콥트전례 [한] ∼典禮 [영] Coptic rite

로마 교황청과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콥트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성 치릴로(St. Cyrillus), 나치안츠의 성 그레고리오(St. Gregorius Nazianzenus), 그리고 성 바실리오(St. Basilius)의 세 가지 미사전례를 말한다. 성 치릴로의 아나포라(Anaphora) 혹은 미사전문(典文, canon)은 성 마르코의 그리스어 사본과 공통되는 부분들과 함께, 성 마르코의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콥트어로 번역될 때 몇 가지 그리스어 형태가 남아 있었지만 콥트어의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성 바실리오의 전례는 일요일과 평일(平日) 연미사에 쓰여지고 성 그레고리오의 전례는 특별한 축일에, 성 치릴로의 전례는 사순절과 성탄 전야에 쓰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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콥트교회 [한] ∼敎會 [영] Coptic church

이집트인의 콥트 국민교회. 639∼640년 아라비아인 지배아래 성립,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밑에 속한다. 교회법은 위사도서간(僞使徒書簡), 고대 공의회문서, 비잔츠, 시리아 법률자료, 여러 주교의 지령에 따라 성립. 교의상 가톨릭 교회와 구별되는 점은 그리스도론, 종말론, 교황의 통치권 · 교도권상의 수위(首位)에 관한 점이다. 전례는 콥트어를 사용. 신도수 약 85만명, 콥트인 프로테스탄트 5만명, 가톨릭 귀일교회 신도 3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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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무니카시오네스 [라] Communicationes [관련] 새벽

서울 대교구 기관지. 월간 <새벽>의 전신. ⇒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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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핑 [원] Kolping, Adolf

Kolping, Adolf(1813∼1865). 독일의 신부. 쾰른 근처의 케르펜에서 출생. 목자의 아들로 태어나 하루에 12시간씩 구두 직공 일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해서 24세에 ‘마르첼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뮌헨과 본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845년 쾰른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산업도시인 엘버펠트(Elberfeld)에 부임했는데 그 곳에서 그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영향에 충격을 받고 브뢰너가 조직한 청년단체에 들어가 근로 청소년들의 교육에 힘썼다. 그는 1894년에 쾰른으로 교구를 옮겨서 앞의 것을 본뜬 직공들의 가톨릭단체를 조직하여 ‘콜핑가족’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단체의 기본 취지는 근로 청년들에게 신앙심을 심어주는 한편 같은 나이 또래의 학생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공부할 기회를 제공해 주자는 것이었다. 이 ‘콜핑가족’은 콜핑이 죽었을 때 그 규모가 400개 지부에 2만 6,000여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1964년에는 유럽과 미국 각 지역에 지부가 2,700여 개에 달하였다.

콜핑은 노동과 봉건주의에서 현대적 사회질서로 옮겨 가는 과도기의 새로운 가치를 인식하고 이러한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한 개개인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 일생을 바친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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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베 [원] Kolbe, Maximilian Maria

Kolbe, Maximilian Maria(1894∼1941). 성인. 폴란드의 사제. 폴란드 우지 부근의 마을 즌스카볼라에서 태어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죽었다. 1910년 라브프 소신학교 졸업, 루보프에 있는 꼰벤투알 성 프란치스코에 입회, 1913년 로마의 그레고리오대학 입학, 1914년 종신서원, 1915년 그레고리오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 취득, 1918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19년 신학박사 학위도 취득한 후 귀국하여 크라쿠프(Krakow)에서 교수생활, 1922년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를 창간하였다. 1930년 4월 일본 전교를 위해 나가사끼(長崎)에 도착, 1개월 후부터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일본어판을 창간하고 그 편집 발행에 종사, 1931년 일본에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을 건설하였다.

1936년 폴란드로 귀국,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 수도원장직에 있으면서 출판사업을 지휘, 1939년 잡지 <원죄 없으신 성모의 기사> 발행부수가 100만부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그와 수도원 수사들이 나치 게시타포에 체포되어 수용소에 억류당했다가 12월에 석방되었다. 1941년 2월 다시 나치 경찰에 체포되어 파비악 교도소에 투옥, 5월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체포 이유는 그가 100만부에 이르는 잡지발행자로서 폴란드 국민에게 커다란 영향과 권위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가 갇힌 감방에서 한 포로가 탈주하였다. 수용소 규칙에 따라 그 감방의 포로 10명이 아사형(餓死刑)을 당하게 되어, 지명된 사람들 중에는 처자식을 가진 프란시스코 가조니체 중사(中士)가 끼여 있었다. 콜베 신부는 수용소장에게 그 중사를 대신하여 처형을 받겠다고 청을 하여, 아사감방에서 15일간 굶주린 후 독약주사를 맞고 8월 14일에 임종하였다. 1971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콜베 신부의 뜻을 받드는 이탈리아의 꼰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은 1958년 한국에 진출, 대구, 부산, 서울 등지에 수도원과 성당을 세우고 사목활동을 하고 있으며, 특히 부산 대연동에 보육원, 경남 동래군 일광면에 음성나환자 수용소를 설치,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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