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bert, Laurent Marie Joseph(1796∼1839). 성인(聖人). 한국명 범세형(范世亨). 축일은 9월 20일.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조선 교회의 초대 교구장인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가 조선 입국을 앞두고 갑자기 선종하자, 로마 교황청은 제2대 교구장으로 중국 사천성(四川省)에서 전교 중이던 앵베르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에 1837년 5월 14일 카프사의 명의주교로서 조선교구의 주교로 서품되는 성성식을 가진 다음 곧 임지인 조선으로 떠났다. 그는 1796년 4월 15일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18일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어, 다음 해 3월 20일 파리를 떠나 중국 사천교구로 가서 전교활동 중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때의 나이 42세였다. 그는 곧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1837년 12월 17일에 봉황성 변문에 다다라 이튿날 조선 입국에 성공하였고, 13일 후에는 서울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이로써 그는 조선땅을 처음 밟은 주교가 되었고, 조선교구는 교구 설정 6년만에, 그리고 조선 교회 창설 53년만에 비로소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그보다 앞서 입국한 모방(Maubant, 羅伯多祿) 신부 및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신부와 힘을 합쳐 전교에 힘쓴 결과 1839년 초에는 신자수가 9,000명을 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인 성직자양성을 서둘러 이미 모방 신부에 의해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내 교육받게 한 바 있으나, 다시 세 명의 소년을 유학시키고자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는 한편, 정하상(丁夏祥)과 이승훈(李承薰)의 손자인 이재의(李在誼) 등 네 사람의 성인(成人)을 뽑아,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빠른 시일 안에 신부로 키우고자 하였다. 그리고 외방전교회의 방침에 따라 일본에도 전교의 손을 뻗고자 여러 가지로 시도했으나, 모든 계획은 얼마 안 가서 일어난 1839년의 기해(己亥)박해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839년 주교는 지방교우들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주교의 입국 사실이 당국에 알려져 교우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고, 주교를 추적하는 포졸들의 수색이 더욱 심해졌으므로, 주교는 하는 수 없이 수원에 가까운 바닷가 교우집에 몸을 숨겼다. 여기서 그는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몸을 피하도록 하였으나, 그들이 함께 남아 있기를 원했으므로 하는 수 없이 몸조심을 당부하며 맡은 지방으로 각각 되돌려 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에 의해 그의 거처가 알려졌음을 알고, 그는 화가 다른 교우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나아가 포졸들에게 몸을 맡기었다.
이어 얼마 뒤 자수한 모방, 샤스탕 신부와 함께 1839년 9월 21일 군문효수라는 극형을 한강 새남터에서 목을 잘리어 순교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4세로 조선에 입국한 지 불과 2년 만이었다. 그의 유해는 처형된 지 20여일이 지나서야 교우들에 의해 몰래 지금의 노고산(老姑山)에 묻혔다가 1843년에 경기도 과천으로 옮겨 묻었던 것을, 1901년 11월 2일 서울 명동의 주교좌 대성당 지하실에 모시게 되고 1925년에는 복자(福者)의 영광된 자리로 올림을 받게 되었다. 그 뒤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