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영도구 청학2동 195번지에 있는 부산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신강림. 1932년 준본당으로 출발하여 1938년에 정식 본당이 설정되었으나 본당의 역사는 186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경주의 양반 출신 순교자 가문의 교인인 김보윤(金甫允)이 어린 딸 하나를 데리고 이곳으로 피신하여 살았다. 당시 영도는 말을 기르는 목축지요, 거의 무인고도로 피난살이를 하는 교인들에게는 안전지대였고, 육지와 격리되어 유배지(流配地)나 다름없는 섬이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찾아드는 교인들이 늘어갔는데, 김보윤은 그들을 모아 공소를 차리고 회장을 맡아 하였다. 1886년 대구에 있는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는 영남일대를 순회할 때, 이 공소에도 들러 판공성사를 주었다.
1890년에는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처음으로 이곳에 주재하면서 현재 성당이 있는 자리에 초가 1동을 지어 교회로 삼고 중 · 동부 경남일대를 순방하였다. 그러므로 당신 절영도(絶影島)로 불린 영도의 청학동교회는 부산 최초의 사제 주재지요, 부산본당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1893년에 우도(Oudot, 吳保祿) 신부가 뒤를 이어 부산일대에 전교활동을 폈다. 이 무렵 부산은 개항(開港)된지 15∼16년이 지나 박해의 여파도 사라졌고, 항구도시로서 활발한 발전을 하고 있었으므로 교회의 중심을 구태여 외딴 섬에 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얼마 후에 범일동본당의 설정을 보게 된다.
1896년에는 한국인 강성삼(姜聖參, 라우렌시오) 신부가 청학동에 부임하여 2년간 사목하였는데, 당시의 교세를 보면 절영도의 43명을 비롯하여, 공소인 기장 상곡 69명, 양산 범실 43명, 언양읍 60명, 청주(지금의 진양) 돌기 35명, 정주 탑골 16명, 정주 선필 하리 34명, 정주 선필 상리 30명, 언양 살대 34명, 그래서 신자총수는 364명이었다. 그 뒤 교세가 차차 늘어 청학동성당이 협소해졌기 때문에 1917년 당시 회장을 맡고 있던 조정화(아우구스티노)가 제공한 부지에 신자들의 성금을 목조 기와집 성당을 신축, 이듬해 3월에 대구교구장 안 주교를 초빙하여 축성식을 봉헌하고, 주보로 ‘성신강림’을 모시게 되었다.
1932년 준본당이 되면서 김선배(金善培, 요한) 신부가 부임하였으나 이듬해 12월에 별세하고, 4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1938년 2대 주임인 김동언(金東彦, 베드로) 신부의 부임과 동시에 청학동 교회는 정식으로 본당이 되었다. 1940년에는 3대 주임인 서정길(徐正吉, 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사제관을 지었다. 교세의 발전으로 1955년 1월 신선본당을 분할하고, 1954년 11월부터 1963년 2월까지 주임을 맡은 9대 김유재(金有宰, 그레고리오) 신부는 신자들의 열성적인 협조에 힘입어 십자가의 첨탑이 치솟은 현대식 성당을 축성하여 국제적인 항구도시의 관문으로서 손색없는 위용을 갖추게 하였다. 이어 사제관과 수녀원도 새로 짓고 유치원까지 만들어 청학동 본당의 면모를 일신케 하였다. 그 후 1969년 7월 봉래동 본당을 분할하고, 1972년 1월에는 태종대 본당을 분할하였으며, 1973년 1월 현 사제관을 다시 지었다. 현재 이 본당의 주임은 박문선(朴文善, 야고보) 신부가 맡고 있으며,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의 수녀들이 파견되어 있고 1983년말 현재 신자 총수는 3,133명에 달하고 있다.
그동안 청학동 본당의 주님을 맡았던 역대 신부는 다음과 같다. 김선배, 김동언, 서정길, 신순균(申順均, 바오로), 베르트랑(J. Bertrand, 韓), 장병룡(張丙龍, 요한), 김기봉(金基奉, 필립보), 김유재, 김영제(金永濟, 요한), 신윤우(申允雨, 갈리스도), 배봉룡(裵鳳龍, 바오로), 양덕배(楊德培, 요한), 배상섭(裵尙燮, 요한), 이돈우(李敦雨, 레오), 김태호(金兌浩, 알로이시오) 신부 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