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사순 제 5주일 셀모임 자료

 

멸시천대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으니 감사하고 섬기리라










탈리다 쿰


    


         “행복한 가족 구성원 되기“


주요 실천 사항 :

①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기  ② 미사, 셀모임 참석하기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1. 시작기도: 말씀읽기: 요한 8,1-11


예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셨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10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죄 있는 사람과 죄 없는 사람.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살아가면서 죄를 안 짓고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누구든지 크고 작은 죄들을 짓고 살아간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렇다면 내가 죄를 짓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죄를 짓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 자신은 완전한 것처럼  그렇게 옆 사람을 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죄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 그렇다면 나에게 잘못한 이들도 용서해 주고, 받아들여주어야 한다. 또한 나와 관계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그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유다인들의 편협한 모습을 대하면서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1 예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셨다. 2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매일 매일 달려는 유다인과의 불쾌하고도 긴 토론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고요와 침묵과 고독을 누리시기 위해 올리브산을 찾으신 것 같다. 바쁜 일상에서도 항상 하느님과 함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진다. 예수님께서는 날이 밝으면 다시 성전으로 가셨다. 남들이 자신을 박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일을 굳굳하게 하신다. 남이 뭐라 해도 하느님의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




3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4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5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다. 신명기 9,15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의 목격자가 있어야 하는데 남편은 아내를 거슬러 불리한 증언을 할 우려가 있기에 여기서 요구하는 목격자에서 제외된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여인을 데려와서 예수님께 이 죄인을 다룰 가장 적절한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장기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장군”을 불렀다. 만일 예수님께서 율법과 같은 해결을 하였다고 한다면 자비에 대해서 가르쳐온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부인하게 되는 위험이 있었다. 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님이 너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외쳤을 것이고, 사형선고의 권리를 로마인에게서 빼앗으려고 했다고 틀림없이 고소하였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동정을 느끼고 그녀를 용서해 주었다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거스른 자로 고발하고, 그러한 범죄를 사형으로 처벌하지 않았던 로마의 지지자라고 부르짖고 나설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완벽한 “외통”이었다.




6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성서에 정식으로 사형시키는 방법이 언급되지는 않았어도 에제키엘서 16,38-40에서 보듯이 간음에 대한 벌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뚜렷이 나와 있고 예수님 시대에도 여전히 실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르게 되니 고발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율법대로 처리하라고 말한다면 자비와 용서를 선포한 예수님 자신의 복음과 모순된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면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드는 자로 고발당할 수 도 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유다인들로부터 죄인을 재판하고 사형할 권한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즉 산헤드린(예루살렘에 있던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회의)은 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과의 정직한 대화를 고의적으로 피하고 예수님의 신용을 떨어뜨려서 그들로부터 제외시키려는 심산이었다. 사실 궁지에 몰린 간음한 여인의 처지가 그들의 안중에는 없었고, 오히려 그녀를 이용해서 무기로 삼아 예수를 골탕 먹일 심산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신다. 무엇을 쓰고 계셨을까? 우리는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떠난 죄인은 땅에 기록되리라(예레미야 17,13)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일깨우고,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으니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도록 지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행동은 그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보여준 예언자적 표시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본에는 “예수께서는…그들 각 개인의 죄(목)들을 쓰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신들 가운데서 죄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시오”


한 사람이 돌을 던지려고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죄를 땅바닥에 쓰십니다. 누구랑 간음. 누구 등치고. ……문득 그것을 본 돌 집은 사람은 슬그머니 그 돌을 내려놓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돌을 집었지만 예수님은 또 그의 죄를 적습니다….


죄가 없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지난 죄를 알려 주고 있다고 생각해보면….누가 돌을 던지겠습니까?




7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절대적인 원리 원칙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이든지 판단을 할 수 없고, 또한 어떤 범죄자에게도 그에 마땅한 벌을 줄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심중을 뚫어 보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들은 간음한 여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기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제 율법학자들이 난관에 빠진 것이다. 돌로 치자니 자신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안치자니 율법을 우습게 만들게 되는 것이고. 오히려 “외통”을 당한 것이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하긴 자신의 죄를 인식한  사람이 다른 죄인에 대한 심판관으로는 자처할 수 없는 것이다. 여인을 단죄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가 버렸다.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 버렸다. 그런데 나이많은 사람들부터라는 말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가끔 우리는 “나는 죄 없는 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단지 자신이 그것이 죄라고 못 느낄 뿐이지…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벼가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우리의 모습 또한 더욱 겸손해 지면서 남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10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죄짓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


모두 가버리고 이제 예수님과 그 여인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동정심 없는 행위의 묘사와 곧 돌로 맞아 죽을 너무나도 미약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여인의 모습 때문에 성 윤리의 기준에 대하여 감정에 치우쳐 여인의 죄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처사는 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여자가 하느님의 자비로 인해 죄의 용서를 받았지만, 그 자비와 용서는 바로 이제부터 더는 죄를 짓지 안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다. 즉 죄의 용서라는 선물은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가 반드시 포함되는 것이다.




2. 말씀나누기 –아래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거나 오늘 말씀 중에 와 닿은 부분에 대해서 자신의 느낌을 나눕니다.


1. 내가 남을 판단하고 있을 때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 내에서 돌로 치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2. 고백성사를 볼 때 성찰을 어떻게 하십니까? 어떻게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인정하기만 하면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십니다. 나는 그 용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3. 알림 및 공지


1. 다음 주 복음 말씀 한두 절씩 나눠서 연구해 오기  2. 성서나 매일 미사 책 가지고 다니기


3. 학교생활 열심히 하기




4. 마침기도 …말씀으로 기도하기


이 글은 카테고리: 말씀과 놀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다해 사순 제 5주일 셀모임 자료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멸시천대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셨으니 감사하고 섬기리라

    탈리다 쿰

        

             “행복한 가족 구성원 되기“

    주요 실천 사항 :

    ①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기  ② 미사, 셀모임 참석하기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1. 시작기도: 말씀읽기: 요한 8,1-11

    예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셨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10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죄 있는 사람과 죄 없는 사람. 두 발을 땅에 디디고 살아가면서 죄를 안 짓고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누구든지 크고 작은 죄들을 짓고 살아간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렇다면 내가 죄를 짓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죄를 짓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나 자신은 완전한 것처럼  그렇게 옆 사람을 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는 죄없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은 그리스도인들이다. 죄를 용서받은 사람. 그렇다면 나에게 잘못한 이들도 용서해 주고, 받아들여주어야 한다. 또한 나와 관계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그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유다인들의 편협한 모습을 대하면서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1 예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셨다. 2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매일 매일 달려는 유다인과의 불쾌하고도 긴 토론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고요와 침묵과 고독을 누리시기 위해 올리브산을 찾으신 것 같다. 바쁜 일상에서도 항상 하느님과 함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여진다. 예수님께서는 날이 밝으면 다시 성전으로 가셨다. 남들이 자신을 박해한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실 일을 굳굳하게 하신다. 남이 뭐라 해도 하느님의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


    3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4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5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자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온다. 신명기 9,15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명의 목격자가 있어야 하는데 남편은 아내를 거슬러 불리한 증언을 할 우려가 있기에 여기서 요구하는 목격자에서 제외된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여인을 데려와서 예수님께 이 죄인을 다룰 가장 적절한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장기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장군”을 불렀다. 만일 예수님께서 율법과 같은 해결을 하였다고 한다면 자비에 대해서 가르쳐온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을 스스로 부인하게 되는 위험이 있었다. 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님이 너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외쳤을 것이고, 사형선고의 권리를 로마인에게서 빼앗으려고 했다고 틀림없이 고소하였을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동정을 느끼고 그녀를 용서해 주었다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거스른 자로 고발하고, 그러한 범죄를 사형으로 처벌하지 않았던 로마의 지지자라고 부르짖고 나설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완벽한 “외통”이었다.


    6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성서에 정식으로 사형시키는 방법이 언급되지는 않았어도 에제키엘서 16,38-40에서 보듯이 간음에 대한 벌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뚜렷이 나와 있고 예수님 시대에도 여전히 실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르게 되니 고발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율법대로 처리하라고 말한다면 자비와 용서를 선포한 예수님 자신의 복음과 모순된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면 로마 정부에  반기를 드는 자로 고발당할 수 도 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유다인들로부터 죄인을 재판하고 사형할 권한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즉 산헤드린(예루살렘에 있던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회의)은 벌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과의 정직한 대화를 고의적으로 피하고 예수님의 신용을 떨어뜨려서 그들로부터 제외시키려는 심산이었다. 사실 궁지에 몰린 간음한 여인의 처지가 그들의 안중에는 없었고, 오히려 그녀를 이용해서 무기로 삼아 예수를 골탕 먹일 심산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신다. 무엇을 쓰고 계셨을까? 우리는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떠난 죄인은 땅에 기록되리라(예레미야 17,13)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 죄인임을 일깨우고,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으니 하느님의 심판에 맡기도록 지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행동은 그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보여준 예언자적 표시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본에는 “예수께서는…그들 각 개인의 죄(목)들을 쓰셨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신들 가운데서 죄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시오”

    한 사람이 돌을 던지려고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죄를 땅바닥에 쓰십니다. 누구랑 간음. 누구 등치고. ……문득 그것을 본 돌 집은 사람은 슬그머니 그 돌을 내려놓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돌을 집었지만 예수님은 또 그의 죄를 적습니다….

    죄가 없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지난 죄를 알려 주고 있다고 생각해보면….누가 돌을 던지겠습니까?


    7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절대적인 원리 원칙을 내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사람이든지 판단을 할 수 없고, 또한 어떤 범죄자에게도 그에 마땅한 벌을 줄 권한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심중을 뚫어 보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들은 간음한 여인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데 있었기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제 율법학자들이 난관에 빠진 것이다. 돌로 치자니 자신이 죄가 없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안치자니 율법을 우습게 만들게 되는 것이고. 오히려 “외통”을 당한 것이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하긴 자신의 죄를 인식한  사람이 다른 죄인에 대한 심판관으로는 자처할 수 없는 것이다. 여인을 단죄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가 버렸다.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 버렸다. 그런데 나이많은 사람들부터라는 말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가끔 우리는 “나는 죄 없는 사람이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단지 자신이 그것이 죄라고 못 느낄 뿐이지…나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생각을 했고, 많은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벼가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우리의 모습 또한 더욱 겸손해 지면서 남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한다.


    10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 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죄짓지 말라.” 하고 말씀하셨다.

    모두 가버리고 이제 예수님과 그 여인만이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동정심 없는 행위의 묘사와 곧 돌로 맞아 죽을 너무나도 미약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여인의 모습 때문에 성 윤리의 기준에 대하여 감정에 치우쳐 여인의 죄를 정당화시켜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처사는 바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여자가 하느님의 자비로 인해 죄의 용서를 받았지만, 그 자비와 용서는 바로 이제부터 더는 죄를 짓지 안는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다. 즉 죄의 용서라는 선물은 새롭게 살아야 한다는 의무가 반드시 포함되는 것이다.


    2. 말씀나누기 –아래의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거나 오늘 말씀 중에 와 닿은 부분에 대해서 자신의 느낌을 나눕니다.

    1. 내가 남을 판단하고 있을 때 내가 판단하는 그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장 내에서 돌로 치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2. 고백성사를 볼 때 성찰을 어떻게 하십니까? 어떻게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용서를 청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인정하기만 하면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십니다. 나는 그 용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3. 알림 및 공지

    1. 다음 주 복음 말씀 한두 절씩 나눠서 연구해 오기  2. 성서나 매일 미사 책 가지고 다니기

    3. 학교생활 열심히 하기


    4. 마침기도 …말씀으로 기도하기

guest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