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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적 관점
1. 현상학(現象學)적 관점 1.1. 제의(祭儀)의 특수한 공간(空間)과 시간(時間) 무속의 제의(祭儀) 즉 굿을 하는 장소를 보면 현실 공간과 엄격히 구별된 공간에서 행하여진다. 또한 굿이 거행되는 시간도 일반적인 시간대가 아닌 엄격히 구별된 시간에 행하여진다. 무속제의의 장소(場所)는 엄격히 통제된다. 굿을 하기 3일 혹은 7일 전부터 금줄1)을 치고 붉은 황토(黃土)2)를 깔아 일반인들은 누구도 이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 또한 굿을 시작할 때도 제일 먼저 정화(淨化)의 예식(禮式)부터 시작한다. 대칼을 들고 사방을 휘젓고, 사방에 물을 뿌리고, 짚을 불살라 그 장소를 정화한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제의의 장소는 일상적 현실(日常的 現實) 공간과는 엄격히 구별되고 일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이탈한 “특수한 장소”이다. 무속제의의 시간(時間) 또한 엄격히 통제된 시간이다. 통상적으로 굿은 밤(夜)에 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한다. 밤은 일상적인 시간인 낮과는 구별되는 시간으로 현실계의 시간에서 차단된 시간이다. 이렇게 볼 때 제의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는 엄격히 구별된 “특수한 시간”에 행해진다. 이렇게 제의는, 비록 그것이 상징적이지만 현실 밖의 특수한 시간과 공간에서 행해지는 것을 그 원칙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2. 특수한 공간, 시간이 갖는 의미 우리는 위에서 제의의 시, 공간은 일상에서 완전히 차단된 특수한 시,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특수성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제의공간(祭儀空間)은 지상현실에 속하지 않는 “별개의 세상”을 의미한다. 이 공간은 현실에 속하지 않는 별개의 공간, 일상적인 현실의 공간이 없어진 전혀 다른 공간을 의미한다. 이렇게 제의 공간이 현실 공간이 없어진 공간이라면 그것은 공간이 없어진 무공간(無空間)의 종말(終末)을 의미하게 되고 이렇게 무공간의 상태라면 그것은 공간 질서가 생겨나기 이전 하늘과 땅의 공간 구별이 없는 혼돈의 ‘카오스’(chaos)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제의 시간(時間)도 밤이라는 현실 밖의 시간을 의미한다. 우주 공간이 끝난 후 공간에 있는 시간 즉 ‘카오스’의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제의(祭儀)가 이루어지는 시간, 공간은 다같이 현실계(現實界)의 시간과 공간이 생기기 이전의 무공간, 무시간(無空間, 無時間)의 상태로 ‘카오스’(chaos)를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무가(巫歌)에서 직접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무가의 서두(序頭)는 천지개벽(天地開闢) 이전의 혼돈 “카오스”에서 하늘과 땅이 열려 처음으로 하늘과 땅의 공간 질서가 생기는 것 부터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카오스란 무엇이고, 왜 제의는 카오스에서 일어나는가?
서론
서론 “인간이 무엇이옵니까?”(시편 8,5)라는 시편 작가의 질문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 이후 자신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해 온 질문이다. 이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의 소외가 있는 곳이면 더 크게 대두되는 질문이다. 19세기초 조선왕조는 정치·경제·사회·사상적으로 혼란의 시기였다. 민중은 이런 혼란 속에서 정치적 소외와 경제적 압박을 받고 있었고, 사상적으로는 그들을 뒷받침해 줄 것이 없었다. 결국 민중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방향과 인간의 가치를 제시해 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나타난 것이 東學이다. 東學은 輔國安民思想으로 서세동점의 시기에 민중을 보호하고, 後天開闢시대에 인간성을 회복하여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여기서는 최제우의 侍天主思想을 바탕으로 어떻게 이 사상이 발전하여 근대적 人間觀 형성에 바탕을 제공했으며, 이상적 인간상과 수양 방법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동양윤리 – 사후 효에 있어서의 유교와 가톨릭
유교에서 효의 지극함은 생시 부모를 섬길 때는 하늘을 섬기듯 하고 사후에는 제사로서 배천함에 있다. 하에서 상, 근에서 원으로의 실천순서를 중시하는 유교에서는 사친을 통해 사천에 이르게 된다고 본다. 가톨릭과 유교는 모두 부모와 선조에 대한 효를 중시하며 그 의식에 대해 업격히 규정한다. 그러나 사후 효도방법과 제사의 대상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첫째, 실천순서에 있어 가톨릭은 사천에서 사친으로 내려오는 하향적이라 한다면 유교는 상향적이라 하겠다. 둘째, 가톨릭에서는 제사란 하느님께만 드리는 예요 미사성제만이 유일한 제사인 반면에 유교는 천뿐 아니라 선조께도 마땅히 드려야 한다. 세째, 가톨릭의 선조를 위한 의식은 천당에서 영복을 누리도록 하느님께 간구함에 있는 반면 유교는 자손의 추효보본에 있다. 네째, 가톨릭은 선조와 자손의 만남과 통교는 하느님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유교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다섯째, 가톨릭이 비현연관계와도 관계를 맺는 반면 유교는 혈연공동체만의 친교와 일치의 관계를 맺는다. 여셧째, 유교는 조상제사의 근본의의를 자손의 보본과 ‘사사여사생’의 계효에 둔 반면 가톨릭은 이를 미신적 행위로 이해하여 단죄 하였다. 산업화의 과정에 있는 한국사회는 전통 가치체제가 붕괴되고 개인주의 황금만능주의가 풍미하고 있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타인과 사회에 봉사할리 만무하고, 자기생명의 존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타인의 생명의 귀함을 깨달을 수 없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생명존엄을 깊이 자각시키고 친족 공동체와의 유대를 도모하도록 하는 조상제사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더우기 복음의 토착화와 문화의 완성이라는 관점에서 조상제사를 재조명 하고자 한다. 첫째, 조상에게 제사를 드림은 이단이라고 단죄하는 것은 서구 그리스도교적 제사정의를 다른 문화권에까지 강요하는 폐쇄적이고 비가톨릭적인 태도라 하겠다. 둘째, 결과 위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미신적 행위라 하겠다. 그런데 동양에서 서구의 선교사들은 신앙의 목적을 바로 결과 위주로 가르쳤으며, 이것은 유교인들이 천주교를 로 단정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세째, 가톨릭 선조굥경의식은 유교의 추효보본의 정신을 수용해서 조화를 이룰 때 의미를 더욱 풍부히 하리라 본다. 네째,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 그리스도교는 조상제사에서의 자손과 선조의 통교와 에 대해 단죄할 바가 아니라고 본다. 다섯째, 신주의 경우 신령의 표상을 통해 그 현존을 느낀다 하더라도 단죄받을 미신적 행위는 아닐 것이다. 여섯째, 제물은 인간 성경의 상징적 표현물인 것이다. 조상제사의 전례적 수용과 그리스도교적 제례를 위한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명절이나 기일에는 미사를 통해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체험 하면서 선조를 위해 기도하고 선조와의 통교를 체험토록 할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평신도 사도직도 크게 주창되고 있기에 가문 단위로 제사를 실시함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둘재, 제사의 형식은 조상생명의 근원인 하느님께 보본-보은토록 함이 좋을 것이다. 세째, 가톨릭 조상제사는 두 부분으로 이룰 수 있으니, 전반부에서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선조를 위해 기도하고, 후반부에서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선조께 직접 감사드리며 통교하고 전구를 간구하며, 제물을 나눔으로써 친교의 잔치를 한다. 네째, 효성의 상징적 표현인 제물과 신주 또는 사진도 자유롭게 허용함이 바람직하며, 축은 선조에 대한 애절한 마음의 표현이므로 오히려 살려야 하리라 본다. 서구 그리스도교가 동양의 조상제사를 미신행위와 같이 엄금하게 된 것은 선교지 문화에 대한 경시와 몰이해 및서구화된 그리스도교를 이식시키려는 통일성의 선교정책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이 문제는 교황청과 선쇼사들이 선교지문활를 바흐제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읻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일깨워주며 아울러 복음의 토착화의 주체는 지역교화와 그 민족 자치가 되어야 함을 자각시켜주는 역사적 교휸이라 하겠다. 이 땅의 구원의 성사인 한국교회는 조상제사를 복음화함으로써 이 세대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가 위해서는 하루속히 교황쳥으로부처 조상제사에 대한 전면적이 허용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양윤리 – 조상제사의 근본 의미
동양 유교문화권에서는 효를 중시하여 조상제사가 마치 국교와도 같이 준행되었다. 한편 서구 그리스도교는 제사란 하느님께만 드려야 할 가장 존귀한 예요 미사성제만이 유일한 제사라고 규정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교회가 동양선교에 어떤 자세로 임해왔고 조상제사에 대해 왜 엄금하다가 관용조치를 취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며, 아울러 조상제사의 근본 의미와 그 현대적 의미를 한국 신학적으로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16세기 서구교회는 “교회 밖에서는 일체 구원이 없다.‘는 확고한 신념과 함께 문화적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당시 유교 역시 다른 문화를 경시하고 이질사상에 대한 벽이단논리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와 유교 조상제사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16세기 말엽 중국선교에 임한 예수회의 마테오 릿치는 가능한 한 유교문화를 수용하여 그리스도교와 조화시키려는 적응주의적 선교방침을 취하고 조상제사를 효성의 행위로 이해하여 허용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꼬회 선교사들은 이를 비난하면서 조상제사를 미신적 행위로 간주하여 금하였다. 이 문제는 1백년간의 쟁론끝에 마침내 교황청은 1715년 끌레멘스 11세의 칙서 Ex illa die와 1742년 베네딕또 14세의 Ex quo singulari를 통해 조상제사를 엄금하고, 불복하는 자는 파문벌을 받으리라고 경고하면서 일체의 논란을 금했다. 교황청이 조상제사를 엄금한 이유는 비록 제사의식이 전적으로 악하지 않더라도 당시 중국인의 종교심성으로 보아 이 의식들이 미신과 혼합되어 있어서 미신적 요소를 분리해 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시 서구 교회는 조상제가 허례요 이단행위라고 다음과 같은 폐제논리를 폈다. 첫째, 물질적 음식물은 혼의 양식이 될 수 없다. 둘째, 죽은 사람의 혼이 신주나 어떤 물건에 깃들 수 없다. 세째, 사람이 죽어서 천당에 간 자는 흠향하러 오지 않을 것이요 지옥에 간 자는 흠향하러 올 수도 없을 것이므로 제사는 쓸데없는 짓이다. 네째, 하느님께 드리는 미사성제만이 유일한 제사이므로 다른 제사는 없애야 한다. 이러한 교황청의 폐제논리와 제사금령의 에는 그리스도교의 순수성과 통일성에 치중한 선교정책과 유럽인의 우월의식 및 동양문화에 대한 경시 등이 크게 작용했으며, 그 외에는 수도회간의 경쟁의식, 국가간의 알력, 언어의 장벽 등 많은 요인이 작용하였다. 그후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토착화에 대한 교회의 재인식, 비그리스도교 민족안에 있는 영적보화들과 그리스도교 은총을 조화 시키려는 신학사조의 대두, 세계무대에서 동양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동양문화에 대한 서양인들의 보다깊은 이해와 통찰, 동양인들의 미신적 종교심성의 감소, 국가에서 명하는 공경의식은 단지 사회적 국민적 의식에 불과하다는 정부당국의 발표 등으로 인해 조상제사 문제는 해빙기를 맞게 된다. 교황 비오 12세는 1939년 12월 8일 ‘중국 의식에 관한 훈령’을 통해 공자 공경의식을 허용하고, 조상제사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용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 이유는 “비록 전에는 외교의식에 관련되어 있었으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사람들의 풍습과 정신이 변하여 현재에 와서는 한갓 조상들에게 효성을, 국가에 사랑을, 동포에게 예모를 표시함에 불과한 민간적 예식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동양문화에 대한 교황청의 시각의 변화와 선교정책의 변화에 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 훈령에 준하여 한국 주교단은 보다 구체적인 지침을 내렸다. 그리고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토착화가 교회의 근본자세임을 재확인 하면서 전통문화를 보호 육성하며 문화를 복음화 해야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회는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를 통해 전통 조상제사를 복음화하고 현대에 맞는 그리스도교적 제례의식을 만들기 위한 지침안을 작성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한국 가톨릭 지도서 준비위원회에서는 상제례 지침을 마련 중에 있다. 유교 조상제사의 근본정신은 생명의 근본인 부모와 선조에게 보답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계속 생시와 같이 섬김으로 효를 실천하는데 있다. 이렇게 드리는 제사는 신령이 흠향하게 되며 아울러 복도 따르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제사의 근본정신과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손의 보본추효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제사를 받는 대상보다 드리는 자손이 중심이 되며, 산이의 효심과 성경이 문제인 것이다. 이렇게 볼때 유교 조상제사는 보본과 보은의 마음에서 생시와 같이 정성껏 섬기려는 효성의 상징적 표현이요 신령의 흠향과 강복은 지성의 제사에 수반되는 결과라 하겠다. 그런데 이 조상제사는 상징적 물건과 언어와 동작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기본구조는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마음을 집중시키고 신령의 임재를 여실하게 하는 준비단계, 둘째, 효성과 사모의 상징적 표현인 제물을 드리면서 흠향을 간청하는 의식, 세째, 신령께서 제사를 흠향하고 강복하는 의식, 네째, 신령께 드리는 의식을 끝내고 친족들이 제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유대와 일치를 도모하는 마무리 부분이다. 이 모든 의식은 효성의 상징적 표현이요, 성경의 실천이며 더 나아가 신령이 흠향하리라는 염원과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또한 유교 제사에서 중심이 되는 신주는 두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는 죽은 사람의 혼이 의지 하도록 마련해 준 의빙처요, 둘째는, 인간의 본성적 조건에서 볼때 죽은 이를 게속 사모하고 섬기기 위해서는 볼수 있는 상이 필요한 데 신주는 바로 죽은이의 신상인 것이다. 그리고 신주의 의미는 의빙처 보다는 신상이 더 근원적이고 크다 하겠다.
중용 2
6. 君子素其位而行하고, 不願乎其外하니. 素富貴 行乎富貴하고, 素貧賤 行乎貧賤하니라(14장). *단어풀이 素(소) : 여기서는 ‘卽’(처하다)의 뜻 *직역 군자는 자기의 위치에 처하여 행하고 자기의 바깥에서 원하지 않는다. 부귀에 처하여서는 부귀에서 행하고 빈천에 처하여서는 빈천에서 행한다. *해설 時中의 개념을 잘 말해주고 있다. 자기의 처지에 처하여서 자기의 일을 하는 것, 그것이 군자가 지녀야 할 미덕이다. 그리하여 기쁠 때에 기뻐하고 슬플 때에 슬퍼할 줄 아는 中和를 실행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우주의 운행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7. 誠者는 天之道也오 誠之者는 人之道也다(20장). *단어풀이 中(중) : 맞다. 之(지) : (목표에) 이르다. *직역 정성 그것은 하늘의 道이며 정성에 이르는 그것은 인간의 道이다. *해설 誠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온전한 성실성이나 정성으로서 인간생활 안에 현존하는 것으로 일종의 희생을 수반하며 인간이나 사물의 완성으로 인도하고 神의 영역에 까지 스며들어 갈 수 있는 진실성이다. 朱喜는 誠을 진실하여 헛됨이 없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는 곧 하늘의 이치이다. 또한 誠에 이르려는 것은 진실하여 헛됨이 없는 것에 이르려 함이니 사람의 길 또한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 정성스러운 사람은 힘들이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맞으며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조용히 따름은 道에 맞나니 이는 곧 聖人의 道와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聖人의 德은 하늘의 이치인데 하늘의 이치는 곧 진실하여 헛됨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8. 唯天下至誠이아 爲能盡其性이니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이오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이다(22장). *직역 오직 하늘 아래에 지극한 정성이라야. 그 본성에 능히 다하는 것이니 그 본성에 능히 다함은 즉 인간의 본성을 능히 다함이요 인간의 본성을 능히 다함은 즉 사물의 본성을 능히 다함이다. *해설 朱喜는 사람이나 사물 모두는 같지만 단 부여된 형성하는 氣가 서로 같지 않아 다를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의 본성을 아는 것은 곧 남의 본성을 아는 것이 되고 더 나아가 모든 사물의 본성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알게 됨을 통해서 나는 천지의 변화와 육성에 참여하게 된다. 참여한다는 것은 천지와 함께 나는 셋이 됨을 말하려는 것이다. 9. 是故로 君子는 動而世爲天下道니 行而世爲天下法하여 言而世爲天下則이라(29장). *단어풀이 道(도) : 여기서는 법칙을 말함 法(법) : 제도, 行의 본보기 *직역 그러므로 君子는 행위으로서 법칙을 만들고 행위로서 대대로 천하의 제도를 만들며 말씀으로서 대대로 천하의 준칙을 만드니라. *해설 유가에서는 은둔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를 본령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자도 周遊天下라는 불휴의 생애를 살았다. 활동하면 천하의 지도자가 되며 그의 언행은 곧장 법칙이된다는 것이다. 10. 詩曰, 德輕如毛라하니 毛猶宥倫이어니와 上天之載無聲無臭아 至矣니라(33장). *단어풀이 詩(시) : 詩經을 말함. 倫(륜) : ‘비교하다’라는 의미로 쓰임 無聲無臭는 不賭不聞이의 경지와 같다. 無聲無臭의 無는 절대 無가 아니라 上天의 속성으로서의 無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 上天은 首章의 天命과 相應하여 中庸의 결미를 맺는다. *직역 詩에 이르기를 德은 털같이 가볍다고 하니 털은 오히려 비교할 수는 있지만 하늘 위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느니 지극하니라. *해설 詩經에 文王의 德도 털같이 가볍다고 했다. 文王의 德이 인간 사회에서는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이 우주 행정을 시행하는 上天의 德에 비하면 한오라기 털에 불과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