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숙 [한] 兪汗淑

유한숙(?∼1801). 순교자. 자세한 인적사항은 알 수 없으나 그는 양근(楊根) 지방의 유력한 신자였다. 1800년 4월경에 양근에서도 7명의 신자가 체포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끝까지 배교를 거부한 사람은 윤유일(尹有一)의 동생 유오(有五)와 유한숙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독실하게 천주교를 믿고 세정(世情)을 끊고 오로지 기도와 묵상으로 신심을 굳혔는데 모든 형을 달게 받아 끝내 배교치 않음으로써 1801년 4월 25일(음 3월 13일) 양근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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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교 [한] 猶太敎 [영] Judaism

1. 예비 지식 : 유태교와 유다이즘은 그 특성, 발전역사, 사회적 배경 등을 고찰할 때 결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유다이즘(ioudaismos)이라는 표현은 2마카 2:21, 8:1, 14:38, 갈라 1:13 이하에서 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유태교를 의미한다.

유태교의 기초를 다진 사람은 모세이지만, 성서에 의하면 그 기원은 아브라함에게 있고 이사악, 야곱, 요셉을 거쳐 내려 왔다. 하느님의 자비로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됨으로써 야훼의 백성이라는 신앙의 토대가 자리 잡혔고, 이 신앙을 근거로 그 전의 시대는 반성하고 그 후의 시대는 그 신앙의 현장으로 삼았다. 성조들에게 후손을 약속한 것도 이 기본신앙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창세 13:16, 15:5, 26:4 · 24, 28:14, 32:13). 또 그런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상호관계가 약속의 형태로 체험됐기 때문에 유태교는 이 세상에 하느님이 주신 계명, 가르침, 구원을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증거하려고 한다. 유태교가 하느님이 이 세상 모든 것의 종주(宗主)이고 왕이라는 것을 드러내려 하고 유다이즘이 종교, 학문,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복합성을 지니고 있는 이상, 유태교와 유다이즘은 실제 내용상으로는 구분하기가 어렵다.

유태교에서는 그 신앙의 기본 내용에 따라 이 세상이 하느님의 자비와 약속이 실제화 되고 경험되는 곳이라고 믿으나 이스라엘 땅은 하느님이 주신 약속의 땅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유태교의 또 다른 특성은 현재를 과거에 대한 생각과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조명하며 사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역사 안에 체험된 해방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리고 이 약속은 미래의 모든 시간적 제약까지 뛰어넘어 유효한 것이므로 종말론적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유태교에는 현실적 민족적 요소뿐만 아니라 천상적 보편적 요소도 처음부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역사 ① 시대 구분 : 유태교는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펴야 한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의 관계는 구약으로부터, 즉 아브라함, 이사악, 요셉, 출애급과 모세, 판관시대, 왕정 시대, 바빌론 귀양을 망라하는 시기를 전제로 유태교의 근간을 이루며 이어져 왔으나 기원전 587년부터 기원후 70년까지 유태교는 전승된 기본 신앙의 여러 발전 형태를 체험하게 되므로 이때를 엄밀한 의미에서 초기 유태교(Early Judaism)가 뿌리내린 시기로 본다. 초기 유태교 시대를 사람에 따라서는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활동할 때부터(약 기원전 450년) 탈무드(Talmud)가 완성될 때까지(약 기원후 500년), 혹은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어 있었던 시대, 즉 약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후 70년, 혹은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때부터(약 기원전 330년) 성전이 붕괴될 때까지(기원후 70년), 혹은 다니엘서가 쓰인 때부터(약 기원전 160년) 하드리안 황제 치하에서의 유태인들의 전쟁 종식까지로 본다. 초기 유다이즘 내지 유태교는 미시나(Mishnah)와 탈무드 시대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기원후 70년부터 탈무드가 완성된 6∼7세기까지를 말한다. 중세 유다이즘(Medieval Judaism) 시대는 6~7세기부터 18∼19세기까지의 유태인들의 계몽시대를 말하고 그 이후를 근대 내지 현대 유다이즘시대라고 한다.

② 시대 특성 :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스라엘 귀양에 이르는 구약 시대의 유태교 특성으로는 모세와 출애급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이 야훼를 알고 그 자비를 체험하고 미래를 향한 약속의 계약 관계를 들 수 있다. 유태교의 근간을 이루는 야훼 신앙은 야훼를 아직 모르고 있던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조들에게 있어서도 예비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야훼의 계시를 역사 순서로 정리한다면 출애급과 시나이 산에서의 하느님과의 만남이 그 시효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로써 야훼의 이스라엘에 대한 해방신으로서의 관계가 정립되고 과거 현재 미래를 선택과 약속의 관점에서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선택과 약속의 길이 십계명이었고, 따라서 이 십계명은 야훼가 해방신으로서의 자신의 모습과 힘을 드러내는 길이고 인간에게는 해방을 체험하게 하고 하느님을 알게 하는 길이었다.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고 이스라엘이 야훼의 백성이라는 기본사상은 구체적으로 해방이라는 결과를 가져왔고 또 해방을 경험하게 될 때 구체성을 띤다. 이 기본사상이 구약시대의 신관 및 인간관의 요체라 할 수 있고 지금의 유다이즘에 이르기까지 일관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십계명이 그러하듯 또 다른 종교의 기본 요소인 구약의 여러 제사, 즉 번제, 희생제, 평화제 등과 중요한 축일 즉 빠스카, 안식일, 장막절 등은 추상적 하느님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선택과 해방과 약속을 드러내는 하느님과 관계가 있다. 종교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룩함의 개념도 위와 같은 견지에서, 하느님의 해방이 기억되고 체험되고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는 축일 및 제사와 관련하여 발전되었고, 윤리에 있어서는 정의 실천을 통해 나타났다.

기원전 587~기원후 70년까지의 초기 유태교의 특징으로 사제 정치를 통한 복구경향, 종말론적 움직임, 그리고 성서공부를 들 수 있다. 복구 경향으로 말미암아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정치 및 예절의 생활 조건을 다시 일으키려 했다. 종말론적 희망은 기원전 3세기 말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서 결정적이고 보편적인 구원의 때가 임박했다고 믿게 되었다. 하씨디(열심한 사람들이라는 뜻) 또는 에세니 등은 종말적 구원에 집착해도 마카베오나 하스모네아 그룹보다 민족적 정치적 요소를 덜 강조했다. 성경과 법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복구하기는 불가능하고 미래를 파악하기도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고유 전통을 고수할 것과 성서를 깊이 연구할 것을 주창하였다. 이 연구 경향이 이스라엘의 개인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 깊이 스며들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사제 · 성전 · 종말론에 열광하는 사람들과 연관을 맺고 있던 사두가이파에 반대되는 바리사이파가 생겨났다. 이들은 기도 및 공부에 있어 이스라엘을 교육하는 위치에 있었고 성경 특히 법 공부를 중요시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신약성경에 나오는 부정적 표현만을 근거로 이들을 판단하면 안 된다.

미시나와 탈무드 시대의 유태교는 66∼73년과 132∼135년에 있었던 두 차례의 로마집정에 대한 저항으로 말미암아 박해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성전도 없었다. 초기 유태교 시대부터 있던 시나고가와 공부하는 집이 삶의 중심이 되었다. 랍비들이 민중의 지도자였고 바리사이파 영향을 받은 원칙과 규정이 유태교 전반에 나타나게 되었다. 90년 얌니아에서 열린 유태인들의 공의회(synodus)가 그들의 생활 기본을 정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산물은 미시나와 탈무드였다.

유태교의 중세기는 6∼7세기부터 8∼10세기까지로 보나 혹자에 따라서는 1492년에 스페인에서 유태인들이 쫓겨난 시대까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 시대는 탈무드 영향이 눈에 띄고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와의 논쟁이 불가피하여 고유의 종교철학이 대두되는 때다. 불행히도 중세 그리스도교의 편향성 때문에 유태교는 차별대우를 당하였다.

근대 유태교는 네 가지 경향을 띄운 유다이즘의 영향을 받고 있다. ㉮ 성서와 탈무드적 전승을 고수하려는 정통경향 ㉯ 계몽과 계방을 주장하는 경향 ㉰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의 옛땅을 발판으로 삼으려는 경향 등이다.

3. 종교적 특성 : ① 유태교는 거의 유태인들의 전유물 같이 되어서, 한 민족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성을 띤 종교라고 고집해도 세계종교라 하기에는 사실상의 무리가 따른다. 그것은 모세교도 아니고 법의 종교도 아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위해 역사 안에 계심을 가르치고, 법뿐만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희망, 신비주의도 내포하고 있는 종교이며, ‘이성의 종교’(Herman Cohen, Moses Mendelssohn)라고 할 수 있다. 법이 강조되기 때문에 법치종교라고 한다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법은 하느님을 알게 하고, 그 자비와 선택, 그리고 해방과 약속을 경험케 하는, 인간 전체에 관한 계시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결국 신정(神政)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 종교는 유태인들의 역사와 연관된 일신론적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② 전거 : 유태교의 근본은 ‘토라’(Torah, 法)에 있다. 이 ‘토라’는 단순히 법이 아니고 인간의 삶의 모든 것을 망라하는 가르침이다. ‘토라’가 그들에게는 24권으로 되어 잇는 구약이다. 구전의 ‘토라’도 서전(書傳)과 똑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왔다. 이것은 특히 약 220년에 Jehuda Hanasi가 집성한 미시나(Mishnah)와 6∼7세기에 완성한 바빌론 탈무드에서 볼 수 있다. ‘미시나’의 자의는 ‘전통’, ‘반복’이라 할 수 있는데 구약과 다른 전통에 대한 공식 주해서이다. 그 내용에 694조의 명령과 금기가 있는데 미시나 자체가 또 주해될 필요가 있었다. 예루살렘 또는 팔레스타인에서 한 주해를 팔레스타인 탈무드(또는 예루살렘 탈무드라고도 함, 대개 400년에 완성됨)라 하고 바빌론에서 주해된 것을 바빌론 탈무드(약500∼550년 바빌론에서 됨)라고 한다. 이 주해를 한 사람들을 amoraim(말하는 사람들, 강연자)이라 일컫는 유태인의 지혜로운 학자들이다. 이들이 예루살렘이나 바빌론에서 한 주해들은 각각 다른 명칭으로 불리고 다른 시대에 완성됐지만 그것을 gemara(완성)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미시나와 합하여 탈무드의 결정적 집성을 하였다. 탈무드는 결국 2개가 있는 셈이고 미시나와 게마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중요한 문전으로 미드라심(midrashim, 찾아냄)과 시나고가에서 하던 기도문이 있다. 미드라심은 설교적인 것(haggada)과 법률적인 것(halakha)으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법률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 둘 다 성경 본문에 대한 반성을 다루고 있다. 실천을 위해서는 각 시대에 따라 해당되는 성경 본문의 숨겨진 의미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이런 문전이 생겼다. 기도서로는 1세기 말경에 집성된 ‘18 기도’가 유명하다.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고통받는 유태인 공동체의 희망과 기도가 그 내용을 이루고 있다. 열심한 유태인은 하루 세 번씩 에루살렘을 향하여 이 기도를 받친다.

쓰여진 그리고 입으로 전해진 두 ‘토라’야말로 유태교의 특징이다.

③ 교리와 실천 : 그리스도교에서 교조(Dogma)라고 일컫는 것과 같은 교리는 유태교에 없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유태인들의 실제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기준, 또는 행동을 조직화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믿을 교리를 조항으로 만들기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주안점을 둔다. 원죄 개념도 없다. 그 대신 선에 대한 개념과 악의 경향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내세에 대한 교리도 그리스도교에서 만큼 강조되지는 않는다. 유태교를 열심히 신봉하는 자는 하느님의 요구와 약속에 자신을 밭기는 자이고 따라서 이스라엘의 특권과 희망에 연대감을 갖고 있는 자이다. 하느님과 전통과 공동체에 충실한 것을 알게 하는 의적 표지는 할손례라고 할 수 있다(창세 17장, 신명 10:16, 30:6, 예레 4:4, 에제 44:7-9 참고). 그외 안식일과 여러 축일의 준수, 기도 생활, 종말 구원에 대한 희망 등은 하느님과의 이스라엘간의 계약에 충실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들이 지키는 축일로는 안식일(토요일) 외에 오순절, 빠스카, 장막절, 신년 속죄일, 에스텔 왕후 덕분으로 페르시아로부터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Purim이라는 축일, 기원전 165전에 유다스 마카메우스가 재건된 성전을 다시 축성한 것을 기념하는 성전 봉헌 축일(Hanukha) 등이다. 속죄일에는 재를 지켜가며 기도를 드린다. 빠스카는 이집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억하고 장막절에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던 것을 기념하고 오순절을 빠스카 후 50일후에 오는 추수감사의 의미이다.

유대교의 윤리는 십계명이 그 근간을 이루고 있고(출애 20장, 신명 5장 참고) 신명기 5-26장도 그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특히 신명기 6:5에 나오는 하느님을 극진히 섬겨야 한다는 계명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계명 때문에 다른 사람도 지극히 사랑해야 하고 특히 고아 · 과부 · 외국인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윤리를 세우게 되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스라엘을 구하셨으며 인간을 당신 모상으로 만드시고 역사의 주인이라는 가르침과 그 외의 전통적 가르침을 유명한 유태인 신학자 마이모니데스(M. Maimonides, 1135~1204)는 13개 조항으로 정리하였다. ㉮ 하느님은 천지를 조성하고 세상의 섭리주다. ㉯ 그는 유일하다. ㉰ 그는 영적존재로 어떤 모양으로도 표현될 수 없다. ㉱ 그는 영원하다. ㉲ 그에게만 우리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 이스라엘 예언자의 모든 말은 진리다. ㉴ 모세는 모든 예언자 중 제일 위대하다. ㉵ 유태인이 갖고 있는 법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주신 것이다. ㉶ 아무도 이 법을 대차하거나 수정할 수 없다. ㉷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생각을 아신다. ㉸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상을 주시고 범하는 자는 벌하신다. ㉹ 예언자가 말한 메시아를 보내신다. ㉺ 죽은 자에게 영생을 줄 것이다.

[참고문헌] Hermann L. Strack, Einleitung in Talmud und Midrash, Munchen 1976 / Cl. Thoma, Christliche Theologie des Judentums, Eichstalt 1978 / M.L. Lagrange, Le Judaisme Asant Jesus-Christ, Paris 1931 / A. Vincent, Le Judaisme, Paris 1932 / D. Daube, The N. T. and Rabbinic Judaisme, London 1956 / Ch. Guignebert, The Jewish World in the time of Jesus, New York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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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길 [한] 劉進吉

유진길(1791∼1839).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일명 용심. 성인 유대철의 아버지. 서울의 유명한 역관(譯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공부했고 특히 종교적 철학적 문제인 세상만물의 기원과 종말에 대해 명확히 알고자 10여년 동안 불교와 도교를 깊이 연구했다. 그러나 ‘만권의 책과 동서고금의 학문이 가슴에 가득한 사람’이라는 세인(世人)의 칭찬과는 달리 오히려 진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였다. 그러던 중 1823년 우연히 ≪천주실의≫의 일부분을 읽고는 사방에 수소문한 끝에 한 교우를 만나게 되어 교리를 터득한 후 곧 입교했고, 이때 성직자 영입운동을 전개하던 정하상(丁夏祥)을 만나 역관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 교회와의 연락 및 성직자 영입 운동을 참여하게 되었다. 1824년 동지사(冬至使)의 수석(首席) 역관으로 북경(北京)에 가서 성세성사를 받고 그 후로 북경교회와의 연락을 담당, 1826년 교황에게 성직자 파견을 간청하는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하는 등 전후 8차에 걸쳐 북경을 왕래하며 조선 교회의 상황을 북경교회에 알렸고,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1833년에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 1836년에 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샤스탕(Chastan, 鄭) 신부와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각각 입국하게 되었다. 그 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박해 초에는 정3품 당상역관(堂上譯官)이라는 높은 지위와 대왕대비의 오빠인 황산(黃山)과의 친분으로 인해 체포되지 않았으나 곧 황산이 죽자 7월 17일 체포되었다. 포청에서 서양신부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된 관헌들에게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으나 끝까지 함구하여 신앙을 지켰고, 서양신부들이 체포되자 함께 의금부로 이송되어 그 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9월 22일 서고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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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성 [한] 柳重誠

유중성(?∼1802). 순교자. 세례명 마태오. 전라도 전주(全州) 출신. 유항검(柳恒儉)의 조카. 어려서 부친을 잃은 그는 홀어머니와 함께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을 지켰다. 1801년 대박해가 일어나 유씨 일가(一家)가 모두 체포되어 두 삼촌 유항검과 유관검(柳觀儉)은 1801년 모두 참수되었고, 그는 사촌 형수 이순이(李順伊, 루갈다), 숙모 이육희(李六喜), 신희(申喜)와 함께 1802년 12월 28일 전주 감영에서 순교하였는데, 그의 나이 15세나 18세 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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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률 [한] 劉正律

유정률(1837~186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베드로. 평남 대동군 율리면 답현리(畓峴里, 일명 논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된 후로 짚신을 엮어 팔며 어렵게 생활했고, 1864년 경 천주교를 알게 되자 즉시 상경하여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성세성사를 받았다. 성세성사를 받은 후 고향에 돌아와 지난날의 방탕하고 난폭했던 생활을 반성하고 속죄하기 위해 신꼬리를 고편(苦鞭) 삼아 자신의 몸을 심하게 매질하며 극기와 인내의 신앙생활을 했으며 그렇게 변화된 모습에 그의 아내도 큰 감화를 받아 입교하게 되었다. 그 뒤 1866년 2월 16일(음 1월 2일) 친척들에게 세배를 마치고 “안녕히들 계십시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라고 자신의 순교를 예감한 듯한 작별 인사를 했는데, 과연 그날 저녁 이웃 마을인 고둔리공소에서 교우들과 모여 성서를 낭독하던 중, 집주인 정 빈첸시오 회장, 우세영(禹世英) 등 5명의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평양 감영으로 끌려갔다. 평양 감영에서 이미 체포된 100여명의 교우들과 함께 문초를 받았고, 혹형과 고문으로 대부분의 교우들이 배교함에도 불구하고 홀로 신앙을 지켰다. 이에 노한 감사 정지용(鄭芝溶)이 배교한 교우 100여명으로 하여금 한 사람이 세 대씩 때리게 하여 결국 체포된 다음날인 2월 17일 300여대의 매를 맞고 장하치명(杖下致命)하였다. 유해는 대동강에 던져졌으나 그의 아내가 거두어 논재에 안장하였다.

이러한 유정률의 성인적 순교 사실은 1876년 평양 감사 이재청(李在淸)이 전임 감사 정지용의 천주교 탄압을 치하하기 위해 부벽루 영명사에 세운 ‘척사기적비’(斥邪紀蹟碑)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 뒤 유정률은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시복(諡福)되었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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