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ela Merici(1474∼1540). 성녀. 축일 1월 27일. 이탈리아의 프란치스코회 회원. 우르술라동정회 창설자. 베네치아공화국의 데즌차노(Desenzano)에서 태어나 브레샤(Brescia)에서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 프란치스코회 제 3회에 소속되어 수년간 소녀교육과 여환자 간호에 헌신하고 있다가, 1524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팔레스타인 성지를 순례하면서 감동을 느껴, 1535년 팔레스타인에 우르술라동정회를 창립, 1537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 최초의 여자교육수도회였따. 사망 직후부터 브레샤 주민들에 의해 성녀로 추앙받았고, 1768년 교황 글레멘스 13세에 의해 시복(諡福), 1807년 비오 7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안주본당 [한] 安州本堂
1930년 평남 안주군 안주읍 북문리(平南 安州郡 安州邑 北門里)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안주지역은 1860년대 초 서울에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에게 영세하고 귀향한 김자당(金子唐, 안토니오)에 의해 최초로 복음이 전파되었다.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김자당을 비롯한 대분의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천주교의 불모지대가 되었으나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된 후, 1927년 함경남도 나남(羅南)에서 안주 경찰서로 전근해 온 경부(警部, 지금의 總警) 이인근(李仁根, 다테오)과 1928년 영유 본당에서 파견된 전교회장 박정결(朴挺傑, 요셉), 곽 안나 등에 의해 다시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 후 교세가 신장함에 따라 1930년 9월 30일 본당으로 창설되어 폐쇄되기까지 평남 안주군 · 박천군(博川郡) · 덕천군(德川郡) · 개천군(价川郡) · 창성군(昌城郡) 일대를 관할하며 4개의 공소를 두었다. 초대 주임신부로는 바론 신부가 부임하여 1937년까지 사목하면서 성당과 사제관을 건축하고 성모학원(聖母學院)과 성모병원(聖母病院)을 개설하는 등 본당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고, 캐롤(Carroll, 安) 신부가 2대 주임신부로, 플런킷(Plunkett, 朴) 신부가 3대 주임신부로 각각 사목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반발로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회 성직자들이 일제(日帝)에 체포되자 1942년 2월부터 1944년 12월까지는 서울교구에서 파견된 신부들이, 1944년 12월부터 1948년 9월까지는 덕원과 연길교구에서 파견된 베네딕토회 신부들이 사목을 담당했고, 1948년 9월 베네딕토회 신부들마저 북한 공산정권의 탄압으로 철수하자 이경호(李京鎬, 안셀모) 신부가 8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950년 6월 24일 6.25동란을 하루 앞두고 이경호 신부가 북한 정치보위부원에게 체포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안주본당의 신심단체로는 부인회, 15세 이상의 미혼녀들로 구성된 미사회, 주일학교회, 가톨릭 운동연맹 지회 및 분회, 교회운영 협의체인 자치위원회 등이 있었고, 본당운영의 사업체로는 1934년 개설된 성모학원, 1935년 개원된 성모병원이 있었다. 그리고 1937년의 교세는 총 교우수 816명이었다.
안중근 [한] 安重根
안중근(1879∼1910). 의사(義士). 본관(本貫)은 순흥(順興). 아명(兒名)은 응칠(應七). 세례명은 토마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진사(進士) 안태훈(安泰勳)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우며 사격 · 승마 · 궁술 등 문무(文武)를 고루 익혔다. 1894년 결혼, 2남 1녀를 두고 1895년 영세 입교한 후, 아버지와 함께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를 도와 황해도 일대를 전교하는 한편, 동학혁명 후 화적떼로 변한 동학패잔병과 싸워 명성을 떨쳤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민족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을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고 1907년 진남포(鎭南浦)에 삼흥학교(三興學校),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운 뒤, 1908년 만주를 거쳐 연해주(沿海州)로 망명, 대한의군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군사령(俄領地區軍司令)으로 의병을 이끌고 국내에 들어와 함북 경흥(慶興)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1909년 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曺道先), 유동하(劉東夏) 등과 함께, 러시아 장상(藏相) 코코프체프(Kokovtsev)와의 회담차 하얼삔(哈爾賓)에 오는 이또오(伊藤博文)를 살해하기로 결의, 9월 26일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하얼삔 역에 잠입하여 이또오를 사살하고 하얼삔 총영사 가와까미(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까(田中太郞) 등에 중상을 입히고 체포되었다.
재판 중 자신은 독립전쟁을 수행하다가 체포된 포로일 뿐이며 자신의 행위는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대의를 위한 정당한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1915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후 영세신부인 빌렘신부에게 모든 성사(聖事)를 받고 가족들에게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과 장남 분도를 성직자로 키워 줄 것을 당부하는 서신을 남긴 뒤 1910년 3월 26일 성화(聖畵)를 몸에 지닌 채 총살되어 순국하였다. 서예(書藝)에 뛰어나 재옥 중 많은 유필(遺筆)을 남겼고 또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정확히 분석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과 자신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安應七歷史, 1979년 발견) 등을 저술하였는데 ≪안응칠 역사≫에서는 ‘신앙인으로서의 안중근’이라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1962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고 1979년 9월 2일 안중근 의사 탄생 100주년 기념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성대히 거행되기도 하였다.
안치룡 [한] 安致龍
안치룡(?∼1815).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1815년 경상도 청송(靑松)의 노래산(老萊山)에서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30여명의 마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경주진영(慶州鎭營)에서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이겨낸 후 대구감영(大邱監營)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옥사(獄死)하였다.
안태훈 [한] 安泰勳
안태훈(?∼1905). 진사(進士). 본관(本貫)은 순흥(順興). 세례명은 베드로. 의사(義士) 안중근(安重根)의 부(父). 진해현감(鎭海縣監)을 지낸 안인수(安仁壽)의 6남 3녀 중 3남으로 출생,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고 재주가 뛰어나 1874년 개화파(開化波)의 박영효(朴泳孝)에 의해 외국유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하자 가족들을 이끌고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信川郡 淸溪洞)으로 이주, 아내 조씨와의 사이에 중근, 정근(定根), 공근(恭根) 등 3남 1녀를 두었다. 그 뒤 친분이 있었던 한 프랑스 선교사의 권유로 입교하여 전 가족을 권면, 입교시키는 한편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를 도와 황해도 지방의 교세확장에 헌신 하였다. 1905년 장남 중근을 상해(上海)로 망명시키고 그해 12월 신병으로 사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