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한] 敎友 [라] Christianus [영] Christian

그리스도교 신앙을 믿고 따르며 가톨릭 교회에 소속된 사람. 신약성서에 따르면(사도 11:26, 26:28, 1베드 4:16) ‘그리스도를 열렬하게 지지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Christianus’는 박해기에 이방인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후에는 자랑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초기에는 ‘Christianus’가 교우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자(信者), 신도(信徒)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일반적인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적 이웃사랑이라는 측면에서 교우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교우는 세례를 받고, 사도신경을 믿으며, 가톨릭 교리를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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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요추언 [한] 敎要芻言 [관련] 교요서론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 1669년 북경에서 초간된 페르비스트(Verbiest, 중국명 南懷仁, 1623~1688) 저술의 ≪교요서론≫(敎要序論)을 상행 자모당(慈母堂)에서 관어(官語)로 옮겨 1886년 중간한 책으로, ≪교요서론≫의 원 내용 이외에 ‘예수수난기략'(耶蘇受難記略)이 추가되어 있다. (⇒) 교요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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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요서론 [한] 敎要序論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 벨기에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페르비스트(Verbiest, 중국명 南懷仁, 1623~1688)가 저술한 교리서로, 1670년 북경에서 1권으로 간행되었다. 모두 62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천주존재 · 천지창조 · 영혼불멸 · 천당 지옥 등 천주교의 교리가 12가지로 요약, 설명되어 있고 이밖에 천주십계 · 신경(信經) · 주의 기도 · 성모송 · 성호경 등과 성세성사의 예식이 설명되어 있다. 문체가 간결, 명료하고 논리적이어서 청(淸)의 건륭제(乾隆帝)에 의해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었고 또 내용이 좋아 ≪교요추언≫(敎要趨言)이라는 제목 하에 중국 관어(官語)로 중간된 후 상해에서도 상해어로 쓰여진 ≪방언교요서론≫(方言敎要序論)이 간행되었다. 또한 프랑스어 · 만주어(滿洲語)로도 번역, 간행되었다. 우리나라에는 18세기말에 전해진 것으로 추축되는데,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에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에 한글본 ≪교요서론≫이 언급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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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오 [한] 驕傲 [라] superbia [영] pride

확실한 기준없이 자신을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의 태도.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누구나 존엄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저마다 크고 작은 재능을 가지며 그들 나름대로 가치를 실현하고 있으므로 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한 인간이 자신의 재능과 가치 실현을 들어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는 필요할 뿐 아니라 덕행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고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하여 자신을 절대화하거나 중심적인 존재로 여기며 남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태도는 칠죄종(七罪宗)의 하나인 교오이다. 교오에서 파생되는 죄는 인간 능력 밖의 것을 이루고자 하는 주제넘음(presumptuousness), 자신의 자격 이상의 명예를 추구하거나 이를 위해 악한 방법을 쓰는 과망(過望), 자신의 탁월성을 나타내려고 절제없이 애쓰는 허세 등이 있다. 교오한 나머지 하느님의 권위와 당신의 계시 진리를 업신여기는 죄는 특히 무거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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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 [한] 敎案

‘교안’이란 유교적 동양 전통사회에 있어서 개항정책에 따라 서구 열강과의 외교적 관계가 맺어진 후 반(反)그리스도교의 사회분쟁이 외교적 절충을 거쳐 해결된 사안(事案)을 뜻한다.

[발생의 배경]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하여 동양의 은서국을 자처해 오던 조선왕국이 대외 개방의 개항정책을 취하게 된다. 그리하여 1882년에는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을 맺고 서구 열강과 통교케 된다. 한편 1886년에는 프랑스와도 한불수호통상조약(韓佛修好通商條約)에 의하여 국교를 갖게 된다. 한미 조약이 체결된 후 강렬한 쇄국 · 양이정신을 담은 척화비(斥和碑)가 전국 각 도시에서 철거된다. 이는 곧 쇄국에서 개국으로, 양이에서 수용으로의 국책의 변화를 나타내는 일이었다. 1886년에 맺어진 한불조약은 외국인들이 국내여행허가증이라 할 호조(護照)를 발급받아 국내 각지를 여행할수 있게 되었고(第4款 2項), 교회(敎誨)라는 명목으로 국내 각지서 전교 활동을 펼 수 있게 되었다(第9款 2項). 비록 그리스도교 신교 자유를 정책적으로 천명한 것은 아니나 이상과 같은 일련의 변화는 조선 왕국의 그리스도교정책이 박해에서 묵인으로, 탄압에서 자유로의 선회를 뜻하는 역사적 대책이었다. 국가적 정치적 측면에서는 이처럼 불투명한 과정으로 오랜 박해정책의 종식이 진행되었던 것이나, 1세기 간에 걸친 박해의 의식은 사회적으로 체질화되다시피 한 것이어서 쉽사리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박해정책의 종식이 국가 정령(國家政令)으로 선명하게 국민앞에 공표된 것이 아니어서 사회적 민중적 측면에서의 반 그리스도교적 박해와 배격의 동향은 여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개인이나 사회 집단 또는 지방 관료에 의한 그리스도교 박해 행위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한편 이와 반대로 완화되는 탄압정책에 따라 해방감을 느끼게 되는 가운데 일부 그리스도교인들의 슬기롭지 못한 행동으로 교민 간에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고, 치외법권(治外法權)적 존재이던 전교신부나 선교사들의 월권적 행위도 없지 않아 분쟁을 자아내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문제로 말미암아 개항 후에도 자주 분쟁이 야기되어 그것은 당사자 간에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하고 외교 사단(外交事端)으로까지 확대된 사건이 곧 교안이다.

[발생 시기] 한국에서의 교안의 발생시기는 1886년 한불조약 체결 후로부터 1905년 을사 조약(乙巳條約)에 의하여 조선왕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의하여 박탈될 때까지 약 20년간이다.

[교안의 유형] 한말에 발생한 우리나라에서의 교안은 대상과 원인에 따라 여러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첫째 전교신부나 선교사에 대한 분쟁, 둘째 교인과 비교인 간에 벌어지는 분쟁, 셋째 지방관료에 의해 야기되는 분쟁, 넷째 사회집단 조직에 의해 야기되는 분쟁 등으로 유형지을 수 있다.

1. 전교신부 · 선교사 관계의 교난 : 전교활동의 자유가 실현됨에 따라 전교신부와 선교사들이 국내 각지에 나가 공공연하게 전교 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각 지방에서 이들에 대한 배척, 폭행, 추방 소동이 잇달아 이어나 교안으로 확대되는 일이 생겨났다. 이러한 교안은, ① 각지의 민간인들이 선교사들을 축출하고자 일으킨 집단폭행 소동 즉, 1888년 원산(元山)서의 드게트(Deguette) 신부 축출소동, 1890년 전주(全州)에서의 보두네(Baudounet) 신부 축출소동, 1890년 안변(安邊)에서의 마라발(Maraval) 신부 축출소동, 1889년 대구(大邱)에서의 로베르(Robert) 신부 축출소동, 1890년 고산(高山)에서의 조조(Jozeau) 신부 축출소동, 1892년 수원(水原)에서의 빌렘(Wilhelm) 신부에 대한 폭행사건, 1893년 양양(襄陽)에서의 불라두 (Bouladoux) 신부에 대한 폭행사건, 1898년 회령(會寧)에서의 브레(Bret) 신부 축출소동, 1898년 안변(安邊)에서의 브레 신부와 교회 습격사건, 1889년 강경(江景)에서의 베르모렐(Vermorel) 신부와 교회 습격사건 등. ② 지방 순시 도상의 위급에 대비하기 위해 무기를 소지했던 전교신부(傳敎神父)의 총기 사용으로 인한 교안, 즉 1895년 원산(元山)에서의 브레 신부 발포사건, 1897년 칠곡(漆谷)에서의 파이아스(Pailhasse) 신부총기사건 등. ③ 청국의 장강교안(長江敎案)과 같은 성격의 ‘양인식영아육음영아혈요언'(洋人食-兒我肉飮-兒血謠言)으로 인한 교안[1888년 서울 등지에서 전교신부들이 어린이의 피를 마시고 고기를 씹는다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로 생겨났던 교안]. ④ 교인(敎人)과 비교인(非敎人)의 다툼에 전교신부나 선교사가 개입하게 되어 일어난 교안[1897년 진주(晋州)에서의 우도(Oudot) 신부, 장성(長城)에서의 드애(Deshayes) 신부, 1899년 베르모렐 신부의 강경포 기뇨사건(江景浦起尿事件), 1899년의 인천(仁川)에서의 마라발 신부, 1901년의 전주(全州)의 보두네 신부에 의한 전주양관(洋館)에서의 제반문제, 원주(原州) 뒤테르트르(Dutertre) 신부의 관찰부(觀察府) 납입문제, 임천(林川) 공베르(Gombert) 신부의 관방(官房) 난입(亂入)문제, 1903년 황해도에서 벌어진 ‘해서교안'(海西交案) 등이 대표적 사례임].

이들 교안은 ㉮ 각지에서 교인들이 비교인들로부터 부당한 박해를 받고 그 부당 행위를 지방관(地方官)이 비호하고 있으니 전교신부나 선교사들이 외교적 특권을 발동하여 교인을 보호하기 위해 간섭하게 되는 인도적 종교적 개입이 문제되고, ㉯ 지방관의 법률행위가 부당하고 탐학이 심하여 연약한 교인들이 핍박을 받게 되니 이러한 불법처사에 전교신부와 선교사가 간섭케 된다는 정치적 사회적 개입에서 벌어진 교안이다.

2. 교(敎) · 민(民)의 다툼에서 벌어진 교안 : 한불조약으로 국가적 측면에서의 박해정책은 후퇴하였으나 척사위(斥邪衛正)의 사회적 전통은 일시에 변화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금압과 박해에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되는 교회와 교인 그리고 전통적인 척사(斥邪)와 배제(排除)를 고집하는 민인(民人)들 사이에 자주 대립 · 폭행 · 소송 · 파쟁이 벌어지게 된다. 이러한 싸움에서 약세에 몰리거나 부당한 처사를 받게 되는 교인들이 프랑스 성직자나 미국 선교사 또는 프랑스 공사관이나 미국 공사관에 호소하여 도움을 청하게 될 때 그 사건이 교안으로 확대되곤 하였다. 교 · 민 사이의 다툼이 벌어지게 되는 원인은 여러 가지로 잡다하다. ① 외국인과 통하거나 외국 종교를 믿고 있다는 시비, ② 재산권을 둘러싼 시비[전답 · 가옥 · 산림 · 금전의 늑탈이나 매매를 둘러싼 시비], ③ 초지 산림(草地山林)의 무단 개간이나 벌채로 인한 시비, ④ 채무관계로 인한 시비, ⑤ 분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시비[墓域 · 密葬 · 掘塚 · 移塚의 문제], ⑥ 여성문제로의 시비[간통 · 여자매매 · 婢女 등의 문제] 등 여러 가지였다.

3. 지방관료 작폐로 인한 교안 : 한불조약으로 전교활동이 조약화(條約化)하였고 박해정책이 후퇴하는 것이었으나 그러한 정책적 전환이 정령이나 전교로 세상에 공포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일부 보수 · 척사적 정신을 가진 지방관료들은 중앙정부의 뜻과는 달리 자기 직권으로 교회와 교인에 대한 부당한 박해를 가하는 예가 있어 교안이 발생한다. 1887년과 1890년 경기도 관하 제읍(諸邑)에서 외국인과 관계 있는 내국인 가운데 문제인물들을 일괄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관찰사의 지시가 하달되어 문제가 생겼었다. 1892년에는 전라도 지방에서도 ‘관내 사학지류'(管內邪學之類) 즉 천주교도와 야소교도(耶蘇敎徒)의 명부를 작성 보고하도록 여러 고을에 지시하였다. 이에 교회가 이를 전면 거부하고 나서자 문제가 확대되었다. 한편 지방관료 가운데 일부 자탁교인(藉托敎人)의 행패를 내세워 교인들을 비방하거나 교회에 대한 박해를 지시 또는 계시하는 자들이 있어 문제되었다[1891년 기장 현감의 外洋人誹謗告示文, 1892년 伊川 부사의 西學禁斷告示, 1896년 태인군수의 西敎人懲治揭示, 1899년 진산군수의 西敎人境外逐出指示, 1904년 장성군수의 西敎人犯法者嚴罰告示 등. 이들 지방 관료들의 비행을 계기로 또는 그것을 빙자하여 보수적 척사정책을 펴니 그것이 교안으로까지 확대되었음].

4. 사회조직에 의해 야기되는 교안 : 이상의 교안은 주로 개인에 의해 야기되거나 또는 이에 부화뇌동하는 군중들의 시위나 난동으로 전개된 사건들이 교안으로까지 확대된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조직된 사회단체가 의식적으로 이끈 교인이나 교회에 대한 박해운동으로 야기되는 교안도 있다. 동학(東學) · 황국협회(皇國協會) · 상무사 (商務社) 그리고 일진회(一進會) 등이 벌인 소란으로 야기되는 교안이 그 예이다.

① 동학은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의 포덕문(布德文)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반서교적(反西敎的) 의식이 뚜렷한 종교교단이다. 특히 1894년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이 전개되면서 반침략(反侵略) 반봉건(反封建)의 성격을 뚜렷이 하게 되면서 동학의 반서교적 의식은 서교인 즉 그리스도 교도들에 대하여 생(生)을 이 땅에 받고 또한 이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양이(洋夷)를 따르는 자로 규정하고 박해를 가하였다. 동학농민전쟁이 전개된 삼남지방 각지에서 외국인 전교 성직자나 선교사에 대한 폭행과 교인들에 대한 불법적인 가해행위가 벌어져 교안화(敎案化)하였다. 전주(全州) · 노성(魯城) · 덕산(德山) 땅에서 서양인 거관(巨館)이 파괴 약탈되었고, 조조 신부가 공주에서 살해되었다. 한편 각지에서 많은 교인들이 폭행당하고 재물을 약탈당하였다.

② 유교적 예도(禮道)를 향촌(鄕村) 사회에 정착시키는 한편 유교적 향촌질서 유지를 위한 향촌 자치규약인 향약(鄕約)도 교안으로 확대되는 물의를 일으켰다. 향촌사회도 그리스도 신앙이 차차 침투해 들어오자, 이에 반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인을 동네에서 추방하거나 징벌을 가하는 향약조항을 새로이 내용화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자 교회와 충돌이 생겨나게 되었다. 1899년 안변동심계원(安邊同心契員)의 교인 축출소동, 1901년 상주향약동심계(尙州鄕約同心契)의 천주교도 추방 결의, 장성향약(長城鄕約)에서의 서교인 작폐자의 징치 결의 등으로 일어난 교안이 그 예이다.

③ 상무사와 황국협회의 행패로 교안이 일어난 예도 있다. 보부상(褓負商)들이 상부상조와 공동이익을 위한 동업조합 조직인 상무사나 황국협회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회조직이어서 때로는 집단적으로 교회난 교인에 대해 테러를 감행하였다. 1903년 황해도의 해서교안(海西敎案)의 문제도 정부가 파견한 안핵사(按-使) 이응익(李應翼)이 보부상을 동원함으로써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1898년에 황국협회의 길영수(吉永洙), 박유종(朴有鍾), 홍종우(洪鍾宇) 등은 연명으로 천주교와 개신교에 대해 서한을 보내어 교회를 비난하고 테러를 감행하겠다고 협박한 일이 있다.

④ 1905~1906년에는 친일 매국단체인 일진회의 회원들이 전라도 각지와 여러 섬에서 교회와 교인을공격 폭행하는 교안이 일어났다. 주로 지도(智島), 기재도(箕在島), 진도(珍島), 완도(莞島), 조도(鳥島), 소안도(所安島)나 영암(靈岩)과 목포(木浦) 등 각지에서 행패가 자못 심해 교회가 프랑스 공사관의 도움을 빌어서야 진압되었다.

끝으로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신축교난(辛丑敎難)은 우리나라 최대의 교안이었다. 교 · 민이 1주간에 걸쳐 전투를 벌인 끝에 제주성이 함락되면서 제주시의 관덕정(觀德亭) 앞 광장에서 일시에 700명의 생명이 희생된 대규모의 교난이었다.

[교안의 처리] 교 · 민간의 대립 분쟁, 성직자나 선교사에 대한 위해(危害)나 활동 방해, 지방관료의 부당한 처리로 인한 분쟁이나 사회조직을 동원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 현지에서 해결하지 못하면 각지의 전교신부와 선교사들은 주교나 선교본부에 보고하는 한편 대책강구를 요청하게 된다. 주교관이나 선교 본부는 그 문제를 주(駐)조선 외국공사관에 외교적 절충을 부탁하게 되고, 그들 외국공관은 우리 외부(外部)에 이를 통고하여 문제 해결을 절충하게 된다. 외부는 그 요구가 타당한가를 검토한 후 조선 정부의 내부(內部)에 대책을 강구토록 공문을 보낸다. 내부가 현지 관료에 지시를 내려 선처하기를 명하게 되어 문제의 결말을 보게 된다. 각지에서 발생한 대소(大小)의 교안은 현지 교회의 서양 성직자나 선교사와 현지 관료의 직접적 절충으로 해결되는 때도 있으나 프랑스나 미국 공사와 우리 외부의 외교적 절충이 있은 후에 귀결되는 예가 허다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자주 벌어진 교안이 청국에서와 같이 관계국 병력의 동원과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악용되는 현대사의 전개로까지 확대되지 않은 것이 우리나라 교안의 특색이다. 자주 벌어진 교안을 근본적으로 해결짓기 위한 교회와 정부의 노력으로 1899년 교민조약(敎民條約)이 체결되었다. 상호간의 월권적 행위를 삼가고 정(政) · 교(敎) 분리정신에서의 공평한 사전조치로 약속한 전문(全文) 9조의 이 교민조약은 서구 근대사회에서의 교황청과 각국과의 콩코르다툼(concordatum)과 같은 성격의 약정(約定)이다. 서양의 그것과 달리 조선 천주교회의 최고 책임자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와 대한제국의 지방국장(地方局長) 정준시(鄭駿時) 사이에 체결된 약정이었다. 그러나 교민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교안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그래서 1904년 프랑스 공사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사이에 전문 8조로 된 교민범법단속의고(敎民犯法團束擬稿)라는 조약 초안을 가지고 교섭이 있었다. 그러나 선교조약(宣敎條約) 체결을 위한 이 교섭은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일본에 박탈당하자 결말을 얻지 못하였다. 1906년 1월에 대한제국 외부가 폐지되고 주한 각국 사절이 본국으로 철수하고 일본정부가 외교권을 장악하게 되자 전교 성직자나 선교사들의 관계도 교민의 다툼으로 재(在)조선 외국사절이 개입되어 외교적 절충을 가져 교안으로 확대되는 일은 자취를 감추었다. (李元淳)

[참고문헌] 李元淳, 朝鮮末期 社會의 對西敎問題硏究-敎을 中心으로 한-, 歷史敎育, 제15집, 歷史敎育硏究會, 1973 /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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