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츠공의회 [한] ∼公議會 [라] Concilium Constantiense [영] Concil of Constance

1414년에서 1418년까지 3년 5개월간에 걸쳐 독일의 콘스탄츠에서 개최된 중세 최대의 공의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그문트(Siegmund)의 제안으로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하였고, 전 회기 동안 300명 이상의 주교, 100명 이상의 대수도원장, 다수의 고위 성직자, 신학자, 교회법학자, 재속 통치자들이 참석하여 서구대이교(西歐大離敎, 1378∼1417년)를 종식시켰고, 이단을 추방하였으며, 교회개혁에 박차를 가하였다.

공의회가 개최되기 전 교회는 로마계 그레고리오 12세, 아비뇽계 베네딕토 13세, 공의회파 요한 23세 등 3파로 분열되어 일찍이 체험하지 못한 위기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열린 공의회는 당연히 교회의 일치를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세 교황은 각자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무리 없는 교회일치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고, 마침내 공의회 참가자들은 세 명의 교황을 모두 퇴위시켜야만 일치가 회복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버리고 샤프하우젠으로 도망, 공의회를 비난하였다. 공의회의 속개를 지원해 온 황제 지그문트는 공의회는 교황 없이도 속행될 것임을 선언하고, 요한 23세를 소환하였다. 한편 공의회에서도 라는 교령을 발표하여 공의회를 계속하여 1415년 요한 23세를 폐위시켰고, 그레고리오 12세를 설득하여 자진 퇴위케 하였으며(1415년), 베네딕토 13세도 폐위시켰다(1417년). 이로써 서구 대이교는 종식되었고 마르티노 5세가 후임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공의회는 위클리프(Wycliffe)와 후스(J. Huss)의 이단문제를 취급하여 위클리프의 명제 <200개안>을 이단으로 단죄하였고, 후스의 명제 30개를 이단으로 단죄한 후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1415년).

공의회는 이밖에도 공의회 우의에 관한 , 10년마다 정기적으로 공의회를 개최한다고 규정한 등 교회개혁에 관한 5개의 교령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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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한] ∼聖∼會 [관련] 꼰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 꼰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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콕토 [원] Cocteau, Jean

Cocteau, Jean(1899∼1963). 프랑스의 작가. 소설 ≪무서운 아이들≫(Les enfants terribles) 등 많은 작품들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알려졌다. 한때 가톨리시즘에 심취되어 마리탱(Jacques Maritain)과의 신앙에 관한 서신왕래를 남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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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이네 [영] Koine

기원전 4세기경에 형성되어 고대 지중해 일대에서 공통어(共通語)로 사용되었으며, 그리스어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언어다. 코이네가 형성되기 전의 그리스어는 지방에 따라 다양한 방언(方言)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선진 문화를 향유하고 있던 아테네 지방의 아티카 방언을 근간으로 하고 산문(散文)에서 우수한 이오니아 방언을 추가하여 만든 공통어가 이 코이네다. 신약성서를 비롯하여 그리스교부들의 저작, 파피루스 문서들이 이 코이네로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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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트 [원] Coste, Eugene Jean George

Coste, Eugene Jean George(1842∼1896). 파리 외방전교회원, 조선교구 선교사. 한국명 고의선(高宜善). 프랑스의 몽타르노(Montarnaud)에서 태어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거쳐 1866년말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 1868년 6월 6일 사제서품을 받고 7월 15일에는 프랑스를 떠나 극동으로 파견되었다. 2년간 홍콩에서 경리를 맡아 본 후 1870년에 싱가포르로가 2년간 요양소 건설에 종사하다가 홍콩에 돌아왔고, 1874년에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경리일을 맡아 보았다. 1875년 11월 21일 청원이 허락되자, 곧 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리델(Ridel) 주교가 오래 전부터 꾸며 오던 ≪한불자전≫(韓佛字典)의 인쇄일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일본 요꼬하마(橫濱)로 건너가 한국어의 자모를 주조하여≪한불자전≫의 간행사업에 착수, 1880년에 출판하였고, 이어 그 이듬해에는 한국어의 문법책과 천주성교공과를 출판하였다. 그 뒤 리델 주교에 의해 나가사끼(長崎)에 조선교구의 경리부가 설치되자 경리부장을 맡아 보게 되었다. 그 곳에서 인쇄일도 맡아 보던 중 1886년 블랑(Blanc) 주교에 의해 부주교로 임명되어 한국에 입국 이후 약현(藥峴)과 종현(鍾峴)성당을 비롯한 많은 성당과 교회건물을 직접 설계하고 감독하였다. 또 인쇄소를 나가사끼에서 옮겨와 한국어로 된 30여권의 책을 찍어 냈다. 이렇듯 박해에서 벗어난 한국 교회 발전의 초석을 튼튼히 다진 그는 만년에 고아원에서 어린이들을 돌보다 1896년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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