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남포본당 [한] 鎭南浦本堂

1900년 평남 진남포시 용정리(平南 鎭南浦市 龍井里)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안나. 진남포지방은 1897년 진남포가 개항되면서 황해도 신천(信川)본당 주임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에 의해 전교되어 공소로 개설되었다가 1900년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폐쇄되기까지 진남포시와 용강군(龍岡郡)의 일원에 유사리(柳沙里) · 한현리(漢峴里) · 광량만(廣梁灣) · 계명리(桂明里) · 갈촌 등의 공소를 두고 관할하였다. 초대 주임신부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포리(Faurie, 方) 신부가 부임, 1906년까지 사목하면서 성당을 마련하는 한편, 돈의학교(敦義學校, 1916년 폐교)를 개설했고, 이어 2대(1906∼1914년) 주임 르레드(Lereide, 申) 신부는 1908년 성당을 신축하고 이듬해 지정여학교(智貞女學校, 1916년 폐교)를 개설했으며, 4대(1921∼1926년) 주임 뤼카(Lucas, 陸) 신부는 폐쇄된 두 학교 대신에 해성학교(海星學校)를 개설하였다. 그 뒤 1923년 메리놀회에서 평안도 전역의 사목을 관할하게 되자 1926년부터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주임신부로 부임해오기 시작,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인해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회 선교사들이 일제(日帝) 당국에 체포 구금될 때까지 본당 사목을 담당하여 이 시기에 성당이 신축되고 시약소와 양로원이 개설되었다. 1942년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신부가 9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1943년 본당 운영의 소화(小花)병원을 개설하는 등 1945년까지 전력을 다해 사목하였다. 그러나 광복 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1대 주임 조문국(趙文國, 바오로) 신부가 6.25동란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북한 공산정권에 체포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었다.

본당 내의 신심단체로 성 안나 부인회, 가톨릭청년회, 가톨릭운동연맹 지회 및 분회, 그리고 광복 후 조직된 명도회, 임마꿀라따회 등이 있었고, 본당 운영의 사업체로는 해성학교, 마리아유치원, 성심학원, 양로원, 시약소, 소화병원 등이 있었다. 그리고 1937년도 본당 현황은 신부 2명, 수녀 7명(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소속), 교리교사 9명(남 3, 여 6), 공소 11개소, 총교우수 2,820명, 예비자 400명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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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교절요 [한] 進敎切要

나아가 많은 우몽(愚蒙)한 사람들이 천주교에 입교(入敎)하기 위하여 마땅히 지켜야 할 5가지 규구(規矩)와 명백히 외워야 할 7가지 경문(經文)을 아주 간략하게 적어 놓은 책. 칠성사(七聖事)에 대해서도 아주 간략하게 문답식(問答式)으로 적어 놓았다. 1883년 블랑(Blanc, 白圭三) 부주교가 감준(監准)하여 발간된 책과 1901년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감준하여 중간(重刊)된 책이 있지만, 정확한 한글본 초간(初刊) 연도를 알 수 없다. 한편 1897년 홍콩(香港) 나자렛(Nazareth) 출판사에서 발간된 한문본(漢文本)도 볼 수 있는데 그 첫 페이지에는 ‘범년노인우몽지배진교요리’(凡年老人遇蒙之輩進敎要理)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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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교변호 [한] 眞敎辯護

진리(眞理)와 참종교[眞敎]를 변호하기 위하여 김성학(金聖學, 아릭스) 신부가 저술한 책. 13.2㎝×19.1㎝의 책 크기에 모두 112면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1933년 평양교구장(平壤敎區長) 모리스(Marris, 睦) 주교의 감준(監准)을 받아 1934년 평양 서포리본당(西浦里本堂)에서 발행되었다. 모두 3편(篇)으로 나누어 제1편에서는 총론(總論), 제2편에서는 거짓 종교[暇宗敎]들을 논함, 제3편에서는 이교(離敎)를 논함이라 하여 장로 · 감리교 · 안식교 · 성공회 · 그리스정교회 · 이슬람교[俄羅斯敎] 등을, 제2편과 제3편에서 문답식(問答式)으로 설명하고 있다. 천주교사상사연표(天主敎思想史年表)라 하여 가톨릭사상사연대표(思想史年代表)와 기독교소장 통계표(基督敎消長統計表)를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1934년 이후 중간(重刊)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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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한] 職業 [영] occupation, calling [독] Beruf

직업이란 생계를 세우기 위하여 일정한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의 종류를 말한다. 이것은 직업통계라는 방편상에서 쓰이는 의미로서의 직업의 개념이지만, 사회학적인 근거에 따르면, 직업이란 인간사회, 다시 말해 국가적 결합을 갖는 민족내부에 존재하는 분업(分業)인 것이며, 인간의 종교적 도덕적인 사회성의 요구로서, 마지막으로는 창조자인 하느님의 의지의 요구로서 나타난다.

종교적으로는, 일반적인 직업에 대한 견해가 여러 갈래 있어서, 전혀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에서부터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입장까지 들 수 있다. 신약성서에는 명확한 직업론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로는 전교하면서도 천막 만들기로 생계를 세워 갔는데, 그 일을 사도직의 자유를 확보하는 방도로 생각하였다(1고린 9:1-). 그러나 신앙인이 일상적인 노동을 경시하는 태도를 엄히 경계하여,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 말라(2데살 3:6-12)는 권고가 나와 있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각자는, 부르심을 받았을 때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십시오”(1고린 7:20) 하는 구절인데, 이것은 신분을 가리키느냐, 직업을 가리키느냐, 또 이 권고가 어느 정도로 적극적인 내용의 것이냐 하는 점이 많이 논의되고 있다. 직업이라는 외국어가 소명(召命, [영] calling, [독] Beruf)과 같은 말로써 나타내지게 된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교회사(敎會史) 초기단계에선, 성직자도 감독 이외 자는 직업을 갖고 있었던 자취가 보이는데, 오히려 문제는 황제예배(皇帝禮拜) 문제에 관하여 로마황제에 시중드는 군사인 것이 정당하냐의 여부를 줄곧 논의하였는가 하면, 또한 윤리적인 관심에서 배우, 검사(劍士) 등 직업에 종사하는 일이 금지되었다. 중세교회에서는 성직제도, 수도원 제도가 발달함에 따라 직업에도 성속(聖俗)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다만, 교회는 성직만을 ‘소명’(vocatio)이라는 말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직업을 무시 또는 경시하고 있는가의 여부가 문제로 부각되었다. 어쨌든 간에 스콜라철학(Scholasticism)은 성직자를 상층으로, 일반적인 작업을 하층으로 보는, 직업의 히에라르키(hierarchy, 聖職位階)를 생각하고 있었다. 중세 후기 특히 독일 신비주의에서 이미 싹튼 사상을 이어 받은 루터(Martin Luther)는, 다시 한 번 ‘소명’이라는 용어를 모든 직업에 적용하고, 성속의 구별을 폐기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직업에 전념함으로써 하느님의 계명을 다할 것을 역설하였다. 칼빈(Jean Calvin)은 ‘예정’(豫定, predestination)의 교리에 입각하여 루터의 직업관을 더욱 철저하게 했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속적인 직업도 또한 헌신 봉사의 장소라고 이해하였다. 이리하여 프로테스탄트의 직업관의 기초가 뒷받침되었다. 그러나 종교와 현세와를 구별하는 루터파도, 천주님의 예정 의지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내적 외적으로 기쁨을 수반하지 않는 칼빈주의적인 직업관도 다같이 가톨릭적인 직업사상에는 미치지 못한다. 가톨릭적인 직업이념은 엄숙과 기쁨, 저승적 목적과 이승적 긍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있어서의 개인 개인의 직업적 노동은, 인류 공동사회의 문화창조를 위한 영역에의 참가이며, 따라서 하느님이 창조하신 피조물(被造物)의 모든 힘의 발전을 위한 영역에의 참가로서, 문화창조와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직업적 노동이란, 그 대상으로부터 직업의 기쁨을 받아들이게 되며,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개인에게 주어진 생활목적 달성의 한 부분이라는 뜻을 갖게 된다. 오늘날과 같이, 합리화와 기계화의 시대에 살기 위하여는, 조직적 또는 기술적인 능력은 단순히 물질적 생산력을 위해서 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인간다운 노동생활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도 필요한 것이다. 현대의 경제 또는 사회발전에 적극 참여하며 정의와 사랑을 위해, 인류의 행복과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음을 확신하도록 요청하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은 “절대로 필요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얻어, 그리스도와 그 복음에 충실하며 현세활동에 있어서 바른 질서를 보존하고 개인적 내지 사회적 생활 전체가 진복팔단(眞福八端)의 정신, 특히 청빈(淸貧)의 정신으로 충만해야 하겠다”고 새로운 직업관 확립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직업과 관련하여 실학파(實學派)를 중심으로 한 지식층이 ‘사 · 농 · 공 · 상’의 봉건사회 계층질서의 원리를 비판하고 ‘사민일체’(士民一體)라는 새로운 질서원리를 주창하였음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에 따라면 “사(士)는 이미 지배자가 아니고 민(民)도 역시 피지배자가 아니어서, 사가 관료로서 국정에 참여하지 않게 되며, 농업 · 공업 · 상업의 그 어느 직업이든 그의 적성에 따라 종사하고, 농 · 공 · 상민이 그들의 직업에서 뛰어난 성과를 발휘하게 되면 그들 중에서도 국정에 참여하는 관료가 발탁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직업적인 사회 분화론의 경제관은 가톨릭의 평등 · 박애 · 보편 · 과학사상 등에 그 사상적인 기초를 두고 있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 당시의 가톨릭 신자들의 직종 분석에서도 나타나듯이, 많은 신자들이 상업이나 수공업 등과 같은 자연경제체제의 해체에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직종에 종사하는 것으로 밝혀지며, 특히 의료 · 학장(學長) · 풍수(風水) 등 당시의 유랑지식인의 존재가 주목할 만큼 나타나고 있다.

[참고문헌] M. Schwarz, Berufsproblem, 1923 / H. Pesch, Lehrbuch der Nationalouomie, I, Aufl. 5, 1925 / A. Pieper, Bersufsgedanke und Ber fsstand im Wirtschaftsleben, Aufl. 2, 1926 / E. Brunner, Das Gebot und die Ordnugen, 1932 / 趙珖, 辛酉迫害의 分析的考察, 敎會史硏究, 第1輯, 韓國敎會史硏究所, 1977 / 韓弘渟, 韓國社會와 가톨릭經濟倫理, 가톨릭社會科學硏究, 第1輯, 韓國가톨릭社會科學硏究會, 1983. 3 / 사목헌장, 제2부 3장 / 요한 23세, 어머니와 교사,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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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방외기 [한] 織方外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예수회 선교사 알레니(Aleni, 艾儒略, 1582∼1649) 저술의 세계 인문지리서로 1623년 중국 항주(杭州)에서 6권으로 간행되었다.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명에 의해 예수회 선교사 판토하(Pantoja, 龐迪我, 1571∼1618)와 우르시스(Ursis, 熊三拔, 1575∼1620)가 편찬에 착수하여 조사, 기록해 둔 기초자료를 판토하의 사후에 알레니가 증보한 것으로 5대주(五大州)의 역사 · 기후 · 풍토 · 민속 등과 6대양(六大洋)의 해로(海路) · 산물 · 섬 및 남극(南極)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고 천주교 교리도 약간 다루고 있는데 이지조(李之藻), 양정균(楊廷筠), 구식곡(瞿式穀) 등의 서(序)를 비롯, <만국여도>(萬國輿圖), <북여지도>(北輿地圖), <남여지도>(南輿地圖) 등의 지도도 수록되어 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사부(史部) 지리편(地理篇)과 ≪천학초함≫(天學初函)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는 17∼18세기에 전해져 실학자들에게 주로 읽혀졌는데 이익(李瀷)은 ≪직망외기 발≫(織方外紀 跋)을 써 인문지리적인 논평을 하였고, 그의 제자 신후담(愼後聃)은 이 책에 언급된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비판하였다.

봉쇄적 조선 사회에 종래의 중화(中華)적 세계관을 깰 새로운 세계지리 지식을 심어주어 의식의 확대, 자아의 각성을 촉구한 세계지리서로 주목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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