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 가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하시고 당신 추종자들에게 제시하신 가난의 복음적 이상, 수많은 성인들이 극도로 철저하게 실천하고 수도자들이 고백한 그 이상을 어떻게 정의(定義)할 수 있을까? 복음적 가난이란 물질적 가난과 영신적 가난을 구체적으로 종합한 것이다.1)
‘복음적 가난’은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 29)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한다. 따라서 비참이나 궁핍함과는 구별되어야 하는2) ‘복음적 가난’은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의 내적 자세이고,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의 이탈의 자세이며, 이는 물질적, 감각적, 지성적 부(富)에 대한 구체적 포기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모든 물질적 재화를 소유하면서 내적 이탈을 추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하나의 기만이 될 수 있으므로, ‘복음적 가난’은 마음의 자세라는 정신적 가난뿐만 아니라 물질적 가난도 포함하고 있다.
복음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그 마음이 재물에 집착되어 있지 않다. 정서적인 애착을 보이지 않고 자유를 느끼며 자유롭게 처신한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흠숭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저주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유스럽게 사용할 따름이다. 정서적 무관심은 온갖 소외적인 소유의 뿌리요, 온갖 노예화하는 축적의 뿌리인 탐욕에서 벗어나는 참된 해방이다. 예수께서도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가”고 말씀하셨으며(루가 12, 15). 바오로도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6, 10)고 말했다.
‘복음적 가난’은 물질적 가난 자체에 집착하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물질적 가난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 데 있다. 이처럼 물질적 가난은 그것이 하느님과 뜻을 함께할 때 비로소 긍적적인 측면을 지닌다. 이러한 금욕적인 자세는 그리스도인이 자유롭게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는 자세에 머무르게 한다. 성서와 위대한 영성가들은 가난의 이러한 측면을 자신들의 이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흔히 가난을, 한계상황에 처한 사람들인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에 속한 것으로-어떤 운명론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체험해 왔다. 성서 역시도 ‘물질적 가난’의 의미를 ‘인간 이하의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인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재화의 결핍을 가리키는 ‘물질적 가난’에다가 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여, 흔히 거의 인간적이며 종교적인 이상으로까지 생각하려 한다. 따라서 이를 검소한 생활, 그리고 이 세상 사물에 대한 무관심이며 복음과 일치하는 생활의 한 전제조건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요구들은 오늘날 사람들의 큰 열망과는 목적이 어긋나는 것이다.3)
가난의 가치는 받은 것을 감사히 여기고 자기 분수에 맞게 올바르게 선용하면서 그것을 함께 나누는 데 있다. 가난의 극치는 ‘나눔’에 있으므로 영성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갖고 있는 것은 모두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영적으로는 나누면서도 물질적인 나눔이 없거나, 물질적인 나눔은 가져도 영적인 나눔이 없다면 이런 가난은 역시 절름발이 영성이 될 수밖에 없다.4)
복음적 가난은 근검 절약하는 생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생활화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복음을 위한 자유와 여유를 상실할 정도로 물건을 모으거나 편리한 생활을 도모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복음적 가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실천하시고 당신 추종자들에게 제시하신 가난의 복음적 이상, 수많은 성인들이 극도로 철저하게 실천하고 수도자들이 고백한 그 이상을 어떻게 정의(定義)할 수 있을까? 복음적 가난이란 물질적 가난과 영신적 가난을 구체적으로 종합한 것이다.1)
‘복음적 가난’은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 29)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한다. 따라서 비참이나 궁핍함과는 구별되어야 하는2) ‘복음적 가난’은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의 내적 자세이고,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의 이탈의 자세이며, 이는 물질적, 감각적, 지성적 부(富)에 대한 구체적 포기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모든 물질적 재화를 소유하면서 내적 이탈을 추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하나의 기만이 될 수 있으므로, ‘복음적 가난’은 마음의 자세라는 정신적 가난뿐만 아니라 물질적 가난도 포함하고 있다.
복음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그 마음이 재물에 집착되어 있지 않다. 정서적인 애착을 보이지 않고 자유를 느끼며 자유롭게 처신한다.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은 재물을 흠숭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저주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유스럽게 사용할 따름이다. 정서적 무관심은 온갖 소외적인 소유의 뿌리요, 온갖 노예화하는 축적의 뿌리인 탐욕에서 벗어나는 참된 해방이다. 예수께서도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가”고 말씀하셨으며(루가 12, 15). 바오로도 디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6, 10)고 말했다.
‘복음적 가난’은 물질적 가난 자체에 집착하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물질적 가난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 데 있다. 이처럼 물질적 가난은 그것이 하느님과 뜻을 함께할 때 비로소 긍적적인 측면을 지닌다. 이러한 금욕적인 자세는 그리스도인이 자유롭게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는 자세에 머무르게 한다. 성서와 위대한 영성가들은 가난의 이러한 측면을 자신들의 이상으로 삼고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흔히 가난을, 한계상황에 처한 사람들인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에 속한 것으로-어떤 운명론적 관점에서- 생각하고 체험해 왔다. 성서 역시도 ‘물질적 가난’의 의미를 ‘인간 이하의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인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경제적 재화의 결핍을 가리키는 ‘물질적 가난’에다가 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여, 흔히 거의 인간적이며 종교적인 이상으로까지 생각하려 한다. 따라서 이를 검소한 생활, 그리고 이 세상 사물에 대한 무관심이며 복음과 일치하는 생활의 한 전제조건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요구들은 오늘날 사람들의 큰 열망과는 목적이 어긋나는 것이다.3)
가난의 가치는 받은 것을 감사히 여기고 자기 분수에 맞게 올바르게 선용하면서 그것을 함께 나누는 데 있다. 가난의 극치는 ‘나눔’에 있으므로 영성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갖고 있는 것은 모두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영적으로는 나누면서도 물질적인 나눔이 없거나, 물질적인 나눔은 가져도 영적인 나눔이 없다면 이런 가난은 역시 절름발이 영성이 될 수밖에 없다.4)
복음적 가난은 근검 절약하는 생활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생활화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복음을 위한 자유와 여유를 상실할 정도로 물건을 모으거나 편리한 생활을 도모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