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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론 3

  2.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하나님은 아담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배필로서 해와를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동산 가운데에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을 비유하는 나무가 있었다면 그러한 여성을 비유하는 또 하나의 나무도 있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 ‘생명나무’와 같이 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창세기 2장 9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라고 한 그 나무는 실상 창조이상을 완성한 여성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해와를 비유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서에서는 예수 님을 포도나무(요한복음 15장 5절1)) 혹은 감람나무(로마서 11장 17절)로 비유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타락의 비밀을 암시하심에 있어서도 완성한 아담고 해와를 두 나무로 비유하셨던 것이다.               Ⅱ. 뱀의 정체  해와를 꼬여서 범죄케 한 것은 뱀이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창세기 3장 4-5절2)). 그러면 또 이 뱀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 우리는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그 내용에 의하여 뱀의 정체를 알아보기로 하자.  성경에 기록된 뱀은 인간과 담화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적인 인간을 타락시킨 것을 보면 그것도 영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 뱀이 인간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것은 더욱 영물이 아니어서는 안된다.   또 요한계시록 12장 9절2)을 보면, 하늘에서 큰 용이 땅으로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옛 뱀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해와를 꼬인 그 뱀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 뱀이 하늘로부터 내쫓겼다고 하였으니, 하늘에 있었던 그 옛 뱀이 영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한편 이 뱀을 마귀요 사탄이라고 하였는데, 이 사탄은 인간이 타락된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항상 인간의 마음을 악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온 것이 사실이니 그것은 영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사탄이 영물인 것이 사실이라면, 사탄으로 표시된 뱀이 영물임을 말할 것도 없다. 성서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사실로 보아, 해와를 꼬인 뱀은 동물이 아니고 어떠한 영적인 존재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처럼 뱀으로 비유한 영물이 과연 창세 전부터 있었던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것도 피조물 중의 하나였던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만일 이 뱀이 창세 전부터 하나님과 대립된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존재라면, 피조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선 악의 투쟁은 불가피한 것으로서 영속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결국 헛수고로 돌아가버리고 말 것이며, 모든 존재가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일원론은 깨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뱀으로 비유한 이 영물은, 원래 선을 목적으로 창조되었던 어떠한 존재가 타락되어 사탄이 되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적인 존재로서, 인간과 담화를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또 그 소재가 하늘이었고, 한편 또 그것이 만일 타락되어 악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심령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존재는 과연 무엇일 것인가 ?  천사 이외에는 이러한 조건을 구비한 존재가 없으므로, 우선 그 뱀은 천사를 비유한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후서 2장 4절3)을 보면,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를 용서치 아니하시고 어두운 지옥에 던져두셨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 말씀은 인간을 꼬여 가지고 범죄 하였던 뱀을 곧 천사라는 사실을 결정적으로 입증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뱀은 혀끝이 둘로 갈라져 있다. 따라서 그것은 한 혀로 두 말을 하고, 한 마음으로 이중의 생활을 하는 자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또 뱀은 자기의 먹을 것을 몸으로 꼬아서 먹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유혹하는 자의 표상이 된다. 그러므로 성서는 인간을 꼬인 천사를 뱀으로 비유하였던 것이다.               Ⅲ. 천사의 타락과 인간의 타락  우리는 위에서 인간을 꼬여 타락케 한 뱀이 바로 천사였으며, 이 천사가 범죄 하여 타락됨으로써 사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면 다음으로 우리는 천사와 인간이 어떠한 죄를 저질렀는가 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1. 천사의 범죄  유다서 1장 6절에서 7절4)에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기록되어 잇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천사가 간음으로 타락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간음이란 혼자서는 행할 수 없는 범행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행하여진 천사의 간음에 있어 그 대상이 되었던 존재가 무엇이었던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인간은 어떠한 죄를 저질렀던가하는 것을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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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론 2

 오늘날의 기독교 신도들은 모름지기 성서의 문자에만 붙들려 있었던 지난날의 고루하고도 관습적인 신앙태도를 버려야 하겠다. 선악과를 비유로 보아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을 비유하였을 것인가 ? 우리는 이것을 해명하는 방법으로서, 창세기 2장 9절1)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에덴동산에 있었다고 하는 ‘생명나무’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이 ‘생명나무’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그와 함께 있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무엇이라는 것도 바로 알 수 있겠기 때문이다.          1. 생명나무  성서의 말씀에 의하면, 타락인간의 소망은 ‘생명나무’앞으로 나아가 ‘생명나무’를 이루는 데 있다. 즉 잠언 13장 12절2)을 보면, 구약시대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민족도 ‘생명나무’를 소망의 대상으로 바라고 있었던 것이고, 요한계시록 22장 14절3)의 기록을 보면, 예수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기독교 신도들의 소망도 역시 ‘생명나무’에 나아가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타락 인간의 궁극적인 소망이 ‘생명나무’인 것을 보면 타락 전 아담의 소망도 ‘생명나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복귀과정에 있는 타락 인간은 원래 타락전 아담이 이루려다가 못 이룬 바로 그 소망을 다시 찾아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 24절4)에 아담이 범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화염 검으로써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그의 길을 막아 버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로 보아도 타락 전 아담의 소망이 ‘생명나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실로 보아도 타락 전 아담의 소망이 ‘생명나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은 타락으로 인하여 그의 소망이었던 이 ‘생명나무’를 이루지 못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 때문에(창세기 3장 24절), 그 ‘생명나무’는 그 후 한결같이 타락인간의 소망으로 남아져 내려왔던 것이다.  그러면 완성될 때를 바라보며 성장하고 있던 미완성한 아담에 있어서의 소망이란 무엇이었을 것인가 ? 그것은 그가 타락되지 않고 성장하여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생명나무’의 내용을 바로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은 곧 완성한 아담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생명나무’는 결국 완성한 아담을 비유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아담이 타락되지 않고 ‘창조이상을 완성한 남성’이 되어서 ‘생명나무’를 이루었다면, 그의 후손들도 모두 ‘생명나무’가 되어 지상천국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나무’로 나아가는 그의 길을 화염 검으로 막아버리고 말았다(창세기 3장 24절). 그렇기 때문에 ‘생명나무’는 창조이상을 복귀하려는 타락인간의 소망으로 남아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죄가 있는 타락인간은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창조이상을 완성한 ‘생명나무’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인간이 ‘생명나무’가 되기 위하여는 로마서 11장 17절5)에 기록된 말씀대로, 창조이상을 완성한 한 남성이 이 지상에 ‘생명나무’로 오셔 가지고 모든 인간을 그에게 접붙이어 하나되게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러한 ‘생명나무’로 오셨던 분이 바로 예수 님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잠언 13장 12절6)에 의하면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고대하였던 ‘생명나무’는 바로 초림 예수 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24절에 명시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화염 검으로써 ‘생명나무’에로 나아가는 아담의 길을 막았기 때문에, 이것이 걷히지 않고는 인간이 ‘생명나무’에로 나아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도행전 2장 3절7)에 기록된 대로 오순절 날에 성도들 앞을 가로막고 있었던 불같은 혀 곧 화염 검이 갈라진 후에야 성령이 강림하여, 전 인류가 ‘생명나무’되시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 그에게 접붙임을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도들은 ‘생명나무’되시는 예수 님에게 영적으로만 접붙임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예수 님을 잘 믿는 부모라 할지라도 또다시 속죄를 받아야 할 죄악의 자식을 낳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아무리 잘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나온 원죄를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또 그 자식에게 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전편 제4장 제1절). 그렇기 때문에 예수 님은 지상에 ‘생명나무’로 재림하셔서, 온 인류를 다시 접붙이심으로써, 원죄까지 속죄해 주시는 섭리를 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의 말씀대로, 신약성도들이 또다시 ‘생명나무’를 고대하게 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 ‘생명나무’는 바로 재림 예수 님을 비유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이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생명나무’(창세기 2장 9절)를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의 ‘생명나무’로서 복귀하시려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담이 타락하여 창세기 2장 9절의 첫 ‘생명나무’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타락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님은 요한계시록 22장 14절의 후‘생명나무’로 재림하셔야 하는 것이다. 예수 님을 후아담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린도전서 15장 45절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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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론

        제2장 타락론  인간은 누구나 악을 버리고 선을 따르려는 본심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어떠한 악의 세력에 몰리어, 본심이 원하는 선을 버리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된다. 이러한 악의 세력 가운데서 인류의 죄악사는 연면히 계속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 악의 세력의 주체를 사탄이라고 한다. 인간이 이 사탄의 세력을 청산하지 못하는 것은, 사탄이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해서 사탄이 되었는가하는, 그 정체를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악을 발본색원함으로써 인류 죄악사를 청산하고 선의 역사를 이루기 위하여는, 먼저 사탄이 사탄된 동기와 경로와 그 결과를 밝히 알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명하기 이하여 우리는 타락론을 알아야 한다.             제1절 죄의 뿌리  이제까지 인간 속에 깊이 그 뿌리를 박고 쉬임없이 인간을 죄악의 길로 몰아내고 있는 죄의 뿌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안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기독교 신도들만이 성경을 근거로 하여, 인간조상 아담과 해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죄의 뿌리가 된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선악과가 문자 그대로 나무의 과실이라고 믿는 신도들과, 또 성서의 많은 부분이 그러한 것처럼 이것도 그 어떠한 것에 대한 상징이냐 비유일 것이라고 믿는 신도들이 서로 의견을 달리하여 제각기 구구한 해석을 하고 있을 뿐,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완전한 해명이 내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많은 기독교 신도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담과 해와가 따먹고 타락되었다는 선악과가 문자 그대로 어떠한 나무의 열매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의 부모 되시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자녀들이 따먹고 타락할 수 있는 과실을 그렇게도 보기 좋고 탐스럽게 만들어서(창세기 3장 6절1)), 그들이 손쉽게 따먹을 수 있는 곳에 두셨을 것인가 ?  예수 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태복음 15장 11절2))고 말씀하셨다. 하물며 먹는 것이 어떻게 인간을 타락케 할 수 있었을 것인가 ? 한편 인간의 원죄는 인간의 시조로부터 유전되어 나오고 있는 것인데, 먹는 물건이 어떻게 원죄를 유전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  유전은 오직 혈통을 타고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이 그 무엇을 먹었다고 하여 그 결과가 후손에게까지 유전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순종 여부를 시험하시기 위하여 선악과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고 믿고 있는 신도들도 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인간에게 사망이 따르는 방법으로써 그렇게 무자비한 시험을 하셨을 리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아담과 해와는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코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먹으면 죽을 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것을 따먹었다. 기아에 허덕였을 리도 없는 아담과 해와가 먹을 것을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그렇게 엄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어떠한 물질이 아니고 생명에 대한 애착까지도 문제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자극을 주는 다른 무엇이었음에 틀림없다. 즉 선악과가 이와 같이 물질이 아니라면 그것은 다른 무엇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성경의 많은 중요한 부분이 상징이나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데, 무엇 때문에 선악과만은 굳이 문자대로 믿지 않으면 안된단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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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4

이 최종적인 이념의 싸움에 누가 승리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를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민주주의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와 같이, 오늘의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를 굴복시킬 수 있는 아무런 이론도 실천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완전히 이루어지려면 바로 이 새 진리가 지금까지 민주주의세계에서 주창해 온 유심론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켜 유물론을 흡수함으로써, 온 인류를 새 세계에로 옮겨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이 진리는 역사 이래의 모든 주의나 사상은 물론, 모든 종교까지도 하나의 길로 완전히 통일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종교를 믿지 않으려는 것은, 하나님의 실재와 내세의 실상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적인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기만 한다면 믿으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세계에다 인생의 궁극의 목적을 세우고 나아가는 그 누구도 마침내 허무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은, 역시 인간의 천성의 발로로서 피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영적인 사실에 부딪쳐서 인생의 근본 목적을 현실세계에다 둘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다 두고 가야 할 것임을 깨달을 때에는, 누구나 이 한 길을 통하여 하나의 목적지에서 하나의 형제로서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온 인류가 하나의 진리에 의하여 하나의 형제로서 하나의 목적지에서 만나게 된다면, 거기에서 이룩된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 것인가 ? 이 세계는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따라, 인생의 양면의 무지에서 헤어나려고 몸부림쳐 온 인간들이, 그 암흑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진리의 빛 가운데서 함께 만나 가지고 하나의 대가족을 이룬 세계이다. 그런데 진리의 목적이 선을 찾아 이루려는 데 있고, 선의 본체가 바로 하나님이시므로, 그 진리에 의하여 도달된 이 세계는 바로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서로 형제애에 얽혀 사는 세계인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웃을 희생시킬 때에 느껴지는 옳지 못한 만족감보다도,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오는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는, 결코 그 이웃을 해칠 수 없게 되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마음의 깊은 곳으로부터 진정한 형제애가 솟구칠 때, 도저히 그 이웃에 고통을 끼치는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의 일거일동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부모가 되시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그 사회의 인간에 있어 서랴. 그러므로 이 새 진리가 인류 죄악 사를 청산한 새 역사의 시대에서 이루어 놓은 새 세계는, 죄를 지으려야 지을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범죄를 하게 되었던 것은 실상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어디까지나 관념적이요 실감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성을 실감하는 자리에서 범죄한 인간은 부득이 지옥으로 보내질 수밖에 없는 천법을 안다면, 거기에서 누가 감히 죄를 범할 수 있을 것인가 ? 그러므로 죄 없는 세계를 천국이라 할진대, 타락인간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찾아 나온 이 세계야말로 바로 그 천국인 것이다. 그리고 이 천국은 지상의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지상천국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지상천국을 이루시려는 데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위에서, 인간이 타락되었다는 사실과 이 타락은 인간이 생긴 이후에 되어진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거니와, 이제 하나님의 실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인간시조가 타락하기 이전, 창조본연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이루려 하셨던 그 세계가 어떠한 것이었던가 하는데 대한 답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에 관해서는 전편 제3장에서 논하겠거니와, 그 세계야말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진 지상천국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됨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를 이루지 못하고 죄악세계를 이루어 무지에 떨어졌었기 때문에, 타락인간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내 외 양면의 진리를 더듬어, 이 무지를 타개하면서 선을 지향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본연의 세계인 지상천국을 되찾아 나왔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역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따라서 새 진리는 타락인간을 그 창조 본연의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비롯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복귀과정에 있는 타락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야 된다.  그리고 인간은 과연 성서가 말하는 문자 그대로, 선악과라는 과실을 따먹고 타락되었는가 ? 그렇지 않다면 타락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 또 완전 완미하신 하나님은 왜 그 창조의 권능을 가지고 일시에 죄악인간을 구원하지 못하시는가 하는 것 등, 실로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혀 온 모든 문제들을 완전히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  피조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과학성을 살펴볼 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야말로, 과학의 근본이기도 한 분이시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세계를 복귀하여 나아가는 섭리의 역사임이 사실일진데, 그와 같이 모든 법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처럼 오랜 복귀섭리의 기간을 두시고, 아무 계획도 없이 무질서하게 이 역사를 섭리해 나오셨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죄악역사가 어떻게 출발하여, 어떠한 공식적인 섭리의 과정을 거쳐서 어떠한 모양으로 종결되어, 어떠한 세계에로 들어갈 것인가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간절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새 진리는 이러한 근본문제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명백하게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들이 명확하게 풀려지게 될 때, 우리는 역사를 계획하시고 이끄시는 어떠한 주체, 곧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더욱 부인할 수 없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 역사상에 나타난 모든 역사적인 사실들이, 바로 타락 인간을 구원하여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의 반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새 진리는 오늘날 문화권 형성의 세계적인 사명을 띠고 있는 기독교의 많은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명백히 풀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지성인들은 누구나 단순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인류의 구주라는 정도의 지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보다 깊은 뜻을 체득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신학계에서는 많은 논쟁을 벌여 나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 진리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인간과의 창조 원리적인 관계를 밝혀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에 못지 않게 어려운 문제로 되어 있는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해명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은 어찌하여 그 독생자로 하여금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게 하셔서만 가능하였던가 하는 것도 응당 풀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인하여 분명히 구속함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이래 어느 한 사람도 구주의 속죄가 필요없이 천국 갈 수 있는 죄없는 자녀를 낳아 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중생한 후에도 여전히 원죄를 그 자녀들에게 유전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닐 것인가 ?  이러한 실증적인 사실로 보아, 십자가 대속의 한계는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상 예수 이후 2천년 기독교 역사의 기간을 두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써 완전히 사죄함을 받았다고 자부하는 신도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죄 없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를 이루어 본 일은 한 번도 없었을 뿐 아니라, 위에서 이미 논한 바와 같이 날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기독정신은 점점 쇠미해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일진데,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 온 바 십자가 대속의 완전 속죄와, 그 결과적 사실의 불일치에서 초래되는 모순은 무엇으로써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가 하는 등 우리를 궁지에 빠뜨리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이 허다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대하고 있는 새 진리는 이에 대한 해답도 명백히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진리는 예수님이 왜 재림하셔야 하며, 또 그의 재림은 언제 어디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며, 천변지이가 일어나서 하늘 땅이 불에 소멸되어 없어질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것 등, 상징과 비유로 기록되어 있는 성서의 많은 어려운 문제들을 이미 예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 바와 같이 비사로써가 아니고 누구나 다 알 수 있도록 밝히 가르쳐 줄 수 있어야 한다.(요한복음 16장 25절1))  이와 같이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이 최종적인 진리는 어떠한 경전이나 문헌에 의한 종합적인 연구의 결과로나, 혹은 어떠한 인간의 두뇌에서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성서에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요한계시록 10장 11절2))고 말씀하신 바와 같이, 이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이 땅 위에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한 분을 보내셨으니, 그 분이 바로 문 선명 선생이시다. 이 분은 수십 성상을 두고 역사이래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넓고 넓은 그 무형세계를 헤매시면서 하늘만이 기억하시는 진리 탐구의 피어린 고난의 길을 걸으셨다.  인간으로 걸어야 할 최대의 시련의 길을 다 걷지 않고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최종적인 진리를 찾을 수 없다는 원리를 아셨기에 선생은 혈혈단신으로 영계와 육계의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의 수많은 성현들과 자유로이 접촉하시며, 은밀히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가운데서 모든 천륜의 비밀을 밝혀내신 것이다.   여기에 발표된 말씀은 바로 그 진리의 일부로서, 이것은 지금까지 그의 제자들이 듣고 본 범위의 것을 수록한 데 불과한 것이다. 때가 이르는 데로 더 깊은 진리의 부분이 계속 발표될 것으로 믿고 또 고대하는 바이다.  어둠길을 헤매던 수많은 생명들이 세계의 도처에서 이 새로운 진리의 빛을 받아 소생해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금할 길이 없다. 어서 속히 이 빛이 온 누리에 가득 차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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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3

 마치 마음과 몸이 완전히 합해야만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것과 같이, 본질과 현상의 두 세계가 완전히 합치되어야만 이상세계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마음과 몸이 그러하듯이, 본질세계를 떠난 현상세계가 있을 수 없고, 현상세계를 떠난 본질세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떠난 내세는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진정한 육신의 행복이 없이 심령 적인 기쁨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종교는 내세를 찾기 위하여 현실을 부정하기에 필사적이었으며, 심령 적인 기쁨을 위하여 육신의 행복을 멸시하기에 몸부림쳐 왔다. 그러나 끊어버리려야 끊어버릴 수 없는 현실과, 떼어버리려야 떼어버릴 수 없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육신의 행복 욕은, 끈덕지게 도인들을 붙들어 오뇌의 골짜기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인들의 도의 생활에도 이러한 모순성이 있는 바로 오늘의 종교인들의 생태인 것이다. 이와 같이 자가당착을 타개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 현대의 종교가 쓸모 없게 된 주요한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제 종교가 이와 같은 운명의 길을 가게 된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이 있다. 즉 과학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지성이 최고로 계발된 나머지, 현대인은 모든 사물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을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태의연한 종교의 교리에는 그런 과학적인 해명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 내적인 진리와 외적인 진리가 서로 일치된 해명을 가지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먼저 마음으로 믿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앎이 없이는 생길 수 없다. 우리가 경전을 연구하는 것도 결국은 진리를 알아서 믿음을 세우기 위함이요, 예수 님이 오셔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심도 그가 메시아 됨을 알려서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곧 인식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간은 논리적이며 실증적인 것 즉 과학적인 것이 아니면 인식할 수도 없게 되어 결국 종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내적인 진리에도 논증적인 해명이 필요하게 되어, 종교는 오랜 역사의 기간을 통하여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 시대를 추구해 나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와 과학은 인생의 양면의 무지를 타개하기 위한 사명을 각각 분담하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과정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상충하여 서로 타협할 수 없을 것 같은 양상을 보여 왔으며, 인간이 그 양면의 무지를 완전히 극복하여 본심이 요구하는 선의 목적을 완전히 이루자면, 어느 때든지 과학을 찾아 나온 종교와 종교를 찾아 나온 과학의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주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새 진리가 나와야 한다는 주장은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 신도들에게는 못마땅하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전이, 이미 그것만으로써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리는 유일하고 영원불변하며 절대적이다. 그러나 경전이란 진리 자체가 아니고 진리를 가르쳐주는 하나의 교과서로서,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차로 그 심령과 지능의 정도가 높아져 온 각 시대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진리를 가르쳐 주는 범위나 그것을 표현하는 정도와 방법에 있어서는, 시대를 따라서 달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교과서 마저 절대시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이 그 본심의 지향성에 의하여 하나님을 찾아 선의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방편으로 나오게 된 것이 종교이기 때문에, 모든 종교의 목적은 동일한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명분야와 그를 대하는 민족에 따라 또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위와 같은 이유로 그 경전을 서로 달리하게 되는 데서 필연적으로 각각 다른 모양의 종교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이란 진리의 빛을 밝혀 주는 등잔과 같아서 주위를 밝힌다는 사명은 같지만, 보다 밝은 등불이 나올 때는 그것으로써 낡은 등잔의 사명은 끝나는 것이다.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오늘의 어떠한 종교도 현세인 들을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생명의 밝은 빛 가운데로 인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새 빛을 발하는 새 진리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새로운 진리의 말씀을 주실 것은 성서 가운데에도 여러 군데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새 진리는 어떤 한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인가 ? 이 진리는 위에서 이미 논술한 바, 종교가 찾아 나온 내적인 진리와 과학이 찾아 나온 외적인 진리를 통일된 하나의 과제로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들을 내 외 양면의 무지에서 내 외 양면의 지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타락인간으로 하여금 악한 마음이 지향하는 그 악의 길을 막고 본심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 선의 목적을 이루게 함으로써 선 악 양면의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모순성과 위에서 이미 논한 바 종교인들이 당면하고 있는 도의 생활의 모순성을 극복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타락인간에 있어 ‘앎’은 생명의 빛이요 또한 소생의 힘이 된다. 그리고 무지는 사망의 그늘이요 또한 파멸의 요소인 것이다. 무지에서는 어떠한 정서도 일어날 수 없으며, 무지와 무정 서에서는 어떠한 의지도 생길 수 없다. 이렇듯 인간에게 있어 정 지 의가 제 구실을 못하게 될 때에는, 거기에 인간다운 인간의 생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도록 지어졌다면, 하나님에 대한 무지야말로 우리 인생을 얼마나 비참한 길로 몰아내고 있는 것인가 ? 그러나 하나님의 실재성에 대하여는 성서를 보아도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하물며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 서랴. 그러므로 이 새진 리는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하여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창조의 심정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자신을 반역하는 타락인간을 버리지 못하시고 유구한 역사의 기간을 두고 구원하시려고 애써오신 애달픈 심정을 우리에게 알려 줄 수 있어야 한다.  선과 악의 두 면을 지향하는 인간들의 상충적인 생활로써 형성되어 온 인류 역사는 거의 싸움으로 엮어져 내려왔다. 그 싸움은 바로 재물 빼앗기 싸움, 땅 빼앗기 싸움, 그리고 사람 빼앗기 싸움 등의 외적인 싸움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민족이 없이 한데 모여 한 국가를 이루고, 이제는 도리어 전쟁에서이긴 나라들이 식민지를 해방하고 그들에게 강대국들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여 유엔의 회원국가가 되게 함으로써, 함께 세계정부의 실현을 도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구대천의 국제관계가 하나의 경제문제를 중심하고 완화되어, 더불어 하나의 공동시장체제를 형성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오늘날 문화면에서는, 각 민족의 전통적인 이질성을 극복하고 동서양의 거리를 초월하여,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서로 유통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피할 수 없는 마지막 싸움이 하나 남아 있으니 그릇이 바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의 내적인 이념의 싸움이다. 그들은 서로 무서운 무기를 마련하고 외적인 싸움을 겨루고 있으나, 그 실은 내적인 이념의 싸움의 판가리를 하기 위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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