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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그 이후-증산교의 분열

(2) 증산교의 분열 참여자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고씨 부인은 1914년 강일순을 敎祖로 하고 자신을 敎主로 하여 선도교(善道敎, 일명 太乙敎)라는 명칭의 교단을 창립하였다. 교세가 커져 가자 차경석1)은 고씨 부인과 신자들간의 접촉을 차단하면서 자신이 교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다른 추종자들은 그의 법통성을 부정하고 교단을 이탈하여 별도의 교단들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고씨 부인 또한 차경석과 결별하고 새 교단을 창립하였으며, 이로부터 증산교의 분파현상은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이러한 이유로 인해 1915 – 20년 사이에 나타나게 된 증산교 교단으로서는 고씨 부인의 태을교(太乙敎)를 비롯하여 미륵불교(彌勒佛敎)·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 이치복의 제화교(濟化敎)와 삼덕교(三德敎)․ 박공우의 태을교(太乙敎)·문공신파(文公信派)교단 · 도리원파(桃李園派) 등이 있다.  ①대표적 교단 이렇게 분파현상을 보이는 와중에서 가장 급속한 성장을 보인 교단은 차경석의 교단이었다. 차경석은 교세가 날로 커지게 되자,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카리스마의 강조는 그의 천자등극설(天子登極設)로 극대화되었다. 특히, 3·1만세운동의 실패로 정신적 구심점을 상실한 民衆은 새 왕조가 건설되고 차경석이 새로운 천자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말에 쉽게 매혹되었다. 世間에서는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로, 그리고 그의 교단을 차천자교(車天子敎)로 불렀으며, 그의 심복들 가운데에서는 그에게 폐하(陛下)라는 칭호를 올리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반일적(反日的) 성향과 민족주의적 성격 그리고 궁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등으로 인해 하류계층에게 더욱 쉽게 퍼져 나가게 되었다. 거기에다, 이 교단에서 발급하는 교첩(敎帖)이 새 왕조에서의 벼슬을 보장할 것이라는 소문은 억압된 하류계급의 현세기복적인 욕구와 일치함으로써 많은 입교자들을 가져오게 되었다.  신도의 수효가 급증하자, 차경석은 교단조직을 60방주(方主)로 개편하고 1921년 9월 경남 함양군 황석산(黃石山)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다. 그는 그를 체포하려는 일본경찰과 헌병대의 포위망을 뚫고 1천여 명의 간부신도들과 황석산 정상에 올라 장엄한 제단과 촛불을 휘황찬란하게 밝힌 가운데서 국호(國號)를 ‘시국’(時國)으로, 그리고 교명(敎名)을 ‘보화’(普化)라고 선언하는 고천의식(告天儀式)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이 천제는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선포하는 의식이었으며, 차경석이 황제로 등극하였음을 하늘에 告하는 즉위식이었다. 이 사건 이후, 차경석과 그의 교단에 대한 소문은 더욱 널리 퍼져 많은 사람들이 이 교단에 들어오게 되었다. 보화교의 신자 수는 6백만 명을 호칭하였으며, 간부의 수효만도 557,7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2) 그러나 일본 경찰의 수사와 체포 활동이 강화3)되자, 차경석은 친일적 성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는 1922년 교명을 보천교(普天敎)로 개명(改名)하고, 1924년에는 기산조합(己産組合)이라는 신자들로 구성된 노동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친일사절을 일본정부에 파견하고, 동양인의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여 친일강연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차경석 자신의 권능강조와 친일적 경향은 교단 자체내에서 심한 반발과 내분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교단내에서는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일부 교단 간부들은 교단을 이탈하여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이 때, 보천교에서 새로 분파된 교단들로서는 신현철의 태을교(太乙敎)․동화교(東華敎)․서울 대법사(大法寺)․삼성교(三聖敎)․천인교(天人敎)․객망리파(客望里派)교단․수산교(水山敎)․홍로교(洪爐敎)․김옥환의 보화교(普化敎)․여처자의 선도교(仙道敎)․무을교(戊乙敎)․임무교(壬戊敎)․금산사 미륵불교 포교소․인천교(人天敎)․원군교(元君敎) 등이 있다.  ② 그 외 교단 한편, 차경석 이외의 강일순 추종자들이 세운 교단에서도 새로운 분파들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교단들로서는 순천교(順天敎)․법문파(法文派)․미륵계(彌勒禊)․김자현파․김사모파(金師母派)․오동정이파․태극도(太極道)․증산선불교(甑山仙佛敎)․정인표의 미륵불교(彌勒佛敎) 등이 있다.  일제시대의 증산교는 한때 1백개에 달하는 교파들을 갖고 있었고, 신자의 수효도 수 백만에 달했었다. 그러나 1938년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해산령’이 내려진 이후, 그 교세는 급격히 약화되었으며 대부분의 교단은 소멸되고 일부는 지하로 잠복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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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그 이후1

5. 죽음과 그 이후 1) 죽음 그는 1901년 7월 5일 道를 얻었다고 선언한 후부터 그가 죽은 1909년 8월 9일(陰曆 6월 24일)까지 9년동안 인류사회와 천계의 혼란을 광정(匡正)한다는 천지공사를 행했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의 행적을 통해 그들이 앞으로의 살기 좋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고, 특히 동학교도였던 이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답답한 현실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에 초조해 하기도 했다.  의병활동을 모의한다는 죄목으로 고부경찰서에 증산이 체포된 사건은 이러한 불안감을 더욱 가중시켰다. 때는 포교를 시작한 지 5년후인 1907년이었다. 추종자들도 함께 구속되었는데, 당시에는 의병혐의로 체포되면 총살을 당하는 경우가 흔하였다.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日兵과 충돌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속된 추종자들은 사형을 당하리라는 불안을 갖게 되었으며 증산을 원망하였다. 그러나 증거불충분으로 추종자들은 15일만에, 증산은 4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추종자들의 대부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이 믿고 있던 증산의 카리스마적 권능에 대해 회의를 갖게 되어 증산을 멀리하였다.  또한 세간에서는 이상한 술객(術客)인 증산이 사람들을 속여서 재산을 탕진하게 한다는 비난이 일기 시작하였으며, 추종자들은 증산이 평소에 말하는 천지개벽이 늦음을 그에게 원망하기도 하였고 그 중에는 자살을 하겠다고 하면서 조속한 천지개벽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신 원일 이라는 종도는 “천지를 개벽하여 새 세상을 건설한다고 한 지 이미 오래이며, 공사를 행한 지도 여러 번인데, 시대의 현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으니, 제자들의 의혹이 자심(滋甚)합니다. 하루 바삐 세상을 뒤집어서 선경을 건설하여 애타게 기다리는 우리에게 영화를 주십시오.”하자 증산은 人事란 機會가 있고, 天理에는 度數가 있다. 억지로 일을 꾸미면 천하에 재앙을 끼치고 억조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또 기유년 6월 초 열흘, 모든 종도들을 구릿골 약방에 모으고 모든 종도들을 한 줄로 꿇어앉히고 묻기를 “너희들이 나를 믿느냐?”하자 모두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증산은 다시 “죽어도 믿겠느냐?”하고 묻자 그들은 “죽어도 믿겠습니다.”하였다. 그러자 증산은 “나는 이미 천지공사를 다 마쳤으니 가겠다”고 하자 종도들은 “공사를 마쳤으면 나서십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증산은 사람이 없어서 못나선다고 하였고, 이에 김 경학이라는 종도가 “제가 비록 무능하지만 몸이 닳도록 두 사람의 일을 대행하려 합니다.”하자 “그렇게는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일이 있은 며칠 후 증산은 그에 대한 추종자들의 회의가 증대되는 가운데 39세인 1909년 8월 9일 아침 꿀물 한 그릇을 마시고 사망하였다.  2) 증산 사후의 교단 그의 사망으로 인해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그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고 해산해 버렸으며, 몇몇 소수의 추종자들만이 그의 장례를 치렀다.3) 그들은 원래 강일순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고 자신들은 큰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면보다는 현세복리적인 기대로 증산을 추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 같았던 증산이 죽음으로써 자신들의 기대가 허무하게 무너지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간부급에 속한 사람들은 오랜 실의와 진통을 거친 후 증산이 죽은 것이 아니고 선화(仙化)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증산이 평소에 제자들을 향하여 금산사 미륵불로 강림한다고 말해 왔으며, 사망 직전에도 “나는 금산사로 들어가서 佛養沓이나 차지하리라.” 또는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와서 미륵불을 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나의 얼굴을 잘 익혀두라. 후일에 내가 출세할 때에는 눈이 부시어 보기 어려우리라. 예로부터 神仙이란 말을 전설로만 들어왔고 본 사람이 없었으나 오직 너희들은 보리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1) 증산교의 재건 그러나 와해된 증산종교운동의 재건은 1911년 그의 부인이었던 고씨(高氏)부인(본명은 高判禮)의 졸도 사건에 기인한다. 고씨 부인은 강일순의 본처가 아니라 강일순의 추종자였던 차경석(車京石,1880-1936)의 이종사촌 누이이며 과부(寡婦)로서 차경석의 천거로 강일순의 부인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녀는 강일순의 생일을 맞이하여 치성을 드리다가 갑자기 졸도하였는데, 깨어난 후부터는 강일순과 비슷한 언행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성령(聖靈)이 자신에게 임하였다고 말하였다.  高氏 婦人에게 강일순의 권능이 옮겨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강일순의 추종자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하였는데, 아마도 한일합방 직후 나라를 잃은 서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많은 추종자들이 새롭게 모여든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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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형성과 종교활동

4. 敎團의 形成과 宗敎活動 증산은 1902년부터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대상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를 추종하였던 자들은 대부분 貧農의 하류 계층들이었으며, 갑오농민 전쟁에 참여하였던 동학 신자들이었다. 또한 이들은 갑오농민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업에 돌아가지 못한 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는 추종자들에게 자신이 天·地·人 三界의 대권을 지닌 主宰者로 가르치면서 천지공사를 행하였다.1) 강 일순이 得道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최초로 찾아온 사람은 김형렬(金亨烈)이었다. 그는 동학교도로서 갑오 동학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이었다. 형렬은 증산의 수제자가 되고, 증산은 형렬의 집을 본거지로 하고 포교사업을 하였다. 김형렬은 자기의 일가 친척들과 그 전에 동학교도였던 그의 친구들에게 증산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그 친구들은 또 자기가 아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식으로 하여 敎徒의 수는 날로 늘어갔다.2) 증산을 따르는 종도들의 수는 적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선택된 종도3)들이 있어 24종도, 또는 28종도, 27종도, 34종도, 61종도라는 칭호가 있었다. 그 후 9년동안 몇몇 제자를 데리고 전주, 금구, 익산,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등지를 돌아다니며 천지공사라는 의식을 행하였다 4) 1) 추종자 교육 강일순은 도문(道門)에 새로 들어온 종도들에게 반드시 지금까지 지은 잘못과 허물을 낱낱이 찾아 내어 사(赦)해 줄 것을 빌게 했다. 그는 종도들에게 태좌정심법(胎坐正心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송주(誦呪)를 장려했으며, 태을주(太乙呪), 시천주(侍天呪), 오주(五呪)를 묵송(黙誦)케 했다. 증산은 이와 같이 추종자들에게 주문을 외우는 수련공부를 시키는 것외에도, 환자를 치료할 때는 송주수련(誦呪修練)과 함께 의학적인 약물치료를 실시하였다. 또한 부적(符籍)을 사용하고 안수치료(按手治療)를 겸하였다. 따라서 병을 고쳤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를 신인(神人)으로 여겨 추종하였으며, 이러한 소문은 인근지방에 까지 알려지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신봉하여 하나의 종교집단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그는 소지(燒紙)라는 주술(呪術)을 자주 행했다. 그것은 백지(白紙)에 부적을 써서 화로에 불사르는 것인데, 연기가 온 방에 자욱하게 되어 숨통이 막힐 정도가 되어도 다 타기 전에는 문을 열지 못하게 했다. 또 도니원서(桃李園序)를 일천 번 이상 읽고, 큰 운수를 받기 위해 서전서문(書伝序文)을 많이 읽으라고 했다. 그리하면 신체에 이상이 생기게 되는데, 그것은 신이 내리는 징조로서 병이 낫고 건강하게 된다고 했는데 이를 강신(降神)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종도들의 재능과 기국(器局)을 보아서, 자기를 위해 부려썼다.  2) 카리스마 강조 증산이 교단을 형성하고 포교활동을 할 때의 특징은 자신의 上帝로서의 카리스마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카리스마란 웨버(M.Weber)가 정의하는 바와 같이 개인 퍼스낼리티(Personality)의 어떤 자질을 의미한다. 곧 超自然的 또는 超人間的이거나 적어도 특수하게 예외적인 힘이나 자질을 천부적(天賦的)으로 부여받은 것으로서, 일상적인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비범하고 일시적이며 창조적인 자질을 의미한다. 이 자질로 인해 그 개인이 일반인과 구별된다. 창시자의 카리스마적 특성은 추종자들을 따르게 하고 존경심을 유발시키며 권위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극대화 과정을 통하여 카리스마적 경험을 갖게 된 증산은 포교활동을 자신의 카리스마적 권능을 다음과 같이 소개함으로써 시작하였다.6)  “나는 三界大權을 主宰하여 造化로써 天地를 開闢하고 不老長生의 仙境을 열어 苦海에 빠진 衆生을 건지려 하노라.”(大巡典經 2:5) 자신이 소명을 가지고 이 세계에 강림한 초자연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증산의 설교는 포교활동이 증가됨에 따라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나는 원래 옥황상제(玉皇上帝)로서 구천(九天)에 있을 때, 진묵대사(震黙大師)와 이 마두(利 瑪竇)가 모든 신령(神靈)과 불타(佛陀)와 보살(菩薩)과 더불어 자기에게 와서 혼란에 빠진 세상을 건져 달라고 애원하기에 마침내 그 뜻을 받아 들여 천하를 대순(大巡)하는 길에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階塔)에 내려와 삼계(三界)를 살피다가 드디어 동토(東土)에 이르러 金山寺 彌勒金像에 임하게 되었던 것인데, 1841년부터 1870년까지 30년간을 그곳에 臨在해 있었다. 그 동안 1860년에 최제우를 찾아내어 그에게 사명을 주어 천하의 무극대도(無極大道)를 펴게 했으나7), 그가 능히 儒敎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므로 1864년이 되는 해 최제우로부터 天命과 新政을 거두었고, 그로써 최제우는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리고 1871년에 직접 地上에 降臨했다.”8) 증산의 이와 같은 설교는 자신의 권위와 규범을 강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카리스마적 존재인 증산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와 선경(仙境)을 약속 받으려는 욕구로 충만할 수 있었다. 이러한 증산과 추종자들의 관계는 당시 정감록 사상에 의한 혁세주(革世主)의 출세(出世)나 미륵불(彌勒佛)의 출신(出身), 또는 최수운의 갱생(更生)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다 수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증산은 자신이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민간신앙의 혁세주 사상 뿐만 아니라 기성종교의 메시아 강림사상을 모두 자신에게 연결시키고 있다. 곧 자신이 출세한 미륵이자 재생한 최수운이며 신선이라고 한 것이다.  그의 카리스마에 대한 강조는 그가 치병(治病)을 하고 死者를 부활(復活)시키며 풍운 조화를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추종자들의 신념에 의해 쉽게 메시아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가 天神이거나 또는 분명히 하느님으로서 강림하였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9) 더욱이 증산의 포교활동지역이 주로 동학혁명의 발생과 전개지역이었던 전라도 전주,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함열 등 全北七郡으로써 세속적 대중운동인 동학혁명이 실패한 지역인 동시에, 따라서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해결을 세속적 대중운동의 방법보다는 비세속적 방법인 메시아에게 의존코자 하는 성향이 강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관계는 보다 용이하게 성립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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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도에 이른 강증산

  4) 得道 – 入山 修道를 통한 宗敎的 經驗의 極大化 전술하였듯이, 3년여의 유력활동을 통해 많은 사회적 경험과 종교적 지식을 습득한 증산은 1900년 가을 本家로 돌아왔다. 이 기간까지 증산은 우리 국가의 난국은 전 세계의 난국이요, 우리 민족의 고통은 전 인류의 고통임을 깨닫고, 특별히 큰 환난을 겪고 있는 이 나라는 세계적인 대변란의 중심지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절망적인 대시련에 처한 이 국가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의 도통공부(道通工夫)를 완성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귀가(歸家) 즉시 송주수련(頌呪修鍊)의 도통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는 때때로 호둔(虎遁)한다고 하며 밤낮 없이 동리(洞里) 뒷산을 오르내리면서 고함을 지르기도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광인으로 여겨 상대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타인으로부터 광인취급을 받게 됨으로써 그는 자아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증산은 자신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소명의식의 발로로써 형성된 사회구제의 방법이 타인으로부터 경원시 당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심리적 고통을 겪고, 또 한번 자신의 정체위기를 체험하였을 것이다. 이 과정은 종교적 경험의 형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숙과정에서 대부분 거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증산은 자신이 아직도 도통단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보고, 도통공부의 완성을 이루어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얻기 위해 1901년 전주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大願寺)에서 입산수도를 하였다. 대원사에서 기도정념(祈禱正念)으로 求道하기 시작하여 7월 5일1)에 다섯 마리의 용이 불어내는 심한 폭풍우 가운데서 홀연히 광명과 지혜가 열려 천지의 대도를 깨달았다 한다. 증산교측의 주장에 의하면 증산은 천지대도를 깨달아 탐음진치(貪淫瞋痴)를 극복하였다. 그리하여 상통천문(上通天文)하고 하찰지리(下察地理)하여 중통인의(中通人義)한 도력(道力)을 갖추어 옛 성인들이 오르지 못한 큰 인격을 소유한 어른이 되었다고 한다. 大巡典經은 비와 천둥과 번개, 지진과 치병(治病-앉은뱅이를 일으킴), 신명(神明)의 회산(會散) 등을 뜻대로 움직여 천지안의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갖게 되었다고 전한다.2)  道를 얻고 집으로 다시 돌아온 증산은 그 해 겨울, 집에서 창문의 종이를 다 뜯어버리고 불을 때지 않은 냉돌방에서 지내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홑옷을 입고 지내며, 무언가 괴상한 글과 그림을 백지에 그려서는 계속해서 불태워 버렸다고 전한다. 증산에 의하면 그것은 천지의 도수(度數)를 뜯어고치는 작업, 곧 천지공사(天地公事)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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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 및 득도 전까지

靑年時代와 得道 이전까지  1) 결혼 증산은 21세(辛卯年)에 정씨 부인과 결혼하였는데 그 정씨 부인은 절름발이에다 눈은 아래로 보려면 위로 치켜 뜨게 되는 천바래기였다. 강일순은 첫날 밤이 아닌 그 다음날에야 이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게다가 성격도 사나워 시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따라서 가정생활을 본다면 그다지 원만치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1) 그는 위천하자(爲天下者)는 불고가사(不顧家事)라 하며 가정생활에는 등한시하고 집에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부인이 “남과 같이 재미있게 살림이나 하자.”고 하자, “그렇게 작은 말이 어디있느냐?”하며 더욱 집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2)  자신보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하면서도 신체적으로는 불구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은 그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相對的 실조의식(失調意識)을 고조시키는 동시에 증산이 가정을 떠나 外地로 장기간 주유하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원만하지 못한 가정생활은 그의 성격을 보다 급진적인 것으로 유인할 수 있었으며, 기존 사회구조에 대한 전면부정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요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2) 서당 훈장 시절 그는 결혼 후 처가(妻家)에서 서당을 열었다. 그러던 도중 1894년 고부에서 동학혁명이 발생하자 그는 이 혁명의 실패를 예견(豫見)하고, 동학혁명군을 따라 남원, 인심, 전주, 청주, 공주 등지로 종군(從軍)하면서 싸움구경만 하고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오히려 겨울이 되면 혁명군은 패하게 된다고 하며 혁명에 가담하지 말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동학혁명을 따라 다니며 동학혁명의 발전상황과 동학혁명에 가담한 민중의 욕구 등을 관찰한 증산은 동학혁명의 실패로 인해 나타난 사회적 아노미 현상을 목격하고는 스스로 동학에 대신할 만한 大道를 창도하여 보겠다는 뜻을 이 시기에 품게 되었다. 이 시기의 사회적 상황과 증산의 활동에 대해 大巡典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記述하고 있다.  “동학혁명 이후로 국정은 더욱 부패하여 세속은 날로 악화되고 관헌은 오직 태악(泰惡)과 토색(討索)을 일삼고 선비는 허란(虛亂)만 숭배하며 불교는 혹세무민(惑世誣民)에만 힘쓰고 동학은 혁명 실패 후에 기세를 펴지 못하여 거의 자취를 거두게 되고 西敎는 세력을 신장하기에 진력하니, 민중은 고궁(苦窮)에 빠져 안도할 길을 얻지 못하고 사위(四圍)의 현혹(眩惑)에 싸여 의지할 바를 알지 못하여 불안이 온 사회를 덮거늘 天師 개연(慨然)히 광구(廣求)할 뜻을 품어 유․불․선․음양식위(儒․佛․仙․陰陽識緯)의 모든 글을 읽으시고 다시 세태(世態)와 인정(人情)을 체험하기 위하여 유력(遊歷)의 길을 떠나시니라.”3) 즉 경제적 및 사회적 실조의식이 강했던 그로서는 失調解消의 방법으로 기존 사회구조의 개혁을 희망하고 있었지만, 동학혁명과 같은 세속적 대중운동의 실패를 목격함으로써 세속적 방법보다는 비세속적 방법에 의한 개혁을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증산은 체계화된 민중종교가 不在할뿐만 아니라 기성종교 또한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에 새로운 종교의 창립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의 혼란한 세태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神明에 의한 道術로써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동학의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는 주문이 天主를 모시고 온갖 도술조화를 부리는 것처럼 주창(主唱)되고 있으나, 사실상 儒敎의 人道的인 것에 그쳐 神道的인 조화가 없는 까닭에 제세구민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증산은 유불선의 교의와 음양(陰陽), 풍수(風水), 송무(誦莁), 의술(醫術) 등을 연구하는 한편, 神明을 부리며 호풍환우(呼風喚雨)하고 둔갑장신(遁甲藏身)을 임의로 하는 道術과 과거나 미래를 가릴 것 없이 온갖 지상만사(地上萬事)에 達通할 수 있는 道通工夫를 하기에 골몰하였다. 그리하여 그 당시 이미 도인(道人)이라는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증산의 종교적 특성은 사회구조의 개혁방법에 대한 추구, 그러한 추구의 방법으로 제시된 종교적 방향에의 모색, 기성종교에 관한 모든 지식의 흡수, 기성종교가 갖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당위론적 소명의식의 발생 등으로 집약될 수 있다.4) 3) 유력(遊歷)을 통한 宗敎的 知識의 增大5) 여러 가지 서적을 탐독한 증산은 27세 되던 해에 더욱 더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유력(遊歷)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庚子년까지 3년동안 평안도와 함경도를 비롯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주로 도통했다는 술객들을 찾아다니던 끝에 1900년 30세 되던 해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6)  유력활동을 통하여 그는 일반 민중의 생활실태와 그들의 욕구를 보다 광범위하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북한 지방으로의 유력은 서울을 통과해야 하는 관계로, 서울에서의 경험과 지식은 그의 종교적 경험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의 서울은 외국과의 修交 이후 청, 일, 러시아, 미국, 이태리, 독일, 영국, 불란서, 네델란드 등 각국의 외국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정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철로의 건설, 광산의 채굴, 어업권의 확보, 각종 상업에의 종사 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도 그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또한 군사적으로도 일본과 러시아 등을 포함하여 각국의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천주교의 명동성당이 준공되고 改新敎의 교회와 병원 및 학교가 설립되는 등 서구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또한 국내 정치적으로도 아관파천 이후의 정치적 혼란과 함께 친일파와 친러파가 대립되던 시대였다.  따라서 증산은 서울에서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한 많은 식견과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혼란한 사회에서 민중을 구제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더욱 고조될 수 있었다. 후에 그가 러일전쟁의 발생과 일본의 승리 예언, 한일 합방 및 그 후의 독립 예언, 마테오 리치의 언급 등 서교의 부분적 인용, 문명이기(文明利器)를 긍정한 것 등에 비추어볼 때,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유력생활을 통해 얻은 지식이 그의 종교적 성향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결국 3년간의 유력생활은 증산의 사회적 경험과 종교적 지식을 보다 많이 증대시켰다. 그는 이 시기에 기성종교의 허약성과 서구종교의 이질성, 열강제국의 침략에 의한 국가정체의 위기, 도탄에 빠진 일반 민중의 실태와 욕구 등을 파악하였으며, 기존 민간신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졌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종교의 창교(創敎)에 대한 소명의식을 증대시킬 수 있었으며 자신의 종교사상을 어느 정도 체계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구질서, 구체제 등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귀향하는 즉시 선령의 공명첩(空名帖)을 불살라 버린 것으로도 추정해 볼 수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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