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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의

   Ⅲ. 부활의 의의  우리는 이제까지 인간이 목숨이 끊어져서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타락으로 인한 죽음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을, 성서가 의미하는 부활이라고 해석하여 왔기 때문에, 이미 타계한 성도들 들의 부활은 곧 흙으로 분해되었던 그 육신이 다시 원상대로 살아나는 것으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창조원리에 의하며, 이러한 죽음은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것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란 노쇠하면, 그 육신은 자연히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한번 흙으로 분해되어버린 육신은 다시 원상대로 부활할 수도 없으려니와, 영계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된 영인체가 다시 육신을 쓸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인간이 그의 타락으로 초래된 죽음 즉 사탄 주관권내에 덜어진 입장으로부터, 복귀섭리에 의하여 하나님의 직접주관권내로 복귀되어 나아가는 그 과정 적인 현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죄를 회개하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좀더 선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만큼 부활한 것이 된다.  성서에서 부활에 관한 예를 들어보면,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품속을 떠나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으로 돌아가는 것이 곧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한편 또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탄의 혈통을 이어받게 된 것이 사망이요, 여기에서부터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하늘의 혈통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을 의미한 말씀인 것이다.    Ⅳ. 부활은 인간에게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가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창세기 2장 17절)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된 아담과 해와는 죽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외형적인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변한 것이 있었다면, 불안과 공포로 인하여 순간적으로 그들의 안색이 변했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인간으로 부활된다 하더라도, 그의 외형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성신으로 중생할 사람은 중생하기 이전에 비하여 분명히 부활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이제 그와 강도를 비교해 본다면, 하나는 하늘편의 사람으로서 중생한 정도만큼 부활한 처지에 있고, 또 하나는 지옥에 가야 할 사람으로서 죽은 처지에 있지만, 그들의 외형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이미 위에서 예증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믿는 자는, 사망으로부터 생명에로 옮겨져서 부활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기 전 사망한 상태에 있을 때나, 예수를 믿고 생명에로 옮겨짐으로써 부활한 뒤나, 그의 육체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으로 오셨던 것이 사실이다(기독론 참조). 그러나 외형으로 본 예수님은 타락인간에 비하여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만일 그에게 다른 것이 있었다면, 당시의 측근자들이 그를 믿고 따르지 않았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인간은 부활로 인하여 사탄의 주관을 벗어나, 하나님과 심정의 일체를 이룸으로써 신성을 가지게 된다. 이렇듯 타락인간이 부활로 인하여 하나님의 주관을 받게 되면, 필연적으로 그 심령에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심령의 변화에 의하여 인간의 육신도 사탄이 들어와 사는 집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성전으로 사실상 성화되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육신도 부활 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악한 일을 위하여 사용되어 왔던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사용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성스러운 건물로 변화된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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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론

          제5장 부활론  성서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이미 흙 속에 파묻혀 삭아져버린 모든 성도들의 육신이, 다시 원상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나올 것으로 보아야 한다(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마태복음 27장 52절).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적인 처지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결국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진정한 내용을 해명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제1절 부활  부활이라는 것은 다시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야 하는 것은 죽었기 때문이므로, 우리가 부활의 의의를 알기 위하여는, 먼저 죽음과 삶에 대한 성서적인 개념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Ⅰ. 죽음과 삶에 대한 성서적 개념  누가복음 9장 603절의 기록을 보면, 부친을 장사하기 위하여 자기 집에 가려고 하는 제자에게,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죽음과 삶에 각각 서로 뜻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개념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장사를 치루어야 할 그 제자의 부친과 같이,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에 대한 생사의 개념이다. 이런 ‘죽음’에 대한 ‘삶’은 그 육신이 생리적인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둘째는 그 죽은 부친을 장사하기 위하여, 모여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여 말하는 ‘죽음’에 대한 생사의 개념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예수님은 현재 그 육신이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을 지적하여 죽은 자라고 말씀하셨던가 ?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배반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버린 자리, 즉 사탄의 주관권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서 사탄 주관권내에 떨어진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죽음’에 대한 ‘삶’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권내에서 그의 뜻대로 활동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그 육신이 활동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주관 권을 벗어나서 사탄의 주관권내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창조본연의 가치기준으로 보아 죽은 자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계시록 3장 1절에 기록된 바, 비신앙적인 세례교회의 신도들에게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한 말씀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 반면에 이미 육신의 목숨이 끊어진 인가니라 할지라도, 그의 영인 체가 영계의 천상천국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주관권내에 있다면 그는 어디까지나 살아있는 사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한복음 11장 25절)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주관권내에서 사는 사람은, 목숨이 끊어지고 그 육신이 흙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그 영인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주관권내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또 계속하여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지상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뜻이 아니라, 육신을 쓰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현재 살아 있는 것은 말할것도 없고, 후일 그가 죽어 육신을 벗어버리고 지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그의 영인체는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의 품 속에서 여전히 삶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위의 성구에 보인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에 있어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그 죽음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는 아무런 영향도 가져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인 것이다.  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하신 누가복음 17장 33절의 말씀도, 육신을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사람은, 비록 그 육신이 활동하고 있어도 그는 죽은 자요, 또 이와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육신을 희생하는 사람이고 보면, 설혹 그 육신은 흙 속에 묻혀 썩어버린다 할지라도, 그 영인체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영존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곧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Ⅱ. 타락으로 인한 죽음  우리는 위에서 서로 뜻을 달리하는 두 가지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 그 중 어느 것이 인간 시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초래된 죽음일 것인가 ?  하나님은 원래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어도, 노쇠하면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930세에 죽어 그의 육신이 흙으로 돌아갔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타락 때문에 온 죽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창조원리에 의하면, 육신은 영인체의 옷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어서, 옷이 더러워지면 벗는 것 같이 육신도 노쇠하면 벗어버리고, 그 영인체만이 무형세계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질로 된 생물체로서 영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도 이 창조원칙을 벗어날 수는 없으므로, 인간의 육신이라고 해서 영존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지상에서 육신을 쓴 채로 영존 한다면, 영인체의 가 곳인 무형세계는 당초부터 창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원래 무형세계는 타락한 인간의 영인체가 가서 살게 하기 위하여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들이 지상에서 생활하다가, 육신을 벗은 후에 그 영인체가 가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으로서 창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타락인간이 육적인 생명에 강한 미련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이 원래 육신을 벗은 후에는 보다 아름답고 영원한 무형세계에가서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타락으로 인하여 알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상에 있어서의 육신생활과 무형세계에 있어서의 영인생활은, 애벌레와 나비의 생활에 비교할 수 있다. 만일 애벌레에게 의식이 있다고 하면, 마치 인간이 육신생활에 대하여 애착을 느끼고 있듯이, 그도 역시 허물 속에 삶에 애착을 느끼어 벗고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애벌레가 일단 나비가 된 후에는 향기로운 꽃과 단 꿀을 마음대로 즐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인과 영인과의 관계는 바로 이 애벌레와 나비와의 관계와 흡사한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되지 않았다면, 지상인들은 같은 지상인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인들과도 자유로이 만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육신을 벗는 것이 결코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상에서 완성되어 생활하다가 노쇠한 후에, 육신을 벗고 가게 되는 그 영인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오히려 육신을 벗고 가게 되는 그 영인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곳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면, 오히려 육신을 벗고 그 세계로 갈 수 있는 날을 그리워하며 고대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논술한 두 가지의 죽음 중에서,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이 타락으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탄 주관군내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이 곧 타락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성서를 중심하고 좀더 상세히 검토해 보기로 하자.   타락으로 인한 죽음은, 곧 인간시조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초래된 바로 그 죽음을 말한다. 그러면 그 죽음은 어떠한 죽음이었을 것인가 ? 창세기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후에,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그들은 따먹은 그 날을 기해서 정녕 죽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은 아담과 해와는 오늘날의 우리들고 마찬가지로 여전히 지상에서 육신생활을 계속하면서 자손을 번식하여, 마침내 오늘의 타락한 인류사회를 이루어 놓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타락으로 인하여 초래된 그 죽음은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주관권으로부터 사탄의 악주관권으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죽음을 말하는 것임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성서에서 이에 관한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요한 1서 3장 14절에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사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이웃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지상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어디까지나 죽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와 동일한 뜻으로서 로마서 6장 23절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고 하였고, 또 로마서 8장 6절에는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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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보여준 교훈

     Ⅳ.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우리에게 보여준 교훈  아브라함을 중심한 복귀섭리는 첫째로 우리에게 ‘뜻’ 성사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어떠하신가를 보여주셨다. 복귀섭리는 하나님의 힘만으로써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인간책임분담이 합해져서만 비로소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려 하셨으나 그가 자기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이 어떠하신가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예정하셨으나, 그의 사명은 이삭을 거쳐 야곱에로 옮겨졌던 것이다.  세째로 복귀섭리는 인간이 그의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할 때에 그 뜻은 반드시 연장되고, 동시에 그것을 복귀하려면 보다 큰 것으로써의 탕감조건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서는 동물을 제물로 바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뜻이, 그의 실수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서야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네째로는 제물을 쪼개는 것으로써, 우리들도 각자를 제물로서 쪼개어 선과 악을 분립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제물의 입장에 세워 놓고, 선과 악으로 쪼개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축의 제물로 바치는 생활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중심하고, 자신을 쪼개지 않을 때에는 거기에 사탄이 침범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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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를 위한 기대

  ㄷ. 메시아를 위한 기대  이스라엘 민족은 정탐 40일의 사탄분립 기간을 세우지 못하여 제2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에 실패하고, 이 기간을 재탕감하기 위하여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을 출발하여, 광야에서 40년을 유리하고 다시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왔다.  이 대의 모세는 제3차 노정을 위한 믿음의 기대를 조성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은 성막을 위한 기대 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불신과 그에 따르는 모세의 반석 2타로 말미암아 이 두 기대는 모두 사탄의 침범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를 중심하고 애급에서 떠난 외적 이스라엘은 모두 광야에서 섬멸되었으나,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은 모세가 세웠던 제2차 노정의 믿음의 기대와 성막을 위한 믿음의 기대 위에서, 정탐 40일의 사탄분립기간을 믿은과 충성으로 찾아 세웠기 때문에 성막을 위한 기대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를 중심한 외적 이스라엘은 모두 광야에서 쓰러지고 말았으나, 성막을 받드는 광야생활 가운데서 출생한 내적 이스라엘은, 모세를 대신한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충성을 다하여 법궤를 모시고 요단을 건너 여리고성을 무지르고 소망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되어 제3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노정의 실체기대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서 이 노정의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이룩됨으로써, 아브라함 때에 이루어졌던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는 그의 제물 실수로 인하여 400년 애급고영의 탕감노정을 지나서야,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를 조성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나 이미 후편 제1장 제3절 Ⅲ에서 자세히 논한 바와 같이, 그 때는 이미 타락인간들이 사탄을 중심하고 애급왕국 등의 굳건한 왕국을 건설하여, 하늘편의 복귀섭리에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를 중심하고 메시아를 위한 민족적인 기대는 세워졌을 지라도, 그 터전 위에 사탄에 대결할 수 잇는 하늘편의 왕국이 건설되기까지는 메시아가 강림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들어간 내적 이스라엘도 또다시 불신으로 흘러, 이 섭리는 다시 연장을 거듭하여 예수님 때까지 밀려 나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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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기대

  2. 실체기대  세례요한은 모세와 같은 처지에 세워졌었기 때문에, 유대민족에게 있어 부모와 자녀의 두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부모의 입장에서 제1차 세계적 가나안 복귀를 위한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였기 때문에 동시에 자녀의 입자에서 ‘타락성을 벗기 위한 세계적인 탕감조건’을 세우는데 있어서의 아벨의 입장도 확립할 수 있었다(본장 제2절 Ⅰ.2). 따라서 세례요한은 모세가 바로궁중에서 40년간의 탕감기간을 지나고, 제1차 민족적 가나안 복귀를 위하여 믿음의 기대를 세웠던 입장을 세계적으로 찾아 세운 터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모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모세가 애급인을 쳐 죽이는 것을 보고 그를 믿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려 하였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사탄 국가인 애급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했던 것이지만, 세례요한을 중심한 유대민족은 로마제국을 떠나 다른 땅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권 밑에 있으면서 그들을 굴복시켜 그 제국을 하늘 것으로 복귀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세례요한을 중심한 기사 이적을 보여 주시어,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함으로써 ‘출발을 위한 섭리’를 이루시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잉태에 관한 천사의 놀라운 예고와 또 그 부친이 이것을 믿지 않았을 때 벙어리가 되었던 기사, 그리고 그가 출생할 때에 보여주신 이적 등으로 말미암아,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고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누가복음 1장 65~66절1))고 하신 성경의 말씀대로, 이스라엘민족은 세례요한의 출생시부터,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으로 목숨을 이어가면서 기도의 생활을 한 그의 빛나는 수도의 생애로 인하여, 제사장들과(요한복음 1장 19절2)) 일반 유대인들(누가복음 3장 15절3)), 그를 메시아로 잘못 알 정도로 그의 신망이 높았던 것이다.  모세가 바로궁중 40년의 탕감기간을 마치고 애급사람으로 죽였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그의 애국심에 감동되어 그를 믿고 따랐더면, 그들은 홍해를 건너거나 광야를 돌지 않고, 또 석판이나 성막이나 법궤도 필요없이 불레셋의 곧은 길을 통하여서 곧 가나안으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이 기사 이적으로써 믿음의 대상자로 세워 주신 세례요한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그들은 ‘타락성을 벗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 실체기대를 복귀함으로써, 메시아를 위한기대를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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