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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천사상

(3) 人乃天思想 최제우가 ‘한울님’을 인간에 내면화했고, 최시형은 事人如天思想으로 인간 존엄성을 강조했다면, 손병희는 人乃天의 원리로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고 인본주의의 사회적 실천에 힘썼다.   그는 하늘(天)과 인간(人)의 관계를 말하면서 “天이 있으면 내가 없을 수 없고, 天이 없으면 매가 있을 수 없다.” 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天․地․人을 상호 불가분의 관계로 보았다.  왜냐하면 사람이나 만물이 생성될 때 그 본성은 ‘하늘’에서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 그의 이런 생각은 天道敎의 宗旨2)와 모순되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손병희는 性心을 바탕으로 인간 본질을 정의하고, 侍天主를 합리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손병희는 “무체법경”에서 인간의 근원을 인즉천(人卽天)의 논리로 무형인 성(性)과 심(心)으로 보아 다음과 같이 ‘하늘’에 연결시켰다.   “性이 闔則爲萬理萬事之原素요 性이 開則爲萬理萬事之良鏡이니 萬里萬事 入鏡中 能運用曰 心이라 心믄 卽神이요 神은 卽氣運所致니라” 性心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萬理萬事에 적용되는 것으로 性은 氣가 작용하기 이전 상태고, 心은 氣가 작용하는 상태다.  性은 우주 만물의 근본 바탕이고, 心은 곧 신으로서 기운의 소치라 하여 ‘人乃天’을 유교적 우주관으로 합리화하였다.  그리고 기운의 시초를 ‘나’라고 하여 사람의 무궁성을 언급하면서3), 인간성의 무궁함이 그 본질임을 들어 성심(性心)의 수양을 의무로 강조하였다.   또한 侍天主의 해석에서 인간성의 본질 규명을 시도하였다.  ‘侍天主’를 각천(覺天)으로 풀이4)하여 侍天의 도덕적 수련 이전에 먼저 자기 마음이 곧 ‘하늘’이라는 인간성의 본질을 깨달아 자기의 심적(心的) 덕화(德化)에 함써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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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여천사상

(2) 사인여천사상 事人如天의 중심 사상은 人本主義라고 하겠다.  人本主義는 이미 최제우 당시에 東學의 이념으로 체계화되었지만 일반 교도들의 실생활에 구체화된 것은 최시형의 시기에 이르러서다.  최제우가 侍天主思想으로 ‘한울님’을 인간에 내면화함으로써 人間觀을 세속화했다면, 최시형은 事人如天思想으로 인간 존엄성을 근대적 人間觀을 세속화했다.1) 이러한 존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리가 뒷받침 해주어야 했다. 1878년 7월에 해월의 이름으로 처음 접(接)을 열었다.  이 접은 교리 토론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 많은 교리 문제가 토의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侍字의 義’가 문제되었다.   “여러분은 侍字의 뜻을 아는가? 侍字를 어떻게 해석함이 可한가? 사람이 胎內에 생길 때부터 侍字의 義가 성립된다고 봄이 可한가? 落地 이후에 처음으로 侍字의 義가 성립되는가? 入道하여 降靈이 되는 날에 侍字의 義가 생긴다고 함이 可한가? 여러분은 이 侍字의 義를 연구하라.”2) 이 글에서 묻는 태도에 이미 그 해답의 방향이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수운은 교인들에게 ‘한울님’을 모시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실 수는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해월이 사람은 사람으로 생겨날 때부터 ‘한울님’을 모시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가 이것을 시인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불 수 있다.  적어도 侍字를 확대 해석하려는 의도가 물음 자체에 분명히 암시되어 있다.   “내 또한 五臟이 잇거니 어찌 物欲을 몰으리요마는 내 이를 하지 안는 것은 ‘한울’을 養하지 못할가 두려워하노라……제군의 행위를 본즉 自尊하는 자 많으니 可嘆할 일이로다 내 또한 세상사람이어니 어찌 이런 마음이 없겠느냐마는 내 이를 하지 아니함은 한울을 養 하지 못할가 두려워함이니라……그럼으로 내 평생에 外飾을 피하고 내실을 主도하는 것은 오로지 ‘한울’을 養함에 유감이 없기를 기함이니라.” 여기서 ‘한울님을 양(養)한다’고 한 것은 ‘각자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 人卽天의 논리에 부합된다.  ‘사람은 본래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으로 보면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쓰여진 것 같다.  그는 人卽天을 事人如天으로 풀이하여 養天主設을 정립하였다.  따라서 養天主는 ‘한울님의 마음을 기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3) 최시형의 養天主는 인간 존엄성을 강조한 생성 철학이다.  그는 인간의 본질과 천인 관계를 天主恭養, 待人接物, 以天食天의 설법으로 事人如天思想을 체계화했다.  이런 해월의 人間觀은 인간 평등과 인간 존중 사상이 주조를 이룬다. 이러한 인간 존중 사상은 그의 법설 “十毋天”에 집약되어 있다.  여기서 天字를 人字로 대체해서 해석하면 그의 사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 一 毋欺天 – 사람을 속이지 말라.   二 毋慢天 – 사람을 게으르게 하지 말라.   三 毋傷天 – 사람을 속상하게 하지 말라.   四 毋亂天 – 사람을 어지럽게 하지 말라.   五 毋夭天 – 사람을 요절하게 하지 말라.   六 毋汚天 – 사람을 더럽히지 하지 말라.   七 毋餒天 – 사람을 굶주리게 하지 말라   八 毋壞天 – 사람을 좌절하게 하지 말라.   九 毋厭天 – 사람을 미워 하지 말라.   十 毋屈天 – 사람을 비굴하게 하지 말라.” 이렇게 볼 때 侍天主思想 안에 내포되어 있는 人本主義的 요소는 최시형에 의해 人卽天思想과 事人如天思想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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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천주사상

1) 人本主義的 인간관 (1) 侍天主思想 인간성 본질에 대한 최제우의 지론은 ‘侍天主思想’에 집약되어 있다.  侍天主는 人間과 神의 관계를 규정해 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侍天主란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다는 의미다.  그리고 侍天主의 경지에 오르면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각자가 侍天主의 주체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을 신적 위치로 격상시켜 놓았고,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인본주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인간은 神的품성을 소유하고 神性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侍天主에 대한 해석은 최제우가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었다는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生不忘 萬事知”의 21字 呪文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최제우는 이 呪文을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글’이라 하였다.  ‘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글’인 이 21字 呪文 속에서 侍天主의 존재인 인간에 대한 이해는 “侍天主 造化定” 여섯 글자 가운데 ‘侍’字의 의미를 살펴봄으로 알 수 있다.   최제우는 呪文을 해석할 때 다음과 같이 侍天主의 ‘侍’字를 3단계로 정의했다.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으로는 神靈이 있고, 밖으로는 氣化가 있는 경지에 합일하여 한치도 옮기지 않는 것이다.  神靈은 내적 본성이고, 氣化는 다른 존재들과의 외적인 본래의 관계이며, 不移는 운동이며 실천이다.  안으로는 하늘과 합하고, 밖으로는 다른 사람과 자연을 관통하는 하나의 기데 한치도 어그러짐이 없이 합치하는 것을 말한다.  불이는 이를 방해하고 저지하는 모든 사상․경향․힘들에 대한 투쟁이다.  안으로 신령한 ‘한울님’이 뚜렷하게 있고, 밖으로는 그 기운이 흘러 넘쳐야 하며, 그것이 구체적으로 생활에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侍天主’한다는 것은 안으로는 인간 본성에 자리잡고, 밖으로는 모든 존재들의 심층을 연결하는 기운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도 그러한 경계에서 잠깐이라도, 한치도 옮김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侍’는 사람의 마음이 의지적으로 ‘한울님’과 일체 되고 ‘한울님’의 조화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侍天主’는 인간이 天人合一의 個全一體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무궁한 존재가 될 수 있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평등해진다는 同歸一體를 의미한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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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적 인간관과 수양 방법

2. 人本主義的 人間觀과 修養 方法 최제우는 ‘인간을 천주를 모시는 존재’라고 했다.  그의 侍天主思想은 東學의 神認識에 나타나 있다.  이런 侍天主思想은 후대에 人乃天이라는 더 적극적 人本主義思想으로 발전했다.  최제우의 神觀과 함께 侍天主와 人乃天思想을 중심으로 東學의 人間觀을 살펴보겠다.   1) 신관 ‘侍天主’에서 천주는 중국 고대 제례에서 받들어졌다고 하는 ‘천주’와 전혀 다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고대 신앙에서 표현된 ‘천주’는 세계를 나누어서 다스리는 천주(天主)․지주(地主)․병주(兵主)․음주(陰主)․양주(陽主)․일주(日主)․월주(月主)․사시주(四時主) 등 팔신(八神)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최제우가 말하는 천주는 우주 만물을 무위이화(無爲而化)하는 보편적인 신이다.1) 이런 최제우의 신관을 ‘한울님’의 존재와 존재 양식의 두 차원에서 보겠다.   수운의 신 즉 ‘한울님’은 온 자연계를 다스리고 모든 생명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유일한 최고의 초월적 존재다.   그는 초월적인 면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아득한 옛날부터 봄과 가을이 어김없이 갈마들고, 계절이 변함없이 제때를 만났다가 사라져 간다.  이것은 역시 天主의 造化의 자취가 뚜렷하다는 본보기다”2) 또한 ‘한울님’은 전지전능하고 성실한 존재다.  그것은 성실한 인간을 도와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인격적이다.  뿐만 아니라 ‘한울님’의 존재를 보편신으로 객체화했던 초기에 비하면 후기에는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하여 ‘한울님’을 내재적 실재3)로 보았다.4)  즉 천주는 초월적 絶對神인 동시에 인격적 實在神이다.   또한 수운은 ‘한울님’을 인간에 내재한 실재로서만 본 것이 아니라, 우주의 자연 순환 원리와 관련지어 신관을 정립하였다.  즉 범신론적 관점에서 氣論을 응용했다.  ‘한울님’을 至氣로 지칭하고 主氣論的 차원에서 氣의 본질을 해석했다.5)  “논학문”에서 ‘至氣’를 무사불섭(無事不涉) 무사불명(無事不命의) 보편자로서 혼원일기(渾元一氣)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서경덕의 氣哲學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6) 그러면 ‘한울님’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東學에서는 조화(造化)와 영부(靈符)로 ‘한울님’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수운은 처음에 ‘한울님’의 全能을 주로 造化와 靈符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였다.   “내가 또한 神仙되어   飛上天   한다해도  개같은   倭賊놈을  한울님께 造化받아  一夜間에 消滅하고저”  <안심가> “서양 사람이 道德을 닦고 體得함으로써 造化를 부리게 되어 못하는 일이 없고 그 쳐부수는 武器엔 당해내는 사람이 없어 중국이 망해 없어진다는 것이다.”7)<논학문> 초기에 造化는 ‘한울님’의 全能에서 유래하는 어떤 초자연적인 위력이다.  그리고 이 造化는 呪文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造化를 어떤 呪術的인 것으로 본 것 같다.   또한 ‘한울님’의 造化를 얻기 위해서는 항상 靈符를 지녀야 한다고 하여 造化의 매개체로 靈符를 중요시하였다.8)  그러나 점차 靈符 자체 만으로서는 효력을 볼 수 없고 지성으로 ‘한울님’을 위할 때 비로소 造化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靈符를 상징적으로 해석하였다.   수운은 造化를 합리적으로 해석하면서, 無爲而化라고 했다.  萬物은 ‘한울님’의 造化로써 無爲而化로 화생한 것이다.  이 造化는 創造의 의미와 進化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한울님’은 萬物化生의 내재적인 원인인 동시에 초월적인 원인이다.  따라서 ‘한울님’은 인간에 외재(外在)하는 동시에 인간과 만물에 내재(內在)하는 원인이다.  즉 ‘한울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도 인격적이며,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이고, 절대 무궁이면서 동시에 변화․생성 과정의 상대적인 존재다.9) 그의 제자 최시형은 스승의 神觀을 계승하면서 초월적인 면은 빼내고, 내재적 범신관10)을 갖추었다.  즉 天主는 인간의 삶 안에서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서로 대화를 나누며 살아가는 존재다.  ‘한울님’은 인간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며, 인간과 精神的 一體를 형성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존재다.  이런 神觀은 東學의 神觀으로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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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창도와 인본주의적 인간관

  Ⅱ. 東學의 唱導와 人本主義的 人間觀 1. 水雲의 生涯 최제우(崔濟愚1824-1864)는 지금의 경상북도 월성군 견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本名은 濟宣이고 호는 水雲이다.  관변기록에는 兒名이 福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 濟愚라는 이름은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고친 이름이다.   아버지 근암 최옥은 경상도 일대에서는 문장과 도덕으로 손꼽히는 학자였으나, 뜻을 펴지 못한 채 향반으로 빈 하게 살았다.  그는 두 번씩이나 아내를 여의고 동생 최규의 아들 제환을 양자로 맞아 대를 잇게 하였다.  그 뒤 60세가 넘어 이웃 마을에 살고 있는 과부 한씨를 맞아 아들을 얻게 되었다.  이 아들이 곧 수운이다.  그는 서자(庶子)로서 태어났다. 그의 7대조인 최진립은 1592년 임진왜란 때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1594년 무과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는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서 출전하여 많은 적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러한 그의 충성 때문에 나라에서는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貞武公)이라는 시호를 그에게 내려 주고, 1699년에는 경주에 사당이 세워졌다.   최제우는 여덟 살 때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유학의 경전에 소양이 깊었다.  그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학동 시절의 자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얼굴은 관옥이고      풍채는 두목이라  그러그러 지내나니    오륙세 되었드라  팔세에 입학해서      허다한 만권시서  무불통지 하여내니    생이지지 방불하다” 그러나 그가 서출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런 총명과 재기가 있으나 세상이 인정을 해주지 않음을 한탄한다.2)  최제우는 여섯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잃었고, 열 일곱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이때부터 살림은 점점 어려워만 지게 되었다.  서출이라 벼슬길을 바라볼 수도 없고, 물려받은 가산도 없었다.  농사에는 뜻이 없었기에 가업과 처자를 돌보지 않고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그 동안 장사도 하고, 의술, 복술(卜術)등 잡술에도 손을 댔으나, 그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10년간 팔도 이곳 저곳을 방랑하고 다시 고향인 경주로 돌아왔다. 이렇게 떠돌아다니면서 세상 인심도 살폈다.  그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그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팔도강산  다밝아서  인심풍속  살펴보니  無可奈라  할길없네  우습다    세상사람  不顧天命  아닐는가” <몽중노소문답가> 이 시에서 세상 인심과 풍속이 각박해진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천명을 알기 위하여 온 정성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는 나이 36세가 되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1859년 10월 가족을 데리고 용담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7개월 정도 지난 1860년 4월 5일에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했다.   종교체험에 대한 수운의 표현을 보면, 감각적으로는 ①천지가 진동하는 듯 했고 ②마음이 섬찟해지며 몸이 떨렸으며 ③질병에 걸린 듯한 상태도 나타났으며 ④밖으로부터 말씀이 들려 오는가 하면 안으로부터 가르침이 내렸다.  ⑤그리고 생전 못 본 물형의 부도(符圖)도 뚜렷이 보였으며 ⑥영기(靈氣)같은 것이 몸을 감싸는 느낌도 받았다.   심적인 현상으로는 ①무섭고도 두려웠으며 ②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으며 ③‘한울님’의 실체감이 너무나 생생했고 ④지금까지 문제로 삼았던 과제들이 일시에 해결되어 미래가 열리는 무한함을 느꼈다.  ⑤그리고, 세계의 의미가 전도되어 충만함과 환희감이 고조되었으며 ⑥무엇인가 피할 수 없는 사명감이 강압적으로 내리는가 하면 ⑦새 역사 창조 의욕이 넘쳐흘렀다. 또한, 신비적 체험의 궁극적인 경지는 ①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나 ②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한울님 마음이 곧 대신사의 마음이 되었다)의 신인합일(神人合一)에 도달했다.3) 최제우의 포교는 道를 얻고 바로 시작하지 않고 이듬해인 1861년 6월부터 포교를 시작했다.  뜻밖에도 그의 가르침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관헌에서도 알게 되었다.  관에서는 포교를 중단하라는 엄한 경고가 내려졌다.  이 경고 때문에 그는 11월에 제자 최중희만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남원으로 갔다.  여기서 서공서라는 사람을 만나 입적 시킨 후 이 사람의 후원으로 교룡산성 내 은적암에 들어갔다.  그는 은적암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敎訓歌, 論學文, 道修歌, 勸學歌”를 저술했다. 수운은 1862년 3월에 경주로 돌아왔다.  다시 사람들이 모였고, 이것을 안 관은 논의 끝에 수운을 체포했다.  이것은 1861년 10월과 같은 위협적 경고와는 달랐다.  왜냐하면 수천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 위험스러웠기 때문에 東學을 못하게 하려는 탄압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석방 압력으로 관은 폭동의 위협을 느끼고 무죄로 석방시켰다.4) 신도가 늘어나자 신도들의 조직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는 명지에 접소를 두고 접소에 접주를 두어 그 지방 신도를 다스리게 했다.  이것이 바로 “接主制”라고 하는 것인데, 東學으로서는 가장 처음의 교회 제도다.   최제우는 포교와 더불어 신도의 교화와 결속에 힘을 썼다.  많은 신도들 가운데는 빠른 시일에 세상이 변하고, 자신이 잘사는 세상을 기대하다가 이루어지지 않자 이탈하려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참된 믿음의 태도와 목적을 역설하였다.   한편 최시형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8월에는 그에게 모든 일을 맡겼다.  그리고 12월 10일 선전관 정운구에 의해 체포되어 과천까지 압송되었다가 대구로 내려가 이듬해 1864년 3월 10일 40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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