니, 유다스 최중오는 김 필립보의 사위라 최중오 말하되 “장인이 집에 계시다가는 필경 잡힐 터이니 내 집으로 가자”하거늘, 마음에 좋지는 못하되 생명을 살릴 마음으로 따라가 사흘이 못되어 남양 장채(즉 장차) 들어와 잡으며 말하되 “영감이 천주학의 괴수란 말을 우리들이 들었으니, 지금도 천주학을 하느냐?” (하니) “지금이라고 어찌 아니하리오.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고 사후 상벌하실 주를 어찌 범연이 공경할 일이 아니라 힘을 다하여 공경함이 마땅하니라” (대답하였다) 장채 “당과 팩을 대라” 하거늘 “책은 첫 번 군난에 다 소화하고 나 혼자 다니며 얻어먹고 사노라” (대답하였다) 두말없이 최중(오)의 세간을 전백어치나 경몰하여 가지고 필립보를 수갑하여 가지고 서울로 올라가면서 (필립보는) 주막에서 도리의 말을 많이 하고 올라가 치명하니, 년은 57세요, 때는 천주 강생 후 일천팔백육십년(1868년의 잘못) 무진 7월이더라.

⑥ 증언록, 21번 : 사적 1-27~28과 동일

⑦ 증언록, 120번: 사적 2-33~34와 동일

 

<b>16) </b><b>하느님의 종 박 마리아</b>

① 일기, 419번

그 장부(김 필립보)와 한가지로 잡혀 치명하니라.

② 사적, 1-27~28 : 김 필립보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③ 사적, 2-33~34: 김 필립보의 순교 행적과 동일

 

<b>17) </b><b>김홍서</b><b>(</b><b>토마스</b><b>)</b>

① 사적, 1-27~28: 김 필립보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② 사적, 24-16

김홍서는 본디 수원 걸매 사람으로, 남양 포교에게 잡혀 남양으로 가 [남양 418에 있는] 김 필립보와 한가지로 치명하니, 나이 대개 38세라. 그 치명한 사정을 들은 이는 지금 함열 용왕동 사는 박 도마더라. (치명)일기에 불기.

③ 증언록, 21번: 사적 1-27~28과 동일

④ 증언록, 163번: 사적 24-16과 동일

 

<b>18) </b><b>이학습</b>

① 사적, 24-11~12

이학습이는 수원 미리내서 살다가 수원 걸매로 이사하였더니, 정묘(1867년) 9월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 대개 42세라. 지금 함열 용왕동 사는 박 회장 바오로가 그 치명한 사정을 자세히 들었으나, 누구에게 들음은 기억하지 못하더라. (치명)일기에 불기.

② 증언록, 163번 : 사적 24-11~12와 동일

 

<b>19) </b><b>최 사도 요한</b>

① 일기, 365번

최 요왕. 본디 직산 사람으로서 수원 걸매서 살더니, 본읍 포교에게 잡혀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45세요 때는 기사(1869년) 8월 25일이더라.

② 사적, 1-23

최 요안은 본디 충청도 직산 불그머리 사람이라. 을축년(1865년)에 문교하여 열심히 수계하며 수원 걸매서 살더니, 병인년 군난을 당하여 포교들에게 잡혀 '당을 대라' 하며 형벌이 난타하매 혀를 깨물고 남을 대지 아니하고 수원 옥에 10삭을 갇혀 있더니. 여러 교우와 한가지로 기사년 8월 25일에 교하여 죽이니, 나이는 45세요. 증인은 평택 신흥리 사는 이 마리아니 나이 60세라.

③ 증언록, 26번: 사적 1-23과 동일

 

<b>20) </b><b>김장복</b><b>(</b><b>짐다</b><b></b><b>)</b>

① 사적, 24-16-17

김장복이는 수원 밀머리서 살더니 정묘(1867년, 1866년의 잘못) 12월에 아내 김씨 와 한가지로 본읍 포교에게 잡혔는데, 김씨는 수원으로 가 치명하고, 장복이는 서울로 가 군문효수하여 치명하니. [홍주 622에 있는] 김 바오로(김 비오의 잘못) 의 질녀서라. 그 치명한 사정을 들은 이는 지금 함열 용광동 사는 박 도마[김장복의 외사촌]더라. (치명)일기에 불기.

② 증언록 163번: 사적 24-16~17과 동일

③ 우포도청등록, 1867년 1월 29일

죄인 김장복. 사호(즉 세례명)는 짐다 나이 28세

아뢰옵니다.

"저는 수원 가사면 삼도 밀머리에서 사는데 특별히 일정한 생업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건대, 계해년(1863년) 11월에 이웃에 사는 외삼촌 박덕여에게 성교를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갑자년(1864년) 정원에 서양인 안 주교(즉 다블뤼 주교) 외삼촌댁에서 만나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지었습니다. 을축년(1865년)에 서양인 권 신부(즉 페롱 신부)를 외삼촌댁에서 처음 만났지만 곧 헤어졌고, 같은 해 7월에 배포했습니다. 외삼촌 박덕여는 작년(1866년) 8월에 아내를 데리고 도망쳐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제가 범한 죄가 비록 이미 잠깐 배웠다가 곧 배교했다는 것일지라도 어찌 해당 법조문을 면하겠습니까? 오직 죽음뿐입니다."

 

<b>21) </b><b>김씨 부인</b>

① 사적, 24-16~17 김장복(짐다래)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② 증언록, 163번 : 사적 24-16~17과 동일

 

<b>22) </b><b>김지득</b>

① 사적, 24-11

김지득이는 본시 수원 세원여 사람으로 정묘년(1867년) 가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 대개 47세라. 그때 옥중에 한가지로 갇혔다가 목도한 이는 지금 용안 동지뫼 사는 박 안드레아더라. (치명)일기에 불기.

② 증언옥, 163번 : 사적 24-11과 동일

 

<b>23) </b><b>김 바오로</b>

① 일기, 379번

본디 홍주 사람으로서 수원 밀머리에 가 살더니, 수원 포교에게 잡혀 교하여 치명하니라.

② 사적, 23-31

바오로는 본디 충청도 홍주 사람이다. 소년에 문교하여 일가를 다 버리고 교우 동네에 가 살며 착실히 수계하나, 그 삼촌이 외인이라 그 조카의 성교함을 엄히 금하여 형법을 하며 금하되 듣지 아니하고 열심 수계하더니, 후에 수원 밀머리서 살 때 수원 포교에게 잡혀갈 때 어린 자식 하나 있어 육정에 거리낌으로 데려 오라 하여 마지막 보고, 아내에게 훈계하되 "잘 가르쳐 이후에 내 뒤를 따라 천국에 오름을 힘쓰라" 하고, 가족과 자식을 이별하고 수원으로 간 지 몇 날 후에 교하여 죽이니, 나이 52세오. 증인은 그 사위 온양 갈산 사는 이 도마니, 나이 47세더라.

③ 증언록, 157번: 명단만 수록되어 있음

 

<b>24) </b><b>지 글라라</b>

① 일기, 438번

본래 아산 구만이 사람으로, 공주 소랑리로 이사하여 살 때 본읍 포교에게 잡혀 여러 교우와 함께 치명하니, 나이는 58세요, 때는 정묘년(1867년)이더라.

② 사적, 2-13~14

지 글라라는 본디 충청 아산 사람이라. 본디 외교인으로서 출가한 후 정부와 함께 문교하여 성교 경문을 열심으로 배워 확실히 수계하더니, 차차 오래되매 더욱 열심으로 염경 기구하여 냉담하는 교우를 권면하여 수계를 잘 지키게 하며, 외교인도 권하여 성교에 들어오게 하며, 위험한 외인 영해에게 대세를 줌은 불가승수요, 그 열애함이 외모에 나타나 모두 일컫더니, 병인년 군난은 피하여 지낸 후 공주 산곡에 들어가 그 딸과 함께 농사하고 있을 적에 공주 본읍 포교가 홀연히 들어와 잡고 '네 천주학을 하느냐?" 하니, 쾌히 말하되 "내 과연 천주 성교를 봉행하는 사람이라 하니, 바로 공주로 가 영장 문목에도 전과 같이 말하매, "네 당을 대라" 하며 형벌 1차 하되 한 사람도 대지 아니하니, 하옥하여 있은 지 오래지 아니하여 정축년 (1877년, 정묘년의 잘못인 듯)에 다른 교우가 또 많이 잡혀 한가지로 있어 한 달 못되 어 교하여 죽이니, 나이 68세요. 증인은 홍주 새터 사는 그 딸 유 데레사니, 나이 43세라.

③ 사적, 6-67

지 글라라는 본디 아산 구만이 사람으로 문교하여 홍주 유 서방에게 혼배하여 공주 소랭이로 이사하여 살 때, 동네 교우 다 도망하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아 피하지 아니하더니, 무진(1868년) 정월 13일에 공주 포채에게 잡히어 즉시 '천주 성교 하노라' 하고, 형벌 없이 관가에 들어간 후 다른 사정은 알지 못하나 치명은 잘 하였다 하더라.

이 말은 청주 만월문이 김 회장 베드로에게 들었노라.

④ 증언록, 120번 : 사적 2-13~14와 동일

 

<b>25) </b><b>이요한</b>

① 일기, 164번

면천 가새울 사람으로서 기해년에 전라도로 피신하고 이미 아산 일북면 쇠재로 도망하였더니, 신미년(1871년)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 서울로 올라와 그 아들과 손자 함께 상대하여 좌포청에서 치사하니 때는 신미 3월 19일이러라.

② 사적, 1-46~48

이 요한,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3대가 경기 손골에서 병인(1866년) 첫 군난에 쫓기어 용인 남성골로 내려와, 베드로가 용인 포졸에게 9인이 함께 잡혀 일곱 사람이 배교하고 다 나오고 베드로하고 다른 사람하고 둘만 갇혔더라. 그 포교하는 말이 “다 누구냐?” 하되, 베드로 말이 “다 내 식구라” 하니, 그 고교 말이 “지금 영은 엄하나, 그럴 수 없으니 하나만 가자”하니, 베드로가 “가자”하였다. 베드로의 부친 요한의 말이 “하나만 갈 테면 내가 가겠다”고 부자 다투니, 그 포교 익히 생각하다가 다 놓고 간 후에 충청도 아산 일북면 쇠재 가서 살았다.

경오(1870년) 2월 23일 야경에 서울 좌변(즉 좌포도청) 포교와 본골 장교하고 와서 잡으며 묻는 말이 "성교하느냐?" 한즉, “물을 것 없다. 성교 아니하면 내가 너에게 잡힐 것 없다”하고 그 본읍에 들어가 하루 묵고, 본골 장교하고 요한·베드로·프란치스코 3대가 함께 서울 좌포청 으로 들어가서 문목할 때 대답이 한결같다 하더라.

그 때 본 사람은 김 서방인데 자 치서라. 살기는 전라도 진안 턱골이요, 그 사람이 잡힐 때는 충청도 신창 남방재 살고, 또 한 사람은 그 때 천안 송산 사는 정서방이라. 그 사람의 자는 모르고, 그 사람 부친의 자는 관지라. 그 군난 후에 살기는 안성 청룡 가련이 부근 점터에 가서 산다 하더라. 베드로 아들 형제 요셉·야고보는 강원도 원주 부흥골 산다.

본 고향은 충성도 면천 가재울. 『치명일기』 책에 수(즉 번호)가 이 요한 164, 자 베드로 165, 손자 방지거 166.

③ 사적, 23-182~188

이 요한이라 하는 이의 아들의 본명은 베드로요. 손자의 본명은 프란치스코라, 본디 충청도 면천 가새울에서 나서 자랐으며, 양반의 후예로 구교 집 자손이라. 본성이 강직하여 고향에 있으면 수계하기 조당된다 하고 목천 성가산(즉 성거산) 서들골로 이사하여 와 살았다. 신분을 감추고 중인 행세를 하자, 모든 교우들이 말하되 “어찌 중인 행세하느냐?한 즉 대답하되 ”만일 양반 행세를 하면 내게도 해로울 뿐 아니라 이후 자손에게도 요긴하지 아니하겠기로 그리하노라"하고 이 모양으로 10여년을 지냈다.

기해(1839년) 풍파 때에 좋은 표양으로 열심 수계할 뿐 외에 또한 회장 소임이라 각 처의 포졸이 지나가며 지팡이로 덤불을 두드리면서도 모르고 지나갔다. 그 후에도 극히 잡으려 하니 그곳에서 견딜 수 없어 전라도로 피신하였더니 상처하고 자녀 남매를 데리고 도로 올라오며 좌우 친구가 면환(아내를 얻어 홀아비의 처지를 면함)하기를 권하였다. 그러자 하는 말이 '자녀를 다 키운 후에나 어찌할지 모르겠다" 하고 미루다가 자녀를 성취한 후에도 환부로 지내더라.

병인 대란을 당하여 이리저리 지나다가 정묘 10월에 아들 둘까지 식구 다섯을 데리고 산곡에 숨었더니 포졸이 좌우로 옹위하고 오거늘 다시 피할 법이 없는지라. 안연히 앉아 보매 장교 중 수두와 극친한 지라. 묻는 말이 “이 다 누구이뇨?” 하니 둘째 아들이 대답하되 “저댁은 노생원님이요, 그 다른 사람 둘은 나의 아들 형제라" 하니 도수자 하는 말이 "만일 다른 사람 같으면 모두 잡아갈 것이로되 이왕 정친한 터에 차마 할 바 아니로다. 모두 잡아가게 되면 다 죽을 것이니 이 일을 어찌하리오? 위의 영이 지엄치 아니하면 그저 가겠으나, 할 수 없이 한 명만 갑시다” 하였다. 아들 형제 일시에 답하되 “그리하라” 한즉 요한이 먼저 말하되 “그러면 내가 가리라” 하니, 아들 베드로가 말하길 “내가 가는 것이 마땅하다”하고 부자 정선하므로 포졸이 보다가 하는 말이 “이 생원댁네는 가면 단단히 죽고 아니 가면 죽지 안리할 것이오, 또한 댁을 잡지 아니하여도 우리는 죽지 아니할 것이니 그냥 가자”하고 당부하되, “이후에 만일 댁 일로 우리가 죽을 터이면 댁에서 오시오” 하였다. 아래 표졸이 "여러 해 못할 일이라" 하며 수두가 가로되 “이 양반은 결단코 그렇지 아니할 것이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고 부탁하되, "이 곳에 있다가는 잡힐 것이니 바삐 어디로 가시오." 하고 갔다.

수개월 후에 충청도 아산 일북면 소재(즉 쇠재) 살더니 신미년 2월 24일 삼경에 본관 포졸에게 요한과 베드로와 프란치스코 3대 일시에 잡히며 모두 탄평한 마음이라. 포졸이 묻되 "천주학 하느냐?" 하자, "아니하면 어찌 너희에게 잡혔으리오?" 하고 본관에 갔다가 서울로 가는 길에 본집에 돌아와 점심을 시킬 때 비록 내 집이나 방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 앉아 있었다. 프란치스코의 어린 아들이 나오며, 요한이 안고 눈물을 흘리거늘 프란치스코가 여쭙되 "조부께서 어찌 이런 대사를 당하여 경천한 육정을 생각하시나이까?" 하고 아내를 불러 바삐 제 아이를 데려가라 하고 3대가 같이 본관으로 갔다. 그 아내 따라가 같이 치명하고자 하거늘 재삼 당부하되 "아무리 가도 잘 죽기를 예탁치 못할 것이니 부질없다" 하고 지성으로 만류하니 할 수 없이 아내는 도로 집으로 갔다.

법정에 가 문목할 때 본관이 묻되 "너희가 천주학을 하느냐?" 하자, 요한과 베드로 대답하되 "물을 것이 없나이다. 천주학을 아니할 양이면 어찌 이곳에 잡혀 왔사오리까?" 하니 다시는 묻지 아니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그 때 나이 21세요, 인물이 지묘한고로 관원이 죽이기를 아까워하며 프란치스코더러 묻는 말이 "네가 천주학을 한단 말이냐? 아니한다고 말 한 번만 하면 방송하겠다. 무슨 연고로 3대가 함께 죽으려 하느냐? 하였다. 대답하되 "아무리 3대라도 몫이 다 각각인 즉, 어찌 경천한 육신을 돌아 보아 지존지대한 대군대부를 배반하오리오?" 하자, 관원이 왈 "그놈 미친놈이니 말할 수 없다" 하였다. 또 좌수와 절친한 고로 가만히 기별하였으되 아무쪼록 한 말만 하면 죽기를 면할 법이 있다 하고 부탁이 자자하매 여일한 말이 "아무리 만 번을 죽는다 하기로 우리 대은주를 모른다 하리오?" 하였다. 모두 말하되 "아마 약을 많이 먹었나보다. 아무리 죽이기 아까우나 할 수 없다" 하고 그 이튿날 본관이 교졸로 압령하여 서울 좌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즉시 좌포도청에 간 즉, 군졸 의 말이 "애처롭다. 3대를 함몰할 수 없으니 프란치스코는 도로 돌아가 부모처자와 동생들을 데리고 잘 살라" 하니 대답하되, "내가 이런 좋은 때를 항상 바라고 기다렸거늘 어디로 가졌느냐?" 하니, 모두 말하길 "미쳤다" 하였다. 옥에 가두지 아니하고 놓아두니 밖으로 다니며 구경도 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3월 19일에 3대 일시에 치사함을 목도하고 말한 이는 그 때 한 목에 함께 갇혔다가 방송된 두 사람이니, 지금 살기는 전라도 진안 덕골(터골의 잘못) 김치서요. 경기 안성 가련리 사는 정 서방이니라. 프란치스코의 아들 바오로, 지금 살기는 원주 부흥골이니라.

④ 증언록, 34번: 사적 1-46~48과 동일

 

<b>26) </b><b>이 베드로</b>

① 일기, 165번

(이) 요한의 아들이니 부친과 함께 치명하니라.

② 사적, 1-46~48 : 이 요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③ 사적, 23-182~188 : 이 요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④ 증언록, 34번: 사적 1-46~48과 동일

 

<b>27) </b><b>이 프란치스코</b>

① 일기, 166번

(이) 요한의 손자니, 조부와 부친(이 베드로)과 함께 치명하니라.

② 사적, 1-46~48: 이 요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③ 사적, 23-182~188: 이 요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④ 증언록, 34번: 사직 1-46~48과 동일

 

<b>28) </b><b>장요한</b>

① 일기, 100번

고마 수영에서 치명하신 장(주기) 요셉 회장의 재당집이라. 아산서 잡혀 합 7인이 서울로 와서 한가지로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 50세더라

② 사적 23-8~9

요안은 장(주기) 요셉의 재당질이라. 부모의 교훈을 받아 열심히 수계하며, 고향을 떠나 여러 곳에 다니며 살더니, 후에 충청도 아산 등골(미상)서 포교에게 잡혀 다른 교우와 한가지로 일곱 사람이 서울 잡혀갈 때 동적강(한강의 동작나루인 듯)에서 동네 외인 친구를 만나 말하되, "나는 성교를 위하여 죽을 터이니 다시 집에 돌아가 내 식구와 동네 친구를 만날 수 없다" 하고 근심하는 얼굴 없이 서울로 가 여러 교우와 한 가지로 교하여 죽으니, 나이 50세요, 증인은 직산 돌실 사는 장 안드레아니 나이 65세라.

 

<b>29) </b><b>함선일</b><b>(</b><b>요한</b><b>)</b>

① 일기, 565번

함선일 요한은 공주 중인이다. 국실에 살 때 김 회장 화숙과 함께 (1867년 4월 9일에)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 45세였다.

② 사적 ,2-126~128

요한은 본래 공주 국실 살았습니다. 열심히 성교하다가 정묘(1867년) 4월 초에 본읍 장교들에게 잡힐 때, 같이 잡힌 교우 40여 명 중 홀로 바른 증거로 포교를 대하여 태연히 말을 잘하니, 포교들이 이 초원한 모양을 보고 여러 교우 중 괴수라 하였습니다. 십리 떨어진 부티 나룻가에서 그날 밤에 문초하고, 이튿날 공주로 들어가니 판관이 또 문초하여 성교하는 줄을 밝히 알고 하옥하였습니다.

모든 교우가 옥중에서 경문을 열심으로 낭송하니, 엄하게 죽일 때에 의연히 천주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어느덧 날이 오르니 기갈을 견디지 못한 몇몇 교우들이 실망하여 도망하려 하자, 수삼 차 권면하며 회개토록 하고, 또 옥졸을 불러 말하기를 "짚을 사주면 짚신을 삼아 팔아서 분식하자”고 하였습니다. 옥졸이 그리 하라 하고는 신을 팔아서 저희들이 먹고는, 옥중의 교우들에게는 돼지 밥통에 가서 구더기가 생긴 술지게미 찌꺼기를 한 동이 갖다 주었습니다.

교우들이 감심으로 먹고, 이나마 조금 더 주기를 원하니, 옥졸 말이 "이왕 죽을 죄인이니 돼지밥도 상관없다" 하였습니다. 수개월 후에 치명하였는데, 40여 명은 먼저 치명하고, 요한이 홀로 제일 끝에 가서 치명하니, 나이 45세였습니다. 이날 밤에 흰 무지개가 옥중의 시체를 에워싸고 찬란히 빛나자, 옥졸들이 보고 말하기를 "성교는 불가불 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의 아들인데, 처음 잡혔을 때 포졸들이 상관없다 하고 가라 하며, 부친이 또한 너는 돌아가 가사를 보살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원으로 같이 잡혀 치명하니, 나이는 20여 세였습니다.

중인은 국실 사는 구 서방과 공주 질울 사는 정 첨지인데, 함께 잡혔을 때 구 서방은 배교하고 죽는 데서 벗어나 요한의 전후 사적을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또 교우들 시체를 공주 정주뱅이 숲 가운데 있는 한 구덩이에 묻고 와서 자세히 전하고 살다가 1년 만에 다시 회두하여 무진년(1868년)에 다시 수원 가서 치명하였습니다. 정 첨지는 그때 옥졸이 범연히 하였으므로 죽는 형벌 가운데서 다행히 살아 나와 전하였으며, 요한 부자 사적을 자세히 아는데 그 또한 지금 죽었습니다.

“아산 뒷내에 거주하는 함 아우구스티노가 한 목격 증인의 증언에 의해 제출하는건. 아산 본당(즉 공세리 본당)의 드비즈(Emil Devise) 신부”

③ 사적, 14-4

병인(정묘의 잘못인 듯) 4월에 공주 국실 점에서 27인(혹은 29인)이 공주 포교 김명보·이치문에게 잡혔는데…… 공주 566번에 기록된 함선일 부자 등 도합 19명은 공주서 교하여 치명하였습니다.…… 본 이는 그때 함께 잡혀갔던 박중헌과 배군일로, 이들은 그 19명의 시체를 가져다가 한 구덩이에 장사지내고 본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함열 간은정 사는 김 회장 요한과 임피 창감 사는 이 회장 마르코가 그때 한 동네에 살았으므로 자세히 들었습니다.

④ 사적, 24-5

함선일은 공주 국실 점(즉 옹기점)에 살다가 병인년(정묘년의 잘못인 듯) 가을에 공주 포교에게 잡혀 진술하고 공주로 가 치명하니, 지금 임피 홍법리 사는 유 회장 베드로가 그때 함선일과 함께 잡혀 치명한 김 회장 화숙의 아들 김광삼에게 들었습니다.

④ 증언록, 130번: 사직 2-126~128과 동일

⑤ 증언록, 163번: 사적 14-4, 24-5와 동일

 

<b>30) </b><b>함 베드로</b>

① 사적, 2-126~128: 함선일(요한)의 행적과 동일

② 증언록, 130번: 사적 2-126~128과 동일

 

<b>31) </b><b>유만여</b><b>(</b><b>요셉</b><b>)</b>

① 일기, 353번

이 위(일기, 93번)에 있는 유 바오로(1866년 서울 양화진 순교자)의 둘째 아들이라. (안양 수리산을 떠나) 그 모친과 동생을 데리고 아산 땅에서 피난하다가 잡혀 옥중에서 한 구수 죄인의 인도함으로 월옥하여 나갔더니, 그 후에 포교에게 자헌하여 서울 옥에서 주려 죽으니, 나이는 28세요, 때는 기묘년(1879년)이더라.

② 사적, 1-111~112

유 요셉은 유 안드레아의 형(동생의 잘못)이라. 병인년 풍파 후로 수계를 못하고 지내나 항상 마음에는 원이러니 을해년(1875년)부터 수계하여 독실하더니, 동생 두 사람과 모친을 모시고 충청도 아산 산소말에 살더니, 기묘년(1879년) 6월 24일에 경포 5~6인이 내려와서 "네 천주학을 하느냐?" 답하되 "과인 하노라." 하고 주모경까지 외운 즉 또 "당을 대라" 한 즉 형벌에 견딜 길이 없어 헛말로 교우도 살지 아니하는 곳을 댄 즉 포교들이 그곳으로 간 즉 헛말인 고로 돌아와 아산 고을에 맡기고, 경포는 그 길로 올라가고 옥에 갇혔더니, 옥안에 구수 죄인이 칼을 벗기고 도주하라 한 즉 그 날 밤에 본집으로 돌아와 모친과 동생과 한가지로 수말을 하되 "내가 매에 견딜 길이 없어 헛말로 아무 곳을 가보라" 하였고, 지체하고 앉았으니 그 밤에 아산 관졸이 불시로 나와 찾을 때 요셉은 피하였더니, 그 모친과 아이와 계수와 3일을 차지(대신 별을 받는 사람)로 잡아갔더니, 요셉이 집으로 돌아온 즉 동중 사람 이 잡아놓고 관가에 기별하여 도로 관졸이 잡아 관가로 들어간 즉 모친과 합 3인은 놓고, (요셉은) 서울로 올려 포청에서 문목한 즉 "병인년 후로 수년을 못하다가 지금 수계한 지 몇 해라" 하였더니 옥중에서 죽으니, 나이는 28세라

③ 사적, 2-37~38

요셉은 유 바오로의 둘째 아들이라. 부모의 잘 교훈함을 받아 열심 수계하며, 그 본성이 순량함은 이웃 사람이 모두 일컫더니, 병인년 군난에 부친과 그 형은 다 치명하고, 동생과 모친을 데리고 향배 없이 시골로 내려가 아산 땅의 외인 동네에 붙어 여러 해를 지내더니 그 후 기묘년(1879녀녜에 경포에게 잡혀 “네 천주학을 하느냐?” 묻거늘 “내 과연 천주 성교 봉행하는 사람이다” 하니, 동네 모든 사람들이 “네 성교 아니하노라 한 말만 하면 우리가 빼어놓을 것이니 한 말만 하라” 하거늘 “내 이미 선대 적부터 성교를 봉행하고, 나도 만 번 죽어도 배교는 못하고 평생에 위주하여 죽기를 원하였다”하고 아산 본관에 가 옥에 갇혔더니, 관장이 왈 “너는 최 신부(즉 드게트 신부) 있는 데를 알 것이니 대라” 하며 혹형이 심하나 죽기로 담짐하고 “알지 못한다”하니 옥에 가두었더니, 그 때 옥에 구수 죄인이 있어 말하되 “내가 인도하여 줄 것이니 네 도망하라” 하니 구수의 말이 “내가 칼을 벗기고 나갈 길을 인도할 것이니 나가라” 하고 칼을 벗기고 옥 담 터진 데로 내보내거늘 생각건대 ‘주명이 혹 계신가’ 하여 나오매, 구수가 발을 옥 담 위에 버티어 주매 나왔더니, 후에 모친과 그 동생ㅇㄹ 잡고 ‘요셉을 찾아내라’ 하거늘 요셉이 그 미거한 동생이 잡히면 영육을 혹 그르칠까 하여 포교를 맞이하여 잡혀 동생에게 하직할 때 “나는 위주하여 죽겠으니 너는 모친을 좇아 봉양하고 잘 있으라” 하고 즐기는 낯으로 서울로 가 별로 형벌 없이 옥에 있더니, 그때 위의 영이 없는데 사사로이 유다스가 잡은 일이라, 포장이 홀로 처단할 길 없으매 두 달 후에 굶겨 죽이니, 나이 28세요, 증인은 그 모친 강경이 사는 전 마리아니, 나이 63세라.

④ 증언록, 93번: 사적 1-111~112와 동일

⑤ 증언록, 120번: 사직 2-37~38과 동일

⑥ 우포도청등록, 1879년 6월 5일

죄인 유만여. 사호는 요습, 나이 28세

아뢰옵니다.

"너는 이미 사학의 무리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어디에 살고 있으며,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구에게 배웠고, 그 사교의 근본 소굴은? 서양 종자는 몇 명이고, 교우는 누구인지 반드시 알지 못할 리가 없다. 이제 자세히 캐어묻는 마당에 전후의 사정을 감히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바로 고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저는 본래 남문(즉 남대문) 밖 자암 태생으로, 나이 11세 때 이미 사망한 저의 부친에게 성교를 배웠습니다. 외우는 경문(즉 기도문)은 천주경, 성모경, 12단, 십계 및 조만견(즉 조만과), 신덕송일 따름입니다. 을축년(1865년)에 저희 부친께서 저를 데리고 함께 남문 밖에 있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최가의 집으로 가서 서양인 장주교(즉 베르뇌 주교) 만나 뵙고 영세하고 세례명을 지었습니다. 그 후 1년도 안되어 또 장 주교께 고해했는데, 그 장 주교께서 사망했다는 것은 제 부친에게 들었습니다.

제 부친께서 사망한 뒤 살아갈 방법이 없어 이곳 저곳으로 떠도는 사이에 아산에 사는 교우 장윤원(안드레아)이 요청해 와서 과연 아산 일북면 산소리(즉 산소말)에 부쳐지내면서 농사를 짓고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제 사촌인 내포에 사는 (유)막현이 제 집에 와서 ‘함께 가서 최 신부(즉 뜨게트 신부)를 뵙자’는 뜻으로 간청했는데, 저는 마침 하던 일이 끝났지만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되어 전하는 말을 들으니 사촌 형수 김조이가 공주 진영에 체포되었다고 했으며, 사촌 막현은 실장사를 하면서 살았으므로 자주 방문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난(1879년) 윤3월 그믐에 제 사촌이 저에게 와서 전해 이르기를, "지난번에 내가 아는 최(즉 드게트 신부)·백(즉 블랑 신부) 두 신부의 서찰이 고산 다리실 마을의 송문재 집에 도착한 뒤에 들으니, 최 신부가 서울 포도청에 체포되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 백 신부는 끝까지 편지를 쓰지 않았으므로 회답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약간 사학을 배웠으며, 아산에 산 이후에는 과연 백 신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처럼 체포된 것은 저의 종수 김조이의 진술 때문인 듯합니다. 제 사촌 막현의 처가 이미 사학의 서찰을 가지고 백 신부에게 왕래한 흔적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 밖에는 비록 죽을지라도 달리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한편 병인박해 이후에는 아산 인근의 신창 지역에서도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우선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한 김 수산나, 고선양 부자와 며느리, 1867년 서울에서 순교한 박 필립보 회장 등은 신창 창말(현 아산시 신장면 대흥리) 출신이었다. 다음으로 앞에서 설명한 1866년의 전주 순교자 조화서·윤호 부자 성인을 비롯하여 1866년 서울에서 순교한 안정서(바오로)와 조 타대오 회장, 1867년 공주에서 순교한 원 시몬 회장, 1871년 서울에서 순교한 김순일(요한) 등은 신창 남방재 출신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1866년 홍주에서 순교한 김 하드리아노와 송춘일 등은 신창 용당리 출신이었다. 이들과 함께 교회 순교록에 신창 출신으로 나오는 순교자는 강 요한 회장, 김 베드로, 김 아가타, 박영도(필립보) 등 20여 명에 달한다.
<ol>
 	<li><b> </b><b>병인양요</b></li>
</ol>
1866년 2월, 베르뇌 주교님을 선두로 홍봉주·남종삼·김면호는 물론 정의배(丁義培)·전장운(全長雲)·최형(崔炯) 등 대표적 천주교 신자들과 다른 많은 신자들이 한양과 내포지역과 그 밖의 지역에서 잡혀 순교하셨다. 이때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도 체포되어 서울 새남터와 충청남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하셨다.

 

이렇게 박해가 치열해지자 피신해 있던 신부 리델(Ridel, 李福明)은 7월 조선을 탈출, 청나라의 톈진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Roze,P.G.)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이에 로즈는 10월에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무력시위를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다. 이 병인양요로 말미암아 흥선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천주교도를 통외초구(通外招寇)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양이(洋夷)의 발자국으로 더럽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무리의 피로 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내포의 해안지방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1866년 초에 대원군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프랑스 신부와 수많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였다. 이 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는 12명 중 9명이 체포되어 순교하셨다. 이때 리델(Ridel) 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해 주중 프랑스 함대사령관 로즈(Roze, P.G, 魯勢)에게 박해 소식을 알리면서 보복 원정을 촉구했다. 이에 로즈가 대함대를 이끌고 내침, 한불간의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었다. 강화부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 26일에 문수산성(文殊山城) 전투에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프랑스 공사 벨로네(Bellonett, H.D., 伯洛內)는 사전에 청국의 승인을 받고 조선이 병인박해를 단행하였으므로 ‘병인사옥의 공범자’라고 청국 정부를 규탄하였다. 조선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로즈 제독에게 응징 원정을 결행할 것을 명하였다. 프랑스군의 총포 화력을 당해낼 수 없어 강화도의 관리·군인·백성이 모두 피난했기 때문에 강화도는 프랑스군의 독무대가 되었다. 이것이 병인양요다.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1866년) 9월 11일 정묘 9번째 기사에는 병인양요 때의 상황이 잘 기록되어 있다.

 

<b>순무영</b><b>(</b><b>巡撫營</b><b>)</b><b>에서 서양선박 도주</b><b>(</b><b>都主</b><b>)</b><b>에게 보낸 격문</b>

총융청(總戎廳)에서, ‘북한산성(北漢山城)의 승군(僧軍)들을 여현(礪峴)의 양주 진영(楊州陣營)에 보내었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서양선박 도주(都主)에게 보낸 격문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국법(國法)을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한다. 하늘이 백성들을 세상에 내려 보냄에 이치로써 순(順)하게 하고, 나라의 봉강(封疆)을 나눔에 다스리어 지키게 하는 것이다. 순(順)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질면서 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수(守)라는 것은 무엇인가? 침범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거스르면 반드시 망하고 어기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며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 너그럽게 대해주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도(道)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너그럽게 대하여 이름도 알 수 없고, 도리(道里)도 알 수 없는 나라 사람들이 매번 우리나라 경내에 표류해오면, 수토지신(守土之臣)에게 명하여 영접하고 사정을 물어보면서 마치 오랜 우호관계를 수행하듯이 하였다. 굶주렸다고 하면 먹을 것을 주고, 춥다고 하면 옷을 주었고, 병들었다고 말하면 약을 지어서 치료해 주기도 하였으며, 돌아가겠다고 하면 식량까지 싸서 보내주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대대로 지켜오는 법으로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온 천하가 우리를 일컬어 ‘예의지국(禮義之國)’이라고 부르고 있다. 만약 우리 사람들을 인연(夤緣)하여 몰래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의 옷으로 바꿔입고 우리말을 배워 가지고 우리 백성과 나라를 속인다든지 우리의 예의와 풍속을 어지럽힌다면, 나라에 상법(常法)이 있는 만큼 발각되는 대로 반드시 죽인다. 이는 세상 모든 나라들의 한결같은 법인데 우리가 상법(常法)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서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성내는가?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 우리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지금 너희들이 이것을 트집 잡아 말하는 것은 이미 도리에 몹시 어긋나는 것이다. 일전에 너희 배가 우리 경강(京江)에 들어왔을 때는 배는 불과 2척이었고 사람도 1,000명이 못 되었으니 만약 도륙(屠戮)하고자 하였다면 어찌 방법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몰래 침입한 자들과는 구별되었으므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대해주는 의리에서 차마 병력을 가하여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경내를 지나며 소나 닭 같은 것을 요구하면 그때마다 주었다. 작은 배가 왕래할 때에 말로써 물으면 먹을 것은 받으면서 돌아가라는 말은 따르지 않았으니 너희들이 우리를 배반한 것이지 우리가 어찌 너희를 배반한 것인가?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고 갈수록 행패를 부려서 지금 우리 성부(城府)를 침범하고, 우리 백성들을 살해하고 재물과 가축을 약탈하는 행위가 한이 없으니 실로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고 나라 법을 어기는 자들로서 이보다 더 심한 자들은 없었다. 그러니 하늘이 이미 그들을 미워하고 사람들도 그들을 죽이려 하였다.

 

듣건대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전교(傳敎)를 행하려고 한다는데 이는 더욱 안 될 일이다. 수레와 서책이 같지 않으며 각기 숭상하는 것이 있으니 정사곡직(正邪曲直)에 대해서는 아예 거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학문을 숭상하고 너희는 너희의 학문을 행하는 것은 사람마다 각기 자기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어떻게 감히 남에게 자기 조상을 버리고 남의 조상을 조상으로 섬기라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만약 죽음을 면할 수 있다면 하늘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너희를 은(殷) 탕(湯) 임금이 갈백(葛伯)에게 하듯이 대해 주었는데, 너희는 우리를 험윤(玁狁)이 주(周) 나라 선왕(宣王)를 배반하듯이 포악하게 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지인지덕(至仁至德)하더라도 제멋대로 난동을 부리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천만(千萬)의 대병(大兵)을 거느리고 지금 바닷가에 나와 하늘의 이치를 받들어 토벌의 뜻을 펴려고 한다. 우선 내일 이른 아침에 서로 대면하자는 약속을 급히 보내니 군사의 곡직(曲直)과 승패(勝敗)가 결정되리라. 너희들은 퇴각하여 달아나지 말고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명령을 들어라.

병인년(1866) 9월 11일 【술시(戌時)】 조선국 순무영(巡撫營) 【착압(著押)하고 인장을 찍었다.】 "

 

<b>고려 통사</b><b>(</b><b>統司</b><b>) </b><b>앞에 올리는 글</b>

"프랑스 황제의 명령을 받은 전권 대신(全權大臣)은 각초(各哨)의 용맹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준절히 효유(曉諭)한 일을 당신들 순무사(巡撫使)는 다 잘 알라. 나는 본 조정 황제의 명을 받고 우리나라 군사들과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이곳에 있는 것이다. 올해에 이 나라에서 무고(無辜)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은 우리나라의 전교사(傳敎士)로 추중(推重)되던 사람이다. 너희는 어질지 못하게 불의(不義)로 그를 죽였으니 공벌(攻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전교사는 매우 어질고 의로운 사람이라 털끝만치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그를 죽였으니 천리를 어긴 것이다. 그러니 죄악은 세상 법에서 온전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에서 지난 몇 해 전에 일어난 일을 듣지 못했는가? 그들이 불인(不仁)을 행하고 이런 흉악한 행위를 저질렀다가 우리 대국에서 토벌하니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번 프랑스 전권 대신은 불인불의(不仁不義)한 나라인 조선을 징벌하기로 정하였으니 만약 귀를 기울여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전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ol>
 	<li>세 사람이 관청을 부추겨 우리나라 전교사를 살해한 것에 대해 엄정히 분별할 것이다.</li>
 	<li>너희 관청에서는 조속히 전권(全權)을 지닌 관원이 조속히 이곳에 와서 직접 면대하여 영구적인 장정(章程)을 확정하라. 재해(災害)와 흉환(凶患)이 지금 가까이 닥쳤으니 너희가 재난을 피하려고 한다면 조속히 회답하고 명령을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본 대신이 기일을 앞당겨 너희들에게 환난(患難)을 줄 것이니, 너희 백성들이 재난을 당하는 근원이 될 것이다. 그때 가서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마라.</li>
</ol>
기원 1866년 양력 10월 18일"

 

<b>이때에 대원군</b><b>(</b><b>大阮君</b><b>)</b><b>이 묘당</b><b>(</b><b>廟堂</b><b>)</b><b>에 글을 써 보낸 글</b>

“사람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천지(天地)의 상경(常經)이다. 양이(洋夷)들이 여러 나라들을 침략한 것은 본래 있었지만 지금까지 몇백 년간 이 적들은 감히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몇 해 전 중국이 화친을 허락한 다음부터 제멋대로 날뛰는 것이 곱절이나 더해져서 도처에서 포악한 행동을 감행하여 모두 그들의 해를 입게 되었다. 오직 우리나라에 대해서만 감행하지 못한 것은 실로 옛 성인이 하늘에서 음덕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예의(禮義)이고 우리가 의지할 바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굳게 뭉치는 것이다. 지금 상하(上下)의 사람들이 만약 의심하거나 겁을 먹는다면 모든 일은 와해(瓦解)되고 국사(國事)는 그르치게 된다. 나에게 마음속으로 굳게 정한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이 굳은 맹세를 알고 나의 뒤를 따르라. 첫째, 고통을 참지 못하고서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이다. 둘째, 그들의 해악을 참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행위이다. 셋째, 적들이 도성에 쳐들어왔다고 해서 만약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가 위태롭게 하는 행위이다." 라고, 하였다.”

 

프랑스군은 10월 14일 상륙 이래 거의 한 달 동안 강화부를 점거했지만, 정신적·육체적으로 피로했기 때문에 정족산성을 재공략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1월 10일 함대를 철수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철수 시 고도서 345권과 은괴 19상자 등 문화재를 약탈해갔다. 로즈의 조선 원정은 11월 21일 제2차 원정이 끝날 때까지 무려 2개월여에 걸친 장기 원정이었다. 원정을 끝내고 청국으로 돌아간 로즈는 선교사 학살에 대한 응징적 보복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사 벨로네를 비롯한 북경의 모든 외교관들은 그의 원정을 실패로 간주하였다.

첫째 외교적 견지에서 보면 수교 관계가 없는 조선으로 가서 조선 개항을 위한 입약협상(立約協商)조차 벌이지 못한 채 돌아왔기 때문이다. 둘째, 군사적 견지에서 보면, 정족산성에서의 패전 직후 곧 함대를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종교적 견지에서 보면, 조선원정의 지상 목표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에 대한 응징 보복인데, 보복은 커녕 오히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와 쇄국정책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ol>
 	<li><b> </b><b>오페르트 도굴 사건</b></li>
</ol>
1868년 4월에 일어난 오페르트(Oppert)의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사건을 계기로 다시 박해에 불이 붙었다.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유태계 독일 상인이었던 오페르트는 상해에 오래 체류하며 일본의 개항과 중국 상인들이 조선에 오가는 것을 보면서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오페르트는 자신을 영국군이라고 속여 두 차례나 조선을 방문했고, 수차에 걸친 통상 요구가 거듭 거부되자 세 번째 조선 방문에서는 도굴사건을 일으켰다. 이에 대원군은 크게 분노하여 내포 지방의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하였다. 도굴에 가담한 천주교인들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b>① </b><b>오페르트의 조선 탐사</b>

오페르트는 1차 조선 방문 때, 한 장군과의 만남을 기록했다. 그는 평신첨사(平薪僉使) 김영준(金泳駿; 오페르트 기록에는 Kam Ta Wha로 되어 있음)이었는데 매우 개방적이었다. 김영준의 방문은 조선과 외국과의 교류에 대한 고위 관리의 견해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오페르트는 많은 이익을 보았다고 했다. 김영준은 이 문제에 대해 자유롭고 직설적으로 견해를 밝혔고, 오페르트에게 방문의 결실을 거두어 두 나라 사이의 신뢰와 이익을 도모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오페르트를 자신의 처소에 초청하고 가축까지 보내주겠다고 할 정도로 우호적이었고, 밤늦게 까지 조선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하다가 돌아갔다. 이 문제를 고종실록 3권의 고종 3년(1866년) 2월 18일의 기록은 이렇게 전해준다.

 

“공충 감사(公忠監司) 신억(申檍)이, ‘이달 11일 이양선(異樣船)이 평신진(平薪鎭)의 조도(鳥島) 앞에까지 와서 떠다니다가 12일에는 해미현(海美縣)의 조금진(調琴津)으로 와서 정박하였습니다. 평신 첨사(平薪僉使) 김영준(金泳駿), 해미 현감(海美縣監) 김응집(金膺集), 서산 군수(瑞山郡守) 정재기(鄭在箕) 등이 보낸 첩보(牒報) 안에 그 사정을 물으며 필담(筆談)한 것들이 다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배는 영국(英國) 배로 [배의 이름은 로나〔羅那〕이고, 선주(船主)는 영국 런던의 상인(商人)으로 이름은 오페르트〔戴拔 : Oppert, Ernest Jacob〕이었고, 배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30여 명이었다. 또 예단(禮單)도 있었는데, 큼직한 신경(身鏡) 1면(面), 자명종(自鳴鐘) 2개(箇), 양금(洋琴) 3개, 오색 무늬의 지전(地毡) 3장(張), 오색무늬의 예전(禮毡) 1장, 시신록(時晨錄) 1개, 천리경(千里鏡) 1개를 헌상(獻上)하겠다고 요청하니, 문정관(問情官)이, "감히 멋대로 행할 수 없다."] 또한 청(淸) 나라 사람들도 있었는데 한 통의 편지를 주며 이르기를, 「우리 상인들은 오로지 외국(外國)을 위하여 귀국(貴國)과 무역을 요청하니, 만약 허락을 받을 수만 있다면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마는, 오직 귀국에 저지를 받을까 염려스럽다. 우리 상인들은 대청(大淸)의 백성이지만 다같이 이 세상에 속해 있으니 성인이신 공자(孔子)께서 모두가 형제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대청은 수백 년 동안 통상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정성으로 사귀어 피차간에 이득을 보아 나라는 부강해지고 백성도 많이 늘어났으니, 통상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배의 체류기간을 물으니, 답하기를, 「동양(東洋)의 일본(日本)으로 빨리 가려고 하니 오래 머물 수가 없다.」하였습니다. 아마도 청나라 사람들이 영국 상인들을 소개하는 것은 통상하고 싶은 의도가 있는 듯한데, 이미 국법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법으로 타일러서 속히 물러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배는 표류선(漂流船)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음식물을 베풀어 주는 일에 대해서는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문정 역관(問情譯官)을 내려 보내는 것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다.

 

오페르트가 자신이 듣고 싶은 것과 쓰고 싶은 것을 썼다 할지라도 김영준이 직접 찾아와 밤늦도록 문호개방에 대한 문제를 열변하며 교류가 두 나라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은 분명 과장은 아닐 것이다. 정부에서 외국과의 교류를 완강하게 금지하고 있었기에 오페르트와의 필담에서도 조선 측 관리는 굳이 필담 자료를 자신에게 남겨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부분이라던가 문답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 놓고 준비하고 있는 모습에서는 자신의 견해와는 상관없이 외국인과의 접촉으로 인해 자신이 혹시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깔린 것을 볼 수 있다.

 

제2차 조선 항행은 1866년 7월에 이루어졌다. 오페르트는 자비를 들여 기선 엠페러(Emperor)호를 마련하고 선장과 선원, 무기 등을 준비해서 항행에 올랐다. 상해에서 출발하여 흑산도를 거쳐, 아산만에 도착했다. 1866년 7월 17일 강화도에 정박한 오페르트 일행을 보고 일반인들은 그들의 모습이 매우 기괴하여 구경하는 자가 매우 많았다.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6일 임술 5번째 기사에는 공충 감사 신억이 이양선이 돌아갔다고 보고했다.

 

공충 감사(公忠監司) 신억(申檍)이, ‘수군 우후(水軍虞候) 한용승(韓用昇)과 해미 현감(海美縣監) 김응집(金膺集)이 연명으로 올린 보고를 방금 받아보니, 「이양선(異樣船)이 어제 출발하여 겨우 7리쯤 가서 닻을 내리고 정박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대로 배가 떠나갔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 올라가 살펴보니 배가 곧바로 서해의 대양(大洋)으로 향하여 멀리 가니 아득히 형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배가 비록 멀리 가기는 하였지만 계속 살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관청으로 돌아오지 말고 다시 더 탐지해서 치보(馳報)하라는 뜻을 신칙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월곶진에 정박하고 있는 오페르트의 영국 상선이 통상할 것을 조선에 청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인기(李寅夔)가 올린 장계(狀啓)를 보니, ‘월곶진(月串津)에 정박하고 있는 영국 상선에 가서 다시 내막을 물어보니, 지난번에 해미현(海美縣)을 통과해서 온 배와 관계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상인 오페르트〔戴拔 : Oppert, Ernest Jacob〕와 선주 젬스〔詹仕〕가 그 가운데에 있었으며, 그들은 오직 두 나라 간에 교역(交易)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바닷물이 얕기 때문에 승천보(昇天堡) 앞바다에 물러가 있으면서 몇 가지 바칠 물건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다시 닭, 생선, 과일, 채소 등속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이므로 마음대로 처리하기 곤란하니,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서양배가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심히 해괴한 일입니다. 심지어 진헌(進獻)하는 물건의 종류는 일의 체모와 관계되는 만큼, 문정 역관(問情譯官)으로 하여금 물러가도록 효유(曉諭)하게 하시고, 식량과 반찬 등속은 되도록 후하게 제급(除給)하여 멀리 있는 나라 사람들을 안무(按撫)하는 뜻을 보여주심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1866년) 11월 5일 경신 4번째 기사에 중국 예부(禮部)에 회답한 자문(咨文)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영국 배가 불에 타 침몰된 일과 프랑스의 격문이 패만(悖慢)했던 이야기와 프랑스 군사가 물러간 이유는 이전 자문에서 상세히 진술하였습니다. 그런데 올해 2월 7일에 해미현(海美縣)과 강화부(江華府)에 다시 와서 통상을 하자고 청하기에 상국(上國)의 공문이 없어서 감히 임의로 허락할 수 없다고 하자, 대청국(大淸國)에 가서 공문과 화물을 가지고 오겠다고 말하고는 배를 띄워 멀리 가버린 다음 그림자도 볼 수 없었으니, 곧 자칭 영국인이라 한 모리슨〔馬力勝〕과 오페르트〔戴拔 : Oppert, Ernest Jacob〕 등입니다. 또 7월에 평양부(平壤府)에 와서 정박하고는 장변(將弁)을 붙잡아가고, 백성들을 살해하며, 재물을 약탈해가고, 총포를 마구 쏘아대다가 얕은 물에 걸려 불에 타 침몰된 것은 곧 자칭 영국인 토마스〔崔蘭軒 : Tomas, Robert Jermain〕, 덴마크인 리바항〔李八行〕과 오귀자〔吳鬼子〕 등입니다. 원래 미국인과 돛을 두 개 단 배 1척이 얕은 물에 걸려서 불에 타버렸거나 선주와 배군 24인이 붙잡힌 일은 없는데, 이번에 윌리엄스〔衛廉士 : Williams, S. W.〕로부터 온 편지는 평양부에서 영국 배가 침몰된 사실이 와전된 것을 근본을 잘 따져보지 못한데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영국, 프랑스 양국과 본래 교섭도 없었는데 어찌 화의를 잃을 수 있겠습니까? 통상과 선교의 문제는 나라의 법에 의하여 거절하였고, 선교사의 문제는 다른 나라의 나쁜 사람이 변복하고 사람들을 현혹시켰기 때문에 배척하고 제거한 것일 뿐입니다. 대체로 천하의 각국이 서로 전쟁을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실정을 자세히 알아보고 불화의 단서를 똑똑히 잡은 다음에야 비로소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인데, 지금 프랑스인들은 우리나라의 미비함을 엿보고 강화부에 느닷없이 들어와 온 성을 모두 불사르고 허물고 재화를 약탈해갔습니다. 이것은 곧 약탈을 일삼는 포악한 도적 무리와 한가지입니다. 통상이 과연 이와 같은 것입니까? 선교라는 것이 과연 이와 같은 것입니까? 마침내 그들은 두령(頭領)이 섬멸되자 돛을 올려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종적을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에 다만 의리를 잡고 준비를 갖추고 힘써 성신(誠信)을 다하고 있는데, 병비(兵費)를 배상하라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귀 예부와 총리 아문(總理衙門)에서 이해관계까지 염려해 주었으니 매우 감사합니다. 다만 프랑스인들이 우리나라에서 보관해 두었던 무기를 빼앗아간 것이 그 수량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프랑스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옳을지 모르지만, 프랑스에서 우리나라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어디 이런 법이 있을 수 있습니까? 대체로 프랑스인이 통상이니, 선교니, 배상이니 하는 여러 일들이 우리나라의 백성과 국가의 정세로는 비록 몇 해 동안 양이(洋夷)들에게서 곤란을 당할지언정 절대로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바라건대 귀 예부에서 실정을 깊이 헤아리고 기미에 따라 알려주어서 말썽이 없게 하며 시종 일관한 혜택을 베풀어 준다면 천만 번 다행하겠습니다.”

 

오페르트는 1868년 4월 세 번째로 조선을 방문했다. 이때 페롱 신부가 동행하게 되는데, 페롱 신부는 병인박해 때 청나라로 탈출한 뒤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비참함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며 대원군을 협박할 무언가를 찾던 중 오페르트와 의기투합했다. 조선에 도착한 그들은 북독일 연방 국기를 게양하고 충청도 홍주목 행담도(行擔島)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구만포(九萬浦)에 상륙, 러시아 군병을 자칭하며 함부로 총칼을 휘둘러 지방 관헌조차도 접근하지 못하게 한 다음, 어둠을 타서 덕산 가동(伽洞)(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덕산군수 이종신(李鍾信)과 묘지기 및 몇몇 주민이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무장한 서양인 무리를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날이 밝아 주민들이 몰려오고 내하(內河)의 퇴조(退潮; 썰물로 인해 하천의 물이 빠져나가는 것) 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관곽(棺槨)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퇴조로 인해 삽교천의 수위가 낮아지면 배를 띄울 수 없기 때문) 구만포로 퇴각하였다. 오페르트는 석회층에 막혀 5시간 동안 삽질만 계속하다 결국 도굴을 단념했다. 오페르트는 경기도 영종진(永宗鎭)에 이르러 대원군에게 올리는 글을 제시하면서 영종진을 습격하다가 실패하고 돌아가 버렸다.

 

대원군 좌하(座下)께 전하게 할 것.

煩帶至大院君座下

 

삼가 말하건대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에 가깝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 빠뜨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본래는 여기까지 관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과도한 것 같아서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예의를 중하게 여기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군사와 백성들이 어찌 석회(石灰)를 부술 기계가 없었겠습니까? 절대로 먼 데 사람의 힘이 모자라서 그만 두었으리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謹言, 掘人之葬, 近於非禮, 勝於動干戈, 陷民塗炭之中, 故不得已行之。 本欲奉柩於此, 想必過度, 故停止耳。 此豈非敬禮的道乎? 軍民豈無破石灰之機械也哉? 萬勿遠人之力, 不及疑訝焉。

 

귀국의 안위(安危)가 오히려 귀하의 처리에 달려 있으니 만약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거든 대관(大官) 1원(員)을 차송(差送)하여 좋은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미혹에 빠져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나흘이 지나면 먼 데 사람들은 돌아갈 것이니, 지체하지 말 것입니다.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반드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우환을 당할 것이니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然且貴國安危, 尙在尊駕之處斷, 若有爲國家之心, 差送一員大官, 以圖良策如何? 若執迷不決而過四天, 遠人將回棹矣, 勿爲遲滯。 不幾箇月, 必値危國之患也, 以免後悔之地, 千萬幸甚。

 

연월일 아리망(亞里莽) 수군 제독 대발(戴拔)

年月日亞里莽水軍督戴拜

 

이 소식이 중앙에 전해지자 분노한 대원군은 양이(洋夷)의 추적을 명하는 동시에, 이러한 궤변은 필시 천주교 신자들의 내응(內應)과 향도(嚮導, 길안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국내에 남아 있는 천주교 신자들을 더욱 엄중히 단속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편지에 대한 화답은 영종 첨사의 명의로 화답 편지를 써서 보냈다.

 

“우리나라 대원군(大院君) 합하께서는 지극히 공경스럽 고 존엄한 위치에 계신다. 이런 글을 어떻게 전달하겠는가? 그래서 도로 돌려보낸다. 귀국과 우리나라의 사이에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었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덕산(德山) 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 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서 몰래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약탈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한 것도, 어찌 사리 상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단지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귀국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따름이다.

答書 【以永宋僉使名, 修答以送】 : 我國大院君閤下, 卽至敬至嚴之地也。 此等書, 何可轉達乎? 玆以還送。 而貴國, 至於我邦, 初無聲氣之相及, 又無恩怨之相干。 而今番德山墓所之作變, 此豈人理所可忍者乎? 又從以瞰其不備, 潛入惹鬧, 掠取軍器, 刦奪民財, 亦豈事理所可行者乎? 到此地頭, 爲我國臣民者, 只當戮力同心, 誓不與貴國, 共戴一天而已矣。

보내온 편지에서 좋은 대책을 도모하라고 한 것은 바로 사류(邪類)를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좋은 말로 용서를 구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 나라는 바로 단군(檀君)과 기자(箕子)로부터 몇천 년 동안 이어온 예의의 나라인데, 어찌 이단에 유혹되어 그것을 없애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것으로써 보면 우리나라의 비적 무리 가운데 법의 그물에서 빠져나간 자들이 당신네 배로 도망가서 백방으로 부추겨서 그렇게 된 것이다.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이유 없이 소동을 피우는 것은 귀국을 위하여 매우 좋지 못한 일이다.

來書中, 以圖良策云者, 無乃爲邪類緩頰而然邪? 我國卽檀、箕幾千年禮義之邦, 烏可以沈惑異端, 不之殪殄乎? 此所以衛正斥邪, 有不得不然者也。 由是觀之, 則專由於我國匪類之漏網者, 逃在貴船, 百般慫慂而然。 爲人慫慂, 無端惹鬧, 甚爲貴國不取也。

몇 달 뒤에 설사 전선(戰船)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도 방비할 대책이 있다. 대원군 합하께서 국정을 확고하게 잡고 계신 데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 표류해 오는 서양 각국의 배에 대해서는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도리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니, 다른 말을 하지 말라. 이렇게 알라.

幾箇月後, 設有兵船出來, 我國亦當有備禦之道。 大院君閤下秉執之嚴確, 僕已詳知矣。 從今以往, 凡於西洋各國漂到之船, 不當待之以柔遠之誼, 毋庸他說。 以此諒之。”

 

조선 정부는 오페르트 일행의 만행에 대해 청나라 예부(禮部)에 자문(資文)을 보내 이 사건을 알리면서 이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의 국가의 영사들에게 통고하는 동시에 사건 해명을 요청했다. 청국 정부의 요청을 받은 상해(上海) 주재 프로이센 영사는 사건의 주모자 3인, 즉 오페르트, 페롱(Stanislas Feron) 신부, 젠킨스(Frederick Jenkins) 등은 프로이센 사람이 아니며 선주 묄러(Moeller)와 선원들은 전원 음모 사실을 몰랐다는 등의 해명을 했다.

 

<b>② </b><b>페롱 신부</b>

페롱 신부는 오래전부터 남연군 묘를 도굴하여 흥선대원군과 빅딜을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방법이 피를 흘리지 않고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페롱 신부는 자신의 계획을 극비에 부치고 파리외방전교회나 상하이 대표부 신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페롱 신부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조선을 유럽인들에게 개방하도록 압력을 가하여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계획을 실행하였다. 페롱 신부는 이 일이 성공하면 프랑스는 불만이 많겠지만 자신은 위대한 사람이 될 것이고, 실패하면 최악의 인물이 되어 교황님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이 자신에게 비난을 퍼부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페롱 신부와 함께 한 6명의 조선인 신자 중 3명만 길 안내를 위해 하선하였는데, 그들 중 2명은 달아났고, 한 명만 페롱 신부를 홀로 버려두고 싶지 않아서 그의 곁에 머물렀다. 페롱 신부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상하이로 귀환한 페롱 신부는 조선 입국로를 탐색한다는 명분으로 중국의 동북 지방으로 도피하였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영자 신문이었던 《노스 차이나 데일리 뉴스(North China Daily News)》의 1868년 5월 22일자 기사에는 ｢도굴을 목적으로 한 어설픈 원정(amateur resurrectionary expedition)｣이라는 제목 아래에 로마 가톨릭 사제의 복장을 한 어느 첩자(emissary)가 조선에 가서 권력자들의 유해가 매장되어 있는 곳을 찾으려 했다는 내용이 실렸다.도굴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페롱 신부는 나가사키에서 상하이 대표부의 르모니에 신부에게 이렇게 편지를 써 보냈다.(1868년 9월 2일 서한)

 

저는 제가 행했던 것들, 저를 이끌었던 동기들, 그리고 천주 앞에서 저를 변호해줄 이유들을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설명한다면 사람들 앞에서도 역시 저의 무죄를 증명해 줄 것이며 이 스캔들을 멈출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더 일찍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상하이에서 근거 없는 소문들이 떠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소문에 연루될 필요가 없었지만 저는 공적인 조사를 두려워했다기보다는 정확한 근거를 더 원했던 것입니다. 프랑스 공사가 진행한 절차는 충동적이었으며, 제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숙고가 없었습니다. 그는 후회할 것이며, 차라리 제가 없었던 것이 그에게는 다행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미국인이나 영국인으로 둔갑시켜 프랑스 공사의 관할권 바깥에 두는 것이 손쉬운 일이었습니다. 확실히 저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시각에서 우리 전교회를 이 사건에 연루시킬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개인으로 말한다면, 오로지 전교지에 또는 오히려 그보다는 천주께 봉사하겠다는 마음밖에 없습니다. ······· 저를 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도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이 충분히 명료하지는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나쁜 성공을 후회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그렇게 그들이 저를 공격하도록 내버려둘 생각입니다. 하지만 비난받아 마땅한 죄를 지었다고 저 자신이 후회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결과들에 대해서는 미리 그것들을 예단할 수 없습니다.

 

페롱 신부는 도굴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 동기의 순수성과 파리외방전교회에 대한 애정과 헌신만을 이야기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랄르망 공사는 1868년 6월 22일 르모니에 신부에게 ‘대외비 서한’이라는 단서를 붙여, 편지를 보냈다.

 

지난해 상하이에 갔을 때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과 인사를 나누고 조선 문제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이런 무덤을 종교적으로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므로 돌려받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복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들으면서 경악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그런데 지금 선교사 한 명의 광기 어린 무모함으로 인하여 전체 선교사들의 평판이 위태롭게 되었으니 신속하면서도 성실한 답변을 부탁합니다.

 

병인양요와 도굴사건은 조선 교회에 감당할 수 없는 박해의 바람을 몰고 왔다. 리델 주교와 페롱 신부의 행동은 다른 방식의 같은 행동이었을 뿐이다. 리델 주교도 병인양요 과정에서 프랑스 함대를 안내하고 통역하는 역할을 했기에 두 사람은 결국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던 것이고, 리델 주교는 페롱 신부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기에 더 비판적으로 말했을 수도 있다.

 

페롱 신부가 프랑스로 귀환한 이후에(1868년 11월) 조선 대목구 선교사들은 페롱 신부가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는 문제를 놓고 고심하였다. 그러나 차쿠의 성모설지전 성당에 있던 마르티노 신부는 파리의 루세이 신부에게 반대의 뜻을 밝혔다. 페롱 신부가 조선 대목구로 귀환하는 문제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였다.

 
<ol>
 	<li><b> </b><b>도굴사건에 가담한 천주교 신자들</b></li>
</ol>
페롱 신부가 도굴계획을 제안할 당시에는 장치선, 김계쇠, 최인서 등이 있었고, 안내자로 온 것은 최인서와 최선일, 이영중”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인물은 최선일이다. 고종실록에서는 도굴사건을 실행에 옮긴 사람으로 페롱신부(권신부)와 함께 이여강, 이돈호, 장경일, 최성일, 김창실 등의 이름이 나온다. 도굴사건을 계획한 사람으로는 장치선과 최영준이 등장하고 있다. 고종실록 5권, 고종 5년 4월 19일 정유 1번째 기사에 장치선과 조철증이 등장한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우변포도청(右邊捕盜廳)에서 보고한 바를 듣건대, 일전에 체포한 사학 죄인(邪學罪人) 장치선(張致善)의 구초(口招)에, ‘단양(丹陽)에 사는 전 정언(正言) 조철증(趙喆增)이 간사한 무리들과 뜻을 같이 한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재작년 서양 배가 경기(京畿) 근해에서 소요를 일으킨 것도 바로 그가 부추겨서 나온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다 건너 도적을 불러온 것이 얼마나 큰 흉악한 역적입니까? 흉악한 정체를 숨기고 고약한 무리들과 서로 호응한 것은 만 번 죽이더라도 죄가 남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엄하게 신문하고 끝까지 조사하여 속히 반란의 싹을 꺾어놓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조정의 관리에 관계되는 만큼 왕부(王府)로 하여금 도사(都事)를 파견하여 형구(刑具)를 채워 잡아들여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실정을 캐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그런 자에게 무슨 조정 관리라는 것으로 구별할 것이 있겠는가? 왕부에서 거행하는 것은 너무 일을 벌이는 것 같으니, 빨리 좌우변포도청으로 하여금 밤낮없이 잡아오게 하라."

 

고종실록 5권, 고종 5년 5월 22일 무술 1번째 기사에 사학(邪學) 죄인 장치선(張致善)과 최영준(崔英俊)을 효수(梟首)하라고 명하였다. 묘당(廟堂)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고종 실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양선과 내통한 사교 죄인 이영중을 효수하여 경계하도록 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수원 유수(水原留守) 이경하(李景夏)의 보고를 보니, ‘갇혀 있는 죄인 이영중(李永中)은 원래 사도(邪徒)들의 괴수로서 얼마 전에 양선(洋船)이 구만포(九萬浦)에 와서 정박하고 있을 때에 놈들을 찾아가 만나고 수작질한 사실을 낱낱이 자복하였는데 이렇듯 흉측하고 간교한 놈을 감히 경솔하게 처결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술(邪術)에 물들고 오랑캐 무리들과 내통하였으니 이것만 해도 벌써 만 번을 쳐 죽여도 부족한데 게다가 양선이 소동을 일으킬 때에 저놈들과 문답(問答)하였으니 그 정상이 흉악하고 고약합니다. 이영중을 공충도 수영(公忠道水營)에 압송해다가 효수(梟首)하여 군중들을 경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고종실록 8권, 고종 8년 4월 9일 무진 1번째 기사에서 의금부(義禁府)에서 이렇게 아뢴다.

"죄인 김창실(金昌實)의 결안(結案)에, ‘원래 타고난 성품이 간사하고 음흉하며 승냥이처럼 독하고 사나운 자로서 사류(邪類) 속에 들어가 굳게 결탁하였으며, 몰래 중국 물건을 사서 법을 무시하고 교역을 하였습니다. 서양책들을 읽고 기꺼이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얻었으며, 장경일(張敬一)처럼 요사한 자로서 4, 5번이나 예배를 하였고, 조철증(趙喆增)처럼 흉악한 자로서 수백 금(金)의 장물을 받았습니다. 신부와 벗하며 서양 사람들과 내통하였으며, 요사한 자들과 패거리를 묶어 요동(遼東)에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은 막지 못한다고 하였고 프랑스〔佛浪國〕도 당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장치선(張致善)의 흉악한 말을 듣기 좋아하였습니다. 사교(邪敎)들을 없애버린 것을 복수하겠다고 하며 오랑캐 놈들을 불러들여 난리를 일으켰으며, 흠차(欽差)의 위세를 등에 업고 8월에 올 배를 몰래 기다려 용유(龍遊)로 도망치고, 백 리 도성을 가리키며 감히 목이 마른 곳의 물고기 운명에 비유하였습니다. 먹은 마음은 도적을 따르는 것이고, 꾸민 음모는 병란을 일으키는 것이었습니다. 포청(捕廳)에서 한 공술은 철안(鐵案)이 되어 움직일 수 없고, 국청에서 한 공술은 도장을 찍은 듯 명백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온 세상의 고금을 통해서 있어 보지 못한 흉악한 음모이고 반역입니다. 그리하여 귀신과 사람들이 모두 통분해 하는 자로서 단 한 시각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모반대역(謀反大逆)에 대해 확실하게 지만(遲晩)이라고 하였으니, 부대시능지처사(不待時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죄인 이여강(李汝江)의 결안에, ‘본래 몹시 지독하고 패악한 종자로서 평소부터 화란(禍亂)을 일으킬 마음을 품어왔고 서양 책들을 배워가지고 전파시키는 학문으로 삼았으며 사도(邪徒)들을 맞아들여서는 거처할 장소를 마련하여 주었습니다. 온갖 악한 짓과 추악한 행동은 정도(正道)를 배반하고 금령을 위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나쁜 무리들과 패거리를 묶고 감히 영세를 받고 고해(告解)를 하였습니다. 왜놈과 군사를 빌릴 음모를 약속하여 권 신부(權神父)와 온갖 꿍꿍이를 다하여 연계를 맺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일 흉악한 기도를 한 것이 최성일(崔性一)에게 드러나 함께 가서 도적들을 유인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요언(妖言)이 자연 근거 없는 말로 귀결되었습니다. 교우(敎友)들에게 해가 미칠 것을 걱정해서 패거리를 굳게 묶고, 양선(洋船)이 정박하는 곳과 몰래 내통하며 차마 덕산(德山)에 삽을 대어 묘를 파는 변고를 일으켰습니다. 포도청에서 한 공술이 이미 확실하니 자신이 범한 죄를 어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결안이 다 갖추어졌으니 대질(對質)을 한 공술에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몸을 천 개의 토막을 내도 아까울 것이 없고 만 번을 죽여도 오히려 죄가 가볍습니다.’ 하였습니다. 모반대역에 대해 확실하게 지만이라고 하였으니, 부대시능지처사에 해당합니다.

죄인 이돈호(李敦浩)의 결안에, ‘본래 추악한 무리로서 몰래 음모를 품고는 정도를 배반하고 사교에 빠졌으며 어려서부터 세상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백성들을 속이는 것을 능사로 여겼습니다. 서양책을 외우면서 감히 김마도(金馬道)에게서 배웠다고 하였으며, 배가 떠오는 것은 배화첨(裵化僉)이 전한 말이라고 명백히 지적하고, 장경일, 최성일, 김창실, 권신부와 함께 흉악한 짓을 하며 천지(天地)의 신명(神明)도 속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평소의 음모는 그저 외부의 도적들을 꾀어 들이는 것이었으나, 밤중에 따라가 결국 덕산의 변고를 일으키기까지 하였습니다. 현장의 흉악한 범행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고 하였으니 도적무리들과 함께 휩쓸렸다는 공술은 실토나 다름없습니다. 진상이 포도청의 공초에서 모두 드러났고, 국청의 공술에서 결안이 이미 작성되었습니다. 범한 죄가 지극히 중한 만큼 처형(處刑)도 오히려 가벼운 형벌인데, 어떻게 지정불고(知情不告)의 형률(刑律)에서 빠져나갈 수 있겠습니까?’하였습니다. 지정불고에 대해 확실하게 지만이라고 하였으니, 부대시참(不待時斬)에 해당합니다."하였다.

 
<ol>
 	<li><b> </b><b>나가는 말</b></li>
</ol>
1866∼1868년 세 차례 조선을 항해했던 오페르트는 남연군묘 도굴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그가 할 수 있었던 것과 천주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한 순간에 막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1868년 오페르트의 제3차 조선항행, 즉 남연군묘 도굴을 위한 항행은 미국인인 젠킨스(jenkins)가 자본을 댔고, 페롱 신부와 조선인 가톨릭 신자가 길을 안내했으며, 총책은 오페르트가 맡았다.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실패로 끝났는데, 이 사건에는 3개국과 3개 종교가 관련됨으로써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또한 이 사건에 연루된 천주교 신자들은 목숨을 잃었다.

페롱신부와 오페르트 도굴사건은 분명 도굴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오페르트와 페롱신부의 도굴사건은 쇄국정책과 천주교 박해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한 시도 중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페롱 신부는 병인양요와 같은 대규모 군사 작전으로는 조선 천주교회에 신앙의 자유를 찾을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페롱 신부는 조선 조정에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중국 조정의 중재를 통하여 박해를 종식시키고 신자들과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의견은 신유박해(1801년) 이전 주문모 신부나 황사영 알렉시오 등이 처음부터 제시했던 방안이다. 그러나 페롱 신부는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의 유골을 가지고 조정과 협상을 하려고 하였다. 이 사건은 무군무부(無君無父)로 천주교를 몰아가던 박해자들에게 강상의 법을 도외시하는 극악한 집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b>참고문헌</b>

- 조현범(2017). 덕산 사건과 프랑스 선교사 페롱.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신과 문화연구 제40권 제3호,

- 노혜경, 오페르트(E.Opert)의 조선 인식, 역사와 실학 2014, 55,201-234

- 샤를르 달레, 안응렬 역, 한국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 펠릭스 클레르 리델, 한국교회사연구소번위원회 역, 리델문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 유홍렬, 한국천주교회사연구, 가톨릭출판사, 1962.

- 노계현, 오페르트의 남연군분묘 도굴만행과 한국의 조치, 국제법학회논총 27-1, 1982.

- 박일근, 젠킨스에 대한 주상해미영사재판-남연군묘소 도굴사건에 관하여,부산대학교논문집 11, 1970.

- 원재연, 오페르트의 덕산굴총사건과 내포 일대의 천주교 박해

- 이영석, 구한말 내한 독일인의 한국 이해 –오페르트, 묄렌도르프, 분쉬의 경우 , 독일어문학 37, 2007.

- 이종국, 오페르트 굴총 사건의 진입로 연구 건국대학교대학원 논문집17, 1983.]]></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9:26:5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3권-셋. 공세리 본당의 설립과 간양골에서 공세리로의 이전]]></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33]]></link>
			<description><![CDATA[<b>셋</b><b>.</b> <b>공세리 본당의 설립과 간양골에서 공세리로의 이전</b>

내포학 편집실

 
<ol>
 	<li>들어가는 말 149</li>
 	<li>병인박해(1866년~1873년) 이후의 내포교회 150</li>
 	<li>본당들의 설립(1890년) 160</li>
 	<li>성전 건립 174</li>
</ol>
4.1. 첫 번째 성당 174

4.2. 두 번째 성당 177

4.3. 세 번째(현) 성당 196

내포의 두 본당의 본당 신부들(1890~2010) 202

 
<ol>
 	<li><b> </b><b>들어가는 말</b></li>
</ol>
1861년 베르뇌 주교는 조선교구 전체를 8개의 본당 구역으로 구분하였다. 그중 5개가 충청도에 있었으며 2개는 내포에 있었는데, 다블뤼 주교가 관할 한 홍주(洪州)를 중심으로 한 ‘상내포본당’과 랑드르 신부가 관할 한 충청도 서부 지역의 ‘하내포본당’이었다. 간양리는 ‘상내포본당’에 속했던 교우촌이었다. 그러나 1866~1871년에 몰아닥친 병인박해로 인해 풍비박산이 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여전히 박해의 칼날을 피해 가며 목숨을 건 신앙 활동을 해 나갔다.

《병인박해 순교자증언록》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그리고 순교자 황석두(루가)의 4대 후손이며 수철리 공소회장을 역임한 (故)황기완의 증언에 의하면 간양골은 박해시대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곳으로, 바다 쪽으로는 ‘신창 창말(현재의 예산읍 신례원 창소리)’을 통해 여사울, 신리로 연결되고, 내륙 쪽으로는 가까운 수철리를 거쳐 대술 고새울, 수골, 광덕 부원골 등과 연결되었던 통로 구실을 하던 곳이었다. 지금은 숲이 우거져서 옛 산길이 거의 사라졌지만 사방으로 이어진 산길을 통해 아산 도고, 예산 대술, 공주 유구, 천안 광덕 등지와 연결되었으며, 고개 넘어 수철리(드르니)와 소통하면서 넘나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늑한 산골짜기면서도 가까운 신례원 창말 포구(浦口)와 선장 창말 포구를 통해 무한천, 삽교천의 수로(水路) 교통과 연결되고, 산길을 통해 충청도 내륙과 연결되었던 위치적 조건 때문에 훗날 충청도에 처음으로 두 본당이 설립될 때, 간양골에 본당이 설립될 수 있었다.

 
<ol>
 	<li><b> </b><b>병인박해</b><b>(1866</b><b>년</b><b>~1873</b><b>년</b><b>) </b><b>이후의 내포교회</b></li>
</ol>
병인박해는 병인년(丙寅年)인 1866년 발생한 박해를 시작으로 1873년까지 약 7-8년 동안의 박해를 모두 포함한다. 조선은 첫 번째 1866년 봄에, 두 번째로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 번째는 1868년(무진사옥), 네 번째는 1871년(신미사옥)에 천주교 신자들을 박해했다. 병인박해는 우리나라 최대의 박해이며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낸 박해이다. 내포지방은 조선 천주교회 설립초기부터 신앙을 깊이 받아들인 지역이었기에 더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병인박해는 천주교의 뿌리를 뽑아내려는 국내 정치적 측면만이 아니라 급격하게 밀어닥치는 서구 식민세력에 대한 대항이었다는 점에서 1801년의 신유박해나 1839년의 기해박해와는 성격이 다르다.

 

1863년 어린 고종이 즉위하자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을 위해 각종 사회제도 개혁을 실시하였고, 대외적으로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실시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의식과 정치적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1858년 6월 애로우호사건(Arow號事件)에 따라 톈진조약(天津條約)이 맺어지고 러시아가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게 되면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 뒤 러시아는 자주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게 되는데, 대원군을 비롯한 정부 고관들은 이에 당황하였고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천주교 신자들 중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1814-1866)와 김면호(金勉浩, 토마스, 1820~1866)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아책(防俄策)을 건의하여 대원군의 정치적 관심을 끌게 되었다. 또 승지(承旨) 벼슬을 지낸 남종삼(南鍾三)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서 비밀리에 선교활동을 하고 계시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의 만남을 건의하였다.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도들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러나 지방에 가 있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한 달이 지나서였다. 불행하게도 대원군의 처지는 급격하게 바뀌면서 천주교에 대한 입장도 바뀌게 된다. 그 이유는 우선 1866년 1월에 도착된 북경사신의 편지에서 영불연합군의 북경함락 이후 시작되었던 양인살육(洋人殺戮)의 사실이 보고되었다는 점에 있다.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의 소식은 반 대원군 세력으로 하여금 천주교와 접촉하고 있는 대원군에게 정치적인 공세를 취하게 하였고, 이에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쇄국양이와 사교금압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더구나 운현궁(雲峴宮)에도 천주교가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趙大妃)까지 천주교를 비난하기에 이르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결심하고 박해령을 선포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서양세력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더욱 강화하였고, 페롱신부와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을 겪으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신미양요는 1866년 평양시민의 공격으로 침몰된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의 사건을 미국이 정치적으로 이용, 조선에 포함외교(砲艦外交)를 펴고자 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함대의 강화도 공격을 시발로 하여 6일간의 전투 끝에 결국 미국은 물러가게 되었고, 격퇴에 성공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국민에게 철저한 쇄국양이의 국시를 선명히 하는 한편,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여 처형시켰다.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로 다시 박해가 가중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 세력과의 수교를 거부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결국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병인박해가 마무리되었다.

 

<b>2.1. </b><b>두세 신부가 바라본</b><b>(1883</b><b>년</b><b>~1890</b><b>년</b><b>) </b><b>내포 교회</b>

1883년 4월 27일, 내포지역의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두세 신부는 블랑주교에게 ‘충청도와 전라도 일부, 경상도의 2개 공소’의 방문 결과를 보고한다.

 

“이번 성사 집행은 3개도(道), 즉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27~28개 지역에서 실시되었는데(이 지구들을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음) 이들은 모두 64개 공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냉담자 수와 교우 수는 대략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좀 정확한 자료를 얻어 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우들 중 외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이들이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 전체가 수계하지 않는 고장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내포(內浦)에서 있은 특별한 움직임에 대해 주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래된 공소인 여기에서 무리를 이루어 교회로 돌아왔고 또한 아직 수계하지 않고 있는 친척들이나 친지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년에는 그 성과가 이에 못지 않게 풍성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 그러기를 바랍니다. 일찍이 매우 번성했으나 박해의 큰 시련을 겪어야 했던 내포 공소가 조선 교회사에서의 그 본래의 위치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두세 신부의 보고서는 병인박해가 내포를 휩쓸고 간 후, 신자들의 어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놀라운 것은 교우들은 자녀가 태어나자마자 계속 세례를 주었고(148명), 성인 영세자가 40명이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박해 속에서도 신자들은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고, 내포 교회가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왔다는 증거이다.

 

<b>① </b><b>한불수교조약</b><b>(1886</b><b>년</b><b>, </b><b>고종</b><b>23</b><b>년</b><b>)</b>

조선은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탄압하면서 많은 사제와 평신도들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했다. 1801년에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새남터에서 처형했고,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 모방 신부를 처형했고, 1846년에는 김대건 신부를 처형했으며, 1866년(고종 3) 병인년에는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 위앵 민 루카 신부,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 도리 김 헨리코 신부,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 푸르티에 신 요한 신부, 프티니콜라 박 미카엘 신부를 처형했다. 조선의 천주교 선교사 처형은 프랑스를 자극했고, 프랑스는 프랑스인의 희생이 있을 때마다 조선에 침입해 왔다. 특히 병인박해 때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조선에 침입한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물론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 세력을 넓히려는 제국주의였다.

1882년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여러 나라들이 차례로 조선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기 시작했다. 천주교라는 종교적 관계 때문에 조선과 프랑스는 다른 어느 국가보다도 먼저 접촉했으나 조선에서의 천주교 탄압정책이 양국간의 불화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조불수호조약은 다른 국가보다 늦게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1886년 3월 8일 전권위원 코고르당(Cogordan, F. G.)에게 수호통상 체결의 임무를 부여해 인천항을 거쳐 4월 3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는 서울에 오기 이전에 미리 당시 총리교섭통상사의(總理交涉通商事宜)였던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통해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의 전교를 허락하고 아울러 교인들의 신분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김윤식(金允植)은 위안스카이의 지나친 내정 간섭을 혐오하여 이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렇지만 프랑스는 통상이라는 물적 욕구보다도 신앙을 통한 양국간의 정신적 결합을 절대시했기 때문에 코고르당의 성의 있는 교섭은 어느 정도 진척될 수 있었다. 조선은 1886년 4월 6일 한성부판윤 김만식(金晩植)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해 조불조약을 협의하게 하였다.

 

전교하기를, “프랑스와의 화약(和約)을 온당하게 결정하려 한다.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김만식(金晩植)을 전권 대신(全權大臣)으로 차하(差下)하여 사리에 맞게 토의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1886년 4월 18일에는 협판내무부사 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장교당상(協辦內務府事兼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掌交堂上)이었던 데니(Denny, O. N.)에게 명해 전권대사와 함께 협의하도록 하였다. 5월 3일 전권대사 김만식과 프랑스 전권대사 코고르당이 회동해 역사적인 「조불수호통상조규」에 기명조인(記名調印)하였다. 이 조약의 효력은 다음 해인 1887년 윤 4월 8일에 독판교섭통상사무 김윤식과 조불공사(朝佛公使) 전권위원 푸라시가 회동하여 조불수호통상조규를 추진하고 교환함으로써 발생되었다. 이후 푸라시는 이후의 일체 사무를 노국(露國, 러시아) 대리공사(露國代理公使) 베베르(Weber, K. I.)에게 대신할 것을 조회하였다.

 

“협판교섭통상사무아문(協辦交涉通商事務衙門) 김윤식(金允植)을 독판(督辦)으로 승차(陞差)하고, 박정양(朴定陽)을 협판(協辦)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 때에 성문된 조규의 내용은 살펴보면 이미 체결된 미국 · 영국 · 독일 등의 조약과는 다른 일면을 나타내고 있다. 첫째, 프랑스인이 조선의 언어문자를 학습 또는 교화할 수 있도록 그들의 신분을 보호, 둘째, 상조(相助)해 양국의 우의를 돈독하게 하며, 셋째, 프랑스에 가 있는 조선인에 대해서도 이 조율에 비추어서 우대한다는 것을 명시하며 프랑스에 유리하게 체결되었다. 프랑스인이 조선 내에서 전교를 목적으로 학교 등을 설치할 수 있는 프랑스만의 특전도 받았다.

1893년경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인들의 선교 운동은 각 지역에서 뿌리를 내려 한성부 · 용산 · 마포 등지에 의원 · 교회 · 학교 등의 각종 기관이 설치되는 등 전국적으로 번지게 되었다.

 

<b>② </b><b>본당의 설립 가능성을 보고하는 두세 신부의 연말 보고서</b>

한불 수교조약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찾은 조선 교회는 활기를 찾게 되었다. 1888년 연말 보고서에서 두세 신부는 내포지역의 신자들을 이렇게 칭찬한다.

 

충청도 교우들은 일반적으로 착하며 열심이고 특히 용맹합니다. 올해에도 여전히 두려움으로 인해 구원에서 벗어나 있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교자들의 후손들이고, 또 수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처음으로 성사를 받은 사람들이므로 그들 모두가 신앙을 굳게 지키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이 구교우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는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으레 그들은 그들이 아니면 정녕 얻을 수 없는 다른 무리들을 우리에게 데려 오기 때문입니다. 아래 내포지방에서는 이러한 열성이 조금 덜한데 그것은 수계하는 교우들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충고와 좋은 표양이 있다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깨울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이 지역에는 아직도 20가구 이상이 죽음과 같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에 근심조차 하지 않으며, 그들 가까운 곳에서 수많은 형제들이 조선 교회의 화관 위에 꽃줄 한 줄을 더 얹고자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최근에 같은 지역에서 훌륭한 모범을 보았는데, 이는 외교인들 사이에서 큰 화제거리가 되었고 또한 많은 냉담자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기도 했습니다.

어느 큰 외교인 마을 한가운데에 한 냉담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대가족의 가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모친이 임종하자 그는 모친에게 성사의 도움도 못 드린채 임종을 맞게 한 것이 불만스러워서 흔히 외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미신 행위를 했습니다. 장례가 끝난 후 그는 작은 사당을 만들어 그곳에 고인의 혼이 머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일이 그쯤 되었을 때 하루는 그의 친척 한 사람이 그를 보러와서 그의 행실이 부끄러운 일이고 심지어는 그의 모친에게 불효하는 짓이라고 말했습니다. 친척의 훈계를 듣고 용기를 얻은 이 선한 남자는 마음에 늘 성교회에 대한 존경심을 간직하고 있었으므로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은총의 힘이 작용되어 외교인들로부터 분노를 사기도 했으나 주님께서는 그를 도우셔서 주님 안에서 무엇이든 희망할 수 있음을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고약한 자가 이 교우의 얼마 안 되는 재산을 탈취하고자 했으나 그 후환이 두려워 한 양반을 찾아가 고했습니다. 대박해 때 내포지역의 수많은 교우들을 앗아 가게 한 대원군의 먼 친척뻘이 되는 이 양반은 그에게 옛날과는 다르니 무모한 짓을 저지르지 말라고 하며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일은 그가 꾸짖어 다루겠다고 말하였으므로 이 고약한 자는 더 이상 어쩔수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고발하려 했던 사실을 그 교우가 알까 봐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저는 그 교우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용감한 행동에 무척 기뻐했습니다.

 

두세 신부는 내포지역을 사목하면서 다시금 신앙의 열성을 회복한 원머리를 자랑한다.

 

충청도에서 제가 가장 자랑할 만한 교우촌은 말할 것도 없이 원머리입니다. 몇 해 전만 해도 성사를 받는 사람이 10명밖에 안 되었는데, 지금은 180명이 넘으며 그 수는 해가 갈수록 증가하리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이 지역의 많은 교우들이 지난 2년간의 흉작 때문에 이주해 간 것도 사실입니다. 원머리의 교우들은 주인 노릇을 하고 있어서 외교인들이 맘에 안 들 때면 그들을 쫒아내겠다고 위협하기도 합니다. 언제까지 이런 일들이 계속될까요? 현재 상태는 여전히 저에게 희망을 안겨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1886년 한불 수교조약을 통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았지만, 많은 지역에서 외교인들이 천주교 신자들의 모임을 반대했고, 사제가 교우들을 방문할 때는 교우들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병인박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제와 신앙을 받아들이는 신자들을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두세 신부는 1889년 연말 보고서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보고하였다.

 

주교님, 저의 보고서가 상당히 늦었습니다만, 주교님께서도 그 이유를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금년의 마지막 성무 집행은 아무런 사고없이 끝났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외교인들이 소요를 일으키려 했고, 또한 교우들이 양인의 방문을 받을 때면 교우들을 위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당연히 그들이 무슨 말을 하던, 또 그들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모임 장소를 마련해 놓아서 저는 약정된 기일에 그곳으로 가서 모든 일이 평온하고 경건하고 진행되었는데, 많은 외교인들은 단순한 사제 방문이 가져다 준 변화를 보고 어리둥절하여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이 거룩한 때에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고 한 가족이 모여 일치를 이루며 마귀의 앞잡이들이 자취를 감추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아들은 더욱 온순해지고 처녀는 더욱 정숙해지며, 그날까지 삶의 온갖 시련을 겪어 온 젊은이는 탕자처럼 이제 돌아와 아버지가 베푸는 식단에 자리를 잡습니다. 가끔 원인도 모르게 외교인들의 마음속에서까지 일어나는 이러한 감정들과 변화에 대해서 우리는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길 잃은 몇 마리의 양을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오기를 원한다면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좋은 행실과 좋은 표양이 요구됩니다. 오래된 편견과 묵은 감정들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외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교우들이 소위 성교회에 합당하게 처신하는지 그들을 지켜보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두세 신부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조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성경을 배포하고,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며 새 신자들을 가입시키고 있는 상황을 바라보며 전교 회장의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첫째, 프로테스탄트들보다 한발 늦은 셈이지만 교우들 가운데서 유식하고 신임할 수 있는 몇 명의 교우들을 골라내어 그들을 조선 8도에 보내 그들의 형제들에게 참된 행복으로 이르는 길을 가르치게 하는 것.

둘째, 전교회장에 대한 매월 봉급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

셋째, 공소의 대표자가 있지만 더 합당한 사람이 없어서 회장직을 수행하는 것이니 회장들의 개선이 요망된다는 것.

넷째, 회장으로 임명하기 전에 교리에 관한 시험을 치르게 하는 것과 회장의 임무와 일반적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 사항이 기록되어 있는 소책자를 그들에게 주는 것.

 

두세 신부는 전교회장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교우들이 너무 무지한 실정이므로 이러한 어떤 규정이 없고서는 이를 개선할 수 없음을 보고하였다. 두세 신부는 “모래 위에 새겨진 흔적을 보고 짐승이 그곳을 지나갔음을 알아차리듯이 이곳의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흔적들은 예전에 이곳에 번성했던 교우촌들이 있어서 천주님의 마음에 드는 화관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며 병인박해의 여파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알렸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직접 체험한 외교인들은 천주교를 믿으면 집안이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포지역의 외교인들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천주교에 대한 완강함을 나타내며 개종자가 드물었지만, 개종한 사람들은 그만큼 확고했고,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영세를 받았다.

 

“19세의 한 청년의 경우가 이를 입증해 줍니다. 그는 아주 최근에 천주교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자신의 고귀한 목적을 달성하고자 부모와 고향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제가 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 때 천주님은 그를 저에게 인도하셨습니다만, 어떻게 해서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그에게 여러 곳에서 혼처가 들어왔으나 그는 이미 한번 혼인했으니, 이제는 자유의 몸이 아니라며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저에게로 와서 자신의 뜻을 말했고, 저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듣기만 하였으니 활짝 열려 있는 그의 영혼 속에서 은총이 작용하도록 내버려 두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집을 떠났습니다. 그의 계획과 동기를 알아차린 그의 부모는 그를 찾아 가족의 품으로 데려오도록 사람을 보냈습니다. 부모는 그에게 천주교를 배우고 수계하는 것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도 그의 고귀한 뜻을 따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후에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굳세게 머무르고 최선을 다해 부모를 개종시킬 것을 충고했습니다. 저는 이 일이 성공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또한 내포지역은 기근으로 수확이 전무했고, 관장이 그의 아전들을 돕기 위해 관할 구역 내의 모든 교우촌들을 강탈하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두려움도 생겼지만 교우들의 열의는 식지 않았고, 두세 신부는 그들의 참된 신앙과 주님 안에서의 믿음은 역경속에서 더욱 성장할 것으로 바라보았다. 두세 신부가 내포지역의 신앙역사를 알고 있었기에 내포교회가 다시금 신앙의 불이 타오를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아름다운 내포 지역은 거의 모든 우리의 순교자들을 배출한 못자리가 아닙니까? 그러니 이 순교자들이 하늘에서 그들의 고향인 이 지역을 더욱 어여삐 여기고 있다고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1890년 연말 보고서에는 내포지역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다.

 

“내포지역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진 비옥한 땅임을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6개 지역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한때는 잊혀지고 그 이름이 공포를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만, 그런 시절은 지나갔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의 고귀한 이 지역을 위해 밤낮으로 천주님께 전구하는 순교자들의 수많은 기도에 천주님께서도 귀를 막고 계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다행한 변화를 확인하려면 5년 전의 과거를 돌이켜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당시에는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격려하기 위해 밤새 여행을 해야 했거나 또는 가마 안에 갇혀 있어야 했고 이러한 온갖 용의주도에도 불구하고 포졸들에게 잡힐 뻔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아주 변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새로운 교우촌들이 생겨났고 이제는 이 훌륭한 내포 지역의 교우촌들이야말로 제가 방금 말씀드린 내용을 입증하고 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시에도 천주교 신자들은 외교인들로부터 학대를 받고 비방을 당하였다. 두세 신부는 이런 어려움에 처한 교우들을 도왔다. 또한 공주에서 아내를 잃고 새롭게 삶을 시작한 목수인 형제 가족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이야기와 열정을 가진 청년이 가족과 함께 영세를 받은 이야기를 통해 두세 신부는 “천주님의 은총이라면 훌륭한 교우가 될 수 있다는 증거”를 계속해서 증거하였다. 또한 이 땅에 얼마나 깊이 있게 신앙이 뿌리내려 있는지를 보여 준 사례를 보고하였다.

 

78세의 한 할머니는 대박해가 있기 전에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성모송까지 배우고 그때부터 매일 몇 번씩 성모송을 바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4년이 흘렀으나 그간 한 명의 교우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녀는 늙어 노쇠해졌고 한편 천주님께서는 선의의 그 노파에 무관심하시지 않았습니다. 과연 어느 날, 그녀는 옛날에 알고 지냈던 한 여교우를 만났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더군다나 그곳에서 5리 떨어진 곳에 회장이 있는 교우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매일 이 공소를 걸어 다니며 저의 공소 때 영세를 받고자 경문과 교리를 배웠습니다. 과연 그녀는 제가 곧 공소에 도착하리라는 것을 벌써 알고 있었습니다. 공소를 방문한 날, 방안에 한 노파가 얼굴을 방바닥에 묻고 있었습니다. 저는 몇 가지 알아 본 다음에 그녀를 오게 했는데,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또 4명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하며 영세를 청했습니다. 찰고를 끝내고 영세 준비를 하라고 했을 때 그녀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 역시 그 노파 못지않게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한 이야기는 그 다음입니다. 드디어 영세의 순간이 되어 그 노파에게 마귀를 끊느냐고 묻자 그녀는 좀 놀라워하며 대답했습니다. 두번째 질문에는 더욱 놀라워했고 세번째 질문을 하자 그녀는 참을 수 없었던지, 27년 전에 마귀를 끊고 집에서 미신 행위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자신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느냐며 저에게 반문했습니다. 곧 방안에 저와 그 노파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웃음을 참지 못해 밖으로 나갔기 때문입니다. 웃지 못하는 사람은 저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매번 질문에 그녀에게 대답을 듣기 위해 15분을 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나이에는 쉽사리 잊는 법이어서 정말 시종일관 웃음판이었습니다!

 

 

 

<b>&lt;</b><b>아산 지역의 초기 공소 현황</b><b>&gt;(1883~1890</b><b>년</b><b>)</b>

 
<table>
<tbody>
<tr>
<td><b>공소명</b></td>
<td><b>설립 연도</b></td>
<td><b>신자수</b></td>
<td><b>현 지 명</b></td>
</tr>
<tr>
<td>갈산리</td>
<td>1883년</td>
<td>121</td>
<td>아산시 탕정면 갈산리</td>
</tr>
<tr>
<td>당개</td>
<td>“</td>
<td>41</td>
<td>영인면 창용리</td>
</tr>
<tr>
<td>공세지</td>
<td>“</td>
<td>37</td>
<td>인주면 공세리(걸매 포함)</td>
</tr>
<tr>
<td>뒷내</td>
<td>“</td>
<td>35</td>
<td>음봉면 동천리</td>
</tr>
<tr>
<td>마릿골</td>
<td>“</td>
<td>59</td>
<td>배방면 수철리 마리골</td>
</tr>
<tr>
<td>강정이</td>
<td>“</td>
<td>42</td>
<td>송악면 강장리</td>
</tr>
<tr>
<td>명지게미</td>
<td>1884년</td>
<td>21</td>
<td>송악면 수곡리(강정이 인근)</td>
</tr>
<tr>
<td>횟고모루</td>
<td>“</td>
<td>34</td>
<td>음봉면 덕지리 회굿머루</td>
</tr>
<tr>
<td>쇠재</td>
<td>1885년</td>
<td>158</td>
<td>영인면 성내리</td>
</tr>
<tr>
<td>개내</td>
<td>1888년</td>
<td>49</td>
<td>온양 5동(초사동) 개화내(갱티)</td>
</tr>
<tr>
<td>덕지</td>
<td>1889년</td>
<td>21</td>
<td>음봉면 덕지리(회굿머루 인근)</td>
</tr>
</tbody>
</table>
 

두세 신부는 내포지역의 신앙을 직접 보았고, 내포의 신자들은 1890년 본당이 설립될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으며, 이 상황을 두세 신부는 사목보고서를 통해 교회에 보고했으며, 마침내 1890년에 내포에 두 성당, 간양골(공세리)과 양촌(합덕)이 설립되게 된다.

 
<ol>
 	<li><b> </b><b>본당들의 설립</b><b>(1890</b><b>년</b><b>)</b></li>
</ol>
1889년 파스키에 주 신부와 퀴를리에 신부의 입국으로 선교사의 수가 22명이 되자, 교회는 1890년에 전국에 9개의 본당을 설립하였다.

 

서울 명동 천주교회, 본당 신부 프아넬(Poisnel, 朴道行)

서울 약현 천구교회, 본당 신부 두세(Doucet, Camille Eugén, 丁加彌)

충청도 신창 간양골 천주교회, 본당 신부 파스키에(Pasquir, 朱若瑟)

충청도 덕산 양촌 천주교회, 본당 신부 퀴를리에(Curilier, 南一良)

경기도 인천 제물포 천주교회, 본당 신부 앙드레(Andre, 安學古)

대구 가실 천주교회, 본당 신부 로베르(Robert, 金保祿)

부산 범일동 천주교회, 본당 신부 죠조(Jozeau, 趙得夏)

전라도 전주 천주교회, 본당 신부 보두네(Boudounet, 尹沙勿)

전라도 고산 되재 천주교회, 본당 신부 비에모(Villemot, 禹一模)

 

<b>① </b><b>파스키에 신부</b>

공세리 성당은 간양골에, 합덕성당은 양촌에 자리를 잡아 그 큰 발자국을 내딛게 된다. 간양골에는 파스키에 신부가 부임하고 양촌에는 퀴를리에 신부가 부임하였다. 간양골 초대 본당 파스키에(베드로) 신부는 1890년 4월 신창 간양골에 도착하였다. 간양골 본당의 관할 지역은 신창, 온양, 아산 공세리, 천안, 충세, 보산원, 직산, 목천, 충북 진천, 백곡, 안성, 평택, 안중 등이 있었다. 한국에 도착한 지 6개월 밖에 안되는 파스키에 주 신부는 각 공소 방문을 위하여 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한 해 동안에 156명을 내고, 1061명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1891년 5월 파스키에 주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이번 성신 강림 전 공소 방문을 청해와서 조선인 복장으로 떠나려 하는데 안내하러 온 회장이 수단을 입고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따라 수단을 입고 떠났는데 풍세면 삼태리 망골에서부터 온양까지 30여리 길을 20명의 교우들이 마중 나왔습니다.”라고 전했다. 파스키에 주 신부는 건강이 나빠짐에도 불구하고 넓은 지역을 돌며 성사 집행에 게으름이 없었다.

 

조선은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농민들이 착취를 일삼던 부패한 관리와 외세에 맞서며 대항했고, 이때 천주교는 외세로 인식되어 동학농민군에 의해 간양골과 양촌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조선의 파병 요청으로 들어온 일본 군대와 정부의 관군이 동학농민혁명군을 무력으로 격파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자생적 변혁 운동’ 이 좌초되었고, ‘관(官) 주도로 추진된 위로부터의 개혁’, 이른바 갑오개혁의 과정에서 을미사변, 을미개혁, 을미의병,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이런 사회적 현상 속에서 신자들과 비신자들은 모두 어려움을 겪었고, 비신자들은 자신들의 적대감을 천주교로 시선을 돌렸다. 파스키에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보낸 연말보고서에서 동학의 움직임과 천주교 선교사에 대한 반감에 얽힌 심각한 이야기를 보고한다.

외인들이 저에 관해 가장 악랄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래서 한두 달 전부 터 이 지방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몇몇 불한당들이 천주교인을 자처하며 또 주교님, 불란서 공사, 선교사에 의해 파견되었다고 허풍을 떨며 이 지방을 두루 다니며 빼앗긴 아내와 약탈당한 돈, 또는 강탈당한 토지를 되찾아 주겠다는 등 엄격한 정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요구까지 했습니다. 제가 그와 유사한 사건들에 한두 번 개입한 적이 있었으므로 외교인들은 그 사기꾼들이 지껄이는 거짓말을 쉽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엔 놈들의 협박에 떨었으나 난폭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소행에 격분한 나머지 결국 들고 일어났습니다.

신창군의 6개 지역에서 선비들을 선두로 3월 초에 읍내에 집결했습니다. 군수에게 대표를 파견하여 선교사와 천주교인들에 대한 엄한 훈령을 요구하게 했습니다. 군수는 우선 상황을 조사하여 양인에 대한 수긍할 만한 상소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확실한 범행에 대한 결정적 증거없이 양인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군중은 대표에게 “사또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시지 않으니 우리는 감사(監司)한테 가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우리가 직접 실력을 행사할 것입니다”고 말하게 했습니다. 군중들은 모임을 갖고 음력 2월 15일(3월 21일)에 다시 모여 그날로 모두가 제 성당을 습격하고 선교사와 천주교인들을 죽이고 발로 짓밟은 후에 저의 집에 불을 지르기로 결의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의 격분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직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합니다. 일부 조선 양반과 선비들이 때로는 노상강도들이 쓰는 방법보다 더 지독한 방법으로, 가장 난폭하고, 차마 입에 올리지도 못할 방법으로 민중을 착취하고 돈을 약탈하고 있는 악습을 주교님께서도 모르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들은 서울로부터의 경고 또는 이따금 교인들을 보호하고자 가끔 선교사들이 취한 대항 혹은 천주교인이건 아니건 몇몇 사기꾼들의 즉흥적인 반동 등으로 인해 종종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기꾼들은 천주교 불란서 공사의 이름을 빌어 여러 번에 걸쳐 완강하게 저항했으며 종종 상당액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고 그로 말미암아 이 지방의 양반들이 치욕과 불명예의 오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비나 양반들, 특히 그중 가장 완강한 사람들은 그 오점을 천주교인의 피로 씻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저는 못된 짓을 하고자 각하와 불란서 공사 그리고 저의 이름을 남용한 7명을 체포하게 하여 매를 때리고 군수에게나 서울로 보내게 했습니다. 그 처벌 행위는 외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21일로 결정된 집회가 예정대로 행해져 삼천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거의 지리멸렬되고 말았습니다. 우두머리들은 모습을 나타낼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계산착오였지요. 주모자들은, 다시 말씀드려 백성들에게 부정행위를 가장 많이 저지른 양반들은 구타를 당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잘 알려져 가장 눈에 뛴 감밭의 성윤복이란 자는 가장 악랄한 도둑놈으로 그 날 몸을 숨기느라 바빴습니다. 봉기의 주모자였던 그의 갓은 발기발기 찢겼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을 억압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오. 그런데 또 당신한테 희생당한 사람들을 처벌하게 하려 하는가? 양인으로 말하면 백성을 억압하기는 커녕 억압받는 자를 보호했다. 그는 범인들을 체포하여 법대로 처벌하게 했소. 그러니 왜 그에게 싸움을 걸고 그의 집을 부수러 가겠소?”

그러므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몇몇 외교인들은 간양골까지 와서 저에게 사과를 하고, 우정을 다짐하고 또 그들은 그 적대적인 집회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고 그들이 믿는 천지신명에게 맹세했습니다. 실제로 그 모임에는 온갖 계층과 온갖 신분의 사람들이 참석했다고 말했습니다. 요컨대 위험스러운 상황이 될 뻔했던 이 모든 사건은 결국 다른 모든 사건들처럼 우리 교회와 주님의 영광에 유익하게 끝났습니다. 또한 그것은 제 교우들과 저 자신에게까지, 의심많고 교만에 부풀은 외교인들과 접촉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신중하고 용의주도해야 한다는 경고가 될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우리에 대해 갖는 감정에 관해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이 모든 외국인에 대해 갖는 질투와 증오는 그 외국인이 신부일 때는 배가되어 격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격노하는 바다의 거센 파도가 해안의 절벽에 부딪치면 무력하게 부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옥의 격노도 교회라는 확고부동한 바위에 부딪치면 언제나 부수어지기 마련입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를 희망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지고의 격노입니다. 즉, 악마가 움직이면 그것이 좋은 신호이므로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그러면 고기가 많이 잡힐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신학적 이론보다 하나의 감격적인 사건이 더 잘 증명해 줍니다..............

베드로 파스키에

 

<b>② </b><b>간양골에서 공세리로</b>

Jozeau 신부가 1894년 7월 27일 공주에서 살해되고, 간양골과 양촌이 동학도들에 의해 파괴되자 파스키에 신부는 동학농민혁명의 후유증으로 잠시 홍콩으로 요양을 떠난다. 뮈텔 주교는 파스키에 신부의 후임으로 드비즈 신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동학도들에 의해 이미 간양골에 있던 선교사 집과 경당을 파괴했기 때문에 퀴를리에 신부와 신자들이 공세리에 사제관을 마련하게 된다.

간양골이 파괴된 후, 공세리에 성당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은 공세리 언덕이 파스키에 신부를 매혹한 것을 교회가 받아들인 것이다. 파스키에 신부는 공세리를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근처에 있던 공소에 갈 때마다, 보루 같은 성벽이 있는 언덕을 바라보고 이 지방 교회의 중심이 되었으면 하곤 했다. 파스키에 신부는 가장 큰 희망을 두는 신자 공동체를 우어리(직산)와 골뫼(걸매)로 꼽았다. 1889년에는 우어리 마을에는 교우가 한 집뿐이었는데 1894년에는 백 명 이상의 교우들이 자유롭게 천주교를 봉행하고 있었고, 바닷가에 있는 골뫼(걸매) 마을은 1866년 이전에 교우집이 약 50가구였는데 그 당시의 대박해로 말미암아 이 교우들이 흩어져서 200가구 이상 되던 이 큰 마을에서 교우집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교우들이 조금씩 그 마을로 돌아오기 시작하여 1890년에는 골뫼(걸매)에 교우집이 대여섯 가구가 되었으며 1894년에는 2배 이상이 되었으며 1895년에는 세 배 이상이 될 것으로 파스키에 신부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서너 너덧의 교우집이 최근에 그곳에 집과 땅을 샀을 뿐 아니라, 같은 마을의 외교인 네 집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영세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파스키에 신부는 골매(걸매)의 신자촌에 거처를 정할 생각을 자주 했다. 해변가에 위치하고 또 두 개의 큰 강이 삼각주(三角洲)를 이루는 지류(支流) 사이에 있는 이 마을은 땅이 매우 비옥하여 논농사가 다른 어느 곳보다도 잘 되었기 때문이다. 파스키에 신부는 성당터를 지금의 공세리 성당 자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파스키에 신부는 1894년에 이렇게 사목 보고서를 작성한다.

 

“마을 앞쪽 1/4 킬로미터가 될까말까한 지점에 아름다운 언덕이 있는데, 그것은 거기서 10리 떨어진 곳의 아산읍을 굽어보는 높은 산맥의 끝입니다. 산 정상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일찍이 그 안에 정부의 곡식 창고가 있었으나 지금은 황폐화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높은 곳에 아름다운 성당을 세우면 멋질 것이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공중 누각일까요?). 외교인들은 벌써 제가 그곳에 정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저를 찾으러 오지 않을까요?”(1894년 4월 6일 보고서)

 

공세리를 본당 부지로 선정한 두 번째 이유는 박해 시대가 끝났기 때문이다. 아직도 동학도와 의병, 관원이나 양반 중에 ‘서양’에서 온 종교를 참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자들은 더 이상 공식적으로 박해의 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자들이 산에서 담배 농사나 화전을 하는 비참한 생활을 버리고 벼농사를 하기 위해 숨어 있던 산골을 떠나는 시기가 온 것이다. 바닷가에 비옥한 땅이 많아 신자들은 거기에 살고 싶었고, 선교사들도 교회의 발전이 불가능한 산골 생활을 버리고 세상 속으로 나아갈 시기가 왔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선교사들의 편지에서 자주 언급되는 주제였고, 뮈텔 주교도 바랐던 변화였다. 셋째, 주교의 지침에 따라 선교사들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서로 쉽게 만나 성사를 통해 영적인 도움을 받는 장소이어야 했다. 배로 삽교천을 건너가면 양촌 신부와 공세리 신부가 쉽게 서로 방문할 수 있었다.

 

<b>③ </b><b>드비즈 신부의 부임</b><b>(2</b><b>대</b><b>,4</b><b>대 신부</b><b>)</b>

동학농민혁명은 간양골과 양촌에 큰 피해를 주었고, 요양을 위하여 파스키에 신부가 한국을 잠시 떠났기에 그의 꿈은 드비즈 신부가 이루게 된다. 양촌에 있던 퀴를리에 신부와 간양골 신자들은 뮈텔 주교와 상의해서 걸매 마을에 집을 얻어, 파스키에 신부의 후임자, 즉 드비즈 신부의 부임 준비 작업을 하였다. 드비즈 신부는 1894년 7월 1일에 사목지를 조선으로 배정받고, 7월 5일에 이렇게 뮈텔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나흘 전에 아름다운 땅 조선으로 배정받았습니다. 이제 저는 그 존경받는 땅에서 일하고, 그 많은 순교자들의 피에 저의 땀도 바치도록 불리움 받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선하신 분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하느님과 영혼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끊임없이 일하는 그리스도의 영웅적인 일꾼들 가운데 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기꺼이 마음속 깊이까지 살펴 저의 단점을 찾아내겠습니다. 제가 다른 곳으로 불리움 받기를 원한다고 하기에는 제가 아름다운 한국을 보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장상이 말씀하셨으니 아주 기쁜 마음으로 순명하겠습니다.

 

드비즈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여 하우개(하우고개,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청계리. 현재의 하우현 본당이 있는 곳)에서 교우들과 함께 지내며 한국말과 풍습을 배웠다. 1895년 4월 11일 하우개에서 뮈텔 주교에게 쓴 보고서에서는 그가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주교님, 하우개 회장이 서울로 가는 기회에 짧은 편지를 씁니다. 지겨울 정도로 일이 많아서 아주 짧게요. 끝없이 종부성사를 줍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마치 신자들이 제가 여기 머무는 기회를 이용해 죽기로 한 것 같습니다. 이미 7, 8명에게 종부성사를 주었습니다. 그 중에 몇 명은 죽었고 다른 이들은 살아 있지만 별 희망이 없습니다. 참으로 먼 거리입니다! 수리산에서 동막으로, 묘론이에서 손골로! 계속 이렇다면 모든 신자들에게 내 허락 없이 죽지 말라는 금령을 내리지 않는 한 저의 불쌍한 다리가 너무 빨리 닳아 없어지겠습니다. 여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습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제 방식대로 짧은 훈화를 해 줍니다. 주님의 수난에 대해 말해 줄 때에 그들이 흐느껴 우는 것을 보면 제 말을 잘 알아듣는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이젠 사방에서 성사를 달라고 부탁이 옵니다. 2, 3일씩 공소방문을 해 달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야 할지, 혹은 피정을 기다리며 조용히 집에서 쉬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 신자들이 어찌나 성체를 모시고 싶어 하는지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 잔인하게 여겨집니다.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필사적으로 사목에 몰두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주교님의 조언이 있었으면 합니다. 또한 짐을 꾸리고 피정 때에 다 가져가야 하는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파스티에(Pasquier, 주약금) 신부가 무사히 한국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습니다. 완전히 회복되었나요?

 

1895년 드비즈 신부가 부임하였지만 관할 지역이 넓어서(충남 아산군, 천안군, 공주군, 경기도 평택군, 안성군, 충북의 진천군) 신부가 공세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1897년에 공주본당과 1901년에 안성 본당이 공세리에서 분할 된 후, 비교적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공세리 본당과 양촌에서 1899년에 이동한 합덕 본당과 공주본당이 충남에 있는 천주교회의 기반을 든든하게 마련하였다.

 

또한 한국인 사제 6명이 탄생하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열 명이 조선으로 파견되면서 본당 관할지역이 축소되면서 사제들이 본당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신자들이 ‘우리 신부님’이란 표현을 쓰게 되었다.

1895년 6월 10일 드비즈 성 신부는 양촌 본당 퀴릴리에 신부의 안내를 받으며 서울을 출발하여 오후 늦게 걸매나루에 도착하여 걸매리 장안드레아 신학생 집에서 첫날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9시에 말을 타고 교우들의 옹호를 받으며 공세리에 도착하였다.

 

퀴를리에(Curlier, 남일량) 신부와 함께 한 여행은 밤에 걸매에 도착한 것을 빼놓고는 모든 면에서 아주 잘 되었습니다. 조수가 좋지 않으면 밤중에 나루를 건너는 것이 위험하다는 경험을 했습니다. 장 안드레아 신학생의 아버지 집에서 밤을 보냈습니다. 이튿날 9시 경에 걸매와 공세지의 신자들과 함께 말을 타고 공세지 본당에 화려하게 입성했습니다. 우리 행렬을 보는 외교인들도 대단히 놀랐습니다. 모두들 문 밖으로 나왔습니다. 신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들이 저와 제가 타고 온 말에 대해 말이 많다고 합니다. 제 말을 보고 전전긍긍합니다.

이때까지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됐습니다. 우선 신자 집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집값이 다 지불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벼룩, 빈대, 이, 모기가 얼마나 많은지요. 이 작은 해충들에게 물려죽는 줄 알았습니다. 팔다리가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런데도 열흘 이상 그 집에서 보내야 했다니! 다행히 이젠 추억이 되었을 뿐입니다.

 

다음에는 입주의 고생이 찾아왔습니다. 구입한 집은 지불한 값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3만 냥으로 이런 집을 지을 수 없답니다. 제가 보기엔 믿을 만한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도착할 때에 집이 얼마나 더러웠는지 모릅니다! 시간과 돈이 있으면 차차로 모든 것이 정리되겠지요. 돈 이야기 나왔으니 말인데, 환전한 것을 쉽게 찾을 줄 알았으나 불행이도 헛수고를 했습니다. 퀴를리에 신부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함께 나누어 쓰자고 원머리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기가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을 제게 나누어 주는 것인데 곧 돈이 올 겁니다. 저는 아직 바닥이 나지 않았고 먹을 것도 다 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이제 시작이니 선교 생활의 맛을 조금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즐기고 편히 살기 위해 조선에 온 것이 아닙니다.

요새는 저의 살림을 차리는 중입니다. 가마솥, 그릇, 항아리, 쌀, 등등. 돈이 어디서 생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 집, 특히 지붕을 급히 수리해야 하는데 500냥 쯤 듭니다. 또한 겨울이 오기 전에 경당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닐 듯합니다. 6칸짜리 아주 좋은 마루, 2칸짜리 방, 2칸짜리의 또 다른 마루를 가지고 서울의 경당보다 훌륭하게 꾸밀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이 있어야 하는데 문을 짜려면 나무가 있어야 합니다. 이곳에서 나무는 비쌉니다. 환전을 할 수 만 있으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입니다.

 

드비즈 성 신부가 공세리에서 성당으로 사용할 집은 공세리 281-1번지에 10칸 되는 기와집으로 지붕과 방, 마루를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다. 뮈텔 주교는 3대 신부인 기낭 신부 때 공세리를 방문(1896년)하여 다음과 같이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

이러한 드비즈 성 신부의 활동은 처음 보는 서양 사람에 대한 이 지방민들에게 화젯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하며 한 번 건드려 보고자 하는 양반들도 있었다. 한번은 공세리 유지들 10명이 담뱃대를 들고 성당 안에 들어오더니 신부더러 “우리에게 인사하라” 라 등의 무례한 행동을 했다. 이를 본 교우들이 달려와 그들을 성당 밖으로 내쫒았으나 3일 동안이나 찾아와 신부에게 욕을 하며 행패를 부렸다. 드비즈 성 신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아산 군수에게 이들을 처벌해 달라고 편지를 써 보냈다.

 

드비즈 성 신부의 편지를 받은 아산 군수는 “나라 법에 양인(洋人)들에게 해를 부리지 말라 했는데 어기는 이자들은 죽어 마땅하다. 내가 공세리에 가서 신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겠다.”라고 말하며 가마를 타고 드비즈 성 신부를 찾아왔다. 드비즈 성 신부는 아산 군수에게 과일과 프랑스산 포도주로 반가이 맞이하니 아산 군수는 “감사하다”하고 인사를 하며 마을 유지들을 불러놓고 말하기를 “앞으로 공세리 신부(洋大人)에게 그런 짓을 하는 자를 엄벌하겠노라, 이번 사건은 내가 군민을 잘 다스리지 못한 탓이다”며 돌아갔고, 다음날 아산 군수는 공세리 드비즈 성 신부에게 행패를 부린 자들을 모두 잡아다가 40대씩 매를 때리고 큰 칼을 씌워 옥에 가두며 국법을 어긴 죄를 뉘우치게 하였다. 이때부터 아무리 공세리 본당의 드비즈 성 신부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다.

 

드비즈 성 신부는 차츰 이곳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타지역에서 30여 가구의 교우들이 공세리로 이주해 옴에 따라 성 신부는 전교 활동에 큰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8월 20일 한양에서 일어난 국모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11월 15일(양력 1895년 12월 30일) 고종 임금이 상투를 자르고 전국에 단발령을 내리는 등 국내 정세의 어려운 사정으로 전교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1895년 일본이 낭인들을 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고 친

일 관료들을 앞세워 단발령이 내려지자, 홍주지역에서는 일제의 침탈에 맞선 항일 의병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김복한, 이설, 홍건 등의 전직 관료들과 안병찬, 임한주 등 지역 출신 유생들이 앞장서서 일으켰다(을미의병, 1차 홍주의병). 이들은 음력 1895년 12월 3일(양력 1896년 1월 16일) 김복한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읍성에 진입, 창의소를 설치하고, 홍주부관찰사(洪州府觀察使) 이승우(李勝宇, 1841~1914)와 지방 관리들을 협박해 동참하도록 했다. 이어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 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참여를 독려했으며, 고을 대표들은 집을 방문해 노약자와 독자를 제외하고 각호에 한 사람씩 응모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다음날 이승우가 배반하고 김복한, 이설을 비롯한 의병 지도부를 체포해 가두면서 의진은 해산되었다. 당시 이승우는 의병에 나서지 않으려고 했지만, 김복한과 이설 등 의병을 주도한 지역 유림들이 의병에 반대하던 홍주부 참서관(參書官) 함인학(咸仁鶴)을 핍박해 내쫓고 경무관(警務官) 강호선(姜浩善)을 구타하며 이승우를 비난하자 마지못해 응했는데, 이들 몰래 이승우가 중앙의 관리들과 내통하고 지도부들을 체포한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1차 홍주의병은 막을 내렸고, 체포된 지도부 23명은 서울로 이송되어 한성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아 이들 중 김복한은 유배 10년, 홍건, 이상린, 송병직, 안병찬 등은 징역 3년, 이설은 곤장 60대에 처해 졌으나 고종의 명령으로 전원 석방되었다.

 

이러한 불안전한 국내 정세 속에서 1895~1896년에는 본당 본연의 복음선포 활동은 지속되었지만 넓게 분포된 공소 방문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당시 공세리 본당의 공소는 ‘선장, 오룡동, 인주 냉정리, 탕정 가리산이, 덕지, 음봉 뒷내, 배방 남골, 도고 버들, 예산 숫골, 간냥골, 예산 낙포, 직산 새터, 주막거리, 월경, 성환 국말, 천안 부원골, 보산원, 느진목이, 해사동, 목천 서들골, 매일골, 진천 베티, 삼박골, 새터, 새울, 용진골, 평택, 안성’ 등 본당을 제외한 26개의 공소가 광범위한 지방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비즈 신부의 사목열정은 1년간 87명의 영세자와 166명의 예비신자를 교회로 인도하였다.

 

<b>④ </b><b>드비즈 신부의 사목 활동</b><b>(2</b><b>대</b><b>, 4</b><b>대</b><b>)</b>

드비즈(Emile Pierre Devise, 성일론 에밀리오, 1871~1933년) 신부는 프랑스 남부 론알프(Rhone-Alpes)의 아르데슈(Ardeche) 지방에서 태어나 1894년 8월 29일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사제품을 받고 같은 해 10월 23일 제물포를 통해 한국에 입국했으며, 10월 25일에는 서울 명동 주교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경기도의 하우고개 공소로 가서 한국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다가 1895년의 연례 피정이 끝나는 5월 5일에 공세리 본당의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재임 1년도 되지 않은 1896년 4월, 코스트 신부가 선종하면서 교구 경리 신부로 전임되었다. 드비즈 신부의 인사이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드비즈 신부는 공세리 본당의 미래에 대한 계획과 희망을 갖고 있었고, 본당 신자들도 드비즈 신부의 인사이동을 몹시 아쉬워하였다.

새로 입국한 기낭(P. Guinand, 베드로) 신부가 공세리 본당의 3대 주임신부로 임명되어 1896년 4월 30일 드비즈 신부의 안내로 서울을 떠나 공세리 본당에 부임하였다.

교구장 뮈텔 주교는 1897년 5월 8일에 발표된 인사 이동 때 비에모(Villemot,) 신부로 하여금 교구 경리를 맡도록 하고, 공세리 본당의 3대 주임 기낭 신부를 공주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면서 드비즈 신부를 다시 공세리 본당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1897년 5월 17일에 서울을 떠나 다음날 공세리에 도착한 4대 주임 드비즈 신부는 이후 1931년 7월 5일에 만 60세까지 35년 동안 공세리 본당 주임으로 사목하였다. 2대 주임신부로 재임한 기간을 더하면 36년 동안 공세리에 재임한 것이고, 내포에서 가장 오래 사목을 한 사제이다. 드비즈 신부는 선교사로서 공세리 본당의 사목에 일생을 바친 셈이다. 드비즈 신부는 서울 주교관에 거처하다가 1933년 병으로 귀국했으며, 같은 해 8월 31일 고향 비비에르 교구의 아르데슈 림프스에서 선종하였다. 드비즈 신부는 공주와 안성을 본당으로 분가하여 설립되도록 하였다.

 

공세리 본당에서는 설립 초기부터 충청남도의 북쪽과 북서쪽 즉 아산·직산·천안·신창 지역은 물론 충북의 진천·공주 일부 지역도 관할했으며, 그 결과 간양골 본당 시절의 아산(온양) 지역 공소 즉 본당으로 승격된 공세리(걸매)를 제외한 갈산리·뒷내·명지게미·당개·덕지·가래기·남골 등 7개 공소는 모두 공세리 본당 소속이되었다. 이후 드비즈·기낭 신부는 아산 지역에서 냉정리·버들·숫골·절골·쇠일 등 5개 공소를 신설하고, 당개·남골의 2개 공소집을 각각 인근의 오룡동(당개)·의식동(남골)으로 이전하였다. 1898년 이후 이 지역 공소들은 공세리 본당, 합덕 본당, 공주 본당 소속으로 구분되는데, 그 이전까지 신설된 공소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table>
<tbody>
<tr>
<td><b>공소명</b></td>
<td><b>설립 연도</b></td>
<td><b>신자수</b></td>
<td><b>본당</b><b>(</b><b>선교사</b><b>)</b></td>
<td><b>현 지 명</b></td>
</tr>
<tr>
<td>기존 공소</td>
<td colspan="4">갈산리, 뒷내, 명지게미, 당개, 덕지, 가래기, 남골</td>
</tr>
<tr>
<td>오룡동(당개)</td>
<td>1895년</td>
<td>50</td>
<td>공세리(드비즈)</td>
<td>영인면 창용리(당개 인근)</td>
</tr>
<tr>
<td>냉정리</td>
<td>“</td>
<td>29</td>
<td>“</td>
<td>인주면 냉정리</td>
</tr>
<tr>
<td>버들</td>
<td>1896년</td>
<td>46</td>
<td>공세리(기낭)</td>
<td>도고면 신유리(일명 ‘유동’)</td>
</tr>
<tr>
<td>숫골</td>
<td>“</td>
<td>51</td>
<td>“</td>
<td>도고면 화천리</td>
</tr>
<tr>
<td>절골</td>
<td>1897년</td>
<td>24</td>
<td>공세리(드비즈)</td>
<td>송악면 강당리</td>
</tr>
<tr>
<td>쇠일</td>
<td>“</td>
<td>43</td>
<td>“</td>
<td>염티면 방현리</td>
</tr>
<tr>
<td>의식동(남골)</td>
<td>1898년</td>
<td>72</td>
<td>“</td>
<td>배방면 세출리 옷밥골(남골 인근)</td>
</tr>
</tbody>
</table>
<b>&lt;</b><b>공세리 본당 초기의 아산 지역 공소 현황</b><b>&gt;(1895~1898</b><b>년</b><b>)</b>

 

1898~1899년 이후 공세리 본당의 관할 지역 중에서 북부 지역(곡교천 이북 지역)은 그대로 공세리 본당의 사목 관할 지역으로 남았지만, 남쪽 일부 지역(곡교천 이남 지역) 즉 신창·배방·송악 지역은 합덕(양촌) 본당과 공주 본당에서 주로 관할하게 된다. 실제로 1898년에는 합덕 본당의 퀴를리에(남 레오) 신부가 아산 지역의 명지게미 공소집을 ‘머리서리’(송악면 수곡리)로 이전하였고, 1901년에는 ‘느랭이 공소’(도고면 도산리 옹기점)를 신설하였다. 또 1909년에는 공주 본당의 제4대 주임 루블레(H. P. Rouvelet, 헨리) 신부가 ‘깊은골 공소’(송악면 유곡리, 일명 ‘유곡 공소’)를, 합덕본당의 3대 주임 크렘프(H. Krempff, 헨리) 신부가 1909년에 ‘감밭 공소’(도고면 시전리)와 1910년에 ‘늘안말 공소’(아산시 온양6동의 남리)를 설립하게 된다. 이어 공주 본당의 임시 주임 이종순(, 요셉) 신부는 1917년에 ‘공수리 공소’(배방면 공수리, 일명 ‘모산 공소’)를 설립하였다. 한편 공세리 본당의 드비즈 신부는 1900년에 ‘더러미 공소’(둔포면 관대리, 일명 ‘둔포 공소’), 1902년에 ‘백석포’(영인면 백석포리) 공소와 ‘곡교 공소’(연치읍 곡교리, 일명 ‘중군말 공소’), 1913년에 ‘발산리 공소’(음봉면 소동리, 일명 ‘소동 공소’), 1916년에 ‘신중리 공소’(영인면 신운리) 등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17~1918년 무렵에는 각 본당에서 관할하는 아산 지역 공소들의 구분이 어느 정도 확정되었다. 다음의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당시의 사목관할 지역을 살펴보면, 성당이 위치한 공세리 지역을 비록하여 방현리(염치읍의 쇠일), 동천리(음봉면의 뒷내), 소동리(음봉면), 관대리(둔포면의 더러미), 창용리(영인면의 당개), 걸매리(인주면의 걸매) 등 6개 공소는 공세리 본당 소속이었다. 그리고 시전리(도고면의 감밭), 신유리(도고면의 유동), 도산리(도고면의 느랭이) 등 3개 공소는 합덕본당 소속이고, 유곡리(송악면의 깊은골), 세출리(배방면의 남골), 공수리(배방면의 모산) 등 3개 공소는 공주 본당 소속이었다.

 

<b>&lt;1917~1918</b><b>년의 아산 지역 공소 현황</b><b>&gt;</b>
<table>
<tbody>
<tr>
<td><b>본당명</b></td>
<td><b>관할 공소</b><b>(12</b><b>개의 공소</b><b>)</b></td>
<td><b>신자수</b></td>
</tr>
<tr>
<td>공세리</td>
<td>방현리(염치읍 쇠일), 동천리(음봉면 뒷내), 소동리(음봉면), 관대리(둔포면 더러미), 창용리(영인면 당개),

걸매리(인주면 걸매)</td>
<td>765명(공세리 포함)</td>
</tr>
<tr>
<td>합덕</td>
<td>시전리(도고면 감밭), 신유리(도고면 유동)

도산리(도고면 느랭이)</td>
<td>233명</td>
</tr>
<tr>
<td>공주</td>
<td>유곡리(송악면 깊은골), 세출리(배방면 남골)

공수리(배방면 모산)</td>
<td>199명</td>
</tr>
<tr>
<td colspan="2">신자수</td>
<td>1.197명</td>
</tr>
</tbody>
</table>
<ol>
 	<li><b> </b><b>성전 건립</b></li>
</ol>
드비즈 신부는 1895년과 1899년에 한옥 성당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마침내 현재의 공세리 성당을 완공했다.

 

<b>4.1. </b><b>첫 번째 성당</b>

1895년 5월 드비즈 신부가 공세리에 매입한 집(현 공세리 281-1번지)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집이지만 10칸 정도의 한옥 와가로 제법 컸던 것 같다. 그는 6월 20일경에 매입 잔금을 모두 치르고 그곳으로 가서 정착한 뒤 집을 수리하였고, 이어 성당 공사를 시작하여 겨울이 되기 전에는 이를 완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록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저는 한 교우집에 정착했습니다. 집을 살 돈을 아직 다 치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그런 곳에서 열흘 가량을 더 지내야 했습니다.·····이제 저는 가마솥이며 각종 항아리, 쌀 등을 조금씩 갖추기 시작했습니다.·····집 수리가 아주 급합니다. 특히 지붕이 그러한데 500냥이 들 것입니다. 또 겨울이 오기 전에 성당도 지어야 하는데, 그 일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여섯 칸짜리 넓은 마루, 두 칸짜리 방 하나, 또 두 칸짜리 마루, 이 정도면 서울도 부러워할 만한 성당이 될 것입니다. 문틀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을 만들려면 목재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성당 문을 다는 일과 또 담을 쌓는 일을 하는 중입니다. 저는 여교우를 위해 문도 해 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들은 제 집에 들어와 저의 사랑채(즉 사제관) 앞을 부득이 통과해야 했는데, 외교인들이 그것을 이상한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음 피정이 끝나자, 제 성당에 성체를 모실 생각을 매일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의 성당은 아주 아담하고, 아주 예쁜 성당이 될 것입니다. 이미 5~6명 신부의 살림살이를 목격한 교우들은 제가 가장 잘 정착했다고 말합니다. 만일 제가 성당에 성체만 모신다면, 거의 아니 정말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코스트(E. Coste,) 신부로 하여금 저를 위해 상해에 제대를 하나 주문하도록 그에게 동봉한 편지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드비즈 신부는 1895년에 공세리의 첫 번째 성당을 완공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희망했던 대로 제대를 갖추고 성체를 모실 감실을 마련하기 전에 교구 경리 신부로 전임되고 말았고, 그의 희망은 3대 주임 기낭 신부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면 드비즈 신부가 1895년에 완공한 공세리의 첫 번째 성당 겸 사제관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이는 1896년 10월 24일부터 26일까지 공세리 성당을 방문한 뮈텔 주교가 자신의 일기에 기록해 놓은 평면도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다음에서 보는 것처럼 새 건물은 성당·침실·제의방·손님방·부엌·마부방·마구간·곳간·화장실·우물 등을 갖추고 있었다.

&lt;공세리 첫 번째 성당 평면도&gt;

 
<ol>
 	<li>침실 2. 식당 3. 통로 4. 성당 5. 제의방 6. 제의방 후부 7. 제의방 후부 뒤쪽</li>
 	<li>부엌 9. 마부방 10. 대문 11. 손님방 12. 마구간 13. 곳간 14. 곳간 15. 변소</li>
 	<li>큰문(대문) 17. 여자 출입문 18. 우물 19. 안마당 ▨ 마루방</li>
</ol>
‘ㅁ’자형의 한식목구조의 기와집과 사제관(신부 침실)은 남향에 배치하고, 그 외 부속실을 북향으로 배치하였다. 동쪽에 큰문(16.대문)을 두고 서쪽에는 드비즈 신부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여교우들이 드나드는 여자 출입문(17)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우물(18)은

건물의 외부에 위치하고, 화장실(15)은 담장 외부로 돌출되게 배치하여 문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성당은 사제관과 연결되었으며 한옥의 대청 부분을 이용하였다. 내부는 벽 없이 공간을 조성한 것으로 가운데 장막을 쳐서 남녀석을 구분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한옥성당의 내부공간은 하나의 공간으로 트여있으며 내부에 두 개의 고주만 두어 전체공간을 좌우로 구분하는 경계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구조적으로는 좌우에서 오는 대들보를 받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 휘장을 걸어 남자와 여자의 공간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성당의 출입구는 남녀공간으로의 진입을 위한 배려로 보인다. 내벽을 전후로 벽제대와 제의방(5), 제의방 후부(6)을 두었고, 제의방 후부 뒤쪽(7)은 보통 오래된 성당들이 그러하듯이 고해실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바깥쪽으로는 출입문과 툇마루가 위치하고 있으며, 성당의 남측에도 툇마루가 위치하고 있다. 성당 좌측에는 사제관(1)과 식당(2), 연결통로(3)를 두었다. 부속실로 손님방(11), 마굿간(12) 및 마루방(9)을 두고 있다.

 

 

<b>4.2. </b><b>두 번째 성당</b>

1897년 5월 8일 공세리 본당의 4대 주임을 임명되어 다시 공세리에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무엇보다 먼저 옛 공진창이 있던 장소, 즉 공세창성 내의 높은 언덕(현재의 공세리 성당 부지)을 매입하는 데 노력하였다. 일찍이 파스키에 신부가 성당을 건립하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 바로 그 장소로, 드비즈 신부는 장차 이곳으로 성당과 사제관을 이전할 생각이었다.

당시 드비즈 신부가 매입하려 했던 옛 공진창 부근의 대지 소유자는 조출명이었다. 그런데 그는 1797년 초에 이를 조화심에게 이를 팔았고, 조화심은 다시 교우 강응칠에게 이를 판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로 이 땅을 매입한 것은 드비즈 신부였다. 이렇게 부지 매입이 성사된 뒤 드비즈 신부는 같은 해 3월 초부터 한옥 와가 성당 겸 사제관 공사를 시작했으며, 1898년 5월 29일에 있은 명동대성당 축성식과 5월 31일~6월 4일에 있은 피정에 참석하고 돌아온 뒤 먼저 완공된 새 사제관으로 거처를 이전하였다. 당시 새 사제관은 멀리사는 사람들이 구경하러 올 정도로 그 지방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흥밋거리였고, 드비즈 신부는 이러한 현상 자체가 좋은 선교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정부에서는 이 무렵 아산군수의 보고를 통해 옛 공진창 터가 교회측에 매매되고, 그곳에 새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1898년 4월에는 외부대신 조병직 명의로 프랑스 공사 플랑시(plancy,)를 통해 교회측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공사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으며, 뮈텔 주교는 드비즈 신부의 서류를 건네받아 플랑시(Plancy,)를 통해 교회측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공사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으며 뮈텔주교는 드비즈 신부의 서류를 건네받아 플랑시 공사에게 전달하였다. 이때 플랑시 공사는 매매 서류를 검토한 뒤 ‘합법적으로 매입한 땅이고, 잘못이 있다면 매도자에게 있는 것이지 매수자인 강응칠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하면서 중단할 수 없다고 항의하였다. 실제로 옛 공세창성 안에는 비어 있는 창고와 창고 터뿐만 아니라 김화심의 집과 밭을 비롯하여 수많은 가옥과 개인 소유의 밭들이 들어서 있었고, 북쪽의 성 밖에는 개인 무덤들도 4기가 있었다. 건물을 지을 수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었던 것이다.

<b>공세지</b><b>(</b><b>공진창</b><b>) </b><b>당시 배치도</b><b>(</b><b>프랑스외교문서철</b><b>,1898</b><b>년도 드비즈 신부 보고 문서</b><b>)</b>

 

정부에서는 1898년 6월 다시 한번 교회측에 항의 문서를 보내 건물을 철거하라고 지시하면서 드비즈 신부의 이주도 권고하였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뮈텔 주교는 플랑시 공사에게 공세리 사건과 관련된 2차 보고서를 건네주었고, 플랑시 공사는 7월 19일 ‘이미 공세창성 안에는 많은 경작지와 가옥이 있다’는 사실과 ‘아산군의 아전 이석민은 오래 전부터 조화심에게 세금을 받아왔다’는 사실 등을 들어 정부의 요구가 옳지 않다는 것을 설명함과 동시에 조사관을 공세리로 파견하자고 조선 외부에 요청하였다.

<b>① </b><b>아산군수 공세리성당 신축 진상보고</b>

 

 

<b>광무</b><b>2</b><b>년</b><b>(1898)4</b><b>월</b><b>17</b><b>일</b><b>. </b>아산군 관문에서 서쪽으로 10리 大迺山(대내산)의 공세창에 祈雨祭壇(기우제단)과 古城(고성)이 있고, 이곳 기우단에 프랑스인이 정부의 토지에 성당신축 터를 잡고 기초석 공사를 하고 있어 관리를 보내 공사를 중지시켰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부지가 아님을 이유로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있어 관찰사를 경유하여 외무대신께 진상 보고하오니 처리결과를 회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b>② </b><b>외무대신 회신</b>

 

<b>외무대신 지령</b><b>1</b><b>호</b><b>. </b>

충남도의 보고를 접하고 프랑스공사에게 사실조회 중이며 아산군수가 우선 공사를 중지하였다 하니 조회결과의 회신이 오면 처리코자 함

<b>③ </b><b>드비즈</b><b>(</b><b>성일론</b><b>) </b><b>신부 의견서</b>

 

<b>광무</b><b>2</b><b>년</b><b>(1898) 4</b><b>월 </b><b>23</b><b>일 </b><b>貢湖館</b><b>(</b><b>공호관</b><b>) </b><b>대법국선교사 </b><b>成一論</b><b>(</b><b>성일론</b><b>)</b>

현재 공세창 산(산)위는 牛馬場(우마장)으로 사용하고, 다만 창고는 빈공터로 남아 있으며, 이곳 주변 토지는 백성과 국가를 위해 사용하고 있으며, 산 정상 토지는 밭으로 사용 식량을 조달하고 있고, 산 아래에 조성된 민가는 사람들이 거주하니 국가의 토지에 백성이 거주해야 하고 천주교 성당이 조성되어 기도하는 곳으로, 또한 천주교가 국가에 넓게 봉사하는 것이니 이는 즉 하느님을 밝게 섬기는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 아닌가? 모든 백성의 구제함이 萬國(만국)의 당연함이거늘, 어찌하여 아산군수가 지금에 와서 공사를 못하게 하는가? 그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예의를 갖추지 못하였지만 자세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b>④ </b><b>외부대신 처분통보</b>

 

<b>광무</b><b>2</b><b>년</b><b>(1898) 5</b><b>월 </b><b>11</b><b>일</b>

충남관찰사의 조사 보고로 공세창 뒤 기우제단에 성당 신축공사에 있어 경성주재 프랑스공사의 조회결과는 드비즈(성일론)선교사가 운영하는 건축공사로 선교사 자위로 간 것이 아니고 姜應七(강응칠)이 사용하는 건물로 제반조건을 갖추어 적법하게 하였기에 충남 관찰사에게 훈령하니 즉시 아산군수에게 지시토록 하기 바람

 

 

<b>⑤ </b><b>아산군수 조사보고</b>

 

<b>광무</b><b>2</b><b>년</b><b>(1898)6</b><b>월</b><b>2</b><b>일</b>

프랑스공사의 조회결과를 보고 이에 대한 사실조사를 하여보니 사실과 같지 않았습니다. 선교사가 처음 땅을 구입하지 않았고, 姜應七(강응칠)은 선교사가 성당부지로 땅을 살 것으로 여기고 趙化心(조화심)에게서 그 땅을 매입하여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매과정을 보면 공세창기지 관리인 趙出明(조출명)이가 趙化心(조화심)에게 땅을 전매하였고, 조화심은 강응칠에게 또한 전매를 하였습니다. 불법 전매자 趙出明(조출명)은 도피한 상태로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사실조사 내용(左開) 총 5매 중 2〜5매는 생략함)

<b>⑥ </b><b>공세창부지 불법전매 발생 진행형들</b>

 

 

<b>광무</b><b>8</b><b>년</b><b>(1904) 5</b><b>월 </b><b>19</b><b>일 외부장관 회신</b>

1898년도 공세창기지의 토지의 불법전매와 함께 그 후 1904년도에도 공세창부지의 불법전매가 이루어졌습니다. 조선주재 프랑스공사의 조회를 접한즉 평리원장의 훈령에 공세리 거주 선교사(성일론)의 복사 姜斗永(강두영)도 불법 전매한 토지를 매입하게 되어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과정을 보면 평택군에 거주하는 崔子化(최자화)의 첩 朴召史(박소사)가 최자화의 처 崔召史(최소사)로부터 전답문권을 강탈하여 경성에 거주하는 洪召史(홍소사)에게 전매하고, 홍소사는 공세리 성당 복사 강두영에게 부지를 전매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난1897년도와 1903년도에 프랑스공사와 조선정부간의 협의하여 성당건축행위와 주변부지 토지 취득을 인정하고 다시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조선정부의 외교상 신뢰문제로 타당하지 않음을 통지합니다. 법부대신께서는 살펴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b>⑦ </b><b>공세리 성당신축과 부지 확보과정의 문헌발굴과 내용분석</b>

공세리 성당 신자로 추정되는 姜應七(강응칠)과 趙化心(조화심)이가 무단으로 경작하던 국가 부지를 매매계약을 체결하여 강응칠 가옥으로 건축하여 성당의 건물로 사용하게 되었다. 강응칠이 기우단의 부지를 취득한 동기는 드비즈(成一論)선교사가 성당의 부지로 매입 한 것이다. 이러한 부지 취득과정으로 姜應七(강응칠)은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주변의 田(전)은 공세창 운영시 건물지와 창고지기인 趙出明(조출명)이 冒耕(모경 :무단경작)했던 풀밭으로 국가의 토지를 趙出明(조출명)이 그 부지를 임의로 姜應七(강응칠)에게 전매하고 가족을 데리고 逋身(포신: 도망감)하여 행불된 상태였다.

또 다른 토지전매가 이루어졌는데, 평택에 거주하는 崔子化(최자화)가 부당하게 취득했던 성당 내 국가소유 부지를 崔子化가 사망하자, 妾 朴召史(박조이)가 복사 姜斗永(강두영)과 함께 최화자의 본부인 崔召史(최소사)의 田畓文券(전답문권)을 빼앗아 경성에 사는 洪召史(홍소사)에게 전매하여 姜斗永은 이후 성당부지로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사기전매에 가담한 崔召史(최조이)와 복사 姜斗永(강두영)을 체포하라는 평리원의 지시가 있어 아산군수는 강두영을 체포하고자 하였으나, 드비즈(成一論) 선교사의 반대로 불가능하다고 보고되고 각 부서에서 당분간 결정을 보류하게 되었다.

드디어 공세리 성당건축과 주변부지 취득처리 최종결정(1904년5월19일 법부대신으로부터 최종 결정통보)이 통보되었다. 성당건축부지 확보와 건축행위, 주변 토지확보 과정이 국가의 관리소홀로 무단경작과 개인토지로 둔갑하고 개인과의 많은 전매를 가져와 되돌리기는 상당히 어려운 여건임을 감안하여, 1897년과 1903년11월 서울 주재 프랑스공사와 조선정부의 협의로 공세리 성당의 건축행위와 주변 부지의 취득을 인정하였다. 다시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조선정부와 프랑스공사와의 외교상 신뢰의 문제로 타당하지 않다는 최종회신을 하였다.

 

이후. 정부는 더 이상 드비즈 신부의 부지 매입과 성당 겸 사제관 공사를 문제삼지 않았고, 그래서 드비즈 신부는 같은 해 6월 새 사제관으로 거처를 옮긴 뒤 성당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b>⑧ </b><b>두 번째 성당의 완공</b>

1899년 8월 말에는 마침내 성당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에 드비즈 신부는 합덕 본당의 퀴를리에 신부와 함께 새 성당과 14처를 축성하였으니, 이것이 공세리 본당의 두 번째 성당으로, 그 완공은 파스키에 신부의 희망이 4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 다음의 평면도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당시의 한옥 성당 겸 사제관은 성당·제의방·고해실, 침실(사제관)·손님방·식당·진열실, 창고·부엌·사랑채·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었다.

&lt;공세리 두 번째 성당 평면도&gt;

두 번째 성당은 사제관(침실)건물이나 부속 건물(사랑방 및 창고)과 떨어져 있는 한옥 단독 건물을 성당으로 사용하였고, 성당 제대부의 양쪽에는 날개를 달아 각각 제의방과 고해실로 사용하였다.

 
<ol>
 	<li>침실, 2. 손님방, 3. 식당, 4. 진열실, 5. 창고와 화실(아궁이), 6. 작은 광, 7. 부엌, 8-9. 사랑방, 10. 창고, 11. 하인방, 12. 화실(아궁이), 13. 화장실, 14. 대문, 15. 헛간, 16. 외양간, 17. 성당, 18. 제의방, 19. 고해실, 20. 정자, 21. 화장실, 22. 여자 출입문, 23. 남자 출입문</li>
</ol>
<table>
<tbody>
<tr>
<td></td>
<td></td>
<td></td>
</tr>
</tbody>
</table>
뮈텔 주교의 1900년 1월 2일자 일기에 ‘신부 댁은 드비즈 신부에 의해 곡성재라고 불리는 언덕 꼭대기로 옮겨졌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곡성재는 공세창성 내 위치한 언덕을 말하며, 실제로 드비즈 신부는 1898년 5월 29일 성령 강림 대축일에 있었던 명동 대성당 축성식에 참여하고, 5월 31일부터 6월 4일까지 피정을 마치고 돌아와 새로 건축한 사제관으로 이사하였다.

 

공세리 성당은 모두 당시의 일반 성당들처럼 대문과 성당 출입문을 남자와 여자용으로 구분했으며, 성당 안 회중석도 가운데 장막을 쳐서 남자와 여자들의 좌석을 구분하였다. 특히 공세리의 두 번째 성당의 사진들을 보면, 제대 반대쪽 지붕 합각 부분에 1칸의 작은 다락층이 돌출되어 있는데, 이는 성당을 토착 한옥으로 건립하면서도 어떠한 방법으로든 성당의 상징인 종탑을 표현함으로써 이곳이 성당이라는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옥성당이 건축된 이후 공세리 본당 신자수는 크게 증가하고 있었다. 1903년 드비즈 신부의 편지와 연말보고에 따르면 ‘공세지에서 마을 전체가 영세준비를 하고 있으며 신자가 한 명도 없었던 마을에도 입교자가 생겨났고, 예비신자수가 1천여명으로 올려 잡아도 과장이 아니라 여기며 신입 교우 중에는 양반, 아전, 포졸, 평민, 농민, 상인 등 거의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한옥성당은 한식목구조 흙벽식으로 건축되어 추위에 취약하고 우수에 흙벽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공세리본당 100년사에서는 ‘1904년 드비즈 성 신부는 전교활동에 전력하면서도 성당의 벽과 창이 흙으로 되어 부서지고 있는 것을 직접 나서서 창틀과 벽에 벽돌을 쌓아 유럽식으로 수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당의 주출입문은 남측에서 두 번째 칸에 좌우측으로 각각 여자 출입문과 남자 출입문을 배치하고, 고해실(19)과 제의방(18)에서는 각각 외부 출입문을 남쪽에 설치하고 성당 내부로 통하는 문을 두고 있다. 주출입문은 | |로 표기되어 있다. 판문 형식으로 보이며 문 앞에 디딤돌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성당의 바닥은 전체가 마루구조로 추정되며, 회중석 중앙에 남녀좌석을 구분하는 칸막이 혹은 휘장이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회중석 좌우측 창은 ○로 표기되어 있으며 하부에 머름이 있고 낮은 창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제단부 좌우측에도 창을 배치하고 있으며, 남측 첫째 칸 좌우벽에는 창을 두지 않았다. 성당의 남측 또한 창을 표시하였으나 화방벽 위에 있는 고측창으로 보인다(Ⓒ)

사제관은 건물 전후로 마루를 배치하고 열주를 배치한 것이 특징적이다. 벽체는 산자를 엮어 만든 흙벽구조이며 회반죽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창호는 각 실 전후로 범살장지문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r>
<td></td>
<td></td>
</tr>
</tbody>
</table>
 

사랑채 좌우에는 창고와 부엌이 위치하고 있는데 안뜰에서 진입하는 문(Ⓐ)을 배치하고 있다. 중앙에는 사랑방 2개가 있고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있다. 사랑방 출입문은 안뜰쪽으로 설치하지 않고 남쪽의 마루에 진입하도록 하였다. 안뜰에서는 성당과 사제관이 중심된 공간이므로 엄숙하고 정적인 공간과 사제관의 사적공간 보호를 위한 계획으로 보인다. 출입문 대신 창(Ⓑ)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벽마루 중앙에는 기둥이 위치한다. 사랑방 사이에는 지그재그선(Ⓒ)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평상시에는 열려 있다가 사적인 공간이 필요할 때에는 닫을 수 있는 안고지기문을 표시한 것으로 보인다.

<b>4.3. </b><b>세 번째</b><b>(</b><b>현</b><b>) </b><b>성당</b>

드비즈 신부는 1897년 공세리 본당의 4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한 지 22년 만인 1919년 7월 1일 은경축을 맞이하였다. 드비즈 시부는 이날의 축하식에서 ‘며칠 후 (현재의 세 번째) 공세리 성당 공사를 시작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교우들이 한마음으로 성당 공사를 마칠 수 있도록 하자고 당부하였다. 성전 건축비는 ‘각처에서 농사를 지어 받아들인 소작료와 그동안 적립해 놓은 자본금’으로 마련되었다.

 

100년사에서는 침해당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다. 침해당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니라 1600년대 성시망이 당을 지어 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시를 노래하던 곳이었다. 위치로는 공진성 안이 아니라 지금 십자가의 길 9처에서 10처 사이의 성 밖이다. 이것은 이민구의 침해당기에 자세히 적혀 있고,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 1권”에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기우제를 지냈던 곳은 지금의 박물관과 사무실 자리로 추즉된다.

 

침해당은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니라 본래 공세리의 세 번째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할 부지 안에는, 즉 옛 공진창 터의 북쪽에는 기우제를 지내던

 

성당 건축 부지는 공세지곡성 밖 동쪽의 낮은 자리로 성안의 둔덕을 파내어 성토해야 할 상황이었다. 기존의 사제관 옆에는 3m 높이의 둔덕이 있고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1920년 정지 작업을 시작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둔덕의 흙을 파 내리면서 주변에 드러난 성돌(城石)을 사용하여 신축할 성당의 종탑부 바닥에 1.5m 두께로 쌓아 기초를 든든히 하였다. 한편 드비즈 신부는 느티나무를 제거하지 않고 3m 정도 내려 앉히기로 계획하고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정지 작업중에 큰 사고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30)

 

‘낙반으로 인해 저의 교우 한 사람이 심장 파열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영세한 지 2년 만에, 그리고 5시간의 고통 끝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정말로 간택된 사람입니다. 주님의 포도밭에서 소용없이 일하고 있다고 믿었던 저의 마음에 정말로 위안이 되었습니다. 그 사고에서 또 다른 교우가 척추골 두 개가 부러졌습니다. 그는 생매장당한 상태에서 빠져나오려고 사력을 다하다가 이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24세의 이 가엾은 젊은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살기를 바라야 할까요? 그의 착한 마음씨가 저의 위안이 됩니다. 불과 몇 년 전에 영세를 받은 그는 때로는 교우집에서 때로는 외교인 집에서 머슴 노릇을 했습니다.31)

 

 

이에 드비즈 신부는 ‘성 베네딕토 패’를 새성당 부지, 감실자리 아래에 묻고 3일 기도를 드리고, 다시 부지 정지 작업을 시작하였고, 안전하게 사고 없이 성전 건립 후에는 새 성당의 주보 성인을 ‘성 베네딕토’로 정했다.

 

세 번째(현) 성당은 목조 기둥에 의해 구분되는 장방형 삼랑식의 고딕식 성당으로 설계되었으며, 첫 번째와 두 번째 성당과는 달리 한국의 성당 건축 양식사에서 두 번째 유형 즉 ‘중세 서양 건축 양식’에 속한다. 성당의 벽돌 제작과 벽체·지붕 공사 등 시공상의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고용된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했고, 본당 신자들은 정지 작업 등 인력을 필요로 하는 일들을 주로 담당하였다.

&lt;공세리 세 번째(현) 성당 평면도 &gt;

 

당시 성당과 사제관을 건립할 지역은 성안에서 밖으로 흙을 퍼내 메워야 하는 지형이었고, 그 옆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나무가 성당 부지보다 높이있었으므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자, 드비즈 신부는 이 나무를 베어버리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히는 방법을 택하였다. 또 공사 과정에서는 주변에 널려 있는 무너진 공세창성 성벽의 돌을 주어다가 성당 종각 바닥에 1.5m 정도로 깔았다고 한다. 공세리의 새 고딕식 성당과 2층의 적벽돌 사제관이 완공된 것은 1922년이었다. 이에 드비즈 신부는 교구청과 연락하여 축성 날짜를 정하고 그 준비를 시작하였다. 이때 새성당 축성식을 집전한 것은 그 전해 교구장 뮈텔 주교의 보좌로 임명된 드브레(Emile A. J. Devred,) 주교였다. 드브레 주교는 안성 구포동 성당의 축성식을 마치고 10월 7일 공세리에 도착했으며, 다음날인 10월 8일(일) 공세리 성당을 축성하였다.

 

공세리 성지와 가치를 함께하는 문화유적 “공세곶창지”의 지형을 하늘에서 내려보면 어머니 뱃속 같은 둥근 모양을 지니고 있고, 성모님의 품을 담은 공간이며 고요한 신비가 있고 영혼의 떨림이 있다. 공세리 성당은 내포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성당이며 한강 이남에서는 다섯 번째로 지어진 성당이다. 최근 성지문화유산에 대한 역사적 가치와 보존 방안이 재조명되고 있다. 공세리 성지·성당은 아산방조제 바로 앞에 위치한 “공세리 언덕”위에 1922년 세워진 성당으로 현재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종교적 건축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공세리의 세 번째(현) 성당은 목조 기둥에 의해 구분되는 장방형 삼랑식의 고딕식 성당으로 설계되었으며, 첫 번째와 두 번째 성당과는 달리 한국의 성당 건축양식사에서 두 번째 유형 즉 ‘중세 서양 건축 양식’에 속한다. 공세리 새 고딕 성당과 2층의 적벽돌 사제관(현/박물관)은 1922년에 완공되었다.

고딕풍의 공세리 성당은 신풍산 자락에 세워져 붉은 벽돌과 토착 재료인 회흑색 전돌을 사용하여 한국인 정서에 부합된 성당 건물이다. 장방형의 삼랑식 건물은 목조 기둥으로써 신랑과 측랑으로 나뉜다. 또한 성당 전면은 종탑이 돌출되어 있고, 외벽은 붉은 벽돌과 버팀벽의 회색 벽돌로 사용하여 건물 전체의 중요 윤곽선을 드러낸 고딕 성당이다.

공세리 성당은 2000년 이후 계속 된 수차례 보수와 변경으로 그 진정성이 훼손되고 변형과 왜곡이 되고 있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d></td>
</tr>
<tr>
<td></td>
<td></td>
<td></td>
</tr>
<tr>
<td></td>
<td></td>
<td></td>
</tr>
<tr>
<td></td>
<td></td>
<td></td>
</tr>
<tr>
<td></td>
<td></td>
<td></td>
</tr>
</tbody>
</table>
천주교 문화유산은 보존가치가 높아 개발보다는 보존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역사의 흔적을 최대한 찾아내 복원, 보존해야 한다. 문화 유적 가운데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있어 보호해야 할 것은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제대로 갖추는 일을 “정비”라고 한다. 정비에는 유구의 보존을 위한 활동과 이를 활용하여 유적의 이해를 돕는 활동이 포함된다. 정비를 위해서 유적은 그 진정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변형되거나 왜곡되어서는 안되며 유적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단위로 일체화되고 주변 및 전체와 조화되도록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공세리 성당은 현시점에서 변형과 왜곡을 막기 위해 성지 조성의 개념을 구체화하고 보존 및 정비로 지역 성지의 특성을 잘 살려내면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가톨릭 문화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천주교 순례지는 부수적으로 관광뿐 아니라 지역 경제 발전이나 홍보에서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아산시의 노력과 함께, 문화유산인 공세리 성당은 교회와 지역이 상생하는 순례 공간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b>내포의 두 본당의 본당 신부들</b><b>(1890~2010)</b>
<table>
<tbody>
<tr>
<td><b>공세리 성당</b></td>
<td><b>년도</b></td>
<td><b>합덕 성당</b></td>
</tr>
<tr>
<td>1대. 파스키에(朱若瑟, 1890~1894)</td>
<td>1890년</td>
<td rowspan="4">1대. 퀴를리에(1890~1904)</td>
</tr>
<tr>
<td>2대. 드비즈 성일론(에밀리오, 1895.11~1896.4)</td>
<td>1895년</td>
</tr>
<tr>
<td>3대. 기낭 진보안(베드로, 1896.5~1897.5)</td>
<td>1896년</td>
</tr>
<tr>
<td rowspan="7">4대. 드비즈 성일론

(에밀리오, 1897.5~1931.7.4.)</td>
<td rowspan="7">1897년</td>
</tr>
<tr>
<td>2대. 홍병철(루가,1904~1906)</td>
</tr>
<tr>
<td>3대. 크렘프(헨리, 1906-1914)</td>
</tr>
<tr>
<td>4대. 라리보(아드리엔, 1914-1917)</td>
</tr>
<tr>
<td>5대. 박우철(바오로,1917-1919)</td>
</tr>
<tr>
<td>6대. 크렘프(헨리, 1919-1921)</td>
</tr>
<tr>
<td rowspan="6">7대.페랭(백문필 필립보, 1921-1950)</td>
</tr>
<tr>
<td>5대. 콜랭 고일랑(요한, 1931.7.4.~1935.7)</td>
<td>1931년</td>
</tr>
<tr>
<td>6대. 김성학(알렉시오, 1935.7~1938.9.8.)</td>
<td>1935년</td>
</tr>
<tr>
<td>7대. 정규랑(레오, 1938~1948.8)</td>
<td>1938년</td>
</tr>
<tr>
<td>8대. 베스트랑 한성년(요한, 1949.3~1949.11)</td>
<td>1949년</td>
</tr>
<tr>
<td rowspan="2">9대. 뷜토 오필도(요셉, 1950.2~1951.1.6.)</td>
<td rowspan="2">1950년</td>
</tr>
<tr>
<td rowspan="5">8대. 박노열(바오로, 1950-1961.6)</td>
</tr>
<tr>
<td>10대. 신종호(요셉, 1951.6~1952)</td>
<td>1951년</td>
</tr>
<tr>
<td>11대. 이인하(베네딕도, 1952.1.5.~1958.5)</td>
<td>1952년</td>
</tr>
<tr>
<td>12대. 세라장서(요한, 1958.5~1961.6.11.)</td>
<td>1958년</td>
</tr>
<tr>
<td rowspan="2">13대. 박노열(바오로, 1961.6.12.~1965.3.16.)</td>
<td rowspan="2">1961년</td>
</tr>
<tr>
<td>9대. 유성숙(루도비코,1961.6-1963)</td>
</tr>
<tr>
<td>14대. 파일러 방약종

(아우구스티노, 1965.3.16.~1968.6.11)</td>
<td>1965년</td>
<td>10대. 최세구((로베르토, 1963-1968)</td>
</tr>
<tr>
<td rowspan="3">15대. 김동욱

(마티아, 1968.6.11.~1974.11.14)</td>
<td rowspan="3">1968년</td>
<td>11대. 윤여홍(바오로, 1968-1971.2)</td>
</tr>
<tr>
<td>12대.이종대(요셉,1971.2-1971)</td>
</tr>
<tr>
<td rowspan="2">13대.김병재(바오로,1971.9-1974.2)</td>
</tr>
<tr>
<td rowspan="4">16대. 윤석빈(루카, 1974.11.14.~1980.9.5)</td>
<td rowspan="4">1974년</td>
</tr>
<tr>
<td>14대. 조성옥(요한,1974.2-1974.9)</td>
</tr>
<tr>
<td>임시. 유영소(블라시오, 1974.9-1974.11)</td>
</tr>
<tr>
<td rowspan="2">15대.여충구(마르코,1974.11-1980.8)</td>
</tr>
<tr>
<td rowspan="2">17대. 여충구(마르코, 1980.9.5.~1985.3.3)</td>
<td rowspan="2">1980년</td>
</tr>
<tr>
<td rowspan="3">16대. 블랑(백 요한, 1980.6-1986)</td>
</tr>
<tr>
<td>18대. 변갑철(바오로, 1985.3.3.~1990.3.4)</td>
<td>1985년</td>
</tr>
<tr>
<td rowspan="3">19대. 김인수

(스테파노, 1990.3.4.~1992.3.5)</td>
<td rowspan="3">1990년</td>
</tr>
<tr>
<td>17대.윤종학(베르나르도,1986.4~1991.8)</td>
</tr>
<tr>
<td rowspan="2">18대.권태웅(안셀모,1991.8~1998.2)</td>
</tr>
<tr>
<td>20대. 유재식(안셀모, 1992.3.5.~1998.2.13)</td>
<td>1992년</td>
</tr>
<tr>
<td>21대. 강현식(베드로, 1998.2.13.~2003.1.21)</td>
<td>1998년</td>
<td>19대.김순호(F.하비에르,1998.2~2003.2)</td>
</tr>
<tr>
<td rowspan="2">22대. 오남한(루카, 2003.1.21.~2010.1.21)</td>
<td rowspan="2">2003년</td>
<td>20대.김홍식(이냐시오,2003.2~2007.1)</td>
</tr>
<tr>
<td rowspan="2">21대.손범규(임마누엘,2007.1~2009.1)</td>
</tr>
<tr>
<td>23대. 김찬용(베드로, 2010.1.21.~2014.1.23)</td>
<td>2010년</td>
</tr>
</tbody>
</table>]]></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9:17:4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3권-둘. 한국천주교회의 ‘사제성소의 못자리’ 내포교회]]></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32]]></link>
			<description><![CDATA[<b>둘</b><b>. </b><b>한국천주교회의 </b><b>‘</b><b>사제성소의 못자리</b><b>’ </b><b>내포교회</b>

박재만(다태오)신부

제 1부 내포지역 사제성소의 영성적 바탕과 역사·지리적 배경 27

제 2부 내포지역 본당의 역사 및 순교자들 그리고 출신 사제들 38

제 3부 내포지역의 중심인 합덕본당의 사제성소 계발과 사제 배출의 특이한 전통 74

제 4부 내포지역 교회의 사제성소의 위기와 사제성소 계발을 위한 대책방안 79

<b>시작하면서</b>

한국천주교회의 사제성소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 등을 배출한 내포지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그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2백 년 동안 내포지역에서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사제성소가 끊임없이 이어져 유난히 많은 사제들을 배출해 왔다. 내포지역에서 사제성소가 가장 먼저 시작된 이유는 무엇이며, 이후로도 내포지역 교회에서 사제성소가 유난히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신비로운 방법으로 섭리하셨기 때문이다. 사제성소는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그러므로 사제성소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이 한국교회의 발전과 성화를 위해 나라의 중심부인 내포지역을 선택하시어 성령을 통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하시고, 박해 중에도 지속적으로 신앙을 고수하고 전파하도록 하셨으며, 많은 순교자들이 배출되도록 배려하고 섭리하심으로써 사제성소가 풍성히 싹트고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하느님은 그분의 부르심인 사제성소가 성장하고 결실을 맺기 위해 인간의 응답과 협력을 요구하신다. 사제성소에 있어서 인간 편에서의 노력은 하느님의 부르심의 은총에 응답하는 마중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포지역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된 사제성소에 교회와 신자들은 마중물로서 어떻게 응답하고 협력해 왔는가? 우리는 그 답을 내포지역의 역사·지리적 배경과 내포교회의 영성적 바탕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여기에 한국교회 안팎의 여러 역사자료와 순교록이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많은 사제들을 배출한 내포지역의 여러 전통적 신앙공동체와 본당들에 대해 역사 깊고 전통 있는 본당들이 출간한 본당사와 한국교회사 자료들을 중심으로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끝으로 한국교회 전체의 사제성소 감소 추이와 유사하게 내포지역에서도 사제성소가 급속히 감소하는 원인과 문제점은 무엇인지 진단해 보고 몇 가지 해결 방안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b>제 </b><b>1</b><b>부 내포지역 사제성소의 영성적 바탕과 역사</b><b>·</b><b>지리적 배경</b>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와 영성사 안에서 설립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포지역 교회가 지니는 의미와 가치 그리고 기여는 참으로 크다. 서울을 비롯하여 양근, 내포, 전주, 충주 지역에 형성된 교회공동체들 중에서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1871년)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내포지역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내포지역의 교회는 신앙의 뿌리가 깊었고 천주교 신앙을 전파한 선교지역의 폭도 매우 넓었다. 이러한 내포지역 교회의 신앙공동체들은 신자들의 신앙의 훈련장이었고 순교자들의 못자리였으며 훗날 사제성소가 싹트고 자라나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내포지역 사제성소의 비옥한 토양으로서 영성적 바탕과 역사, 지리적 배경을 몇 가지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내포교회의 전반적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ol>
 	<li><b> </b><b>사제성소의 비옥한 땅 내포교회의 전반적 역사 개관</b></li>
</ol>
조선시대의 기록을 집대성한 &lt;조선왕조실록&gt;에 의하면, 바다를 접하고 강을 끼고 있는 지역은 하천이 흐르기 때문에 포구가 육지 안으로 깊숙이 연결되는데, 이곳을 ‘내포(內浦)’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그 실록에서 내포와 관련하여 언급한 기록을 종합해 보면, 내포는 충청도의 서해안 및 가야산 동·서부와 관련이 있으며 내륙과 바다를 연결하는 포구 주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중환이 저술한 &lt;택리지&gt;(擇里志)에서는 내포를 가야산 중심으로 본다. 가야산 서쪽의 보령, 결성, 해미 세 고을과 북쪽의 태안, 서산, 면천, 당진 네 고을 그리고 동쪽의 홍주, 덕산, 예산, 신창 네 고을을 내포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그보다 훨씬 넓은 지역적 의미로 내포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lt;영조실록&gt;에서는 18개 고을을 내포라고 지칭하였다. 내포의 지역적 범위 안에는 더 많은 고을이 포함되어 충청도 서북부 지역을 지칭하는 일반용어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충청도 서북부 지역이란 서산, 예산, 홍성, 태안, 당진의 전 지역과 아산, 보령의 일부 지역, 서천과 한산 지역을 아울러 가리킨다.

한국천주교회사에서 말하는 내포의 지역적 범위는 천주교신앙의 전파과정에 따라 교회 순교록이나 프랑스선교사들의 기록에 의해 조금씩 다르게 이해되어 왔다. 1785년 초 내포 여사울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후 병인박해기(1866-1873년)까지 내포신자들은 내포지역을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는 평야지역 일대, 즉 지금의 당진시 우강면, 합덕읍, 예산군 고덕면, 신암면, 아산시 신창면, 선장면 지역으로 인식하였다. 그 범위가 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달레의 &lt;한국천주교회사&gt;는 충청도에서 서해로 불거져 나온 지방을 내포라 했으며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가 복음 전파한 지역을 ‘내포평야’라고 하였다.신앙의 자유기에 들어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생각한 내포의 지역적 범위는 크게 확대되었다. 삽교천 무한천과 연관되어 있는 지금의 당진시, 예산군, 아산시가 내포지역의 중심이기는 하지만 그 범위가 충청도 서부의 해안 지역 전체를 의미하는 데까지 확대된 것이다. 제 8대 조선 대목구장 뮈텔(C.M. Muttel) 주교가 1901년 4월에 공베르(M. Gombert) 신부를 홍산 금사리 주임에 임명하면서 이 지역을 ‘아래 내포지역’ 즉 ‘하부내포’라고 설명해준다. 파리외방선교회의 교회사가 로네(A.C. Launay) 신부도 1916년 기록에서 내포지역을 상부와 하부 내포지역으로 구분하였다.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내포를 상부와 하부 두 지역으로 나누어 안산, 온양, 신창, 예산, 대흥, 면천, 당진, 덕산, 해미, 홍성 등을 상부 내포라 하고, 태안, 서산, 결성, 보령, 청양, 남포, 비인, 서천, 한산, 홍산 등을 하부 내포라 부른다.

<b>1.1 </b><b>내포지역의 복음 선포와 신앙공동체 형성</b>

내포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신앙공동체를 만든 사람은 여사울 출신 이존창이었다. 그는 1784년(정조 8년)에 경기도 양근(현 양평)의 권일신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루도비코 곤자가라는 이름으로 세례성사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충청도 일대에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고향 여사울을 중심으로 예산, 당진, 천안, 면천, 공주, 한산 등에서 전교활동을 하였고, 1791년 신해박해 때 공주 감영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뒤로는 홍산, 금산, 전라도 고산 등으로 이주해 다니면서 전교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는 그를 ‘내포의 사도’라 호칭했으며, 조정에서는 ‘호중(湖中)의 사학(邪學) 괴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후 내포교회는 언제나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로서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하였으며, 1868년의 무진박해 때까지 박해가 있을 때마다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집안도 이곳에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이존창의 순교 이후에는 또 다른 지도자들이 등장하여 신앙공동체를 이끌었다. 또 박해가 지속되는 동안 이 지역의 신자들이 전라도 북부, 경기도, 경상도 지역으로 피신하여 이주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이 확장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박해 시대 조선에서 활동하던 성직자들 대부분은 내포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중 이 지역을 가장 먼저 담당한 성직자는 1836년 초 조선에 입국한 모방(P. Maubant) 신부였고, 1845년에 입국한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éol) 주교와 다블뤼(A. Daveluy) 신부 그리고 1849년에 귀국한 최양업 신부도 내포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또 1861년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Berneux) 주교가 전국을 8개 본당 구역으로 나누면서 다블뤼 주교가 상부 내포(홍주 지역)를, 랑드르(Landre) 신부가 하부 내포(충청도 서부)를, 조안노(Joanno) 신부가 공주 지역을, 리델(Ridel) 신부가 진밭(현 공주군 사곡면 신영리) 일대를 맡아 전교를 담당하였다. 이로써 내포교회는 크게 4개의 본당구역으로 나뉘게 되었으나, 1863년 조안노 신부와 랑드르 신부가 둠벙이(현 공주군 신하면 조평리)와 황무실(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에서 각각 병사한 뒤에는 남은 신부들이 돌아가며 이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내포지역 교회는 1865년 6월에 내포 지역에 상륙한 4명의 선교사들을 맞이하였는데, 그들 중 위앵(Huin) 신부는 입국 후 이전에 랑드르 신부가 맡았던 하부 내포 지역을 담당하였다. 한편 1863년 입국한 오메트르(A. Maîstre) 신부도 병인박해가 일어난 후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와 함께 내포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들리자, 다블뤼 주교는 곧 위앵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거더리(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공소에 모이도록 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여기서 그들은 다시 헤어져 내포 일대의 공소로 각각 피신하였다.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가 신리, 금사리, 거더리 공소에서 차례로 체포되어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이들은 1866년 3월 23일자로 군문효수형을 선고받고, 다시 충청도 수영이 있던 보령의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순교하였다. 이때 내포지역의 신자들도 각처에서 체포되어 공주 감영, 해미 진영, 홍주 진영에서 순교하였다.

이렇게 마지막까지 내포지역을 떠나지 않았던 3명의 사제가 체포되어 순교하면서 꽤 오랫동안 이 지역에는 박해를 피한 신자들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역 교회 자체는 소멸되지 않았다. 15년 후 이곳에 사제가 파견되었을 때 각 지역의 신자공동체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1866년까지 내포지역에서 전교활동을 한 선교사들은 전담 선교사제가 3명이었고, 이곳을 순회한 사제가 7명이었다. 이때까지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나 방인(邦人)사제들이 모두 19명이었으므로 전체 중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병인박해와 무진박해 때의 전국 순교자를 가장 많이 수록한 &lt;병인박해순교자증언록&gt;의 내용에 따르면 전체 순교자 가운데 충청도 남부 지역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37%에 이르는 415명으로 나타나며, 그중에서도 내포지역의 순교자가 약 45%인 187명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한국교회 전체 순교자의 약 17%에 해당할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곧 내포지역의 본당에 가해진 박해가 다른 어느 곳보다도 거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교회사적으로 볼 때는 1860년대에 이르러 이 일대에 가장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생활하고 있었다는 점과 그만큼 교회 재건의 기틀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b>1.2 </b><b>내포지역의 공소와 본당 시대</b>

박해가 끝나자 내포지역에는 다시 신자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1880년대 초에 이미 약 1,000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1881년부터 이 지역을 담당하게 된 두세(Doucet) 신부는 이들 공동체를 방문한 뒤 각처에 공소를 설립하고, 이후 7~8년 동안 이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신자들에게 매년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때의 공소들이 훗날 본당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공소들 중에서도 당진의 원머리(현 신평면 한정리), 아산의 공세리(현 인주면 공세리), 예산의 간양골(현 예산읍 간양리), 드르니(현 예산읍 신례원리), 양촌(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서산의 쇠길리(현 팔봉면 금학리)의 신앙공동체는 매우 주목할 만한 곳이었다.

1890년, 제 7대 조선교구장 블랑(Blanc) 주교의 사망으로 임시 교구장을 맡게 된 코스트(Coste) 신부는 두세(Doucet) 신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 지역에 본당 중심지를 두기로 결정하였다.

코스트 신부는 1889년 6월 21일에 입국한 퀴를리에(Curlier) 신부와 10월 3일에 입국한 파스키에(Pasquier) 신부를 다음해 1890년 8월 내포 지역에 파견하였다. 이로써 내포 지역에는 1866년 이래 24년 만에 다시 2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때 퀴를리에 신부는 양촌에 거처하면서 충청도의 남쪽과 동쪽을 관할하였고, 파스키에 신부는 간양골에 거처하면서 북쪽과 서쪽을 관할하였다. ‘양촌본당’의 퀴를리에 신부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간양골본당’이 파괴되고 파스키에 신부가 요양차 본당을 비우게 되자 다음 신부(드비즈 신부)가 부임할 때까지 통합하여 사목하게 된다.

퀴를리에 신부는 그 후 양촌이 본당의 중심지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장소를 물색한 끝에 1898년 창말(창리, 현 합덕성당 자리)에 있는 언덕을 매입하여 이듬해 한옥으로 된 사제관 겸 성당을 완공함과 동시에 본당을 이전하고 그 본당을 ‘합덕본당’으로 개칭하였다.

이후에도 내포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였다 합덕본당으로부터 1901년에는 부여의 ‘금사리본당’이, 1908년에는 결성의 ‘수곡본당(서산본당의 전신)’이 분리되었고, 1906년에는 공주본당 지역의 일부가 충북 ‘옥천본당’으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해방 당시 내포지역에는 합덕, 공세리, 공주, 금사리, 서산, 예산, 천안, 당진 등 8개 본당이 자리 잡게 되었고, 이 본당들에 속한 신자수는 모두 1만 2천여 명에 이르렀다. 1948년 충남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독립된 포교지로 설정된 바탕에는 바로 이들 교회가 있었던 것이다.

내포 지역엔 어느 지역보다 순교성지들과 교회사적지들이 많다. 대표적인 곳으로 공주의 황새바위, 해미 국제성지, 홍성의 동헌, 청양의 다락골, 보령의 갈매못, 서산 동문의 무명 순교자 묘, 천안 북면의 순교자 묘, 성거산, 공세리 순교자묘, 원머리의 순교자묘, 신리, 여사울, 솔뫼, 진산, 황무실 등이 있다.

240여 년의 내포교회의 역사 안에서 성직자들의 헌신적 사목과 신앙의 선조들의 증거의 삶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비옥해진 내포의 교회와 성지들은 후대 신자들의 신앙의 바탕이 되었으며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배출되는 성소의 못자리가 되고 있다.
<ol>
 	<li><b> ‘</b><b>내포의 사도</b><b>’ </b><b>이존창의 여사울 신앙공동체 형성과 내포지역 복음 전파</b></li>
</ol>
내포지역의 천주교회가 일찍부터 열정적 신앙인들을 양성하고 복음을 널리 전파할 수 있는 터전을 닦고, 수많은 순교자들을 태어나게 하고 많은 사제들을 배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1759- 1801)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으로 충만한 그가 열정적으로 사도직을 수행하며 이룩한 여사울 신앙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존창의 열정적 사도직은 천주교 신앙을 여사울을 중심으로 하여 내포지역과 충청도 전역에 급속도로 확산시켰다. 또한 얼마 후 박해가 시작되면서 내포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천주교 신앙은 여러 도(道)로 널리 퍼져 나갔다. 그 예로, 1815년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을해박해의 순교자들이나, 1827년 전라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정해박해의 순교자들 대다수가 내포지역 출신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하느님은 이존창을 그분의 일꾼으로 부르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내포지역 뿐 아니라 다른 지역까지 널리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수행하도록 배려하신 것이다.

<b>2.1 </b><b>이존창의 여사울 신앙공동체 형성과 내포지역 선교</b>

내포지역에 처음으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이존창이 ‘내포의 사도’가 되기까지의 준비과정과 선교활동은 이러하다. 1784년 겨울에 권일신, 이벽, 정약용 등 유학자들은 북경에서 교리공부와 세례성사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천주교회의 시작이다. 바로 이 무렵 여사울의 이존창은 양근의 대감마을을 찾아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그로부터 ‘루도비코 곤자가’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한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는 그가 알게 된 천주신앙을 즉시 가족과 고향사람들과 나누고자 서둘러 고향 여사울로 돌아왔다.

이존창이 활동초기에 복음을 전한 대상자는 우선 가족들과 주변의 친지들이었지만, 곧이어 마을 주민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짧은 기간 내에 놀랍게도 300여 명의 신자들이 모이는 내포교회가 되었다. 그가 이끈 내포교회는 이승훈, 이벽, 권일신 등이 창설한 서울 교회공동체에 이어 조선에서 두 번째로 생겨난 신자공동체였다. 그가 전교한 대상은 양반과 선비집안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주로 내포지역의 농어촌 사회를 중심으로 농민과 노동자 등 서민층의 전교에 힘써 서울의 교회와 달리 서민층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한국교회사 연구소가 수집한 사료에 의하면,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시작된 여사울의 천주교 공동체의 신앙은 1784에서 1785년 사이에 내포지역 일대에 널리 퍼져나갔다. 특히 여사울 건너편에 위치한 삽교천 좌안(左岸)의 강문리, 우평리(당진시 우강), 신평의 신당리와 원머리, 음섬에서 신앙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많았다. 강문리, 우평리, 신평의 신당리, 원머리, 음섬은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이존창의 고향인 여사울이 그렇듯이 이곳은 모두 서해와 연결된 삽교천 하류의 수변(水邊)지역으로 간척지와 염전이 발달한 곳이었다.

1785년 봄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인한 탄압으로 첫 번째 수난을 겪게 되면서 모임과 전교활동을 자제하고 조심스럽게 관망하던 조선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그 후 한 해가 지날 무렵 다시 신자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해 비밀리에 한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조직단체를 후에 역사가들은 ‘가성직자단’ 혹은 ‘모방성직자단’이라 부른다. 이존창도 가성직자단에서 사제로 위임되어 내포교회를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게 되었다. 선교사 없이 창설된 한국교회가 사제를 모셔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여 사제성품에 대한 충분한 교리지식 없이 북경교회의 성직자단을 모방하여 자율적으로 가성직자단을 조직한 것이다. 성품성사를 받지 않은 평신도 단체, 가성직자단이 임의대로 평신도 10명에게 사제직을 위임하고 그들에게 성사와 미사집전의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서적을 통해 이러한 제도의 문제점을 알게 된 유항검 아오스딩은 이 문제를 제기했고, 이승훈은 북경의 주교에게 다른 여러 가지 의문점과 함께 그 문제에 관해 문의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하였는데, 북경의 구베아 주교는 그 제도의 오류를 지적하며 활동의 정지를 명했고,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즉시 순종하여 가성직자단을 해체하였다. 그 후 이존창은 평신도 지도자로 돌아와서 전과 다름없이 전교활동을 열정적으로 수행하였다.

이존창은 조정의 박해와 형의 반대와 방해로 전교활동이 어려워지자 1791년 여사울을 떠나 홍산 고을로 이사하여 전교하였고, 그로부터 얼마 후 금산으로 전교활동의 터전을 옮겼다. 또 그는 한때 주문모 신부를 자신의 집에 영접할 요량으로 전라도 고산으로 이사하였다. 그 후 이존창은 충청도 한산의 처가에 내려가 많은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전교하였다.

<b>2.2 </b><b>이존창의 신앙생활과 전교활동에서 보여준 신념과 복음적 영성 </b>

이존창은 천주교 교리를 배우면서 하느님 대전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소중한 아들딸이라는 가르침을 충격적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 깨달음으로 인해 이제 그는 당시의 통념적인 신분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중인으로 태어난 그는 신분상승을 위해 과거급제를 목표로 학문을 시작하였지만 천주교 신앙을 만나면서 신분상승의 노력은 그에게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로 인해 하느님과의 관계와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관념과 확고한 신념으로서의 영성이 형성되었고 그는 신분제도의 제한성과 부자유스러움에서 해방되어 편안하게 전교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양반계층의 사람들에게도 교리를 가르치며 전교하였고 그들과 신앙 안에서 편안하고 자유롭게 교류하면서 사제의 영입과 신앙의 자유를 위한 방안 등 교회발전을 위해 상의하였으며 그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해 뛰었다.

하느님 대전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교리에 대한 이존창의 확고한 신념은 중인이나 상인, 더 나아가 천민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천주교 신앙을 받아드리도록 설득시키는 데 큰 동력이 되는 영성이었다.

<b>2.3 </b><b>사제성소 배출의 기반 조성에 기여한 이존창의 역할</b>

이존창 선조가 내포지역에 신앙의 씨앗을 뿌린 전교활동은 또한 한국의 역사적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가 탄생하는 데 기초가 되었다. 이존창이 활동초기에 복음을 전한 대상자들은 그의 가족들이었는데, 그 가족들은 두 사제의 친인척들이었다. 이존창의 가족과 두 사제가 어떻게 친인척 관계로 연결되는지 살펴보면 이러하다.

이존창의 딸 멜라니아는 김진후와 결혼하였는데 그 부부가 바로 김대건 신부의 조부모가 된다. 이존창이 전교한 김종현은 김대건 신부의 큰할아버지이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인 최한일도 이존창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그의 아들 최인주와 부인도 같이 세례를 받았는데 이들이 바로 최양업 신부의 조부모이다. 또한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례는 이존창의 사촌누이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다. 이존창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가 내포에 신앙의 씨앗을 뿌렸기에 조선의 고귀하고 위대한 두 사제,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태어난 것이다. 그가 없었거나 그곳에서 전교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사제가 태어나는 데 얼마나 긴 세월이 흘러야 했을지 모른다. 이러한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가 내포교회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참으로 귀중하고 고마운 분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감격하게 한다.

두 사제의 출생지인 내포교회는 그 이후에 지속적으로 수많은 사제 배출의 배경이 되었고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존창 선조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음을 감사드리며, 또한 그를 도구로 활용하시어 내포지역과 우리나라에 놀랍고 신비로운 업적을 이루신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ol>
 	<li><b> </b><b>내포교회사 안에서 신리</b><b>(</b><b>거더리</b><b>)</b><b>성지의 주요 의미와 역할</b></li>
</ol>
신리성지(현 당진군 합덕읍 신리)는 내포교회사나 한국교회사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중요한 의미와 영향력을 지녀왔다. 신리성지는 내포 천주교회 창설 초기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면서 박해기 내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우촌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1836년 1월에 입국한 모방(P. Maubant) 신부가 이 지역을 방문하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함으로써 신리(거더리)교우촌이 공소로 설정되었다. 그 후 신리성지는 제 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A. Daveluy, 1818-1866) 주교가 오랫동안 거처하던 내포지역의 사목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은 다블뤼 주교가 &lt;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gt;과 &lt;조선 순교사 비망기&gt;를 비롯하여 초기의 한글 교리서를 저술하고 이를 목판으로 간행한 장소로 전해지고 있다.

다블뤼 주교는 내포지역의 여러 교우촌들을 순회하거나 임시 거주하면서 조선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선교회역사 자료 등을 수집하고 정리하였고 성사집전과 전교활동을 하였는데, 그 교우촌들이란 광천(현 홍성군 광천읍), 둠벙이공소(현 공주군 신풍면 조평리) 등이었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될 때(1866년)까지 가장 오래 거처하며 사목중심지로 삼았던 곳은 신리(거더리)였다. 신리성지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신리성지는 손자선(토마스) 성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순교자들의 못자리이며 순교자들의 시신이 안장된 묘가 있는 곳이다.

신리성지는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하다가 순교한 파리외방선교회 성직자들에게 감사하면서 우리 내포교회와 한국교회 전체가 방인사제들을 많이 양성해야 한다고 다짐하며 이를 실천해 왔으며, 이제는 해외 오지를 위한 선교사들을 많이 양성하고 파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도록 자극한다. 이 신리공동체가 전국에서 사제와 수도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합덕본당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 합덕본당이 관할한 공소라는 점이 성소에 크게 기여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ol>
 	<li><b> </b><b>사제의 부재 시 성사생활의 어려움을 겪은 선조들의 고통 재인식</b></li>
</ol>
내포지역 교우촌들의 신자들은 다른 지역 신자들과 달리 박해 중에도 주문모 신부를 일찍 그리고 간헐적으로 모시며 고해성사를 받고 미사에 참여하면서 성체를 모실 수 있는 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로 주문모 신부의 순교 후 길고 긴 33년 동안 내포교회를 포함한 한국교회 전체가 사제의 공석으로 신자들은 고해성사, 성체성사 등 성사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신자들은 사제를 얼른 보내주시도록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면서 사제의 영입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그때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밀사를 통해 북경의 주교와 교황청의 교황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전달하기도 하였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이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은총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또 성체를 모시길 얼마나 갈망했는지를 그분들이 쓴 편지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1811년 12월 9일자 교황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사를 집전할 사제를 보내주시길 청하면서 이렇게 썼다.

“이 박해(1801년 신유박해)때에는 순교자가 1백여 명 넘사오며 귀양살이 간 신자들도 약 4백 명이 되었나이다. 그들은 성사의 은총(고해성사 특히 성체성사의 은총)을 많이 받음으로써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또 같은 해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국교회의 박해로 인한 심각한 피해상황을 보고한 뒤 사제를 보내주실 것을 청하면서 이렇게 썼다.

“선조들이 그토록 전교하고 순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사, 특히 성체 성사의 특별한 은총이었음을 잘 아나이다. 저희도 성사를 받을 수 있다면 저희의 교회가 더욱 크게 빛나리라 믿나이다.”

“눈물과 통곡을 겉잡지 못하고 주야로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이것이옵니다. 저희가 이내 죽음을 당하지 않길 원하는 것은 오직 미사성제에 참여하고 저희 죄를 고백하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이옵니다. 그런 다음엔 곧 죽는다 하더라도 저희들은 만족하고 기뻐 용약하겠나이다.”

박해 시절의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은 성체를 모시기 위해 야간에 몰래 숨어서 미사를 봉헌하는 장소를 찾아 수 십리 길을 목숨을 걸고 왕복하였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순교로 33년간 한국 교회에 사제가 공석이었을 때 그들은 성사를 집전할 사제를 교황청이나 북경교회에서 보내주길 그토록 간청하였고 매일 애타게 기다렸다. 그 후 새로 입국한 사제들이 기해박해로 인해 순교한 뒤에도 그리고 간헐적인 여러 박해와 병인박해로 사제들의 활동이 극히 제한되던 때에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성사를 집전할 사제들을 자유로이 만나고 평화로이 성사생활을 할 수 있는 기쁨의 날을 빨리 앞당겨 주시길 주님께 기도하면서 간절히 기다렸다.

신앙생활을 위하여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의 절대적 필요성과 존귀함을 박해시절을 거치며 절감한 신자들은,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때에 사제성소의 고귀함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고 사제성소를 적극 권유하며 성소계발을 위해 힘썼다.

박해시절에 어느 지역보다 사제들을 자주 모시고 성사생활을 했던 내포지역의 신자들과 그 후손들은 다른 지역의 신자들보다 방인사제 양성의 필요성과 긴급성을 더욱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신앙생활이 자유로운 시대에 이르자 다른 어느 지역보다 사제성소를 계발하고 양성하는 데에 훨씬 적극적으로 힘썼음을 여러 역사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ol>
 	<li><b> </b><b>내포</b><b>·</b><b>충청 출신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에 대한 내포 청소년들의 긍지</b></li>
</ol>
내포 ·충청의 신자들과 청소년들은 한국의 첫 방인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솔뫼에서 태어났고 한국의 두 번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청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크게 자랑스러워하고 긍지를 갖는다.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내포 충청 청소년들이 솔뫼에서 거행하는 행사에 참여하거나 청양 다락골에 순례 갈 때 마다 그들에게 순교영성을 재인식 시키고 사제직을 동경하고 염원하도록 고무시켜 왔을 것이다. 그들 중에 적지 않은 청소년들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제들이 되었을 것이다.
<ol>
 	<li><b> </b><b>내포지역 순교자들의 증거와 순교성지들이 사제성소에 미친 영향</b></li>
</ol>
내포·충청 지역은 1791년 12월 8일에 순교한 윤지충 복자와 권상현 복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했다.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병인박해 그리고 여러 박해 중에 내포·충청 출신의 순교자들이 다른 지역보다 월등하게 다수를 차지한다.내포·충청 지역에 가해진 박해들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거세었고 그 때마다 많은 신자들이 목숨 바쳐 신앙을 증거하였던 것이다. 내포·충청 지역에 박해가 거세었던 이유는 그 일대에 교우촌, 공소 등 신앙공동체들의 재건이 가장 빨리 이루어졌고 전교활동도 활발하여 신자들이 많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포·충청 지역에서 순교자가 많았던 또 다른 이유는 그 지역에 많이 확산되어 있던 신앙공동체들을 방문하던 사제들로부터 신자들이 자주 교리교육을 받았고 고해성사, 성체성사 등 성사생활의 은총으로 신앙이 굳건해져 많은 이들이 용감히 목숨까지 바쳐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포·충청 지역엔 순교성지와 사적지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다. 열렬히 복음을 선포하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주님께 목숨까지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못자리’인 내포·충청 지역의 성지와 사적지는 주님의 은총으로 훗날 자연스럽게 ‘사제성소의 못자리’를 위한 비옥한 땅이 된 것이다.

<b>제 </b><b>2</b><b>부 </b><b>내포지역 본당의 역사 및 순교자들 그리고 출신 사제들 </b>

이존창 선조가 신앙의 씨앗을 뿌리며 전교활동을 한 내포·충청 지역은 240여 년의 역사를 이어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복음화가 확산되고 성장하며 더욱 큰 결실을 맺고 있다. 내포·충청 지역의 천주교회는 한국천주교의 역사 안에서 크게 기여했으며 여러 면에서 많은 의미를 지닌다. 서울을 비롯하여 양근, 전주, 내포·충청 지역에 형성된 교회창설기의 지역교회들 중에서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까지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내포·충청 지역뿐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그 뿌리가 매우 깊었고 천주교 신앙 전파의 폭도 매우 넓었다. 또한 1815년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을해박해의 순교자들이나 1827년 전라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정해박해의 순교자들 대부분이 실제로 내포·충청 지역 출신이었으며, 이러한 현상이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내포·충청 지역의 교회가 일찍부터 터전을 잡고 성장했고 다른 지역까지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내포의 사도’ 또는 ‘내포·충청도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이 있었고, 그의 전교활동의 기여가 컸기 때문이다.

이존창이 순교한 이후에도 내포교회는 언제나 한국천주교회의 중심지로서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하였으며, 1868년의 무진박해 때까지 박해가 있을 때마다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켰다. 이존창의 순교 이후에도 계속 후예 평신도 지도자들이 나와 신앙 공동체를 이끌었다. 또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이 지역의 신자들이 전라도 북부, 경기도. 충청도 북부, 경상도 지역까지 피신하여 이주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이존창이 열정적으로 신앙의 씨앗을 뿌린 내포지역엔 일찍부터 여러 곳에서 신앙공동체가 세워졌고 성장하여 끊임없이 많은 결실을 맺었으며 그 공동체들이 오늘엔 역사와 전통 있는 본당들과 성지들로 발돋움하여 여전히 복음화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한 본당의 예로 합덕, 공세리, 공주, 홍성, 논산, 서산, 금사리, 홍산, 서천, 해미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내포·충청 지역은 어느 지역보다 순교성지와 교회사적지들이 많아 전국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참배를 위해 모여 든다. 이처럼 성령의 은총으로 성장하고 발전해 온 내포지역 교회는 수많은 신앙인과 순교자 그리고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의 못자리가 되었다.
<ol>
 	<li><b> </b><b>합덕지역 교회사와 순교자들 그리고 출신 사제들</b></li>
</ol>
<b>1.1 </b><b>합덕지역의 복음전래</b>

내포교회의 역사는 한국교회의 시작과 성장을 함께해 온 역사의 중심지이다. 그리고 합덕본당의 역사는 한국교회의 성장을 함께해 온 내포지역의 교회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합덕본당이 위치한 지역은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 지역이며 다블뤼(A. Dabluy) 주교 등 선교사들의 활동 중심지였고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한 복된 땅이다.

블랑 주교가 선종하면서 임시 교구장을 맡은 코스크(E. Coste)신부는 1890년 8월에 두 본당을 설립하면서 두 사제를 두 곳에 각각 주임으로 임명했다. 퀴를리에(L. Curlier)신부가 양촌(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파스키에(P. psquier)신부가 간양골(현 예산읍 간양리)에 거처를 정함으로써 두 본당은 ‘양촌 본당’과 ‘간양골 본당’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퀴를리에 신부는 교구장 뮈텔(Mutel)주교의 명에 따라 간양골 본당의 파스키에 신부와 함께 서울로 피신하였다. 한편 오랫동안 류마티즘 질환으로 병치레하던 파스키에 신부는 뮈텔 주교의 허락을 받아 치료를 받기 위해 홍콩으로 요양을 떠났다. 퀴를리에 신부는 1년 후 드비즈 신부가 부임할 때까지 내포지역 일대와 천안 공주, 부여 등의 공소들을 사목하게 된다.

퀴를리에 신부는 양촌이 본당의 중심지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장소를 물색하던 중 1898년 합덕이 적당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합덕지(池) 위쪽 언덕(현 합덕읍 합덕리)에 땅을 매입하여 사제관 겸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1899년 이를 완성한 후 그곳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퀴를리에(Curlier) 신부가 1890년에 합덕본당의 전신인 양촌 본당으로 부임하여 9년간 사목하다가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이곳을 ‘합덕본당’으로 명칭을 바뀌었다.

합덕본당의 설립이 1890년이지만, 그 역사는 내포교회의 역사이며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내포평야는 예부터 합덕본당 관할 지역이었고 한국 초기교회의 사도 이존창은 고향 내포지역의 사도였으며 1784년부터 내포지역에 신앙공동체를 세우고 내포평야 일대에 복음을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덕본당은 ‘내포교회 → 충청도 본당→ 양촌본당 → 합덕본당’ 이라는 일련의 교회발전사 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은 한국교회에서 언제나 주목하는 전교대상 지역이었다. 교세의 확대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선교사들의 활동 근거지로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박해기간 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이곳을 순회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합덕본당 관할지역에서 박해 때마다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며,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는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가 선교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고, 187명의 신자들이 이 지역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니 이곳이야말로 수많은 성인 성녀들의 고향이며 복된 성지인 것이다.

조정으로부터 신앙의 자유가 허락된 후 합덕본당은 정착 과정에서 선교활동 문제로 향촌사회와 여러 갈등도 겪어야 했다. 향촌사회와의 갈등이 마무리된 후 합덕본당은 새로운 기틀을 다져가게 되었다. 그 기틀의 성과를 가장 훌륭히 이루어낼 수 있었던 사제는 크렘프 신부였다. 크렘프 신부의 뒤를 이어 합덕본당의 제 7대 신부로 부임한 사람은 페랭(P. Perrin, 백문필 필립보) 신부였다. 페랭 신부는 29년간 합덕본당의 주임신부로서 교회 안팎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현재의 성당건물도 1929년 페랭 신부에 의해 건축되었다. 그는 본당공동체의 성화와 평신도사도직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청년회, 안나회를 창설했으며 공소의 활성화를 위해 공소회장 피정을 자주 실시하였다. 신자 가정의 형편에 따른 교무금 차등 봉헌을 전국에서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그는 복사소년들을 교육시키며 신학생 발굴에도 힘썼다. 페랭 신부는 프랑스에서 배워온 기술로 고약과 안약을 직접 제조하여 신자들과 가난한 주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며 치료해 준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것은 애덕실천과 선교의 좋은 방편이기도 했다.

기도와 사목활동에 열정적이었던 페랭 신부는 신자들은 물론이고 향촌사회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을 뿐 아니라 일제치하의 시대적 난관 속에서도 꾸준히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는데, 아직도 합덕지역의 노인신자들은 페랭신부의 신앙과 사도직 열성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는 1939년 합덕본당에서 당진본당을 분할시키고 정해진 관할지역 안에서 정착을 이루고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페랭 신부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보좌신부를 피신시키고 1950년 8월 14일에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집전하다가 공산군에 피랍되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 후 대전에서 순교하였다. 합덕본당의 신자들은 주님의 착한 목자로 사목하다가 순교한 그분을 기리며 1957년에 ‘백 비리버 문필 신부 순교비’를 세웠고 그분의 유품 일부를 담은 묘를 조성하였다.

페랭 신부를 이어 박노열(바오로) 신부가 합덕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박노열 신부는 페랭 신부가 실시하던 신심단체와 활동단체들뿐 아니라 여러 봉사 단체들을 늘리며 활성화하였고 공소 사목에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박노열 신부의 업적 중에 특기할 것은 사제양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결실이었다. 그의 사제성소 발굴과 양성과 관련된 공헌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살펴보겠다.

<b>1.2 </b><b>합덕지역 순교자들</b>

합덕 지역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파악된 이들만도 187명이다. 그들 중에서 시복된 순교자들의 이름과 세례명 그리고 출생지를 순교일자 순으로 나열해 보면 이렇다.

원시장(베드로) 응정(현 합덕면 응정리), 박취득(라우렌시오) 면천, 방(프란치스코) 면천, 원시보(야고보) 응정(현 합덕면 응정리), 정산필(베드로) 덕산, 배관겸(프란치스코) 덕산, 인언민(마르티노) 덕산, 이보현(프란치스코) 덕산, 강완숙(골롬바) 덕산, 김정득(베드로) 충청 대흥, 홍필주(필립보) 덕산, 김사집(프란치스코) 덕산, 김진후(비오) 면천, 이시임(안나) 덕산, 고성운(요셉) 덕산, 김종한(안드레아) 면천, 최성열(발바라) 덕산, 김화춘(야고보) 덕산, 정태봉(베드로) 덕산, 이사성(요한) 신리, 손자선(토마스) 신리, 손(마르첼리노) 신리, 신(그리산도) 덕산, 백청여 신리, 손여희 신리, 손치황(요한) 신리

<b>1.3 </b><b>합덕지역 출신 사제들</b>

복된 성지이며 영적으로 비옥한 땅인 합덕본당 관할지역 솔뫼에서 1821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했고 그 후 수많은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합덕지역에 속한 합덕본당과 신합덕본당, 신평본당에서 태어났다.

가) 합덕본당 출신 사제들

신인식(바오로) 신부, 양덕환(안드레아) 신부, 유영근(요한) 신부, 윤을수(라우렌시오) 신부, 김영식(베드로) 신부, 신원식(루카) 신부, 박성춘(레오) 신부, 김철규(바르나바) 신부, 김영환(타대오) 신부, 김동억(바오로) 신부, 김종국(바르나바) 신부, 윤주병(베드로) 신부, 김기룡(사도 요한) 신부, 안문기(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김진화(바오로) 신부, 김신호(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윤인식(바오로) 신부, 윤인용(바오로) 신부, 박상옥(토마스) 신부, 윤세병(세례자 요한) 신부, 김진형(세례자 요한) 신부, 이상호(요한) 신부, 신양수(바오로) 신부, 이은진(미카엘) 신부, 이재형(요한) 신부, 윤인규(라우렌시오) 신부, 김종기(세례자 요한) 신부, 김명환(요셉) 신부, 김정환(세례자 요한) 신부, 서용원(다미아노) 신부

위에 언급된 사제들 외에도 합덕본당에서 신학생 때에 다른 교구나 다른 본당으로 이사해서 그곳에서 사제가 된 이들이 많고, 또 합덕본당 관할에서 태어났지만 가정이 타 교구로 이사하게 되면서 그곳에서 사제가 된 이들도 적지 않다.

합덕 본당 지역에서 수녀원에 입회하여 수녀가 된 수자는 통계기록이 없지만, 2000년이 되기 전 1990년대 까지 100명이 훨씬 넘는다고 전해졌다. 합덕출신 남자 수도자도 여러 명 있다. 1960년엔 합덕본당에서 신합덕본당이 갈라져 나갔고, 1975년에 신합덕본당에서 신평본당이 분가하였다. 합덕본당에서 분가한 이 본당들은 오랫동안 합덕지역의 교우촌 내지 공소였기 때문에, 합덕본당과 함께 내포교회의 전통적 영성을 공유했고 가장 먼저 세워진 합덕본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사제성소와 사제 배출에 있어서 그러했다.

나) 신합덕본당 출신 사제들

이한영(마르코) 신부, 김종민(사도 요한) 신부, 김찬형(안드레아) 신부, 박진규(요셉) 신부

다) 신평본당 출신 사제들

김철규(바르나바) 신부, 박재만(타대오) 신부, 박우식(요셉) 신부, 구일모(베드로)신부, 구정모(마르코)신부, 홍광철(세례자 요한) 신부, 최효인(시몬) 신부, 이석우(비오) 신부, 최상순(비오) 신부, 박종훈(안토니오) 신부, 박종민(임마누엘) 신부, 김대주(세례자 요한) 신부.
<ol>
 	<li><b> </b><b>아산</b><b>·</b><b>공세리 지역 교회사 및 순교자</b><b>, </b><b>출신 사제들</b></li>
</ol>
<b>2.1 </b><b>아산</b><b>·</b><b>공세리지역 복음전래</b>

아산·공세리 지역에도 여사울 이존창의 전교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복음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순교록에 나오는 걸매(현 아산시 인주면 걸매리) 출신의 박원서(마르코, 1817-1867)가 수원에서 1867년 51세로 순교하였는데 그는 태중교우였다. 걸매 밀양 박씨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적어도 박원서가 태어난 1817년 전이었다. 이 시기는 아산만 방조제를 완성한 그의 조부 박종학(1751-1836)을 비롯하여 백부 장환, 부친 상환, 계부 동환 3형제가 생존해 있던 시기였으므로 밀양 박씨 집안은 박종학 생존 시부터 천주교 신앙을 받아 들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784-1785년 경 이존창이 여사울 신앙공동체를 창설한 지 얼마 안 되어 박씨 집안에서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 신앙이 걸매 동네에서 파급된 것으로 교회사 연구자들은 추정한다. 교회사 연구자들은 그 시기, 즉 신유박해 이후에 아산과 그 인근 여러 곳에 천주교 공동체들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본다. 밀양 박씨들이 살았던 걸매(현 인주면 걸매리)를 비롯하여 밀두리(현 이주면 밀두리), 아산 쇠재(현 아산 영인면 성내리), 신창 남방재, 창말(현 아산시 선장면 대흥리), 신창 용당리(현 아산 선장면 가산리) 등지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리델(F. Ridel) 신부가 한 때 머물던 방아사골(현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에도 신자들이 은거해 살고 있었다. 조선에 입국한 여러 선교사제들이 병인박해 전에 아산·공세리 지역을 순회방문하며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메스트르(A. Maistre) 신부는 1852년 이후 아산을 포함한 충청도 해안과 경상도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순회 사목하였다. 1861년 10월 아산 지역의 공동체는 하부 내포 지역본당에 속하게 되었는데 초대 본당신부로 랑드르(Landre) 신부가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랑드르 신부가 선종한 후엔 아산지역을 순방하며 사목한 이가 다블뤼 주교(1857년 주교 서품)였다. 다블뤼 주교는 둠벙이(현 공주시 신풍면 조평리)에 사목중심지를 두었다가 1857년을 전후로는 광천에 거처하기도 했고 1865년 무렵엔 방아사골(현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에도 거처하였다. 1865년 10월 이후엔 신리(현 합덕읍 신리)를 사목 중심지로 삼고 인근 지역을 순방했는데 지금의 아산, 당진, 예산지역이 이때 다블뤼 주교가 담당했던 사목관할 지역 안에 속해 있었다.

1890년 2월 블랑주교가 선종하면서 임시 교구장을 맡게 된 코스트(E. Coste)신부는 같은해 8월 내포지역에 두 곳의 본당을 서립하고 2명의 선교사, 퀴를리에(L.Curlier)신부와 파스키에(P.Pasquier)신부를 이곳으로 파견하였다. 퀴를리에(L.Curlier)신부는 예산 양촌(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파스키에(P.Pasquier)신부는 예산 간양골(현 예산읍 간양리)에 거처를 정했고 두 곳의 본당을 각각 ‘양촌본당’, ‘간양골 본당’이라 불렀다. 당시 양촌본당(현 합덕본당의 전신)의 퀴를리에 신부는 공주, 논산, 부여, 서천, 서산, 홍성, 당진 등 주로 충남의 서쪽 해안에서 남쪽 지역까지 관할하였다. 간양골본당(현 공세리본당의 전신)의 파스키에 신부는 아산, 예산, 천안 등 충남의 북쪽과 북서쪽, 충청북도의 진천과 경기도의 평택, 안성 일부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후 파스키에 신부는 1890년에 신흥리공소를, 1891년엔 가래기공소를, 1892년엔 남골공소를 설립하였다. 따라서 현 아산(온양) 지역엔 위 세 공소와 기존에 있던 공세리(걸매), 갈산리, 뒤내, 명지게미, 당개, 덕지를 합쳐 9개의 공소로 증가하였다. 파스키에 신부는 자연적, 지리적, 경제적 여건이 좋은 걸매 마을(공세리공소에 속하는 지역)의 ‘아름다운 언덕’에 성당을 건립하려는 뜻이 있음을 1894년 연말보고서에서 뮈텔 주교에게 보고한다. 파스키에 신부는 1894년 초부터 이미 간양골 본당을 공세리로 이전하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 희망을 공세리·걸메 신자들에게 이야기함으로써 주변 마을에 소문이 퍼졌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파스키에 신부가 언급한 ‘아름다운 언덕’은 그가 연말보고서에서 설명한 내용과 문맥상 조선시대 공진창이 있던 언덕 즉 지금의 공세리 성당 위치를 말한 것이 분명하다고 전해진다. 그의 희망은 그가 본당을 떠난 후 새로 부임한 드비즈(E.O.Devise)신부에 의해 현실화 된다.

파스키에 신부는 질병(류마티즘)을 치료하기 위해 1894년 10월 초 홍콩으로 떠나게 된다. 뮈텔주교는 새 주임신부로 드비즈 신부를 임명하였는데 그는 1895년 5월 5일 공세리로 부임한다. 그가 부임한 곳은 간양골이 아니라 공세리였는데 따라서 그가 부임한 본당 이름이 ‘공세리 본당’이 되었다. 2대 주임신부인 드비즈 신부가 공세리에 새 거처를 정하고 부임한 것은 간양골에 있던 본당을 공세리로 이전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던 파스키에 신부의 조언에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 공세리 본당의 설립일은 2대 주임인 드비즈 신부의 임명일인 1895년 5월 5일이 아니라 간양골본당 1대 파스키에 신부가 임명된 날인 1890년 8월로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공세리 본당은 간양골 본당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b>2.2 </b><b>아산</b><b>·</b><b>공세리지역 순교자들</b>

교회사의 기록에 아산 지역의 첫 순교자로 등장하는 사람은 1825년 3월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한 하 바르바라였다. 그녀는 당진 출신으로 면천에서 살다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전교회장이 되어 내포지역 여러 곳으로 다니며 전교하는 데 힘썼다. 1825년 3월 아산의 반대마을에서 체포되어 해미진영에서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했지만 석방된 후 병사하였다.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조화서 베드로가 1839년 기해박해 이후 남방재(현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에서 살면서 아들 주윤호 요셉을 낳았는데, 이들 부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아산과 인근 지역 곳곳에 형성된 교우촌들은 1866년 병인박해와 그 후 여러 차례 포교들의 습격을 받았으며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게 된다. 병인박해는 1866년 1월 9일 서울의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같은 해 3월 11일에 내포지역 거더리에서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고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 황석두 등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3월 30일 보령시 오천면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는 얼마 안 되어 아산 지역에까지 미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교회순교록에 의하면, 1867년에 걸매 출신의 박의서(사바) 회장과 일가친척들이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하였다. 박의서 회장 집안의 순교자는 모두 10명이었다. 걸매(현 아산 인주면 걸매리) 출신이거나 걸매에서 거주하다가 병인박해 이후에 체포된 순교자는 박씨 집안 10명을 포함하여 모두 19명이다. 여기에 밀두리 출신 순교자 4명, 아산 구말리 출신 순교자 1명, 아산 쇠재에 거주하던 순교자 3명, 아산 등골에 거주하던 1명, 아산 뒷내 출신 순교자 2명 그리고 아산 산소말에 거주하던 기묘해 박해 순교자 1명을 더하면 병인박해 이후 기묘박해 때까지 아산지역 출신 순교자는 모두 31명에 이른다. 1825년의 순교자 하 바르바라를 포함하면 박해기에 순교한 아산지역 출신 순교자 수는 모두 32명이 된다.

<b>2.3 </b><b>아산</b><b>·</b><b>공세리지역 순교자 유해 이장 및 묘 표석 안치</b>

현재 공세리성당 구내에 8위의 순교자들의 유해와 1위의 묘표석이 안치되어 있다. 그 유해들과 묘표석은 1988년 9월 20일과 2006년 10월 30-31일 두 차례에 걸쳐 본래의 무덤이 있던 아산 맹고개(현 아산 인주면 냉정리의 맹령)의 밀양 박씨 의암공과 함께 문중 선영에서 발굴하여 성당 구내로 옮긴 것이다. 1988년 첫 번째 발굴 이장에서는 병인박해기인 1867년 수원에서 순교한 박의서 사바 회장, 그의 아우 박의서 마르코와 박익서 등 삼형제의 유해를 발굴하여 이장했고, 2006년의 두 번째 발굴 이장에서는 병인박해기의 순교자 박인서, 이 마리아, 이씨 부인, 박홍갑, 박화진 알렉산델 등 5명의 유해와 조 모니카의 묘 표석을 발굴하여 이장했다.

<b>2.4 </b><b>아산</b><b>·</b><b>공세리지역 출신 사제들</b>

1) 공세리본당 출신사제

봉희만(안토니오)신부, 강만수(요셉)신부, 신규식(도메니코)신부, 이규남(요셉)신부, 이종민(요아킴)신부, 정준섭(요셉)신부, 강길원(베드로)신부, 이유수(요아킴)신부, 유영근(요한)신부, 맹봉술(요한)신부, 김성현(스데파노)신부, 강창원(마르티노)신부

2) 온양본당 출신사제

김종원(비오)신부, 이종석(레오)신부, 홍성민(미카엘)신부, 이원광(사도요한)신부

3) 천안지역본당 출신 사제들

3.1) 천안오룡동

유인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신부, 서용태(타대오)신부, 지경준(시몬)신부, 성병렬(야고보)신부, 국일호(대건 안드레아)신부

3.2) 천안봉명동

정운광(마태오)신부, 박상균(세례자요한)신부, 임민수(베드로)신부, 유영근(야고보)신부, 전용국(레오)신부

3.3) 천안쌍용동

장인국(세례자 요한신부), 김광호(요셉)신부, 길기문(토마스 아퀴나스)신부, 김준영(안드레아)신부, 김철희(시몬)신부, 김현(마태오)신부, 최동민(파스칼)신부

3.4) 천안쌍용 3동

김도원(안셀모)신부,

3.5) 천안성정동

이의철(가밀로)신부, 김민수(야고보)신부, 김용태(안드레아)신부

3.6) 천안원성동

강전민(스데파노)신부, 이상규(야고보)신부, 박제준(토마스)신부, 백종관(요셉)신부

3.7) 천안신부동

이용호(바오로)신부, 오기환(사도 요한)신부, 유창현(사도 요한)신부, 유정의(바오로)신부, 전영우(우보)신부, 노상민(토마스)신부, 박종민(프란치스코)신부, 김준성(스데파노)신부, 김현수(프란치스코)신부

3.8) 천안구룡동

이승민(대건 안드레아)신부

3.9)천안 신방동

주선우(요셉)신부

3.10) 천안 청당동본당

최바오로(바오로)신부
<ol>
 	<li><b> </b><b>공주지역 교회사와 순교자들 그리고 출신 사제들</b></li>
</ol>
<b>3.1 </b><b>공주지역의 복음전래</b>

여사울에 신앙공동체를 세운 이존창은 인근에서 시작하여 내포 전 지역으로 천주교 신앙을 전하며 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교세가 확대되어 가면서 이존창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은 내포의 신자들 중 전교활동에 적극 협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내포교회는 예산, 면천, 덕산, 당진 등 서해안 지역으로부터 점차 내륙지역인 홍주, 청양, 정산 등지로 확대되어 갔고 그러면서 공주 지역에도 복음이 전파되었다.

공주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한 때는 1791년 무렵이었다. 기록상으로 볼 때 공주 출신으로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김명주와 두 아들 황철, 인철이었다. 이들은 1791년경 이존창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1795년에 상경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주문모 신부를 만나 교리를 더 배우고 세례를 받기 위해서 상경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791년 순교한 윤지충의 부인과 딸이 박해 후에 공주로 이사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는 기록도 나타난다. 이존창과 함께 내포교회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교세가 점점 확장하도록 도운 이들이 있었다.

내포·충청 지역에 복음전파에 중요역할을 한 이도기는 공주 지역 출신으로서 홍주의 이세채, 보령의 김성옥, 청양의 이원경, 은진의 이상원, 공주의 김선룡 등에게 전교하였다. 덕산 출신 정산필 베드로는, 홍주의 김일찬, 덕산의 정복선 부자, 유한징, 박춘산, 박중돌 등에게 전교하였다. 이들 외에도 내포교회 초창기에 입교하여 활동한 신자들이 많았는데 면천 출신 박취득 라우렌시오, 홍주 출신 원시장 베드로, 보령 출신 김한빈 베드로, 청양 출신 김풍헌 토마스 등이 있다.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 이후 병인박해(1886년)에 이르기까지 내포·충청 지역의 신앙공동체의 성격이 변모해 나갔다.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인적이 드문 산골로 피신하여 교우촌을 이루었고, 그 교우촌 중 일부는 공소로 지정되기도 했다. 외교인들과 함께 거주하던 교우촌의 신자들은 그들과 상호 교류를 갖기도 했다. 다른 한편 교우촌이나 다른 신자들과 전혀 교류 없이 숨어사는 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신앙생활을 중심으로 하던 교우촌이 박해로 인해 포교들로부터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고 모든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한 경우도 있다.

대표적 사례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공주 국실((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공소: 회장 김화숙 베드로와 신자 30명이 1867년 4월에 체포되어 공주에서 1차로 8명이 교수형으로 순교했고, 2차로 19명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공주 접티(현재 지명 불명): 1866년에 강치명 바오로 등 4명이, 1868년에 강덕중 바오로 등 5명이 공주에서 순교하였다. 그 외에도 랑드르 신부가 거주하던 공주 덤벙이, 리델 신부가 거주하던 공주 진밭 등도 그러한 박해로 교우촌이 폐쇄되었다.

1882년 한미조약이 체결된 이후 두세(Ducet) 신부가 공주 지역을 순방하며 사목하기 시작했고 1886년 한불조약을 체결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자 공주 인근의 산곡에 은둔하던 신자들은 억압의 틀에서 벗어나 편안한 마음으로 공소예절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뮈텔주교는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한국인 사제들이 꾸준히 탄생하고 입국하는 선교사들도 증가하면서 1896년과 1897년에 걸쳐 새 본당들을 신설하였다. 이에 1897년 5월 8일자로 양촌본당(현 합덕본당)에서 분리되어 ‘공주본당’이 설립되면서 기낭(Guinnand) 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임명되었다.

기낭신부는 당시 공주 읍에 거처할 곳이 없었으므로 임시 거처가 마련되어 있던 요골 공소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요골의 공소집이 그 위치나 구조면에서 불편한 점이 많아 공주로 이전할 계획을 가지고 탐색하던 중 강경골(현 공주시 중동의 강경동)에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대지와 기와집을 찾아 그것을 매입하였다. 기낭신부는 뮈텔주교에게 본당을 공주 읍으로 옮기고 싶은 희망을 보고 드렸고 1897년 6월 28일 요골을 떠나 공주 읍내로 이전하였다.

교회가 매입한 가옥의 매매와 철거를 둘러싸고 1개월에 걸쳐 교회 측과 교회를 대적했던 지방 관리들 사이에 복잡한 분쟁이 있었지만 교회 측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기낭신부는 약 10개월 정도의 공사 끝에 1898년 4월 말에 성당과 사제관 그리고 기타 부속 건물의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매입했고 건축공사를 한 자리가 바로 현재의 중동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땅이다.

1921년 6월 말 공주본당의 제 5대 주임으로 임명된 최종철(마르코)신부는 새로운 성당과 학교를 건립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계획을 세웠다. 기존 성당이 좁아 미사 봉헌하는 데 불편하였을 뿐 아니라, 그러한 계획 실행이 지역사회의 전교에 도움이 되고 어린이들을 교회학교에서 가르침으로써 역시 전교에 유익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뮈텔주교의 후임으로 제 9대 서울 교구장이 된 라리보(Larribeau) 주교에게 성당건립 계획을 보고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최신부는 신자들의 기도와 성당건립을 위한 헌금에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하면서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공사를 시작했다. 신자들은 그에 적극 협력하면서, 건물의 기공식 때부터 완성될 때 까지 ‘묵주기도 100만단 봉헌 운동’까지 전개하였다. 건축공사는 1937년 5월 초에 끝을 맺게 되며, 같은 달 12일에 성당 등 건축물 축성식과 낙성식을 갖게 되었다. 그 성당이 바로 현존하는 코딕식 건물, 공주중동성당이다.

<b>3.2 </b><b>공주지역의 순교자들</b>

<b>1) </b><b>초기박해와 공주지역의 순교자들</b>

1797년 충청감사 한용화가 일으킨 정사박해로 내포교회가 큰 타격을 받았으나 공주 출신의 순교자는 아무도 없었다. 한때 덕산 출신 인언민 순교자가 공주지역에서 거처한 사실이 있었다. 정사박해 이후 공주지역은 여러 지역의 신자들의 은거지로 변모했다. 서해안 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고향을 떠나 신분을 감추며 신앙생활을 계속하기 위해 공주의 산간지대로 옮겨 산 것으로 추측된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이존창 등 6명이 감영이 있는 공주에서 처형되었는데, 이로써 공주에서 처음으로 순교자가 태어난 것이다. 신유박해 이후 전국적으로 박해가 계속되었으나 공주에는 그 여파가 미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공주 지역의 산곡마다 교우촌이 자리잡게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전국적으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게 되었지만, 공주에서는 전 베드로 한 명이었다. 한편 이 박해 때 공주 출신 이춘화 베드로가 전북 나주에서 순교한 기록이 있다.

<b>2) </b><b>병인박해와 공주지역의 순교자들</b>

병인박해(1866년) 때부터 1879년까지 내포·충청 지역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내포·충청 지역뿐 아니라 인근 전라도에서도 체포되어 왔다. 순교지는 초기 갈매못 외에 충청 관찰사가 있던 공주와 영장(營將)이 주재하던 홍주 그리고 해미읍성 세 곳이었다.

공주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공주, 신창, 목천, 해미, 덕산, 홍주(당진, 합덕 등) 출신 신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예산, 연산, 홍산, 천안, 대흥, 유구, 남포, 전라도 그리고 다른 여러 지역 출신 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공주의 순교지는 황새바위였다. 황새바위는 제민천 하류 부근으로 금강과 가까운 곳이었다. 황새바위로부터 제민천 일대가 모두 순교지이자 또한 순교자들의 무덤이 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이곳 순교자들 가운데 주민이 근처에 시신을 옮겨 매장해 준 경우가 소수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시신은 거두어들여지지 않았다. 신자들을 죽이는 형벌 주로 교수형(絞首刑)과 참수형(斬首刑)이었지만 생매장도 있었다.

처형된 천주교 신자명단을 기록한 포도청 등록을 조사한 연구에 의하면, 1866년에서 1879년까지 공주, 홍주, 해매읍성에서 순교한 신자 중에 거주지를 알 수 있는 330명 가운데 약 25%인 81명이 내포·충청 출신이다. 정부 측 기록과 교회 측 기록을 같이 대조하여 조사해 보면 내포·충청 출신 신자가 약 380명이고 다른 지역에서 순교한 내포·충청 신자수를 더하면 약 500명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868년 3월에서 6월까지 5개월 동안 공주, 홍주, 해미에서 순교한 신자가 191명이다. 그러나 교회 측 기록에 나타나는 신자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순교자들이 그 기록에 누락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회사 연구자들은 여러 정황을 참작하여, 각 지역별 순교자 수를 추정한다. 공주 지역 순교자는 1,503명(기록상 193명), 홍주 지역 순교자는 692명(기록상 89명), 해미 지역 순교자는 405명(기록상 52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b>3.3 </b><b>한국교회사 안에서 공주지역 교회의 의미</b>

첫째, 한국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계속됨과 동시에 내포교회가 확산되어 가면서 공주 지역에도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었고 점차 여러 산골에 비밀 신앙공동체로서 교우촌들이 형성되었다. 내포지역의 신앙공동체들이 평야지대에 조성되었던 것과 비교할 때 공주 지역엔 산간지역이 많으므로, 공주 지역 신자들뿐 아니라 다른 지역 신자들도 이주하여 숨어서 신앙생활하기에 적당했다.

둘째, 공주는 일찍부터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 즉 순교지가 되었다.

선조 35년(1802년)에 충청도 관찰사의 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옮겨지면서 충청도 각처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이곳으로 이송되어 신문과 판결을 받았다. 따라서 공주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 흘려 순교한 성지가 되었다.

셋째, 공주 지역은 여러 차례 박해를 받았지만 신자들과 그들의 신앙이 사라지지 않았고 여러 교우촌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 그 결과 신앙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시기에는 일찍부터 각처에 공소가 설립될 수 있었고, 선교사제들이 그 공소들을 순방하며 사목을 활발히 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박해 이후 교회 재건에 바탕이 되었다. 아울러 이 공소들에서 많은 방인사제들과 수도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으니, 이처럼 공주 지역은 일찍부터 ‘성소의 못자리’로 자리 잡아 온 곳이라 말할 수 있다.

<b>3.4 </b><b>공주지역 출신 사제들</b>

구전회(발토로메오)신부, 김윤산(베네딕도)신부, 유봉운(야고보)신부, 안선호(베다) 신부, 유성숙(루도비코)신부, 이존복(그레고리오)신부, 유재식(안셀모)신부, 윤석빈(루카) 신부, 김병상(필립보)신부, 이종대(요셉)신부, 구자오(베네딕토)신부, 구자륜(비오) 신부, 변갑철(바오로)신부, 최병석(마리아노)신부, 윤여옥(안토니오)신부, 윤성균(가브리엘)신부, 김관희(마르첼리노)신부, 정필국(베드로)신부, 최석영(이냐시오)신부

오종진(베드로)신부(공주신관동), 최용상(바오로)신부(공주교동), 신응석(마르코)신부(공주중동), 변창수(시메온)신부(공주중동), 최용묵(사도요한)신부(공주교동), 박성언(그레고리오)신부(공주신관동), 노영호(베드로)신부(공주중동), 박윤재(라우렌시오)신부(공주교동)
<ol>
 	<li><b> </b><b>홍주지역 교회사와 순교자들 그리고 출신 사제들</b></li>
</ol>
<b>4.1 </b><b>홍주지역의 복음전래</b>

홍주지역(오늘의 홍성, 광천, 예산, 청양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것은 이존창이 1784년 여사울에 신앙공동체 설립 후 얼마 안 된 때였다고 전해진다. 1788년에 남인 출신으로 천주교 반대에 앞장섰던 홍낙안이 내포지역(충청도 서부 지역)에 널리 퍼진 천주교 전파 상황에 대해 언급한 기록들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홍낙안은 1791년 조정에 올린 글에서도 홍주의 예속 현(縣)인 예산과 보령 지역의 천주교 전파에 관해 설명한다.

홍주 지역은 1780년대에 이미 예산, 당진, 보령, 면천, 덕산, 청양 등과 함께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으며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이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이 증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95년 정조가 정약용을 금정 찰방으로 보낸 이유도 천주교와 관련하여 반대파들의 공격을 받는 그를 보호해 주고 그로 하여금 금정 이웃의 천주교 신자들을 다스림으로써 천주교와 무관하다는 것을 입증해보일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데 있었다. 실제로 정약용은 이때부터 교회를 멀리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홍주 지역의 천주교 전파는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홍주지역의 신앙공동체는 병인박해(1866년)로 인해 거의 와해 될 정도로 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가 1890년 내포지역에 양촌본당과 간양골본당이 설립되면서 내포교회가 꾸준히 성장하자 홍주지역에는 신자들이 다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후 홍주지역은 수곡(현 서산 동문동), 합덕, 예산 본당의 관할하에 있다가 1950년 예산본당에서 분리되어 ‘홍성본당’으로 설정되었다. 초대주임으로 강만수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한국 전쟁으로 인해 대전으로 압송되어 순교함으로써 본당사목이 중단되었다. 이로 인해 홍성본당은 예산본당 소속 홍성공소가 되었다. 1956년 3월 세라장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홍성공소는 다시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세라장 신부는 부임 직 후 대교리에 성당을 신축하고 본당운영 정상화에 힘썼다.

제 4대 주임 유성숙 신부는 1963년 4월 지금의 성당 대지를 매입하였고 5대 주임 윤영균 신부는 1968년 10월에 현 성당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6대주임 원종덕신부가 성당과 사제관 공사를 마쳤고, 1969년 7월에 홍성성당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b>4.2 </b><b>홍주지역 순교자들</b>

내포·충청지역에서 홍주지역은 공주 다음으로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였다. 홍주 지역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자가 체포된 것은 1791년 신해박해 때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전주에서 순교한 뒤 여러 지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다. 홍주 지역의 박해 초기(1791-1801년)의 순교자들은 8명이다.

박해 중기(1812-1839년)의 홍주 지역 순교자들은 이여삼 바오로를 포함하여 4명이다. 병인박해기의 홍주 지역 순교자들은 모두 합쳐 199명이다. 연도별 순교자수는 이러하다. 1866년에 48명, 1867년에 19명, 1868년에 115명, 1869년에 2명, 연도 미상이 15명이다. 확인된 홍주 지역 순교자 전체의 숫자를 종합해 보면 211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발견된 기록상의 순교자일 뿐이며 실제의 순교자수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b>4.3 </b><b>홍주지역 출신 사제들</b>

홍주지역 출신 최양업(토마스)과 최방제(프란치스코)는 1836년 한국교회에서 처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하였다. 최양업은 다래골(현 다락골) 출신으로 경기도에 이주해 살던 최경황의 장남이었다. 그리고 최방제는 홍주에서 태어났다.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두 번째 한국인 사제로 수품 되었다. 그러나 최양업, 김대건과 함께 사제직을 준비하던 최방제는 안타깝게도 1837년 마카오에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홍성 지역 본당들의 출신 사제들은 아래와 같다

1) 홍성본당 출신 사제들

조장윤(베르나르도)신부, 이창덕(마르코)신부, 김탄용(베드로) 신부, 곽상호(사도요한)신부, 김재덕(베드로)신부, 김수형(필립보)신부, 이상빈(알렉산델)신부(홍북본당)

2) 예산본당, 신례원본당 출신 사제들

김순호(프란치스코 하비에르)신부(예산), 강석준(미카엘)신부, 이원순(마티아)신부, 임기선(요셉)신부, 여준구(안토니오)신부

3) 삽교본당 출신사제

조병기(바오로)신부, 김문수(야고보)신부

4) 광천본당 출신 사제들

한현택(아우구스티노)신부, 서석빈(다니엘)신부, 황병현(요한 에우데스)신부, 김영민(베드로)신부

5) 덕산본당 출신 사제들

최교선(토마스)신부, 김창선(안드레아) 신부, 최교성(세례자요한)신부, 김경식(미카엘)신부, 이덕길(알바노)신부, 장동준(라파엘)신부

6) 대천본당 출신 사제들

권태웅(안셀모)신부, 오남한(루카)신부, 조성광(바오로)신부, 송우진(가시미로)신부, 김인호(루카)신부, 김두한(요셉)신부, 조성구(미카엘)신부, 이성진(다미아노)신부

7) 청양본당 출신 사제들

이영일(야고보)신부
<ol>
 	<li><b> </b><b>논산지역 교회사와 순교자들 그리고 출신 사제들</b></li>
</ol>
<b>5.1 </b><b>논산지역의 복음전래</b>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논산 지역에 천주교 신앙을 처음으로 전한 이들은 윤지현 프란치스코(복자, 1764-1801)와 이도기 바오로(복자, 1743-1798)이다. 이들에 의해 은진에 복음이 전해졌고 연산에도 전해져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윤지현은 윤지충 바오로(복자)의 동생이다. 그는 형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1789년에 세례를 받았다. 은진 사람 이채운이 윤지현한테 교리를 배웠다는 기록이 있으니, 1789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 은진에 복음이 전해졌을 것이다. 이도기 바오로는 청양 출신으로 고향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신앙생활을 위해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정산의 어느 옹기점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주변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이도기는 1797년 6월에 체포되어 그 다음 해인 1798년 7월 24일에 순교하였으니 1797년 이전에 은진에 천주교 신앙이 전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은진 사람 오한상과 황경달은 누구로부터 교리를 배웠는지 알 수 없으나 은진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체포되어 1801년 신유박해 때 유배형을 받았다.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은진에 천주교가 전해진 시기는 1790년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연산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천주교 신앙이 전해진 정황이 나타난다. 결성 덕머리의 신자 원 베드로가 1794년경 박해를 피해 연산으로 이사했다. 그는 이사하기 전 외교인이 운영하는 옹기가마에서 일하던 중 교리를 배워 신자가 되었다. 그는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홍주 황쇠울로 이사하여 옹기를 구우며 살다가 그곳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형벌을 받았다. 형벌에서 풀려난 그는 연산 의실로 이사했는데 그곳 역시 신자들이 옹기를 굽는 마을이었다.

연산 의실에서 남동쪽으로 산을 넘어 6km 정도 가면 금산군 진산면의 지방리와 막현리에 이른다. 이 두 마을은 진산에 천주교를 처음 받아들인 윤지충과 그의 동생 윤지현이 성장한 지역이다. 따라서 은진처럼 의실에서도 이들의 영향으로 복음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초기교회사에서 연산은 내포지역과 서울 지역의 신자들의 피난처로 나타난다. 중앙정부가 있는 서울 그리고 내포지역 전체를 관할하는 홍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위에서 언급한 원 베드로와 비슷한 시기에 덕산 황무실(현 합덕읍 석우리) 사람 이보현(복자, 1773-1800)과 덕산 용머리 사람 황심 토마스(1756-1801)가 연산으로 이주했다. 서로 매형, 처남 사이였던 이보현과 황심은 1795년 이전에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연산으로 이사하였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교회 일에 협력하였다. 황심은 윤지현의 추천으로 북경을 왕래하며 교회의 중요한 밀사 역할을 하였다. 1795년엔 주문모 신부가 박해를 피해 연산 이보현의 집으로 가서 2개월간 은신한 바 있다.

한국교회 초창기의 역사를 보면, 논산 지역은 내포지역 만큼 큰 규모의 복음화 활동이 이루어진 정황은 없다. 복음이 전해진 시기는 진산과 청양 그리고 내포지역의 영향을 받으며 1790년경에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듯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복음전파가 늦었지만 비교적 안전한 옹기 교우촌이 형성되어 신자들이 공동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1839년 기해박해는 조선정부에서 주도한 전국적인 박해로서 그 여파가 2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살아남은 신자들 상당수도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야 했다. 이 과정에서 이미 복음이 전해진 강경 지역으로 피난한 신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강경 출신의 첫 신자는 이종필이다. 이종필의 행적을 보면 1790년대 후반에 천주교가 강경에 전해진 정황이 드러나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신앙공동체의 존재가 드러나는 시기는 기해박해가 일어난 후라고 여겨진다. 강경에는 외지에서 피신한 교우들뿐 아니라 1845년 무렵에 새로 입교한 신자들 몇 가정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지역 교우들과 교류하며 알고 지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김대건 신부 일행이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강경에 비밀리에 상륙했을 때 즉시 집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강경(현 강경읍 홍교동)의 교우 구순오가 그의 집에서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가 상륙한 첫날 밤을 지내도록 하였다.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신자들의 거주지 기록을 보면, 논산 지역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김윤지 등이 체포된 연산 상사바위, 정 안드레아가 체포된 연산 중보실, 김수환 추기경의 조부 김보현이 체포된 연산면 고정리에 신앙공동체가 있었다.

1860년대 중반에는 논산 지역 전역에 천주교가 확산되어 있었다. 대둔산 줄기를 넘어 진산으로 이어지는 벌곡면 덕곡리 일대에 큰 교우촌이 있었고 대둔산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고정리 일대에도 많은 교우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산의 교우들은 동쪽 산 너머 진산 일대의 신자들과 자주 만나고 교류하며 살았다.

금강 동쪽에 위치한 강경과 은진에는 여전히 많은 신자들이 거주했다. 논산지역의 북단의 노성에도 규모는 작았지만, 신자들이 살았다는 흔적이 나타난다. 1886년 한불조약의 체결로 조선의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면서 논산 지역 천주교회 신앙공동체들도 활기를 띠었다. 그 신앙공동체들이 있던 곳곳에서 공소 설립이 이어졌고, 이로써 논산성당이 세워지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 공소들은 이러하다. 강경공소, 삼산공소, 은진공소, 갈매울공소, 쇠목공소, 죽평공소, 돌분이공소, 동산공소, 장바탕이공소, 무동공소, 벌곡공소, 신기공소 등이다.

1911년 서울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된 후 두 교구는 경계선 확정 문제와 함께 논산을 두 교구 중 어느 곳으로 예속시킬 것인지 오랜 논란이 있었는데, 결국 논산은 서울교구에 소속되는 것으로 일단락되면서 논산에 새 본당이 세워졌다. 그리고 1921년 6월 파리외방전교회 루블레(Rouvelet) 신부가 논산에 부임하면서 논산본당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b>5.2 </b><b>논산지역 순교자들</b>

<b>1) </b><b>초기박해기 논산지역의 순교자들</b>

신해박해(1791년)때 논산 지역에는 박해의 영향이 없었다. 그러나 신유박해(1801년)때에는 논산 지역에서도 박해가 있었다. 그리하여 은진 출신의 이채운, 이상원, 오한상, 황경달 등 4명의 신자가 체포되어 유배형을 받았다. 임신박해(1812년)는 충청도에서 발생한 박해인데 연산에 거주하던 네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여러 명의 신자들이 유배형을 받았다. 그들 중에 연산 출신 신자들이 있었고 외지에서 연산으로 이주해 온 신자들도 있었다.

<b>2) </b><b>병인박해기 논산지역의 순교자들</b>

1866년 병인년부터 시작되어 1868년 무진년까지 벌곡, 연산, 은진, 강경, 노성 등 논산 지역에서 신자들이 박해를 당했는데 그 때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벌곡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신자는 김영오 아우구스티노, 김 베드로, 김윤지, 정 안드레아, 김 토마스였다. 연산, 노산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신자는 김영삼, 김보현 요한(김수환 추기경의 조부), 윤자호 바오로, 김 세례자 요한이었다. 그리고 은진, 강경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신자들은 김 베드로, 서경도, 김 치릴로, 이 바오로, 황 세례자 요한이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퇴위하고 고종이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되자 천주교 박해는 많이 약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지역에 따라 간헐적인 박해가 있었는데 논산 지역에서도 적지 않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순교자들은 김 사도 요한, 성 베드로, 박 알렉시오와 형제들, 장정선 등이었다.

<b>5.3 </b><b>논산지역 출신 사제들</b>

1) 논산본당 출신 사제들

박노열(바오로)신부, 김용태(베네딕도)신부, 여충구(마르코)신부, 송갑의(사도요한)신부, 유호식(아우구스티노)신부, 유흥식(라자로)추기경, 정재돈(바오로)신부, 김수겸(프란치스코)신부, 이상수(사도요한), 남광근(프란치스코 드 살)신부, 김주선(안셀모)신부

2) 강경본당 출신 사제들

박상래(야고보)신부, 고영환(타대오)신부, 김용남(힐라리오)신부, 김선태(야고보)신부, 김석태(베드로)신부, 백현(바오로)신부, 권선민(요셉)신부, 주상연(베드로)신부
<ol>
 	<li><b> </b><b>서산지역 교회사와 순교자들 그리고 출신 사제들</b></li>
</ol>
<b>6.1 </b><b>서산지역 복음전래</b>

교회역사기록에 ‘서산’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 이후이다. 당진진목(현 고대면 장항리)출신의 배관겸(프란치스코,복자)가 신해박해를 겪은 뒤 서산 두름바위(현 서산시 음암면 문양리)로 이주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몇몇 교우들과 함께 면천 양제(현 순성면 양유리)로 다시 이주하여 사제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비록 잠깐이지만 여기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내용은 서산지역 최초의 복음전파를 의미한다. 다음으로 서산지역의 복음전파와 관련되어 있는 인물은 김강이(시몬, 복자)가 있다. 그는 서산의 양인출신으로 동생인 김창귀(타대오)와 함께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던 1794년 12월 이전에 천주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11년에는 해미 이도면(현 서산시 운산면 지역)에 거주하는 15세의 박옥귀와 양인 안정구를 비롯하여 홍주, 덕산 등지의 천주교신자 10 여명이 내포의 골짜기(가야산 자락)에서 교리를 전하고 실천하다가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문초받았다. 그들 중 박옥귀는 천주교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1812년 금강나룻터에서 참수 순교하였다.

이후, 서산 특히 해미지역에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는 시기는 병인박해(1866-1873년) 직전이었다. 교회 순교록을 보면, 1860년대 초부터 서산지역으로 다른 지역에서 거주하던 신자들이 이주해 와 신앙공동체를 형성했고 병인박해 때 이들 신앙공동체에서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당시 서산지역에 형성된 신앙공동체들은 대부분 해미현 즉 지금의 운산면, 해미면 지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서산지역 금학리(소길리)에도 병인박해기에 신앙공동체가 존재했다는 증언이 있다. 금학리는 박해를 피해 모여든 천주교신자들이 일군 마을이라고 한다. 1881년에 금학리공소가 설정되었고 신자들이 점차 늘어났다. 금학리공소는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1917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금학리본당은 1920년 서산 상홍리로 본당을 이전하면서 다시 공소로 환원되었다. 상홍리본당의 주임 바로신부는 본당을 이전할 자리를 물색하다가 서산읍 공소 자리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그 자리는 지금 서산동문동성당 부지이다. 1936년 여름에 성당기공식이 있었고 성당과 사제관이 완공되어 1937년 10월 5일에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의 주례로 축성식이 있었다. 이로써 상홍리 본당시기가 끝나고 서산본당 시기가 열린 것이다.

<b>6.2 </b><b>서산지역 순교자들</b>

병인박해 시 서산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 중 신앙을 지키면서 목숨 바친 순교자들은 심 시몬을 포함하여 41명이다.

<b>6.3 </b><b>서산지역 출신 사제들</b>

1) 서산본당 출신 사제들

이종순 신부, 신인식(바오로)신부, 백남창(아가비도)신부, 백남익(디오니시오)시누, 조성옥(요한)신부, 박창득(아우구스티노)신부, 조규식(여한)신부, 민병섭(바오로)신부, 황선영(라우렌시오)신부, 김기만(알베르토)신부, 한정현(스데파노)주교, 이정욱(다니엘) 신부, 김경수(바오로)신부, 박효식(사도 요한)신부

서산 동문동본당 출신수녀 숫자는 1987년까지의 통계에서 29명이나 되었다. 그 후 더 많은 수녀들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2) 금학리공소 출신 사제들

금학리공소는 서산에 본당이 설립되기 전, 1881년에 설정되었으며, 한 때는 본당으로 승격되기도 했었다. 역사 깊은 금학리공소는 일찍부터 다수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배출했다. 금학리공소 출신 사제들은 다음과 같다. 여기엔 서산본당 출신 사제들 명단과 중복되는 신부들 이름이 있다.

김명재(베드로)신부, 신인식(바오로)신부, 이선영(바오로)신부, 김영환(타대오)신부, 김영곤(필립보)신부, 조규식(세례자 요한)신부.

금학리공소 출신수녀 숫자는 열일곱이다. 전국 천주교 공소들 중에서 금학리공소가 가장 많은 수도자를 배출했을 것이다.
<ol>
 	<li><b> </b><b>홍산</b><b>·</b><b>금사리지역 교회사와 순교자들 그리고 출신 사제들</b></li>
</ol>
<b>7.1 </b><b>홍산</b><b>·</b><b>금사리지역 복음전래</b>

한국 초기교회 역사에 ‘홍산’에 대한 기록은 달레의 &lt;한국천주교회사&gt; 안에 내포의 사도 이존창(1752-1801)의 이름과 함께 나타난다. 달레에 의하면, 이존창이 신유박해(1791년)때 체포되어 충청감영, 공주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면서 고향 여사울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홍산으로 가 머물면서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존창이 선교했던 ‘홍산’은 당신의 홍산현(縣)을 일컫는 것인데 그 홍산현은 현재의 홍산면 소재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홍산현 관아의 눈길을 피하여 여러 곳에 선교활동을 하며 규합해 나갔을 것으로 교회사가들은 추론하고 있다. 홍산지역에서 이존창이 전교하여 신자가 된 사람으로 황일광(시몬)의 이름이 잘 알려져 있다. 황일광은 청양의 이씨라는 사람과 함께 홍산에서 이존창을 만나 교리를 배우고 신자가 되었다. 황일광은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홍주로 끌려가 순교하였는데 그는 홍산지역의 첫 신자로서 순교하였으며 2014년에 영광스럽게 시복된 복자이다. 황일광에 관한 기록은 홍산지역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조선의 천주교회 초기에 이존창의 선교에 의하여 홍산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씨앗이 뿌려졌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유박해 때 홍산에서 김원석과 박천수가 체포되어 홍주로 이송되었는데 그들은 홍산 인근에 살던 김복성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홍주에서 유배형을 받은 최만재, 이취번, 감만기 세사람도 홍산의 김복성에게서 교리를 배운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면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홍산지역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신유박해 이후에도 홍산지역에서 천주교신자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을해박해(1826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를 지나면서 1850년대에 이르기까지 홍산지역으로 선교사제들이 계속 파견된 사실은 관아의 눈길을 피할 수 있던 홍산 지역 여러 곳의 산골에 교우촌들이 존속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그러한 산골의 교우촌들은 수십 년 간의 박해시기 동안 은밀히 존속되었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에 입각하여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1) 최양업신부가 귀국한 후 전국의 신자들을 순방하고 1850년에 홍산지역의 도앙골에 머물며 마카오 신학교의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최초의 보고서한을 작성하였다.

(2) 1856년 홍산지방 내대마을의 신자 집에 선교사 프티니콜라(Petinicolas)신부가 은거하며 조선말을 익히며 사목하였다.

(3) 1857년 산막골(현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에서 선교사 페롱(Peron)신부가 황석두 루카 회장의 보필을 받으며 선교하기 시작했고, 황석두 회장이 자기의 식솔들을 산막골의 산 너머 부덕리(현 옥산면 대덕 1리)와 홍산 삽티(상천 2리)에 거주하도록 할 정도로 이미 교우촌들이 존속되고 있었다.

(4) 황석두 회장이 그 당시 북두머니(현 외산면 만수리)와 거칠( 현 외산면 화성이)의 신자들을 방문하였다.

그와 같이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홍산 지역의 산골에 은거하며 교우촌을 이룰 수 있었던 상황을 최양업신부의 서간들에서 엿볼 수 있다. 내포라고 일컬어지던 당진, 예산, 홍주 지역의 평야지대에서는 비밀스럽게 신앙생활을 이행하기 어려워지자 점차 산간지역으로 이주하여 교우촌을 형성하였다고 최양업신부는 사목보고서에 기록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1860년대 이후 홍산을 중심으로 하는 현 부여군, 보령시, 청양군, 서천군의 산간지역을 ‘하부내포’라고 일컬어 왔다. 하부내포의 중심인 홍산지역엔 일찍이 교우촌들이 형성되었는데, 삽티, 도앙골, 내대, 고갈, 거칠, 옥가실, 상터 세재, 안나마리, 부덕리 등이 주요 교우촌들이었다. 이러한 교우촌들에 거주하던 천주교신자들은 1866년 이후에 병인박해시기에 홍산 현감에 의하여 홍주나 공주 감영 혹은 서울에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b>1) 1901</b><b>년 현 </b><b>‘</b><b>금사리 본당</b><b>’</b><b>인 </b><b>‘</b><b>홍산 본당</b><b>’</b><b>의 설립 </b>

박해가 잦아들던 시기인 1886년에 조선과 프랑스의 조약(朝佛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들의 활동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로 인해 충청 공주 이남의 전 지역을 사목하던 기낭(Guinand)신부의 뒤를 이어 1897년에 공주에 부임한 파스키에(Pasquier)신부는 홍산지역을 비롯한 충남 서남부(하부내포)지역에 따로 사목자를 파견해야 할 필요성을 조선대목구장 뮈텔(Mutel)주교에게 건의하였다. 동시에 홍산의 신자들이 서울의 뮈텔주교를 방문하여 사제파견을 간청하였다. 이에 따라 1899년 순방에 나선 뮈텔주교는 이 지역 신자들의 신앙상태를 확인하면서 사제파견의 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신학생을 선발하기도 하였다.

1901년 줄리앙 공베르(J. Gombert)신부가 홍산의 첫 본당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는 뮈텔주교의 명에 따라 충남 서남지역(하부내포지역)의 사목자로서 홍산에 부임한 것이다. 그의 사목관할지역은 홍산군을 비롯하여 부여군, 임천군, 한산현, 서천군, 남포현, 비인현, 보령현 등 내포 전 지역이었다. 공베르신부는 홍산읍내 가까운 곳에 성당 터를 잡으려고 시도했다가 ‘쇠앙이’라 일컬어지던 금사리(현 구룡면 금사리)로 가서 터를 마련하였다. 그곳에 1901년 5월부터 성전건축을 시작하여 1906년 4월 완공하였으며 1913년 9월 2일 뮈텔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이 성당이 바로 ‘홍산 성당’이라 일컬어지던 ‘금사리 성당’이다. 한일강제합방 후 1914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홍산군이 폐지되고 부여군에 병합됨으로써 일제강점기 동안 그 성당을 ‘부여성당’이라고 불렀다. 쇠양이의 ‘부여성당’은 1956년 규암본당을 분리함으로써 그 소재지 ‘쇠양이’의 별칭인 금사리란 이름을 따라 현재 일컬어지는 ‘금사리 성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b>2) 1958</b><b>년 지금의 </b><b>‘</b><b>홍산 본당</b><b>’ </b><b>설립</b>

금사리 본당의 제 13대 주임이던 최세구(Jezegou)신부는 부임한 후 새 본당이 세워질 곳으로 홍산을 지목하면서 그곳에 관심을 기울였다. 홍산은 여러지역으로 뚫린 교통 요충지이면서 5일장이 설 정도로 큰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최신부는 홍산에서 성당자리를 물색하던 중 적절한 땅을 매입하여 1957년 말부터 성당신축공사를 시작하였고 다음 해 1958년 5월에 완공하였다. 그리고 금사리본당에서 분리하여 이 성당 중심으로 ‘홍산 준 본당’을 신설하였으며 최세구 신부가 초대주임을 겸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8년 8월엔 견진성사를 집전하러 방문한 대전교구장 원형근 아드리아노 주교의 주례로 성당축성식이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매주일 이 성당에서 미사가 봉헌되었다.

‘홍산 준 본당’이 설립된 때는 1958년 5월이고 ‘홍산본당’의 교세보고는 1962년부터 정식으로 하였으나 ‘홍산본당’의 정식 본당승격일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b>7.2 </b><b>홍산</b><b>·</b><b>금사리지역 순교자들</b>

홍산지역에서 체포되어 홍주나 공주 그리고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된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은 &lt;치명일기&gt;와 &lt;치명자 증언록&gt;에 의해 일부 확인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황일광(시몬), 황천일(요한), 황기원(안드레아), 김사범, 김루카, 김바오로, 오시몬, 오요한, 박루시아, 박첨지의 아내, 양서방의 모친, 임베드로의 모친, 임아나타시아, 김바르바라, 이용래(아오스딩), 황마리아, 박시몬, 강영흠(베드로), 김천명, 최근서, 강호경, 임데레사, 강순오(안드레아), 박중문(토마스), 이사심, 이용옥(아오스딩)

<b>7.3 </b><b>홍산</b><b>·</b><b>금사리지역 출신 사제들</b>

1) 금사리본당 출신 사제들

윤예원(토마스)신부, 이완성(요한)신부, 이우철(시몬)신부, 손만재(세례자 요한)신부, 김병재(바오로)신부, 김영교(베드로)신부, 김인수(스테파노) 신부, 김용덕(야고보)신부

2) 홍산본당 출신 사제들

윤종관(가브리엘)신부, 윤종수(세례자요한)신부, 이건석(대건안드레아)신부, 최정규(요엘)신부, 박진수(사도 요한) 신부
<ol>
 	<li><b> </b><b>서천지역 교회사와 순교자들 그리고 출신 사제들</b></li>
</ol>
<b>8.1 </b><b>서천지역 복음전래</b>

충청남도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서천 지역에도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이 널리 전파되었다. 특히 페롱(Féron) 신부의 사목중심지였던 산막골(현 산막동)은 서천 일대의 사목중심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천 지역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한 사실을 볼 때 서천 지역은 1790년대에 천주교 신앙이 이미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천 지역에서 최초로 박해를 받은 신자는 전라도 무장 출신의 최여겸 마티아이다. 그는 윤지충을 통해 천주교에 대해 알게 되었고 1790년 초엔 처가인 한산에 머물면서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운 후 고향으로 돌아가 널리 복음을 전파하였다. 1801년 고향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한산 처가로 피신하였다가 체포되어 무장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1866년)로 서천지역의 여러 신자들이 잡혀가고 순교하게 되면서 신앙공동체가 일시 주춤하였다. 그러나 박해가 끝난 후 순교자들의 후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고 다른 지역의 신자들이 이주 해 오면서 서천지역의 여러 곳에 신앙공동체들이 다시 형성되기 시작했다. 서천지역에 형성된 공소들 가운데서도 1884년 공소로 설정된 독뫼(현 문산면 수암리)와 작은재(현 판암면 금덕리), 1890년에 공소로 설정된 용아실(현 마서면 덕암리)등이 유명했는데 이 공소들은 1897년 이래 공주본당 소속이 되었다. 그러다가 1901년 4월 27일에 공주에서 부여본당이 분리 설립되면서 초대주임으로 공베르(J. Gombert) 신부가 임명되었다.

공베르 신부는 용아실과 갈덕리(현 부여군 옥산면 가덕리)공소에 머무르면서 본당 중심지를 물색하였고 마침내 소양리 공소(부여군 구룡면 금사리)에 거처를 정함으로써 금사리 본당이 설립되었다. 이로써 서천지역의 공소들은 모두 금사리 본당에 속하게 되었다. 차차 서천읍의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1934년엔 금사리 본당 관할 서천공소가 설립되었고 2년 뒤인 1936년엔 서천공소가 서천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주임으로 조인원신부가 임명되었다.

서천본당의 2대 주임인 김영식 신부는 서천인근의 장항이 교회발전을 위해 요지라고 생각하면서 그곳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41년에 부지 2400평을 매입한 뒤 작은 건물 한 채를 지었다. 1943년 12월 15일자로 장항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서천본당은 장항본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다. 서천공소 신자수가 1950년-1960년대에 걸쳐 꾸준히 증가하자 공소신자들은 본당 승격을 추진하는 한편, 1967년 8월에 사제관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 29일자로 본당으로 다시 설정되면서 조병기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6대주임 김기 신부 이후 본당에서는 성당신축 계획을 수립한 후, 전 신자들의 노력함으로써 1984년 7월 2일 현재 성당을 신축하여 봉헌하였다.

<b>8.2 </b><b>서천지역 순교자들</b>

서천 지역 천주교회는 순교자 최여겸 마티아가 체포되어 무장으로 압송된 후 한동안 박해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때 서천 지역 교회도 집중적으로 수난을 겪게 되었다. 1866년부터 1879년까지 서천 관련 신자들이 56명이나 붙잡혀 심문을 받았다. 1866년에 24명, 1867년에 6명, 1868년에 19명, 1869년에 2명, 1871년에 1명, 1879년에 2명, 그리고 연대 미상의 시기에 2명이 붙잡혀 심문을 받았다. 이들 서천 지역 관련 신자들은 주로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병인박해시기에 대한 서천 지역 관련 역사자료에 의하면, 서울에서 43명, 공주에서 10명, 충주에서 2명, 보령 갈매못에서 1명이 심문을 받고 처형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병인박해 때 붙잡혀 심문을 받은 서천 지역 관련 신자들을 고을별로 살펴보면, 서천 고을 신자가 38명으로 가장 많았고, 비인 고을 신자가 12명, 한산 고을 신자는 6명이었다. 병인박해 때 붙잡혀 심문을 받았던 서천 지역 관련 신자들이 거주했던 고을은 산막골, 독뫼, 초막골, 구산면 작은재, 질미, 정수동, 중미동, 삼수동이었다. 이들 마을에 거주했던 신자들의 숫자를 보면, 산막골이 10명으로 가장 많았고, 독뫼가 4명, 초막골, 구산면 작은재가 각각 2명씩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고을들은 각각 1명씩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서천 고을 중에서 산막골과 독뫼가 중심이 되는 교우촌이었고, 그 중에서도 산막골이 가장 규모가 큰 교우촌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비인 고을의 경우, 체포된 신자들이 살았던 마을은 한티, 띠안말, 불무골, 산곡, 월봉이 있다. 이들 마을에 거주하다가 체포된 신자들의 숫자는 한티와 띠안말이 각각 3명씩이고, 불무골, 산곡, 월봉은 각각 1명씩뿐이었다. 비인 고을의 경우 한티와 띠안말이 큰 교우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산 고을의 경우, 체포된 신자들이 살았던 마을은 군간리, 장두목, 동학곡이었다. 군간리에 거주했던 신자가 2명이었고, 장목구와 동학곡에 살던 신자는 각각 1명이었다. 한산 고을에서 군간리가 비교적 큰 교우촌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병인박해 때 붙잡혀 심문을 받았던 신자들 중 일부는 안타깝게도 배교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신앙을 굳세게 증거하며 주님께 소중한 목숨을 바쳤다.

<b>8.3 </b><b>서천지역 출신 사제들</b>

1) 서천본당

박종우(안드레아)신부, 박성민(요한 금구)신부, 김지성(바오로)신부, 김정찬(사도요한)신부,

2) 장항본당

윤영균(미카엘) 신부, 양택규(안드레아)신부, 우희수(발타살)신부, 이경열(베드로)신부, 황화인(도미니코)신부, 김동진(사무엘)신부, 이은기(미카엘)신부
<ol>
 	<li><b> </b><b>해미지역 교회사와 순교자들 그리고 출신 사제들</b></li>
</ol>
<b>9.1 </b><b>해미지역</b><b>의 복음전래</b>

해미교회는 내포교회의 일부이므로 내포지역의 교회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784-1785년에 이존창이 여사울에 세운 신앙공동체의 신앙이 서해안 지역으로 전파되고 곡교천, 무한천, 삽교천을 따라 내륙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1795년의 을묘박해 이전에 이존창이 천주교 신앙을 전파한 지역을 보면 여사울을 비롯하여 예산, 면천, 덕산, 공주, 한산, 보령, 천안, 홍주 등지로 나타난다.

한국천주교회사에서 ‘해미’라는 이름은 1799년 4월 3일 홍주에서 순교한 박취득(라우렌시오)의 순교행적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박취득은 면천 출신으로 1791년 신해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어 면천 관아에 투옥되자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다가 체포되는데, 그때에는 형벌만 받고 석방된다. 그러나 그는 1798년 8월 홍주관장에게 다시 체포되어 다음 해에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복음이 전래되어 형성된 해미지역의 신앙공동체는 병인박해 때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신자 김선양(바오로) 등 해미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다수였음이 드러났다.

해미의 신앙공동체는 병인박해로 큰 타격을 입었고 1880년대에 들어서서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1885년부터 &lt;교세통계표&gt;에 해미지역 공소들이 언급되었으며 1889년부터는 해미면에 존재하던 신앙공동체가 확인된다. 해미지역은 1908년 수곡본당이 수립되자 수곡본당의 관할 아래 있다가, 1917년 서산본당이 설립된 후 서산본당의 관할 아래 놓였다. 1957년엔 해미읍성 안에 위치한 가옥을 매입하여 공소로 사용했고 그 후 여러 장소로 옮겨 다니다가 1983년 10월엔 현 본당 소재지에 공소 건물을 짓고 이전하였다. 그리고 1985년 4월 11일 해미공소는 해미본당으로 승격되었다.

<b>9.2 </b><b>해미지역</b> <b>순교자들</b>

박해 초기(1800년)의 순교자는 두 명인데 인언민 마르티노와 이보현 프란치스코이다. 박해 중기(1811-1839년)의 순교자는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를 포함하여 8명이다.

병인박해기의 연도별 해미 지역 순교자수는 다음과 같다. 1866년 24명, 1867년 6명, 1868년 19명 그리고 연도 미상이 8명으로 합계 57명이다. 거기다가 무명 순교자 47명을 더하면 도합 104명이다. 교회순교록에 의한 병인박해기의 순교자가 104명이지만, 근래 발견된 자료 &lt;공충도사학죄인성책&gt;을 참고하면, 해미 지역 순교자수는 169명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에 나타나는 순교자일 뿐이며 실제 순교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b>9.3 </b><b>해미지역 출신사제</b>

박지목(율리오)신부
<ol>
 	<li><b> </b><b>원머리공소 교회사와 순교자들 그리고 출신 사제들</b></li>
</ol>
<b>10.1 </b><b>원머리공소 복음전래</b>

합덕본당의 관할 지역에는 역사 깊은 교우촌과 공소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원머리공소인데 그 역사가 특기할 만하다. 원머리공소의 천주교 신앙전래와 변천역사를 요약해보고자 한다.

역사자료에 의하면 합덕본당이 설립(1890년)되기 백여 년 전인 1780년대에 원머리(현 신평면 한정리)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상황을 알려 주는 두 가지 사료에 의하여 증명되었다. 하나는 노상추가 쓴 &lt;노상추 일기 &gt;이고, 다른 하나의 사료는 박종악의 &lt;수기(隨紀)&gt;이다.

① 노상추는 홍주에서 근무한 영장(營將)이었으며, &lt;노상추 일기&gt;는 그가 1801년 신유박해 때 홍주에서 영장으로 근무할 때 쓴 일기이다. 그 일기에 당시 체포되어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 중 원머리 주변에 거주하던 신자들의 이름이 나온다. 이 기록을 통해 신유박해 이전부터 이미 원머리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② 1791년부터 1792년까지 충청도 관찰사였던 박종악은 정조 임금의 명에 따라 충청도 일대의 천주교 동향을 소상히 보고하였다. 그 기록에 의하면, 내포에서 천주교는 1784-1785년 사이에 여사울 출신 이존창에 의해 시작되어 그 일대에 널리 퍼져 나갔다. 특히 여사울 건너편에 위치한 삽교천 좌안(左岸)의 강문리와 우평리(당진시 우강면), 신평의 여러 고을에 성행했다. 그리하여 이 지역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천주교에 물들어 있어 쉽게 그 가르침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단계에 와있다고 보고하였다. &lt;수기&gt;의 전체 내용을 살펴보면, 신평의 신당, 음섬 그리고 그 일대에 천주교가 전해진 시점이 이존창의 입교와 전교활동을 시작하던 시기와 가까운 때이다. 따라서 1780년대 후반에 이미 원머리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기록에서 언급된 고을들은 공통된 특징이 있다. 이존창의 고향인 여사울과 그 고을들은 모두 서해로 연결된 삽교천 하류의 수변(水邊)지역으로 간척지와 염전이 발달된 곳이라는 점이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원머리 공동체는 얼마간 주춤했으나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계속되었다. 1810년경 원머리 신앙공동체가 재건되면서 신평 지역의 첫 공소가 되었다. 원머리 공동체는 다시 활성화되어 새로운 신자들을 받아들이고, 이어서 이웃 마을 매산, 음섬 등에도 전교하여 신앙공동체가 형성되도록 도왔다. 또한 원머리공소는 기존 신자들과 더불어 외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도 신앙을 받아들이도록 전교하여 공동체를 확대해 나갔다.

1885년 이후 원머리공소를 비롯하여 신평 일대의 신자공동체들이 빠르게 회복되고 신자들이 증가되어 갔다. &lt;대전교구 교세통계자료집&gt;에 의하면 1885년 원머리공소의 신자들은 78명으로 집계되었다. 1891년에는 83명이었는데 다음 해인 1892년에는 110명으로 늘어났으며 1902년에는 200명이 되었다. 그 후 1949년에는 214명, 1955년에는 263명, 1963년에는 312명, 1964년에는 334명이 되었다.

합덕본당이 설립되기 전에 이미 형성되었던 원머리 신앙공동체는 합덕본당이 설립되면서 그 관할지역의 공소가 되었다. 그리고 1960년에 합덕본당에서 신합덕본당이 분할되면서 원머리공소는 신합덕본당의 관할지역으로 되었다. 그러다가 1975년에 신합덕본당에서 신평본당이 분가되면서 원머리공소가 이번엔 신평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다.

<b>10.2 </b><b>원머리공소 순교자들</b>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부터 1868년 무진박해까지 교회 기록과 관청 기록을 보면 원머리 출신 순교자는 16명, 주변 마을 출신 순교자는 4명이었다. 순교 장소는 홍주가 12명으로 가장 많았고, 해미와 수원에서 순교한 신자가 각각 2명이었다. 원머리공소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두 순교자의 묘가 보존되어 있다.

1868년 가을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가 수원 포교에 체포되어 수원감영에서 신앙을 증거하다가 사형판결을 받고 순교하였다. 두 순교자의 시신은 서덕행(박서진의 매제)에 의해 운구되어 신평면 한정리 233번지 원머리 순교자의 묘에 안장되었다.

두 분 순교자의 묘는 원머리공소가 보유하고 있는 고귀한 신앙 유산이다. 수원에서 순교한 두 분의 시신이 수습되어 원머리에 묻혔고 밀양 박씨 집안에서 대를 이어 묘를 관리함으로써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렇게 보존된 두 순교자의 유해는 1989년 신평성당 구내로 이장되었다가 20년 후인 2009년에 다시 원머리로 옮겨졌다. 그 사이 원머리 묘역에는 순교자 유해가 없었음에도 두 기(基)의 빈 무덤이 잘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원형을 회복시키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원머리 두 순교자의 묘는 한국교회 안에서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순교자의 묘이기에 순례자들에게 순교정신을 고무시키는데 생동감이 있어 성지로서 그 가치가 높다. 원머리의 두 순교자는 지금 한국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시복절차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2009년 3월 한국주교회의 춘계정기총회에서 조선시대 제 2차 시복 추진과 근현대 신앙의 증인들의 시복 추진이 결정되자 그 해 5월 주교회의에서는 각 교구로 공문을 보내어 추가로 시복될 대상자들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전교구에서는 내포교회사 연구소에 추가 대상자로 선정될 만한 후보자들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내포교회사는 우선 대전교구와 관련이 있는 모든 순교자와 증거자들을 파악했다. 대전교구 지역과 관련있는 후보 대상자들을 파악했더니 그 수가 총 623명이었다. 그중 조선시대 순교자가 602명, 박해시대에 활동했지만 순교하지 못한 증거자가 4명, 근현대 순교자가 17명이었다. 그 후 약 3년 간 대전교구 시복시성위원회와 한국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선정위원회에서 대상자들을 최종 선정한 결과 대전교구에서는 조선시대 순교자 15위, 근현대 순교자 16위가 확정되었다. 그 대상자들 중에 원머리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가 포함되어 있다.

<b>10.3 </b><b>원머리공소 사제성소의 배경</b>

선조 순교자들의 영성을 본받고자 하던 원머리공소의 후손들은 공소를 중심으로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였다. 필자가 살면서 보고 체험한 1940-1960년대의 원머리공소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일부 묘사하면 이러하다.

가정에서 부모들은 자녀들과 매일 아침기도(조과)와 저녁기도(만과)를 바쳤다. 저녁기도 후엔 묵주기도 5단을 바쳤다. 공소는 신자들이 자주 모이고 기도하는 신앙생활의 중심이었다. 순교자 묘 아래에 지어진 공소에 신자들은 주일 오전에 모여 공소예절을 하였다. 공소예절은 기도와 제 1독서, 복음 봉독, 공소회장의 강론 등으로 구성되었다. 공소회장은 &lt;성경직해&gt;와 &lt;성경광익&gt; 등의 책을 미리 읽어 공부하고 묵상한 후 신자들에게 강론하였다. 그 책들은 중국에서 예수회 신부들이 주일과 대축일 복음말씀을 해설한 것들인데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었다. 강론 후에도 여러 기도문을 바치고 휴식시간을 가진 후 묵주기도를 바쳤다. 원머리 신자들은 토요일 저녁과 주일 저녁에 공소에 모여 저녁기도(만과)와 묵주기도를 바쳤다. 기도에 이어서 때론 회장이나 교리교사가 교리강좌를 하거나 성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순절엔 매주 금요일 새벽에 어른들뿐 아니라 어린이들까지 공소에 모여 &lt;십자가의 길&gt; 기도를 함께 바쳤다. 원머리공소엔 봄 판공, 가을 판공 두 차례 본당신부가 찾아와 4일간 머물면서 찰고와 고해성사를 주었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찰고는 신자로서 알아야 할 교리에 대해 구두시험을 보는 것이다. 어른들도 찰고를 해야 하지만 어린이들의 찰고는 매우 엄격했다.

판공날이 다가오면 매일 새벽 원머리 동네는 찰고를 준비하는 어린이들이 &lt;천주교 요리문답&gt;을 외우는 소리로 요란했다. &lt;천주교요리문답&gt;은 신자로서 알아야 할 교리를 320개 조목의 문답으로 만든 교리서였다. 초등학교 1학년생은 50개 조목을 암기해야 했고 2학년생은 100개 조목을 암기해야 했다. 그렇게 학년을 올라갈 때마다 50개 조목씩 더해지는데 6학년생은 70개 조목을 더해서 520개 조목을 모두 암기해야 했다. 판공 때마다 본당신부는 어린이들에게 사제성소와 수도성소의 고귀함에 대해 말해주며 많은 성소자들이 나와 주길 당부했다. 이와 같이 원머리공소는 사제성소자들과 수도성소자들이 많이 태어날 수 있는 좋은 배경이었으며 성소의 못자리가 될 수 있었다.

<b>10.4 </b><b>원머리공소 출신 사제들 </b>

1882년에 원머리 출신 박 프란치스코(1866년생)는 16세의 나이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로 보내졌고 거기서 사제양성과정의 공부를 하였다. 그는 8년 간 공부하고 1890년에 귀국하였다. 박 프란치스코는 1892년 3월 당시 성직자의 첫 단계인 삭발례까지 하였으나 열대지방에서 얻은 병으로 인해 더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는 귀국하여 서울에서 질병 치료를 받다가 더 이상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고 고향 원머리로 돌아와 그 해 6월에 안타깝게도 사망하였다.

원머리공소에서 배출된 사제들은 모두 4명이다. 김철규(바르나바)신부, 박재만(타대오)신부, 홍광철(세례자 요한)신부, 박종훈(안토니오)신부이다. 사제성품을 받지 못했지만 신학교에 입학했던 신학생들의 숫자도 5명이나 되었다. 말레이시아 페낭신학교로 유학을 갔으나 질병으로 사망한 박 프란치스코도 그 인원에 포함된다. 원머리공소 출신의 수녀들은 7명이었고 동정녀로 산 이들도 여러 명 있었다.
<ol>
 	<li><b> </b><b>본당 및 공소별 출신 사제들 일람</b></li>
</ol>
<table>
<tbody>
<tr>
<td><b>본당</b></td>
<td colspan="2"><b>출신 사제들</b></td>
</tr>
<tr>
<td>합덕</td>
<td colspan="2">신인식(바오로) 신부, 양덕환(안드레아) 신부, 유영근(요한) 신부, 윤을수(라우렌시오) 신부, 김영식(베드로) 신부, 신원식(루카) 신부, 박성춘(레오) 신부, 김철규(바르나바) 신부, 김영환(타대오) 신부, 김동억(바오로) 신부, 김종국(바르나바) 신부, 윤주병(베드로) 신부, 김기룡(사도 요한) 신부, 안문기(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김진화(바오로) 신부, 김신호(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윤인식(바오로) 신부, 윤인용(바오로) 신부, 박상옥(토마스) 신부, 윤세병(세례자 요한) 신부, 김진형(세례자 요한) 신부, 이상호(요한) 신부, 신양수(바오로) 신부, 이은진(미카엘) 신부, 이재형(요한) 신부, 윤인규(라우렌시오) 신부, 김종기(세례자 요한) 신부, 김명환(요셉) 신부, 김정환(세례자 요한) 신부, 서용원(다미아노) 신부</td>
</tr>
<tr>
<td>신합덕</td>
<td colspan="2">이한영(마르코) 신부, 김종민(사도 요한) 신부, 김찬형(안드레아) 신부, 박진규(요셉) 신부</td>
</tr>
<tr>
<td>신평</td>
<td colspan="2">김철규(바르나바) 신부, 박재만(타대오) 신부, 박우식(요셉) 신부, 구일모(베드로)신부, 구정모(마르코)신부, 홍광철(세례자 요한) 신부, 최효인(시몬) 신부, 이석우(비오) 신부, 최상순(비오) 신부, 박종훈(안토니오) 신부, 박종민(임마누엘) 신부, 김대주(세례자 요한) 신부.</td>
</tr>
<tr>
<td>공세리</td>
<td colspan="2">봉희만(안토니오)신부, 강만수(요셉)신부, 신규식(도메니코)신부, 이규남(요셉)신부, 이종민(요아킴)신부, 정준섭(요셉)신부, 강길원(베드로)신부, 이유수(요아킴)신부, 유영근(요한)신부, 맹봉술(요한)신부, 김성현(스데파노)신부, 강창원(마르티노)신부</td>
</tr>
<tr>
<td>온양</td>
<td colspan="2">김종원(비오)신부, 이종석(레오)신부, 홍성민(미카엘)신부, 이원광(사도요한)신부</td>
</tr>
<tr>
<td colspan="2">천안오룡동</td>
<td>유인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신부, 서용태(타대오)신부, 지경준(시몬)신부, 성병렬(야고보)신부, 국일호(대건 안드레아)신부</td>
</tr>
<tr>
<td colspan="2">천안봉명동</td>
<td>정운광(마태오)신부, 박상균(세례자요한)신부, 임민수(베드로)신부, 유영근(야고보)신부, 전용국(레오)신부</td>
</tr>
<tr>
<td colspan="2">천안쌍용동</td>
<td>장인국(세례자 요한신부), 김광호(요셉)신부, 길기문(토마스 아퀴나스)신부, 김준영(안드레아)신부, 김철희(시몬)신부, 김현(마태오)신부, 최동민(파스칼)신부</td>
</tr>
<tr>
<td colspan="2">천안쌍용 3동</td>
<td>김도원(안셀모)신부</td>
</tr>
<tr>
<td colspan="2">천안성정동</td>
<td>이의철(가밀로)신부, 김민수(야고보)신부, 김용태(안드레아)신부</td>
</tr>
<tr>
<td colspan="2">천안원성동</td>
<td>강전민(스데파노)신부, 이상규(야고보)신부, 박제준(토마스)신부,백종관(요셉)신부</td>
</tr>
<tr>
<td colspan="2">천안신부동</td>
<td>이용호(바오로)신부, 오기환(사도 요한)신부, 유창현(사도 요한)신부, 유정의(바오로)신부, 전영우(우보)신부, 노상민(토마스)신부, 박종민(프란치스코)신부, 김준성(스데파노)신부, 김현수(프란치스코)신부</td>
</tr>
<tr>
<td colspan="2">천안구룡동</td>
<td>이승민(대건 안드레아)신부</td>
</tr>
<tr>
<td colspan="2">천안 신방동</td>
<td>주선우(요셉)신부</td>
</tr>
<tr>
<td colspan="2">천안 청당동</td>
<td>최바오로(바오로)신부</td>
</tr>
<tr>
<td>공주

지역</td>
<td colspan="2">구전회(발토로메오)신부, 김윤산(베네딕도)신부, 유봉운(야고보)신부, 안선호(베다) 신부, 유성숙(루도비코)신부, 이존복(그레고리오)신부, 유재식(안셀모)신부, 윤석빈(루카) 신부, 김병상(필립보)신부, 이종대(요셉)신부, 구자오(베네딕토)신부, 구자륜(비오) 신부, 변갑철(바오로)신부, 최병석(마리아노)신부, 윤여옥(안토니오)신부, 윤성균(가브리엘)신부, 김관희(마르첼리노)신부, 정필국(베드로)신부, 최석영(이냐시오)신부, 오종진(베드로)신부(공주신관동), 최용상(바오로)신부(공주교동), 신응석(마르코)신부(공주중동), 변창수(시메온)신부(공주중동), 최용묵(사도요한)신부(공주교동), 박성언(그레고리오)신부(공주신관동), 노영호(베드로)신부(공주중동), 박윤재(라우렌시오)신부(공주교동)</td>
</tr>
<tr>
<td>홍성</td>
<td colspan="2">조장윤(베르나르도)신부, 이창덕(마르코)신부, 김탄용(베드로) 신부, 곽상호(사도요한)신부, 김재덕(베드로)신부, 김수형(필립보)신부, 이상빈(알렉산델)신부(홍북본당)</td>
</tr>
<tr>
<td>예산, 신례원</td>
<td colspan="2">김순호(프란치스코 하비에르)신부(예산), 강석준(미카엘)신부, 이원순(마티아)신부, 임기선(요셉)신부, 여준구(안토니오)신부</td>
</tr>
<tr>
<td>삽교</td>
<td colspan="2">조병기(바오로)신부, 김문수(야고보)신부</td>
</tr>
<tr>
<td>광천</td>
<td colspan="2">한현택(아우구스티노)신부, 서석빈(다니엘)신부, 황병현(요한 에우데스)신부, 김영민(베드로)신부</td>
</tr>
<tr>
<td>덕산</td>
<td colspan="2">최교선(토마스)신부, 김창선(안드레아) 신부, 최교성(세례자요한)신부, 김경식(미카엘)신부, 이덕길(알바노)신부, 장동준(라파엘)신부</td>
</tr>
<tr>
<td>대천</td>
<td colspan="2">권태웅(안셀모)신부, 오남한(루카)신부, 조성광(바오로)신부, 송우진(가시미로)신부, 김인호(루카)신부, 김두한(요셉)신부, 조성구(미카엘)신부, 이성진(다미아노)신부</td>
</tr>
<tr>
<td>청양</td>
<td colspan="2">이영일(야고보)신부</td>
</tr>
<tr>
<td>논산</td>
<td colspan="2">박노열(바오로)신부, 김용태(베네딕도)신부, 여충구(마르코)신부, 송갑의(사도요한)신부, 유호식(아우구스티노)신부, 유흥식(라자로)추기경, 정재돈(바오로)신부, 김수겸(프란치스코)신부, 이상수(사도요한), 남광근(프란치스코 드 살)신부, 김주선(안셀모)신부</td>
</tr>
<tr>
<td>강경</td>
<td colspan="2">박상래(야고보)신부, 고영환(타대오)신부, 김용남(힐라리오)신부, 김선태(야고보)신부, 김석태(베드로)신부, 백현(바오로)신부, 권선민(요셉)신부, 주상연(베드로)신부</td>
</tr>
<tr>
<td>서산</td>
<td colspan="2">이종순 신부, 신인식(바오로)신부, 백남창(아가비도)신부, 백남익(디오니시오)시누, 조성옥(요한)신부, 박창득(아우구스티노)신부, 조규식(여한)신부, 민병섭(바오로)신부, 황선영(라우렌시오)신부, 김기만(알베르토)신부, 한정현(스데파노)주교, 이정욱(다니엘) 신부, 김경수(바오로)신부, 박효식(사도 요한)신부</td>
</tr>
<tr>
<td>금학리공소</td>
<td colspan="2">김명재(베드로)신부, 신인식(바오로)신부, 이선영(바오로)신부, 김영환(타대오)신부, 김영곤(필립보)신부, 조규식(세례자 요한)신부</td>
</tr>
<tr>
<td>금사리</td>
<td colspan="2">윤예원(토마스)신부, 이완성(요한)신부, 이우철(시몬)신부, 손만재(세례자 요한)신부, 김병재(바오로)신부, 김영교(베드로)신부, 김인수(스테파노) 신부, 김용덕(야고보)신부</td>
</tr>
<tr>
<td>홍산</td>
<td colspan="2">윤종관(가브리엘)신부, 윤종수(세례자요한)신부, 이건석(대건안드레아)신부, 최정규(요엘)신부, 박진수(사도 요한) 신부</td>
</tr>
<tr>
<td>서천</td>
<td colspan="2">박종우(안드레아)신부, 박성민(요한 금구)신부, 김지성(바오로)신부, 김정찬(사도요한)신부,</td>
</tr>
<tr>
<td>장항</td>
<td colspan="2">윤영균(미카엘) 신부, 양택규(안드레아)신부, 우희수(발타살)신부, 이경열(베드로)신부, 황화인(도미니코)신부, 김동진(사무엘)신부, 이은기(미카엘)신부</td>
</tr>
<tr>
<td>해미</td>
<td colspan="2">박지목(율리오)신부</td>
</tr>
<tr>
<td>원머리

공소</td>
<td colspan="2">김철규(바르나바)신부, 박재만(타대오)신부, 홍광철(세례자 요한)신부, 박종훈(안토니오)신부</td>
</tr>
</tbody>
</table>
<b>제 </b><b>3</b><b>부 내포지역의 중심인 합덕본당의 사제성소 계발과 사제 배출의 특이한 전통</b>

내포지역 교회의 사제성소 계발과 사제 배출 상황은 다른 지역에서 보거나 경험하기 어려울 만큼 특이하고 특출하다. 내포지역의 본당인 합덕본당, 공세리본당, 예산본당, 신례원본당, 공주본당, 논산본당, 당진본당, 서산본당 등에서는 참으로 많은 사제성소를 계발하고 양성하여 사제를 배출하여 왔다. 그러나 그 중 합덕본당의 사제성소 계발과 사제 배출이 내포·충청 지역의 본당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의 본당 중에서도 제일 우수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합덕본당의 수도자 배출도 마찬가지다. 합덕본당에서 분가한 본당들이 많이 있지만 1960년대 이후 분리되어 나간 본당이 신합덕본당과 신평본당인데, 이 두 본당도 사제를 많이 배출하였다. 두 본당의 사제성소는 합덕본당의 사제성소 발굴 및 양성 과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영향도 많이 받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합덕본당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지만 다른 교구나 다른 본당 구역으로 이사하여 신학교로 들어간 후 사제가 된 이들을 제외하고 이 본당에서 추천받아 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가 된 이들만 31명이다. 그리고 1960년 이후 합덕성당에서 분가한 신합덕본당 출신 사제 4명과 신평본당 출신 사제 10명을 합치면, 총 사제의 수는 45명이 된다.

어떻게 합덕본당은 이토록 많은 사제들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사제직에 부르신 하느님만이 아시는 성소의 신비(요한 15,16 참조)에 대해 우리가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마중물로서 성소의 응답과 협력과 배경이라는 측면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여겨진다. 성소의 응답과 협력 그리고 배경이란 측면은 성소 계발과 양성의 노력 그리고 내포지역과 합덕본당의 역사적 배경, 전통적 신앙 분위기 등이다.

합덕본당이 설립된 때가 1890년이니 올해(2024년)는 134주년이 되는 해다. 합덕본당은 충청도에서 공세리와 함께 최초로 설립된 본당이니 내포지역뿐 아니라 대전교구 모든 본당의 모(母)본당이 되는 셈이다. 오랜 신앙의 역사를 가진 내포지역에 설립된 합덕본당은 수많은 신앙인과 순교자들 그리고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의 못자리가 되어 왔다. 합덕본당이 특히 사제성소의 훌륭한 못자리가 될 수 있었던 역사·지리적 배경과 영성적 바탕 그리고 본당의 사제와 신자들의 협력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ol>
 	<li><b> </b><b>내포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이존창의 공헌</b></li>
</ol>
합덕지역에 천주교 신앙공동체들이 형성되고 그 공동체들이 합쳐 합덕본당이 설립될 수 있도록 여사울과 합덕 주변의 내포지역에 처음 복음의 씨앗을 뿌린 이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였다. 1784년 무렵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운 뒤 ‘루도비코 곤자가’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존창은 고향 여사울로 돌아와 그가 알게 된 신앙을 가족과 고향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그의 열정으로 가족과 친지, 마을 주민들이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짧은 기간 동안 300여 명의 신자가 모여 내포교회로 발전하였다. 그가 이끈 내포교회는 조선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신자공동체였다. 그는 서울의 교회와 달리 내포지방의 농어촌 사회를 중심으로 농민과 노동자, 빈민 등 서민층 전교에 힘써 서민층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유명한 내포지역 교회의 기초는 이렇게 이루어졌고 그 이후 내포지역은 수많은 신자와 순교자들 그리고 많은 사제와 수도자들의 못자리가 되었다.

한국교회사 연구소가 수집한 사료들에 의하면, 이존창 선조에 의해 시작된 여사울의 천주교는 1784-1785년 내포지역 일대에 널리 퍼져나갔다. 특히 여사울 건너편에 위치한 삽교천 좌안(左岸)의 강문리, 우평리(당진시 우강), 신평의 신당리와 원머리, 음섬에서 성행하였다. 강문리, 우평리(당진시 우강), 신평의 신당리, 원머리, 음섬은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존창의 고향인 여사울이 그러하듯이, 모두가 서해와 연결된 삽교천 하류의 수변지역으로 간척지와 염전이 발달된 곳이다. 이 지역들은 모두 뒷날(1890년) 설립되는 합덕본당의 관할지역이 된다.
<ol>
 	<li><b> </b><b>다블뤼</b><b>(A. Daveluy) </b><b>주교와 사제들의 합덕지역 신리공동체 거주와 전교활동</b></li>
</ol>
합덕 지역은 내포의 다른 지역에 비해 복되게도 신자들이 박해 중에도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선교사제들을 일찍 그리고 간헐적으로 모시며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참례를 하며 영성체 등 성사생활을 할 수 있었다. 특히 다블뤼(A. Daveluy) 주교가 합덕지역 신리공동체에 거주하였고 선교사제들이 내포의 중심지였던 합덕지역을 자주 순회 방문하여 전교하고 성사를 집전함으로써 합덕 지역의 신자들은 영적으로 큰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합덕지역의 신자들은 박해 중에도 굳은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 많은 신자들이 목숨까지 바치며 신앙을 증거하는 순교자들이 되는 은총을 받았다. 많은 순교자들이 태어난 땅이며 그분들이 살아계실 때 기도하고 일하며 생활함으로써 영적으로 비옥해진 합덕본당 지역에서 그 후손들이 열심한 신앙인들이 되는 은총과 사제들이 배출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서 주시지 않겠는가.
<ol>
 	<li><b> </b><b>한국의 첫 방인사제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 솔뫼의 영향</b></li>
</ol>
한국의 첫 방인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출생지인 솔뫼가 합덕본당 지역에 있다는 사실이 사제성소 계몽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합덕본당은 오래 전부터 김대건 신부의 축일에 해마다 여러 행사를 거행하여 왔다. 합덕본당의 신자들은 본당 관할 공소들의 신자들과 함께 솔뫼에서 미사를 봉헌해 고, 순교자 현양대회 등을 개최하였다. 이러한 전례와 행사는 성소의 대상자인 어린이들에게 김대건 신부님의 사도적 열성과 순교영성을 재인식시키고 본받고자 하는 염원을 갖도록 교육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전례와 행사들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에게 사제직을 동경하고 열망하는 동기를 고무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ol>
 	<li><b> </b><b>역대 합덕본당 사제들의 모범적 삶과 사제성소의 적극적 계발 및 양성</b></li>
</ol>
합덕본당의 역대 주임신부들의 모범적 생활이 복사단 소년들과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 사제성소를 동경하고 신학교에 지원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초대 본당신부 퀴를리에 레오 신부와 제 4대 주임신부였던 라리보 아드리아노 주교 등도 훌륭한 사제로 사도직을 모범적으로 수행했지만, 특히 제 7대 페랭(P. Perrin, 백문필 필립보) 신부와 제 8대 박노열 바오로 신부는 아직도 성인사제로 기억되며 존경을 받고 있다. 페랭 신부는 6.25 동란 때 피난을 거부하고 끝까지 성당을 지키며 사도직을 수행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박노열 바오로 신부는 본당 사목과 광활한 지역의 공소들을 순회하며 사도직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였고 특히 사제성소 계발에 열정을 쏟았다. 두 사제는 교우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많이 받았고 어린이들에 사제성소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사표가 되었는데, 두 신부가 합덕본당에서 사도직을 수행하는 동안 신학교 입학생이 가장 많았다.

합덕본당에서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사제성소 계발에 큰 공을 세운 이는 박노열 신부였는데, 그의 성소계발의 특유한 방법과 활동을 일부 소개하면 이러하다. 박노열 신부는 본당에서뿐 아니라 판공성사 기간 공소 순회 중에 자주 사제직의 존귀함과 성소 계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신자들에게 어린이들을 미래의 사제로 양성해 주기를 촉구하였다. 부모가 모범적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린이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에게 사제성소를 자주 권면하기를 요청하였다. 즉 가정이 예비신학교 역할을 해 주길 요청한 것이다. 다른 한편 신학생 후보자 선발에 일정한 규정을 만들어 대상자를 엄선하였다. 이를테면 어떤 학생이나 젊은이가 사제직에 뜻을 가지고 있다면 본당신부에게 그 뜻을 신학교에 응시하기 2-3년 전부터 말씀드려야 했고, 본당 신부는 성소를 식별하기 위해 그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의 부모와 대화하며 가정의 신앙생활 상태를 살펴 보았다.
<ol>
 	<li><b> </b><b>예비신학교로 여기며 시행한 복사단 교육과 성소 발굴</b></li>
</ol>
박노열 신부는 수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복사소년들을 예비신학생들로 간주하며 교육하고 양성하였다. 어린이가 복사단원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과 수행해야 할 봉사가 어려웠지만, 어린이들이 많던 그 당시에는 복사단에 뽑히는 것이 쉽지 않아 복사단에 선발되면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복사소년들은 가능한 한 매일미사 참여, 복사 당번 시 미사시간 엄수, 절도 있는 행동, 비교적 우수한 학교 성적, 성실한 요리문답 공부 등 어려운 요구사항들을 수행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은 복사단에 경쟁적으로 가입하길 희망했다. 복사들은 제단에서 멋져 보이는 복사복을 입고 봉사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고 부모들도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는데, 특히 복사들 중에 종종 신학생이 선발되곤 했기 때문이다.
<ol>
 	<li><b> </b><b>합덕본당 출신 신학생들의 모범적 생활과 성소 계발의 노력</b></li>
</ol>
합덕본당에서 사제성소가 많이 배출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그곳 출신 신학생들의 모범적 생활과 적극적인 성소 계발의 노력이다. 신학생들이 방학 중에 본당으로 내려오면 규칙적으로 매일미사 참례, 기도, 묵상, 성체조배 등을 하면서 모범적 삶을 살았고 화목단결하며 좋은 표양을 보였다. 신학생들 사이에서 상급생들은 하급생들의 방학생활과 과제를 도왔고 인격적 우대를 극진히 하였다. 부제들과 상급반 신학생들은 하급반 소신학생들까지 소외시키지 않고 여러 면에서 배려했으며 하급생들은 상급생들을 예우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하였다.

합덕본당 신학생들의 멋진 전통 중 하나는 방학 동안 각 신학생들의 가정을 함께 순회 방문하면서 부모님들에게 인사드리고 그들이 마련해 주는 음식을 함께 나누며 오락시간을 가졌던 이벤트 같은 행사였다. 이 같은 신학생들의 모범적 생활과 활동이 많은 신자들에게 훌륭하게 비쳤을 것이며, 어린이들에게 성소 지망의 동기가 되는 데에 획기적 요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사료된다.

긴 세월동안 성당의 종소리가 합덕 마을의 사람들에게 시계역할을 하면서 성당과 넓은 마당 그리고 그늘을 이루는 나무가 많은 정원은 대부분이 신자들인 주민들의 생활 전반(신앙, 친교, 문화, 체육, 휴식)의 중심이었다. 신학생들의 방학동안의 생활과 봉사활동은 성당과 그 주변에 자주 모이고 만나는 신자들과 어린이들의 성소에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성당과 그 주변에 몰려오는 어린이들에게 신학생들은 교리와 성가뿐 아니라 오락, 학교 숙제와 공부까지 보충하여 지도해 주었는데, 당시에 연예인만큼 인기가 좋던 신학생들이 그들을 선망하던 어린이들의 방향을 이끌어 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어떤 한 어린이가 사제되기에 알맞은 성품이나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여겨지면 신학생들은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사제성소를 권면하였고 적절한 때에 그의 집을 방문하여 부모와 대화하면서 성소발굴에 힘썼다.
<ol>
 	<li><b> </b><b>합덕본당 출신 사제들의 본당소속 신학생 양성 협력</b></li>
</ol>
합덕본당 출신 사제들은 매해 1박 2일 혹은 하루를 친교의 날로 정해 함께 기도하고 회의도 하고 회식도 하며 대화를 나누는 행사를 지속해 왔다. 합덕본당 출신 사제들은 매해 합덕본당의 주요행사에 참여하면서 적립한 회비로 후원을 하고 본당 소속 신학생들의 장학금을 지원해 왔다. 이곳 출신 사제들은 본당 역사 100주년을 맞이하여 1990년에 한국교회사 연구소와 함께 &lt;구 합덕본당 100년사 자료집&gt;을 편집하고 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홍광철 신부가 합덕주임으로 사목하고 있을 때 그의 계획에 공감하여 백 패랭 필립보 신부의 동상을 제작하여 정원에 모시도록 도왔다.
<ol>
 	<li><b> </b><b>미래의 사제들인 신학생들에 대한 본당신자들의 애정과 적극적 격려</b></li>
</ol>
합덕본당의 신자들은 선조 순교자들의 정신을 물려받아, 신앙생활을 철저히 수행했으며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사제직의 존귀함을 가르치면서 성소에 대해 권고하기도 했고, 가정에서는 함께 기도하는 생활을 통해 예비신학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방학 동안 본당의 신학생들이 미래의 사제라는 마음으로 존경과 맞갖은 예의로 품위를 높여 주었고 자녀들에게 그런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학생들은 그에 대한 화답으로 조심스럽게 처신하고자 했으며 긍지를 가졌다. 신학생에 대한 신자들의 예우와 신학생들의 성실한 자세는 주변의 어린이들에게 신학교 입학을 동경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또 하나의 특기할만한 전통적 이벤트가 있었다. 그것은 신학생이 부제품 받을 계획이 있는 해 여름방학에 본당의 원로급 어른들과 부제, 신학생들 앞에서 강론 발표회를 하는 것이었다. 본당의 어른들은 신학생이 오랫동안 준비한 강론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경건한 자세로 열심히 경청하였다. 그것은 마치 대학원 강당에서 학위 수여 전 발표회(difense) 같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발표가 끝나면 밤늦게까지 회식을 하면서 부제와 신학생들이 발표한 강론 내용과 발표 자세, 억양 등을 평가해 주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마을의 어른들은 여기저기 모여 앉아, 어린이로만 여겼던 그 신학생이 어느새 의젓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강론을 훌륭하게 잘했다고 흐뭇해하며 아들 신학생을 둔 부모를 칭찬하며 부러워하였다. 특히 사제성품을 받은 후 첫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의 부모가 누리는 기쁨과 영광은 뭇 신자들로부터 큰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b>제 </b><b>4</b><b>부 내포지역 교회의 사제성소의 위기와 사제성소 계발을 위한 대책방안</b>

오늘의 한국의 산업과 경제 구조 변화의 여파로 인해 젊은이들의 이농과 도시 집중, 산아제한, 농어촌 학교의 교육적 불이익 현상 등이 점차 농어촌 본당의 인재난과 성소 감소를 초래하고 있는데, 합덕본당을 포함하여 내포지역의 본당들도 그러한 영향을 직접 받고 있는 실정이다. 실로 내포지역 교회에서 근래 사제성소와 수도성소가 격감되고 있으며, 신자들의 신앙생활은 순교정신으로 무장되어 있던 선조들과 부모세대의 신앙생활 자세와 달리 매우 약화되어 있다.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쉬고 있어 본당공동체의 미사전례와 신심 및 활동단체들, 주일학교 그리고 선교활동과 예비신자 교리반 등이 활기를 잃고 있어 참으로 안타깝다. 선조들로부터 순교신앙을 물려받아 전통적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내포교회의 신자들이 오늘날 갑자기 들이닥친 산업 중심, 경제 제일주의의 경향으로 기울어가면서 선조들의 순교 정신과 기도와 신심의 삶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서 약화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비록 여건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전통으로 이어져 온 자랑스러운 내포교회의 성소 계몽과 계발의 노력을 소홀히 하거나 포기해선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내포교회의 사제성소의 감소위기의 원인을 다각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내포교회 사제성소 계발과 양성을 위한 대책 방안을 찾아보고자 한다. 우리의 선조들, 특히 내포교회의 순교자들의 전구를 빌며, 옛 신앙자세의 회복과 동시에 참신한 복음 생활을 다짐하면서 다시 새로운 사제성소 계발실행을 위한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어야 하겠다.
<ol>
 	<li><b> </b><b>내포교회의 사제성소 감소의 원인</b></li>
</ol>
<b>1.1 </b><b>젊은이들의 이농으로 인한 성소 계발과 양성의 어려움</b>

내포지역의 여러 본당 중의 일부는 소도시에 위치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농촌 지역에 위치해있다. 소도시나 농촌지역 본당에선 젊은이들의 대도시 이주로 신자 노령화 현상이 나타나며, 신자 감소, 예비신자 감소뿐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 사목 협력자들의 부족으로 공동체의 활기가 떨어지고 사목자들의 사도직 수행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대다수의 젊은 신자들이 도시로 이주함으로써 농촌본당은 어린이들이 거의 없어 성소자를 발굴하거나 양성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b>1.2 </b><b>산아제한과 자녀출산의 급감</b>

농촌 지역이나 소도시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은 소수인데, 그들조차 경제사정으로 결혼을 미루기 일쑤고, 결혼을 하더라도 매우 제한적으로 자녀를 출산하고 있다. 따라서 안타깝게도 농촌과 소도시에서는 초등학교들의 폐교가 이어지고 있고 본당에선 어린이뿐 아니라 교리교사들도 부족해 주일학교 운영이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제 성소자들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b>1.3 </b><b>부모들의 소극적 신앙생활과 세속화로 인한 자녀들의 신앙교육 소홀</b>

적지 않은 신자들이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정립되어 있지 않고 신앙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신앙생활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자녀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지 못해 가정에서 자녀들의 인성교육이나 신앙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자녀들에게는 진학을 위한 공부와 출세를 위한 방법만이 최우선이 되고 신앙생활이나 교회활동 등은 뒤로 미뤄져 소홀히 되고 있다. 그러한 가정에서 자란 오늘의 청소년들 대부분이 교회생활을 멀리 하고 있고 기본적인 기도생활이나 성사생활을 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성소를 계발하기 어렵다.

<b>1.4 </b><b>학교의 편향된 교육제도의 문제로 인한 전인교육의 실종</b>

지식 중심의 현행 교육제도는 청소년들의 전인교육을 어렵게 만들고 있어 전인성숙을 하는데 큰 장애를 준다. 그런 상황에서는 전인성숙을 위한 사회적․정서적 측면, 윤리적 측면, 영적 측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교육의 기회가 현실적으로 거의 없고, 오히려 그런 교육은 진학을 위한 학교공부에 지장을 주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적지 않은 신자 학생들이 주일미사 참석, 주일학교 공부, 교회의 동아리 활동이나 봉사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 부모들도 그와 같은 경향에 동조하면서 자녀들의 전인교육이나 신앙생활에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그런 것들이 자녀의 진로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기도 한다.

전인성숙이 이루어지지 않는 가운데 학업에 짓눌리고 과중한 스트레스로 시달리는 청소년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술, 담배, 마약, 가출, 폭력 등의 유혹에 빠져 방황하며 문제의 청소년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제성소의 계발의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여겨져 우울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 있는 청소년들을 위한 치유자로서 사제들이 필요하기에 성소자 계발은 더욱 절실하다.

<b>1.5 </b><b>경제 제일주의 사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인 가정의 세속화</b>

오늘의 한국의 산업, 경제 구조의 급격한 변화의 여파로 인해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물질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가 스며들어 신자들의 생활도 점점 세속화되어 기도생활, 신앙생활, 성사생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일상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문명의 발전으로 외적인 삶의 모습은 급변하였지만, 거기에 따르는 내적 변화, 정신적 뒷받침이 이뤄지지 못하여 내외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에 전통적 가치가 전도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물질주의가 깊이 침투되고 있다. 근검, 절약, 절제는 결핍사회의 산물로 여기며 극기, 수덕, 나눔 등을 경시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 이기적 소비, 편의주의에 빠진다. 인생을 즐기는 것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현안이 되고, 주일에는 여가 활동과 휴식을 우선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신앙생활과 주일미사 참석은 뒷전으로 밀린다. 또한 봉사하는 삶, 헌신하는 삶이라든지 사제의 삶은 매력적인 것이 되지 못할뿐 아니라, 오히려 특이한 취향을 가진 이방인의 삶처럼 여겨질 수 있다.

<b>1.6 </b><b>어릴 때부터 </b><b>‘3S </b><b>문화</b><b>’</b><b>에 물들어가는 사회</b>

오늘 우리 사회에서 반종교적 세속화 상황을 부추기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중의 하나가 ‘3S 문화’라고 한다. 3S 문화의 S는 Sports, Sex, Screen의 머리글자인데, Screen은 영화, TV, 인터넷, 스마트폰, 온갖 온라인 게임을 통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에선 많은 사람들이 도덕적, 문화적으로 빈약해지고 때론 윤리적으로 황폐화 되며, 그 결과 각종 범죄들과 사회 병리현상들이 나타나 사회의 기존질서를 혼란에 빠트리게 한다. 3S 문화에 중독된 사람들은 아이돌, 유명 가수, TV 탈랜트, 배우, 유명한 운동선수 등을 영웅시하고 열광적으로 흠모하며 모방하고자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성경이나 교회서적에 눈을 돌리려고 하지 않고 십자가나 성모님 상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볼 수도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이 오늘의 청소년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떠나 냉담하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부모들의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판단능력이 없는 나이의 어린이들이 인터넷, 스마트폰을 통해 너무 빨리 너무 많은 것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게 되면서 교회생활의 규범이나 가르침에는 관심과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그런 청소년들에게 과학이나 오락, 게임이 아닌 인성교육이나 추상적인 신앙교육과 성사생활의 실행이 어렵게 된다. 이러한 현상 속에 빠져있는 청소년들에게 사제성소의 싹이 트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ol>
 	<li><b> </b><b>내포교회 사제성소 계발을 위한 대책방안</b></li>
</ol>
앞에서 사제성소 지망이 급감하는 내포교회와 관련하여 한국사회의 산업과 경제구조 변화나 젊은이들의 이농의 현상으로 인한 청소년의 감소 등 어려운 상황을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산아제한으로 자녀출산의 감소 현상과 신자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의 소홀, 학교의 인성교육 부재 등으로 인해 내포교회에서 청소년들의 사제성소 계발과 양성이 어려운 현 실정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과 여건 앞에서 고민하고 실망하여 사제성소 계발을 포기하며 손을 놓아야 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그렇게 열악하고 불리한 상황이라면 오히려 내포교회는 더욱 더 성소의 주관자이신 주님께 기도하면서 성소 계발을 위한 최선의 방법들을 찾으며 실천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소수의 가정과 소수의 공동체부터 노력하면서 참여가 확대되고 고무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미흡하나마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b>2.1 </b><b>사제성소의 좋은 못자리 성가정 이루기</b>

인간의 신앙 여정의 주기에서 유년기(출생부터 12세까지)는 참으로 중요하다. 이 시기는 어린이들에게 모방의 시기이다. 그들은 흔히 부모나 주변 사람들의 표현이나 행위를 흉내 낸다. 이 시기의 신앙 형태는 모방적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이 연령의 어린이는 가정과 주변 생활 분위기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종교심과 신앙 자세가 형성된다. 그는 부모와 교리교사들의 신앙 자세와 신심행위들을 따르면서 자연스럽게 모방한다. 이때 부모나 교리교사는 어린이들에게 좋은 신앙교육을 시켜야 한다. 어릴 때 좋은 분위기에서 받은 종교교육은 일생 동안 이어지는 신앙생활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가정과 주변의 상황으로부터 어린이에게 주입되고 반응된 관념이 그의 무의식 속에 형성되면서 인격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는 심층 심리학자들의 학설에 따르면 유아 시절의 신앙교육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기도를 통해 ‘하느님은 아빠, 아버지’라는 인식이 생활화되지 못하고, 게다가 부모로부터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경우라면, 뒤늦게 성인이 되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부성애를 느끼는 것도 어렵다고 종교심리학자들은 강조해 말한다. 이런 주장은 많은 이들의 체험과 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어린이는 부모한테서 처음 체험한 것과 유사한 감정과 정서적 반응으로 하느님께 전이시킨다. 어린이는 하느님을 알기 전에 부모와 주변에서 보살펴 주는 사람들을 알게 된다. 어린이에게 종교교육의 첫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방법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며 좋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가정은 사제성소의 좋은 못자리이다. 사제성소를 받을 수 있는 어린이의 신앙교육의 첫 출발점이자 가장 중요한 방법도 역시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좋은 모범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b>2.2 </b><b>선조들의 굳은 신앙과 순교정신 본받기 재다짐</b>

신앙선조들의 후손인 오늘의 신자들은 과거와 달리 박해 없는 자유로운 시대에 살면서 점차 선조들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잊어버리고 사는 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신앙의 선조들을 본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무엇보다도 매일 우리 앞에 놓인 각자의 십자가를 성실히 지는 것이 그 시작이며 핵심이다. 실로 우리의 일상에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순교자적 결단이 요구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정에서 모범을 보이는 부모,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녀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절제, 양보, 이해, 용서, 받아들임 등에도 순교자적 용단이 필요하다. 또 직장에서도 동료에 대한 친절한 언행, 성실하고 모범적인 근무, 불의에 대한 타협의 거부와 정의 실현 그리고 기꺼운 봉사도 순교자적 자세를 요구한다. 본당공동체 안에서도 신자 본분의 이행, 단체 활동, 전교 활동, 봉사 활동의 참여 등에서 순교자적 결단이 요구된다. 일상에서 기도의 삶, 기쁨의 삶(언제나 기쁠 수 없기 때문에), 감사의 삶(언제나 감사로운 것은 아니기에) 그리고 나눔과 봉사의 삶은 실로 순교자적인 것이다.

이처럼 매일 십자가를 지는 결단의 삶, 매일 순교 연습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진짜 순교를 요구하는 극한 상황을 맞을 경우,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은총을 받게 된다. 그러한 삶이 우리 순교 선조들의 일상적 삶이었다. 그분들을 본받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도 그분들처럼 매일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순교 연습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신앙선조들의 순교정신을 본받는 신앙인들이 늘어난다면, 하느님께 사제성소를 많이 보내 주시기를 청하며 자녀들에게 사제성소를 적극 권하고 신앙을 키워주는 이들도 늘어날 것이므로 자연히 사제성소에 응답하며 은총을 받는 청소년들도 늘어날 것이다.

<b>2.3 </b><b>청소년들에게 지속적인 사제성소 계몽</b>

사제성소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 하느님이 성소의 주도권(initiative)을 가지고 계신 것이다. 다른 한편 하느님은 그분의 부르심인 사제성소가 결실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의 응답과 협력을 요구하신다. 사제성소에서 인간 편에서의 노력은 하느님의 부르심의 은총에 기꺼이 응답하는 마중물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성소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지만, 인간적 차원에서 볼 때 사제는 순서를 거꾸로(역순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어떤 개인적 계기로 사제가 되고 싶어 신학교에 가기로 스스로 결정했고, 그래서 주님이 받아 주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소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소의 실상은 주님이 주도자로서 먼저 불러 주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은 사제직에 어떻게 부르시고 사람은 그 부르심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는가?

하느님의 부르심은 구약시대와 달리, 오늘날엔 그분께서 어떤 계기를 통해 인간의 생활 안에서 신비로운 방법으로 개입하시면서 작용한다. 하느님은 성경말씀이나 교회 서적, 성인 전기 등을 통해 감동을 주시며 사제성소에 부르신다. 하느님은 부모나 수도자, 어른들의 권고 그리고 본당신부의 모범이나 권고를 통해 사명감을 갖도록 하시며 부르신다. 때론 신앙교육이나 피정 등 어떤 역사적 계기를 통하여 하느님은 말씀하시며 인간을 사제성소로 이끄신다. 혹시 우리는 가정이나 교회공동체 안에서 무관심으로 인해 성소자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의 소홀함으로 인해 주변의 좋은 성소 재목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청소년들의 사제성소 계발을 위해 주님의 부르심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최선의 방법과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며 협력해야 하겠다.

<b>2.4 </b><b>예비신학교 제도의 활성화에 본당사제들과 부모의 관심과 적극 협력</b>

본당의 사제와 신자들은 사제성소의 발굴과 증진을 위해 교구의 예비신학교에 적극적 관심을 기울이며 협력해야 한다. 본당사제들은 복사소년들과 중고등학교 학생회원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예비신학생들을 발굴하여 예비신학교 모임의 참석을 적극 권장하며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어야 한다. 신자 가정에서도 자녀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사제성소를 권유하며, 뜻이 있는 자녀를 예비신학교 모임에 참석하도록 적극 지원해 주어야 한다.

대전교구 예비신학교는 1975년부터 성소지도신부를 임명하면서 시작되어 근 40년 동안 많은 변화와 발전을 이루면서 수많은 성소를 발굴하고 양성하여 교구의 많은 사제들이 탄생하는 데 기여하였다. 현재 예비신학교를 교구청 내 성소국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예비신학생을 위한 활동으로 겨울 캠프, 예비신학생 월 모임, 성소주일 행사, 신학교 생활 체험, 신학교 지원반 월 모임, 쿼바디스(청년 사제성소 모임), 새 사제와 함께하는 청년미사 등이 있다.

1) 겨울 캠프: 겨울방학 중에 실시하는데, 초등부 복사단 캠프와 중등부 캠프, 고등부 캠프가 있다. 이 캠프들은 신학생들과 친교를 나누며 함께하는 프로그램으로 성소 계발과 성소 증진을 위해 매우 효율적이며 중요한 자리가 되고 있다.

2) 예비신학생 월 모임: 신학교 지원반, 대전지역, 동부지역(천안-아산-논산-공주), 서부지역(홍성-서산-당진-보령)의 네 모임이 있다. 월 모임은 신학생들이 프로그램을 짜는데, 그 주요 내용은 렉시오 디비나(말씀 나누기), 월별 주제로 진행하는 프로그램, 미사로 이루어진다. 중고등학생들의 활동적인 성향을 고려해서 체육대회를 개최하거나 그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진행하기도 한다. 예비신학생들이 신학생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친교를 이룰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3) 성소주일 행사: 신학교를 개방하여 초대하는 행사이다. 현재 신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성소주일 행사의 참석 대상자는 매년 바뀐다. 모든 이가 참여할 수 있는 전체 개방의 해, 예비신학생들만 참여하는 해(예신의 해), 신학생 부모들에게만 개방되는 해, 그리고 개방하지 않는 해로 이루어진다. 성소주일 행사를 통해 신학교에서 직접 신학생들이 기도하고 공부하고 생활하는 모습을 단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중고등학생의 성소 증진에 보탬이 되고 있다.

4) 신학생 생활 체험: 고등학교 1, 2학년 예비신학생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1박 2일의 신학교 생활체험이다. 신학생들과 함께 토요일 오후부터 주일 오전까지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이것은 멘토-멘티 프로그램으로서 신학생 1명당 예비신학생 2명 정도가 배정되어 함께 대화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신학교의 삶을 조금이나마 체험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해준다. 예비신학생들의 성소 증진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5) 신학교 지원반 월 모임: 예비신학생들이 신학교 입학 전 성소 식별을 하는 단계이다. 특별히 여름 피정에서 강의도 듣고, 성소국장 신부, 담당 수녀, 지도 신학생들과 면담을 하면서 예비신학생은 기도 중에 자신의 성소에 대해 진지하게 식별해 가는 시간을 갖는다. 사제성소를 확신하는 예비신학생에게는 신학교 입학시험에 대비한 논술 준비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수능 이후엔 신학교 입시에 필요한 서류 안내, 신체검사 준비 등을 시켜가는 등 신학교 입학을 위한 실질적 지원을 해준다.

6) 쿼바디스(청년 사제성소 모임): 2018년도부터 시작된 이 모임은 청년들이 사제성소에 마음을 두고 고민할 때 함께 대화하며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7) 새 사제와 함께하는 청년미사: 새 사제들이 초대된 청년들과 함께 봉헌하는 특별미사다. 새 사제들은 그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자신의 성소의 동기와 신학교 생활 그리고 사제성품을 받은 소감 등을 들려주고 안수도 해준다. 그리고 함께 식사시간을 가지며 친교를 나눈다. 이 프로그램은 청년들이 새 사제들과 함께 어울리는 기회를 갖게 함으로써 사제성소 증진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b>2.5 </b><b>사제들의 매력적이고 모범적인 모습</b>

신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나 사적인 대화에서 사제성소의 동기에 대해 물으면 적지 않은 신학생이 복사소년 때와 예비신학생 때 함께해 주신 주임신부나 보좌신부의 생활 모습에 영향을 받았다고 대답한다. 신자들도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사제를 보면서 감동을 받아야 자녀들에게 사제성소를 적극 권하게 되고 자녀들을 복사단이나 예비신학교에 참석하도록 주선하면서 자발적 협력에 동참하게 된다. 오늘의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사제상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전인적으로 성숙한 사목자이다.

우선 신자들은 사제가 신체적으로 건강하고 활동적이길 기대한다. 사제가 건강이 안 좋거나 병약하면 사목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사제의 신체적인 건강과 부지런한 활동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심리적, 정서적으로 건강하길 바란다. 긍정적인 자세,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예술, 문학, 음악 등 미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마음은 심리적, 정서적으로 건강한 모습이다. 또한 사제가 사회성 측면에서도 건강하기를 바란다. 개방적이고 대화의 능력을 갖추고 포용력을 지니고 사랑을 주고 받을 줄 아는 목자이길 기대한다. 권위적이거나 관료적인 모습이 아니라 열린 자세의 사제이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들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자들은 사제가 지성적이기를 기대한다. 끊임없이 읽고 배우고 다양한 것들을 체험하여 사회의 현실감각을 지님으로써 생동감 있는 강론과 이해하기 쉬운 교리강좌, 생활과 구체적으로 연계되는 성경 강좌를 해 주길 바란다. 거기에다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 하나 더 첨가되기를 바란다. 사제가 품위 있는 영성을 지님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기도의 사람, 영적 부성애를 지닌 사제, 사도적 열정과 복음적 기쁨을 지닌 사목자이길 바란다. 사제의 존재와 생활과 사도직 활동이 성령으로 충만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실현하기 쉽지 않은 이상적인 사제상이다. 그러나 사제들은 이러한 사제상에 가깝게 다가가도록 꾸준히 힘써야 할 것이다. 이것이 청소년들의 사제성소 지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b>2.6. </b><b>복사소년들의 신앙교육과 예비신학교 참여 독려</b>

본당에서 사제나 수녀들이 사제성소 후보자를 찾거나 성소를 권면하는 데 비교적 수월한 대상은 복사소년들이다. 주임신부는 복사소년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 친교모임을 갖고 신앙교육을 시키며 예비신학교 모임에 참석하도록 안내하면서 그들의 성소에 대한 관심과 지향을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느 신학생은 복사소년 시절에 “네가 신학교에 들어가면 정말 멋진 사제가 될 거야.”라는 제의실 담당 수녀의 말이 성소의 씨앗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신학생에게 신학교에 가고 싶다고 느끼게 된 첫 계기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본당 수녀의 권면이라는 대답이 실제로 꽤 많이 나온다.

<b>2.7 </b><b>논산대건 고등학교의 예비신학교 활성화</b>

대전 신학교 설립 이후, 논산대건고등학교의 예비신학교 프로그램은 20여 년간 많은 성소를 계발하여 우수한 학생들이 신학교에 입학하도록 기여하였다. 그들 중에 많은 사제들이 탄생하였다. 근래엔 여러 사정으로 성소지망자들이 줄어 예비신학생들이 감소하고 있어 염려스럽다. 논산대건고등학교의 예비신학교에 기도의 성원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교목신부 담당으로 시행해온 논산대건고등학교의 기존 예비신학교 프로그램은 이러하다.

1) 기숙사 양업관의 한 층을 성소지망자들이 공동생활을 하도록 한다.

2) 학교에서 저녁학습이 끝난 후 성소지망자들의 조별로 저녁기도를 바친다.

3) 성소지망자들은 신자학생들을 위해 봉헌하는 주일미사와 두 차례의 평일저녁 미사에 참여한다.

4) 주일에 ‘Lectio Divina’를 실행한다.

5) 월 1회 교구의 예비신학교에 참여한다.

6) 교목신부와 한 학기 2회 정도 면담한다.

7) 여름방학에 2박 3일간 친교의 캠핑체험을 한다.

근래 논산대건고등학교 예비신학교의 프로그램은 여러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전보다 간소화되었다. 상황의 변화란 우리나라 전체의 인구감소로 인해 학교 전체 학생 수가 많이 감소했고 성소지망자도 숫자가 감소 되었으며 특히 코로나 이후 교육시스템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학생들과의 만남이나 모임이 어려워져 학교분위기가 매우 달라졌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1) 사제성소 지망자 선발방식을 변화시킨다. 기존 특별전형 선발 형식의 예비신학생들의 숫자를 줄이고, 주로 일반 전형으로 입학하는 신자학생들에게 사제성소를 적극 홍보하여 예비신학생들을 선발한다. 이로 인해 전보다 학교성적이나 인성이 좋은 예비신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는 유리함이 있다.

2) 주일미사 뿐 아니라 매일 미사 참여를 독려한다.

3) 매월 1회 예비신학생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한다.

4) 교목신부는 매 학기 고 1,2 학년 예비신학생들의 전체 모임을 효율적으로 운용하며, 매 학기 개별면담을 실시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편안히 찾아와 다과를 나누며 대화할 수 있도록 교목실을 개방한다.

5) 고3 예비신학생은 교구 성소국에서 주관하는 예비신학교의 월 모임에 참석한다.

6) 교장신부는 예비신학생을 학년별로 연 1회 전체모임에서 훈화하고, 고3 예비신학생들을 분기별로 개별면담을 실시한다.

교장신부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교목신부와 함께 예비신학교를 효율적으로 운영하면서 좋은 사제지망자들을 계발하는 데 최선을 다 하고 있으며 교구의 예비신학교 담당 성소국장과 협업하고 있다. 교구민 모두는 논산대건고등학교의 예비신학교가 더욱 활성화되어 더욱 많은 사제성소가 계발되고 훌륭한 사제가 많이 탄생하길 기대하며 기도로 성원해야 하겠다.

<b>2.8. </b><b>사제</b><b>, </b><b>수도자</b><b>, </b><b>평신도가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함께 하는 시노달리타스 구현</b><b>.</b>

근래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서의 최대 화두는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이다. ‘시노달리타스’를 신학자들이 우리말로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쉽게 풀어보면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교회의 삶과 사명을 함께 실현한다는 뜻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노달리타스는 3천년기 교회가 가야 할 길이고 교회를 교회이게끔 하는 구성요소’라고 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교회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이 시대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자기 본래의 삶을 살아가고 사명을 수행할 방식을 모색하고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발전적 양상으로 표현한 것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성경에서 묘사하는 초기교회 모습을 지금 여기에 살아내려는 노력이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성령께서 주시는 다양한 카리스마에 불리었다고 가르친다. 또한 세례성사를 통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선택된 민족, 거룩한 겨레, 그리고 영적 성전을 이루기 위하여 축성되었고 성령 안에서 하느님께 영적 경배를 드리기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1베드 2,9)을 선포하기 위하여 축성되었다고 가르친다. 실로 초세기 교회에서 처음부터 교회의 직무에 평신도들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도직 활동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사도들과 복음 전파에 봉사하는 선교사들을 돕고 환대하는 일뿐 아니라 설교와 여러 사도직 업무에도 직접 참여했던 것이다.

이러한 교회론에서 평신도의 신원과 사명 그리고 영성이 나오게 된다.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평신도들은 “교회에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고유하고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역할”을 갖는다. 그들은 이 사명에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통하여 주님께로부터 불린 이들”로서 “극히 단순한 것일지라도 은사들을 받았기 때문에 교회와 세계 안에서 사람들의 복지와 교회의 건설을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할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약성경에 입각하여 교회의 신비를 사제,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의 총체인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공의회는 세례성사를 받은 모든 이의 동등한 품위와 공동책임성을 강조한다. 각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유익한 구원사업에 한몫을 담당하도록 불렸다는 것이다. 이 공의회가 개최되기 두 세기 전, 세계의 교회 안에서 아직 평신도의 신원과 사명의 진가가 모호하고 과소평가되고 있을 때, 극동의 조그마한 나라 조선에서는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사명을 깊이 자각했고 놀랍게도 활성적으로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성령께서 분명 그들의 머리와 마음과 영을 비추어 주시고 그들의 혀와 손발을 이끌어 주심으로 가능했다는 것 외엔 다르게 이해할 방도가 없다. 그들의 사도적 활동은 교회 안에 늘 모범이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로부터 이상적인 것으로 재확인된 초세기 신자들의 활동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한국 초기교회공동체의 설립은 평신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평신도들의 활동으로 복음전파가 확산되었다. 쇄국정책과 박해로 외국에서 선교사제들을 영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뒷날 선교사제들이 입국을 했지만 박해 상황과 언어소통의 한계성으로 사제들의 활동은 성사집전 외의 다른 업무는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전교활동과 교리강좌 등 많은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내포지역의 신앙공동체 설립과 복음선포도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과 그를 도운 평신도들이 적극 활동함으로써 확산될 수 있었고, 선교사제들이 입국한 후에도 교회 안팎에서 평신도들의 협력이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오늘 내포지역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전국 교회공동체들은 시노달리타스의 정신에 따라 평신도 사도직을 활성화하며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일치하여 교회의 삶과 사명을 함께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사제성소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방법이며 사제성소 발굴의 방편이기도 하며 성경에서 묘사하는 초기교회 모습을 지금 여기에 살아내려는 노력이다.

<b>마치면서 </b>

마태오 복음 9장 35-38절에 보면, 예수님이 여러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시며 병자들과 장애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시는 곳 마다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모습을 보시며 가엾이 여기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해야 할 일꾼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를 제자들이 깨닫도록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리고 우리 교회공동체와 교회 주변의 상황은 어떠한가? 교회의 안팎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갈팡질팡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떠나 방황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오늘도 한국사회와 교회의 안팎에서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시며 가엾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임에 틀림없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최근 개신교의 한 연구소에서 실시한 통계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종교인이 37%이고 무종교인이 63%인 것으로 나타났다. 20년 전인 2000년 초기만 해도 종교인이 50% 이상이었는데, 불과 10여 년 전부터 불교, 개신교, 천주교 등 모든 종교에서 탈종교화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후 더 가속화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영향도 컸다고 한다. 특히 20대 젊은이들 중에서 종교인의 비율은 19%에 지나지 않는다. 이 통계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 비율은 2012년 10.1%에서 2022년에는 <u>5.1 %</u>로 줄었다. 10년 사이에 냉담자가 절반 이상 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의 수가 반 토막으로 줄어든 것이다. 개신교 현황에 초점을 맞춘 통계조사이기에 천주교에 대한 정확도가 미흡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공식으로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근래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의 수가 교적에 등록된 신자들 중 20% 안팎이라고 한다.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위에서 언급한 개신교 연구소 조사에 의하면, 개신교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중 1위는 ‘종교에 관심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2위는 ‘교회에 대한 불신과 실망 때문에’였다. 개신교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종교에 관심이 없어서’라고 했는데, 천주교 신자들도 그와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무튼 시대의 상황이 크게 달라지고 있고 사람들의 삶의 자세도 많이 변하고 있다.

근래 우리나라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급속히 큰 변화를 이루고 있다<u>.</u>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디지털 문화는 로봇과 인공지능(AI)으로 진화하고 각종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가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 들어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에 따라 많은 이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종교의 초월적 성격에 공감을 느끼거나 동의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성향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래서 교회의 학자들은 이런 문화에 몰입해 가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어떻게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며 공감을 얻어내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황들과 교회 문헌들이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새로운 복음화’의 실현과제이다.

오늘 우리 교회는 획기적으로 열린 자세로 현대인들의 사고와 삶에 살아있는 의미와 가치를 제시하며 그들의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 ‘새로운 복음화’는 사제들만의 과제가 아니며 수도자들과 모든 신자들이 적극 참여하고 활동해야 할 과제이다. 새로운 복음화는 그리스도인이 각자가 살고 일하는 자리에서 복음을 생활화하고 업무를 복음화하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부부는 가정에서, 정치인은 정치 분야에서, 경제인은 경제계에서, 교사는 교육의 현장에서, 노동자는 일터에서 복음정신으로 살며 제도와 업무와 주변상황을 끊임없이 쇄신하고 복음화해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오늘도 여전히 많은 사제성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수도자성소도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추수해야 할 일꾼으로 부르시는 대상은 사제나 수도자만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대상이다. 그러니까 평신도들도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사제성소의 부족으로 인한 교회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방법이다. 한국 초기교회공동체의 설립은 평신도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평신도의 활동으로 복음전파가 확산되었으며, 내포지역의 신앙공동체 설립과 복음선포도 이존창과 평신도들이 적극 활동함으로써 널리 퍼져 나갔다. 뒷날 선교사제들이 입국한 후에도 교회 안팎에서 평신도들이 사제들에게 협력하며 함께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오늘 시노달리타스 정신으로, 사제뿐만 아니라 수도자와 모든 신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저마다 살고 일하고 사람들을 만나는 현장에서 복음을 따라 충실히 살아가며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사제성소는 많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 모두가 일치하여 복음의 삶과 복음화활동을 수행하는 시노달리타스의 중심 봉사자가 되어야 할뿐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고 성사를 집전해야 하는 사제가 많이 필요하다.

<b>참고 서적</b>

- 구합덕본당 100년사 자료집 편찬위원회, &lt;구합덕 본당 100년사&gt;,천주교 구합덕교회, 1990.

- 천주교 대전교구, &lt;공세리 성지·성당 자료집&gt;, 2008.

- 중동본당 100년사편찬위원회, &lt;중동본당 100년사&gt;, 천주교 대전교구 공주 중동교회, 1997.

- 천주교 대전교구, &lt;홍성·해미 성지 자료집&gt;, 2006.

- 천주교 대전교구, &lt;여사울·성거산·신리·갈매못 성지 자료집&gt;, 2007.

- 박재만, &lt;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한국교회의 영적자세&gt;, 천주교대전교구 대흥동성당
<ul>
 	<li>천주교대전교구 신평본당, &lt;신평본당 설립 41주년 한정리공소 140 주년 기념 심포지움&gt;, 2016.</li>
 	<li>천주교대전교구 논산부창동 본당, &lt;논산부창동본당 100년사. 1921-2021&gt;, 2021.</li>
 	<li>최현순, &lt;시노달리타스&gt;, 바오로딸, 2022.</li>
 	<li>내포교회사 연구소, &lt;황무실 면천 자료집&gt; 천주교 대전교구 신합덕본당, 2014.</li>
 	<li>내포교회사 연구소, &lt;청양 다락골 자료집&gt;, 다락골 성지, 2009.</li>
 	<li>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lt;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123위&gt;,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2009.</li>
 	<li>샤를르 달레, &lt;한국천주교회사&gt;, 상, 안응렬, 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79</li>
 	<li>공세리 성지성당 박물관, &lt;천주교 중심의 내포학&gt;, Vol. 1, 2023.</li>
 	<li>천주교대전교구 서산동문교회, &lt;서산동문본당 70년사&gt;,1987.</li>
 	<li>내포교회사 연구소, &lt;서산 금학하리 공소&gt;, 2021</li>
 	<li>대전교구 천안오룡동성당, &lt;오룡동 본당 70년사&gt;, 2010.</li>
 	<li>천주교 대전교구 서천본당, &lt;박해시대 서천지역 천주교회사와 그 자료&gt;, 2010</li>
</ul>
- 천주교 대전교구 홍산성당, &lt;홍산 본당 60년사&gt;, 2018.

- 천주교 대전교구 금사리교회, &lt;금사리 본당 100년사&gt;, 2000.

- 청주교구 배티성지 외 편, &lt;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서한집&gt;, 2009.

-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lt;한국가톨릭 대사전&gt;, 7권, 12권, 한국교회사연구소,]]></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9:14: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3권-하나. 내포의 신앙문화 활용을 통한 선교활동과 신앙유산 전승, 그리고 자원화]]></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31]]></link>
			<description><![CDATA[<b>하나</b><b>. </b><b>내포의 신앙문화 활용을 통한 선교활동과 신앙유산 전승</b><b>, </b><b>그리고 자원화</b>

내포학 편집실
<ol>
 	<li>들어가는 말 9</li>
 	<li>생생문화재 공모사업 11</li>
</ol>
2.1. 국가유산청 문화유산 활용사업 현황 11

2.2. 2022~2024년에 공세리 성당에서 이루어진 생생문화사업 14

2.3. 대전교구의 국가 유산 활용 16
<ol>
 	<li>내포의 천주교 국가유산 활용을 위한 방안 17</li>
</ol>
3.4. 내포 교회가 지속적으로 펼칠 수 있는 문화재 활용 사업들 19
<ol>
 	<li>나가는 말 25</li>
</ol>
<ol>
 	<li><b> </b><b>들어가는 말</b></li>
</ol>
가톨릭은 어떤 나라나 시대를 막론하고 인류의 역사와 함께 존재하며 사상적·문화적 배경이 되었다. 가톨릭의 종교문화자원은 단순히 역사문화자원으로서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국민의 문화향유권 충족을 위해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 특별히 내포의 천주교 문화는 지역 전체를 거대한 박물관으로 만들고 있게 지역 안에서 보편적 가치를 가지며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문학 등에 다양한 영향을 주었고, 지역사회와 함께 하며 이 문화를 지켜왔고, 그 역사는 내포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포의 가톨릭 종교문화자원은 내포지역의 보편적 가치와 함께 다양한 문화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현재 국가유산 중 유형문화재는 성당과 사제관 등이 자리잡고 있고, 무형문화로 등록된 것은 없다. 그 이유는 단지 지속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240년(since 1784년)이 된 가톨릭은 더 이상 특정 종교의 영역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문화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뒤따라가기보다는 능동적으로 앞서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b>“</b><b>어머니인 교회는 참으로 이 매체들이 올바르게 사용되면 인류에게 커다란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다</b><b>. </b><b>이 매체들이 정신적 휴식과 수양을 위하여 또 하느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튼튼히 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기 때문이다</b><b>.”</b>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에서는 내포의 역사와 문화자원을 발굴하고, 내포의 총체적인 삶을 연구하여 자료를 공유하고 지식을 덧대어 디지털아카이브를 구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화화 역사의 자원화’를 향해 나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내포는 거대한 신앙박물관이기 때문이다.

내포가 품고 있는 국가유산은 가톨릭 신자들에게만이 아니라 국민에게도 큰 관심이 있는 자원이고, 국가유산을 활용하여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과 자긍심을 키우며, 살아있는 역사를 만나게 될 때, 가톨릭의 신앙 유산은 다음 세대에도 더욱 풍요롭게 전해지게 될 것이다. 현재 각 국가유산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그 프로그램들이 심화되어 자원화될 때, 내포의 신앙유산은 내포를 찾는 이들에게 가톨릭 신앙을 전하고, 그 신앙을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며 선포할 수 있도록 더 큰 도움을 주게 된다. 현재 국가유산청에서 시행하는 ‘생생문화재 공모사업’은 내포의 국가유산을 더욱 빛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국가유산청은 국가유산을 대상으로 문화재활용사업을 통해 국민의 문화향유권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ol>
 	<li><b> </b><b>생생문화재 공모사업</b></li>
</ol>
국가가 지원하는 생생문화재 공모사업은 남녀노소 누구나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배우고 즐길 수 있도록 각 지역의 문화유산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와 의미들을 담아낸 문화프로그램을 통해 국민의 문화 향유권을 충족시키고 높이려는 것이다. 가톨릭은 좋은 ‘문화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내포는 거대한 신앙의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을 살아 숨 쉬게 만들면 다음 세대도 우리가 전해 받은 신앙유산을 더욱 풍요롭게 전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가톨릭이 하고 있는 많은 프로그램에 보편성을 추가하면 일반 대중들도 쉽게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을 대중과 함께 하고, 좀 더 보편적인 프로그램으로 진행하며, 지속적으로 진행하면 그것이 다음 세대에서는 지역의 문화재로 존중받게 될 것이다. ‘성체거동과 연도’ 뿐만 아니라 ‘성모의 밤이나 묵주기도의 밤, 순교자의 밤’ 등도 일반 대중이 함께 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든다면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행사가 될 것이다.

예전에 합덕에서는 성모승천 대축일에 소화데레사 성녀 성극을 공연했는데, 약 3,000여명이 관람했고, 성당 앞에 장이 섰다고 한다. 공세리도 성극공연팀이 있었을 때가 선교가 잘 되었다고 한다. 교회가 신자들을 위해 하는 문화행사나 교육행사나 신심행사를 국가유산청의 지원을 받아 지자체와 함께 진행하고, 천주교 중심의 내포의 역사와 핵심가치를 문화유산 활용사업으로 지속시켜 나간다면 가톨릭의 문화를 통해서 신자들의 긍지를 드높이고, 지역 주민들에게 천주교가 멀리 있는 종교가 아님을 인식시켜 주게 될 것이다.

국가는 ‘국가유산 문턱은 낮게, 프로그램 품격은 높게, 국민 행복은 크게’라는 전략으로, 닫히고 잠자고 있는 국가유산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문화콘텐츠로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매년 프로그램을 공모한다. 국가유산에 내재된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지역의 인적·물적자원과 결합하여 활용한 국가유산 향유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기 위해서 ‘지정유산 및 등록문화유산’을 대상으로 사업을 공모하고 있다.

<b>2.1. </b><b>국가유산청 문화유산 활용사업 현황</b>

2022년을 기준으로 생생문화재(165건), 향교·서원 활용사업(107건), 문화재야행(45건), 전통산사문화재 활용사업(43건), 고택·종갓집 사업(45건), 세계유산 활용(21건)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다양한 단체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공세리의 예를 들면, 지난 3년간 지역 단체에서 “생생문화재 사업”을 통해 성당에서 문화재활용사업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대전교구도 기획팀을 만들어 프로그램 공모에 참례하면, 다양한 프로그램 진행을 통해 성당과 성지, 신자들에게 큰 영적 이익을 주며 선교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table>
<tbody>
<tr>
<td><b>구분</b></td>
<td><b>시범육성형</b></td>
<td><b>집중육성형</b></td>
<td><b>지속발전형</b></td>
</tr>
<tr>
<td>사업기간</td>
<td>1-2년차</td>
<td>3-5년차</td>
<td>6년차 이상</td>
</tr>
<tr>
<td>국비 지원금액</td>
<td>5천만원 이내</td>
<td>1억원 이내</td>
<td>1억 오천 이내</td>
</tr>
<tr>
<td>추가지원</td>
<td colspan="3">외국인 대상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업은 지원금액의 10% 범위 내에서 예산 추가 지원(단, 신청금액 범위 내)</td>
</tr>
</tbody>
</table>
신청자격은 ‘공고일 현재 법령에 의해 설치·운영 중인 공모해당 분야의 법인 및 단체이며, 공고일 현재 공모분야에서 주된 활동을 하고, 문화유산(문화재) 관련 프로그램 운영경험이 있거나 사업수행이 가능한 인력과 역량 등을 갖춘 법인 또는 단체이다.

<b>① </b><b>1</b><b>차 서류평가 심사 기준</b>
<table>
<tbody>
<tr>
<td><b>평가</b>

<b>항목</b></td>
<td><b>항목</b></td>
<td><b>세부</b>

<b>점수</b></td>
<td><b>판단기준</b></td>
</tr>
<tr>
<td rowspan="2"><b>사업</b>

<b>계획의</b>

<b>충실성</b>

<b>(30)</b></td>
<td>계획의

적합성</td>
<td>15</td>
<td>사업계획이 구체적이고 충실한가?

(프로그램 시기, 수혜 대상 적절성, 횟수, 예산 등)

해당 국가유산 활용에 대한 이해 및 기획의도는 적절한가?</td>
</tr>
<tr>
<td>콘텐츠

경쟁력</td>
<td>15</td>
<td>해당 국가유산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이는가?

수혜대상에 부합하는 국가유산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는가?

유사 프로그램과 차별적인가?</td>
</tr>
<tr>
<td rowspan="2"><b>사업</b>

<b>운영</b>

<b>역량</b>

<b>(40)</b></td>
<td>사업수행

역량</td>
<td>20</td>
<td>해당 지자체는 추진의지가 높은가?

수행단체는 추진역랑(전문성, 인력)을 갖추었는가?

프로그램은 실현가능성이 있는가?</td>
</tr>
<tr>
<td>사업관리</td>
<td>20</td>
<td>홍보의 타깃이나 추진의지가 높은가?

지역주민 참여를 위한 방안은 갖추었는가?

안전관리를 위한 계획은 적절한가?</td>
</tr>
<tr>
<td><b>지속 </b>

<b>가능성</b>

<b>(30)</b></td>
<td>기대효과</td>
<td>30</td>
<td>프로그램은 국가유산 향유에 기여하는가?

프로그램은 지속발전 가능성이 있는가?

계획을 통해 지역 활성화를 가져오는가?</td>
</tr>
<tr>
<td><b>가산점</b>

<b>(5)</b></td>
<td>관내업체</td>
<td>5</td>
<td>관내를 소재지로 둔 업체인가?</td>
</tr>
</tbody>
</table>
사업계획서를 작성하여 지자체에 보고하면 지자체에서는 전문가 3명 이내로 구성되어 종합 검토하여 충남도와 국가유산청으로 송부하게 된다. 사업계획서를 작성할 때, 반드시 소유자(관리자)의 장소 사용 확약서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성당과 가톨릭 교회내의 문화유산 시설에 대한 계획서를 다른 단체에서 선점할 수 없다.

가톨릭은 문화와 예술의 영감을 세상에 불어넣고 있고, 가톨릭에서 행하던 것들을 지자체에서 흡수한 경우도 있다. 2014년부터 합덕성당에서는 성체거동을 거행할 때 지역 풍물패들을 모아 풍물대회를 했고, 성체거동 행렬 때 길놀이를 맡겼다. 그 후 ‘기지시 줄다리기’에서도 풍물대회가 개최되었다. 또한 성체거동을 할 때 지역의 종교와 전통문화 계승자들이 모여 함께 일치와 화합의 음악회를 했는데, 이것이 당진시에서는 매년 음악회로 지속되고 있다. 가톨릭과 다른 단체의 특징 중 하나는 가톨릭은 특정 문화행사가 지속되다가 단절되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반면, 지자체나 다른 단체들은 지속적으로 행사를 진행하는데 있다. 그래서 무형문화재로 등록될 때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지속성’이다.

<b>② </b><b>대전교구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생문화사업 현황 </b>

2021년을 기준으로 하여 현재 다양한 단체가 지자체와 협력하여 국가유산을 활용하여 생생문화사업을 펼치고 있다. 포구나 성벽, 인물이나 자연환경 등을 활용하여 문화사업을 펼치면서 국민의 문화 향유권을 충족시키고 있다. 공세리 성당에서도 문화상상 연구소에서 “둘러보‘공’ 놀아보‘세’”라는 사업명을 가지고 22년부터 생생문화사업을 진행했다. ‘공세 곶창지와 성당’을 주제로 하여 3년 연속 사업을 진행했다.
<table>
<tbody>
<tr>
<td><b>지역</b></td>
<td><b>사업명</b></td>
</tr>
<tr>
<td rowspan="2">논산시</td>
<td>옛 강경포구의 영광을 지현하다.</td>
</tr>
<tr>
<td>三代가 함께하는 종학당 삼도락(三道樂)</td>
</tr>
<tr>
<td rowspan="2">당진시</td>
<td>흥겨운 줄난장, 생생하게 즐기자</td>
</tr>
<tr>
<td>면천읍성 360도 투어</td>
</tr>
<tr>
<td rowspan="2">금산군</td>
<td>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순례길 따라 걷기

(한국 천주교 첫 순교자 진산 성지성당 탐방)</td>
</tr>
<tr>
<td>어기여차 우여차! 농바우를 끄시세</td>
</tr>
<tr>
<td>서천군</td>
<td>모여봐요 동백의 숲!</td>
</tr>
<tr>
<td>청양군</td>
<td>위기의 조선, 그리고 최익현</td>
</tr>
<tr>
<td>예산군</td>
<td>칭찬받는 황새 만들기

룰루랄라♪ 충의사에서 놀아보자!</td>
</tr>
<tr>
<td>태안군</td>
<td>2021년 수군과 함께 안흥진성을 보고! 느끼고! 즐기자</td>
</tr>
<tr>
<td>홍성군</td>
<td>결성을 사수하라</td>
</tr>
<tr>
<td rowspan="2">부여군</td>
<td>동헌에서 피는 문화향기</td>
</tr>
<tr>
<td>생생와박사! 정암리 와요(瓦窯)</td>
</tr>
<tr>
<td>천안시</td>
<td>山溜穿石! 그래 石吾처럼~</td>
</tr>
<tr>
<td>공주시</td>
<td>공주 문화재에서 만나는 대한민국의 근대!</td>
</tr>
<tr>
<td>보령시</td>
<td>충청수영성, 푸른 바다의 전설</td>
</tr>
<tr>
<td rowspan="2">아산시</td>
<td>다시 생각해보는 임진왜란</td>
</tr>
<tr>
<td>온주아문 秀樂하다!</td>
</tr>
<tr>
<td>서산시</td>
<td>성벽에 새긴 역사</td>
</tr>
</tbody>
</table>
<b>2.2. 2022~2024</b><b>년에 공세리 성당에서 이루어진 생생문화사업</b>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년 연속 진행된 ‘문화상상 연구소’의 “둘러보‘공’ 놀아보‘세’”라는 사업은 교회가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문화상상 연구소’는 ‘공세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반인들에는 종교시설이고 단순한 아름다운 사진 명소’라고 생각과 공세리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곶창지가 아산을 비롯한 충청도 일대의 세곡이 모이는 장소이며, 보관하는 세곡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은 곳으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부각되지 않고 있음에 바탕을 두어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b>① </b><b>공세리 성당 스탬프 투어 </b>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공존하는 살아있는 박물관인공세리의 가치를 느껴보는 프로그램으로 공세리성당과 이명래 고약이 생겨난 일화를 탐구하고 스탬프를 찍으며 기억하는 투어. 참자자에게 공세리 일대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교육한다.

<b>② </b><b>내 손안의 이명래 고약</b>

이명래 고약의 발원지와 그 일화를 소개하고 이에 맞는 체험 활동으로 이명래 고약이 드비즈 신부님에 의해 탄생한 스토리와 이명래 고약의 탄생 비화를 립밤 만들기를 통해 교육하며 체험할 수 있게 한다.

<b>③ </b><b>공세곶고지 탐구생활</b>

공세곶고지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교육으로 조선시대 세금이 쌀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쌀을 이용한 미니 계량 체험 프로그램으로 홉, 되를 이용한 계량 체험을 통해 조선시대의 부피, 무게를 재는 단위에 대한 교육이다.

<b>④ </b><b>조운선 미니게임</b>

잠가자가 직접 준비한 재활용품을 활용하여 나만의 조운선 만들기를 진행한다. 공진창에서 서해, 강화도를 지나 한양의 경창까지 이동하는 조운선의 항해 경로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 후, 바람과 암초 등 세곡을 운반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현상을 추가하여 재미요소와 함께 역사적 사실을 전단한다. 경주가 진행될 때 실제 세곡을 운반하던 것과 관련된 이야깃거리를 추가하여 게임과 설명이 함께 진행되는 형태로 구성된다.

<b>⑤ </b><b>공세리 달빛 야행</b>

공세리 스탬프 투어, 공세리 사진관, 업사이클링 조명 만들기, 공세리 소풍, 공세리 한마당의 큰 주제로 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공세리 사진관’은 공세리 일원에 조명과 포토존을 설치하여 사진 촬영 스팟을 설정하고, 자유롭게 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하며, 촬영된 사진은 인화해서 액자에 담아 제공한다. ‘업사이클링 조명 만들기’는 유리병을 활용한 조명 만들기 체험으로, 체험을 통해 스테인드글라스의 의미와 공세리 성당의 고딕 양식에 대한 교육이 진행된다. ‘공세리 소풍’은 공세곶고지와 공세리성당에 관련된 다양힌 이야기를 레시피북 형태로 소품 바구니와 함께 제공한다. 소풍 바구니 구성품은 김밥, 샌드위치 등 저녁식사 대용으로 충분한 먹거리와 함께 제공한다. ‘공세리 한마당’은 가족과 함께 하는 레크레이션, 공연, 빔프로젝터를 통한 참가자들의 사진 콘테스트 등 흥겨운 시간 안에서 공세리를 알아가는 시간이다.

<b>⑥ </b><b>공세리 유리 공방</b>

‘업사이클링 유리공예 체험, 기후변화와 재활용 배우기, 둘러보공 공세리’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업사이클링 유리공예 체험은 폐유리 조각을 활용한 업사이클링 캔들 홀더를제작하고, 제험을 통해 스테인드글라스의 의미를 배울 수 있도록 구성했다. 기후변화와 재활용 배우기는 기후변화에 따른 우리의 생활 모습 변화와 인식 개선의 필요성에 대한 교육과 재활용, 일상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노력과 방안에 대한 선언문을 작성한다. ‘둘러보공 공세리’는 공세리 성당의 역사와 성당의 건축양식에 대한 교유으로 성당이 가지는 의미와 역사를 배우고 체험활동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프로그램이다.

문화상상연구소에서는 공세리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공세리 워크북’, ‘공세리 기념 배지’, ‘수채화 키트’, 창문 형태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여 보급하였고, 야외무대에서 다양한 공연을 선보였다. 공세리에서 이루어진 생생문화사업은 인터넷 신청을 통해서 각지에서 찾아온 부모와 자녀들이었다. 천주교 신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성당을 처음 와 보는 이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프로그램 진행을 통해 공세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공세리 성당이 신자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공간임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생생문화사업은 교회가 세상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찾아오는 이들만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올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하고, 찾아왔을 때 그들에게 가톨릭의 문화와 전통, 아름다움과 경건함을 전해 주며 그 안에 가톨릭 신앙을 담아 전해 줄 수 있다. 찾아오게 만드는 교회를 만드는 것이 오늘의 교회의 사명 중의 하나임은 틀림없다.

<b>2.3. </b><b>대전교구의 국가 유산 활용</b>

내포지역은 다양한 천주교 국가유산을 품고 있고, 대부분은 성지로 선포되어 수많은 순례객들의 방문이 이루어지고 있다.
<table>
<tbody>
<tr>
<td><b>지정연도</b></td>
<td><b>국가유산 명칭</b></td>
<td><b>형태</b></td>
<td><b>관리단체</b></td>
</tr>
<tr>
<td rowspan="4">1998.7.25</td>
<td>공주 중동성당</td>
<td>성당</td>
<td rowspan="4">(재)대전교구천주교회

유지재단</td>
</tr>
<tr>
<td>부여 금사리성당</td>
<td>성당</td>
</tr>
<tr>
<td>아산 공세리성당</td>
<td>성당</td>
</tr>
<tr>
<td>당진 합덕성당</td>
<td>성당</td>
</tr>
<tr>
<td>2001.6.27</td>
<td>거룩한말씀의수녀회 성당</td>
<td>성당</td>
<td>거룩한말씀의 수녀회</td>
</tr>
<tr>
<td>2004.4.10</td>
<td>예산성당</td>
<td>성당</td>
<td rowspan="4">(재)대전교구천주교회

유지재단</td>
</tr>
<tr>
<td>2007.4.30</td>
<td>서산 동문동성당</td>
<td>성당</td>
</tr>
<tr>
<td>2007.7.3</td>
<td>서산 상홍리 공소</td>
<td>공소</td>
</tr>
<tr>
<td rowspan="2">2008.4.10</td>
<td>천안 성거산 천주교 교우촌터</td>
<td>교우촌</td>
</tr>
<tr>
<td>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td>
<td>수목</td>
<td>서산시</td>
</tr>
<tr>
<td rowspan="3">2008.12.22</td>
<td>당진 신리 다블뤼주교 유적지</td>
<td>유적지</td>
<td rowspan="8">(재)대전교구천주교회

유지재단</td>
</tr>
<tr>
<td>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td>
<td>생가터</td>
</tr>
<tr>
<td>공주 황새바위 천주교 순교유적</td>
<td>순교터</td>
</tr>
<tr>
<td>2013.2.12</td>
<td>보령 갈매못 천주교 순교지</td>
<td>순교터</td>
</tr>
<tr>
<td>2014.9.26</td>
<td>당진 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td>
<td>기념관</td>
</tr>
<tr>
<td>2014.10.30</td>
<td>대전 대흥동성당</td>
<td>성당</td>
</tr>
<tr>
<td>2015.8.25</td>
<td>강경성당</td>
<td>성당</td>
</tr>
<tr>
<td>2017.5.29</td>
<td>천주교 진산성지성당</td>
<td>성당</td>
</tr>
</tbody>
</table>
현재, 많은 성지나 성당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미사와 성사, 십자가의 길, 박물관 관람, 도보순례, 성지 안내, 개인기도 등이다. 성지나 성당별로 지자체와 연계하여 음악회나 전시회, 축제 등이다. 국가유산을 활용하여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부족한 편이고,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인력도 없는 실정이다. 본당과 함께 있는 국가유산은 신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신자가 없는 국가유산으로 지정된 성지는 프로그램 진행에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ol>
 	<li><b> </b><b>내포의 천주교 국가유산 활용을 위한 방안</b></li>
</ol>
교회의 국가유산들에 대한 공간과 시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 안에서 신앙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그 역사적 가치 안에서 자신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이 핵심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한 교육과 신앙문화를 체험하게 한다면 다음 세대로 초대 교회가 지녔던 그 신앙을 보존하며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게 될 것이다.

<b>3.1. </b><b>가치 알기 및 브랜드화 </b>

2024년 현재, 공세리를 찾는 이들 중에는 많은 학술팀들이 있다. 성벽을 연구하는 이들과 유배문학을 연구하는 이들, 해양포럼을 하는 이들, 건축을 연구하는 이들, 기우제 등 민간신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공세리는 답사코스가 됐다. 공세리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는 증거이다. 공세리 뿐만 아니라 모든 성당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모르는 가치를 연구자들은 알고 있을 수 있고, 교회가 힘들어하는 프로그램을 일반단체에서는 쉽게 진행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국가유산 활용프로그램을 하는 많은 단체가 저녁 행사를 ‘달빛야행’이라는 개념에 담아서 참석을 유도하고 있다. 교회가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순교자의 밤, 묵주기도의 밤, 성모의 밤’ 등은 천주교 신자들이 자연스럽게 참례하겠지만 일반인들은 선입견을 가지고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나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을 나누고, 가톨릭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그 행사를 통해서 비신자들도 신앙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프로그램 진행에 지역 주민들이나 비신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예비신자 등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교회가 국가유산을 활용하여 프로그램을 만들고 찾아오는 성당을 만든다면 교회도 충만해지고, 세상도 복음의 기쁨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그렇게 공간이 지닌 가치를 알고, 그 가치를 브랜드화시킨다면 그 브랜드를 찾아 자연스럽게 성당을 찾아오게 되고, 그 성당을 중심으로 지역사회도 성장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의 상설화이다.

<b>3.2. </b><b>사단법인 설립</b>

생생문화재 공모사업을 위해서는 먼저 사단법인을 설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법인을 통해 지속적으로 사업을 수행하고, 그 법인을 통해 국가유산의 활용과 천주교의 무형문화유산을 등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인에는 국가유산을 담당하는 본당신부나 전담사제를 당연직 위원으로 참여시키고, 책임과 부담은 줄여주고, 혜택만 받을 수 있도록 기획해야 한다. ‘시범육성형’은 사제의 임기와 관련이 없지만 ‘집중육성형과 지속발전형’은 사제의 임기가 중요한 변수가 되기도 한다. 국가유산을 담당하는 사제의 승인이 필요하고, 국가유산을 담당하는 사제가 거부하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단법인 설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프로그램의 지속성”이다.

<b>3.3. </b><b>생생문화재 공모사업</b>

법인 담당자가 협력자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시범육성형과 집중육성형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지속발전형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내포교회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생생문화재 공모사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수 있다. 공모사업을 통해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지속성을 가지며 성당과 성지를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구내의 국가유산 10곳만 생생문화재 공모사업에 참여하게 된다면 받을 수 있는 혜택들이 커지게 된다.
<table>
<tbody>
<tr>
<td><b>대상</b></td>
<td><b>시범육성형 지원 예산</b><b>(</b><b>안</b><b>)</b></td>
<td><b>집중육성형 지원 예산</b><b>(</b><b>안</b><b>)</b></td>
<td><b>지속발전형 지원 예산</b><b>(</b><b>안</b><b>)</b></td>
</tr>
<tr>
<td>국가유산 10곳(예)</td>
<td>5천*10=5억</td>
<td>1억*10=10억</td>
<td>1억오천*10=15억</td>
</tr>
<tr>
<td>국가유산 16곳(예)</td>
<td>8억</td>
<td>16억</td>
<td>24억</td>
</tr>
</tbody>
</table>
교구는 국가유산에 경제적인 지원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교구를 지원한다. 국가유산의 활용을 통해 교구를 지원한다면 교구도 풍요로워지고 국가유산을 보존하고 활용하는 성당과 성지들도 큰 도움을 받게 된다. 활용사업을 통해 성당과 성지를 알리고, 국가유산을 통해 신자들을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며, 비신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240년 이상 된 가톨릭 문화는 천주교 신자들에게만 한정된 문화가 아니라 국민 전체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이다.

<b>3.4. </b><b>내포 교회가 지속적으로 펼칠 수 있는 문화재 활용 사업들</b>

<b>① </b><b>교구가 원하는 프로그램 진행</b>

교구는 국가유산을 품은 성당과 성지에 원하는 사목지침이 있고, 그 사목지침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당연히 바랄 것이다. 담당 사제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교구가 제시하고, 교구의 의지가 담당 사제를 통해 국가유산의 활용사업으로 펼쳐진다면 교구민들에게도 큰 복이 된다. 교구는 성지나 성당을 통해서 신자들에게 하고 싶은 사목이 있다. 전체를 바라보며 교구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고 하기 때문이다. 일반인들도 교구장이 성당을 방문했을 때는 사진을 함께 찍고 싶어 하고, 싸인을 받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신자교육과 신심교육, 성소 개발을 위한 젊은이들과의 만남, 사목위원이나 구역의 봉사자들과의 만남 및 교육, 예비신자들과의 만남 등을 생생문화재 활용사업안에 교구의 사목방침을 프로그램으로 개발하여 진행한다면 국가유산을 가장 많이 품고 있는 대전교구는 가톨릭 문화를 활짝 꽃피우는 교구가 될 것이다.

<b>② </b><b>공통된 프로그램 진행 및 프로그램 공모</b>

생생문화재 활용사업 법인에서 공통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것을 각 국가유산 성당이나 성지에서 일정을 바꾸어서 진행한다면, 부담 없이 프로그램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성모의 밤’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진행한다면 한쪽에서는 성모님에 대한 생애를 아름다운 선율로 들려주고, ‘과달루페의 성모마리아,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 등을 성극으로 공연하며, 스템프 투어를 통해 성당과 성모님을 이해하게 하고, 참된 성모신심을 가르치며, 묵주 만들기나 팔찌 만들기 프로그램을 통해 참가자들의 적극성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저녁식사 대용으로 음식 만들기(떡, 김밥, 만두 등) 프로그램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스텝의 운영은 법인에서 진행하고, 핵심적인 부분(예를 들면 성모의 밤 미사 주례)을 그곳 사제가 진행하고, 장소사용료까지 지급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성당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성극팀, 찬양팀, 프로그램 진행팀, 음향팀 등의 봉사자를 모으고, 지속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하며 국가유산 활용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면 어느 순간 이 모든 팀들이 전문팀이 되고, 각 본당은 재정적 부담없이, 봉사자에 대한 부담없이 일정만 사전조율하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성당 건축물과 야간 조명, 음악회와 함께 하는 야행, 젊은이들을 위한 문학의 밤, 가을 축제, 성탄 축제, 교리축제, 성소 축제 등을 각 국가유산에 맞게 프로그램화하고, 법인에서 그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국가유산을 품은 성당과 성지는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세상과 소통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한 곳(국가유산)이라도 신청을 해서 지속적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특별히 성소 개발 프로그램은 교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합덕본당의 신자들은 선조 순교자들의 정신을 물려받아, 신앙생활을 철저히 수행했으며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사제직의 존귀함을 가르치면서 성소에 대해 권고하기도 했고, 가정에서는 함께 기도하는 생활을 통해 예비신학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방학 동안 본당의 신학생들이 미래의 사제라는 마음으로 존경과 맞갖은 예의로 품위를 높여 주었고 자녀들에게 그런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학생들은 그에 대한 화답으로 조심스럽게 처신하고자 했으며 긍지를 가졌다. 신학생에 대한 신자들의 예우와 신학생들의 성실한 자세는 주변의 어린이들에게 신학교 입학을 동경하도록 영향을 주었다. 또 하나의 특기할만한 전통적 이벤트가 있었다. 그것은 신학생이 부제품 받을 계획이 있는 해 여름방학에 본당의 원로급 어른들과 부제, 신학생들 앞에서 강론 발표회를 하는 것이었다. 본당의 어른들은 신학생이 오랫동안 준비한 강론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경건한 자세로 열심히 경청하였다. 그것은 마치 대학원 강당에서 학위 수여 전 발표회(difense) 같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발표가 끝나면 밤늦게까지 회식을 하면서 부제와 신학생들이 발표한 강론 내용과 발표 자세, 억양 등을 평가해 주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마을의 어른들은 여기저기 모여 앉아, 어린이로만 여겼던 그 신학생이 어느새 의젓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강론을 훌륭하게 잘했다고 흐뭇해하며 아들 신학생을 둔 부모를 칭찬하며 부러워하였다. 특히 사제성품을 받은 후 첫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의 부모가 누리는 기쁨과 영광은 뭇 신자들로부터 큰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성소가 많은 곳에서는 그 비결이 있었다. 그 비결이 전통이 되어 내려왔기 때문에, 그 문화를 접한 이들은 성소에 대한 관심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된 것이다. 젊은이들을 불러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다른 이들 앞에서 발표할 수 있도록 하며, 서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면 젊은이들의 자기 개발과 인격 형성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성소에 대한 싹을 틔우게 하고, 열매 맺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합덕성당이나 솔뫼, 신리 등지에서 매년 지속적으로 행한다면 분명 교구의 성소는 풍성하게 될 것이다.

또한 내포에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있다. 1785년에 벌써 여사울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신자가 생겨났다는 것은 이존창 루도비코가 복음 선포를 잘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이존창에게 가면 교리를 배울 수 있고, 원동지에게 가면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말이 생겨났다. 전주교구는 초남이에 교리당을 세워 유항검 아오스딩이 어떻게 복음을 선포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는 내포에서 잊혀진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고, 여사울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현재 공세리에는 다양한 교구의 본당의 예비신자들이 지속적으로 순례를 오고 있다. 그 이유는 예비신자들이 왔을 경우 그동안 배운 교리를 정리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6개월 과정 안에서 예비자 교리를 시작한 이들이 처음으로 접해야 하는 곳이 여사울이고, 중간에 합덕과 공세리를 순례하여 신앙이 어떻게 성장하고 성숙되는지를 알게 하고, 세례 받기 전 해미나 갈매못, 황새바위 등을 순례하며 결심을 다지게 하는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신앙의 참된 가치를 직접 보고 배우며, 영세 후 냉담율도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 견진교리를 받게 될 경우, 성령의 은사를 활성화시키는 방식을 삶으로 배울 수 있도록 집중적으로 교리를 가르치는 곳이 여사울이 된다면, 여사울은 이존창 루도비코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의 신앙인들 앞으로 소환하게 될 것이다.

공통된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서는 프로그램 공모가 반드시 필요하다. 특별히 젊은 사제들에게 프로그램을 문의하게 된다면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시될 것이고, 일반 신자들과 함께, 또한 해당 국가유산에서 신앙생활하는 이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기획한다면 많은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고, 지속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b>③ </b><b>순교자들의 행적을 성극화하여 공연 </b>

내포는 거대한 신앙의 박물관이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장시키고, 순교로서 증거한 삶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내포다. 순례자들이 성지나 성당을 찾을 때, 그곳의 역사를 전시물이나 해설로 듣는 것이 아니라 성극으로 체험할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공세리에서는 32위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4가지 성극으로 만들어 순례 신청시 성극 공연을 원할 경우, 무료로 공연해 주고 있다. ‘순교자 박홍갑, 순교자 하 바르바라, 삼대의 순교(이 요한, 이 베드로, 이 프란치스코), 하느님의 종 필립보와 마리아의 순교’를 신자들과 후원자들로 구성된 아산연극단이 공연하고 있다. 또한 성모신심을 위해서 ‘과달루페의 성모마리아, 루르드의 성모마리아’도 공연해 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법인 안에서 받아들여진다면 각 성지와 성당에서 다양하게 공연할 수 있도록 기획하고 지원할 수 있게 된다. 순교자들의 생애를 성극으로 공연할 때, 순례자들과 성지나 성당을 찾는 이들은 가톨릭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고, 다음 세대에도 내포의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전해 줄 수 있게 될 것이다.

내포는 도보순례길이 잘 정비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 공간은 없다. 산티아고 순례들에 들어선 이들은 오전에는 걷고, 오후에는 지역의 문화를 즐긴다. 내포 도보순례자들에게도 각 성지에서 성극을 공연해 주면, 도보순례의 피로를 풀고, 성지순례의 의미를 극대화할 수 있게 될 것이다.

<b>④ </b><b>스토리텔링을 담은 음악회 </b>

현재 많은 국가유산에서 봄·가을로 다양한 음악회를 하고 있다. 해미성지에서는 교황님 방한 10주년(2024년)을 맞이하여 열린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해미에 5,000명 이상이 모였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선교팀이 운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5,000명 이상 모인 장소에서 레지오 단원이나 선교위원들을 통해 “천주교를 알려드리니다.”라는 작은 유인물이라도 나눠줬다면, 부채나 작은 기념품에 새겨 주었다면 참석자들이 천주교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참석자들은 유명 가수 때문에 그 저녁에 몰려왔지만, 그 기회를 통해서 교회는 선교의 장으로 탈바꿈시켰어야 했다. 사목에는 반드시 재정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 재정을 성지나 본당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국가는 국민의 문화향유권 충족을 위해서는 국가유산청을 통해 지원한다. 그것을 지원받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참석자들에게 기념품을 나눠주고, 본연의 선교사명을 수행할 때, 문화재청과 교회는 상호 이익을 도모할 수 있게 된다.

음악회를 개최하면서 본당의 성가대로만 구성을 하면 참례자들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미리 공모하여 지역의 참가자들을 모으고, 공연할 수 있는 실력있는 이들을 발굴하며, 인지도 있는 가수와 함께 스토리가 있는 음악회를 진행한다면 대화가 오가는 장, 역사를 살아 숨쉬게 만드는 장, 신앙을 고백하는 장이 될 것이다.

<b>⑤ </b><b>제의 전시회를 통한 교회의 역사 알리기</b>

제의는 단순히 사제가 미사를 드리기 위해 입는 옷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들의 거룩한 경배를 위해 필요한 것이고, 하느님 자녀들을 위한 것이다. 제의 전시회를 통해 하느님 백성은 거룩한 전례에 어떻게 참례해야 하는지, 제의를 입고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는 사제는 누구인지, 사제와 함께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는 이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제의 전시회를 통해 긴 시간 동안 성당에서 사목하신 사제들의 열정에 감사하는 계기와 젊은이들이 미래의 사제직을 꿈꿀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모든 지체가 같은 임무를 수행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여러 가지 임무는 성찬례를 거행하는 동안 입는 거룩한 옷에서도 그 차이가 드러난다. 거룩한 옷은 각 봉사자의 고유 임무를 드러내는 표지가 된다. 또한 거룩한 행위를 아름답게 하는 데에도 이바지하는 것이 제의다. 사제, 부제, 평신도 봉사자들이 입는 옷은 거룩한 전례 안에서 거룩하게 드러나야 한다.

제의 전시회는 그 성당의 역사를 알려준다. 1대 신부부터 제의를 입고 복사들과 함께 행렬하며 제의의 의미와 그 신부님이 계셨을 때의 역사적 상황과 사목을 진행자가 이야기 해 준다. 공세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제의 전시회는 신자들과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되어 진행된다. 역대 신부님들이 복사들과 행렬할 때, 진행자들은 신부님과 제의에 대해서 설명한다. 예를 들면 공세리 2대 4대 신부님이신 드비즈 신부님의 행렬의 예는 다음과 같다.
<table>
<tbody>
<tr>
<td><b>드비즈 에밀리오 신부님</b><b>(2</b><b>대</b><b>, 4</b><b>대</b><b>) </b><b>행렬</b>

진행1: 공세리의 2대 신부님은 드비즈 에밀리오 신부님, 한국명 성일론 신부님이십니다. 신부님께서는 1894년 7월 5일, 조선으로 발령 받으시고 이렇게 당신의 감동을 드러내십니다.

<b>“</b><b>아름다운 땅 조선으로 가라고 나흘 전에 발령을 받았습니다</b><b>. </b><b>이 거룩한 땅 위에 일하며</b><b>, </b><b>수많은 순교자들의 피에 저의 땀을 섞게 되었습니다</b><b>. </b><b>하느님은 너무 좋으신 분이십니다</b><b>.” </b>

<b>행렬방식</b><b>: </b>드비즈 신부는 장백의와 백색제의를 입고 핼렬한다. 행렬은 복사 두명이 앞서 가고 세례 받을 가족이 따라가고, 그 뒤를 드비즈 신부가 따라간다. 군중은 본당에 부임하는 신부를 환영한다. 그렇게 행렬을 한 번 한 후에 다시 돌아서서 중간 즈음에 서서 드비즈 신부는 유아에게 물을 부으면서 세례를 거행한다. 드비즈 신부는 주전자를 들고 아이에게 물을 붓는 자세를 취한다.

진행2: 드비즈 신부님께서는 1895년 6월에 공세리에 부임하십니다. 간양골은 동학군에 의해 황폐화되어 있었고, 그곳에서는 신자들의 신앙을 돌볼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초대 신부님이신 파스키에 신부님께서 마음에 두셨던 공세리에 10칸짜리 기와집 한 채를 계약해 놓았습니다.

<b>1895</b><b>년 </b><b>6</b><b>월 </b><b>10</b><b>일 드비즈 성 신부는 양촌본당 퀴를리에 신부의 안내를 받으며 서울을 출발하여 걸매나루에 도착</b><b>, </b><b>걸매리 장 안드레아 신학생 집에서 첫날밤을 지내고 다음날 아침 </b><b>9</b><b>시에 말을 타고 교우들의 환영을 받으며 공세리에 도착하였다</b><b>. </b><b>드비즈 성 신부가 공세리에서 성당으로 사용할 집은 </b><b>10</b><b>칸 되는 기와집으로 지붕과 방</b><b>, </b><b>마루를 개조하여 성당으로 꾸몄습니다</b><b>. </b>

드비즈 신부님은 1896년 4월 21일 전국 사제가 함께 모여 거행된 피정을 마치면서 명동 교구청의 당가 신부로 전근 발령을 받게 됩니다.

<b>진행 </b><b>1: </b><b>제의설명</b><b>:</b>

제의는 서방 교회의 전례 의상으로 도입되면서 측면이 접어 포개진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부제는 사제가 제의의 측면을 접는 것을 거들었으며, 간혹 이러한 일을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끈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13세기 초부터는 제의의 측면을 조금 짧게 하는 경향이 대두하였으며, 이는 15세기 복식을 설명하는 삽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5세기와 그 다음 세기를 거치면서 제의는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형태를 취했습니다. 옷의 측면이 더는 발목까지 내려오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손목까지만 이르렀을 뿐이며, 접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지금 보고 계신 제의는 백색제의입니다. 세례 성사의 상징과도 같이 백색 제의는 영광과 결백, 기쁨을 상징합니다. 부활시기와 성탄시기에 많이 사용합니다. 대축일과 축일별로 보면 수난과 관련 있는 축일을 제외한 그리스도의 축일, 성모 마리아의 축일과 기념일, 천사들 축일, 순교자가 아닌 성인들의 축일과 기념일,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2월 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6월 24일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날,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등의 미사 성제 때에 사용합니다.

(제의에 대해서 설명할 때 제의를 보여주며 포즈를 취하여 카메라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한다.)</td>
</tr>
</tbody>
</table>
모든 본당의 역사를 제의 전시회를 통해서 시각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 제의 전시회를 통해 다양한 이들이 제의를 직접 입어볼 수 있고, 역사를 들을 수 있으며, 기억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 성당의 신앙의 역사가 다음 세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되고, 신자들은 자긍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제의 전시회는 공세리에서는 신앙 역사의 자원화된 한 예이다.
<ol>
 	<li><b> </b><b>나가는 말</b></li>
</ol>
내포지역은 거대한 신앙의 박물관이고, 내포를 찾는 이들에게 죽은 박물관이 아니라 살아있는 박물관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대전교구는 16개의 국가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 국가유산을 통하여 국민의 문화향유권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취시키고, 교회의 전통이 다음 세대에도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통합된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을 통해 누구나 쉽게 내포의 박물관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며, 접한 자료를 통해 신앙을 키우고, 역사를 배우며, 가톨릭에 대해 호감을 갖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면에서 생생문화재 공모사업은 국사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내포교회에는 신앙유산을 다음세대에 전해주는데 큰 도움이 되는 계기이며, 가톨릭의 문화를 자원화하여 보편적인 문화 선교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국가유산청의 지원을 받지 못하더라도 지속시켜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9:13: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섯. 초창기 천주교회 신자들의 기도생활]]></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30]]></link>
			<description><![CDATA[<b>여섯</b><b>. </b><b>초창기 천주교회 신자들의 기도생활</b>

이석원 프란치스코

 

Ⅰ. 머리말 270

Ⅱ. ‘신앙선조’에게 기도는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했는가? 270

Ⅲ. ‘신앙선조’들은 어떤 기도를 했을까? 274

Ⅳ. 맺음말 279

 

<b>Ⅰ</b><b>. </b><b>머리말 </b><b>– </b><b>‘</b><b>신앙의 선조들</b><b>’, </b><b>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b><b>=</b><b>십자가를 지는 삶</b>

 

한국 천주교회가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세계교회 역사상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위주치명(爲主致命,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침)를 각오한 초창기 신자들[신앙선조]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교회로 성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난하고 약하고 병든 자에게 위로와 사랑을, 세상에 좌절하고 부조리에 분노하는 자에게는 용기와 정의를 주었다. 천주교에 대한 오해와 시기와 미움이 넘치는 세상[천주교 금압(禁壓) 시기]에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기만의 십자가를 지어야만 했다. 하지만 오히려 십자가의 고통을 나눔으로써 새로운 삶(부활)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신앙선조’들은 모든 시련과 고통, 심지어 죽음마저도 이기게 하는 용기와 믿음을 가졌다.

‘신앙선조’들에게 이 세상의 삶은 ‘나그네길’이었고, 참 고향은 ‘하느님 나라(천국)’였다. 지금 세상에서 시험[과거]을 통과해야 하느님 나라에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삶’ 자체가 소중한 여정이기도 했다. 그 길을 안내하는 목자(사제)들에게 순종하는 양떼처럼 의지하고 따랐고, 또 같은 길을 가는 신자들은 ‘교우’(敎友, 믿음의 벗, 친구)라 하여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는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되었다.

이처럼 혹독한 시련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살았던 우리 ‘신앙선조’들의 삶, 그중에서도 ‘성사·전례[미사] 참여와 함께 신앙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기도생활’을 살펴보는 것은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거울이 될 것이다.

 

<b>Ⅱ</b><b>. ‘</b><b>신앙선조</b><b>’</b><b>에게 기도는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했는가</b><b>?</b>

 

‘신앙선조’들은 기도를 무엇이라고 여겼을까? 그 문제의 답을 『천주교요리문답』(1934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table>
<tbody>
<tr>
<td>문 : 기도는 무엇이뇨?

답 : 기도는 우리 마음을 들어 천주께로 향(向)함이니,

곧 천주를 흠숭(欽崇)하며,

천주께 기왕[이미] 받은 은혜에 사례(謝禮)하며,

죄[를] 사하여 주심을 빌며,

자기와 다른 이를 위하여 요긴(要緊)하고 유익한 모든 은혜를 구(求)함이니라.</td>
</tr>
</tbody>
</table>
 

‘신앙선조’들은 ‘기도’가 우리의 마음을 천주께로 향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므로 기도 내용에 있어 가장 먼저 천주를 흠숭하고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예(禮)를, 그리고 베푸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저지른 것에는 용서를, 마지막으로 자신과 이웃이 생활해 나가는데 꼭 요긴(要緊, 필요하고 중요)한 것을 그분께 청했던 것이다. 천주께 간청한다는 의미에서 예전에는 기구(祈求)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기도는 언제 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천주교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table>
<tbody>
<tr>
<td>문 : 기도는 어느 때에 할 것이뇨?

답 : 기도는 예수의 말씀대로 간단(間斷)없이 할 것이로되,

매일 아침저녁과,

모든 주일과 파공 첨례(罷工瞻禮)와

또한 유혹 당할 때에 할 것이니라.</td>
</tr>
</tbody>
</table>
 

이와 같이 ‘신앙선조’의 삶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마치는 생활이었다. 왜 기도를 잠시라도 그치거나 끊어지지 않게 해야 되는가에 대해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인간의 육신·영혼을 둘러싼 위험이 끊임없이 닥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실제 사료에서 ‘신앙선조’들의 기도생활을 살펴보면 위의 내용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평소에는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한 번씩 조·만과(早晩課)[현재 아침·저녁기도의 원형]를 하고 하루 세 번씩 삼종기도*를 바쳤다. 주일과 축일에는 하루 종일 기도를 했다.** 잠을 자다가도 밤에 일어나 무릎 꿇고 기도를 바치기도 했고,*** 길을 갈 때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table>
<tbody>
<tr>
<td>* 신앙선조들은 들에서 일을 하다가도 삼종 시간이 되면 무릎을 꿇고 삼종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한번은 신자 소녀들이 나물을 뜯다가 한낮이 되자 서로 말하기를 “삼종 때 되었다” 하고 삼종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냉담자였던 이 베드로가 회개했다.

 

** 용인 굴암 공소회장이던 성인 김제준 이냐시오는 축일과 주일에 모든 신자들을 모아 오래도록 성경[성경직해광익]을 읽고 기도를 했다. 성인 손자선 토마스는 축일과 주일에는 온종일 기도에 힘썼는데 기도할 때는 비신자가 보는 것도 꺼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 성녀 박희순 루치아는 병 들었을 때도 잠이 오면 (마귀의) 유혹이라 하여 밤이 이슥하도록 기도를 했으며, 성인 권득인 베드로는 밤에 잠을 적게 자고 항상 일어나 불을 켜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도심지에 살았던 치명자[순교자] 이 체칠리아는 사방의 이웃에 비신자들이 살고 있고 낮에는 번잡했기 때문에 낮 대신 밤에 자지 않고 기도를 하고 교회서적을 읽었다고 한다.</td>
</tr>
</tbody>
</table>
 

‘천주교 금압시기’에 살았던 ‘신앙선조’들은 군난(窘難, 시련과 고난)[박해]을 만나 붙잡히거나 심문을 받을 때에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묵주를 보이거나 천주경[주님의 기도], 성모경[성모송] 등의 기도문을 외웠다. 심문을 받으면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는 감방 안의 신자들과 함께 조만과[아침·저녁기도] 등을 큰소리로 바쳤다.* 신앙을 증거하여 사형 언도를 받고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치명(致命, 순교)을 예비하기 위해 주모경 등을 끊임없이 외웠다. 사형장에 끌려갈 때에도 공개적으로 큰 소리로 기도하고 노래를 불렀고, 칼을 받는 순간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신자들은 위대한 치명자[순교자]들을 공경하면서 그 무덤을 참배할 때도 기도를 바쳤고, 평소에도 순교신심을 본받기 위해 치명자를 생각하면서 기도를 했다.

 
<table>
<tbody>
<tr>
<td>* [붙잡혀 감옥에 갇힌] ‘김자선의 모친’은 손에 묵주를 항상 들고 잘 때나 깰 때나 입에서 기도가 떠나지 아니하니 관속(官屬, 관아의 아전과 하인)이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감옥에 갇힌] ‘정도문의 모친’도 손에 묵주를 들고 끊임없이 기도하니 옥졸[이] 보고 사술(邪術, 사악한 마술) 들린 사람으로 여겼다고 한다.

 

** 박 요셉과 동료 신자들이 포도청에서 치명하러 갈 때에 열심히 열품도문(列品禱文, 성인호칭기도)과 경문(經文, 기도문)을 외우며 나갔다고 한다. 동래 경상좌수영에서 군문효수될 때 이 요한[80세]은 낮 삼종기도를 하면서 성호를 그었고, 조카 이 베드로는 이 요한의 칼[형틀 가(枷)]을 붙들고 삼종기도 한 후에 함께 칼을 받아 치명했다고 한다.</td>
</tr>
</tbody>
</table>
 

언제든지 체포되어 처형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신앙선조’들은 선교사제의 지도 아래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같이 기도생활을 하면서 교육, 전교, 봉사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국천주교회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신심단체로서 교리교육과 전교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명도회(明道會), 성모를 공경함으로써 회에 부여된 은사를 얻고자 하는 성의회(聖衣會, 스카풀라회), 묵주기도 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매괴회(玫瑰會, 로사리오회), 성모 마리아의 전구로 하느님께 죄인들의 회개를 청하는 성모성심회(聖母聖心會), 예수 성심을 공경하고 성체성사의 올바른 보속을 위한 예수성심회 등이 1860년대 이전 시기부터 확인된다. 연령회가 설립된 것은 1886년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이지만 연령회의 전통은 그 이전시기까지 소급될 수 있다. 초창기 때부터 상을 당한 신자나 비신자를 찾아가 조문하고 장례 절차까지 돕고, 연도를 함께 하는 것이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신앙선조’들은 주일과 각종 축일에 맞춰 혼자서 또는 가족, 단체와 함께 기도를 했다. 천주교의 달력[전례력(典禮曆)]을예 전에는 ‘첨례표’(瞻禮表)라고 불렀는데, 이 첨례표는 전통적인 달력[조선 후기 ‘시헌력’(時憲曆)]과 달랐기 때문에 교회에서 제작하여 배포했고, 이것이 어려울 경우에는 신자들이 스스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1861년 제4대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목판인쇄소를 서울에 건립한 이후 ‘첨례표’를 간행하여 신자들에게 배포했고, 현재 1865년 1866년 첨례표가 남아 있다. 이 표에는 각종 축일은 물론 중요한 신심단체 관련 내용[규칙]도 포함되어 있어, 신자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로 신앙생활[기도]을 할 때 필수적이었다.

이와 같이 ‘신앙선조’들은 하느님에게 마음을 향하고 은혜에 감사드리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고, 자신과 이웃에게 꼭 필요한 것을 구하기 위해 기도를 했다. 이러한 기도들을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매주, 매달, 매년 끊임없이, 집과 공소, 단체 모임 장소나 감옥이든 간에, 혼자서나 가족이나 신자 교우들과 함께 했다. 이와 같이 기도와 단체 활동 등을 통해 신앙생활에 충실했던 ‘신앙선조’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현재 한국천주교회의 기틀이 잡혔다고 할 수 있다.

 

 

<b>Ⅲ</b><b>. ‘</b><b>신앙선조</b><b>’</b><b>들은 어떤 기도를 했을까</b><b>?</b>

 

기도의 종류에 대해 『천주교요리문답』은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table>
<tbody>
<tr>
<td>문 : 기도는 몇 가지 있느뇨?

답 : 묵상(默想) 기도와 염경(念經) 기도 두 가지 있느니라.

 

답 : 묵상 기도는 천주와 담화하거나, 그 앞에서 무슨 진리를 궁구하는 것이니라.

답 : 염경 기도는 무슨 경문(經文)을 정성되이 입으로 외는 것이니, 이는 사사로이 하거나 혹 여럿이 모여 하는 것이니라.</td>
</tr>
</tbody>
</table>
 

묵상 기도는 혼자서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이며,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깊이 생각하서 그 해답을 찾는 것이다.* 묵상 기도의 주제와 방법을 지도하는 천주교서적이 있으며, 그에 따라 날마다 묵상한다.** 묵상기도는 모든 성직자[수도자], 신학생에게는 필수 사항이며, 열심한 신자들도 매일 묵상 기도를 드렸다.

 
<table>
<tbody>
<tr>
<td>* 성인 황석두 루카는 평상시에 길을 걸을 때에도 염경[기도문을 외움]했고, 매번 새벽에 닭이 울 때면 즉시 일어나 대월(對越, 묵상)하다가 날이 밝으면 그쳤다고 한다.

 

** 성인 정의배 마르코는 날마다 성인 행실[성인전]을 하나씩 보기로 떳떳한[한결같은] 공부로 삼고, 묵상 염경을 오래하고 잠깐하는 것은 때에 따라 하며, 아무 일 없이 앉아 있을 때면 책을 보거나 그렇지 않으면 눈을 감고 깊이 무엇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고 한다.</td>
</tr>
</tbody>
</table>
 

염경 기도는 교회에서 정해놓은 기도문을 외우는 것이다. 천주교에 들어온 예비신자가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리문답과 주요 기도문을 배워야 했다. 세례성사뿐 아니라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를 위한 교리문답서[삼본문답(三本問答)]를 익히고 ‘주모경’을 비롯한 주요 기도문을 외워야 했다. 필수적인 기도문으로 한국천주교회에 정착된 것이 ‘십이단(十二端)’*이고, 현재 『가톨릭 기도서』에 수록된 ‘제1편 주요 기도’의 원형이다.

 
<table>
<tbody>
<tr>
<td>* 1920년대 이전 『천주성교십이단』 책자에 나오는 12단은 성호경(聖號經), 삼종경(三鐘經, 현재 삼종기도), 천주경(天主經, 현재 주님의 기도), 성모경(聖母經, 현재 성모송), 종도신경(宗徒信經, 현재 사도신경), 고죄경(告罪經, 현재 고백기도), 관유하심을 구하는 경, [‘사하심을 구하는 경’], 소회죄경(小悔罪經, 현재 통회기도), 천주십계(天主十誡, 현재 십계명), 성교사규(聖敎四規, 현재 신자 의무규정[주일의 의무]), 삼덕송(三德誦), 봉헌경(奉獻經, 현재 봉헌기도)이다. 이 시기까지 책자에는 숫자 번호 표시가 없다.</td>
</tr>
</tbody>
</table>
기본적인 주요 기도문[십이단] 외에 주일과 축일 미사나 전례 때 사용되는 기도문, 다양한 지향을 가진 기도문을 모은 ‘기도서’가 중국에서 수입되어 사용되었다. 이것을 모아 공식 기도서로 나온 것이 『텬쥬셩교공과(天主聖敎功課)』(1862년 간행)이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개정된 『가톨릭 기도서』(1972년 초판)가 나올 때까지 공식 기도서로서 사용되었다.

기도문은 천주교가 한국 땅에 들어온 시점에 다른 천주교서적과 함께 중국에서 들여왔는데, 다른 서적과 마찬가지로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교리문답서를 비롯하여 다른 천주교서적들은 한문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일찍부터 한글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기도문[기도서]만큼은 한글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입국했던 1838년 당시까지도 한문으로 된 기도문을 한자발음만 조선식으로 읽는 방식으로 기도를 했다. 이런 방식으로 읽었던 ‘천주경’과 ‘성모경’이 현재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앵베르 주교는 어느 정도 조선말을 배우자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중요한 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모든 신자들이 배우도록 했다.

 

이후 기도문의 한글 번역은 사제들의 주도 아래 계속되었고, 특히 최양업 신부가 번역을 주로 맡아서 완성한 것이 앞서 언급한 『천주성교공과』라는 공식 기도서이다. 최양업 신부와 함께 번역에 참여한 다블뤼 주교가 기도서 편찬을 주관했고,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의 감준을 받아 1862년에 서울 목판인쇄소에서 간행되었다. 이 기도서에 따라 신자들은 매일 기도를 하면서 신앙을 키워나갔다.

실제 사료를 보면 ‘신앙선조들’이 십이단 기도를 포함한 다양한 기도문을 배우고 그 기도를 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예를 들면, 앞에 나온 성인열품도문[성인 호칭 기도], 매괴경(玫瑰經, 현재의 묵주기도)*, 성로신공(聖路神功, 현재의 ‘십자가의 길’)**. 조만과[아침·저녁기도], 칠기구(七祈求), 중인(衆人)을 위하여 하는 경, 연도(煉禱, 煉獄禱文의 준말, 현재의 ‘위령기도’), 일비선종경(日備善終經, 선종을 날마다 예비하는 경, 현재의 ‘선종기도’의 원형), 대송(代誦)*** 등의 기도를 바쳤다. 특별한 지향을 가진 기도도 했는데, 자기 죄를 참회하는 기도, 죽은 부모를 위한 기도, 위주치명을 바라는 기도, 가난한 이를 위한 기도,**** 선교사제 입국을 위한 기도, 성인에게 기구, 기타 청원기도가 그것이다.
<table>
<tbody>
<tr>
<td>* 성녀 김성임 마르타는 방구석에 꿇어앉아 묵주를 가지고 기도할 때면 항상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유 마리아는 자신의 남편이 경상도에서 잡혔단 말을 듣고 날마다 성로선공[‘십자가의 길’ 기도]을 바쳤고, 결국 남편은 무사히 귀환했다. 이덕부[이덕보] 마태오는 스스로 성로선공을 매일 한 번씩을 하는 것을 규정으로 정했다.

 

*** 주일이나 교회법이 정한 의무 축일에 부득이한 사정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없는 경우, 대신 드리는 기도를 말한다. ‘천주교 금압시기’에는 선교사제를 만나거나 공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대송으로 주일과 축일의 의무를 대신하였다. 대개 『천주성교공과』에 나와 있는 주일 및 축일에 해당하는 기도문을 외웠는데, 만일 책이 없거나 글을 모를 경우에는 ‘성로선공’[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거나, ‘천주경’[주님의 기도] 33번씩 2회와 ‘매괴경’[묵주기도] 15단을 드리거나, 성모경[성모송] 33번씩 3회 즉 99번을 바치도록 했다고 한다.

 

****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은 전옥(典獄, 형조 감옥)에서 함께 갇힌 신자들에게 “올해 흉년이라 남아있는 신자들이 살기 어려우니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를 위하여 주님께 기도하자”고 했다.</td>
</tr>
</tbody>
</table>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전례 개혁과 함께 기도문도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이를테면 매일 신자들이 했던 조만과가 아침·저녁기도로 바뀌면서 그 내용이 간략해졌다. 현재 한국천주교회 『가톨릭 기도서』와 『천주성교공과』의 아침·저녁기도[조만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table>
<tbody>
<tr>
<td rowspan="2"> </td>
<td colspan="2"><b>천주교성교공과</b></td>
<td rowspan="2"><b>가톨릭 기도서</b></td>
</tr>
<tr>
<td><b>제</b><b>1</b><b>양식</b></td>
<td><b>제</b><b>2</b><b>양식</b></td>
</tr>
<tr>
<td><b>조과</b><b>(</b><b>早課</b><b>, </b><b>아침기도</b><b>)</b></td>
<td>△오배례

△천주경

△성모경

△종도신경

△고죄경

△관유하심을 구하는 경

△사하심을 구하는 경

△대회죄경

△도우심을 구하는 경

△호수천신송

△성교회와 중인을 위하여 외는 경

△예수 성명 도문

△성모를 찬송하는 경

△부모를 위하여 외는 경

△천주십계

△성교사규

△봉헌경</td>
<td>△오배례

△천주경

△성모경

△종도신경

△고죄경

△관유하심을 구하는 경

△사하심을 구하는 경

△호수천신송

△예수 성명 도문

△성모를 찬송하는 경

△봉헌경</td>
<td>△성호경

△주님의 기도

△봉헌기도

△우리 주 하느님께 권능과 영광 지혜와 굳셈이 있사오니 찬미와 감사와 흠숭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td>
</tr>
<tr>
<td><b>만과</b><b>(</b><b>晩課</b><b>, </b><b>저녁기도</b><b>)</b></td>
<td>△성신강림송

△죄를 알게 하심을 구하는 경

△소회죄경

△호수천신송

△성모덕서도문

△형제 친척 붕우 은인을 위하여

△남녀 교우 중에 새로 죽은 이를 위하여

△성영 (제 일백이십구)

 

△죽은 모든 이를 하여 외는 경

△신덕송

△망덕송

△애덕송

△간단한 삼덕송

△오사례</td>
<td>△성신강림송

△죄를 알게 하심을 구하는 경

△고죄경

△관유하심을 구하는 송

△사하심을 구하는 경

△호수천신송

 

△성모덕서도문

 

△죽은 모든 이를 위하여 외는 경

△신덕송

 

△망덕송

△애덕송

△오사례</td>
<td>△성호경

△반성기도

△삼덕송

(신덕송, 망덕송, 애덕송)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하루도 이미 저물었나이다. 이제 저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주님을 흠숭하며 지금 이 순간까지 베풀어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나이다. 아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지켜주소서. 아멘</td>
</tr>
</tbody>
</table>
이러한 선조들의 신앙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것이 성물(聖物)이었다. 신자라는 표징이자 신심을 드러내는 대상이기도 했던 성물은 신자들이 꼭 가지고 싶던 것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십자고상(十字苦像), 묵주, 성상(聖像), 성화(聖畵), 성패(聖牌) 등이 있었다.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돈을 마련해 성물을 꼭 장만하려 했고,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은 직접 묵주 같은 것을 만들어서 팔기도 했다. 선교사제들이 본부에 서한을 보내 요청하는 물품 중에 성물이 상당한 양이 차지하고 있었다.

 

군난[천주교 박해]이 발생하면 신앙선조들은 소중한 성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땅을 파거나 마른 우물에 넣어 묻기도 했다. 또한, 신자들이 선종한 후 그의 무덤에 평소에 쓰던 묵주 등을 넣기도 했다. 현재 간간히 발굴되고 있는 성물들은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이다.

 

<b>Ⅳ</b><b>. </b><b>맺음말</b>

우리들의 신앙선조들은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과 시련이 거셀수록 예수님의 고통을 같이 나누고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 모든 것을 이겨냈다. 여기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매주, 매달, 매년 끊임없이, 집이든 공소이든 감옥이든 간에, 혼자서나 가족이나 신자 교우들과 함께, 하느님에게 마음을 향하고 은혜에 감사드리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고, 자신과 이웃에게 꼭 필요한 것을 구했던 신앙선조들의 기도생활이 뒷받침되었다.

이처럼 한순간도 겸손함을 잃지 않고 기도를 드렸던 신앙 선조들의 용기와 신앙심은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요 바탕이 되었다. 따라서 주님과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신앙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복음을 실천하고 신앙을 증거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9:11:4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다섯. 천주교의 연도와 유교의 제사]]></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29]]></link>
			<description><![CDATA[<b>다섯</b><b>. </b><b>천주교의 연도와 유교의 제사</b>

<b>Ⅰ</b><b>. </b><b>유교의 제사와 천주교의 연도</b> <b>216</b>

제1부 유교와 천주교의 상제례 217
<ol>
 	<li>유교 상제례의 근본정신과 목적 217</li>
 	<li>조상 제례에 대한 천주교와 유교의 관점 비교 219</li>
</ol>
제2부 천주교의 연도 221
<ol>
 	<li>연도의 일반적 특징 221</li>
 	<li>『텬쥬셩교례규』 223</li>
 	<li>『상장 예식』 228</li>
</ol>
<b>Ⅱ</b><b>. </b><b>연도</b><b>煉禱 </b><b>-</b><b>한국 천주교 상장례 문화와 음악</b><b>-</b> 235

2.1. 연도(煉禱))의 개념과 연행(演行) 236

2.2. 연도(煉禱)의 형성과 초기 정착 240

2.3. 장례예식서의 변천과 토착화 240

2.4. 『성교예규』(1992)와 『상장예식』(2003) 연도(煉禱)의 음악적 연구 246

2.5. 연도(煉禱)의 지역 사례-부산지역의 천주교 장례노래 연도(煉禱) 250

2.6. 장례미사의 장례음악 연구 253

2.7. 천주교 연도(煉禱)와 한국의 전통 상장례 문화 257

<b>Ⅲ</b><b>. </b><b>유교식 상장의례</b><b>(</b><b>喪葬儀禮</b><b>)</b> 265
<ol>
 	<li>상례의 어의(語義) 265</li>
 	<li>유교식 상장의례 절차 265</li>
</ol>
첫 번째 초종의례(初終儀禮): 임종에서 입관까지 265

두 번째 사자(死者)를 보내는 장송의례(葬送儀禮) 266

세 번째 상제의례(喪祭儀禮) 우제에서 길제까지 267

<b>Ⅰ</b><b>. </b><b>유교의 제사와 천주교의 연도</b>

윤종식(티모테오) 신부
<ol>
 	<li><b> </b><b>들어가는 글</b></li>
</ol>
교회는 『장례 예식』 지침에서 장례와 파스카 신비와의 깊은 연관성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고 기다리고 있음을 드러낸다. “교회는 자녀들의 장례를 정성껏 치름으로써,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세례와 한 몸이 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건너가도록 도와주며, 영혼으로는 참으로 정화되어 성인 성녀와 뽑힌 이들과 함께 하늘 나라에 들고, 육신으로는 복된 희망을 품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이들의 부활을 기다리게 한다”(1항).

그리스도교가 동아시아에 전래되기 시작한 중국(16-17세기)과 한국(18세기)은 생활 전반에 걸쳐 유교 사상과 문화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었고 장례 문화의 차이로 인하여 부득이한 충돌이 생겨났다. 효(孝)의 종교라고 일컬어질 만큼 효를 중시하는 유교에서는 부모 생시(生時)뿐만 아니라 사후(死後)에도 제사를 통해 효도를 계속하며, 또한 공자에 대해서도 만세의 스승으로 받들어 존경의 의식과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 선교에 임한 서양 선교사들은 이 이질적인 유교식 조상제사와 공자 공경의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그리스도교 신앙과 병행할 수 있는냐 하는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 선교사들은 물론이요 전 유럽의 가톨릭 교계가 간여하여 1세기 간이나 논쟁을 벌였다. 로마 교황청은 금지와 허용의 곡절 끝에 엄한 금지령을 내리게 되며, 이로 인해 동양선교는 치명적 상처를 받게 된다.

그 후 약 200년간 이 금령은 엄격히 준수되다가 20세기에 들어와 다시 문제화되었다. 즉 만주국에서 공자숭배와 일본에서의 신사참배를 허용할 것이냐는 난제가 대두된 것이다. 이 때는 이미 획일화에서 토착화로 선교 정책을 전환하고 있던 교황청은 공자공경의식과 신사참배를 허용할 뿐만 아니라, 조상제사에 대해서도 비록 전면적인 허용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관용적인 조치를 취했다.

로마 교황청이 조상제사를 금한 이유는, 비록 의식 자체는 전적으로 악하지 않다 하더라도 당시 중국인의 종교심성으로 보아 그 의들이 미신과 혼합되어 있어서 미신적 요소를 분리해 내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조상제사의 금령 시기에 조상제사 거부로 유명한 ‘진산사건’의 주인공인 윤지충 바오로는 공술(供述)에서 잠자는 사람이 음식을 먹을 수 없듯이 영면(永眠)한 사람 역시 제물을 음향할 수 없으며, 더우기 음식은 육신의 양식일 뿐 영혼의 양식은 될 수 없으므로 조상제사는 허위라고 역설하였다.

제1부에서는 유교가 지향하는 효의 방식과 천주교의 교회 가르침 사이에 어떤 차이점과 공통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유교 상제례의 근본 정신과 목적을 알아보고 그 다음으로 제사를 바라보는 유교와 천주교의 관점 차이를 고찰하려 한다.

제2부에서는 천주교에서 행하는 연도를 고찰한다. 연도의 기원과 변천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옛 죽은 이를 위한 기도서인 천주성교예규와 현재의 상장 예식에 나오는 ‘연도’(위령 기도)에 대한 비교를 통해서 의미를 확인하려 한다.

<b>제</b><b>1</b><b>부 유교와 천주교의 상제례</b>
<ol>
 	<li><b> </b><b>유교 상제례의 근본정신과 목적</b></li>
</ol>
<b>1.1. </b><b>효의 근본 정신과 </b><b>‘</b><b>事親如事天</b><b>’</b>

“낙천적 인본주의”인 유교는 삼재(三才)인 천(天), 지(地), 인(人)를 사상 체계의 근간으로 삼고 있으나 그 중심을 인간에 두고 있으며, 인(仁)를 핵심 사상으로 삼고 있다. 이 인(仁)은 인간의 측은지심에서 연유하나 단순히 어짐이나 자비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다운 인간, 전인적인 인간이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仁)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효성(孝)과 우애(悌)라고 보아 효제(孝悌)를 무엇보다 중시하고 강조한다. 제(悌)는 효(孝)에서 연유하고 효에 포함되므로 효가 절대적인 본(本)이 되며 인간 행위의 근본이요 모든 덕의 으뜸이라고 한다. 이 효는 단순히 부모와 형제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개인의 수신, 임금의 선정, 나아가 천(天)을 섬김에 이르기까지 연결, 확산된다고 본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효에 의해 그 사람됨을 평가하며, 효도하지 않는 자는 자식이라 할 수도 없고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불효를 가장 큰 죄로 간주하는 것이다.

유교적 효의 근본정신은 가장 귀한 생명과 삶을 조건 없이 주시고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 생명의 근원인 부모와 선조께 감사의 응답을 하는 보본(報本)과 보은(報恩)에 있다. 그런데 이 보본과 보은의 마음에서 연유한 효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 효도의 양상으로 실천된다. 첫째는 자신의 몸을 잘 보존하고 경건하게 다루는 것이다. 부모의 생명과 혈육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나의 몸은 동시에 부모의 유체(遺體)이므로 잘 보전함은 물론이요, 자손을 통해 계속 지속시키고 확충시켜 나가야 한다. 따라서 부모의 생명을 지속시키고 부모께 효도의 제사를 지낼 후손이 없는 것이 최대의 불효가 됨은 당연한 바이다. 둘째는 의식주 전반에 걸쳐 불편이 없도록 하는 양구체(養口體)는 물론이요. 기쁜 마음으로 봉양하며 부모의 뜻을 정성으로 받드는 양지(養志)이다. 셋째는 수신하고 도를 행하여 떳떳한 사람으로 살아감으로써 이름을 빛내고 부모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유교에서 효의 극치는, 생시 부모 섬김에 있어서는 천(天)을 섬기듯 하고 사후에는 제사로써 천과 짝함(配天)에 있다. 사천(事天)과 사친(事親)을 둘로 분리하지 않고,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인 불가분의 관계로 본다. 그래서 “인자(仁者)는 부모 섬기기를 천(天) 섬기듯이 하고 천 섬기기를 부모 섬기듯이 한다.”

<b>1.2. </b><b>상례의 목적과 장친</b><b>(</b><b>葬親</b><b>)</b>

유교에서는 보본 보은의 효를 부모 생시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장례와 제례를 통해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이 섬기듯이 함(事死如事生)으로 지속한다. 효를 시간적으로 구분하면 생시에 섬기는 사친(事親), 사후에 섬기는 장친(葬親)과 제친(祭親)으로 나눌 수 있는데, 유교에서는 생시의 사친보다도 오히려 사후의 장친과 제친에 더 지성을 드린다. 생시에 좀 소홀함이 있다 하더라도 다음의 기회가 있으나 상례에 있어서는 한 번 지나가 버리면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으며, 또한 제사에 있어서는 죽은 이와의 감격(感格) 내지 흠향(歆饗) 여부가 오로지 자손의 정성에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면 유교에서는 상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후 효를 행하며 아울러 상례의 세 가지 목적을 수행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상례에서 수행하는 목적은 세 가지로, 애도와 함께 죽은 이를 장송하고, 유족들이 다시 정상 생활을 하도록 도와주며, 죽음에 대한 깊은 인식을 통해 삶을 더욱 의미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유교에서는 이 세 가지를 유족과 공동체의 극진한 애도, 정성의 장송(葬送), 효성의 상제 등을 통해 수행하고 있다.

<b>1.3. </b><b>제례의 근본 의미와 효과</b>

탈상 후에도 유교의 ‘事死如事生’의 효도는 선조의 신령이 계시다고 믿는 사당을 중심으로 하여 계속되며, 특히 제사를 통해 수행된다. 「예기」에서는 제사의 근본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명하고 있다.

“대저 제사는 타물(他物)을 외부에서 빌어 내 몸 위에 가져다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 속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자기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 제사란 어버이가 돌아가신 후 그 미처 다하지 못한 봉양(奉養)을 뒤쫓아서 하는 것(追養繼孝)이다”.

곧 제사는 근본을 갚고 은혜를 사례하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유교 조상 제사의 의의는 보본과 보은의 마음에서 생시와 같이 섬기는 추양계효(追養繼孝)에 있다. 이렇게 보본추효(報本追孝)로 드리는 지성의 제사는 신령이 흠향하게 되며 아울러 복도 따르게 된다고 믿는다. 신령이 흠향하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간청하지만, 제사의 근본 의의와 목적은 어디까지나 신령이 굶주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손의 보본추효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제사를 받는 대상보다는 제사를 드리는 자손이 중심이 되며, 죽은 이의 존재 형태나 흠향 여하보다는 산 이의 효심과 성경(誠敬)이 문제인 것이다. 신령과의 감격 내지 흠향은 오로지 자손의 정성 여하에 달려 있기에, 지성으로 제사를 드리면 아무리 오래전에 돌아간 선조라도 감격하여 흠향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갓 돌아간 부모도 흠향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한마디로 “부성(不誠)이면 무물(無物)”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유교에서는 주체적 성(誠)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제사의 복은 무엇인가? 조상 제사의 하사 내용은 고대 농경 사회에서의 축복인 오복과 농사의 풍요를 담고 있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이러한 외적 복보다는 내적 복에 더 가치를 두어서, 진정한 복이란 “내적으로는 자신에 충실하고 외적으로는 도에 순응함”이라고 한다.

이렇듯 조상 제사의 효과로는 신령과의 통교(通交)와 강복(降福) 외에도 생자(生者)로 하려금 생명의 소속감과 뿌리 의식을 깊이 느끼고 선조의 유체로서의 자신의 삶에 더욱 충실하도록 자극한다.
<ol>
 	<li><b> </b><b>조상 제례에 대한 천주교와 유교의 관점 비교</b></li>
</ol>
중세 그리스도교에서도 효를 부모 생시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계속하도록 가르쳤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는 유교와 다르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세속과 육신의 감옥에 갇혀있던 영혼이 해방되어 천국 본향에 귀환함을 의미하기에, 부모의 상(喪)을 당해서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거나 애통해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하고 축하할 바라고 하였다. 그리고 죽은 이를 위해서는 무익하고 헛된 제사를 드릴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하루 속히 연옥 단련을 마치고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느님께 기도하고 대속적인 선한 공로를 바치도록 가르쳤다.

간략하게 조상제례에 대한 천주교와 유교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겠다.

첫째, 두 종교 모두 사후(死後)에도 계속 효도를 하도록 가르치지만 그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 다르다. 영혼불멸과 사후심판을 믿는 천주교에서는 사후(死後)의 효도의 의의를 죽은 이의 영혼 구원에 두기에 하느님께 기도하고 대속적인 선한 공로의 바침을 중요시하는 반면에, 생사여일(生死如一)과 혼백산화(魂魄散化)를 믿는 유교에서는 산 이의 도리로서의 추효보본에 근본 의의를 두기에 ‘죽은 후에도 생존과 같이’(事死如事生)의 제사를 중요시한다.

둘째, 두 종교 모두 제사가 신적 존재에게 드리는 인간 최대의 정성의 표현이라고 보나, 천주교에서는 하느님만이 생명의 유일한 근원이요 절대자이므로 그에게만 제사를 드려야하고 타존재에게 드리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범죄행위라고 단죄하는 반면에, 유교에서는 천(天) 뿐만 아니라 부모를 비롯한 조상도 자손 생명의 근본이므로 사은(謝恩)의 제사 역시 원(遠)근본인 천(天)에게도 물론이요 근(近)근본인 부모에게도 드림이 당연하다고 본다.

셋째, 두 종교 모두 산 이와 죽은 이 사이의 통교가 가능하다고 믿으나, 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을 통해서만 통교가 이루어진다고 믿는 반면에 유교에서는 산 이의 지극한 정성을 통해서만 감격(感格)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따라서 통교의 가능 근거 내지 모체가 천주교의 경우에는 하느님과의 결합이기에 아무리 혈육이라도 세례를 받지 않은 비그리스도인이나 지옥에 간 영혼과는 통공이 불가능하다고 믿는 반면에, 유교의 경우에는 그 모체가 후손의 정성스러운 공경이기에 일반적으로 비혈육관계와는 감통(感通)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넷째, 전통 조상제사에 대해 천주교는 그 근본의의가 신령의 흠향과 강복에 있다고 이해한 반면에, 유교에서는 자손의 계효보본(繼孝報本)에 있으며 신령의 흠향과 강복은 거기에 따르는 결과라고 보았다. 이렇게 제사의 의의를 실효성에서 이해한 천주교에서는 사후 영혼은 제물을 흠향할 수도 없고 또 복을 내려 줄 권한도 없으므로 조상제사는 무익한 허례라고 단죄한 반면에, 산 이의 도리와 효도의 상징성에 제사의 근본의의를 둔 유교에서는 비록 신령의 흠향과 강복이 없다 하더라도 효성의 상징적 표현으로서의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였다.

다섯째, 신주(神主)의 의미에 대해서도 천주교에서는 신령이 빙(憑)한 신물(神物)로 이해하여 금지한 반면에, 유교에서는 신령의 빙의처로써의 기능도 인정하나 이보다는 근원적으로 자손의 애련한 마음의 의지처로서의 상징적 신상(神像)이라고 여겨 받드는 것이다.

<b>제</b><b>2</b><b>부 천주교의 연도</b>
<ol>
 	<li><b> </b><b>연도의 일반적 특징</b></li>
</ol>
은 이를 위한 기도는 천주교 역사 초기부터 전해오지만, 우리식 연도는 고유한 우리 가락에 맞춰 바치는 독특한 것이며, 그 선율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특성을 갖고 있다. 연도(위령기도)는 암송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기도서에 의존하므로, 연도의 기원이 되고 있는 초기 기도서부터 현재까지의 기도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연도의 기원이 되는 기도서는 라틴어로 된 『로마예식서 Rituale Romanum』와 한문본인 중국의 『수진일과(袖珍日課)』 그리고 한글로 된 공과, 예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공과(功課)는 한국 천주교회 초기의 기도서를 말하고, 이 중 장례 예식만을 규범화해서 만든 것은 예규(禮規)이다.

<b>1.1. </b><b>연도의 의미</b>

연도는 천주교 교리에 따라서 ‘연옥(煉獄, purgatorium)의 영혼을 위한 기도’라고 볼 수 있는데, 입관, 출관, 하관 등 임조에서 탈상까지의 모든 상장례에서 행해진다. 천주교식 상장례는 그 규범을 정해놓은 『성교예규』에 따라 행하게 된다. 성교예규의 내용은 임종을 돕는 예식, 상장(喪葬)예식, 어린이 장사예식, 간단한 위령기도와 필요한 기도 등 4장으로 나뉘며, 상황에 따라 기도 내용을 선택할 수 있다.

천주교에서의 사후세계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 연옥까지 합쳐 세 단계로 구분한다. 이는 선한 자들이 가는 천국(Caelum), 사면 가능한 죄를 지은 자가 가는 연옥(purgatorium), 악한 자들이 가는 지옥(Infernus)을 구분한 중세의 사후세계관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연옥교리가 확산되었으며, 교회는 연옥영혼의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 위령기도의 중요성을 공식 선포하였다.

천주교에서는 ‘연옥(煉獄) 영혼을 위한 기도’란 뜻에서 ‘쇠불릴 련(煉)’자를 사용하여 ‘煉禱’로 쓴다. ‘연도’라는 말을 이어서 하는 기도라는 의미인 ‘連禱’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성인호칭기도’(litania)에 적용할 수 있다.

<b>1.2. </b><b>천주교 연도의 형성</b>

천주교에서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구약성경의 2마카베오 12,38-45이다. 신약성경에서도 이런 기도 관습은 2티모1-18에서 보이며, 사도 시대의 문헌에서 분명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무덤에 새겨진 비문이나 작품들이나 위령기도의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4세기 이후에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대한 기록은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대부분 죽은 영혼의 속죄와 부활을 청하는 면에서 유사하지만, 교회 밖에서 행해지던 것이 교회 안에서 미사로 행해지는 경우로 변화되었다. 예를 들면, “콘스탄틴 대제가 죽은 뒤 시신을 제대 앞에 모시고 신자들이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든가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39-397)는 자신의 형제의 사망 주기를 맞아 379년에 장엄하게 미사를 집전하였다”는 기록들이 보인다. 이러한 기도는 중세 이후 교회 안에서 널리 사용하게 되었으며, 연옥에 관한 신학적 본질이 1274년에 완성되었고, 그해 제2차 리옹 공의회는 위령 기도의 유익함을 공식적으로 전 교회에 선포하였다. 1300년에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재위1294-1303)에 의해 희년이 선포되어, 로마 순례자들 뿐 아니라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완전한 면죄(plenissima venia peccatorum)를 제공했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해방시킬 가능성은 산 자들이 선행으로써 얻은 공덕을 죽은 자들에게 넘겨줌으로써 시행될 수 있었지만, 연옥에 있는 영혼들의 모든 벌로부터의 즉각적인 해방 즉 완전 사면을 교황이 허용한 것은 커다란 사건이었다. 이후 연옥교리가 확산되어 연옥영혼의 구원을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서 위령기도를 강조하기에 이른다. 교황 식스투스 4세(재위 1471-1484)는 위령기도를 통해 연옥 영혼에게 대사(Indulgentia)의 은혜를 전달할 수 있다고 선포하였고, 트렌토 공의회(1545-1563)는 대사에 관한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연옥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교령을 선포하게 되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던 위령기도들은 트렌토 공의회 이후인 1614년에 간행된 『로마예식서 <i>Rituale Romanum</i>』에 편집 수록되었으며, 그 내용은 여러 편의 시편과 찬미가, 후렴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기도문들이 선교사들에 의해 중국으로 전해졌으며,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는 조선 학자들의 욕구에 의해 한국으로 들어왔다. 학자들에 의해 한글로 번역된 연도는 신자들 사이에 전파되었으며, 한국인 사제에 의해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보급되고, 현재까지 상가(喪家)에서 불리는 전통선율의 연도로 정착하게 된다.
<ol>
 	<li><b> </b><b>『</b><b>텬쥬셩교례규</b><b>』</b></li>
</ol>
<b>2.1. </b><b>『</b><b>텬쥬셩교례규</b><b>』</b><b>의 기원</b>

조선 교회는 기도서인 『텬쥬셩교공과』에 이어 상장 예식서인 『텬쥬셩교례규』를 발간하였다. 당시 조선 사회는 중국처럼 상장례가 아주 중요한 통과의례였다. 그런데 유교와 불교, 무교 등이 뒤섞여 있는 당시 조선의 상장 관습에서 천주교 신자가 천주교의 정신과 형식대로 상장례를 거행하기 위해서는 기도문뿐 아니라, 예절의 형식과 내용을 합당하게 구현할 수 있는 예식서가 필요하였다.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주교(1818-1866)가 황석두 회장 등의 도움을 받아 늦어도 1859년에 『텬쥬셩교례규』의 초고를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텬쥬셩교례규』는 1865년에 서울에서 1책 2권(상·하)의 목판본으로 발간되었다. 『텬쥬셩교례규』를 편찬할 때 주요 전거(典據)로 삼은 예식서는 중국 교회가 발간한 한문본 『셩교례규』이다. 이 예식서는 조선 시대에 남인 실학자뿐 아니라,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통해서도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 교회는 모든 교우들의 상장례를 사제가 일일이 집전할 형편이 못 되었다. 따라서 평신도만으로 거행할 수 있는 기도문과 예식서가 절실하였다. 또한 당시 조선의 사회 환경과 정서를 고려하면서도 교회 정신에 어긋나지 않는 형식과 내용이 분명히 드러나고, 학식이 별로 없더라도 신앙심이 투철하고 기초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신자라면 어렵지 않게 거행할 수 있는 예식서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상장례를 치르면서 바쳐야 할 각종 기도문뿐 아니라, 임종부터 하관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절차와 형식, 의미와 자세까지 순서대로 자세하게 수록하여야 했다.

<b>2.2. </b><b>『</b><b>텬쥬셩교례규</b><b>』</b><b>의 구성과 연옥도문</b>

<b>1) </b><b>『</b><b>텬쥬셩교례규</b><b>』</b><b>의 구성 </b>

『텬쥬셩교례규』는 1책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은 임종할 때까지 필요한 준비 사항과 기도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선종을 돕는 공부를 시작으로 제1권에 수록된 목록은 다음과 같다.

① 선종(善終)을 돕는 공부

② 임종하는 이를 돕는 규식(規式)

③ 병자를 제성(提醒)하는 규식: 통회(痛悔), 신덕, 망덕, 애덕, 경덕, 봉헌, 인내, 순명, 죽기 원함을 권함이라, 고상을 향하여, 성모를 향하여, 천신(天神)을 향하여, 성인을 향하여

④ 임종경: 병자 임종 때에 감사하여 도우심을 구하는 경, 임종도문(臨終禱文), 영혼이 장차 육신을 떠나려 할 때 이 아랫 경을 외라, 축문(祝文)(네 가지), 이 아랫 경을 병자가 친히 외우거나 돕는 자가 대신하여 외우거나 하라. 임종하는 이에게 가장 유익한 경문(經文), 축문(세 가지), 운명할 때에 영혼이 육신을 떠나거든 즉시 염하라, 종후 축문(終後祝文).

제2권은 임종하고 나서 하관할 때까지 상장례를 거행하면서 지켜야 할 교회의 규칙을 23개 항목으로 정리한 상장규구를 시작으로 상장예절, 유동장사예절(幼童葬事禮節), 상례문답 등으로 짜여 있다.

① 상장규구(喪葬規矩)

② 상장예절(喪葬禮節)

- 초상(初喪): 시상(屍床)에 놓을 때, 성영(聖詠) 129(130)편, 성영 50(51)편, 연옥 도문과 축문, 시상에 놓은 후에, 연령을 돕는 찬미경

- 입렴(入殮)

- 출관(出官)

- 행상(行喪)

- 도묘(到墓)

- 하관(下官): 자가리야 성가

③ 유동장사예절

- 성영 112(113)편, 성영 118(119)편, 성영 23(24)편

- 발인(發靷): 성영 148편, 성영 149편, 성영 150편

- 어린 아해 죽은 후에 하는 찬미경

④ 상례문답

1권과 2권의 구성요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박명진이 쓴 『한국천주교회 상장례, 어제와 오늘』(77~150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에서는 초상(初喪)부분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b>2) </b><b>초상</b><b>(</b><b>初喪</b><b>)</b><b>에서 연옥도문 </b>

박해가 끝난 뒤에 상장례를 치를 때 교우들의 앉는 방향 때문에 마치 교우들이 시신(屍身)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보여 외교인들이 이에 대한 의구심을 표하였는데,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경향잡지』 1919년 7월호에 질문 해답을 통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즉 시신에 대한 것은 방이 넓으면 시신을 방 한가운데에 발쪽이 고상을 향하게 안치하고 기도하는 이들은 시신 좌우에 앉아서 고상을 향하여 기도하도록 하였다. 방이 좁아서 한쪽에 시신을 모시더라도 방향은 늘 고상을 향하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시신은 장례를 치를 때까지 안치한 장소뿐 아니라 성당이나 묘지에서 예절을 거행할 때도 늘 발 쪽이 고상을 향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제는 일반 신자들과는 반대편을 향하게 하였는데, 평소 성당에서 사제는 신자들을 향하였기 때문이다.

시신을 모시고 나서 함께 바쳐야 할 『텬쥬셩교례규』의 기도문은 성영 129(130)편과 50(51)편 그리고 연옥도문, 축문 등이다. 성영 129편과 50편은 오랫동안 교회의 상장례에서 바치던 시편들이다. 129편은 고통 가운데에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는 내용이며, 다윗의 참회 시편으로 알려진 50편은 지은 죄에 대한 참회를 가장 절절하게 그려 내고 있는 대표적인 시라 하겠다.

연옥도문은 연옥에 있는 이를 위하여 바치는 호칭 기도이다. 연옥도문의 내용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주님의 자비를 호소하는 자비송인 “천주여 망자를 긍련(矜憐)히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망자를 긍련히 여기소서. 천주여 망자를 긍련히 여기소서. 그리스도여 우리를 들으소서. 그리스도여 우리를 들어 허락하소서”. 그리고 삼위일체이신 성부, 성자, 성령을 향하여 망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청하는 “망자를 긍련히 여기소서”를 계응송으로 나누어 바친다. 이어 성모 마리아와 여러 성인들에게 “망자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며 전구를 청한다. 연옥도문이 모든 성인들의 호칭 기도와 가장 다른 점은 자비와 전구의 대상이 우리가 아닌 망자(연령)라는 것이다.

둘째, 주님께 하휼(下恤)하시는 은택(恩澤)으로 망자를 관유(寬宥)하시기를 비는 것으로 시작하여 잠벌(暫罰)하는 옥(獄), 연옥불의 맹렬함, 이미 지은 죄의 더러움, 주님을 떠난 괴로움 등에서 망자를 구해주시기를 간구하고, 이러한 탄원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으로 강생하셔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과 심판 등 주님의 구세 업적에 힘입어 이루어지기를 빈다. 그런데 이 둘째 부분에는 모든 성인들의 호칭 기도에 있는 우리를 모든 흉악, 환난, 질병 등에서 구해주시기를 탄원하는 내용이 없다. 연옥도문은 죽은 이를 위한 탄원이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천주 성자께 주님 앞에서 모두 죄인임을 고백하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어 망자를 구하시도록 청원한다. 그런데 연옥도문에는 모든 성인들의 호칭 기도에 등장하는 주님께서 성교회를 다스리시며 보존하시기를 구하여 주시기를 탄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성직자의 보존, 성교회의 모든 원수에 대한 굴복, 그리스도인 위정자들의 참된 평화와 진실한 화목, 우리 자신· 우리 은인· 풍년· 죽은 모든 이의 영원한 안식, 우리의 소망 등과 같은 청원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이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천주의 고양(羔羊)이신 주님께 평안함을 망자에게 주시기를 간구하고, 이어 “그리스도여 우리를 들으소서”와 “그리스도여 우리를 들어 허락하소서” 그리고 “천주여 망자를 긍련히 여기소서”와 “그리스도여 망자를 긍련히 여기소서. 천주여 망자를 긍련히 여기소서”라고 한다. 주님의 기도인 “하늘에 계신(운운 묵념하다가)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흉악에 구하소서”에 이어 “주여 내 빎을 들어 허락하소서”와 “또한 부르짖음이 네게 사무쳐지이다”를 계응송으로 바치면서 연옥도문을 마무리한다.

한문본 『성교례규』에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는 연옥도문이 『텬쥬셩교례규』보다 먼저 발간된 『텬쥬셩교공과』에 실려 있다. 그리고 『성교례규』에 기도문이 수록되어 있지 않은 연령을 돕는 찬미경은 『텬쥬셩교공과』의 연옥도문에 있는 것으로서, 파리외방전교회 모예 신부가 저술한 중국 교회의 한문 기도서 『천주경과』의 ‘위신망송’(爲新亡誦)을 연령을 돕는 찬미경으로 번역하여 수록한 것이다.

<b>2.3. </b><b>『</b><b>텬쥬성교례규</b><b>』</b><b>의 기여와 문제점</b>

<b>1) </b><b>『</b><b>텬쥬성교례규</b><b>』</b><b>의 기여</b>

『텬쥬성교례규』가 한국교회에 가장 크게 기여한 점은 하느님 중심 신앙으로 상장례를 치를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천주교보다 먼저 우리나라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던 무교, 유교, 불교 등의 종교들에서 볼 수 없었던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과 희망을 드러내는 새로운 인생관과 신앙을 상장례의 모든 과정을 통해 분명히 고백하게 하였다. 그리고 상장례에 참석하는 유족과 교우들은 무엇보다 죽은 이의 귀중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노력을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가장 큰 사랑으로 알고 적극 실천하게 하였다. 또한 교우의 시신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지체”(1코린 6,15), “성령의 성전”(1코린 6,19)이라는 것을 믿었으므로 특별히 소중하게 다루게 하였다.

『텬쥬성교례규』는 비복음적이고 반교회적일 뿐만 아니라 미신적인 요소까지 포함되어 있던 이교의 장례가 판치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에게 교회 정신으로 장례를 거행할 수 있게 하는 확고부동한 길잡이가 되었다.

<b>2) </b><b>『</b><b>텬쥬성교례규</b><b>』</b><b>의 한계</b>

『텬쥬성교례규』가 당시 조선사회에서 천주교인들이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상장례를 치루도록 하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는 가치가 크지만, 그 유래나 시대적 상황, 그리고 당시 유럽교회의 신앙과 신심의 경향 등에서 오는 한계가 분명히 있음은 어쩔 수 없다.

『텬쥬성교례규』가 중국의 한문본 『성교례규』에서 유래했음을 생각할 때, 최윤환 몬시뇰이 「한국 공과의 내용비판과 쇄신전망」에서 지적한 사항은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중국 공과(功課)들이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서양 선교사들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감안 할 때 우리는 이 선교사들이 산 바로 그 정신세계, 즉 17-19세기의 정신적 및 종교 상황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의 신심은 중세기의 유산을 물려받아 바로코 시대를 거쳐 발전시키고 계몽주의 시대에까지 전개된 것이다. 전 중세기를 통하여 기도생활과 신심생활의 배경을 이루고 있던 그리스도의 상(像)은 수난의 그리스도 상이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최창덕 신부는 「새 상장 예식에 수록된 위령 기도(연도)에 대한 전례 신학적 반성과 실천의 문제점」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설명한다. “두 기도서(성교공과와 성교예규)가 표현하는 신학은 전형적인 중세의 죽음과 심판에 대한 이해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곧 죽음은 더 이상 새로운 삶의 단계로 건너감이나 주님께서 계시는 본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주님 심판 앞에 등장함이며 혹독한 저 세상 단련의 시기가 시작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로 인하여 장례 전례의 파스카적 특성은 뒤로 물러나고 속죄와 보속 그리고 하느님의 엄한 심판과 하느님의 의노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전면에 등장하여 장례 전례의 성격을 지배하였다. 이 같은 강조점에는 연옥교리에 대한 교의사적 발전이 큰 역할을 하였다. 위령 부속가인 ‘Dies irae’(의노의 날)와 사도예절 때 부르는 ‘Libera me’(저를 구하소서)는 대표적인 세상 심판에 대한 노래이다. 무서운 하느님의 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묘사한 이 내용이 표현을 달리하여 성교예규의 출관 때 낭송된다. 임종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의 관점은 악마의 위협과 연옥에 대한 두려움에 방향을 두고 있다”.
<ol>
 	<li><b> </b><b>『</b><b>상장 예식</b><b>』</b></li>
</ol>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당신 아들을 보내 주셨음을 고백하는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를 개막하며 요한 23세는 “오늘날 사람들이 겪고 있는 온갖 고뇌에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사목적 관심을 밝혔다. 그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현대화’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형성하는 ‘전통 유지’라는 상반되는 것 같지만 상호보완을 해 주는 방향성을 기본으로 하여 교회를 쇄신시키는 노력을 하였고, 그 첫 결실로 「전례 헌장」이 나오게 되었다. 전례헌장 81항에서는 장례식의 개정에 관해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장례식은 그리스도인 죽음의 파스카 성격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야 하며, 각 지역의 환경과 전통에, 또한 전례 색상에 관한 것에도, 더 잘 부응하여야 한다”.

이 ‘파스카 성격’과 ‘각 지역의 환경과 전통’에 부합하는 개정된 『장례 예식』 라틴어 표준판이 1969년에 발행되었고, 이에 대한 한국어본은 1976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그리고 2008년 『로마미사경본』 세번째 표준판에 따른 한국어본 『장례 예식』을 2018년에 발간했다.

한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하고 변화된 장례 현실을 반영한 내용으로 대폭 개정한 『주일미사』(각종 기도문 합본)와, 이 기도서를 수정· 보완한 『가톨릭 기도서』를 1968년부터 계속 발간하였으나, 『텬쥬성교례규』는 1980년대까지 다른 기도서나 예절서와는 달리 새로 개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장례 예절서에 대한 교우들의 수요가 줄어들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텬쥬성교례규』의 기도문에 띄어쓰기를 하고 문장부호를 첨부하는 한편, 어렵고 낯선 한문 낱말들을 현대적으로 바꾸는 정도로 소폭 수정한 『성교예규』를 가톨릭출판사가 1990년 12월30일 현재 62판까지 계속 발간했다. 그리고 2003년에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상장예식』을 내놓았다.

<b>3.1. </b><b>『</b><b>사목회의 의안 </b><b>4 </b><b>전례</b><b>』</b>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전국 사목회의를 1981년부터 1984년까지 개최하였다. 한국천주교 역사상 처음으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 모여 12개 소위원회별로 한국 교회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들을 주제별로 체계화하였고, 그 중 하나가 『사목회의 의안 4 전례』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이 의안 가운데 제3장 제3절이 상제례(喪祭禮)로,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상제례

가. 교회의 가르침(144-145)

나. 일반 지침(146-149)

다. 세부 지침(150-167)
<ol>
 	<li>상제례 예식서</li>
</ol>
가. 일반 지침(168-171)

나. 세부 지침(172-182)
<ol>
 	<li>위령 기도</li>
</ol>
가. 일반 지침(183-185)

나. 세부 지침(186-187)

여기에서 장례에 대한 기본 시각은 다음의 제144항에서 잘 드러난다.

“교회는 상례 예식을 통하여 죽은 이를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파스카의 신비와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길러 주며, 자모(慈母)이신 교회의 사랑과 신앙의 위안을 제공하여 유족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며 동시에 참석자들이 삶과 죽음의 신비를 깊이 묵상하게 함으로써 진실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준다.”

<b>3.2. </b><b>서울대교구 </b><b>『</b><b>성교예규</b><b>』</b>

공식적인 전례서인 『장례 예식』은 주로 사제가 집전하는 장례 미사와 고별식에서 사용되고, 다른 부분에서는 평신도가 중심이 되는 『텬쥬성교례규』로 거행되고 있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다른 기도서나 예식서들은 공의회 정신에 맞게 개정되어 새로 발간되었으나, 『텬쥬성교례규』는 바뀐 시대 환경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 등 새로운 신학적 흐름이 전혀 반영되지 못한 채 이전 내용 그대로 1990년 12월 30일 현재62판까지 발행되고 있었다.

서울대교구가 가톨릭사회복지회가 1986년에 발행한 『선종 봉사 예식서』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느 정도 노력했으나, 본격적인 노력의 결실은 1990년대에 들어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서울대교구 전례위원회가 가톨릭교회의 공식 전례서인 『장례 예식』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사목연구소 상제례토착화연구특별위원회가 만든 「상제례 예식서 시안」 등을 참조하여 1991년 11월 2일에 발간한 서울대교구 『성교예규』 초판이 이에 해당된다.

『텬쥬성교례규』의 성영들은 한문본을 중역(重譯)한 것이어서 히브리어 성경의 내용과 다른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서울대교구 『성교예규』에 수록된 시편들은 히브리어 성경에 가깝게 번역되어 정확한 내용으로 전달되는 데다 현대적인 언어와 시의 특징이 드러나는 최민순 신부의 번역본으로 대체하여 우리말의 운율을 제대로 살리고 있다. 나머지 기도문과 해설도 쉬운 오늘날의 낱말과 문장으로 교체되어 내용이 전달되는 데 큰 문제가 없다. 또한 평신도들만으로 상장례를 진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던 『텬쥬성교례규』와 달리 사제도 모든 상장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편찬되었고, 장례 미사와 고별식을 수록하여 달라진 교회 여건이 충실히 반영되었다. 부록 1에 실린 성교예규 ‘상장 예식’부분의 악보는 김득수 회장(당시, 평협 노인분과 위원장)이 채보를 해 주었고, 특히 ‘입관’ 묘지에서 ‘하관’ 부분은 기존의 연도 곡에 맞추어 새롭게 만들었다고 한다.

<b>3.3. </b><b>『</b><b>상장예식</b><b>』</b>

200주년 사목회의 의안의 제안을 실행하기 위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는 1987년 한국사목연구소를 설립하여 토착화를 중심으로 제1차 학술회(1987년 3월)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후반기에 세 차례의 걸친 전례 토착화 연구 발표회를 열었고, 여기에서 최기복 신부의 「상제례 예식서 시안」이 발표되고 이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그리고 한국사목연구소는 「상제례 예식서 시안」이 그 자체로 큰 성과가 있다고 여겨 이 시안에 대해 검토하고 보완하여 실제적인 적용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 상제례토착화연구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가 설립된 1989년 5월 29일부터 1993년 12월까지 총 23차례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에서 보고된 김종수 신부의 연구 자료들을 바탕으로 「가톨릭 상제례 토착화 시안」을 마련하여 1994년 1월 25일에 발표하였다. 이 시안에게 크게 주목되는 점은 세 가지 원칙이다. ① 상제례의 중요성, ② 현행 예식서의 문제점, ③편찬 원칙.

여기서 ③ 편찬원칙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정신에 따라 우리 민족의 상제례의 문화 전통을 시대에 맞게 수용하여 살려 나가도록 한다.

둘째, 한국인이면 누구나 공감하고 함께 기도하며 의식에 동참할 수 있도록 쉽고도 편리하게 만든다.

셋째, 사별(死別)의 상처로 아파하는 유족의 심리를 충분히 고려하여 작성한다.

넷째, 대상과 상황에 따라 적절히 취사선택할 수 있도록 기도문, 성경, 시편, 한국의 가사와 노래 등을 다양하게 수록하며 우리의 고유한 상징적 의례를 수용한다.

다섯째, 한국 교회의 사목적 필요성을 고려하여 평신도도 쉽게 집전할 수 있도록 하며 임종을 돕는 예식, 장례 예식, 제례 예식을 한 책에 수록한다.

여섯째, 『장례 예식』, 『병자성사예식』을 바탕으로 하되, 한국 천주교회가 지금까지 사용해 온 『성교예규』, 『선종 봉사 예식서』와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 의안 4 전례』를 참고한다.

2003년 3월 10일에 가톨릭출판사를 통해 『상장 예식』 초판을 발간함으로써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한 한국 교회의 정식 상장례 예식서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2006년 11월 15일에 발간된 포켓용 제2판에서 그동안 공동번역 『성서』의 성구가 사용되던 독서와 복음이 새번역 『성경』의 구절로 교체되었다.

『상장 예식』은 운명하기 직전부터 면례에 이르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상장 예식의 각 단계마다 거행되는 다양한 예식에 필요한 형식과 기도문이 수록되어 있는 예식서이다. 그리고 각 단계마다 포함하고 있는 정신과 의의, 준비와 실행 방법, 주의 사항 등에 대해 간략하지만 적절한 해설까지 수록되어 있다. 『상장 예식』은 총 6장으로 펴내는 말씀, 일러두기, 제1장 임종과 운명, 제2장 위령기도 1과 2(짧은 위령기도), 제3장 염습과 입관, 제4장 장례, 제5장 우제(虞祭), 제6장 면례(緬禮), 성가로 구성되어 있다.

<b>나가는 글</b>

부모에 대해 효도하는 것은 어느 종교이든 문화이든 강조하는 기본적인 윤리이다. 조선의 양반 사회에서 유교식 상장례가 대세를 이루는 상황에서 천주교인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유교식 제사를 드리지 않음으로써 사회적, 정치적 박해를 받고 순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의 주제는 순교가 아니라 유교의 효도의 관점에서 바라본 상장례와 천주교의 하느님 흠숭과 연관된 부모 공경의 관점에서 바라본 상장례이다. 그래서 제1부에서는 유고의 상장례를 제2부에서는 연도를 고찰하였다.

제1부 “2. 조상 제례에 대한 천주교와 유교의 관점 비교”에서 최기복 신부가 제시한 내용은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유교와 천주교가 기본적으로 효도를 하는 목적과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참 생명의 창조주인 하느님에게만 제사를 드려야 하는 천주교와 천(天)과 더불어 부모도 생명의 근본이기에 먼 근본인 천(天)과 가까운 근본인 부모에게 다 제사를 드림이 당연하다고 보는 유교, 산 이와 죽은 이의 통교가 하느님을 통해서 하는 천주교와 달리 유교는 산 이의 지극한 정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 그리고 신령이 와서 음식을 먹는다는 흠향과 강복에 대한 견해 차이, 신주(神主)에 신령이 빙하여 신령한 물건으로 이해하여 미신적인 요소로 보는 천주교와 신령의 빙의처로서의 기능도 인정하나, 이 보다는 자손의 애련한 마음의 의지처로서의 상징적 신상(神像)으로 보는 유교는 확실히 다르다.

한국천주교회는 유교와는 여러모로 다른 관점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던 제례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지침을 마련하여 그 의미와 필요성을 밝히고 있다. 주교회의 2012년 춘계 정기총회에서 승인한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예식」은 한국 천주교 제례의 의미를 이렇게 말했다.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는 ‘제사의 근본 정신은 선조에게 효를 실천하고, 생명의 존엄성과 뿌리 의식을 깊이 인식하며 선조의 유지에 따라 진실된 삶을 살아가고 가족 공동체의 화목과 유대를 이루게 하는 데 있다. 한국 주교회의는 이러한 정신을 이해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제례를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한 사도좌의 결정을 재확인한다.’(제134조 1항)고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허락한 제례는 유교식 조상 제사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성과 추모의 전통 문화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한 예식이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 제례의 의미가 조상 숭배의 개념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제례 용어에 있어서 신중하게 사용함을 강조했다. “기일 제사와 명절 차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제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신위(神位), 신주(神主), 위패(位牌), 지방(紙榜)이라는 유교식 제례 용어는 조상 숭배의 의미를 연상시킬 소지가 있어, ”조상(고인)의 이름“, ”조상(고인)의 사진“등의 용어로 대치하였다”.

한국이라는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널리 퍼뜨리고 잘 스며들게 하기 위해서 토착화의 노력은 계속해서 이어져야 할 것이다.

<b>『</b><b>참고문헌</b><b>』</b>

<b>〈</b><b>단행본</b><b>〉</b>

『Dizionari Piemme Liturgia』, Piemme, 21993.

『텬쥬셩교공과: 영인본』1권, 한국교회사연구자료 제2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강영애, 『한국천주교 상장례 노래, ‘연도’』, 민속원, 2007.

권오돈 역해, 『禮記』, 홍신출판사, 1991.

박명진, 『한국 천주교회 상장례, 어제와 오늘』, 가톨릭출판사, 2016.

샤를르 달레 저, 안경렬·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서울대교구 전례위원회 엮음, 『성교예규』, 가톨릭출판사, 1991.

성동호 역해, 『孝經』, 홍신출판사, 1988.

이기석· 한백우 역해, 『論語』, 홍신출판사, 1991.

이기석· 한용우 역해, 『孟子』, 홍신출판사, 1991.

이기석· 한용우, 『大學· 中庸』, 홍신문화사, 1991.

자크르고프 저, 최애리 역, 『연옥의 탄생』, 문학과 지성사, 1995.

정하상 지음, 윤민구 번역, 『상재상서(上宰上書)』, 성황석두루가서원, 1999.

하인리히 덴칭거,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 선언 편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17.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가톨릭교회 교리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2008.

__________________, 『상장 예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3.

__________________,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2002.

<b>〈</b><b>잡지와 사전</b><b>〉</b>

이완희, “전례사적 맥락에서 살펴본 장례 예식의 본질적 의미”, 『사목』 274호(2001/1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6-31쪽.

_____, “위령기도”, 『한국가톨릭대사전』 9(서울: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6722-6724쪽.

전대섭, 「연도의 모든 것: 위령성월 기획」, 『가톨릭新聞』(1995.11.19.), 13면.

최기복, “敎皇廳의 宣敎政策과 東洋祭禮의 榮辱”, 『가톨릭사상』 4집(1991/4), 139-187쪽.

_____, “유교 상제례의 구조와 의미”, 『상제례 토착화 특별 세미나』, 1992, 76-121쪽.

최윤환, “한국 功課의 內容批判과 刷新展望”, 『가톨릭대학신학부논문집』 제8집, 가톨릭대학신학부, 1982, 1-30쪽.

최창덕, “새 상장 예식에 수록된 위령 기도(연도)에 대한 전례 신학적 반성과 실천의 문제점”, 『가톨릭사상』 46(2013 전기), 3-35쪽.

<b>Ⅱ</b><b>. </b><b>연도</b><b>煉禱 </b><b>-</b><b>한국 천주교 상장례 문화와 음악</b><b>-</b>

주은경(음악학)
<table>
<tbody>
<tr>
<td>1.들어가는 말

2.1) 연도(煉禱)의 개념과 연행(演行)

2) 연도(煉禱)의 형성과 초기 정착

3) 장례예식서의 변천과 토착화

4) 『성교예규』(1992)와 『상장예식』(2003) 연도(煉禱)의 음악적 연구

5) 연도(煉禱)의 지역 사례-부산지역의 천주교 장례노래 연도(煉禱)

6) 장례미사의 장례음악 연구

7) 천주교 연도(煉禱)와 한국의 전통 상장례 문화

3.나가는 말</td>
</tr>
</tbody>
</table>
<ol>
 	<li><b> </b><b>들어가는 말 </b></li>
</ol>
한국 천주교회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바치는 위령기도 즉 죽음의례 연도(煉禱)가 있다. 초상이 나면 ‘연도 났다’고 했으며 ‘문상(問喪)가자’는 뜻으로 ‘연도하러 가자’는 말로 대신했다. 이것은 어진 마음으로 죽은 이를 귀중히 여기는 정(情)을 표현함이며 우리의 전통풍습인 예(禮)의 바탕 안에서 치르는 마지막 통과의례이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lt;가톨릭 영상 교리 29 교회의 장례와 제례&gt;</td>
</tr>
</tbody>
</table>
연도는 초기의 천주교가 한국에 전래 된 이후 구전으로 전승되어 장례의 장에서 불려졌다. 장례예식의 모든 절차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으로 불려지며, 특히 문상갔을 때 빈소가 차려진 장례식장에서 연도를 한다. 죽은 이를 위해 기도 할려는 의사만 있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공동체 문화를 형성한다. 이러한 연도는 어떠한 음악적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떻게 불려지고 있는가? 연구자는 연도선율을 화두로 잡아 천주교 장례노래 연도와 상장례 문화를 연도(煉禱)의 개념과 연행(演行), 연도(煉禱)의 형성과 초기 정착, 장례예식서의 변천과 토착화, 『성교예규』(1992)와 『상장예식』(2003) 연도(煉禱)의 음악적 연구, 연도(煉禱)의 지역 사례-부산지역의 천주교 장례노래 연도(煉禱), 장례미사의 장례음악 연구, 천주교 연도(煉禱)와 한국의 전통 상장례 문화로 나누어 서술하고자 한다.

<b>2.</b><b>연도</b>

<b>2.1. </b><b>연도</b><b>(</b><b>煉禱</b><b>)</b><b>)</b><b>의 개념과 연행</b><b>(</b><b>演行</b><b>)</b>

연도는 죽은 이의 죄의 용서와 안식을 빌어 주며, 정화를 통해 구원되며 죽은 이와 산 이의 통공을 의미하는 기도이다. 교리에 의하면 연도는 죽음의 세계인 천국, 연옥, 지옥 중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12세기 중세에 탄생한 연옥은 서양의 봉건체계 구조와 사회의 논리적 체계와 정신적 요구들을 반영하였다. 연옥을 표현하는 이미지인 ‘중간적 사고’, ‘형벌의 이미지 불’, ‘생사간의 연대성’, ‘단테 󰡔신곡󰡕의 연옥’, 󰡔요리강령要理綱領󰡕의 연옥을 통해 특징을 기술하고자 한다. 『요리강령(要理綱領)』은 한국 천주교 그림교과서로 68폭의 그림과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1910년 한기근 신부(韓基根 바오로, 1868-1939)에 의해 번역하고 뮈텔 민주교가 감준하여 발행되었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r>
<td>&lt;그림 1&gt;『요리강령(要理綱領)』-17 종도신경</td>
<td>&lt;그림 2&gt;『요리강령(要理綱領)』의 연옥에 관한 그림</td>
</tr>
<tr>
<td colspan="2">제 9절-모든 성인의 서로 통공을 믿으며/상본풀림</td>
</tr>
</tbody>
</table>
『요리강령(要理綱領)』의 “요리강령(要理綱領)-17 종도신경 제 9절-모든 성인의 서로 통공을 믿으며 /상본풀림” 부분에 연옥에 대한 그림과 해설이 소개되어 있다. 연옥에 대한 내용을 발췌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종도신경 제 九절(속)
<ol>
 	<li>三. 모든 성인이라 함은 천당과 <u><b>연옥</b></u>에 계신 성인들을 가리킬뿐 아니라 또한 세상 교우들을 가리킴이니 대저 교우들이 이미 성세를 받고 성덕에로 나아가는 연고니라</li>
 	<li>八. 단련지회(鍛煉之會)는 <u><b>연옥</b></u>에 있는 성교회이니 죄 보속하는 회니라</li>
 	<li>九. <u><b>연옥</b></u>은 의인의 영혼이 세상에서 죄보속을 못하였으면 천당에 들어가기 전에 얼마동안 괴로움울 받는 옥이니라</li>
</ol>
十. 성총지위에 죽은 의인이라도 소죄나 혹 잠벌을 다 보속치 못하였으면 <u><b>연옥</b></u>에 가느니라

十一. <u><b>연옥</b></u>은 신덕도리요 또 성경에 실린 오주 예수의 말씀을 상고하면 가히 <u><b>연옥</b></u>이 있음을 알찌니 예수 이르시되「성신을 거스린 죄는 금세와 후세에 도무지 사 하지 못한다」하셨은즉 다른 죄는 금세에서도 사 하고 혹 후세에서도 사람이 분명 한지라 그러나 후세를 말할진대 천당에는 미죄라도 들어가지 못하니 사하지 못할것이요 또 지옥에는 도무지 죄 사하는 법이 없은즉 필경 <u><b>연옥</b></u>에서 사함이 의심없느니라.

十三. 신전지회와 단련지회가 서로 통공하느니 우리는 연령을 위하여 미사와 기구를 드려주고 연령은 우리를 위하여 천주께 전구하시니라.

十四. 우리가 연미사와 은사와 연도와 및 각가지 신공으로서 연령을 도와 줄만 하니라.

十五. 신천지회에서 서로 통공하는 몫은 다 같지 아니 하여 공로대로 어떤이는 많이 받고 어떤이는 적게 받는니라

연옥그림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본풀림

十九. 이 상본은 천당의 천신 성인과 세상의 교우와 <u><b>연옥</b></u>의 영혼들이 다한가지로 통공하는 형상이니라

二十. 위에는 천신 성인들이 세상교우들을 위하여 전구하는 형상이요

二十一. 중간에는 교우들이 연령을 위하여 천주께 미사를 드리려 천당 성인께도 기구하는 형상이요

二十二. 아래는 연령들이 불가운데서 죄보속을 하는데 천신들이 제대 좌우편에 서 미사성제의 공로를 연령들에게 펴내리는 형상이니라.

단련지회(鍛煉之會)는 연옥교회의 다른 표현으로 세상에서 소죄(小罪)나 잠벌(暫罰)을 다 보속하지 못하였으면 천당에 들어가기 전에 얼마 동안 괴로움을 받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신전지회(神戰之會)와 단련지회(鍛煉之會)가 서로 통공하느니”에서 신전지회(神戰之會)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신자들의 집단을 의미하며 연옥교회와 서로 친교하여 공로를 나눈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연령을 위하여 미사와 기구를 드려주고 연령은 우리를 위하여 천주께 간접적으로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연옥의 존재에 대해서는 초기 교회의 여러 신학자들이 언급했으나, 이를 정교화한 것은 중세의 제2차 리옹 공의회와 종교개혁시대의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였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연옥에 대한 교령Decretum de purgatorio”에서 “연옥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 영혼들은 살아있는 신자들의 대리기도, 특히 거룩한 미사에 의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으로 연옥 교리가 확정됨을 선포하였다. 오늘날의 연옥에 대한 그리스도교 사상은 동방교부들의 정신을 바탕으로 형벌과 고통을 주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영혼을 정화하는 사랑의 의미로 파악된다.

󰡔상장예식󰡕(2003)의 장례예식에 따른 연도의 연행은 예식과 시편 내용 그리고 음악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상관되어 있는지 기술하였다. 입관은 죽은 사람을 마지막으로 보는 예식으로 유가족들의 슬픔이 울음으로 북받치는 상황이다. 이러한 울음의 상황을 고려하여 밀어 올리는 소리의 시김새를 표현하지 않았으며 느리고 간절하게 부른다. 출관·운구·면례는 하느님께로 가는 마음을 기쁨과 희망으로 표현하기 위해 중간종지와 e음보다 3도 높은 g음을 사용하여 힘차고 우렁차게 노래한다. 하관은 전통상장례의 달구소리를 높은 g음으로 정하여 &lt;즈가리야의 노래&gt;에서 희망과 기쁨으로 표현하였다. 즉, 출관·운구·면례·하관 때 부르는 연도는 이전에 조상들의 눈물․설움․북받침의 한풀이로 슬프게 불러졌던 정서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드러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강조한다. 화장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공포 후 수용되었으며 &lt;욥의기도&gt; 가사에 ‘내 뼈가 부서지듯이’의 감정으로 노래한다. 우제·면례는 전통상장례의 장례예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토착화하였다.

초상집에서 하는 밤샘 기도 형태의 연도는 운명 후 빈소가 마련되면 죽은 이를 위해 교회 공동체가 예를 표하고 공동의 기도를 바친다. 특히 연도와 장례봉사를 하는 단체인 연도회는 팀을 이루어 죽은 사람과 그의 가족들을 위해 빈소를 지키며, 밤샘 기도로 연도를 한다. 󰡔상장예식󰡕 제2장 위령기도(연도)의 예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상하는 신자들은 애도의 뜻으로 소박하고 정중한 복장을 하여 예의를 갖춘다. 상가에 도착하면 빈소에 가서 성수를 뿌리고 분향한다.

둘째, 영정에 절한 다음(또는 적당한 다른 예의를 표한 다음), 상주에게 절을 하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만일 여러 사람이 함께 문상을 갔으면 대표 한 사람만 나가서 예를 표한다.

셋째, 신자들은 다른 문상객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알맞은 자리에서 고인을 위하여 기도한다. 먼저, 시작성호 및 인사말과 독서를 하며 죄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세 편의 &lt;시편 62(63),2-8&gt;, &lt;시편 129(130)&gt;, &lt;시편 50(51),3-21&gt;을 한다. 세 편의 시편은 모두 탄원시편의 유형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도움을 청하고, 자기가 처한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하느님께 간청을 드린 다음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리라는 확신을 고백한다. &lt;시편 62(63),2-8&gt;은 넘치도록 베푸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생명의 샘이신 주님을 목말라 하는 영혼을 노래한 내용이다. 이 시편에는 “구성지게” 노래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도를 “구성지게” 부른다는 것은 남자들만의 목소리, 즉 남창으로 구성되어 낮은음으로 계와 응을 하면서 노래가 끊어지지 않게 부르라는 것을 의미한다. &lt;시편 129(130)&gt;은 절망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으니 나의 기도를 경청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lt;시편 50(51),3-21&gt;은 회개하는 죄인들의 근심과 열망을 긍휼이 여겨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와 은혜로 베풀어 달라는 내용이다.

시편 120(121)

성인들의 통공을 간구하는 &lt;성인호칭기도&gt;를 하며 일반문상객의 기도, 자녀의 기도, 친구의 기도를 한다. &lt;성인호칭기도&gt;는 성모마리아․예언자․천사․순교자․동정녀 등 여러 성인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이 하느님 앞에서 신자들을 위하여 빌어주기를 당부하는 기도이다.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을 부르면 “( )를(을) 위하여 빌으소서”로 대응창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사업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는 찬미와 간구를 바친다. 주님의 기도와 마침기도로 모든 예식을 마치면 신자들은 시신을 향하여 성수를 뿌리고,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이나 적절한 예를 표하고 빈소를 물러 나온다. 성수를 뿌리는 동안 신자들은 적절한 성가를 부른다.

<b>2.2. 2</b><b>장 연도</b><b>(</b><b>煉禱</b><b>)</b><b>의 형성과 초기 정착</b>

중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선교는 조상제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선교단체들의 의례논쟁이 일어난다. 조상제사를 문화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우상숭배와 미신으로 간주하느냐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중국의 의례논쟁은 조상제사의 허용과 금지의 반복과정을 거쳐 제사금령의 칙서로 중국에서 40여 년간 지속 되었다. 중국에서 전해진 초기의 한국 천주교회는 1742년 발표된 중국에서의 제사금령이 한국의 전통사회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제사금령은 한국의 전통상장례와 많은 갈등을 일으켰으며 결국 천주교 신자들은 전통상장례를 포기하고 다른 적합한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인륜에 해당하는 상례를 새로운 의식으로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조상에 대한 효를 실천하고 천주교의 죽음에 대한 교리도 표현할 수 있는 의례 즉, 연도가 형성되었다. 기도서 󰡔천주성교일과󰡕(天主聖敎日課)와 󰡔수진일과󰡕(袖珍日課) 그리고 신유박해 때 포도청이나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은 신자들의 진술내용과 판결문 등을 모아 편찬된 󰡔사학징의󰡕(邪學徵義)의 &lt;요화사서소화기(附妖畫邪書燒火記)&gt;의 문헌을 통해 연도와 장례예식이 실제로 천주교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실천되어 정착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문헌의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신자들이 연도를 실천했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b>2.3. </b><b>장례예식서의 변천과 토착화</b>

연도와 장례예식의 변천을 살펴보기 위해 출판된 연도순으로 일곱 개의 장례예식서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중 1865년 출간된 󰡔천주성교예규󰡕는 최초의 한국 천주교 장례예식서로 공식 기도서와는 달리 장사예절만이 수록되어 있어 역사적 자료로 의미 있는 장례예식서이다. 2권의 내용 중 &lt;상장규구&gt;, &lt;상장예절&gt;, &lt;상장예절&gt;에서 구체적인 장례예절을 기술하고자 한다.

&lt;상장규구&gt;는 상사喪事를 성교회의 규범대로 할 것을 모두 23항으로 규정하고 있다. 다음은 연도와 관계되는 항목을 발췌하여 정리한 내용이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천주성교예규』 제2권 상장규구와 성영 1129</td>
</tr>
</tbody>
</table>
11항 교회의 장사를 만나매 마땅히 교우로 하여금 관을 메게 하여 송경하기에 편케 할 것이요. <u>길에서 너무 급히 행하고 들레지 말지니</u><u>, </u><u>만일 긴급한 일이 있으면 낮은 소리로 알게 하여서 차례를 잃게 하지 말 것이요</u><u>. </u><u>마땅히 마음을 고요히 하고 거동을 진중히 하여 메고</u> 가는 시체는 이 오주 예수의 지체이요 성신의 궁전이었음을 깊이 생각할 것이니라.

13항 <u>장사를 다 지낸 후라도 자식이 효도를 다한 줄로 생각치 말고</u><u>, </u><u>마땅히 평생에 죽은 부모를 생각하며 정성으로 기도하여 항상 그 영혼 돕기를 힘쓸지니</u><u>, </u><u>기도하는 공부는 날마다 행할 것이나</u>, 특별히 성교회에서 정하신 날에 행하면 더욱 죽은 이의 영혼에 유익하리라. 이 날은 곧 죽은 후 제三일, 제七일, 제 三十일과 주년이니라.

14항 교우 죽으매 반드시 속히 각처 교우에게 통부를 전하여 써 교우들이 알고 죽은 이의 영혼을 돕게 할 것이니, 이 통부를 받은 후에 교우들이 마땅히 만과할 때에 천주경 성모경 각 한번을 외대, 죽은 이의 분수를 의거하여 정한 날수를 아래와 같이 함이 마땅하니라.

15항 친척붕우은인의 멀고 가까움을 따라 기한을 헤 마련하여 본분을 폐하지 말지니, <u>교종을 위하여는 </u><u>一</u><u>년이요</u><u>, </u><u>본 지방 주교</u>를 위하여는 아홉 달이요, 본 지방 신부를 위하여는 여<u>섯 달이요</u><u>, </u><u>이웃 지방 신부를 위하여는 석 달이요</u><u>, </u><u>본 지방 회장을 위하여는 한 달이요</u><u>, </u><u>다른 교우를 위하여는 이레니라</u>. 만일 통부 여럿을 한가지로 받으면 경을 여러번 욀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하여 한번만 외움이 가하니라.

관은 연도를 노래할 수 있는 천주교 신자가 메게 하고, 특히 장례행렬 때 상여를 멘 상두꾼들은 너무 급하게 행렬하지 말고 연도노래에 맞추어 행렬하며 연도 부르는 방법인 계와 응의 차례를 놓치지 말라는 내용이다. 장례예식을 다 치르고 난 뒤에도 평생동안 죽은 부모를 위해 연도를 하고 특별히 교회에서 정한 날인 3일·7일·30일·1년에 연도를 하면 죽은 영혼에 유익하다고 설명한다. 저녁에 하는 기도인 만과(晩課)를 할 때 죽은 이를 위해 천주경과 성모경을 한 번 기도하며 교종을 위해서는 일 년, 주교를 위해서는 아홉 달, 신부님을 위해서는 여섯 달, 이웃지방 신부님을 위해서는 석 달, 회장을 위해서는 한 달, 다른 교우를 위해서는 칠일을 기억하여 연도를 하라고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lt;상장예절&gt;은 장례예식의 모든 예절을 수록하고 있다. 연도를 부르는 방법은 초상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교우 죽으매 염하기 전에 마땅한 곳에 시상을 예비하고, 그 위에 백포를 깔고, 시체를 각각 처지대로 조찰하고 검소한 옷으로 입혀 그 위에 놓고, 나무 십자가를 두 손으로 가슴 위에 받들어 잡게 하거나, 혹 두 손을 십자 모양으로 가로 놓거나 하고, 얼굴을 가리우지 말고 머리를 제대로 향하게 하고 좌우에 밀초 한 대 씩 켜 놓고, 발치에 성수병과 성수채를 둘 것이요. 제대 위에는 고상을 모시고 촛불을 켜고 이같이 다 안배한 후에 모든 교우 한가지로 꿇어 염하라.

<u>시상에 시체를 놓은 후에 염하기까지는 모인 교우의 수대로 패를 갈라</u><u>, </u><u>한 패씩 차례로 시체 앞에 항상 망자의 영혼을 위하여 기구하기를 그치지 말 것이니</u><u>, </u><u>한 패가 경을 마치고 나거든 또 다른 패 들어와 경을 시작할지니라 </u><u>｢</u><u>주여 나 깊고 그윽한 곳에서 운운</u><u>｣ ｢</u><u>천주여 네 자비하심을 크게 베푸사 운운</u><u>｣ ｢</u><u>연옥도문</u><u>｣</u><u>과 </u><u>｢</u><u>축문</u><u>｣</u><u>을 위와 같이 하고</u><u>, </u><u>또 아래에 있는 연령을 돕는 찬미경을 욀 것이오 글자를 모르는 이는 묵주의 기도를 욀 것이라</u><u>. </u><u>차례마다 염경하기를 마치매 시체에 성수를 뿌리고 나올지니라</u><u>.</u>”

초상이 났을 때 문상을 간 신자들이 연도를 노래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연도는 꿇어 앉아서 적당한 인원으로 나누어 하며, 연도가 끝나면 뒤이어 다른 신자들이 연도를 계속해서 하라는 내용이다. 상가에서 연도노래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진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연도 기도문인 &lt;주여 나 깊고 그윽한 곳에서 운운&gt;, &lt;천주여 네 자비하심을 크게 베푸사&gt;, 연옥도문과 축문, 찬미경으로 노래를 하며 글자를 모르는 신자는 묵주기도를 한다. 연도를 할 경우 시편 가사의 음절에 따라 리듬을 맞추어 계속 연달아 읽어 나가는 느낌으로 노래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숨을 쉬는 부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노래의 진행에 있어 숨이 차서 노래하기가 힘들 경우 숨을 쉬고 난 뒤 노래를 다시 시작할 때에는 한탄이 섞여 표현된다. 이러한 연도노래는 죽은 사람에 대해 슬픈 감정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으며 현재 생활의 한을 하소연함과 동시에 북받치는 감정까지도 표현된다.

행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행상할 때에 시세에 걸림이 없거든 예절을 아래와 같이 하라. <u>제 </u><u>一</u><u>은 십자가를 한 사람이 들고 앞서 행하매</u> 두 사람이 좌우에 각각 촛불을 켜 잡고 같이 행하고, <u>제 </u><u>二</u><u>는 한 사람이 성수병과 채를 가지고 행하고</u><u>, </u><u>제 </u><u>三</u><u>은 영경자</u><u>(</u><u>영경자는 경문 외우는 것을 거느리는 사람이란 말</u><u>) </u><u>두 사람이 각각 경본을 가지고 앞서 행하고</u><u>, </u><u>제 </u><u>四</u><u>는 상여를 메고 가되 발이 앞으로 가게 하고</u><u>, </u><u>좌우에 두 사람이 각각 촛불을 켜 들고 앞서 행하고</u><u>, </u><u>제 </u><u>五</u><u>는 상제와 복인이 각각 다 촛불을 켜 들고 차례로 행하고</u><u>,</u> <u>제 </u><u>六</u><u>은 회장하는 모든 교우 제 단정하고 진중한 거동으로 차례를 잃지 말고 말을 말고 다 잠잠히 망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따르고 글자를 아는 교우는 두 편에 갈라 각각 다 경본을 가지고 좌우에 행하며</u><u>, </u><u>한 편에서는 계하고 한 편에서는 응하여 귀절을 맞추어 아랫 경을 낭송할지니라</u><u>.</u> <u>관을 메고 문에서 날 때에 십자가 뒤에로는 두 영경자 진중한 소리로 천천히 아래 경을 제</u><u>(</u><u>제하라 함은 선소리 주다는 말</u><u>)</u><u>하고 제하거든 상여 뒤에 행하는 교우들이 소리를 같이하여 한 편에서 한 대문씩 차례를 돌려가며 성영 제 오십을 행하며 낭송하되</u><u>, </u><u>만일 가는 길이 멀거든 이 경을 외운 뒤에</u><u>, </u><u>｢</u><u>연옥도문</u><u>｣</u><u>이나 </u><u>｢</u><u>연령을 돕는 찬미경</u><u>｣</u><u>을 외울 것이요</u><u>,</u> 무덤에 이르러는 즉시 합송 조목을 외울지니라. [영경자－제] 쓰러졌던 내 해골이 성영 시편 50 천주여 네 자바히심을… &lt;합송&gt; 스러졌던 내 해골이 다시 일어나, 주께 용약하리이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lt; 『천주성교예규』의 &lt;상장예절&gt;의 기록에 따라 재구성한 장례행렬&gt;</td>
</tr>
</tbody>
</table>
행상은 상여를 들고 장례행렬을 하는 것을 의미하며, 행렬하는 순서는 한 사람이 십자가를 들고 두 사람이 촛불을 가지고 행하며, 한 사람이 성수병과 채를 들고 행하며, 경본을 든 영경자 두 사람이 행하며, 상여를 메고 갈 때 상여 좌우에 두 사람이 촛불을 들고 행하며, 교우들은 경본을 가지고 연도를 노래하며 행렬을 한다. 다음 그림은 한국 천주교 장례예식의 장례행렬 순서와 연도 부르는 방법을 위의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하여 재구성해 본 것이다.

도묘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덤에 이르거든 모든 이 한가지로 모여 서되, 십자가 든 이는 좌우에 촛불 켜든 이와 한가지로 상두 발치에 상여를 향하여 서고, 그 지차는 상여를 괴목에 받쳐 놓고, 좌우에 촛불을 잡은 이는 십자가를 향하여 서고, 그 다음에 성수병과 채를 가진 이는 상여 우편에 또한 십자가를 향하여 서고, 그 뒤에는 상제와 복인들이 촛불을 잡고 상여머리에 차례로 늘어서고, 또 그 뒤에는 회장하는 교우들이 두 편에 갈라 영경자를 하나씩 각 편에 앞세우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서서 이 아래와 같이 외우라.” (합송) 천사들이 너를 천당에 데려가며, 치명자들이 너를 영접하여 천상(예루살렘)에로 들어가게 하며…이 아래경은 한편에서 계하고 한편에서 응하라… (계) 너를 부르신 그리스도 너를 거두시며, 천사들이 너를 ｢아바람｣의 품에로 데려 갈지어다. (응) 저희 영혼을 거두사, 지극히 높으신 주 대전에 바치소서”

십자가를 든 한 사람과 촛불을 든 두 사람은 상여를 향하여 서고, 좌우에 촛불을 든 사람은 십자가를 향하여 서고, 성수병과 채를 든 사람은 상여 우편에서 십자가를 향하며 서고, 상제와 복인들은 촛불을 들고 상여머리에 서고, 영경자는 두 편으로 나누어 각 편에 앞세우고 한편에서 계하고 한편에서 응하며 연도를 노래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도묘에는 행상과 달리 사람들의 위치가 달라진다. 다음 그림은 한국 천주교 장례예식의 도묘 때 사람들의 위치와 연도 부르는 방법을 위의 기록을 바탕으로 상상하여 재구성해 본 것이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lt; 도묘 때 사람들의 위치와 연도 부르는 방법의 기록에 따라 재구성한 장례행렬&gt;</td>
</tr>
</tbody>
</table>
1945년 해방 이후 노바오로 감준으로 1947년 󰡔성교예규󰡕와 1964년 이문근의 편저와 노기남 대주교의 감수 하에 같은 명칭인 󰡔성교예규󰡕로 다시 재출간된다. 두 장례예식서에는 시편가사의 변화와 음절단위 표시가 보완되었을 뿐 장례예식의 내용은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이문근의 󰡔성교예규󰡕는 1992년 󰡔성교예규󰡕가 출간되기까지 일반 신자들에게 사용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1969년 8월 15일 경신성사성의 교령으로 새 장례예식서를 공포한다. 한국 천주교회는 1976년 다시 우리말로 번역 및 보완하여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의에 따라 개정된 장례예식서󰡕를 단행본으로 발행한다. 그 이후 1992년 󰡔성교예규󰡕 제2장 상장예식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토착화 정신이 표명화 된 1976년 장례예식서를 수용했다. 장례예식은 절차를 세부적으로 나누어 그에 따른 시편 수를 늘였으며 장례미사와 고별식을 첨가하였다. 연도선율은 (전)서울 연령회연합회장 김득수(金得洙 1931~)에 의해 채보하여 처음으로 서양악보로 수록된다. 특히 입관예식, 묘지예식, 하관예식은 기존의 연도에 맞추어 새롭게 만들어졌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장례예식서 『상장예식』(2003)</td>
</tr>
</tbody>
</table>
2003년󰡔상장예식󰡕은 이전 예식서에 없던 화장·우제·면례예식을 삽입하였다. 화장예식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공포한 1976년 장례예식서의 일러두기 15항에서 “육신부활에 관한 그리스도교 교리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는 화장을 허용하며 교회의 관습대로 장례식을 거행한다”는 내용을 받아들여 화장예식을 마련했다. 이후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죽은 이의 매장과 화장된 유골의 보존에 관한 훈령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기 위하여｣를 2016년 발표했다. 이를 토대로 산골에 관한 교회 공식 가르침을 담은 ｢산골(散骨)에 관한 질의응답｣을 펴내었다. 교회는 부활신앙을 반대하는 이유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면 수목장(樹木葬)은 허용하나 산골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제시하였다. 우제와 면례예식은 전통상장례에 행하는 초우·재우·삼우의 유교의 제사를 장례예식서에 그대로 포함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연도선율은 1992년 󰡔성교예규󰡕에 실린 악보의 수정과 보완을 통해 2003년 󰡔상장예식󰡕에 통합하였다.

2013년󰡔상장예식󰡕에서는 지금까지 시안으로 그쳤던 부분을 ‘한국 천주교 가정 제례 예식’으로 정식으로 정리하여 표명하였다. 한국 천주교 제례의 의미에서는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허락한 제례는 유교식 조상제사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효성과 추모의 전통 문화를 계승하는 차원에서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해석한 예식이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 제례의 의미가 조상 숭배의 개념으로 오해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정 제례의 필요성에서는 ‘사목적 배려 차원에서 신자들이 조상의 기일이나 명절에 가정이나 묘지에서 차례를 지낼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제134조 1항 참조)’ 가정 제례와 미사에서는 ‘신자가정에서 의무적으로 제례를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신자 가정에서는 기일 등 선조를 특별히 기억해야 하는 날에는 가정의 제례보다 우선하여 위령미사를 봉헌한다.(｢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제135조 1항)’

<b>2.4. </b><b>『</b><b>성교예규</b><b>』</b><b>(1992)</b><b>와 </b><b>『</b><b>상장예식</b><b>』</b><b>(2003) </b><b>연도</b><b>(</b><b>煉禱</b><b>)</b><b>의 음악적 연구 </b>

악보화 된 두 예식서 󰡔성교예규󰡕와 󰡔상장예식󰡕의 음악적 분석을 하였다. 먼저, 김득수 옹이 연도를 채보하여 악보화 한 과정과 연도선율의 성격에 대해 기술하였다. 󰡔성교예규󰡕(1992)에는 “입관·묘지예식·하관” 의 예식부분이 기존의 연도 곡에 맞추어 새롭게 만들어 구성되었다. 󰡔상장예식󰡕(2003)은 화장예식이 삽입되어 역시 기존 곡에 맞추어 새롭게 만들어졌다.

두 예식서에 공통으로 실려 있는 연도 &lt;시편 129(130)&gt;, &lt;시편 50(51)3,-21&gt;, &lt;성인호칭기도&gt;, &lt;기도합시다&gt;, &lt;찬미와 간구&gt;, &lt;시편 113(114),1-8; 113후편(115), 1-12ㄱ&gt;, &lt;즈가리야의 노래&gt;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형식은 계(Ｏ)와 응(●)의 대응창법으로 노래가 진행된다. 선법은 e계면조로 4음 B(mi)·d(sol)·e(la)·g(do)과 a음이 추가된 5음 B(mi)·d(sol)·e(la)·g(do)·a(re)로 구성된다. 이중 B(mi)·e(la)·g(do)는 주요 구성음으로 메나리토리의 음계구조와 같은 성격을 가지며 추가된 음은 음향이 풍부해지는 효과를 나타냈다. 리듬은 가사에 리듬을 붙인 형태로 대부분 앞이 짧은 단( ), 뒤가 긴 장( )의 형태로 분류된다. 선율의 시작리듬은 , 와 마지막에 쓰인 리듬 으로 연도의 전체적인 형식의 통일을 위해 규칙적으로 사용된다. 선율의 진행은 B-e-g-e-d- /e-g-e-g-e-B-e를 중심으로 변형선율들이 나타난다. B음으로 시작하여 중간종지 d음으로 맺고, 다음은 항상 상승한 e음으로 시작하여 완전종지 e음으로 맺는다. 󰡔상장예식󰡕(2003)에서는 󰡔성교예규󰡕(1992)의 g-e-e음이 모두 e-e-e 동음으로 정리되는데 이것은 낭송조의 효과를 더 표현시키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에도 󰡔상장예식󰡕(2003)에서는 󰡔성교예규󰡕(1992)의 연도에 시김새의 삽입, 가사의 음절변화에 따른 선율변형, 악곡의 통일을 위해 시작에 B-B-e 선율과 완전종지에 e-B-e-e를 사용하였다. 시김새는 밀어 올리는 시김새 B-e의 4도․e-g의 3도․g-a의 2도와 흘러 내리는 시김새 e-B의 4도로 악곡에서 규칙적으로 나타나며 반복된다. 연도의 음악적 특징 중 특히 주목해야 하는 부문은 가사와 리듬의 상관성이다. 가사의 음절에 따라 리듬을 붙인 형태로 예외적인 형태도 있으나 1음절에서 7음절로 나누어지며 대부분 규칙적으로 붙여진다.

&lt;성인호칭기도&gt;는 죽은 사람의 영을 잘 보살펴 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는 선율로 1978년 교우촌인 갈곡리 공소에서 구교우들의 가창에 의해 채보되었다. 1864년 출간된 󰡔천주성교예규󰡕 제2권의 &lt;상장예절&gt;과 연관시켜 선율의 유래와 의미를 밝혔으며 그림으로 재구성하여 이해를 도왔다. 일반적인 연도선율과는 다른 g-a/(g)B-/e-e로 구성되는 선율은 서양의 성인과 한국의 성인들을 부를 때는 가사의 음절에 따라 리듬이 다르게 표현되었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lt;가사의 음절에 따른 리듬의 관계 1음절에서 7음절까지&gt;</td>
</tr>
</tbody>
</table>
마지막으로 연도의 음악구조는 전통음악과 동시대의 음악문화 속에서 생성 발전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전통음악인 자장가․독서성․전통 상여소리․판소리&lt;심청가&gt;의 상여소리와 공통된 전통음악 어법이 있음을 기술하였다. 기층음악인 자장가는 육자배기토리와 여러 유형의 토리가 혼합된 복합 토리도 나타나지만 메나리토리로 구성되었으며 4음보의 규칙적인 가사에 리듬이 붙여진 형태로 앞이 짧은 단( ), 뒤가 긴 장( )의 반복되는 구조로 연도와 공통된 음악적 어법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의 구전문화에는 한문책을 읽을 때 소리 내어 읽는 전통이 있는데 이것을 독서성(讀書聲)이라 하며 최근에는 ‘성독(聲讀)’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성독은 근대 이전까지 계속되어 구전되어 왔으나 과거와 같은 전통적인 방식은 거의 사라지고 잊혀져가는 실정이다. 물론 전문 음악인들이 음악적인 멋을 가미하여 글을 읽는 송서(誦書)와 한시(漢詩)를 긴 율조(律調)에 올려 부르는 시창(詩唱)으로 전승되어 음악의 한 장르로 인식되어 왔다. 여기서는 옛 선비들인 한학자들의 성독을 채보하여 연구한 내용을 자료로 기술하고자 한다. 선율구성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데 경기도 북부는 re, mi, sol, la, do 영남지방은 mi, la, do, re 강원지방은 sol, la, do, re 호남지방은 sol, la, do, re, mi로 주로 4음~5음으로 표현된다. 영남지방의 mi, la, do, re는 메나리토리의 구성음으로 연도와 같은 선율구조로 해석되며 음역 역시 연도와 같이 한 옥타브 내외의 영역으로 구성된다. 호남지방의 경우 완전8도·장10도로 타지역에 비해 비교적 넓은 음역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편하게 구사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음역으로 불러진다. 일반 한학자 권희문(1919 전북 장수 출생)의 &lt;대학장구서&gt;의 줄글(산문)읽는 악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lt;대학장구서&gt;</td>
</tr>
</tbody>
</table>
선율의 진행방식에 도약진행과 순차진행이 나오기도 하지만 한문가사를 효과적으로 구송하기 위해 동일한 c음(do)으로 15번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진행형태는 연도에서도 공통적으로 표현되는데 시편 129(130)의 동일한 e음(la)이 14번 반복 지속되며 낭송하기 좋은 역할을 한다. 성독의 리듬은 예외적인 리듬이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짧은 단( ), 뒤가 긴 장( )의 결합이 중심이 되고 있다. 단조로운 리듬으로 연도의 단순하고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리듬 구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상여소리는 한국의 전통장례 때 불렀던 대표적인 기층음악으로 상여를 메고 가는 상여꾼들이 불렀던 노래이다. 만가, 향도가, 행상소리, 회심곡 등의 명칭으로 전국적으로 널리 불러졌으며 현재는 장례예식의 변화로 잊혀져 간 선율로 기억되고 있다. 전통 상여소리 중 충청남도 공주 봉현리 상여소리 &lt;진소리&gt;를 채보한 악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lt;진소리 1-4마디&gt;</td>
</tr>
</tbody>
</table>
선율의 구성음은 mi, sol, la, do, re의 5음으로 주요음은 mi, la, do의 세음으로 구성된다. sol음은 주로 la-mi의 하행선율에서 경과음으로만 사용되며 la-sol-mi의 선율형으로 메나리토리의 음악적 특성이 나타난다. 상여소리와 연도는 메나리토리의 음계구조로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상여소리의 가창방식은 느린 3소박 4박자로 2마디를 메기고 2마디를 받는 선·후창 방식으로 한다. 보통 메기는 부분에서는 한사람이 사설을 즉흥적으로 자유롭게 엮어 부르며 받는 부분에서는 상두꾼 전체가 같은 후렴을 반복하며 제창의 형태로 노래한다. 연도는 두 편으로 나누어 두 명의 영경자가 계와 응의 선소리를 하며 신자들은 대응창법으로 낭송한다. 연도와 상여소리는 대응창법, 메기고 받기 그리고 선·후창방식으로 서로 주고받는 연주형태로 볼 수 있다.

판소리는 삶의 희노애락을 음악과 어울려서 해학적으로 표현한 전통예술이다. 판소리 중 심청가, 홍보가, 변강쇠가 등에는 장례장면에 맞는 상황과 정서를 좀 더 묘사하기 위해서 상여소리가 편입되어 나타난다. 『정권진 창 심청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lt;상여소리 16-18마디&gt;</td>
</tr>
</tbody>
</table>
심봉사의 아내 곽씨 부인이 심청이를 낳고 사망하여 출상하는 장면에서 &lt;상여소리&gt;와 &lt;자진 상여소리&gt;를 부른다. 선법은 메나리토리로 전통 상여소리에 나타났던 선법과 동일하며 받는 소리의 re-do의 반복과 la-sol-mi의 하행형 선율에서 그 특징이 나타난다. 전통 상여소리의 받는 소리인 ‘어허넘차 너허넘’의 반복적인 후렴구는 판소리에서 그대로 사용되며 메기고 받는 형태가 아닌 독창의 형식으로 부른다. 전통 상여소리의 형식과 사설의 일부를 차용하여 판소리화 된 상여소리의 모습으로 수용된 것으로 해석된다. 연도와 전통 상여소리 그리고 판소리에 편입된 &lt;상여소리&gt;는 모두선법적인 면에서 메나리토리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b>2.5. </b><b>연도</b><b>(</b><b>煉禱</b><b>)</b><b>의 지역 사례</b><b>-</b><b>부산지역의 천주교 장례노래 연도</b><b>(</b><b>煉禱</b><b>)</b>

󰡔상장예식󰡕(2003) 연도를 사용하지 않는 사례로 2001년부터 2013년 8월경까지 부산 지역에서만 불려졌던 󰡔위령기도서󰡕 연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lt;시편 129&gt;</td>
</tr>
</tbody>
</table>
연도의 음악적 구조는 경상도의 음악어법인 메나리 토리의 음계구조로 e계면조의 선율적 특징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표적인 선율 B-e-d-e-g-e-B-e를 사용하여 음악적 통일성과 반복으로 인해 단순성의 효과를 나타낸다. 󰡔성교예규󰡕(1992)와 상장예식󰡕(2003)에서 밀어 올리는 시김새로 쓰였던 a음은 부산지역 연도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시김새는 곡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서 보이기는 하나 &lt; 단장&gt;의 리듬형태로 동음으로 반복되어 조금 빠른 속도감으로 표현되었다. 가사와 리듬의 관계에서는 가사의 음절에 따라 리듬이 규칙적으로 붙여지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특징적인 부분은 3음절에서 나타나는데 보통 3음절의 경우 &lt; 장 단장, 1음절+2음절&gt;으로 표현되나 󰡔위령기도서󰡕에서는 3음절이 &lt; 단장 장, 2음절+1음절&gt;로 구성된다. &lt; 단장&gt;의 리듬은 음악의 흐름 내에서 강박과 약박이 자연스럽게 바뀌어 당김음으로 표현된다.

같은 예로 대구지역 연도 논문 박철수의 ｢경상도(대구)지방에서의 한국천주교 연도(구연도)노래 보존을 위한 연구｣에서도 3음절 &lt; .&gt;와 당김음의 형태를 찾을 수 있다. &lt; 단장&gt;의 &lt;장&gt;에 ‘강세’ 또는 ‘센음’으로 표현되며 강한 느낌으로 소리를 내다보니 강한 억양이 표출되며 듣는 이로 하여금 감각적으로 앞으로 치고 나가는 진행감을 주게 된다. 또한 약간의 흥분으로 활기와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경상도 민요의 특징인 강한 억양과 꿋꿋함, 그리고 빠르기의 속도와 융합되어 표현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5음절․6음절․7음절에서도 같은 구조로 구성됨을 알 수 있다. &lt;성인호칭기도&gt;는 e-g-e선율로 3도 음정내에서 ♪(8분음표)만으로 구성되어 부산 지역 사람들이 부르기 쉬운 단순성과 낭송의 느낌을 준다. 박철수의 ｢경상도(대구)지방에서의 한국천주교 연도(구연도)노래 보존을 위한 연구｣에서도 e와 g로 구성되어 부산과 대구의 &lt;성인호칭기도&gt;는 공통점이 있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lt;가사의 음절에 따른 리듬의 관계 1음절에서 7음절까지&gt;</td>
</tr>
</tbody>
</table>
현장음악연구(2009년 1월 11일 선종한 고(故) 김종환(요셉, 83세)의 3일장의 장례식에 참가)를 통해 부산 지역의 연도선율에 대한 이해와 정체성을 살펴보았다. 연도는 가창자 인원수의 구성과 처한 환경에 따라 계와 응으로 낭송하거나 노래로 부르는 등 유동성 있게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lt;시편130&gt;의 시작하는 부분의 계와 응이 자연스럽게 맞지 않아 서로 눈치를 보고 노래하였으며 목소리 큰 사람이 선창할 경우 모두 그 사람의 노래에 끌려가는 현상이 나타났다. 첫 시작리듬인 “깊은－/” 과 중간 종지 후 시작에 쓰인 “주님－/ ”에서 밀어 올리는 음은 약하게 표현되거나 거의 표현되지 않았으며 &lt; 단장&gt;으로 불러졌다. 첫 시작음의 &lt; 단&gt;은 약하고 &lt; 장&gt;은 쎄게 불러 경상도 억양이 표현되기도 했다. &lt;시편51&gt;의 41-43단에서는 g와 e를 바꾸어 부르거나 동음 e의 반복으로 빠른 속도감을 표현하였다. &lt;성인호칭기도&gt;의 경우는 이전에 사용했던 󰡔성교예규󰡕(1992)의 g-a-e-B-e-e선율과 󰡔위령기도서󰡕(2001)의 e-g-e선율을 혼합하여 부르고 있었으며 악보를 보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lt;시편114&gt;에서는 2단과 3단에 나오는 마지막 가사 “올 제/B-e”는 “올 제/e-B”로 바꾸어 불러졌다. 31-33단의 32단 가사 “발이 있어도 걷지도”에서는 4도와 3도의 음정을 올려 부르기도 했다. 구전으로 전해지던 연도선율이 오선악보로 인해 선율의 정형화가 되면서 실제로 가창을 할때 구성음인 B․e․g들이 무의식적으로 분출되어 표현되는 형태가 자주 보였다.

부산지역 연도는 통일된 선율이 실려있는 있는 호남풍의 연도를 2013년 8월 이후부터 수용하여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부산지역 연도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산지역 연도를 구전으로 부를 수 있는 가창자들이 연로하여 돌아가시기 전에 녹취와 채보 작업을 통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채보된 연도선율은 재정비하여 새로운 장례예식서가 재출간되어야 할 것이다. 부산지역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정서로 표현되어진 연도선율을 밝힘으로서 지역전통예술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며 새로운 공동체적 지역문화의 창출을 도모하는데 기여하기를 고대한다.

<b>2.6. </b><b>장례미사의 장례음악 연구</b>

장례미사에서 부르는 장례음악은 『가톨릭 성가집』과 『장례예식서』를 근거로 역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연구범위는 󰡔가톨릭성가집󰡕과 󰡔장례예식서󰡕에 실린 자료를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첫째,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출간된 󰡔가톨릭성가집󰡕중 장례와 관계되는 용어인 “연령”, “장사예절”, “사도예절” “연미사”라고 명시되어 있는 1936년 8월 25일 출간된 󰡔성가집󰡕(충북 음성장호원 천주교회)과 1938년 덕원에서 출간된 󰡔가톨릭성가집󰡕, 그리고 1957년 서울에서 출간된 󰡔정선 가톨릭성가집󰡕을 살펴보고자 한다. 1963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공표 후 전례에 많은 변화가 나타나는데 공표 후 출간된 1975년 대구 󰡔가톨릭 공동체의 성가집󰡕과 2012년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통일성가집 1986년 서울 󰡔가톨릭성가󰡕(혼성합창용)을 선정하여 장례와 관계되는 성가를 기술하고자 한다. 둘째, 장례미사 경본과 장례에 필요한 성가가 수록되어 있는 1992년 출간된 장례예식서 󰡔성교예규󰡕와 이후 2003년 출간된 장례예식서 󰡔상장예식󰡕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특히 󰡔상장예식󰡕에는 이전 예식서에 필요한 장례예식의 수정과 보완, 연도선율의 통합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례에 필요한 성가가 더 많이 수록되어 있다. 연구자는 두 예식서에 실린 장례와 관련된 성가 부분을 발췌하여 장례미사 때 어떤 성가를 사용하였는지 연구하고자 한다.

1936년 8월 25일 󰡔성가집󰡕(충북 음성장호원 천주교회)의 167-192쪽에는 장사례절, 사도례절, 련미사의 순서로 실려 있다. 4선악보에 라틴어 가사를 한글 발음대로 표기되어있다. 누가 이 악보를 만들었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라틴어 가사를 잘 읽지 못하는 신자들을 배려해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1938년 덕원에서 출간된 󰡔가톨릭성가󰡕에는 목차에 “연령”이라는 항목이 명시되어 수록된다. “연령”과 관계된 부분을 선별하여 살펴보면, 연령창가미사, 연령을 위하야, 라전문 연령창가미사이다. “연령창가미사”는 “187 초입가”, “188 연경”, “189 제헌가”, “190 거양성체후가”, “191 미사 끝에”로 구성되어 있다. 장례미사의 전례에 사용하기 위해 구성된 곡들로 “연옥의 모든 영혼을 긍휼이 여겨시어 사슬을 풀고 옥문을 열어 벌과 눈물 사해주시고 자모의 사랑으로 부르짓는 저들을 구해달라”는 내용의 가사이다. 음악적 구조는 단성부로서 한글가사로 표기되어 있다. “연령을 위하야”의 곡은 “192 주여 모든 연령에게”, “193 인자한 천주 성부여”이다. 가사는 각각 8절과 5절로 이루어지며 “보속의 눈물을 흘리는 연령을 구하시고, 연옥불을 꺼 주시어 서늘하게 하여 천당에 가서 편히 쉬게 해 달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모든 성인이 반렬하여 복을 주시고 우리 또한 이 세상 지난 후에 가리니 천상영복소에서 만나보게 해 달라”는 기도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전문 연령창가미사”의 “212 레귀엠”은 장례미사의 전례인 긔리에, 부속가, 상크 투스, 악 누스 데이로 구성되어 있다. “213 리베라메”는 장례미사 끝에 하는 예식인 고별식 때 부르는 그레고리안성가가 수록되어 있다. “레귀엠”과 “리베라메”의 음악적 구조는 그레고리오성가의 형태로 오선 악보에 8분음표와 4분음표로 표기되어 있다. 라틴어 가사는 한글 발음으로 표기함과 동시에 번역을 아랫부분에 설명하여 가사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표기되어 있다. 위의 성가집들로 미루어 보아 단성부의 한글가사로 된 성가와 그레고리오성가를 장례미사의 전례에 혼용하여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1957년 서울 󰡔정선 가톨릭성가집󰡕은 오르간 반주․혼성 합창용으로 가톨릭성가집, 미사통상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가집을 살펴보면, 먼저 성수예절로 그레고리오성가 1․2는 “아스뻬르제스메”, 3․4는 “비디아꽘”으로 시작한다. 목차구성은 “국어성가”, “라띤어성가”로 나뉘어진다. “국어성가”의 부분에는 이문근의 “창미사곡”으로 2벌의 창작미사곡과 1벌의 어린이 창작미사곡이 실려 있다. 어린이 창작미사곡의 부분에 장례미사의 전례절차에서 예물기도 후 드리는 “죽은 이를 위한 감사송”이 더불어 실려 있다. 이 곡은 그레고리오성가의 선율에 “위령감사송”의 한글 기도문을 붙여 만든 곡이다. “라띤어성가” 부분의 부록에는 장례음악인 3.연미사와 4.사도예절이 실려 있다. 3.연미사곡들은 레꾸이엠, 기리에, 층계경, 연경, 부속가, 제헌경, 감사서문경에, 상 뚜스, 천주의 고양, 영성체 후 이다. 장례미사 후 고별식에서 하는 그레고리오성가인 “리베라메”, “인빠라디숨”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음악적 구조는 모두 그레고리오성가의 형태이며 오선 악보에 8분음표와 4분음표로 표기되어 있다. 라틴어 가사는 모두 한글 발음으로 표기되었으며 이전의 성가집에서 표기되었던 번역된 한글가사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레고리오성가는 199페이지에서 293페이지에 걸쳐서 라틴어 가사를 한글 발음만으로 표기하여 실려 있다. 이러한 100페이지에 달하는 그레고리오성가의 수록은 장례미사 뿐만 아니라 다른 전례에도 그레고리오성가를 많이 사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바티칸공의회의 공표 후 전례헌장의 정신을 수용한 1975년 대구 『가톨릭 공동체의 성가집』에는 그레고리오성가 미사곡은 배제되었으며, 위령기도 때 부르는 시편들을 가지고 만든 성가와 장례분위기에 맞는 성가들을 선별하여 실어졌다. 고별식에도 그레고리오성가 “리베라메”와 “인빠라디숨” 대신에 이종철 작곡의 “291이 영혼을 받으소서”(고별식 시작), 292“천상 낙원으로 데려가소서”(고별식 끝)이 실려있다. 1986년 서울 혼성합창용 『가톨릭성가』에는 그레고리오성가가 다시 수록되나 장례음악의 그레고리오성가 미사곡은 실려있지 않다. 그레고리오성가가 다시 실어진 이유는 전통적으로 불러왔던 그레고리오성가의 부재에 대한 필요성을 느껴 수록되어졌다고 추측된다. 그레고리오성가는 한글가사와 그 아래에 번역되지 않은 라틴어 가사를 그대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신자들이 미사 때 한글가사로 불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라틴어 가사로 부를 경우는 전례의 특송으로 성가대나 독창자가 연습하여 불렀을 것이다. 이전에 그레고리오성가를 부를 때 바로 라틴어 가사를 부르는 것과는 다른 내용이다. 성가는 대부분 장례분위기에 맞는 슬프거나 어두운 느낌의 단조 곡들로 구성되나, 희망과 부활을 내포하는 장조 곡 웨일즈 성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도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창작 위령미사곡 중 장례의 의미를 두고 전례에 따른 가사로 작곡한 최병철은 주목할 만하다. 고별식에 있어서는 이전에 실려있던 성가들이 1986년 서울 혼성합창용 『가톨릭성가』에서 모두 삭제가 되는 현상을 보인다.

장례예식서 1992년 『성교예규』에는 장례미사의 경본과 고별식, 연도선율의 악보화 그리고 장례에 필요한 성가가 삽입되어 있다. 미사 끝에 하는 고별식의 경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자들의 영성체가 끝나면 사제는‘영성체 후 기도’를 바치고 나서 즉시 이 예식을 거행한다. 성찬례의 거행 없이 말씀의 전례만으로 장례식을 거행할 경우에는‘신자들의 기도’후에 이 예식을 집전한다. 사제가 영구 앞에 나아올 때 유가족들은 촛불을 켜들고 영구 주위에 둘러서고, 성수를 든 복사와 향로를 든 복사는 사제 옆에 선다. 십자가를 든 복사는 사제의 반대편, 영구의 머리 쪽에 선다. 이어서 사제는 교우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비슷한 말로 권고한다.

+(아무)를 위해 열심히 기도한 우리는 이제 마지막 작별을 하게 됩니다.

* <u>그다음에 성수를 뿌리고 향을 드린다</u><u>. </u><u>그동안 교우들은</u><u>‘</u><u>하늘의 성인들이여</u><u>’</u><u>를 바치거나 다</u>

<u>른 적합한 성가를 부른다</u><u>.</u>

* 향을 드리고 나서 다음의 기도를 바친다.

+ 지극히 인자하신 아버지, (아무)를 맡겨 드리오니, 그리스도님 안에서 죽은 모든 이와 이 교우

가 그리스도님과 같이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나이다.....

* <u>모든 예식이 끝나고 운구해 나갈 때</u><u>‘</u><u>천사들이여</u><u>’</u><u>나 다른 적합한 성가를 부른다</u><u>.</u>

고별식에서 밑줄친 내용 중 성수를 뿌리고 향을 드린 후 ‘하늘의 성인들이여’를 바치는데 이것은 고별식 시작에 하는 기도로 이전에는 그레고리오성가나 이종철 작곡 “291 이 영혼을 받으소서”로 불렀으나 이 예식서에는 낭송으로 한다. 그리고 고인의 친지가 많아 향을 드리는 예식이 길어질 경우 성가를 부른다. 운구가 나가는 동안 ‘천사들이여’를 하는데 이 내용 역시 이전에 그레고리오성가나, 이종철 작곡 “292 천상 낙원으로 데려가소서”로 불렀으나 이 예식에서는 낭송하며 성가를 부른다.

장례에 필요한 성가는 1986년 혼성합창용 『가톨릭성가』에서 성가 16곡을 선별하여 단성부(소프라노 선율)만의 형태로 실었으며 통상부분의 미사곡은 실려있지 않다. 1986년 서울 혼성합창용 『가톨릭성가』의 &lt;위령&gt; 항목의 성가들은 그대로 실었으며 “27 이 세상 덧없이, 50 야훼는 나의 목자, 54 주님은 나의 목자, 59 주께서 나의 피난처, 151 주여 임하소서 210 나의 생명 드리니, 218 주여 당신 종이 여기, 436 주 날개 밑, 480 믿음으로”의 성가들이 첨가되어 수록되었다. 첨가된 성가들은 장례분위기를 나타내는 성가보다는 미사의 고유부분인 입당송, 화답송, 봉헌송, 영성체송 때 즐겨 부르는 곡들임을 알 수 있다. 『장례예식서』는 신부들에 의해 장례미사와 장례미사의 고별식 때 사용되었으며, 신자들은 실제로 장례미사 때 『가톨릭성가』를 가지고 장례성가를 부르고 있다

2003년 『상장예식』의 장례미사는 이전 예식서의 내용에 다음의 내용이 삽입된다. 기도문에서는 ‘보편지향 기도’와 ‘예물기도’가 삽입되며, 고별식에서는 72항에서 시신의 기증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상황을 고려하여 “시신의 기증 등으로 영구 없이 이 예식을 거행할 때에는 다음의 기도만을 바친다”가 삽입된다. 연도선율은 이전 예식서의 내용에 수정과 보완 그리고 통합하여 실어졌으며 연도 악보는 이전에 부록으로 실어졌던 것과는 달리 장례예식의 절차에 따라 본문에 실었다.

장례미사에 사용된 성가는 이전 장례예식서에 실려있는 16곡에 다시 『가톨릭성가』에서 16곡을 선별하여 32곡을 소프라노 성부(단선율)만을 실었다. 첨가된 성가곡들은 이전 예식서와 마찬가지로 장례미사의 고유부분에 즐겨 부르는 곡들이다. 특히, “251 무변해상”의 &lt;천국에서 즐기리라 영원무궁 즐기기라&gt;, “423 천년도 당신 눈에는”의 &lt;당신만이 영원히 계시나이다&gt;, “462 이 세상 지나가고”의 &lt;천국 가까워 나 오래 기다리던 그 영광 보인다&gt;, “463 순례자의 노래”의 &lt;언젠가 떠나리라&gt;의 가사는 장례의 의미를 살린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장례미사는 미사통상문을 낭송으로 하기도 하고 성가대의 활동이 잘 되는 경우에는 그레고리오성가와 라틴어 미사곡, 한국작곡가가 만든 창작 위령미사곡, 국악성가 등을 부르고 있다. 또 교회에서 추기경과 주교, 성직자들이 선종하였을 때는 가톨릭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져 레퀴엠이 연주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장례미사의 장례음악은 서양음악의 특징을 가진 음악과 우리의 전통선율에 근거한 토착화된 선율의 수용으로 전례에 다양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b>2.7. </b><b>천주교 연도</b><b>(</b><b>煉禱</b><b>)</b><b>와 한국의 전통 상장례 문화 </b>

천주교 연도와 상장례에서 한국 전통문화의 어떤 부분들이 유래되어 수용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장례예식서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禮規󰡕에서 유교 전통장례 효(孝)·곡(哭)소리·장례행렬(行喪)부분을 발췌하여 공통점과 비교되는 부분의 설명과 규정을 기술하고자 한다. 효는 부모의 영혼을 위해 정성으로 평생을 기도하기를 힘쓰라고 당부하며 당시의 유교적 정서가 반영된 반면 스스로가 부모를 죽게 한 죄인이라 생각하는 것은 덕이 아니라고 천주교적 해석으로 효를 제시하고 있다. 곡소리는 우리가 부활하여 다시 만나 파스카의 기쁨을 누릴 것이므로 미치게 부르짓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다. 장례행렬은 󰡔천주성교예규󰡕의 &lt;상장예절&gt;의 기록과 실제로 1903년경의 천주교 장례행렬 그리고 전통 장례행렬을 가지고 비교 분석하여 서술하였다. 1903년경의 천주교식 장례행렬 사진에는 󰡔천주성교예규󰡕의 &lt;상장예절&gt; 기록과 거의 유사하게 재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r>
<td>天主敎式 葬禮</td>
<td>전통 장례행렬</td>
</tr>
</tbody>
</table>
천주교 장례행렬시 십자가상을 세우는데 이것은 전통 장례행렬 때 앞에 세우는 방상시와 같은 성격으로 마귀무리들을 흩어 버린다는 의미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전통 장례행렬시 만사(輓詞)와 아(亞)삽․운(雲)삽은 천주교 장례행렬에는 쓰지 말 것을 당부하며 상여소리 역시 부르지 말라고 기술하고 있다. 천주교 장례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시세에 걸림이 없거든...”, “만일 외인이 능욕할 위험이 없으면...” 등의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무리한 진행보다는 주변의 상황과 분위기를 고려하여 예식서의 규정을 이행하라는 당부의 의미를 알 수 있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r>
<td>1993년 경남 창녕군 이방면 이종민 선생의 만장 행렬 모습. 출처: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www.culturecontent.com</td>
<td>운(雲)삽․아(亞)삽(불삽). 출처: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왕실 관혼상제) www.culturecontent.com</td>
</tr>
</tbody>
</table>
󰡔상장예식󰡕(2003)에 사용된 장례용어와 장례예식의 절차가 유교 전통장례와 많은 부분이 비슷하여 절차측면에서 비교하였다. 천주교 장례예식 운명의 ‘자비송’과 유교 전통상장례 초혼복귀(初魂復鬼) 의식, 천주교 장례예식 운명의 ‘예’와 유교 전통장례 제사, 천주교 장례예식 위령기도(연도)의 ‘절’과 유교 전통장례 조문례(弔問禮)의 재배(再拜)와 상주의 답배(答拜), 천주교 장례예식의 출관 하기 전 ‘분향과 절’은 유교 전통장례의 발인제사, 천주교 장례예식 하관의 ‘절·분향·예’는 유교 전통장례 하관의 후토제와 평토제, 천주교 장례예식 ‘우제’와 유교 전통장례 우제, 천주교 장례예식 ‘면례’와 유교 전통장례 면례로 살펴보았다. 천주교 장례예식 우제와 면례예식은 전통장례에 행하는 초우·재우·삼우의 유교의 제사를 장례예식서에 그대로 포함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장례의 마지막 절차인 탈상이 있는데 탈상의 기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탈상은 3일상, 불교에서 하는 49재, 오순절 성령강림을 기억하며 기리는 50일상, 유교의 100일상, 1년상, 3년상 등이 있다. 탈상의 의미에서 위령미사를 하고자 할 때 기간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 고민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탈상에 대한 천주교적 설명과 수용에 대해 이해가 요구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어려운 상황에서 서로 도와주는 공동체 문화의 환난상구(患難相救)의 성격을 문헌의 기록들로 알 수 있었다. 윤석춘(尹碩春)의 공초기록, 로베르 신부의 무료 장례예식의 선교, 전염병 “마마”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성대한 장례 예식을 치렀다는 기록, 폴리신부의 장례풍속의 상부상조 표현을 살펴보았다. 환난상구는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인 향약의 4대 덕목 중 하나인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다는 환난상휼(患難相恤)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한 사람의 죽음에 마을의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하며 상주의 슬픔을 함께 나누며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서로 돕는 환난상구는 한국 전통문화의 미풍양식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천주교회는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와 전구 및 장례를 이끌고 주도하는 장례봉사 단체 연령회(煉靈會)가 있다. 1910년대에는 보험회(保險會)와 비슷한 성격의 계(契)의 형식으로 변화된다. 1912년 천주교중보험회(天主敎中保險會)와 1933년 용인군 남곡리 본당 연령회는 장례봉사는 물론 금전적인 부조를 위한 계의 형태의 조화, 기도 및 미사 봉헌 등 오늘날의 연령회의 모습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1912년 천주교중보험회의 규칙을 살펴보면, “우리 교중인이 이 회를 설립함은 일개인의 사욕을 위함이 아니라 교중 남녀를 위함이니, 이 회에 가입한 회원들은 망자(亡者) 난 발문(跋文)을 보거든 수렴전(收斂錢) 7전 5리(백동은 3푼)를 삼일 내로 지체 없이 납부하여 상가(喪家)에 폐단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보험처럼 회원을 모집하여 회비를 거둔 뒤 회원 가운데 상을 당한 사람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해 주는 단체로 역할을 했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r>
<td>정유 동부 상여도주비수전기

(丁酉 東部 喪轝都註備收錢記)</td>
<td>정유 사월 초육일 동부상여제만취조기

(丁酉 四月 初六日 東部喪轝祭滿炊助記)</td>
</tr>
</tbody>
</table>
천주교 장례문화의 계(契) 형식은 조선 시대에 상사(喪事)를 공동 부조하기 위해 만든 협동 조직인 상여계(喪輿契)에서 그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r>
<td>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 266호)로 지정된 “경산의 상엿집 및 관련문서”</td>
<td>경자 정월 십오일상여계수기 (庚子 正月 十五日 喪輿契授記)</td>
</tr>
</tbody>
</table>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 266호)로 지정된 󰡔경산의 상엿집 및 관련문서󰡕의 상여문서(喪輿文書)에서 상여계 경비를 거둔 내역과 상여 제작비용의 지출 내역, 제를 지내는데 물자 지원한 기록, 계금(契金)을 분배하여 이자를 받은 기록(取息)을 살펴보았다. 연령회의 상여계 문화는 경산 상엿집의 상여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 전통사회에서 인적 상호부조로 운영되는 계의 기능을 접목하여 나타난 문화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ol>
 	<li><b> </b><b>나가는 말</b></li>
</ol>
초기의 천주교 유입당시 종교적 목적과 함께 유교의 전통장례문화를 수용, 접변된 한국적인 천주교의 장례문화는 효과적인 타종교문화 수용의 좋은 예를 제시하는데 기여했다. 󰡔상장예식󰡕(2003)을 통해 한국인의 심성에 맞는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하였으며 선교의 장으로서 장례문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연도는 핵가족으로 인한 개인적인 이기주의와 어른 공경이 사라져가는 오늘날 전통장례가 지키고자 했던 효와 예를 재실현하였다. 천주교의 신앙 안에서 수용된 우리의 고유사상과 전통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져 사라져가는 한국 장례문화를 재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상여소리는 한국의 장례문화 변화로 쉽게 접할 수 없는 사라져 간 전통선율로 기억되고 있으며 연도는 오늘날까지 천주교의 의례음악으로 구비전승되고 있으며 종교음악 및 예술음악으로의 가치를 찾을 수 있다.

구전으로 전승된 연도선율은 김득수 옹의 채보로 자칫 계승되지 않고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염려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보전의 모범사례가 되었다. 󰡔상장예식󰡕(2003)을 사용하지 않는 사례로 부산지역의 연도를 살펴보았는데 이외의 각 지역의 고유한 연도선율들도 연구되어야 한다. 구전으로 부를 수 있는 가창자들이 연로하여 돌아가시기 전에 녹취와 채보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시급한 필요가 있다. 지역의 연도선율을 밝힘으로써 지역 전통예술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며 새로운 공동체적 지역문화의 창출을 도모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나아가 이 책이 전통선율의 맥을 보존하고 계승하는데 일익을 담당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각 지역의 다양한 연도선율을 보존하고 전승할 수 있도록 대표적인 구교우촌을 지정하고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상장예식󰡕(2003)에서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를 전통장례의 관점에서 주력하여 살펴보았는데, 한국인의 심성세계에 영향을 끼친 무속 신앙과 불교, 도교와도 더불어 연구되어야 한다. 불교 의식음악인 범패 그리고 무속음악과의 관계를 연구하여 의례로서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여러가지 측면에서 비교 분석이 요구된다. 연도는 한국 천주교에만 있는 향토색이 현저한 상장예식의 문화유산으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죽음의례인 진도 씻김굿이나 불교의 영산재와 같이 연도 역시 무형문화재로 국가지정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ol>
 	<li><b> </b><b>참고문헌 </b></li>
</ol>
<b>&lt;</b><b>단행본</b><b>&gt;</b>

󰡔상장예식󰡕, 한국천주교주교회의, 가톨릭출판사, 2003

󰡔위령기도서󰡕, 한국천주교 부산교구 전례위원회, 부산: 신안정판사, 2001

󰡔성교예규󰡕, 서울대교구 전례위원회 엮음,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2

대곡박물관, 『천주교의 큰 빛 彦陽』, 2013

로버트 슈나이더․황애경 역, 󰡔신학의 토착화󰡕, 가톨릭출판사, 1991

반 게넵, 『통과의례』(Rites de Passage), 전경수 역, 을유문화사, 1985

박미경 저․윤화중 역, 『한국의 무속과 음악』, 부산: 세종출판사, 1996

박요한 영식, 󰡔분향같게 하옵소서󰡕, 서울: 가톨릭출판사, 1992

방상근, 『19세기 중반 한국 천주교사 연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빅터 터너, 『제의에서 연극으로』, 현대미학사, 1996

샤를르 달레(지은이), 안응렬, 최석우(옮긴이), 『한국 천주교회사』상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80

<b>&lt;</b><b>논문</b><b>&gt;</b>

김종수, 「상제례 예식의 한국화 모색」, 수원가톨릭대학교, 2001, 143-182쪽.

강지원, 「교회의 친교 실현에 적합한 한국인의 심성과 친교의 공동체인 ‘소공동체’활성화 전망」, 부산가톨릭대학교 대학원, 1999, 20-27쪽.

강영애, 「천주교 연도(위령기도)의 음악적 연구」, 󰡔예술논집󰡕 제4집, 광주: 전남대 예술연구소, 2001, 107-125쪽.

＿＿＿, 「한국 천주교 장례노래(연도)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박사논문, 2005, 100-126쪽.

김득수, 「나의 신앙과 삶/김득수․(전)연령회연합회장(1)(2)(3)」, 󰡔교회와 역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9월-11월호, 38-48쪽.

＿＿＿, 「상장예식서가 나오기까지」, 󰡔가톨릭 상장례봉사자 전문교육󰡕, 마산: 천주교마산교구 연령회연합회, 2008, 20-23쪽.

＿＿＿, 「천주교 납골 문화 정착의 필요성」, 󰡔사목연구󰡕 10권, 가톨릭대학교, 2002, 55-80쪽.

김수정, 「천주가사의 음악적 특성(1) -천주가사의 구비적 성격」, 󰡔제2회 근현대 한국가톨릭연구단 공동 학술심포지엄󰡕, 공동: 부산교회사연구소, 2004, 147-174쪽.

＿＿＿, 「한국문화로서의 가톨릭 교회음악에 대한 재조명 -연도의 선율짜임새에 대한 비교․연구를 중심으로」, 󰡔음악학󰡕 13, 서울: 민음사, 2006. 47-71쪽.

박철수, 「경상도(대구)지방에서의 한국천주교 연도(練禱)(구연도) 노래 보존을 위한 연구」,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12

방상근,「연령회(煉靈會)」, 󰡔교회와 역사』,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소, 2001, 8-12쪽.

손상오, 「우리말 시편의 음악적 소여(所與)」, 󰡔초대가톨릭 사상󰡕 제18집, 대구: 효성가톨릭대학교 가톨릭사상연구소, 1998, 177-209쪽.

이상선, 「연령회의 현재와 미래」, 『사목』 11호, 2006, 53-57쪽.

이유림, 「한국 천주교회의 출판활동」,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569-605쪽.

오용록, 「상여소리를 통해 본 노래의 형성」, 󰡔한국음악연구󰡕 제30집, 서울: 한국국악학회, 2001, 241-257쪽.

임재혁, 「연옥교리의 이해」, 󰡔이성과 신앙󰡕 제26호, 수원가톨릭대학교, 2003, 153-17

7쪽.

윤민구, 「전례의 토착화」, 󰡔전례영성의 토착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2, 27-39쪽.

전정임, 「가톨릭 교회음악가 이문근 연구」, 󰡔음악과 민족󰡕 제29호, 부산: 민족음악학회, 2005, 69-89쪽.

조수현, 「진정한 일치의 기도가 되기를 -새 상장예식서와 연도의 바람직한 미래」, 󰡔생활성서󰡕, 서울: 까리따스수녀회 생활성서사, 2003, 74-77쪽.

주은경, 「한국 천주교 장례예식서 󰡔성교예규󰡕와 󰡔상장예식󰡕의 연도」, 󰡔음악과 민족󰡕 제35호, 부산: 민족음악학회, 2008, 175-202쪽.

＿＿＿, 「한국 천주교 장례예식서를 통해 본 장례문화와 연도(煉禱)의 노래문화」, 한국음악사학보 제40집, 한국음악사학회, 2008, 342-360쪽.

최기복, 「유교의 상례에 관한 연구 -그 인륜성과 종교성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대학원, 1979, 7-69쪽.

＿＿＿, 「유교와 서학의 사상적 갈등과 상화적 이해에 관한 연구 -근세의 제례문제와 다산의 종교사상의 관련하여-」, 성균관대학교 박사논문, 1989

＿＿＿, 「유교의 효 사상을 통해서 본 하느님 섬김의 한국적 이해」, 󰡔한국그리스도사상󰡕,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1998, 71-97쪽.

＿＿＿, 「한국 전통문화와 천주교회의 충돌」,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 50-86쪽.

＿＿＿, 「조상제사와 일본 천주교회」,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최종민, 「천주교 연도의 음악적 구조 -구연도를 중심으로」, 󰡔음악과 민족󰡕 제27호, 부산: 민족음악학회, 2004, 177-199쪽.

최창무, 「한국 천주교회와 조상 제사의 공인」, 󰡔사목연구󰡕 제3집, 1996, 203-226쪽.

최필선, 「초기 한국 가톨릭교회음악에 대한 연구」, 동아대학교대학원 석사논문, 1989, 61-62쪽.

최윤환, 「󰡔천주성교공과󰡕의 원본」, 가톨릭대학신학부 논문집 2, 1976, 35-74쪽.

하성래, 「한국 천주교회의 한글번역 활동」,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469-529쪽.

허윤석, 「한국 천주교 상제례(喪祭禮)문화의 토착화」, 󰡔천주교 한마음운동본부 심포지움󰡕, 서울: 천주교한마음운동본부, 2002, 1-25쪽.

황영삼, 「한국 천주교 상장예식과 한국 전통상장례에 나타난 죽음이해」, 대구가톨릭대학교대학원, 2005, 22-69쪽.

황현, 「무속과 가톨릭의 장례식 비교 연구」, 수원가톨릭대학교, 1995

<b>Ⅲ</b><b>. </b><b>유교식 상장의례</b><b>(</b><b>喪葬儀禮</b><b>)</b>

김창선

상장례는 우리문화의 원류로 죽음을 맞이한 이후부터 망자(亡者)가 아닌 생자(生者)에 의하여 한 인생을 종결시키는 통과의례의 마지막 관문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본연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ol>
 	<li><b> </b><b>상례의 어의</b><b>(</b><b>語義</b><b>)</b></li>
</ol>
『예서』에는 소인의 죽음은 육신이 죽은 것이기 때문에 ‘사(死)’라 하고, 군자의 죽음은 도를 행함이 끝난 것이기에 ‘종(終)’이라 하여 사와 종의 중간의 의미를 택하여 ‘없어진다’는 뜻이 담긴 ‘상(喪)’자를 써서 ‘상례’라 한다.
<ol>
 	<li><b> </b><b>유교식 상장의례 절차</b></li>
</ol>
유교식 상례는 19개의 절차로 이를 행하는 생자(生者)의 심정변화에 따라 크게 세 단계로 구분
<table>
<tbody>
<tr>
<td>『예서』 19개 절차

<b>초종의례</b><b>(</b><b>임종에서 입관</b><b>)</b>

초종(初終), 습(襲), 소렴(小殮), 대렴(大殮)

<b>장송의례</b><b>(</b><b>성복에서 반곡</b><b>)</b>

성복(成服), 조상(弔喪), 문상(聞喪), 치장(治葬), 천구(遷柩),

발인(發靷), 급묘(及墓), 반곡(反哭)

<b>상제의례</b><b>(</b><b>우제에서 길제</b><b>)</b>

우제(虞祭), 졸곡(卒哭), 부제(祔祭), 소상(小祥), 대상(大祥),

담제(禫祭), 길제(吉祭)</td>
</tr>
</tbody>
</table>
<b>첫 번째 초종의례</b><b>(</b><b>初終儀禮</b><b>): </b><b>임종에서 입관까지</b>

임종에서 대렴까지 초종의례는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애통 속에서 상사(喪事)를 행하지만 망자가 다시 소생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있다.

<b>1) </b><b>초종</b><b>(</b><b>初終</b><b>): </b><b>임종에 대한 준비</b>

-속광(屬纊): 임종과 죽음의 확인

-초혼(招魂): 다시 살아나기를 비는 것

-수시(收屍), 입상주(立喪主), 호상(護喪) 역복(易服), 고묘(告廟),

부고(訃告), 사자밥 차리기(무속:일직사자와 월직사자), 소임분담(호상, 사서 등), 상구 준비

<b>2) </b><b>습</b><b>(</b><b>襲</b><b>): </b><b>시신</b><b>(</b><b>屍身</b><b>)</b><b>을 목욕시키고 의복을 갈아입히는 절차</b>

-반함(飯含): 저승길 양식

-조발낭(爪髮囊): 손톱, 발톱, 머리카락 주머니

<b>3) </b><b>소렴</b><b>(</b><b>小殮</b><b>): </b><b>시신을 옷과 작은 이불로 싸는 의식</b>

- 습이 끝나면서 시신을 의금(衣衾)으로 수렴(收斂)하는 절차로써 뼈가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

- 괄발(括髮): 풀었던 머리를 묶음

- 설영좌(設靈座), 명정(銘旌), 전(奠),

<b>4) </b><b>대렴</b><b>(</b><b>大殮</b><b>): </b><b>소렴 다음날에 행하며 입관</b><b>(</b><b>入棺</b><b>)</b><b>도 동시에 행한다</b><b>.</b>

-전(奠), 조석곡(朝夕哭), 초빈(草殯)

<b>두 번째 사자</b><b>(</b><b>死者</b><b>)</b><b>를 보내는 장송의례</b><b>(</b><b>葬送儀禮</b><b>)</b>

성복에서 안장에 이르는 장송의식 단계는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잘못으로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죄의식이 강하게 작용해 장송에 대한 최대한 정성을 쏟게 된다.

<b>5) </b><b>성복</b><b>(</b><b>成服</b><b>): </b><b>성복례</b>

대렴 다음날 상가 사람들이 각각 상복을 입는 것으로 고인(故人)과의 친소 관계에 따라 소재, 형태가 다르다.

- 망자와 8촌 이내 근친 간에 친소에 따라 상복(참최복, 재최복, 대공 9월, 소공 5월, 시마복) 을 입고 정해진 기간 복상(服喪)

- 설영침(設靈座): 손님이 죽은이에게 슬픔을 나타내는 장소

- 상차(喪次): 주상이하 상제들이 있는 장소

- 조석전(朝夕奠), 조석상식(朝夕上食), 무시곡(無時哭)

<b>6) </b><b>조상</b><b>(</b><b>弔喪</b><b>): </b><b>조상</b><b>(</b><b>弔喪</b><b>)</b><b>과 문상</b><b>(</b><b>問喪</b><b>)</b>

조문객이 상인(喪人)을 만나 조문하는 것. 『예서』에 의하면, 성복전에는 손님이 와도 빈소 밖에서 입곡(立哭)하고, 성복 후에야 비로소 상인과 정식으로 조문을 한다.

<b>7) </b><b>문상</b><b>(</b><b>聞喪</b><b>): </b><b>상주</b><b>(</b><b>喪主</b><b>)</b><b>가 타지</b><b>(</b><b>他地</b><b>)</b><b>에서 상사</b><b>(</b><b>喪事</b><b>)</b><b>를 들었을 때 행하는 절차</b>

부모의 상이면 우선 곡을 하고 옷을 바꾸어 입고 상가를 향하여 길을 떠난다. 도중에 슬픈 마음이 나면 곡을 하고, 상가가 보이면 다시 곡을 한다. 집에 들어서서는 영구 앞에서 재배하고, 성복을 하고 다시 곡을 한다.

<b>8) </b><b>치장</b><b>(</b><b>治葬</b><b>): </b><b>장지</b><b>(</b><b>葬地</b><b>), </b><b>장일</b><b>(</b><b>葬日</b><b>)</b><b>을 정하고 신주</b><b>(</b><b>神主</b><b>)</b><b>와 지석등을 만든다</b><b>.</b>

<b>9) </b><b>천구</b><b>(</b><b>遷柩</b><b>): </b><b>발인 전날 망자가 사당에 하직하는 절차</b>

실제 관행에서는 천구의 절차는 거의 소멸되고 발인 전날 저녁에 망자와 마지막 이별을 한다는 의미에서 제(祭)를 지냄

1<b>0) </b><b>발인</b><b>(</b><b>發靷</b><b>): </b><b>장지로 떠나는 행상과 노제</b><b>(</b><b>路祭</b><b>)</b>

망자가 장지로 향하는 절차. 아침에 상여를 꾸미고, 영구를 옮겨 싣는다.

<b>11) </b><b>급묘</b><b>(</b><b>及墓</b><b>): </b><b>영구</b><b>(</b><b>靈柩</b><b>)</b><b>의 장지 도착 </b><b>(</b><b>묘택과 후토제</b><b>(</b><b>后土祭</b><b>)</b>

상여가 장지에 도착 매장하기까지의 절차로 상여가 장지에 도착하면 영구를 광중의 남쪽에 모시고 상주들은 광중의 양옆에 서서 곡을 한다. 다음에 상주들은 곡을 멈추고 영구를 광중에 내린다.

1<b>2) </b><b>반곡</b><b>(</b><b>反哭</b><b>): </b><b>혼백을 집으로 모시고 오는 절차</b>

본가(本家)로 반혼(返魂)하는 절차로 집에 도착하면 축관이 영좌에 신주와 혼백을 모신다.

<b>세 번째 상제의례</b><b>(</b><b>喪祭儀禮</b><b>) </b><b>우제에서 길제까지</b>

시신을 안장하고 처음 지내는 우제부터 길제까지 상제의식은 내재화된 단계로 제사를 통해 부모와 통교하며, 해가 두 번 바뀌어 슬픔도 어느 정도 잊혀 길제에 이르러서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와 상례는 끝나게 된다.

<b>13) </b><b>우제</b><b>(</b><b>虞祭</b><b>): </b><b>혼령을 평안하기 위한 제사 </b>

망자의 시신을 매장하였으므로 그의 혼이 방황할 것을 우려하여 위안(慰安)하는 절차로, 초우제·재우제·삼우제의 세 번이 있다. 초우제는 장일(葬日)에 지내고 재우제는 유일(柔日)에 지내고, 삼우제는 강일(剛日)에 지낸다.

1<b>4) </b><b>졸곡</b><b>(</b><b>卒哭</b><b>): </b><b>수시로 하던 곡을 멈추는 졸곡</b>

무시곡(無時哭)을 그친다. 1개월∼3개월이 지난 뒤에 행하는데, 이때 제를 올린다. 삼우제 이튿날이나 100일쯤 되는 때 지내며 졸곡제 이후 조석에만 곡을 한다.

<b>15) </b><b>부제</b><b>(</b><b>祔祭</b><b>): </b><b>새 신주를 조상 신주 곁에 모시는 제사</b>

망자의 신주를 그 조상의 곁에 모실 때 지내는 제사로 졸곡 다음날 지낸다. 실제로 사당이 있는 집에서만 지내며 일반적으로 지내지 않는다.

<b>16) </b><b>소상</b><b>(</b><b>小祥</b><b>): </b><b>사망 </b><b>1</b><b>주기를 새기는 소상</b><b>(</b><b>喪</b><b>→</b><b>祥</b><b>)</b>

초상으로부터 13개월이 되는 날, 즉 1주기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연복(練服)으로 갈아입고 신주를 영좌(靈座) 모시고 제를 올린다. 이때부터 조석곡(朝夕哭)이 폐지하고 삭망(朔望:초하루,보름)에만 곡을 한다.

<b>17) </b><b>대상</b><b>(</b><b>大祥</b><b>): </b><b>사망 </b><b>2</b><b>주기를 새기는 제사</b>

초상으로부터 25개월째 되는 날 즉 2주기에 지내는 제사로 절차는 소상과 영좌를 철폐하고 지팡이는 태운다. 탈상을 하고 혼백은 묻는다.

<b>18) </b><b>담제</b><b>(</b><b>禫祭</b><b>): </b><b>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제사</b><b>, </b><b>담제와 길제</b>

초상으로부터 27개월째 되는 달의 정일(丁日) 또는 해일(亥日)에 사당에서 지내며 3일 전부터 재계하고, 전날 사당에 고한다, 이때는 담복(禫服)을 준비하는데, 화려한 빛깔을 제외한 그 밖의 옷을 말한다. 이후부터 음주(飮酒)와 육식(肉食)이 허용.

<b>19) </b><b>길제</b><b>(</b><b>吉祭</b><b>): </b><b>담제를 행한 다음 달에 정일이나 해일을 택하여 지내는 제사</b>

택일이 되면 3일 전부터 재계하고, 전날 사당에 고한다. 길복이라 하여 평상시의 제복을 준비.
<ol>
 	<li><b> </b><b>결어</b></li>
</ol>
<table>
<tbody>
<tr>
<td><b>『</b><b>유교 상례의 핵심은 삼년상</b><b>』</b>

<b>출생하여 혼자 먹고 활동할 수 없는 젓먹이 </b><b>3</b><b>년 동안 부모가 </b>

<b>품안에서 온각 정성과 사랑으로 길러준 은혜에 대한 보답</b></td>
</tr>
</tbody>
</table>
- 상장례는 본인을 위해서 치르는 것이면서도 막상 본인이 주관하지 못하는 유일한 의례

- 죽은 자에 대한 공경심과 공포심 등이 어우러지면서 상장례 예법은 가장 보수적인 문화로 전승

- 우리나라 상장례는 전통 무속의례나 불교의례에 주자가례 예법이 접목되면서 다른 예법보다도 준엄성이 돋보임

- 우리 민족의 토착 세계관은 무속(巫俗)으로 육신은 죽었어도 혼은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사생관.

- 상례에 곡(哭)은 필수적이며, 슬픔을 표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9:09:25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넷. 동학농민혁명과 내포의 천주교회]]></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28]]></link>
			<description><![CDATA[<b>넷</b><b>. </b><b>동학농민혁명과 내포의 천주교회</b>

내포학 편집실

 

<b>Ⅰ</b><b>. </b><b>동학농민혁명과 내포의 천주교회</b> 105
<ol>
 	<li>동학과 천주교 105</li>
</ol>
1.1. 천주교를 위협하는 동학 106

1.2. 동학농민혁명 연보 113
<ol>
 	<li>내포지역의 동학 유입 114</li>
</ol>
2.1. 박인호와 박덕칠 116

2.2. 정태영(丁泰榮, 1859~1922) 119
<ol>
 	<li>파스키에 신부의 보고서에 드러난 내포의 상황(1890년~1894년) 121</li>
 	<li>뮈텔 주교 일기 중 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1894.5~1895.6) 129</li>
</ol>
<b>Ⅱ</b><b>. </b><b>서천의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연구 과제</b> 156
<ol>
 	<li>머리말 156</li>
 	<li>서천지역 동학농민혁명의 배경 156</li>
</ol>
2.1. 역사 지리적 환경 156

2.2. 동학교세의 성장과 유적·유물 160
<ol>
 	<li>서천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162</li>
</ol>
3.1. 한산읍성 전투 164

3.2. 화양산 전투 166

3.3. 서천읍성 전투 168

3.4. 비인읍성 전투 169
<ol>
 	<li>서천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의의와 연구과제 170</li>
</ol>
4.1. 서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의의 170

4.2. 서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연구과제 173

<b>Ⅲ</b><b>. </b><b>동학혁명의 위험을 피해 전주 선교사들의 피신과정에 대한 고찰 </b> 177
<ol>
 	<li>동학농민혁명 배경 177</li>
 	<li>2차 봉기(전주성 점령) 177</li>
 	<li>전주성 조선정부군 철수 상황 177</li>
 	<li>전주 지역의 선교사와 신자들의 위기상황 178</li>
</ol>
① 동학도들의 살육과 방화 178

② 조조신부의 피살소식 178
<ol>
 	<li>조조(趙得夏)신부 피살과 청국의 배상금 배분 179</li>
</ol>
1)피살과정 179

2)조조(趙得夏)가족과 조선 선교회 배상금 배분요청 179
<ol>
 	<li>비에모(禹一模)와 보두네(尹沙勿) 피신과정 179</li>
</ol>
1) 성불공소 15일간 굴속에 숨은 선교사들 179

2) 두 선교사 탈출 할 프랑스 군함 지원요청 180

3)두 선교사 귀환할 프랑스 군함 출동 180

4) 전주 지역에서 탈출 180

5) 인솔자 이덕화(李德化) 달개시장에서 동학도(起包)에 체포 181

6) 두 선교사 다시 구원요청과 &lt;앵콩스탕 호&gt; 출동 183

7) 소형선박 이용 피신결정 183
<ol>
 	<li>두 선교사를 탈출을 도운 하급관리 포상 184</li>
</ol>
<b>Ⅳ</b><b>. </b><b>청양군</b><b>, </b><b>정산현의 동학여당</b><b>(</b><b>東學餘黨</b><b>) </b><b>천주교 투탁사건</b> 201

1 청양군(靑陽郡) 201

2 정산현(定山縣) 203

 

<b>들어가는 말</b>

1876년 개항 이후 조선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적 사회 모순의 심화였으며, 밖으로는 조선을 약탈하기 위해 밀려드는 외세와 열강의 수탈과 주권의 유린에 대한 대응의 과제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상황은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특히 토지문제와 조세문제가 가장 극심했다. 양반 지주의 토지소유의 확대와 관리들의 탐욕은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이어졌고, 결국 조세수탈의 가중으로 민중들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사회상을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10만냥이 있어야 과거급제하고 감사 자리 하나에도 2만 냥이 있어야 하는데 그나마 안동김씨만 가능하다.’고 적고 있다.

서구의 새로운 도전은 한불수교조약 이후 좀 더 자유로워진 천주교의 포교 활동, 외국상선의 통상 요구, 자본주의 여러 나라들의 개항 요구와 선진 자본주의 제국에 의한 식민지화의 위협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아래의 표에서 보듯이 조선 정부로부터 열강들은 전국에 걸친 모든 이권을 챙겼다. 이는 곧바로 민중의 삶이 악화로 이어졌다.
<table>
<tbody>
<tr>
<td colspan="3"><b>열강에 빼앗긴 이권의 내용</b><b>(1876-1896)</b></td>
</tr>
<tr>
<td><b>연도</b></td>
<td><b>이권의 내용</b></td>
<td><b>침탈국</b></td>
</tr>
<tr>
<td rowspan="2">1876</td>
<td>무관세 무역권</td>
<td>일 본</td>
</tr>
<tr>
<td>외국화폐 통용권</td>
<td>일 본</td>
</tr>
<tr>
<td rowspan="5">1882</td>
<td>평안도․황해도 연안어채권</td>
<td>청</td>
</tr>
<tr>
<td>상해-인천 윤선운항권</td>
<td>청</td>
</tr>
<tr>
<td>해관 인사권</td>
<td>청</td>
</tr>
<tr>
<td>상해-시노모세키-부산-인천 윤선정기운항권</td>
<td>영국</td>
</tr>
<tr>
<td>한성(서울) 상점개설권</td>
<td>청</td>
</tr>
<tr>
<td rowspan="5">1883</td>
<td>부산-시노모세키 해저전선가설권</td>
<td>일 본</td>
</tr>
<tr>
<td>상해-인천 윤선정기운항권</td>
<td>영 국</td>
</tr>
<tr>
<td>전라․경상․강원․함경 연안어채권</td>
<td>일 본</td>
</tr>
<tr>
<td>조선연해 화물운송권</td>
<td>일 본</td>
</tr>
<tr>
<td>해관 수세권</td>
<td>일 본</td>
</tr>
<tr>
<td rowspan="3">1884~1885</td>
<td>인천-한성-의주 전선가설권</td>
<td>청</td>
</tr>
<tr>
<td>서울-부산 전선가설권</td>
<td>청</td>
</tr>
<tr>
<td>조선-일본 윤선정기운항권</td>
<td>일 본</td>
</tr>
<tr>
<td rowspan="3">1886</td>
<td>부산 절영도 저탄소설치권</td>
<td>일 본</td>
</tr>
<tr>
<td>전라도 새미운송권</td>
<td>독 일</td>
</tr>
<tr>
<td>창원(경남) 금광채굴권</td>
<td>일 본</td>
</tr>
<tr>
<td>1887</td>
<td>제주도 연해어채권</td>
<td>일 본</td>
</tr>
<tr>
<td rowspan="4">1888</td>
<td>도문강(두만강)운항권</td>
<td>러시아</td>
</tr>
<tr>
<td>한러은행 개설권</td>
<td>러시아</td>
</tr>
<tr>
<td>군함 밀무역권</td>
<td>청</td>
</tr>
<tr>
<td>경기도 연안제한어채권</td>
<td>일 본</td>
</tr>
<tr>
<td>1890</td>
<td>조선-일본 윤선정기운항권</td>
<td>일 본</td>
</tr>
<tr>
<td rowspan="3">1891</td>
<td>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td>
<td>일 본</td>
</tr>
<tr>
<td>경상도 연해포경권</td>
<td>일 본</td>
</tr>
<tr>
<td>원산 저탄소설치권</td>
<td>러시아</td>
</tr>
<tr>
<td rowspan="2">1892</td>
<td>인천-한성 한강운항권</td>
<td>청</td>
</tr>
<tr>
<td>화폐주조원료 독점제공권</td>
<td>일 본</td>
</tr>
<tr>
<td rowspan="2">1895</td>
<td>운산 금광채굴권</td>
<td>미 국</td>
</tr>
<tr>
<td>인천-부산, 인천-대동강, 인천-함경도 윤선정기항로 개설권</td>
<td>일 본</td>
</tr>
<tr>
<td rowspan="6">1896</td>
<td>경인철도 부설권</td>
<td>미 국</td>
</tr>
<tr>
<td>경원․종성 광산채굴권</td>
<td>러시아</td>
</tr>
<tr>
<td>인천 월미도 저탄소채굴권</td>
<td>러시아</td>
</tr>
<tr>
<td>압록강 울릉도 산림벌채권</td>
<td>러시아</td>
</tr>
<tr>
<td>경의철도 부설권</td>
<td>프랑스</td>
</tr>
<tr>
<td>동해 포경권</td>
<td>러시아</td>
</tr>
</tbody>
</table>
 

결국 내외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여 조선 사회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왕조 말기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동학이 창도 되었고, 민중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충청도 내포지역은 풍부한 물산과 지리적 이점으로 일찍이 양반사족이 정착하였으며, 이들은 신분적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봉건적 토지관계의 모순과 억압된 신분제도 아래에서 착취와 수탈의 이중고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국내외적 위기 속에서 거병(擧兵)하여 조선의 힘으로 외세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봉기하였다.

 

아산 지역에 동학이 포교되기 시작한 시기는 1860년대 후반이나 1870년대 초반으로 보고 있다. 아산 출신의 동학 지도자로는 안교선이 대표적인데, 안교선과 순흥안씨(順興安氏) 일가인 안교일(安敎一), 안교강(安敎綱), 안교백(安敎伯), 안교상(安敎常) 등도 초기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특히 안교선은 1870년대와 1880년대 동학 경전의 편찬과 교세 확장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안교선의 초기 활동 무대는 출신지 아산과 수원, 평택, 안성, 진위 등 경기도 남부 지역이었다. 경기도 남부 지역의 경우 1862년(철종 13) 동학 조직이 이미 확인되므로 경기도 남부와 인접한 아산의 안교선 등이 1860년대 후반이나 1870년대 초반에 동학에 입도한 후 아산 지역의 지도자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1892년(고종 29) 후반부터 1893년 초까지 동학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 전개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이 전개될 때 아산 지역의 동학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안교선이 아산포 대접주(大接主)로 임명되었다. 아산의 안교선과 신창의 김경삼(金敬三)이 이끄는 동학교도들은 1893년 3월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일본과 서양 세력을 배척하여 의병을 일으킨다.)’를 기치로 내세운 보은 집회에 참여하였다. 1894년 6월 청일전쟁에서 일제를 몰아낸 청국 군대가 아산만 백석포에 상륙하여 두 달 정도 주둔하였는데, 청국 군대 접대를 위한 인력 동원과 비용 조달은 아산 지역민에게 직접적인 부담이 되었다. 또 7월 30일 청일 양국군의 전투가 성환과 아산 지역에서 일어나면서 아산은 청일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에 아산 지역민들의 외세 침략에 대한 저항 의식이 크게 고조되었다. 청국 패잔병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으로부터 분탕질을 당한 아산 지역민들은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직접적으로 표출하였다. 같은 해 8월 12일 다리 공사를 하던 주민과 동학교도들이 다리를 지나가려던 일본인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아산 지역민들은 이 사건을 조사하러 온 일본 경찰들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위협하였다. 이 사건 이후 일본 침략 세력을 물리치자는 의지를 갖고 동학에 입도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1894년 9월 방구용, 방성모(方聖謀), 편덕진 등이 지도하는 온양의 동학농민혁명군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세우고 봉기하여 마을을 다니면서 군사들과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어 온양 관아의 무기도 탈취하고자 하였다.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편덕진은 백정(白丁)이었으며, 동학농민혁명군에는 향리(鄕吏)도 참여하였다. 양반 관료 지배체제에서 소외되었던 계층이 동학농민혁명군이 되어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면서 지역민을 수탈하는 탐관오리와 지방 토호들을 공격했다. 안교선이 이끄는 아산의 동학농민혁명군은 덕산포의 동학 농민군과 합세하여 10월 5일 아산 관아를 점령하여 군수 양재건(梁在謇)을 포박하고 탐관오리를 징벌한 후, 무기고를 부수고 병기를 탈취하였다. 이튿날에는 신창의 지루동에 주둔하면서 군세를 정비하였다. 아산의 동학농민혁명군은 온양의 금곡에서도 활동한 기록이 있는데, 아산에서 탈취한 무기와 민간에서 거둔 농기구를 온양으로 옮겨 무장력을 강화하였다. 당시 아산에 머물고 있던 유생 이범석(李範奭)이 남긴 『경난록(經亂錄)』에 의하면, 탐관오리를 징벌하고 양반 토호들로부터 재물을 탈취하는 동학농민혁명군을 보자 많은 주민과 청지기가 동학농민혁명군에 합류하였으며 노비들이 동요했다. 또한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를 풀어 면천시켰다는 기록이 남겨져 있다. 동학농민혁명군은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를 해체하고자 했다.

 

매천 황현의 기록에는 충청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호서는 본래 사대부가 모여 사는 곳이요, 훈척과 향재들의 원림이 서로 바라보여서 붕당을 이루고 있다. 또 무단이 풍속을 이루어서 억지로 장사를 사고 남의 산지를 억지로 빼앗아서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집이나 서민의 집에서는 원통한 호소가 뼈에 사무치고 있었다. 이런 때에 동학이 일어나자 어깨를 치켜 올리고 한번 소리치면 여기에 호응하는 자가 백만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김씨, 송 씨, 윤씨의 세 대족 및 그 밖의 재상의 이름난 집이나 부자로 살던 집이 졸지에 피폐함을 당한 사람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충청남도 청양의 유생으로 후일의 홍주 의병에 참여했던 임한주의 기록에도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때 직위에 있는 자들이 거의 국가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직 사리사욕에만 급급하여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백성의 재물을 박탈하여 10년 사이에 나라 형세가 날로 위태롭게 되어가니….

 

그러나 조정은 민심을 거부하면서 청(淸)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청나라 군대가 조선으로 들어오자, 일본 군대도 조선에 진출하게 되었다. 황토현 전투와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동학농민혁명군은 마침내 전주성에 입성하자(1894년 4월 27일), 조선정부는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다.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기에 이르자, 조선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일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톈진조약에 의거, 제물포(현재의 인천)에 병력을 투입하였다. 청군은 5월 5일(양 6월 8일) 아산만에, 일본군은 6일(양 6월 9일) 인천에 각각 상륙하였다. 일본은 어떻게든 조선에 군대를 진군시키려 하는 상황에서 동학농민혁명군과 조선 조정은 일본에게 좋은 구실을 제공한 것이었다.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위해 조선과 일본이 맺은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 1882년에 체결한 불평등 조약)은 일본이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이 조약을 근거로 내세워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기 위해 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군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아산만에 상륙했지만, 일본군은 아산만이 아닌 인천에 상륙 후 서울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5월 6일,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조선 조정은 5월 8일 “전주 화약”을 맺으며 청나라와 일본군대의 철수를 요구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었다. 동학농민혁명군과 조선 조정은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과 1894년 음력 5월 8일 “전주 화약”을 맺었다. 조선 조정은 농민군과 화약을 맺어 청군과 일본군이 모두 물러가게 하려 했다. 톈진 조약에 의거하면 조선의 변란이 진정될 때 양국 모두 즉시 병력을 철수하여야 하며 잔류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러 내려온 홍계훈은 음력 5월 8일, 농민군 지도부는 강화를 맺었다. 이때 전봉준은 폐정개혁안 27개조를 내놓았고, 이에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이 무조건 수용함으로써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동학농민혁명군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는데, 신식무기로 무장한 경군(京軍)과의 전투에서 피해를 입었을 뿐더러 동학농민혁명군의 주력인 농민들에게 농번기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청나라군을 치기 위해 권력이 약해진 대원군에게 1894년 7월 5일 치욕적인 각서를 쓰게 한 후 전열을 가다듬어 인천 제물포항에서 청군을 몰아냈다. 서울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을 아산으로 이동시켰고, 7월 26일 수많은 일본군이 수원 쪽으로 출발했다. 일본군은 7월 27일 제물포항에서 9척의 군함이 아산으로 향하던 중 풍도에 있던 3척의 청나라 군함 중 2척을 침몰시키며 아산만으로 들어와 백석포에 상륙하여 아산에 주둔해 있던 청국군과 대격전을 벌였다. 영문도 모르고 있던 아산 주민들은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고,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숨어다녔다. 한편 영인면 아산 싸움에서 수세에 몰린 청나라군은 일본군에게 완전히 패하여 일부는 성환 쪽으로 일부는 천안 쪽으로 후퇴하는 등 거의 전멸 상태에 이르렀고, 아산 전투는 일본의 대승리로 끝났다. 아산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와 이를 공략하러 평택으로 내려온 일본군을 빗대어 “아산이 깨지나, 평택이 무너지나.”라는 말이 생겨났다. 청군(淸軍)은 아산 주둔지에서 약 15km 떨어진 성환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배했다. 아산이 깨진 것이다. 청나라 패잔군은 뿔뿔이 흩어져 공주로 도망쳤다. 일본군은 아산의 청군 주둔지까지 밀고 내려가 그곳에서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해 승리를 자축했다. 성환 전투가 벌어진 날은 7월 29일(양력)이었다. 나흘 전인 7월 25일 아산만 앞 풍도(현재 안산시 지역)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를 상대로 승리한 이후 일본 육군이 거둔 첫 승리였다. 일본인들은 한일합방(1910년, 경술국치)을 전후해 성환에 잇따라 승전비를 세웠고, 청군이 주둔했던 아산에도 일본 승전비를 세웠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당시 아산에선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개선문을 만들고 대대적인 일본군 환영식을 열어야만 했다. 일본인들은 영인면 아산리 영인산 기슭에 ‘일청전쟁승전기념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일본 모두 식량·인부·우마 등에 대한 준비없이 전쟁을 일으켜 군수물자 대부분을 현지에서 조달했다. 아산·천안 일대에서는 강제적인 주민 동원과 소·돼지 약탈이 자행됐다. 특히 아산에 40여 일 주둔하는 동안 주민들 피해는 막심했다. 일본군이 현재 옛 아산 감영이 있던 영인면 아산리에 입성했을 때 주민들 모두 피난을 가서 민가가 텅 빈 상태였다고 한다.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뮈텔 주교는 전국 각 본당에 훈령을 내려 사제들을 모두 서울로 올라오게 하였다. 이때 전라도에서는 동학 농민 운동이 발생하여 500여 호의 천주교 신자들이 동학도들에 의해 약탈과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전주에서 50리 떨어진 교우촌에서 전교 중이던 조조(Jozeau) 신부는 명동 주교의 연락을 받고 마부만 데리고 서울로 향해 출발하였다. 그러나 1894년 7월 28일 오후 공주강을 건너 광정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고 출발하여 얼마 가지 않았을 때, 아산 전투에서 패하고 공주로 쫓기던 청나라의 패잔병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하게 된다.

 

청일전쟁 시기 충청남도 아산 지역의 동학도와 주민들은 일제 침략에 저항하면서 양반 중심의 신분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안교선(安敎善)이 이끄는 아산의 동학도들은 1893년(고종 30) 동학교단의 보은 집회에 참여하여 외세 침략에 저항했다. 이어 청일전쟁으로 항일의식을 고조시킨 아산 지역민들은 동학에 입도하여 항전 의지를 다졌다. 1894년(고종 31) 9월 이후 아산의 안교선과 온양의 방구용(方九用) 등이 동학도와 주민들을 규합하여 일본군에 점령당한 관아를 습격하고 무장을 강화하였으며, 정부의 힘이 약해진 것을 기회로 부정부패를 일으키는 탐관오리와 양반 토호를 공격했다. 안교선이 이끄는 호서창의소(湖西倡義所)는 충청남도 서부 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내포지역의 동학조직은 관의 지목과 탄압을 피하면서 12개 포를 구성해서 참석할 정도로 크게 번성했다. 동학농민혁명의 “보국안민”,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재기포가 일어났을 때는 면천 승전곡에서 일본군의 정예부대를 퇴각시켰으며 북상을 기도하기 위해 신례원 관작리에 주둔, 이곳에서도 관군, 유회군을 크게 무찔러 내포 최대 승전지를 일궈낼 정도였다. 그러나 10월 28일 홍주성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과 대규모 전투에서 패하였다.

동학농민혁명군은 우금치전투와 청주전투에서도 패배하였다. 1894년 10월 말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에서 군대를 아산으로 보내 수많은 동학농민군을 색출하여 체포하고 처형하였다. 11월 온양의 황천일(黃千一), 정구영(鄭九永), 유덕신(劉德信), 안완석(安完石), 이구길(李九吉), 김일석(金一石), 백원손(白元孫) 등은 온양읍에서, 김기형(金琦亨), 이호득(李好得), 이성오(李成五), 정군칠(鄭君七), 이우하(李禹夏), 권태진(權泰鎭), 엄흥록(嚴興祿) 등은 신창 앞길에서 처형당하였다. 이 밖에도 수많은 아산의 동학농민군이 체포 투옥되었다. 김개남은 12월 1일 태인에서, 전봉준은 순창에서 12월 2일, 손화중은 12월 11일 고창에서 체포되어 농민전쟁의 3대 지도자 모두가 체포당하였다. 안교선은 12월 24일 경기도 수원 남벌원(南筏院)에서 처형당하여 효수되었다. 신창의 이신교도 홍주전투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관군에 체포되거나 처형당한 동학농민군의 가산도 몰수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동학 농민군의 희생과 피해는 후손들에게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안교선의 처형 사실은 효수된 사진과 함께 일본 신문에 보도되었고, 이사벨라 비숍(I. B. Bishop)의 조선 여행기인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도 소개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제반봉건을 목표로 하였던 동학에서 반제반봉건의 기본 사상을 찾아내고 해석하여 현실에 적용하였던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b>Ⅰ</b><b>. </b><b>동학농민혁명과 내포의 천주교회</b>

 
<ol>
 	<li><b> </b><b>동학과 천주교</b></li>
</ol>
 

동학농민혁명은 반제반봉건을 추구하며 천주교는 외세와 긴밀하게 연결된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조선 정부로부터 邪學이라는 같은 대접을 받고, 신자 구성이 비슷하였음에도 동학은 천주교에 부정적이었다. 동학과 천주교는 협력의 방안을 모색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동학이 서학과의 대결이라는 면에서 창교되었기에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천주교는 동학과 연관된 농민전쟁을 반란으로 이해하였고 농민군을 폭도로 보았고, 농민혁명군은 천주교를 외국세력과 연계된 근거지로 생각하여 반제 척양의 입장에서 공격하였다.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천주교는 많은 공격을 받고 피해를 입었다. 내포의 첫 본당인 간양골(공세리성당)과 양촌(합덕성당)도 큰 피해를 입었다. 그것은 동학농민혁명이 반외세라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민혁명의 주도세력이 서학과 대결하고자 창교된 동학교도이거나 동학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최제우가 구도에 한창이던 1850년대 중반에 천주교 교리서를 접했고, 동학을 창시한 1860년대 초에 의도적으로 천주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최제우가 천주학 교리서를 접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동학교단 최초의 역사서인 「최선생문집도원기서」의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을묘년 춘삼월에 봄잠을 즐기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밖에서 주인을 찾는 어떤 선사가 있었다. … “소승은 금강산 유점사에 있습니다. 그저 불경이나 읽었으되 결국은 신비로운 체험이 없어 백일의 공을 드렸습니다. … 공을 마치는 날, 탑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가 문득 깨어 탑 앞을 보니 탑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거두어 들춰보니 세상의 보기 드문 책이었습니다. … 생원께서는 이 책을 아시겠는지요?” … 선생께서 들춰보았으나 유교나 불교의 책을 읽는 문리로는 합당하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웠다. 승려가 말했다. “그렇다면 3일의 말미를 드리겠습니다. … 그 사이에 자세히 살펴 읽으심이 어떠하신지요?” 그러고는 물러갔다. 그날이 되어승려가 와서 물었다. “혹시 깨달은 것이 있으셨습니까?” 선생이 대답했다. “나는 이미 이해했습니다.” 승려가 백배사례하고 더없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 책은 생원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소승은 그저 그것을 전할 뿐이니 이 책에 쓰인 대로 행하소서.” … 그 후 깊이 살펴 이치에 통하니 책에는 기도의 가르침이 있었다.

 

위의 글을 천도교에서는 최제우가 1855년에 하늘에서 기이한 책을 받은 사건이라 하여 을묘천서(乙卯天書) 사건이라 칭하지만, 유가나 불가의 책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해독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의 천주실의(天主實義)로 보기도 한다. 최제우는 천주교 교리의 일부를 그의 사상 안에 포용하였다. 그는 동학이 서학과는 “運數인즉 같고 道인즉 한가지로되 理인즉 다르다”(『東京大典󰡕, 論學文」)고 설명하였다. 동학을 서학과 같은 운수라고 한 것은 두 종교 사상이 모두 흥성하는 운수임을 말한 것이요, 도인즉 한 가지라고 한 것은 동학이나 서학이나 天道인 것이 동일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서학이 자기의 영혼만 있음을 알고 부모의 영혼 있음을 인정하지 않아 부모의 제사조차 지내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의 일부가 서학에 경도(傾倒)되기 시작하였는데 서학은 백성을 구제하기는커녕 서양세력의 침입을 선두에서 인도하는 힘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1886년 한불 수교조약 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은 내포교회는 길고 참혹한 박해를 끝내고 다시 일어나기 위해 준동하고 있었고, 박해를 피해 흩어졌던 이들이 다시금 돌아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b>1.1. </b><b>천주교를 위협하는 동학</b>

 

1864년 3월 10일 조정은 동학의 초대 교주인 최제우(崔濟愚, 1824~1864, 水雲)를 대구 감영에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했다. 이후 동학은 경상도와 강원도 산간지대에서 기반을 다지고 활동하다가 1871년 영해에서 동학교도 이필제(李弼濟, 1825~1871)가 교조신원을 핑계로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 호남지역은 최제우가 살아있을 때부터 순회하여 일찍부터 이곳에 신자가 있었는데, 이를 이어 제2대 교주 최시형도 1880~1890년대에 이 지역을 순회하여 포교에 힘썼다.

동학은 스스로를 수도(修道)하는 유학자(儒學者)란 뜻의 ‘도유(道儒)’라고 불렀고, 평시에는 스스로를 ‘도인(道人)’이라 불렀다. ‘도인’이 배운 것을 ‘도’라고 하였고, 도인들의 무리를 포(布)라고 하였으며, 포가 모인 것을 접(接)이라고 하였다

동학 교리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목으로 처형된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 명예회복)을 위해 1893년 2월 11일, 서울의 대궐 앞에 동학교도가 모여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올린 가운데 잘 드러난다.

 

각 도의 유학(幼學) 신 박광호(朴光浩) 등은 황공하옵게도 거듭 머리를 조아려 삼가 목욕재계하고 백번 절하며 … 주상전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 지금 전하는 신 등의 천지부모(天地父母)이고, 신 등도 전하가 기르는 어린애입니다. … 이처럼 매우 원통한 처지를 천지부모에게 호소하지 못한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다시 어디로 돌아갈 곳을 정하겠습니까? … 원만하고 흠이 없는 이 대도(大道)가 남에게 날조를 당해서 이처럼 만고에 처음 있는 횡액을 겪게 하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인의예지(仁義禮智)와 효제충신(孝悌忠信) 및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리(道理)에 비추어도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할 것이며, 만약 조금이라도 어그러지는 일이 있다면 감히 도학(道學) 두 글자로 의논에 참여하지 못할 것입니다. … 그 글은 시(詩), 서(書), 역(易), 춘추(春秋)이고 그 법은 예약(禮樂)과 형정(刑政)이며, 그 도는 온화, 양순, 공손, 검소, 효도, 형제간의 우애, 친족 및 외척들과 화목, 친구간의 믿음과 구휼, 인(仁), 성(誠), 의(義), 충(忠), 화(和)로 그 기질을 변화시킬 뿐입니다. … 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침이고 수심정기(修心正氣)는 우리가 다시 정한 것입니다. … 성, 경, 신의 세 가지 단서로 하늘과 땅을 공경해서 받들고 … 유(儒), 불(佛), 도(道)를 통일하는 이치입니다. …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동학의 교리는 유학의 덕목인 성(誠), 경(敬), 신(信)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수심정기(修心正氣)와 포덕광제(布德廣濟)로 요약될 수 있다. 초대교조 최제우는 성(誠)․ 경(敬)․ 신(信)으로서 도를 수립하는 요체로 삼았고, 수심(修心)과 정기(正氣)를 도를 수련하는 요점으로 삼았으며, 덕을 펴고 대중을 널리 구제하는 것(布德廣濟)을 도를 행하는 연장으로 삼았다.

 

동학교인들은 서울의 서양 각국 외교관의 공관으로 서학(西學)을 배척하는 격문을 발송하고 동학이 외세를 배척함을 분명히 했다.

서학(西學) 종교의 두령(頭領)들은 우리가 타이르는 일을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 관문을 설치하고 종교를 전파하는 일은 조약 중에 너희들 두령에게 허용하지 않은 것인데도 제멋대로 몰려와서 명목상 상제(上帝)를 공경해서 기도를 글로 만들어 야소(耶蘇)를 믿는다고 한다. 그러나 다만 예수를 찬미하는 법으로 삼는 바른 마음과 성실한 뜻의 배움은 전혀 없다. 또한 말을 실천하고 행실을 돈독하게 하는 실제도 없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부모가 살아서는 공양하고 순종하는 도가 없고 죽어서는 곡읍(哭泣)과 분상(奔喪)하는 절차가 없으니 이것을 어찌 떳떳한 인륜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너희는 구걸하는 부류로 너희 교회에서 관례적으로 정한 돈과 밥을 지나치게 탐하고 훌륭한 거처와 음식에 마음을 쓴다. 처음에는 영어 교리를 가르치다가 한문으로 양가의 자손을 꾀어 끝내는 너희들의 교회 속으로 압박해서 들게 한다. … 이렇다면 너희는 반드시 영원히 고생하는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두렵지 않은가? … 속히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병사와 인자하고 의로운 방패로 죄를 성토하고 토벌할 것이다.

 

동학이 천주교를 타도해야 할 외세로 본 이유는 천주교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학이 추구하는 평등한 세상, 사람 중심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천주교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그들에게는 관심 밖의 일이었고, 미국에서 들어온 개신교의 선교방식과 외세의 약탈을 모두 하나의 시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병인양요나 페롱신부와 오페르트의 도굴사건 등이 가지고 있는 이면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적대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학교도의 주장에 대해서 당대의 온건 개화관료인 김윤식(金允植, 雲養, 1835~1922)은, “동학당이 전라감영으로 보낸 동학당의(東學黨議)를 보니, 충효열(忠孝熱)을 세 가지 어려움[三難]으로 삼고 일본과 서양을 물리치는 것을 대의로 삼는다고 한다.”라고 하면서 별도의 비판 없이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다수의 관료들은 동학을 서학과 함께 싸잡아 비판했다.

내포 지역에 농학 농민군이 봉기했을 때, 정부나 관아에서는 아산 지역 일대의 동학도들을 회유하며, 중앙 정부에서 내려온 글 등을 베껴 마을마다 붙이며 봉기에 참여하지 않도록 했으며, 동학을 탈퇴하도록 압박하기도 하였다.

 

호남을 비롯한 전국의 동학도에 대해서 그 발생부터 사상적, 사회적 배경을 자세히 고찰한 유학자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은 동학이 비록 서학을 비판하지만 서학을 바꾸어 부른 데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이 같은 사학(邪學)이 횡행하게 된 것은 붕당(朋黨)의 폐해로 유림(儒林)이 쇠퇴하고 정치가 문난해져 민생이 도탄에 빠진 데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고 진단했다.

 

황현은 동학(東學)을 천주학(天主學)의 다른 이름으로 인식했다. 최제우가 받아들인 학문은 ‘천주’를 받드는 것인데도 서학(西學)과 구분하고자 동학(東學)이라고 고쳐 불렀다. 동학은 서학과 다를 바 없고 서학(천주학)의 부스러기를 주워 모은 것이며, 동학은 정감록을 빌미로 왕조교체를 예언하여 사회적 혼란을 부추기며 부적과 주문으로 백성을 우롱하는 것으로 보았다. 최시형의 혹세무민은 지식인에게 통하지 않았고, 귀천을 섞어놓고 천한 이들과 원망을 가진 이들을 모아 부자와 양반을 괴롭혔으며, 유전무죄(有錢無罪)와 형벌을 이용한 토색질을 했다고 보았다.

 

1890년대 호남에는 동학 외에도 사대부들의 입장에서 볼 때 다양한 이단 학문들이 발생하고 있었는데, 향촌사회의 유림들은 특히 동학의 후신인 남학과 동학의 모태로 여기던 서학의 교세확장에 대해 우려를 표하였다.

 

전라감사 이도재가 도내를 순시하다가 진안현에 이르러 불학(佛學)의 간사한 무리 10여 명을 체포하여 전주로 이송하여 가두어 두었다가 목을 베었다. 불학은 또 ‘남학(南學)’이라고도 하는데, 몇 년 전에 처음 생겼으나, 그 주창자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동학과 더불어 함께 일어났으나 배움이 달랐다. 그러나 그 법회를 할 때 미친 듯이 노래를 부르고 어지럽게 춤을 추며 껑충껑충 뛰면서 주문을 외우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 동학에서 빠져나온 자들이 점점 남학으로 몰려들었다. 땅을 생업의 터전으로 여기며 장차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이 마치 동학이 처음 일어났을 때와 같았는데, 대저 이들 또한 동학과 같은 종류였다. 바야흐로 사로잡혀 죽임을 당하였는데 남학에 들어가는 자들이 계속 이어졌다. … 이때 전라우도(全羅右道) 일대에는 서학이 크게 번졌다. 서양 선교사가 몸소 다니며 우매한 백성들에게 권유하였는데 바람에 쓸려가듯 추종하였다. 그것을 성교(聖敎)라고 불렀다. 그런데 대개 동학, 남학은 엄금하였지만 서학은 누구도 금할 수 없었다. 한번 성교에 입교하면 비록 죄를 지어도 수령들이 서양 선교사를 겁내어 법으로 다스리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서학에 물드는 자들이 날로 늘어났다.

 

1890년에 전라도에 서학이 크게 번졌다는 것은 전라도 전주와 고산 되재에 본당이 설립되고 사제가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보두네(Boudounet, 尹沙勿) 신부와 비에모(Villemot, 禹一模) 신부는 1886년 한불조약으로 보호를 받으며 전라도에서 선교하고 있었으며, 지방관들은 신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프랑스인 선교사들을 법적으로 제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동학도들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불법적인 폭력을 행사하였다. 당시 호남의 다수 천주교 신자들은 농민전쟁을 전후하여 동학교도들로부터 천주교를 포기하고 동학당에 가입하라는 협박을 수차례씩 받았지만 실제로 이러한 협박에 넘어가 동학을 추종한 경우는 신자들의 0.1%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전라도 흥덕의 천주교 신자 이씨는 동학교도들로부터 무섭게 구타당한 후에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동학교도들은 그를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화형(火刑)시켜 버리겠다고 협박했으며, 마침내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 올려진 그의 옷이 불에 탔는데, 이를 보다 못한 다소 인정 있는 동학군 한 명이 그를 장작더미 속에서 끌어 내려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천주교 신자는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했지만 신앙심만은 굳게 보존할 수 있었다. 천주교 신자들은 신해, 신유, 기해, 병오, 병인박해를 이겨내면서 당당하게 신앙을 증거해 왔고, 이제 신앙의 자유를 찾았기에 더 이상 숨을 필요가 없었고, 동학도들의 협박에 결코 굴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1890년에 교회는 선교사가 상주하는 본당들을 설립하며 흩어졌던 신자들을 모으시기 시작하였다. 1889년 파스키에 주 신부와 퀴를리에 신부의 입국으로 선교사의 수가 22명이 되자, 1890년 전국에는 9개의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1891년 12월부터 여러 도에 천주교를 비방하는 벽보가 동시에 나붙었다. 벽보는 전라도에 가장 많이 붙었다. 선교사들은 그 이유를 동학교도가 전라도에 가장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고산현감은 각 마을에 보낸 동학에 관한 공문을 전라도 되재 본당의 비에모(Villemot) 신부에게 보냈고, 비에모 신부는 천주교를 비방하는 벽보를 입수하여 조선교구장 뮈텔(Mutel) 주교에게 보냈다. 1893년 선교사들은 동학의 반외세 움직임을 인지하였다. 2월 16일(양 4월 2일) 고산과 인접한 용담관아의 문에는 주민들에게 서양인과 맞서 싸울 것을 호소하는 방문이 나붙었다. 1864년 최제우가 처형당한 것은 천주교도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주 본당의 보두네(Baudounet) 신부는 1892년 11․12월(양력)부터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의 뜻에서 반외세운동이 일어났고, 1893년 2~3월에는 서양인 타도를 노골적으로 표명하는 방문이 붙었다고 보고하였다. 보두네 신부는 동학교단의 입장을 3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로 정부로부터 동학을 공인받는 일, 둘째로 외국인을 추방하는 일, 셋째로 정부를 전복하고 동학교도로 조각하거나 아니면 정부를 서서히 전복하는 일 등이었다. 그래서 계룡산에 개국할 것을 대비하여 삼공육경, 문무대신, 척멸양인양교훈련대장, 양왜탐정사 등 새로 세워질 정부의 조각을 전라도인들로 구성하여 부서담당자들의 명단까지 짜놓았다고 하였다. 즉 호남지방동학교단의 집회는 교조신원과 포교의 자유라는 종교적 목적에서 벗어나 반외세와 정부전복을 계획하는 정치적 성격을 띤 것으로 규정하였다.

 

선교사들은 조선 정부와 보수지배층의 입장과 같이 농민군을 난민 또는 폭도로 규정하였다. 뮈텔 주교는 농민군을 ‘폭도’나 ‘동학도’ 등으로 불렀다. 또 그들의 행위를 ‘강도질’이라 표현하였고, 봉기지역에 있던 르메르(Le Merre) 신부는 “그들의 패배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뮈텔 주교에게 편지를 쓰는 목적이 거기에 있다고 하였다. 민중들이 착취와 수탈을 일삼는 지배계급에 저항할 경우 반란세력으로 간주될 위험이 있으므로, 동학 조직에 가탁하여 활동을 전개하고자 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동학농민혁명군이 목표로 한 반외세의 직접적인 대상은 일본이었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 있는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도 예외적인 감정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특히 천주교의 경우는 조선과 부딪혔던 그간의 역사성으로 인해 또 다른 표적이 되었다. 1893년 동학교도들이 서울에서 교조신원운동을 벌일 때 그들에 의해 외국공사관뿐 아니라 성당에까지도 동학교도들이 경고하는 벽보가 붙여지기도 했다.

동학교도들이 처음 교조신원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천주교를 공격한 것은 종교적인 이유에서였다. 동학은 천주교를 반대하여 발생된 종교이므로 공격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리고 교조 최제우의 죽음의 원인이 정부가 동학을 천주교와 같은 것으로 오인하여 이단으로 단죄하고 천주교의 죽음과 같이 이루어졌다는 데 대한 원망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가담한 일반농민들은 동학교도들과 달리 천주교를 탄압하려는 감정이 없고 오직 탐관오리를 징치(懲治)하고자 하였다.

 

농민군의 봉기는 천주교에 대한 즉각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다. 천주교인들은 항쟁에 참여한 농민들과 다를 바 없이 비참한 처지였다. 그랬음에도 농민군은 천주교인을 증오하고 배척하였으며, 천주교인들은 이를 피해 다녀야 했다.

<b>1.2. </b><b>동학농민혁명 연보</b>

 

<b>1893</b><b>년</b><b>(</b><b>날짜는 음력 기준</b><b>)</b>

11월 15일 고부농민, 군수 조병갑에게 수세감면 호소

<b>1894</b><b>년</b>

01월 10일(2월 15일) 전봉준이 고부 농민군 1천여명으로 고부 관아 점령

<b>03</b><b>월 </b><b>20</b><b>일</b><b>(4</b><b>월 </b><b>25</b><b>일</b><b>)</b> 동학농민군, 고창 무장에서 전면 기포(1차 봉기)

03월 26일 ~ 29일 백산에 호남창의대장소 설치(남접 농민군 8천여명)

04월 07일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 격파후 정읍 관아 점령

* 양호초토사 홍계훈의 경군(京軍) 전주성 입성

04월 08일 ~ 16일 전라도 서남해안(흥덕·무장·영광·함평) 점령

0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 경군과 1차 접전, 격파

04월 27일 호남의 수부(首府) 전주성 입성

05월 01일 ~ 03일( 전주성에서 경군과 2차·3차 접전, 격파

<b>05</b><b>월 </b><b>04</b><b>일 청국군</b><b>(</b><b>淸國軍</b><b>) </b><b>아산만 상륙</b>

05월 06일 일본군 인천항 상륙

<b>05</b><b>월 </b><b>07</b><b>일</b><b>(6</b><b>월 </b><b>11</b><b>일</b><b>)</b> 남접 농민군, 경군과 전주 화약(和約) 체결

- 전라도 53군현 집강소 설치 및 농민군 해산 합의

06월 21일(7월 23일) 일본군 조선 경복궁 침입

<b>06</b><b>월 </b><b>27</b><b>일</b><b>(7</b><b>월 </b><b>29</b><b>일</b>) 청국군과 일본군, 성환에서 교전

07월 01일 일본군, 청·일전쟁 선전 포고

07월 06일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 간에 전주회담 개최

- 전라도 군·현 집강소 전면적 설치

- 전주성내 전라좌우도 대도소 설치

07월 26일 조·일공수동맹조약(朝·日攻守同盟條約) 체결

<b>06</b><b>월말 </b><b>~ 08</b><b>월말 전라</b><b>·</b><b>경상</b><b>·</b><b>충청도 각지 봉기</b>

08월 17일 일본군, 청(2만여명)·일(1만여명)간 평양전투 승리

09월 07일 김개남, 대원군의 밀지 접수

<b>09</b><b>월 </b><b>08</b><b>일 </b>남접 농민군 지도자 전봉준·김개남, 금구 원평에서 남접 농민군 2차 기포 결정 과 삼례 집결 통문

<b>09</b><b>월 </b><b>18</b><b>일</b><b>(</b><b>양력 </b><b>10</b><b>월 </b><b>16</b><b>일</b><b>) </b>동학교주 최시형(68세) 무력 봉기 선언

09월초 ~ 11월초 경기·강원·충청·경상·황해도 일대에서 농민군과 경군·일본 연합군과 전투

10월 09일 ~ 15일 일본군 진압대대 인천항 상륙, 충청·전라·경상도로 진격

10월 12일 전봉준 휘하의 남접 농민군, 삼례에서 논산 도착

10월 12일 ~ 16일 손병희 휘하의 북접 농민군, 논산 도착, 합류

10월 21일 남·북접 농민군이 연합, 논산에서 공주로 진격

11월 08일 공주 우금치로 남·북접 농민군과 경군·일본군 집결

11월 09일 <b>우금치 전투</b>에서 남·북접 농민군(2만여명) 패퇴

<b>11</b><b>월 </b><b>11</b><b>일</b><b>(12</b><b>월 </b><b>7</b><b>일</b><b>)</b> 곰티에서 경군의 기습공격으로 노성으로 후퇴

11월 14일~19일 남·북접 농민군, 노성·논산서 일본군과 접전후 강경(김개남 합류)을 지나 전주로 패퇴

11월 23일 경군·일본 연합군 전주성 장악

11월 25일 ~ 27일 원평·태인 전투 패배로 전봉준 휘하의 농민군 해산

12월 01일 손화중·최경선 휘하의 나주성 포위 농민군 해산

12월 02일 전봉준(41세),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12.18 한양 도착)

12월 17일 장흥 석대들 전투 패배로 장흥‧강진 농민군 해산.

12월 24일 북접 농민군, 충주 무극에서 경군에 패퇴(손병희 홍천 피난)

 

<b>1895</b><b>년</b>

01월 01일 김덕명(51세), 원평에서 체포

01월 24일 대둔산 최후항전. 동학농민혁명이 막을 내림.

02월 09일 ~ 03월 10일 전봉준, 일본 영사로부터 5회 심문

03월 30일(4. 24) 전봉준·손화중·김덕명·최경선 등 교수형 처형
<ol>
 	<li><b> </b><b>내포지역의 동학 유입</b></li>
</ol>
 

충청도 내포지역은 풍부한 물산과 지리적 이점으로 일찍이 양반 사족이 정착하였으며, 이들은 신분적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토지의 소유를 집중하였다. 이로 인해 농민들은 봉건적 토지관계의 모순과 억압된 신분제하에서 착취와 수탈의 이중고에 시달렸다. 또한 내포지역은 세곡을 운송하는 길목이어서 전운사의 횡포도 이에 못지않았다. 개항 이후 서양문물의 유입과 일본상인의 활동은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있는 내포지역민들에게는 더욱 생활고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과 동학이 추구하는 만민평등이 실현되는 후천개벽의 이상사회는 헐벗고 굶주린 내포의 농민들이 쉽게 동학에 입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포지역은 어업과 농업이 활발하여 쌀과 콩 등은 물론 어류 역시 풍부했다. 1900년대에조선의 상인들은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방직류 등을 가지고 와서 이 지역의 주 생산물인 쌀과 연초 등과 매매 교환 형식으로 활발한 무역업이 발달해 있었다. 예산의 신포와 창촌, 덕산의 구만포, 아산의 둔포, 결성의 성호, 광천의 옹암 등지에는 인천 등지로 이동하는 수많은 배들로 가득 찰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내포지역에는 외국 상인들도 활발했는데 일본 상인들보다는 주로 청나라 상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청나라 상인들은 주로 인천항을 통해서 방직물과 금건(金巾), 성냥, 석유 등을 들여와 팔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시장은 예산이었는데 예산은 아산만과 인접해 있어서 인천 개항이후에도 서울의 화물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요충지였다. 예산 개시일에는 농업 생산물을 팔러 오는 상인들은 물론 유민들까지 운집하여 모두 3천 명 내지는 6천 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보부상들의 활동도 활발하여 2,3백명의 보부상들이 아산, 청양, 예산 홍주 등의 장시에 모여들었다. 1900년대의 당시 상황이 그랬다면 10년여 전의 상황(1894년도)도 비슷했을 것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봤을 때 충청 서북부 지역은 풍부한 농수산물과 유통의 활발함으로 인하여 전라도, 경상도 등 타지역에 비해 객관적으로 좋은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는 일본 상인의 경제적 침투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지만 양반 계층의 탐욕은 끊임없이 지속되어 많은 민중이 그들의 수탈의 대상이 되고 있었고 그것이 동학사상의 전파와 확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군의 주 세력은 당시 생산물의 8할의 높은 소작료를 지불했던 소작농을 중심으로 하는 빈농층이 주도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불합리한 소작관계에 대한 저항의식이 동학사상의 유입으로 자연히 변혁사상으로 점차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예로 내포지역의 양반가 부농에 대한 재산을 약탈하는 방법으로 응징하는 사건이 상당히 많이 일어 나타났으며 동학혁명 당시 당연히 조선봉건사회의 기본모순인 지주전호제에 대하여 강력하게 공격함으로써 토지소유를 실현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였다.

 

충청도 서부지역의 기록에 동학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1880년경이다. 1883년 6월에 간행된 경주판 동경대전 발문에 충청도 아산 도인 안교선(安敎善)이 공주 도인 윤상호와 같이 실무를 맡았다고 되어 있다. 경주판 동경대전은 공주접에서 자금을 마련하여 동협접(東峽接, 강원도)과 영남접이 힘을 모아 만든 것이다. 적어도 경주판 동경대전을 간행하는데 호서 대표자로 안교선이 참여한 것은 이 지역에 상당한 도인들이 있었으며, 적지 않은 자금도 염출할 힘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1878년 11월, 「최선생문집도원기서」 간행 업무를 추진할 때 안교일(安敎一), 안교상(安敎 常), 안교백(安敎伯), 안교강(安敎綱) 등 안교선의 인척들이 실무에 참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충청도 아산지역에는 1878년경부터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입도하였음이 분명해 보인다.

 

<b>2.1. </b><b>박인호와 박덕칠</b>

 

내포지역에 본격적으로 동학세력의 형성되고 조직화 한 것은 박인호와 박덕칠이 동학에 입도한 이후였다. 박인호는 1855년 2월 1일 충청도 덕산군(현 예산)에서 박명구(朴命九)와 온양 방씨 사이에 큰아들로 태어났다. 박인호가 천도교와 인연을 맺는 계기는 그가 단골로 다니던 예산 읍내의 주막 주모를 통해서였다. 주모로부터 한울님을 믿는 동학이라는 것이 영남에서 생겼는데 기름에 불을 붙인 것 같이 영남, 호남에 크게 번지는데 그들의 주장은 사람을 하늘 같이 섬기고 바른 마음으로 한울님을 믿어 이 세상은 평화로운 새 세상이 된다는 내용을 받아들였다. 주모의 이름은 김월화로 알려져 있는데 그녀의 남편 박씨가 동학교도였다.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교세를 형성한 박인호는 1893년 이후 동학의 공인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교조신원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1893년 1월 광화문 앞에서 전개된 교조신원운동에 박인호와 박덕칠, 그리고 박인호의 사촌동생인 박광호 등이 중심인물로 등장하였다. 이는 박인호 중심의 내포 동학도인들이 동학교단에서 조직력과 역량이 강화되어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내포 동학이 서서히 북접 동학도의 중심으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내포 동학도인들은 보은 척왜양창의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내포지역의 동학도들은 매우 강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모든 깃발을 철거하였지만, 오직 척왜양기(斥倭洋旗)만은 남겨두어 자신들의 요구가 척왜양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같은 날 지도부에서는 노약자들을 진중으로부터 주변으로 철수시켰으나, 상주, 선산, 태안, 수원, 광주, 정난, 직산, 덕산 등지의 교도들은 오히려 장내로 몰려들었다. 수원접이 장재(壯才)에서 장 내(帳內)로 진을 옮기었다. 12시 경 광주 수백명이 네바리에 돈을 싣고 왔다. 광주, 천안, 직산, 덕산 등지를 비롯한 많은 돈이 장내로 흘러 들어오고 길에는 쌀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대부분 박인호의 덕의포가 이끄는 지역이었고 돈과 쌀은 덕의포 중에서도 당시 덕산군이었던 고덕 구만 리, 용리, 삽교 하포리지역의 부농 동학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구만리의 이원겸(李元兼)과 그의 아들 이진해(李鎭海)는 동학혁명 이후 구만포구의 이점을 이용해 쌀에 관계된 미곡운반 등의 큰 사업 수단을 발휘한 것으로 볼 때 그의 활동이 사실임을 추측케 한다. 이렇게 내포지역의 동학은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면서 점차 그 세력이 확산되어 내포 일대에 엄청난 인원이 동학에 몰려들게 되었다. 당시 면천지역으로 유배를 왔던 김윤식도 “내포지역에는 동학교인이 적었으나 지금은 가득 차서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1883년 3월 박인호는 동학의 최고 지도자인 해월 최시형을 만나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1884년 최시형, 손병희 등과 공주 가섭사에서 49일 기도에 참여하여 매일매일 해월 최시형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박인호의 포덕활동은 탁월했다. 박래원(朴來源)의 기록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박인호의 포덕활동이 나온다.

이렇게 수련을 하시면서 생각하시기를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의 우리 동학의 목적을 달성하려며는 동지가 많아야 한다 생각하시고 그 때의 충청우도 지금의 충남일대 덕산을 위시해서 아산, 당진, 서산, 태안, 면천, 홍성, 광천, 청 양, 예산, 온양 등지에서 동지를 구하여 입도를 시키고 그들과 협력해서 무국대도의 진리와 목적을 선포하니 이에 응하며 입도한 자가 만여에 이르렀다 한다.

 

내포지역 동학세력의 한 축을 형성하였던 박덕칠도 이때 박인호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는 내포의 서부지역인 예산, 태안, 해미, 서산, 당진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덕칠의 본명은 박희인(朴熙寅)으로 보은취회 당시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예포 대접주로 임명될 정도로 막강한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동학혁명 당시에도 많은 공을 세워 현상금이 걸릴 정도의 거물이었다고 한다.

 

덕산과 예산에서 활동하던 한 일본상인은 당시 동학의 동향을 일본공사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한 바 있다.
<ol>
 	<li>덕산과 예산지역은 인민의 반수가 동학에 속하였지만 아직 소동 같은 것은 없고 평상시와 같이 각자 영업에 종사 중이라고 하였다.</li>
 	<li>덕산의 동두리에서 내가 유숙하고 있던 곳의 주인은 金尙立이라고 하며 동학에서 약간 높은 지위에 있는 자였다. 또 예산에서 숙박하였던 곳의 주인 權順根도 역시 동학의 사람이었다.</li>
 	<li>동학교인이 집회 또는 협의를 할 때는 신호로서 징 같은 것을 쳐서 울렸다.</li>
 	<li>예산과 덕산에 동학 두목이 2,3명은 있는 것 같았다. 이 지방에서는 동학의 평판이 아주 좋았다. 그후 점점 증가하는 상황이었고...</li>
 	<li>내가 머무르고 있는 동안에는 다급한 대사건이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li>
 	<li>덕산과 예산의 부사는 도망하지 않고 여전히 임지에 있었다.</li>
</ol>
 

이 보고에 의하면, 박인호계의 중심지역인 덕산과 예산의 동학조직은 점점 세력을 확장해 나가며 조직화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동학군의 활동을 유생 또는 양반의 기록에 의하면 대부분 ‘悖類’(패류, 말이나 행동이 거칠고 예의가 없는 무리)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비해 오히려 일본상인들의 보고에 의하면 동학군이 일반 민중으로부터 ‘평판이 좋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동학군에 대한 인식이 상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b>2.2. </b><b>정태영</b>(丁泰榮, 1859~1922)

 

정태영(丁泰榮, 일명 건섭, 1859~1922)은 당진군 우강면 신흥리에서 출생했다. 삽교천 건너 마을인 선장면 대정리로 이사하여 박인호의 포교활동으로 동학에 입도한 후 온양군 신창현, 아산현 지역에서 포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1894년 1월에 북접대도주인 해월 최시형으로부터 집강에 임명되고 같은 해 7월 접사로 임명받았다.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군의 아산 주둔으로 인한 막대한 경비조달을 온양군 일대 백성들에게 부담지게 해서 큰 고통을 당하게 되자 그는 그 부당함을 호소하고 폐정개혁에 진력하다가 호서 대접주 춘암 박인호의 기포 명령에 따라 신창현에서 이신교, 김경삼, 곽완 등과 함께 기포했다.

 

수천의 농민군을 신창현에 집결시켜 감밭 지역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10월 26일 신례원 관작리로 이동하여 내포 지역에서 총집결한 농민군과 합류하니 그 수가 6만이었다. 28일 홍주성 전투에서 정태영은 큰 부상을 당해 이후 일가족을 데리고 예산군 어느 곳에 은신 도피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때 그의 부인 김태화는 만삭의 몸이었는데, 이듬해 1월 3일 장남 규희를 낳았다. 정태영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생하다가 국가 잃은 한을 품고 1922년 8월 26일 환원했다. 그의 아들 규암 정규희(1895생)는 1907년 3월 10일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 재건 활동을 했으며 천도교 예산교구를 설립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3․1운동 때는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 등과 함께 기미년 4월 4일 선장 군덕리 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 헌병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하게 펼쳤던 만세운동 사건으로 정규희는 일경에 체포되어 고등법원에서 2년 6개월 징역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또 1938년 무인멸왜기도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정환석, 문병석 등과 함께 13일 동안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았다. 정태영은 아들 정규희와 함께 동학정신을 근간으로 삼고 일제 강점기시대 민족의 독립과 애국운동을 일평생 펼쳐 나갔다.

 

동학이 추구하는 세상은 만민평등이 실현되는 후천개벽의 이상사회이다. 농민들은 봉건적 토지관계의 모순과 억압된 신분제하에서 착취와 수탈의 이중고에 시달렸다. 양반들에게 수탈당하고, 야만적인 외세의 침탈을 목격한 내포지역의 민중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적극적으로 동학을 수용했다. 또한 내포지역은 세곡을 운송하는 길목이어서 전운사의 횡포도 이에 못지않았다. 뿐만 아니라 개항 이후 서양문물의 유입과 일본상인의 활동은 경제적 어려움에 빠져있는 내포지역민들에게는 더욱 생활고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조선의 자긍심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 반봉건과 반외세에 있다고 믿은 동학농민혁명군은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를 외쳤다. 그러나 홍주성전투에서 대패한 박인호의 동학군은 후퇴와 해산을 거듭하면서 관군과 유회군의 토벌대상이 되었다. 결국 박인호, 박희인 등 동학군 주요 지도자뿐만 아니라 동학혁명 대열에 동참한 동학군은 각지에서 은신하면서 목숨을 보존할 수밖에 없었다.
<ol>
 	<li><b> </b><b>파스키에 신부의 보고서에 드러난 내포의 상황</b><b>(1890</b><b>년</b><b>~1894</b><b>년</b><b>)</b></li>
</ol>
 

동학은 자체 내에 반천주교적(反天主敎的)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교조신원운동기(敎祖伸寃運動期)’와 동학농민혁명기에는 천주교를 외세를 끌어들인 반민족세력으로 단정하고 적대감을 표출하였다. 한편 천주교 역시 동학을 미신(迷信)이나 이교(異敎)로 간주하였고,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의 원인이 집권층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있다고 하면서도 동학(농민군)을 ‘난민(亂民)’, ‘폭도(暴徒)’, ‘동비(東匪)’, ‘비도(匪徒)’ 등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파스키에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내포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1891년 5월 17일 보낸 보고서에서는 이렇게 상황을 말하고 있다. “제 관할 구역의 두서너 곳만이 외교인들로부터 심한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예산 땅 숫골의 교우들이 오래전부터 아주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핍박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들의 지주(地主)인 산 주인이 미신을 섬기며, 자기의 소작인 천주교인들에게 자기를 본받도록 강요했다. 그는 교우들에게 “만약 너희들이 양인을 계속 따른다면 너희들의 농토를 빼앗고, 또 매를 때리고 마을에서 쫒아내겠다.”고 협박했다. 또한 아산(牙山) 땅 돌실에서 교우들의 논 임자가 농사를 짓지 못하게 했다. 파스키에 신부가 그곳을 방문하자 외교인들은 신부가 불란서 사람인 것을 알고는 무례하게 굴었다. 파스키에 신부가 그곳을 떠나자 외교인들은 그 양인(파스키에 신부)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며, 대신 교우들을 핍박했다. 파스키에 신부는 돌실의 회장에게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아산 관장에게 탄원서를 올리라고 했다. 그 결과 관장이 외교인 지주에게 매를 때리게 했지만 매를 맞은 후에도 계속해서 교우들에게 논의 소작을 거부했다. 이것은 간양골 본당이 어떻게 파괴될 것인지를 미리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891년 5월 21일 보고서에 의하면 숫골 교우들을 심가란 산 주인이 그 산에서 몇 년 전부터 만일 교우들이 계속 천주교를 믿는다면 그들을 쫒아 내거나 매를 맞게 하겠다고 하며 위협했다. 또 그 산 주인은 군수에게 천주교인들이 산의 나무를 모두 베고 뽑아서 산을 완전히 황폐화시켰고, 뿐더러 그중 한 천주교인이 자기에게 심한 모욕을 주었다는 등 일련의 거짓말로 천주교인을 무고했다.

1893년 8월 1일의 보고서에는 동학교도 가족의 세례와 배려문제가 등장한다. 목천(木川)의 정가란 사람의 친척 중에서 17명이 동학군으로 체포되었는데, 파스키에 신부는 비신자이지만 정가의 아들들을 받아 주었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들의 어머니와 3세 된 아이는 거처할 데가 없어, 성영회에서 나오는 양육비를 지원할 수 있는지를 주교님께 문의하였다. 결국 동학 때문에 위협을 느낀 이들은 동학에서 천주교의 그늘로 들어오고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후에도 이런 상황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1893년 9월 19일 보고서에서 “충청도, 특히 제 구역은 아주 평온하고 시끄러운 일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파스키에 신부는 동학의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스키에 신부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돈 문제, 약탈문제, 토지문제 등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었다. 1984년 4월의 사건에도 동학이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날지를 파스키에 신부는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스키에 신부는 1894년 4월 6일 보고서에서 신자수가 1890년 1,290명에서 거의 해마다 사망자가 출생자보다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4년만에 1,675명으로 늘어났다고 보고한다. 그런데 새로운 개종이 대개는 하느님의 섭리로 서민 계층의 비천하고 힘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고, 때로는 교만하고 남을 무시하는 조선 양반층의 불의와 착취로부터 보호를 얻으려는 희망에서 천주교인이 되는 경우도 있다고 보고하였다. 파스키에 신부는 조건 있는 개종은 신입 교우들에게 박해와 또 다른 유의 핍박을 야기시키는 결과밖에 되지 않았던 것임도 알고 있었다. 당시 파스키에 신부는 외교인들이 천주교 신부를 큰 힘과 굉장한 권한이 있는 사람으로 보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파스키에 신부는 1894년 4월 6일 보고서에 드디어 한 차례 위기가 닥쳤음을 보고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를 파스키에 신부는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외인들이 저에 관해 가장 악랄한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래서 한두 달 전부 터 이 지방이 소란스러워졌습니다. 몇몇 불한당들이 천주교인을 자처하며 또 주교님, 불란서 공사, 선교사에 의해 파견되었다고 허풍을 떨며 이 지방을 두루 다니며 빼앗긴 아내와 약탈당한 돈, 또는 강탈당한 토지를 되찾아 주겠다는 등 엄격한 정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요구까지 했습니다. 제가 그와 유사한 사건들에 한두 번 개입한 적이 있었으므로 외교인들은 그 사기꾼들이 지껄이는 거짓말을 쉽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엔 놈들의 협박에 떨었으나 난폭하고 입에 담을 수 없는 소행에 격분한 나머지 결국 들고 일어났습니다.

신창군의 6개 지역에서 선비들을 선두로 3월 초에 읍내에 집결했습니다. 군수에게 대표를 파견하여 선교사와 천주교인들에 대한 엄한 훈령을 요구하게 했습니다. 군수는 우선 상황을 조사하여 양인에 대한 수긍할 만한 상소 이유를 찾아야 하는데, 확실한 범행에 대한 결정적 증거없이 양인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군중은 대표에게 “사또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 주시지 않으니 우리는 감사(監司)한테 가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우리가 직접 실력을 행사할 것입니다”고 말하게 했습니다. 군중들은 모임을 갖고 음력 2월 15일(3월 21일)에 다시 모여 그날로 모두가 제 성당을 습격하고 선교사와 천주교인들을 죽이고 발로 짓밟은 후에 저의 집에 불을 지르기로 결의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나 그들의 격분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직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이러합니다. 일부 조선 양반과 선비들이 때로는 노상강도들이 쓰는 방법보다 더 지독한 방법으로, 가장 난폭하고, 차마 입에 올리지도 못할 방법으로 민중을 착취하고 돈을 약탈하고 있는 악습을 주교님께서도 모르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들은 서울로부터의 경고 또는 이따금 교인들을 보호하고자 가끔 선교사들이 취한 대항 혹은 천주교인이건 아니건 몇몇 사기꾼들의 즉흥적인 반동 등으로 인해 종종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기꾼들은 천주교 불란서 공사의 이름을 빌어 여러 번에 걸쳐 완강하게 저항했으며 종종 상당액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고 그로 말미암아 이 지방의 양반들이 치욕과 불명예의 오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비나 양반들, 특히 그중 가장 완강한 사람들은 그 오점을 천주교인의 피로 씻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저는 못된 짓을 하고자 각하와 불란서 공사 그리고 저의 이름을 남용한 7명을 체포하게 하여 매를 때리고 군수에게나 서울로 보내게 했습니다. 그 처벌 행위는 외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월 21일로 결정된 집회가 예정대로 행해져 삼천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거의 지리멸렬되고 말았습니다. 우두머리들은 모습을 나타낼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계산착오였지요. 주모자들은, 다시 말씀드려 백성들에게 부정행위를 가장 많이 저지른 양반들은 구타를 당했을 뿐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잘 알려져 가장 눈에 뛴 감밭의 성윤복이란 자는 가장 악랄한 도둑놈으로 그 날 몸을 숨기느라 바빴습니다. 봉기의 주모자였던 그의 갓은 발기발기 찢겼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을 억압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오. 그런데 또 당신한테 희생당한 사람들을 처벌하게 하려 하는가? 양인으로 말하면 백성을 억압하기는 커녕 억압받는 자를 보호했다. 그는 범인들을 체포하여 법대로 처벌하게 했소. 그러니 왜 그에게 싸움을 걸고 그의 집을 부수러 가겠소?”

그러므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몇몇 외교인들은 간양골까지 와서 저에게 사과를 하고, 우정을 다짐하고 또 그들은 그 적대적인 집회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고 그들이 믿는 천지신명에게 맹세했습니다. 실제로 그 모임에는 온갖 계층과 온갖 신분의 사람들이 참석했다고 말했습니다. 요컨대 위험스러운 상황이 될 뻔했던 이 모든 사건은 결국 다른 모든 사건들처럼 우리 교회와 주님의 영광에 유익하게 끝났습니다. 또한 그것은 제 교우들과 저 자신에게까지, 의심많고 교만에 부풀은 외교인들과 접촉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신중하고 용의주도해야 한다는 경고가 될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우리에 대해 갖는 감정에 관해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들이 모든 외국인에 대해 갖는 질투와 증오는 그 외국인이 신부일 때는 배가되어 격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격노하는 바다의 거센 파도가 해안의 절벽에 부딪치면 무력하게 부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옥의 격노도 교회라는 확고부동한 바위에 부딪치면 언제나 부수어지기 마련입니다. 대개의 경우 우리를 희망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지고의 격노입니다.

 

파스키에 신부는 1894년 6월 12일 보고서에서 드디어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음을 보고하였다.

제 성당에 불을 지르려던 사람들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전라도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소문입니다. 전주읍이 동학군에게 점령되고 감사가 달아나고, 서울에서 파견된 수백 명의 군인들이 살해되고, 청나라군이 서울에서 대포를 갖고 왔고 전신선이 공주에서 서울로 곧 연결될 것이라는 소문입니다. 또한 러시아군이 조선 북쪽에 왔다고 합니다. 이 소문들이 다 사실일까요? 무엇보다도 저는 보두네 신부의 소식이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동학군이 전주성 밖의 집들을 모두 불 질렀다고 이야기가 들려오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서로 소식이 끊긴 지가 두 달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특히 각하 소식, 대성당과 서울 신부들의 소식이 궁금합니다.

 

뮈텔주교는 1894년 5월 6일 일기에서 “동학도들이 집결하여 벽보를 붙이고 양반과 부자들을 습격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5월 7일에 동학도들이 전라도와 충청도의 선교사들에 대한 공격의 우려가 제기되며 선교사들을 잠시 서울로 올라오는 문제가 언급되었지만 급할 것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뮈텔주교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1894년 7월 24일에 전주에서 “신부들과 모든 신자들이 죽게 생겼음. 보두네. 즉답 요망.”이라는 전보에 뮈텔 주교는 “신부들은 피신하거나 이리로 오라. 뮈텔.”고 답신하였다.

8월 9일에 퀴를리에 신부, 파스키에 신부, 알릭스 신부에게 조심하여 서울로 올라오라는 말을 전하기 위한 회람 서신을 보냈고, 갓등이에 와 있던 파스키에 신부와 퀴를리에 신부는 8월 10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뮈텔주교는 8월 9일에 8월 6일에 파스키에 신부가 간양골에서 써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것은 바로 조조 신부의 죽음에 관한 내용이었다.

 

파스키에 신부는 조조 신부의 피살 소식을 뮈텔 주교에게 전했다. 8월 2일에 저녁 9시 반에 파스키에 신부가 파견한 연락원 두 명으로부터 조조 신부가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뮈텔 주교는 전해 받았다. 1894년 8월 6일, 파스키에 신부는 간양골에서 조조 신부의 죽음에 대해 뮈텔 주교에게 자세히 보고하면서 자신의 유언까지 첨부하였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했던 것이다. 이 편지는 8월 9일에 뮈텔주교에게 도달하였다.

 

주교님,

각하께서는 조조(Jozeau) 신부의 죽음에 대해 더 이상의 의문을 갖고 계시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끔찍한 참극의 모든 장면을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 광경을 목격한 교우가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잘못이었습니다. 3명의 교우가 순교 현장을 그들의 눈으로 목격했고 그중 한 명은 신부의 체포 순간부터 그의 죽음까지 모든 장면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조조 신부는 공주에서 체포된 것이 아니고 공주를 지나 거기서 40리 떨어진 팔풍정이까지 갔습니다. 하인 한 명만을 데리고 말을 타고 가다가 성환(成歡)에서 도망쳐 오는 청나라 군인들을 만나자 즉시 군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습니다. 신부를 붙들어 신문한 자는 석사인(Syek Sain, 葉)이란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오?”

“불란서 사람이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전라도 전주 근방에서 왔소.”

“전라도에서는 무슨 일을 하고 있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것 외에 다른 일에 관여한 적은 전혀 없소.”

“그러면 왜 전라도를 떠났소?”

“동학군들이 나와 교우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오.”

“일본인들은 보지 못했소?”

“보지 못했소.”

“어디로 가는 거요?”

“서울이오.”

“서울로 간다니 함께 공주로 돌아 갑시다. 거기서 함께 서울로 갑시다.”

조조 신부는 그들이 그를 함정에 빠지게 하려는 것을 필시 잘 알고 있었겠지만 폭력에 못이겨 그 놈들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 바오로는 저의 마부였는데 불란서 공사의 이름을 악용하여 나쁜 짓을 저지른 데 대해 작년에 주교님께 편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또 나쁜 짓을 저질러 지난 봄에 둔내에서 쫓겨난 후 청나라 군에 매수되어 성환 전투에 참가했다가 청군을 따라 도주하면서 조조 신부의 신문 현장과 체포 그리고 순교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신부가 체포되던 때, 복사와 회장 그리고 김 요셉이라는 학생(그리고 짐꾼 한 명)도 공주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학군과 청군이 무서워 큰길을 벗어났기 때문에 신부와 길이 엇갈렸고, 화로(Hoarau) 주막에 가서야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박 회장은 조조 신부의 봇짐을 제게 보내며 그 슬픈 소식을 알려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얼마 안가서 조조 신부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복사와 다른 두 사람은 공주로 돌아갔는데 거기서 신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전라도로 계속해서 내려갔습니다.

다시 조조 신부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공주읍 앞에 이르러 강을 건너자 청군(淸軍)들은 조조 신부를 포위했습니다. 그때 손 바오로뿐 아니라 공주의 모 가란 두 교우도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두 교우는 청나라군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호기심에서, 또 조조 신부가 공주를 지나간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좀 걱정이 되어 강가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신부가 청나라 군인들 한가운데 서서 고개를 높이 들고 조금도 불안해하지 않고 군인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걸어서 냇물을 건넜는지 그의 다리 아래 부분이 젖어 있었습니다. 청군 3명이 동시에 신부의 허리를 공격했습니다. 신부의 몸이 공중에 솟아오르더니 얼굴을 땅 쪽으로 하고 떨어졌습니다. 신부의 목을 절반을 베었고 그래서 머리가 몸통에서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신부의 머리를 창끝에 매달아 끌고 다녔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머리가 완전히 동체에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신부의 팔과 몸과 다리를 여러 번 칼로 찌르고는 시체를 강물에 던졌습니다. 이에 앞서 그들은 신부에게서 묵주와 성의(聖衣)와 고상을 꺼내 군중들에게 의기양양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신부의 시체는 이 참극을 목격한 강가와 오가에 의해 다음날, 즉 7월 28일 월요일 밤에 거두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은 강가에 임시로 묻었습니다. 신부의 하인도 살해되었는데 그의 시신은 감사의 지시로 아전들이 매장했습니다. 저는 즉시 사람 15명을 보내 신부의 유해들을 서재 교우촌으로 운반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신을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남겨 두고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유인 즉, 이러합니다.

그것은 우리 전라도와 충청도가 폭발 전야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방으로 동학군들에게 포위되어 우리와 우리 교우들이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아마 순교밖에는 다른 길이 없을 겁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우리의 죽음의 시간이 왔다고 생각됩니다. 주교님의 편지를 방금 받았습니다. 도중에 목이 잘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제가 직접 그것을 퀴를리에 신부에게 전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머지않아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 동학군과 청나라군 사이에 이미 결정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교님,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적어도 교우들만이라도 구해 주십시오.

 

유 언

현 상황에 처하여 본인은 나의 영혼을 하느님께 바치고 또 나의 목숨을 조선 교회와 나의 교우들을 위해 바친다. 하늘에서 본인의 피와 조조 신부의 피의 희생에 만족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파리에 있는 본인의 재산 1,000 내지 1,200 프랑을 큰 희생을 해가며 그것을 본인에게 준 본인의 부모님에게 돌려주기를 바란다. 서울 당가에 있는 350불은 뮈텔 주교 각하나 그 후임자에게 맡겨, 조선의 복음화와 조선 교구를 위해 사용하기를 바란다. 다만 그중 20불을 본인을 위한 연미사 예물로 써 주기를 바란다. 기도를 부탁한다. 따로 편지 쓸 시간이 없어 본인의 부모님과 사랑하는 이들에게 안부를 부탁한다.

교황 파견 조선 선교사

베드로 파스키에

 

천주교가 농민군으로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받은 것은 1894년 5월 31일(양) 전주성이 함락되면서 그리고 집강소 활동이 시작되면서였다. 주한프랑스공사는 전라도 선교사와 천주교도들이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외무독판에게 중재를 요청하였고, 외무독판은 전라감사에게 6월 8일 전보로 선교사와 천주교도들을 위험에서 대처하라고 지시를 하였으나 소용없었다. 농민군은 천주교도들에게도 농민전쟁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참여를 거절한 것이 천주교도 공격의 한 이유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농민군이 선교사를 원수로 여긴 까닭은 진압군이 서양무기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래서 천주교도들에게 울분을 터뜨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민중의 의식 저변에 깔려 있는 외세에 대한 적대감이 천주교도들에게 표출되었다. 민족적인 감정이 피해를 입을 때마다 그들의 겪는 손상을 모든 외국인의 연대책임으로 돌렸다. 그리고 서양

인이면 으레 프랑스 선교사를 연상하였고, 천주교도들은 서양 선교사들을 불러들인 반민족적인 세력으로 단정하여 멸종시키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천주교에 반감을 가진 청국과 일본군의 영향도 컸다. 청국의 전주 주둔은 농민군이 천주교도들을 본격적으로 약탈하고 탄압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보두네 신부는 청군은 농민군과 야합하여 일본인과 서양인을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농민군으로부터 뇌물까지 받았고, 농민군과 청군 사이에 천주교도를 멸종시키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농민군과 청군은 반서양세력에 감정이 일치하였다. 한국에 파병된 청국군은 산동․직예․성경의 육군이었는데, 이 지방은 반천주교 내지 반프랑스운동이 치열하게 일어났던 곳이었다. 청국제독 葉志超는 1891년 5월 중국 朝陽에서 반제국주의․반천주교․반황조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홍장과 함께 진압에 참가하였다. 섭지초는 7월 28일 성환에서 일본군에 패한 청군 패잔병과 동학군이 함께 공주군 정안면 팔풍정이에서 체포한 조조(Jozeau) 신부를 심문하였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29일 조조 신부를 공주 장깃대 나루터에서 살해하였다. 조조 신부는 7월 28일 공주 금강을 건너 40일 떨어진 廣程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팔풀정이에 이르렀을 때 그날 일본군과 성황에서 싸우다 패하여 공주 방향으로 도주하던 청군 패잔병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때 청군을 뒤따라오던 동학농민군이 청군의 섭지초를 선동하여 조조 신부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섭지초는 통역을 시켜 조조 신부를 간단히 심문하고, 자기들과 공주로 갔다가 서울로 가자며 공주로 끌고 갔다. 이곳에는 2,000명의 농민군과 200명의 청군이 머물고 있었다. 공주 금강을 못 가 감나뭇골 주막에서 섭지초는 중군과 영장이 배석한 가운데 심문을 재개하였다. 조조 신부는 조선관리 앞에서 자신이 선교사임을 밝히면 보호받으리라 생각하였지만 아니었다. 청군들은 조조 신부를 금강의 장깃대 나루에서 살해, 강물에 던져버렸다. 전라도와 내포의 간양골 본당과 양촌본당이 농민군의 공격을 받았다. 농민들은 사회불안으로 농사일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하며, 동학과 천주교 때문이라며 똑같이 증오심을 품었다.

당시 충청도와 경상도의 선교사들은 프랑스공사에게 천주교신자들이 쫒겨나지 않은 교우촌은 한 곳도 없으며, 배교를 강요당하며 고문을 받은 신자들이 여럿이고, 매질을 당하여 죽은 신자가 여럿이며, 동학농민군이 모든 것을 약탈해 갔다고 보고하였다.

 
<ol>
 	<li><b> </b><b>뮈텔 주교 일기</b><b> 중 동학농민혁명</b><b> 관련 내용</b><b>(1894.5~1895.6)</b></li>
</ol>
 

조선 교구장 뮈텔 주교는 동학(東學)을 『역경(易經)』에 바탕을 둔 신비적인 사상과 천주교에서 빌려간 몇 가지 단편적 진리, 그 밖의 마술과 축문, 짧은 기도 등으로 구성되었다고 파악하였다.

 

이 교파(=동학)의 교의(敎義)에 대한 개념을 믿기는 꽤 어려운 일이며, 이 교파에서 발행한 책을 내(=뮈텔 주교)가 장만할 수 있었으나 아주 모호합니다. 이 교파의 두목 중 한 사람은 예전에 천주교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모양입니다. 그 책들 중 하나에서 그가 이야기 하는 것을 들으면, 1861년에 천주교를 믿어야 할지 어떨지 몰라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꿈을 꾸었답니다. 신령이 그에게 나타나서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는 그의 소원을 칭찬하면서 서양에서 온 사람들이 가르치는 대로의 천주교는 취하지 말고 자기가 진리를 직접 가르쳐 주겠다고 했답니다. 그리고 그가 받아서 전파할 책임을 진 교리는 ‘동학’(東學)이라고 부르라고 했답니다. 거기에 환상가의 공상 아닌 다른 것이 들어 있다고 해도 이 예언자에게 말한 천사가 빛의 천사가 아님은 아주 명백합니다. 천주라는 이름과 천주교에서 빌려간 몇 가지 단편적인 진리에, 대개는 『역경(易經)』에서 끌어온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사상과 이 책에 대한 제멋대로의 해석들이 섞여 있습니다. 마술의 축문과 몇 가지 짧은 기도문도 들어 있습니다. 하기는 동학을 따르는 사람 대부분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교리를 절대로 모르고 다만 그 이름만이 그들의 가담의 표가 됩니다.

 

뮈텔 주교는 동학의 교리가 천주교의 교리를 부분적으로도 수용하여, 유교의 경전인 『역경』의 신비주의와 주술적인 기도가 가미된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동학의 교의보다는 그 신도들의 현실적인 활동들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동학교도들이야말로 왕조교체설과 같은 예언사상을 바탕으로 일종의 정치적 반란을 도모하는 집단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뮈텔 주교는 호남 지방을 비롯한 전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에게 가한 동학교도들의 사적인 박해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했다. 특히 외세를 배척하는 ‘척양척왜(斥洋斥倭)’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서울의 프랑스 공사관 앞으로 조선에서 철수하라는 공갈과 협박문서를 보내온 것에 한때나마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b>1894</b><b>년 일기</b>

<b>5</b><b>월 </b><b>6</b><b>일</b><b>(</b><b>음력 </b><b>4</b><b>월 </b><b>2</b><b>일</b><b>)</b>

동학도들이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최근에 전라감사가 전보를 보냈다. 동학도들이 집결하여 벽보를 붙이고 양반과 부자들을 습격하고 있지만, 감사의 휘하에 있는 병사들로는 그들을 막을 수가 없다면서 서울에 병사들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수백 명의 병사들이 배편으로 전라도 감사에게 파견되었다. 동학도들은 특히 泰仁에서 많이 숙영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반역자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b>5</b><b>월 </b><b>7</b><b>일</b>

르페브르 씨의 방문. 동학(東學)도들이 전라도와 충청도의 선교사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염려되니 그곳 선교사들을 잠시 서울로 돌아오게 하라고 독판이 그에게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급한 것 없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독판이 르페브르 씨에게 그러한 요청을 하도록 르젠드르 장군가 권유하였으리라 생각된다.

 

<b>5</b><b>월 </b><b>9</b><b>일</b>

동학도에 대항하기 위해 서울에서 파견되는 병사 800명이 어제 혹은 그제 한양(漢陽)호, 창룡(蒼龍) 호 등 2척의 증기선에 나눠 타고 제물포를 떠나 군창(Koun-tchyang)으로 향했다. 또한 청국 군함 한 척이 두 증기선과 함께 떠났는데, 이 군함도 병사들을 실어 날랐다. 소문에 의하면 충청도(忠淸道)에도 1,200명의 병사가 파견되었다고 한다.

 

<b>5</b><b>월 </b><b>19</b><b>일</b>

전라도(全羅道)에서 확실한 소식들이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동학도들의 약속된 봉기(蜂起)가 벌어진 것 같다. 특히 고부(古阜) 지방에서 시작된 민중 운동이 그러하다. 그곳 주민들은 소금에 대한 세금의 폐지와 시장에서 거래되는 모든 상품에 대해 징수하는 세금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b>5</b><b>월 </b><b>28</b><b>일</b>

응답을 보내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나는 전주로 전보를 쳤다. “보두네, 전주, 전쟁에 관하여 무슨 소식이 있는지, 위험에 처해 있는지, 오늘 답신 요망, 뮈텔.” 6시에 다음과 같은 답신을 받았다. “큰 전쟁이 벌어지고 있음, 아직까지는 위험하지 않음, 윤.” 나는 즉시 이 답신과 함께 연락원을 보냈다. 이 연락원은 밤에도 길을 가야 할 것이다. ……

 

<b>6</b><b>월 </b><b>3</b><b>일</b>

어제부터 나돌기 시작한 소문이 오늘 확실해지다. 즉 폭도(暴徒)들이 전주(全州)로 들어갔으며, 그들은 전화선을 끊고, 전신주를 부수고, 심지어 전화기마저 떼버렸다는 것이다. 파직된 전임 감사는 구금 상태에 있으며, 왕은 금부(禁府)에 그를 포박한 채 서울로 데려와 재판을 받게 하라는 영을 내렸다. 그는 소요가 벌어지는 것을 보자 도망쳤었다고 한다. 한편 최근에 전라도에서 올라온 한 교우의 말에 의하면 고부(古阜), 태인(泰仁), 고창(高敞)을 포함하여 6개 고을의 군수들이 도망쳤다고 한다. 그렇지만 교우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히 농사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서울의 신식 군대가 최근에 해로(海路)와 육로(陸路)로 파견되었다. 통리아문(統理衙門)의 전임 서리독판(署理督辦)이었던 전라도 신임 감사는 전주까지 가지도 못한 채 공주(公州)에서 지체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b>6</b><b>월 </b><b>4</b><b>일</b>

왕이 전라도의 사건들을 걱정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궐의 기생(妓生, Ki-saing)들로 하여금 춤과 노래를 하게 하면서 매일 밤을 보낸다고들 말한다. 여론은 서울에서 모든 병사가 철수된 데 대하여 좀 불안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가 만일 이곳 서울에서 무슨 사태라도 발생한다면 어쩔 것인지! 백성들은 고관들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b>6</b><b>월 </b><b>6</b><b>일</b>

비에모 신부가 고산(高山)에서 6월 1일에 쓴 편지가 오늘 아침에 도착함. 폭도들이 5월 31일 아침에 전주를 점령하였다는 소식이다. 그들은 성 바깥에 위치한 구역에 불을 놓고는 남문(南門)을 통해 들어갔다고 한다. 보두네 신부는 짐을 네 꾸러미 들고서 늦지 않게 도망칠 수 있었다고. 그의 집은 아마도 불에 타버렸을 것이라고 한다. 비에모 신부도 거처를 버리고 은밀히 다른 교우들의 집으로 가서 머무르고 있음. 조조 신부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지만, 비에모 신부는 그가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믿고 있음. …… 연락원이 서울로 오는 길에 진위(振威)에서 600명 정도 되는 (연락원의 추정치) 조선 병사들을 만났다고 함. 그 우두머리들은 그에게 전라도의 상황에 대해 상세히 묻더라고. 다시 한강 가까이에서는 역시 남쪽으로 향하는 60명가량의 청국 기마병과 마주쳤다고 한다. 사람들 말로는 민간인 복장을 한 일본 경찰 소속 4명이 조사차 전라도에 내려갔다고 한다. …… 르메르 신부가 편지를 보내오다. 그의 집에서 1킬로쯤 떨어진 고개에 강도들이 진을 치고 여행자들을 강탈하였다는 내용. 그의 마을에 사는 교우 한 사람이 500냥과 옷을 빼앗겼다고. 그는 그것이 동학도와 관계된 것이 아닌가 염려. 지방에서도 여론이 폭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으며, 전반적으로 동학도의 성공을 기원하고들 있다고. 신부는 그들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자신이 내게 편지를 쓰는 목적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그가 바란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직 불가능함. 나는 7월 15일까지 평화를 위한 기도를 바치라고 명령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교우들은 주일마다 공동으로 성로신공(聖路神功)을 바칠 것이다.

 

<b>6</b><b>월 </b><b>7</b><b>일</b>

저녁에 랑루 함장이 특사를 보내 회신을 전해 오다. 그는 현재 제물포에 있는 군함들의 수를 알려 주었다.

프랑스 순양함 르 포르페 호 1척

미국 해군 제독이 승선한 순양함 르 볼틴(Le Baltins) 호 1척

청국 장갑함(裝甲艦) 3척

청국 통보함 1척

일본 군함 3척

또한 러시아 및 영국의 장갑함도 곧 도착할 예정이란다. 청국 배의 함장들이 포르페 호를 방문하였으며, 랑루 함장은 그들에게 자신은 내륙(內陸)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보호를 확고히 하기 위해 거기에 있던 것이라고 얘기했단다. 또한 만약 청국의 무력 개입이 있게 되더라도 그러한 개입은 선교사들에게 좀 더 확고한 보호를 보장해 주는 것에 국한되기를 바란다고 얘기했다고. 함장들은 항의와 보장을 혼동하였다. 청국의 무력 개입은 조선 왕이 요청하고 청국이 약속한 것인데, 이는 이미 일본에도 통보된 조약에 따른 것이다. 제물포의 청국 영사는 한 장갑함의 장교 몇 명과 함께 조선 기선(汽船)을 타고 군대의 상륙 방법을 연구하러 떠났다.

 

<b>6</b><b>월 </b><b>9</b><b>일</b>

저녁에 전라도에서 연락원이 세 신부의 편지를 가지고 오다. 전주가 함락될 당시에 감사의 영에 따라 교외에 불을 질렀는데, 그런 다음에 감사는 이방과 병방 그리고 형방과 함께 도망쳤다고 함. 백성들은 달아났다가, 곧 동학도와 합류하여 되돌아왔다. 5월 31일에 전주성으로 들어온 폭도들은 수천 명에 달했다. 6월 1일에는 홍재희(또는 홍계훈)31) 장군이 서울의 군사들을 이끌고 높은 지대에 도착하였는데, 도시를 부분적으로 포위하고, 성 안에는 3발의 포격을 가했다. 1,000명 정도의 동학도들이 빠져나갔는데, 그 중의 일부가 살해되자 도망치던 자들은 부내(府內)로 다시 들어왔고, 산야(山野)에 흩어져 있던 다른 자들은 도망하던 전주 사람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그 소식을 들은 동학도들은 부내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복수하고 있다. 그들은 전주부를 지키며 거기에 가까이 오는 자들을 죽이고 있다. 신학생 김 도마는 6월 1일 저녁에 버려져 있던 보두네 신부의 집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턱에 총을 한 발 맞았다고. 보두네 신부는 돈과 옷, 그리고 제의(祭衣)들을 감춰 두고 전주에서 20리 떨어진 마재로 피신하였다. 조조 신부는 성사집행을 조금 하였는데, 배재의 높은 산악지대여서 두려울 것이 전혀 없다고 한다. 비에모 신부는 이틀간 종적을 감추었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교우들이고 외교인들이고 뒤죽박죽인 상태이며, 농사는 버려진 채라 한다. 얼마 전에는 그가 맡은 구역의 예비자 7명과 신입교우 1명이 석유불에 머리털을 그을리고 동학도들에게 머리털을 잘렸다고.

 

<b>6</b><b>월 </b><b>10</b><b>일</b>

나는 포르페 호의 함장에게 급사(急使)를 보내어 소식을 전했는데, 새로 교체되었을지도 모를 포르페 호의 함장에게 연락하라고 마라발 신부에게 말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랑루 함장으로부터 9일 아침에 체푸로 떠난다는 내용의 6월 5일자 편지를 정오에 받았다. 청국 포함 1척은 조선에 파견된 군대가 대구(大邱)를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8일 아침에 남하하였다. 소문에 의하면 청국 군대는 아산(牙山)에 상륙할 것이라고 한다. 일본 공사가 병사 50명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서울에 돌아올 것이라는 말들도 하고 있다. 실제로 저녁 6시경에 일본 군인들이 진고개 지역에서 도착하였다는 나팔 소리가 들리다. 전라도에서 받은 소식들을 르페브르씨와 드 케르베르그씨에게 알려 주다.

 

<b>6</b><b>월 </b><b>11</b><b>일</b>

사람들 말에 의하면 일본 병사 수는 400명에 이르며, 아직도 많은 수가 더 올 예정이라고 한다. 그들은 대포와 각종 군수품으로 무장하였다. 3시경에 제물포에서 보낸 연락원이 당도. 마라발 신부는 랑루 함장 앞으로 보낸 편지를 앵콩스탕호 함장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함장은 그에 대해 매우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현재 제물포에 11척의 전함이 정박하고 있으며, 영국 배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b>6</b><b>월 </b><b>13</b><b>일</b>

오늘 아침 7시에 일본 병사들(대부분이 배에서 내린 해군들)이 제물포를 향해 출발하였다. 하지만 낮 동안에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다른 병사들로 대체될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오후 5시경에 800명(어떤 이들은 1,000명이라고 한다)의 병사들이 촘촘히 열을 지어 남대문, 구리개, 명동, 진고개를 거쳐 도착하고 있음을 알리는 군대의 나팔 소리가 들리다. 장교들은 말을 타고 있다. 이 대열은 일본 공사관으로 가는 길이며, 병사들은 몹시 지쳐 보였다. 이들이 진을 치는 것을 보러 갔던 프와넬 신부와 샤르즈뵈프 신부는 오오토리 공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위안 공사, 그리고 거기에 온 드 케르베르그씨와 르페브르씨를 만났다고 한다.

 

<b>6</b><b>월 </b><b>15</b><b>일</b>

등에 배낭을 메고 어깨에 총을 걸친 채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군 척후병 2명이 우리 땅을 감시하는 것처럼 이따금씩 우리 소유지 주위를 맴돌다. 그들은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여기를 자기네 조차지(租借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b>6</b><b>월 </b><b>16</b><b>일</b>

우리 집의 조선 사람들은 우리 주위를 맴도는 그 일본군 척후병들을 아주 좋지 못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 또 청국인 노무자들은 오늘 아침에 두 차례나 우리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자기들이 보기에 위협이라도 하는 것 같은 이 척후병들이 계속 돌아다닌다면 일을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르페브르 씨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고, 르페브르 씨는 오오토리 씨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결과 실제로 정오부터는 이 척후병들의 방문이 일체 중단되었다. 오늘 아침에는 마치 정세를 살피려는 듯이 장교까지 한 명 왔었다. 저녁에는 또 총사령부 참모장 소속의 공병대 지휘관 한 명이 왔다. 그는 지금 특수한 사명을 띠고 여기에 온 것이다. 필시 프랑스 공사의 항의가 근거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알아보라는 사명일게다. 그는 프랑스어를 아주 잘 말한다. 실제로 그는 처음에는 그르노블(Grenoble), 다음에는 퐁텐블로(Fontainebleau)의 실습학교 등 5년 동안 프랑스에서 보냈으며, 작년에는 인도차이나(印度支那)에 종군하였다고 한다. 그는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며 만약 우리가 항의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자신에게 직접 알려 달라고 내게 당부한다.

 

<b>6</b><b>월 </b><b>29</b><b>일</b>

공포 분위기는 계속 가중되고 있다. 함장이 편지를 보내오다. 지난 27일, 일본 수송선 8척이 병사 4,000명과 식량, 그리고 물자를 제물포에 실어다 놓았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 청국인들은 거의 다 떠나 버렸다. 우리 벽돌공들은 떠났고, 미장이들도 위태위태해 보인다.

 

<b>7</b><b>월 </b><b>1</b><b>일</b>

전란(戰亂)을 피해 지방으로 내려가 버린 조선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b>7</b><b>월 </b><b>2</b><b>일</b>

10시경에 전라도의 연락원과 전주에서부터 가마로 실려 온 김 도마 학생이 도착. 그는 여전히 말도 못하고 우유 등과 같은 유동식만을 삼킬 수 있을 뿐이다. 신부들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다. 보두네 신부는 집으로 다시 돌아갔으나 가구와 생필품, 그리고 엽전 700냥가량 등의 금전적인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흩어진 동학도들은 200~300명씩 무리를 지어 부자들을 노략질하고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청국군 선발대는 6월 26일에 전주에 도착하였으며, 그 뒤로 더 대규모의 병사 대열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다. 비가 내려 공기를 조금 신선하게 해 주다.

 

<b>7</b><b>월 </b><b>6</b><b>일</b>

저녁때 전주에서 전보가 도착. “신자들이 위험에 임박해 있음. 조조, 보두네.”(CHRISTIANI IN PERICULO IMMINENT. JOZEAU, BAUDOUNET.) 어디서 위험이 오는 것일까? 아마 전주를 빠져나갈 필요가 없어지면서 노략질을 시작한 동학의 무리들로부터 오는 것일 게다.

 

<b>7</b><b>월 </b><b>7</b><b>일</b>

르페브르 씨를 보러 가다. 그는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얻고서 행동을 개시했으면 하길래, 내가 전주의 보두네 신부에게 전보를 띄우다. “도대체 어떤 위험인가. 적은 누구이고 몇 명이며, 어디에 있는가. 갈수록 더 난폭해지는가. 읍내에 중국인들이 있는가. 뮈텔.”(QUODNAM PERICULUM QUI HOSTES QUOT UBI DIE FURIUS SINENSES SUNTNE IN URBE. MUTEL.) 3시경에 전주에서 새로운 전보가 날아들다. 하지만 아직 내가 보낸 전보에 대한 답장은 아니다. “어제 내 전보 받았는가. 적들은 중국인들. 즉시 회답 요망. 보두네”(HERI ACCEPISTE TELEGRAMM SINENSES INIMICI. REPONDEZ AUSSITOT. BAUDOUNET). 나는 다시 르페브르 씨에게 갔으나 그는 부재중이었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러한 적의가 없어지게끔 청국인들에게 교섭을 부탁하는 메모를 남김. 아침에 알릭스 신부가 제물포로 떠났다.

 

<b>7</b><b>월 </b><b>8</b><b>일</b>

정오에 보두네 신부로부터 답신 전보. “신자들은 약탈당하고 매를 맞아 죽을 위험에 처함. 적들은 1만 명가량. 조조 신부 근처에 있음. 중국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떠났음.”(CHRISTIANI SPOLIATI VERBERATI PERICULUM MORTIS INIMICI DECEM MILLIA JOZEAU PATRIS PROPE SINENSES NIHIL FACIENDO EGRESSI.) 이거야말로 갈수록 불분명해진다. 적들이란 어떤 자들인가? 어제 같아서는 청국인들이었는데, 오늘 보니 그들은 떠나 버렸다고 한다. 또 적이 10,000명이라니? 나는 르페브르 씨를 보러 갔다. 그는 집에서 드 케르베르그 씨, 그리고 타세 씨와 함께 점심 식사하는 중이었다. 타세 씨는 5~6일간 북한(北漢)에서 머물다가 다시 내려왔다고 함. 르페브르 씨는 [판독 안됨]에 관한 내 메모를 보고 위안에게 편지를 띄웠으며, 그는 전주로 전보를 치겠다고 약속하였단다. 그는 곧 위안에게 짧은 글월을 띄워 새로운 정보에 의하면 전보 내용이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고 전하겠단다. 그리고 독판에게는 교우들을 보호하라는 영을 내려 달라고 부탁하겠다고 한다. 어제 용산에 머물던 알릭스 신부가 오늘 아침으로 신부와 함께 제물포로 떠났다. 그들은 작은 청국 배를 타고 갔다. 일본 배들은 계속해서 여행객들을 태우기를 거부하고 있다. 김 도마는 볼도크 박사에게 보인 첫날에 탄환을 뽑았는데, 점차로 회복되고 있다. 저녁나절 내내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다.

 

<b>7</b><b>월 </b><b>9</b><b>일</b>

저녁에 세 신부의 편지를 지닌 전라도의 연락원 도착. 각각 7월 3일, 4일, 6일자 편지이다. 유독 고창, 정읍, 순창, 장성 등지의 교우들을 위협하고 있는 자들은 바로 지방에 흩어져 있는 동학도들이다. 보두네 신부와 조조 신부는 감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감사는 그들의 편지를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b>7</b><b>월 </b><b>10</b><b>일</b>

르페브르 씨는 전주 감사가 선교사들의 편지를 거절하였다는 것을 알고 분개하였다. 그는 독판에게 감사를 엄히 질책하는 전보를 띄우라고 하였고, 독판은 감사에게 감사 앞으로 온 그 편지를 찾아내고 선교사들과 교우들을 보호하라는 영을 내렸다. 저녁 9시에 전라도에서 다시 전보가 오다. “유럽 군인들이 즉시 온다면 신자들과 우리는 죽을 것이다. 보두네”(EUROPEANI MILITES SI STATIM VENIANT CHRISTIANI ET NOS PERIBIMUS. BAU-DOUNET). “만약 ~라면(SI)”이라는 단어는 “만약 ~아니라면(NISI)”을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닐지? 그렇더라도 몇 가지 의심나는 점이 있지 않은가?

 

<b>7</b><b>월 </b><b>11</b><b>일</b>

르페브르씨를 찾아가 “만약 ~아니라면(NISI)” 얘기와 함께 전보를 읽어 주다. 나는 해군 제독에게 알리자고 제의했다. 그는 앵콩스탕호 함장에게 부탁하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 배가 아직 제물포에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므로, 그는 라포르트씨에게 전보를 쳐서 함장에게 영사의 편지를 받기 전에는 떠나지 말라고 청하게 하였다. 내 쪽에서도 위험과 그에 대처할 수 있는 가능성에 관해서 내가 얻은 정보들을 모두 함장에게 전해야겠다. 아침에 보두네 신부에게 전보를 쳤다. “감사가 어제 당신들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음. 그러니 안심하기 바람. 현재 군인들이 부족함”(GUBERNTOR HERI RECEPIT MANDATUM VOS ADJUVANDI. ET REMITE. NUNC DESUNT MILITES). 정오에는 샤르즈뵈프 신부를 용산으로 보내 전라도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베르모렐 신부에게 제물포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이르다. 우리 해군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4시가 되어도 르페브르씨로부터 아무런 답이 없다. 내가 그를 보러 갔더니 그는 아무 소식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함장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썼고, 나는 그 편지를 나의 편지와 함께 용산으로 보냈다. 오늘 저녁에 떠날 것인지 내일 아침에 떠날 것인지 하는 선택만은 베르모렐 신부에게 맡겼다.

 

<b>7</b><b>월 </b><b>12</b><b>일</b>

저녁때 주사의 방문. 독판이 어제 전주 감사에게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라는 말을 하려고 세 번이나 전보를 쳤다고 한다. 우리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위험을 겪고 있다는 것을 왕도 알았으며, 왕은 어떤 대가(代價)를 치르더라도 그들을 구조하겠다는 간절한 희망의 뜻을 표하였다. 일본인들과 관련해서는 상황이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들은 왕에게 개혁을 강요하려 하고 있으며, 기회를 기다렸다가 되도록이면 최소한도의 동의를 하려는 왕은 여기 있는 일본인들이 불평분자들 혹은 반란군과 합의를 하고 또 일본인들의 지원을 업고서 그들이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탈취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현재 조선 정부는 기능이 마비된 상태이다. 민씨(閔氏) 일가들은 파렴치하게 부(富)의 축적을 계속하고 있으며, 그들 때문에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남산에서 들리던 일본인들의 세레나데는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로 끝이 났다.

 

<b>7</b><b>월 </b><b>13</b><b>일</b>

제물포에 갔던 연락원이 돌아오다. 어제 마라발, 로, 베르모렐 등 3명의 신부가 배로 찾아갔는데,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앵콩스탕 호는 곧 떠났다고 한다. 필시 함장은 그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라고 판단하여 나가사키(長崎)의 해군 제독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러 간 모양이다. 6시에 전주에서 전보. “감사가 우리를 조소함. 늘 죽을 위험에 처해 있음. 조조.”(GUBERNATORI NOS COMMITTERE DERISORIUM SEMPER AD MORTEM DESTINATI. JOZEAU.) 이 가엾은 신부는 무슨 생각에서 나에게 이런 전보를 보낸 것일까!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b>7</b><b>월 </b><b>15</b><b>일</b>

두세 신부가 저녁 식사에 오다. 6시 반경 전주에서 전보. “신자들이 죽음을 피해 산에서 방황하고 있으므로 도움이 필요. 즉답할 것. 조조.”(CHRISTIANI MORTEM FUGIENTES IN MONTIBUS ERRANT UNDE AUXILIUM. REPONDES DE SUITE. JOZEAU.) 그에 대해 이런 답장을 보내다. “왕이 친히 당신들을 보호하라고 감사에게 명령하였음. 다른 희망은 없음. 뮈텔.”(REX IPSE MANDAVIT KAMSA VOS PROTEGERE NIHIL ALIUD SPERATI. MUTEL.) 오늘 아침에 이 가엾은 신부들에게 보내는 장황한 상황 설명과 함께 전라도의 연락원을 돌려보내다. 폭도들을 쫓아내고 교우들을 보호하기 위해 해군 병사들을 상륙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무엇 때문에 그렇듯 불가능하고 허망한 도움을 기대하며 거기에 집착하는 것일까. 르페브르 씨가 내게 얘기해 준 바에 의하면 전라도 감사가 전보를 쳤다고 한다. 즉 그가 신부들, 아니 적어도 그들 중의 한 명을 만나 보았었으며 가능한 진압책에 관하여 그들과 오랫동안 상의했다는 내용의 전보라고 한다.

 

<b>7</b><b>월 </b><b>19</b><b>일</b>

전라도에서 연락원이 보두네 신부와 조조 신부의 편지를 가지고 오다. 동학도들의 수가 대단히 많다고 한다. 50,000명이라는 말들도 있고 심지어는 100,000명이라는 말들도 있다고. 하지만 이 숫자는 과장된 것이다. 교우들도 외교인들도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연락원이 도착한 조금 뒤에 조조 신부로부터 전보. “감사의 보호라니요. 신자들의 살육과 방화가 시작됨. 회답 요망. 조조.”(ECCE GUBERNATORIS PROTECTIO INCIPIUNT CHRISTI-ANORUM CAEDES ET INCENDIA. REPONSE. JOZEAU.) 오, 하느님! 내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단 말인가? 저녁에 2명의 일본 병사가 수녀원을 침입하다. 그들을 밖으로 몰아내기가 무척 힘들었으나, 그들 중 한 명에게서 그가 긴 줄에 매달아 가지고 있던 부적(符籍)을 빼앗음으로써 간신히 쫓아냈다. 그 즉시 2명의 경찰관이 조사를 한다고 왔지만, 지체없이 불려나간 프와넬 신부가 공손하게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저께 제물포 세관장 오스본 씨가 일본 병사들에게 떼밀렸던 모양이다. 확실히 일본인들은 영국인들과 운수(運數)가 맞지 않는 모양이다. 가드너 씨는 25명의 해군을 상륙케 하였고, 요즈음 그 해군들이 서울에 와서 영사관을 지키고 있다. 영국인들은 낙동을 떠나 영사관 근처로 피신해 있다. 제물포에서는 머지않아 청국 군대가 서로 다른 5군데의 장소에 상륙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의주(義州)(기마병 8,000, 보병 10,000), 절도(Htyel-to), 마산포(馬山浦), 아산(牙山), 부산(釜山) 등지이다. 유럽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런 소식을 듣지 못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소문은 거짓인 것 같다. 오늘 아침에 르페브르 씨는 프랑스에서 자국민들과 선교사들의 안전을 그가 책임지도록 하라는 전보를 받았다. 이것은 분명히 리옹 호에서 해군 제독에게 전라도 문제에 대해 전보를 치자, 이를 받은 제독이 다시 프랑스에 전보를 쳤기 때문일 것이다. 위안 씨는 현재 상황에 대한 상세한 보고를 하라는 부름을 받고 오늘 청국으로 떠났다. 그는 업무를 통 씨에게 인계하고 갔다. ……

 

<b>7</b><b>월 </b><b>24</b><b>일</b>

1시경에 전주에서 전보. “신부들과 모든 신자들이 죽게 생겼음. 보두네. 즉답 요망.”(PATRES OMNES CHRISTIANI MORIUNTUR. BAUDOUNET. REPONDEZ DE SUITE.) 그에게 이런 답신을 보내다. “신부들은 피신하거나 이리로 오라. 뮈텔.”(PATRES FUGIANT VEL HIC VENIANT. MUTEL.) 저녁때 전주에서 다시 연락원이 오다. 조조 신부와 보두네 신부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한 편지는 7월 19일자, 다른 하나는 7월 20일자이다. 상황이 절망적인 것 같다. 주여, 평화를 주소서!(Da pacem Domine!) 여러 지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소요는 모두 일본인들이 바라던 것이 아닐까? 저녁때 나는 마음에도 없으면서 모토노 씨를 방문하였다. 그는 너무 과장되이 친절을 보이며 나를 맞아들인다. 그리고 몇 가지 거짓말을 털어놓는다. 프랑스 말로 하는 그 거짓말들은 들어주기가 정말 가증스럽다. 그에게는 어떤 진실도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느끼다. 그는 오늘부터 조선 왕국의 행정권이 대원군의 손에 넘어간다는 얘기도 한다.

 

<b>7</b><b>월 </b><b>26</b><b>일</b>

오늘 아침에 수많은 일본군 병사들이 수원(水原)을 향해 떠나다. 필시 아산(牙山)으로 가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제 성문 밖의 막사는 거의 비어 있으며, 도성 안에도 여러 군데의 수비 초소 근무를 위한 적정 인원뿐이다. 통 씨를 찾아가 초이 씨가 우리 집에 두고 간 봉투를 전해 주다. 통 씨는 그때 막 떠나려는 참인 것 같았다. 이번에는 그가 떠나는 것이다. 어쨌든 오늘 저녁 5시경에 청국의 선박이 탈취당했다. 저녁에 드 케르베르그 씨가 마라발 신부의 편지를 가져다주다. 25일 아침, 제물포에서는 약 30분간 계속된 포격 소리가 들렸는데, 이는 아산(牙山) 방향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b>8</b><b>월 </b><b>2</b><b>일</b>

샤르즈뵈프 신부가 용산에서 소식을 가져오다. 청국군이 처음에는 소사(素沙)에서, 다음에는 천안(天安) 부근의 성환 成歡에서 완전히 패배했다는 소식이다. 또한 오늘 저녁 9시 반에 파스키에 신부의 연락원 두 명이 와서 가엾은 조조 신부가 청국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다. 그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었는데, 7월 29일 저녁 화론(공주) 弓院의 주막에서 패주하던 청국 군대와 마주쳤는데, (그 청국 군대는 바로 그날 아침에 격퇴당했음) 신부는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신부의 마부인 칼노 영감도 그들의 총에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끔찍한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교우들 가운데조차도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신부와 동행하던 4명의 교우들은 아주 멀리 뒤처져 있었다고 한다.

 

<b>8</b><b>월 </b><b>3</b><b>일</b>

밤새도록 그 학살 소식이 정말 확실한 것인지 생각해 보다. 그리고는 오늘 아침 몰두해서 파스키에 신부의 편지를 다시 읽어 보다. 틀림없이 죽음의 증거는 완전하지가 않다. 하지만 파스키에 신부는 그 증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만났던 연락원이 화론(Hoaron)의 외교인들로부터 신부의 피살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르페브르 씨에게 우리가 상(喪)을 당했음을 알리고, 곧 모토노 씨를 찾아가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일본 군대가 공주 쪽으로 청국 군대를 뒤쫓아 내려갈 예정이라면 우리 동료 신부의 유해나마 찾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청국인들이 무장을 해제하고 떠났으므로 일본군 당국에서는 그들을 추격하지 않기로 하였다고 그는 대답한다. 하지만 그 뒤에 葉 장군이 공주 근방의 雙樹城에서 부대를 다시 집결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므로, 그를 공략하기 위한 새로운 군사 작전이 아마도 불가피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조조 신부의 유해를 찾을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 한다. 오늘 아침에 두세 신부가 우리를 보러 왔다. 그는 조조 신부가 목천(木川)이나 청주(淸州)의 길을 택하지 않고 어쩌면 그리도 대담하게 위험을 무릅쓰고 큰길로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한다.

 

<b>8</b><b>월 </b><b>6</b><b>일</b>

저녁에 대구(大邱)에서 8월 1일자 우편물 도착. 7월 31일에 보두네 신부가 전주에서 로베르 신부에게 전보를 쳤다고 함. “조조가 청국인들에게 피살되었음. 서울에 알리시오. 보두네.”(JOZEAU TUE PAR CHINOIS. PREVENEZ SEOUL. BAUDOUNET.) 딱한 로베르 신부는 이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전주에서 서울로 오던 전보는 틀림없이 중도에서 차단되었을 것이다.

 

<b>8</b><b>월 </b><b>8</b><b>일</b>

저녁때 전라도의 연락원. 비에모 신부가 쓴 짤막한 편지를 가져다주다. 아마도 8월 2일에 쓴 것인가 본데, 그와 보두네 신부의 서명이 함께 되어 있다. 그들은 피신중에 있으며 커다란 위협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그들을 구조해 줄 수 있을 만한 프랑스 군함 1척을 군창에 파견해 주는 길 외에는 달리 추격을 피할 방법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연락원들은 홍주와 퀴를리에 신부의 집을 거쳐서 왔다. 가엾은 퀴를리에 신부 역시 큰 위험에 처해 있다. 도처에 동학도들이 있으며 어디서나 매우 위험한 상태다.

 

<b>8</b><b>월 </b><b>9</b><b>일</b>

베르모렐 신부는 오늘 아침 7시에야 용산을 떠날 수 있었다. 퀴를리에 신부, 파스키에 신부, 알릭스 신부에게 조심하여 서울로 올라오라는 말을 전하기 위한 회람 서신을 보내다. 상황이 너무나 심각하므로 그들이 위험에 노출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정오에 알릭스 신부 도착. 그는 도중에서 연락원을 만났단다. 종부성사를 주러 하우고개[下牛峴]에 갔다가 돌아온 그는 여기에서 머물 것이다. 크리엔 씨의 방문. 그때 전라도의 신부들로부터 다시 전갈이 오다. 8월 6일에 어느 동굴에서 씌어진 편지이다. 날이 갈수록 위험이 가중되고 있다. 가엾은 신부들은 프랑스 배 한 척을 보내 달라는 그들의 요청을 되풀이하고 있다. …… 8시 반에 2명의 연락원이 도착. 8월 6일 파스키에 신부가 간양골에서 써 보낸 매우 근심스런 편지를 가지고 오다. 하지만 파스키에 신부는 퀴를리에 신부와 만난 뒤 둘이 함께 갓등이에 와 있으며, 연락원은 오늘 아침에 그들을 뒤로하고 온 것이다. 그들은 내일이면 서울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b>8</b><b>월 </b><b>10</b><b>일</b>

10시에 퀴를리에 신부와 파스키에 신부 도착. 천주께 감사!

 

<b>8</b><b>월 </b><b>11</b><b>일</b>

오늘 우리는 조조 신부의 피살에 조의를 표하는 수 많은 방문객들을 받았다. 아침에는 가드너씨, 오후에는 실(Sill)씨, 이어 베베르씨와 드 케르베르그씨, 그리고 마지막으로 르페브르씨가 찾아왔다.

 

<b>8</b><b>월 </b><b>18</b><b>일</b>

8월 16일자 르 메르 신부의 편지는 주민들이 패주하는 청국 부대의 낙오병들에게 약탈을 당했으며, 지금 본인은 산에서 밤을 보내려고 준비하는 중이라고 적었다. 왜냐하면 그 낙오병들이 다음날 풍수원(豊水院)에 들어오리라 예상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앵콩스탕 호로부터는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이렇듯 늦어지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인 것 같다. 한편 15일에 공주(公州)를 출발한 어느 교우는 신부들이 아주 가까이에서 추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바로 신부들이 숨어 있는 산에서 동학도들의 총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원조자이시여,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보라, 마리아는 우리의 희망이셨도다’(Auxilium christianorum o.p.n.! Ecce Maria erat spes nostra).

 

<b>8</b><b>월 </b><b>21</b><b>일</b>

전라도에서도, 그리고 앵콩스탕 호에서도 여전히 소식이 없다. 오래전에 올라온 남쪽 지방 교우들 중의 한 명을 군창으로 떠나게 하다. 그는 정오에 되돌아와서는 도중에 파스키에 신부의 복사에게 소식을 들었는데 그 두 명의 신부가 피살을 당했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그 복사를 불러오게 하다. 그는 12일에 수원(水原)을 지나다가 그런 소식을 들었노라고 얘기한다. 이는 우리가 받은 마음이 놓이는 소식들과는 상반되는 것이며, 어제 모토노 씨가 우리에게 전해 준 전보 내용하고도 모순되는 것이다. 전보의 내용인즉, 19일에 부산(釜山)에서 우도 신부에게 받은 소식에 의하면, 비에모 신부가 고산(高山)에서 동학도들에게 포위되었으며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전보에는 보두네 신부로부터는 소식이 없지만, 아마도 두 신부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저녁때 로 신부 도착. 베르모렐 신부가 제물포에서 막 돌아온 참이며, 앵콩스탕 호는 어제 제물포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신부들의 소식은 없다고. 신부들을 찾으러 보낸 연락원마저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마라발 신부에게 받은 편지도, 보두네 신부 집에 있는 교우들이 전주(全州)에서 베르모렐 신부에게 써 보낸 14일자 편지도 한결같이 우리에게 침울한 소식을 전해 주고 있다. 하지만 신부들에 대해서는 좀 덜 걱정스럽다. 동학도들에게 무기를 잃어버리고 동료들과 함께 돌아온 강화(江華)의 포졸이며 예비교우인 연락원의 말에 의하면, 폭도들은 더 이상 특별히 선교사들은 물론 신자들도 찾아내려 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b>8</b><b>월 </b><b>22</b><b>일</b>

베르모렐 신부는 이곳에 있다. 그의 의견에 따라 보두네 신부와 비에모 신부에게 경상도로 넘어올 길을 찾아보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교우 3명을 파견하다. 경상도는 일본군들의 통행로이기 때문에 동학도들이 없다. 그와는 반대로 충청도에는 동학도들이 들끓고 있다.

 

<b>8</b><b>월 </b><b>28</b><b>일</b>

성 아오스딩 첨례. 신부들 모두가 함께 모여 점심 식사. 로 신부와 함께 우에하라 씨를 방문. 일본 공사관 관저에서 그를 만나다. 오후에 비에모 신부의 복사인 주 바오로와 다른 3명의 전라도 교우가 도착. 그들은 두 신부들이 여기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10일 저녁 앵콩스탕 호에서 상륙시킨 연락원은 馬梁에서 동학도들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틀 만에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14일에는 보두네 신부와 비에모 신부에게로 갈 수 있었다고. 동학도들에게 포위된 채 산속에 있던 두 신부는 포위망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르페브르 씨가 외아문독판(外衙門督辦)에게 전하고, 독판이 다시 전주 감사(全州監司)에게 내린 명령, 즉 위험에 처한 선교사들에게 호위대를 조직해 주고 통행증을 발부하라는 명령에 따라 정식으로 그러한 영을 받은 감사(김학진(金鶴鎭)으로 알려져 있음)는 보두네 신부의 집에 있던 교우들에게 이를 알렸고, 교우들은 19일에 전주(全州)에 온 신부들에게 이를 전했다. 전주에서 신부들은 다시 수단으로 갈아입고 가마를 이용하여 조그만 항구, 함열(咸悅) 성당진(聖堂津)을 향해 떠났다. 집사(執事) 한 명이 그들을 보호했고, 관쪽(關子)에 대한 답신을 지니고 선교사들을 서울까지 인도할 책임을 진 서울의 특사, 그리고 동학에 가담한 자들로부터 선교사들을 지켜 주기로 예정된 동학도의 우두머리 두 명이 함께 출발하였다. 20일 신부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은 조선 돛배(jonque)에 올랐으며 이틀이면 마양(馬梁)에 당도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들은 마량에 가면 그때라도 앵콩스탕 호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베르모렐 신부가 연락원에게 그 배가 15일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한 말을 연락원이 잘못 알아듣고 두 신부에게 배가 15일 동안 기다릴 것이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제물포에 다녀오는 여행을 계획했지만 출발을 망설이고 있었던 퀴를리에 신부, 파스키에 신부는 곧 내일 아침 일찍 떠나기로 작정하다. 조선 사람 두 명이 그들과 함께 떠날 예정이며, 퀴를리에 신부는 이 조선 사람들과 함께 앵콩스탕 호의 함장에게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나는 함장 앞으로 오늘 들었던 모든 소식을 전하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퀴를리에 신부를 위해 조선말 지명을 찾아볼 수 있게끔 내 지도를 간략하게 스케치해 주었다.

 

<b>9</b><b>월 </b><b>1</b><b>일</b>

8시 반이 되자마자 르페브르 씨가 아래와 같은 전보를 가지고 오다.

“니우선(Niusen) 1894년 8월 31일 오후 7시 45분 발신, 8시 45분 수신. 마츠이, 서울. 다음을 프랑스 공사관 르페브르에게 전하기 바람. 조선의 기선 편으로 이미 출발한 원산(元山)의 선교사들이 내일 도착할 것임. 그라비에(그라니에를 가리킴) 노스(Nosse).”

신부들이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이 어디 있는 것일까? 이 기쁜 소식에 모두들 즐거워하며 이 전보문을 해독해 보려고들 애쓰다. 저녁때 드 케르베르그 씨가 러시아 해군 분견대의 신임 지휘관 트라플린스키(Travlinsky) 중위를 소개해 주기 위해 방문. 그때 우리를 크게 절망시키는 마라발 신부의 편지가 도착하다. 마량(馬梁)에 당도하긴 했으나 거기서 앵콩스탕 호를 발견하지 못한 채 보두네 신부와 비에모 신부가 마라발 신부에게 누군가가 마량으로 그들을 찾으러 와 줄 것을 요청하는 짤막한 편지를 보내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마량에 있겠다고 했단다. 그 편지는 지난 28일에 도착하였다고. 앵콩스탕 호는 29일에 출발하여 오후 3시경에 마량에 도착. 신부라고는 아무도 없었단다. 대신에 편지 한 통만 남아 있었다. 이 편지에 따르면 동학도들에게 쫓긴 그들은 [판독 안됨]의 관장이 제공한 [판독 안됨]을 따라서 元山의 섬으로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통역자도 없이 출발한 앵콩스탕 호는 약간 고생을 하였으며, 그런 뒤에 원산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항해하였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탐색 끝에 그들은 신부들의 또 다른 편지를 찾아냈다. 병들고 지친데다 전함이 오리라는 것도 불확실하다는 내용의 편지다. 신부들은 조그만 조선 기선에 타고 있다. 그들은 바로 그날 오후 앵콩스탕 호의 도착 몇 시간 전에 출발했던 것이다. 앵콩스탕 호는 그 두 명의 피신자를 보게 되리라고 믿고 있던 제물포로, 언제나처럼 아무런 수확도 없이 되돌아온 것이다!

 

<b>9</b><b>월 </b><b>2</b><b>일</b>

10시경에 마츠이 씨의 편지. 오늘 새벽 4시에 앵콩스탕 호의 장교 3명이 소피 호를 타고 출발했음을 알리는 전보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같은 시간에 위험에서 빠져나와 서울로 피신해 오는 르 메르 신부와 부이용 신부가 도착하다. 특히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동학도들, 그 무리의 강도질이다. 식사 후 베르모렐 신부와 샤르즈뵈프 신부가 삼개[麻浦]를 향해 출발, 그리고 4시에 앵콩스탕 호의 프라피에 부관, 뒤몽(Dumont) 장교, 군의관 티티(Titi) 씨를 데리고 돌아오다.

 

<b>9</b><b>월 </b><b>4</b><b>일</b>

장교들이 삼개로 떠나다. 하지만 소피 호는 내일에나 내려간다. 로 신부가 그들을 용산으로 데리고 가고, 베르모렐 신부가 저녁때 들러서 그들을 두세 신부 집으로 다시 데려감. 북부지방에서 연락원. 8월 18일에 뒤테르트르 신부 집이 몇몇 조선인들이 끌고 들어온 300~400명 정도의 청군들에게 약탈당하고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한다. 모두가 약탈을 당했다고. 그는 그가 입은 피해액을 엽젼 3,200냥으로 추산하고 있다. 다행히도 그는 도망하여 이웃의 신자들 집에 안전하게 있을 수 있었다. 르 장드르 신부 마을에도 21일에 청군(약 2,500명)이 지나갔으나 신부가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가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7,000명의 청군과 8,000명의 만주군이 8월 9일경에 평양(平壤)에 도착하였다. 알려지기로는 30 내지 40만 명의 병사가 처음의 병사들 곁으로 뒤따라올 예정이라고 하나, 25일경까지 아직 한 명도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즈음에 黃州에는 1,000명의 청군과 황해도의 사냥꾼들이 있었으며, 10,000명의 청군은 平壤에서, 나머지는 安州에서 숙영 중이었다. 마지막 두 곳에서는 겨울을 나기 위해서 정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일 아침에 한강에서 배를 내린 르메르, 부이용 두 신부가 한 일본인 파수병에게 체포되었다. 그 파수병은 신부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신호를 하며, 또 일본 말로 얘기를 하였다. 그의 일본 말은 더욱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이었다. 두 신부는 그가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몰라 프랑스 말로도 얘기하고 조선말로도 얘기하였다. “우리는 프랑스 사람이다. 우리는 서울로 가는 길이다.” 파수병은 고집스럽게 그대로 있었다. 잠시 뒤 3~4명의 병사들이 그를 도우러 와서는 신부들을 떼밀고 르 메르 신부의 등을 주먹으로 서너 대 후려쳤다. 신부들은 초소로 끌려갔다. 초소에서는 풋내기 신병이 그들에게 모든 것을 일본 말로 말하고 또 일본 말로 글까지 쓰더라는 것이었다. 결국 두 명의 신부는 그들의 여권에 사증(査證)을 받았고, 그러자 떠나게 해 주었다고 한다.

 

<b>9</b><b>월 </b><b>5</b><b>일</b>

오늘 아침, 3명의 장교들이 베르모렐 신부와 함께 떠나다. 제물포에서 편지. 보두네, 비에모 두 신부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단다.

 

<b>9</b><b>월 </b><b>6</b><b>일</b>

제물포에서 퀴를리에 신부 도착. 파스키에 신부는 제물포에서 꼼짝 못하고 있다. 류머티즘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필시 그가 내게 편지로 요청했던 대로 1년 내지 2년 예정으로 유럽에 가려는 때문이기도 할 게다. 정오부터 우리는 전라도의 신부들에 대해 더욱더 불안을 느끼다. 7시 반에 내가 성체 조배 중이었을 때, 누군가가 와서 나에게 그들이 도착했다고 알렸다. 그들은 잠시 두세 신부 집에 들어갔으며, 그들의 심부름꾼들이 먼저 여기에 온 것이다. 나는 전보로 제물포에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 일본 공사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돌아오니, 보두네 신부, 비에모 신부가 식사하는 중이다. 한 달 동안의 불안 끝에 이렇게 해방을 맞다니! 원산(元山)을 출발하여 8월 29일에는 안면도(安眠島)로 갔다고 한다. 그들이 탄 배는 조선의 기선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나룻배였다고. 그 배는 어떤 바위에 부딪혔던 키를 수리하기 위해 안면도에서 20~30리를 가서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단다. 거기에서부터 그 작은 배에서 일어난 뜻밖의 돌발사건과 변화를 수도 없이 겪고 나서, 그들은 安興 땅을 밟았다. 다시 泰安 쪽으로 발길을 옮겨 瑞山, 唐津, 한 나로(Han naro), 알릭스 신부의 집을 거쳐 마침내 서울에 이른 것이다. 그들이 갓등이에 도착한 것이 오늘이라고. 그들은 거의 400리 길을 걸어서 와야 했으므로 몹시 지쳐 있다. 저녁 식사 후에는 비에모 신부 자신이 몸이 불편함을 느껴 곧 자리에 누워야 했다.

 

<b>9</b><b>월 </b><b>10</b><b>일</b>

조금 기운을 되찾은 보두네 신부와 비에모 신부는 그들을 위해 앵콩스탕 호의 함장이 해 준 일에 대해 함장에게 감사를 표하고자 제물포로 떠나다. 조조 신부의 죽음에 관한 나의 진술서를 복사하여 함장에게 보내다. 함장이 그것을 해군 제독에게 전하게 하기 위해서다. 르페브르 씨에게도 진술서 사본 3부를 보내다. 1부는 문서(文書)로 보관하기 위한 것이고, 1부는 베이징에 보낼 것, 그리고 나머지 1부는 외무성에 보낼 것이다.

 

<b>9</b><b>월 </b><b>17~ 20</b><b>일</b>

피정. 코스트 신부가 전라도 및 충청도의 신부들과 함께 르페브르 씨를 찾아가다. 조조 신부의 유해를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해 줄 것과 동학도들로부터 강탈당하고 학대받는 남부 지방 교우들의 불행한 운명에 조선 당국자들이 관심을 갖게 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b>9</b><b>월 </b><b>25</b><b>일</b>

동학도들이 벌써 상주(尙州)와 선산(善山)에 와 있으며 머지않아 인동(仁同)에까지 도착할 것으로 알려졌다는 내용이다. 강원도 남서쪽도 피해를 입었다. 용인(龍仁), 양양(襄陽), 양지(陽智), 진위(振威) 등 경기도 지역도 약탈에 내맡겨진 상태이다. 특히 전라도와 충청도는 계속해서 황폐화되고 있다.

 

<b>9</b><b>월 </b><b>29</b><b>일</b>

여전히 류머티즘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파스키에 신부가 마침 내가 그에게 얘기하려던 것을 청해오다. 나는 그에게 홍콩으로 갈 것을 제안하려던 참이고, 가엾은 신부는 그에 대해 대단히 만족스러워하는 것 같다. 나의 몸은 점차 나아지고 있으나, 기력은 서서히 돌아오고 있고 설사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b>10</b><b>월 </b><b>5</b><b>일</b>

전라도에서 바다를 통해 송화(松禾)로 건너온 동학도들의 선동으로 황해도에서도 폭동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따라서 주민들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되면 이 불온한 사람들의 꼬드김에 저항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 나도 이곽안(Ni Koak-an) 源永이라는 자의 방문을 받았다. 그는 르 메르 신부를 모욕했던 횡셩의 양반들 편에 서서 중재하고자 작년에 한 번 왔던 적이 있는 사람이다. 작년 봄에 백천(白川)의 관장으로 있던 그의 아버지는 내가 교우들의 소송사건을 하나 부탁하자 그의 아전들에게 내린 엄한 지시 사항을 내게도 보내 주었다. 提川에 사는 그의 아들은 동학도들의 난폭함을 피해 볼 양으로 동학도들에게 가담하였다는 소문이다. 이번 방문의 목적이 진정 어디에 있는지 의심스럽다!

 

<b>10</b><b>월 </b><b>7</b><b>일</b>

매괴 첨례를 맞아, 자비로운 어머니께 우리 교우들을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청하기 위해 실시된 9일 기도를 오늘로 마무리하여 끝낸다. 여전히 좋지 못한 소식들이 들어오고 있다. 특히 경기도(京畿道)의 소식이 그러하다. 어제 오늘, 미리내의 모든 교우들이 동학도들을 피하여 이곳에 당도하였다. 얼마나 불쌍한지 마음이 무척 아프다. ……

 

<b>10</b><b>월 </b><b>8</b><b>일</b>

어젯밤 자정쯤에 남대문 밖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30 내지 40가구가 소실되었다는 소문이다. 오늘 오후 4시경에 종각에서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대로변의 어느 상점에서 또 화재가 일어났다. 서울에 많은 동학도들이 있다고 하는데, 공공연한 소문에 의하면 그들이 서울의 사방에 불을 놓겠노라고 예고했단다. 그 점에 주목하면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이번 화재들이 그들의 소행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프랑스 공사관의 주사가 대원군(大院君)이 동학도들에게 보낸 포고문의 원본과 충청도의 우두머리 15명이 보낸 답서를 가지고 오다. 답서(答書)의 내용인즉 전투를 중지하겠다는 것이다.

 

<b>10</b><b>월 </b><b>13</b><b>일</b>

조선 병사들이 어제 오늘 동학도들을 진압하러 떠났는데 사람에 따라 그 수가 300명 또는 500명, 심지어는 1,000명이라고까지 얘기한다. 소문에 의하면 병사들은 안성(安城) 및 죽산(竹山)으로 간다고 한다. 강원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폭도들은 부엉골도 풍수원도 공격하지 않았다. 이 요새(要塞)가 그들을 겁먹게 해서일까? 그들이 명령에 복종할까? 지평(砥平)에서는 어느 정도 동학도들과 흡사했다던 사냥꾼들이 명령에 순종하여 약탈자들이 그들의 고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결속하였다는 소문이다. 피신하였던 퇴침이(Toi tchimi) 옹기 마을 사람들은 평소에 살던 집으로 돌아왔다.

 

<b>10</b><b>월 </b><b>15</b><b>일</b>

양 씨라는 평안도 출신의 한 신입교우가 동학도들에게서 얻은 통행 허가증들을 가지고 남부 지방에서 오늘 당도하였다. 그는 자신이 동학도들의 가장 중요한 우두머리들과 보름 동안 친분을 맺었으며, 때문에 깜짝 놀랄 만한 그들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되었노라고 얘기한다. 그가 온 목적은 우리에게 그 모든 비밀을 폭로하고 또 일본인들에게 알리는 것이란다. 그 어느 모로 보나 이 교우의 태도가 수상쩍고 또 진실한 사람이 못 되는 것 같아, 면담을 거절하고 그가 그 비밀들을 안고 돌아가게 내버려 두었다. 동학도들에 다녀온 첩자로 자처하는 이 사람은 동학도들을 위해 우리를 또 염탐하러 올 만한 자는 못되는 것 같다. 그가 얘기한 것 중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대원군(大院君)이 폭도들과 공모했다는 얘기다. 동학도들에게 자중(自重)을 요구하기 위한 공식 문서를 보내고 또 그들을 뒤쫓으라고 병사를 파견하면서, 그는 비밀리에 그들에게 봉기하여 대거 서울로 올라와 일본인들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음력으로 이달 말이나 내달 초에 서로 다른 다섯 갈래의 길로 올라와 수적으로 일본인들을 압도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 근거가 매우 희박해 보이는 이러한 정보가 최근에 강원도의 한 교우를 통해서, 다시 말하면 전혀 반대 방향에서 우리에게 들어왔었다는 사실에 주목하다.

 

<b>10</b><b>월 </b><b>16</b><b>일</b>

르페브르 씨는 외아문(外衙門)에서 새로운 문서를 받았노라고 우리에게 얘기해 준다. 그 문서에는 공주(公州)의 營將은 7월 29일 청군의 후퇴명령을 내린 군(軍) 우두머리는 葉 장군이 아니라 그의 조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다. 그들이 강 건너로 그의 조카를 맞으러 가자 그는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글자를 써 가며 그들에게 얘기하였다고 한다. 조조 신부에 대해서도 이 장수(將帥)가 글을 썼는데, 자신이 방금 일본인 한 명을 체포했으며, 강 건너로 곧 그자의 사형을 집행하러 간다는 내용이었다는 것이다. 정자(亭子)에서는 판결도 없었고 신문도 없었다고. 營將과 中軍이 탄 나룻배가 채 강을 건너기 전에 신부의 사형이 집행되었으며, 그들은 사형이 집행되는 것을 멀리에서 보았을 뿐이었다고 한다는 것이다. 조조 신부의 시신(屍身)에 대해서 우리는 공주(公州) 감사가 어디로 옮겼는지도 모른다고 르페브르 씨에게 얘기하자, 르페브르 씨의 대답인즉 그 문서에 보면 바로 그 강가에 매장되어 있다고 적혀 있단다. 독판은 르페브르 씨에게 만약 조조 신부의 시신을 서울로 옮겨 오고자 한다면 호위대를 보내 주마고 약속하였다고 하길래, 우리는 그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대답하였다. 2명의 선교사가 함께 가서 그 소중한 임무를 직접 이행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 조선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예절인 그러한 소중한 임무가 소홀히 여겨질 것 같지 않으면서도 아주 오랫동안 도외시되어 왔다. 일이 그렇게까지 진전되자, 르페브르 씨는 이 나라의 현재 상황으로 보아 선교사들이 위험없이 그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서 주춤하는 것 같아 보인다.

 

<b>10</b><b>월 </b><b>18</b><b>일</b>

최근에 강원도에서 올라온 제천(堤川)의 한 교우는 평화가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확언하다. 여러 곳에서 주민들에 의해 동학도들이 쫓겨났으며, 지평(砥平)에서는 7~8명의 동학도들이 동맹을 맺은 사냥꾼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또 예천(醴泉), 문경(聞慶), 함창(咸昌), 그리고 용강(龍岡)에서도 주민들이 동학도들에 대항해 결속을 맺고 동학에 가담했다고 확신되는 사람들의 집에는 모두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불을 놓았다고 한다. 남쪽에서는 여전히 좋지 못한 소식이 들려오고 있으며, 충청도 및 경기도의 교우들은 계속해서 서울이나 제물포로 피신처를 찾아오고 있다.

 

<b>10</b><b>월 </b><b>26</b><b>일</b>

아침에 퀴를리에 신부가 제물포로 떠나다. 그는 제물포에서 거기에 피난 온 수많은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 예정이다. 오후에는 르 장드르 신부가 수원(水原)으로 떠나다. 신임 일본 공사가 오늘 오후에 서울에 도착한 모양이다. 조선 병사들(400~500명)이 오늘 동학도들을 무찌르러 떠났다. 나돌고 있는 새로운 얘기들이 믿을 만한 것인지 모르겠다. 폭도들에게 문서를 가지고 가서 그들이 전투를 중지하도록 유도하라는 임무를 띠고 파견된 대원군의 특사가 남원(南原)에서 폭도들에게 체포되어 죽임까지 당했다고 한다. 조선 정부가 동학도들에게 그 유명한 비밀 명령을 내렸다고 할 때부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폭도들이 유포한 갖가지 문서들의 원본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그 비밀 명령에 대한 진실성을 의심케 하고 있다고 한다. 대궐 수비대에 근무하는 안 안드레아라는 교우 병사는 왕에게 불려가 극비리에 나에게 가서 현 일본 공사의 경질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물어보고 오라는 책임을 맡았다고 한다. 근래에 일본으로 보내진 그의 아들(서자)이 어떤 위험을 겪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b>10</b><b>월 </b><b>30</b><b>일</b>

알릭스 신부가 갓등이로 떠나다. 수 많은 교우들이 그를 데리러 왔다. 이름난 동학도 2명의 사형이 서울에서 집행되다. 지방의 경우엔 남부 지방에서 동학도들이 격퇴되었으므로 이곳에 피신해 와 있던 그 지방 교우들이 각자의 마을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수원(水原)에서도 여러 명의 폭도들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b>12</b><b>월 </b><b>9</b><b>일</b>

로베르 신부의 편지가 [판독 안됨]을 통하여 도착. 동학도들이 별 말 없이 조용히 있다고. 필시 대구에서 질서를 유지시키고 있는 일본인들 덕분일 거라고 한다. 파이야스 신부가 신나무골로 귀환하였다. 200명가량의 전라도 교우들이 경상도 함양(咸陽) 지방으로 피신을 왔었다고. 함양 군수는 무정하게도 그들을 내쫓으려 하였으나, 로베르 신부가 감사에게 교섭하여 그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라도에서 들려오는 소식들은 여전히 좋지 못하다. 열흘 전쯤 남원(南原)에서 전주(全州)로 온 동학도들이 보두네 신부의 집을 약탈하였단다. 이제 신부의 집에 남은 것이라고는 기둥과 지붕뿐이라고. 신부의 집에 도로 갖다 놓았던 미사 도구도 도둑을 맞았다. 성작, 성합, 제의, 옷 등 모두 잃어버렸다. 전라도에서 서울까지 신부들을 수행했던 이 집사(執事)는 신부들 때문에 매를 맞고 학대를 받았으며, 도망 나와 몸을 숨기고 있어야 한단다.

 

<b>12</b><b>월 </b><b>21</b><b>일</b>

퀴를리에 신부가 우음이(Ou-em-i)를 향해 출발. 그는 거기에서 그의 본당과 파스키에 신부 본당의 성사집행을 시작할 예정이다.

 

<b>1895</b><b>년 일기</b>

<b>1</b><b>월 </b><b>3</b><b>일</b>

전라도에서 반가운 소식. 보두네, 비에모 두 신부는 머지않아 전라도로 다시 내려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b>1</b><b>월 </b><b>12</b><b>일</b>

전라도의 교우들이 오후에 두 신부를 찾으러 오다. 그들의 얘기에 의하면 전라도 지방의 상황이 충청도의 상황만큼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신임 감사가 동학도들에 대해 너무 나약한 태도를 보이는 모양이다. 주민들은 병사들이 떠날 경우 또다시 봉기가 있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또 佛學이라 불리는 새로운 종파가 형성되고 있는 모양이다.

 

<b>1</b><b>월 </b><b>14</b><b>일</b>

보두네, 비에모 두 신부의 출발. 이들은 공주(公州) 및 전주(全州)의 두 감사 앞으로 각각 보내는 독판(督辦)의 편지 두 통을 가지고 간다. 첫 번째는 새로 관에 넣어서 실제로 매장한 조조 신부의 유해에 관해서이고, 두 번째는 보두네 신부가 입은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1시에 알릭스 신부가 건강한 모습으로 도착. 퀴를리에 신부로부터 편지. 그는 별 어려움 없이 벌써 6개 공소를 순방하였단다. 그가 편지를 쓴 곳은 아산(牙山) 동개(Tong-kai)이다.

 

<b>1</b><b>월 </b><b>19</b><b>일</b>

알릭스 신부가 제물포로 떠나다. 거기에는 그의 신자 20여 명이 피난을 와 있는데, 그들은 성사를 받기 위해 알릭스 신부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 동대문 밖에서 동학의 주요 지도자 세 명이 처형당하다.

 

<b>2</b><b>월 </b><b>2</b><b>일</b>

영하 22도. 몹시 불쾌한 북풍이 불다. 1월 17일에 바울(Pa-oul)에서 쓴 퀴를리에 신부의 편지가 오늘 도착. 아직도 몇몇 지역에는 평화가 되돌아오지 않았다고. 그의 집은 동학도들에 의해 황폐화되었단다. 그는 자신의 피해액을 6,000~7,000냥으로, 파스키에 신부의 피해액을 4,000냥으로 추산하고 있다.

르페브르 씨에게 가서 퀴를리에 신부와 파스키에 신부가, 못된 짓을 한 자들이 발견될 경우에 그자들에게 피해를 보상시켜도 좋다는 허가서를 가능하면 외아문에서 꼭 좀 얻어 달라고 부탁하다. 그는 나에게 베이징 공사 제라르(G럕ard) 씨에게서 받은 편지를 전해 준다. 청국이 동의한 피해보상액 중에 조조 신부의 살해로 인해 그의 가족에게 가는 보상액 7,000태일(平兩, ta멿s)이 포함되어 있다는 내용이다.

 

<b>3</b><b>월 </b><b>23</b><b>일</b>

항상 예의 바르고 상냥하기까지 한 크리엔 씨의 방문. 동학도들에게 약탈을 당한 魯城의 교우들을 위해 르페브르 씨가 얻어낸 관자(關子)가 오후에 내게 전달되었다. 이 서류는 어제 내가 요청한 것으로 아주 빨리 얻어졌다. 그에 대해 내일 르페브르 씨에게 감사를 표해야겠다. 그것 말고도 그는 외무 대신에게서 안성(安城)에 갇혀 있는 교우를 풀어 주라는 내용의 편지도 얻어냈다.

 

<b>4</b><b>월 </b><b>3</b><b>일</b>

르페브르 씨를 방문. 가능하다면 조조 신부의 유해를 서울로 운반하는 데에 조선 정부에서 짐꾼들과 호위병을 제공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다.

 

<b>4</b><b>월 </b><b>14</b><b>일</b>

예수 부활 주일. …… 르페브르 씨는 조조 신부의 유해 운반에 관한 외부 대신의 관자(關子) 2통을 가지고 왔다. 공주(公州) 감사가 4명의 호위 병사와 16명의 운구인(運柩人)을 제공할 것이며, 그들은 도중의 각 관아(官衙)에서 교체될 계획이다.

 

<b>4</b><b>월 </b><b>25</b><b>일</b>

샤르즈뵈프 신부와 보두네 신부가 조조 신부의 유해와 함께 오늘 용산에 도착한다는 소식이다. 장례식은 토요일에 거행할 예정이나, 유럽 사람들에게 장례 초대장을 보내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들은 이미 신부가 피살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문상(問喪)을 왔었다. 르페브르 씨도 이번에는 초대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의견에 동의한다. 어제, 전녹두(全琫準, 젼봉쥰)와 다른 4명의 동학도 우두머리들이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후 왕이 사형선고를 인준함으로써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

오늘 아침 샤르즈뵈프 신부가 전해 준 소식에 의하면 퀴를리에 신부는 여전히 위중하고 불안스런 상태이다. 퀴를리에 신부는 비교적 좋은 상태이나, 안색이 몹시 창백하고 몹시 허약해져 있다. 비에모 신부와 드비즈 신부의 도착.

 

<b>4</b><b>월 </b><b>26</b><b>일</b>

르페브르 씨에게 소송을 제기하러 갔다가 외부 대신에게 사의(謝意)를 표해 주고 대신을 통해 공주 감사에게도 감사를 전해 달라고 당부하다. 조조 신부의 유해 운반 작업에 그들이 보여 준 도움과 열성에 대한 고마움이다. 관(棺)과 운반 경비는 물론 신부들과 신부들이 데리고 간 사람들의 숙식비용까지도 조선 정부에서 부담하였다. 충청도의 여러 관장들이 특별히, 특히 천안(天安) 관장이 장례행렬을 마중 나왔으며 아주 친절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b>4</b><b>월 </b><b>27</b><b>일</b>

10시에 용산에서 보두네 신부의 창미사로 조조 신부의 장례 미사 거행. 모든 선교사들과 르페브르 씨가 참석하였다. 조조 신부는 동쪽의 경계선 부근, 이미 있던 무덤들의 오른쪽에 안장되었다. 내가 사도예절을 거행하고 베르모렐 신부가 하관 예절을 거행하였다.

 

<b>5</b><b>월 </b><b>5</b><b>일</b>

9시 반에 주교 집전 미사. 전원이 모여 점심 식사. 어쨌든 마지막에는 두 환자들도 잠시 식탁에 나왔다. 둘 다 많이 좋아졌다. 파스키에 신부는 일어나 있기 시작했다.

 

<b>5</b><b>월 </b><b>24</b><b>일</b>

파스키에 신부와 두 로베르 신부들의 출발. 배는 부산(釜山) 및 나가사키(長崎)를 향해 내일 출발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낮 12시에 용산에서 조그만 기선에 올랐다.

 

<b>6</b><b>월 </b><b>3</b><b>일</b>

동학도들에게 약탈을 당한 횡성(橫城)의 교우들은 도둑맞은 재산을 돌려받게 되기를 원했지만, 군수도 감사도 그들의 권리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전에 내무 대신(內務大臣)이 지방 당국자들이 거절하는 재판이 있으면 언제라도 그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말을 전해 들은 적이 있기에, 나는 그에게 호소를 했었다. 교우들의 이름으로 작성되어 교우들에 의해 제출된 청원서는 두 차례나 내아문(內衙門)의 답변도 없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두 번째에는 박이 서에게 그 청원서가 접수될 것이라고 단언했었고 나는 서에게 그 청원서에 대한 얘기를 해 두었었다. 이제 법부(法部)에서는 일종의 상고심 법정인 고등 재판소에 청원서를 제출하라고 말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 청원서가 통과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도움에 대해 법부 대신에게 감사를 표하다.

 

<b>6</b><b>월 </b><b>4</b><b>일</b>

어제 관보(官報)에 조선 정부에서 보두네 신부에게 100불의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언급이 있었다. 그 언급이 르페브르 씨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 그는 사전에 통보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합의 금액을 알지도 못했고, 또 그 금액이 불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다.

 

<b>6</b><b>월 </b><b>10</b><b>일</b>

퀴를리에 신부와 드비즈 신부의 출발. 퀴를리에 신부는 내포(內浦)에서 성사집행을 마치고 덕산(德山) 양촌(陽村)으로 되돌아갈 예정이다. 마침내 덕산 현감은 신부의 집과 성당을 수리해 주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드비즈 신부는 아산(牙山) 근방의 공세리(貢稅里)로 가서 자리를 잡게 된다. 그곳에는 집도 한 채 사 두었다.

 

 

<b>Ⅱ</b><b>. </b><b>서천의 동학농민혁명의 전개와 연구 과제 </b>

유승광
<ol>
 	<li><b> </b><b>머리말</b></li>
</ol>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탐관오리의 학정에 반발한 전봉준의 봉기로부터 시작되어 전주성 함락과 집강소 시기와 일본을 비롯한 외세로부터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키고자 하는 항일 전쟁시기로 정리되고 있다. 동학 농민 혁명은 안으로 조선의 부패와 모순을 시정하여 새 사회를 이루기 위한 반봉건적 성격을, 밖으로는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을 경계하고 나선 반침략적 성격을 가진 농민혁명이다.

이러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는 각 지방별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충남의 서남단에 위치한 서천지역은 연구가 다소 부족한 상태이다. 서천지역에 관한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연구가 부족한 것은 역사 자료의 빈곤으로 연구의 한계가 있다. 그러나 구전, 일기, 금석문, 족보, 유고 등을 추적한 결과 관련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었다. 이에 서천지역의 토박이와 면접을 통하여 서천지역 동학농민혁명 유적과 유물을 답사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 연구 과제를 탐색하고자 한다.

서천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1914년 시군통폐합령 이전에 형성된 한산군, 서천군, 비인군우로 나누어 동학농민혁명의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전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유적과 유물로 살펴 본 서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사상적으로는 북접에 속해 있고 전쟁의 진행은 인접한 전라도 동학농민군과 연합전선을 전개하였다. 서천지역의 동학 농민군은 주로 2차 봉기로 분류되는 시기에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본고는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를 소개하고 그 연구과제를 탐색한 바 추후 자료가 발견되면 그 양상이 달라질 것으로 본다.

 
<ol>
 	<li><b> </b><b>서천지역 동학농민혁명의 배경</b></li>
</ol>
 

<b>2.1. </b><b>역사 지리적 환경</b>

 

서천지역은 충남의 서남단에 위치하여 있다. 동쪽으로는 부여군, 서쪽으로는 서해바다, 남쪽으로는 금강을 사이로 전라북도 군산시, 북쪽으로는 보령시와 부여군에 접하고 있다..

이러한 서천지역은 쌀 생산이 풍부하였으며, 한산모시가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 많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서천은 금강하구 지역으로 서해와 접하고 있기 때문에 어류가 풍부하여, 이를 유통시키기 위한 나루가 금강변에 발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서천지역은 1877년에 최무주가 1876년 흉년으로 곡식 100여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여,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81년에는 박규문이 한산군수 홍종관의 불법 곡물징수를 정지하도록 하는 것으로 보아 19세기 말 이미 이 서천지역에도 탐관오리의 가렴주구가 횡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인지역에 1893년 전운사로 세곡을 징수할 때 불법항목을 만들어 호남농민을 괴롭히고, 이에 불응하면 악형도 서슴지 않았던 조필영의 불망비가 비인중학교 앞 비석군에 있다. 지금까지 조필영 불망비는 세미에 대한 불법징수가 비인지역에 자행됨으로 이에 미봉책으로 세미를 줄여 보자는 속셈에서 불망비를 세운 것으로 추정이 하였다. 그러나 조필영은 충남 서천군 마서면 계동리 사람으로 풍양조씨이며 아들은 옥구현감 조병징으로 확인되고 있다. 옥구현감 조병징의 묘가 마서면 계동리 풍양조씨 선산에 있다. 따라서 비인에 있는 전운사 조필영의 불망비는 1893년 옥구현감이전에 남포현감으로 있던 아들 조병징이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table>
<tbody>
<tr>
<td>1893년도 세운 전운어사 조공필영불망비(서천군 비인면 성내리 비인중학교 앞 비석군)</td>
</tr>
</tbody>
</table>
 

또한 서천지역은 당시 중앙에서 정치권력을 소유한 조영희 (趙英熙 양주인)의 횡포를 들 수 있는데, 조영희는 산송문제를 야기하여 급기야는 늑장(勒葬)을 반대하던 조영구(趙英九풍양인)의 부친 조동척(趙東碩)이 금장(禁葬)에 타격(打擊)을 당하여 누운 제 8개월을 토혈(吐血)하다 죽음을 당하게 한다. 이는 당시 세도가의 전형적인 횡포로 풍수적으로 좋은 묏자리라면 이를 빼앗기 위하여 갖은 횡포를 자행한 사례로 보아진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서천지역은 중앙에 근거를 가진 세도가에 의하여 횡포와 착취가 있었던 것으로 그 들에 대한 불만이 야기 되고 있었다.
<table>
<tbody>
<tr>
<td></td>
</tr>
</tbody>
</table>
요컨대 서천지역은 전라도와 금강을 사이로 나루를 이용한 생활 전반에 대한 상호작용이 있었으며, 충적 평야의 발달로 미곡중심의 농업이 주업이었다. 1877년 곡식 100여 석을 베푼 최무주와 같은 대지주가 존재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여건을 가진 지역이었다. 또한 정치적으로 1881년 한산군수 홍종관의 가렴주구와 전운사 조필영의 횡포, 중앙에 지지기반을 가진 조영희의 늑장 등은 민란의 씨를 잉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b>2.2. </b><b>동학교세의 성장과 유적</b><b>·</b><b>유물</b>

 

동학은 서천지역에 언제 누구에 의하여 포교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서천지역의 구전과 문헌에 의하면 동학농민혁명 이전에 이미 이 지역에 포교가 이루어 졌고 많은 사람들이 가담하고 있었다고 사려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을 「조영구의 실적」, 최덕기의 「동학난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ㅇ. 丁亥年(1887)에 當하야 東學敎門에 入校하야 七年동안 布敎함에 敎徒 三萬餘에 達하고 苧産七邑의 大接主의 名譽를 얻게 되었다.

ㅇ. 3월 21일 종일 바람불고 침침하였다.允洞에 가서 金時亨을 만났는데 그가 [내가 동학에 입도하려 하는데 때는 지금이다. 그대도 동학에 들어 오는 게 어떤가?] 하기에 나는 [마땅히 보아야겠다.]하고 院山으로 갔다가 나왔다.

ㅇ. 한산에서는 노재덕이 1894년 4월 설향약척비류문(設鄕約斥匪類文)을 공표하여 동학무리들로 인하여 향약으로 결속된 질서가 파탄에 이르고 있으니 서로 화합하여 못 된 무리들을 척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ㅇ.6월 25일 : 날씨가 맑았다. 원두막에서 일찍 집으로 왔다. 그 때 윤인상 윤동접에게 입도 하여 며칠 사이에 접을 설치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 저녁 때 道人들이 김운화와 박윤화 부자등 3명을 잡아갔다.

1887년에 비로소 서천지역에 동학에 관한 포교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여겨지며 그 이후에도 활동이 있었으나 1894년에 구체적인 활동과 포교가 있어 이에 입교자가 늘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서천지역의 동학접주는 누구였겠는가?. 당시 서천지역은 서천, 한산, 비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이에 접주 역시 세 사람으로 알려져야 하나 지금까지는 서천의 추용성(秋鏞聲), 한산의 김약선(金若善)만 전하고 있다. 비인은 최재홍(崔載洪)이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최재홍은 비인현 현내면 칠지리에서 태어나 동학난리에 가담한 후 쫓겨 다니다 외가인 서면 월리 짚눌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비인 서문거리 옥터에서 굴비처럼 엮여 화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서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각 지역에서 이끈 접주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은 자료부족으로 알 수가 없다.

서천지역의 각 접주들은 남접과 북접 중 어느 지역에 속해 활동을 전개하였을까?. 이는 서천지역이 전라도와 금강을 사이로 도계를 이루기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이 된다. 즉 생활공간이 전라도와 인접하여 있기에 남접의 영향 속에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천지역은 북접의 지도하에 있음을 조영구(趙英九)가 북접(北接) 법헌(法軒) 최시형으로부터 받은 도집강(都執綱) 임명장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도집강이란 동학의 고위지도자로 사회개혁의 추진 구심체가 된 사람이다. 이를 중심으로 인맥이 이어지고 조직이 확대되는데, 이들이 머무르는 장소를 집강소, 도소, 접소라고 칭하여 동학 조직의 확대를 꾀함은 물론 오랫동안 농민들을 억눌려온 봉건질서를 재편하여 갔다. 이렇게 볼 때 서천지역은 도집강 조영구의 조직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其後 報恩 ㅇ 團에 崔海月先生丈席에 들어가 先生侍奉할 제 月ㅇ에 東學의 暴動은 漸漸ㅇ하여 勒堀人塚하고 勒俸私債하고 ㅇ辱官長하고 ㅇ辱士大夫하며 世上이 紛撓하니 先生이 憂慮하사 公을 命하여 苧産七郡의 禁亂都執綱으로 任을 定커늘 各郡의 巡團하야 禁亂中 舒川宗中의 大患亂을 鎭撫하였으며(중략)

도집강 조영구가 최시형의 명에 의하여 각 군을 순회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서천지역 즉 저산칠군은 북접에 속해 있었다고 여겨진다. 요컨대 서천지역은 1894년 전후로 이미 각 고을에 동학의 전파는 전통질서를 붕괴시켜 양반들의 수습책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특히 1887년 조영구의 동학 입교로 동학교세가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조영구는 당시 세도가 조영희에게 선산을 빼앗기고 봉건질서에 대한 울분을 해결하고자 입도 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동학의 평등사상이 농민층에게 뿌리 내릴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무르익고 있었다. 이를 이끈 접주로는 서천의 추용성, 한산의 김약선, 비인의 최재홍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살펴보지 못하였지만, 도집강 조영구가 북접 법헌 최시형으로 부터 도집강에 임명되어 각군을 순회하는 것으로 보아 북접에 속하여 동학 교세가 대단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r>
<td colspan="2">&lt;그림 2&gt; 도집강 조영구와 임명장</td>
</tr>
</tbody>
</table>
 
<ol>
 	<li><b> </b><b>서천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전개</b></li>
</ol>
 

서천지역은 제1차 농민혁명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가 제2차 동학농민혁명기에 활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지역은 홍주 관할지역으로 홍주관군의 움직임과 일본군의 진로를 주시하여야 한다. 또한 동학 농민군의 활동상을 주목하기 위해서는 전라도와 도계를 이룬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호남인들이 금강을 건너와 활동하였음을 참작하여야한다. 먼저 홍주목 관군의 움직임과 일본군의 진로를 살펴보면 홍주목관군은 홍주목사 이승우의 지시에 의하여 홍주목 지역에 대한 동학당 방비의 계책을 상의 하고 있다. 이후 서천지역에 대한 자세한 움직임은 없지만 서천군지(1929) 경선개요에 의하면 1894년 11월 18일 홍주 남포유병이 서천읍성에서 유숙한 것으로 보아 서천지역의 동학농민군의 동요가 홍주목에 보고되어 관군의 일부가 서천지역으로 이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舒川郡守 兪冀南의 요청으로 경병이 1894년 11월 19일 홍산에서 유숙하고 익일 20일 한산읍에 도착하고 있는데 이는 농민군 진압을 위해 파견된 성하영 관군의 일부이다.

일본군의 움직임은 서천지역에서 볼 수 없으나 1894년 11월13일 홍주목사 이승우가 홍주전투직후에 인천에서 증파되어 온 야마무라(山村) 대위에게 동학도 수천명이 한산 남포방면에 집합해 홍주로 내습하려한다는 내용을 알리고 있어 야마무라(山村) 대위 휘하 일본군 1개 소대가 사이토(齋藤) 소위 지휘하에 홍주목에 남아 공격에 대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군의 움직임 하에 서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한산읍성, 화양산, 서천읍성 등을 점령하고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table>
<tbody>
<tr>
<td></td>
</tr>
</tbody>
</table>
<b>3.1. </b><b>한산읍성 전투</b>

 

한산 지역의 동학 농민군의 움직임은 금강을 건너온 호남 동학 농민군과 협조하여 그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1894년 7월17에 한산과 연기 등지에서 농민군이 작요하였다 라는 기록을 보아 동학 농민군의 활동이 이미 전개되고 있었다.

ㅇ.1894년 11월 5일 한산 상지포에 동학농민군이 주둔하였다. 이때 성을 지키는 군인과 몇 사람이 진세를 관찰하고자 총을 쏘고 들어가니 도인들이 분산도주하여 읍인에게 이십여 인이 결박되고 화포 오십여 대와 말 두 필을 얻었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호남 동학농민군을 끌여 들였다.

ㅇ. 11월 19일 한산 읍성이 점령 되었다.

ㅇ. 11월 11일 도인 천여 명이 탑리에 진을 치고 명일로 한산성을 함락 시킨다고 했다.

ㅇ. 11월 12일 도인들이 성을 함락하고 포를 쏘아 화광이 충천하고 가옥이 소실 되었다. 성을 지키던 군인들과 읍인 들이 분주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도인 들이 성을 함락하고 종동 앞에서 행진하고 인하여 진을 치고 점심식사를 한다고 한다. 본 읍이 다 타고 호남도인들이 재산을 탈취한 것을 다 헤아릴 수 가 없다. 저물게 신성포로 건너갔다.
<table>
<tbody>
<tr>
<td></td>
</tr>
</tbody>
</table>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볼 때 한산읍성은 1894년 11월 중순에 동학 농민군에게 점령을 당하고 있다. 당시 최덕기는 한산읍성이 점령된 후의 모습을 문루에 올라가 보니 집이 즐비하게 연소되어 있고 내외문헌이 다 파괴되어 공연히 슬픈 회포를 견딜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 참상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때 박용희는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고통을 받게 되자 이를 구제하기위해서 관과 협조를 하였던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

그렇다면 서천 지역에서 한산 읍성이 먼저 점령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1881년 한산 군수 홍종관이 불법으로 곡물을 징수 하였던 횡포가 그 이후에도 자행되어 농민의 원성이 높았던 지역이었다.

둘째, 지리적으로 도계인 전라도와 정보교환이 가능한 나루가 많았던 요인을 꼽을 수 있겠다. 신성포, 후포, 죽산포 등은 대안에 웅포, 나포나루를 통하여 왕래가 많았던 것이다. 이에 가까운 장시로는 우시장과 안장(모시장)으로 유명한 신장(새장)과 대안의 웅포장이 있다. 웅포장은 도계를 뛰어 넘어 서로 왕래가 잦은 곳으로 여겨지며, 서해에서 잡히는 어물이 이들 나루를 통하여 유통되었던 곳으로, 객주들이 곳곳에 모여 있어 어시장이 성행 했던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산지역은 금강 건너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어 의식전환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셋째, 관군의 지연 도착을 들 수 있다. 서천 군수 유기남이 경군을 요청함에도 경군은 홍산에서 1일을 유숙하고 늦게 도착함으로 이미 한산 읍성은 점령되고 말았다. 또한 유회군이 조직되어 읍성을 보위하였지만 방어력 부족으로 쉽게 성을 함락 당하게 되었다고 여겨 진다. 이에 그만큼 동학 농민군의 수적 우세와 조직력을 새삼 확인 할 수 있겠다.

 

요컨대 한산읍성은 1894년 11월 12일에 함락 되었는데 여기에는 호남 동학 농민군의 협조가 있었으며 한산읍성이 먼저 점령되는 이유는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한 의식전환이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유회군의 군사력 부족, 경군의 지연도착은 한산읍성이 쉽게 점령되었던 이유로 여겨진다. 이렇게 한산읍성이 동학 농민군에게 한산읍성이 점령되자 당시 한산 군수 정대무는 교체되고 말았다.
<table>
<tbody>
<tr>
<td></td>
</tr>
</tbody>
</table>
<b>3.2. </b><b>화양산 전투</b>

한산읍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은 현재 화양면 금당리 후산인 화양산에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 화양산은 한산면과 화양면의 면계에 위치한 산으로 한산읍성과 서남으로 4Km가 이격 되어 있다. 산의 높이는 100m로 계곡과 계곡으로 감싸여 있어 어느 부분이 주통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산으로 방어에 유리하고 공격에 불리한 지형조건을 갖춘 요새이다. 화양산에서 바라본 주변 경관은 동으로는 한산지역의 움직임을 경계할 수 있고, 서로는 속칭 서천평야인 곡창지대가 조망되며, 남으로는 금강의 움직임을 한눈에 경계 할 수 있는 지역이다. 북으로는 서에서 동으로 602번 도로가 있어 한산으로 접근하는 관군의 움직임을 살필 수 있는 산이다.

화양산에 진지를 구축한 동학 농민군은 화양면 금당리 일대를 주요 거점지역으로 확보하여 이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고 있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당시 밥인심이 좋았던 최권식의 증조부이야기, 영달이 아버지가 화약을 제조하는 기술과 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구전 되고 있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에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농민군이 물러 간 후 관군에 의해서 처형되어 제삿날이 같은 날이라고 한다. 이 지역에 이와 같은 동학농민군에 협조자가 있었던 이유는 본래 화양들을 중심으로 기산 두문이와 화양 금당리를 면계로 하여 두문리 사람들에 의하여 화양 금당 사람들을 물 아랫것들 이라고 하여 지역적인 차별과 업신여김을 받아 왔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두문리의 횡포에 대한 금당리 지역의 차별이 평등을 지향하는 동학농민혁명의 이상과 어느 정도 부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table>
<tbody>
<tr>
<td></td>
</tr>
</tbody>
</table>
이렇게 화양산에 진지를 편성한 동학 농민군과 1894년 11월19일 홍주와 남포의 유병들이 서천에 와서 하루를 유숙하고 11월 20일 두문리 동록에 진지를 구축하여 종일 포전을 하다가 남포 병사가 탄환에 맞아 기절하자 서천성으로 철수를 한다. 그러자 동학 농민군은 하산하여 두문 5동에 방화를 하여 노씨 일문이 혹독한 화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 두문 5동은 90% 정도가 전소되어 난을 피하여 마서 옥산에서 돌아 왔을 때는 쑥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타버렸다. 평소 물 아랫것들이라고 차별을 당하던 금당 동학 농민군의 감정과 관군이 진지를 구축한 곳으로 잔적 소탕을 위하여 초토화 시킨 것으로 사려 된다. 이렇게 화양산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 농민군은 서천읍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게 된다.

 

요컨대 한산읍성을 점령한 후 금강을 한눈에 주시 할 수 있고 목전이 평야지대인 화양산에 진지를 편성한 동학 농민군은 평소 지역적 차별을 당하던 금당리 농민을 규합하여 치중대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한 다음 서천 관군과 홍주남포 관군의 공동 진압작전에 대치하여 관군을 후퇴시키고 만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두문 5개 마을에 방화를 하여 초토화 시키고 서천 읍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승리를 거둔다.

 

<b>3.3. </b><b>서천읍성 전투</b>

 

서천은 서천⋅한산⋅비인 3고을 중 가장 규모가 큰 고을이다. 서천 지역은 해안을 끼고 있으나 주업이 농업으로 곡창지대가 발달되어 있다. 서천지역에 동학에 관한 구전으로 현재 장항읍 장암리 일대와 원수동 용댕이에 동학 진압군으로 참석한 관군이 탈영하여 키를 쓰고 숨어서 살아 남았는 이야기가 있다. 또 시초면 신곡리 평해구씨와 용곡리 남양홍씨의 갈등 관계 속에도 동학농민혁명과 연관된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또한 종천면 장구만으로 동학 농민군이 상륙할 때에 장구리 임모씨가 화승총으로 사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전은 신빙성이 적은 자료이지만 이 지방의 동학 농민군의 진로를 확인 할 수 있는 자료이고 당시 진압군의 군기 문란 상태를 추정 할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장구만으로 진입한 동학 농민군은 어디서 기포한 농민군인지 알 수 없으나 배를 타고 들어 온 것으로 볼 때 호남 농민군의 일부로 사려 된다. 이들은 서천 읍성을 탈환하는데 가담하기 위해서 서쪽 장구만을 이용하여 판교천으로 진입을 시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가 1894년 11월 20일로 화양산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이 후퇴하는 관군을 추격하여 일거에 서천 읍성을 점령한 시기이다. 서천 읍성에 입성한 농민군은 방화를 하고 포탄을 폭발하여 공해를 전소 시킨다. 이때 서천군수 유기남은 11월 19일 순영에 장계를 올려 경병을 요청하는데 19일 경병은 홍산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20일 하오 4시경에 한산읍에 도착하여 서천방향으로 향하는데 길산포 1리에서 성을 함락한 농민군과 대치를 하게 된다 경병은 일시에 발포하여 농민군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된다.
<table>
<tbody>
<tr>
<td></td>
</tr>
</tbody>
</table>
 

요컨대, 서천읍성 전투에 관한 내용은 정부의 기록이지만 1894년 11월 20일 화양산 전투에서 승리 한 동학 농민군에 의하여 서천 읍성이 점령당하고 있다. 구전이지만 용댕이의 진압군 탈영이나 장구만 동학 농민군의 진입은 이지역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서천군수 유기남의 요청에 의한 경군이 동학농민군을 격퇴했다는 사실을 살펴 볼 수 있었다.

 

<b>3.4. </b><b>비인읍성 전투 </b>

 

비인지역은 동학농민군에 활동이 활발했던 것으로 여겨지나 사실을 확인할 자료가 없다. 그러나 먼저 주목 되는 인물로 북접 법헌으로부터 도집강으로 임명받은 조영구를 들 수 있다. 저산팔읍을 관할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그 휘하에 남포의 백접주, 종천의 임접주, 산천리의 한접주 등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비인에 최재홍의 활약도 있었다고 하나 어떻게 싸웠는지에 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table>
<tbody>
<tr>
<td></td>
</tr>
</tbody>
</table>
 

비인읍성은 언제 어떻게 점령 당하였는가? 구전에 의하면 한산읍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은 전세를 가다듬어 문산 도마다리를 경유하여 노루재 고개를 넘어 검단에서 노무자를 모아 무기 및 탄환을 판교 심동 월봉까지 운반후 둔덕재부터는 농민군만이 비인 읍성을 공격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하여 볼 때 비인 읍성 역시 동학 농민군에게 점령되었을 것으로 사려 된다.

요컨대 비인지역의 동학 농민군 활동은 활발했던 것으로 여겨지나 이에 관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자세하게 기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영구의 활약 최재홍 접주, 한접주, 백접주, 임접주의 인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비인읍성 역시 점령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ol>
 	<li><b> </b><b>서천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의의와 연구과제</b></li>
</ol>
 

<b>4.1. </b><b>서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의의 </b>

 

서천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서천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배경으로 중앙에 권력을 가진 양반들의 횡포가 성행하자 이에 대한 불만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게 되었다.

먼저 梅泉 黃玹(1855~1910)은 충청도 지방의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에 대하여,

󰡒호서는 본래 사대부가 모여 사는 곳이요, 훈척과 향재들이 원림이 서로 바라보면서 붕당을 이루고 있다. 또 무단이 풍속을 이루어서 억지로 장사를 사고 남의 산지를 억지로 빼앗아서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집이나 서민의 집에서는 원통한 호소가 뼈에 사무치고 있었다. 이런 때에 동학이 일어나자 어깨를 치켜올리고 한번 소리치면 여기에 호응하는 자가 백만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김씨, 송씨, 윤씨의 세 대족과 그 밖의 재상의 이름난 집이나 부자로 살던 집이 졸지에 피폐함을 당한 사람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다󰡓.

라고 기록함으로 충청도 동학농민혁명 발발 원인을 양반의 횡포로 들고 있다. 서천지역 역시 동학농민혁명의 발발 원인이 권력을 가진 양반의 횡포라고 할 수 있다

즉 도집강 조영구는 조영희의 처, 이완용의 누이가 죽자 남편 조영희가 선산에 늑장을 당하자 이를 찾고 마져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동학에 입도 하여 양반의 횡포에 대항하고 있다.

-. 乙酉(1885)正月十五日에 趙英熙에게(趙同熙 直閣의兄) 勒葬을 當하고 曾祖以下의 先塋局內 全部를 强奪하여 前後左右 何山麓은 勿論하고 强奪후 漢城府 入案을 내어 所有를 삼았다.

-. 埋葬한 趙塚은 趙英熙의 妻요 당시 侍從大監 趙重國의 母요 李鎬俊(判書)의 女 李完用의 姉(No.1쪽)

-. 三十餘年前에 先葬한 趙英九氏의 祖父墓가 不過 二三十步에 右하거늘 士大夫 女塚之下에 士庶人之男塚이 不可라하여 勢力을 對抗치 못하고 抑鬱히 移葬까지 當하였다.

황현이 지적 한 바와 같이 서천지역에도 억지로 장사를 사고 남의 산지를 빼앗아서 원통한 호소가 뼈에 사무치고 있었다 라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趙英九의 선산을 빼앗은 趙英熙는 趙斗淳의 손자로 양자간 趙同熙의 친형으로 금산군수를 지낸 趙秉立의 양자이다. 趙英熙(1855~1930)는 資憲大夫 前行吏曹參判後陞判書를 지낸 자로 字는 順先이다. 따라서 당시 권세가 대단하였던 가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전되는 말로 원을 제쳐두고 원행세를 했다든지 조씨네집에서 불을 때면 남산에서 김을 구워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로 미루어 당시 양주 조씨의 권세는 이루 형언 할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 동학 평등사상의 영향을 받아 신분적 차별을 극복하고자 동학 농민혁명에 참여 하였다.

서천지역에서 대표적으로 신분적 차별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지역으로는 화양면 금당리 마을을 들 수 있다. 이 마을은 윗마을 두문리의 지역적인 권세의 차별에 저항하여 동학 농민군에 가담하여 화양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두문리 마을을 전소시키고 만다. 이는 조그만 지역내에서도 차별을 극복하고자 했던 사건으로 봉건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서천지역내 동학 농민군에 가담한 사람들이 주로 해변에 거주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구전은 신분적으로 하층민이었고 어업에 종사 했던 사람으로 보아서 이들은 쉽게 동학 사상을 받아들이고 신분적 차별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한 표출이 바로 군현의 중심지인 읍성을 점령하여 수탈의 핵심부를 붕괴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서천지역의 동학 농민혁명은 북접의 영향으로 도인들이 동학의 포접을 통하여 활동하고 동시에 불법한 일을 저지르지 말라는 통유문에 따라 교단의 지시를 적극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서천지역의 도집강 조영구의 활동으로 드러나는데 도인들이 집결하여 양반세력을 제거하려고 할 때 조영구 자신이 이들을 보호해 주고 있다.

禁亂中 舒川宗中의 大患亂을 鎭撫하였으며 (趙參判집, 趙英岩집大小家, 支石里 趙都事집, 其他에도 鍾川 趙宗에난 特別히 患亂을 鎭撫하여 無事避亂하였으며 郡內 三山里 曹監察, 斗旺里 金監察, 韓山 楸洞 閔郡玉, 堂仙里 李群昌, 솔리 秋의관집, ㅇㅇ의大患亂과 生命財産을 安保시켰으며 山川里 韓氏宗中의 患亂을 避하였더라 (韓氏는 가위 父讐之嫌에 있ㅇ어 父親이 韓塚을 自堀하고 三年懲配간 嫌提도 不拘하고 生命求濟의 正義로써 나아감에 그후 韓氏의 作嫌은 韓氏들이 解嫌을 하고 말 것이다.

조영구는 도집강으로서 서천지역의 양반세력들을 비호하여 줌으로 훗날 재산을 헌납 받는다든지 만인의 은인으로 칭송을 받게 된다. 이는 조영구의 개인적인 성향으로 보기 보다는 통유문의 영향으로 남접과는 달리 북접의 행동 지침을 바탕으로 보였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서천지역의 동학 농민혁명은 적극적인 공세적 활동보다는 관을 인정한 상태에서의 개혁으로 보아야 한다.

넷째, 서천지역의 동학 농민 혁명은 북접으로부터 영향으로 받아 사상적으로 평등사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도계인 호남인을 불러 들여 관아를 습격하고 있다. 이는 서천지역이 북접으로 관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지만 일부 호남인과 합세하여 양반의 횡포에 저항하고, 행정적, 군사적 중심지인 읍성을 탈환하고 있다.

요컨대 서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는 양반의 횡포에 대한 불만으로 동학교도의 확산과 신분적 차별을 극복하고자 하는 동학 본래의 평등사상에 기저를 두고 기포하여 화양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한산읍성, 서천읍성을 점령하게 된다. 이는 북접의 지도하에 있었지만 남접인 호남 동학농민군의 협조로 이루지고 있음이 확인이 되었다.

 

<b>4.2. </b><b>서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의 연구과제</b>

 

1894년 서천 지역은 한산, 서천, 비인현으로 1군 2현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각 군현별로 신분제와 소작제, 산송문제, 지역적 차별로 인하여 조선 후기사회의 모순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에 전국적인 동학농민혁명은 반봉건, 반외세, 척양척왜를 부르짖으며 조선후기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였다. 그러나 서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자료가 아직까지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이 없어 연구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에 이제까지 발견된 서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자료를 검토하여 연구과제를 선정하는 것도 후일 서천지역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접근성을 용이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전운사 조필영과 동학농민혁명과의 관계 그리고 아들 조병징에 대한 응징에 대한 연구 문제이다. 전운사 조필영은 황현의 『매천야록』에 소개된 인물로 가혹한 세금을 수탈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자이다. 그러나 그동안 전운사 조필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나 사실관계를 확인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았다. 단 서천군 비인면 비인중학교 앞 비석군에 전운사 조필영에 대한 불망비가 남아 있어 누가 왜 세웠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에 서천 지역사 연구를 해온 박수환 씨가 조필영의 고향은 충남 서천군 마서면 계동리라는 사실을 밝히게 되었다. 또한 조필영은 풍양조씨이며 선산이 서천군 마서면 계동리라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선산에는 남포현감과 옥구현감을 지낸 아들 조병징의 묘와 비석이 있다.

또한 규장각 문서 훈지기안 11권 135a에 의하면 1904년 1월 10일에 적도 70여 명이 서천 동죽 조옥구(조병징)의 집에 이르러 행패를 부리고 환도로 그 부자를 구타하여 상처를 입히고 재물을 빼앗으며 집에 불을 질렀고 또 돈을 빼앗을 계획으로 조옥구를 잡아가서 그 생사를 알 수 없었는데 사흘째 되는 날 비인군 장구포 앞바다에 머무는 것이 있어 조옥구가 그 배에 잡혀있다고 하였다는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기안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조필영과 조병징의 관계와 동학농민혁명이후 1904년까지 조필영 일가에 대한 응징은 어떻게 볼것인가에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조필영의 승승장구하는 사회적 모순도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둘째, 한산 동학여당의 천주교 투탁 자폐 사건에 대한 연구과제이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우금티 전투에서 패하게 되자 동학농민군들의 진로는 항일의병으로 또는 관의 회유와 전향의 문제로 갈등이 이어졌다. 1895년 한산지역에서도 동학에 가담한 후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천주교인으로 전향한 김선재(金善在)와 서가량(徐可良)이 기존의 동학도인 오응로(吳應老)의 금품과 재물을 빼앗고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오응로의 가족이 관아 고소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한산군수 백낙형(白樂亨)은 1895년 7월25일이후 면직과 사면을 반복하며 1905년까지 관직을 유지한다. 또 합덕 양촌성당 퀴릴리에(南一良) 선교사는 김선재와 서가량의 석방을 요구하여 한산군수 백낙형이 임의로 석방한다. 이에 백낙형은 임의 석방한 죄로 한성으로 압송되어 재판 결과 파직(장60대, 1년 유배)을 당한다.

 

이에 법무대신은 홍주부관찰사 이승우에게 다시 자폐죄인 김선재와 서가량을 구속하라 한다. 조선교구장 명동성당 뮈텔 주교는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의 협의 통해 교민의 자폐를 통보해 오자 서학을 빙자하여 처벌하여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자폐를 막도록 회신하였다. 또 1896년 김선재와 서가량의 구명활동을 통해 뮤텔 주교가 사건을 해결한다. 이들은 1년이 지나 석방되었다. 그 후 주교는 공주에서 만나 김선재에게 견진성사 받아 진실한 신자가 되었다. 또 서가량은 대세를 받아 신자가 된 후 사망하였다.

 

요컨대 한산 동학여당의 천주교 투탁 자폐 사건은 김선재와 서가량이 동학도이었지만 천주교인으로 귀의하게 되었다. 이를 통하여 당시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도의 향후 갈등을 통해 천주교로 귀의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또한 조선교구 뮈텔 주교의 노력으로 프랑스공사관을 통해 조선정부와 협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한산군수 백낙형 역시 파면과 복직을 반복하게 되었다. 1894년을 동학농민혁명이후 동학농민군의 향배를 살펴볼 수 있는 연구과제라 할 수 있다.

 

셋째 1894년 우금전투가 실패로 끝나고 성하영 부대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추적과 소탕이 서천지역과 금강 건너 함열까지 이어지고 있는 과정에 대한 연구과제이다. 성하영 부대는 북한산에 주둔하던 부대로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보은, 우금티전투에 참여하였다. 그 후 동학농민군 잔적 소탕을 위하여 서천, 함열 등을 누비며 동학농민군을 학살하였다. 서천지역의 경우 한산군 남상면 활동리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을 학살한 사실이 확인되고 추후 죽산진을 건너 곰개나루를 경유하여 함열에서도 동학농민군을 섬멸하고 있다. 이러한 성하영 부대의 진로와 상황을 구체적인 사료를 통하여 연구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ol>
 	<li><b> </b><b>맺음말</b></li>
</ol>
서천지역은 전라도와 금강을 사이로 나루를 이용한 생활 전반에 대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서천지역은 충적 평야의 발달로 미곡중심의 농업이 주업이었다. 1877년 곡식 100여 석을 베푼 최무주와 같은 대지주가 존재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여건을 가진 지역이었다. 또한 정치적으로 1881년 한산군수 홍종관의 가렴주구와 전운사 조필영의 횡포, 중앙에 지지기반을 가진 조영희의 늑장 등이 민란의 씨를 잉태했다고 볼 수 있다.

서천지역은 1894년을 전후로 동학 교세의 확장은 양반들로 하여금 그 대책을 마련하게 하기도 하였다. 1887년 조영구의 동학 입교로 동학교세가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조영구는 당시 세도가 조영희에게 선산을 빼앗기고 봉건질서에 대한 울분을 해결하고자 입도 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동학의 평등사상이 농민층에게 뿌리 박을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무르익었고 이를 이끈 접주로는 서천의 추용성, 한산의 김약선, 비인의 최재홍 등을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살펴보지 못하였지만, 도집강 조영구가 북접 법헌으로부터 도집강에 임명되어 각군을 순회하는 것으로 보아 북접에 속하여 동학 교세가 대단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산읍성은 1894년 11월 12일에 함락 되었는데 여기에는 호남 동학 농민군의 협조가 있었다. 한산읍성이 먼저 점령된 이유는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와 지리적 여건으로 인한 의식전환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유회군의 군사력 부족, 경군의 지연도착 등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한산읍성이 동학 농민군에게 점령되자 당시 한산 군수 정대무는 교체되고 말았다.

한산읍성을 점령한 후, 금강을 한눈에 주시 할 수 있고 목전이 평야지대인 화양산에 진지를 편성한, 동학 농민군은 평소 지역적 차별을 당하던 금당리 농민을 규합하여 치중대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한 다음 서천 관군과 홍주남포 관군의 공동 진압작전에 대치하여 관군을 후퇴시키고 만다. 이에 동학 농민군은 두문 5개 마을에 방화를 하여 초토화 시키고 서천 읍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승리를 거둔다. 서천읍성 전투에 관한 내용은 관의 기록으로, 1894년 11월 20일 화양산 전투에서 승리 한 동학 농민군에 의하여 서천 읍성이 점령 당하고 있다. 구전이지만 용댕이의 진압군 탈영이나 장구만 동학 농민군의 진입은 이지역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서천군수 유기남의 요청에 의한 경군이 동학 농민군을 격퇴하는 사실도 살펴보았다.

비인지역의 동학 농민군 활동은 활발했던 것으로 여겨지나 이에 관한 자료가 확인 되지 않아 자세하게 기술하지는 못했지만, 조영구의 활약 최재홍 접주, 한접주, 백접주, 임접주의 인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컨대 비인읍성 역시 점령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서천지역의 동학 농민 혁명의 의의는 양반의 횡포에 대한 불만으로 동학교도의 확산과 신분적 차별을 극복하고자 하는 동학 본래의 평등사상에 기저를 두고 기포하여 화양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한산읍성, 서천읍성을 점령하게 된다. 이는 북접의 지도하에 있었지만 남접인 호남 동학농민군의 협조로 이루지고 있음이 확인이 되었다. 그러나 서천지역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연구는 많은 연구과제를 가지고 있다. 위에서 제시한 조필영과 조병징의 응징과 승승장구의 사회 모순, 한산 동학잔당의 천주교 투탁 자폐 사건에 대한 평가 문제, 그리고 우금치 전투가 끝나고 관군 즉 성하영부대의 서천동학농민군 진압과 함열 동학농민군 섬멸에 대한 연구, 비인읍성 점령에 대한 자료 검증 등이 이루어질 때 서천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성격이 제대로 규명될 것이다.

 

<b>&lt;</b><b>서천동학농민운동과 유적 유물</b><b>&gt;</b>
<table>
<tbody>
<tr>
<td><b>분류</b></td>
<td><b>내 용</b></td>
</tr>
<tr>
<td>유적</td>
<td>한산읍성, 화양산, 길산 질메다리, 서천읍성, 비인읍성</td>
</tr>
<tr>
<td>서책</td>
<td>『舒川郡誌』, 「設鄕約斥匪類文(1894)」,1929,

「舒川郡誌」 經燹槪要, 1929, 「趙英九의 實積」

都執綱 明是非可執紀綱員趙英九前接主兼都執綱 甲午七月日 北接法軒

최덕기저,송창준역,「東學亂日記」,1894년,『향토연구』,제7집,

충남향토연구회,1990.</td>
</tr>
<tr>
<td>비문</td>
<td>轉運御史趙公弼永不忘碑, 憂國志士慶州崔公載洪 配烈女婦人江陵劉氏 之墓. 招討使李公勝宇永世不忘碑, 郡守 柳侯冀南永世不忘碑, 菊史公高靈朴公龍熙之墓 孺人交河盧氏 俯左</td>
</tr>
</tbody>
</table>
 

<b>Ⅲ</b><b>. </b><b>동학혁명의 위험을 피해 전주 선교사들의 피신과정에 대한 고찰 </b>

<b>- </b><b>조조</b><b>(</b><b>趙得夏</b><b>), </b><b>비에모</b><b>(</b><b>禹一模</b><b>), </b><b>보두네</b><b>(</b><b>尹沙勿</b><b>) </b><b>선교사 중심으로</b><b>-</b>

박수환

 
<ol>
 	<li><b> </b><b>동학농민혁명 배경</b></li>
</ol>
1882년 이후의 각종 사회 혼란과 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도화선이 되어 농민운동을 일으켰다.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동학 혁명(東學革命), 동학 운동(東學運動),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으로 불리기 시작한 동학난(東學亂)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ol>
 	<li><b> 2</b><b>차 봉기</b><b>(</b><b>전주성 점령</b><b>)</b></li>
</ol>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첫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없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였다. 이용태의 강경책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태인 대접주 김개남, 무장(茂長) 대접주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 등으로도 불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다.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 손화중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궐기한 뒤 전주성을 점령했다.

 

한편 동학농민군은 고부의 황토현(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에서 4월 7일(양력 5월 11일) 전주감영군을 격파했다. 이에 크게 놀란 조정에서는 전라도병마절도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4월 23일(양력 5월 27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4월 27일(양력 5월 31일)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1894년 3월 21일 고부에서 봉기한 지 석 달,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청, 일에게 군사주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갑오개혁의 시작되는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

 
<ol>
 	<li><b> </b><b>전주성 조선정부군 철수 상황</b></li>
</ol>
조선정부의 정부군은 전주화약을 맺고 청·일에게 군사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곧바로 지방에 출동시킨 모든 군대를 서울로 즉각 철수시켰다. 그러나 평온을 찾을 것으로 조선정부의 생각은 그 반대로 흘러갔다. 정부군에 의해 패주한 동학군들은 시골로 흩어졌고 주민들의 잔인하게 약탈하고 강탈을 자행했다. 이들은 특히 천주교도들을 겨냥했다. 당시 1894년 8월30일자 조선주재 프랑스 공사관 르페브르 공사가 본국 파리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외교문서를 보면, 7월에는 전주지방에서 포교하고 있던 조조(趙得夏1866〜1894 모세), 비에모(禹一模1869〜1950 바오로), 보두네(尹沙勿1859〜1915 프란치스코)신부는 위기에 처해져 있었다. 따라서 조선교구장 뮈텔(閔德孝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즉시 전주에서 탈출하여 서울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하며, 돌아오면서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몸을 숨기라고까지 하였다.

 
<ol>
 	<li><b> </b><b>전주 지역의 선교사와 신자들의 위기상황</b></li>
</ol>
<b>① </b><b>동학도들의 살육과 방화</b>

뮈텔주교의 1894년 7월 19일자 일기를 보면, 전주에서 보두네 신부와 조조 신부가 연락원의 편지를 통해 보고하길 동학도들의 수가 50,000명이라는 말도 있고 심지어는 100,000명이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숫자는 조금 과장된 것 같다고 하였고, 교우들과 외교인들도 공포에 사로잡혀 있으며 전라도 감사의 보호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신자들에 대한 살육과 방화가 이루어지 있다고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서신을 통하여 보고하였다.

또한 7월24일 1시경 전주에서 보두네 신부는 뮈텔주교에게 전보로 “신부들과 모든 신자들이 죽게 생겼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즉답을 요구하였다. 뮈텔주교는 답신으로 “신부들은 피신하거나 서울로 오라”하였다. 그날 저녁 때 보두네와 조조신부는 연락원을 통해 전달된 7월19일자, 7월20일자 편지에도 “이곳 상황이 절망적이다. 주여, 평화를 주소서” 하며 급박한 상황을 보고하였다.

 

<b>② </b><b>조조신부의 피살소식</b>

8월 2일자 뮈텔주교 일기에 샤르즈뵈프 신부으로부터 용산에서 청국군이 소사(素沙)에서, 다음에 천안(天安) 부근의 성환(成歡)에서 일본군에게 완전히 패배했다는 소식과, 또한 저녁 9시 반경에 파스키에(朱若瑟 주약슬)신부의 연락원 2명이 와서 서울로 올라오는 조조 신부가 7월 29일 저녁 공주 화론 궁원(弓院)의 주막에서 패주하는 청국군에 의하여 마부와 함께 공주금강 장기나루에서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ol>
 	<li><b> </b><b>조조</b><b>(</b><b>趙得夏</b><b>)</b><b>신부 피살과 청국의 배상금 배분</b></li>
</ol>
<b>1)</b><b>피살과정</b>

배제에서 사목 활동하던 조조 신부는 동학군으로부터 여러번 습격을 당하고 세 번이나 총으로 위협을 받았지만 굽히지 않았다. 조조 신부는 동료신부들과 복사 박제원(朴濟元)의 권유로 뮈텔주교에게 보고하기 위해 상경을 결심하였다. 뮈텔주교의 지시를 받은 조조(趙得夏모세)신부는 빌모,보두네 신부보다 먼저 즉시 전주를 떠났고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소요가 심한지역을 무사히 통과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공주 금강변 장기나루에서 패잔병 청군과 동학도를 만나 조조신부와 함께 동행 하였던 마부와 함께 7월29일 피살되었다. 조조신부는 금강변에 2일 동안 버려두었다가 교우(강경희 미티아와 이해미 시몬)이 조조신부의 시체를 7월31일 밤중에 간신히 시체를 찾아내 거적으로 덮어 그곳에 서 가까운 강변에 임시매장하고 서울의 뮈텔 주교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 후 조정의 명으로 공주 감사는 조조(趙得夏)신부의 시신을 찾아내 공주공산성 아래에 묻도록 하였고 다음해인 1895년 뮈텔 주교는 샤르즈뵈프(宋德望1867〜1920스테파노)신부를 내려 보내 부두네 신부와 함께 조조신부의 시신을 서울로 이장하도록 하였다. 현재 조조신부는 용산 정직자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b>2)</b><b>조조</b><b>(</b><b>趙得夏</b><b>)</b><b>가족과 조선 선교회 배상금 배분요청</b>

프랑스선교사 조조신부의 피살에 있어 프랑스 외무부에서는 청국주재 프랑스 공사 제라르(Gerard)로 하여금 청국에 대하여 조조 가족에 대한 배상요구로 청국에서는 가족에게 배상금 전액을 지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1895년 2월 8일 조선교구장 뮈텔주교는 조선주재 프랑스 외교관 르페부르 공사관을 통하여 프랑스 외무부에 조선 선교회도 조조신부 가족만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고 조선 선교회가 선교사의 피살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볼 때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기에 조선 선교회에도 가족과 더불어 조선 선교회에도 청국배상금을 배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선교부에 배상금 여부??)

 
<ol>
 	<li><b> </b><b>비에모</b><b>(</b><b>禹一模</b><b>)</b><b>와 보두네</b><b>(</b><b>尹沙勿</b><b>) </b><b>피신과정</b></li>
</ol>
<b>1) </b><b>성불공소 </b><b>15</b><b>일간 굴속에 숨은 선교사들</b>

되재 본당 <b>비에모</b><b>(Villemot, Marie Pierre Paul 1869-1950. </b><b>우일모 </b><b>禹一模</b><b>) </b>신부와 전주 본당 <b>보두네</b><b>(Baudounet, Francois Xavier 1859-1915.</b><b>윤사물 </b><b>尹沙勿</b><b>)</b>신부는 관의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처지인데다가 농민군들이 분풀이 식으로 난폭해지자 7월 중순부터 본당을 떠나 고산 성불 공소로 피신하여 6주를 지냈다 그곳에 있는 동안 위봉산성과 성불 나무숲에서도 지냈는데 아주 위험한 경우에는 성불 공소 감나무골 큰 바위 굴속(<b>완주 동상면 위봉산성 아래</b>)에서 보름(15일) 동안 음식을 날라다준 사람은 <b>송군서</b><b>(</b><b>요한</b><b>)</b>이였다. 그는 굴을 출입할 때마다 다니는 길을 매번 바꾸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다니던 길로만 계속 다닐 경우 사람 다닌 흔적이 나타날 것이고, 만약 농민군들이 수상한 흔적을 따라 굴에 오는 날에는 신부들이 꼼짝 못하고 잡힐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b>2) </b><b>두 선교사 탈출 할 프랑스 군함 지원요청</b>

1894년 8월8일, 8월9일 연락원을 통해 두 선교사는 우리를 구조해 줄 수 있는 방법은 프랑스 군함 1척을 파견 주는 길 이외는 없다며 갈수록 위험에 처해 있으니 군함을 파견을 계속 요청하였다. 그 때 쓴 편지는 전주 어느 동굴에서 쓴 편지였다.

<b>3)</b><b>두 선교사 귀환할 프랑스 군함 출동 </b>

전주의 두 선교사를 구출할 계획을 베르모렐 신부가 맡았고, 프랑스 군함에 함께 타고 갈 신부는 파스키에와 퀴를리에 신부였다. 또한 길 안내를 할 신자와 함께 군함에 승선하여 8월10일 출동시켰다. 저녁 프랑스 군함&lt;앵콩스탕 호&gt;에서 종선을 타고 상륙시킨 연락원은 마량(馬梁鎭)에서 마량진 관리들에게 붙잡혀 마량첨사 김현정(金顯鼎)의 조사를 받았다. “네가 조선 사람인데 어째서 타국의 병선에 타고 있느냐? 묻자, 대답하길, 본인은 서울에서 친한 양대인(洋大人)을 만나고 왔다고 하니 믿고 놓아 줄 수가 없어 가두었다가 이틀 후에 풀어주었다 그 연락원은 이틀 만에 풀려나 14일간 전주에서 탈출하지 못한 두 신부에게 갈수 있었다.

 

<b>4) </b><b>전주 지역에서 탈출 </b>

동학도들에게 포위되어 산속에 있던 두 신부는 8월 19일 탈출에서 성공한 연락원과 함께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馬梁鎭)에서 대기하고 있는 프랑스 군함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두 신부는 다시 수단으로 갈아입고 가마를 이용하여 조그만 항구, 함열(咸悅) 성당진(聖堂津)을 향해 길을 떠났다.

집사(執事-전주 하급 장교 李德化) 한 명이 그를 보호했고, 전주본당 복사 이춘역, 박제원(朴濟元)과 선교사를 서울까지 인도 할 책임을 진 서울특사(안내자-마량진 체포자), 그리고 동학에 가담한 자들로부터 선교사들을 지켜 주기로 예정된 동학도의 우두머리 2명과 함께 출발하였다. 신부 일행은 성당포구에 도착하여 박프란치스꼬 회장집(두동 공소)에 머물렀고, 박회장은 돛단배를 마련해주었다. 이때에 동학군의 집사는 돌려보냈다. 8월20일 두 선교사들과 그들의 수행원들은 조선의 돛단배에 올랐으며 이틀이면 마량(馬梁鎭)에 도착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갓개(양화 입포)에 이르러 풍랑을 만나 간신히 곰개포(익산 웅포)에 배를 대었다, 그들은 마량(馬梁鎭)가면 그때라도 &lt;앵콩스탕 호&gt;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당시 안내자에게 베르모렐 신부는 &lt;앵콩스탕 호&gt;가 8월15일까지 기다릴 것이라고 한 말을 연락원은 현지 마량에 도착하여 15일(2주간)동안 기다릴 것이라고 잘 못 알아들어 마량(馬梁鎭)에 도착하였으나 기다리던 &lt;앵콩스탕 호&gt;는 제물포로 귀항을 해 버려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b>5) </b><b>인솔자 이덕화</b><b>(</b><b>李德化</b><b>) </b><b>달개시장에서 동학도</b><b>(</b><b>起包</b><b>)</b><b>에 체포</b>

<b>8</b><b>월</b><b>22</b><b>일 </b>가까스로 달개포(성산 월포)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풍범선으로 갈아타려고 돛단배는 돌려보냈다. 그러나 풍범선은 암초에 결려 꼼짝 못하는 상태였다. 두 선교사의 서울 귀환을 수행하였던 전주의 하급관리 장교 이덕화(李德化)는 월포(月浦)에서 일행이 풍랑과 비바람에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월포시장(月浦市場-달개시장)에 들려 흥정하다가 부여군 임천동학도(起包)가 금강을 건너와 이덕화 복장일 보고 수상히 여기고 잡아오라고 하고 “뭐하는 사람이냐”고 하며 폭행을 가하였고 동학도(起包)는 대접주(金文化-김문화)에게 끌려가서 본인은 전라도에서 임명한 각 포구의 공납미수를 독촉하려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거짓말하여 의심하지 않고 풀어주어라 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암초에 걸린 풍범선에서 다른 지나가는 배를 기다리던 중 지나가는 범풍선을 발견하고 소리쳐 불렀다. 우리 일행을 경포(군산 서래포)까지 데려다 주면 후한 가격을 주겠다고 하여 배에 올랐다. 일행은 8월23일 경포(京浦)에 도착하여 큰 배를 이용하여 마량진에 도착 하였다.1770년 신경준(申景濬)의 도로고(道路考) 시장편을 보면 월포 시장은 없고 다만 가까운 서포(西浦)나루에 서시포시장(西施浦 市場)이 개시되었다 이곳이 달개시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b>되재본당 비에모</b><b>(</b><b>우일모</b><b>) </b><b>신부와 전주본당 보두네 신부 피신경로</b>

7월 중순 고산 성불 공소 피신

7월29일 : 조조 신부 공주 장깃대나루 피살.

8월10일 : 앵콩스탕호 제물포 출항하여 마량만에 정박(베르모렐 신부와 전주 파발꾼 동승)

8월 12일 : 10일 하선하여 보두네 신부에게 가던 중에 파발꾼이 농민군에 체포됨

8월 14일 : 파발꾼 탈출

8월 15일 : 파발꾼 보두네 신부 피신지 성불 도착

8월 19일 : 보드네 신부 일행 전주 도착 후 함열 성당포로 출발

8월 20일 : 성당진 출발(갓개, 공개포, 달개포, 군산) 엥콩스탕호 제물포항에 도착.

8월 23일 : 마량 도착

8월 27일 : 마량 출발 원산도 도착

8월 29일 : 원산도 출발. 앵콩스탕호 마량진 도착(3시) 안면도 안흥 도착

9월 2일 : 안흥 출발- 태안- 서산- 당진- 갓등이

9월 5일 : 갓등이(화성)도착.

9월 6일 : 서울도착

 

<b>6) </b><b>두 선교사 다시 구원요청과 </b><b>&lt;</b><b>앵콩스탕 호</b><b>&gt; </b><b>출동</b>

마량에서의 만남이 실패로 돌아가자 두 선교사는 마라발(서요셉)신부에게 “누군가가 마량으로 그들을 찾으러 와줄 것을 요청하는 짤막한 편지를 보내 언제까지나 마량(馬梁鎭)에 있겠다고” 하며 구원요청을 하였다 그 편지는 8월28일에 도착했다. 따라서 베르모렐 신부는 다시 프랑스 군함&lt;앵콩스탕 호&gt;을 8월29일 마량으로 출발시켜 오후 3시경 마량(馬梁鎭)에 도착하였으나 두 신부는 없었다.

 

<b>7) </b><b>소형선박 이용 피신결정</b>

다른 편지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계속하여 기다릴 수 없어서 동학도들에게 쫓긴 그들은 마량첨사(馬梁僉使 金顯鼎)이 제공한 작은 배를 타고 8월27일 오전 그들은 원산도(元山島)라는 작은 섬으로 출발하여 8월29일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들은 원산도를 출발하여 안면도(安眠島)로 갔다 그 배는 조선의 기선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나룻배였다 그 배는 항해 중에 바위에 부딪혀 키를 수리하기 위해 안면도에서 20-30리를 가서 멈추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제물포로 가기 위해 다른 중국 상선 &lt;정크선&gt;에 올랐다. 9월2일 제물포 까지 반쯤 왔을 때 &lt;정크선&gt;에서 안흥(安興)에서 하선하였고, 그들은 안흥(安興)땅을 밟았다. 다시 태안(泰安)쪽으로 발길을 옮겨 서산(瑞山).당진(唐津) 그리고 한 나로(Han naro) 알릭스 신부의 집(화성 갓등)을 거쳐 마침내 서울에 도착했다.
<ol>
 	<li><b> </b><b>두 선교사를 탈출을 도운 하급관리 포상</b></li>
</ol>
두 선교사의 서울 귀환을 수행하였던 전주의 하급관리 장교 이덕화(李德化)가 있었다. 두 신부는 그 장교가 성실하게 헌신적으로 도와주어 신부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프랑스 외부부에 보고를 하였고, 조선정부에도 사실을 알려 포상토록조치 하였다. 그 후 프랑스 외부부에서는 포상금100프랑이 내려졌고, 조선정부는 그 관리에게 전주 남고산성(南固山城) 별장(別將)자리를 맡겨 해마다 3000〜4000프랑의 막대한 금액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

 

 
<ol>
 	<li><b> </b><b>맺는말</b></li>
</ol>
이와 같이 동학난으로 신변의 위험을 피하고자 세 선교사 중 불행히도 피신과정에서 조조(趙得夏)신부는 피살 순교를 하였고 다행이 비에모(禹一模)신부와 보두네(尹沙勿)신부는 무사히 서울로 피신할 수 있었던 것을 외교문서를 통하여 살펴 볼 수 있었다. 두 선교사의 피신과정에서 역사적 흔적을 남겼지만 그곳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리려는 성역화가 전무한 상태다. 두 선교사의 은신처(전주 고산지역)동굴은 밝혀져 표지판만 세워져 있다. 두 선교사가 금강을 이용 탈출하기위해 출발하였던 함열(咸悅) 성당진(聖堂津). 웅포진(熊浦津),월포진(月浦津).군산 경암동 경포(京浦). 그리고 소형선박을 위험을 무릅쓰고 출발하였던 마량진(馬梁鎭), 내포지역의 원산도(元山島),안면도(安眠島),안흥 등의 역사적 현장을 보존하고 선교사의 행적을 남긴 각 지역에 대한 안내표석을 세우고 현지답사 순례코스로 지정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b>1894</b><b>년 동학란 때 보루네 신부 금강 배편 이용 피신경로</b>

<b>&lt;</b><b>측도연도 </b><b>1918 </b><b>제판연도 </b><b>1918 </b><b>일본육지측량부</b><b>&gt;</b>

 

출발:성당포구--&gt;부여 양화(笠浦-갓개포구)경유--&gt;전북 熊浦(곰개나루) 도착--&gt;향 군산 곰개나루(熊浦나루)정박 --&gt; 출발--&gt;전북 옥구군 달개포(月浦)정박 후 --풍범선 이용 출발 후 암초에 좌초됨. 지나가는 배편을 이용 군산항구 경포(京浦,서래포구)도착--&gt;경포출발--&gt; 서천군 서면 마량진 도착

 

<b>풍범선 암초 좌초된 전북 옥구군 성산면 월개포</b><b>(</b><b>月浦</b><b>)</b>

<b>측도연도 </b><b>1910 </b><b>제판연도</b><b>1913 </b><b>금강 경포</b><b>(</b><b>달개</b><b>)</b><b>나루터</b><b>(</b><b>일본육지측량부</b><b>)</b>

측도연도 1916제판연도1918(일본육지측량부)

군산 경암동 경포(서래포구). 이곳에서 보두네 신부 일행 마량진으로 출발

 

<b>자료</b><b>1. </b><b>월포</b><b>(</b><b>月浦</b><b>, </b><b>달개나루</b><b>) </b>

월포는 우리말로 달개나루라고 부르는데 <b>성산면 성덕리 항동마을</b>에 있다. <b>월포는 포구와 나루터의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b><b>,</b> 일제 강점기에는 여객선이 경유지는 아니다 .언제부터 포구의 기능을 한지는 알 수 없으나, 해방 후 전마선 1척이 있어서 <b>서천 망월리로 건너 다녔다고</b> 한 다 「조선환여승람」에는 군의 서쪽 30리에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b>참고문헌</b>

군산시사. 군산시.2000

군산~강경의 수운과 나루 . 포구 위 유형연구. 김중규 2006년*

군산문화 13집. 군산문화원 1999

군산시 성산면 성덕리 항동(港洞마을-옛 月浦-달개나루) 위쪽 나루터

 

<b>자료</b><b>2. </b><b>서포</b><b>(</b><b>西浦</b><b>,</b><b>西施浦</b><b>) </b>

과거에 서시포라고도 불린 서포는 금강하구 오성산 자락에 자리한 포구마을로 자연하천인 방여강이 금강에 합류하는 <b>원서포 마을</b>에 포구가 위치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던 <b>서포나루는 충남서천군 지새울 로 건너는 나루였으며</b><b>, </b><b>서포장</b><b>(</b><b>西施浦場 </b><b>4</b><b>일</b><b>)</b><b>이 섰던 곳이다</b><b>.</b> 고려시대 60포구 중 조종 포는 바로 서포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 근거로 주민들이 구전에 진성 창에 모인 쌀들이 창안 토성의 북문을 통하여 서포로 옮겨졌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즉 서포가 조운 창구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서포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임피현의 조운 창고로 이용이 된다.

 

 

 

 

 

 

 

 

 

 

군산시 나포면 西浦里(서포나루) - 西施浦場 開市4

 

<b>○</b><b>8</b><b>월</b><b>22</b><b>일 </b>두 선교사의 서울 귀환을 수행하였던 전주의 하급관리 장교 이덕화(李德化)는 월포(月浦)에서 일행이 풍랑과 비바람에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월포시장(月浦市場-달개시장)에 들려 흥정하다가 부여군 임천동학도(起包)가 금강을 건너와 이덕화 복장을 보고 수상히 여기고 잡아오라고 하고 뭐하는 사람이냐고 하며 <b>&lt;</b><b>道路考 市場</b><b>편</b><b>&gt;</b>

폭행을 가하였고 동학도(起包)는 대접주에게 끌려가서 본인은 전라도에서 임명한 각 포구의 공납미수를 독촉하려고 다니는 사람이라고 거짓말하여 의심하지 않고 풀어주어라 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1770년 신경준(申景濬)의 도로고(道路考) 시장편을 보면 월포 시장은 없고 다만 가까운 서포(西浦)나루에 서시포 시장(西施浦 市場)이 개시되었다 이곳이 달개시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b>자료</b><b>3. </b><b>나폴레옹이 엘베 섬 탈출 시 이용한 범선 </b><b>【</b><b>앵콩스탕호</b><b>】</b>

 

러시아원정 실패 후 엘베섬에 유배중이던 나폴레옹 은 1815년 2월 26일 범선 앵콩스탕호를 타고 탈출해 칸느 인근 쥐앙만에 상륙한 다음 1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북상 정권을 잡음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r>
<td><b>프랑스 전함 엥콩스탕호</b></td>
<td><b>중국무역선 정크선</b></td>
</tr>
</tbody>
</table>
 

<b>자료</b><b>4. </b><b>전라도에서 위기에 처한 두 선교사 </b>

문서번호 : 정무국 제17호

발신일 : 1894년 8월 30일 ( 1894년 08월 30일 )

수신자 : 외무부 장관, 등등

 

조선 주재 프랑스 공화국 공관

정무국 제17호

서울,

1894년 8월 30일

 

전라도의 무정부 상태

두 선교사가 처한 위험한 상황

 

 

장관님,

정부군이 전라도 도읍 전주를 탈환하고 반도들을 소탕한 후, 조선 정부는 이 지방에 출동시킨 모든 군대를 서울로 즉각 귀환시키는 큰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런 조치를 취해서 전라도가 완전히 질서를 되찾고, 이로써 청국군과 일본군이 조선 영토에 더 오래 머물 수 있는 핑계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경솔한 조치는 곧 효과가 나타나 이전보다도 상황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 반도들은 백성들은 비교적 건드리지 않고 관리들만 공격했습니다. 정부군에 의해 반도들이 패주하게 되어 반도들은 시골로 흩어졌고 주민들을 잔인하게 약탈하고 강탈했습니다. 이들은 특히 천주교도들을 겨냥했습니다. 반도들을 진압할 방법이 없었던 지방당국은 혼란을 초래한 자들을 처벌하지 못했고 결국 전라도는 완전한 무정부 상태가 되었습니다.

소요 사태에도 불구하고 이 지방에 계속 머물렀던 우리 선교사 3명의 상황도 7월에 매우 위험해졌습니다. 뮈텔 주교는 서울로 돌아오거나 돌아오는 여행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몸을 숨기라고 선교사들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인 <b>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조조 신부는 즉시 길을 떠났습니다</b><b>.</b> 그는 가장 소요가 심한 지역은 무사히 통과했으나, <b>불행히도 청국 군인 무리를 만나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b><b>.</b> 이 사건의 정황에 대해서는 지난 8월 16일자 공문으로 보고한 바 있습니다.

<b>다른 두 사람인 보두네 신부와 빌모</b><b>(Villemot) </b><b>신부는 신중치 못하게 열성이 지나쳐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출발을 계속 연기시켰습니다</b>. 불행히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고 이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산속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에 강도들이 들끓어 신부들은 감히 서울로 향할 수도 없었습니다.

두 선교사가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8월 8일에 보고받은 본인은 해당지방 관찰사에게 즉각 지시하여 선교사들을 찾아 그들을 안전하게 호위하여 <b>금강</b><b>(Keum-Kang) </b><b>하구 해안까지 인도하도록 했습니다</b><b>. </b><b>금강 하구에는 선교사들을 데려올 군함을 보낼 예정이었습니다</b><b>. </b><b>그리하여 본인은 제물포에 정박 중이던 </b><b>‘</b><b>엥콩스탕</b><b>(Inconstant)’</b><b>호 함장에게 금강 하구에 며칠 정박하며 선교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것을 요청하였습니다</b><b>.</b>

우리 교민들을 위험한 상황에서 구출해내려면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본인은 생각했습니다. 선교사들이 해안에 닿기 위해 이동해야 할 거리가 비교적 짧아서 전주 관찰사가 호위대를 붙여주지 않아도 군함이 있는 곳까지 별일 없이 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b>‘</b><b>엥콩스탕</b><b>’</b><b>호 함장은 전라도로 즉시 출항하였습니다</b><b>.</b> 함장은 신부들을 찾아가 군함이 해안의 어느 장소에 머물러 있는지 알려줄 <b>조선인 천주교도를 함께 데려갔습니다</b><b>. </b><b>전령은 즉시 하선했고 함장은 두 선교사들을의 도착을 기다렸습니다</b><b>. </b><b>그러나 열흘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함장은 제물포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b><b>.</b>

‘엥콩스탕’호가 귀항한 후 일주일이 넘도록 본인은 보두네 신부와 빌모 신부 때문에 매우 염려했습니다. 다행히 뮈텔 주교가 신부들의 소식을 전해와 그나마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습니다. <b>전주 관찰사는 사람들을 산으로 보내어 신부들을 찾아낸 후 금강까지 호위해주었습니다</b><b>.</b> 신부들은 8월 20일 배에 올라 군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 금강 하구까지 내려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신부들이 금강에 하선한 날이 <b>‘</b><b>엥콩스탕</b><b>’</b><b>호가 열흘을 기다리다가 허탕을 치고 제물포로 귀환한 바로 그날이었습니다</b><b>.</b>

도착한 해안에 군함이 없으니 두 신부들이 조선의 소형 배를 타고 제물포로 오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 걸리겠지만 불가능한 방법도 아닙니다. 아니면 군함이 다시 찾으러 오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이 두 번째 가정 하에 본인은 엥콩스탕호 함장에게 전라도 해안으로 다시 출항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지난 번 출항보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경구.
<ol>
 	<li>르페브르</li>
</ol>
파리의 외무부 장관 각하께, 등등

 

<b>자료</b><b>5. </b><b>보두네와 빌모신부 피신 과정</b><b>,</b> 1984년 8월 20일

---중략 ---

본인은 조조 신부와 같은 선교사의 죽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손실인가는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죽음이 선교회에 일어난 가장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선교사들을 건드리지 못했던 동학교도들이 먹잇감을 찾는 야수처럼 선교사들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손아귀에 걸려들지 않기 위해 <b>보두네 신부와 빌모 신부는 산속 동굴로 피신해 이주일 밤낮을 보내야했습니다</b><b>. </b>천주교도들이 이미 많은 고통을 받았지만 이때부터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약탈당하지 않은 마을이 한 군데도 없을 것입니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도망을 쳐서 만 천 명 천주교도들 중 살아남은 자가 있을지 생각하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지경입니다.

 

-1894년 9월 7일 프랑스공사관 르페브로에게 보낸 서한

서명：G. 뮈텔

-------------------------------------------------------

 

<b>자료</b><b>6. </b><b>승정원일기 고종 </b><b>32</b><b>년 을미</b><b>(1895) 2</b><b>월 </b><b>19</b><b>일</b><b>(</b><b>신유</b><b>) </b><b>맑음</b>

신병이 있는 남고 별장 길흥규를 파출하고 후임에 한량 이덕화를 자벽할 것을 청하는 군무아문 서리 대신의 계

○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 이도재(李道宰)의 첩보를 보니, ‘남고 별장(南固別將) 길흥규(吉興奎)가 신병을 이유로 정장하여 체직을 청하였기에 부득이 파출하고 그 대신에 한량 <b>이덕화</b><b>(</b><b>李德化</b><b>)</b>를 자벽하니, 보고 내용을 아뢰어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대로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그대로 윤허한다는 칙지를 받들었다.

自辟(자벽) : 조선 후기 일부 특정 관직에 대해 해당 관아에서 독자적으로 추천하여 임용한 제도.

 

<b>자료</b><b>7. </b>빌모와 보두네 두 선교사의 서울 귀환

문서번호 정무국 제18호

발신일 1894년 9월 10일 ( 1894년 09월 10일 )

수신자 아노토, 등등

조선 주재 프랑스 공화국 공관 정무국 제18호 서울, 1894년 9월 10일

 

<b>빌모 신부와 보두네 신부 서울 무사 귀환</b>

장관님, 지난 8월 30일자 공문을 통하여 본인이 매우 염려했던 전라도 두 선교사들에 관해 보고한 바 있습니다. 두 신부가 이주일 이상 계속된 고된 여행 끝에 안전하게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전라도 관찰사가 제공한 호위대의 보호 하에 8월 19일 전주를 출발했던 선교사들은 별 탈 없이 23일 <b>금강 하구 부근인 마량에 도착했습니다</b><b>. </b>신부들은 그곳에서 제물포로 데려다 줄 군함을 만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엥콩스탕’호는 그곳에서 일주일 이상 기다리다가 사흘 전에 떠나버린 상태였습니다. 빌모 신부와 보두네 신부는 다시 자기들을 찾으러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며칠 동안 마량(Ma-ryang)[<b>馬梁</b><b>]</b><b>에 머물렀습니다</b>. 그러나 반도들의 위협 때문에 신부들은 곧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7일 오전, 신부들은 <b>작은 배를 타고 원산도</b>(île de Ouen-san)라는 <b>조그만 섬으로 가서 </b><b>29</b><b>일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b><b>.</b> 29일 오후에는 해안선을 따라 제물포로 가기 위해 다른 정크선에 올랐습니다. 9월 2일, 제물포까지 반쯤 왔을 때 정크선에서 아예 하선해서 육로를 통해 여행을 했고 9월 6일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전주의 하급관리 한 명이 두 신부들의 여행길을 함께 했는데 내내 성실하게 헌신적으로 일해주어 신부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본인은 그에게 포상을 내리라고 조선 당국에 요청할 것입니다. 내륙에 있는 우리 선교사들은 현재 모두 서울이나 개항장으로 돌아온 상태입니다. 조선 정부가 해당 지역 안전을 보장할 때까지 근무지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경구 G. 르페브르 파리의 외무부 장관 아노토 각하께, 등등

 

<b>자료</b><b>8. </b><b>프랑스 공사관</b><b>, </b><b>전라도 지역에 파견된 두 선교사의 서울 귀환에 관하여 외무성에 보고함</b>

 

연월일 : 고종 31년(1894년, 淸 德宗 光緖 20年, 日本 明治 27年) 10월 25일

르페브르 씨

서울

제19호

1894년 11월 22일

 

전라도 선교사들에 관하여

귀하. 지난 8월 30일자 공문을 통하여 전라도에 있던 선교사 두 명의 목숨을 구하고 프랑스 전함에 이들을 태워오기 위해 귀하가 취하신 조치들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귀하가 책임지고 나서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b>엥콩스탕호</b> 함장에게 부탁하신 조치에 대해 본인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다음번에는 우리의 두 선교사들이 제물포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빕니다.

 

출전: 『프랑스외무부문서』 6권(1893~1894), 【104】전라도 두 선교사의 서울 귀환에 관하여, 1894 11월 22일

 

<b>자료</b><b>9. </b><b>빌모와 보두네 신부의 서울 귀환을 호송한 조선인 관리에게 조선 정부에서 포상 </b>

발신일 1895년 3월 2□일 ( 1895년 03월(음) )

수신자 G. 아노토

 

서울,

1895년 3월 2□일

조선 주재 프랑스 공화국 공관 정치국 제5호

 

장관님, 지난 12월 5일 공문을 통해 지시하신 바대로 8월에 빌모(Villemot)[禹一模] 신부와 보두네(Baudounet)[尹沙勿] 신부의 서울 귀환을 수행했던 <b>전주의 장교 이덕화</b>(Y Tok-houa)[李德華;李德化]에게 <b>100</b><b>프랑을 전달했습니다</b><b>.</b> 재정상으로 매우 어려웠던 이 조선인은 자신에게 매우 유용했던 이 은전에 대해 진심어린 감사의 뜻을 프랑스 정부에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또한 며칠 전, 위험한 상황에서 우리 교민들을 도와준 것을 치하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이 관리에게 전라도[남고](Nankou)[南固] 산성 별장[別將] 자리를 맡겼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기뻤습니다. 이 자리로 해마다 3000~4000프랑은 벌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인에게 이런 금액은 엄청난 재산입니다. 프랑스 대표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진 이번 임명 건으로 전라도 내 프랑스의 위신이 높아지리라 생각되며 우리 선교사들의 일도 어느 정도 수월해지지 않을까 예상됩니다. 경구.

&lt;南固山城&gt;:사적(史蹟) 제294호 전주 남고산성 (全州 南固山城)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산228 백제 때 축성

&lt;별장&gt;: 호조(戶曹)가 설점(設店)한 은점(銀店)을 관리하던 임시관원.

 
<ol>
 	<li>르페브르</li>
</ol>
파리의 외무부 장관 G. 아노토 각하께, 등등

 

출전 · 『프랑스외무부문서』 7권(1895~1896), 【8】빌모와 보두네 신부의 서울 귀환을 호송한 조선인 관리에게 조선 정부에서 포상, 1895년 3월 2일

 

<b>자료</b><b>10. </b>조선 선교회가 피살된 조조 신부의 청국 배상금 배분을 요청

 

발신일 1895년 2월 8일 ( 1895년 02월08일(음) )

수신자 외무부 장관

서울,

1895년 2월 8일

조선 주재

프랑스 공화국 공관

제2호

 

조선 대목이 조조 신부 피살 사건으로 받은 보상금을 조선 주재 선교회와 조조 신부의 유가족에게 배분할 것을 요청

첨부 1

 

장관님,

조조(Jozeau)[趙得夏] 신부 피살 사건을 보상하는 의미로 청국 정부가 전달한 배상금을 조조 신부의 유가족과 조선 주재 선교회가 배분받았으면 한다는 뜻을 뮈텔(Mutel)[閔德孝] 주교가 본인에게 서한을 통하여 전해왔습니다. 주교의 서한 사본을 동봉하는 바입니다. 조선 대목의 이와 같은 요청은 유감스러운 사건 발생으로 선교회가 입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볼 때, 합당하고 공평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본 요청을 각하에게 전달하는 바이오니,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합니다.

경구.

 
<ol>
 	<li>르페브르</li>
</ol>
 

파리의 외무부 장관 각하께, 등등

 

별지

◈별첨

서울발 1895년 2월 8일 정치공문 제2호 첨부

조선 대목 뮈텔 주교가 르페브르 씨에게 1895년 2월 4일 보낸 서한 사본

 

정부위원님,

제라르(Gérard) 청국 주재 프랑스 공사의 노력으로 우리 조조 신부의 피살 사건에 대한 배상금을 얻어냈다는 소식을 서한을 통하여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진 것은 프랑스와 프랑스 외교관들의 위신을 드높이는 일입니다. 청국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중요하게 여기는 조선 당국에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며, 선교사들도 조선 내에서의 안전 문제에 더욱 안심할 수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토록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애써주신 정부위원님과 청국 주재 프랑스 공사님에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사안 해결에 애써주신 제라르 씨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배상금을 다루는 보상규정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를 귀하를 통해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피력하고자 합니다.

총리아문(Tsong-li-Yamen)[總理衙門]은 유가족에게 배상금을 지급했습니다. 이는 옳은 처사입니다. 달리 방도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선교사의 ‘유가족’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의 젊음과 업적, 노력, 열정과 인생을 바친 선교회가 두 번째 가족이면서도 실질적인 유가족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가족을 잃은 슬픔에 대한 배상금을 선교회도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과 나눌 권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선교사가 직무를 수행하다가 목숨을 잃으면 그가 남긴 유품은 대개 선교회에 귀속됩니다. 조조 신부도 다른 방법으로 처리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1894년 7월 15일 남긴 유서에 “이곳이나 외방전교회(Société des Missions Etrangères) 회계부에 있는 자산, 동산 및 부동산은 모두 조선 선교회에 기탁한다.”라고 썼기 때문입니다.

윌리(Wylie) 개신교 선교사의 경우 보상금이 유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개신교 선교사들은 몸담고 있는 선교회에 일생을 바치지 않습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소속된 곳을 떠나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아내와 자녀들이 있는 경우가 보통이어서 선교사들이 이들을 응당 부양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선교사가 피살당하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족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를 보상하기 위한 배상금이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선교사는 경우가 다릅니다. 가톨릭 선교사는 선교회에 평생 온몸을 바칩니다. 소속 단체와 가족이 모두 그의 사명인 것입니다. 배상금이란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복구하라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입은 손해를 보상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피해라면 조조 신부의 유가족과 조선 선교회가 똑같이 입었습니다. 그러나 손해 차원에서 보면 조선 선교회가 고스란히 보았다는 것이 자명합니다.

조조 신부와 같은 선교사는 하루아침에 대체할 수도 없으며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듭니다. 그 비용은 파리 신학교(Séminaire de Paris)와 조선 선교회가 나누어 떠맡게 됩니다. 조조 신부를 따라 나섰다가 같이 신부 때문에 변을 당한 조선인 마부의 미망인과 여섯 살 난 자녀도 선교회가 부양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조 신부와 마부의 장례비용도 선교회가 부담할 것입니다. 우리는 유해를 서울까지 이송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송 기간이 사흘이 넘어 상당한 지출이 예상됩니다.

조조 신부 피살로 우리 선교회가 입은 손해를 감안하면 배상금 전액을 받는다 하더라도 손해를 만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1894년 9월 7일자 본인의 공문에서도 이 유감스러운 사건으로 선교사들과 조선 가톨릭교도들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 놓였는지 말씀드렸으니 이에 대해서는 부언하지 않겠습니다.

소속 선교사가 피살당하여 받게 된 배상금으로 선교회가 홀로 입게 된 물질적 피해에 대해 어떤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북경(Pékin)[北京] 주재 프랑스 공사는 받은 배상금을 파리로 보내셨는데, 자신의 보호 하에 있는 선교회와 선교사들의 상황을 잘 알고 계시니, 아마도 조조 신부 유가족과 조선 선교회에 돌아갈 배상금 몫을 외무부가 직접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어쨌든 외무부에서는 사안을 그런 측면으로 파악하셨습니다. 지난 11월 7일, 파리 신학교 원장은 받을 배상금 일부를 조선 선교회에 제공하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처리하는 것이 공평하며 원장의 요청을 감안 하겠다는 외무부의 답신을 받은 바 있습니다.

경구.

 

서명：G. 뮈텔

<b>자료</b><b>11. </b><b>&lt;</b><b>관련자료</b><b>&gt;</b>

<b>17</b><b>권 프랑스외무부문서 </b><b>7 </b><b>조선 </b><b>Ⅵ</b><b>·1895~1896</b>

韓國近代史資料集成 17권 17권 프랑스외무부문서 7 조선 Ⅵ·1895~1896 &gt; 정치공문 1888~1896 조선 1895~1896 권6 G. 르페브르 씨, 콜랭 드 플랑시 씨 &gt; 【5】 조선 선교회가 피살된 조조 신부의 청국 배상금 배분을 요청

---------------------------------------------------------------------------

 

<b>G.</b><b>르페브르</b><b>, </b><b>조선 선교회가 피살된 조조 신부의 청국 배상금 배분을 요청한 것을 보고함</b>

 

연월일 고종 32년(1895년, 淸 德宗 光緖 21年, 日本 明治 28年) 2월 8일

서울, 1895년 2월 8일

조선 주재

프랑스 공화국 공관

제2호

조선 대목이 조조 신부 피살 사건으로 받은 보상금을 조선 주재 선교회와 조조 신부의 유가족에게 배분할 것을 요청

 

장관님,

조조(Jozeau)[趙得夏] 신부 피살 사건을 보상하는 의미로 청국 정부가 전달한 배상금을 조조 신부의 유가족과 조선 주재 선교회가 배분받았으면 한다는 뜻을 뮈텔(Mutel)[閔德孝] 주교가 본인에게 서한을 통하여 전해왔습니다. 주교의 서한 사본을 동봉하는 바입니다.

조선 대목의 이와 같은 요청은 유감스러운 사건 발생으로 선교회가 입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볼 때, 합당하고 공평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에 본 요청을 각하에게 전달하는 바이오니,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합니다.

경구.

 
<ol>
 	<li>르페브르</li>
</ol>
파리의 외무부 장관 각하께, 등등

출전 · 『프랑스외무부문서』 7권(1895~1896), 【5】조선 선교회가 피살된 조조 신부의 청국 배상금 배분을 요청, 1895년 2월 8일

 

<b>자료</b><b>12. </b><b>충청도관초</b><b>(</b><b>忠淸道關草</b><b>) / </b><b>고종</b><b>(</b><b>高宗</b><b>) 31</b><b>년</b><b>(1894) 9</b><b>월 </b><b>14</b><b>일 충청도의 보고</b>

 

천안군(天安郡)에서 일본 사람이 죽게 된 사유와 죄인을 뒤쫓아 붙잡는 일에 대해 별도로 신칙을 한 연유는 전 감사(監司)가 재임(在任)할 때 이미 치보(馳報)하였거니와, 이번에 천안 군수가 올린 첩정(牒呈)을 받아 보니, “본군(本郡) 각처의 동학교도〔東徒〕수백 명이 일본 사람 6명과 싸우다가 죽이고는 길 옆에 파묻은 사유는 이미 낱낱이 전임 사또〔使道〕에게 보고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 도부(到付)한 회제(回題)에, “경솔히 먼저 행자(行刺)하여 저들이 비록 화(禍)를 불러들였으나 뒤섞여 싸우다가 죽게 하였다니, 이것이 무슨 패악(悖惡)인가? 소문을 듣고 매우 놀랍다. 이미 묻은 여섯 시체를 우선 파내어 검시(檢屍)하여 보고할 것.”이라고 하였다는 일.

 

같은 날 또 보고함

귀(貴) 대신(大臣)의 서함(書函)을 열어 보니, “법국(法國) 서리대신(署理大臣) 노(盧)의 조회(照會)를 받아 보니, ‘얼마 전에 확실히 탐지하였는데, 전일에 충청 감사(忠淸監司)가 파견하여 보낸 공주 영장(公州營將) 및 중군(中軍)을 영접한 중국의 섭문(葉門)이 금강(錦江)과 매우 가까운 시목동(柿木洞) 안에 있으면서 <b>법국</b><b>(</b><b>法國</b><b>) </b><b>사람인 조 교사</b><b>(</b><b>趙敎士</b><b>)</b>를 취초(取招)할 때 그 공주 영장 및 뜻밖의 충청도 감사가 본서(本署)의 대신이니 몹시 괴이한 것이었습니다. 청컨대 귀 대신께서 충청 감사에게 비칙(飛飭)하여 그 영장과 중군이 들은 것과 말한 일을 자세히 따져 물어 일일이 보고하여 밝히는 것이 참으로 매우 시급하고 매우 긴요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안을 조사해 보니, 전임 감사 이헌영(李憲永)이 신문하여 보고한 것은 아무래도 명백함이 부족하니, 청컨대 번거롭지만 재차 사문(査問)을 행하여 속히 서둘러 비보(飛報)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본영(本營)의 중군 박정우(朴正祐)를 조사해 보니, 8월 초에 휴가를 고하고 시골에 돌아가서 단지 전래(傳來)한 영장 이기동(李基東)을 알아내서 그에게 일체를 물어보았고 곧이어 이 영장이 성칭(聲稱)한 것에 의거하면, “올해 6월 27일에 감사가 면전에서 유시한 것을 받들어 천안군 남쪽의 청나라 장수(將帥)를 영접하였고, 동 중군 박중우는 공주(公州)의 금강(錦江) 북안(北岸)을 건너가서 영후(迎候)하였는데, 먼저 ‘이 진중(陣中)의 대인(大人)이 누구인가?’고 물어보니, ‘섭 대수(葉大帥)의 조카입니다.’라고 답하였으며, 과연 어떤 한 사람이 말을 타고 와서 접견하였고 영장과 중군이 말에서 내려 서로 읍(揖)을 하였는데, 이 사람이 바로 섭 대수의 조카였습니다. 그 뒤에 청나라 군병들이 외국사람 1명을 잡아서 벌떼처럼 껴안고 와서는 즉시 배에 올라가기에 영장과 중군이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써서 묻기를, ‘어느 나라 사람이고 무슨 죄가 있어서 붙잡아 왔는가?’라고 하니, 섭 대수의 조카도 사람을 시켜 모래바닥에 쓰게 하기를, ‘이자는 일본 사람이고, 우리가 지금 일본 군대에게 패하고 왔다. 우리는 이 일본 사람을 죽일 것이다. 운운(云云)’이라고 하고는 섭 대수의 조카가 마침내 먼저 강을 건너고 영장과 중군은 뒤에 건너는데 배 안에 있으면서 멀리 바라보니, 섭이 무기를 휴대하고 저쪽 물가에 도착하더니 그 자리에서 이른바 그 일본 사람을 베어 죽이고 <b>또 그 마부</b><b>(</b><b>馬夫</b><b>)</b><b>도 베어 죽였는데</b>, 마부는 곧 조선 사람입니다. 청나라 군대가 또 이미 베어 죽인 조선 마부에게 총을 쏜 뒤에 남쪽을 향하여 행진하여 갔고 영장과 중군도 그 뒤를 따라 다시 강을 건넜는데, 그때 모두 명자(名刺 명함(名銜))도 서로 주고받지 않았고 또 언어도 통하지 않아서 그 이름도 알지 못하고 단지 섭 대수 지초(志超)의 조카라는 것만 알았습니다.”라는 등을 말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조사해 보니, 섭지초(葉志超)의 조카가 이른바 일본 사람이라고 말한 자는 곧 법국 사람인 듯하고 그곳은 바로 금강의 모래밭이었으며 모두 시목동(柿木洞)이 아니고, 또한 취초(取招)하거나 옆에 앉아 들은 일도 없습니다. 이에 상응하여 글을 갖추어 보고하니, 귀 대신이 조사하고 대조하여 전복(轉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b>자료</b><b>13. </b><b>전라도천주교 전교약기 구술자 박제원</b><b>(</b><b>朴齊元 </b><b>요셉 </b><b>1853</b><b>〜</b><b>1935)</b>

1885년부터 12년 동안 전라도 선교사 복사로 활동하였고, 1897년 나바위 신부 장약슬(張若瑟 요셉 베르모렐)신부의 복사로 1911년까지 활약하다가 1920년까지 잠시 대구 매목구 명도회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0년 나바위로 돌아와 노년을 밪이하였다. 1922년 68세 노령으로 눈을 잃고, 마음의 눈을 밝혀 신앙을 다졌다.

박제원 요셉 복사가 구술한 내용을 담은 책, 전라도전교약기(全羅道傳敎略記 1932년)는 전북지역에서 이루어진 선교사의 이야기를 통해 개항기 천주교회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박제원이 구술한 전교약기에 비에모와 보두네 신부를 안내를 함께한 전주 장교 이덕화(李德化)가 월포(月浦市場-西施浦市場 인듯함)에서 임천동학도에게 체포되었으나 무사히 풀려났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r>
<td></td>
<td></td>
</tr>
</tbody>
</table>
[출처] 전북 익산 : 천주교 전주교구 나바위성지성당

<b>Ⅳ</b><b>. </b><b>청양군</b><b>, </b><b>정산현의 동학여당</b><b>(</b><b>東學餘黨</b><b>) </b><b>천주교 투탁사건</b>

<b>박수환 </b>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동학여당(東學餘黨)이 천주교, 러시아 정교회[희랍교(希臘敎)], 야소교(耶蘇敎)에 투탁하거나 또는 그들 종교를 이용하여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한편 변혁운동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군의 반란으로 혼란한 시기에 내포지역인 청양, 정산현에서도 동학이 크게 일어났으니 정부군의 진압으로 동학은 실패로 끝났다. 조정에서는 동학도인 우두머리 만 처형하고 단순가담자는 처벌하지 않았다. 청양, 정산지역에도 많은 동학 도인이 있었다. 실패로 끝나 동학여당(東學餘黨))들은 천주교에 투탁하여 프랑스 선교사의 위세를 이용하여 불법을 자행하는 등 사회의 불안을 야기시켰다. 정산, 청양지역의 동학여당의 작패실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b>1 </b><b>청양군</b><b>(</b><b>靑陽郡</b><b>)</b>

① <b>사건의 발생 보고</b>

1895년7월9일 청양군수 정인희(鄭寅羲)는 고을 이원식(李元植)으로 부터 동학잔당의 무리의 불법작태에 대하여 올라온 글을 접하고 그 실태를 법부대신에게 올린 내용을 살펴보면, 1894년 동학농민군들이 창궐하였을 때 집안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일이 전적으로 동학교도(東學敎徒)인 강군장(姜君章)이라는 사람이 일으킨 일로 백성이 죽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지난 동학란 때 같은 마을에 사는 강심은(姜心隱)과 강군장(姜君章)은 부자 사이로 동학무리에 기대어 이원식(李元植)의 집에 충격을 가하여 청상과부(靑孀寡婦)가 자살을 하였다. 이 일에 대하여 법을 밝혀 두 부자를 처벌해 달라는 청원에 따라 지난 일이라고 그냥 버려두어서는 안 되므로 사실을 조사하였고 불법을 자행한 두 부자를 붙잡아오려고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南一良 : 퀴릴리에)를 따르는 제자를 칭하는 무리가 붙잡지 못하게 하여 부친 강심은(姜心隱)은 붙잡았으나, 아들 강군장(姜君章)은 피신하였다. 그는 성교인(聖敎人)을 부추겨 작당하여 관청에 찾아와 소란을 피우며 관장(官長)을 협박하니, 군수로써 그냥 둘 수 없어서 그 부친 강심은(姜心隱)은 우선 청양군의 감옥에 가두었고 법부의 처분을 기다린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b>② </b><b>법부의 처분지시</b>

보고를 접한 법부대신은 처분지시를 내렸다.

그 처분내용을 살펴보면, 동학도인 강군장(姜君章)의 작태는 그자가 비록 원통하다고 말하지만, 믿을 수 없는 점이 있다. 이미 해당 백성이 호소한 글에 대한 답변에서 엄하게 배척을 하였으되, 근래에 서학 교인들이 폐해가 곳곳에서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데 이는 모두 수령(守令)이 약조(約條)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망령스럽게 겁을 먹고는 두려워하여 스스로 권리를 잃어버린 까닭에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가 다스리는 것이지 법국(法國:프랑스) 사람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미 이러한 뜻을 법국 공사(프랑스공사)와 담판(談判)하였고, 이미 프랑스 도교주(都敎主:주교)에게 설명하였는데, 모두 감히 우리나라 정사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지금 작폐(作弊)하는 자는 모두 우리의 백성 중에 간사하고 자잘한 무리들이 전교사(傳敎師:선교사)를 자탁(藉托 :다른 구실을 내세워 핑계를 댐)하고 위복(威福 : 복됨이 위태로워)을 저지르는 것이다. 통렬히 금단하고 엄하게 다스려야 되고 절대로 돌아보며 관망하거나 의심하여 겁을 내어 그들의 완악하고 분에 넘는 버릇을 키워서는 안 된다, 가까운 일전에 전주(全州) 관찰사가 그곳의 선교사인 윤사물(尹沙勿 : 보두네)선교사와 담판하여 약조를 만들고 그 뒤로 교인 중에 작폐한 자를 즉시 우리 관아로 하여금 법대로 잡아다가 다스리자 그 선교사가 감히 편들거나 두둔하지 못하였다. 이는 수령의 능력에 달려 있을 따름이지 전적으로 외국 사람만 탓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잘 알고서 준수하고 심판하여 우리 양민(良民)으로 하여금 의지하고 신뢰하는 바가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b>1895</b><b>년</b><b>7</b><b>월</b><b>17</b><b>일 청양군수 정인희가 보고한 동학무리들의 작패 첩보문서</b>

<b>&lt;</b><b>규장각원문 첩보</b><b>1</b><b>권 규</b><b>26290&gt;</b>

<b>【</b><b>첩보주요내용</b><b>】</b>

발신자 : 청양군수 정인희

수신자 : 법부대신

 

충청도 청양군수의 첩보를 보니, 본 청양군민 이원식의 소장에 지난(1894년) 가을 동학란 때 같은 마을(화성면 농암리)에 사는 강심은, 강군장 부자가 동학무리에 기대어 근거 없는 추한 말로 충격하여 청상과부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들었으니, 사실을 조사하고자 강심은, 부자를 붙잡아오라 하였는데, 법국교사(선교사 :남일량)의 제자를 칭하는 무리들이 붙잡지 못하게 하였는데 아버지 강심은은 붙잡았고, 아들 강군장은 이에 피신하여 성교인을 부추겨 작당하여 소란을 피우며 장관을 협박하니, 지난 가을의 범죄도 이미 용서할 수 없거늘 이번에 또 관장을 협박하니 만약 이을 내버려두면 법을 베풀 곳이 없을 것이라, 강심은(姜心隱)은 우선 청양군의 옥(獄)에 잡아 가두었으니, 이에 보고하고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1895년7월17일

 

<b>- </b><b>지령 </b><b>-</b>

<b>강심은 부자를 잡아들이고 모두 엄한 형벌에 처할 것 </b>

1895년 8월 5일

 

 

<b>2 </b><b>정산현</b><b>(</b><b>定山縣</b><b>)</b>

<b>① </b><b>사건의 발생 보고</b>

1895년 4월 29일, 정산현감이 지난 4월 16일 누구인지 모르는 두 사람이 관아에 들어오더니 문첩(文牒:문서)을 던져주고는 그대로 돌아갔는데 그 내용을 열어 읽어 본즉 다음과 같았다.

 

작년(1894년) 6,7월부터 이후로 동학농민군의 난리로 어지럽게 소요하여 각처가 모두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일일이 형언 할 수 있겠는가? 귀읍(貴邑:정산현) 적면(赤面)도림(道林)에 사는 배학주(裵學周)는 본래 천주교의 성교(聖敎)를 봉행하는 사람인데, 왕진리(汪津里)의 동학무리가 아무 이유도 없이 가산이 되는 물건들을 모조리 빼앗아갔고, 몸조차도 또한 지탱하여 보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5,6달 동안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뒤에 그 동네 사람들과 상의하여 빼앗아간 놈과 가산이 되는 물건 및 전답문건을 돌려받고자 마을 이장이 증인을 불러 1백냥으로 수기(手記 : 약속문건)를 만들어 공평하게 받아내게 하려 하였는데, 얼핏 들으니 정산현 관아에서 그 마을 이장을 잡아다가 강제로 받아내고 내주지 않는다고 하니, 그것이 어찌된 곡절인가? 목민의 관원이 되었으면 이렇게 원통하고 억울한 일은 마땅히 명쾌하게 돌려줘야 하거늘 어찌하여 이렇게 의롭지 못한 마음을 먹고 가난한 백성을 잔학하고 성교(聖敎)를 멸시하여 옳지 못한 물건을 받아먹는단 말인가?

이렇게 하고도 관직에 있으면 어떻게 백성을 다스리겠는가? 그러나 배학주의 돈 1백냥을 며칠 안으로 다시 내주되, 만약 내주지 않으면 1백 금(金)의 돈을 나에게 주어 불평(不平)해진 뒤에 사이가 좋아지는 정상이 있을 것이니 헤아리기 바란다.

대법국(大法國)전교사(傳敎師) 남일량(南一良)

 

그러면서 지난 섣달에 본현 적면(赤面) 왕진리(汪津里)에 사는 동학도의 수괴 송만복(松萬卜)의 집물가(什物價) 19냥을 이미 감영에 갚아서 노령청(奴令廳:노비관리청)에 보태어 집과 일꾼은 그 마을에 주어 요역의 비용에 보태게 하였으며 그 뒤에 본읍 적면 도림에사는 배학주(裵學周)가 서학(西學:천주교)의 회장(會長)이라 칭하였고 또한 송만복(松萬卜)과 관계된 것이 있어서 백금의 돈을 토색하려고 대법국 신부(남일량 선교사)에게 부탁하고 전후로 관아를 핍박하고 백성을 학대한 것이 못하는 짓이 없을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관아는 관아 역할을 못하고 백성은 백성 노릇을 못하였던 것이니 직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 본 군수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지금 이 【<b>대법국 신부님</b>】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로 있는지 없는지 상세하지 않아서 판단할 수가 없으므로 대법국 신부의 글을 첨부하여 보고 하였다.

 

<b>② </b><b>법부의 처분지시</b>

법부는 다음과 같이 지령하였다.

동학무리가 비록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가산을 적몰하여 관아의 폐단을 구제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법을 잘 처리한 것이 아니므로, 마땅히 외국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길 것이 되느니 비록 그러나 우리나라 교민(敎民)들이 교주(敎主)를 부추기여 관원을 능멸하고 백성을 학대하여 불법적인 짓을 함부로 저지르니 매우 통탄스럽다. 외국인과 서로 관계하는 법은 교당(敎堂)여부를 막론하고 일제 조약을 따를 뿐이다 송사에 간여하고 시골 백성을 결박하여 때리고 강제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등의 일은 모두 불법(不法)에 관계되므로, 비록 법국의 신부라도 만약에 이 죄를 범했으면 그가 있는 곳의 지방관이 마땅히 법에 따라 잡아다가 법국 영사관에 교부해야 되거늘, 하물며 본국(本局) 교민(敎民)이 만약 이 죄를 범했으면 본국 관원이 마땅히 법에 의거하여 곧바로 단죄하여 훗날의 폐단을 막아야 되지, 어찌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관망할 단서가 있는가? 관장(官長)이 이러하면 백성은 믿을 바가 없게 되어 입교(入敎)한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교만하고 억세게 할 것이니 그 폐단이 장차 이르지 않는 바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사건을 당할 경우에는 작조의 본뜻을 교주(敎主:선교사)에게 명확히 보여주고 교인들을 타이르면 저들도 필시 감히 억지를 부리지 않을 것이니 이 영(令)을 깍듯이 준수하여 타인의 모욕을 초래하지 말라, 또한 본부(本部)에서도 법국 공관에 알리고 조회하여 법을 마련하여 폐단을 막도록 하겠다.

<b>정산현감 첩보 보고 </b><b>/ </b><b>고종</b><b>(</b><b>高宗</b><b>) 32</b><b>년</b><b>(1895) </b><b>윤</b><b>4</b><b>월 </b><b>29</b><b>일 충청도관초</b><b>(</b><b>忠淸道關草</b><b>)</b>

<b>&lt;</b><b>조선시대 청양군 고지도</b><b>&gt;</b>

충청남도 청양군의 청남면 왕진리(汪津里)에 있는 나루터이다. 이 나루터는 금강을 사이에 두고 부여의 구두래나루와 마주보는 곳에 자리한다. 왕진나루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동여도』에서 왕지진(王之津)이라 기록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정산현의 남쪽 26리에 있으며 부여로 통하는 길목이라고 기록하였다.

----------------------------------------------------------------------

고종 40년 계묘(1903) 10월 18일(무진, 양력 12월 6일)

 

<b>비서원 승에 종</b><b>2</b><b>품 이승재를 임용하였다</b>

○ 종2품 이승재(李承載)를 비서원 승에 임용하고, 윤하영(尹夏榮)을 장례원 상례에 임용하고, 비서원 승 이승재(李承載)를 겸임 장례원 장례에 임용하고, 조성익(趙性翼)을 홍문관 시독에 임용하고, 이승우(李丞宇), 최재옥(崔在玉), 김원형(金元亨), 배학주(裵學周), 변한고(邊翰高), 신운집(辛雲集), 장홍식(張鴻植)을 중추원 의관에 임용하였다.

----------------------------------------------------------

고종 40년 계묘(1903) 10월 23일(계유, 양력 12월 11일)

 

<b>③ </b><b>배학주 관련기록</b>

<b>시종원 시종 이봉선 등의 본관을 의원면직하였다</b>

○ 시종원 시종 이봉선(李鳳善), 후릉 참봉 홍덕주(洪德周), 숭인전 참봉 정진홍(鄭鎭弘), 중추원 의관 배학주(裵學周)ㆍ장창식(張昌植)ㆍ조경택(趙慶澤)ㆍ김영모(金永模)ㆍ이원철(李源喆)ㆍ이덕재(李德在)ㆍ송철호(宋哲浩)의 본관을 의원면직하였다.

 

 

 

 

 

 

<b>④ </b><b>이원직 관련 기록</b>

<b>◯ </b><b>광업권설정</b><b>(</b><b>금은광</b><b>)</b>

<b>조선총독부관보 </b><b>1935</b><b>년 </b><b>12</b><b>월 </b><b>27</b><b>일 정규호 </b><b>2687</b><b>호</b><b>(</b><b>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이원직</b><b>)</b>

 

<b>◯</b><b>충청감영계록</b><b>/</b><b>철종</b><b>6</b><b>년</b><b>(1855</b><b>년</b><b>)2</b><b>월 </b><b>29</b><b>일</b>

- 정시문과의 초시 합격 ---李元植

- 시험장소 : 충청도감영(공주목)

- 시험결과보고 : 예조에 합격자의 순위와 합격자와 가족사항을 보고

- 보고내용 :유학 이원식(李元식)30세, 본관-全州, 당진(唐津)거주,

父 생원 이봉진(李鳳震)

 

삼가 시취(試取)한 일을 아룁니다. 정시 문과(庭試文科)의 초시(初試)를 삼가 예조에 계하(啓下)하여 행회(行會)하신 내용에 따라, 공주목(公州牧)에서 도회(都會)를 합설하고, 이달 25일에 개장(開場)한 연유는 이미 치계(馳啓)하였습니다. 신(臣)이 참시관(參試官)인 연기 현감(燕岐縣監) 이승겸(李承謙), 결성 현감(結城縣監) 권명규(權命奎)와 함께 입회하여 시취(試取)한 뒤에, 입격(入格)한 유생(儒生)들의 성명, 나이, 본관, 거주지 및 아버지의 직명(職名)을 일일이 뒤에 개록(開錄)하였으며, 입문(入門)한 수효와 수권(收券)한 수효도 아울러 뒤에 기록하여 치계합니다.

 

다음

1등(等) 3인 —생략--/ 2등 7인—생략--/

3등 20인

--생략 --

진사 김정현(金定鉉) 48세. 본관 광산(光山). 연산(連山) 거주. 부 통훈대부 행 창평 현령 겸 남원 진관 병마절제도위(行昌平縣令兼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 김재웅(金在熊).

유학 윤자정(尹滋綎) 50세. 본관 파평. 신창 거주. 부 학생 윤종진(尹鍾鎭).

<b>유학 이원식</b><b>(</b><b>李元植</b><b>) 30</b><b>세</b><b>. </b><b>본관 전주</b><b>. </b><b>당진</b><b>(</b><b>唐津</b><b>) </b><b>거주</b><b>. </b><b>부 생원 이봉진</b><b>(</b><b>李鳳震</b><b>).</b>

유학 윤재철(尹載哲) 66세. 본관 칠원(七原). 정산 거주. 부 학생 윤광국(尹光國).

유학 이종림(李鍾林) 31세. 본관 전주. 충주 거주. 부 학생 이인영(李仁榮).

입문인(入門人) 1405인. 수권(收券) 1208장(張). 원(原)

 

<b>나가는 말</b>

1895년 1월 7일 프랑스공사 서리 르페브르는 외무대신 김윤식에게 정부가 선교사를 보호하지 못해 입은 피해이므로 피해액을 보상하도록 요구하는 공문을 띄웠다. 프랑스공사와 외무대신 사이에 서너 차례 공문이 오가다가 외무대신은 보두네 신부가 입은 손실에 다소나마 쓰라고 顧恤金 명목으로 1895년 7월 18일 프랑스공사에게 300원을 주어 피해보상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청국군으로부터 살해된 조조 신부 보상문제는 북경주재 프랑스공사와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나섰다. 그래서 배상금으로 30,000만 프랑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았다. 이 배상금은 조조 신부 유족들에게 지불되었다.

 

‘동학(東學)’이라는 이름 자체가 ‘서학(西學=천주교)’에 대항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동학군의 폐정 개혁안 중에는 외세의 침입에 대한 저항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동학군들은 천주교에 강한 반감(反感)을 품고 성당과 천주교 신자들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신자들은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였으며, 간양골과 양촌 본당 모두 파괴되고, 탈취당했는데, 파스키에 신부의 1894년 보고 자료를 통해 당시 ‘간양골에서 가져갔거나 파괴된 물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table>
<tbody>
<tr>
<td><b>항목</b></td>
<td><b>금액</b></td>
<td colspan="2"><b>항목</b></td>
<td><b>금액</b></td>
</tr>
<tr>
<td>미사경본 1 (금박 제본)</td>
<td>11.11불</td>
<td colspan="2">적포도주 70병</td>
<td>13불</td>
</tr>
<tr>
<td>감실 1 (약 20~25프랑)</td>
<td>5불</td>
<td colspan="2">큰 조선 가구 1</td>
<td>220냥</td>
</tr>
<tr>
<td>제대 융단 1</td>
<td>7불</td>
<td colspan="2">참기름 (10병에 16냥)</td>
<td>160냥</td>
</tr>
<tr>
<td>8피트짜리 영국제 쿠션(융단) 1</td>
<td>6불</td>
<td colspan="2">관기와 기타 기구들</td>
<td>20냥</td>
</tr>
<tr>
<td>색 돗자리 4(경리부에서 준 것)</td>
<td>4불</td>
<td colspan="2">식기류와 취사 도구</td>
<td>100냥</td>
</tr>
<tr>
<td>기타 돗자리 (대략)</td>
<td>3불</td>
<td colspan="2">조선 의류</td>
<td>100냥</td>
</tr>
<tr>
<td>제대</td>
<td>10불</td>
<td colspan="2">모기장 (4불)</td>
<td>80냥</td>
</tr>
<tr>
<td>문</td>
<td>4불</td>
<td><b>합 계</b></td>
<td colspan="2">680냥, 90.31불</td>
</tr>
</tbody>
</table>
예산의 향토사학자 박성묵의 &lt;간양리 동학군 후손 구술 조사 자료&gt;를 살펴보면 왜 간양골 본당이 동학 농민군에게 그렇게 처참하게 습격을 당했는지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원래 간양골의 입구에 해당하는 현재의 간양리 마을에 밀양 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들 대부분이 동학에 귀의하였고 동학의 중간 책임자인 접주(接主)가 있을 정도로 세력이 강하였다. 이들과 간양골 본당에 드나드는 천주교 신자들과 평소에도 마찰이 있었고, 이러한 불편한 관계가 동학농민혁명 때 불상사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뮈텔 주교에게 보낸 파스키에 신부의 1891년 5월 17일자 서한을 통해서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조선정부는 1895년 1월 27일 프랑스공사관으로부터 간양골과 양촌본당이 동학군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피해가 발생한 것에 대한 상황을 접수하고 즉시 충청도관찰사에게 덕산(양촌 본당)과 천안(간양골 본당) 두 관장으로 하여금 해당 동학도들을 체포하고 그들로 하여금 피해액 전액에 대하여 변제조치를 요구하였다. 피해 내역으로는 덕산(양촌)은 선교사 공관 건물 1동 반파 등 6∽7천냥이며, 천안(간양골)은 선교사 공관 건물 1동 반파와 서적 집물 등 약4〜5천냥의 피해액을 제시하고 있다.

1895년 3월 11일 충청남도관찰사는 정부에 보고하면서 교민 등이 잃어버린 물건은 증거가 없는 까닭에 조사가 어렵다고 보고를 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이 일본의 지원군과 조선정부의 경군에게 진압되고 동학농민혁명군의 우두머리가 체포되어 피해액에 대한 청구로 간양골 집수선비로 750냥의 일부 금액을 변제받았다

파스키에 신부와 퀴를리에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피해 규모와 피해금액을 정확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정부 공식적인 문서에는 구체적인 피해상황을 알 수 있도록 기록하였다. 당시 간양골(干陽洞)은 신창현(新昌縣) 관할구역이나 천안(天安)의 월경지(越境地)로 천안군수가 행정처분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동학농민혁명군의 해당 범인 체포와 처분에 대해 의정부와 충청관찰사가 지시하고 있다.

발신자 議政府

수신자 忠淸監司

발신일 乙未正月二十七日 (1895년 01월27일(음))

 

關錦伯

相考事。 照得, 在今月二十六日, 接到法館來函內開, 忠淸道德山陽村, 有法國敎師住館一座, 向遭土匪之擾, 其住館半爲毁撤, 所失物件價値, 計銅錢六七千兩, 於天安干陽洞地, 亦有法敎師住館一座, 半被毁撤, 所失書冊什物價値, 略爲四五千兩, 請飭忠淸監司, 詗捕該犯, 嚴行訊究, 竝將所失物件, 一一推給爲希等因。 准此査, 匪類之滋事敎堂, 已屬過境, 有難査覈, 摘出該犯, 此案係是外人必爭之事也。 不可因循掩過, 仰貴觀察使, 嚴飭該兩地方官, 覈明滋事之顚末, 務期拿獲該犯, 徵淸所失價値, 俾行辦結, 先將本事, 綜詳迅報, 以便函復宜當者。
<table>
<tbody>
<tr>
<td colspan="2"></td>
</tr>
<tr>
<td colspan="2"><b>1895.1.27. </b><b>忠淸道 關草 </b><b>0003</b><b>권 규장각원문 </b><b>18070</b></td>
</tr>
<tr>
<td></td>
<td></td>
</tr>
<tr>
<td><b>18</b><b>세기 대동여지도</b><b>(</b><b>신창현</b><b>) &lt;</b><b>천안 월경지</b><b>&gt;</b></td>
<td><b>충청도관초</b><b>(1893.6</b><b>〜</b><b>1895.8)</b></td>
</tr>
</tbody>
</table>
<b>&lt;</b><b>번역문</b><b>&gt;</b>

서로 비교하며 참고하여 보건대 1895년1월26일 프랑스공사관으로부터 보내온 공문을 열어보니 충청도 덕산(양촌)에 있는 프랑스선교사(퀴릴리에)가 거주하는 건물1동이 동학란으로 그 건물이 반파되었고 소실된 물건의 가치가 동전6∽7천냥이며, 천안(간양골)에 있는 또한 프랑스선교사(파스키에)가 거주하는 건물1동도 반파되었으며 소실 서적과 집물 등의 피해액이 약 4∽5천냥인바, 충청감사에 지시하니 염탐하여 범인을 체포하고 엄히 심문하여 두 지역에서 소실된 모든 것을 일일이 찾아주도록 하고 이에 준하여 동학도들이 교회에서 자행한 일들을 자세히 조사 할 것이며 해당지역은 어려움이 있어도 자세히 조사하고 범인을 찾아내기 바란다. 본 사안은 외국인과 다툼이 관계되는 사건인바, 머뭇거리고 숨김없이 귀 관찰사는 명령을 받들어 해당관장에게 신칙하여 그 전말을 자세히 밝히고 반드시 해당 범인을 체포하여 손실가액을 청구하고 우선 장차 본 사건을 상세하고 치밀하게 처결하고 신속하게 문서로써 보고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양촌의 퀴를리에 신부는 1895년 7월 10일 보고서에서 이렇게 보고하였다.

“주교님. 마침내 공소가 끝났습니다. 옛날 거처로 돌아온 길인데, 제가 이곳에서 공소를 치룬 2월 이후 아주 변한 것을 보고 기뻤습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비참한 상태였으니, 문도, 마루도, 담장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파손되었던 것이 복구되고, 없던 것이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또 문간에 대문이 세워졌는데, 이를 위해 재료를 모았었습니다(목수도 얼마 동안 일을 했음). 부역도 3/1이 더 확장되었습니다. 수리비는 생각보다 더 들었습니다. 그것은 <b>당오</b><b>(</b><b>當五</b><b>)</b><b>로 거의 만 냥에 달하는데</b><b>, </b><b>그것은 옛 폭도들이 본의 아니게 준 것입니다</b>. 그렇게 해야만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덕산(德山) 현감이 구 회장에게 전권을 위임했기 때문에 회장은 그의 임무를 아주 훌륭히 해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 매일 저녁 돈을 빼내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간양골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천주께 감사합니다. 일이 이처럼 잘 해결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은 주님이시고,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던 덕산 현감의 마음을 돌린 것도 그분이십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그분의 덕분입니다.”

 

1895년 10월 5일 드비즈 신부가 공세리에서 뮈텔 주교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동학도들로부터 배상받은 금액이 나온다. “다른 소식은 동학도들로부터 간양골 집의 수리를 위해 750냥을 받아 가지고 있습니다. 주교님께서 그 돈의 용도를 정해 주실 때를 기다리면서 우선 저는 그 돈을 공세지의 누추한 저의 집을 수리하는 데 썼습니다. 저는 그들이 또 돈을 받게 될지 모릅니다.”

 

내포의 천주교는 실패한 동학동민혁명군으로부터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피해보상을 받았다. 그러나 간양골 성당은 파괴가 되었고, 파스키에 신부는 정신적인 충격과 나약해진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요양을 떠나게 되고, 잠시 간양골 본당은 본당신부가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파스키에 신부의 후임으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공세리로 자리를 옮겨 사목을 이어 나가게 된다. 조선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실패하고 배상의 의무까지 부여받으며, 살아남기 위해 천주교의 그늘로 들어오기도 했다. 천주교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살아남기 위해 천주교의 그늘로 숨어들어 왔다.

 

동학농민혁명(1894년)은 조선 후기 농민들이 부패한 정치체제와 외세에 반발하여 일으킨 혁명이다. 이 혁명은 조선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제기하고, 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였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가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이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군은 천주교가 서양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를 외세와 연관지어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타도의 대상으로 여겼다. 천주교는 박해를 받으면서도 사회적 평등과 인권을 강조했다. 중요한 것은 동학농민혁명과 천주교가 직접적인 협력이나 교류, 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동학과 천주교회의 관계를 바라보면서 천주교가 동학농민군을 폭도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민중을 위해 봉기한 혁명군으로 바라보면서 그들과 대화하고, 천주교가 실현하고자 하는 세상이 농민들과 가난한 이들이 원하는 삶임을 인식시켰다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천주교가 동학농민혁명을 민중해방세력으로 바라봤다면, 천주교와 동학 간의 연대 가능성이 높아졌을 것이다. 천주교가 유학으로부터 철저한 배척을 받은 것을 기억하면서 동학과 천주교의 대화가 종교간의 관용과 협력을 이루었다면 사회적 통합을 통해 한국 사회에 종교적 다양성과 관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억압받는 농민들과 가난한 이들에 의해 파괴된 성당이라면 내포의 교회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이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고, 민중의 생각을 인식하지 못했고 그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이며, 위기 상황을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은 여러 변화 과정을 거쳐 일제강점기에는 천도교로 발전했다. 천도교는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에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1919년 3.1운동에서 천도교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독립운동과 민중 계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반면에, 천주교는 일제강점기 동안 여러 친일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는 천주교가 일제의 지배에 순응하고,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천주교는 병인박해까지 무수한 박해를 겪어왔기 때문에 교회의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안정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곳이다. 교회는 높은 자리에서 민중을 내려다보는 존재가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민중을 섬기며 올려다보아야 한다. 정치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불의에 맞서 싸우는 민중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존재이어야 한다. 이 땅이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명동성당에 모여 도움을 받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외쳤던 것처럼, 교회는 억압받는 민중이 자신들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동학농민혁명군에 의해 교회가 파괴되었던 것처럼 오늘을 살아가는 민중에게도 오해당하고 외면당하게 될 것이다.]]></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9:07:09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셋. 내포지역의 무고와 작폐와 투탁 사건,안익중(安益重)을 천주교 신자로 무고(誣告)한 병인박해 사건, 1902년 금사리(金寺里)성당 선교사(공베르 줄리앙) 작폐 사건]]></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27]]></link>
			<description><![CDATA[<b>셋</b><b>. </b><b>내포지역의 무고와 작폐와 투탁 사건</b>

박수환

<b>Ⅰ</b><b>. </b><b>안익중</b><b>(</b><b>安益重</b><b>)</b><b>을 천주교 신자로 무고</b><b>(</b><b>誣告</b><b>)</b><b>한 병인박해 사건</b> 80
<ol>
 	<li>들어가면서 80</li>
 	<li>사건의 발생 80</li>
 	<li>안익중(安益重)의 숙모 황씨미망인(黃氏未亡人) 구명청원 81</li>
 	<li>청원에 대한 답변 89</li>
 	<li>좌포도청의 심문결과 처분 89</li>
 	<li>마치면서 90</li>
</ol>
<b>Ⅱ</b><b>.1902</b><b>년 금사리</b><b>(</b><b>金寺里</b><b>)</b><b>성당 선교사</b><b>(</b><b>공베르 줄리앙</b><b>) </b><b>작폐 사건</b> 91
<ol>
 	<li>들어가면서 91</li>
 	<li>작폐사건 발생 경위 91</li>
 	<li>프랑스공사관의 선교사 작폐행위 금지요구에 대한 회신 92</li>
 	<li>마무리하며 93</li>
</ol>
 

<b>Ⅰ</b><b>. </b><b>안익중</b><b>(</b><b>安益重</b><b>)</b><b>을 천주교 신자로 무고</b><b>(</b><b>誣告</b><b>)</b><b>한 병인박해 사건</b>
<ol>
 	<li><b> </b><b>들어가면서 </b></li>
</ol>
천주교는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를 받으면서도 복음선포를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신자가 박해 시기에 순교하였는데, 그 중에 무고하게 처형된 희생자도 있었다. 충남 부여군 은산면 나령리(옛 부여현 방생면 조령리)에서 발생한 안익중(安益重)의 개인적인 감정과 금전적인 토색 목적을 두고 무고한 양민을 천주교 신자로 신고하여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적극적인 무고함을 청원하면서 무고가 밝혀져 석방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ol>
 	<li><b> </b><b>사건의 발생</b></li>
</ol>
사건의 발생은 1867년 3월에 부여현 방생동면(方生洞面) 나마리(羅馬里-현 은산면 나령리)에 농사를 짓고 살고 있던 안익중(安益重 당시29세)은 밤7〜9시경에 경포(京捕:한양포졸) 두 사람이 집안으로 들이닥쳐 천주교를 믿고 있는 교인이라며 결박하고 무수히 구타하며 부여현의 옥에 가두고 사실을 자복하라며 악형을 가하였지만 끝내 무고함을 주장하였다. 몇 차례 형벌을 가하여 목숨이 경각에 이르렀는데, 마지막으로 조사를 하며 “한 번만 했다고 하면 너를 살려주마”라고 허위자백을 강요하기에 이르니 안익중(安益重)은 장(杖-몽둥이)의 형벌을 이기지 못하여 정신이 혼미한 중에 천주교를 믿었다고 허위자백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양(서울) 좌포도청으로 이관되어 다시 사실 여부를 조사하게 되었다.

 

무고로 인하여 죄인이 된 안익중(安益重)은 1867년 4월 13일자 좌포도청(左捕盜廳)에서 사실 여부를 다시 심문하였으나 안익중(安益重)은 혹독한 장(杖)의 형벌을 견딜 수 없어서 거짓 자백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이로 인하여 석방되었다.

 
<ol>
 	<li><b> </b><b>안익중</b><b>(</b><b>安益重</b><b>)</b><b>의 숙모 황씨미망인</b><b>(</b><b>黃氏未亡人</b><b>) </b><b>구명청원</b></li>
</ol>
안익중의 숙모 황씨 미망인은 조카의 무고함을 암행어사와 포도청에 3차례에 걸쳐 진정서를 제출하여 무고함을 청원하였다. 청원의 내용을 통하여 보면, 무고함을 항변하고 있다. 안익중의 집안은 일찍부터 8대까지 독자로 살아오면서 가족이 주변에 없었다. 오직 숙부마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또한 부친마저 돌아가셨기에 나이 어린 시절 숙모께서 자식처럼 길러주었다. 식구라고는 안익중과 숙모 황씨 미망인 둘 뿐이고 생계도 어려워 서로의지 하면서 살았다. 사건의 발단은 안익중은 오랫동안 그곳에 있는 조상을 모신선산을 지키며 살다가 생활이 어려워 청양에서 잠시 기거를 하였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선산에 다른 사람이 묘역에 투장(偸葬-가까이 묘씀)하였기에 불법 투장한 묘지를 이장을 하겠다는 다짐하는 문서인 수표(手票)를 받아내고 이장까지 하며 선산을 지키며 살았다며, 이러한 무고는 지난번 타인의 묘지 투장으로 인한 감정과 무고하게 신고한 자가 포교들과 결탁하여 돈을 토색하려고 한 짓이니 철저히 조사하여 무고함을 밝혀 줄 것을 천만번 울며 청원하였다.

 

<b>부여 방새면</b><b> 남계리에 사는 고</b><b>(</b><b>故</b><b>) </b><b>학생 안경신의 처 황씨 미망인 원정</b>

 

황공하오나 살펴주십시오. 엎드려 생각건대, 미망인이 일찍 가장과 이별하고, 또 일찍 부모를 잃은 조카 하나나마 혈혈단신 의지할 곳 없는 것과 함께 모진 목숨 죽지 못하여 근근히 연명하며 지냈습니다. 천행(天幸)으로 입장(入葬)하고 누대 선산을 지키고 있다가 땅을 지키고 살기 어려워 청양 땅에 잠시 우거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고향 세거지로 들어와 사는데 생계가 속수무책이라 스스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미망인의 가여운 정경을 자세히 아룁니다. 조카를 키울 때 어려서 혹 앓아 누워 있을 때에는 밤낮으로 붙들고 기절한 것이 몇 번인지 알지 못할 정도이고, 혹 어디를 보내고 늦게 오면 제가 문에 서서 기다리다가 오는 모양을 보면 반가이 붙들면서 서로 의지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저의 조카는 <b>8</b><b>대 독자</b>로 가까운 친척 하나 없고 먼 친족 일가도 없고, 다만 저희 숙모와 조카 뿐이지만 모자간이나 다름없습니다.

저의 시아버지의 효행을 서울과 지방 인근 고을 사람들이 모르는 이 없고, 지난해 가을에 상언을 올려 입계(入啓)되었는데 본도 감영에서 장계까지 하여 효성을 포양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 묘를 누대 선산 아래에 옮겨 계장(繼葬)했습니다. 생계가 본래 매우 가난하여 지금까지 목숨을 간신히 지탱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지난밤 초경(오후 7시~9시)에 경포(京捕)라고 칭하고 안뜰에 돌입하여 불쌍하게 키워낸 조카를 잡아내 결박하고 무수히 구타하여 유혈이 낭자했습니다. 거울 속 같이 투명한 인생을 <b>억울하게 사학</b><b>(</b><b>邪學</b><b>)</b><b>꾼을 만들어 부여 옥에 가두고</b><b>, </b><b>또 악형을 무겁게 가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b>.

저는 간담이 떨리고 청천백일 아래에 칼을 물고 땅에 엎어져 죽고 싶었지만, 조카의 억울하고 죄 없는 오명을 벗기지 못하고 억울한 목숨이 놈들 손에 죽으면 원수를 갚을 사람이 없기에, 밝게 살피시는 수의사도께 이 원정을 올리니 세세히 살펴주십시오. 남계리 근방에 사는 놈들이 포교 놈에게 억울한 일을 사주한 놈이 있을 것이니 포교 놈과 사주한 놈을 서로 대질하여 그 놈의 입에서 과연 사학(邪學)을 믿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이 때문에 목숨이 죽는다고 해도 지극히 원통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니 포교 놈에게 확실한 증거 없이 평민을 침학한 죄를 엄형하여 엄히 다스리시고, 이놈들을 바로 타살하라고 지시하시고, 억울하고 죄 없는 제 조카를 살려주십시오. <b>지난달에 포교 무리가 들어와 이 양반이 죄가 없다 하고 그저 말없이 나갔는데</b><b>,</b> <b>이놈들이 돈을 토색하느라고 </b>이 <b>학정을 </b><b>8</b><b>대 독자에게 몹쓸 형벌을 행했습니다</b>. 죄가 없이 죽으면 8대 독자가 자식이 없어 후사가 끊기게 되니 저의 불쌍한 사정을 밝게 살피셔서 옥석을 분간하시기 천번 만번 울며 바랍니다.

수의사도님 처분 정묘년 3월 일

 

<b>1915</b><b>년도 지도 부여군 은산면 나령리</b><b>(</b><b>옛</b><b>, </b><b>방생면 조령리</b><b>,</b><b>외나리</b><b>,</b><b>내나리</b><b>,</b><b>온탑리</b><b>)</b>

<b>&lt;</b><b>일본 육지측량부 제작</b><b>&gt;</b>

<b>扶餘郡 恩山面 羅嶺里</b><b>(</b><b>옛 부여군 방생면 조령리</b><b>, </b><b>외나마리</b><b>, </b><b>내나마리 지역</b><b>)</b>

 

<b>부여 방생동면 남계리</b><b>에 사는 고 학생 안경신의 처 미망인 황 과부 원정</b>

이 삼가 말씀드리는 원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일찍 가장이 세상을 떠난 뒤에 아들이든 딸이든 일점혈육이 없고 다만 조카 하나가 있어 모진 목숨 죽지 못했습니다. 조카는 4살에 그의 부친이 별세하고 8살에 그의 모친마저 별세했습니다. 저의 외로운 신세야 세상에 어디 짝할 데가 있겠습니까? 어린 조카 하나 키우면서 첩첩 설움을 잊었습니다. 8대 독자로 전해지는 후손이 이것 하나요, 내외 친척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천행(天幸)으로 입장(入葬)하여 본래 집안 내력이 한미하지만 누대 선산을 지키면서 6, 7대 동안 대대로 거주했습니다. 제 시부의 효행은 본도 인근 고을의 사람들이 노소를 막

 

론하고 모두들 칭송하여 계사년 후에 효행을 정소하는 문서가 쌓여 권축(卷軸)이 되었습니다. 지난 해 가을에 상언을 올려 입계되어 위에서부터 관찰사로 하여금 포양(襃揚)하는 정문(旌門)을 내리게 하는데, 이 혈혈단신의 조카가 서울과 지방에서 증언을 얻어 반이나 거의 성사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청양 땅에서 잠시 우거할 때에 선산에 다른 사람이 투장(偸葬)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그 사람의 무덤을 파내고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며 무사히 지냈습니다. 그러자 근방 사람이 모두 안씨 가문에 드문 사람이 또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도(天道)가 밝지 못하고 조물주가 시기하여 며칠 전 밤 초경(初更)에 포교 무리라면서 안뜰에 돌입하여 시비곡직을 불문하고 제 조카를 잡아내어 결박하고 무수히 구타하여 유혈이 낭자하게 뒹굴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세상에 이러한 변괴가 어디 있겠습니까. 설사 천주학 꾼이라 하더라도 이놈의 무리가 제 눈으로 불미한 증거를 하나도 잡아낸 것이 없으면서 백옥같이 흠이 없는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놈들이 산촌에 자주 왕래하며 만만한 잔민(殘民)에게 돈을 토색하느라고 평민을 침학하는 일이 매우 심하고, 포교 무리가 양인을 체포해서는 눈을 빼어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놈에게 억울하고 죄 없는 인생이 죽게 되면 해와 달이 밝게 비추는 아래에 어찌 지극히 원통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법정에서 자세히 흑백을 분변하시려고 한다면, 포교 놈에게 모함하며 사주하여 거론한 놈이 당연히 있을 것입니다. 이놈들에게 조목조목 심문하여 서로 대질하면 흑백이 분명히 드러날 듯하오니 이대로 처결해 주십시오. 조령(朝令)으로 분부하신 것이 지엄한데도 사학(邪學)을 믿는다는 증거가 있으면 잡아 죽이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조카는 억울하고 죄가 없사오니 살려주시면 은택이 하해와 같을 것입니다. 그의 죄가 털끝만큼이라도 있으면 몹쓸 악형을 받아 목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어디다 대고 원망하겠습니까?

 

제가 참혹한 변을 보고 간담이 떨리고 기가 막혀 식음을 전폐하고 청천백일 아래에 칼을 물고 엎어져 목숨을 끊고 싶지만, 억울하고 죄없는 조카의 오명을 벗기지 못하고 죽으면 원수를 갚을 사람이 없기에 누누이 원정을 올립니다. 밝게 살피시는 법사(法司)께서 세세히 살피셔서 옥석을 분간하여 주시기를 천번 만번 울며 바랍니다.

법사님 처분

정묘년 3월 일

 

 

<b>본읍 방생동면에 사는 고 학생 안경신의 처 황씨 미망인은 원정합니다</b><b>.</b>

이 삼가 말씀드리는 원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죄 없는 조카에게 경교배(京校輩)가 몹쓸 악형을 가해 억지로 대낮에 억울한데도 <b>“</b><b>한번만 했다고 하면 너를 살려주마</b><b>”</b><b>라고 한 말에 장</b><b>(</b><b>杖</b><b>)</b><b>을 이기지 못하여 정신이 혼미한 중에 이 대답을 했습니다</b><b>.</b> 이게 어찌 진정한 사학(邪學)꾼이 되겠습니까? 또 증험할 일이 있으니, 그 조부의 효행을 사모하여 상언을 올려 입계되어 예조에서 관찰사를 시켜 머지않아 정문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한 가지 일로 본다 하더라도 진정 천주학 꾼이면 자기 조상의 효행을 어찌 포양하려고 마음이 움직였겠습니까? <b>경교배가 억지로 초사를 받을 때 제 조카 주머니 속에 있는 것이 은서로 누대 조상의 기일을 적은 것과 다른 사람 산릉에서 어느 때에 묘를 파겠다는 수표</b><b>(</b><b>手標</b><b>)</b><b>를 받은 주머니를 떼어 갔습니다</b>. 이 연고를 경교배에게 추심하여 엄히 조사하시고 관가에서 죄 없는 사정을 통촉하시어 저의 조카를 살려내어 주십시오. 특별히 하해와 같은 덕치(德治)를 내리시기를 천번 만번 울며 바랍니다.

관사 처분 정묘년 3월 일
<ol>
 	<li><b> </b><b>청원에 대한 답변</b></li>
</ol>
숙모 황씨 미망인이 1867년 3월에 수의도사(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청원한 결과 처리결과의 회신에는, 사실을 조사하여 엄하게 처리할 것, 부여관(扶餘官-부여현감)에 명하였다. 암행어사의 처분결과를 받고, 숙모는 2차로 1867년3월에 형조에 청원하였다, 1867년3월15일자 그 결과의 회신은, 죄가 포도청에 관계되니, 비록 터럭만큼의 원통함이 있더라도 분간하기 어렵다는 확실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

2차의 답변에도 구명되지 않자 1867년 3차로 형조에 청원하면서 구체적으로 무고한 사실을 청원하면서, 장(杖)형을 가하면서, 한번만 했다고 거짓자백을 강요하였고, 조카의 주머니속에 간직한 투장에 대한 파묘를 하겠다는 확약서인 수표(手票)도 포교들이 뺏어 갔다는 사실을 밝히며 무고하게 신고한 자와 경포(京捕)들과의 대질 심문을 통하여 무고함을 철저히 밝혀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 결과 형조의 답변은 16일자로, 물러가서 처분을 기다릴 것을 처분하였다.

 
<ol>
 	<li><b> </b><b>좌포도청의 심문결과 처분</b></li>
</ol>
<b>左捕廳謄錄 </b><b>&lt;</b><b>좌포청등록</b><b>&gt;</b>

<b>&lt;</b><b>청구기호 </b><b>: </b><b>奎</b><b>15145-v.1-18 </b><b>편저자 </b><b>: </b><b>捕盜廳</b><b>(</b><b>朝鮮</b><b>) </b><b>編 </b><b>/ </b><b>포도청</b><b>(</b><b>조선</b><b>) </b><b>편</b><b>&gt;</b>

<b>정묘</b><b>(1867)4</b><b>월</b><b>13</b><b>일 죄인 홍진영</b><b>(58</b><b>세</b><b>), </b><b>안익중</b><b>(29</b><b>세</b><b>), </b><b>송보비</b><b>(47</b><b>세</b><b>), </b><b>강정관</b><b>(37</b><b>세</b><b>)</b><b>는 방면한다</b><b>. </b>

--전기 생략--

<b>본인 안익중</b><b>(</b><b>安益重</b><b>)</b><b>은 본래 부여군 라마리</b><b>(</b><b>羅馬里</b><b>) </b><b>태생</b>으로 농업에 종사하였습니다. 홍산, 부여 등지에 천주교인 들이 많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뜻하지 않게 지난(3월)달11일 이씨(李氏)라는 자(者:京捕)로 하여금 체포되어 당시 그 장소에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이미 한 개라도 사학(邪學-천주교)이 몸에 붙어 있지 않습니다. 비록 몽둥이로 죽음에 있다 하더라도 전혀 알지 못하옵니다. --&lt;방송 : 석방함&gt;

 

정묘(1867) 4월13일 洪州 了(홍주소관 마침)

 
<ol>
 	<li><b> </b><b>마치면서 </b></li>
</ol>
안익중(安益重)에 대한 무고한 청원과 심문결과에서 들어난 내용이 무고함이 밝혀져 석방한다는 처분이 내려졌다. 이로써 안익중(安益重)의 경포와 결탁하여 돈을 토색질 하려한 사건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본 사건을 통하여 본 결과 병인박해 때 조정에서 천주교 신자의 체포과정에서 실적에 따라 포상을 하는 정책 때문에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지만, 그중에는 무고한 백성들이 경포와 결탁된 무리배들이 돈을 토색하려는 경향으로 처형되었을 것이다.

 

 

 

 

<b>Ⅱ</b><b>.1902</b><b>년 금사리</b><b>(</b><b>金寺里</b><b>)</b><b>성당 선교사</b><b>(</b><b>공베르 줄리앙</b><b>) </b><b>작폐 사건</b>

 
<ol>
 	<li><b> </b><b>들어가면서</b></li>
</ol>
조선에 천주교가 1784년에 전래되면서 조선정부로부터 신해박해(1791년)를 거치며 병인박해(1866년)까지 많은 천주교 신자와 선교사, 무고에 의하여 많은 양민들이 처형되었고, 1886년 프랑스와 조불통상조약을 맺고 천주교인이 신앙의 자유를 얻어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은 각 지역에 파견하고 성당을 짓고 전교활동을 하여왔다. 충청도 하부내포지역인 당시 홍산군 수양리(首陽里- 현 부여군 구룡면 소양리)에 1901년 4월27일 공주 본당에서 분리되어(공베르 줄리앙-孔安世)신부가 초대 신부로 부임하였다. 그 후 1902년11월에 금사리 성당 회장 <b>윤순경</b><b>(</b><b>尹順京</b><b>)</b>이 선교사의 위세를 이용하여 개인간의 금전관계를 해결하고자 작폐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의 작폐사건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ol>
 	<li><b> </b><b>작폐사건 발생 경위</b></li>
</ol>
<b>① </b><b>천주교 회장 윤경무</b><b>(</b><b>尹敬武</b><b>) </b><b>채무 제</b><b>3</b><b>자 변제요구</b>

1902년11월 홍산군 갈치(葛峙=高葛里, 옛 부여군 내산면 고갈리) 거주하고 있던, 현 부여군 외산면 갈산리(葛山里), 당시 金寺里 천주교 會長 <b>윤순경</b><b>(</b><b>尹順京</b><b>)</b>이 같은 마을에 살며 가까운 친척인 <b>윤경무</b><b>(</b><b>尹敬武</b><b>)</b>에게 빚 보증인으로 600량의 채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금전적 변제를 해주지 않자 임천군 북변면 원문리(현 부여군 장암면 원문리) 거주하고 있던 채무자 처남인 <b>백효기</b><b>(</b><b>白孝基</b>=白洪順 兒號)에게 매부를 대신하여 변제를 요구하였다. 처남인 <b>백효기</b><b>(</b><b>白孝基</b><b>)</b>는 채무에 대한 의무도 없고, 또한 관여할 사항이 없다며 거부하였다.

 

<b>② </b><b>백효기</b><b>(</b><b>白孝基</b><b>) </b><b>체포조 파견</b>

처남 백효기가 채무자 매부 윤경무의 채무변제를 거부하자 같은 마을에 살고 있던

<b>순동운</b><b>(</b><b>筍同云</b><b>)</b><b>과 이두성</b><b>(</b><b>李斗成</b><b>)</b>으로 하여금 체포조를 꾸리고 체포하려 하자 임천군 북변면 원문리(현 부여군 장암면 원문리) 거주하고 있던 <b>백효기</b><b>(</b><b>白孝基</b>=白洪順 兒號) 는 임천군수(林川郡守) 김익경(金益慶)에게 보고하여 신변보호 요청을 하였다.

 

<b>③ </b><b>순동운</b><b>(</b><b>筍同云</b><b>)</b><b>과 이두성</b><b>(</b><b>李斗成</b><b>) </b><b>체포와 압송</b>

보고를 접한 임천군수는 천주교 회장 윤순경(尹順京)이 보낸 범인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거주지 홍산군수에게 관련사항을 통보하고 체포한 범인 중 단순 가담한 순동운(荀同云)은 방면하고, 범인 이두성(李斗成)과 사주한 회장 윤순경(尹順京)을 압송하던 중 부여군 경계에 이르렀을 때 홍산군 수양리 금사리 성당 신자10여명이 압송하던 포졸과 범인 모두를 빼앗아 가벼렸다고 임천군수에게 보고되었다. 임천군수는 즉시 홍산군수 에게 공문을 보내 빼앗아 간 범인과 포졸 모두를 압송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후 홍산군수로부터 회신과 함께 체포조 범인 이두성(李斗成)은 이미 도피하였고 사주한 천주교 회장 윤순경(尹順京)을 임천군수 김익경(金益慶)에게 압송하였다.

 

<b>④ </b><b>공베르 줄리앙</b><b>(</b><b>공안세</b><b>-</b><b>孔安世</b><b>)</b><b>신부 임천군수 협박</b>

천주교 회장 윤순경(尹順京)이 임천군에 압송도자 금사리 성당 주임신부(공베르 줄리앙)는 신자 10여 명을 대동하고 관청에 들어와 군수에게 본 사건은 본인이 지시한 사항으로 이미 충청도관찰부에 편지를 보냈고, 회장 윤순경(尹順京)은 책임을 물어 직책을 박탈하여 향후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처리하였으며, 충청도관찰부에 회신하였니 신자인 윤순경을 데려가겠다고 주장하였다. 선교사와 싸우는 것은 외교 마찰 등 지방관으로써 어려움점이 있어 결구 내어주고 말았다.

 

<b>⑤ </b><b>충청남도 재판소의 외부대신 보고</b><b>(1903.2.2.)</b>

이러한 작폐사건에 대하여 임천군수는 1902년 11월에 충청남도 재판소장(尹相悳)에게 보고하였고 충청남도 재판소장은 1903년 2월 2일자로 외부대신에 보고하며 프랑스 공관에 본 문건을 보내고 처분지시에 대한 지령을 기다려 처리하겠다고 보고하였다.

 

 
<ol>
 	<li><b> </b><b>프랑스공사관의 선교사 작폐행위 금지요구에 대한 회신</b></li>
</ol>
1903년 3월 23일 자로 외부대신은 프랑스공사 주차대신 골랭드 플랭시(葛林德)에게 통보하며, 최근 천주교인들이 외국선교사의 세력에 기대어 불법을 자행함에 통탄스러움을 금할 길 없다며 이러한 폐단이 이후에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귀 주차대신께서 살피셔서 해당 선교사에게 속히 지시하여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1903년 3월 31일자 프랑스공사 공사관 골랭드 프랭시(葛林德)는 다음과 같이 회신하였다.

 

사건과 관련하여 긴요한 내용이 보고서에 누락되어 명확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약간의 말씀을 드리자면, 해당 선교사 공안록(孔安錄-孔安世)은 본래 교도 10여인을 데리고 관방에 직접 들어가서 윤순경(尹順敬)을 강제로 빼앗아 간 일이 없으며, 다만 해당 선교사가 군수에게 청원하였고, 윤순경이 공주 관찰부로(公州觀察府)로 압송되어 그때부터 윤순경은 공주부에 미결수로 갇혀 있었으며, 그러함에도 본 사건에 대하여 임천군수 및 홍산군수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지령을 받기 전에는 함부로 석방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내용에 대하여 귀 대신께서는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ol>
 	<li><b> </b><b>마무리하며</b></li>
</ol>
본건 사료를 통해 금사리 성당 주임신부(공베르 줄리앙)의 한국명 표기는 공안록(孔安祿)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공식적인 한국명 표기는 공안세(孔安世)로 알려져 있어 다른 이칭으로 사용하였음을 확인되었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는 조불통상수호조약에 따라 불법한 행위에 대한 처벌은 주재국 공사관으로 하여금 처리토록 하여 사실상 조선 국내법으로는 적용할 수 없어 조약내 규정을 무시한 치외법권의 부당한 행위를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경우가 있어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사건의 교안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해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외부대신과 프랑스공사관과의 조회과정에서 프랑스공사관은 사건전말을 확인하였고 현지 임천군수 및 홍산군수가 요구한 부분은 앞뒤가 맞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정부부처 간에 처리과정에서 진행과정의 정보가 미흡하였다고 할 수 있다. 어느 부서가 맞지 않는 것인지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그 당시 선교사들이 관여한 사건들을 대부분 프랑스공사관은 선교사에 대하여 철저한 보호를 하였고,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그에 따른 피해는 오직 조선 자국민(自國民)만 피해를 보았음을 알 수 있다.

 

 

 

 

<b>1903</b><b>년 금사리성당 공베르신부 천주교 작폐사건 당시 고소인 </b><b>白孝基 </b><b>거주</b>

 

<b>1917</b><b>년도 지도 부여군 외산면 갈산리 </b><b>(</b><b>옛 내산면 고갈리</b><b>)</b>]]></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9:06:0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둘. 성호학파(星湖學派)와 한국천주교 창립에 대한 고찰]]></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26]]></link>
			<description><![CDATA[<b>둘</b><b>. </b><b>성호학파</b><b>(</b><b>星湖學派</b><b>)</b><b>와 한국천주교 창립에 대한 고찰</b>

<b>박근수</b>

 

<b>Ⅰ</b><b>. </b><b>성호학파의 서학</b><b>(</b><b>西學</b><b>)</b><b>에 대한 인식</b> 20
<ol>
 	<li>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22</li>
 	<li>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 1710~1776) 24</li>
 	<li>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 1726~1785) 27</li>
 	<li>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1712~1791) 33</li>
 	<li>복암(伏菴) 이기양(李基讓, 1744∼1802) 38</li>
 	<li>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1736 ~ 1801) 41</li>
</ol>
<b>Ⅱ</b><b>. 1784</b><b>년 천주교 신앙공동체 결성</b> 48
<ol>
 	<li>이벽(李檗, 세례자 요한, 1754~1785) 48</li>
 	<li>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 52</li>
 	<li>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1) 55</li>
 	<li>이존창(李存昌, 루도비코, 1759~1801) 60</li>
</ol>
<b>Ⅲ</b><b>. </b><b>이존창의 체포와 석방</b><b>·</b><b>처형에 대한 </b><b>刑政</b> 65
<ol>
 	<li>이존창의 1786년 체포와 석방 65</li>
 	<li>1791년 체포와 석방(신해박해) 66</li>
 	<li>1795년 체포와 연금(을묘박해) 68</li>
 	<li>신유박해(1801) 네 번째 체포와 처형 74</li>
</ol>
 

 

<b>Ⅰ</b><b>. </b><b>성호학파의 서학</b><b>(</b><b>西學</b><b>)</b><b>에 대한 인식</b>

 

18세기 조선의 가장 큰 문제는 농민들의 토지 이탈이었다. 이것은 이앙법(移秧法)의 실시로 농업 생산력이 증가하고 광작(廣作)이라는 농업경영으로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이 줄어들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18세기에 이르면 농민들은 냇물을 막아 만드는 보(洑)와 같은 수리 시설을 개발하여 이앙법을 넓게 시행할 수 있었다. 이앙법의 시행으로 농민들이 경작할 수 있는 토지의 양이 늘어남에 따라 지주들은 토지를 직접 경작하게 되었고, 소작농들은 소작지를 잃고 토지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었다.

숙종 때부터 많은 유민이 발생하였는데. 숙종 43년에는 충청도에 약 10만 명의 유민이 발생하였고, 영조 9년에는 경상도에서 17만 명의 유민이 발생하였다. 이해에 기근이 들어 40만 명이 굶주리고 굶어 죽은 사람도 1만 3,000명이 생겨났다. 호남에도 기근이 들어 50만 명이 굶주리게 되었다. 조선의 지배계층은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성리학적 질서를 강화하려 하였다. 천주교는 말할 것도 없고 유학의 일파인 양명학도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현실을 개혁해야 하는 상황에서 사회는 성리학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이 필요하였고, 이러한 필요에 따라 실학이 등장하였다. 당시 실학자들은 명분과 형식만을 중요시하는 실속 없고 공허한 주자학으로써는 급변해 가는 현실을 타개해 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근본유학(根本儒學)의 입장에서 다시 유교를 인식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독선적이고 폐쇄적이고 획일적인 주자학 지상주의 사회에서 주자학 이외 학문에 관심을 둔다는 그 자체가 반동이었다. 실학자들은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농민들의 이농 현상을 막아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토지제도와 농업경영을 개선하고자 하였다. 유형원은 토지를 국가가 공유하고 농민들에게 경작지를 분배하는 균전제(均田制)를, 박지원은 가구당 토지 면적을 국가가 정하고 그 이상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법(限田法)을 주장하였다. 성리학에서는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하였지만 18세기에는 인구의 증가와 상업활동이 활발하였다. 실학자들은 상인의 관직 진출을 막는 법이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양반 중심의 사회도 개혁하고자 하였다.

유형원과 홍대용은 누구에게나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고 신분이 아닌 개인의 능력에 따라 관리를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문벌을 폐지하고 학교 제도와 관리임용제도의 개선을 추진하였다. 이익은 과거제가 개인의 재주만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것이기에 한계가 있다며, 재주와 덕행을 겸하여 인재를 선발하는 제도인 천거제(薦擧制)를 더불어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청이 지배하는 중국을 한족의 중화 문명과 동일시하고, 청을 세운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여기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홍대용은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공거제(貢擧制)를 주장하며, 청의 문물과 서양 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북학론(北學論)을 제시하였다. 실학자들의 새로운 시도는 현실 정치에서 수용되지 못하였지만 그들의 사상과 개혁에 대한 의지는 조선 후기 사회변화를 이루어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b>1. </b><b>성호</b><b>(</b><b>星湖</b><b>) </b><b>이익</b><b>(</b><b>李瀷</b><b>, 1681~1763)</b>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평안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성호는 호이고, 사설(僿說)은 자질구레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부친 이하진은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숙청되었을 때 대사간에서 진주목사로 좌천된 뒤 운산 유배지에서 1682년 세상을 떠났다. 성호의 첫 스승은 20년의 터울의 형 이잠이다.

성호는 선비라면 당연히 가난하게 사는 것을 법도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는 “나물을 씹을 수 있다면 못 할 일이 없다”라는 말의 뜻을 좋아하였다. 일상생활 중에서 먼저 자신의 사욕을 이기는 공부를 오래 해 나가 습관으로 만든다면 본성과 같이 편안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 같이 잘 살 수 없는 세상이라면 선비는 가난을 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선비가 가난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성호는 유형원과는 인척 관계이며, 이수광 가문과는 혼인을 통해 교류가 이어졌다. 『성호사설』은 백과사전적인 면에서는 『지봉유설』과 유사하며, 사회에 대한 비판과 개혁론은 반계수록과 유사하다.

조선 시대에는 선비들이 주자의 말은 하늘처럼 받들었다. 주자의 말에 토를 달거나 문제를 제기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윤휴와 이하진이 논어의 주를 읽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윤휴는 사사(1680)시키고 이하진은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1681). 성호는 성현이 후세에 바라는 건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의심스러운 일을 밝혀서 세상에 알리는 일이라고 보았다. 의심하고 의심해 자득(自得)이 참된 공부라고 보았다. 의심을 하는 것은 의심을 없애려는 방법이라고 하였다. 성호는 주자, 공자, 그리고 남인의 정신적 지주인 이황까지도 의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성호는 궁경치용을 주장한 경학자이지만,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한역과 서학서를 읽고 새로운 서구의 종교와 과학에 대하여 적극적 수용의 자세를 취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서구의 과학사상에 대해서는 대체로 받아 들었지만, 천주교 수용 여부에 따라서 신서파와 공서파로 나누었다.

성호의 서학을 평가하는 태도는 복합적인 경향을 나타낸다. 하빈 신후담(愼後聃)과의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호는 서학에 대체로 호의적이었으며, 중국 예수회가 소개한 천문역법과 기술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반면, 서양의 중천설과 주자의 천동설 모델 중 결국에는 후자를 진리로 인정했던 경우처럼, 성호는 서로 다른 문명의 지식이 경합할 때 주자의 권위에 기초한 전통 지식에 손을 들어주었다. 또한 성호는 삼혼설, 뇌낭설, 칠극, 교우론 등 서학의 인간학을 비롯하여 천문역법이나 기술에는 대체로 우호적인 시선을 보냈지만, 천당 지옥설이나 예수 강생설, 기적과 같은 주요 교리는 거부하였다. 성호의 교리 비판은 ｢발천주실의｣에 실려 있는데, 그 전반부에서는 ‘천주교(天主敎)’가 불교의 허구를 배척하면서 그와 유사한 주장으로 귀결되고 있다고 보았다.
<ol>
 	<li><b> </b><b>정산</b><b>(</b><b>貞山</b><b>) </b><b>이병휴</b><b>(</b><b>李秉休</b><b>, 1710~1776)</b></li>
</ol>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 1710∼1776)는 성호학파의 종장인 이익의 형인 이침(1671∼1713)의 셋째 아들로 충청도 덕산현 장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 부친을 여의고 10세 때 모친을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 13세 때에 이잠(1660∼1706)의 양자로 들어갔다. 13∼14세 무렵부터는 이익의 문하에서 이용휴와 이맹휴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그림 1 성호 이익의 가계도</td>
</tr>
</tbody>
</table>
성호학파의 제2세대의 대표적 인물로 윤동규·신후담·안정복과 함께 이병휴가 거론된다. 이병휴는 이익으로부터 가학을 이어받아 권철신·이기양 등 제3세대 학자들에게 학맥을 전수하였다. 그는 이익의 학문 중에서도 진보적인 면을 계승 발전시키며, 주자학은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것이므로 당연히 후대에 그것을 변론해 완성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병휴의 유교 사상은 양명학에 입각해 있었지만 그러한 사실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정주(程朱)의 설을 끌어다가 자신의 논거로 삼기도 하였다. 동료 학자들도 경전에 대한 이병휴의 자의적 해석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의심하거나 배척하지는 않았다. 양명학을 수용하게 된 것은 이익의 실학사상이 본래 내포하고 있는 이론적 모순의 해소와 관련이 있다.

이익—이병휴—권철신·이기양으로 이어지는 ‘치의(致疑)를 통한 자득(自得) 위주의 학문관’과 신의(新義)를 추구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선유(先儒)의 가르침을 고수하여 잃지 않는 것”을 중시하는 윤동규·안정복 계열과 학문관에서 차이점이 나타난다. 이병휴는 성호학파의 종장인 이익의 진보적 학문관을 온전히 계승한 인물로, 이익의 사후에 그의 학문이 가문의 후손들과 성호학파의 후학들에게 이어지도록 하는 가교역할을 하였다. 이병휴는 당대 조선 학술의 문제점으로 “도학의 이름에 가탁하여 사사로운 이욕(利慾)을 이루고자 하며, 시비(是非)를 뒤섞어 어지럽히고 거리낌 없이 함부로 말하는 폐단”이라면,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사상 풍토를 지적하였다. 그는 “의리(義理)란 천하의 공물(公物)”이라고 단언하면서 기존의 경전 주석에 이론을 제기하였다.

1747년 이병휴는 고향인 덕산 장천리로 돌아와 학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성호 타계 후 이 지역 중심으로 성호학파를 전개해 나갔다. 문하생 이기양(李基讓)은 1764년경부터 이병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이병휴의 영향으로 양명학을 정면으로 수용하였다. 양명학은 이기양과 권철신에 의해 한정운(韓鼎運)·이가환(李家煥)·권일신(權日身)의 문도인 정약전(丁若銓)·이벽(李檗)·이승훈(李承薰)에게 학문을 전수하며 발전시켰다.

이익의 실학사상을 체계화해 덕을 이루는 학문을 선진 유학과 같이 실천 위주로 전환하고, 사실 세계의 이치에 관한 적극적인 탐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이병휴의 실학적인 양명학을 그들이 계승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1768년 무렵에는 경기도 양근의 권철신이 이병휴에게 처음으로 서한을 보내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병휴는 젊은 학자들 가운데서 촉망되는 인물로 이기양을 지목하고 권철신에게 교류를 권하였다. 권철신의 제자인 이벽도 1774년에 덕산 장천으로 이병휴를 방문한 적이 있으며, 이병휴가 사망하자 제문을 지어 그를 추모하였다. 1776년 이병휴 사망 후 성호학파는 안정복 제자 중심으로 순암계, 권철신의 녹암계가 형성되어 분파되었다. 한편, 이병휴 사후에 성호학파의 학통을 이어받은 가계의 종손 이철환(李煥丸, 1722~1779)에 대해서 『송담우록』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이철환은 자가 길보(吉甫)로 성호의 종손(從孫)이다. 호는 예헌(例軒)이다.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났고, 문사(文詞)에 관한 얘기를 잘하였다. 과거 시험 공부하는 것은 즐기지 않았지만, 기이한 글과 궁벽한 책에 두루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웅장한 말로 언변이 뛰어나 장하기가 마치 큰 강물과 같았다.… 그의 말에는 서양 사람 마태오 리치의 주장이 많았다. … 그저 당세에 박학한 사람 중에 그보다 나은 이가 없을 것으로만 여겼다. … 나무 심는 법 같은 것도 모두 서양의 방법을 써서 그 법이 기묘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를 본 자들이 또한 기이하게 여겼다.

 

이철환은 사촌 이창환·이삼환(1729∼1813)과 함께 종조할아버지인 성호에게 입문하여 안산에서 학문을 익히다가 덕산으로 돌아와 평생 은거하였다. 이철환은 작은 생물이나 초목이라고 해서 쉽게 넘기지 않고 일일이 연구하고 고찰하며 실학이 가지는 과학 정신으로 발전시켰다. 아들 이재휘와 함께 사물 어휘를 연구한 『물보(物譜)』를 저술하였다. 초목류 등은 향촌에서 의방에 실제 대입하며 질병을 퇴치하는 데 활용하였다. 시·서·화에도 능통하였으며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등과 교류하였다. 또한 이철환의 서학에 대해 『송담유록』에서 이가환을 두고 이렇게 적었다.

 

이가환은 벼슬에 오르기 전부터 서학(西學)을 몹시 믿었으니, 이철환이 전수한 것으로 참으로 난형난제라 할 것이다. 남몰래 서로 배워 익히면서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꾸몄다. 그의 무리인 이벽과 이기양·권일신·이승훈 등은 바로 대대로 벼슬한 집안인데다 얼마간 재예(才藝)를 지닌 자들이었다. 남몰래 저들끼리 교분을 맺어 사학(邪學)에 매진하면서 벗들을 부르고 부류를 끌어모아 제일 먼저 서학에 물들었다. 그런 말들이 크게 퍼지자 식견 있는 이들이 남몰래 탄식하였다.

 

이병휴의 학문적 가르침을 받은 성호학파 젊은 학자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은 권철신·이기양이다. 이익과 이병휴 사후에 후손은 서학의 수용 입장이 양분된 것으로 보인다.
<ol>
 	<li><b> </b><b>농은</b><b>(</b><b>隴隱</b><b>) </b><b>홍유한</b><b>(</b>洪儒漢, <b>1726~1785)</b></li>
</ol>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r>
<td colspan="2">그림 2 홍유한 가계도 및 만가보: 9책 96면</td>
</tr>
</tbody>
</table>
농은(隴隱)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은 풍산(豐山) 홍씨(洪氏)로서 1726년(영조 2)년에 서울의 아현동에서 홍창보(洪昌輔)와 창녕 성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창녕 성씨가 1729년에 사망하면서 홍유한은 고모와 서모가 돌보아 주었다. 또한 어려서 몇 년간은 예산에서 살았다. 16세가 되는 1741년에 다시 한양 집으로 돌아왔고, 그즈음에 부친의 권유에 따라 성호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하지만 홍유한은 질병으로 도학에 매진할 수 없었다. 채응검(蔡膺儉)의 딸인 평강 채씨와 결혼하여 1754년에 아들 홍낙질(洪樂質)을 낳았다. 1757년 12월 18일 부친이 사망하였다, 이후 한양의 가산을 정리하여 충청도 예산의 여사울로 내려갔다. 재종질 홍낙민(洪樂敏, 1751～1801)은 홍유한이 예산으로 이주한 이유에 대해, “정축년(1757) 이후 말하기 어려운 시사(時事)가 있기에 드디어 한양의 집을 팔고 예산의 여촌으로 이사하였다”라고 한다.

 

홍유한의 행적은 종손가에 보관된 「가장간첩(家藏簡牒)」과 「가장제현유고(家藏諸賢遺藁)」 및 간찰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자료에는 성호 이익이 홍유한의 부친 홍창보(洪昌輔)에게 보낸 편지가 9통,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는 57통이나 남아 있다. 성호의 문집에는 57통 중 단 1통만 수록되었다. 홍유한의 부친 홍창보를 위해 써준 「독행홍공묘지명(篤行洪公墓誌銘)」에서 성호는 홍창보가 자신과는 40여 년간 가깝게 지낸 벗이라고 적었다. 성호가 1755년 1월 20일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방성도(方星圖)’는 도움 되는 점이 실로 많으니, 자세히 살펴보게나. 관상(觀象)의 여러 그림은 아마도 애초에는 외국으로부터 온 것인 듯하네. 사람과 별의 운명을 비슷이 보는 것 또한 연유가 있겠으나, 저쪽이 옳고 이쪽이 그르다네.

이 서한에서 ‘방성도’ 바로 앞, 네 글자를 먹물로 까맣게 지워 놓은 것은 서학과 관련한 것으로 보인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r>
<td colspan="2">그림 4 방성도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소장.</td>
</tr>
</tbody>
</table>
 

<b>(1) </b><b>예산 거주기</b><b>(1760~1775)</b>

 

1765년에 작성된 홍유한의 호구단자를 보면, 두촌면 호동리(현 예산군 신암면 두곡리)에서 부인 채씨와 아들 팔희(12세), 재종 형수 이씨(63세), 재종질(再從姪, 7촌) 홍낙수(29세) 부부와 함께 거주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728년 홍유한 집안은 충청도의 천안과 덕산, 경기도의 김포와 장단에 전답 10석 83두락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중 충청도에 5석 57두락지, 경기도에 5석 26두락지가 있어 양 지방에 비슷한 크기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지역에 집안의 토지가 있었던 것이 홍유한이 여사울에 정착한 직접적인 이유라고 하겠다. 그리고 홍유한이 어려서 몇 년간 생활한 예산 지역도 이 전장(田莊-湖西庄)임을 알 수 있다. 이 전장은 집안에서 필요할 때 머물던 별저(別邸)였다가, 홍유한 대에 와서 주거지가 되었다. 따라서 홍유한이 예산으로 이주한 것은 ‘친척들이 살고 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집안의 별장과 소유 노비’가 있었던 것이 직접적인 배경으로 보인다.

여사울로 이주한 홍유한은 이병휴를 비롯하여 예산을 찾는 성호학파 사람들과 교유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생활을 하였다. 이병휴는 󰡔문혈록󰡕에 발문을 썼고, 그 발문에서 “홍창보 집안과 통가골육지의(通家骨肉之義)”가 있다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리고 홍유한이 영남으로 이주할 때 송서(送序)를 주기도 했는데, 이것으로 보아 이들의 친분을 가름할 수 있다. 홍유한은 여사울에 머물면서 학문 연구와 함께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에도 힘을 썼다. 이에 홍유한의 재종질인 홍낙민이 지은 제문(祭文)을 보면, ‘1763년 선친이 사망했을 때, 자신은 성인이 되기에 2살이 부족했는데, 오직 선생이 사랑으로 길러주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라고 하였다. 호동리에 거주한 홍낙민 형제는 충주로 이주하는 1776년까지 이곳에서 홍유한의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이웃 마을에 사는 이존창도 이들과 함께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 홍유한의 학문에 관한 입장은 1765년에 남긴 유훈(遺訓)에서 더욱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 무릇 나의 후손들은 마땅히 독서와 수신을 으뜸의 일로 생각하여 벼슬에 나갈 뜻을 두지 말라 비록 과거를 보고 벼슬에 오르더라도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하여 충분히 재보(宰輔)가 될 수 있는 이는 목백(牧伯)에 그치고 충분히 목백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현령(縣令)에 그쳐서 위태로운 곳을 밟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유훈에서 홍유한은 독서와 수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면서도 과거 시험을 보는 것을 경계하였다. 홍유한이 생각한 학문이란 무예 곧 무과를 통한 무관이 아니라 유학 곧 성리학이 대상이었다. 이렇게 학문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다른 사람의 평가 곧 문하생이 쓴 제문(祭文)에서도 확인이 되는 바이다.

우(又) 달성(達城) 서간유(徐幹儒) 문하생의 제문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밖으로는 매우 겸손한 자세를 가졌으나 안으로는 몹시 엄숙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사람에게 인후하고 사물을 사랑함은 선생의 마음이고 널리 베풀어 대중을 구제하려 함은 선생의 덕이었으니 남들의 주림과 추위를 보면 반드시 의복과 의식을 도와주었습니다. 성리(性理)에 침잠하여 깊은 경지에 나아갔고 경전(經傳)을 고찰하여 실천으로 징험하였습니다.

 

1775년 이병휴가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듣자니 또 책 상자를 지고서 산사로 들어가려 한다고 하니, 그대에게는 부득이한 계책이겠으나, 내게는 서글피 상심이 됩니다. 어느 산 어느 절에서 지내시려는지요. 비록 산에 있더라도 혹 인편에 금옥(金玉) 같은 소식을 전해준다면 다행이겠습니다. 나는 눈 오는 집 얼음 언 창에서, 산 것도 아니요. 죽은 것도 아닌 한 마리 벌레로 지냅니다. 서방(西方) 성인의 일을 내가 아는데, 또한 이처럼 될까 걱정입니다.”

 

<b>(2) </b><b>순흥 거주기</b><b>(1775~1785)</b>

 

1760년경에 예산으로 낙향한 홍유한은 이곳에서 16년을 생활한 후 1775년)에 경상도 순흥으로 이주하였다. 1780년의 호구단자를 보면, 홍유한 부부와 아들 홍낙운 부부가 거주한 곳은 순흥부 동원면(東園面) 구고리(九皐里)이다. 순흥의 남양 홍씨는 홍유한과 인연이 있는 집안이었다. 홍유한의 6대조인 홍이상과 홍득전·홍필전의 6대조인 홍가신(洪可臣)이 교분이 돈독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홍득전 가족은 홍유한의 순흥 거주를 도왔고, 그는 홍필전과 홍거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여 학문을 가르쳤다.

순흥 이주에 대해서 이병휴가 홍유한에게 보낸 송서(送序)에는 “퇴계를 존중하고 사모한 성호는 평소에 영남에 살 집을 얻으려는 뜻을 품고 있었으나 실행하지 못했는데, 홍유한을 통해 성호 선생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홍유한을 통해 선생의 도(道) 역시 영남의 선비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을 기대하였다. 물론 홍유한도 스승인 이익처럼 퇴계의 학문을 사모했고, 동문들과 영남에서 살 약속을 하기도 하였다. 이에 권철신 제문(祭文)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 한 구역의 땅에 터를 잡고 손을 잡고서 함께 돌아가는 것은 제가 예전부터 품었던 소원이었습니다. 또한, 동지 몇 사람이 십수 년 동안 꼼꼼히 얽어 준비한 계획은 마침내 일과 마음이 어긋나 중도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홀로 천리 밖 영남에서 공이 홀로 지내면서 한 사람도 따름이 없어, 살아서는 서로 힘이 되지 못했고, 죽어서도 서로 알지 못했으니 제가 공을 저버림이 크다 하겠습니다.

 

샤를르 달레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고적한 곳에서 묵상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백산(白山)에 들어가 13년 동안 지냈다”라고 하였다. 홍유한의 삶이 1765년에 66명이었던 소유 노비가 순흥 이주 후 1780년에 47명으로 감소하였다. 1786년에는 소유 노비가 19명으로 급감하고 있다. 이처럼 집안 형편이 순흥으로 이주한 이후 더욱 나빠짐을 알 수 있다, 순흥에서의 경제적 어려움은 홍유한 자신도 토로한 바 있다. 순흥으로 이주한 이듬해에 수재로 인해 흉년이 들었을 때,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극심한 흉년을 만나 10식구가 살아갈 계책이 거의 없으니 시름과 번민을 형용하기 어렵다.”라고 심경을 내비친 바 있다.

1783년 겨울에 방문한 권준은 살림이 영락(零落)하고 생계가 냉박(冷薄)했으며,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1784년에는 며느리 장씨가 사망했는데, ‘집안 형편이 궁패(窮敗)하여 초종(初終)의 여러 예를 모두 간단히 처리하고, 기한이 지나서 치룬 장례는 단지 흙만 덮었을 뿐’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홍유한은 순흥에서 경학(經學)뿐만 아니라 서학(西學)에 관한 공부도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1781년 8월 17일 이병휴의 조카인 이구환(李九煥)이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학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를 엿볼 수 있다. ,

 

서태(西泰)의 책 두 권을 그대께서 아직 돌려주지 않아서 내가 물어보려 했더니, 아드님의 말이 근자에도 여전히 되풀이해 살펴보고 계신다더군요. 그렇다면 감히 독촉해서 찾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천리 밖의 편지는 늘 전하기 어려운 것이 염려되니, 다 보신 뒤에는 믿을만한 인편을 찾아 속히 돌려보내 주심이 어떠실런지요? 천 번 만 번 간절히 바랍니다.

 

홍유한은 독서와 학문 연구 외에 후학을 가르치는 데에도 시간을 할애하였다. 제문을 지은 사람 중에 문하생(김만직·김경직·홍거·홍필전·서간유)과 시교생(이한기)이 있는데, 이들이 홍유한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홍유한은 ‘현우(賢愚)에 간격을 두지 않고 물으면 반드시 답해 주었기 때문에, 교화에 훈도된 원근의 사람들이 모두들 공경하고 본받고자 하였다’라고 하였다.

홍유한의 예산으로의 이주는 ‘부친의 사망,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으로 시사(時事)가 여의치 않았던 정치 상황, 본인의 병, 이병휴의 낙향’, ‘예산 소유 토지와 노비의 존재’, 순흥 이주는 ‘영남 지방이 갖는 학문적 위상, 홍유한의 풍수관과 주거관, 그리고 1772년 이후 집안 형편의 위축과 자신의 숙환’ 등이 고려된 결정이었다. 홍유한이 영남으로 이주한 것에 대해서도 천주교의 신앙생활 곧 수덕(修德)을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문집에는 이와는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자손에게 남긴 유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항상 영좌(嶺左: 경상도)의 산수가 거의 이 말씀에 해당한다고 여겼다. 나의 자손들은 삼가 다른 곳을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태백산과 소백산의 아래서 깃들어 살도록 하라. …(안동·영주·풍기·순흥·봉화·예안·예천이 모두 땅을 택하여 살 만한 곳이고 청송·영양도 또한 살 만한 곳이다. 비록 일시에 우거(寓居) 할지라도 삼가 강릉 이북을 넘어서지는 말아야 한다).

 

권준은 홍유한의 영남 생활에 대해 “공의 집은 영남으로 옮겨간 이후에 우환이 연이었고, 상사(喪事)가 거듭했던 탓에 생계가 조락하여 지금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집안의 형편은 점점 어려워지고, 숙환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그 후 1785년 1월 24일에 홍유한은 권준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 중에 ‘유행하는 독감을 앓는데 묵은 병이 도졌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그로부터 6일 뒤인 1월 30일 홍유한은 사망하여, 4월 19일에 순흥부 동쪽 문수산 우곡 골짜기에 안장되었다.
<ol>
 	<li><b> </b><b>순암</b><b>(</b><b>順庵</b><b>) </b><b>안정복</b><b>(</b>安鼎福, <b>1712~1791)</b></li>
</ol>
 
<table>
<tbody>
<tr>
<td> </td>
</tr>
<tr>
<td>그림 5 안정복 가계도</td>
</tr>
</tbody>
</table>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본관은 경기도 광주(廣州)이며,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이며, 아버지 안극과 어머니 증 정부인(贈貞夫人) 이씨(李氏) 사이에서 1712년 태어났다. 안정복은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고, 아버지 따라 자주 이사를 하였다. 그의 일가들은 1736년 전라도 무주에서 경기도 광주 덕곡리에 돌아와 살았다. 그는 이곳에 ‘순암’이라는 거처를 만들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순암은 여러모로 독특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먼저 청년 시절에는 독학으로 일관하다가 35세의 나이가 되어서야 당시 경기도 안산에 있던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문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익의 학문을 계승하여 성호학파를 이끌었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부터 몸에 밴 독학의 기풍이 그대로 이어져서 언제나 자득(自得)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순암이 처음 서학서를 접하게 된 것은 그의 스승인 성호와 관계를 맺으면서부터이다. 그의 나이 36세 때인 1747년 성호와 처음 만난 후 직접 방문과 꾸준한 서신 교환을 통해 학문적 교류를 지속하였다. 성호가 서학에 대해 함께 토론한 제자는 이병휴·안정복·윤동규 등이며, 이 토론은 그의 말년인 1759년까지 지속되었다. 순암 안정복은 스승인 성호 이익과 윤동규와 서학에 대해 토론하였다. 윤동규가 1756년에 안정복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천주교의 천주강생설, 천당지옥설 등을 잇달아 비판하였고 안정복도 1757년에 성호에게 잇달아 보낸 편지에서 󰡔천주실의󰡕 · 󰡔畸人十篇󰡕 · 󰡔辨學遺牘󰡕 세 책을 비판하였다. 성호는 천주교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종래의 입장을 수정하였다.

순암은 조선 천주교의 초기 양반층 신자들과 학맥과 혈맥으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권철신과 권일신의 부친 권암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정약종의 부친 정재원과도 왕래하는 사이였다. 이로 인하여 광주이씨와 안동권씨, 광주안씨, 여주이씨는 한 집안처럼 얽혀있다. 이기양의 큰아들 이총억과 권철신의 딸이 결혼하고, 이기양의 동생 이기성은 순암의 손녀와 결혼함으로써 사돈이 되었다. 또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은 안정복의 사위이다. 순암이 남긴 자료에는 가까웠던 인물들 가운데 천주교에 가담한 인사들에 관한 기록이 나타난다.
<table>
<tbody>
<tr>
<td> </td>
</tr>
<tr>
<td>그림 6 광주이씨와 안동권씨, 광주안씨, 여주이씨의 통혼 관계도</td>
</tr>
</tbody>
</table>
 

순암의 서간 중 서학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757년과 이듬해인 1758년 성호에게 보낸 편지이다.

 

제가 근래 서양서(西洋書)들을 보았는데, 그 말은 비록 정밀하고 확실했으나 결국에는 이단의 학문이었습니다. 우리 유학(儒學)에서 몸을 닦고 성품을 기르며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할 뿐 털끝만큼도 죽은 뒤에 복을 바라는 뜻은 없습니다. 서학(西學)의 경우에는 자기 몸을 닦는 까닭이 오로지 천대(天臺)의 심판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니, 이 점이 우리 유학과는 서로 크게 다릅니다.

 

1758년 두 번째 서간에서는 영혼론, 천당 지옥설을 들어 이단성을 재차 지적하는데, 이는 모두 전형적인 유교 성리학의 관점에서 인간과 세계의 배후에 ‘근원적 존재’(天主)가 있음을 전하고자 한 주요 서학서의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었다. 안정복의 서학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단순히 천주교 교리의 모순이나 허망함만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단(異端)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근원적으로는 서학과 성리학 사이에 존재하는 세계관 자체의 차이를 거론하고자 한 성격이 크다.

 

천주실의 제2편에서 또 이르기를 “임금이 있으면 신하가 있고 임금이 없으면 신하도 없다. 사물이 실재하면 그 사물의 이치가 있게 되고, 그 사물의 실재가 없으면 그 이치의 실재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른바 기(氣)가 리(理)보다 먼저라는 주장이 아니겠습니까. 이 주장이 과연 어떠한지요?

 

순암의 서간에서 다시 서학과 관련한 내용이 등장한 것은 1784년에 이르러서이다. 이는 앞서 성호와 편지로 서학에 대한 견해를 밝힌 지 26년이 지난 시점에 해당하며, 그의 나이 73세 때인 만년의 일이다. 이즈음에는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오고, 이에 따라 성호 문하의 권철신·권일신·이기양 등 성호좌파 계열의 소장파 문인들이 교회를 창립하여 신앙 활동을 벌이고 있을 때이다.

순암은 제일 먼저 1784년 11월 22일에 권철신에게 편지를 보내, 서학에 몰두하여 공부하다 보니 어투나 말투가 유학자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졌음을 경계하며, 점점 성리학적 인식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깊은 우려를 전달하였다. 그는 열흘쯤 뒤인 1784년 12월 3일에 다시 권철신에게 편지를 띄운다.

 

사흥(士興, 이기양)이 찾아와서 칠극(七克)을 빌려 갔다고 하기에, 내가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여겨 말하기를 “칠극은 사물(四勿)에 대한 각주이니, 비록 뼈를 찌르는 듯한 절실한 내용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 무엇을 취하겠는가”라고 하였다네. 그런데 그 후 들리는 말에, “양학(洋學)이 크게 번져 … 동화된 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라고 하였다네. 나는 놀랍고 괴이함을 이길 수 없었으나, 이미 사람들의 입에 파다하게 올랐으니 우리가 서로 좋아하는 사이에 숨기고 감출 필요는 없을 듯하네. … 지금 천주학을 하는 자들이 밤낮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면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면하게 해달라고 하니, 이는 모두가 불학(佛學)과 같은 것일세. 제군들은 평소에 늘 상 불교를 배척했으면서 지금 천주학에는 꼼짝 못 하고 있네.

 

위 편지에서 순암은 칠극등의 서학서를 읽으며 공부하는 모임의 주동자인 권철신을 나무라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철저하게 비밀로 하면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순암은 소문을 통해 젊은 선비들의 움직임을 다 알고 있으니, 그들이 행하고 있는 신앙 활동에 대해 사실대로 털어놓으라고 말한다. 연이어 편지를 보내 자신들을 나무라고 비판하는 순암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활동을 지속하였다. 심지어 이기양은 거꾸로 순암에게 오히려 천주학을 권하며 자신들과 함께할 것을 제안하기까지 하였다.

순암은 열흘쯤 뒤인 12월 14일에 3차로 2,600여 자에 이르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여 권철신과 이기양 앞으로 보내 12가지 항목으로 조목조목 천주학을 부정하는 논리를 펼친다. 하지만 순암이 천주학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데에는 또 다른 측면의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전에 우서(권진의 자)가 와서 묵었는데, 이 신학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서양 나라들이 일찍이 서학을 금하였는데, 주살된 자가 천만인이 넘고 일본도 이 서학을 금하여 주살된 자가 수만인” 이라고 한다네.(살펴보건대, 일본의 종문 당이 처음 서학을 하였고 끝내는 군사를 일으켜 난리를 일으켰다. … 여러 해 뒤에 비로소 평정되었다. 그때 우리나라에 보낸 서결에 소식을 전한 것이 여러 번이다. …) 어찌 우리나라도 이러한 일이 없겠는가? 만약 패가망신하고 오명을 뒤집어쓴다면 이때에 와서 천주가 능히 구해주겠는가? 아마 천당의 즐거움을 향유하기도 전에 이 세상의 화가 닥칠 것이네. 어찌 근신하지 않겠는가? 두렵지 않은가? 공의 무리들이 이미 이에 빠져 있다면 마음을 씻고 발길을 돌려 이 습성을 버리지 못하면서 도리어 지옥이 만들어진 것은 아무개 어른 때문”이라고 하는데, 내가 이것은 감수하겠지만 차마 이 행태는 참을 수가 없네. 사흥 이기양의 소식이 오래 막혀 있는데, 만약 인편이 있다면 이 편지를 함께 보내고, 본 뒤에는 태워버리라고 고하는 것이 어떤가.

 

이 편지에서는 권철신이 이가환·정약전·이승훈 등 젊은 학자들의 맨 앞에서 서학을 연구하고 전파하고 있다는 소문이 낭자하고, 신학이 유럽은 물론 일본에서도 크게 문제를 일으켜 참화를 당하였다. 이에 미래에 닥쳐올 재난을 경고하며, 순암이 이들을 서학에서 유학으로 되돌리려고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답장조차 하지 않았다.

순암은 「천학설문」을 1784년 11월 14일 이전 초겨울에 저술하였다. 1784년 겨울부터 성호학파의 소장학자들이 천주교에 휩쓸리는 경향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 갔다. 이를 막기 위하여 「천학설문」을 보다 체계적인 「천학고」와 「천학혹문」으로 개편하여 1785년 완성하였다. 「천학혹문」의 제목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남한조의 지적에 따라 1791년 죽기 전에 그 제목을 「천학문답」으로 바꾸었다.

순암은 「천학문답」의 부록에서 어떤 사람이 “성호 선생도 서학을 하였다던데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1746년에 자신이 성호와 처음 만나 서양학에 대해 주고받았던 대화를 소개하였다. 그는 당시 성호가 “서양학은 천문 관측과 기계 제작, 수학 분야에 탁월해 중국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더러 자신이 서양학을 한다고 말하지만, 성호는 서학(西學)을 부정하였다. 하지만 성호 일문에서 서학에 기울어진 그룹은 이병휴의 문하의 권철신·이기양·이벽 등 신서파와 성호의 종손인 이철환과 이가환이다. 순암이 1791년 7월 20일(향년 80세) 광주 덕곡에서 운명하였다. 안정복의 장례식에 사위 권일신(權日身)과 외손자들이 방문하지 않아 시중의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는 권일신이 중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특별히 부의(賻儀)를 추가하고 사람을 보내 조문하였다. 그는 천주교에 비판적이었던 까닭에 1791년의 신해박해와 1801년 신유박해 때의 화를 면하였다.
<ol>
 	<li><b> </b><b>복암</b><b>(</b><b>伏菴</b><b>) </b><b>이기양</b><b>(</b><b>李基讓</b><b>, 1744</b><b>∼</b><b>1802)</b></li>
</ol>
 
<table>
<tbody>
<tr>
<td> </td>
</tr>
<tr>
<td>그림 7 이기양 가계도</td>
</tr>
</tbody>
</table>
이기양은 문인이며, 자는 사흥(士興), 호는 복암(伏菴), 본관은 광주(廣州)이씨이다. 아버지는 종한(宗漢)과, 어머니는 동래정씨 사이에서 1744년 태어났다. 복암은 18세 되던 1761년 이병휴의 문하에서 배우다가 1765년에 덕산으로 거처를 옮겨 학문을 닦았다. 1776년 외가가 있던 경기도 이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기양은 1785년 이벽과는 세계와 우주의 기원과 그 질서, 인간 영혼과 후세 상벌에 관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서학의 교리를 토론하였다. 결국 이 토론에서 천주교 교리의 합리성을 인정하고 은밀히 천주교를 신봉하였다. 그러나 겉으로는 남인공서파(南人攻西派)와 친분을 가짐으로써 서학 반대자로서 자처하였다. 순암은 1784년 12월 3일 권철신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이기양이 칠극을 탐독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기양은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에 사학 괴수로 지목을 받아 심문 과정에서 천주교인들과 가까웠으나 증거가 드러난 바가 없었지만 단천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저서로 『복암유고(伏菴遺稿)』가 남아 있다.

순암은 이기양도 발길을 끊었을 뿐만 아니라 답장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권철신을 통하여 자신의 경고 메시지가 전달되기를 기대하였다. 다음 해 봄에 이기양의 편지를 받고 다시 보낸 답장 편지에서도 신서파 젊은이들이 순암과는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편지에서 책상 밑에서 애쓴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 전하던가? 나의 성품이 혼렬하고 또 떨쳐 일어설 용기도 없어서 선입견을 위주로 하고 옛 학설을 힘써 지키는데, 비록 발걸음을 바꾸어 보려고 해도 방아 돌리는 나귀처럼 제자리에 있는 것을 어찌 하겠는가? 지난번에 생오(권일신의 자)가 이 서학을 힘써 권하였지만, 나는 귓가에 지나는 바람 소리 정도로 들었는데, 그 후에 또 편지를 보내어 권하기를, ‘이 서학은 정말로 진실하여서 천하의 대본달도가 모두 여기에 있고 옛 성인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교훈이 이 학문에 있다.’라고 했소. 그러나 팔십 노인이 배울 것이 아니어서 공도 아마 많이 고민하리라고 생각하오. 또 말하기를 ‘매일 신음하고 앓으면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니 과연 이는 가련한 인생이요(이 전에 정약전이 이 어른이 가련하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는 앞으로 지옥에서 받을 고통에 불과한 것이니 이에 이르러 다시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했소. 또 말하기를 ‘야소는 구세주의 이름’이라고 했는데, 이미 세상을 구원한다고 했으면 그 혼우(昏愚)한 것을 지도하여 개오(開悟)하게 해야 하는데, 왜 하필 답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그 책을 덮어두고 비밀로 하여 혼우한 자로 하여금 개오하지 못하게 하니 그것이 과연 천주가 구세를 하는 뜻이오?

 

이기양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의 사위인 권일신이 순암에게 서학을 배울 것을 권하였다는 것, 서학이 진실로 천하의 큰 진리라는 것, 이러한 진리를 모르는 순암은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라고 말하였다. 순암는 그런데도 이기양에게 자신을 깨우쳐 주고 서학서를 같이 보자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순암과는 상대하지 않고 그에 대한 분노와 의심만을 키워갔다. 순암의 이러한 경고와 대화 요청 편지에 이어서 1785년에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다. 이런 정국하에서 순암이 작성한 ｢이기양 방문 관련 메모｣는 신서와 벽서가 갈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기양 방문 관련 메모｣의 일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흥(이기양)이 안부를 물은 후에,… 편지 중에 ‘문의언찰(文義諺札)’ 네 자는 우리 어머니의 편지인데 왜 이걸 남에게 드러내느냐고 말하였다. 내가 그의 말투나 기색을 보니 전날과는 매우 달랐다. 그래서 웃으면서 천천히 말하기를 “이 네 글자는 다른 데서 나온 것이 아니네. 우리 집과 자네와 기명의 집은 한 집안이네. 기명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네 집 언찰을 말하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하니, 그가 마침내 정색을 하고 말하기를 “이는 옳지 않습니다.”고 말하였다. 거기에다가 또 말하기를 “왜 그 언찰을 손님이 왔다고 하나하나 보여주십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내가 비록 늙었어도 사돈집의 언찰을 왜 바깥사람들에게 보이겠는가?” 하였다. 그는 마치 못들은 척하면서 또 말하기를 “일이 이렇게 되면 안됩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답하기를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는 老妄하여 그런 것이니 어찌 큰 허물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이는 정말 안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멀고 가까운 것을 가리지 않았으니 정말 망령된 일을 했네. 속담에 음자(陰者)는 죽이지 않는다고 했으니 용서하는 게 어떤가?”라고 하였다.

 

‘문의 언찰(文義諺札)’이란 이기양의 어머니 동래정씨가 며느리인 안정복의 손녀에게 보낸 언찰이다. 이 언찰에는 동래정씨 자신의 손자인 총억과 방억의 신앙심이 깊다는 것을 칭송하고, 자신의 며느리인 순암의 손녀에게도 천주학을 권면(勸勉)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순암은 손녀에게 온 시어머니의 언찰을 주변 인물들에게 공개하며 자신의 주변에 서학(西學)이 광범하게 유포되어 있는 상황을 걱정하였다. 이기양은 순암의 이러한 행동을 ‘복심(禍心)’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고 양근을 거쳐 광주에 있는 순암에게 와서 강경하게 항의를 한 것이다. 이기양의 항의에 대해서 순암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으므로 정식으로 사과하였다. 이 부분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초기의 자발적 신앙집단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 중 하나이다.
<ol>
 	<li><b> </b><b>녹암</b><b>(</b><b>鹿菴</b><b>) </b><b>권철신</b><b>(</b><b>權哲身</b><b>, </b><b>암브로시오</b><b>, 1736 ~ 1801)</b></li>
</ol>
권철신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鹿菴), 당호(거처)는 감호(鑒湖)이다. 증조부 권흠 때까지는 벼슬길에 있었으나, 조부 권돈은 진사에 머물렀고, 부친 권암도 평범한 선비의 삶을 살았다. 권철신이 이익의 문하에 들어간 것은 24세 되던 영조 35년(1759) 무렵이다. 권철신은 이익이 만년에 얻은 제자로 동년배들 가운데서 촉망을 받았다. 이익이 권철신의 부친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대 아들이 뜻밖에 경서의 가르침에 뜻을 두어 갈수록 깊어집니다. 이제 몇 차례 보내 온 편지들을 보니 의지가 높고 깊을 뿐만 아니라 그 논변과 사조가 넉넉하여 가히 볼 만합니다. 마음속에서 터득한 바가 없다면 능히 그럴 수 있을지요. 근래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은 끝까지 통달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고 합니다. 그 이치가 또한 이러하다면 기명이 바로 그 사람이니, 우리의 도를 위해 다행한 일입니다.
<table>
<tbody>
<tr>
<td> </td>
</tr>
<tr>
<td>그림 8 권철신과 권일신 가계도</td>
</tr>
</tbody>
</table>
권철신은 이익의 제자인 안정복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으며, 안정복과 기탄없는 학문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권철신은 이익의 조카이자 제자인 이병휴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이병휴는 일찍부터 권철신의 인물됨에 대하여 듣고 있었다. 그때에 권철신이 먼저 서한을 보냄으로써 관계를 맺었다. 이병휴는 권철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769년 안정복이 이병휴에게 보낸 다음의 서한에서도 알 수 있다.

 

旣明(권철신)과 士興(이기양)은 실로 당대의 귀재입니다. 무릇 덕을 성취하고 큰일을 이루는 것은 다만 재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평실 은중하고 관후 정대한 기상이 있고 난 뒤에야 이룰 수 있어서 그들의 재주를 조절하는 권한을 실로 형에게 바라는 바입니다.

 

권철신의 학문의 깊이와 성향이 드러나는 대목은 제자 정약용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 선생(이익)이 만년에 한 제자를 얻었으니 그가 바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이다. 공은 영민하고 지혜로우며 어질고 화순(和順)하여 재덕(才德)을 겸비하였으므로 선생이 매우 사랑하여 문학(文學)은 자하(子夏) 같고 포양(布揚)은 자공(子貢) 같을 것이라 믿으셨더니, 선생이 죽은 뒤로는 과연 재주 있고 준수한 후배(後輩)들이 모두 공에게 모여들었다. …후세의 학문은 담론(談論)에 빠져 이기(理氣)와 정성(情性)만을 논할 뿐 실천에 소홀하였으나 공의 학문은 효제 충신(孝弟忠信)을 한결같이 으뜸으로 삼았다.

 

정약용은 권철신에 대해 영민하고 지혜를 갖추었고 거기에다 온화한 품성과 덕까지 갖추었다고 더할 나위 없는 존경을 드러냈다. 스승 이익도 그를 공자의 제자 중 문학에 가장 뛰어난 자하(子夏)와 언변으로 유명한 자공(子貢)에 빗대어 권철신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권철신이 서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익의 문하에 들어간 1759년(영조35)의 24세 무렵이다. 이는 서양 과학기술에 스승 이익이 서학에 관심을 보이고 학문적 차원에서 적극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교유하고 있던 윤동규·이병휴·안정복·홍유한 등이 일찍부터 여러 서학서를 읽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권철신 역시 서학서를 접한 것으로 보인다. 이익의 제자인 신후담과 안정복이 척사의 입장에서 서학을 공격한 이후에 권철신은 기존의 서학에 대한 인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한편 권철신의 서학 접촉에서 천주교 수용까지 나아가게 된 계기는 그의 학문 성향도 작용하였다. 그는 1766년 무렵부터 양명학을 접한 뒤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 후 일련의 학설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알고 행하지 않으면 천박한 학문이 되고 행하되 알지 못하면 제멋대로 행동할 우려가 있다”라고 하여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중시하였다. 이처럼 그의 학문 성향은 창조적이며 실천적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권철신의 학문 형성에 영향을 준 인물로는 이병휴·안정복·윤동규·홍유한 등이 있지만 특히 이병휴의 영향이 컸다. 성호학파의 학통이 이익→ 이병휴→ 권철신→ 이벽·정약용 등으로 맥이 이어졌다. 그의 제자로는 홍낙민·이승훈·정약전·정약용·이윤하·이벽·윤유일·이존창 등이 있다. 권철신의 학문은 현실 사회와 경제적 개혁의 의지를 담고 있으며, 정통주자학을 비판하고, 양명학(陽明學)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선학들의 학문 방법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경전을 해석하며 유학의 한계를 극복해 나갔다.

권철신은 1776년에 그동안 교류가 있었던 김원성과 이충억과 이존창 등 10여 명을 제자로 받아들여 녹암계(鹿菴係)를 형성하였다. 권철신이 주도한 천진암 주어사의 강학모임이 1779년 전후로 여러 차례 있었다. 여기에 참석한 인물들은 권상학(權相學)·김원성(金源星)·이총억(李寵億) 등 여러 명이었다. 이들은 주자학에 바탕을 둔 학문 토론뿐만 아니라 원시유학(原始儒學)을 토론하던 중 이벽의 참석으로 서학(西學)에 관한 검토를 하는 등 밤새워 토론하였다. 이 강학이 서학에 관한 학문에서 천주교 신앙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권철신의 천주교 수용 시기는 기록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는 1784년 9월 자신의 집에 온 이벽에게서 천주교에 관하여 들었을 때 믿기가 어려웠다. 이에 교리를 깊이 연구한 후에야 받아들일 결심을 하였다. 그는 신앙 동기에 대해 “제 동생이 인천에서 저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그 학문에 대해 처음에 들었을 때는 허황하여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그 책을 얻어 보았는데, 그 가운데에서 주재하는 이를 흠숭한다는 말과 생(生), 각(覺), 영(靈) 등 삼혼설(三魂說), 화(火), 기(氣), 수(水), 토(土)의 사행설(四行說)은 참으로 지극한 이치가 있어서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 책을 깊이 이해한 뒤에 공격해야지, 뭇사람을 따라 대충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그의 철학적 신앙 이해의 면모를 드러내 주고 있고, 보유론(補儒論)적 입장에서 천주교를 이해하며 그 신앙의 타당성을 말했던 것이다. 이를 대학자로서 세례를 받은 신자라는 사실을 더하여 생각해 보면, 그런 단순한 서술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숨어있는 핵심적인 진술, 바로 ‘영과 진리로써 주재자를 흠숭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다’라는 ‘신앙고백’으로 볼 수 있다. 이벽의 방문과 동생의 권유로 입교한 그는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의 한 분인 암브로시오(Ambrosius, 339~397)를 주보로 하여 세례를 받았다. 이때 실학자 순암은 1784년 그에게 보낸 셋째 서한에서 이렇게 질타하고 있다.

 

“지금 또 듣자 하니, 공이 서양의 천주학에 있어 경망하고 철없는 젊은 것들의 앞잡이가 되고 있다는데, 지금 세상에 사문이 기대를 걸고 친구들이 믿고 소중히 여기고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후배들의 종주가 될 사람이 공 말고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이학(異學)으로 가버리다니 과연 어찌해서 그러한 것인가?”라고 하였다.

 

권철신이 천주교를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탈 주자학적 학풍에 기인한다. 그는 공자(孔子)·맹자(孟子)·순자(荀子) 사상의 중심인 선진유학(先秦儒學)을 학문의 궁극적인 표준으로 삼아 주자학에 구애받지 않고 경전을 자유롭게 해석했고,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도덕적 실천 공부를 강화해 나갔다.

권철신이 신앙을 받아들이자 온 가족이 믿고 따랐고, 그는 양근 일대에 살던 이들에게도 전하였다. 신유박해에 그에게 천주교를 배운 죄로 양근 조응대(趙應大)는 강진으로, 윤지겸(尹持謙)은 진해로, 윤학겸(尹學謙)은 사천으로, 며느리 숙혜(淑惠)는 순천으로, 행랑에 살던 순덕(順德)은 칠원으로 유배되었다. 또한 회장 강완숙(姜完淑)의 서찰을 받기도 하였다.

광주(廣州) 공동체의 정약전 형제들은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고, 여주 공동체의 김건순(金健淳, 요사팟)은 여러 차례 찾아와서 하느님의 존재, 삼위일체, 강생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며, 내포의 이존창은 이기양 밑에서 공부하다가 그의 문하로 옮겼다. 포천 공동체의 홍교만(洪敎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그의 고종사촌이고, 충주의 이기연·권상익(權相益), 이재섭(李載燮) 등은 그의 사돈, 조카, 사위이다. 그는 1784년부터 1791년까지 보여주었던 실천적 삶과 가르침은 친인척들과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어 존경을 받았다. 유항검은 전주지방, 이존창은 내포지방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세워다. 1791년 진산 사건 이후 그의 드러나지 않는 삶은 복음적인 퇴거(은수)로 볼 수 있다

권철신은 1801년 2월 11일 체포되었고, 의금부에서 2월 11일 두 차례, 18일, 19일, 21일에 각 한 차례씩 심문을 받았다. 1차 심문에서 양근 일대를 천주교에 물들게 만든 괴수임을 자백하라고 하자, “이러한 비방은 동생과 함께 이 책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 책을 보았습니다.” 황사영은 그가 “매를 맞고 죽었는데, 그가 선사(善死)하였는지 아닌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체포되어 판관들 앞에 서자, 그는 상세하고 조리 있게 천주교와 신앙 실천을 설명했으며, 형벌을 받으면서도 안색이 변하지 않았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답변하였다. 직책상 심문에 참석했던 가장 악착스러운 심문관 한 사람이 밖으로 나오면서 그곳에 있던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심문을 받는 다른 죄인들을 보면, 모두가 정신이 나간 듯 보이나, 권철신만은 고문을 받는 가운데서도 잔칫상에 차분히 앉아 있는 사람처럼 답변한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심리가 끝나기도 전 음력 2월 21일 66세로 생애를 마감하였다.
<ol>
 	<li><b> </b><b>소결</b></li>
</ol>
 

성호학파 서학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수용론을 보면, 이익을 비롯한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서양의 과학기술(西學)과 천주교(西敎)를 분리해서 사고하였다. 성호는 천주교는 이단이라고 단언했지만,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수용의 태도를 보였다.. 성호는 천주를 유가(儒家)의 상제(上帝)에 비유한다든지, 『칠극』을 유가의 ‘극기지설(克己之說)’과 같다고 하면서, 간간이 유학에서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혔다고 평가하며, 유가의 극기복례와 상통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보며 보유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서학의 가치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전제되어 있다. 이익의 선별적 수용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천주교를 비롯한 이단의 학설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탐구하였다. 1724년 성호는 자신을 방문한 신후담에게 마테오 리치의 학문은 소홀히 여길 수 없다고 하였다. 그가 신후담의 천주교 배척에 대해서 그것이 깊은 고찰을 배제한 맹목적 비판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이는 서학에는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내포되어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이와 같은 이익의 개방적 학문 자세를 공유하였고, 그 토대 위에서 서학을 비롯한 이단의 학문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탐구를 진행하였다.

순암은 1757년에 성호에게 잇달아 보낸 편지에서 󰡔천주실의󰡕·󰡔기인십편(畸人十篇)󰡕·󰡔변학유독(辨學遺牘)󰡕 세 권의 책을 비판하고 또 서양의 귀신설과 천당지옥설을 비판하였다. 이렇게 천주교에 대한 비판이 갈수록 거세지자 이익은 1757년에 안정복에게 보낸 답장에서 천주설을 긍정하던 종래의 입장을 수정하여 구라파의 천주설은 자기가 믿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게 되었다. 성호와 신후담, 안정복 등의 논설에 인용된 西學書(서학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성호학파의 학자들은 다양한 서학서를 폭넓게 읽고 장단점을 적출하였다. 이는 서학서를 전혀 읽지 않고 비판론을 제기했던 영남 계열의 일부 학자들과 비교할 때 분명한 차별성이 있다.성호의 제자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지녔던 이병휴는 주자학을 맹종하는 당시의 학문 풍토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양명학의 견해를 밝힌 이병휴의 유교 사상은 그의 학문을 계승한 이기양·권철신 등에 의해 더욱 계승 발전하였다.

 
<table>
<tbody>
<tr>
<td><b>1845</b></td>
<td><b>순암 안정복</b></td>
<td><b>광암 이벽</b></td>
<td><b>비고</b></td>
</tr>
<tr>
<td>유학자(儒學者) 계통</td>
<td>주자-이황-이익-안정복

(성호우파).</td>
<td>이황-이익-이병휴-권철신-이벽(성호좌파).</td>
<td>진보적 개혁론(광암)

보수적 경장론(순암).</td>
</tr>
<tr>
<td>서기(西器)

인식</td>
<td>백과전서적, 경세치용적

입장에서 긍정 :

‘성호사설유선’, ‘잡동산이’.</td>
<td>호기심에서 발전하여 천주교 수용의 한 과정으로 긍정함.</td>
<td>서기(西器)의 필요성

인정(공통점).</td>
</tr>
<tr>
<td>서양윤리(西洋倫理) 인식</td>
<td>부정하거나 언급하지 않으려고 함, 성호사설유선에서 성호사설에 있던 칠극을 삭제.</td>
<td>천주교와 함께 수용.</td>
<td rowspan="2">유교중심 척사론(斥邪論)과 보유론(補儒論)

적 인식 차이.</td>
</tr>
<tr>
<td>천주교 인식</td>
<td>이단으로 배척.</td>
<td>영혼 구원의 진리로 수용.</td>
</tr>
<tr>
<td>서학인식

(西學認識)종합</td>
<td>선별적 수용론

(동도서기(東道西器)에 근접).</td>
<td>합일적(合一的) 수용론

(서양과학기술보다 천주교

에 더 큰 비중을 둠).</td>
<td> </td>
</tr>
</tbody>
</table>
〈표 1〉 안정복과 이벽의 서학 인식체계

 

성호학파의 양명학자들이 열람한 천주실의 등의 천주교 서적에는 인간의 나약한 의지를 극복하여 도덕적 실천을 강력히 뒷받침할 수 있는 주제적이고 인격적인 천주설이 들어 있었기에 수용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이 없었다. 이병휴·이기양·권철신 등이 서양 과학기술과 천주교 수용을 위한 사상체계를 구축하는 과정이었다면, 권철신의 제자 이벽 등은 이를 수용하고 계승하여 각지에서 신앙공동체 설립의 주춧돌을 놓았다.

<b>Ⅱ</b><b>. 1784</b><b>년 천주교 신앙공동체 결성</b>

 
<ol>
 	<li><b> </b><b>이벽</b><b>(</b><b>李檗</b><b>, </b><b>세례자 요한</b><b>, 1754~1785)</b></li>
</ol>
 

이벽(李蘗, 세례자 요한)의 본관은 경주, 자는 덕조(德操), 호는 광암(曠菴)으로, 1754년 포천 화현리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집안은 무반가문(武班家門)이지만 이벽은 학문에 더 뜻을 두었고, 광주 마재에 살던 나주 정씨 집안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된 뒤에는 정약전·약용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학문을 닦았다. 이벽이 언제, 어떠한 경로로 천주교 서적을 접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한문 서학서를 탐독하는 과정에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는 과정으로 나아갔고, 한국천주교회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벽은 “몰래 천주교 서적을 읽고 있었는데, 이승훈도 알지 못하였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그림 8 이벽 가계도</td>
</tr>
</tbody>
</table>
 

이벽은 순암과 권철신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1774년에 권철신의 스승으로 주자학의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자주적인 경전 해석을 중시하던 이병휴를 덕산으로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이병휴의 제자인 이기양과 권철신과 교분을 쌓았고, 1776년을 전후로 권철신의 문하로 들어가면서 녹암계의 일원이 되었다. 1779년 권철신이 정약전·김성원·권상학·이충억·권일실 등과 함께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회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 참여하였다. 이벽은 서학에 관한 관심을 신앙으로 바꾼 성호학파의 3세대 인물이다. 이에 이승훈은 이벽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그 사람은 이미 예전에 우리 종교에 관한 책을 한 권 발견하고는 그것을 여러 해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노력은 전혀 헛되지 않았으니, 그는 천주교에 관한 문제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점까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과 열성은 그의 지식보다 더했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가르치쳐 주기도 하고 저에게 힘을 복 돋아 주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을 잘 섬기도록 수 있도록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이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벽은 1783년 북경 사행길에 동행하는 이승훈을 찾아가서 그곳에 가면 천주당을 찾아가 볼 것을 권유하였다. 그곳을 방문하면 그들이 반갑게 맞이하고 선물로 책을 줄 것이므로 꼭 받아서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이승훈은 1784년 봄에 동지사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리고 이벽을 만나서 자신이 북경의 천주당을 찾아가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선교사들이 준 책들을 이벽에게 건넸다. 이벽은 이승훈에게서 받은 책들을 탐독하였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가지고 돌아온 천주교 서적들을 통해서 이벽은 천주교에 대한 궁금증 가운데 많은 부분을 해소하였다. 특히 󰡔교요서론(敎要序論)󰡕과 󰡔성교절요(聖敎切要)󰡕를 통해 천주교 교리와 세례에 대해서, 󰡔이십오언(二十五言)󰡕과 󰡔성경직해(聖經直解)󰡕를 통해 성서의 내용에 대해서, 󰡔천주성교일과(天主聖敎日課)󰡕와 󰡔수진일과(袖珍日課)󰡕를 통해 매일의 기도에 대해서, 󰡔성년광익(聖年廣益)󰡕을 통해 천주교의 성인들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었다. 그 뒤 이벽은 교회 서적들의 내용과 이승훈이 북경에서 획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초의 세례식을 하기로 이승훈과 의논하였다.

 

이벽은 주변의 동료들에게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벽이 가장 먼저 다가간 사람들은 정약전 형제이었다. 이벽에게는 정약전 형 정약현에게 시집갔다가 일찍 죽은 누이가 있었다. 4월에 누이의 기일이 되었을 때 이벽은 정씨 형제들이 살던 마재로 가서 제사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한양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에게 천주교에 관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약용은 자신의 자찬묘지명 집중본에서 “갑진년 4월 이벽을 따라 두미협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다 처음으로 서교(西敎)에 대하여 듣고 한 권의 책을 보았다.”라고 간략하게 적었다. 그런데 중형 정약전의 묘지명 끝부분에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약용의 회고에 따르면, 이벽이 정약전·정약용 형제를 만나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고 세례를 받도록 이끈 것은 1784년 음력 4월 15일(양력 6월 2일)이었다. 그리고 1784년 여름에는 이가환을 찾아가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고, 정약종을 설득하여 천주교에 입교하도록 만들었다. 순암일기에 의하면, 이벽은 1784년 늦여름 무렵에 조선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공동체를 결성하기 위하여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적고 있다.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사에서는 이벽은 ‘1784년 9월 양근에 있던 권철신 형제의 집을 찾아가서 천주교에 관하여 설파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권일신은 즉시 입교하였고, 장남 권철신은 처음에 망설이다가 얼마 후에 천주교로 입교하여 세례를 받았다.그해 9월 “감호(鑑湖)에 사는 그는 사류(士類)가 우러러보는 사람이니, 감호에 사는 그가 교에 들어오면 들어오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하며 그의 집을 찾아가 10여 일을 묵으며 교리를 전하였다. 이에 그의 동생 권일신이 입교하여 열심히 믿기 시작하였다. 그는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 성인을 주보(主保)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대저 그 학술은 천주(天主)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그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일을 삼가는 의리가 고서(古書)의 ‘어두컴컴한 새벽 남모르는 곳이 더욱 드러나니 엄히 공경하고 경건히 두려워하라’라는 가르침과 은연중 합치되기에 그때 과연 열람하였다.” 이벽은 1784년 천주교를 전파하고 신자들을 규합하자 이승훈이 그의 활동에 호응하였다. 이어서 정약전·정약종·정약용 형제가 천주교에 가담하였고, 권철신, 권일신 형제도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순암이 권철신에게 “요즈음에 정조(庭藻, 이가환), 자술(子述, 이승훈), 덕조(德操, 이벽) 등이 서로 긴밀히 언약하고 신학(新學)의 학설을 익힌다는 말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네”라고37)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어 그는 찾아온 실학자 이기양(李基讓, 1744~1802)에게 천지의 존재 이유, 세상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의 아름다운 질서, 4원소(元素)의 조화와 하느님의 섭리의 다양한 원리, 다양한 능력을 지닌 인간의 영혼에 대한 교리, 상선벌악 등 한마디로 견고하고 공략할 수 없는 원리들에 기댄 천주교의 진리와 명확성의 명백한 증거를 갖고 설명하였다. 이에 이기양은 토론을 견뎌낼 수 없었고,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명례방에 사는 역관 출신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에서도 공동체 모임이 이루어졌다. 이벽은 김범우에게 천주교를 전했고, 그는 입교 후 온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들, 특히 역관 계급에서 여러 사람을 가르쳐 입교시켰다. 이벽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 공동체 기도 모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벽이라는 자가 푸른 두건을 머리에 덮어 어깨까지 드리우고 아랫목에 앉아 있었고, 이승훈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3형제와 권일신 부자가 모두 제자라고 하면서 책을 옆에 모시고 앉아 있었다. 이벽이 설법하여 깨우쳐 주는 것이 유가의 사제 간 예법에 비해 더욱 엄하였다. 날짜를 정하여 모이는데 약 두어 달이 지나니 사대부와 중인으로 모이는 자가 수십 명이 되었다. 추조의 금리가 그 모임이 술 먹고 노름하는 것인가 의심되어 들어가 보니, 모두 얼굴에 분을 바르고 푸른 두건을 썼으며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해괴하고 이상스러웠다”라고 하였다.

 

이벽은 신앙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며, 거룩한 전례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에 박해자들은 그를 ‘사당(邪黨) 가운데에서도 가장 거괴(巨魁)가 되는 자’라 하였다. 1785년 봄 을사추조적발 후 부친 이부만(李溥萬)의 박해를 받으면서 ‘어떻게 하느님을 부인하겠는가? 또 어떻게 부친을 죽도록 내버릴 수 있는가?’라고 하느님에 대한 신앙과 부친에 대한 효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을 겪었다. 그는 부친에 의해 감금된 상태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다가 병에 걸린 지 8~9일 만에 33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는 부친을 위시한 다른 가족들로부터 갖은 수단으로 ‘범주적(範疇的) 신앙’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극심한 위협을 당하면서도 명시적으로 배교하지 않음으로써 ‘범주적 신앙’도 저버리지 않았다. 또한 그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두 가지 의미를 지니는 말’로 부친의 죽음을 저지시킴으로써 효를 실천하는 ‘초월적(超越的) 신앙’도 아울러 성취하였다. 그는 극도로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범주적이고 초월적 차원에서 하느님을 믿고 증거한 신앙으로 처신하였다.
<ol>
 	<li><b> </b><b>이승훈</b><b>(</b><b>李承薰</b><b>, </b><b>베드로</b><b>, 1756~1801)</b></li>
</ol>
 

이승훈(李承薰)은 본관이 평창(平昌)이고,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으로, 서울 반석방(盤石坊)의 약현(藥峴, 현 서울 중구 중림동)에서 태어났다. 1868년에 순교한 이신규(李身逵, 마티아)와 이재의(李在誼, 토마스)는 그의 아들과 손자이며, 이연구·이균구·이명헌은 증손이고, 이들은 병인박해기에 순교하므로 4대에 걸쳐 신앙을 증거하였다.
<table>
<tbody>
<tr>
<td> </td>
</tr>
<tr>
<td>그림 10 이승훈 가계도</td>
</tr>
</tbody>
</table>
 

이승훈은 어려서부터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학문을 닦는 데 노력하였고, 장성한 뒤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정약용(요한 사도)의 누이인 나주 정씨와 혼인하였다. 이승훈은 외숙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의 영향을 받아 서학의 천문, 역상(曆象), 특히 수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신앙 동기는 이벽의 권유에서 비롯되었다. 즉 1783년 10월 동지사행(冬至使行)의 서장관(書狀官)인 부친 이동욱(李東郁)을 따라가게 되었는데, 이벽이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그 안에는 서양 선비로 전교하는 사람이 있다. 그대가 가서 만나보고 신경(信經) 한 부만 구해 달라. 더불어 세례받기를 청하면, 선교사들이 분명 그대를 매우 사랑하여 기이한 물건과 패물(玩好)을 많이 얻을 것이다. 반드시 그냥 돌아오지 말게”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이벽의 권고와 수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서 성당을 찾아갔다. 북당 선교사들에게 다과를 대접받고 󰡔천주실의󰡕(天主實義) 수질(數秩), 󰡔진도자증󰡕(眞道自證), 󰡔성세추요󰡕(盛世芻 ), 󰡔기하원본󰡕(幾何原本), 󰡔수리정온󰡕(數理精蘊) 등과 시원경(視遠境), 지평표(地平表) 등을 받았다.

1784년 2월 무렵 북당 성당에서 그라몽(Grammont, 梁棟材) 신부는 “천주님께서 그를 조선 교회의 반석으로 예정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신앙의 문을 처음으로 열었으므로 그에게 성 베드로의 이름을 주었습니다”라고 하면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귀국 후 그는 북경에서 가져온 천주교 서적을 통하여 부족한 교리 지식을 보완하였다. 그해 겨울 서울 수표교 인근의 이벽 집에서 이벽·권일신·최창현·정약용·김범우 형제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 세례식을 통하여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이룩한 이승훈은 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이승훈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차례의 박해를 겪었다. 그는 교회에서 물러남과 다시 나옴을 거듭하면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신앙에 대한 견해를 여러 가지 형태로 표명하였다. 한문 서학서를 한글로 번역한 그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사건 시 부친이 천주교 서적을 불사르는 동시에 칠언율시(七言律詩) 두 편을 짓자,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형조판서 김화진(金華鎭, 1728~1803)에게 보내었다. 이는 일시적으로 신앙이 흔들렸던 것에 불과하였다. 1789년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그 박해로 인하여 다른 어떤 가족들보다도 더 큰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저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모이게 된 형제들 모임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례를 주는 일이 중단되지 않게 하려고 저 대신 다른 두 사람이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승훈은 여러 차례 을사년(1785) 이후에는 배척하였다고 진술했지만, “과연 을사년 이후에 한 번 이 천주학을 믿었으며, 몇 년 동안 단념할 수 없었다”라고 고백하였다. 이에 황사영은 “그 후 그는 아버지의 엄한 반대와 악한 벗들의 많은 비방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참아 견디며 성교회를 봉행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외형적으로 배교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외척내수(外斥內守) 내지 외배내신(外背內信)의 이중적 모습으로 자신의 내면적 천주 신앙을 지킨 것이다.

1786년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신자들의 신앙심과 선교열을 북돋우려 가(假)성무집행제도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787년 이 제도가 잘못된 일임을 알고 중단하고, 1789년 북경에 밀사 윤유일(尹有一, 바오로)을 파견하였다. 이때 이승훈이 보낸 서한에서, “나는 완전히 하느님의 은총을 잃어버리고, 또 자진하여 마귀의 종이 되어, 성사들을 집전하는 일에 관여하기까지 엄청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것은 나의 영혼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영혼까지 잃어버리게 하였으므로 나의 죄 중에서 가장 큰 죄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1787년 겨울 반촌(泮村) 김석태(金石太)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이기경(李基慶)은 “정미년 10월 무렵부터는 승훈의 무리들이 다시 천학(天學)을 숭상한다는 말이 귀에 시끄러울 정도였습니다”라고 하였다.

 

1790년 4월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을 받은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결정하였다. 그해 7월 윤유일을 다시 북경에 보내며 쓴 서한에서 “우리를 직접 가르쳐 주고, 좀 더 확실하게 도와줄 수 있는 사제를 한 분을 모셔야겠습니다.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이 깊은 구렁에서 어떻게 저희를 다시 꺼내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친 밀사의 파견과 이승훈의 서한은 북경 교회뿐만 아니라 교황청까지 크게 감동시켰다. 교황 비오(Pius) 6세(1717~1799)은 1792년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 교회를 특별히 보호하고 지도하도록 위임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교황청과도 간접적으로 유대 관계를 맺게 되었고, 또한 그것은 이미 5년간에 4천 명의 신자를 갖게 된 조선 교회 발전의 기반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791년 11월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홍낙안은 채제공에게 「장서」(長書)를 보내 윤지충과 권상연(權尙然, 야고보)을 사형에 처할 것을 요구하면서, 이승훈과 정약용 등 사교의 무리를 일망타진할 것을 촉구하였다. 평택 현감이던 이승훈은 소환되어 형조 신문에서 구서(購書), 간책(刊冊), 반회(泮會) 등에 대해 모두 모함이라고 부인하였지만, 삭직(削職)을 당하였다. 1801년 12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은 홍익만(洪翼萬, 안토니오, 복자)은 “저는 갑인년(1794)에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지속적으로 교회 활동에 관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승훈 베드로는 1801년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ol>
 	<li><b> </b><b>권일신</b><b>(</b><b>權日身</b><b>, </b><b>프란치스코 하비에르</b><b>, 1742~1791)</b></li>
</ol>
 

권일신(權日身)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성오’(省吾), 호는 ‘직암’(稷菴)으로, 경기도 양근의 한감개(大甘浦, 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살았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은 그의 형이고, 1801년의 순교 복자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은 그의 아들, 1819년의 순교 복자 권천례(權千禮, 데레사)는 그의 딸이다. 권일신은 일찍부터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아 학문을 닦았으며, 장성한 뒤에는 안정복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천주 교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1784년 가을 이벽(요한 세례자)이 천주교 서적을 들고 그의 집으로 와서 머물며 교리에 대해 토론한 뒤부터였다. 이어 같은 해 겨울, 그는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베드로), 정약용(요한 사도) 등과 만났고, 그 자리에서 동료들과 함께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이 조선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세례식이었다. 양근과 인천을 오가며 살고 있던 사위 권일신이 경기 덕곡의 장인댁을 방문하고 하루를 묵은 다음에 한양으로 들어간 일이 순암일기에 여러 번 등장한다.

 

1785년(74세) 을사년

3월 6일 성오(권일신)가 양근에서 왔다(省吾自楊根來).

3월 8일 성오와 원대(안경연)가 서울에 들어갔다(省吾元大入京).

3월 13일 천학 옥사가 일어났는데 어떤 일로 중지되었다고 한다. 형조판서 김화진이 담당한다고 한다(聞天學獄起 因以中止 刑判金華鎭爲之云).

 

순암일기를 보면, 양근에 살던 권일신은 1785년 음력 3월 6일(양력 4월 14일 목요일) 덕곡의 이택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는 이틀 뒤인 3월 8일(양력 4월 16일 토요일)에 권일신은 한양으로 갔다. 권일신이 서울로 가기 위하여 덕곡을 떠난 지 닷새 뒤인 3월 13일(양력 4월 21일 목요일) 일기에서 순암은 “천학 옥사가 벌어졌다는 소문을 들었다”라고 적었다. 형조에서 적발한 사람들, 그리고 나중에 형조로 찾아가서 예수의 상을 비롯한 천주교 성물을 돌려달라고 요구한 사람들이 남인의 유명한 집안 자제들임을 알고 훈계한 뒤 방면하였으므로 옥사가 중지되었다고 말한 것이다. 을사년에 벌어졌던 최초의 천주교 적발 사건, 즉 을사년의 형조 적발은 1785년 음력 3월 9일(양력 4월 17일)에 일어난 일이라 비정할 수 있다.

권일신은 이때부터 천주교 전파에 열중하여 자신의 가족들은 물론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친척과 지인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다. 이후 그는 이승훈 등 지도층 신자들과 함께 교회를 이끌어나가는 데 앞장섰다. 권일신은 장인 순암에게 천주교는 참으로 진실한 학문이고 천하의 큰 근본과 통달한 도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면서 거듭 권유하기도 하였다. 1785년 아들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과 함께 김범우의 집에서 있었던 신앙공동체 모임에도 참석하였고, 사건이 일어나자 형조에 권상문·이윤하(李潤夏)·이총억·정섭(鄭涉) 등을 데리고 가서 압수한 서적과 물건들을 돌려달라고 요구였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조동섬(趙東暹, 유스티노)과 함께 용문산에 있는 절에 가서 8일 동안 피정을 하였다. 1786년 봄에는 그들과 함께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수립하였고, 그 자신이 신부들 가운데 한 명으로 임명되어 약 1년 동안 활동하다가, 1787년 봄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갑진년과 을사년의 일을 겪으면서 천주교를 배척하는 장인 순암과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위 권일신의 관계가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런 와중에 권일신의 부인 안씨가 1788년에 전염병을 앓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음력 6월부터 양근 권씨 집안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권철신의 아들 권상문 내외도 병을 앓았고, 6월 26일에 권상문의 어머니이자 권일신의 부인이었던 순암의 딸이 병사하였다. 순암은 7월 1일에 딸의 부고를 접하였다. 전염병 때문인지 권일신 부인의 장례는 넉 달이 다 되어 가던 10월 25일에야 거행하였다. 12월 17일(양력 1789년 1월 12일 월요일)에 권일신이 인천을 떠나 한양을 들렀다가 덕곡으로 찾아왔다. 안정복은 딸의 초상 뒤에 만난 사위라서 슬픈 마음을 억제할 수 없다는 소회를 일기에 남겼다.

덕곡을 방문한 권일신은 이틀을 묵고 12월 19일에 양근으로 돌아갔다. 여기서도 한양을 떠나서 덕곡으로 온 것이 월요일이었으므로 그 전날 한양에서는 천주교 공동체의 집회가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주교에 대한 경계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내놓고 집회를 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천주교 금지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어서 신자들 사이의 조심스러운 왕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일신이 상처한 지 3년 뒤인 신해년(1791)은 순암과 권일신 모두에게 결정적인 해였다. 장인과 사위, 두 사람 모두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 7월 20일(양력 8월 19일) 정오에 안정복이 운명하였다. 이 사실은 순암의 손자 안철중(1755~1820)이 조부를 대신하여 책력 일기에 적어 넣었다. 그리고 11월 29일에는 안철중은 한양에서 온 양근 사람을 통해서 11월 24일(양력 12월 19일)에 고모부 권일신의 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 역시 일기에 적었다. 안정복이 별세하기 전에 권일신에게 보낸 편지가 한 통 남아 있다. 1791년 5월 7일에 보낸 것이다. 이 편지를 보면 생애의 마지막 해에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구절들이 적혀 있다. 주요한 내용을 추려서 보면 다음과 같다.

 

자네의 병은 내 평소 잘 알고는 있지만, 근년 이래로 매번 병이 더하여 심해졌다는 소식만 있었네. 대저 생사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네. 매번 자네가 “산속이 이처럼 맑으니, 천상의 즐거움 무엇하리오.”라고 말한 구절은 범상한 사람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네. 이로써 말한다면 저네의 생사를 나도 신경 쓸 것이 없으니 축하할 만하네. 요즘 죄악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했는데, 형제의 집안에 두환(痘患)으로 6, 7세 아이 두셋을 잃었네. 이 또한 천주께서 내리신 벌로 그런 것이니 다만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네. 자네가 능히 이 편지로써 절필한다고 여긴다면 국아(掬阿) 무리들이 그것을 능히 알겠는가? 맥아(麥阿)와 송아(松阿)까지는 나도 모를 것이니, 어찌 가련하지 않겠는가? 자네는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함께 하던 때를 기억할 것이니, 이 어찌 장인과 사위 간이라 그런 것이겠는가? 절필하는 것이 이처럼 몹시 서글플 뿐이네. 이만 줄이네. 신해년 단양 후 2일, 미친 늙은이.

 

순암은 사위 권일신에게 편지를 쓰기 보름 전이었던 4월 23일에 외손 권상문의 편지를 받았다. 권상문은 그 편지에서 생부 권일신의 병이 중하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므로 중병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사실을 안정복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천주교 문제로 빚어진 서먹한 관계를 풀 수 있는 기회도 시간도 갖지 못하였다. 석 달이 못 되어 안정복은 80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말았다. 천주교를 공격하던 목만중과 목인규 등이 통문을 돌려 권일신을 천주교의 교주로 지목하며, 홍낙안은 이 사실을 직접 고발하였다. 권일신은 11월 3일(양력 11월 28일) 형조에 체포되었다. 당시 권일신을 고발하는 상소에는 권일신이 사학(邪學)에 빠져 장인 안정복의 상이 났음에도 이에 문상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해서 권일신은 자기 입장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다. 권일신의 변론 내용에 대해 『정조실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 자식이 외조부의 상을 당했을 때 장례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말하면, 그때 마침 제가 중병에 걸려 死境에 처했기 때문에, 힘을 다해 구호하느라 다른 것을 돌볼 겨를이 없어 가서 참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초상 때에는 두 아들이 모두 가서 護喪하였고, 또 장사지낸 뒤에도 계속 왕래를 하였으니, 이로써 애초부터 서로 어긋난 일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권일신은 본인이 중병으로 사경을 헤매다 살아났기 때문에 덕곡으로 가서 안정복의 빈소에 호상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는 점, 그래서 본인 대신에 두 아들이 가서 호상을 섰다는 점, 마지막으로 안정복의 장사 뒤에도 안씨와 권씨 두 집안의 종형제들은 계속 왕래하였다는 점을 들어 잘못된 비난이라고 반박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안정복의 일기에 실린 내용을 통해서 권일신의 자기 변론이 사실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권일신의 중병설에 대해서 안정복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791년(80세) 신해년

4월 23일 종하 편에 국손(권상문)의 편지를 보았다. 그의 아비(권일신) 병이 중하다고 한다. 걱정이다(從何便見菊孫書 其父病可重云 憂悶).

 

안정복은 4월 23일에 손자 권상문의 편지를 받았고, 권상문은 친아버지 권일신이 중병에 들었다고 연락하였다. 석 달을 채 넘기기 전인 1791년 7월 20일 오시(낮 12시)에 안정복의 상이 났다. 이것은 책력일기에 적힌 사항인데, 안정복의 뒤를 이어서 그 손자 안철중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안정복이 사망할 당시에 권일신의 병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4월 23일 편지로 보면 1791년 초여름부터 권일신이 중병을 앓았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안정복의 손자 안철중은 조부가 썼던 책력일기를 이어서 쓴 부분에서 안정복의 초상을 어떻게 치렀는지에 관해서 상세하게 적었다. 그중에서 양근의 사위 권일신 집안에 부고를 전하고, 조문한 내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791년(80세) 신해년

7월 22일 두설을 양근, 이천에 보내어 부고를 하였다(送斗雪于楊根利川告訃).

7월 24일 양근의 두 종형제(권상문·권상학)가 돈 2량을 부조하였다(楊根兩從兄 弟賻錢二兩).

8월 28일 양근의 큰 종형(권상문)이 왔다(楊根伯從兄來).

8월 29일 종형님과 이장이 돌아갔다(從兄主及李丈還).

 

권일신의 말대로 안정복의 상이 났을 때 권일신의 두 아들 권상문과 권상학이 덕곡으로 가서 문상하였다. 그리고 두 집안은 계속 왕래하였다. 이것을 보면 안정복의 상과 관련한 권일신의 주장이 신빙성을 지닌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권일신은 사학의 괴수라는 지목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거듭된 형벌과 신문을 받은 끝에 제주도 圍籬安置의 판결을 받았다가 유배지를 예산으로 변경하는 감형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권일신은 유배를 떠나기 전, 혹은 떠난 직후에 형벌의 후유증으로 이내 사망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하여 권일신이 유배를 떠나기 전에 이윤하(李潤夏)의 집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설도 있다. 이는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에 실린 내용에 근거를 둔 것인데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안동 권씨 족보를 보면 권일신의 여동생이 이윤하에게 시집갔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이윤하는 권일신의 매제였다. 따라서 권일신은 유배를 떠나기 전에 한양에 있던 매제 이윤하의 집에서 몸조리를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권일신이 사망한 장소도 한양에 있던 이윤하의 집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안정복의 일기를 이어서 쓴 안철중은 권일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기록을 남겼다. 아래는 안철중이 조부 안정복을 대신하여 적은 책력일기의 해당 부분이다.

 

1791년(80세) 신해년

11월 29일 양근 사람이 서울에서 왔다. 들으니 고모부(권일신) 상이 24일에 났다고 한다. 매우 놀랐다(楊根自京來 聞姑母夫喪事出於二十四日云 驚愕驚愕).

12월 초1일 석교점에 가서 양근의 (고모부 권일신) 상여 나가는 것을 기다렸으나 미치지 못하고 돌아왔다. 저녁에 표형(권상문)이 여기를 지나기에 가서 조문을 하였다.

 

위의 일기에 따르면, 안정복의 손자 안철중은 고모부 즉 권일신의 상이 1791년 음력 11월 24일에 났다고 적었다. 그러므로 양력으로 따지면 권일신의 사망 날짜는 1791년 12월 19일이 된다. 또한 안철중은 “12월 1일에 권일신의 상여를 마중하러 석교점이라는 곳으로 나갔지만 만나지 못했고 대신에 저녁에 권일신의 친자이며 권철신의 양자였던 권상문이 덕곡을 지나기에 가서 조문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안철중이 적은 책력 일기를 통해서 보면, 권일신은 유배형을 받은 뒤에 떠나지 못했으며 1791년 11월 24일(양력 12월 19일) 한양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어서 안철중은 권일신이 한양에서 사망한 지 6일 뒤인 12월 1일(양력 12월 25일) 권일신 상여의 발인이 있었다고 적었다.총회장 최창현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우러르는 사람이 “권일신, 정약종, 이존창”이고, 정약전도 “가장 존경하여 믿은 자는 권일신”이다,
<ol>
 	<li><b> </b><b>이존창</b><b>(</b><b>李存昌</b><b>, </b><b>루도비코</b><b>, 1759~1801) </b></li>
</ol>
 

이존창(李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은 내포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천인 출신으로, 본관은 경주였고,‘단원’(端源) 이라는 이름도 갖고 있었다. 이존창은 본디 신창(新昌) 성덕산(成德山) 집안의 사천(私賤)이지만, 그는 이웃 마을에 살던 홍낙교･홍낙민 형제와 함께 홍유한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1774년 덕산 장천에 사는 이기양을 찾아가 수학을 하였다. 이기양 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닦던 이존창은 2년 후인 1776년 4월경, 이기양이 경기도 南川(현 이천)으로 이주하자, 다시 그의 집을 왕래하면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해 5월경에는 이기양의 아들 이총억과 함께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 시기는 바로 권철신이 문도들을 받아들이면서 녹암계가 형성된 시기이다.

이존창은 1776년부터 녹암계의 일원으로 이기양과 권철신의 영향을 받아 양명학을 접하였다. 그의 학문 과정과 교유 관계는 이후 서학을 이해하고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A-① 이존창은 천안의 상천이다. 일찍이 이름이 군적에 올라 있었다. 그가 학문을 하기 위하여 태수(太守)에게(軍役에서 면해 주기를) 청하자, 그의 재주를 아껴 면역(免役)을 허락하였다.

A-② 저(이기양)는 갑오(1774년)․을미(1775년) 연간 덕산에 거처할 때 (이존창의) 얼굴을 알게 되었고, 그 뒤 장옥(과장)에서 또 얼굴을 보았습니다.

A-③ 저(이존창)는 이기양이 덕산에 있을 때 가서 배웠으며, 이기양이 이천으로 이사한 뒤에도 여러 해 가서 머무르며 과거 공부를 했습니다.

A-④ (이기양은) 또 일찍이 이존창을 집안에서 양육하면서 문필을 가르쳤고, 전에는 최창현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A-⑤ 비범한 재능을 타고났던 그(이존창)는 집에서 먼저 글을 익혔다. 그러다 차츰 큰 포부로 일하고 자연의 이치를 깊이 알려는 열망을 품고 스승을 찾아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던 중 고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경기도 양근) 권씨(權氏) 집안의 명성을 듣고 끌리어 그들(권철신․일신 형제)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권(일신)은 이 제자의 훌륭한 성품과 뛰어난 재능에 매료되어 그에게 세심한 정성을 쏟았다. 그때 이미 그(권일신)는 유럽의 학설들(doctrines européennes, 즉 西學)을 안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권철신은 이존창을 제자로 받아들인 다음 해 즉 1777년 여름에 이기양과 함께 덕산 장천을 거쳐 여사울로 이존창을 방문하고 그의 집에서 유숙한 사실을 홍유한에게 전하였다. 이존창은 이처럼 1774년 이래 약 2년 동안 이기양으로부터, 1776년 이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1784년 무렵까지는 권철신에게 사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존창이 학문의 길을 택한 이유는 과거 때문이었다.

이존창은 1784년 겨울 권일신(權日身)에게서 천주 교리를 배운 뒤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세례를 받은 후 내포로 내려와 적극적인 전교 활동 덕분에 여사울을 중심으로 하는 내포 지역에는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어 그는 1786년부터 약 1년 동안 시행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시행할 때 신부로 임명되어 전교 활동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를 ‘충청도 내포(內浦)의 사도’라고 일컬어졌다. 한편, 『송담유록』에는 이 시기에 이존창의 첫 번째 체포과정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천안 여소동에 이존창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오로지 사학만 익혀 근처에서 이름이 있었다. 상민은 물론이고 남녀노소가 서로서로 전파하여 익히게 하였다. 신사원이 공문을 보내 붙잡아서 천안 가옥에 가두었다.

예산현감 신사원이 이존창을 체포한 소식을 접한 이기성은 천안 옥문 밖으로 가서 이존창에게 절을 올린 뒤에 자기도 함께 죽기를 원하였다. 천안 군수 조정옥이 평소 친숙했던 터라 불러와 몹시 꾸짖었지만 듣지 않았다. 또한 이존창의 딸이 양반 집으로 시집간 사실을 『송담유록』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홍낙민의 외종질인 조아무개는 참판 조경진(趙景禛)의 후예이고, 상사(上舍) 조육(趙錥)의 손자였다. 이존창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다. 홍낙민이 권유하여 성사되었다. 그들의 학문은 배움의 깊고 얕음을 가지고 높고 낮음의 서열을 삼을 뿐, 문벌의 높고 낮음은 따지지 않고 혼인하여 교류하는 지경에까지 다다랐으니, 사학이 세상의 도리를 그르치는 정도가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이존창의 신분과 활동과 초기 내포지역 신앙공동체 모습을 『수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존창은 천안의 상민으로 홍낙민이 속량시켜준 종의 아들이었다. 홍낙민과 이기양에게서 글을 배워, 글씨도 잘 쓰고 시에도 능하였다. 사학에 조예가 깊어 인근을 교화시켰다. 마을 사람 중에 다른 고을의 상민과 혼인한 사람도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교화되어 사학을 하니, 덕산과 홍주, 예산과 청양, 정산의 사이가 온통 사학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 이에 한글로 전파하여 가르쳤다.

사학을 본받아 배우는 노비들은 문서를 불태우고 대가 없이 양인으로 풀어주었으며, 사학을 배우는 이웃 사람들은 가난한 처지를 도와주고 의식을 돌봐주었다. … 서로 교중이라 부르며 노비와 주인이 존비의 구분도 없고 멀고 가까운 사람이 친소의 구별도 없습니다.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일단 이 술법에 빠지면 미혹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존창의 순교 후 1850년대에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서울·경기·충청·전라에서 순교한 그들의 행적을 조사하면서 “오늘날의 천주교 신자들 대부분이 그때(교회 창설기) 이존창이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평가하였다.
<ol>
 	<li><b> </b><b>소결</b></li>
</ol>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조선 천주교회는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이 세웠으니, 이들이 마땅히 조선 천주교회의 창립자들이라 불려야 한다.”라고 강론에서 밝혔다. 교황은 선교사 없이 신앙공동체를 세우고, 박해를 받으면서 신앙을 이어 나간 주역은 평신도이며, 창립은 1779년 강학회부터 1836년 모방 신부 입국까지를 설립과정으로 보았다.

한국천주교는 성호학파의 권철신 문하 제자들이 ‘보유론적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면서 시작하였다. 이벽은 서학이라는 학문을 1779년 강학회에서 학문에서 신앙으로 바꾼 것이다. 그의 뜻에 따라 1883년 이승훈이 북경 사행길에 따라가서 북경의 천주당을 찾아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조선에 귀국하여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며 동료들에게 전파하였다. 이에 따라서 1784년 서울 수표동 이벽 집에서 정약종·정약용·권일신·권철신 등이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교회 설립 직후 복음 선교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해 겨울부터는 김범우가 세례를 받고, 많은 사람이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에 김범우는 자신의 집을 신앙집회의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는 이벽 집이 세례 공동체이라면, 김범우의 집은 집회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 공동체는 1785년 음력 3월 9일(양력 4월17일) 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 사건으로 조선 사회에 공적으로 드러났다.

한편, 천주교의 전교 활동은 지방까지 확산하여 나갔다. 권일신의 제자인 이존창은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유항검은 전주에서 신앙을 전파하였다. 1786년에는 이승훈과 권일신 등이 스스로 신부가 되어 천주교 성사를 거행한 모방 성직 제도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하지만 신앙공동체의 초기 구체적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정미년(1787)에 성균관 앞 반촌(泮村) 사건의 전모도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교회에서 내포의 사도라고 칭하는 이존창의 신앙적 여정은 더욱 그렇다. 이에 새롭게 발굴되어 해제된 ‘송담유록’과 ‘수기’ ‘다블뤼 비망기’ 등의 사료 안에서 이존창을 만나며, 더 깊이 조명되기를 기대해본다.
<table>
<tbody>
<tr>
<td>〈표 2〉 성호학파와 한국천주교창립 동향</td>
</tr>
<tr>
<td>
<table>
<tbody>
<tr>
<td><b>년도</b></td>
<td><b>성호학파</b></td>
<td><b>한국천주교창립 관련</b></td>
<td><b>내포 지역 이존창</b></td>
</tr>
<tr>
<td>1759</td>
<td>이병휴 덕산(1747년경) 이주</td>
<td> </td>
<td>이존창 출생,</td>
</tr>
<tr>
<td>1760</td>
<td>홍유한 여사울 이주</td>
<td> </td>
<td> </td>
</tr>
<tr>
<td>1763</td>
<td>성호 이익 사망.</td>
<td>홍낙민 여사울 이주</td>
<td> </td>
</tr>
<tr>
<td>1763</td>
<td>이삼환 덕산 이주</td>
<td> </td>
<td> </td>
</tr>
<tr>
<td>1765</td>
<td>이기양 수원에서 덕산 이주하여 이병휴 문하 수학</td>
<td> </td>
<td> </td>
</tr>
<tr>
<td rowspan="2">1768</td>
<td>이병휴와 권철신 교류</td>
<td> </td>
<td rowspan="3">홍유한 문하에서 홍낙민과 함께 수학 시기

 </td>
</tr>
<tr>
<td>이병휴는 이기경에게 권철신과 교류 권유함</td>
<td> </td>
</tr>
<tr>
<td>1769</td>
<td>권철신 양명학 수용</td>
<td> </td>
</tr>
<tr>
<td>1774</td>
<td>이벽이 덕산 이병휴 방문(6~7월)-세 번의 서한</td>
<td> </td>
<td rowspan="4">이기양 문하 수학</td>
</tr>
<tr>
<td rowspan="4">1776

 </td>
<td>홍유한 영남 순흥 이주(1월)</td>
<td> </td>
</tr>
<tr>
<td>이기양 이천으로 이주</td>
<td>홍낙민 충주 이주</td>
</tr>
<tr>
<td>이병휴 사망(음력10월 15일)</td>
<td> </td>
</tr>
<tr>
<td>안정복 순암계와 권철신 녹암계으로 분파.</td>
<td>녹암계 이충억 등 형성</td>
<td>권철신 문하로 들어감</td>
</tr>
<tr>
<td>1777. 여름</td>
<td> </td>
<td> </td>
<td>이기양·권철신이 이존창

집 유숙</td>
</tr>
<tr>
<td>1779</td>
<td> </td>
<td>천진암 주어사 강학회

(이벽 참석)</td>
<td> </td>
</tr>
<tr>
<td>1783</td>
<td></td>
<td>이승훈 북경 사행길</td>
<td> </td>
</tr>
<tr>
<td rowspan="5">1784</td>
<td> </td>
<td>이승훈 북천주당 세례</td>
<td> </td>
</tr>
<tr>
<td> </td>
<td>이벽 첫 전교 –정약용 정약전 형제(6월)</td>
<td> </td>
</tr>
<tr>
<td> </td>
<td>이벽과 이가환 토론(여름)</td>
<td> </td>
</tr>
<tr>
<td>이기양이 안정복 방문

(10월)</td>
<td>이벽 양근 권철신 유숙(9월)</td>
<td> </td>
</tr>
<tr>
<td>안정복 『천학설문』간행(11월)</td>
<td>이벽·권일신·권철신·정약용·정약전 등 세례</td>
<td>권일신으로부터 세례받음</td>
</tr>
<tr>
<td>1785</td>
<td>안정복 천학고, 천학혹문 간행</td>
<td>을사추조적발(乙巳秋曹摘發)사건(4월 김범우 유배)</td>
<td>내포지역 전교활동 시작</td>
</tr>
<tr>
<td>1786~7</td>
<td> </td>
<td>모방성직제도</td>
<td>모방성직 제도에서 신부로

활동</td>
</tr>
<tr>
<td>1787</td>
<td> </td>
<td> </td>
<td>천안 투옥(첫 번째)</td>
</tr>
<tr>
<td>1778</td>
<td> </td>
<td>반촌 사건</td>
<td> </td>
</tr>
<tr>
<td>1791</td>
<td>안정복 『천학문답』, 사망</td>
<td>진산사건, 권일신 사망</td>
<td>투옥 후 배교하고 석방 후 홍산 이주.</td>
</tr>
</tbody>
</table>
</td>
</tr>
</tbody>
</table>
<b>Ⅲ</b><b>. </b><b>이존창의 체포와 석방</b><b>·</b><b>처형에 대한 </b><b>刑政</b>

 
<ol>
 	<li><b> </b><b>이존창의 </b><b>1786</b><b>년 체포와 석방</b></li>
</ol>
이존창이 최초로 관아에 체포된 것은 그동안에는 1791년 진산사건 때가 정설이었다. 하지만, 1791년 진산사건에 대한 통문을 돌린 홍낙안은 진술서에서 이존창이 천안에서 형벌 받은 사실을 적시하여 상기시켰다. 그는 이존창이 천안에서 형벌을 받은 적이 있는데 한결같이 뉘우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1801년 이기양의 공초에서는 옥(獄)으로 이존창을 찾아간 일을 거론하였다. 정조는 병오년(1786) 이존창이 체포되었을 때 새로운 길로 나가겠다고 밝혀 석방하였다는 기사를 1797년 실록에서 밝히고 있다.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은 신해박해(1791) 때에 이존창이 한 차례 체포된 적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한편, 심환지는 1787년 호서지방의 각 고을을 암행한 후 정조에게 보고한 동향에는 이 지역의 천주교와 관련된 언급이 없다. 이 당시 조정 관료는 천주교의 확산에 대해 우려하던 시기이다. 그들은 시골의 백성까지도 천주교에 물든 이들이 많고, 이들은 언문으로 번역한 것을 베껴 보고, 글을 모르는 사람은 입으로 전하고 있다며, 더 흩어져 퍼지기 전에 엄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존창의 첫 번째 체포와 석방은 모방성직자로 활동하며 천주교가 내포지역 전역으로 확산하던 시기이다. 1786년 신사원(申史源)은 내포의 천주교 확장을 막고자 그를 체포하여 관할지 천안에 이송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보면,

 

… 진산 군수(珍山郡守) 신사원이 전에 예산(禮山)을 맡고 있을 때 편지를 보내 예산 촌민들이 가지고 있던, 언문으로 번역하거나 베낀 책을 바로 형리(刑吏)에게 보내 불구덩이에 던졌는데, 그중 󰡔성교천설(聖敎淺說)󰡕과 󰡔만물진원(萬物眞源)󰡕 두 책은 모두 증거가 있다.

 

이존창을 체포한 신사원은 1785년 8월 19일에 부임하여 1789년 6월 19일까지 예산 현감을 지냈다가 그달 20일에 진산 군수로 제수받아 이동하였다. 신사원은 이존창의 첫 번째 체포자이며, 1791년 진산사건으로 파직과 함께 유배를 당한 인물로 알려졌다. 이존창의 첫 번째 체포와 석방은 󰡔승정원일기󰡕ㆍ󰡔일성록󰡕 등의 관찬 사료와 󰡔송담유록󰡕의 사찬 사료를 통하여 추론할 수 있다. 이 부분은 향후 조금 더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ol>
 	<li><b> 1791</b><b>년 체포와 석방</b><b>(</b><b>신해박해</b><b>)</b></li>
</ol>
이존창의 내포지역 활동은 1786년부터 예산 현감 신사원과 조정에 노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낙안은 1791년 사대부들에게 천주교 확산의 심각성을 알리면서 진산사건을 언급하였다. 정조는 그해 11월 3일 승지 홍인호(洪仁浩)를 홍낙안에게 보내 통문 내용을 자세하게 알아보도록 하였다. 이때 홍낙안은 이승훈, 권일신 그리고 이존창의 존재를 언급하며, 이존창은 관아에서 형벌을 받고도 뉘우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정조는 이들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이존창 처리는 충청도 관찰사 박종악에게 위임하였다.

 

… 예산의 백성 이존창은 이미 본 읍에서 형벌을 받고도 한결같이 뉘우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 전교하기를, 증거물이 적발되면 조정에서는 그저 유사에게 맡겨 그에 맞는 법에 따라 처리하면 그만이다. 어찌 부질없이 수응(酬應)하여 갑의 말을 가지고 을을 잡아다 조사하고 을의 공초를 가지고 갑을 붙잡아 따진단 말인가 … 예산 백성들의 행위가 참으로 이와 같다면 매우 가증스럽기는 하지만 도신(道臣)에게 맡겨 처치(處置)하게 하면 족할 것이다. 죽여야 할 죄라면 그 실정을 보고하고, 유배 보내야 한다면 곧바로 처결하라고 충청도에 분부하라”.

 

박종악은 내포(內浦)의 이존창을 1791년 11월 13일에 체포하여 형벌을 가하고 공주 형옥에 가두었다. 그는 이존창을 문초하면서 권일신의 자명서(自明書)를 보여주면서 회유하였다고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정조는 기호지방에서 감화시키기 어려운 자는 이존창이지만, 선 석방하고 추후 그의 행동을 보면서 최종적으로 결정한다는 여지를 남겨놓았다.

 

이존창을 날마다 타이르고 부지런히 인도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 보고 그의 모습을 보니 마음을 바꾸어 사학을 떠나 정도로 전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 그가 진심으로 잘못을 고친 것이 이처럼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대번에 풀어주기는 어렵기에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었습니다. 이를 아울러 여쭈며 삼가 처분을 기다립니다.

 

박종악의 장계에 정조는 … 기호(畿湖) 지역에서 교화하기 어려운 자가 바로 이존창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존창마저 환하게 죄를 뉘우치고 사학(邪學)을 배척하여 요술(妖術)이라고까지 하니 그가 깨우쳤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사학에 물든 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개과천선한 지는 얼마 되지 않으므로 이후에 그가 진짜 정학으로 돌아왔는지 아닌지는 그가 얼마나 열심히 성심을 바쳐 공을 세우는지를 봐서 결정할 것이니 우선 풀어주라고 하였다.

 

신해년(1791) 박종악은 내포의 천주교 신자를 감영에 잡아들인 뒤 이존창의 징계 사실을 체포한 신자들에게 알리자 그들은 두려워 배교하였다. 이는 박종악이 내포교회 신자들에게 이존창의 배교를 선전하면서 회유의 도구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박종악은 정조에게 남인을 통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회유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천주교 문제로 조정에서 거론되던 인물들이 남인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비화하는 것을 항상 경계하였다.

 

󰡔추안급국안󰡕에 의하면, 이존창은 1801년 2월 16일 공초에서 “저는 10여 년 전에 과연 서양의 사학을 하여 수년간 미혹되었는데, 저희 형이 금지하므로 홍산으로 이주했다가 금산으로 다시 이사하였다”라고 진술하였다. 이존창은 홍산 이주 후에 전교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전라도 무장의 최여겸은 한산 처가에서 이존창을 만나 다시 교리를 배우고 신자가 되었다. 공주의 고윤득과 금명주ㆍ인철ㆍ홍철 부자, 청양의 이씨 뿐만 아니라 홍주 출신 황일광, 밀사로 활동한 보령출신 김유산 등에게 천주교를 전하였다. 천안 출신 최구두쇠와 아들 천명·명은 이존창의 여사울에 살 때 이웃에 살면서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 그의 아들 최억명은 고산 저구리로 이존창이 이주할 때 따라가 살았다. 김유산은 신유년 공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저는 본래 의지할 데 없고 머물 데도 없는 사람으로, 승려가 된 지 수년 만에 다시 환속하여 홍산 땅에 가서 신발을 팔아 생활했습니다. 제가 사는 촌락에 이존창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는데, 여러 날 꼬드기면서 천주교를 배우도록 권하였으므로 저는 기뻐하며 따르다가 매우 친숙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또한 몇 년 있다가 이존창이 고산 저구리로 옮겨갔지만, 그의 집을 왕래하면서 이전처럼 학습했습니다.

 

1795년 초에 이존창은 홍산을 떠나 다시 고산 저구리로 이주하였다. 이존창은 홍산에서 고산으로 이주한 것은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맞물려 진행하였다. 이는 고산 저구리가 대둔산의 깊은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어서 박해로부터 안전한 은신처로 보았기 때문이다.

 
<ol>
 	<li><b> 1795</b><b>년 체포와 연금</b><b>(</b><b>을묘박해</b><b>)</b></li>
</ol>
을묘년 박해(1795)는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 체포와 관련하여 발생한 것이다. 이존창은 1795년 4월 전주의 유관검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서 주문모 신부를 만나 지방 사목 방문에 동행하였다. 이때 이존창은 고산 저구리로 내려와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어 주문모 신부는 초남이 유관검ㆍ유항검 집을 방문하고, 고산, 남포, 공주, 온양, 내포 등지를 방문 후에 서울로 돌아왔다. 주문모 신부는 서울 귀경 후 그해 5월 11일(양력 6월 27일) 입국 사실이 발각되면서 을묘박해(乙卯迫害)가 일어났다. 이 박해 여파로 이존창은 1795년 9월 성주산에서 금정역 찰방에게 체포되었다. 그 당시 이존창의 체포와 주문모 신부의 행적은 그동안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해석을 달리하여 혼선이 있었다.

하지만, 정약용의 기록과 󰡔사학징의󰡕 󰡔일성록󰡕 그리고 교회 사료를 교차하여 보면, 1794년 12월 14일경 주문모 신부 조선 입국 → 이존창 홍산에서 고산 저구리로 이주(1795. 초) → 1795년 4월경 주문모 신부 지방순회(이존창·유관검 안내) → 고산 저구리 이존창 집 방문 → 유관검의 초남이 유숙 → 보령·공주·온양·내포 방문 → 서울 귀환(4월 하순) → 주문모 신부 조선 입국 발각(5월 11일) → 강완숙 집 피신 → 주문모 신부 지방으로 피신(서울 여주, 연산 2개월 피신) → 정약용 금정역 찰방 임직, 이승훈 예산 유배(7월 26일) → 정약용 금정 일대의 천주교 신자 김복성을 체포(8월 17일) → 이존창을 성주산에서 체포하여 공주 감영 이송(9월 19일) → 정약용 12월 25일 서울로 돌아왔다는 도식이 성립된다.

 

1795년 주문모 신부 체포에 실패한 이후 그해 7월에 관학 유생 박영원 등 637인이 상소하여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이단 학설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8 조목을 앞세워 천주교가 유교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이존창은 1791년 형옥에서 모두 자복해놓고 옥문을 나서자 예전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며 형정으로만 다스릴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정조는 이들에게 더 깊이 연구하여 그 뜻을 밝힐 방도를 세우도록 하였다. 박영원의 상소를 보면 당시 천주교 공동체의 상황, 지배층이 지닌 위험 의식, 이존창의 회심을 보여주고 있다.

 

조정이 예(禮)와 의(義)로 나라를 세우고 기자(箕子)께서 세운 8 조목의 가르침을 따라 고려 시대 삼승(三乘)의 법을 몰아내니 예악(禮樂)과 문물(文物)로 소중화(小中華)라고 불리며 지금까지도 그 아름다움을 잇고 있습니다. … 불행히도 일종의 음흉하고 사특한 무리가 있어 서양(西洋)의 서책을 사들여와 스스로 교주(敎主)가 되어 이단(異端)의 학설을 주창하여 부자간의 친함을 끊고 군신(君臣) 간의 분의를 업신여기며, 남녀가 서로 뒤섞여서 부부간의 윤리가 어지러워지고 상제(喪祭)를 모두 폐해서 신인(神人) 간의 이치가 끊어지며, 정욕(情慾)이 사사로이 타오르게 하여 예악으로 교화할 수 없게 하였고, 천당과 지옥의 설이 일어나 형정(刑政)으로 제어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호서 지방의 이존창(李存昌)은, 연전의 형옥(刑獄)에서 모두 자복했는데 옥문을 나오자마자 또다시 전과 같이 되었습니다. … 이존창의 흉악함은, 전날에 자복했던 것을 생각하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전향하지 않고서 전하고 익히기를 더욱 열심히 하는 것이니 또한 그들이 변명했던 말을 믿고 용서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정약용은 박영은 등의 상소가 있고, 그다음 날에 천주교에 물들어가는 호서(湖西) 지방의 금정 찰방(金井察訪)에 제수받았다. 정약용은 1795년 7월 26일 서울을 떠나 그달 29일에 도착하였다. 그해 8월 17일에는 금정 일대의 천주교 신자 김복동을 체포하고, 김복동은 그달 30일에 4인을 데리고 와서 자수하였다. 그 후 이존창은 성주산에서 9월 19일 체포한 것으로 보인다. 금정 활동에 대해 정약용은 자찬 묘지명에 “금정역은 홍주 땅에 있으니, 역(驛)의 이속(吏屬)이 서교를 많이 익혔다. 주상의 의도는 정약용이 호유(曉諭)하여 그것을 금지하게 하려 한 것이다”라고 썼다. 이는 정약용을 금정에 보낸 정조의 의중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이에 정약용은 이 일대 호족(豪族)에게 제사 지내기를 권하였다.

정약용은 이존창의 체포과정과 시기, 사후 과정을 󰡔금정일록󰡕과 자찬 묘지명 등에 남겼다. 이 사료를 근간으로 보면, 정약용은 1795년 9월 19일 성주산에서 이존창을 체포하여 충청도 관찰사 유강(柳焵)에게 보내었다. 유강은 이존창을 심문 후 공주 형옥에 가두었다. 1795년 12월 20일에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된 이정운(李鼎運)은 정약용이 이존창을 체포한 공로로 발탁되도록 노력하였다. 이에 정약용은 이정운에게 다음과 같이 서한을 보내며 이를 만류하였다.

 

이존창(李存昌)은 살려고 도망을 다니는 하나의 어리석은 백성에 지나지 않는 자입니다. 비록 그 어리석은 백성이 비와 바람을 부르며 둔갑술(遁甲術)로 몸을 숨기는 사람이어서 오영(五營)의 병졸을 다 풀어서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약용(若鏞)이 책략을 세워서 어느 날에 체포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공로로 여길 것이 없을 터인데, 더구나 저 이름을 바꾸고 자취를 숨기어 이웃 고을에 피해 있던 자에 지나지 않는 자를 잡은 것이겠습니까? 그자가 숨어 있던 곳을 알아내어 한 사람의 장교와 한 사람의 병졸을 이용하여 마치 항아리 속에서 자라 잡듯이 붙잡은 것이고, 더구나 그의 행적을 염탐할 적에는 애당초 참여하지도 않았다.

 

정조는 충청도 임지로 떠나는 이정운에게 호서지방에 천주교가 번성한 상황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정약용은 금정 찰방에서 보임을 잘 수행하고, 천주교를 맨 처음 퍼트린 자를 감영 옥에 가두었다고 말하였다. 공주 감영에 도착하면 이존창을 조사한 다음에 징계하라고 말하였다.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은 이존창이 1795년 염찰(廉察)할 때 잡혀서 감영 옥에 갇힌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존창은 공주 문초에서 배교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하며 독촉하였다. 감영에서 신문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전과 달리 굴복하지 않았다.

이존창은 옥중에서 천주교가 직면한 상황을 중국 교회에 전하였다. 그는 1796년과 1797년에 황무실 출신 황심, 1798년과 1799년에도 김유산을 밀사로 보내었다. 김유산(金有山)은 충남 보령의 역말 사람으로 이가환ㆍ이존창과 왕래하였다. 이존창은 1798년 공주 옥에 찾아온 김유산에게 죄가 없는 사람들이 형벌을 받는 것에 대해 설명하였다. 충청도 천주교 신앙공동체는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1798년에 들어와서 격화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존창은 이런 상황을 북경에 알리면 천주교 탄압을 늦출 수 있다고 보았다. 김유산은 옥에 갇힌 스승 이존창의 뜻에 따라 연행사의 역마 몰이꾼으로 위장하여 북경에 들어갔다. 그는 밀사 파견에 대해 신유박해 때 문초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무오년(1798)에 이존창이 (충청) 감영의 감옥에 있을 때 저에게 … 우리나라는 천주 십계가 국가에 유익함을 알지 못하여 법을 만들어 엄금해서 무죄한 사람들이 형벌을 많이 받으니 진실로 원통하다. 지금 만약 이러한 이유를 모두 설명하여 천주당 신부에게 편지를 보낸다면 우리나라가 금령을 늦추는 길이 융통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한 번 저 나라에 왕래하여 천주당에 들어가 그 방향을 알아보고, 이후로는 연달아 편지를 왕래하게 해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라고 진술하였다. 김유산은 역마 몰이꾼에 차출되도록 도모하여 북경에 도착하였다. “다음에 일행의 군졸들과 함께 관광차 나와서 남당과 북당 두 곳의 천주당을 보았습니다.…김유산은 조선으로 돌아온 뒤에 옥중에 있는 이존창을 보러 가서 그 대강을 말하니, 그는 상당히 기뻐하였다.

 

이존창은 옥중에 있을 때(1799) 북경을 다녀온 김유산에게 편지와 여비를 주고 다시 서한 전달 임무를 맡겼다. 김유산은 이번에는 연행사의 마부가 되어 중국에 들어갔다. 남 천주당에 가서 서한을 전달하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 답신을 받아와 이존창에게 가져다주었다. 이 시기는 1977년(정사년)에 시작한 충청도 천주교 탄압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고, 조정 관료는 이존창의 처형을 주창하던 때와 맞물려있다.

 

기미년(1799)에 이존창이 아직도 옥중에 있었는데, 저에게 말하기를, “너는 이미 한 차례 저 나라에 다녀왔으니 편지를 전해주는 방법이 반드시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모름지기 이번 사행에 다시 들어가라.”라고 하고서 돈 15냥을 주고 행장을 꾸리도록 하였다. 또 가는 올로 된 하얀 무명 겨울옷 한 벌이 들어 있는 푸른 보자기를 주면서 말하기를, “이 가운데 편지가 있으니, 곧 서울에 사는 정 생원의 서찰이다. 반드시 중국 천주당 신부에게 잘 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돈으로 참빗과 생강 등을 사서 평안도로 내려갔습니다. 다른 역졸과 교대하여 삼방 태평거 마부가 되어 중국에 들어갔습니다. 그 지역에 도착한 뒤 틈을 타서 혼자 가서 남천주당 문밖에 이르렀는데, 문을 지키는 한 사람이 팔을 밀며 쫓아내기에 저는 손으로 가슴에 십자 성호를 긋고, 또 입고 있던 겨울옷을 비벼댔습니다. 그가 비로소 친근하게 대하며 옷을 잡기에 저는 옷을 벗어 주었습니다. 저는 곧 관소로 돌아왔다가 출발하기 사흘 전에 다시 갔더니, … (제가) 지난번에 주었던 겨울옷을 꺼내와 저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저는 답장이 그 안에 봉해져 있으리라고 생각하고서 전과 같이 옷을 입고 귀국했습니다. 이존창이 옥에 있었으므로 저는 옥중으로 이를 가져다 전해주었습니다”라고 공초에서 진술하였다.

 

이존창은 옥중 생활하는 동안에 교회 지도자와 연통하며 직간접적으로 교회 활동을 지속한 것으로 보인다. 이존창은 북경교회에 서한을 전달하며 조선의 상황을 알렸다. 그는 이 임무를 자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황심과 김유산에게 맡겼다. 이 선택은 박해의 위협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한 것이었다. 1795년 이후 공주 형옥에 있는 이존창에 대해서 조정 관료들은 사학의 괴수라고 하며 끊임없이 상소하였다. 1796년 12월에 사간원 이경명은 요서(妖書)를 소리 내어 읽고, 어리석은 남녀들이 이존창을 추종하여 내포가 사학의 소굴이 되었다며, 사형을 정조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정조는 이존창의 일은 조정관료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호서(湖西)에 있으면서 시골 사람에게 들으니, 가까운 현에 거괴(巨魁) 이존창이라는 자가 있는데 저번에 처형당한 괴수보다 열 배는 더 심한 자여서 나라의 금법이 지엄한 때에도 평상시와 똑같이 요서(妖書)를 소리 내어 읽으매 어리석은 남녀들이 다들 바람에 휩쓸리듯 그를 추종하여 내포(內浦)의 한쪽은 거의 사학(邪學)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 이존창은 의금부가 특별히 사형시키는 벌을 시행하게 하소서, 비답하기를, 이존창의 일은 사학의 거괴라고 하였고 또 속히 사형을 시행하자고 청하였으니 형조로 하여금 대신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

 

1797년 2월 조정 관료들은 이존창이 석방 이후 뉘우침 없이 활동을 이어가는 그에 대해 사형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그들은 사형을 집행하여 예산(禮山)과 신창(新昌)의 경계에 효수(梟首)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정 관료 김종수ㆍ김이소ㆍ이병모ㆍ윤시동 등도 이존창을 처형하지 않으면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 잡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상놈 이존창 처형에 문제는 없지만, 형륙(刑戮)은 백성을 교화하는 방법 중에서 말단에 속하는 것이라며, 관찰사가 직접 가르치고 경계하라고 하였다. 이존창에 관한 조정 관료 의견에 다시 한번 교화적 형정을 취하였다. 정조는 풍속교화로 유교적 지배 질서를 강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존창은 연전에 서학(西學)의 교주로 자처하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미혹하기를 끝이 없이 하였습니다. … 그의 공포에 대해 들어 보니 전날에 뉘우쳤던 것과는 하나하나 모두 상반되었고 심지어 오직 속히 죽기를 원한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 도신에게 분부하여 엄하게 세밀히 캐묻게 해서 만일 여전히 모질고 사나워서 조금도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면, 결안(結案)에 대한 다짐을 받은 뒤에 계문하여 예산(禮山)과 신창(新昌)의 경계에 효수(梟首)해서 인근의 미혹된 무리들을 징계하여 두려워할 줄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날로 선(善)으로 옮겨 가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게 한다면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르게 이루는 방도에 보탬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봉조하 김종수(金鍾秀)는 … 죽이고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의를 결단코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는 ‘이존창은 사학의 우두머리로서 아직도 공개 처형을 당하는 형벌을 면하고 있으니, … 옛날의 악을 고치지 않고 다시 요사스럽게 홀리는 것을 일삼고 있다면 결안에 대한 다짐을 받아 시원하게 사형을 시행해서 인심을 바로잡고 요사스런 술법을 그치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판중추부사 이병모(李秉模)는 ‘뉘우쳐 스스로 새롭게 할 것을 허락했는데 끝내 옛날의 악을 고치지 않았으니 결단코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은 ‘그의 공초에서 처음에 잘못을 뉘우쳤기 때문에 조정의 명령 또한 스스로 새롭게 할 것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완악하고 사나운 점을 고치지 않고 그릇되는 것이 더욱 심해졌으니 결단코 사형에 처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충청도 전역은 정사박해(1797~1799)가 일어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고 처형당하였다. 정사박해(1798) 시기 조정 관료 윤함은 호서지방에서 궁벽한 도서 지방이나 산속 토굴 사이에 피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였다. 또, 채제공은 호서지방의 천주교를 퍼뜨린 이존창을 처형하지 않고서는 내포지역의 천주교 전파를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부교리 심규로(沈奎魯)는 옥 안에서까지 사당을 영접하고 있다고 이존창을 법대로 처형하기를 상소하였다. 이는 이존창이 형옥 안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만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임장원은 이존창을 처형하지 않으니 그 무리가 방자해지고 있다고 보았다. 정조는 한결같이 재조사와 도백에게 엄히 다스리도록 하겠다는 답을 하였다.

반면, 충청감사 이태영은 1799년에 정조에게 이존창의 석방을 요청하였다. 이에 정조는 조정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받아들여 승낙하였다. 조정관료들은 이존창의 석방 명에 끊임없이 반대하며, 충청감사 이태영의 문책을 주장하였다. 이때도 정조는 이존창의 일벌백계를 주장하는 조정 관료에게 신해년에 했던 행적을 가지고 지레 의심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석방 결정 후에도 조윤수(曺允遂)는 “서학(西學)이 남녀의 구별이 없고 귀천의 등급이 없습니다. 화폐를 통용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모아들이면 주인이 되고 써 버리면 노예가 되니 이런데도 만약 한번 엄히 물리치고 통렬히 다스리지 않는다면 나라에 해를 끼치는 것이 홍수와 맹수보다 심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사회에 미칠 위험성을 개진한 것이다. 그러므로 호서의 죄인 이존창(李存昌)을 온전히 석방하라는 명을 거두고, 해당 관찰사 이태영(李泰永)에게 견책하는 벌을 시행하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정조는 이존창을 풀어주었으니 장차 지켜보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조정관료들의 이존창 석방 반대 상소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존창(李存昌)은 도신이 장계를 올려 용서해 주기를 청하고 잘못을 깨달았다고 하였으니, 옥사(獄死)하게 하는 것은 또한 책은 불사르고 사람은 사람답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판부사 심환지의 의견 가운데, 이존창이 진짜로 잘못을 깨달은 것은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도리어 의심스럽다고 미리 억측하는 것에 가깝다. 성인(聖人)이 《주역》을 지을 때 혁괘(革卦)에서 낯빛만 고치는 것도 고치는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마음을 고치는 것으로 말하자면, 어찌 먼저 마음부터 고치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이존창이 과연 마음을 고친 실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도신의 장계가 조정에 보고된 뒤에 조정의 체모로 볼 때 어찌 미리 의심하여 인색하게 굴으셔야 하겠는가?

 

정조는 충청감사가 이존창을 용서해 주자고 요청한 사실을 들어 석방을 결정하였다. 이존창을 옥에서 죽게 하는 것은 자신의 교화주의 형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존창은 석방된 후 천안으로 방귀전리(放歸田里)되어 관문(官門) 근처에 거주하였다. 관원은 그의 일상적 행위를 특별히 샅샅이 살펴보고 매달 보고하였다. 이존창은 1799년 석방되어 천안에서 연금상태로 신유년에 체포될 때까지 머물렀다.

 
<ol>
 	<li><b> </b><b>신유박해</b><b>(1801) </b><b>네 번째 체포와 처형</b></li>
</ol>
‘신유박해’는 1801년 1월 10일 정순왕후가 사학을 엄금하라는 억압적 정책으로 시작되었다. 이 박해는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전국적 시행으로 다양한 계층의 천주교 신자색출, 고문, 사형으로 이어졌다. 이존창은 신유박해(1801)가 시작되자 다시 호서의 괴수로 지목되었다. 이해 2월 5일 심환지는 선조(先朝)께 영구히 사학을 버리겠다고 하여 석방된 이존창이 다시 하고 있으므로, 그는 감화되기 어렵다며 다시 엄벌하도록 요청하였다. 신유박해는 정조 재임 시에 천주교를 반대하며 이존창의 처형을 주장했던 조정 관료들이 주도하였다. 이존창은 1801년 2월 12일 체포하여 국문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공주 감영 옥에 갇혔다.

홍주 영장 노상추는 이존창이 포도청에 체포 소식을 듣고, 천주교는 “양주(楊朱)·묵적(墨翟)·노자(老子)·석가(釋迦)와는 다른데, 모든 대상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은 이들보다도 더 평등하게 대한다”라고 보았다. 이존창은 2월 16일 공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조정 관료는 이존창이 온 나라에 사학의 수괴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며. 이자가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선다면 백성 보기에 나라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존창은 최필공ㆍ이승훈ㆍ정약종ㆍ최창현ㆍ홍교만과 함께 결안을 받고 처형지 충청도 공주로 이송되었다.

 

호서의 사학 수괴는 바로 이존창입니다. 연전에 가뭄을 근심하실 때 도신의 장계에서 소결(疏決)하여 풀어 주는 것을 경솔히 청해서 마침내 완전히 석방되었고, 이어 도신에게 명하여 그가 개심하였는지 여부를 자세히 살펴 달마다 형조에 보고하게 하였습니다. 본도에 분부하여 감영 옥사에 다시 가두고 엄히 형신하여 자백을 받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죄인 이존창(李存昌)에게 다시 공초를 받은 뒤 한 차례 형문하고 신장 30도를 치고 형문을 정지하였다. 이존창(李存昌)은 여러 번 감옥에 들어간데다가 변사(變詐)가 무상(無常)하였으니, 중외(中外)의 멀고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이존창이 사학의 괴수가 됨을 모르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러한데도 이 자가 만약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간다면 팔방(八方)의 청문(聽聞)에 손상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사당(邪黨)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존창도 살았으니, 다시 두려워할 만한 것이 없다.’ 할 것이니, 이 또한 일률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존창은 본도(本道)에 내려보내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사형에 처하여 도를 경계하고 두렵게 하도록 하였다. 이존창은 본도(本道)에 내려보내어 백성들을 모아 놓은 후에 정법(正法)하여, 한 도에서 경계가 되어 두려워하는 바탕으로 삼도록 하였다.

… 이존창(李存昌)은 본래 호서(湖西)의 관교(官校)로서 사학에 오염되었는데, 최필공과 동시에 체포되었다. 영옥(營獄)에 들어가기에 이르러, ‘뉘우쳐 깨달았다.’고 공초를 바치고 석방되었는데 한결같이 곧바로 포도수(逋逃藪)를 만들어 전혀 오염된 데 대해 개철(改轍)하지 않은 채 무리를 불러 모아 반결(盤結)하고 호서의 거괴(巨魁)가 되었다. 충청도에 압송(押送)하여 정법함으로써 많은 사람을 깨우치게 하였다.

 

서울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이존창의 형 집행은 충청도 감영에서 하도록 하였다. 감영은 관문(關文)을 충청도 각 현에 보내 이존창의 참수를 공고하며, 천주교에 대한 본보기로 삼도록 하였다. 이존창의 형 집행은 1801년 음력 2월 28일(양력 4월 10일) 공주의 금강변에서 이루어졌다. 이존창의 사후 50년 뒤 다블뤼 주교는 그의 행적을 기록하며, 이존창에 대한 황사영의 평가에 대한 의문을 표명하였다. 다블뤼는 이존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의 판결문은 이 마지막 전투에서 그가 어떠한 나약함도 보이지 않았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확증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황사영(알렉시오) 자신은 그 상황들을 잘 알지 못한다고 자인하면서 모호한 말을 한마디 하였는데, 그 말이 이러한 견해의 공신력을 보완해 줄 수도 있으리라! 그는 자기 동포들에게 공포스러운 광경을 보여주도록 결정되었다. … 그의 친척들 가운데 몇 사람이 처형 현장에 있었는데, 그의 머리는 여섯 번째 칼질에 가서야 떨어졌다. 그리고 모든 참석자들이 그의 죽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이 그의 유해를 수습하였다. … 그들은 시신을 가져와서 조상들의 묘지에 안장하였다.

 

이존창은 체포되어 문초를 받을 때마다 인간적 나약함에 배교하고 풀려나기를 반복하였다. 하지만, 그는 석방 후에 지역을 넓혀 가며 전교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이존창은 천주교를 탄압하는 조정 관료들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그는 교화적 형정을 펼친 정조의 사망 이후 사학 괴수라는 죄명으로 처형을 당하였다. 이존창 처형 당시 천주교에 대한 인식은 종교보다는 사학으로 불리며 오랑캐와 같은 집단으로 사람과 집안, 국가에 화를 불러올 것으로 보았다.

 

 
<ol>
 	<li><b> </b><b>맺음말</b></li>
</ol>
이존창은 18세기 말 상민(商民) 신분으로 천주교를 수용하고, 내포지역에 전파한 인물이다. 이 연구는 그동안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에 의지한 연구를 탈피하여 󰡔일성록󰡕ㆍ󰡔승정원일기󰡕ㆍ󰡔수기󰡕를 토대로 이존창에 대한 조정 관료의 인식과 정조의 형정(刑政)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의 결과를 보면,

첫째, 1791년 박종악이 기록한 󰡔수기󰡕를 통하여 그 당시 이존창이 전파한 내포지역의 천주교 실정(實情)과 그의 영향력이 새롭게 드러났다. 둘째, 조정 관료는 천주교의 평등사상을 실현하는 이존창의 처형을 주창한 데 반해, 정조는 규범적 판결보다 교화주의 형정(刑政)을 지향하였다. 셋째, 이존창은 1786년ㆍ1791년ㆍ1795년 체포와 석방을 반복하다 1801년에도 체포되어 그해 2월 공주에서 처형되었다.

이 연구는 18세기 말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한 조정 관료의 주장과 정조의 형정을 조명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존창이 이룩한 내포 신앙공동체는 신분, 남녀노소로 차별받지 않는 평등사상을 실현해 나갔다. 이 공동체는 노비의 문서를 불태워 양민으로 풀어주며 그들의 자립을 서로 도와주고 교중(交中)이라고 부르고 받아들였다. 이는 신분적 평등을 넘어 경제적 공동체로 사회질서에 반하는 행위이었다. 이에 조정 관료는 조선의 신분사회와 유교 가치관을 위협하는 이존창을 ‘호서의 사학 괴수’라며 끊임없이 견제하고 참수할 것을 주창하였다. 이존창은 ‘형옥에서 자복했는데 옥문만 나서면 전과 같이 되었다는’ 조정 관료들의 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주장을 보면, 이존창은 16년 동안에 네 차례의 체포와 석방을 반복하고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이존창이라는 인물에 대해 오랜 시간에 고착된 ‘배교’라는 이미지가 한순간에 정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이존창과 내포교회 모습을 기억하며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동안 이존창 연구는 단편적으로 이루어져 왔고, 새로 발굴된 사료도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존창의 삶과 행적은 이해되지 않은 채 상호 모순 상태로 아직도 남아 있다.

이에 후속 연구에서는 이존창에 관한 교회사적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내포지역 교회와 사회사 연구로 확장되어 다각적으로 조명되기를 기대해본다.

 

<b>[</b><b>참고문헌</b><b>]</b>

 
<ol>
 	<li>문헌</li>
</ol>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사학징의(邪學懲義)󰡕.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일성록(日省錄)󰡕.

 

강세정 저, 정민 역주, 2022, 󰡔송담유록󰡕 김영사.

노상추, 1801, 󰡔국역 노상추 일기󰡕 8, 국사편찬위원회.

박종악, 신익철ㆍ권오영ㆍ김문식ㆍ장유승 역해, 2016, 󰡔수기󰡕(隨記) 정조의 물음에 답하는 박종악의 서신󰡕,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상식 역주, 2014,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국역본 73,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이재기 저, 정민 역주, 2022, 󰡔놀암기략󰡕, 김영사.

조광 편저, 이상식 역주, 1999, 󰡔정조시대 천주교사 자료집󰡕Ⅰ~Ⅲ,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조광 역주, 2001, 󰡔역주 사학징의󰡕 Ⅰ,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조광 역주, 2022, 󰡔역주 사학징의󰡕 Ⅱ,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2, A-MEP, Les Documents de Mgr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 󰡔조선 순교자 역사 비망기󰡕 필사 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위원회, 2012, A-MEP, Les Documents de Mgr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조선 순교자 약전󰡕 필사 문서 판독 자료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

 
<ol>
 	<li>단행본</li>
</ol>
정 민, 2022,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김영사.

<u>정 민</u>, 󰡔파란󰡕 2, 천년의 상상, 2019.

 
<ol>
 	<li>논문</li>
</ol>
김수태, 2004, ｢조선 후기 내포지역 天主敎의 확산과 李存昌｣, 󰡔지방사와 지방문화󰡕 17(1), 79~132쪽.

<u>김수태</u>, 2011, ｢이존창의 신앙과 배교문제｣, 󰡔김성태 신부 고희 기념 논총 :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와 문화󰡕, 한국교회사연구소, 281~356쪽.

김현진, 2012, ｢󰡔審理錄󰡕을 통해 본 正祖의 범죄판결 특성과 對民敎化政策｣, 󰡔한국학연구󰡕 28,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527~563쪽.

박근수, 2020, ｢병인박해기 신창지역 천주교 순교자 행적｣, 󰡔지방사와 지방문화󰡕 23(1), 역사문화학회, 121~155쪽.

<u>박근수</u>, 2023, ｢내포 여사울 출신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관련 사료 정리(史料 整理)｣,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 1, 공세리성지박물관, 95~137쪽.

박종악, 2014, ｢󰡔수기(隨記)󰡕수록 교회사 관련 기록 번역｣, 󰡔敎會史硏究󰡕 44, 한국교회사연구소, 105~142쪽.

소진형, 2022, ｢신유사옥(辛酉邪獄) 이전 천주교에 대한 국가적 대응과 그 정치적 의미 : 천주교에 대한 여론형성과 사회의 보수화적 관점에서｣, 󰡔정치사상연구󰡕 28(1), 한국정치사상학회, 95~120쪽.

이강옥, 2014, ｢󰡔日省錄󰡕 別單의 형식 및 분류｣, 󰡔民族文化󰡕 44, 한국고전번역원, 121~177쪽.

임병조, 2008, ｢內浦地域의 構成과 아이덴터티에 關한 硏究｣,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장유승, 2014, ｢1791년 내포(內浦):박종악과 천주교 박해｣, 󰡔敎會史硏究󰡕 44, 한국교회사연구소, 60~104쪽.

전종익, 2009, ｢정조시대 천주교 전래와 평등｣, 󰡔法史學硏究󰡕 40, 105~137쪽.

조성을, 2003, ｢금정시절 다산의 활동과 사상｣, 󰡔한국실학연각승구󰡕 6, 한국실학학회, 163~184쪽.

차기진, 2002,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생애와 신앙｣, 󰡔敎會史硏究󰡕 19, 한국교회사연구소, 165~182쪽.

<u>차기진</u>, 2007, ｢예산 여사울과 내포의 사도 이존창｣, 󰡔천산 김진소 신부 고희 기념 논총 : 한국 사회와 천주교󰡕, 47~86쪽.

 
<ol>
 	<li>사이트</li>
</ol>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http,//kyu.snu.ac.kr.

한국고전번역원 DB, http://db.itkc.or.kr.

한국사데이터베이스(조선시대 사료 DB), http://db.history.go.kr.

한국천주교주교회의, https://cbck.or.kr.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dangjin.grandculture.net.

한국학자료통합플랫폼, https://kdp.aks.ac.kr.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9:02:36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하나.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 내포지역은 천주교 신앙의 박물관이다.]]></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25]]></link>
			<description><![CDATA[<b>하나</b><b>. </b><b>천주교 중심의 내포학</b>

내포지역은 천주교 신앙의 박물관이다.

내포학 편집실

 
<ol>
 	<li>들어가는 말</li>
 	<li>자료의 수집과 활용</li>
</ol>
① 데이터 개방과 연구 재현성 문제 ② 데이터 공유와 연구 확장성 문제

③ 데이터 보존과 연구 지속성 문제
<ol>
 	<li>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li>
</ol>
3.1.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

3.2. 내포학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

① 시간별 분류 ② 공간별 분류 ③ 주제별 분류 ④ 형태별 분류
<ol>
 	<li>문화자원의 활용과 자원화</li>
 	<li>나가는 말</li>
</ol>
 
<ol>
 	<li><b> </b><b>들어가는 말</b></li>
</ol>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내포지역의 총체적인 삶을 다루고 있는 지역학이다. 지역학은 인문학와 예술, 경제와 지정학, 종교와 문화 등을 포함한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 사고 또는 인간다움 등 인간의 근원 문제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 지역의 문학, 사학 철학과 같은 보편적 인문학을 지역적 특수성을 통해 이해할 때인문학은 지역학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지역적으로는 1890년 한국천주교회가 내포지역에 설립한 두 성당, 간양골(공세리)과 양촌(합덕)이 사목한 내포 지역의 시간과 공간적 특성 안에 담긴 천주교 신앙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고, 가톨릭 신앙의 요람인 내포 지역의 총체적인 삶을 가톨릭 신앙을 중심으로 인식하며 주제별로 형태별로 구분하며 연구하여 내포지역이 천주교 신앙의 살아있는 박물관임을 드러내고 있다.

내포지역은 천주교 신앙의 박물관이다. 지리적 개념과 문화적 개념, 시대적 바탕(정치와 경제 포함) 위에서의 내포 지역의 가톨릭 신앙 역사는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으며, 가톨릭 신앙의 수용과정과 정착, 가톨릭 신앙이 내포 지역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미래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내포 지역이 가진 공간적, 문화적, 현상적 특징을 가톨릭 신앙 안에서 바라보며, 내포 지역 안에서의 가톨릭 신앙의 총체적 삶과 가톨릭의 핵심 가치를 지역 사회를 넘어서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는 방안이 연구되고, 내포의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활용을 통한 지역 주민의 문화향유권 충족 방안에 대해 연구가 지속될 때,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지역학으로써의 자리를 굳건하게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내포라는 지역적인 특성 안에서의 삶과 종교문화, 통치 이념과 종교의 갈등에서 겪게 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박해, 신분제도 안에서 인간의 고뇌와 평등한 신앙인의 삶, 인간의 존귀함과 고귀함을 깨달은 이들의 배려와 나눔의 삶,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진 이들이 추구하는 자유와 평등을 내포지역은 잘 보여주고 있고,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이를 탐구하고 있으니, 지역학으로써의 내포학은 이 지역의 훌륭한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ol>
 	<li><b> </b><b>자료의 수집과 활용</b></li>
</ol>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료의 수집과 활용이며, 수집된 데이터에 대한 교회와 연구자들의 의식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데이터에 대한 인식은 크게 세 가지로 제시되는데, “첫째, 데이터 개방과 연구 재현성 문제, 둘째, 데이터 공유와 연구 확장성 문제, 셋째, 데이터 보존과 연구 지속성 문제”이다. 수집된 데이터를 위의 세 가지 큰 틀 안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내포학 연구자들뿐 아니라 각 교구의 교회사 연구소나 개인 연구자들이 데이터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대한 인식의 공유와 확장이 필요하다. 인식의 전환은 데이터 개방과 공유로 이어져 협업을 통한 새로운 자료가 지속적으로 생성되어 풍성한 아카이브를 구축하게 된다.

<b>① </b><b>데이터 개방과 연구 재현성 문제</b>

연구 자료들이 개방될 때 연구자들은 누적된 자료를 통해 좀 더 쉽게 그 주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현재 다양한 자료들인 인터넷에 올라와 있지만, 그 출처가 불분명한 것이 많고, 출처도 없이 사용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자료에 대한 공유 정책을 수립하고, 연구데이터의 저작권과 소유권을 주장하기보다, 출처만 밝힌다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연구자 및 공공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자료의 검색 및 다운로드가 용이하도록 제공하며, 연구 결과에 사용된 원본 데이터를 함께 제공할 때, 연구 결과에 대해 다른 연구자들의 검토 과정을 거쳐 연구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할 때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데이터 개방과 연구 재현성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이를 통해 연구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높이며, 연구자들의 자료 공유를 촉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현재 교회는 시복시성을 준비하면서 다양한 데이터를 일목요연하게 제공하고 있다. 주교회의나 교회사 연구소들, 가톨릭 대학교 도서관, 연구 논문 자료실들은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 연구자들이 그 데이터의 기초자료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고, 기존 연구자들이 이미 해 놓은 것을 처음인 것처럼 반복하는 경우도 있다. 교회사에 대한 연구는 결국 누적된 연구의 이득을 새연구자들이 쉽게 누릴 수 있도록 데이터 개방이 필요하다.

 

<b>② </b><b>데이터 공유와 연구 확장성 문제 </b>

데이터 공유는 연구 결과의 투명성과 공동연구를 추진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다. 현재 각 교구의 교회사 연구소가 활발하게 연구활동을 하고 있고, 개인 연구자들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교회도 연구소와 개인 연구자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자료 공유 방법, 저작권 등에 대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명확한 데이터 공유 정책을 수립하여 연구소와 연구자들의 역량을 강화시키고, 자료에 대한 접근성을 높여주어야 한다. 특별히 ‘주교회의’에서 연구자들의 모든 자료를 공유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을 해 주는 방안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이고, 연구 확장성을 위해 연속적인 주제를 제시하고 논문 공모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렇게 될 때 그 주제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나 응용이 가능하게 된다. 또한 그 주제에 대한 상세한 연구 방법론을 공개하여 다른 연구자들이 이를 참고할 수 있도록 하거나, 연구 결과에 사용된 원본 데이터를 함께 제공하여 다른 연구자들이 추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면 다른 연구자들과의 공동 연구나 그룹 연구, 온라인 포럼 등을 통해 연구 공유와 연구 확장이 촉진될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될 수밖에 없다. 각 교구의 교회사 연구소나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데이터가 공유될 때, 더 큰 결과물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b>③ </b><b>데이터 보존과 연구 지속성 문제</b>

데이터 보존은 연구 데이터의 원본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하는 것이다. 자료의 변형이 왔을 때, 원본 데이터를 통해 그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데이터를 저장할 때, 데이터의 안정성과 접근성을 보장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디지털 자료로 보존할 경우에는 표준화된 데이터 포맷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E-book으로 웹에서 제공하고, PDF 파일과 텍스트 파일, 이미지 파일과 음성파일의 포맷이 함께 사용된다면 데이터의 원본을 변형시키지 않을 있고,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안정성과 접근성을 보장할 수 있게 된다.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연구 지속성을 위해 연구자들에게 연구 자금을 지급하고, 기금을 형성하는 일이다. 기금이 형성되어 있을 때, 지속적이고 장기적이며, 수준 높은 연구가 지속되고, 출판과 자료 제공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ol>
 	<li><b> </b><b>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b></li>
</ol>
인문학 분야에서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연구와 교육을 혁신하려는 시도, 즉 인문학의 위기에서 부상한 디지털 인문학(Digital Humanities)은 미시적(微視的)으로는 지역학 강의의 범주와 지향점을 보다 명확히 하는 데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거시적으로 관성화된 인문학 교육의 목적을 상기시키고 성찰하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디지털은 오픈 소스(open source)의 영역이고, 디지털은 풍부함(copiousness)을 중시한다. 그래서 디지털 인문학은 생성 인문학(Generative Humanities)이며. 공동창조(co-creation)라고 말한다.

흩어져 있는 자료들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디지털 아카이브의 구축은 미시적으로는 내포지역의 총체적인 삶을 세밀하게 파악하여 분석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거시적(巨視的)으로는 내포지역의 총체적인 삶을 전체적으로 분석하여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연구자들 각자의 자리에서도 함께 협업하며 디지털 아카이브를 통해 지속적인 데이터 생성과 창조적인 활용이 가능하게 된다.

 

<b>3.1. </b><b>디지털 아카이브</b>(digital archive)

아카이브(archives)는 정부나 관공서, 기타 조직체의 공문서와 사문서를 소장·보관하는 문서국 또는 기록보관소를 의미하는 말이다. 보통은 웹에서 파일 전송을 위해 백업용이나 보관용, 기타 다른 목적으로 한곳에 모아둔 일단의 파일을 말한다. 아카이브란 단순히 파일들의 목록만을 포함할 수도 있지만, 지원되는 프로그램에 따라 하나의 디렉토리나 구조일람표 밑에 파일들을 조직화할 수도 있다. 웹사이트상에서의 아카이브는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흔히 일람표나 목록표 등을 통해 어떤 형태로든 액세스할 수 있도록 모아 놓은 개별 발간물들을 지칭하지만, 웹사이트에 게재된 잡지나 저널 그리고 신문 등의 내용 중에서 지난 기사들을 모아 놓은 것을 아카이브라고 부르기도 한다.

디지털 아카이브(digital archive)는 인터넷에 디지털로 이루어진 거대한 문서 저장고이자 콘텐츠 아카이브다. 디지털로 전환된 사물의 반영물은 디지털 복제로 수많은 사람의 용도에 맞게 사용될 수 있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지구화된 차원에서 실시간적인 데이터로 이루어진 내용물이 축적됨과 동시에 사용되는 시공간압축의 저장고이다. 이는 인터넷 사용자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올린 말과 생각, 의견과 감정이 쌓이는 실시간 저장고라고 할 수 있는데, 사용자가 올려놓은 디지털 콘텐츠는 그것이 저장되는 물리적 장소(서버)에 상관없이 네트워크 안에서 사이버스페이스라는 가상의 공간 안에 축적된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개인의 노력으로 구성되는 사적 아카이브와 공동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공적 아카이브로 구성된다. 디지털 아카이브가 네트워크로 서로 연결되면 새로운 모양으로 전환된다. 링크로 연결된 디지털 아카이브는 고립된 아카이브와 달리 상호 연결을 통해 양적 축적을 질적 변환으로 이끈다. 아카이브가 살아 있는 생명력을 가지려면 종류가 다른 새로운 창조물들과 접속해야 하고 새로운 링크를 만들어야 하며 하나의 부분이 기꺼이 다른 부분과 연결되어야 한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다른 사람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변형되고 확장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것은 타자에 의해 완성되는 관계의 연속이자 지속이다. 이러한 디지털 아카이브의 특성 때문에 지식과 정보의 완결성은 약화된다. 네트에서는 무수한 타자의 개입과 변형으로 정보와 지식의 자체 완결성이 과거에 비해 중요하지 않게 된다. 개인의 창의력과 집중에 의존하는 체계적인 저작물은 쇠퇴하고 공동 작업이나 기동성 있게 현실에 대응하는 부분적 중간 결과물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초고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미완성된 원고를 뜻하지만 이제 온라인 버전이란 다른 사람들의 비판과 개입을 기다리는 열려있는 지적 과정으로서 성격을 갖기에 이르렀다. 디지털 아카이브의 특징은 물리적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데이터의 단위로 축적된다는 특징으로 인하여, 디지털 아카이브는 장소의 소멸과 공간의 통일이라는 특징을 가진다.

디지털 아카이브에 축적되는 데이터는 플랫폼을 거쳐 저장된다. 축적된 디지털 아카이브의 정보는 그 시간성이 과거와 현재, 미래의 흐름에 모두 적용된다. 실시간으로 축적되는 정보와 실시간으로 조회되어 재현되는 축적된 정보는 항상 현시적이다. 또한 아카이브에 저장된 정보는 물질 아카이브와 다르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즉, 언제 어느 때라도 조회한다면 다시 살아날 예비 동면 상태로 남아 창조와 동시에 축적되는 것이다.

연구자들에 의해 형성된 자료들은 디지털 형태로 전환하여 저장한다. 연구자들에 의해 생성된 디지털화된 내용물은 축적되고, 연구자들의 활동 결과와 함께 누적되면서 디지털 아카이브는 확장된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아카이브는 문서, 소리, 이미지 등 다양한 형태로 원본을 재현한다. 디지털 아카이브에서는 사물이 디지털로 전환되어 보관된다. 이러한 디지털 정보들은 수많은 사람의 용도에 따라 사용된다. 그렇기에 디지털 아카이브는 기존 아카이브와는 다르게 보관보다는 사용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공간적인 접근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 등의 특성들이 이를 가능케 한 것이다. 결국 디지털 정보의 장점인 검색과 활용의 용이, 원본 변형의 용이와 복사의 특성을 그대로 가져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디지털 아카이브는 다양한 참여자들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지는, 열린 체계를 갖고 있기에 그 공공성을 강하게 가져간다고 할 수 있다.

 

<b>3.2. </b><b>내포학의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b>

지역을 연구 대상이자 주체로 하는 지역학은 수많은 역사의 조각들을 모으고, 현장을 조사하며, 기존 자료와 구술자료를 기반으로 연구하게 된다. 지역의 자료를 충실하게 발굴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서 오랜 연구활동을 해 오고 있는 향토학자들의 협력이 절대적이다.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1890년 간양골과 양촌에 세워진 두 본당의 사목지를 대상으로 하기에 광범위하고 숨겨진 역사가 더 많은 실정이다. 그러므로 먼저 수집된 역사와 문화자원을 구조화시켜 메타데이터(Metadata)를 작성해야 한다. 메타데이터(Metadata)는 일반적으로 데이터에 관한 구조화된 데이터로, 대량의 정보 가운데에서 확인하고자 하는 정보를 효율적으로 검색하기 위해 원시데이터(Raw data)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구조화 혹은 표준화한 정보를 의미한다. 시간, 공간, 주제, 형태별로 분류 체계를 마련하여 검색 및 활용에 용이하도록 구축하여 내포의 역사 문화자원과 신앙 유산자원을 디지털화해야 한다.

 

<b>① </b><b>시간별 분류</b>

이승훈의 세례를 통해 천주교가 시작된 1784년은 한국교회사에 획을 긋는 시간이다. 성호학파가 녹암계와 순암계로 구분되어 1777년 강학회가 시작된 시점을 기준으로 교회 창설 이전의 시간과 교회창설, 을사추조적발사건(1785년), 신해박해(1791년), 주문모 신부님의 입국과 활동과 을묘박해와 정사박해(1794~1801),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1871), 한불수교조약(1886년), 조선에 9개의 본당 설립(공세리, 합덕 설립, 1890년), 일제 강점기의 내포교회, 대전교구 설정(1948년), 6.25 전쟁(1950~1953),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 서울 세계 성체대회(1989년), 대전교구 시노드(2019년) 등으로 내포의 천주교 역사를 정리할 수 있다. 이 시간별 분류 안에 시대적 상황과 정치 경제와 문화와 천주교 신앙을 담아 구분하게 된다면 시간을 거슬러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하며 오늘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일의 우리 지역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된다.

 

<b>② </b><b>공간별 분류</b>

내포지역은 가톨릭 신앙의 박물관이다. 많은 이들이 내포를 ‘한국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라고 말하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고 부족한 정의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앙의 시작과 발전, 성장의 기원 등이 모두 담겨 있기에 요람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내포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신앙은 전국 각지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었고, 내포는 지금도 가톨릭 신앙의 중심으로 살아가며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고 있으니 요람이라는 말로 정의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이 있다. 분명한 것은 내포 지역은 가톨릭 신앙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살아 숨 쉬는 천주교 신앙 유산이 내포에 가득하고, 그것을 찾아 순례의 길을 걷는 이들이 이어지고 있다.

내포학의 공간별 분류는 크게 1890년부터 공세리 성당과 합덕성당이 사목하던 곳, 서산, 서천과 공주를 중심으로 오래된 성당과 초기부터 이어져 온 공소, 순교지와 교우촌을 중심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내포라는 공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의미 있는 공간들의 지리적 특성과 문화적 특성, 교통과 삶의 자리를 담아 디지털 아카이브를 구축하면 입체적으로 내포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한 국제성지로 선포된 해미를 중심으로 성지들을 연결시켜 공간의 개념을 입체적으로 구현한다면 성지를 순례하는 이들이 마치 메타버스 안에서 체험하는 그 놀라움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b>③ </b><b>주제별 분류</b>

지역학으로서의 내포학은 설정된 범위의 총체적인 삶을 다룬다. 천주교 신자들이 타 종교신자들과 어울려 살아가며 겪게 되는 모든 것들도 주제별로 분류가 될 수 있다. 유교와 천주교, 천주교 신앙과 불교 신앙, 유학자들과 실학자들, 지주와 소작농, 신분제도와 천주교, 교우촌과 신자들의 생활, 박해자와 배교자, 사제성소와 수도자 성소, 6.25와 천주교, 내포의 종교문화(성체거동, 장례와 연도, 판공성사, 성영회 사업, 음악과 건축 등) 등은 크게 내포문화를 주제별로 구분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된다.

 

<b>④ </b><b>형태별 분류</b>

한국 교회의 특별함은 ‘평신도 중심의 교회’에 있다. 평신도들이 주도적으로 선교사를 영입하였고, 공동체를 이끌었으며, 복음을 선포하였다. 내포학에서는 크게 성직자 중심과 평신도 중심의 공동체 형태를 분류하여 오늘날 성직자 중심의 공동체 형태의 장단점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성지순례자들을 위하여 순교지와 유적지, 탄생지와 무덤과 가묘, 유형 문화재와 무형문화재, 교우촌과 공소, 순교신심과 성모신심과 성체신심, 성체거동과 장례 문화, 건축형태, 천주가사와 성가 등 다양한 형태별로 분류하여 총제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ol>
 	<li><b> </b><b>문화자원의 활용과 자원화</b></li>
</ol>
내포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은 내포학의 핵심 연구 대상이자 개념으로 문화콘텐츠학의 ‘자원화’개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원화’란 역사학을 필두로 미술사학, 건축학, 문화재학 등의 각 분과 학문의 연구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와 연구 결과물을(원자료, Source) 콘텐츠로 활용하기 쉬운 중간단계의 것인 자원(Resource)으로 가공하는 과정을 말한다.

자원화는 원자료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도록 하면서 개별 자원의 맥락과 연관성을 구조화하여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일련의 지식 가공 과정이다.

내포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은 내포라는 특이한 장소에서 천주교 중심으로 축적된 유형무형의 신앙문화 산물로 내포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된 신앙과 문화적 분위기로 공감대를 형성하며, 지역의 모든 이들에게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원천 자료이다.

내포지역은 역사문화자료의 수집과 연구를 통한 문화자원화와 스토리텔링을 통해 다양한 지역문화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성지순례가 보편화된 지금은 역사문화자원 분류의 기준을 인문학적 관점에서 재정의함으로써 그 범주를 대폭 확장할 때, 이를 통해 내포 전 지역을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천주교 중심의 관점에서 지역의 역사와 인물, 문화와 종교, 문학과 건축 등을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할 때 내포가 지닌 가치를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 연구의 자원화를 통해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사목적 배려와 주민들에게는 문화적 혜택을 수혜받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유치원, 중고등학교, 피정의 집, 연수원, 성지, 성당의 교육관 등 이 모든 것들이 천주교 신자들만이 아니라 지역과의 연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자원화되어야 한다.

자원화는 신앙과 역사와 문학의 가치를 시각화시켜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의 문화향유권을 충족시키고, 교회가 지닌 가치를 다음 세대에 전해줄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게 된다. 공세리 성당에서는 박물관에 전시된 제의를 ‘제의 전시회’를 통해 자원화하였다. 패션쇼를 하는 것처럼 제의를 입고 역대 신부님들의 사목을 소개하며 공세리의 역사를 들려주고, 그 제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제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32위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4개의 성극으로 만들어 공연하고 있으며, 순례자들이 원할 때, 원하는 성극을 공연하며 하느님의 종들의 시복시성을 위해 노력하며 순례자들에게 공세리의 신앙역사를 입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매년 1회 성체거동을 통해 축제로 역사를 알려주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병을 찍는 체험을 직접 할 수 있도록, 다음 세대에 이 성체거동을 전수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합덕성당이나 여사울 성지, 솔뫼와 신리성지, 황새바위성지와 홍주성지, 다락골 줄무덤과 성거산 성지 등도 지니고 있는 신앙적 가치와 역사적 가치, 문화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고 시각화하여 연계시킨다면 내포가 거대한 신앙의 박물관임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특히 해미국제성지는 대전교구에 있는 다양한 성지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지구촌 모든 이들이 방문하고 순례하며 자원화된 내포의 신앙역사문화를 시청각적으로 체험하며 머물 수 있는 곳이 된다면 ‘내포의 박물관’은 그 빛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해미국제성지가 가지고 있는 원자료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고, 개별 자원의 맥락과 연관성을 구조화하여 시청각적으로 가공 과정을 거쳐 자원화되어 교구의 모든 성지와 연계될 때, 해미국제성지는 ‘내포는 신앙의 박물관이다.’라는 것을 방문자들이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모든 성지도 그 중심에 서서 가톨릭 신앙의 보물을 세상에 빛내게 될 것이다.

 
<ol>
 	<li><b> </b><b>나가는 말</b></li>
</ol>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1890년에 설립된 두 본당의 사목지를 대상으로 총체적인 삶을 연구하며, 시대별, 장소별, 주제별 원천자료를 발굴하여 이를 자원화하며 데이터베이스 구축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다. 또한 각 자원별 연관 관계와 맥락을 규명하고 스토리텔링을 시도함으로써 일반 국민들도 내포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성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자 한다. 특히 역사문화자원의 적합한 활용 방안과 이를 기초로 한 내포지역의 성지계발 계획의 방향성을 도출하는데 도움을 주고, 내포의 천주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자원화하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흩어진 조각들을 모으고, 이 자료를 공유하며, 다양한 연구자들이 쉽게 자료에 접근하며 자료를 재생산하여 내포가 신앙의 거대한 박물관임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자료에 접근하고 원자료를 통해 재생산하는 자료가 만들어질 때, 지역사회와 함께 공감하고 소통하는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내포의 천주교는 이렇게 일반 시민과 공유하며 신앙의 역사를 신자들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들과도 대화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천주교 중심의 내포학은 발굴된 자료와 숨어있는 자료들이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자료의 수집과 활용, ‘디지털아카이브 구축’과 ‘자원화’에 더 집중해야 할 것이다.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9:00:28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ⅩⅥ.갈매못 순교성인들의 시신 운구와 매장지 연구]]></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24]]></link>
			<description><![CDATA[<b>ⅩⅥ</b><b>.</b><b>갈매못 순교성인들의 시신 운구와 매장지 연구</b>

<b>황의호</b>
<ol>
 	<li>들어가기 342</li>
 	<li>갈매못 순교 성인 342</li>
 	<li>순교와 매장 343</li>
</ol>
1) 충청수영에서 갈매못까지의 이동 343

2) 순교터 갈매못의 지형 343

3) 순교터 344

4) 순교 상황 345

5) 시신의 매장 346
<ol>
 	<li>1차 운구와 매장(영보리) 348</li>
</ol>
1) 옮긴 사람 348

2) 옮긴 장소 350
<ol>
 	<li>2차 운구와 매장(서짓골) 350</li>
</ol>
1) 2차 이장(移葬)의 이유 350

2) 2차 이장을 추진한 사람 351

3) 시신을 옮긴 과정 351

4) 시신을 매장한 장소 356

5) 서짓골 무덤의 발굴 357
<ol>
 	<li>서짓골 이후 네 성인의 안치 358</li>
 	<li>성인의 시신을 운구하여 매장한 이화만 358</li>
</ol>
1)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의 기록 359

(1) 이화만(李化萬, 바울로, 1802) 360

(2) 이치서(이냐시오) 360

(3) 이뀌수(李三哲, 요한 크리소스토모, 1828): 361

(4) 이치문(힐라리오, 1836) 361

(5) 이 그레고리오(1839) 361

(6) 이 도르테아 361

2) 이화만과 아들들의 치명 362

3) 이화만 후손들의 생활 363

4) 이화만 가족 묘지의 조성 365
<ol>
 	<li>맺음말 366</li>
</ol>
 
<ol>
 	<li><b> </b><b>들어가기</b></li>
</ol>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수영 갈매못에서 다섯 성인이 순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천주교회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순교한 장소를 찾는데 노력하였고, 1975년에는 순교복자비을 세웠으며, 1990년대에는 성지로 조성하고 순교 기념 성당을 건립하여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이들 다섯 성인에 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많은 논문과 단행본들이 출간되었으나 순교한 이후 시신을 옮겨 매장한 과정과 매장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화만과 그 후손들에 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이에 필자는 순교자 재판기록에 나오는 지명들을 현지 지명과 대조하여, 순교자의 시신을 옮긴 경로를 연구하고, 시신을 옮겨 매장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이화만과 그 후손들의 행적을 연구해보고자 하였다. 최근 이화만의 후손을 만나 족보 등 문헌을 얻고 조상들이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본 연구의 계기가 되었다.

 
<ol>
 	<li><b> </b><b>갈매못 순교 성인 </b></li>
</ol>
갈매못에서 순교한 성인은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행해진 병인박해 때 순교한 성인이다. 모두 다섯 분으로 성 다블뤼 안 안또니오 주교(1818~1866), 성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1837~1866), 성 위앵 마르틴 루카 신부(1836~1866),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1803~1866), 성 황석두(黃錫斗) 루카 회장(1813~1866)으로, 프랑스인 주교 1명, 신부 2명과 한국인 회장 2명이다. 다블뤼 안 안또니오 주교는 프랑스인으로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강경으로 들어와 21년 동안 조선에서 활동하였고, 천주교 서적을 저술하거나 한글로 번역하였으며 조선 천주교사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여 기록하였다. 1866년 3월 8일 베르뇌 주교가 순교하여 다블뤼 주교가 제5대 조선교구장으로 승계되었다. 그는 충남 서부지역 포교에 전념하던 중, 황석두 회장과 함께 당진 신리에서 체포되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인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와 역시 프랑스인 위앵 마르틴 루카 신부도 더 많은 신자들이 고통 당하고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수하였다.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는 프랑스 외방선교회 신학교를 마치고 사제로 서품되어 1863년 조선으로 들어왔고, 위앵 마르틴 루카 신부는 1864년 사제로 서품되어 1865년 조선으로 들어왔다.

황석두 루카 회장은 충북 연풍 사람으로 충청도 서천 산막골에서 권(權 Feron) 신부의 복사로 일했고, 장주기 요셉 회장은 경기도 수원 사람으로 충북 제천 배론에서 생활하다가 1866년 그곳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다블뤼 안 안또니오 주교와 함께 순교할 것을 결심하고 스스로 죄인 행렬에 참가하여 함께 처형되었다.

이들은 모두 서울 의금부로 압송되어 가혹한 문초를 받은 뒤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마침 고종과 민비의 국혼일(國婚日)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던 관계로 서울 도성 안에서 형을 집행하는 것이 문제가 되자 이곳 보령의 충청수영까지 끌려와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 당하였다.
<ol>
 	<li><b> </b><b>순교와 매장</b></li>
</ol>
<b>1) </b><b>충청수영에서 갈매못까지의 이동</b>

 

충청수영에서 갈매못까지는 육로로 이동하였는데 솟재를 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남문(진남문 鎭南門)을 통과하고 솟재를 넘어 수해마을로 내려오다가 갈매못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차기진은 서문을 통과하였다고 하였으나 서문은 바다로 통하는 문이고, 솟재를 넘으려면 남문을 통해야만 한다. 갈매못을 지나는 해안도로는 최근에 만들어지고, 당시에는 남문과 솟재를 넘어 외부로 출입하였다.

 

<b>2) </b><b>순교터 갈매못의 지형</b>

1866년 다섯 성인이 순교한 갈매못은 천수만에서 갈라져 오천만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만들어진 작은 만입지이다. 만입지의 길이는 약 350m쯤이고, 입구의 폭은 약 150m이다. 이 입구에 사구가 형성되어 있는데, 겨울철 북서풍이 불 때, 강한 바람의 영향으로 형성된 사구이다.

이 사구는 길이 약 150m, 폭 70m로 형성되었는데 작고 납작한 자갈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주변의 암석이 얇게 갈라지면서 풍화되는 특성이 있어 얇고 작은 자갈이 공급되었고, 그런 자갈이 파랑에 의해 침식되어 동그랗고 납작한 자갈이 형성되었다.

이들 작은 자갈은 파도에 의해 만조선 근처로 이동하였고, 이후 바람에 의해 모래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여 사구를 형성하였다. 사구에서 바다 쪽으로 갈수록 큰 자갈이 퇴적되어 있다.

사구의 안쪽은 습지였으나 옛날부터 논으로 개간되어 경작되었고, 사구의 동쪽 부분도 개간되어 밭으로 경작되었다. 사구의 서쪽 부분은 자갈이 많고, 바다에서 모래가 계속 운반되기 때문에 경작이 불가능하였다.

1866년 다섯 성인이 순교한 곳은 바로 이 사구의 서쪽, 경작되지 않았던 곳이다. 당시 밭에는 모두 보리를 심었을 것이고, 순교한 시기가 양력 3월이면 보리가 한창 자라는 시기이다. 보리밭에서 수백 명이 모여 처형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바닷가 황무지로 된 사구에서 처형했을 것으로 보인다.

 

<b>3) </b><b>순교터</b>

다섯 성인이 순교한 자리는 여러 증언 기록으로 보아 현재의 갈매못 성당 자리가 확실하다. 이곳은 병인박해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사건과 관계된 손경로(孫敬老), 김양길(金良吉), 이영중(李永仲) 등도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바닷가의 한적한 모래밭이고 주변에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순교한 장소 갈매못은 주민들에게는 ‘갈망시’라고 불리고 갈마연(渴馬淵)으로 표기하였었는데 근래 ‘갈매못’으로 굳어졌다. 그러면 순교한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디일까? 순교한 장소는 농사를 짓지 않은 바닷가 모래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농사를 짓는 곳에는 농작물이 있어 사형장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바닷가 사구로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는 황무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천주교회에서는 순교터를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순교터를 처음 답사한 사람은 부여 소양리 본당(현 금사리 본당의 전신) 주임 정규량(丁圭良, 레오) 신부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성인들의 시신을 거두어 안장하는데 참여하였던 이치문의 아들을 앞세우고 서짓골의 옛 무덤자리를 확인한 뒤, 7월 8일에는 갈매못을 찾아가 그곳에 누대로 살아온 사람들의 생생한 고증 하에 순교터와 장기대(將基臺)가 섰던 자리, 임시 매장지 등을 확인하였고, 1926년 9월 14일에는 자기 명의로 순교터 인근의 부지를 매입한 뒤, 1929년 1월, 서울교구 천주교 유지재단으로 등기이전하였다. 그후 1975년 9월에는 대천 본당 주임 정용택(사도 요한) 신부와 신자들이 그곳에 순교 복자비를 건립하였다. 따라서 현재 순교복자비가 서 있는 자리가 순교한 장소이다.

 

다섯 성인이 순교한 음력 2월 14일은 5물(매)이다. 2021년의 경우 음력 2월 14일은 08시 10분이 저조였고, 14시 06분이 만조였다. 형을 집행한 시각이 오시(午時)였으므로 바닷물이 2/3쯤 들어오는 때였다. 음력으로 같은 날이면 밀물 썰물의 시각과 높이는 큰 차이가 없다.

 

2021년 음력 2월 14일 보령항 조석표: 5물

고조 01:31분 540㎝ 저조 08:10분 154㎝

고조 14:06분 643㎝ 저조 21:01분 163㎝

 

순교 장소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병인순교자 교회재판록, 1922, 〈회차 86〉
<ul>
 	<li>증언자: 강 이사벨라</li>
 	<li>69세. 홍산 대내 출신으로 논산읍에 거주. 부친은 강 시메온으로 병인년에 순교하였고, 모친은 신 아가타. 순교자 손자선 토마스의 외척으로, 증언자 강 마리아의 언니이자 강도영(라우렌시오) 신부의 누이. 당시 11살쯤 됨.</li>
</ul>
 

〔제18조목〕 안 주교와 황 루카가 치명하러 나가실 때에 따라가 보았는데, 그 때에 고마 수영 방갓동네에 살았습니다. 방갓 동네에서 안 주교께서 치명하신 자리까지 5리도 안 됩니다. 그때 나는 안 주교와 황 루카께서 치명하실 때 머리를 벨 때까지 있었는데, 모인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던 소리만 지금 겨우 생각됩니다.

〔제22조목〕 안 주교, 황 루카가 치명하신 후 여러 번 그 자리에 가서 조개와 굴도 많이 주웠는데 치명하실 때에 차렸던 상과 그릇에 피 묻은 것을 많이 보았으나 무심히 보았고, 또 바다 조수가 들어왔다가 나가는 고로 차차 다 씻겨갔습니다.

〔제23조목〕 안 주교와 황 루카의 시신은 치명 후 3일 동안이나 강변에 있었는데, 그 후에 산에 묻었고 나는 그 무덤까지 보았습니다. 그 후 여러 날 후에 또 산에 갔었는데, 무덤 파간 자리가 있기에 어머니께 주교 무덤을 누가 파갔다고 하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까지 들었습니다.(차기진 책 90쪽)

 

<b>4) </b><b>순교 상황</b>

다섯 성인이 순교한 상황은 1900년 시복 재판기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성인들의 시신을 옮긴 이치문(힐라리오)은 가족들을 시켜 다섯 성인이 이동하여 처형되는 모습을 보게하고 증언하였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병인박해 당시 이치문의 나이는 31세의 청년이었고, 남포 서짓골에 살다가 충청수영에서 가까운 수청구지 처갓집으로 피신한 상황이었다.

이치문에 의하면 행렬을 지어 이동하였는데, 맨 앞에 군사들이 나아가고 다음에 풍악장이가 나아가고 다음에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황 루카, 장 회장이 짚둥지를 타고 갔으며 마지막에 수군절도사가 갔다. 갈매못 형장에 도착해서는 높은 장막을 치고 수군절도사가 앉고 군사들은 가운데를 비우고 좌우로 둘러서고, 죽일 사람들은 바닷가에 내려 결박하였던 것을 끌러놓고 상투에 죄인의 이름을 쓴 명패를 달아 놓았다.

이후 공주에서 온 휘광이가 안 주교의 목을 찍었는데, 반만 베고 수군절도사한테 돈 400냥을 요구하여 들어주자 두 번째 칼질을 하여 목을 완전히 베었다. 다른 신부 두 분과 교우 두 분은 단칼에 목이 잘렸다.

<b>5) </b><b>시신의 매장</b>

순교한 성인들의 시신은 처형된 지 3일 째 되는 날 저녁, 외교인들이 형장에 모래를 파고 묻었는데, 3명의 프랑스인 신부를 함께 묻고, 2명의 조선인 회장을 함께 묻었다. 이후 황석두의 시신은 조카(황 예로니모)가 순교 직후 수습하여 홍산 삽티에 매장하였다. 당시 황석두의 조카는 서천부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갈매못 바닷가에 남은 시신은 4구였다.

 

시신을 이장하기 위해 발굴한 이화만의 아들 이치문(힐라리오)은 1882년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시체를 묻은 곳을 4월 초8일(양력 5월 21일)에 가본 즉, 잔돌로 봉분을 쌓아 놓았기에 주막이 가까이 있는 고로 소리나지 않게 손으로 차차 헐어들어갔습니다. 시체 하나가 들어나기에 보니, 적신(赤身)으로 묻고 또 목은 다 각각 제 몸에 맞추어 놓고 칡으로 허리 를 둘러 묶고 칡 틈에 나무로 패를 만들어 언문으로 쓰기를 오가(吳哥)라 하였기로 오 신부인 줄 알고, 또 다음에 안 주교 시체가 또 그 모양이고, 그 다음은 민 신부이고, 그 다음은 장 회장이라. 밤에 시체의 모양을 본즉 빛깔은 희유스럼하고 물은 내왕하는 모양이고 냄새는 독하지 아니하여 시상(屍床)을 가지고 가서 올려놓고 마포로 감아서 지게에 넷이 지고 나선 즉,--

 

위의 기록으로 보아 시신을 매장한 장소는 처형한 장소에서 바다쪽인 것으로 보인다. 손으로 봉분으로 쌓은 돌을 헐고, 물이 내왕하는 장소는 처형한 장소 서쪽, 바닷가 만조선 근처이다. 이곳은 작은 자갈이 쌓여 있는 곳이다. 이곳을 강 이사벨라는 1922년 증언에서 산으로 이야기하였다. 경작되지 않는 사구이기 때문에 산으로 본 것이다. 현재도 갈매못 근처의 만조선 근처는 작고 납작한 자갈이 쌓여 있다.

네 성인들은 모두 알몸이었고, 머리와 몸통을 맞추어 칡으로 묶어 한글로 쓴 명패를 끼워놓아 누구의 시신인지 구분할 수 있도록 묻었다.

 
<ol>
 	<li><b> 1</b><b>차 운구와 매장</b><b>(</b><b>영보리</b><b>) </b></li>
</ol>
1866년 4월 초8일(양력 5월21일) 천주교 신도들이 나서 갈매못에 묻힌 네 성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옮기게 된다. 옮긴 장소는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고 갈매못에서 10리 되는 곳, 여수해 마을에서 5리 되는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여러 사람이 동원되어 장사를 지낸 것으로 보인다. 일부 인원은 매장할 곳을 파는 일을 하였고, 일부는 갈매못에 가서 시신을 발굴해 왔기 때문이다. 시신을 발굴해서 지게에 지고 오는 인원만 최소한 4명이 필요하였다.

‘여우가 침노하여 발가락이 상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깊이 묻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화만의 아들 이치문(힐라리오)은 1882년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장사하여 일 시키는 곳이 멀리 10리가 되는데, 날이 밝아 위험하자, 공론이 아무 곳이나 사패(사태?)난 곳에 묻고 가자고 하기에 죄인이 “안 된다”하고 주교의 시체가 그 중 무거운 고로 죄인이 지고 앞서 가며 “나만 따라오라”하여 급대참에 일하는 곳으로 가서 묻었나이다.

 

<b>1) </b><b>옮긴 사람</b>

1866년 4월 초8일(양력 5월 21일) 시신을 옮기는데 참여한 사람은 몇 사람이 증언하고 있다. 김요한의 증언에 의하면 시신을 옮기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이 바오르(이화만)이였다. 이 바오르가 논 10두락의 문서와 돈 90냥이 있으니 시작하자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 논과 돈은 이화만이 낸 것인지 다른 사람이 낸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화만이 자금을 마련한 것은 분명하다. 4분의 시신을 감쌀 염포(殮布)와 칠성판만 해도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참여한 사람은 장주기 회장의 아들 장노첨이었다.

김요한의 증언(1882.3.15.)은 다음과 같다.

마침 남포 땅에 사는 이 바오로라 하는 교우가 죄인더러 주교·신부 장사할 마음이 있다하여 우리 둘이 하자고 하고, 돈 걱정을 하온즉 돈 걱정은 말라 하고, 이 바오로의 말이 “논 10두락 문서 전 권하고 돈 90냥을 내었으니 쓰자”하기에 장사날을 4월 초8일로 정하였는데, 전에 알지 못하던 사람이 장 회장의 아들이라 하고 찾으나, 죄인은 외인 중에 장종비적(藏?秘迹)하여 있삽고, 교우 상종은 없고, 근처 교우를 약간 아는데 근 2백 리에 사는 사람이 찾아왔기에 연고를 물은즉 “내 부친이 꿈에 와서 아무 곳 사는 아무 사람이 내 시체를 거두려고 하는데, 너는 무심히 왔느냐?” 하고 재삼 발현하기에 “그대 성명을 알고 찾아 왔노라”하기로 그러면 우리가 4월 초8일 장사하겠으니 오라고 하였더니, 그 날 왔기에 함께 장사하였습니다. 1882년 3월 15일 편지,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180. 위책 99쪽

 

방시영(프란치스코)은 증언(1882.3.15.)을 하고 마지막에 참여한 사람을 기록하여 놓았는데 다음 7명이다.

장회장 아들, 외인 임중심, 손자중, 죄인 방시영, 방순오, 김성도, 서도심.

 

이화만의 아들 이치문도 구체적으로 증언하였다. 이치문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장주기 회장의 아들 장노첨이 4~5명을 데려왔는데 이름이 기억나는 것은 방시영, 임중심, 서필립보였다. 그리고 이치문의 식구, 조카사위 이 바르나바, 김백원, 일할 때 주인은 최 안드레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략--장노첨이 데리고 온 사람도 대개 네 다섯인 듯하나 그 사람들이 돈을 얼마 나 가지고 왔는지 모르고, 노첨이 데리고 온 사람들 중에 똑똑히 아는 사람이 방시 영과 임중심과 서 필립보 뿐이라. 죄인의 식구와 질서(姪壻) 이 바르나바 성여와 함 께 시체 묻은 곳을 4월 초8일에 가본즉, --중략--

이 일할 때 주인은 수청고지에서 사는 죄인의 장인 최 안드레아이고, 이 때 손자중 이 왔으나 일을 다하고 쉬는 날 와서 다녀가고, 신창 남방재에서 살던 김백원이라 하는 사람은 죄인의 처고모의 사위 되는데 홀아비로 다니다가 죄인의 처가에 와 있 는 고로 함께 일은 하였으나 삯을 주었습니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하면 갈매못에 묻힌 네 성인을 운구하여 1차 장사지내는데 주도한 사람은 이화만의 가족이다. 이화만이 돈을 대고 아들들을 동원한 것이다. 이치문이 ‘식구’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화만과 이치문, 이치문의 형 이치서(이냐시오)가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주도한 사람은 장주기 회장의 아들 장노첨이다. 장노첨이 방시영과 임중심, 서필립보(서도심?) 외 1~2명을 데려왔다. 이들 외에 이름이 거명되는 사람이 손자중, 방순오, 김성도, 김백원, 최 안드레아이다. 따라서 1차로 시신을 옮겨 장사지내는데 10여 명이 움직인 것이다. 4구의 시신을 발굴하여 칠성판을 대고 염하여, 10여 리 되는 곳으로 지고 와 매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밤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신앙심이 아니고는 어려웠을 것이다. 기록으로 보아 일은 분업으로 이루어졌다. 시신을 매장할 곳을 파는 사람은 매장 장소에서 일하고, 시신을 발굴하여 가져오는 사람은 시신을 발굴하러 갔던 것이다. 이런 일을 총괄한 사람은 이치문의 장인 최 안드레아였다. 이치문의 증언록에는 ‘이 일할 때 주인’이라고 표현했는데, 시신을 발굴해 장사지낸 장소가 이치문의 처가인 수청구지와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이장하는 일에 관한 것은 이치문의 장인 최 안드레아가 주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b>2) </b><b>옮긴 장소</b>

그럼 묻은 네 성인의 시신을 옮겨 묻은 장소는 어디일까? 갈매못에서 10리 떨어진 곳, 여수해에서 5리 떨어진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갈매못에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이동해서 묻을 곳은 남쪽방향뿐이고, 남쪽으로 내려와야 여수해와 가까운 곳이다. 남쪽으로 10여 리 내려오면 이곳 역시 해안인데, 최근까지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거주하지 않는 남쪽은 양지바른 바닷가이고, 무엇보다도 일을 주도한 이치문의 장인 최 안드레아가 거주하는 수청구지 마을과 1㎞ 내외로 가까운 곳이다. 이치문의 장인은 이곳 갯벌에서 늘 해산물도 채취하고, 갯벌을 건너다니면서 나무도 했을 것이다.

 
<ol>
 	<li><b> 2</b><b>차 운구와 매장</b><b>(</b><b>서짓골</b><b>)</b></li>
</ol>
<b>1) 2</b><b>차 이장</b><b>(</b><b>移葬</b><b>)</b><b>의 이유</b>

갈매못 성지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매장된 네 성인의 무덤은 광중을 4개 파고, 봉분은 하나로 해서 묻었는데 깊이 묻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밤에 작업을 했고, 봉분을 하나로 했으며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했기 때문에 깊이 묻힐 수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여우가 굴을 뚫고 시신을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확인한 사람은 이치문의 부친 이화만이었다. 이화만이 확인하고 이장을 결심했던 것이다.

 

<b>2) 2</b><b>차 이장을 추진한 사람</b>

이화만이 여우의 침노를 확인하고 홍산 도앙골에 사는 김순장에게 이야기하여 이장이 추진되었다. 이때 들어간 비용을 이치문이 기록으로 남겨놓아 누가 주도해서 이장을 추진하였는지 알 수 있다.

 

비용

김순장과 국실 신 회장 40냥

이 이냐시오 50냥(이화만의 아들)

이 요한 크리소스토모 40냥(이화만의 아들)

이 바오로 27냥(이화만)

최이경 7냥

합 164냥.

 

위 기록에서 돈을 내어 이장을 추진한 사람은 총 6명이다. 6명이 164냥을 모아 이장을 추진하였다. 50냥을 낸 이 이냐시오와 40냥을 낸 이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치문의 형이고, 27냥을 낸 이 바오르는 이치문의 아버지이다. 이때 이장하는데 들어간 비용 164냥의 65%인 107냥을 이화만의 가족이 댄 것이다. 2차 이장도 이화만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3) </b><b>시신을 옮긴 과정</b>

4구의 시신을 옮기기로 한 곳은 남포 서짓골(현 미산면 평라리 서짓골)이었다. 이곳은 이화만이 거주하는 곳으로, 보다 안전하게 매장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시신이 매장되어 있던 오천면 영보리에서 미산면 평라리로 시신을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뱃길로 35㎞ 정도를 이동해야 하고, 육로로 10㎞ 정도를 이동해야 했던 것이다.

시신을 발굴한 것은 1866년 음력 7월 13일(양력 8월 22일) 밤이었다.

시신을 발굴하고 운반하는데 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고, 배는 세를 내어 사용하였다. 배의 사공은 수청구지에 사는 서성학 형제로 교우는 아니지만, 친척들 중에 교우들이 많아 천주교에 관한 일(성교일)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이들에게 40냥을 주고 배를 세냈다. 이때 배에 탄 사람은 안일삼, 최 안드레아(이치문의 장인), 사공 4명, 이치문의 3형제, 조카사위 이 바르나바, 조카 (이)영화로 무려 11명이었다. 상당히 큰 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배를 타고 건너가 시신을 발굴해 보니 여우의 침노에 의해 민 신부의 왼쪽 발가락이 좀 상했을 뿐 큰 피해는 없었지만 부패되어 냄새가 지독하였다. 칠성판은 그대로 사용하고 새로운 천으로 염을 하여 배에 실었다.

배의 목적지는 남포현 완장포(현 웅천읍 대창리)였는데 두물거리였다. 당시에는 모두 돛단배로 바람을 이용해서 다녔다. 돛단배가 다닐 때 바람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밀물과 썰물 즉, 물때였다. 수청구지 포구에서 바다로 나갈 때는 썰물을 이용해서 나가고, 들어올 때는 들물을 이용해서 들어오는 것이다. 수청구지 앞바다에서 출발하여 웅천 완장포구로 가려면 우선 썰물을 이용해서 나가야 한다. 썰물 6시간을 이용해서 천수만을 벗어나 먼 바다로 나가고, 들어오는 물을 이용해서 완장포구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으면 12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음력으로 7월 13일이면 사리때라 조류도 빨라 쉽게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은 2021년 음력 7월 13일의 보령항 조석표이다.

 

2021년 7월13일(양력 8월 20일) 보령항 조석표: 4물.

고조 01:36분 668㎝ 저조 08:35분 238㎝

고조 13:43분 583㎝ 저조 20:31분 141㎝

 

즉 1866년 7월 13일(음)은 4매날이다. 이날 아침 8시 30분경이 저조시간이라, 새벽 시간에 급히 떠나 먼 바다에서 기다렸다가 밤 들물을 따라 웅천 완장포로 들어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과 달랐다. 풍랑을 만난 것이다. 당시 풍랑 상황을 이치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염을) 다하여 가지고 나선 즉 또 날이 밝은지라. 급히 배에 올리고 수로로 5리쯤 되는 여수애 큰 강어귀로 가 있다가 바람이 일어나며 비와 뇌성이 크게 일어나 니, 이때는 밤이라 모두 겁을 내고 도로 가패라 하는 곳으로 두 번을 쫓겨 들어가 서 또 나아가다가 슬섬이라 하는 곳으로 쫓겨 밤에 풍랑을 겪어 거의 죽을 뻔 하더라. 아침에 밥을 시키고 사공이 나서 보더니 “오늘은 더 큰 바람이 일어날 터 이니 진작 녹안이뿌리로 가자” 하여 행선을 시작하매, 바람이 크게 일어나 화살같 이 달아나니 수로로 20리를 가서 녹아니로 가매 떠날 때 앉힌 밥이 겨우 끓었으니 그 급하게 달아난 사정은 가히 알만하다. 물에 떠있기를 8일로 하고 12일만에 집에 돌아온 즉 김순장은 죄인의 집에서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위 내용을 보면 시신을 배에 싣고 5리쯤 되는 여수해 큰 강어귀로 가서 기다렸다. 아침 8시 30분경 저조시간이 되어 더 이상 배를 움직이지 못하고 정박한 것이다. 오천면 영보리 쪽에서 웅천천 하구로 갈려면 썰물을 따라 큰 바다로 나가야만 하기 때문에, 8시 30분 이후 들물 상황에서는 정박할 수밖에 없다. 바닷물이 완전히 들어온 후, 썰물이 되어야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기다린 것이다.

이때 풍랑이 일어나 만 안쪽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위 글에서 가패라고 하는 곳으로 쫒겨들어갔는데 가패는 곧 뱃사공이 거주하는 수청구지 근처이다. 시신을 싣고 안쪽 바다로 들어온 것이다.

여수해 포구는 자갈이 방파제처럼 쌓여 천혜의 포구를 이루었는데, 여수해 포구로 들어가지 않고 더 깊숙이 들어와 가패에 도달한 것이다. 여수해 포구는 보령현의 선소로 수군들이 주둔하고 있고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오천면 영보리와 오포리 사이의 만을 빠져나와 송도로 들어가게 된다. 바람을 이겨내고 만의 어귀까지 나왔으나 넓은 바다로 나갈 수는 없어 할 수 없이 송도로 들어간 것 같다. 송도 바다는 송도와 고만 사이의 바다로, 송도가 남쪽에서 오는 바람을 막아주어 안전한 곳이다. 다만 고만과 마동에 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송도에도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 노출되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이후 바람이 잦아들지 않아 녹아니뿌리로 이동한다. 녹아니뿌리는 오천면 영보리의 서남쪽 끝으로 수청구지로 뻗은 만의 입구이다. 이곳은 남풍을 막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인가가 없는 곳이다. 송도에서부터 이곳까지 20리 뱃길을 얼마나 빨리 갔던지, 밥이 끓을 동안 이동하였다. 이렇게 8일을 소모하여 웅천천 하구의 완장내 포구에 도착하게 된다. 7월 13일(음)에 출발했으므로 7월 21일(양력 8월 30일)이 되는 날이다.

 

1866년 음력 7월 21일(양력 8월 30일)의 물때를 2021년의 물때로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2021년 7월21일(양력 8월 28일) 보령항 조석표: 한객기

고조 06:42분 690㎝ 저조 01:09분 154㎝

고조 19:09분 649㎝ 저조 13:26분 150㎝

 

위 조석표를 보면, 음력 7월 21일경에는 오후 7시 9분경에 만조가 된다. 먼바다에 있다가 만조에 맞추어 들어왔다가 기다려, 어두워진 뒤에 시신을 내려 지게에 지고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완장포에서 서짓골까지 어떻게 이동했는지 기록은 없다. 다만 1922년 김 아가타가 증언한 기록 중에서 이때 상황이라고 추측되는 증언이 있다. 증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

여러 교우와 나의 부친과 함께 모여와 시신을 파 가지고 가다가 날이 밝으니 곁에 콩밭에 감추고 다른 교우들은 곤하여 이웃에 흩어져서 자고 이 바오로라고 하는 교 우 혼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후략

 

시신을 운반하다가 낮에 콩밭에 시신을 숨겨 놓는 상황을 증언한 것이다. 때는 음력 7월이라 콩이 무성하게 자랐을 때이다. 완장포에서 서짓골로 시신을 운반할 때 중간에서 날이 밝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콩밭에 시신을 숨기고 시신을 지고 가던 사람들도 다른 곳에서 자고 있었는데, 이 바오로(이화만)가 남아 시신을 지켰다는 내용이다.

 

시신을 이동한 통로는 두 길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A길) 완장포에서 웅천읍 대창리 한내마을을 거쳐 성동리를 거쳐 삽재, 매바위, 곰재를 넘는 길이고, 하나는(B길) 완장포에서 주산면 창암리를 거쳐 주산면 삼곡리, 동오리를 거쳐 곰재를 넘는 길이다. 거리는 모두 8.15㎞로 비슷하다. 현재 천주교 성지 탐방로 안내에는 A길로 나와있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주산면 창암리와 삼곡리·동오리를 지나는 길을 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길이 평탄하고 하천을 건너지 않기 때문이다. 웅천읍 성동리를 통하는 길은 웅천천이라고 하는 큰 하천을 2번이나 건너야 한다. 특히 시신을 운반할 때 몇 일동안 폭풍이 불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것은 태풍이 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양력으로 8월, 태풍이 분 직후에는 웅천천을 건널 수 없다. 따라서 냇물을 건너지 않는 B길을 통하여 시신을 운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b>4) </b><b>시신을 매장한 장소</b>

서짓골 시신을 매장한 장소는 정규량 신부가 1925년 답사하고 쓴 글(치명지와 묘지 발견)에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정규량 신부의 글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석죽골 동네에서 공경하올 주교 산소 자리로 올라가려면 한 5분 정도 걸리니, 그 산 상봉을 근동 사람들이 부르기를 멍덕봉이라고도 하고 멍덕산이라고도 한다. 이 멍덕봉에서 북편으로 세 번째 봉을 타고 내려오면 매상리 바위를 만나는데, 매상리 바위에서 등을 타고 끝까지 내려오다가 동편 비탈로 내려서면 공경하올 주교 산소 자리를 만난다. 반은 산비탈을 차지하고 반은 평지를 차지하였으며, 앞에는 오치상의 담불(약 100평 크기) 밭이 있고, 산소 자리와 밭 사이는 담 형상의 바위가 둘러있으며, 누가 보든지 묘지 하나는 쓸 만하게 보인다. 그 자리에 28년 전에 그 동네 임성좌와 임원중의 부친 무덤을 썼는데, 공경하올 안 주교, 오 신부, 민 신부 산소 자리는 그 무덤에서 바로 남쪽 고개를 향해 두 걸음 가량 되는 곳이다. 130쪽.

 

정규량 신부는 1925년 7월 5일 서짓골 무덤자리를 찾아가는데, 부여군 구룡면 소양리성당(금사리 성당 전신) 아래에 사는 이 바오로의 안내를 받아 찾아간다. 이 바오로는 성인들의 시신을 주도적으로 옮겨 묻은 이 바오르(이화만)의 손자로 13세 때 서짓골을 떠났다고 한다. 서짓골에 살다가 이주한 이화만의 손자 안내를 받았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찾았다고 볼 수 있다.

 

 

<b>5) </b><b>서짓골 무덤의 발굴</b>

1866년 7월 21일(양력 8월 30일 금요일) 네 성인을 옮겨 장사지낸 서짓골의 묘지는 1882년 1월 21밤 발굴하여 2월 초4일(양력 3월 22일) 보고하게 된다. 발굴 과정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194번.

작년에 백 신부의 분부에 그 일 한 사람들이 다 죽으면 나중에 산소를 잃어버릴 염 려가 있으니 죄인의 형 이냐시오에게 분부하여 면례를 하고 오라 하기에 금년 정월 21일 밤에 죄인의 형 이냐시오와 외인의 조카 안드레아와 질서(姪壻) 이 바르나바 와 김 안드레아와 조카 프란치스코와 토다리 최서방 등 일곱 사람이 함께 산소를 파본즉, 횡대(橫帶)하였던 나무가 아래로는 모두 썪어 없어지고, 뼈가 흙에 혼합되 어 해골 위만 홍대 쪽이 남아 있어서 조심하여 낱낱이 백골을 모아올 때에 흘릴까 조심했으나 적은 뼈가 다 삭아 없어진 것도 있더라. 계골(計骨)을 하여 보매 혹 없 어진 것도 있어, 모두 삭아 없어졌는지 혹은 흙에 묻혀 잃어버렸는지 자세히 모르 고, 남아있는 것은 해골과 팔과 다리와 갈비뼈는 각 위를 반간하여 종이로 각각 봉 하여 백 신부께 바치는 사정으로 전후의 일장 일을 아는 대로 사실을 기록하여 바 치나이다.

임오(1882년) 2월 초 4일(양력 3월 22일) 죄인 이(치문) 힐라리오.(105쪽)

 

즉 시신을 옮겨 장사지낸 사람들이 죽은 뒤에는 성인들의 시신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백신부(조선 부주교 블랑(G. Blance) )가 이화만의 큰아들 이냐시오에게 부탁하여 1882년 1월 21일(양력 3월 10일) 밤 시신을 발굴하게 된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끝났지만 아직도 두려움이 있어 밤에 발굴한 것으로 보인다.

 
<ol>
 	<li><b> </b><b>서짓골 이후 네 성인의 안치</b></li>
</ol>
네 성인의 시신은 발굴되어 강경 이치문의 집 벽장에 달포간 두었다가 블랑 부주교가 확인한 후 부위별로 기름종이에 싸고, 개인별로 삼베 주머니에 넣어 블랑 부주교가 봉인하였다. 그후 우선 전북 진안 널티(전북 진안군 마령면 덕천리)의 마 베드로(Moua Pierre) 회장의 집에서 리델 주교의 최후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가 1882년 11월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성당으로 보냈다. 오우라 성당은 1865년 일본에서 최초로 세워진 성당으로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1882년 11월 6일 일본의 대목구장인 프티장 주교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가사키에 있는 우리들은 오늘 큰 기쁨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불랑 주교의 매우 귀중한 위탁물인, 다블뤼 주교와 오메르트 신부와 위앵 신부와 조선인 회장의 유해를 받았습니다.

 

그후 1894년 5월 22일에 유해들이 서울로 다시 돌아와서 용산에 있는 사제와 수도자들의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00년 9월 10일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후 1967년 마포 절두산 순교성지로 옮겨져 현재까지 모셔지고 있다.

다섯 분의 순교자는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어 성인품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body>
</table>
 
<ol>
 	<li><b> </b><b>성인의 시신을 운구하여 매장한 이화만</b></li>
</ol>
충청수영 갈매못에서 처형되어 묻힌 네 성인의 시신을 옮겨 묻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남포현 심전면 서지골에 살던 이화만이다. 그는 1차 이장할 때도 논 10마지기와 돈 90냥을 주선하여 이장을 추진하였으며, 2차 이장 때도 아들들과 함께 총 비용의 67%인 107냥을 내어 추진하였다.

 

죽음을 무릅쓰고 성인들의 시신을 옮겨 묻은 이화만은 원래 정산 사람으로 서짓골에 이주해서 살았는데, 천주교 박해로 잡혔다가 배교하고 풀려나왔었다고 한다. 이후 네 성인의 유해를 거두어 안장하였다가 체포되어 1866년 12월 12일 두 아들과 함께 치명하였다. 이화만과 그 후손들에 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b>1) </b><b>『</b><b>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b><b>』</b><b>의 기록</b>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은 1882년에 작성된 문서이다. 이 때 자세히 증언한 사람은 이화만의 아들 이치문(힐라리오) 인데, 이화만의 가족에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영(水營)으로 내려와 치명하신다는 말을 듣고 십리쯤 되는 곳에 사는 연고로 가 서 뵈올 마음은 간절하나 육정에 갈 마음은 없었나이다. 17세 된 죄인의 처남 최 안드레아에게 가보고 오라 한즉 죄인의 넷째 동생 (이) 그레고리오와 처고모 최 바 르바라와 돌돌(도로테아) 누나와 종6촌 종수(從嫂) 임 마리아 등 합 다섯 사람이 16 일(음력, 2월 14일의 잘못)에 일찍 수영으로 가서 따라 다니며 보니,

 

죄인의 형 이냐시오가 죄인의 셋째 형 요한 크리소스토모(뀌수)와 함께 오 좌수라 하는 집에 가서 돈 50냥을 얻어왔으나 이 돈을 나중 7월에 썼는지 4월에 썼는지는 모르고, 또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돈 40냥 대고, 죄인의 부친이 27냥을 대서 수청고 지로 가서 외인의 배를 삯을 내되

 

금년 정월 21일 밤에 죄인의 형 이냐시오와 죄인의 조카 안드레아와 질서(姪壻) 이 바르나바와 김 안드레아와 조카 프란치스코와 토다리 최서방 등 일곱 사람이 함께 산소를 파본즉,

 

위 글 내용에서 이화만의 아들 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화만의 아들 딸로 증언에 참여한 이치문(힐라리오)과 이 그레고리오(4째 동생), 이 이냐시오( 형), 이뀌수(셋째형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딸 이 도로테아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이화만의 아들 순서는 어떻게 될까? 이화만과 아들 몇 명의 생년을 계산할 수 있는데 이화만은 1802년생, 이뀌수는 1828년생, 이치문은 1836년생, 이 그레고리오는 1839년생이다. 여기에 이치서(이냐시오)를 큰아들로 하면 이화만의 아들은 이치서, 이뀌수, 이치문, 이 그레그리오 순이다.

 

증언록 정리번호 120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략

이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바오로의 셋째 아들이라. 부친과 함께 잡혀 서울로 갈 때에 소솔(所率)들이 함께 따라오려 하매 그 부친과 함께 육정을 이별하는 말로 하 직하고 부자가 함께 위주치명할 마음으로 서울까지 가서 그 아우 그레고리오와 삼 부자를 한 날에 교하여 죽이니, 나이 38세요. 그레고리오는 28세요. 증인은 서천 작은재 사는 그 아들 이 안드레아니, 나이 38세라.

 

증언록에서 이화만과 그 아들들의 이야기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b>(1) </b><b>이화만</b><b>(</b><b>李化萬</b><b>, </b><b>바울로</b><b>, 1802)</b>

정산(定山) 사람인데 남포 심전면 서짓골에 살았다. 부인은 김 가타리나이다. 병인년(1866) 정월에 남포(藍浦) 땅에서 잡혀 배교하고 나왔으나 늘 불편하게 생각하던 중, 충청수영에서 다섯 성인이 처형되어 묻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1866년 4월 초9일(음) 아들, 교우들과 함께 시신을 옮겨 안전한 곳에 매장하였다가, 여우가 훼손한 것을 보고 아들들과 함께 다시 시신을, 자기가 사는 남포 심전면 서짓골로 옮겨 묻었다.

1866년 전라도에 피신하여 있던 중 셋째 아들 요한 크리소스토모와 함께 잡혀 1866년 12월 12일 서울에서 치명하였다. 이때 넷째 아들 이 그레고리오도 남포에서 잡혀와 함께 치명하였다. 나이는 65세(1802년생)였다.

 

<b>(2) </b><b>이치서</b><b>(</b><b>이냐시오</b><b>) </b>

이화만의 첫째 아들이다. 아버지와 함께 1866년 4월 초9일(음) 성인들의 시신을 옮겨묻는데 역할을 하였고, 1866년 7월 초9일(음) 시신을 배로 옮겨 남포 서짓골로 옮길 때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때는 동생 이뀌수(요한 크리소스토모)와 함께 비용 50냥을 부담하기도 하였다. 1882년 1월 21일 백주교(블랑주교)의 지시로 서짓굴에 매장하였던 네 성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전달하였다.

<b>(3) </b><b>이뀌수</b><b>(</b><b>李三哲</b><b>, </b><b>요한 크리소스토모</b><b>, 1828): </b>

이화만의 둘째 아들로 1828년생이다. 1866년 4월 초9일(음) 아버지 아화만과 함께 네 성인들의 시신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7월 초9일(음)에는 남포면 심전면 서짓골로 옮겼다. 이때 경비 40냥을 부담하기도 하였다. 전라도에 살다가 아버지 이화만과 함께 잡혀 1866년 12월 12일 서울에서 38세의 나이로 치명하였다.

 

<b>(4) </b><b>이치문</b><b>(</b><b>힐라리오</b><b>, 1836)</b>

이화만의 셋째 아들로 1836년생이다. 첫 부인은 최 아녜스, 장인은 최 안드레아이고, 둘째 부인은 주 마리아이다. 남포 심전면 서짓골에 살다가 1866년 군난을 당하여 보령 수청구지(현 오천면 오포리 수청구지)로 피신하였다. 이때 동생과 누나 등 가족이 함께 피신하였다. 충청수영 갈매못에서 다섯 성인이 처형된다는 소식을 듣고, 본인은 가보지 않고, 동생 이 그레고리오와 누나 도르테아 등을 현장에 보내 지켜보게 하였다.

1866년 4월 초9일, 성인들의 시신을 갈매못에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 묻고, 7월 초9일(음)에는 남포현 심전면 서짓골 안전한 곳으로 옮겨 묻었다. 이후 흩어져서 살다가 1882년 1월 21일 백주교(블랑주교)의 지시로 네 성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전달한다. 이때 발굴된 성인의 시신을 강경에 있는 집 벽장에 달포간 보관하기도 하였다.

천주교 박해가 끝날 때까지 생존하여 많은 증언을 하였다. 아들 이윤오(바오르)도 증언록에 등장한다.

※ 이윤오(바오르, 1855): 이치문(힐라리오)의 아들이다. 1855년 생으로 병인년 전부터 서짓골에 살다가 13세 때 서짓골을 떠났다. 할아버지 이화만(바오르), 중백부(뀌수, 요한 크리스토모)와 부친 이치문(힐라리오)이 병인년 전부터 서짓골에 살았음을 증언하였다.

1921년에는 아버지 이치문이 벽장에 네 성인들의 시신을 달포 동안 보관했다는 이야기를 증언하였고, 1925년(71세)에는 미산면 평라리 서짓골에 가서 네 성인이 묻혔던 장소를 정규량 신부에게 증언하였다.

<b>(5) </b><b>이 그레고리오</b><b>(1839)</b>

1866년 병인박해 때 형수의 친정인 오천면 오포리 수청구지로 피난하여, 1866년 2월 14일(음) 다섯 성인이 처형되는 현장을 지켜본 사람이다. 네 성인의 시신을 서짓골로 옮길 때 비용을 대고 참여하였다. 서짓골에 살다가 1866년 체포되어 12월 12일 서울에서 아버지 이화만과 형 이뀌수와 함께 28살의 나이로 치명하였다.

 

<b>(6) </b><b>이 도르테아</b>

이화만의 딸로 이치문의 누나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동생인 이치문의 처가가 있는 오천면 오포리 수청구지 마을로 피신하여 다섯 성인이 처형되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1882년까지 임천 칠산에서 살고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화만 후손 집안에 내려오는 족보와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나오는 이화만의 아들들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삼부자가 순교하고 숨어 사는 과정에서 수단(收單)에 누락되었기 때문에 돌림자를 중시하는 족보상의 이름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증언록에 기재된 이름도 기록된 것이 아니고 증언이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특히 이뀌수가 그렇다. 증언록에는 ‘뀌’라고 나오나 실제 이름을 그렇게 짓는 것은 드문 일이다. 아마도 ‘귀’가 아닐까 한다.

 

○ 이화만(李化萬): 이화만(바오르, 1802)

1자 이범인(李範寅): 이치서(이냐시오)

2자 이범식(李範寔): 이뀌수(李三哲, 요한 크리소스토모, 1828)-순교

3자 이범실(李範實): 이치문(힐라리오, 1836)

4자 이범의(李範儀): 이 그레고리오(1839)-순교

5자 이범항(李範伉):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시신을 옮기는 과정에서 역할을 못하여 증언록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생각됨.

 

<b>2) </b><b>이화만과 아들들의 치명</b>

이화만과 아들들은 1866년 7월(음) 네 성인의 시신을 서짓굴로 옮겨 묻은 후 각지로 흩어져 살다가, 이화만과 둘째 아들 이범식(이뀌수, 이삼철, 요한 크리소스토모)은 전라도에서 체포되고, 넷째 아들 이범의(이 그레고리오)는 고향인 서짓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1866년 12월 12일 치명하게 된다. 증언에 의하면 얼굴에 종이를 붙이고 술을 품어 숨을 못 쉬게 해서 처형했다고 전한다.

천주교 대전교구 금사리 교회에서 2000년에 발간한 『金寺里本堂 100年史』에는

1866(丙寅)년 종교박해 때 충청도 고마수영(보령 오천)에서 순교한 안주교, 민신부, 오신부의 시신을 남포 서죽골로 이장하였던 교우 이화만(李化萬, 바오르)이 서죽골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해 9월에 다시금 박해가 심해지자 집에 있을 수 없어서 3남 이뀌수(일명 李範實)를 데리고 충청도 인내로 피신하다가 배교자 이치산(李致散)의 밀고로 포교들에게 체포되었고, 4남 범의(範儀, 그레고리오)는 집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순교하였다. 위 사실은 이치산이 발설하여 알게 되었다고 한다.

 

치명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치명일기」 134번

○ 이 바울로: 정산(定山) 사람이다. 병인 정월에 남포(藍浦) 땅에서 잡혀 배교하고 나왔더니, 고마수영(水營)에서 안(다블뤼) 주교와 다른 시체를 안장한 후 다시 경포에게 구준오(具俊五)와 한가지로 잡혀 서울로 와서 두 아들과 김성집(金聖執)과 박중문(朴仲文)과 최인경과 최 군이 합 7인이 동일 치명하니, 나이는 65세요, 때는 병인 12월 12일이러라.

 

「치명일기」 135번

○ 이삼철(李三哲) 뀌수: 이 위에 있는 바울로의 아들이라. 그 부친과 한가지로 치명하니 나이는 38세러라.

 

「치명일기」 136번

○ 이 그레고리오: 이 위에 있는 바울로의 아들이라. 그 부친과 한가지로 치명하니 나이는 28세러라.

 

<b>3) </b><b>이화만 후손들의 생활</b>

이화만과 후손들은 1866년 7월(음) 네 성인들의 유해를 옮겨 묻은 후, 박해가 심해지자 흩어져서 거주하게 된다. 이 후 이화만과 두 아들이 잡혀 1866년 12월 12일 순교하였다. 나머지 후손들은 숨어 살았다.

이기정(1948)님의 증조부인 이수병(안드레아)님은 2살 때 아버지(이범식)가 치명하였고 부여군 외산면 거칠에서 살았다고 한다. 거칠에서 아들 이우대를 낳았고, 손자인 이완성 신부가 어렸을 때 구룡면 금사리로 이주하였다. 거칠에서는 산에서 한약재를 캐다 팔아 생활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숨어 살던 이화만의 후손들은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로 이주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거주하게 된다. 1970년대에는 약 30호가 이화만의 후손이었다고 한다. 금사리에는 이씨 외에도 윤씨, 손씨가 거주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지켰고, 1901년 성당(본당)을 만들었다. 이화만의 후손들은 윤씨 손씨와 함께 교회의 회장을 맡는 등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화만의 친손자들 중에서는 3명의 신부와 1명의 수녀를 배출하였고, 이화만의 외손인 윤씨 집안에서는 3명의 신부와 1명의 수녀를 배출하였다. 이화만의 친손자와 외손자 중에서 많은 신부와 수녀가 나와 집안과 주변에서는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음은 이화만과 외손(윤씨) 가계도이다.

 

 

 

<b>4) </b><b>이화만 가족 묘지의 조성</b>

이화만의 후손들에 의하면 이화만과 함께 치명한 두 아들의 묘지는 만들어지지 못했고, 부인들의 묘만 전한다고 한다. 원래 묘지는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에 있었고, 1978년 이화만의 증손 이우철 신부에 의해 묘비까지 만들어졌었는데, 서천 천방산에 임도가 개설되면서 이름 없는 많은 천주교인들의 묘가 발굴되어 작은재줄무덤이 만들어졌고 이때 작은재로 이장되었다.

현재 작은재에는 삼부자 순교비와 함께 이화만의 부인 동래정씨 묘, 이화만의 막내아들 이범항과 두 부인, 이범인 요한 크리소스토모 부인의 묘, 이범식 그레고리오 부인의 묘, 이신병 요한과 두 부인의 묘가 있다. 그리고 묘역 위에는 이장하기 전 묘역에 세웠던 비석이 옮겨 세워져 있다. 옮겨진 비석과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孺人東萊鄭氏之墓(子坐) 本名 마리아.

후면: 夫君 全州李公化萬(바오로)는 병인년(1866) 천주교 박해시 충청도 수영에서 순교하신 안주교 및 동료 신자의 시체를 몰래 안장하다가 포졸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장자 範寅(기수) 차자 範寔(그레그리오)와 그해 12월 12일 치명하셨다.

子 範寅 範寔 範實 範儀 範伉

天主降生 1978年 4月 12日

曾孫 神父 宇哲謹竪

 

○ 學生全州李公範伉(本名 도마), 孺人草溪鄭氏(本名 안나)合窆 之墓

후면 子 愼柄(요안), 情柄(요안)

孫 宇植(도마), 宇宗(방지거), 宇連(마지아)

宇材(누가), 宇天(야고버), 宇英(요셉), 宇哲(시몬)神父

天主降生 1978年 4月 12日

孫 神父 宇哲謹竪

측면 夫 丁亥 6月27日卒

配 丙戌 5月28日卒

 

○ 全州李公愼柄요한, 配密陽朴氏안나, 配平山申氏막달레나 之墓

후면 全州李氏世宗王子漢南君15代孫

子 宇宗 孫 建成 奎成

宇連 萬成 文成 德成

2008年 4月 日立

위의 비문에는 이화만과 함께 치명한 아들을 큰아들(範寅)과 둘째아들(範寔)로 기록하였다. 둘째와 셋째 아들이 치명했다고 기록한 「금사리본당 100년사」와도 일치하지 않고, 둘째와 넷째 아들이 치명했다는 필자의 견해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지만 아마도 1978년 당시 순교에 관한 자료들이 발간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하게 고증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body>
</table>
 
<ol>
 	<li><b> </b><b>맺음말</b></li>
</ol>
이상으로 1866년 2월 14일(음) 갈매못에서 처형된 다섯 성인들의 시신 이동과 시신을 옮겨 모시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화만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병인박해 때인 1866년 2월 14일(음) 성 다블뤼 안 안또니오 주교 등 다섯 분은 충청수영 남문과 솟재를 지나 갈매못에 도착하였다. 정오쯤 참수되어 효수되었고, 3일이 지난 후 부근에 매장되었다. 처형된 장소는 사구(砂丘)로, 자갈과 모래가 섞인 황무지였다. 현재 순교복자비가 서 있는 곳이다. 3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2명의 조선인 회장을 따로 묻었는데, 장소는 사구의 만조선 근처로 자갈밭이었다. 이후 황석두의 시신은 후손들이 발굴하여 부여 홍산 삽티에 매장하였다.

약 2달이 지난 4월 초8일, 신도들이 밤에 시신을 발굴하여 옮겨 묻었는데, 장소는 오천면 영보리 남쪽 바닷가였다. 칠성판을 대고 염을 하여 매장하였다. 시신을 옮겨 매장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이화만과 장주기 회장의 아들 장노첨이었다.

이장한 묘지는 여우가 파는 등 안전하지 않아 7월 13일(음) 다시 이장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남포현 심전면 서짓골 이화만의 집 근처로 이장하게 된다. 밤을 택하여 시신을 발굴하고 다시 염하여 배에 싣고 운반하였는데, 첫날부터 풍랑을 만나 오천면 영보리와 오포리 사이의 바다와 송도 안쪽 바다를 전전하다가 8일 만에야 완장내 포구에 도착하였다.

완장내 포구에서는 시신을 지게에 지고 야음을 틈타 서짓골까지 이동하여 비밀리에 매장하였다. 이때 이동로는 완장내-주산면 창암리-동오리-곰재-서짓굴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차 매장을 주도한 사람은 이화만이었다. 이화만이 아들들과 함께 자금을 마련하고 배를 얻어 실행하였다. 이후 이화만의 가족들은 흩어져서 생활하였으나 이화만과 둘째 아들 이범식(이뀌수), 넷째아들 이범의(그레고리오)는 잡혀 1866년 12월 12일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서짓골의 묘지는 1882년 1월 21일(음) 밤에 발굴되어, 강경 이범실(이치문) 집 벽장에 달포 보관되었다가 전북 진안 널티(진안군 마령면 덕천리) 마 베드로 회장 집으로 옮겨졌고, 11월 일본 나가사키 오우라성당으로 보내졌다. 이들 유해는 1894년 5월 22일(양) 다시 서울로 돌아와 용산에 있는 사제와 수도자들의 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00년 9월 10일(양)에는 명동성당으로, 1967년에는 마포 절두산 순교성지로 옮겨졌다.

이화만의 후손들은 흩어져 숨어 살다가 천주교가 공인되자 부여군 구룡면 금사리로 모여 집성촌을 이루었고, 금사리 교회를 창립하였다. 금사리에는 이화만의 후손 이외에도 윤씨, 손씨 등의 천주교를 믿는 집안이 있었다. 이화만의 친손과 외손(윤씨) 집안에서는 많은 신부와 수녀를 배출하였고, 회장을 맡아 교회를 발전시켰다.

현재 이화만의 부인과 후손들의 묘지는 서천 천방산 작은재줄무덤에 모셔져 있다.

 

 

참고문헌

뮈델·閔德孝, 1986, 『致命日記』, 성 황석두 루가서원.

천주교 대전교구 서천본당, 2010, 『박해시대 서천지역 천주교회사와 그 자료(산막골과 작은재 줄무덤 터 현양)』

차기진, 2007, 『갈매못 성지의 순교성인과 순교터 고증』, 순교성지 갈매못.

갈매못 성지, 2012, 『순교성인 위앵 루카 신부』

내포교회사연구소, 2016, 『갈매못 다섯 성인의 삶과 영성』

차기진, 2016, 「갈매못 순교자들의 최후 압송로와 순교터·매장지에 대한 연구」

천주교 대전교구 금사리교회, 2000, 『金寺里 本堂 百年史』,

 

도움말 주신 분

이기정(1948): 대전시 유천동. 이화만의 6대손.]]></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8:59:12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ⅩⅤ. 일제가 충청남도 천주교회에 끼친 폐해 - 프랑스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의 서한을 중심으로 -]]></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23]]></link>
			<description><![CDATA[<b>ⅩⅤ</b><b>. </b><b>일제가 충청남도 천주교회에 끼친 폐해</b>

<b>- </b><b>프랑스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의 서한을 중심으로 </b><b>-</b>

<b>권영명</b>

머리말 324
<ol>
 	<li>토지조사사업과 무단 점유 324</li>
</ol>
1) 합덕 성당 325

2) 공세리 성당 325

3) 공주 성당 326

4) 서산 성당 326
<ol>
 	<li>포교규칙 326</li>
</ol>
1) 합덕 성당 327

2) 공세리 성당 327

3) 공주 성당 328

4) 부여 성당 328

5) 서산 성당 328

6) 대전 성당 328
<ol>
 	<li>사립학교 관련 규칙들 329</li>
 	<li>삼림법과 화전 정리 사업 330</li>
 	<li>연초와 관련된 법령들 332</li>
 	<li>일제가 가지고 온 도박과 윤락 333</li>
</ol>
1) 합덕 성당 334

2) 예산 성당 335

3) 공세리 성당 335
<ol>
 	<li>일본에 대한 환상 335</li>
 	<li>신사참배 335</li>
 	<li>공출 337</li>
</ol>
맺음말 337

참고 문헌 338

<b>머리말</b>

필자는 2021년 봄에 “일제강점기 종교 정책에 직면한 한국천주교회(1910-1945)”라는 주제로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세계교회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일제의 종교정책은 대부분은 법령을 통해서 공포되었고, 시행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법령에 따른 천주교회의 직권자들과 주일 교황대사, 그리고 교황청의 포교성성이나 국무성 장관의 결정과 지침들에 집중하여 논문을 집필했다.

올해 내포교회사연구소 부소장으로 부임하여 일하고 있는데 공세리성지성당 주임사제인 홍광철 신부님이 공세리에서 할 11월 학술 심포지엄의 한 발표를 부탁했다. 주제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가 충청남도 천주교회에 끼친 폐해였다. 필자가 쓴 박사논문과 겹치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렇게 크게 유용하지는 않았다. 참고할만한 부분은 법령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대전교구가 출간한 대전교구사 자료집인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과 “한국인 성직자들의 서한”에서 본당 주임 사제로 활동했던 프랑스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이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한들, 그리고 대전교구 내 본당사 자료집들을 중심으로 자료들을 찾았다.

일제강점기에 충청남도 지역에 존재했던 본당들은 공세리성당, 합덕성당, 예산성당, 공주성당, 부여성당, 서산성당, 논산성당, 대전성당이었다. 자료를 정리할 때는 본당별로 묶었지만, 본 글에서는 폐해의 소주제별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러한 항목을 되도록 법령의 연대순에 맞추어서 설정했다. 그래야 좀 더 효과적으로 일제가 천주교회에 끼친 폐해를 잘 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본 글에서는 주제에 따라 시대적으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부터 해방을 맞이한 1945년까지 제한하였다.

본문은 토지조사사업과 무단 점유, 포교규칙, 사립학교 관련 규칙들, 삼림법과 화전 정리 사업, 연초와 관련된 법령들, 일제가 가지고 온 도박과 윤락, 일본에 대한 환상, 신사참배, 공출 순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연구안에서 일제의 수탈과 억압, 그리고 해악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ol>
 	<li><b> </b><b>토지조사사업과 무단 점유</b></li>
</ol>
일본은 식민지 정책의 시행을 위한 한 방법으로 1905년 통감부 출현과 함께 근대적 토지 소유로의 확립을 목표로 그 기초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1910년 초 조선 내에 토지조사국을 설치하였고, 일제 강점이 되자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으로 개칭하여 본격적인 사업을 벌였다. 일제는 본격적으로 한국의 토지 소유관계를 독점하기 위해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위해 1912년 8월 13일에 토지조사령(제령 제2호)과 토지조사령 시행규칙(조선총독부령 제6호)을 공포하였다. 이 토지조사령 제4조에 따르면 토지 소유자가 주소, 성명, 지목(주된 용도에 따라 땅을 구분하는 명목), 지적(토지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등록하여 놓은 기록), 결 수(논밭의 면적을 헤아리는 단위인 결부의 수량) 등을 신고하면 지권을 발행하여 그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였다.

 

<b>1) </b><b>합덕 성당</b>

크렘프 신부는 1910년 9월 8일 자 서한으로 합덕성당의 토지들을 위한 합법적인 증서를 갖추도록 뮈텔 주교에게 청했다. 그는 1910년 10월 20일 자 서한으로 수입 인지에 대해 보고를 뮈텔 주교에게 했다. 이 서한에서 세금 고지서에 따른 수입 인지를 붙이기 위한 권리 증서들의 분실이 군청의 실수로 일어났으며, 따라서 새롭게 인지가 붙여진 권리 증서들을 입수하게 되었다고 보고 했다.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령과 토지조사령 시행규칙을 공포하면서 토지 대장의 조사원들이 합덕성당에도 찾아왔다. 그래서 크렘프 신부는 1912년 5월 27일 자 서한으로 주교의 인장을 증서나 위임장에 사용해도 되는지, 본당 사업을 위해 각 본당 신부들 명의로 된 토지들을 천주교회의 이름으로 등록시켜야 하는지 뮈텔 주교에게 문의했다.

 

<b>2) </b><b>공세리 성당</b>

드비즈 신부는 1913년 12월 17일 자 서한에서 교구의 토지 문서들에 대한 소속을 관청에서 더디게 처리하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뮈텔 주교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1914년 1월 14일 자 서한에서 토지와 관련된 정식 문서를 취득하기 위해서 두 가지 방법이 있음을 뮈텔 주교에게 보여주었다. 하나는 본당 신부가 토지 문서의 대표자가 되면 대목구장의 위임장이 필요하고, 다른 하나는 대목구 명의로 하지 않고 본당 신부의 명의로 할 경우인데 이때에도 대목구장의 서류, 예컨대 동봉하는 인감 감지 증명서 같은 것이 필요했다.

 

<b>3) </b><b>공주 성당</b>

루블레 신부는 1910년 9월 2일 자 서한에서 공주에 속한 땅문서를 조사하면서 부족한 서류를 뮈텔 주교에게 요청했다. 또한 그는 같은 달 5일 자 서한에서 군청이 조선 정부 가옥을 학교로 만드는데 그 앞에 있는 교구 밭을 교환하거나 사겠다는 건을 뮈텔 주교에게 문의했다.

이러한 군청의 요청을 거절한 루블레 신부는 다음 해 7월 8일 자 서한에서 농업 학교에 이르는 오솔길을 넓은 길로 확장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공주에 거주하는 육군 중령으로부터 요청받았음을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그는 그해 12월 16일 자 서한에서 뮈텔 주교의 회신에 따라 이 육군 중령이 요청한 토지 건을 거절하였지만, 사전에 통고 없이, 도로가 아주 넓게 나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을 알렸다.

 

<b>4) </b><b>서산 성당</b>

폴리 신부는 1910년 9월 1일 자 서한으로 토지 문서들이 규정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다시 작성하는 권유를 관청으로 받았다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하면서, 문서를 다시 작성하면서 복사의 이름이 아니고 본인 또는 주교의 명의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뮈텔 주교에게 보냈다. 이어서 그는 같은 달 17일 자 서한으로 다시 한번 본인의 의견을 전달하면서 토지 문서들을 재등록하는 데 필요한 문서들을 뮈텔 주교에게 청했다. 그는 다음 달 10월 13일 자 서한으로 본인 명의로 소유권을 고치려고 하지만, 󰡒경향잡지의 '법률 문답'과 관장은 이사관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신고 방식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애로사항이 있음을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ol>
 	<li><b> </b><b>포교규칙</b></li>
</ol>
191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령 제83호로 '포교규칙'이 공포되었다. 총독부는 종교 자유 보장, 포교 행위 공인, 종교에 대한 평등한 대우를 위해서 포교규칙을 제정하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법령의 핵심은 종교 자유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종교를 통제할 수 있는 일종의 '종교 공인' 정책이었다. 포교규칙 제2조에 따르면 포교자에게 자격증을 요구하였는데, 천주교회의 경우 포교자는 사제만 해당하는 것 같았다. 교회의 설립과 변경에도 조선 총독의 허가가 필요하였고, 다음 해에는 교회에의 기부에도 허가를 요구했다.

 

<b>1) </b><b>합덕 성당</b>

라리보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1915년 12월 28일에 보낸 서한에서 󰡒성당과 공소 집에 관한 서류들을 주교님께 발송했습니다. …… 이 모든 서류들이 제게는 아주 생소한 것입니다. 이 새로운 규제들로 인한 주교님의 모든 걱정에 동정을 합니다만, 그 일부를 우리가 도와드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롭게 생각합니다󰡓라고 쓰면서 새로운 규제들로 인해 혼란과 어려움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같은 달 30일에 보낸 서한에서도 군에서 요구하는 사본을 다 충족하지 못함을 이야기했다.

라리보 신부는 1915~1916년 합덕본당 및 수곡본당의 연말보고서를 뮈텔 주교에게 보내면서 포교규칙에 대한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작년에 이전처럼 한국에서의 포교에 관한 조사가 없었더라면… 그 법의 정신이 어떻든 간에 법이 제정된 이상, 그 적용이 너무나 자주 불친절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급 관리들은 그들의 직무를 이행하는 데서까지 가끔 종교에 대한 그들의 개인적인 증오를 드러냈습니다. …… 보다 두려운 것은 신앙이 약한 몇몇 교우들이 두려움 때문에, 인간의 호의를 얻기 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박우철 신부는 1917년 10월 18일 자 서한에서 󰡒합덕 관할 공소 중 세 공소는 아산 땅에 있는데, 포교계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가 않아서󰡓 뮈텔 주교에게 의견을 청했다.

<b>2) </b><b>공세리 성당</b>

드비즈 신부는 1915년 11월 29일 자 서한에서 포교규칙에 따라 종교국에 신고하는 행정적 절차가 쉽지 않음을 토로하면서, 뮈텔 주교에게 하나의 본보기를 만들어 달라고 청했다.

 

<b>3) </b><b>공주 성당</b>

이종순 신부가 떠나고 공주성당으로 부임한 백남희 신부는 1917년 10월 9일 자 서한에서 주교의 지시에 따라서 포교계와 포교 담임자 변경계를 제출하였다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따라서 매번 신부들의 인사이동이 있을 때마다 관청에 포교계와 포교 담임자 변경계를 제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b>4) </b><b>부여 성당</b>

박동헌 신부는 1923년 7월 27일 자 서한에서 포교계를 군청에 제출하였지만, 거주계를 내야 한다고 면소에서 통지받고, 거주계도 내야 하는지 뮈텔 주교에게 문의했다.

 

<b>5) </b><b>서산 성당</b>

안학만 신부는 1917년 10월 27일 자 서한에서 포교 담임자 변경계을 넣은 봉투에 서산군청으로 써야 할 것을 홍성군청으로 써서 잘못 기입하였기에, 뮈텔 주교에게 변경계 3통을 다시 보내 달라고 청했다. 그는 같은 해 12월 3일 자 서한에서 포교 담임자 변경계가 처리되고 있음을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b>6) </b><b>대전 성당</b>

이종순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보낸 1915년 10월 16일 자 서한에서 󰡒공베르 신부 명의로 끝나버린 공주 본당 포교계의 갱신 문제로 이달 10일에 군청에서 발송한 편지가 와󰡓 있으므로 본인이 그 문제를 처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다음 달 11월 9일에 보낸 서한에서 공주 본당에 관한 신고 사무가 지연되고 있음을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이어서 그는 12월 22일에 󰡒포교소와 포교자를 신고󰡓하라는 공문을 받아서 이것을 처리하여 뮈텔 주교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이종순 신부는 다음 해 1916년 1월 1일 자 서한에서 비룡 포교소의 설립에 관해 신고하는 일에 대해서 뮈텔 주교에게 문의했다. 그는 같은 달 17일 자 서한에서 󰡒포교 담임자 문서󰡓가 오류 때문에 옥천 군청으로 반환되었고, 공주에서도 본당과 공소에 대한 포교계를 재촉하는 편지가 왔음을 뮈텔 주교에게 전했다. 그는 다음 달 2월 8일 자 서한에서 본인이 관할하고 있는 포교소계에 대전군 공소 하나가 빠져 있음을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이종순 신부는 1916년 2월 9일 자 서한에서 비룡 포교소를 설정하는 문제는 주교의 지시에 따라 일을 추진하겠지만, 일이 얽혀 있어서 시일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같은 달 22일 자 서한에서 공주 군청에서 강당 포교소 설치계 제출건에 관해 통지서가 왔음을 알리면서 그 사본을 동봉하여 뮈텔 주교에게 보냈다. 그는 같은 해 3월 9일 자 서한에서 주교의 지시에 따라서 공주 명곡리 강당 건에 관해 공주 군청에 답변하지 않았지만, 이 문제에 관해 다시 조회가 왔음을 뮈텔 주교에게 알렸다.

이종순 신부는 1917년 6월 30일 자 서한에서 서울로 올라갔을 때 두 본당의 4개 성당(옥천, 비룡, 공주, 명곡리)이 설립된 연월은 적었지만, 그것을 신고한 연월일은 적지 않았는데, 이것으로 옥천 경찰서에서 이 점에 대한 대답을 요구해 왔다고 하면서, 뮈텔 주교에게 포교소 설치계를 제출한 연월일, 포교 담임자 선정계 제출한 연월일을 알려주기를 청했다.

 
<ol>
 	<li><b> </b><b>사립학교 관련 규칙들</b></li>
</ol>
조선총독부는 1911년 8월 23일에 칙령 제299호로 ‘조선교육령’을 발표했다. 이 교육령은 일본 신민화의 토대가 되는 일본어의 보급, 곧 충량한 제국 신민과 그들의 부림을 잘 받는 실용적인 근로인, 파급관리, 사무원 양성을 목적으로 했다. 그리고 총독부는 이 법령을 사립학교에도 적용하기 위해서 같은 해 10월 20일에는 총독부령 제114호로 ‘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했다. 사립학교 규칙은 사립학교에 대한 인사권 및 교학권 등에 대한 간섭을 강화했다. 이 규칙을 통해 교육과 종교의 분리를 주장함으로써 그리스도교에 압력을 가하였다. 그리스도교 학교에서의 종교교육과 종교의식을 금지함으로써 선교사들이 스스로 교육 분야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4년이 지난 후 1915년 3월 24일 총독부령 제24호로 ‘개정사립학교 규칙’을 공포했다. 모든 학교의 교과목에서 성경을 제외할 것과 5년 이내에 교사들에게 일본어 학습을 의무화하고, 고등보통학교로의 교명 변경을 강요했다. 그리스도교 학교에서의 종교교육 및 종교의식 금지는 선교사들에게 교회에서 운영하던 학교들의 설립 취지를 흔들었다. 특히 교사 자격 기준 강화 및 전문사립학교 설립에 대한 재단법인 규정은 가난한 천주교 학교에 큰 어려움을 주었다.

사립학교 규칙과 개정사립학교 규칙으로 인해 성당의 학교들이 어려운 상황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사한 자료들 안에서는 합덕 성당의 사례만 구할 수 있었다.

크렘프 신부는 1912년 4월 26일 자 서한에서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 수가 많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을 뮈텔 주교에게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다: “학생들이 정부의 모든 지원을 받는 공립 학교와는 경쟁을 이겨낼 수가 없으니, 공립 학교의 학생들은 정부로부터 온갖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1921년 5월 16일 자 서한에서 󰡒사립 학교들은 유능하고 헌신적인 교사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성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규 교육자에 대한 처우 수준은 사립 초등학교의 빈약한 기금으로는 높은 보수로 직원들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원과 자원의 부족으로 필시 학교 문을 닫아야 할 것입니다󰡓라 하면서 성당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경제적 어려움을 뮈텔 주교에게 토로했다.

이러한 어려움이 지속되면서 페랭 신부는 1927-1928년 합덕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본당 여학교의 학생들이 지난여름에 설립된 공립 여학교로 전학을 거의 가게 되어서, 유치반만 남았다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ol>
 	<li><b> </b><b>삼림법과 화전 정리 사업</b></li>
</ol>
조선총독부는 1911년 6월 20일에 총독부 제령 제10호로 ‘삼림령’을 제정하고 그해 9월 11일에 시행에 들어갔다. 이는 조선의 임야를 강제적으로 국유임야를 창출하고 일반 국민의 임야를 박탈할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화전 정리 문제는 토지 조사사업과 임야 조사 사업을 거치는 과정에서 불거진 문제 중 하나였다. 이들 사업을 시행하던 중 일제는 토지의 경계와 지목을 결정하면서 어디까지는 임야로, 또 어디까지는 전답으로 인정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부딪히게 되었다. 화전이 소재한 땅의 지목이 ‘임야’로 결정되면 그 안에서 경작하는 행위는 ‘삼림법’ 혹은 ‘삼림령’에 규정된 바 일정한 통제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당시 화전의 상당 부분은 숙전화(토양을 작물생육에 적합하도록 개량하는 과정)된 상태였고, 많은 농민이 이에 생계를 의지하고 있어서 무턱대고 화전 경작을 금지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조선총독부는 재정 수입을 보존하기 위하여 경사도 30도에 가까운 험준한 산지의 화전까지 되도록 그 경작을 인정했다. 곧 대다수 화전을 과세지로 한다는 방침이었다. 따라서 총독부가 적극적으로 정리하고자 했던 것은 지세를 내는 자가 존재하는 민유림 내 화전이 아니었다. 총독부의 화전 정리 방침은 국유림 내 화전민들의 강제 이주를 강력히 밀어붙이고, 그 재입산을 막기 위한 통제책으로 일관했다.

 

<b>1) </b><b>공주 성당</b>

루블레 신부는 1912-1913년 공주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아침 미사 참석률이 매우 좋지 않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극심한 생활고로 들었다. 󰡒화전의 수확의 감소, 담배 값의 하락, 돈이나 부역으로 지급해야 하는 온갖 세금, 우리 화전민과 지주와의 어려움, 몇 푼의 돈도 꿀 수 없는 상태 등등이 우리 조선들로 하여금 생계를 찾기 위해 환경을 바꾸고 다른 곳으로 이주케 하는 이유들󰡓이라고 하면서 많은 이들이 서간도로의 이주를 매력적으로 느낀다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루블레 신부는 1914년 5월 11일 자 서한에서 산의 농사가 안 되었고, 화전이 금지될 것이기에 많은 교우가 비참한 상태에 빠지거나 이주를 할 것이라고 뮈텔 주교에게 알렸다.

 

<b>2) </b><b>부여 성당</b>

공베르 신부는 1911년 8월 19일 자 서한에서 삼림법의 영향으로 사유지에 있는 나무들을 베거나 그 가지를 쳐내는 것도 금지하고 있어서 소양리에 있는 사제관과 함께 사둔 산의 나무들 가지를 쳐내야 하는데, 면사무소의 서류가 필요하다고 뮈텔 주교에게 알렸다. 그는 다음 달 22일 자 서한으로 나뭇가지 치는 것에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아서 결국 허가 신청 없이 하인을 보내 산의 나무들의 가지를 치게 하였다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ol>
 	<li><b> </b><b>연초와 관련된 법령들</b></li>
</ol>
조선총독부가 1914년 3월 16일에 총독부 제령 제5호로 '연초세령'을 제정하여, 그해 7월부터 이를 실시하고 연초에 대한 경작세와 판매세 부과를 주 내용으로 한 '연초세법(1909년 2월 법률 제4호)'을 폐지했다. 이 법은 제조세와 소비세를 부과하고 연초제조지역과 제조공장을 허가제로 함으로써 영세한 조선 연초제조업자들이 대거 몰락하고 일본인들이 제조업을 장악하게 되었다.

총독부는 국내 담배 산업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연초세령’을 폐지하면서 1921년 4월에 '조선연초전매령'을 공포하고, 그해 7월 1일부터 본격적인 연초전매를 실시했다. 따라서 연초와 관련된 법령들은 식민 통치에 필요한 조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만든 제도로서 농업정책을 가장한 수탈이었다.

 

<b>1) </b><b>합덕 성당</b>

페랭 신부가 1923-1924년도 합덕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공소 동정' 항목에서 권곡리 공소와 대치리 공소가 담배 농사 금지로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음을 보고했다.

 

<b>2) </b><b>공주 성당</b>

루블레 신부는 1919-1920년 공주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담배 재배와 판매가 법률의 규제를 받게 되었고, 화전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어서 교우들의 생계가 막막해지고 있음을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b>3) </b><b>부여 성당</b>

공베르 신부는 1910-1911년 부여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담뱃값이 하락하고 나서 안면도 공소가 어려움에 부닥쳐 있다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그는 1921-1922년 부여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총독부에 의해 금지된 담배 농사로 인해 신자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이들을 돕기 위해 공소전을 사용했으며. 산악 지대의 작은 공소들은 담배 전매 시행으로 인해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b>4) </b><b>서산 성당</b>

멜리장 신부는 1922년 4월 16일 자 서한에서 서산 지역에서 담배 농사가 허용되지 않기에 이주해 가고 있다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b>5) </b><b>논산 성당</b>

루블레 신부는 1921-1922년 논산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총독부는 담배 전매권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을 때 백성 중 가장 건전한 계층의 사람들이 거지 신세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담배 농사로 살아온 성실한 가족들이 생계를 구하기 위해 얼마나 놀미(논산)로 저를 찾아오는지 모릅니다. …… 군산, 강경, 논산 등은 일찍이 행복했던 이 굶주린 사람들에게 정말로 불안한 피난처가 될 것입니다󰡓라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공베르 신부는 1923-1924년 논산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쇠목(현 충남 논산군 가야곡면 중산리)에 있는 구교우들이 담배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은 담배 경작 금지령으로 인해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ol>
 	<li><b> </b><b>일제가 가지고 온 도박과 윤락</b></li>
</ol>
조선의 개항 후, 일본에서 들어온 화투가 노름계를 휩쓸었다. 화투는 대체로 포르투갈에서 비롯된 ‘카르타(carta) 놀이 딱지’가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에 무역차 출입하였을 때 전해졌다. 일본인들이 그것을 본떠서 하나후다(花札)라는 것을 만들어 놀이 겸 도박행위를 하던 것이다. 이 화투가 일제 강점기에 널리 퍼졌다. 그리고 일본 노름 야바위도 화투와 함께 들어왔다.

도박이나 내기 자체가 정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본인이나 이웃에게 필수적인 것을 박탈할 때, 도박과 내기는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도박 벽은 그 사람을 도박의 노예로 만들어 버릴 심각한 위험이 있는 것이다. 손해가 가벼워서 손해 본 사람이 그 손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정하게 내기를 걸거나 노름에서 속임수를 쓰는 행위는 중대한 죄가 된다. 따라서 교회의 십계명 중 일곱 번째 계명인 ‘도둑질을 하지 마라’에 기초하여 도박은 교회 내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유곽(遊廓)은 17세기 초반, 에도시대부터 시작된 일본의 공창제 하에서 법적 근거를 갖추고 국가권력의 허가를 받아 성매매 영업을 하는 집결지를 말하였다. 또한 공창제 시행 전후시기에 공식적인 법령 없이 국가권력으로부터 허가 또는 묵인을 받고 공공연하게 성매매 영업을 하는 업소나 집결지도 유곽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공창제란 일본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이른바 일본 제국의 영역 안에서 실시하였던 성매매 관리제도이다. 포주가 여성의 성을 팔고 남성이 성을 사는 것을 국가가 합법 또는 묵인하고, 등록 및 강제 성병 검진 제도를 통해 법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일본의 유곽과 공창제 또한 한반도로 이식되었다. 1876년 일본에 의해 조선이 개항된 직후부터 개항장에 일본인 유곽 업자와 창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1880년대부터 이들의 성매매에 대한 관리정책을 시행하며 일본의 조선 진출을 촉진하였다.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일본식 유곽이 들어섰으며, 조선인을 대상으로는 '일가(一家)'의 성매매 영업을 허용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유곽은 집결지를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매매 영업을 하는 개별 업소를 지칭하는 것으로도 인식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비 공창 업소인 요리점이나 음식점에서의 성매매도 묵인하여 조선 사회에서는 공창뿐 아니라 공공연한 성매매 영업을 하는 사창 업소 또한 유곽으로 통칭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성매매는 교회 안에서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인 ‘간음하지 마라’에 기초하여 금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 선교사들이나 한국인 성직자들 모두 본당의 신자들이나 공소의 신자들에게 성매매나 축첩을 금지했다. 축첩은 조선 시대부터 만연하였던 것이어서 쉽게 해결되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일제의 영향으로 공공연한 성매매를 위한 유곽이나 공창제도로 인해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또 하나의 유혹을 낳게 되었다.

 

<b>1) </b><b>합덕 성당</b>

크렘프 신부는 1911년 합덕본당 연말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합덕 지방과 그 인근에 일본인이 오면서 그전에는 거의 몰랐던 노름을 지역 사람들이 알게 되었고, 노름의 열기가 더해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크렘프 신부는 행운에 대한 절제 없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노름이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해를 끼친다고 걱정했다.

페랭 신부는 1922-1923년 합덕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가장 심한 악습 중에서 돈놀이를 꼽았다. 그는 그것을 단절하기 위해 공공연한 처벌, 퇴학 등 모든 방법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으로, 청년 학생들에게도 미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그다음 해 합덕본당 연말 보고서에서도 노름에 대해서 다시금 전했다. 󰡒사람들이 돈놀이에 미쳐 있습니다. …… 지금은 노름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돈이 없으면 부모의 돈을 훔칩니다. 또 책, 연필을 사라고 준 돈, 혹은 월사금을 내라고 준 돈으로 노름을 합니다. 쌀을 팔거나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서 훔친 물건을 팔아서까지 노름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는 1926-1927년도 합덕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사기소 공소가 노름에서 특히 유명하다고 언급했다.

 

<b>2) </b><b>예산 성당</b>

구천우 신부가 1927-1928년도 예산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곡평 공소에서는 거의 모두가, 회장까지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라 보고했다.

 

<b>3) </b><b>공세리 성당</b>

드비즈 신부는 1918-1919년 공세리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일본의 조선 강점으로 물질적인 측면에서 진보를 이루었을지라도 󰡒윤락 여성들이 집들 가운데 활보하고 있고 아주 작은 마을까지도 일본인의 페스트에 감염󰡓되었기에, “혼인의 불가해소성이 깨졌다”고 보았다. “일본은 지금까지 조선인들을 온순한 짐승으로 만들었지 사람을 만들려 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본당의 신자들이 일본 법의 보호를 받는 많은 유혹 앞에 놓여있음을 걱정했다.

 
<ol>
 	<li><b> </b><b>일본에 대한 환상</b></li>
</ol>
일제강점기에 일부 사람들이 가졌던 일본에 대한 환상을 합덕본당 자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페랭 신부는 1926-1927년도 합덕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일본에 대한 열광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경솔한 젊은이들, 심지어는 여성들 가운데서까지 일본을 동경하며, 구운 닭이 구경꾼의 입 속으로 떨어지는 환락의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모, 처자를 버리고 오사카로 갔고, 그곳에서 신앙과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는 다음 해 합덕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일본으로 이주한 신자들이 대부분이 돌아왔으며, 그들은 일본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에 이제는 정신을 차렸다고 뮈텔 주교에게 전했다. 이후 일제의 총동원령이 내려지고 식량은 물론 쇠붙이 공출까지 시작되어 신자들의 생활이 점점 어려워지는 가운데 합덕 지역에서는 1939년부터 2년 연속 흉작이 들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생계를 위해 공장이나 광산에 일자리를 구하러 일본에 이민을 떠났다.

 
<ol>
 	<li><b> </b><b>신사참배</b></li>
</ol>
신사참배는 일제가 식민지 정책의 하나로 강요한 것으로서,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8월 16일 총독부령 제82호로 ‘신사사원규칙’을 공포하면서 신사에 공립적 성격을 부여했다. 이어 1917년 3월 22일 총독부령 제21호로 ‘신사에 관한 규칙’을 제정하면서 신사의 전국적 설립을 추진했다.

교회는 1920년대까지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 반대 견해를 밝혀 왔다. 1925년에 발간된 한국 천주교 교리서는 명시적으로 신사참배를 금지했다.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이나 한국인 성직자들 모두 이 신사참배를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인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에 기초하여 우상숭배라고 보았다. 따라서 교황청의 공식적인 지침이 있기 전까지, 조선총독부와 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계속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은 강요와 처벌로 변경되었고, 신사참배 거부에 따른 불이익이 현실화하면서 교회의 신사참배 지침은 수정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36년 교황청은 가톨릭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허용한다는 훈령(Pluries instanterque)을 반포하고, 이로써 교회의 신사참배와 관련된 논란은 마침표를 찍었다. 이러한 신사참배와 관련된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이 문제에 대해 서한을 썼던 곳은 합덕성당과 부여성당 두 곳이지만, 아마도 다른 성당들도 같은 문제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정규량 신부는 1926-1927년 부여본당 연말 보고서에서 공립학교에 다니는 신자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피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했다. 신사참배가 본격적으로 강요되기 시작하면서 공립 학교에 다니는 신자 학생들이 어려움을 겪었다. 학교에서는 정기적인 신사참배가 있었고, 매번 이 신사참배가 있는 날 결석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1936년 이후 신사참배가 충성심을 표현하는 하나의 국가예식으로 교회로부터 인정되면서, 조선총독부는 미사가 시작되기 전 일본 쪽을 향하여 궁성요배를 하도록 강요했다. 따라서 신자들은 성당에 들어오기 전 마당에 서서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 이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미사 때가 되면 경찰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 강론의 내용을 일일이 감시하였고 때로는 고해성사까지 입회하려고 하여 페랭 신부와 갈등을 겪었다.
<ol>
 	<li><b> </b><b>공출</b></li>
</ol>
조선총독부의 물자 회수는 1930년 후반(중일전쟁 시기)에 종이, 섬유류 등 폐품 회수가 지배적이었으나 태평양전쟁으로 돌입하는 1940년대에 금속 회수가 특별히 강조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41년 9월 30일에 총독부령 제260호로 ‘금속류회수령시행규칙’을 공포하면서 10월 1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1942년 2월부터 교회 종의 대대적인 헌납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달부터 이뤄진 교회 종 헌납에는 ‘싱가폴 함락 기념’이라는 명목이 부여되었다. 이후에도 각지 교회에서 교회 종을 헌납하는 기사가 자주 ‘매일신보’에 등장했다. 3월 5일에도 교회 종 일제 헌납 운동이 전개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금속 공출이 원활히 시행되지 않자, 조선총독부는 이를 어기는 곳은 ‘반국가’, ‘반국민적’ 행위라는 위협적인 언사를 하였고, 직접 강제 양도명령이 제대로 실행되는지 단속에 나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자들의 금속류 식기구와 성당의 종들이 징발되었다. 이 공출에 대한 언급은 공세리 성당과 공주 성당, 그리고 대전 성당에서 나왔다.

공세리 신자들은 공출의 명목으로 곡식과 쇠, 놋숟가락, 놋 식기들을 빼앗겼다. 그리고 공세리 성당의 종은 다른 성당의 종과 같이 동네 사람들에게 아침, 점심, 저녁을 알려주는 동시에 기도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 일제가 1944년에 종을 떼어 가는 일이 벌어졌다. 공주 신자들도 많은 놋그릇과 쇠붙이를 공출당하였다. 더욱이 공출이 심해지면서 마침내 1944년에 성당 종탑에 있던 종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그와 같은 해에 대전 본당도 종을 빼앗겼다.

 

<b>맺음말</b>

일제강점기인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충청남도 지역에서 사목 활동을 했던 프랑스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의 서한을 중심으로 놓고, 부족한 부분들은 각 본당사를 참조하면서 일제의 억압과 수탈 그리고 해악에 직면했던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대부분 법령의 공포와 함께 시행되었다. 따라서 일제의 해악과 관련된 부분인 일제가 가지고 온 도박과 윤락, 일본에 대한 환상은 명확한 법적 근거를 들기 어렵지만, 일제의 억압과 수탈 부분은 대부분 조선총독부 령이나 제령으로 법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신자들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아닌 본당 주임을 맡고 있었던 성직자들에 의해 쓰인 서한들이기 약간의 아쉬움이 있지만, 반대로 본다면 신자들이 본인들의 어려움을 본당 사제에게 토로하였던 것이고, 또 신자들의 공동체를 이끄는 본당 신부가 사목하면서 일제로 인해 겪었던 여러 어려움을 교회의 장상인 주교에게 보고하였다고 본다면 이 서한들은 교회의 삶을 잘 드러내 줄 수 있다고 판단된다.

이 지상을 순례하는 교회는 신자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에 토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교회 부동산 등록의 어려움을 겪었고, 일제의 무단 점유로 인해 성당의 땅들이 잘려 나가기도 하였다. 포교규칙으로 인해 본당 사제의 인사이동이 있을 때마다 매번 관청에 변경계를 제출해야 했고, 성당과 공소 건물을 보고해야 했다. 그리고 사립학교 관련 규칙들이 계속해서 나올 때마다 본당 사제는 학교 운영의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학교의 문을 닫는 결정하기도 하였다.

삼림법과 화전 정리 사업으로 인해 화전으로 생계를 꾸리던 신자들은 자주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에 대한 환상을 가진 신자들은 이사가 아닌 일본에 이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신자들의 잦은 이동은 각 본당의 공소 운영에 악영향을 주었다. 연초와 관련된 법령들은 담배를 재배하던 신자들에게 담뱃값 하락이라는 치명타를 주었고, 이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일제가 조선으로 가지고 온 화투와 윤락은 신자들의 도덕적인 타락을 부채질하였다. 특히 도박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조선인들 전체를 병들게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고 윤락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공창제를 통해서 강화되었다. 이러한 도박과 성매매는 십계명에 기초하여 본당 사제들이 여러 번 훈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잘 개선되지 않았음을 보았다.

교회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조선총독부와 갈등을 빚었고, 그런 중에 신사참배를 강요받았던 학생 중 신자 학생들은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나중에 교회의 공식적인 신사참배 허용으로 이러한 갈등이 일단락되었으나, 미사 전 국민의례를 해야 했고, 일본 경찰이 강론의 내용을 감시하였고, 고해성사의 내용까지 들으려고 했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그리고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일제는 많은 것을 공출해 갔다.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금속류가 회수되었고, 1944년에는 성당에 달린 종들도 빼앗겼다.

본 연구는 이렇게 일제가 충청남도 천주교회에 끼친 폐해를 하나의 항목만 잡아서 하지 않고, 다양한 면에서 조사하여 입체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비록 긴 글은 아니지만, 차후에 이러한 주제로 연구가 더 진행되는 것에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b>참고 문헌</b>

 

<b>1, </b><b>출판된 사료</b>

『경향잡지』, 342호(1916년 1월 31일), 46쪽.

『한국인 성직자들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와 대전교구홍보국 역편, 천주교 대전교구, 1990

『천주교 요리』, 2권, 최루수 편, 경성부명치정천주교회, 1925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한국교회사연구소와 대전교구홍보국 역편, 천주교 대전교구, 1994.

『朝鮮總督府官報』, 1911년 6월 20일, 131-132쪽.

『朝鮮總督府官報』, 1911년 10월 20일, 14-15쪽.

『朝鮮總督府官報』, 1912년 8월 13일, 85-86쪽.

『朝鮮總督府官報』, 호외1, 1914년 3월 16일, 2-4쪽.

『朝鮮總督府官報』, 1915년 3월 24일, 313쪽.

『朝鮮總督府官報』, 1915년 8월 16일, 153-155쪽.

『朝鮮總督府官報』, 1917년 3월 22일, 309쪽.

『朝鮮總督府官報』, 호외1, 1921년 4월 1일, 1-3쪽.

『朝鮮總督府官報』, 1941년 9월 30일, 253-255쪽.

Congregazione de Propaganda Fide, 「Pluries instanterque」, 『Acta Apostolicae Sedis』, vol. 28 (1936), 406-409쪽.

 
<ol>
 	<li><b> </b><b>신문</b></li>
</ol>
『新韓民報』, 1911년 9월 20일, 1쪽.

이주연, 「한국 교회 최고령 사제 고 구천우 신부의 생애」, 『가톨릭신문』, 1928호, 1994년 11월 6일, 5쪽.

 
<ol>
 	<li><b> </b><b>논문</b></li>
</ol>
Kwan Youngmyoung, 『La Chiesa Cattolica Coreana di fronte alla politica religiosa durante il dominio giapponese(1910-1945)』, 세계교회사 박사학위논문, PUG, 2021.

 
<ol>
 	<li><b> </b><b>단행본</b></li>
</ol>
윤선자, 『일제의 종교정책과 천주교회』, 경인문화사, 2001.

『공세리 본당 100년사』, 공세리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천주교 대전교구 공세리 교회, 1998.

『대흥동본당 85년사』, 천주교 대전교구 대흥동본당 역사편찬위원회, 천주교 대전교구 대흥동교회, 2004.

『중동 본당 100년사』, 중동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 천주교 대전교구 공주 중동 교회, 1997.

『착한 목자 백 필립보 신부』, 김정환, 류귀선 역편, 내포교회사연구소, 2010.

 
<ol>
 	<li><b> </b><b>잡지</b></li>
</ol>
김인호, 「태평양전쟁 시기 조선에서 금속회수운동의 전개와 실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2호,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0.

유가별, 「교황청의 신사참배 허용의 최후 과정」, 『교회사연구』, 56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20년 6월.

정동훈, 「일제 강점기하의 한국 천주교회와 신사 참배에 관한 고찰」, 『교회사연구』, 11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최병택, 「조선총독부의 화전 정리 사업」, 『한국문화』, 58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2.

 
<ol>
 	<li><b> </b><b>사전</b></li>
</ol>
『한국사대사전』, 교육출판공사, 1992.

『한국가톨릭대사전』, 1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한국가톨릭대사전』, 3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한국가톨릭대사전』, 4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한국가톨릭대사전』, 5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4.

『한국가톨릭대사전』, 8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한국가톨릭대사전』, 11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ol>
 	<li><b> </b><b>사이트</b></li>
</ol>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8:15:54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ⅩⅣ. 신사참배(神社參拜)와 국민의례(國民儀禮) 신사참배(神社參拜): 일본의 신토(神道) 신앙을 바탕으로 만든 종교시설. 신사 (神社)에  참배 하는 종교 의식이다. 국민의례(國民儀禮)는 공식적인 행사에 앞서 행하는 격식으로,]]></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22]]></link>
			<description><![CDATA[<b>ⅩⅣ</b><b>. </b><b>신사참배</b><b>(</b><b>神社參拜</b><b>)</b><b>와 국민의례</b><b>(</b><b>國民儀禮</b><b>)</b>

<b>- </b><b>한국천주교 내포를 중심으로</b><b>-</b>

<b>윤용자</b>
<ol>
 	<li>정 의 289</li>
 	<li>역사적 배경 290</li>
 	<li>경 과 291</li>
</ol>
1) 국가신도와 군국주의 291

2) 황국신민화 정책과 신사참배 292

3) 신사참배와 거부운동 293

4) 야훼 하느님이신가? 바알인가? 295

5) 천주교인의 신사참배 거부 운동( 神社參拜反對運動 ) 300

① 1920~1930년대 한·일 교회 301

​ ② 한·일 교회는 왜 신사참배를 금했나 302

③ 교황청의 입장 304

​ ④ 제사 허용 문제 307

⑤ 한·일 주교단의 신사 참배 허용 312

⑥ 한국천주교회 내 갈등 312

6) 신사참배의 허용 313

① 개정건 314

② 5교구 공인 정기간행물에 관한 건 314

③ 기독교인의 신도의식 316
<ol>
 	<li>결과 318</li>
 	<li>의의와 평가 319</li>
</ol>
참고문헌 321

 
<ol>
 	<li><b> </b><b>정 의</b></li>
</ol>
신도(神道)는 일본의 전통적인 종교적 관습과 일본인의 삶의 태도, 그리고 국가 이념의 총제적인 개념이다. 일본인에게 두려움과 놀라움을 주는 자연 현상과 자연물, 신화적 인물과 역사적 위인, 조상들의 영(靈) 등은 모두 숭배의 대상이 되어 800만 신이 있다. 자연과 조상을 숭배하는 신도의 제사 의식을 행하는 곳이 신사(神社)이다.

 
<ol>
 	<li><b> </b><b>역사적 배경</b></li>
</ol>
신도의 큰 신(大神)은 태양 여신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다. 천조대신은 일본 황실의 조상이며, 일본 천황은 그 직계 후손으로 믿는다. 일본 천황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난 현인신(現人神)이며, 국명과 국기는 태양신 숭배로 표현한다. 일본(日本)은 ‘태양의 기원’이라는 뜻이고 국기의 흰 바탕 위에 붉은 원은 태양신을 상징한다. 원시 종교인 신도는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의 외래종교의 영향을 받아 신도 사상이 만들어졌다. 8세기경 불교의 영향을 받은 신도는 절을 수호하기 위한 신사(神社)가 불교 사원 경내에 세워지고, 신도의 가미(神)들에게 보살 칭호가 붙여진다. 일본의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가 신도의 가미로 나타났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 동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 여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출처 : 위키백과)</td>
</tr>
</tbody>
</table>
13세기경 신도 사상이라 할 수 있는 ‘이세신도(伊勢神道)’는 신도오부서(神道五部書)라는 경전을 갖는다. 일본은 두 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략(1274, 1281년)으로 국가 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신도오부서 경전에는 ‘신의 나라’라는 신국(神國)사상이 나온다. ‘신의 신성’과 ‘신의 나라’에 대한 언급은 파격적이었다. ‘이세신도’는 불교 용어를 금지하는 등 반불교 사상의 원조이다.18세기경에는 이세신도는 불교나 유교 등의 외래 사상을 배격하고 일본의 전통적이고 고유한 것을 찾으려는 ‘고학신도(古學神道)’로 발전한다. 고학신도 사상은 군국주의적인 천황제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ol>
 	<li><b> </b><b>경 과</b></li>
</ol>
<b>1) </b><b>국가신도와 군국주의</b>

일본 근대화를 이룬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1889)은 700년간 지속된 막부(幕府) 중심의 정치체제에서 천황 중심의 정치체제로 변혁을 이루었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 중심의 정권 수립을 했지만, 정치 기반이 약하여 반정부파와 내전을 겪어야 하였다. 1870년 강력한 통치체제를 위한 천황제의 통치이념을 민간신앙 차원의 신도를 국교(國敎)적 지위로 올린 후에 국가 신도를 통해 구축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의 모든 신사(神社)는 황실의 조상신을 제사하는 이세신궁(伊勢神宮)아래에 두며 등급에 따라 관리하여 황실의 조상과 국가공로자의 위패를 모시는 국가 신도로 공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신도의 국교화 정책은 내·외부로부터 종교의 자유에 반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1882년 메이지 정부는 국가 신도에서 종교의 기능을 제거하는 ‘비 종교화’ 조치하였다. 이것을 ‘신사 신도’ 원래 신도를 ‘교파 신도’로 구분한다. 신사 신도가 국민의례가 됨으로써 신도의 참배는 국민 의무가 되었다. 하지만, 신사 신도는 교파 신도와 같은 신을 섬기고, 같은 날짜에 같은 원시적인 종교의식 등을 똑같이 같은 신사에서 거행함으로 그 구분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1889년 제국 헌법 제정 이후 ‘신도 비종교론’ 주장이 주류가 되어 1890년 신도가 교육의 근간이 되는 교육칙어(敎育勅語) 정책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조치는 신도에 초종교적 절대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신도가 타 종교를 통제하게 되었다. 신도는 종교가 아니므로 정교분리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논리는 종교 자유와 정교분리에 대한 국내. 외 비판을 피하기 위한 술수였다. 1891년 교육칙어 봉독과 신사참배가 소학교의 행사로 제도화됨으로 천황을 절대화하는 국가 신도의 교리가 사상적‧법적으로 완화되었다.

쇼와 정부는 신사의 통폐합, 제사의 획일화 등으로 신사제도를 정비하여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닌 국민통합을 상징하는 행사로 정착되었다. 일본이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년)을 승리로 이끈 가장 큰 요인은 국가신도를 통해 국론을 결집 시킨 것이다. 국가신도로 대변되는 야스쿠니(靖國) 신사의 원래 명칭은 쇼콘사(招魂社)였다. 메이지유신 직후인 1869년에 유신을 위해 숨진 영혼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시 많은 전사자들을 냈던 메이지 정부는 민중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 야스쿠니 신사와 각 지방에 호국신사를 세워 전사자들의 영령을 안치하였다.

 

 

 

 

 

 

 

 

 

 

▲ 일본은 1894년 7월 경복궁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도발을 시작하였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 전경(출처: 위키피디아).

 

1929년 세계 대공황에 경제적 타격을 입은 일본은 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 3성을 점령한다. 1945년까지 15년 동안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대륙진출 과정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기리는 추모 시설을 넘어 일본의 대외 팽창주의를 합리화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것은 군국주의 확대 정책을 종교적으로 뒷받침하였기 때문이다. 국가 신도는 국민에게 천황은 현인 신(現人神)이고, 일본열도는 신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신국(神國)사상과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 우월의식을 주입하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며 ‘천황을 위해 죽으라’라는 명령을 합리화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중요한 시기마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대대적인 열병식을 진행하고 쇼와 천황이 몸소 신사에서 참배하는 모습들을 국민에게 보여주었다.

<b>2) </b><b>황국신민화 정책과 신사참배</b>

임진왜란 후 1609년 조선과 일본이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일본인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부산진에 처음 신사를 세우고 용두산 신사로 불렸다. 본격적으로 조선 땅에 신사가 세워진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이다. 일본은 가는 곳마다 신사를 세워 천조대신과 메이지천황을 숭배하였다. 1898년 남산공원의 태신궁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42개 신사를 세워 국가 신도를 받아들이는 토양이 되었다. 1917년 평양 을밀대가 있는 높은 언덕에 신사가 세워지고, 5년 공사 끝에 1925년 서울 남산에 신도의 총본산인 조선신궁이 세워진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신궁 준공식인 진좌제(鎭坐祭)에 앞서 어령대(御靈代)를 부산에서 서울로 운송하는 봉영식에 경부선의 각 역과 서울에 학생동원령을 내렸다. 기독교 학교들은 학생들을 봉영식과 진좌제에 참석시키지 않도록 결의하였다. 이때만 해도 총독부는 3.1운동 이후 조선에 대한 유화책으로 기독교 학교에 대해 적극적으로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이 대륙침략을 재개하면서 사상적 통일을 위해 신사참배 정책을 강하게 추진하였다. 신사 신도를 애국 교육 정책의 기초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먼저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일본의 신사는 황실의 조상, 혹은 국가 원로를 제사하는 곳인데 여기에 참배하는 것은 제국 시민 된 자의 당연한 의무이다. 고래로 경신숭조(敬神崇祖)는 우리나라 교육의 근본 방침이다.”라고 하며 강요하였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 일제시대 학생들이 신사참배하는 모습</td>
</tr>
</tbody>
</table>
 

<b>3) </b><b>신사참배와 거부운동</b>

기독교 학교들이 이를 거부함으로 신사참배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32년 1월 전남 광주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가 ‘만주사변 기원제’ 참석을 거부하였다. 9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비롯한 10여 개의 학교가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 참석을 거부하였다. 1933년 9월 원산 진성여자보통학교가 ‘만주사변 2주년 기념 순난자 위령제’ 참석을 거부하였다.

신사참배 문제가 크게 확대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1935년 11월 14일 평남도청에서 공·사립 중등학교 교장 회의에 참석한 교장들에게 평남도지사(일본인)가 개회 벽두에 평양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자 숭실학교 교장 맥큔(G. S. McCune), 숭의여학교 교장 대리 정의성,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M. H. Lee)는 기독교인의 교리와 양심상 이에 응할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총독부는 거부한 교장들을 파면시켰다. 이런 강경책을 쓴 이유는 대외적인 요인도 컸지만, 한국교회와 선교사 간을 분열시켜 기독교 학교에 대한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배제 시키려는 의도가 컸다.

기독교 학교 교장의 파면 사건은 장로회 한국선교부와 선교학교에 영향을 끼쳐 학교의 존폐에 대해 고민하게 하였다. 숭실학교 교장 맥큔은 박형룡(朴亨龍과)‧ 주기철 등에게 최종 자문한 후에 조선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진리와 양심의 자유에 반하여 신사참배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학교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신사 예식에 참여하되 종교적인 부분에서만 참여하지 않을 것을 주장하는 선교사들도 있었다.

1936년 9월 미 북장로회 한국선교부는 실행위원회를 열어 ‘교육철수 권고안’을 69:16으로 가결하여 평양의 3숭(숭실, 숭실전문, 숭의)을 비롯하여 경신, 정신, 계명 등 9개 학교를 폐교하기로 결의하였지만 최종 3숭만 폐교원을 제출하였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 (왼쪽) 5년제 숭실중학교, (중앙) 장로교와 감리교가 합동으로 세운 숭실전문학교, (오른쪽) 5년제 숭의여학교</td>
</tr>
</tbody>
</table>
 

1936년 11월 미 남 장로회 한국 선교부는 교육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결의하고 광주 수피아와 숭일학교,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 여학교, 군산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 순천 매산 학교와 매산 여학교가 폐교를 신청하였다. 호주 장로교는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후에 모든 학교를 폐쇄하였다. 캐나다 선교부는 1925년 감리교회 및 회중교회와 연합하여 캐나다연합교회로 개편한 후 신사참배 문제를 타협적으로 처리하여 학교를 계속 운영하였다. 총독부가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을 계기로, 신사에 참배하든가 폐교하게 하는 강경책으로 나오자 기독교계의 의견이 분열되었다.

신사참배는 1938년 2월부터였다. 이로 인하여 기독계도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이후 ‘황국신민화 운동’의 고조와 함께 교육계의 신사참배 문제가 그들의 의도대로 일단락되자 조선총독부는 그 강요를 교회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교회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압을 이기지 못하게 되고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채택함으로 굴복하였다. 이 시기의 신사참배와 부일 협력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은 교계의 분열은 물론 광복 후까지 영향을 주어 한국교회에 심각한 교파 분열까지 이루게 되는 요인이 된다. 하지만 신자들 모두가 이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교파건 교단의 신사참배 결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전국적 규모의 신사참배 거부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력을 동원해 개교회(個敎會)로부터 시작해 노회ㆍ총회 등이 있었다.

 

<b>4 ) </b><b>야훼 하느님이신가</b><b>? </b><b>바알인가</b><b>?</b>

총독부는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 의례일 뿐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반면에 신사의 신도에는 이렇게 규정되어 있다.

 

‘일본은 신(神)의 나라이고, 최고 신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이며, 가장 실질적인 신은 천조대신의 손자이며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이며, 그 천황은 신성불가침이다. 이 천황에게 국민은 죽음으로써 충성할 것이며, 천황의 조상신들을 모신 신사에 참배치 않는 것은 비국민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에게 일본 천황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위한 정신개조 운동을 강화하였다.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이다)를 강조하면서 일본 황실의 조상과 전쟁 유공자를 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참배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각지에 신사 설립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서울 남산의 경성 신사와 부산 용두산 신사를 각각 국폐소사(國幣小社)로 승격시켰다. ‘1면 1 신사 정책’을 세워 산간벽지의 면 단위까지 신사를 세우게 하였다. 1945년 6월까지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작은 규모의 신사(神祠) 1062곳이 세워졌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r>
<td colspan="2">▲ 호안덴(奉安殿:봉안전) ▲ 가미다나(神棚)</td>
</tr>
</tbody>
</table>
총독부는 파출소, 주재소 등 관공서와 학교에 호안덴奉安(殿:봉안전)을 설치하고 호안덴을 보호하기 위해 숙직실도 마련하였다. 일반 민가에는 호안덴(奉安殿:봉안전)를 설치하여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하였다. 호안덴과 가미다나(神棚)에는 태양여신과 천황의 위패, 신주와 부적 등이 담겨있다.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사참배를 하기 위해서는 미소기하라이(禊祓) 의식을 행해야 하였다.

미소기(禊)는 몸의 더러움을 씻어 버리는 것, 하라이(祓)는 먼지와 더러움을 털어내는 것을 뜻한다. 더러운 옛것, 비일본적인 것, 비신도적인 것, 기독교적인 것 등을 씻어 없애는 신도(神道)의 결례 의식이다. 신도 청정, 신도 침례라고도 하며 서울 한강과 부산 송도 앞바다를 비롯한 전국의 강과 바다, 호수 등에서 행해졌다. 신도 승려는 ‘천조 대신 보다 더 높은 신은 없다’고 고백한 사람에게만 미소기하라이 의식을 진행하였다. 개신교인이 신도 침례를 받았다는 것은 신도(神道)로 개종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목사님들이 일본 중들이 행하던 불교 세례 즉, 불교에서 물을 뿌려 세례를 주는‘미소기 하라이’라는 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 미소기 하라이는 강과 바다 등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졌는데, 한국 교회 목사들은 일본 불교 중들에 의해 행해진 이 예식을 단체로 행하였다. 개신교 기관도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은 매 한 가지였다. 한국 비정부기구(NGO)의 뿌리이자 산파인 YMCA는 &lt;청년&gt;에 '황국시민의 선서'를 냈고 신흥우 윤치호 등 YMCA 지도자가 친일 행각을 벌였습니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 일제시대 한국개신교 지도자들이 한강에서 일본 신도승려들이 집례하는 미소기하라이(신도침례)를 받았다(이상원, 태양신과 신사참배).</td>
</tr>
</tbody>
</table>
 
<table>
<tbody>
<tr>
<td></td>
</tr>
<tr>
<td>▲ 1919년 카시마 신궁에서 신년 미소기하라이(신도침례) 행사 모습.

침례 받는 사람들이 물 속에서 신주를 손에 잡고 기도하고 있다.</td>
</tr>
</tbody>
</table>
 

일본 신사가 조선에 세워진 것은 17세기 초엽부터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이 무역 재개를 위한 을유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인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이들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로 부산진에 신사를 건립하였다. 이 신사는 1894년 거류지 신사라고 개칭되었다가, 1900년에는 용두산 신사라 불리었다. 일본인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신사를 세워 자신들의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삼았다. 1876년 강화도조약체결 이후 신사건립 본격화하기 시작하여 1898년 남산공원에 경성신사(1913)의 전신인 태신궁(太神宮)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42개 신사를 세워 국가 신도를 배양하였다. 1911년 2월 한일합방을 기념하여 목포거류민단의 주도로 건립하였다. 1917년 평양에 신사건립 하였고 조선총독부는 조선 신궁 준공식인 진좌제(鎭坐祭)에 앞서 어령대(鎭坐祭)를 부산에서 서울로 운송하는 봉영식에 경부선의 각 역과 서울에 학생동원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때 천주교학교인 대구혜성여학교는 출영하지 않는 등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이는 대구교구는 물론 원산교구에서도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절하였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일제의 감독하에 남산의 조선 신궁에 참배하는 어린이 행렬</td>
</tr>
</tbody>
</table>
서울 남산에는  <a href="https://namu.wiki/w/%EA%B5%AD%EC%82%AC%EB%8B%B9">국사당</a> (國師堂)이 있어 무당들이 기도처로 여겼는데, 일제는 국사당이 조선신궁을 짓기로 한 자리보다 높이 있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았다. 결국 국사당은  <a href="https://namu.wiki/w/%EC%9D%B8%EC%99%95%EC%82%B0">인왕산</a> 으로 이전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현재 남산 국사당이 있던 자리에는 팔각정이 들어섰다. 1919년에  <a href="https://namu.wiki/w/3.1%20%EC%9A%B4%EB%8F%99">3.1 운동</a> 이 일어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을 좀더 강하게 동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는 조선 신사 건설을 서둘렀다. 결국 일본 정부는 그해 7월 18일자 내각고시 제12호로 남산 아래에 조선신사(朝鮮神社)란 이름으로 신사를 지을 것이고 사격은 관폐대사이며 제신은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이라고 확정하였다. 이는 총독부가 일본 본토에서 신사들을 관할하는 신사국(神社局)과 별개로, 조선총독부가 조선의 종교시설들을 직접 장악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 분명하였다.

 

조선총독부가 결정한 신격은 신토가들의 주장과 상당히 다르다. 신토가들이 신격 후보로 내세운 의견들은 모두 내선일체를 나름대로 의식했지만, 조선총독부가 결정한 신격들은 그런 의사가 전혀 없다. 아마테라스와 메이지 천황을 모심으로써, 조선이 이제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왔으니 복종하라는 표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1920년부터 공사비 156만 엔을 들여 <a href="https://namu.wiki/w/%EB%82%A8%EC%82%B0(%EC%84%9C%EC%9A%B8)">남산</a>에 총면적 12만 7900여<a href="https://namu.wiki/w/%ED%8F%89">평</a> (약 42헥타르), 경내 면적 7천 평(약 2.3헥타르)을 닦아 건물을 지었다. 1925년 조선총독부는 동화(同化)정책의 하나로 서울 남산에 신도의 총본산인 조선 신궁’을 5년에 걸쳐 건립하였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 

▲1925년 신도의 총본산 조선 신궁 건립 (5년 공사)</td>
</tr>
</tbody>
</table>
<table>
<tbody>
<tr>
<td></td>
</tr>
<tr>
<td>▲ 일본항공회수송주식회사가 촬영한 조선신궁 항공사진

1925년 서울 남산 중턱에 세워진 조선신궁은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 상징으로 384개의 돌계단이 있었고, 이곳은 현재 남산도서관 부근으로 서울역 쪽으로

돌계단이 설치돼 있었다. 서울역사 박물관 제공</td>
</tr>
</tbody>
</table>
 

<b>5) </b><b>천주교인의 신사참배 거부 운동</b><b>( </b><b>神社參拜反對運動 </b><b>)</b>

일제강점기 부산, 대구, 등에서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고 일어난 기독교계의 반일 저항운동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인 41년에는 9개 교구와 169명의 외국인 신부, 139명의 한국인 신부, 18만 명의 신자로 증가 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8일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일어 사용과 일본식 이름의 창씨 개명 등을 강요하는 한편, 각 교구의 외국인 성직자를 가두었다가 미국인 성직자는 본국으로 추방하고 기타 성직자들은 행동을 감시하였다. 42년 서울 교구의 라리보 신부가 그 직책을 노기남(盧基南) 신부에게 넘기고 은퇴하자, 노신부는 교황청 지시에 따라 평양과 춘천 교구장도 겸임하였다. 같은 해 12월 노신부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주교 임명장을 받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주교가 되었고, 43년에는 홍용호(洪龍浩) 신부가 평양 교구장이 되어 이듬해 성성식(成聖式)을 가졌다.

한편 일제는 대구와 광주교구에 일본인 신부를 임명하고 각 성당들을 병사(兵舍)로 사용하는가 하면,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한국인 신부들을 구속하는 등 온갖 횡포를 자행하다가 8 ·15광복으로 끝을 맺었다.

 

<b>① </b><b>1920~1930</b><b>년대 한</b><b>·</b><b>일 교회</b>

1932년 5월, 일본 예수회가 운영하는 도쿄 조치대 학생들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한다. 이에 조치대에 파견됐던 교관은 격분해 이 사건을 일본 육군성에 보고하고 대학에서 전격 철수한다. 이 사건으로 장교 임용이나 군 복무 기간 단축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조치대 입학 지원자가 격감하고 조치대는 존폐 기로에 선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내에선 사회적으로 반 가톨릭 분위기가 조성됐다. 대학 측은 다시 교관을 영입하려 했지만, 1933년 12월이 되기까지 불발되었다. 신사참배 허용을 비롯해 일본 국가주의에 충성하겠다는 구체적 조치를 취하지 않고서는 교관 재임명을 허용하지 않았다.

​ 1934년 12월 일본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현 오시마에서 일본 국가주의와 신사참배 요구가 강화되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오시마에서 선교 중이던 캐나다 출신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신사참배를 거부, 반 국가주의적 행위를 하였다는 오명을 썼다. 오시마 주민들은 성당을 약탈했고, 온갖 위협과 폭력에 시달린 끝에 오시마 선교사들은 결국 철수하였다. 또한, 오시마의 거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배교를 선언하자 나가사키 주교는 가톨릭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허용했고, 일본 주교단 또한 이 지침을 뒤따랐다.

​

<b>신사참배거부운동</b><b>(</b><b>神社參拜拒否運動</b><b>) -</b>1924년 10월 강경 공립보통학교(현 강경 중앙초등학교)에 다니던 나바위 본당 신자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교장 지시에 불응해 퇴학당하였다. 1925년 10월 서울 조선 신궁(현 서울 남산공원과 안중근의사 기념관 일대) 진좌제(鎭座祭, 신령이 내려와 위패에 깃들게 하는 제사 의식)를 전후해 대구 효성여학교(현 효성초등학교)를 비롯한 가톨릭 학교들이 진좌제 관련 행사에 불참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 사건과 관련,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 는 문부대신을 만나 “가톨릭교회는 신사참배를 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1920년대 한국교회는 일관되게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봤고, 참배를 막았다. 1931년 전국 대목구장 공동명의로 발표한 「한국천주교 공용 지도서」도 신사참배를 미신으로 규정하고, 신자들의 참석을 금지하였다. ​193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일본제국주의가 전시 동원 체제를 강화해 가는 가운데 취해진 종교정책과 일정한 긴장 관계 속에서 발전하였다. 이 당시에 교회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행동하였다. 먼저 신사참배 등 종교적 사안에 대해서는 쉽게 타협하지 않았으나,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대응하였다.

 

<b>​② </b><b>한</b><b>·</b><b>일 교회는 왜 신사참배를 금했나</b>

신사는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신을 모셔놓고, 그 신을 재장(齋場) 교장(敎場)의 성스러운 터전으로 믿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제사 대상이 된 ‘카미’(神)는 자연신을 총칭한 것으로, 포괄적으로는 신화적, 역사적 인물이나 위인, 조상의 영들도 카미로 숭배했고, 이를 ‘야오요로즈노카미’(八百万の神)라고 불렀다.

메이지유신 초기, 일본 정부는 ‘신도 국교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종교계 반발에 부딪히자 ‘신사 신도’(神社神道)의 비 종교화를 추진한다. 메이지 정부는 1882년 ‘국가 신도화 법령’을 반포, “신사 신도는 국가 제사이지 종교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신도를 종교에서 분리하였다. 이후 내무성 산하에는 종교국을, 문부성 산하에는 신사국을 두어 행정적으로 신사 신도를 일반 종교의 범주에서 구분시켰다. 동시에 국가 신도는 더는 종교에 해당하지 않기에 정치와 종교 분리 원칙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근거를 마련하였다. 1910년대로 접어들며 신사참배가 가톨릭교회와 얽히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처음에는 국가 공무원의 의례 행위로만 봤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일본 정부가 1911년 모든 학교 학생들에게 교사 인솔하에 신사참배를 할 것을 의무화했기 때문이었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전 신사는 일본인 거류민에 의해 개항장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조선을 강점(强占)한 후 일제는 신앙을 보급함으로써 종교적·정신적 식민지화를 꾀하였다. 1915년 8월 16일 공포된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부령 제82호)은 신사에 관. 공립적 성격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공포된 포교규칙(布敎規則부령 제83호)은 기독교·불교·교파신도만을 종교로 인정함으로써 신도를 종교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어 1917년 3월 22일 공포된 '신사에 관한 규칙'(부령 제21호)은 신사의 전국적 설립을 확대. 추진하였다.

일제가 아무리 부인하더라도 종교적 성향이 뚜렷한 신도가 조선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은 일제의 신사 정책이 목적하는 바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였고, 어떠한 구체적인 대응도 못 하였다. 신사사원 규칙이 기독교와 배치되는 요소를 안고 있는 법령으로 공포 되었지만 교회는 직접적인 기독교 규제법령으로 공포된 포교규칙과 ‘개정사립학교규칙’(改正私立學校規則부령 제24호, 1915년 3월 24일)에 관심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천주교회는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선교 인력과 자금 면에서 어려움에 부닥쳐 있었으므로 분명한 기독교 규제법령인 두 법령에도 적극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일제가 공포한 신사에 관한 법령에 교회의 적극적인 관심과 대응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천주교회에서 일제의 신사 정책을 간과한 것은 아니었다. 신도를 믿지 않으면 비애국자로 낙인찍히고, 천주교 신자들도 신도 신앙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을 교회 지도자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 정책이 포교 규칙이나 개정사립학교 규칙 이상으로 교회에 어려움을 가져오리라고는 인식하지 못하였다. 나가사키(長崎]교구의 천주교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던 1917년, 천주교 신자들도 신사 건립 할당금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떠한 대처도 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신사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교황청에서 파견한 교황사절 페트렐리(Petrelli)는 신도(神道)와 유교도 구별하지 못하였고, 신사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1919년 조선인들의 3·1운동을 경험한 후 일제는 조선통치에 정신적 지배가 긴요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신도를 조선민족동화정책, 황민화정책 (同化政策, 皇民化政策)의 도구로 삼고자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19년 7월 18일, 일제는 천조대신. 명치천황( 天照大神·明治天皇)을 제신(祭神)으로 하는 조선신사의 창립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천주교회에서는 여전히 어떠한 구체적인 대안도 발표하지 않았다.

신사문제에 조선 천주교회가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은 「서울교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에서였다. 1922년 9월 1일 발표되었고, 이듬해 홍콩 나자렛 인쇄소에서 간행된 「서울교구 지도서」에서 천황의 사진에 절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신사참배는 불가능하다고 규정하였다. 이에 240명의 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는 불가능하다고 공포한 것이다. 이때부터 신자들에게도 신사참배 불가(不可)의 지시가 내렸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성직자들을 통하여 신사참배 불가 방침이 전해졌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924년 10월 강경 공립보통학교( 江景 公立普通學校)에서 발생한 신사참배 거부사건은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과 일제의 신사정책이 정면으로 부딪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연례 행사로 강경 신사 예제일(例祭日)에 교사의 인솔하에 학생들을 신사에 참배시켰으나, 천주교 성직자들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신사참배를 이단으로 인식하고 신사참배를 불참 하였다. 천주교 학생들의 징계 소식을 전해들은 나바위 본당의 카다스(Cadas) 신부는 학교장에게 신사참배는 일본 헌법에서 인정한 종교 자유의 원칙에 위배 됨을 항의하였다. 천주교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안 할 수 있도록 해주거나, 등교하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교장은 “신사참배는 국민적인 예식의 문제이고, 보통학교의 교육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라며 거절하였다.

 

<b>③ </b><b>교황청의 입장</b>

교황청과 일본 간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교섭이 이뤄졌다. 1916년 필리핀 교황사절 주세페 페트렐리 주교는 1912년 즉위한 다이쇼 일왕의 즉위를 축하하고 일본과 바티칸 간 수교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에 파견됐다. 그의 파견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일본 신사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황청 개입 필요성이 언급됐다. 이어 이듬해 2차로 신사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간 페트렐리 주교는 방일 중 나가사키, 도쿄, 하코다테 등지 교구장 주교들과 만나고 일본 외무대신 모토노이치로(本野一)와도 접견하지만,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신사참배 관면은 별다른 진전 없이 논의로만 끝나고 만다.

조선 천주교회는 전래된 초기부터 조상 제사 문제를 놓고 조선 정부와 계속 갈등 관계를 이루었다. 개항기와 일제 초기까지도 천주교회 측은 아시아 지역의 고유한 토착 문화 특히 조상 제사를 비롯한 여러 의례에 대해 우상 숭배라는 이름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조선 천주교회는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미신 또는 이단으로 인식하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 1923년에 발행된 서울교구지도서는 제향에서 신사참배를 하거나 신사에서 행해지는 예식들에 참석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지향이든 간에 금지된다고 못 박고 있었다. 1925년에 간행된 천주교 신사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본 교회의 노력은 계속됐다. 1919년 일본 해군 제독이자 가톨릭 신자였던 야마모토신치로(山本進次郞)는 파리강화회의에서 바티칸과 일본 수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신사참배 문제를 해결하려면 바티칸과 일본 당국자 간 대화가 필요하다고 밝히며 20여 가지의 청원을 담은 편지를 교황청에 보낸다.

​이에 초대 주일 교황사절은 이탈리아 출신 푸마소니 비온디 주교(1919~1921년 재임), 제2대는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마리오 자르디니 주교(1922∼1931년 재임) 등 교황사절이 파견된다. 1932년 9월 22일에 동경대교구장 샹봉(Chambon) 대주교는 일본 문부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어 신사참배가 애국적인 것으로 종교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하게 선언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자 문부성 당국은 8일만인 9월 30일에 ‘차관’의 이름으로 “학생 생도 아동을 신사에 참배시키는 것은 교육상의 이유에 근거를 둔 것으로서 이 경우에 학생 생도 아동의 단체가 요구받는 경례는 애국심과 충성심을 나타내는 것”이 라는 회신을 보내 왔다.이 회답은 이후 일본과 조선의 천주교회가 신사참배를 국민적인 예식의 문제로 간주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다. 당시 무니 주일 교황사절은 이 회답을 근거로 종교적 예식이 아닌 한에서 천주교 신자들도 神社에서 이루어지는 행사에 참여하여 머리를 숙이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지침을 발표하였다.

1932년 9월 30일의 문부성 차관회답을 근거로 ‘신사참배를 국민 의식으로 용인할 수 있다’라고 경성 교구의 뮈텔 주교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것은 1932년에 나온 『천주교 요리』 제2 판을 통해 확인된다. 이는 1925년의 『천주교 요리』 제1판에서는 신사참배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금지했지만, 1932년의 『천주교 요리』 제2판에서는 신사참배가 국가의 한 예식이기 때문에 국민의 자격으로서는 행할 수 있다는 입장이 바꾸면서 용인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바티칸 교황청은 독일과 동맹관계를 맺으려는 일본의 비위를 거슬러 교회가 위협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는 비록 그 시작은 종교적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일반의 인정과 관계 당국의 성명에 의하여 국가의 한 가지 예식으로 되어 있으니 저것과 혼동할 것이 아니며 천황폐하의 어진 앞에 예함도 이단이 아닌즉 국민 된 자 가히 행할 것이요.

 

1933년 3월에 경성에서 열린 조선 주교 회의 연례 회의에서도 무니 주일 교황사절의 지침을 근거로“ 신도 이즘에 대하여, 개별적인 경우의 해결을 위하여 동경에서 용인되는 실천 사항들은 조선의 지역에서도 용인하도록 하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교회적인 차원에서 차츰 신사참배를 허용하려는 태도를 비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35년 이후가 되면 로마 교황청에서는 신사참배가 일본의 고유한 국가 의례로서 비종교적인 예식이라는 입장으로 선회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천주교 신자들이 이 신사참배 예식에 참석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교황청의 결정 과정에는 당시 주일 교황사절이었던 마렐라 추기경의 보고서가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마렐라 추기경은 1935년 5월 8일에 신도 예식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교황청 포교성성(布敎聖省)으로 보내어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교황청의 공식 결정을 새로이 내려 줄 것을 청하였다. 그의 보고서에 담긴 내용을 그대로 수용해 1936년 5월 18일 포교성성에서는 일본의 신도 의식에대한 천주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을 담은 교령인 플루루에스 인스탄테르퀘(Pluries Instanterque)를 발표하여 신사참배를 인정하였다. 일본주재 교황사절 마렐라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에 &lt;국체명징에 관한 감상&gt;이라는 통첩을 내리고 신사참배를 권고하였다. 이 교령에서 포교성성이 신사참배 문제에 관해서 내린 지침은 다음과 같다.

 

‘일본 제국의 영토 안에 있는 교구 직권자들은 예식의 경우 신자들에게 다음의 사항을 가르쳐야 한다. 즉 문화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여론은 물론 앞서 반복해서 그리고 명백히 선언문들을 통하여 밝힌 바대로 공권 기관인 정부에 의해 공적으로 운영되는 신사에서 늘 거행되는 의식들에는 조국애의 의미 즉 황실 가족과 국가의 은인들에 대한 공적 존경의 의미만이 담긴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교구 직권자들은 이런 의식들이 순수하게 시민적인 예식의 가치만을 지닌 것이기에 가톨릭 신자들이 그것에 참여하고 다른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정당한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이로써 조선과 일본에서 천주교회가 오랜동안 정부와 긴장 관계를 가지게 만든 신사참배 넓게 말해 신도 의식(神道 儀式)에 참여하는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조선과 일본의 모든 천주교 신자는 천주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교황청 포교성성의 공식 교령이 나오기 개월 전에 이미 『경향잡지』에는 신사참배를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가의식이라고 명시하고 참배행위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게재되었다.

 

조선과 일본 천주교회는 교황청의 공식적인 교령이 발표되기 전에도 마렐라 추기경과의 교감 속에서 신사 참배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황청이 발표한 교령은 일본 천주교회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조선 천주교회가 이것을 받아들인 것은 교령을 확대 해석한 결과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에 대해서는 로마 교황청이 1911년 대구교구를 설정하면서부터 이미 조선을 일본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사참배 문제에 관한 교령이 조선 천주교회에 적용되었다.

 

<b>​④ </b><b>제사 허용 문제</b>

로마 교황청이 중국과 동아시아 지역에서 널리 퍼져 있던 의례 문화인 조상 제사와 공자 숭배 의식을 전면적으로 거부함으로써 중국과 조선 및 일본 등 유교 문화권에서는 천주교 선교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유럽인 천주교 선교사들은 이들 나라에서 혹독한 탄압을 받으면서 해당 지역 사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18세기와 19세기 조선에서도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천주교 신자들은 무부무군의 이단사설(無父無君의 異端邪說)을 추종하는 무리로 몰려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수 세기에 걸쳐 로마 교황청과 동아시아 지역의 천주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조상 제사의 우상 숭배 논쟁과 이에 대한 교황의 금지령은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포교성성의 교령이 나온지 3년만인 1939년에 와서 비로소 재검토되기 시작하였다. 즉 로마 교황청은 1939년 12월 8일에 흔히 ‘중국 예식에 관한 교서’라고 불리는 교서를 발표했는데 이 교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중국 예식과 그에 대한 서약에 관하야.

극동 여러 지방에 어떤 예식 등은 비록 예전에 외교 예식(外敎 禮式)에 관련되어 있었으나 시대의 지남을 따라 사람들의 풍속이 변하여지고 정신도 변하여진 현대에 와서는 한갓 조상들에게 효성을 국가에게 사랑을 동포에게 예모를 표시함에 불과한 민간적 예식이 되었음은 명백하다. 이에 동 의원들은 여러 가지 증명을 깊이 헤아려보고 지혜 있는 자와 경험 있는 자의 의견을 자세히 살핀 후 아래의 사항을 성명하기로 합의하였다

 

ⅰ)중국 정부에서는 모든 국민에게 종교는 임의로 선택하여 신봉할 수 있으며 종교적 사항에 대한 법률이나 제령을 발할 의사는 정부에게 없다는 것, 따라서 공자를 존경하는 의미로 관청에서 행하거나 명하는 예식 등은 종교적 공경을 드리기 위함이 결코 아니오, 다만 유명한 인물에 대한 존경과 조선(祖先)들의 끼친 바에 대한 경의를 품고 또 표시하기 위한 목적뿐임을 여러 번 또는 명백히 성명하였으므로 가톨릭 신자들은 공자의 기념당이나 학교에서 공자의 모상이나 위패 앞에 거행되는 존경 행사에 참례함이 가하다.

 

ⅱ) 공자의 모상이나 그의 이름이 기록된 위패까지라도 가톨릭 학교 안에 더구나 관청에서 명하면 이를 모시거나 머리를 숙여 경례함을 불가하다고 여기지 말 것이라, 만일 오해를 받을 염려가 있으면 가톨릭 신자들의 바른 지향을 열어 밝힐 것이다

 

ⅲ) 가톨릭 신자인 관리나 학생들이 만일 공식으로 거행되는 예식에 참례하게 되면 교회법전 조를 따라 수동적으로 지내고 또 순전한 민간적 예식으로 당연히 인정되는바 행동이나 조력을 할 만하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만일 필요하면 오해를 받지 않기 위 하야 자기 바른 지향을 성명할 것이다

 

ⅳ) 시체나 죽은 이의 모상 앞에 또는 죽은 이의 단순한 이름이 기록된 위패 앞에 머리를 숙임과 또는 기타 민간적 예모를 표시함은 가한 줄로 여길 것이다.

 

이 교서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극동 지방의 일부 예식이 예전에는 종교적인 것이었지만 현대에 와서 효성과 사랑과 예모를 표시하는 민간적인 예식으로 변하였다고 규정한 점 공자에게 바치는 숭경 의식을 전면적으로 허용한 점, 그리고 죽은이의 모상이나 위패 앞에서 절을 할 수 있다고 허용한 점 등이다.

교황청이 이런 교서를 내린 중요한 이유는 동양 문화에 대한 교황청의 시각 변화와 선교 정책의 변화를 지적할 수 있다. 1919년에 교황 베네딕도 15세가 회칙‘ 막시뭄 일루드’(Maximum illud) 를 반포해 선교지에서의 현지인 사제 양성과 교계 제도의 토착화를 역설하였다. 이후 교황청과 세계의 지역 천주교회에서는 토착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1920년대에 와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서 중국인과 일본인 사제들이 주교로 임명되어 현지인 성직자가 교구를 위임받는 사례가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다. 1939년에 발표된 ‘중국 예식에 관한 교서’도 역시 교황청이 종래의 공격적인 정복 위주의 선교 정책을 벗어나 선교 지역의 문화와 관습을 깊이 이해하는 적응주의적 선교 정책으로 그 기조를 변경하기 시작했음을 반영한다고 하겠다. 죽은 이의 이름만 쓰는 위패는 허용된다는 규정은 1704년 칙서에 이미 담겨있었다.

1939년 조상 제사에 관한 교황청의 교서는 조선 천주교회의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조상 제사의 허용은 공자 공경 의례의 전면 허용일 뿐이며, 유교 문화권에서 이해하는 조상 제사와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므로 현지 신자들과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하였다. 왜냐하면 교서의 내용 가운데 조상 제사에 관한 사항은 1704년과 1742년에 발표한 교황의 칙서에서 허용되었고, 묘지 앞에서 향을 피우고 음식을 진설하는 행위는 1742년 칙서에서 허용된 사항이다. 1939년 중국 예식에 관한 교서의 내용이 공자 공경 의례에 대한 전면적인 허용에 국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교서가 조상 제사 문제에 관해서 부분적인 허용만을 담고 있다는 점을 감안 하더라도 이 시기를 전후해 교황청과 조선 천주교회에서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의례 문화에 대한 재인식이 일어났다는 점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조선과 일본 천주교회의 신사참배 용인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마렐라 추기경은 신사참배 문제를 거론하면서 동양의 전통적인 의례 생활 일반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발언을 하였다.

그는 “일반 사교상 예컨대 장식(葬式), 결혼식(結婚式) 기타 사사로운 의식이 거행될 때에 설령 그것이 본 시는 다른 종교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오늘에 있어서는 유식자 간에 종교적 의의가 없어졌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가톨릭 신자도 다른 사람과 같이 거기에 참여하여도 무방하다”는 통첩을 내려 아시아 지역에서 토착 문화에 입각한 의례들을 용인할 의사를 보였다. 물론 이 소책자는 일본 천주교회에 보내는 글이었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한 연구의 지적대로 당시 교황청은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 곧 일본의 제국 정부가 지배하는 영토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천주교회에도 어느 정도 구속력을 가지는 통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마렐라 추기경의 글이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대표적인 교계 잡지였던 『경향잡지』에 실렸던 것이다.

조선 천주교회가 조선의 전통문화에 대해서 종전과는 다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사들이 『경향잡지 』에 자주 등장한다. 이 기사들 속에서 조선 천주교회는 이전과는 달리 동아시아 지역의 전통문화와 그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의례 생활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천주교회에서는 천주교 신자로서 각종 비천주교적인 예식에 참석할 경우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는 사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결혼식을 예로 들어 보자, 1937년 8월 15일자 『경향잡지』의 『질문 해답란』에서는 천주교 신자가 전통적인 혼례 방식대로 결혼식을 거행할 때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가 세속예식으로 결혼식을 할 때 전안(奠雁)과 초례(醮禮)를 행해도 되느냐는 문제에 대해 전안례는 안 되지만 초례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안례의 경우 첫째, 그 설명이 통일되지 못하고 서로 분분한 해설 가운데 하나도 안심하고 신용할 만한 해설이 없고, 둘째, 천주교인은 먼저 천주 대전에서 혼례를 행해야 하기 때문이며, 셋째, 예전의 까다로운 풍속과 전례를 폐지해 나가는 때이므로 그것을 행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신상에 어려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초례는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아니고, 결혼의 예절이므로 무방하다고 보았다. 이런 판단의 받침이 되는 것은 “무슨 행동이 당초에 무슨 이단이나 미신의 뜻으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 후로 그 뜻을 완전히 저버리면 그것은 상관치 아니하고, 다만 풍속과 관습이 된 경우에는 교우도 할 만”하다는 것이다. 조선 천주교회는 신사참배 용인과 더불어 조상 제사를 허용하게 되었고, 혼례 상례 등 전통 의례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1920년대까지는 신사참배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처벌하기 시작하면서 가톨릭 학교에서 문제가 커졌다. 이에 주일 교황사절 파올로 마렐라 대주교는 초대 중국 교황사절인 첼소 콘스탄티니 주교에게 요청, 베네딕토 14세 교황이 1742년 7월 반포한 「조상 제사 금지에 대한 회칙」(Ex quo singulari)과 관련해 조상 제사의 문화적 측면을 다시 한번 논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중국의 공자 의례 문제와 한·일 신사참배 문제는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어 신사참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자 의례 문제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 신사참배를 위해 메이지 진구(明治神宮) 앞에 모여든 일본 군인들과 일본ㆍ만주간 친선 서약을 하는 사진을 게재한 일본 신문 이미지[한국교회사연구소제공❳.</td>
</tr>
</tbody>
</table>
 

한·중·일 가톨릭교회에서 신사참배가 허용되는데 실마리가 되는 회의는 1935년 3월 12일 만주국 수도 신징(현 창춘)에서 만주국 주재 교황청 대표 오귀스테가스페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만주국 주교단의 공자 의례에 관한 회의였다. 신사참배를 허용하는 데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제사 중 위패(位牌)에 절하는 문제였는데, 만주국 주교들은 위패에 절하는 문제를 문화적 행위로 보고 허용하는게 바람직하다는 결정을 내리고 교황청에 보고하였다. 비오 11세 교황은 이에 따라 1935년 5월 28일 만주국 주교단의 결정을 인준하고, 공자 의례 예식에 일부 금지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아 신자들의 참여를 허용하였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 신사에 참배하기 위해 도쿄 도심 메이지 진구(明治神宮)에 모여든 일본인들.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td>
</tr>
</tbody>
</table>
1935년 11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평양에 있는 어떤 열교 (개신교) 학교장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을 계기로, 신사에 참배하든가 아니면 폐교해야 한다는 강경책을 내어놓았다. 이어 1936년 5월 26일 교황청 포교성성 (현 인류복음화성) 훈령을 통해 제사와 함께 신사참배를 전격 허용한다.

천주교회가 선교지역의 전통문화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한 것은 1962년에 열린 제2차 바타칸 공의회를 계기로 이루어졌다. 한국에서 천주교회가 전통문화를 존중하는 방향에서 토착화된 상례, 제례의 시안을 작성한 것도 1994년에 시작하였다. 한국천주교회사의 흐름에서 선교지역의 문화적 관행을 극단적으로 배척하는 입장이 완화되고, 지역 사회에 뿌리박은 토착 문화를 재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 말기의 전시 동원 체제 아래이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 천주교회가 국가 이데올로기와 유착되면서 가능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 천주교회의 중요한 문화적 에토스로 자리 잡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조선 천주교회의 전통문화에 대한 재인식은 아무런 비판적 성찰이나 재조명도 없이 주변적인 역사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b>⑤ </b><b>한</b><b>·</b><b>일 주교단의 신사 참배 허용</b>

만주국 주교단의 결정은 한·일 주교단의 신사참배 허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독일 출신으로 일본 히로시마 대목구장으로 있던 요한네스 로스 주교도 1932년 ‘신사참배에 관한 교회법적 허용 가능성’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일본 교회가 신사참배를 허용하는데 교회법적 영향을 줬다. 그는 1983년 개정 이전 구 교회법 1258항 ‘가톨릭 신자의 비 가톨릭적 종교예식 참여에 관한 규정’에서 그는 1983년 개정 이전 구 교회법 1258항 ‘가톨릭 신자의 비 가톨릭적 종교예식 참여에 관한 규정’에 신사참배 참여 허용 원리를 찾아냈고, 주일 교황사절 에드워드 무니 주교는 이 논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신사참배의 길을 열었다. 무니 주교는 이 논문을 한·일 주교단에 모두 보내고, 논문을 본 소감을 달아 회신하라고 요구한다. 이어 도쿄 대교구장은 논문의 결론을 도출하고, 주일 교황사절은 신사참배가 허용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어 제시한다. 이 논문을 접한 서울대목구장 라리보 주교는 1933년 10월 신사참배 반대 입장을 바꿔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와 같이 신사참배에 긍정적 입장을 표명 할 정도로 신사참배 허용에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b>⑥ </b><b>한국천주교회 내 갈등</b>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를 놓고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에 앞서 서울대목구장 뮈텔 주교는 1926년에 펴낸 교리서 「천주교요리」(天主敎要理)를 통해 신사참배를 금지하였다. 또 1931년 조선대목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전국 공의회를 개최하고 발표한 사목 지침서에서도 신사참배는 금지됐다. 하지만 1932년에 내놓은 「천주교요리」 개정판에서는 입장이 확 달라져 신사참배를 허용하였다.

1932년만 해도 서울, 대구, 원산 대목구와 평양, 연길, 지목구 주교단 중 대구의 드망즈 주교를 빼고는 모두 신사참배를 반대했지만, 나중에는 다른 주교들도 입장을 바꾼다. 신사참배를 지속적으로 반대하던 평양지목구장 모리스 몬시뇰이 1935년 갑작스레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해 한국의 모든 지역 교회는 신사참배 찬성 입장으로 돌아선다. 끝까지 반대하던 메리놀회 선교사 월터 콜만 신부와 레오 스위니 신부는 미국으로 소환됐다. 콜만 신부는 탄원서를 교황청 성무성성(현 신앙교리성)에 보냈지만, 초대 주일 교황사절을 지낸 포교성성장관 푸마소니 비온디 추기경이 이를 묵살 하였다.

1933년에 결정된 신사참배 반대 번복을 교회가 곧바로 공개한 것은 아니었다. 주교회의 안에서만 공유하다가 번복 사실을 공개한 것은 3년 뒤 「경향잡지」 1936년 4월 호를 통해서였다. 이어 한 달 뒤 포교성성훈령이 발표되자 한국 주교회의는 신사참배와 관련된 사목 지침서 조항을 개정, “신사참배는 애국 행위의 표명”이라고 규정하였다. 한편 일본 정부도 1936년 ‘신사참배의 종교성 여부 조사위원회’를 꾸려 신사참배의 종교성 여부에 대한 논쟁을 벌였지만, 이 위원회 역시 종교와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936년 6월 12일 주교회의에서 1932년에 발간된 [한국천주교 공용지도서(Dirxctorium Commune missionum Coreae)〕의 신사참배 금지를 규정하는 466항을 애국주의표현으로 수정하며 신사참배를 허용한다.

 

<b>6) </b><b>신사참배의 허용</b>

교황 비오 11세, 신사참배 (神社參拜) 허용(1936.05.26.) 질문해답

 

신사참배(神社參拜)에 대하여

문) 교우(敎友)가 신사(神社)에 참배(參拜)해도 관계 없습니까?

답) 이왕(已往)에는 신사(神社)에 참배하는 것이 종교적 의식(儀式)인 줄로 알고 대문답(大問答)에 기재한 바와 같이 금하였더니, 그 후로 정부의 발표와 설명에 의하면 신사참배는 ‘종교와는 전연 구별이 있어 다만 황실의 어조선(御祖先 : 황실의 조상 )을 경앙(敬仰)하며 국민정신을 작흥(作興)케 하는 한 국가의 의식’ 이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와 신앙은 법률상 자유인만큼 신사참배가 종교의 의식과 구별이 없다면 명하지도 않을 것’ 이라 합니다. 교황대사(敎皇大使)와 열위(列位) 주교는 일반 교우들에게 이 설명을 알려주어 모든 이가 안심하고 참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문의하실 것이 있으면 본당 신부께 질문하시어 더 세세한 설명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밖에 신자들이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가정과 사회, 학교에서 실제로 겪어야 했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신사참배에 대하여 재고할 필요성이 검토되었다. 오랫동안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일본정부와 교회의 관계가 악화되어 가는 것을 두려워하던 천주교 교권층은 교황청의 권고에 따라서 1936년 6월 12일 ‘全鮮 5교구 연례주교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을 하게 된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경향잡지 제 827호(1936.4.12.)</td>
</tr>
</tbody>
</table>
 

<b>주교회의 결의사항 </b><b>抄</b><b>(</b><b>초</b><b>) </b><b>전선</b><b>(</b><b>全鮮</b><b>) 5</b><b>교구 수뇌 서명</b><b>(</b><b>首腦 署名</b><b>)</b>

<b>①</b><b>개정건</b>

“신사(神社)에서 거행되는 식전(式典)에는 유단 애국심의 표시를 위하여 참가함을 허(許)함”

 

<b>② </b><b>5</b><b>교구 공인 정기간행물에 관한 건</b>
<ul>
 	<li>경향잡지: 조선교회 기관지.</li>
 	<li>가톨릭연구: 평양교구 간행.</li>
 	<li>가톨릭소년: 연길교구 간행.</li>
</ul>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신사참배로 인하여 일본당국과 갈등을 일으키는 일을 극히 삼가하였다. 나아가 태평양 전쟁을 전후하여 한국 천주교회 교권 층은 1940년 6월 10일~13일 &lt;조선 성교회 8교구 연차 주교회의 사목교서&gt;에서 교황의 말씀까지 운운하면서 조선 천주교회 신자들이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도록 자제시켰다.

교황성하는 교서를 이 지방에 응용하여. ‘국민정신 통일’을 명분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있는 조선총독부와 정면으로 대립하지 않고 융통성 있게 대처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개신교회가 1938년 장로회 총회에서 강압적으로 신사참배를 수락한 이후에도 많은 성직자와 신도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순교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너무도 현실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모든 신학교는 폐쇄하되 일본 정부에 협조하는 신학교만 다시 복구하도록 하였다. 그 때에도 신학교 이사장은 일본인으로 하고, 교육과목 중에도 구약이나 바오로 서간, 예언서와 같은 과목은 없애는 대신 일본 종교인 신도학, 신도역사, 불교학, 교련 등과 같은 과목을 가르치도록 제한하였다. 기독교 신학교인지, 신도 신학교인지 구분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table>
<tbody>
<tr>
<td>(우상숭배를 규정하고 신사참배를 금지했지만 군국주의를 막지 못한 교회 )</td>
</tr>
<tr>
<td></td>
</tr>
</tbody>
</table>
[아직 끝나지 않은 문제, 신사참배]

1938년 9월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개최된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의 회의록. 당시 193명의 총대들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한다.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려행(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 동원에 참가하여 비상시국 하에 있어서 총국황국신성을 다하기로 기함”이라는 성명서를 채택하였다(국민일보 DB).
<table>
<tbody>
<tr>
<td></td>
</tr>
<tr>
<td>서울 남산의 신궁에서 신사 참배를 하는 여학생들. 한국교회사연구소제공</td>
</tr>
</tbody>
</table>
 

<b>③ </b><b>기독교인의 신도의식</b>

교회에서는 주일예배 전에 국민의례를 먼저 해야 하였다. 그 국민의례는 실제로 신도 의식이었다. 교회당 안 동편에 기미다나(神棚)를 모시고 일본의 가미(神)를 향해 예배를 드린다. 먼저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きみがよ)를 제창하고 대동아전쟁 필승 기원 묵도를 한 후,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암송한다. 마지막에는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우미유가바를 합창한다.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인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공식적 모임에서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해야 하였다

주일 오전 예배를 제외하고는 모든 예배가 폐지되었고, 찬송가 가운데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와 같은 전투적인 찬양이나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찬송가는 금지되었다. 4복음서 이외의 신구약 성경은 모두 출간이 금지되었고, 신앙고백 가운데서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사옵고’와 같은 조항들은 천조대신을 부정한다고 하여 삭제되었다. 또한 한국교회는 일제의 지도에 따라 성경과 찬송가마저 왜곡하였다. 일제는 1940년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을 통해 성경과 찬송가 내용을 국가 신도의 내용에 맞추어 수정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장로교와 감리교 지도부는 각기 ‘혁신 요강’ 혹은 ‘혁신조항’을 만들어 찬송가를 수정하였다.

이에 따라 천황의 권위를 하느님보다 더 높이기 위해 “왕, 임금, 다스리시네” 등 하느님의 통치권과 관련되는 단어는 ‘주님, 보살 피시네’ 등으로 용어를 바꾸었다. 그리고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과 같은 민족적 의식을 고취하는 찬송, ‘십자가 군병들아’와 같은 전투적인 내용의 찬송은 아예 삭제하였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출처]‘창조주 하느님’을 고백하는 문구 삭제 등 성경·찬송가 왜곡 |작성자 별소리

출처:1943년 4월 11일 대구신정장로교회 주보. 신사참배 결의에 따라 궁성요배, 대동아전쟁필승기원묵도, 황국신민서사계송, 우미유가바(일본 군가) 합창 순서가 포함돼있다. 최덕성 교수 제공[출처] - 국민일보서사계송</td>
</tr>
</tbody>
</table>
성경도 모세오경을 포함한 구약성경이나 요한묵시록과 바오로 서간 등은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와 해방의식, 종말의식을 표현하고 있다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설교 본문은 사복 음서로만 제한됐고, 설교자는 설교의 주제를 사전에 당국에 보고해야 했고 내용도 엄격히 통제됐다. 사도신경 가운데서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사옵고’와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와 같은 조항들은 삭제되었다. 하느님을 창조주와 심판 주로 고백하는 것은 천조대신을 최고 신이자 창조주로 묘사하는 신도의 신화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b>황국신민서</b><b>(</b><b>아동용</b><b>)</b>
<ol>
 	<li>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 입니다.</li>
 	<li>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폐하에게 충의를 다하겠습니다.</li>
 	<li>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li>
</ol>
 

<b>황국신민서사</b><b>(</b><b>성인용</b><b>)</b>
<ol>
 	<li>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니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답하리라.</li>
 	<li>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리라.</li>
 	<li>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리라.</li>
</ol>
 

국민의례를 한 후에야 교회에서 기독교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예배를 드리다가 12시 정오 사이렌 소리가 나면 일제히 일어나서 천황 궁성이 있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동방요배(東方遙拜, 황거요배)를 거행한다. 교회에서도 국민의례라는 이름으로 태양신과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는 신도의식이 항상 우선해야 하였다. 일제는 야만적인 폭력을 내세워 내선일체 정책을 추진하였다. 아주 소극적인 항일운동도 가혹하게 처벌하며 기초적인 기본권조차 부인하는 실정이었다. 자발적으로 일제의 앞잡이가 된 이들은 내선일체를 영광으로 받아들이고 일본인으로서 의무를 다하자고 할 수 밖에 없었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주말 예배 중에도 정오 사이렌이 울리면 일본 동쪽 천황이 있는 쪽을 향하여 동방요배를 하였다. 출처 : 주간기독신문(https://www.kidok.com)</td>
</tr>
</tbody>
</table>
 
<ol>
 	<li><b> </b><b>결과</b></li>
</ol>
일제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명분은 국가 신도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애국적 국민의례라는 것이었다. 신사참배는 1937년 9월 6일을 애국일로 정한 후 매월 6일에 행사를 하도록 해 애국심 고취를 위한 행사를 통해 한국인에게 일왕에 대한 숭배를 요구하였고 신사참배는 그런 행사의 주요한 의례로서 행하였다. 신사참배는 단순한 종교적 의례가 아니라 일왕에 대한 숭배를 통해 일제의 지배력을 공고하게 하려는 수단이다.

국내외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자행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국인 스스로 자기 조상의 역사를 부정하도록 세뇌되었다. 한국은 일본에 의지하여야 발전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의식을 갖게 했고, 일본의 역사가 위대한 것처럼 착각하였다. 이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한국인을 강제적으로 동원하는데 쉽도록 활용된 범죄행위이다.

신사참배가 강요되었을 때 반대론을 펼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는 하느님의 계명에 반하는 죄로 간주하고 순교적 각오로 반대 투쟁 태도를 펼쳤고, 타협론을 주장하던 지도자들은 일제의 탄압과 박해 때문에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순응하는 견해를 밝혔다. 수용론 입장을 내세웠던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이라 하여 신앙 양심에 가책이 없이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수용하는 태도였다. 이는 신사참배를 순교적 각오로 반대 투쟁한 입장과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태도로 나누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전국적으로 200여 교회가 파괴되었고, 2,000여 명이 투옥되었고 그 중 30여 명은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큰 고통을 당하였다. 주기철은 7년간 투옥되어 있던 중 1944년 4월 순교하였고, 부산의 한상동 목사는 해방 후 석방될 수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쇼와 일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신사참배는 사실상 종언을 알린다. 그해 12월 5일, 연합군 총사령부는 “국가 신도와 관련된 모든 교육과 지지, 홍보 등을 엄격히 금지하는 조처를 내린다”고 발표하였다.
신사참배가 공식 금지된 지 이제 78년이 지났다(2023년).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에서 ‘신사신도’가 ‘국가신도’가 되면서 비롯돼 군국주의 망령 속에서 횡행했던 신사 참배는 이제 공식적으로는 수면 아래 잠겨 있다. 1945년 해방 직후, 전국 각지에서 설치되었던 신사는 한국인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일본 신궁은 일본인들에 위해 철거 후 소각되었음을 보게 된다. 국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라는 포장을 한, 일제 천황을 숭배하며 그로 인하여 충성심을 유발하여 전쟁의 도구로 사용 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본의 국교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종교인들이 일제 강요에 굴복하는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명분을 찾기에 급급해 그에 대한 사실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국가 신도가 종교성이 없는 단순 국민의례에 그쳤던 것일까 하는 아쉬운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역사란 어느 한쪽만을 두둔 할 수 없는 것이다. 유기적인 흐름에 의하여 선택하는 것이 아닌, 정확한 상황이 인식되었을 때,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역사가 아닌가 싶다.

 
<ol>
 	<li><b> </b><b>의의와 평가</b></li>
</ol>
신사참배를 반대한 중요한 이유는 3가지였다. 첫째, 신사참배는 하느님의 계명에 반하는 우상숭배라는 점, 둘째, 개인의 신앙 양심과 신교의 자유를 억압·탄압하는 것이라는 점, 셋째, 교회의 순수성과 신앙의 거룩함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신앙 정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자 신앙의 자유와 순수성과 거룩함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민족 독립운동의 성격을 지닌다. 실제로 일제는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식민 정책에 반하는 민족주의 운동 혹은 민족 해방 운동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검거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투옥되거나 순교했던 이들이 독립 유공자로 인정되고 보훈이 추서되기도 하였다.

교황청이 신사참배 허용을 해야만 했던 시대적 상황과 외교적인 노력 등을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것이 아닌 문화적이며 애국적인 측면으로만 해석하고, 신사참배 사안은 일제 식민지배의 수단이며, 식민지배에 처한 민족의 애국주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신사참배 허용에 앞장선 한국 교회 내의 주교들이 교황청의 공식적인 허용 지침을 수용해야만 했던 점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 모든 것은 역사교육의 부재에서 비롯된 일이다. 일제는 종교 지도자들을 충동하여 전 교회적 차원에서 일제 신민화 정책에 협조하도록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교회가 앞장서 침탈 전쟁을 위한 기도운동과 모금운동을 벌였다. 무운장구 기도회, 국강연을 열렀고, 국방헌금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또 감리교에서는 ‘감리교 단호’라는 이름을 붙인 ‘애국기’ 3대 값을 헌납하였고, 장로교에서는 ‘조선 장로호’라는 해군함상 전투기 등의 무기구입비를 헌납하면서 미군과 대응해서 이기라는 신도의식도 거행하였다 한다. 여기에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교회 종이나 철제 문짝을 헌납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매국적, 배교적 행위의 출발이 바로 1938년 9월 9일의 27회 장로교 총회결의에서 시작되었다.

중일전쟁(1937∼1945년)을 전후하여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재차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에 응했고, 감리교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로교는 한때 반대했으나, 총독부의 요구와 일부 친일 목사들에 의해 제27회 총회에서 찬성 결의를 함으로써 결국 굴복하였다. 이렇게 엄청난 과거의 잘못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았고, 제대로 회개하지도 못하였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국가의 체계를 갖추기에 급급한 나머지 친일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아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불행한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정권에 협력하였던 독일 교회가 1945년 8월에 프랑크푸르트에서, 10월 18일에 슈투트가르트에 모여서 지난날 잘못을 참회하는 ‘슈투트가르트 죄책 고백’을 발표하고 하고, 책임 있는 사람들은 재건과정에서 물러난 것과 대비되고 있다

독일의 예가 아니라도, 국제적인 수준의 참회와 행동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본 종교계의 통렬한 사죄만 돌이켜 보아도 알 수 있다. 위안부 문제의 부정을 필두로 독도의 일본 영토주장, 강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시비 등 일본의 행보는 여전히 이웃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일본의 불교계를 비롯한 종교계가 나서야 한다. 일본 종교계가 진정으로 과거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한다면, 지금부터는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과거를 부정하는 정치계를 바로잡아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은 고통당한 약자들을 가슴으로 끌어안아야만 인권과 평화를 존중하는 ‘보통 국가’의 신분으로 진정한 국가임을 증명해야 될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일본의 태양신 앞에 허리 굽혔음은 엄연한 사실로서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비록 절대적 수는 아니었지만 이에 항거하여 진리를 사수한 교역자가 있고 순교자의 정화가 있어 한국교회를 향해 오늘도 빛나는 생명력을 던져주고 있음을 간과하지 못한다. 이 순교 정신의 발로야말로 금자탑적 존재로서 한국 민족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기약하면서 영원히 빛을 밝히리라 본다.

 

<b>참고문헌</b>
<ol>
 	<li>국내문헌</li>
</ol>
김수태, &lt;1930년대 평양교구의 신사참배 거부운동&gt;.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8, 2004

_____, &lt;1930년대 평양교구의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gt;. 〖한국사학사학보〗 11, 2005.

_____, &lt;1930년대 천주교 평양교구의 문서 선교&gt;, 〖한국민족운동사연구〗

김정송, 「일제하 민족문제와 가톨릭 교회의 위상」,「교회사연구」 1, (1996)

문규현, &lt;한국천주교회사&gt;, 빛두레, 1994,

박경식, ⌜일제의 황민화정책⌟, 1994. ⌜한국사⌟13, 한길사.

孫禎睦, 「朝鮮總督府의 神社普及·神社參拜 強要政策硏究,1987」,『韓國史 한국기독교와 신사참배문제』,

슈투트가르트 죄책선언 중1945.10.18. 윤선자,「일본 군국주의 종교정책과 조선 천주교회의 신사참배」,「한국사 연 』,98집(1997),P158

윤선자, 「조선천주교회와교황청의중국의례에허용훈령」.「사학연구」, 55.56합회, (1998)

_____, 『1930년대 일제의 종교통제 정책 강화와 천주교회의 황국신민과 과정』, 2001.

_____,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과 조선 천주교회의 대응」.국민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7.

정동훈, 「일제강점기하의 한국천주교회와의 신사참배에 관한고찰」.「교학사연구」11집(1996),

_____, 『일제강점기하의 한국 천주교회와 신사참배에 관한 고찰』 가톨릭대학교대학원 석사학의 논문, 1994.

최기복, 「한국 전통문화와 천주교회의 충돌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0)

______, 「조상 제사문제와 한국 천주교회사의 성찰과 전망」 서울 한국천주교, 2004,

한국개신교, 죄책 선언과 대전환이 필요하다|작성자 디아코니아 실천이론,

 

외국문헌

C~R-TalK0u, 1917

J.Cadars,ibid, 1925,'Petits confesseurs de la foi et cuillerees de 걐‘, Les Mission Catholique58,p.172, pp. 452~465

J.Cadars,ibid, pp. 452~454

『DEMANGE 주교일기』

 
<ol>
 	<li>웹자료</li>
</ol>
경향잡지, 『한국 가톨릭 대사전 제1군』(한국교회사연구소,1995),P349~352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서울교구연보 (Ⅱ)1904~1938」,서울 명동천주교회,1987

가톨릭뉴스 지금여기(<a href="http://www.catholicnews.co.kr">http://www.catholicnews.co.kr</a>)

기독신문(http://www.kidok.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신사참배거부운동(神社參拜拒否運動)

『朝鮮總督府官報』 제2085호,1919년 7월 23일자.]]></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8:14:3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ⅩⅢ. 드게트(崔兀乭) 신부의 체포와 추방   –선교 활동 지역과 체포 지역 중심으로 –]]></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21]]></link>
			<description><![CDATA[<b>ⅩⅢ</b><b>. </b><b>드게트</b><b>(</b><b>崔兀乭</b><b>) </b><b>신부의 체포와 추방</b>
–<b>선교 활동 지역과 체포 지역 중심으로 </b><b>–</b>

<b>박수환</b>
<ol>
 	<li>드게트(崔兀乭) 생애 280</li>
 	<li>조선입국 과정 281</li>
</ol>
1) 선교사 입국활동 281

2) 드게트(崔兀乭)과 리델, 블랑 신부 재입국 281
<ol>
 	<li>체포와 추방 281</li>
 	<li>드게트 체포 장소에 대한 문헌 자료 비교 282</li>
</ol>
1) 주호식 신부 논문 282

2) 오다, 쇼고(小田 省吾-일본역사학자) 조사자료 282

① 추방경로 ② 드게트 관계조사 자료 ③ 우포도청 등록 내용 등록: &lt; 드게트 신부 체포 장소 &gt; ④ 岔溝(차구) 지역 ⑤ 프랑스인 선교사(드게트)의 구금 (1933년10월 12일 자료조사) ⑥ 드게트 신문(우포도청) ⑦ 이병교(李秉敎) 심문
<ol>
 	<li>공주시 정안면 고성리(질울) 288</li>
</ol>
 
<ol>
 	<li><b> </b><b>드게트</b><b>(</b><b>崔兀乭</b><b>) </b><b>생애</b></li>
</ol>
드게트(Deguette Victor Marie, 1848 ~ 1889, 한국명 최동진(崔東鎭)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세례명은 빅톨, 한국명은 최동진(崔東鎭), 최진승(崔鎭勝), 최올돌(崔兀乭) 등으로 불리었다. 그는 1848년 프랑스의 퐁 수 아브랑쉬에서 태어나 모르탱 소신학교와 구탕스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1875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년간의 수련을 마치고 한국에 파견되었다. 1876년 2월에 만주에 도착한 후 리델, 블랑 등과 함께 입국을 시도하여 리델 주교만 돌아가고 블랑 신부와 함께 5월에 입국, 서울에서 좀 쉬다가 경기도 용인에서 전교하였으며, 충청도 등지로 피신하였다. 그 후 입국한 리델 주교가 1878년 6월 중국으로 추방될 때를 전후하여 다시 전교 활동에 나섰다가 곧 관헌에게 체포되어 동년 9월에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만주에서 리델 주교를 만나 ‘라한사전’ 편찬에 착수하고 1881년 일본 나가사키로 가서 교회 서적을 인쇄하기도 하다가 블랑 주교의 요청에 따라 1883년 조선에 재입국하여 당시 강원도 이천(伊川), 함경도 원산(元山) 등지에서 전교 활동을 했다.

원산에서는 개항이 되고 한불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완고한 원산 주민들과 그곳 지방관의 무지로 1887년 체포된 채 서울로 호송되었다가(드게트 추방사건) 다시 교회측과 프랑스 대리공사의 엄중한 항의에 힘입어 원산으로 귀임하였고, 1889년 4월 블랑 주교의 지시로 서울로 올라와 요양을 했으나 장티푸스로 인해 동년 4월 29일 선종하였다.
<ol>
 	<li><b> </b><b>조선입국 과정</b></li>
</ol>
<b>1) </b><b>선교사 입국활동</b>

오랫동안 계속된 박해로 인해 한국 천주교회는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위시한 성직자들을 잃게 되었고, 많은 신자들이 희생됨으로써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박해 직전 2만 3천 명에 이르던 신자 수는 1만 명 정도로 줄었으며, 중국으로 피신한 프랑스 선교사들 중에서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리델(이복명) 주교만이 중국의 요동 반도 챠쿠에 있는 성모설지전 성당에 머무르면서 조선에 입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839년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였으며 1866년 병인박해부터 8년간의 지속적인 박해로 인하여 수 천명의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조선에 잠입해 선교 활동한 선교사 20명 중 5명은 병사를 하였고, 12명은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병인박해 때 살아남은 리델, 페롱 신부는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따라서 조선에 진출한 30명의 프랑스 선교사는 전무한 상태였다.

 

<b>2) </b><b>드게트</b><b>(</b><b>崔兀乭</b><b>)</b><b>과 리델</b><b>, </b><b>블랑 신부 재입국</b>

여러번의 재입국에 실패를 거듭하다 1876년 4월 29일 드게트 신부는, 리델, 블랑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출발하여 그 해 5월 8일 대청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리델 주교는 입국 계획을 취소하고 중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한 후 훗날을 기약하였다. 그러던 중 리델 주교는 조선 선교사 블랑(백규삼) 신부와 드게트(최동진) 신부를 만나 1876년 5월 8일에 그들을 황해도로 잠입시킬 수 있었다. 바로 이들이 대 박해 이후 다시 조선 땅을 밟게 된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이어 리델 주교도 1877년 9월 23일에는 두세(정가미) 신부와 로베르(김보록)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잠입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해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ol>
 	<li><b> </b><b>체포와 추방</b></li>
</ol>
<b>1) </b><b>체포과정</b>

이에 앞서 드게트 신부는 리델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듣게 되자,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를 떠나 충청도 공주의 공수원 새터(공주군 우성면 용봉리)에 새로 매입해 놓은 이병교 레오의 집으로 가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자신이 방문했던 교우촌과 신자들로부터 얻은 기쁨을 다음과 같이 파리 본부에 보고하였다.

“이 나라를 두루 여행한다는 것은 오히려 새로운 박해를 자초하러 가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온전히 천주님께 의탁하면서 망설이지 않고 길을 떠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저는 1천 5백 명 가량의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렇게 한 다음 귀가 길에 테데움을 기쁘게 불렀습니다.”

 

드게트 신부가 우려했던 것처럼 새로운 박해의 위협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박해는 드게트 신부가 공주 새터에서 휴식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된 1879년(기묘년) 윤3월 25일 배교자 최우돌의 밀고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배교자 최우돌은 이미 1878년부터 드게트 신부의 거처를 알아내기 위해 포졸들과 함께 공주 인근의 교우촌을 돌아다니며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그 결과 드게트 신부는 공주군 정안면 고성리(질울)에서 신자 14명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그해 윤3월 29일 경성 좌포청(京城 左捕廳)에 수감되었다.

 

<b>2) </b><b>추방과정 </b>

경성 좌포청에 수감되었던 드게트 신부는 북경주재 프랑스 공사(패트노트로)가 청국나라 예부에 드게트 신부에 대한 석방요청을 하였고, 청나라 예부는 조선국에 석방압력을 넣어 조선 국왕은 청의 압력에 굴복하고 1879년 양력 9월 7일 드게트 신부의 석방을 단행하였다. 석방된 드게트 신부는 신의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봉황성(鳳凰城)에 입국하여 봉천(奉天)을 거쳐 우장(牛莊)에 도착하였다.

 
<ol>
 	<li><b> </b><b>드게트 체포 장소에 대한 문헌 자료 비교</b></li>
</ol>
<b>1) </b><b>주호식 신부 논문</b>

그간 주호식 신부의 발표된 논문 &lt;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의 포도청의 역할과 천주교 순교사 연구&gt;에는 드게트 신부는 1879년 5월1 6일(음력 윤3월 26일) 충청도 공주의 공수원(公須院) 새터(新垈, 공주군 우성면 龍鳳里)에서 체포되어 포도청에 투옥되었다가 9월 7일 중국으로 추방되었다고 하였다고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발표하였다.

 

<b>2) </b><b>오다</b><b>, </b><b>쇼고</b><b>(</b><b>小田 省吾</b><b>-</b><b>일본역사학자</b><b>) </b><b>조사자료 </b>

일제강점기 소화 8년(1933년) 10월 12일 소전(小田 일본역사학자)이 밝힌 드게트(崔兀乭)신부에 관한 조사서에는 드게트 신부 본인이 1879년 양력11월 21일 중국 단둥 옆 수암현(秀巖縣)에서 체포 당시 수감 전말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고 밝힌바 있다. 드게트 신부가 쓴 &lt;나의 선교 활동 1880년 3월~4월&gt; “눈의 성모마리아”라는 기고문에 공주군 정안면 고성리(질울)에서 신자 14명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 수감되었다가 그해 윤3월 29일 경성 좌포청(京城左捕廳)에 수감되었다고 밝히고 있다.또한 &lt;우포도청등록&gt; 신문조서도 드게트 신부의 체포된 장소에 대하여도 밝히지 않고 있다.

 

 

 

<b>① </b><b>추방경로</b>

 

<b>② </b><b>드게트 관계조사 자료</b>

<b>&lt;</b><b>선교사 구금</b><b>&gt;</b>

이태왕 15년(1878년) 프랑스 선교사 리델이 포도청에 수감되었다. 동료 드게트 선교사는 기회를 틈타 도망하여 다행히 어려움을 면하였다.

그 후 1879년 양력 5월 15일 공주 부근 촌락(질울)에서 14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공주감 영에 수감되었다. 또한 경성으로 이송하여 좌포도청에 수감되었다. 그 후 북경주재 프랑스 공사(패트로트르)는 청나라 예부에 석방에 대한 지원요청을 하였고, 청나라에서는 조선국왕에게 석방요구를 하여 결국 1879년 양력 9월 17일에 석방 결정이 되어 드게트 신부는 신의주를 거쳐 단둥 봉황성에 입경하고 봉천을 경유하여 우장에 도착하였다.

 

<b>소전</b><b>(</b><b>小田</b><b>:</b><b>일본역사학자</b><b>) </b><b>보고서</b>

 

<b>③ </b><b>우포도청 등록 내용 등록</b><b>: </b> <b> &lt; </b><b>드게트 신부 체포 장소 </b><b>&gt;</b>

드게트 신부(최올돌의) 선교에 대하여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드게트 신부의 체포는 공주 부근(질울)에서 교우 14명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 수감되었고, 체포 장소에 대하여는 지난 8월 28일 현지에 출장하여 조사를 실시한 결과 공주군 정안면(正安面) 고성리(高城里)로 판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b>④ </b><b>岔溝</b><b>(</b><b>차구</b><b>) </b><b>지역</b>

중국 요동(遼東)반도 남부의 장하가에 있던 교우촌, 만주교구 관할로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사목했었는데 흰 눈으로 덮인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lt;눈의 성모마을 Notre Dame de Neige)로 불렀다.

의주(義州)에서 300리 정도의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1866년 병인(丙寅)박해 이후 조선전교의 전초 기지 역할을 하여, 조선에 잠입하려는 선교사들이 이곳에 머무르며 조선어와 조선 풍습을 익혔고, 최지역(崔智爀) 등과 같은 조선 교회의 밀사들이 자주 왕래했었다. 특히 1868년 리델(李福明, 제6대 조선교구장) 신부는 이곳에서 칼레(Calais) 신부, 블랑(白圭三-제7대 조선교구장) 신부, 리샤르 신부, 마르티노 신부 등과 성직자 회의를 열어 조선 전교계획과 잠입 계획을 세웠고, 1876년 코스트(Coste高宜善) 신부와 드게트(Deguette崔東鎭)신부가, 1877년 두세(鄭加彌) 신부, 로베르(金保祿)신부, 뮈텔(Mutel閔德孝-제8대 조선교구장) 신부 등이 이곳에서 머무르다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b>⑤ </b><b>프랑스인 선교사</b><b>(</b><b>드게트</b><b>)</b><b>의 구금 </b> (1933년10월 12일 자료조사)

-번역문-

고종 15년(1878년) 프랑스 선교사 리델이 포도청에 체포 수감되었을 때 동료인 드게트는 기회를 보고 도주하여 운 좋게 피신했다. 다음 해인 고종 16년 (1879년) 양력 5월 15일(음력 윤3월 25일) 돌연 공주 부근의 한 촌락 “질울”에서 14명의 교우와 함께 포박되어 곧장 공주 관아에 압송되었다. 또한 5월 29일(음력 4월 9일) 경성에 압송되어 좌포청에 수감되었다. 드게트의 일은 즉시 북경주재 프랑스 공사(페트노트르)가 알게 되었고, 프랑스 공사는 청나라 총리아무에 간청하여 드게트에 대하여 석방 구출을 의뢰하였다. 이리하여 청나라 정부는 조선 정부에 구금 선교사의 석방을 요구함에 따라 고종 16년 (1879년) 양력 9월 7일(음력 7월 21일) 선교사 드게트는 리델처럼 관헌에 호송되어 청나라(鳳凰城 봉황성에 들어가 봉천(奉天)을
<table>
<tbody>
<tr>
<td></td>
</tr>
<tr>
<td><b>&lt;</b><b>드게트 심문</b><b>-</b><b>우포도청</b><b>&gt;</b></td>
</tr>
</tbody>
</table>
경유하여 우장(牛莊)에 도착하였다.

 

<b>⑥ </b><b>드게트 신문</b><b>(</b><b>우포도청</b><b>)</b>

기묘년(1879년) 윤3월 29일(양력 5월 19일). 서양인 최올돌, 나이 32세, 세례명 위또르(빅톨)
<table>
<tbody>
<tr>
<td></td>
</tr>
<tr>
<td><b>&lt;</b><b>드게트 답변</b><b>&gt; </b><b>우포도청등록</b></td>
</tr>
</tbody>
</table>
-심문하면서 말하길 “네 놈은 어느나라 사람으로 언제, 어디로부터 어느 나라 배를 타고 어느 지방에 도착하여 정박하였으며, 어떤 일로 와서 어디에서 머물렀느냐? 그리고 반드시 불러서 화답하고 응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성은 무엇이고 이름은 무엇이며 네 나라 사람으로 함께 온 사람이 몇이며, 그간에 왕래하고 거주한 곳은 어떤 곳이며, 관여한 일은 무엇이고 우리나라 사람으로 교우는 몇인지 금번의 여러 가지 물음에 감히 거짓으로 꾸미지 말고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라!”

하였습니다.

 

<b>&lt;</b><b>드게트 답변</b><b>&gt;</b>

“저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살았으며, 부모 형제가 모두 살아있습니다. 프랑스로부터 화륜선을 타고 출발한 지 43일 만에 중국의 상해(上海)땅에 도착하여 정박했고, 보름정도를 머물렀습니다. 병자년( 고종 13년, 1876년) 4월 20일경에 상해로부터 중국 선박을 임대하여 동쪽으로 왔으며, 지명을 모르는 조선의 작은 섬에 도착하였고, 사흘 동안 조선의 선박을 타고 강화도를 지나서 서울의 한강에 도착하여 정박했습니다. 상인복으로 변장하고 육지로 올라와서 새문 밖 최가(최지혁)의 집에서 머물러 거주하다가, 같은 해 11월 용인(龍仁)의 공수동(公數洞-현 처인구)으로 올라가서는 이 주교(李福明-리델주교)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각처의 교우 집으로 숨어서 피신하였는데 공주 부근에서 붙잡히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금번의 조사하고 심문하는 마당에, 교우가 누구인가는 성교(聖敎-천주교)에서 말하지 않도록 금지하는 바이므로 비록 죽더라도 결코 진술할 수 없으며, 전후의 지명은 진실로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b>이병교</b><b>(</b><b>李秉敎</b><b>) </b><b>심문</b></td>
</tr>
</tbody>
</table>
<b>⑦ </b><b>이병교</b><b>(</b><b>李秉敎</b><b>) </b><b>심문</b>

기묘(1789) 음력 4월 1일(양력 5월 21일), 죄인 이병교, 나이 67세, 자는 덕경, 세례명은 량이

-심문하며 말하길 “너의 집에 있다가 붙잡힌 서양인을 너는 언제 불러와서 머물게 했으며, 네 놈이 사학(천주교)에 물들었으므로 이로부터 전후의 사정을 말 수 있을 것이니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되, 이른바 교우는 몇이며 어디에 거주하는지 일일이 고하라” 하였습니다.

 

<b>&lt;</b><b>이병교 진술</b><b>&gt;</b>

“저는 본래 서소문 밖 차동 태생이며 몇 년 전에 충주 서촌 방축리로 옮겨가서 살았으며, 처음에 성교(천주교)는 나이 겨우 10세에 저의 선친(先親)으로부터 배웠으며, 30여년 전 내포(內浦-층청도)로 갔다가 처음으로 서양인 안 주교(安敦伊, 다블뤼 주교)를 만나 세례를 받고 세례명을 지은 다음 다시 서양인 장 주교(長敬一 , 베르뇌 주교)를 만났고, 재작년(1877년) 최신부(崔兀乭, 드게트 신부)를 최지혁(崔智爀)의 집에서 만나서 고해성사를 받기에 이르렀으며, 같은 해 8월경에 제가 잠시 진잠(鎭岑)에 머물 때 최지혁이 그의 행랑에 머물며 심부름하던 오완복(吳完卜)으로 하여금 서로 연락하는 일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서울에 올라가 그를 방문하였더니, 최지혁이 저에게 말하길 ‘최신부가 바야흐로 서울 근처의 경기도에 머물고자 하니, 당신이 가까운 고을의 집을 사서 편안히 거주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용인(龍仁)의 무명동(牛鳴洞 )으로 가서 평소에 친분이 있던 이름을 모르는 이가(李哥)를 만나 이러한 사정을 모두 말했더니, 이가가 용인 공수동(空藪洞)을 가르키며 집을 정하여 매입해 주었으므로 최지혁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교우 중에 박공악(朴公岳), 신치욱(申致旭) 및 최가의 심부름꾼 오완복이 최신부(드게트 신부)를 모시고 와서 4개월간 머물다가 최신부가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하므로 헤어져서 갔습니다. 그 후에는 간 곳을 알지 못합니다.
<table>
<tbody>
<tr>
<td></td>
</tr>
<tr>
<td><b>&lt;</b><b>이병교 진술</b><b>&gt; </b><b>우포도청등록</b></td>
</tr>
</tbody>
</table>
<ol>
 	<li><b> </b><b>공주시 정안면 고성리</b><b>(</b><b>질울</b><b>) </b></li>
</ol>
<table>
<tbody>
<tr>
<td colspan="2"></td>
</tr>
<tr>
<td></td>
<td></td>
</tr>
</tbody>
</table>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8:13:37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Ⅻ. 지명 연구- 버그내, 범근내포,소들강문, 술등, 소래, 소롱굴, 소루구지, 수해, 쇗개]]></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20]]></link>
			<description><![CDATA[<b>Ⅻ</b><b>. </b><b>지명 연구</b>

<b>황의호</b>

하나. 당진의 지명 「버그내」에 관하여 259

「버그내」의 사전적 의미 261

「버그내」 어원의 추론 261

「범근내포」의 형성 262

일제강점기 지형도에 나타나는 「버그내」 관련 지명 262

둘. 당진 우강면의 지명 「소들강문」에 관한 연구 267

당진지역에서 이야기하는 「소들강문」의 어원 267

「소들강문」 위치의 검토 269

보령지방에 분포하는 「술등」 관련 지명 271

셋. 보령지방의 만(灣)에 붙여진 지명 연구 275

소래, 소롱굴, 소루구지, 수해, 쇗개 275

 

 

<b>하나</b><b>. </b><b>당진의 지명 </b><b>「</b><b>버그내</b><b>」</b><b>에 관하여</b>
<ol>
 	<li><b> </b><b>들어가기</b></li>
</ol>
최근 삽교천 안에 퇴적되어 노출된 섬에 「소들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는 이야기를 듣고, 당진지역에서 유명한 지명인 「소들강문」에 관하여 짧고 보잘것없는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쓰면서 인터넷 검색도 하고, 현지를 답사하기도 하였는데 당진 우강면 지역에 「버그내」라는 지명이 널리 사용되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아주 아름다운 지명으로 생각되어 어원을 밝혀보고자 하였다.

검색을 계속하면서 2017년 9월 김추윤 박사님께서 당진신문에 기고한 내용을 발견하였고, 「버그내」의 어원까지 밝혀낸 것을 알았다. 김추윤 박사님의 식견에 감탄하면서, 김 박사님과 좀 다른 시각에서 「버그내」 지명에 관하여 탐구해 보고자 한다. 먼 곳에 사는 사람이 인터넷 검색과 답사 한 번으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겠지만 여러 가지 생각 중에 한가지라도 사실에 부합한다면 영광이겠다.

 
<ol>
 	<li><b> </b><b>당진지역에서 인식하는 </b><b>「</b><b>버그내</b><b>」</b></li>
</ol>
아래는 2017년 9월 29일자 당진신문에 실은 김추윤 박사님의 글이다. 당진 지역에서 인식하는 「버그내」의 내용이라고 보아 소개한다.

 

<b>1) </b><b>「</b><b>버그내</b><b>」</b><b>는 삽교천이다</b><b>.</b>

김 박사님은 삽교천을 버그내, 범근천, 범근내, 사읍교천, 신교천, 금마천 등으로 부른다고 하고, 상류인 오서산 계곡에서는 장곡천(長谷川)이 되고, 금마면을 거치면서 금마천(金馬川)이 되고, 여러 지천들을 합류하여 북쪽으로 계속 흘러가면서 예산군 삽교읍에 이르러서 삽교천(揷橋川)이 된다고 하였다. 특히 우강면 지역에서는 과거에 범천(犯川), 범근천(犯斤川), 버그내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 근거로 범근내포가 기재된 동국여지승람에 있는 지도를 제시하였다.

 

<b>2) </b><b>합덕장을 과거 </b><b>「</b><b>버그내장</b><b>」</b><b>으로 불렀다</b><b>.</b>

합덕장을 과거에는 「버그내장」이라고 불렀고, 부근에 범근내(犯斤內), 범근내포(犯斤內浦), 범천포(泛川浦), 범근천(泛斤川), 범천(泛川), 범근시(泛斤市) 등의 지명이 있었다.

 

<b>3) </b><b>「</b><b>버그</b><b>」</b><b>의 어근은 </b><b>「</b><b>버근</b><b>」</b><b>이고</b><b>, </b><b>버근은 이두어로 </b><b>‘</b><b>다음가는</b><b>’ ‘</b><b>다음차례</b><b>’</b><b>의 뜻이다</b><b>.</b>

「버그내」의 원형은 「버근내」이다. 아산만에서 첫 번째로 큰 하천이 안성천이고, 두 번째로 큰 하천이 삽교천이기 때문에 「버근내→버그내」로 불렸다.

<b>4) </b><b>「</b><b>범근내포</b><b>(</b><b>犯斤內浦</b><b>)</b><b>」</b><b>는 현재의 부리포이다</b><b>.</b>

「범근내포(犯斤內浦)」는 현재의 부리포로, 공주와 홍주목 소속 군현 세미를 수납하여 한양으로 조운했는데, 성화 14년 봄에 물이 얕아져서 배가 땅바닥에 교착하므로 아산의 공세곶으로 옮겨갔다

 
<ol>
 	<li><b> </b><b>「</b><b>버그내</b><b>」</b><b>의 사전적 의미</b></li>
</ol>
「버그내」는 아주 오래 전부터 불려온 지명으로 판단되어, 「버그내」와 관련 있어 보이는 단어를 고어사전(古語辭典)에서 찾아보았다. 사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버그다: 버금가다. 다음가다. 예) 버근며느리, 버근딸, 버근아들.

② 버긔다: 버그러지다. 어긋나다.

③ 버기다: 버겁다. 궁핍하다.

 
<ol>
 	<li><b> </b><b>「</b><b>버그내</b><b>」 </b><b>어원의 추론</b></li>
</ol>
버그내의 어원으로 고어 사전에 나오는 위의 3가지를 모두 추론할 수 있다. 추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b>1) </b><b>버그다</b>

「버그내」의 ‘버그’ 어원이 ‘버그다’라고 하면 많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김추윤 박사님의 추론대로 아산만 안에서 가장 큰 하천은 안성천이고 다음가는 하천이 삽교천이기 때문에 삽교천을 일컬어 「버그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현재 합덕 근처에 작은 산을 경계로 2개의 하천이 흐르는데 큰 하천, 현재 석우천으로 부르는 하천은 합덕 방죽으로 들어가는 하천이고 다음가는 하천이 현재의 합덕 읍내를 가로지르는 하천이다. 따라서 이 합덕 읍내를 가로지르는 하천을 합덕 방죽으로 들어가는 하천과 비교하여 「버그내」로 부를 수 있다.

셋째 예산군 고덕면을 흐르는 하천이 한내이고, 고덕장이 한내장이다. 고덕은 예산군 땅이지만 당진과 접경이기 때문에 서로 비교하여 고덕면에 흐르는 하천을 「한내」, 합덕 지역을 흐르는 석우천을 「버그내」로 부를 수 있다.

 

<b>2) </b><b>버긔다</b><b>.</b>

「버그내」의 ‘버그’어원이 ‘버긔다’라고 해도 추론이 가능하다. 합덕 방죽으로 흐르는 석우천은 동남방향으로 흘러 합덕 방죽에 유입하는데, 합덕 읍내 가운데를 흐르는 하천은 동북방향으로 흐른다. 주변의 하천과는 흐름 방향이 다른 것이다. 이것을 두고 ‘버그러진 하천’이라는 뜻으로 「버그내」라고 할 수도 있다고 본다.

 

<b>3) </b><b>버기다</b><b>.</b>

「버그내」의 ‘버그’어원이 ‘버기다’라고 해도 추론이 가능하다. 현재의 합덕 읍내 주변에 흐르는 2개의 하천 중 석우천은 합덕 방죽으로 들어가 넓은 간척지들에 물을 공급하는데, 합덕 읍내의 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하천은 넓은 소들강문 들에 물을 대기에 늘 부족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들강문에 물을 대기에 버거운 하천이라는 의미로 「버그내」로 불렸을 수도 있다.

 

그럼 위의 경우 중에서 어떤 연유로 「버그내」로 불려졌을까? 필자는 「버그내」 ‘버그’의 어원을 ‘버그다’로 본다. 지명은 지형을 보고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 크기를 비교해서 붙이면 쉽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크기를 비교해서 붙인 이름이라면, 김추윤 박사님 의견처럼 안성천을 큰 하천으로 보고, 다음 크기의 하천인 삽교천을 「버그내」로 불렸을 것 같지는 않다. 지명은 민중들이 생활하면서 붙이는 것인데, 과거 합덕이나 우강지역에 사는 민중들은 안성천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큰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안성천과 비교해서 붙인 이름이라면 안성천 주변지역 주민들도 삽교천 즉, 버그내를 알아야 할 것이다. 더구나 하천의 크기를 비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버그내」라는 지명은 당진 합덕이나 예산 고덕 주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지명이고, 「범근내포(犯斤內浦)」의 경우에도 당진지역 주민이나 세곡선을 운항하던 사람들이나 알 수 있었던 지명이기 때문에, 예산군의 고덕면과 당진시의 우강 근처에 있는 인접한 두 하천을 비교했을 것으로 보인다.

 
<ol>
 	<li><b> </b><b>「</b><b>범근내포</b><b>」</b><b>의 형성</b></li>
</ol>
범근내포 즉 버그내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지형적으로 고찰해 보자. 서해안에는 조석간만의 차가 크다. 특히 삽교천 유역에서는 최대 8m에 달하여 조석 간만의 차가 극심하다. 따라서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는 썰물 때 침식이 일어나 깊은 계곡을 형성한다. 포구는 이런 계곡에 발달하게 된다. 삽교천 본류는 육지와 접하는 부분이 완경사이기 때문에 배를 대려면 물양장 같은 시설이 필요한데, 옛날에는 이런 시설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급경사를 이루어 바로 육지에 댈 수 있는 곳은 삽교천 본류와 지류가 만나는 지점뿐인 것이다.

큰 하천인 석우천이 흐르는 합덕 방죽 아래에는 큰 배를 댈 수 없었다. 합덕 방죽의 하류에는 삽교천의 상류지역으로 수심이 낮아 큰 배가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그내」가 삽교천과 접하는 부분에는 수심이 깊어 큰 배가 들어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썰물 때 깊은 침식이 이루어져 육지에 바로 배를 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버그내」의 하류에 좋은 포구(범근내포)가 만들어지고, 공주·홍주 지역의 세곡을 모아 서울로 수송했던 것이다. 포구 이름도 버그내가 바다와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범근내포(泛斤內浦)로 불린 것이다.

 
<ol>
 	<li><b> </b><b>일제강점기 지형도에 나타나는 </b><b>「</b><b>버그내</b><b>」 </b><b>관련 지명</b></li>
</ol>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편집한 1:50000지형도에 의하면 「버그내」에서 파생된 몇 가지 지명이 보인다.

 

<b>1) </b><b>범천</b><b>(</b><b>泛川</b><b>)</b>

현재의 합덕면 소재지에 지명으로 표시하였다. 이곳에 있던 하천을 버그내라고 했는데, 범천(泛川)으로 표기한 것이다. 합덕읍 소재지를 흐르는 하천은 버그내이고, 그곳에 열린 시장은 버그내장 즉, 범천시(泛川市)인 것이다. 1872년에 그린 면천군 지도에는 범근시장(泛斤市場)과 범천포, 범천면이 표기되어 있다.

 

<b>2) </b><b>범천리</b><b>(</b><b>泛川里</b><b>)</b>

현재의 합덕면 소재지 동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버그내 하천이 산지를 통과하여 평야와 만나는 지점으로 가옥이 밀집된 마을이었다. 현재는 불려지지 않지만, 지도를 만든 1915년 당시에는 버그내와 평야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마을을 버그내, 즉 범천리(泛川里)로 부른 것 같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body>
</table>
 

<b>3) </b><b>범천면</b><b>(</b><b>泛川面</b><b>)</b>

잘 알려진 바와같이 현재의 당진군 우강면이 과거에는 면천군 범천면(泛川面)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도 범천면이었다. 범천면 지역은 버그내의 물이 공급되어 개간된 땅이기 때문에, 범천면으로 불린 것이다. 이 지역을 개간하는 데는 버그내의 물이 절대적이어서 버그내면 즉 범천면(泛川面)으로 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3년 10월 1일, 범천(泛川)이 범람의 의미가 있다고 하여 우강면으로 고쳤다.

 

위에 열거된 일제강점기의 버그내 관련 지명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초기까지는 버그내 관련 지명이, 현재 합덕면 소재지를 가로지르는 하천 주변에 붙여졌다.

 
<ol>
 	<li><b> </b><b>논의</b></li>
</ol>
예산군 고덕면과 당진시 합덕면은 인접되어 있지만, 서로 시군을 달리하여 먼 곳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덕풍현으로 한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고 같은 행정구역 내에서 생활하던 옛 주민들은 고덕면을 흐르는 하천과 합덕면 지역을 흐르는 하천을 비교하여 큰 하천을 「한내」 작은 하천을 「버그내」라고 부를 수 있다. 불과 6㎞ 떨여져 있고, 같은 덕풍현 관할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때 버그내는 현재 주민들이 부르는 버그내가 아니고 합덕 방죽 안에 있는 석우천을 말하게 된다. 그러면 왜 버그내는 석우천 북쪽에 있는 작은 하천 이름으로 변하게 되었을까?

필자는 합덕 방죽에 주목한다. 현재 합덕 방죽은 없어지고, 석우천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석우천이라는 이름은 합덕 방죽 상류에 있는 「돌모루」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그럼 합덕방죽을 만들기 이전에도 합덕 방죽으로 흘러드는 하천을 석우천이라고 불렸을까? 하는 것이다. 필자는 「버그내」로 불렸을 것으로 본다. 예산 고덕에 있는 큰 하천을 「한내」라고 부르고 그보다 좀 작은 합덕에 있는 하천을 「버그내」라고 부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후 버그내 하천에 큰 방죽을 만들어 「합덕 방죽」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더 작은 하천이 「버그내」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합덕 방죽을 만든 이후 이렇게 불렸다고 보는 것이다.

합덕 방죽이 만들어진 지 아주 오래되어 고려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므로,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에 기록된 「버그내」는 모두 합덕 방죽 북쪽에 있는 작은 하천을 말한다.

만약 삽교천이 버그내이면, 삽교천 어디에도 버그내포라는 지명을 붙일 수 없다. 삽교천 안에 있는 포구들을 서로 구분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만의 특징을 집어내어 지명을 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금강에 금강포구가 없고, 한강에 한강포구가 없으며 낙동강에 낙동강포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버그내」라는 지명은 합덕 방죽 자리를 흐르던 하천의 이름에서 합덕면소재지 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하천 이름으로 바뀌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버그내 마을, 범근내포, 범천면으로 확대되었고, 심지어는 삽교천을 버그내라고 부르기도 한 것이라고 본다.

 
<ol>
 	<li><b> </b><b>맺음말</b></li>
</ol>
당진시 우강면과 합덕면 일원에 만들어진 「버그내」라는 지명은 ‘버그다’를 어원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지명이다. 원래는 합덥 방죽으로 흐르는 하천을 예산군 고덕면 지역을 흐르는 「한내」와 비교하여 「버그내」로 부르다가, 합덕 방죽을 만들면서 바로 인접한 작은 하천을 「버그내」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버그내」를 한자로 표기하기 위하여 음차로 범근(泛斤), 훈차로 내(川)를 붙여 범근천(泛斤川)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범근천에는 홍수를 연상하는 범(泛)자가 들어갔다고 하여 다시 새롭게 바꾸었다. 버그내장은 합덕장으로, 범천면(泛川面)은 우강면으로 바꾼 것이다.

이로써 버그내라는 우리의 아름다운 지명이 사라졌다. 하천을 소재로 하여 만들어진 우리의 아름다운 지명들, 버그내 · 아우내 · 사그내 중 버그내가 이렇게 사라졌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디지털당진문화대전

당진신문(2017년 9월 29일자, 삽교천-김추윤)

일제강점기 1:50000 지형도(아산·예산 도폭)

1872년 발행 지방지도(아산현, 면천현)

 

 

 

<b>둘</b><b>. </b><b>당진 우강면의 지명 </b><b>「</b><b>소들강문</b><b>」</b><b>에 관한 연구 </b>

<b>황의호</b>

 
<ol>
 	<li><b> </b><b>머리말</b></li>
</ol>
필자는 최근 충남 당진시 우강면 삽교천 안에 생긴 섬에 「소들섬」이라는 지명을 붙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랫동안 보령지방의 지명을 조사 연구하고, 특히 해안에 붙은 지명을 연구하여 발표한 바도 있어 관심 있게 자료를 검토하게 되었고, 「소들섬」은 우강면의 어원이 된 「소들강문」에서 「소들」을 차용한 것을 알게 되었다.

당진시 우강면 주민들은 「소들강문」 지명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2020년 8월 30일 현지인 강문리와 신촌리 일대를 답사하여 주민들과 면담하여 보았다. 현재 거주하는 주민들은 「소들」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고 있고, 「강문」만 「강문이」라고 하여 우강면 강문리 부리포(사발포)로 알고 있었다. 「소들강문」은 우강면의 서쪽, 삽교천 연안에 있는 마을을 통칭하는 지명으로 알고 있었다.

당진지역에서 널리 알려지고, 전국적으로도 알려진 「소들강문」의 어원을 보령지방의 지명과 비교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ol>
 	<li><b> </b><b>당진지역에서 이야기하는 </b><b>「</b><b>소들강문</b><b>」</b><b>의 어원</b></li>
</ol>
당진지역에서 간행되는 여러 자료를 접할 수 없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 속에 들어있는 디지털당진문화대전을 검색하여 보았다. 소들강문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소들강문은 소들과 강문이 합쳐져 지명이 된 경우이다. '소들'의 어원은 철종 때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서 '우평(牛坪)'이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내포 지방의 방언인 솟뜰이란 말의 어원과 일치한다. 솟뜰이란 입술의 인중과 같이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 바다에서 퇴적의 결과 생겨난 섬과 같은 작은 돌출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들은 솟뜰에서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간척의 과정을 통해 논이 되었고, 소들이라는 지명으로 발전된 경우이다.

 

또한 강문(江門)이란 말의 어원도 삽교천이라는 강의 입구를 뜻하는 말로 지금의 당진시 우강면 강문리 사발 포구 지역을 말한다. 즉, 사발포를 통해 해상 운송을 하던 시기에 사발포를 삽교천의 강 입구로 인식하여 강의 입구를 뜻하는 ‘강문’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로써 소들과 강문을 합쳐 부르던 소들강문이 일반화되면서 우평강문이 되었고, 우강면의 지명으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소들은, 갯벌에 퇴적이 일어나 섬처럼 된 곳을 당진지방 방언으로 ‘솟뜰’이라고 하고 이것이 변하여 ‘소들’, 한자어로는 우평(牛坪)이 되었고, 강문(江門)은 삽교천의 입구를 강문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이중환의 택리지를 소개하기도 하였는데, 1930년대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8쪽에 우평(牛坪)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군의 동남쪽 40리에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토정 이지함이 아산을 다스릴 때 한진 앞바다가 크게 터져 육지가 바다가 된 이후 근 100년간에 걸쳐 점차적으로 간사지가 되어 육지와 연결되었다. 토착민이 둑을 쌓아 논을 만들어서 큰 들이 되었는데, 우평이란 지명을 붙인 뜻은 소 모양의 돌 두 개가 바다 섬 중에 돌출했다가 자연스럽게 매몰되었다. 들의 동쪽에 대각리가 있는데 속칭 이르기를 두 소뿔 사이에 만인이 살 수 있다고 말을 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즉 당진지역에서 「소들」은 갯벌에 만들어진 작은 섬처럼 생긴 지형이나 바다 속에 있는 2개의 소뿔 같은 바위 때문에 생긴 지명으로 이해하고 있고, 강문(江門)은 강의 입구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해하고 있다. 후자에 관해서는 이론의 여지없이 모두 수긍하고 있는 어원이다. 또한 소들과 강문에는 각각 포구가 있어 소들에 있는 포구는 우평포(牛坪浦), 강문에 있는 포구는 강문포(江門浦)로 불렸다고 한다.

 

 

<b>3, </b><b>「</b><b>소들강문</b><b>」 </b><b>위치의 검토</b>

<b>1) </b><b>대동여지도</b>

「소들강문」에서 강문은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 즉 강(삽교천)의 입구이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라는데 이론이 없기 때문에, 「소들」만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소들에서 유래된 우평(牛坪)이 기재된 최초의 지도는 대동여지도(1861)이다. 대동여지도의 삽교천 부근을 보면 면천에서 공진(貢津)나루로 통하는 포구 근처에 「우평(牛坪)」이 기재되어 있다. 대동여지도는 군현지도보다 축척이 작아 작은 지명을 기재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기재된 지명이기 때문에 상당히 넓은 지역을 우평이라고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b>2) </b><b>일제강점기 지형도</b>

일제강점기에 그려진 1:50000 지형도의 아산과 예산 도폭은 1915년에 측도하고 1919년에 발간되었다. 예산 도폭에 의하면 강문(江門)은 범천면(泛川面) 강문리(江門里)로 표기되어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소들」은 나와 있지 않다. 대동여지도의 우평(牛坪) 위치가 공진(貢津)으로 통하는 나루 북쪽에 위치하므로 아래 지도에 표기한 곳이 아닐까 한다.

 

<b>3) </b><b>항공 사진</b>

당진 우강면 지역의 항공 사진 중 가장 오래된 사진은 1966년 9월 16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에 의하면 삽교천 하구에 퇴적이 이루어져 일제강점기의 지형도와는 다르지만 우강면 강문리의 포구와 포구 북쪽에 있는 마을이 선명하다.

특히 포구 북쪽에 있는 마을은 만의 방향과 일치하게 남북방향으로 들어서고 마을 가운데에 남북방향으로 길이 나 있다. 이것은 마을이 들어선 지역이 주변보다 높은 지형이며, 높은 지형의 한 가운데로 도로가 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만과 나란히 좀 높은 지형이 만들어져 있고, 이 지형을 따라 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만과 나란히 만들어진 긴 마을이 「소들」로 불린 마을로 보인다.

 
<ol>
 	<li><b> </b><b>보령지방에 분포하는 </b><b>「</b><b>술등</b><b>」 </b><b>관련 지명</b></li>
</ol>
보령지방은 많은 섬과 긴 해안선이 있어, 해안에만 붙은 각종 지명이 발달해 있다. 그 중 「술등」과 관련된 지명에 관해서는 2019년 제 10회 전국해양학자대회에서 발표하였다. 당진 우강면의 「소들」 관련 지명은 보령지방의 해안에 붙는 지명 「술등」과 관련 있는 지명일 것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보령지방의 지명과 비교 검토해 보기로 한다.

보령 지방에 ‘술등’이라는 지명과 그와 유사한 지명이 붙은 곳은 다음과 같다.

 

○쇠뜰: 남포면 월전리의 북쪽과 양항리의 남쪽에 걸친 마을.

○쇳들: 남포면 양항리 남쪽에 있는 들.

○쇳재: 웅천읍 독산리 샛장벌 북쪽의 모래 언덕.

○수등안: 남포면 월전리 용머리 마을 북쪽에 있는 들.

○술둥: 주교면 송학리 송도 윗섬 큰동네 동북쪽으로 내민 돌출부.

○술둥: 천북면 학성리 젓떼기의 중심 마을. 도로가 지나는 마을이다. 간척사업 이전에는 작은 자갈로 된 해안이었다.

○술둥: 오천면 영보리 가승구지 북쪽에 있는 당산에서 동쪽으로 내민 지형.

○술등: 장고도의 북쪽 해안에 있는 사구

○술뚱: 삽시도의 북동쪽 해안에 있는 큰 마을

○술뚱: 효자도 멍덱이 마을의 서북쪽 해안 모래 언덕

○술몽댕이: 고대도 남쪽 봉화재의 동쪽 해안

○숫들번덕: 남포면 양항리 방목 서쪽에 있는 사구.

○숫들장벌: 남포면 양항리 양항리 서쪽 해안에 있는 사구. 최고 높이는 16m에 이른다.

○숫똘: 남포면 월전리 북쪽 해안. 1960년대 초까지도 풀 한 포기 없는 전형적인 사구였으나 방풍림을 조성하여 울창한 삼림으로 변하였다

○숫밑강: 웅천읍 소황리에 있는 석호.

○우평(牛坪): 남포면 양항리 쇠뜰의 한자 표기.

○우평교회: 남포면 양항리 쇠뜰마을에 있는 교회

 

지명의 변화된 양상이 당진 우강면의 「소들」과 유사하다. 우강면에서 「소들」, 「솟뜰」, 「우평(牛坪)」으로 불리는 것처럼 보령지방에도 비슷한 이름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는 것이다.

 

 
<ol>
 	<li><b> </b><b>논의</b></li>
</ol>
<b>1) </b><b>「</b><b>술등</b><b>」</b><b>과 관계된 지명이 붙여진 곳의 특징</b>

보령지방에서 술등과 술등에서 파생되었으리라고 판단되는 「숫들」, 「쇳들」. 「우평(牛坪)」 등의 지명이 붙여진 곳은 모두 바닷가의 사구이다. 1915년경에 측도한 1: 50000지형도를 보면 그 위치와 특징을 잘 알 수 있다.
<table>
<tbody>
<tr>
<td></td>
<td></td>
</tr>
</tbody>
</table>
 

 

<b>2) </b><b>「</b><b>술등</b><b>」</b><b>의 어원</b>

위에서 「술등」이라는 지명과 그와 유사한 「숫들」, 「쇳들」 등의 지명은 모두 바닷가의 사구(砂丘)에 붙여진 지명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면 술등의 어원은 어떤 것일까?

우선 「술등」에서 뒤에 붙은 「등」은 「진등」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보령지방 20여 곳에 붙여진 「진등」이라는 지명은 모두 「낮고 긴 언덕과 같은 지형」에 붙여진 지명이다. 여기서 「진」은 길다는 의미이고, 「등」은 두두룩하게 높은 지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술등」에서도 등은 두두룩하게 높은 지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앞에 붙은 「술」은 무었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는 「술」을 가장자리라고 생각한다. 입의 가장자리가 「입술」이기 때문에 「술」은 바다의 가장자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훈민정음에 「입시울 소리」라는 말이 있고, 「시울」은 「눈․입 따위의 가장자리」이다. 이 시울이 「술」로 변화된 것이다. 우리 얼굴에는 눈시울이라는 고어와 입술이라는 변화된 말이 아직까지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술」이 「바다의 가장자리」를 의미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바다 가장자리 중에서 두두룩하게 높은 지형은 어떤 것일까? 바로 사구(砂丘)이다. 사구를 순수 우리말로 「술등」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바닷가 모래 언덕마다 술등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이다.

어원을 모르는 현대인들이 사구 안에 있는 들을 중시하여 「쇳들」, 「솟들」 등으로 부르고 한자어로는 소를 연상하여 「우평(牛坪)」으로 부른 것으로 생각된다.

 
<ol>
 	<li><b> </b><b>맺음말</b></li>
</ol>
충남 당진시 우강면의 어원이 된 「소들강문」의 어원에 관하여 보령지방 해안에 흔한 지명인 「술등」과 비교하여 검토해 보았다. 우강면의 「소들」은 사구를 일컫는 순수 우리말 이름인 「술등」에서 파생된 지명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선조들은 바닷가 사구(砂丘)를 바다의 가장자리에 있는 두두룩하게 높은 지형이라는 의미로 「술등」이라고 부른 것이다. 당진시 우강면에도 과거에는 삽교천 연안을 따라 사구처럼 생긴 지형이 있었고, 이것을 「술등」이라고 부르다가 「소들」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우강면의 신촌리 일원이 「소들」로 불렸고, 우강면의 강문리 일원과 포구가 「강문(江門)」으로 불렸기 때문에 우강면의 동쪽, 삽교천 연안을 통칭해서 「소들강문」으로 부른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대전 디지털당진문화대전

보령시, 1998, 보령의 지명

語文閣, 1977, 종합국어사전.

조선총독부, 1915년 측도 1:50000 지형도(대천리)

황의호, 2003, 보령지방의 지명 연구, 보령문화 제12집.

황의호, 2019, 「보령지방 해안에 붙여진 지명 ‘술등’에 관한 연구」, 제10회 해양문화학자대회 발표 논문

 

 

 

<b>셋</b><b>. </b><b>보령지방의 만</b><b>(</b><b>灣</b><b>)</b><b>에 붙여진 지명 연구</b>

<b>황의호</b>

 
<ol>
 	<li><b> </b><b>머리말</b></li>
</ol>
필자는 수년간 보령지방의 지명을 정밀하게 조사하여 1998년 『보령의 지명』을 발간하였다. 이후 지명을 통합하여 비슷한 지명을 나열해 보기도하고, 산지나 해안 등지에 붙는 비슷한 지명을 조사 비교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에 보령지방의 만(灣)에 비슷한 지명이 여러 개 분포하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런 지명이 분포하는 곳을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1:50000 지형도에 표기하여 위치적 공통점을 찾아보고, 그 어원을 밝혀보고자 한다.

전문학자가 아닌 아마추어의 글이지만 해안지형과 관계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2018년 안산에서 열리는 전국해양학자대회에 제출해 발표해 보기로 하였다.

 
<ol>
 	<li><b> </b><b>보령지방의 만</b><b>(</b><b>灣</b><b>)</b><b>에 붙여진 지명</b></li>
</ol>
보령지방의 만(灣)에 붙여진 지명으로 소래, 소롱굴, 소롱구지, 쇗개 등이 있다. 이들 이름들은 서로 비슷하여 하나의 어원을 가질 것으로 생각된다. 각 지명의 위치는 다음과 같다.

 

<b>1) </b><b>소래</b>

보령시 내항동의 서쪽 지역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모두 바닷가 만 안쪽에 있으며 여지도서에는 송포(松浦)라 표기되어 18세기 중엽에도 소래라고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안소래 밧소래로 나누는데 바다 쪽이 안소래, 육지 쪽이 밧소래이다.

 

<b>2) </b><b>소롱굴</b>

보령시 청소면 신송리 동북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진고랑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마을이 있다. 송동(松洞)이라 표기하기도 한다.

 

<b>3) </b><b>소루구지</b><b>(1)</b>

보령시 주교면 주교리의 북쪽에 있는 옛 해안선 근처의 만(灣)에 있는, 남쪽으로 열린 골짜기이다. 골짜기 북쪽에는 간척지로 내민 산줄기가 있다.

 

<b>4)</b><b>소루구지</b><b>(2)</b>

보령시 오천면 교성리 웅개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 해안선 근처의 만(灣)이다. 만 동쪽에는 바다 쪽으로 내민 산줄기가 있다.

 

<b>5) </b><b>수해</b>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간척사업 이전에는 내만(內灣) 연안이다.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지형도에는 우포리(牛浦里)로 표기되어 있다.

 

<b>6) </b><b>쇗개</b>

보령시 대천동에 있는 옛 포구이다. 대천천의 하구(河口)에 해당하는 곳으로 만입지이며 과거에는 대천시장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ol>
 	<li><b> </b><b>논의</b></li>
</ol>
충남 보령의 옛 해안선은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었고, 위의 지명은 모두 리아스식 해안의 내만(內灣)에 위치한다. 그러면 위의 지명들은 어떤 어원에서 파생되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옛 선인들이 리아스식 해안을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생각해 보고자 한다.

벌레가 물건을 갉아서 구멍을 내거나 홈을 내는 것을 ‘쏠다’라고 말하는데 현대인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옛 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아주 많이 사용하였다. 벌레가 나뭇잎을 파먹은 것 도 ‘쏠은 것’이고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은 것도 ‘쏠은 것’이며, 쥐가 나무를 갉아먹은 것도 ‘쏠은 것’ 장롱 속의 옷을 좀벌레가 새긴 것도 ‘쏠은 것’이었다.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흔히 보고, 말해 온 단어였다.

선인들은 리아스식 해안을 바다가 육지를 갉아먹은 것으로 즉, ‘쏠은 것’으로 인식하고 ‘쏠다’에서 파생된 지명을 붙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육지가 바다로 들어간 것으로 인식하지 않고, 바다가 육지를 갉아먹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즉, 바다를 중심으로 생각한 것이다. 각 지명의 어원을 추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b>1) </b><b>소래</b>

‘소래’는 바다가 쏠은 곳. 즉 리아스식 해안의 내만(內灣)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지형도상의 위치도 모두 내만(內灣)이다.

인천시의 소래포구는 ①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래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들어온 곳이기 때문에 불렸다는 설, ②지형이 좁다는 뜻의 ‘솔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 ③냇가에 소나무가 울창해 솔내〔松川〕으로 불리다가 ‘소래’라고 불렸다는 설, ④지형이 소라처럼 생겨 ‘소래’가 되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리아스식 해안의 내만(內灣)에 위치하므로 ‘쏠다’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북 부안군에 있는 내소사(來蘇寺)는 소래사(蘇來寺)라고도 불렸다고 하는데, 이것도 순수 우리말 ‘쏠다’에서 유래된 ‘소래’를 한자로 표기하고 절〔寺〕을 붙여 소래사(蘇來寺)가 되고, 안소래에서 차용한 내소사(內蘇寺)가 내소사(來蘇寺)로 변한 것으로 생각된다.

 

<b>2) </b><b>소롱굴</b>

‘소롱굴’은 바다가 쏠은 골짜기나 그런 골짜기에 있는 마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형도에서도 일치하고 있다.

<b>3) </b><b>소롱구지</b>

‘소롱구지’는 바다가 쏠은 내만과 바다쪽으로 내민 육지인 ‘곶(구지)’의 합성어로 보인다. 지형도상에서도 내만과 곶이 어우러진 곳이다.

 

<b>4) </b><b>수해</b>

‘수해’는 소래가 변해서 된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 웅천읍 수부리에서 ‘소안(所안)’을 수안으로 부르는 경우와 같다. 바닷가이기 때문에 물과 바다를 연상하고 ‘수해(水海)’로 표기하고 발음한 것으로 보인다.

 
<ol>
 	<li><b> </b><b>맺음말</b></li>
</ol>
충남 보령지방 해안의 만(灣)에 붙은 지명인 소래, 소롱굴, 소루구지, 수해, 쇗개 등을 지형과 관련하여 검토해 보았다. 모두 바다가 육지를 갉아먹은 것으로 인식하여 ‘쏠다’에서 파생된 지명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보령시, 1998, 보령의 지명

語文閣, 1977, 종합국어사전.

조선총독부, 1915년 측도 1:50000 지형도(대천리)

황의호, 2003, 보령지방의 지명 연구, 보령문화 제12집.

인천광역시 문화원 연합회, 2018, 『蘇萊 삶의 터전』.

 

 

초록

충남 보령지방 해안의 만(灣)에 붙은 지명인 소래, 소롱굴, 소루구지, 수해, 쇗개 등을 지형과 관련하여 검토해 보았다. 모두 바다가 육지를 갉아먹은 것으로 인식하여 ‘쏠다’에서 파생된 지명으로 판단된다.

 

주제어,: 쏠다. 소래, 소롱굴, 소루구지, 수해, 쇗개.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8:12:43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item>
			<title><![CDATA[Ⅺ. 錦江의 뱃길과 龍堂津祠와 침해당기]]></title>
			<link><![CDATA[https://test2.missa.or.kr/?kboard_content_redirect=19]]></link>
			<description><![CDATA[<b>Ⅺ</b><b>. </b><b>錦江</b><b>의 뱃길과 </b><b>龍堂津祠</b><b>와 침해당기</b>

<b>박수환</b>

 
<ol>
 	<li>錦江의 뱃길과 龍堂津祠 243</li>
 	<li>제문들 248</li>
</ol>
① 순풍제문 248

② 龍堂祭文(용당제문) 248

③ 海若祭文(해약제문) 249

④ 兄峯祈雨祭文(형봉기우제문) 250
<ol>
 	<li>문인들의 작품 250</li>
</ol>
貢津城上觀海 (공진성상관해) 공진성 위에서 바다를 바라본다 250

貢津城望海(공진성망해) 공세진성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252

牙州志感 (아주지감) 아산에서 느끼는 바를 적다 253

運漕詩 (운조시) 조곡을 배로 운반 하는 시 254

枕海堂記(침해당기) 255

 
<ol>
 	<li><b> </b><b>錦江</b><b>의 뱃길과 </b><b>龍堂津祠</b></li>
</ol>
우리 고장 장항읍 원수 1리 연수조선 옆 금강변에 龍堂山(용당산)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의 龍堂祭(용당제)를 지내던 祠堂(사당)은 없어지고, 지금은 읍민의 체육 공원으로 활용하고 금강의 아름다운 경관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최근에 만들어진 8각정 龍堂亭(용당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 龍堂山(용당산)은 (龍堂,또는 龍塘 두가지로 쓰였음) 중요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국가의 국운 융성과 백성의 평온을 위해, 금강에 살고 있다는 龍神(용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위안을 삼았던 곳이다. 역사적 기록을 보면, 삼국 시대를 거처 고려 시대까지 전국 大川名山(대천명산)에 大祀(대사), 中祀(중사), 小祀(소사)로 구분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곳 龍堂津祠(용당진사)는 中祀(중사)지역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고려시대까지 매년 봄 국가에서 香(향)과 祝文(축문)을 내려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고. 그 후 조선시대에는 금강을 드나드는 漕運船(조운선-세곡선)과 금강을 건너는 나룻배의 안전을 위하고, 가뭄이 심하면 舒川郡守(서천군수)가 직접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용당산 아래 마을에 군산을 오고가는 나루터와 배를 정박하는 항구 역할을 하였다. 그만큼 중요시하였던 곳이라 錦江(금강)을 조선 말 고지도에는 龍塘江(용당강)으로 표기한 지도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항해는 위험한 일이다. 육로처럼 길을 확인하며 이동할 수 없다는 어려움은 차치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날씨와 파도는 늘 사람들을 불안에 빠뜨린다. 또한, 동일한 지점을 가더라도 해양에서의 이동 거리는 육지에서의 직선 거리보다 길고, 해양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육지 사고보다 사망률이 훨씬 더 높다. 이처럼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음에도 고려와 조선은 지방에서 징수한 조세를 바다와 강으로 운송하였다. 산과 강이 많은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상 육로가 발달하지 못한 탓이기도 하지만 수레보다 선박이 대량 운송에 훨씬 유리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그런 까닭에 고려와 조선 정부는 지방에서 징수한 조세를 안전하게 운송하기 위해 해안과 강변 고을에 漕倉(조창-운반할 곡식창고)이라는 창고를 설치하고, 漕運船(조운선)을 확보하여 특정인들에게 역을 지우는 조운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기능을 강의 물길을 이용해왔다.

朴齊家(박제가) 北學議(북학의)에서 “일반적으로 수레 백 대에 싣는 양이 배 한 척에 싣는 것에 미치지 못하고, 육로로 천리를 가는 것이 뱃길로 만리를 가는 것보다 편리하지 않다.”한 것을 보면 조운 제도의 장점을 말하고 있다. 금강을 이용한 조운 제도에 대하여, 조선 후기에 제작된 漕行日錄(조행일록)이라는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 전라도 성당창에서 금강을 경유하여 京倉(경창-광흥창)에 이르기까지의 운항과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시행한 의례 등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聖堂倉(성당창)은 전라도 8개읍(함열,고산,진산,익산,금산,용담,남원,운봉)에서 국가에 납부한 조세를 국가가 운영하는 12척의 배를 이용하여 출발과 운행 도중에 의례에 따라 風神(풍신), 龍神(용신), 海神(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무사히 서울 한강 廣興倉(광흥창)에 도착하도록 하였다. 배 1척의 적재량은 1,000石(석)을 적재하였다. 쌀 80㎏ 1,800가마의 양이다. 성당창에서 12척에 조세를 적재하고 출발하기 전에 순조롭게 바람이 불어달라는 의미로 順風堂(순풍당)에서 順風祭(순풍제)를 지냈다.

당시 조선말 錦涯(금애) 夏錫圭(하석규 1817~1877)의 順風祭 祭文(순풍제 제문)을 보면, /“咸山(함산-함열)의 북쪽에 神堂(신당)이 있으니 예부터 바람을 순하게 하는데 영험하시다 하여 숭상해 왔습니다. 생각건대 남쪽의 조운은 관리들과 백성들이 충성스럽게 운송하는 것이니 만곡의 곡식은 여덟 고을에서 올린 것입니다. 지난봄에 순조롭게 배를 댄 것은 신의 솜씨임을 알았고, 은택을 많이 내리시니 저희들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이번에 再運(재운)을 하게 되어 더욱 그 몸 고달프지만 믿는 것은 오직 영령이라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게 하소서..-이하생략-” 순풍제를 끝내고 聖堂倉(성당창)을 출발하여 이곳 長項(장항) 龍堂津祠(용당진사~용당산 사당)앞 금강에 도착하면 잠시 정박을 하고 龍堂祭(용당제)를 올렸다.

/“신령께서는 일 년 열두 달을 변화무쌍하게 바꾸시는 비상한 힘을 가지셨으니 베푸는 은혜가 보통이 아닙니다. 높이 솟은 저 둥근 언덕에 우뚝한 堂(당)이 있어 기도하면 바로 응답을 하니 더욱 이 방법을 의지하게 되옵니다. 돌아보건대 조운을 영솔함은 임금께 충성을 다하는 데 있으니 한 해에 정식으로 바치는 공물을 여덟 고을에서 함께 포장하였나이다. 일만 천 여석을 열두 척 조운선에 싣고 몸과 힘을 다하느라 거처할 겨를이 없습니다. 신의 도움을 빌어 강과 바다를 호송하기를 원하오니 이번 再運(두 번째 운송)을 하면서 한잔의 술잔을 올립니다. 작은 정성이나마 흠향하시고, 금강을 넘어 한강에 이르는 멀고 긴 길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소서... -이하생략- ”
<table>
<tbody>
<tr>
<td></td>
</tr>
<tr>
<td><b>龍堂津祠</b><b>(</b><b>용당진사</b><b>)</b><b>가 있는 </b><b>龍堂山</b><b>(</b><b>용당산</b><b>)-</b><b>조선해동지도</b></td>
</tr>
</tbody>
</table>
 

이와 같이 조운선의 무사함을 기원하였다.

성당창의 조운선은 성당 포구에서 세곡 적재가 끝나면 웅포로 내려가 發船(발선-출항) 준비를 했다. 웅포는 성당창으로부터 약 30리 거리에 있었다. 조운선 12척이 웅포에서 출발 준비를 하면 함열 군수는 藍輿(남여-뚜껑이 없는 작은 가마)를 타고 함열에서 웅포로 내려와 웅포에서 배에 올랐다. 12척의 조운선에는 세곡뿐만 아니라 각 선박마다 사공 1명, 漕卒(조졸-노젓는자) 15명, 향리 3명, 조복감관, 좌수, 배리, 영선 장교, 통인, 사령, 급창, 도자, 방자 등을 합쳐 총 22여 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운선 안에는 이들이 잠을 자고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과 조졸들이 노를 저을 수 있는 공간 등이 확보되어 있었다. 음악을 연주하고 포성을 울리며 출발한 조운선은 서천 長項龍堂山(장항용당산)에 도착하면 정박하고 용당제를 올렸다.

용당이 있었던 서천군 장항읍 원수리의 용당산은 생김이 용의 머리와 같아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용당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마을 사람은 용당산이 용의 머리이며, 목 부분은 도로를 개설하면서 짤린 형국이다. 그 북쪽의 왕개산, 성주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용의 몸통이라고 이야기한다. 제당의 이름이 용당이 된 것도 이러한 지명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용당이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명확치 않지만 그 역사가 오래되었음은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확인된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龍堂津祠(용당진사)는 군 남쪽 24리에 있다. 고려 때에는 熊津溟所(웅진명소)로 되어 향과 축문을 내렸는데, 지금은 西州(서주-서천군)에서 致祭(치제-제사)한다.

 

위의 자료는 고려시대 熊津溟所(웅진명소)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용당진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웅진명소는 앞쪽에 포구를 두고 있어 이를 龍堂津(용당진-용당나루)이라고 불렀다. 용당진은 금강 건너편의 군산을 오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용당진은 1931년 무렵까지도 용당나루라고 불리며 군산을 오가는 도선장의 역할을 하였으나 장항선 철도가 완공된 후 장항역 아래쪽으로 도선장이 옮겨지면서 기능이 약화되었다

용당진이 뱃사람들의 복을 기원하였고, 또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었음은 稼亭 李穀(가정 이곡)의 시에도 나타나 있다.

 

용당에서 남쪽으로 마주 보면 장암 포구 / 龍堂南對長岩曲

그 위에 교목 그늘 아래 황량한 사당 / 上有荒祠蔭喬木

동남으로 향하는 배들 신령에게 비나니 / 東南舟航皆乞靈

노래와 춤 분분하고 술과 고기도 듬뿍 / 歌舞紛紛供酒肉

몇 년 전부터 꽤나 심한 풍우의 재해 / 年來風雨頗爲災

사람이 불성실해 신령이 복을 안 주는지 / 人不誠耶神不福

내가 한가히 노닐지만 마음에 걱정되어 / 我縱閑遊心悄悄

천리에 내 낀 파도 괜스레 눈에 가득 / 千里煙波空滿目

 

시에 묘사된 용당은 용당진이며, 장암은 長巖鎭城(장암진성)이다. 시의 제목이 ‘용당과 장암 두 사당을 지나며[過西州龍堂長岩二祠]’라는 것을 보면 두 곳에 모두 사당이 세워져 있었던 것 같다. 장암은 조선시대의 장암진성이 있었던 현재의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 일대를 가리킨다. 용당과 장암진은 본래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형국이었으나 1929년 일본인 미야자키[宮崎]가 금강변의 갈대밭을 개간하기 위해 용당산과 전,후망산을 연결하는 제방을 쌓고 매립하게 되면서 현재의 장항이 만들어졌다. 장항 제련소 굴뚝산 전망산은 일제강점기 측량지도를 보면 祭串(제곶-제사지내던 곳)으로 표기되어있다.

용당제를 마치고 금강 하구를 빠져나온 조운선은 바다에 이르러 海若祭(해약제)를 지냈다. 해약은 北海(북해-북쪽바다)의 神(신)으로 본래 이름은 若(약)이다. 굴원의 楚辭 (초사)에 등장하는 바다의 주인공이자 유명한 고사성어 ‘井中之蛙’(정중지와-우물안 개구리)에도 등장하는 해약은 바다의 신을 대표한다. 성당창 조운선이 마지막으로 설행한 해약제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바다의 신 ‘해약’에게 올린 제사이다. 출발 전에 올린 순풍제는 택일을 하여 올렸지만 용당제와 해약제는 날짜를 정해서 올린 것이 아니라 용당과 군산 앞바다에 도착한 날 시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금강을 빠져나와 군산 앞바다에서 해약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해약제는 제문을 짓고, 제물을 차리고 영운관이 제관이 되어 거행하는 형태였

<b>용당산과 용당 나루터 </b><b>–</b><b>장항읍 원수리 </b>

 

다. 흥미로운 점은 해약제를 지낼 때는 돼지고기를 제물로 쓰고, 제관의 홑저고리를 함께 바다에 빠뜨리는 의례를 행했다는 점이다. 돼지고기를 쓴 이유와 홑저고리를 함께 던진 이유에 대해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 바다이고, 아름다운 징조를 약이라고 합니다. 大方家(대방가-文章이나 學術이 뛰어난 사람)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모든 강은 결국 바다로 모인다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영운은 신속한데에 귀함이 있는 것이니 산더미같이 쌓은 쌀을 배로 무사히 운송하게 해 주소서. 어제 순풍당에서 좋은 바람이 일어나기를 기원하였고, 이어서 龍祠(용사-용당진사)에 기도하였나니 오직 정성으로 신령님께 의지하나이다. 더욱 신령님께 의지하여 더욱이 성심을 다하여 기원하나니 이전에도 하늘의 도움을 입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또한 도움을 내려주소서. 상어와 악어는 물러가고, 호수와 조수는 잔잔하여, 천리를 가게 하는 길에 한 곳에서라도 근심이 없도록 하소서. 하늘과 땅 사이에 비가 멎고 하늘이 활짝 개어 산천을 지날 때마다 날마다 조수는 순하고 머무는 곳마다 아무 탈 없이 하소서. 노에 의지한 여러 사공들이 우리 신의 은택을 노래하도록 하나니 남쪽 고을의 벼슬아치가 서쪽 물가에서 마음 놓고 정박할 수 있게 하소서. 성심으로 마름질한 제 옷과 돼지고기를 바치옵니다./

 

이와 같이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목적지 한강 광흥창까지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 운행하면서 조운선이 정박하거나 항해할 때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북, 취라, 징 등을 이용하였고, 잠자리에 들 때는 개폐문이라는 점호 행사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노를 저을 때는 박자를 맞추거나 고됨을 잊기 위해 뱃노래를 부르기도 하였음을 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ol>
 	<li>제문들</li>
</ol>
 

<b>① </b><b>순풍제문</b>

 

維咸山北有堂 其崇古稱靈慧 有順其風 顧玆南漕 吏民輸忠萬斛 惟正八邑 攸同前春利 泊仰認神工 受賜其多銘 我素衷及此再運 益瘁其躬 所賴惟靈 冥感遂通 象取羲楫 歌發薰宮 浮于達于 不西不東 由湖抵洌翼如輕鴻 一瞬千里 棹師奏功久矣 默禱匪私 伊公庶冀冥 佑禮旣精豊

유함산북유당 기숭고칭영혜 유순기풍 고자남조 리민수충만곡 유정팔읍 유동전춘리 박앙인신공 수사기다명 아소충급차재운 익췌기궁 소뢰유령 명감수통 상취희즙 가발훈궁 부우달우 불서불동 유호저렬익여경홍 일순천리 도사주공구의 묵도비사 이공서기명 우례기정풍

함산(함열)의 북쪽에 신당이 있으니 예부터 바람을 순하게 하는데 영험하시다 하여 숭상해 왔습니다. 생각건대 남쪽의 조운은 관리들과 백성들이 충성스럽게 운송하는 것이니 만곡의 곡식은 여덟 고을에서 올린 것입니다. 지난봄에 순조롭게 배를 댄 것은 신의 솜씨임을 알았고, 은택을 많이 내리시니 저희들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이번에 재운을 하게 되어 더욱 그 몸 더욱 고달프지만 믿는 것은 오직 영령이라 감응하여 마침내 통하게 하소서. 형상은 희집(羲楫)을 취하고 노래는 남훈가(南薰歌)를 부르며, 배 띄워 바다로 나가면 서쪽으로도 동쪽으로도 가지 않게 하소서. 호강(湖江, 錦江)에서 열수(洌水, 漢江)에 도달하기까지 가벼운 기러기가 나는 것처럼 눈 깜짝 할 사이에 천리를 가서 뱃사공이 순조롭게 일을 이루게 하소서. 오랫동안 묵묵히 기도함은 사사로움이 아니라 공무를 위함이니 흠향하시고 음우(陰佑)를 베풀어 주소서. 정결하고 풍요롭게 예를 올리나이다.

 

<b>② </b><b>龍堂祭文</b><b>(</b><b>용당제문</b><b>)</b>

參四惟靈 乘六其陽 化權獨運 普施非常 屹彼圜丘 巋然有堂 禱輒惠應 尤賴是方 顧忝領漕 事在勤 王 一歲正供八邑 同裝萬千餘斛 十二其檣 心力極殫 啓處靡遑 願假神助 護送溝茫 今方再運 庸薦一觴 庶格微諴 禁呵不祥 逾湖至洌 路幾脩長 順越關項 隱涉巨洋虞歌相和 周波不揚 日星朗映 鮫鰐退藏 朝發聖津 暮泊京倉 津篚貢禹 汴船輸唐 吏職恭修 神惠無疆

참사유령 승륙기양 화권독운 보시비상 흘피환구 규연유당 도첩혜응 우뢰시방 고첨령조 사재근 왕 일세정공팔읍 동장만천여곡 십이기장 심력극탄 계처미황 원가신조 호송구망 금방재운 용천일상 서격미함 금가부상 유호지렬 로기수장 순월관항 은섭거양우가상화 주파불양 일성랑영 교악퇴장 조발성진 모박경창 진비공우 변선수당 이직공수 신혜무강

 

신령께서는 일 년 열두 달을 변화무쌍하게 바꾸시는 비상한 힘을 가지셨으니 베푸는 은혜가 보통이 아닙니다. 높이 솟은 저 둥근 언덕에 우뚝한 당이 있어 기도하면 바로 응답을 하니 더욱 이 방법 의지하게 되옵니다. 돌아보건대 조운을 영솔함은 임금께 충성을 다하는 데 있으니 한 해에 정식으로 바치는 공물을 여덟 고을에서 함께 포장하였나이다. 일만 천 여석을 열두 척 조운선에 싣고 몸과 힘을 다하느라 거처할 겨를이 없습니다. 신의 도움을 빌어 강과 바다를 호송하기를 원하오니 이번 재운(두 번째 운송)을 하면서 한잔의 술잔을 올립니다. 작은 정성이나마 흠향하시고, 금강을 넘어 한강에 이르는 멀고 긴 길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소서. 관장항을 순탄하게 넘고 큰 바다를 가만히 건너게 하며, 우임금 노래를 화답하고 주나라 파도 일렁이지 않게 하소서. 해와 별이 영롱하게 비치고 상어와 악어가 물러나게 하며, 아침에 성진(성당창)을 출발하여 저녁에는 경창(광흥창)에 도달하게 하소서. 나룻터의 대바구니를 우임금께 바치고, 변선으로 요임금께 운송하였듯이 관리의 직책을 공손히 수행하오니 신령께 끝없는 은혜를 비나이다.

 

<b>③ </b><b>海若祭文</b><b>(</b><b>해약제문</b><b>)</b>

最鉅者海 休徵日若 大方家號 自古在昔 萬川奔湊 百靈潛躍 涵育恩波 護送漕舶 顧忝領運 貴在神速 由水木道 如山米積 昨祈順堂 祥颷微作 繼禱龍祠 惟諴是格 尤賴尊靈 益殫誠力 前已冥祐 今又昭錫 退伏蛟蜒順漲湖汐 款乃千里 無恙一席 穹壤開霽 山川的歷 朝潮夕洌 津郵水驛 倚櫓羣工 歌我神■ 南州■吏 西澨利泊 誠衫我裁 孚豚我擲

최거자해 휴징일약 대방가호 자고재석 만천분주 백령잠약 함육은파 호송조박 고첨령운 귀재신속 유수목도 여산미적 작기순당 상표미작 계도룡사 유함시격 우뢰존령 익탄성력 전이명우 금우소석 퇴복교연순창호석 관내천리 무양일석 궁양개제 산천적력 조조석렬 진우수역 의로군공 가아신■ 남주■리 서서리박 성삼아재 부돈아척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 바다이고, 아름다운 징조를 약이라고 합니다. 대방가(文章이나 學術이 뛰어난 사람)가 말하기를 예로부터 모든 강은 결국 바다로 모인다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영운은 신속한데에 귀함이 있는 것이니 산더미같이 쌓은 쌀을 배로 무사히 운송하게 해 주소서. 어제 순풍당에서 좋은 바람이 일어나기를 기원하였고, 이어서 용사[용당]에 기도하였나니 오직 정성으로 신령님께 의지하나이다. 더욱 신령님께 의지하여 더욱이 성심을 다하여 기원하나니 이전에도 하늘의 도움을 입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또한 도움을 내려주소서.

상어와 악어는 물러가고, 호수와 조수는 잔잔하여, 천리를 가게 하는 길에 한곳에서라도 근심이 없도록 하소서. 하늘과 땅 사이에 비가 멎고 하늘이 활짝 개어 산천을 지날 때마다 날마다 조수는 순하고 머무는 곳마다 아무탈 없이 하소서. 노에 의지한 여러 사공들이 우리 신의 은택을 노래하도록 하나니 남쪽 고을의 벼슬아치가 서쪽 물가에서 마음 놓고 정박할 수 있게 하소서. 성심으로 마름질한 제 옷과 돼지고기를 바치옵니다.

 

<b>④ </b><b>兄峯祈雨祭文</b><b>(</b><b>형봉기우제문</b><b>)</b>

有屹雙峯 曰兄曰弟 興雲喚雨 民賴以濟 一方所瞻 禱輒有徵 䨙不違期 嵐氣朝升 今何亢陽 如火益燃 萬川俱渴 三農方愆 赤兮何辜 大命近之 靈如有視 普闕恩施 潔樽肥俎 敢薦微誠 冀蒙欽顧 惠霈時行 苟受冥佑永世莫忘 精淑磅礡 是爲之望

유흘쌍봉 왈형왈제 흥운환우 민뢰이제 일방소첨 도첩유징 䨙불위기 람기조승 금하항양 여화익연 만천구갈 삼농방건 적혜하고 대명근지 령여유시 보궐은시 결준비조 감천미성 기몽흠고 혜패시행 구수명우영세막망 정숙방박 시위지망

 

두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으니, 형이라고 하고 동생이라고 하네. 구름이 일어 비를 부르니, 백성이 힘입어 구제되네. 한쪽의 바라는 바를 기도하니 문득 징후가 나타나네. 장마는 기한을 넘기지 않고, 산들바람이 아침에 부네. 지금 어찌 양기가 차올라 불처럼 더욱 타오르는가. 온갖 시내가 모두 마르니, 봄에 밭 갈고 여름에 김매고 가을에 추수하는 것이 바야흐로 잘못되었네, 어떤 희생을 치루어 천명을 가까이 하니, 신령이 보시는 것처럼 널리 은혜를 베푸네. 깨끗한 술과 살찐 제물로 감히 조그마한 정성을 바치니, 바라건대 공경히 돌아보시어 은혜로운 큰 비를 때에 맞게 내려주십시오. 진실로 신의 보우함을 받들어 영원토록 잊지 않겠습니다. 고르고 깨끗하게 쌓아올리고 이에 바랍니다.

 

 
<ol>
 	<li><b> </b><b>문인들의 작품</b></li>
</ol>
<b>近齋集卷之一 </b><b>/ </b><b>詩 </b>

<b>貢津城上觀海 </b><b>(</b><b>공진성상관해</b><b>) </b><b>공진성 위에서 바다를 바라본다</b>

<b>作</b><b>: </b><b>朴胤源</b><b>(</b><b>박윤원</b><b>, 1734</b><b>년</b><b>~1899</b><b>년</b><b>, </b><b>정조 장인 </b><b>朴準源 兄</b><b>)</b>

 

層城枕長湖 (층성침장호) 공진성 아래 긴 호수는 베개 모양

下臨無底谷 (하임무저곡) 아래에 임하면 계곡 없는 평야

回首西北裂 (회수서북열) 서북쪽 바라보면 열려있는 호수

峰巒失重複 (봉밀실중북) 뽀족하게 솟은 산 봉오리 없이 중첩된 산

滄波一何闊 (창파일하활) 푸른 물결은 어찌 이렇게 넓은가?

百川如輳輻 (백천여진부) 백의 냇물이 모여 이렇게 호수 되었다.

瀰漫開天地 (미만개천지) 가득차고 넓게 펼쳐진 하늘과 땅

蕩漾凌坤軸 (탕양릉곤축) 넘실거리는 파도는 지구의 지축 때문

長風萬里動 (장풍만리동) 긴 바람은 만리에 이른다.

怒濤相豗蹙 (노도상회축) 밀려오는 성난 큰 파도 세차게 서로 부딪치고.

側耳聞雷霆 (측이문뢰정) 귀를 대고 들으면 우레와 같은 천둥소리

毛髮竦以肅 (모발송이숙) 머리 들어 공경하며 엄숙해진다

俄頃倏開霽 (아경숙개제) 잠시 후 삽시간에 안개 사라지고

纖漪淨紋縠 (섬의정문곡) 섬세한 잔물결은 주름진 비단 무늬 만든다.

詎知雄傑態 (거지웅걸태) 어찌해서 영웅호걸의 모습인지 알 수 있으니.

復此媚心目 (복차미심목) 이에 아름다운 마음과 눈을 다시 볼 수 있다

蒼茫辨島嶼 (창망변도서) 멀고 아득한 바다에 놓인 크고 작은 섬

明滅見漁屋 (명멸견어옥) 저 멀리 깜박이는 어부의 집이 보인다.

商船自何郡 (상선자하군) 저기 장사하는 배는 어느 고을의 배일까?

鳧鷖與相逐 (부예여상추) 물오리 갈매기 서로 쫒는다.

潮來囓城根 (조래설성근) 조수가 밀려와 성곽뿌리를 파고들고

潮去復平陸 (조거복평육) 조수가 밀려가면 다시 평지가 된다.

噓噏誰主張 (허흡유주장) 어떤 사람은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하고

若有神鬼伏 (약유신귀복) 큰 신하가 업드린 것 같다고 하고

山浮六鰲背 (산부육오배) 물 위에 떠 있는 산이 6마리 자라등 같고

雲出羣龍腹 (운출군용복) 구름에서 나온 용들의 배 같다 하였다.

日月從西懸 (일원종서현) 해를 쫒은 달은 서쪽에 걸려 있네.

怳疑攀若木 (황의반약목) 공진성은 약간의 나무를 잡고 오를 만 한곳

蓬瀛不難到 (봉영불란도) 봉영극락에 어렵지 않게 도착할 수 있으니

紫芝如可掬 (자지여가국) 자주색 영지 가히 움켜잡을 수 있다.

俯視塵寰窄 (부시진환착) 굽어보니 티끌만한 좁은 세상

吾道免跼蹜 (오도면국축) 우리의 굽신 거리는 도를 버려야 한다.

平生喜壯遊 (평생희장유) 평생 동안 기쁘게 보내야 하느니

直欲窮四瀆 (직욕궁사독) 궁핍하면 곧바로 4강 (한강,낙동강,대동강,용흥강)에서 구한다

前年來鶴山 (전년래학산) 전년부터 학산에서

玆湖接林麓 (자호접입록) 이에 호수와 숲 산기슭에서

時向南亭望 (시향남형망) 때때로 남쪽 정자를 바라보고

渺如杯水覆 (묘여배수복) 아득하게 한 잔의 물을 쏟아 붓는다.

今日快開眸 (금일쾌개모) 상쾌한 오늘 두 눈으로 떠보니

胷懷豁幽獨 (흉회활유독) 가슴속에 품은 고독함 뻥 뚫린다.

始信溟渤大 (태신명발대) 태초에 크나큰 바다였을 것이다.

元氣久涵蓄 (원기구함축) 타고난 기운은 오랜 세월동안 함축되었고

日夜去滔滔 (일야거도도) 낮과 밤이 지나면 물은 넘쳐흐른다.

尾閭洩不縮 (미려선불숙) 물이 바다 깊은 곳에서 줄지 않고 나오니

望洋未須驚 (망양미수경) 넓은 바다 모름지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觀瀾理已熟 (관란이리숙) 물결을 바라보니 그 이치는 이미 익숙하다

會待秋濤盛 (회대추도성) 풍성한 파도 치는 가을 모임이 기다려진다.

重遊且可卜 (중유차가복) 다시금 또 짐 있어 실어 나르겠지 ...

(번역: 박수환)

 

<b>錦石集卷之一 </b><b>/ </b><b>詩 </b>

<b>貢津城望海</b><b>(</b><b>공진성망해</b><b>)</b> <b>공세진성에서 바다를 바라보다</b>

<b>作 </b><b>: </b><b>朴準源</b><b>( </b><b>박준원</b><b>, 1739</b><b>년</b><b>~1807</b><b>년</b><b>)</b>

 

雙眸直放貢湖前(쌍모직방공호전) 두 눈으로 공세곶 앞바다 바라본다.

海色平鋪萬里天(해색평포만리천) 넓은 바다 펼쳐진 뻘 만리 하늘과 맞닿아있고

拍地潮驅莓島樹(박지호구매도수) 이끼와 나무가 자라는 섬 조수가 밀려온다.

度津風捲石村烟(도진풍권석촌연) 나루에 부는 바람 석촌 연기 휘감아

靑峰蕩漾沉還出(청봉탕양침환출) 푸른 산봉우리 집어삼킬 듯 돌아 나온다.

赤日玲瓏墜復懸(적일영롱추복현) 영롱한 붉은 해 바다 떨어지면 다시 뜨고,

未信如今開混沌(미신여금개혼돈) 지금 펼쳐지는 혼돈의 세상 믿기 어려워

鴻濛夕氣但蒼然(홍몽석기단창연) 큰 가랑비 올려는 저녁 기운 다만 창연하다.

(번역 : 박수환)

 

박준원(朴準源, 1739년 ~ 1807년)

조선 시대의 문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평숙(平叔), 호가 금석(錦石)이다. 1783년에 본처 원주 원씨와 사별했는데, 1787년에 셋째 딸 수빈 박씨가 정조의 후궁으로 간택되고 1790년 순조를, 1793년 숙선옹주를 낳는 경사가 있었다. 1801년(순조 1년), 당시 수렴청정 중이었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807년(순조 7년) 음력 2월 7일에 졸하였다. 사망 후에 판돈녕부사(돈녕부의 종1품 관직)에서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1807년 (순조 7년) 음력 2월 8일, 순조는 외할아버지 증 영의정 박준원에게 충헌(忠獻)이란 시호를 내렸다.

 

가족관계​는 다음과 같다.

증조부 : 박태원(朴泰遠) - 박세성(朴世城)의 아들. 조부 : 박필리(朴弼履)

아버지 : 박사석(朴師錫, 1713~1774)

어머니 : 기계 유씨(杞溪 兪氏) - 유수기(兪受基)의 딸. 형 : 박윤원(朴胤源)

형수 :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부인 : 원주 원씨(原州 元氏, 1740~1783) - 인조반정 공신 원두표(元斗杓)의 5세손인

증 참판 원경유(元景遊)의 딸.

장남 : 박종보(朴宗輔, 1760~1807)

자부 : 서광수(徐廣修)의 딸.

손자 : 박주수(朴周壽)

손자 : 박호수(朴鎬壽) - 삼남 박종익에게 양자로 출계.

차남 : 박종경(朴宗慶, 1765~1817)

자부 : 이술모(李述模)의 딸.

손자 : 박기수(朴岐壽) - 장남 박종보에게 양자로 출가.

삼남 : 박종익(朴宗翊, 1773~1791)

사남 : 박종희(朴宗喜, 1775~1849)

장녀 : 반남 박씨 - 평산인 신광회(申光晦)에게 출가.

차녀 : 반남 박씨 - 전주인 이요헌(李堯憲)에게 출가.

삼녀 : 수비 박씨(綏妃 朴氏, 1770~1822) - 정조의 후궁. 외손자 : 순조(純祖, 1790~1834)

사녀 : 반남 박씨 - 풍산인 홍욱주(洪郁周)에게 출가.

오녀 : 반남 박씨 - 전주인 류첨(柳詹)에게 출가.

둘째 부인 : 미상 오남 : 박종염(朴宗琰, 1797~1857) - 부인 도정궁 사손 진안군(晋安君) 이언식(李彦植)의 딸.

육남 : 박종영(朴宗永, 1804~?)

 

박준원의 공진성망해의 작품은 朴宗岳이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할 때 공세곶을 찾아와 작품을 남긴 것 같다. 박종악의 백부(伯父)는 사도세자의 누이 화평옹주와 혼인했다. 따라서 박종악과 정조는 6촌 관계다. 박종악이 정조에게 보냈던 편지 105편을 번역한 『수기(隨記·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가 최근 출간됐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御札)을 비롯해 정조의 편지는 공개된 것만 1200여 편에 이른다. 충청도 관찰사 재직 당시 박종악이 지역 천주교도들의 동향을 파악한 뒤 보고한 내용과 노비제 개혁 방안, 노론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극심한 당파 대립, 중국 연경(燕京·베이징)에 두 차례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살핀 청나라 황제와 조정의 동향 등도 편지에 담겨있다.

 

<b>近齋集卷之一 </b><b>/ </b><b>詩 </b>

<b>牙州志感 </b><b>(</b><b>아주지감</b><b>) </b><b>아산에서 느끼는 바를 적다</b>

<b>作 </b><b>: </b><b>朴胤源</b><b>(</b><b>박윤원</b><b>, 1734</b><b>년</b><b>~1899</b><b>년</b><b>, </b><b>朴準源</b><b>(</b><b>박준원</b><b>) </b><b>兄</b><b>)</b>

 

王母歸寧地 (왕모귀령지) 친정 할머니 뵈러 아산에 간다.

家君作宰居 (가군작재거) 아버지께서 예전에 사시던 온양

流風瞻峴峀 (유풍첨현수) 물, 바람 따라 산마루에서 굽어본다.

至恨結潘輿 (지한결번여) 도착한 가마에 맺힌 한이 넘친다.

撫迹思庭柿 (무적사정시) 고향 정원에서 감나무 어루만지던 생각,

傷心薦海魚 (상심천해어) 걱정스런 마음으로 생선을 드렸던 생각

白頭官婢在 (백두관비재) 같이 있던 백발 된 관노 여시종이

話舊淚盈裾 (활구누영거) 지난날 이야기하며 눈물로 옷자락 적신다.

(번역: 박수환)

(朴胤源 모친 杞溪 兪氏, 할아버지 兪命弘 온양에 살았다.)

 

 

<b>近齋集卷之一 </b><b>/ </b><b>詩 </b>

<b>運漕詩 </b><b>(</b><b>운조시</b><b>) </b><b>조곡을 배로 운반 하는 시</b>

<b>作 </b><b>: </b><b>朴胤源</b><b>(</b><b>박윤원</b><b>, 1734</b><b>년</b><b>~1899</b><b>년</b><b>, </b><b>정조 장인 </b><b>朴準源 兄</b><b>)</b>

 

邑人打鼓賽水神。(읍인타고새수신) 고을 사람이 북치고 수신께 제사 지낸다.

信風山下漕船發。(신풍산하조선발) 신풍산 아래에서 조운선이 출발하네.

行如車馬戒舟楫。(행여차마계주읍) 혹시 수레와 배가 잘못될까 경계한다.

八島鸛項平地越。(팔도관항평지월) 팔도 황새목 어려운 길 넘어 평지에 있겠지

沿海貢稅七州粟。(연해공세칠주속) 일곱 고을 세곡 벼 바다 길로 바친다.

船船各載五百斛。(선선각재오백곡) 배 마다 오백 석 가득 실고

今年轉運不可遲。(금년전운불가지) 금년 운반도 지체 할 수 없다

洛陽府庫頗虛縮。(각양부고파허축) 각 부서 창고 자못 줄어 비어 있지 않나 걱정.

王事不憚重溟涉。(왕사불탄중명보) 임금 일 중함을 바다 건너는 것을 꺼리지 마라

官家千里寄一葉。(관가천리기일엽) 고을에서 천리 길 한 조각배로 보낸다.

柁樓日出華蓋飜。(타루일출화개번) 키 잡고 선장은 해 떠오르면 화려하게 날아간다.

海門天長畫角喧。(해문천장화각훤) 바다길 넓고 긴 하늘 요란한 나팔 한 폭의 그림

三老長年笑相慶。(삼노장년호상경) 사공과 노젓는 세사람 즐거워 서로 웃는다.

風雨不動波如鏡。(풍우부동파여경) 비바람 불지 않아 거울 같은 바다

小邑仁聲不自居。(소음인성부자거) 작은 고을 어진 소리 자처하지 않아

休徵歸之我王聖。(휴징귀지아왕성) 성스러운 나의 임금 상서로운 기운 돌아온다.

金浦月明乘潮濟。(금포월명승호제) 김포에 밝은 달 조수에 띄어 건는다.

揚帆直泊西江底。(척범직박서강저) 돛을 들어 곧바로 서강에 정박하고

戶部尙書初閱舶。(호부상서초열배) 호조판서 첫 배의 검열을 받는다.

太倉郞官催納米。(태창랑관최남미) 광흥창 낭관 납미 재촉하고

請看此米民所種。(청간차미민소종) 이 쌀은 백성의 곡식이라 간청한다.

有司固合思節用。(유사고합사절용) 관리에게 완고하게 절약하는 생각으로 사용케 하고

九重每下薄賦詔。(구중매하박부소) 궁궐에서 매번 세금부과를 적게 하라 하네.

年年郡縣惟正供。(년년군현유정공) 매년 고을은 오직 정기적으로 조세를 바친다.

(번역: 박수환)

 

 

 

 

<b>枕海堂記</b><b>(</b><b>침해당기</b><b>)</b>

<b>갑신년</b><b>(1644, </b><b>인조</b><b>22) </b><b>이후</b><b>〔</b><b>枕海堂記 甲申以後</b><b>〕 </b>

<b>이민구</b>

夫朝廷者，薦紳進取之途；市廛者，孅民衡利之區。寬閒之郊，僻遠之鄕，亦士之不遇於世，養安自放者之所趨也。然而處江海者厭湫墊，居山林者病深阻，二者每不得兩全而竝有，則此又取適者之所常恨。其或挈此而訾彼，拘近而昧遠，俱非通論也。然則兼山海之勝，具高深之致，可以超護短偏長之目者，其惟成氏之枕海堂乎！

 

牙州之鎭曰靈人山。山西迤東注，北起而爲新豐，嶺下平而爲倉城。城左右則民居之湊，萬屋鱗錯，中高者爲官廨，旁衍者爲諸廥。又起而昂頭者爲曲城，自曲城西轉數步，若人之回顧望洋者，卽枕海堂。成氏得之，以都其勝槩焉。

 

夫太湖之傍，巨海之涯，斷石承其阯，洪波浸其隈。嵎夷以東，渤海之津，島嶼隱現之形，樓舡往來之路，特目力所不及，而未嘗有芥滯焉。則升高瞰遠，究覽體勢之奇，固無所與讓。而以其在小山之頂，皐壤隔絶，崇庳剔突，因勢寓巧，曲折陟降，梯徑繚盤，雲煙蒸蔚，草木蔥蘢，又窅然饒山藪之趣。向所謂山林也江海也，兩全而竝有者，宜無以先此屈指矣。豈成氏胸中包大瀛海與小須彌山耶？

 

自有天地以來，便有此江山，舟楫之憩泊者必於是，行旅之濟涉者必於是，民物之所都會，官吏之所走集，經閱百代，豈無一二具眼？而堆阜斷壟丘榛墟莽之間，付之漁村蜑戶之所翕集，而騷人雅士，一莫之顧眄。今而遇佳主人，抽祕蘊發潛翳，彰幽闡隱，創新改覯，山增其奇，水增其麗，宇宙增其曠朗，日月增其淸美，使人人登覽者無不怳然開暢，神與境會。

 

夫湖右地，傍海臨水而亭臺者殆以十百數，而此堂一朝出其上，自其西秋雪、白沙之屬，索然以廢。意者顯晦在天，財成在人，而天人相與之際，其有主張闔闢，而默相之者存耶？

 

山水余所樂也。探尋汎濫，足跡徧一邦。居恒有長往之願，至老流徙，不獲管一丘一壑，而濛汜迫矣。僑寓鄕井，得從成氏游，暇日相隨，觴詠於斯堂之上，臨望之樂，與主人共之，亦已幸矣。堂西偏下據絶岸，每晝夜潮上，枕底聞波濤聲，堂之得名，義其取此。而觀成氏故偃蹇當世，倘亦有孫參軍洗耳意否？成氏名時望，字尙甫。辛巳歲，實經始此堂云。

 

무릇 조정은 관리가 진취(進取)하는 길이요, 시장은 백성들이 이득을 저울질하는 곳이다. 널찍하고 한가한 교외와 멀고 외진 시골은 또한 선비들 가운데 세상을 만나지 못하여 편안함을 기르고 자유분방하게 지내려는 이들이 달려가는 곳이다.

 

그러나 강과 바다에서 사는 사람은 축축하고 낮은 것을 싫어하고,

산림(山林)에서 사는 사람은 외지고 험한 것을 꺼린다.

강해와 산림은 매번 두 곳의 장점을 온전하게 함께 가질 수는 없으니,

이것은 또 한적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늘 한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혹 이쪽의 장점을 가지고 저쪽의 단점을 헐뜯거나

가까운 것에만 구애되어 먼 곳을 알지 못한다면

모두 사리에 통달한 의론이 아니다.

그렇다면 산과 바다의 빼어난 경치를 겸하는 동시에

높고 깊은 정취를 갖추어 단점을 비호하거나

장점에 치우치는 안목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성씨(成氏)의 침해당일 것이다.

 

아산(牙山)의 진산(鎭山)은 영인산(靈人山)이다.

산의 서쪽은 완만하고 동쪽은 가파르며,

북쪽으로 솟은 곳이 신풍(新豐) 고개이고,

고개 아래 평평한 곳이 창성(倉城)이다.

성의 좌우에 민가가 모여 있어 수많은 가옥이 즐비한데,

가운데 높은 건물이 관청이고, 옆으로 뻗어나간 건물이 여러 창고들이다.

또 솟아 머리를 쳐든 것 같은 곳이 곡성(曲城)이고, 곡성에서 서쪽으로 돌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마치 사람이 바다를 돌아보는 것처럼 생긴 건물이 곧 침해당(枕海堂)이다.

성씨(成氏)는 그곳을 차지하여 아름다운 경치를 모두 볼 수 있다.

 

큰 호수의 곁과 너른 바닷가에 깎아지른 바위가 그 터를 받들고, 큰 물결이 그 모퉁이를 때린다. 우이(嵎夷)의 동쪽과 발해(渤海)의 나루 주변에 섬들이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형세와 배들이 오가는 길은 다만 시력이 미치지 못해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일찍이 앞을 가로막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 올라 멀리까지 바라보면서 지형의 아름다움을 모두 바라보는 데 진실로 손색이 없다. 그리고 작은 산의 꼭대기에 있어서 진펄과는 단절되고, 높은 곳과 낮은 곳, 움푹 팬 곳과 돌출한 곳이 지세에 따라 교묘하게 붙어 있으며, 굽이굽이 오르고 내리는 곳에 좁은 돌계단 길이 빙 둘러 있고, 운무가 자욱하고 초목이 울창하니, 아득히 산림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앞에서 말한 산림과 강해의 장점을 온전하게 함께 갖춘 곳으로는 마땅히 여기보다 먼저 손꼽을 곳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성씨는 가슴속에 큰 바다와 작은 수미산(須彌山)을 품고 있는 것인가. 천지가 생겨난 이래 문득 이 강산이 있어서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머물러 쉰 곳도 반드시 여기였을 것이고, 나그네가 물을 건널 때도 반드시 여기를 이용했을 것이다. 백성들이 모여 살고 관리들이 달려와 모이기도 하면서 백대(百代)의 세월을 지나왔으니, 어찌 한두 사람이라도 안목을 갖춘 이가 없었으랴. 그러나 퇴적된 언덕과 깎아지른 절벽으로 잡목과 잡초가 우거진 사이에 있어서 어촌의 어부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여겼을 뿐, 시인과 고상한 선비들이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이제 좋은 주인을 만나 꼭꼭 숨겨졌던 것과 깊이 가려졌던 것을 드러내고, 그윽하고 은밀한 것을 밝혀 나타내 새로운 면모를 만들어 내니, 산은 더욱 아름답고 물은 더욱 수려하며 우주는 더욱 환하고 일월은 더욱 밝아 올라와 관람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황홀하고 상쾌하여 마음과 경치가 합하지 않음이 없게 한다.

 

호서 지역에 바다를 마주하고 물가에 세워진 정자가 수십 수백 곳인데, 이 침해당이 하루아침에 최고가 되었으니, 서쪽에 있는 추설정(秋雪亭)과 백사정(白沙亭) 등 유명한 정자는 쓸쓸히 빛이 바랬다. 생각건대 드러나고 감춰지는 것은 하늘에 달렸고, 마름질하여 조화를 이루는 것은 사람에게 달렸으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더불어 함께 하는 사이에 열고닫음을 주장하여 남몰래 돕는 자가 존재하는 것인가.

 

산수는 내가 즐기는 것이다. 여기저기 수없이 찾아다녀서 발자취가 온 나라에 두루 닿았다. 평소에 속세를 떠나 멀리 산수 사이로 떠나려는 바람이 있었지만, 늘그막까지 떠도는 신세로 한 언덕, 한 골짜기조차 가꾸지 못한 채 인생 말년에 다다르고 말았다. 시골 마을에서 우거하면서 성씨와 어울리게 되었는데, 한가한 날이면 서로 만나 이 당 위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보는 즐거움을 주인과 공유하였으니 또한 매우 다행한 일이다. 당의 서쪽 아래로는 절벽이라 매일 밤낮으로 조수가 밀려오니, 베개 밑에서 파도 소리가 들린다. 당의 이름은 그 의미를 여기에서 취하였다.

 

그러나 성씨가 세상에서 짐짓 꼿꼿한 지조를 견지한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혹여 손 참군(孫參軍)이 귀를 씻은 것과 같은 뜻이 있는 것인가. 성씨의 이름은 시망(時望), 자는 상보(尙甫)이다. 신사년(1641, 인조19)에 이 당을 지었다고 한다.

 

 

 

 

 

 

 ]]></description>
			<author><![CDATA[missa]]></author>
			<pubDate>Sun, 22 Mar 2026 08:10:20 +0000</pubDate>
			<category domain="https://test2.missa.or.kr/?kboard_redirect=7"><![CDATA[내포학 심포지움 자료]]></category>
		</item>
			</channel>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