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뫼 [한] 松山

김대건 성인의 탄생지.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松山里)에 위치한 솔뫼는 소나무숲이 청청하다고 하여 솔뫼(松山)라 불린다. 이곳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金震厚)가 50세에 영세한 이후 교구마을로 되었다. 면천군수로 있을 당시 김진후는 ‘내포지방의 사도’라고 불리는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에게서 복음을 전해들은 뒤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신해 신유 양 박해 때 체포, 10여년을 옥살이하다 해미(海美)감옥에서 옥사하였다. 김진후의 셋째 아들 김한현(金漢鉉, 일명 宗漢)이 순교했고(1816년), 1839년에는 다시 둘째아들 김택현의 아들 김제준(金濟俊, 이냐시오)이 순교, 1846년에는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김대건의 가문은 32년 사이에 4대가 순교하는 영광의 가문이 되었고, 솔뫼는 ‘신앙의 못자리’로 불리게 된다. 19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맞아 그의 후손들이 김대건 신부의 집터와 뒷동산 4,600평을 매입했고, 1976년 대전교구는 솔뫼 성역화 추진위원회를 결성했으며, 1977년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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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섭 [한] 宋京燮

宋京燮(1916~?). 세례명은 루가, 전남 목포(木浦) 출생. 목포상업학교(木浦商業學敎)를 졸업하고 상경(上京), 만념(萬念) 미싱상회를 설립, 경영하면서 교회사업에 많은 재정적 후원을 하였고, 8.15광복 뒤 명동본당 청년연합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6.25전쟁 중인 1950년 7월 16일 북한 공산군에게 납북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서울 대교구 소속 송진(宋眞, 발렌티노) 신부가 그의 독자(獨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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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덕망 [한] 宋德望 [관련] 샤르즈뵈프

샤르즈뵈프(Chargeboeuf)신부의 한국명. ⇒ 샤르즈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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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림본당 [한] 松林本堂

소재지는 황해도 송림시 산서리(黃海道 松林市 山西里). 1902년 황주(黃州)본당이 설정되면서 송림에 공소가 개설되어 황주본당의 초대 신부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신부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그 이듬해 송림의 교세는 영세신자 26명, 예비신자 20명이었다. 1904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이곳에 포구(浦口)를 열고 겸이포(兼二浦)라 칭했으며, 그 해에 노일전쟁(露日戰爭)이 일어나자 부산(釜山)을 거쳐 육로로 압록강(鴨綠江)을 향해 북상하는 일본군의 군수물자 양륙항(揚陸港)이 되었다. 따라서 일본군 병참부대와 한국인 노무자들이 많이 상주(常駐)하게 되었는데, 그 노무자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도 있었을 것이다. 1915년 황주본당이 폐지되고, 1916년 사리원(沙里院)본당이 창설되자, 송림지방은 사리원 공소의 관할이 되었다. 1919년말 신자수는 100명을 넘게 되어 비로소 공소 강당을 마련하고, 주일학교도 개설하였다.

1939년 7월 송림지방은 오랜 공소시대를 청산하고 서울 교구장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에 의해 본당으로 승격, 초대 본당주임으로 강원도 양양(襄陽)본당을 맡고 있던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신부를 맞게 되었다. 당시의 관할공소는, 황주원동(龜洛面 仁訓里 院洞), 던모루, 능리, 적은동(三田面 外松里 積銀洞), 포북리(靑童面 浦北里), 금광리(靑水面 金光里), 황토개(黑橋面 永深里 黃土峴), 청수면(淸水面), 빙량리(黑橋面 氷梁里) 등 10개소였다. 유재옥 신부의 부임 직후인 그 해 8월에 산서리(山西里)에 확보해 둔 1만여 평의 부지에 성당, 사제관, 식청을 새로 짓는 큰 역사가 시작되었다. 착공 1년만에 건평 83평의 벽돌성당과 21평의 사제관, 19평의 식청이 완공되었으며, 총공사비 2만 6,000여원을 서울교구장 라리보 주교와 황해도 감목대리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의 지원 외에 본당과 공소의 모든 교우들이 가구별로 낸 성금으로 충당되었다. 준공 축성식은 1940년 12월 성 프란치스코 축일에 라리보 주교 집전으로 성대히 거행되고, 본당 주보는 ‘예수 성심’으로 명명되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眞珠灣)을 기습하여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던 날, 유재옥 신부는 겸이포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유는 평양교구(平壤敎區)의 메리놀 외방선교회 미국인 신부들과 연락해서 군수공장으로 지정된 겸이포 제철소의 기밀을 탐지하려 했다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유 신부는 이듬해 4월 18일 138일만에 무죄 석방되었다. 8.15광복 후 북한 당국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더니, 1950년 6월 24일, 유 신부는 정치보위부에 납치, 수감되었다가 1주일 후 해주(海州)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 해 10월 4일 유 신부는 수감자들과 함께 동해주 해변으로 끌려가 자신들이 생매장 당할 구덩이를 팠고, 이튿날 새벽에 그 구덩이에 생매장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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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마리아 [한] 宋~

宋~(?~1801). 순교자. 이름은 미상(未詳). 순조(純祖)의 서백부(庶伯父) 은언군(恩彦君) 이인(李-)의 처. 여회장 강완숙(姜完淑)의 전교로 며느리 신(申) 마리아와 함께 입교하였다. 남편 이인이 강화에 유배 중이었기 때문에 폐궁(廢宮)에 기거하면서 자주 주문모(周文謨) 신부와 접촉했고,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는 주문모 신부를 숨겨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가 자수한 후, 주문모 신부를 숨겨준 사실과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이 탄로나 4월 19일(음 3월 16일) 며느리와 함께 사약(死藥)을 받고 순교하였다. 강화에 유배 중이던 이인도 천주교와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사사(賜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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