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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결론  19세기 조선왕조는 정치․경제․ 사회․사상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서 최제우는 민중을 구제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濟宣이라는 이름을 어리석은 백성을 구제한다는 의미의 濟愚로 바꿨다. 그는 이런 생각 속에서 20대에 팔도를 돌아다니며 그 방법을 생각해 보고, 민중의 생활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소득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860년 4월 5일 신비한 체험을 하고, ‘한울님’께 도를 얻어 ‘東學’을 창도했다.  수운의 신 즉 ‘한울님’은 인간의 화복과 자연계를 다스리는 全知全能하신 초월적 존재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따로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 인간이 나면서부터 모시고 있는 내재적인 존재다.  이런 ‘한울님’을 잘 모시기 위해 기본이 되는 마음 자세는 誠․敬․信의 마음이며, 그 방법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三七字呪文이다.  인간은 주문을 통해 ‘한울님’을 섬길 수 있고 ‘한울님’을 알아모실 수 있다. 이러한 전제 조건으로 誠敬의 마음이 전제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呪文을 외우고 하느님을 섬길 때 인간은 天命과 天理를 알아들어 道成德立하여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 그 방법 또한 유가처럼 오랜 시간의 학습을 통해 가능하고 일부 계층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誠․敬․信의 마음으로 道를 깨닫고, ‘한울님’을 섬길 때 聖人․君子가 되는 것이다. 이런 東學의 理想的 人間觀은 유교처럼 폐쇄적인 人間觀이 아니라, 개방적이며 보편적인 人間觀이다.  최제우의 人間觀을 최시형은 실생활에 구체화했다. 그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胞胎說을 주장하면서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주장해서 汎神論으로 빠졌다. 손병희는 人乃天의 원리로 인간 본성을 규명하고 인본주의의 사회적 실천에 힘썼다. 그는 性心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질을 정의하면서 인간의 무궁함을 설명했고, ‘侍’를 覺天으로 풀이하여 ‘한울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한울님’이 어떤 분인지 먼저 깨닫고 자신이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인간 본질을 깨닫게 했다.  東學의 人間觀은 근대 이후 인간을 존중하고, 나가 만물을 중요시한다는 면에서 사상적 발전을 가져왔으나, 인간을 너무 중요시하여 신적 위치로 격상시키면서, 정작 신의 위치는 격하시켰다. 人乃天思想은 無神論的 성격과 汎神論的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이런 東學의 사상은 근대적 人間觀을 형성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수운의 侍天主思想은 ‘한울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東學의 입장은 유교나, 그리스도교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이 하라’는 事人如天思想은 평등사상에서 한 걸음 나아가 사람을 恭敬하라는 주장이다.  이런 東學의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愛主愛人思想과 비슷하다.  그러나 손병희가 侍天主思想을 발전시킨 人乃天思想은 근대적 人間觀형성에 도움은 되었으나 無神論과 汎神論的 문제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이 곧 하늘이라면 인간과 하늘은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하늘을 섬길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타인에게 봉사와 공경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하늘인데 굳이 하늘을 섬길 필요가 없고, 내가 중요한데 타인에게 봉사와 공경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잘못 해석하면 극도의 이기주의를 낳을 수 있다.  결국 손병희는 최제우와 최시형의 사상을 잇는 것 같으면서도, 모순된 교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Imago Dei’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Imago Dei란 하느님께서 인간은 자기의 형상대로 人格的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상대자로서 창조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피조물로서 하느님을 닮은 것이지 똑같은 존재는 아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하느님과의 거리감을 인식하며, 모상의 원천인 하느님과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의 모상인 구체적인 인간은 하느님을 대표하는 존재다.  이렇게 인간이 하느님을 대표하기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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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과 현대인 상

제3절 ‘원본(原本)’과 ‘현대인상(現代人像)’ 서론 현대는 과학의 최첨단을 일구어 나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사는 오늘날에 아직도 거리마다 비합리적이고도 원시․기복적인 굿이 성행하고 있음을 또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절에서는 현상학적 입장에서 原本思考가 현대인의 心性을 어떻게 이끌어 가고 있는지에 대해 巫의 원본과 現代人像을 비교해서 그 원인을 찾아보고자 한다.  여기서 제시하는 現代人像이란, 현대인의 心性에 기반을 둔 人間像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우선 밝혀야 할 것은 현대의 개념과 다음으로 현대인의 개념을 규정하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의 현대의 개념 기준은 역사적 시간에 바탕을 둔 고대와 현대의 개념도 아니고, 단순히 문명에 기준을 둔 원시와 현대의 의미가 아니고, 그 이전에 인간이 역사와 문명을 인간의 것으로 만들게 된 결정적인 원인과 그 근원(根源)에 기준을 두고자 한다.  본론 인간은 원시 역사에서 볼 때 자연과 未分化의 상태에 있었다. 즉 인간의 心性이 자연적 상황 속에 자연 상태 그대로 있기를 원해 자연에 맡겨진 상태다. 神을 믿고 神의 의사를 거역하지 못하는 인간의 心性이 주어진 자연적 상황 그대로 자연에 순종하는 상태의 未分性이다(표1-A). 차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간은 자연을 分化된 상대적 개체임을 깨닫고 자연으로부터 오는 인간 존재의 저해 요소를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써서 道具를 만들어 내게 된다(표1-B). 예를 들어 농사에 필요한 도구들, 자연의 공간과 시간을 인위적으로 단축시키려는 교통수단(자동차, 비행기 등), 그리고 각종 기계 등의 도구들이 오늘날 인간들의 문명 척도가 되었다. 인간은 이것을 자연의 利用이나 活用이라 하여 표1-A의 未分的 心性의 自然中心에서 표1-B의 人間中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인간이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分化된 독립적 개체임을 인식하고 인간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 놓은 사건을 인간 쪽에서 존재의 지속 측정 단위 개념인 시간을 설정하여 이 단위 기준으로 측정하고 있는 것을 역사적 시간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자연과 분화된 인간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인간 안에서 한 번 더 분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표1-C에서 보듯이 B의 M에서 C의 a로 분열이 생기고, 여기서 다시 C의 b와 같이 M M M M 로 각기 개체분화를 일으켜 질서있게 횡적 수평선상에 일직선으로 위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分化된 개체가 횡적 수평선상에서 規格化하여 연계적 유대성을 가져야 하는 것은 분화된 개체 M M M M 가 각기 自我中心의 인력(引力)에 의해 이 分化된 개체들을 자기만의 자아로 흡수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 引力을 견제하기 위해서, 또 개체 지속을 위해서 개체 상호간에 지켜야 할 인위적 개체분화질서(人爲的 個體分化秩序)인 것이다. 그래서 미분적 순환지속(未分的 循環持續)의 영원한 자연질서와는 별도로 인간끼리 서로 개체로 分化되어 그 分化된 개체 인간이 지속되기 위해, 수평적이고 규격화해야 하는 인위적 개체분화질서를 만들어 놓고 인간이 그 속에서 인위적 질서에 스스로 얽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자연을 언젠가는 정복해야 할 상대적 개체로 보아 그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 인위적 결과로 얻어지는 경험, 이 경험을 토대로 한 論理, 이것에 기초를 둔 과학과 합리성에 매달려 文名化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이 스스로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分化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연을 상대적 개체로 보면서 자연질서와는 별도로 인위적 경험과 이론에 기초를 둔 합리성 위주의 인위적 상황을 ‘現代’라는 의미로 보고, 이런 인위적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을 ‘現代人’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현대는 인위적 경험과 이론․과학․합리성․문명화의 획일적 질서 쪽에만 서 있기를 강요하는 인위적 상황의 총화(總和)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 발전 단계상 인간은 상호 완전한 수평적 분화의 상황(인위적 상황) 속에서 규격화, 합리화된 질서 속에서만 생활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心性은 그렇게 획일적으로 규격화되지 않는다 사실이다. 합리성에 바탕을 둔 현대의 이상적 질서가 획일적으로 규격화시키려는 규범을 만들어 인간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그것은 또 강제성을 띤 法으로 발전해 인간을 스스로 구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현대사회에 제반 법규가 있고, 이것을 감독하고 집행하는 경찰과 법관이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으로 획일화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표C-b와 같이 인간이 합리적으로 획일화해야 한다는 것은 현대의 인위적 상황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이상적 질서에 불과한 것이고 이런 현대 상황속에 살면서도 인간이 그 이상적 질서대로 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이 실제로 직면한 현실 – 획일적이고 규격화하기를 강요하는 인위적 질서를 거부하는 인간의 심성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心性은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 양자를 함께 갖고 있으며, 이 양자 중에서 어디에 비중을 더 두느냐 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유동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의 표가 필요하다. 이 표는 인간의 心性이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分化되어 가면서도 다시 자연으로 향하는 과정의 양면이 종합된 표이다.  표2-D의 M 상단 화살표 N→C 방향은 자연적 상황과 인간의 分化 및 그 행위이고, M 하단 화살표 C→N 방향은 인간이 자연적 상황으로 돌아가는 心性的 欲求여서 인간 M은 N과 C의 중간에 위치하여 인간은 N과 C의 양면적 유동성을 갖고 있다. 이렇게 인간의 心性은 자연적 상황과 인위적 상황 양자를 함께 소유하려는 욕구가 있으면서 상황에 따라 편리한대로 이 양자 중의 비중이 바뀔 수 있는 유동성을 보이고 있다. 표2-D의 N→C 방향 즉, 인위적 상황의 욕구는 도구의 사용과 도구의 발달로 인해 자연을 상대적 개체로 보는 인간중심의 인위적인 상황으로서, 인간 상호간의 분쟁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인위적 질서를 요구하는 제반 법규가 생겨나고 이것을 시행 감독하기 위한 경찰․법원 등의 사법기구가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 심성의 또 다른 한 면은 합리성에 기초를 둔 인위적 질서를 거부하여 본래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상황을 원하는 심성도 겸하게 된다. 인간 서로가 균형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인위적인 질서를 요구한다는 그 자체가 인간이 그렇게 균형 있게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인 동시에, 경찰과 법원 등의 사법기구가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심성 자체가 자연적인 상태로 있기를 원해 필요에 따라서는 自我中心의 未分性으로 인해서 인간 상호간에 충돌과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인위적 상황은 보다 더 기계적으로 문명화하기를 바라면서도 그만큼 그것과는 반대인 자연의 보호를 갈망하게 되고, 이런 양면적 상황 속에 있는 현대인의 심성은 인위적 상황을 바라면서도 그 인위적 상황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그 반대편의 자연적 상황을 갈망하게 된다(예: 일(인위적 상황)과 휴식(자연적인 상황), 50分수업에 10分간 휴식, 방학, 회사와 직장, 군대 등에서 일하는 시간과 휴식시간의 분리 등) 인위적 상황의 현대 사회는 학교․사회․공장․군대가 필요하고 감옥도 필요하여, 그 인위적 질서는 계속 강화되어야 하고, 또 그래야 사회가 유지될 수 있어서 이런 것들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이 현대 사회 속에 들어 있는 인간은 그 인위적 질서의 속박만큼 그렇게 그 인위적인 것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인 것의 상태가 되어 자유로워지기를 욕구한다.  이렇게 현대인의 심성은 순환(循環)적 현상으로 보이는데, 이런 순환적 현상은 인간이 인위적 질서에 묶여 있게 되면 여기서 탈출하여 그 인위적 질서가 가해지기 이전, 원래 있었던 그대로의 자연적인 상태로 되어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것으로, 자유롭게 되기 위해 편리한 대로 자연적 상황에 비중을 두는 유동적 심성이라 할 수 있다. 반대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영원한 자연질서와는 별도라 스스로 생각하는 인위적 상황 속에서 인위적인 상황에 비중을 두면서도 필요에 따라 자연적 상황을 또 그 인위적인 것의 비중만큼 원하는 심성, 그래서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을 동시에 갖으려는 양면적 유동성의 순환적 심성에 기반을 둔 현대인의 심성, 이것을 現代人像으로 본다.  이렇게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함께 갖으려는 現代人像의 양면적 유동성 자체가 이 양자를 엄격히 분리시키지 못하는 未分性이며, 자연적 상황에서 인위적 상황으로, 여기서 다시 자연적 상황으로 돌아가려는 순환적 현상이 이 양자를 각기 分化된 별개의 것으로 보지 않는 ‘카오스’적 未分性에 기반을 둔 순환성이라 생각된다. 이 외에도 합리적이어야 하는 현대의 인위적 상황에서는 인간이 마약을 사용해서는 안되지만 그 반대로 합리적이어야 하는 사회일수록 진한 마약을 통해 현실계의 질서를 초월해 환각(幻覺)의 세계를 체험하려는 경향이 높아간다.  이렇게 복잡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카오스’적 未分性의 희열(喜悅) 때문에 사람들은 마약을 사용하고 술도 마시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인위적 방편인 마약이안 술을 통해서라도 인위적 상황의 현실을 초월해 ‘카오스’적 未分性에 도달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속박을 거부하고 영원히 자유로운 상태로 있기를 원하는 心性은 현대인 뿐만 아니고 자연적 상황 속에 살고 있는 민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욕구는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존재의 영구지속욕구(永久持續欲求)로 나타난다.  결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여야 하는 현대의 인위적 상황 속에 있는 현대인은 그 인위적 상황 그대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서 그 인위적 상황이 요구하는 질서 속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면서도 현대인의 심성은 인위적 상황에서 벗어나 그 인위적 상황 이전에 원래 있었던 자연적인 것의 상태로 영원히 자유롭게 있기를 원한다. 또한 인위적 상황의 현실적 시간 속에 있지 않는 시간 밖의 영원을 생각하며, 그렇게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현대인의 心性은 ‘코스모스’ 의 현실을 초월한 것이 된다. 이렇게 ‘코스모스’의 현실을 초월하려는 현대인의 심성이 인위적 상황과 상반되는 자연적 상황으로 바뀌어 순환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은 이 양자를 ‘코스모스’ 밖의 ‘카오스’쪽에서 미분적 동일 근원으로 보는 ‘아키패턴’의 思考 延長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이와 같은 ‘原本’思考가 현대인의 심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인위적 상황을 원하면서도 자연적 상황을 함께 갖으려는 양면적 未分性이 현대인의 심성 속에 未分化 상태로 있게 되어 現代人像이 양면적 未分化 상태로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아키패턴’의 思考가 연장되는 현대인의 이런 양면적 未分性의 心性으로 인해 ‘카오스’쪽에서 존재를 영원한 것으로 보고 그렇게 영원히 만들려는 巫俗의 굿이 합리적이어야 하는 인위적 상황의 현대 도시 – 서울․부산․대구 등 대도시 속에 사는 현대인들의 생활 속에 파고 드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현대인의 心性이 인위적 상황과 자연적 상황이 分化되지 않은 양면적이고 유동적인 미분성으로 인해 이런 현대인의 心性 속에 있는 미분성의 ‘原本’思考와 巫俗의 ‘原本’思考가 일치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인위적 상황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 巫俗의 굿에 참여하게 되면 현대인의 心性은 이미 그 인위적 상황의 것으로부터 이탈하여 무당을 믿고 무당과 함께 미분성의 ‘原本’思考 쪽으로 돌아가게 된다. 인위적 상황의 편리한 점을 좇아 현대 도시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巫俗을 비롯한 불교나 다른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현대인의 心性이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분화하지 못한 미분성의 ‘原本’思考를 배제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적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分化될 수 없어 자연적 상황과 인위적 상황이 조화있게 균형을 유지해 가야 할 인간의 생존적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카오스’의 未分性이 영원히 변치않는 人間思考의 ‘原本’(arche-pattern)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활력소인 동시에 인간 활동의 동력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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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화 및 기타 민속 속의 민간사고

5. 민간화 및 기타 민속 속의 민간사고 흔히 民畵라고 부르는 民間畵는 전문적 기술을 가진 畵工에 의해 그려진 정규 그림이 아니고 비전문적인 민간인들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다. 民間畵의 소재는 주로 새나 짐승, 松竹 등의 長壽하는 자연물들이다. 불로장생한다고 믿는 十長生1)의 그림도 자주 그려졌다. 이외에도 옷이나 베개 마구리에도 ‘壽’, ‘福’ 등등의 글씨가 쓰였다. 이 글귀가 뜻하는 것은 건강, 장수, 부와 多産의 의미이며, 인간의 존재지속에 대한 염원이 그 안에 담겨 있다고 보겠다.  이상에서 본 民間畵와 服飾 등에 담긴 사고는 (1) 건강하여 (2) 장수하면서 (3) 富하고 貴하게 되려는 욕구로 집약시켜 볼 수 있다. 6. 民間思考의 ‘本’ 위에서 본 통과의례, 세시풍속, 가신·동신·풍수신앙 등의 민간신앙과 기타 민속 속에 담긴 공통적 욕구는 인간이 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자손을 거느리고 病 없이 건강하고 부귀를 누리고 편안하게 장수하려는 것으로 집약된다. 이것은 결국 한마디로 ‘인간존재의 영구지속 욕구’로 압축된다. 이 속에 깔려 있는 民間思考의 원리는 존재를 ‘카오스’ 쪽에서 보는 입체적 존재사고여서 존재가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미분적 동일근원의 순환 체계 위에서 영원히 지속된다고 믿는 것이다. 낮과 밤의 순환, 달이 차고 기우는 것, 죽은 사람의 영혼이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 것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巫俗이 민간인들에게 잘 받아들여진 것은 바로 巫俗 안에서 이러한 미분적 동일근원의 ‘本’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제2절 ‘원본’과 민간상 이 장에서는 ‘原本’思考를 통해 한국의 전통적인 民間像2)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巫俗에 대한 평가는 주로 역기능적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비판되었다. 巫俗으로 인해 나태심과 요행심만 심어 주게 되었고, 윤리의식과 역사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巫俗이 한국인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기능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부정적인 견해들이 나오게 된 이유는 민간인들의 반대편에서 합리적인 관찰자대로의 주관적 척도를 가지고 관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객관적 입장에 서서 민간인들의 생활현장으로부터 그들의 心性을 들여다보면 ‘카오스’ 쪽에 비중을 두고 살아온 民間思考를 이해하게 된다. 즉 ‘카오스’ 속에는 질서가 없어서 질서를 전제로 하는 합리성이나 역사의식, 책임의식과 조직력에 의한 횡적 결합과 단결이 있을 수 없다. 이런 民間像을 편의상 구분해 보면 ‘카오스’적 未分性, 循環性, 持續性인데, 이 3자는 모두 ‘原本’思考에 기반을 둔 相補的 관계에 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를 차례대로 검토해 나가기로 하자. 1. 미분성 자연적 상황 속에 살고 있는 민간인의 心象은 질서 체계 이전의 未分性을 간직하고 있다. 분화된 개별 질서 체계로 인한 너와 나의 분리된 경쟁적 적극성이 없어 체념과 나태심이 있을 수 있다. 상대편이 자기와 대등하게 分化되어 있는 개체임을 인정하지 않아서 사회적 통합성이 결여되며, 이 때문에 한국의 굴절된 人間像의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未分性이 이와 같은 역기능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민간인들의 융화, 協同과 人情 등의 기능적인 일면도 지니고 있다. 카오스를 넘나들며 자연적 상황 속에 살고 있는 민간인들은 너와 나의 구별없이 온 마을이 한 덩어리가 되어 살고 있다. 洞神祭나 ‘품앗이’, ‘계’와 같은 마을 전체의 공동 목적인 있을 때만 단합되고, 그 외의 평상시엔 원상태로 돌아와 자아중심이 되기 때문에, 여전히 이웃과의 反目과 갈등이 있게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未分性이 때로는 人心과 素朴, 착한 心性이라는 긍정적인 면을 보여 주기도 한다. 人情이나 人心은 너와 나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 未分性에서 나온다. 따라서 남의 어려움을 나의 어려움과 똑같이 여기게 되고 남의 길흉사에 기꺼이 협동하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상호 협동이 무조건적으로 사람은 원래 그래야 된다는 일방적인 생각으로 흘러 갈 가능성이 높다. 한편 사람들은 한데 어울리어 동일감 속에 사는 人情을 원하면서도 때로는 분화 질서를 원하는 반대현상을 보이고 있다. 未分性이 지나쳐 상대편의 개체 분화 한계를 인정하지 않게 될 때 ‘뻔뻔스럽다’는 말을 듣게 된다. 2. 순환성 ‘循環性’은 어떤 것이든 한 상태로 지속되지 않고, 다른 상태로 변해 돌아가며 교체되는 것이 반복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두 상태의 개체분화가 명확하지 않은 카오스적 未分性의 연장 변화 상태로 볼 수 있다.  이런 循環性의 예는 다음과 같다. 설화의 경우, 前生에 살다 죽은 총각의 영혼이 이승에 태어나 정승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거기서 다시 이승으로 오는 循環性을 보여 준다. 그리고 민요와 민담에서 고난을 이기고 마침내 행운으로 끝내는 이야기의 例, 또 時空을 초월해 變身이 자유로운 變身說話의 例가 있다. 한편 속담의 경우, ‘고생 끝에 낙이 온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등의 말은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고난이 낙이 될 수도 있는 고난과 낙의 未分的 循環인 것이다. 이와 같은 循環性은 민간인의 忍耐心과 내일을 기다리며 희망을 갖고 조급하게 굴지 않는 餘裕와 樂天性으로 이어지는 것이라 보인다. 3. 지속성 未分性의 기반 위에 循環性이 있고, 이 둘은 존재의 持續性으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民間思考 속의 靈魂觀, 來世觀, 그리고 怨恨, 保守性과 傳統의 固守, 物慾이나 慾心, 혈통의 계승을 위한 아들 重視와 근원을 重視하는 孝誠의 결과가 생겼다. 靈魂觀과 來世觀은 인간이 죽어도 그 육체에 있던 영혼은 멸하지 않고 그 근원인 ‘카오스’로 돌아가 永遠存在로 지속되면서 환생 또는 내세에서 영생한다는 것이다. 살아 생전의 怨恨이 죽은 후까지도 계속된다고 믿는 것 역시 未分性에 기반을 둔 恨의 持續性이다. 保守性과 傳統의 固守는 자아 중심의 未分的 지속 욕구이며 여기서부터 개인 慾心이 더욱 강하게 부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자아중심의 未分的 持續性은 딸보다 아들을 重視하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자아 연장인 아들이 다시 자아를 계승 연장시켜 자아를 영원히 持續해 가려는 욕구는 한편 자아와 未分的 관계인 부모·조상을 重視하는 孝誠으로 발전해 간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民間像으로 비추어진 未分性·循環性·持續性은 相補的 관계에 있다. 이런 心性은 존재를 ‘카오스’ 쪽에서 보는 ‘原本’思考에 기반을 둔 것이다. 자아 중심의 결과를 가져온 ‘카오스’적  未分性은 제반 부정적 요소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또한 많은 긍정적 요소도 여기서 나오고 있다. 즉 未分性은 人情·素朴美·善 등을, 循環性은 인내심과 여유· 희망·낙천성 등을, 끝으로 持續性은 孝誠과 혈친을 重視하는 등 ‘否定 속의 肯定’이란 逆現象을 보이고 있다. 민간인들은 존재의 永久持續을 위해 늘 ‘카오스’의 未分性에 비중을 두면서 필요에 따라 分化秩序를 인정도 하고 부정도 하는 유동성을 보여 否定과 肯定이 교체 循環하면서 영원히 持續한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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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 동신신앙 및 기타 민간신앙 속의 민간사고

3. 가신·동신신앙 및 기타 민간신앙 속의 민간사고 민간인들은 집안이 잘되고 못 되는 것이 모두 家神들의 뜻에 달려 있다고 믿어 집 요소요소에 神들을 모셔 놓고 섬긴다. 대청 기둥 밑에 성주神, 안방 아랫목에 삼神, 윗목에 祖上神, 부엌 부뚜막에 조왕신, 광에 업神, 뜰에 地神, 장독대에 철융神, 문간에 守門神, 샘에 井神, 변소에 厠神이 있어 명절이 되거나 별식이 나면 이들 家神에게 바치고 기원한다. 洞神의 경우 마을마다 입구에 서낭堂이나 장승이 있고 뒷산에는 山神堂이나 국수당이 있는데 여기에 洞神을 모신다. 洞神이 마을 전체를 보살펴 준다는 신앙은 각 가정을 결속시키는 마을 공동체 의식의 주축이 되기도 한다. 家神과 洞神信仰외에 民間信仰에서는 山·江·바다·나무·바위와 동물을 숭배하는 自然信仰과 영웅숭배가 있다. 그밖에 不淨과 禁忌에 대한 思考, 묘자리나 집터의 明堂자리를 찾는 風水信仰 등도 民間信仰에 속한다. 이런 民間信仰 속에 담긴 사고를 종합해 보면 神聖觀念이 지배적이다. 즉 인간의 생존에 관계되는 모든 것이 神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나 神을 믿는 것이 神을 위해서라기보다 인간 자신의 생존을 위한 신앙으로 풀이된다. 4. 민요·설화 속의 민간사고 민요와 설화 속에 담긴 민간사고에 대한 연구가 그 동안 많이 있었다. 이와 같은 구비문학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고 그 안의 의미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도 서로 다르다. 그러나 대체로 민요는 생활환경에서 오는 고난을 숙명으로 받아들여 좌절하지 않고 낙천적이고 해학적으로 이를 극복하며, 죽은 남편과 만나 살며, 성주神1)을 노래하는 신앙성을 보이고 있다. 설화의 경우 영혼이 불멸하여 전생과 후생을 순환 幻生2)하며 變身이 자유로워3) 時空을 초월한 원초적 思考를 보여 주고 있다. 요약하면 (1) 이승과 저승을 자유롭게 왕래하고, 인간과 자연물이 자유롭게 서로 바뀌는 循環思考 (2) 영혼불멸에 의한 永生의 욕구 (3) 시간과 공간의 초월 욕구, 이 세 가지가 구비문학 속에 담긴 민간사고의 내용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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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시풍속의 민간사고

2. 세시풍속 속의 민간사고 歲時風俗은 한 해를 단위로 매년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민속행사이다. 이런 행사는 대체로 풍년 농사를 빌고 액운을 막으며 병없이 건강하게 살기를 바라는데 목적이 있다. 정월 1일 설날 아침에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한다. 초이틀이나 3일이 되면 안택(安宅)1), 厄맥이2), 뱃고사3), 地神밟기 등을 한다. 그중 안택은 각 가정에서 그 해의 질병을 예방하고 풍년이 들어 집안이 잘 되라고 신께 비는 의식이다. 안택을 크게 하면 무당을 데려다 굿을 하고, 규모가 작으면 축원 형식으로 무당 혼자서 ‘비손’으로 한다. 무당이 없는 지방에서는 독경(讀經)으로 한다. 음력 정월 대보름이 되면 설날에 시작한 신년 경축 행사가 절정을 이룬다. 14일 날은 오곡밥을 지어 해가 지기 전에 일찍 먹는다. 그래야 일년 내내 부지런해지고 몸이 건강해지며 오곡이 고루 잘 여문다고 한다. 15일날에는 먼동이 틀 때 일어나 풍년을 기원하는 볏가릿대4)(禾竿)를 세우고 집 주위를 청소해서 마당 한 귀퉁이에 쓰레기를 모아놓고 불태운다. 이 불을 모기불이라고 하며 이렇게 하면 일년 중 모기가 없어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해 뜨기 전에 만나는 사람을 불러서 대답하면 ‘내 더위’하는데, 그렇게 하면 여름에는 덥지 않아 더위 먹는 더위병이 예방된다고 믿는다. 이런 것을 ‘더위팔기’라고 한다. 보름 전날 밤에는 ‘福土훔치기’5), ‘마당찧기’6), ‘제융치기7)’를 하며 ‘부럼8)’을 먹고 ‘쥐불’을 놓으며, ‘횃불싸움’, ‘石戰’, ‘다리밟기9)’를 하고, 보름날이 되면 ‘줄다리기’, ‘달맞이’10), ‘달집태우기’11)를 한다.  신년초의 행사들 중 특히 불과 물에 관계된 民俗과 ‘편싸움’의 민속이 주목된다. ‘모기불’, ‘쥐불놓기’, ‘횃불싸움’, ‘달집태우기’ 등은 모두 불로 태워 없애는 행동이다. 이는 지나간 해의 묵은 것을 불로 태워 없애고 완전히 無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새로운 질서화의 의미이다. 설날에 마시는 歲酒, 보름날에 마시는 ‘귀밝기 술’은 물의 상징으로 역시 묵은 것을 물로 일소해버린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징, 꽹과리 등을 치며 온 마을을 요란스럽게 돌아다니는 ‘지신밟기’는 마을을 소란한 무질서로 만든다는 혼돈의 의미와, 소란을 부려 잡귀를 몰아낸다는 의미가 있다. 14일 밤에 쥐불을 놓고 벌이는 ‘편싸움’ 역시 인위적 혼돈을 만든 후에 새 질서를 만들어 나간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카오스에서 새 질서를 찾아 코스모스로 옮겨간다는 의미는 섣달 그믐날 밤의 ‘歲守’에서 잘 볼 수 있다. 즉 이 날 밤에 집안 곳곳에 불을 밝히는데 이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체의 것을 불로 태워 없애버린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 결과로 ‘카오스’의 상황이 이루어지고 여기서 ‘차례’와 안택, 고사, 동신제를 지내게 된다. 이밖에 정월부터 섣달 그믐까지 이어지는 세시풍속은 神에게 풍년을 빌고 길흉화복과 같은 문제들을 신에게 기원하고 예방하는 의례적 행사라 보인다. 이런 세시풍속은 매년 반복되는 주기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1년의 1회로만 유효하고 그 이전의 것은 무효화하여 폐기된다. 세시풍속에 不淨과 禁忌12)가 있는 것을 보면 세시풍속이 원래는 神聖儀禮이던 것이 점차 형식적 의례로 세속화해 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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