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가 1258년부터 1261년에 걸쳐서 지은 호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가 비이성적인 종교라고 하는 비그리스도 교인들의 주장에 대해 그리스도교가 이성에 바탕을 둔 종교임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이 책을 썼다. 그는 이 책에서 처음에 이성으로써만 발견할 수 있는 진리를 열거하고 다음에는 도덕률을 포함한 한층 더 심원한 진리에 대해 서술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신비에 대해 언급하였다. 이 부분에서 그는 신비란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으로써 파악할 수 없는, 즉 이성에 반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호교교부 [라] apologetae [영] apologists [한] 護敎敎父
2세기경 반교회적이고 적대적인 이방인들에게 교회에 대한 방어 및 옹호, 그리고 호교적(護敎的)인 변론을 폄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앙을 옹호하고 권하는 일을 한 일련의 저작들을 말한다. 지체가 높은 식자층에서 입교자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리스도교의 존속을 위해 로마제국과 투쟁하고 있을 당시에 활동하였다. 이들은 대개 그리스철학과 언어풍토에서 성장하였는데 변증론, 대화론, 수사학 등 전통적인 이교 철학의 방식을 통해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꾀하였으며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의 그리스도교화를 시도하였다.
호교교부는 비록 크게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이론적 설명으로 신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는데, 첫째 그리스도교를 국가나 사회에 위협적인 종교로 파악하고 있는 황제나 치자들에게 그리스도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도록 노력 연구하였으며, 둘째 이교사상과 그들의 우상과 미신, 신화의 모순과 부도덕성을 제시하였고, 셋째 철학의 이론적 방법, 즉 인간이성만으로는 절대진리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일깨우면서 인간의 한계성을 지적하였다. 이들은 이교도의 철학과 그 영향하에 있는 전반적인 사고방식 외에도 특히 유대사상과 이단사상에 거스르는 이론을 세우는 적극성을 발휘해야 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신 · 구약의 일치와 조화를 말하고 그리스도의 기적, 신성(神性), 구약의 고고성(考古性)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근거를 논증하였다.
최초의 호교교부로는 콰드라토(Quadratus)를 들 수 있으며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순교자 유스티노(Justinus)이다. 그 외에 아리스티데스(Aristides), 아리스톤(Ariston),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안티오키아의 테오필로(Theophilus), 그리고 이레네오(Irenaeus) 등이 있다.
혜화동본당 [한] 惠化洞本堂
1909년 서울에 들어온 독일 바이에른지방의 성 베네딕토 수도회 수사들이 백동(栢洞, 혜화동)의 3만평 땅에 수도원을 건설하자, 이 일대의 교우들은 거의 모든 성사를 이 수도원 성당에서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1년 서울교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원산(元山)교구의 포교를 담당하고자 1927년 덕원(德源)으로 수도원을 결정적으로 옮기게 되자 백동 교우들은 이 수도원 성당을 비롯한 부대시설을 기반으로 하여 본당설립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그 해 10월에 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종현(鐘峴, 명동)본당으로부터 분리하여 서울에서 세 번째로 혜화동본당을 설립하였고, 초대 본당신부로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시잘레(Pierre Chizallet, 池士元) 신부가 부임하였다. 1929년 5월 신설된 소신학교(건물은 수도원 성당을 사용) 교장신부로 전임, 2대 서기창(徐起昌, 프란치스코) 신부가 새로 부임, 수도원 부속건물인 목공소를 개조하여 성당으로 사용, 그 해 9월에 라리보(Adrianus Larribeau, 元亨根) 부주교는 본당 주보성인을 ‘성 베네딕토’로 정하고 강복예절을 거행한 뒤 첫 미사를 드렸다. 1936년 3대 본당 신부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가 부임 당시의 본당 주변의 신자수는 1,400명, 14개 산하공소의 신자수는 1,444명이었다. 1937년 혜화유치원 개설과 때를 같이하여 샤르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분원이 설치되어 본당의 전교와 유치원 원아 교육수녀가 부임하였다. 당시 평신도로 장기빈(張箕彬) · 장면(張勉) · 장발(張勃) 3부자를 비롯해 박병래(朴秉來), 유홍렬(柳洪烈), 한창우(韓昌愚), 정지용(鄭芝溶) 등 유지 지식인이 많았으며, 이들은 모두 재속 성 프란치스코회(제3회) 회원들이기도 하였다. 1939년 4대 본당신부로 생제(Singer, 성재덕) 신부가 부임, 1942년 제기동(祭基洞)본당을 분리 독립시키는 한편, 1943년에는 성가수녀회 수녀원을 창설하였으며, 1944년에는 미아리(彌阿里)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 분리시켰다.
1950년 11월 7대 정원진(鄭元鎭, 루가) 신부가 부임, 1954년 숙원이던 성당 신축 기성회를 조직, 8대 장금구(莊金龜,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공사를 완공, 1960년 5월 노기남(盧基南) 주교의 집전미사로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9대 유수철(柳秀徹, 도미니코) 신부는 1965년 포천묘지(15만 7,000여평)를 조성하였다. 11대 박귀훈(朴貴勳, 요한) 신부는 1975년 성북동(城北洞)본당을 분할 독립시키면서 그 자신이 성북동 1대 본당신부로 전출하였다. 12대 박희봉(朴喜奉, 이시도로) 신부는 본당 창설 50주년을 맞이하여 1975년 12월 구 사제관을 헐고 교리실을 겸한 사제관(110평)을 신축 낙성시켰고, 역시 본당 창설 50주년 기념사업으로 1977년 혜화동본당사 ≪백동반세기≫(栢洞半世紀)를 발간하였다. 1979년에는 문산(汶山)본당 돕기운동을 벌여 모금한 3,000만원을 전달하였다. 현 13대 이기명(李起明, 프란치스코) 본당 신부는 부임 직후인 1980년 수녀원(61평)을 신축하였다. 현재 본당 소유대지는 1,178평, 연건평은 564평이고, 관할구역은 이화동, 혜화동, 명륜 4동, 연건동, 와룡동, 동소문동 일부, 성북동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신자수는 5,554명(1983년 현재)이다.
형조 [한] 刑曹
조선시대 중앙행정기관인 육조(六曹)의 하나. 법률(法律) · 소송(訴訟) · 형벌(刑罰) · 노예 등에 관한 일을 담당했고, 일명 추조(秋曹)라 불렸다. 조선개국과 함께 설치되어 초기에는 그 권한이 미약했으나 1405년(太宗 5년) 관제개혁을 통해 정2품(正二品)의 관청으로 승격되면서 권한이 크게 강화되었다. 관원으로 우두머리인 정2품의 판서(判書)와 그 아래에 참판(參判) ·참의(參義) · 정랑(正郞) · 좌랑(佐郞) · 율학(律學) · 교수(敎授) · 겸교수(兼敎授) · 별제(別提) · 명률(明律) · 심률(審律) · 율학훈도(律學訓導) · 검률(檢律) 등이 있었다. 또 형조의 예하조직으로 중죄(重罪)에 대한 복심(覆審)을 담당한 상복사(詳覆司), 법령의 조사를 담당한 고율사(考律司), 감옥과 범죄수사를 담당한 장금사(掌禁司), 노예와 포로에 대한 일을 담당한 장예사(掌隸司) 등 4사(四司)가 있었고, 이외에 율학청(律學廳), 죄수의 행형(行刑)을 담당한 전옥서(典獄署), 일반범죄를 수사하던 좌 · 우 양 포도청(捕盜廳) 등을 관할하였다. 형조에서의 범죄수사는 포도청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수사를 하고, 재판은 포도청에서도 넘어온 범죄와 자체에서 수사한 범죄를 함께 다루었다. 박해 때 체포된 대부분의 천주교인들은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고, 일부 지도급 천주교인과 선교사들은 이곳을 거쳐 의금부(義禁府)에서 신문과 재판을 받았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형조는 법무아문(法務衙門)으로 개칭되었다.
형제애 [라] caritas fraterna [영] fraternal charity [한] 兄弟愛
이웃은 같은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주님 안에 한 형제 · 자매라는 인식에서 우러나는 사랑으로서 애덕을 실천하는 것. “만민을 아버지같이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한 가족을 이루고 서로 형제같은 마음으로 대하기를 원하셨다”(사목헌장 24). 그러므로 교회는 먼저 ‘형제애의 상징’(사목헌장 92)이 되며 “보다 깊이 뿌리박힌 세계적 형제애를 추구”(사목헌장 91)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