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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선문답 – 신통묘용, 백장회해, 조주종심
신통묘용(神通妙用) 馬祖道一의 제자 방거사(龐居士)지음 일상사가 다를 것이 없나니 내가 스스로 하나가 될 뿐 무엇이나 취사(取捨)없으매 어디서건 어긋남은 없도다 주자(朱紫)를 누가 귀하다 이르던가 청산에는 한 점의 티끌조차 없는 것을… 신통묘용이 무어냐 하면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일 日用事無別 唯吾自偶諧 頭頭非取捨 處處勿張乖 朱紫誰爲號 丘山絶點埈 神通幷妙用 運水及搬柴 <선시p 148> —- 선의 생활철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백장 회해(百丈懷海) * 한번은 어떤 승려가 백장에게 “부처는 누구입니까?” 하고 묻자, 이에 스승인 백 장은 “ 그대는 누구요? ”라고 하더라. <선학의 황금시대p181> ——조동종의 사상과 연결시켜 본다면 우리 모두가 부처임을 느낄 수 있다. * 조주 종심 * 한 신참자(新參者)가 사과하는 말투로 趙州에게 말하였다. “이렇게 빈 손으로 왔습니다.” “그러면 내려놓게 !” “아무것도 가져 온게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습니까? ” “그럼 계속해서 들고 있게나 !” 선의 경지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빈 손만으로 충분치 않다. 더욱 중요한 것은 ’빈 마음(空心)’을 지녀야만 한다. 무지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벌써 자기 마음이 自我로 가득함을 의미한다. <선학의 황금시대p223> 한 스님이 선학의 근본 요지(根本要旨)를 들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趙州는 변명하듯 거절하며 말하기를 “오줌 좀 눠야겠군. 생각해 보게나, 이런 사소한 일조차도 나 자신이 몸소 해야 하는데 !” —- 선의 깨달음은 다른 이가 대신 깨달아 줄 수 없다. 물을 건너다가 동산 양개(洞山 良价) 아예 타자(他者)에게 구하지 말지니 멀고 멀어 나하고 떨어지리라 나는 이제 홀로 가면서 어디서건 그와 만나나니 그는 이제 바로 나여도 나는 이제 그가 아니로다 응당 이러히 깨달아야 바야흐로 진여(眞如)와 하나 되리라 —— 선의 깨달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중요 선문답 – 달마, 혜능
중요선문답 9. 重要禪問答 禪 詩 : 禪 問 答 * 달마 * 혜가가 달마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었다. “제 마음은 평안을 찾지 못했읍니다. 청컨데 제 마음을 진정시켜 주십시오.” 이에 달마가 이렇게 말하였다. “ 어디 자네 마음이라는 것을 내놓아 보게. 그러면 내 그것을 진정시켜 줌세.”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끝에 혜가는 스승에게 오랫 동안 마음을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달마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자, 이제 내 이미 자네 마음에 평화를 주었네 !” <선학의 황금시대 p91 > * 혜능 * 어느 날 두 중이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다가 열띤 논쟁으로 이어가게 되었다. 한 중이 말하기를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 중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우기고 있었다. 이를 본 혜능이 나서서 말하기를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아니요 깃발도 아니라, 단지 그대들의 마음일 뿐이요.”
십우도
8. 十 牛 圖 74> 禪에는 흔히 十牛圖라고 부르는 조그만 텍스트가 있다. 소를 잃어버린 牧者가 野性으로 돌아가 있던 그 소를 다시찾아내 길들임으로써 소와 하나됨을 실현해 나간다는 열 개의 연속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인간 본래의 참모습, 즉 “참된자아”를 자각해 나가는 모습을 열 단계로 나누어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각 단계의 경지를 나타내는 열 개의 그림과 그림 사이의 다이내믹한 관련성은 자기실현의 과정과 모습들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그림 하나하나마다 붙어있는 간결한 서문과 偈頌은 각 단계에서 자기 경지의 위상을 설명하고 있다. 12세기 후반 북송 시대 말엽 廓庵禪師가 지은 이 十牛圖75>는 원래 禪門의 수행자를 위한 기초적 입문서이며 지금도 그와 같은 용도로 쓰이고 있는데, 이 십우도에는 “自己”라는 본질적인 문제, 즉 자기가 겪어가는 “자기의 온갖 모습”과 그 사이의 關聯性이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十牛圖를 단순히 禪에 관한 것으로만 한정치 않고, 현대인의 입장에서 새롭게 ‘자기의 現象學’이라고 이해해 나갈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十牛圖는 각각의 단계에서 자기가 자기에게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나타남(現象)’을,‘참된 자기’를 꿰뚫는 자각의 빛으로 조명함으로써 단계적인 자기를 초월해 참된 자기로 통하는 길을 열어 보여준다. 제 1 도 : 尋牛 (소 찾아 나서다) 잃어버린 심우를 찾아 가는 初發心의 단계를 나타낸다. 참된 자기를 찾는 바로 그 태도가 참된 자기의 시작인 것이다.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참된 자기’를 향한 첫걸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에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힘 빠지고 정신 피로하여 소 찾을길 없는”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에서 “들리는 것은 늦가을 나뭇가지 매미 울음 뿐”이다.76> 제 2 도 : 見蹟 (자취를 발견하다) 여기서 牧者는 소의 발자국을 발견하다. 불교의 표현을 빌면 “경전에 의거해 뜻을 이해하고 가르침을 배워서 자취를 아는”경지인 것이다. 경전을 배우고 가르침을 들어서 理致上으로는 참된 자기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막다른 곳에 봉착한 그가 절망 상태 속에서 “참된 자기”의 발자취로서 어떤 가르침과 마주치는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77> “스스로”라는 것이 전혀 불가능해졌을 때 機緣에 따라 제시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제 1 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맞부닥친 이 막다른 곳은 가르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앞선 자의 모범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한 전제였다. 이제 그는 가르침을 통해 몇가지 理致를 알고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아직 理致를 理致로서 지해 ( 知解:지식으로 이해 ) 한데 불과하고 이치를 나타낸 언어가 나오게 된 근원은 여전히 은페돼 있다. 오히려 그 이치를 전개한 “經典”이나 “가르침”의 말에 묶여 자유롭지 못하다. 제 3 도 : 見牛 (소를 보다) “성품을 보고”(見性) 매사에 한치의 허술함도 없이 단련함으로써 몸 위에 자기의 “참된 성품”(眞性)을 확실해 해 나간다. 이렇게 나날이 공부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가 조금씩 자기로 되어간다. 제 4 도 : 得牛 (소를 얻다) 이 그림에서 소는 全身을 드러내고 저쪽을 향해 여전히 달려가려고 한다. 목자는 소의 고삐를 온몸으로 힘껏 당기고 있다. 그 고삐에 의해 참된 자기와 참된 자기를 찾는 자기와의 統一이 具體化 되어있다. 이 단계에서 고된 수행을 통해 분열을 통일하는 것은 재분열을 미연에 방지하는 加重的 統一의 지속적인 긴장 속에서 분열의 힘이 차차 통일 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제 5 도 : 牧牛 (소를 기르다) 이 그림에서 牧者와 소는 그 통일 속으로 차차 녹아들면서 行이 “안락의 법문”이라는 본래의 특질을 나타내게 된다. 앞장서서 걸어가는 목자를 소는 스스로 따라서 간다.78> 여기서 비로서 소의 얼굴이 드러난다. “本來面目”의 진정한 의미는 겨우 여기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다.79> 또한 여기서는 牧者와 소 사이의 고삐가 이미 느슨해져 있다. 즉 이 경지에선 제 4 도처럼 자기의 統一이 緊張的 統一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統一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제 6 도 : 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다) 제 5 도의 단계에서 牧者와 소는 肯定的 統一을 이루고 있지만 여전히 二重的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 오면 牧者와 소는 이미 한 몸이 되어 자기에 대한 분열과 갈등들이 그쳐 있기 대문에 자기 존재는 저절로 詩的 趣向을 띠게 된다. 목자와 소의 통일이 완전히 자연스러워지고, 그 한 몸이 된 자연스러움은 저절로 天地 自然과 交響하면서 피리 소리가 된다. 목자가 피리를 불고 있다기보다는 목자와 소의 一體性이 “天地와의 一體性”이라는 곡을 불고 있는 것이다. 그 소리는 “한량없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제 7도 : 忘牛存人 . 到家忘牛 (소는 잊고 사람만 존재한다)80> 여기서 주제를 “소를 잊음”이라고 한 까닭은 소와 완전히 合一 ( 지금 현재 철저히 자기화 됨) 한 탓으로 더이상 별개의 소로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현재 소이기 때문에 소의 일은 모두 잊혀지게 된 것이다. 이 단계에서 나와 소는 一如속에 있으며 하나의 완성이기도 하다. “본래의 자기를 찾는 자기”가 “본래의 자기”를 찾았고 결국은 이 둘이 하나가 된 상태(一如)에 도달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과연 완성일까?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자신이 “있다”(有)는 데 있다. 제 1 부터 제 6 까지는 각각의 그림이 보여주듯이 제각기 자기 방식대로 활동해 나갔다. 이 단계들은 모두 自己自身을 향한 自己의 實存運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결국은 소와 내가 하나가 되는 一如의 단계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도달한 후 스스로 그 경지에 만족하는 바로 그 순간에 활동은 정지되고 거기에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활동이 정지된 것 자체가 逆轉의 始作이기 때문이다. 제 8 도 : 人牛逑忘(사람도 소도 모두 잊다) 소뿐만 아니라 제 7 의 사람 자체도 잊어버린 경지이다. 그림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텅 빈(空) 것 만이 있다. 제 7 도에서는 소가 사라지고 自己自身에 安住한 사람이 그려져 있었지만, 이제는 그 사람도 집도 풍경도 모두 단숨에 자취도 없이 떨쳐버린 絶對無의 경지가 제 8 의 단계이다. 일체의 수단(十牛圖에서는 여기가지 오는 과정)을 쓸어버린 제 8 도의 이 텅 빈 圓相은 제 7 도에서 현성한 자기자신을 전면적으로 버려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81> 제 7 도에서 제 8 도로 가는 과정은 지금까지처럼 “成就”하는 것이 아니라 “還滅”하는 것이다.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크나큰 죽음”(大死)이며 여기서 결정적인 非連續的 飛躍이 있다. 즉 여기서는 決定的인 向上의 飛躍的 轉換이 發生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잊지말아야 할 것이 있다. 여기서 아무것도 없음은 有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無가 아니다. 여기서의 無는 有와 無의 구별도 없는 有無가 있기도 전의 완전한 絶對無이다. 絶對無는 有와 對立하는 無 역시 부정한다. 佛敎의 경우 본디 實體的 思惟를 해체하는 智慧의 作用이 “空觀”이며, 그 空觀에서 實相이 나타난다. 절대무는 비실체적으로 “없음도 없는 (無의 無)”것으로 바뀐다. 대승불교의 일반적 표현방식에서 空은 “空 또한 空”이며, 따라서 色卽是空 空卽是色인 것이다. 그리고 이“空 또한 空”,“없음도 없다 (無의 無)‘로 바뀌는 데에서 ”“생명의 뿌리를 끊고 , 끊은 뒤에 다시 되살아나면서”“자기 아닌 자기”로 부활한다. 그러나 禪의 과정이 여기서 끝나는 것 역시 아니다. 여기서 끝나버린 다면 “禪은 虛無主義다”라는 비난이 타당성을 얻을 것이다. 十牛圖에서 제 8 의 단계는 제 9 도에서 부활한다. 제 9 도 : 返本還原 (근원으로 돌아가다) 이 그림에는 단지 흐르는 냇물과 물가에 꽃 핀 나무가 전부이다. 그 광경은 참된 自己의 自然이다. “참된 자기”의 現象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의 내적 상태가 외적 자연을 통해 비유적으로 표현되고 있거나, 혹은 내면적인 이미지 (心象風景)가 可視的인 풍경으로 투영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인간과 자연 둘이 하나가 됐다는 의미도 아니다. 절대 무에서 부활할 때 동시에 그 절대무에서 現前한 山水는 즉각 “자기 아닌 자기”중 “자기 아닌”인 것이다. “끊어진 뒤에 부활한” “자기 아닌 자기”를 그 “자기 아닌”의 無我性에서 비대상적인 방식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이다. 물 흐르고 꽃 피는 그 일이 이 경지에선 자기가 “자기 아닌 일” 바로 그것이다. 혹은 ”자기 아닌 자기“는 그 무아성에서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를 부활의 신체로 삼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이 무아의 신체에서 “자기 아닌 자기”가 “자기 아닌 자기”를 투명하게 얘기하고 있는 그것이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라는 말인 것이다. 또 제 8 의 단계에서 제 9의 단계로 가는 것은 단계적인 상승이 아니라 상호 透入하고 相卽互轉하는 작용의 양면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는 객관적 검증이나 논리 자체가 이미 타당성을 잃어버린 영역이다. 오히려 이 경지만 본다면 詩的 世界라고 할 수 있다. “부정이 곧(卽) 긍정” = “긍정이 곧(卽) 부정”인 이 즉(卽)에서 有와 無가 상호 침투하기 때문에 이 당처에서 자연은 가장 현실적임과 동시에 가장 환상적인 것이다. 제 10 도 : 入廛垂手 (저자에 들어가 손을 드리우다) 괴롭고 복잡한 인간세계에 들어가 利他行을 한다는 뜻이다.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다”로서 무아성을 구체화한 “자기아닌 자기”가 인간세계에 자기로서 나타나 자기 전개를 하면, 그것은 저절로 타자로 하여금 참된 자기를 깨우치게 하는 道가 된다.1) 일반적으로 대승불교는 “스스로를 깨우치고 남도 깨우친다”(自覺覺他)고 말한다. 자기의 깨우침(自覺)은 남을 깨우치는 데서(覺他) 그 깨달음이 증명된다. 참된 자기는 “열반에 머물지 않고”거리로 나가 타자와 교류한다. 그러나 절대무로 부터 나왔다고 해서 절대무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제 10 도도 제 9 도와 마찬가지로 제 8 과 相卽相入한다. 제 10 의 경지는 自己와 他者가 만나서 교류하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제 10 도에서 마주보는 두 사람이 나타난 까닭은 참된 자기가 “마주 본 두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매우 중요하다. 끊어지고 난 뒤에 부활 한 자기는 절대무로서 타개되고 있으며, 자타 두 겹으로 되어 있다. 자기는 자타 “사이”에서 진실로 타개되고 있으며, 그 “사이”가 자기의 고유한 내면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人“間”(사람사이)가 참된 자기이다.
간화선과 묵조선의 논쟁
3) 看話禪과 黙照禪의 논쟁 이제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던 看話禪과 黙照禪의 논쟁에 대하여 살펴보자. 흔히 看話禪의 大慧의 비판이 黙照禪의 宏智에 대한 비판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이것에 대한 근거는 없다. 단지 大慧의 비판은 본각적(本覺的)인 원리에 떨어져 이원적이고 점수적(漸修的)인 고좌(姑坐)에 집착되어 있는 사선(邪禪)에 대한 비판이다. 또한 문헌적으로도 大慧가 굉지(宏智)에 대해 비판하였다기보다는 宏智와 같은 黙照禪의 진헐청료(眞歇淸了)의 黙照禪에 대하여 지적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眞歇淸了는 당시 따르는 사대부들이 많고 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문헌에 나타난 大慧의 黙照禪에 대한 비난과 大慧가 귀양을 간 후에도 편지로서 사대부들에게 공안선의 참구법을 가르친 점 등을 보아 眞歇淸了 주변의 黙照姑坐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그렇기에 大慧의 비난은 黙照禪의 전체적인 것이라 볼 수 없겠다. 만약 大慧가 黙照禪 전체에 대하여 비난을 할 경우, 大慧 역시 2가지 관점에서의 오류를 범하게 되기때문이다. 첫번째는 조사선의 역사로 볼 때 달마 벽관(壁觀)의 기본정신아래, 본각적인 頓悟禪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는 黙照禪이 정통적인 입장이라고 인정받기에 黙照가 邪禪이라면 달마나 혜능,마조나 임제의 禪도 邪禪이 되는 것이다. 두번째는 宏智가 찬술한 「지유암명(至遊庵銘)」에서 宏智는 至遊禪이라 불릴 수 있는 그의 선사상을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오는 至遊는 원래 열자(列子)에서 나오는 말로서, 여기에선 깨달음의 경지에서 法界에 자유롭게 거니는 유희삼매(有戱三昧)의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黙照禪이 단순한 좌선의 정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72> 지금까지 비교해본 黙照禪과 看話禪에 있어서 그 특징은 黙照禪은 坐禪修行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아닌 그 목적으로 삼아, 坐禪修行의 行함안에서 見性成佛을 이루는 禪수행의 실천적인 면을 보여주는 반면, 看話禪은 ‘無’자 公案의 참구를 통한, 즉 현실적 실천적인 면에 있어서 사변으로서 修行證得을 행하며 단지 坐禪을 見性成佛하기 위한 수단방법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후대에 黙照禪은 일본으로 전래되어 독자적인 일본의 曹洞禪에 그 영향을 주었으며, 看話禪의 ‘無’자 公案은 그 후 無門關에 이르러 그 극치를 이루며, 일찌기 북종선에서 주장한 간심간정(看心看淨)의 坐禪과 남종선에서 주장한 見性主義 禪思想을 새롭게 조화시키고 있다.73>
간화선 묵조선
7. 看話禪 과 黙照禪 선사상이 발전하였던 송나라 시대의 선종의 특징은 첫번째로, 이 시기에 不立文字 見性成佛 등의 사상이 확립되었고, 두번째로 법맥을 전하는 표시인 전등을 존중하는 사상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선원에서만이 아니라 승려들의 생활이 일반적으로 선종의 청규를 의지하게 되었고, 네번째로서 불립문자의 가풍속에서 일반적으로는 선시,선문학등이 왕성하게 유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섯번째로는 선사상의 중심적인 흐름이라 할 수 있는 看話禪과 黙照禪이 대립하여 서로 비판하며 공박하는 양상을 띄었다는 것인데, 이제 여기서는 서로 대립하였던 看話禪과 黙照禪의 관계를 보도록 하려고 한다.70> 1) 묵조선(黙照禪) 黙照禪은 송대의 曹洞宗에서 祖師禪의 정신을 坐禪의 실천으로 새롭게 체계화하여 전개시킨 것이다. 黙照禪의 대표적 인물로서는 굉지정각(宏智正覺)을 들 수 있으며, 黙照禪에서의 묵(黙)은 묵묵히 좌선하는 것이요, 조(照)는 조용(照溶)으로 심성의 영묘한 깨달음의 작용을 말한다 할 수 있다. 이러한 黙은 좌선의 실천의 수행을 전개하는 모습으로, 照는 깨달음의 주체인 청정한 불성이 스스로 비추고 있는 것으로 黙照는 바로 수행과 깨달음이 하나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것을 宏智는 「묵조명」에서 “묵묵히 일체의 언어를 끊고 좌선할 때에 불성의 영묘한 작용이 분명히 깨달음의 세계로서 그대로 드러난다… 텅비어 있지만 그 불성의 본체는 영묘히 작용하고 있다. 영묘히 작용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비추며, 깨달음의 세계는 언어와 분별을 초월하고 있다… 깨달음의 세계는 묵묵히 좌선하는 그곳에 있으며… 묵묵히 좌선할 때에 삼라만상이 모두 광명을 놓아 설법하고 저들이 각각 증명하고 각자가 문답을 한다. 그러한 문답과 증명은 잘 맞아 하나가 되어 상응될 때, 깨달음으로 비춘 세계(照)에 좌선(黙)이 없으면 곧 미혹하게 되버린다… 黙照의 이치가 원만할 때 연꽃이 피고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라고 한다. 또한 宏智語錄에 보면 黙照禪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坐禪하고 있는 사람은 修行도 깨달음도 없다. 그는 汚染되지 않고 청정하다. 본래 지혜의 빛은 위로부터 비추어 공의 세계에 작용하여 근원적인 깨달음의 지혜의 작용에 응하여 공의 세계에 그대로 비추어 주고 있는데, 이때에 차별심이 없어지면 깨달음(黙照)의 세계가 된다. 이렇게되면 언제 어디서나 부처의 세계를 현출(現出)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黙照禪은 수증불이(修證不二 : 깨달음과 수행은 둘로 나뉘지 않는다)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좌선에만 매이는 선승들의 경향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대혜(大慧)의 비판을 받게 되었다.71> 2)간화선(看話禪) 看話禪은 송(宋)대에 정통적인 禪의 계승이라 할 수 있는 黙照禪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입장에서 선 실천적인 禪 思想이라 하겠다. 看話禪의 대표적인 인물로서는 大慧宗姑가 있다. 대혜(大慧)는 잘못된 묵조고좌선(黙照姑坐禪)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선의 입장인 看話를 부각시켰다. 看話는 옛 조사들이 깨닫게 된 기연(機緣;因緣)인 공안(公案)을 참구하는 새로운 禪 수행의 방법이다. 公案은 법칙의 조문(條文)을 말하는 것으로, 「산방야화(山房夜話)」에서 보면 “公은 천하의 사람들을 깨달음의 길로 가게하는 가르침(理致)요, 案은 깨달은 이치로 나아가는 올바른 방법이다.”라고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公案을 참구하는 것은 그 公案이 타파되기 전까지는 계속 公案과 대결해야 한다. 그리하여 생사의 윤회에서 해탈한 三昧를 얻어야 하는 것이다. 大慧가 인용하는 公案의 대표적인 것은 ‘무(無)’이다. 이것은 조주(趙州)가 사용한 말로써, 大慧는 이 글자로 인하여 문자 가운데서 증거를 찾으려 해서도 안되며, 일체의 분별심,차별심을 억누르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無’라는 화두(公案)을 참구하라고 한다. 이러한 公案은 자기의 심지를 개발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趙州의 ‘無’자 公案을 참구하도록 강조한 것은 5조 법연(法然)에서부터이다. 法然에 이어서 大慧가 이러한 ‘無’字를 참구하라고 하였고, 이러한 公案禪은 大慧이후에 새로운 公案禪으로서의 실천을 형성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무문혜개(無門慧開)의 「무문관(無門關)」으로 완성된 看話禪이다. 大慧가 주장한 趙州의 ‘無’字公案은 참선 수행의 中心이 되고 있다. 無門이 편집한 「無門關」48원칙의 公案중에 趙州의 無字 公案을 제1칙에 싣고 있음은 그러한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하겠다. 사실상 48칙의 公案은 趙州無字 公案 1칙의 전개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다. 무문관의 제1칙을 살펴보자면, “참선은 마땅히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하며, 절묘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보통의 심의식(心意識)을 완전히 끊어야 한다… 趙州의 無字 公案이 선종의 제일 관문이며, 이것을 「선종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이 관문을 뚫는다면 역대 祖師들과 같은 안목으로 법을 본다… 그러나 이 無字 公案을 참구하여 밤낮으로 이 문제를 집중하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