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권 제 8장 가이사가 애굽과 싸울 때 유대인들은 그와 동맹을 한것과 안티파데르의 빛나는 활동과 가이사와의 친분에 대하여, 또한 유대인들이 로마인과 아덴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에 대하여.

 


제 8 장



가이사가 애굽과 싸울 때 유대인들은 그와 동맹을 한것과 안티파데르의 빛나는 활동과 가이사와의 친분에 대하여, 또한 유대인들이 로마인과 아덴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에 대하여.



1. 안터파테르와 힐카누스가 애굽에서 가이사를 돕다[㈜ (127-155)와 전쟁 1권. (187-200)에 내용에 나오는



  폼페이에게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리고 폼페이가 사망한 후[㈜ 가이사(Caesar)는 주전 48년 8월(율리우스의 계산에 따름)에 파르살루스 (Pharsalus)에서 폼페이를 물리쳤다. 폼페이는 주전 48년 9월 애굽에 상륙할 무렵 죽음을 당하였다.] 가이사가 애굽에서 싸우고 있을 무렵, 힐카누스의[㈜ 힐카누스는 전쟁. 1권.(187)에 나오는 병행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참).주 194를 보라.] 명령에 따라 유대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통치자[㈜ (139)에 나오는 스트라보의 인용문에서 안티파테르에게도 붙여졌던 이 칭호 (ejpimeletvh\”)는 고대. 18권.(89)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의) 총독의 의미를 지닌다. 17권.(6)에서는 이 칭호가 수리아 총독이었던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에게도 붙여졌다. 전쟁. 1권.(225)에 보먼 헤롯이 전수리아의 ejpimeletvh\”로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고대. 14권.(280)의 병행구에 그는 strathgov\”로 불린다. 이 본문에서는 안티파테르가 가이사에 의해 주 전 48년에 혹은 더 일찍(참). (108))가비니우스에 의해 특별한 직책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전 47년이 되어서야 유대의 총독(procurator, ejpivtropo\”)이 되었다. 쉬러 (Shi\’rer), i . 343 주 14에서 가비니우스가 그를 총독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이 직책은 특별한 직책(extra ordinem)인 것이 분명하다. 모미글리아노(Momigliano)가 \’Ricerche\’, p.207에서 지적하듯이 유대는 가비니우스가 4구역으로 분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본문에서 앞질러 말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가이사는 주전 48년 겨울에 애굽에 왔으나 주전 47년 봄이 되어서야 미드리다테스와 안터파테르의 도움을 받았다. 이 원정에 관해 W. Judeich의 \’Casar im Orient\’, 1885를 보라.] 안티파테르는 가이사의 애굽 원정에 여러모로 유익한 존재임을 보여 주었다. 버가모(Pergamum)의 미드리다테스가 원군을[㈜ 수리아에서 파병된 37군단과 함께.] 끌고 가이사를 도우려고 하였으나 펠루시움(Pelusium) 주민들의 방해로 진로가 막혀 아스글론에[㈜ 택커래이 박사가 전쟁. 1권.(187)에서 지적한 대로 아스글론(Ascalon)은 펠루시움(Pelusium)에서 6일간 행군하여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미드리다테스(Mithridates)는 이 행로를 거절하기 이전에 충분히 경고를 받았음에 틀림없다.]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때 안티파테르는 유대인무장병사 약 3,000명을 거느리고 미드리다테스를 도왔다. 안티파테르는 또한 아라비아의 세력가들을 설득하여 원군을 보내게 하였다. 이에 가이사를 사모하는 마음에 있어서 안티파테르에게 뒤질세라 원군을 자청하고 나셨다. 그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리바누스 산에 거주하는 얌블리쿠스(Jamblichus) 방백과 레바논(Leb-anon) 산과 거의 모든 성읍에서 거주하였던 소에무스(Soemus)의 아들[㈜ 본문이 다소 불확실히다. 이 톨레미는 같은 지역의 멘나우스(Mennaus)의 아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톨레미와 얌블리쿠스(Jamblichus)는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자서(52)에 언급되어 있는 소에무스(Soemus)가 이 지역의 지배자였을 것이다. 그 이름은 페트라(Petra)와 이두매(Ituraea)에서 발견되는 아랍어와 나바타이아어이다. 참), 고대. 15권.(185), 17권.  (54), 20권. (158).] 톨레미(Ptolemy) 등이었다. 이에 미드리다테스는 수리아에서 펠루시움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이 그를 환영해 주지 않자 미드리다테스는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하였다.여기에서 안티파테르는 그의 명성을 발휘하였다. 즉 그는 제일 먼저 성벽의 일부를 허물고 성에 진입하여 아군이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그리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오니아스(Onias)에[㈜ 오니아스(Onias)의 신전의 위치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멤피스(Memphis)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함. 참). 고대. 13권.(65) 각주, 쉬러(Schurer) iii. 97. 주 25.] 거하는 유대인들이[㈜ 다른 본문에는 \’애굽의 유대인들\’.]  안티파데르와 미드리다테스의 군대가 가이사에게 가는 길을 또 다시 가로막고 나섰다. 이에 안티파테르가 다시 나서서 그들을 설득시켜 우방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다.[㈜ 병행본문인 전쟁. 1권.(190)의 내용에는 안티파테르가 힐카누스의 이름을 사용하여 애굽 유대인들의 지원을 받았던 것에 대한 언급은 없다. 참). 주194.] 안티파테르가 성공한 것은 그들과 같은 민족이었다는 점에도 그 이유가 있었겠으나 대제사장 힐카누스의 편지에 더 큰 원인이있었다. 힐카누스는 이 편지에서 그들에게 가이사와 친선 관계를 맺고 돈과 그 밖의 물자로 가이사를 도와 줄 것을 권면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힐카누스의 서신을 보고 안티파테르와 힐카누스의 생각이 같다는 점을 깨닫고 안티파테르가 요구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한편 멤피스(Memphis) 주변에 거하는 유대인들은 이 유대인들이 가이사의 원군이라는 것을 알고 미드리다테스를 초청하였다. 이에 미드리다테스는 이 초청에 응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자기의 군대에 편입시켜 주었다.



  2. 가이사가 애굽 전투에서 용맹스럽게 싸운 안티파테르를 칭찬하다



  미드리다테스는 델타(Delta)라고 불리우는 지역을 지나면서 이른바\’유대인의 진영\’이라고[㈜ 참). 주 201.] 하는 곳에서 적과 일대접전을 벌이게 된다. 미드리다테스는 우측 군사들을 통솔하였고 안티파테르는 좌측 군대를 맡았다. 그런데 접전이 벌어지자 오른편에 있던 미드리다테스의 군대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반면 좌측 편에 있던 안티파테르의 군대는 벌써 전투를 승리로마치고 미드리다테스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서 강둑을 따라 오고 있었다. 만일 안티 파테르의 군대가 아니었더라면 미드리다테  스의 군대는 큰 재앙을 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안티파  테르가 와서 패전 직전의 미드리다테스의 군대를 구조해 주었으며 애굽의 군사들은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안티파테르는 적 진영을 장악하고 계속해서 도망가는 적을 추격했다. 그후 그는 패배하여 한참 뒤로 물러나 있던 미드리다테스에게로 돌아왔다.[㈜ 다소 수정된 본문. 다른 사본들에는 \’소집되었다(called)\’로 나온다.] 이 전투에서 미드리다테스의 부하는 800명이 전사한 반면에 안티파테르의 부하는 불과 50여명[㈜ 다른 본문에는 \’4명\’ ; 전쟁. 1권.(192)에는 \’80명\’으로 나와 있다.] 밖에 전사하지 않았다. 미드리다테스는 이 전쟁의 전말을 가이사에게 보고하면서 전쟁 승리의 주역은 안티파테르이며 그가 자기의 목숨까지도 구해 주  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에 가이사는 안티파테르를 극찬하였으며 전 전쟁에 걸쳐 어려운 고비마다 그를 기용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안티파테르는 몇몇 전투에서 부상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 안티파테르의 용감성에 대한 이러한 찬사는 전쟁. 1권.(192, 193)에 나와 있는 병행귀절의 것에 못지않는 것이다.]



 3. 가이사는 애굽에서의 전투시 원조해 주었던 힐카누스에게 보답하다



 더우기 마침내 전쟁을 종식하고 수리아로[㈜ 가이사는 보스포루스(Bosporus)의 왕인 파르나케스(Pharnaces)를 공격하기 위해 주전 47년 봄에 수리아로 항해해갔다. 파르나케스는 소아시아의 로마군인들을 위협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연대기에 관하여 알고자하면 유데이크(Judeich)의 책 p.108 이하를 보라.] 배를 타고 가서안티파테르를 극진하게 대우해 주었고 힐카누스에게는 대제사장직을 재확인해 주었다.[㈜ 전쟁. 1권.(194)에 보면 가이사가 안티파테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이렇듯 시민권을 주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힐카누스는 주전 63년에 있었던 아리스토불투스의 투옥 이후 대제사장의 직무를 재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 (7)의 각주.] 또한 안티파테르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주면서 어디에서든지 면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힐카누스가 이 전쟁에[㈜ 약간 수정된 본문이다. 다른 사본들에는 \’군대\’로 되어 있다.] 참전하여 애굽에까지 왔었다는 사실이[㈜ 이 진술과 뒤이어 나오는 스트라보의 인용구문은 전쟁. 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전해져 내려오고 했다. 저자의 이러한 진술은 갑바도기아의 스트라보(Strate of Cappadocia)가 아시니우스(Asinius)의[㈜ 율리우스 가이사와 동시대인물인 아시니우스 폴리오는 주전 60-40년까지의 역사를 상술한 하나의 역사서 \’\’History\’를 서술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단지 부분적인 단편 외에 모두 분실되었다.]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언급에 의해서 그 사실성이 증명되어진다 : \’미드리다테스가 애굽을 침략하였을 때에 유대의 대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가 동행하였다. \’ 또한 다른 구문에서 스트라보는 힙시크라테스(Hyp-Sicrates)라는[㈜ 스트라보보다 더 나이가 든 동시대 인물 : 그의 저서는 지극히 부분적인 단편을 제외하고는 소실되어 버리고 없다. 이 저서는 근동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의 역사와 인종학을 다루었다.] 사람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미드리다테스는 처음에는 혼자 출정하였으나 유대의 통치자[㈜ 참. 주 197.] 안티파테르를 아스글론에서 불렀다. 이에 안티파테르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3,000명의[㈜ 가이사의 포고문에는 단지 1,500명으로만 언급되어 있다. 참). (193).] 병사들을 이끌고 직접 왔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지배자들을 설득하여 전투에[㈜ 약간 수정된 본문이다. 다른 본문에는 \’군대\’로 되어 있다.] 합세하게 하였다. 이때 대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도 이 원정에 가세하였다\’ 이상이스트라보 자신이 증언한 내용이다.



4. 아리스토불루스 Ⅱ세의 아들 안티고누스가 힐카누스의 권리침해를 가이사에게 고소하다.



  그러나 그때 당시[㈜ 다른 본문에는\’그당시\’라는 말을 빠뜨리고 있다.]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었던 안티고누  스(Antigonus)는 가이사에게 나아가 그의 아버지의 비참한 운  명을[㈜ 다른 \’죽음\’으로 나와 있다.] 통곡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저희 아버  지인 아리스토불루스가 독살되었던 것이나 저의 형이 스키피오  에 의하여[㈜ 참). (124, 125).] 참수형을 당했던 것은 가시아 때문이었습니다. 황제께서는 부당하게 왕국에서 쫓겨나 버린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티파테르와 힐카누스는 나라를 무력으로 다스리고 있으며 제게도 수많은 해를 가했습니다.\’ 이때 그 자리  에 참석하고 있던 안티파테르는 안티고누스의 고소에 대해 자기  입장을 변호하였다.[㈜ 고대사는 안티파테르(Antipater)와 힐카누스(Hyrcanus)에 대한 그의 공격에 대한 안티고누스의 비난(분명하게 다메섹의 니콜라스에서 반복됐다)을 빠뜨리고 있다.] 이것은 전쟁. 1권.(195) 병행구에 표현되었다. 이것은 또 그의 적대자들이 선한 뜻으로가 아니라 두려움으로 애굽에서 가이사(Caesar)를 지지했다는 안티고누스의 비난을 빠뜨리고 있다.

  그는 안티고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변  혁을 좋아 하는 반란의 무리임을 강조하었다.[㈜ 안티파테르(Antipater)는 전쟁. 1권. (197)에서 더 생동감있게 자신을 변호한다 ; 그는 자기의 상처를 보이려고 옷을 벗었으며 아리스토불루스의 가적의 반역적인 경향에 대해서 더 수사학적으로 말한다.] \’제가 황제를  대신하여 전쟁에서 어떤 고생을 하였는지에[㈜ 이것은 그의 상처들을 암시하는 것이다. (참). 앞의 주). 다른 사람들은 번역은 \’그가(가이사) 증인이었다고 말하면서\’.] 대하여는 황제께서 친히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아리스토불루스가 로   마로 잡혀간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는 로마의 적이었고 도저히 그는 로마의 편이 되기에는 어려운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티고누스의 형이 스키피오에게 생포된 것은[㈜ 다른 본문에는 \’잡힌 것은\’.] 강도짓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폭력을 휘두르고 불의를 일삼다가 스키피오에 의해 죄값을 치른 것뿐입니다. \’



 5. 가이사와 로마의 원로원은 안티파테르와 힐카누스를 영예롭게 함



  안티파테르가 이처럼 변명을 마치자 가이사는 힐카누스를 대제사장으로[㈜ 190 이하에 인용된 법령에 의하면 지배자. 유대인에 의해 그는 왕이라 불리워진 것 같다. 참). (157).] 임명하였고 안티파테르에게는 그가 원하는 어떠한 자리에서든지 그로 하여금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때에 안티파테르는 이러한 지위의 결정을 가이사에게 맡기었기때문에 가이사는 그로 하여금 유대의 행정 장관의 자리에[㈜ 참). 주197.] 임명하였다. 가이사는 또한 폼페이가 허물어 버린 이후로 폐허인채로 남아 있던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할 수 있도록[㈜ 전쟁.1권.(199)에서 이 호의는 안티파테르가 부여한 것이다. 사람들의 변화에서 Laqueur, p.165에서는 요세푸스가 시도한 전쟁사의 \’체계적이며 정치적인 변역\’의 또다른 예를 본다.] 허락해 줄 것을 힐카누스가 청원하자 그에게 성벽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는 로마의 집정관들에게 이같은 사실들을 사람을 보내어 알리고 원로원 의사당에[㈜ 고대. 13권. 과 14권 .에서 인용한 다양한 로마와 헬라적인 법령에 대해서 부록에 있는 목록의 작품을 보라.] 새겨 놓을 것을명하였다. 원로원에 의해 제정된 법령은 다음과 같았다.[㈜ 다음의 법령은 그 연대(年代)를 알 수 있다. 이는 힐카누스 Ⅱ세 때가 아니라 (가이사 자신을 위해 발효시킨 법령은 (190) 이하에 인용되어 있다) 시몬(Simon)의 때로 생각된다. 더 정확히는 주전 139년이다. 참). 마카비 1서 15 : 16-21. 여기서는 로마인 집정관 루키우스(Lucius)의 유사한 편지가 인용된다. 참) 부록에는 자세하게 작품들이 인용되었다.] \’집정관[㈜ 또는 \’호민관\’, 이는 라틴어 번역이다 : \’치안관\’과 \’호민관\’이라는 의미의 strathgov\”는 Magie, pp. 84, 81을 보라.] 부키우스(Lucius)의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LuciusValerius)는 콩코드[㈜ Schurer, i. 251 주 22. 에서는 이것이 주전 121년에 세워진 것보다 더 일찍 세운 콩코드 신전(Temple of Concord)일 것이라고 한 몸센(Mommsen \’Hermes\’ix\’ 1875, 281이하)에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그래서 주전 139년으로 법령의 연대를 추정하는 것을 배제시키지 않는다.] 신전(the Temple of Concord)에서 12월13일에 원로원에 이같이 보고한다. 이 법령을 작성할 때에 참석했던 자들은 콜리네족(the tribe of Colline) 출신의 루키우스(Lucius)의 아들 루키우스 코포니우스(Lucius coponius)와 퀴리네족(the tribe of Quirine)출신의 파피리우스(Pagirius)였다. 법령의 내용은 유대의 사신인, 야손(Jason)의 아들 알렉산더(Alexander)와[㈜ 리츨(Ritschl)은 마카비 1서 14 :22과 부합되게 하려고 발효시킨 \’안티파테르(Antipater)\’라는 본문을 제안한다. 그곳에는 안티오쿠스의 아들 누메니우스와 야손의 아들 안티오쿠스라는 사신 이름이 나온다.]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아들 누메니우스(Numenius)와 도시데우스(Dositheus)의 아들 알렉산더(Alexagder)가 제안한 로마와 유대 간의 기존 우호동맹의 갱신에 관한 것이다. 유대 사신들은 우정의 표시로 금화 50,000의 가치가 나가는 금방패를[㈜ 참). 마카비 1서 14 : 24, 15 : 18, 여기서는 1,000미나(minae) 즉 50,000디드라크므스(didrachms) 또는 스타테르스(staters)인 금방패를 언급한다.] 가져왔으며 모든 자유 도시들의 지배자들과 열왕에게[㈜ 그런 왕들은 마카비 1서 15 : 22에서 열거된다.] 유대 나라를 해하거나 침략하지 말 것을 명하는 서신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원로원은 유대와우호 동맹을 갱신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유대를 들기로 결정하고 유대국이 보낸 금방패를 받았다.\’ 이는 민족의 통치자이자대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 제 9년 파네무스(Panemus)월(月)에[㈜ 요세푸스의 자료가 마게도냐(Macedonia)력으로 로마 법령의 날짜를 기록한 이유는 없다. 더구나 그 법령은 국내적으로는 12월의 13일로 발효한다. 반면 파네무스(Panemus)는 6, 7월이다. 본문은 다음의 아델(Athen)법령을 언급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힐카누스 I세 때로 연대가 추정된다(다음의 주를 보라) 그러므로 호몰레(Homolle)가 제안한 것처럼, \’9 \’를\’29\’로 수정해야 한다. 이것은 주전 106/5년이 된다. 이는 아가도클레스(Agathocles)의 집정관직의 연대와 일치한다. 또한 \’통치자\’라는 것은 삭제해야만 한다. 이 단어는 힐카누스 I세에게 적용시키기가 어렵다.] 결정되었던 사실이다. 힐카누스는 또한 여러모로 아덴인들은 힐카누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한 결정 사항을서신으로 보내왔다. \’아스클레피아데스(Asclepiades)의 아들인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최고 지도자이자 대제사장으로있을 당시, 파네무스 월이 끝나기 5일 전에 아덴 사람들의 법령이 행정장관들에게 넘기워졌다.[㈜ 라이나흐(Reinach)가 지적한 것처럼 첫째 문장은 서론이고 몇몇 헬라 도시에서 유대인들에게 법령을 전달한 것을 언급한 것이 다.] 아가도클레스가 집정관으로 재임할 당시,[㈜ 주전 106/5년. W. B. Dinsmoor, \’The Archons of Athens in the Hellenistic Age\’, 1931, pp.275-277과, W. Pritchett와 B. D. Meritt, \’The Chronology of Hellenistic Archons\’1941, p. 34를 보라.] 이 당시에는 크세난더(Xenander)의 아들유클레스(Eucles)가 아이달리드(Aithalidean) 시(市)의[㈜ 라이나흐(Reinach)의 추정, 이는 사본, \’메난더(Menander)의 아들, 알리무시안(Alimusian) 도시의\’에 대한 동시대의 비문(\’CIA\’,ii\’. 2984)에 근거한 것이다.] 서기관으로 있을 때인데, 무니키온(Munychion)월(月)[㈜ 그러므로 그 법령은 힐카누스가 수령하기 두달 전에 통과되었다, 참). 위 각주 234.] 11일에[㈜ 사본에 빠져 있는 prytany의 날은 딘돌프(Dindorf)에 의해 제공된 것이다.] 에르키아(Erchia)시를[㈜ 본문이 다소 수정됨. \’에르키아 시\’의 통치자,즉, !Ercieu;\”는 사본에는 \’대제사장\’, 즉 ajrciereuv\”로 되어있다.] 통치하는 도로데우스(Dorothe-us)와 그의 동료 관료들은 디오니시우스(Dionysius)의 아들 디오니시우스(Dionysius)의 의안을 통과시킨[㈜ 사본에 빠져있는 이 단어는 보엑(Boeckh)이 제공한다] 투표를 감독하였다.[㈜ eipeyhvfixe는  ejpestavtei와 동일하다. 참). W. Larfeld, \’\’Griechigche Epigraphik\’, 1914, p.333.] 그 의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의 형식은 아덴(Athen) 법령의 일반적인 형태와 완전히 일치한다. 참),   Larfeld, 앞의 책.] \’대제사장이자 유대 백성의 지도자인[㈜ \’알렉산더와 아들\'(얀나아우스, Jannaeus)이란 단어는 요세푸스나 그의 자료에 의해 침가된 것이다. 이는 힐카누스 I세 대신에 힐카누스 Ⅱ세를 의미하는 인상을 준다.] 알렉산더의 아들 힐카누스는[㈜ \’그리고 지도자\’란 단어는 첨가된 것이 분명하다. 주 234를 보라.] 우리 민족 모두에게 뿐만 .아나라 국민 개개인에게도 끊임 없이 호의와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아덴인들이 공적인 임무를 지니고 사신으로 가든지 아니면 개인적인 자격으로 가든지 간에 그는 그들을 매우 다정다감하게 영접해 주었으며, 또한 그들이 안전하게 귀국 하도록 도와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선례를 여러 차례 보아왔다.  특히 이러한 사실들은 수니안(Sunian)성의 디오도루스(Dio-   dorus)의 아들[㈜ \’디오도루스(Diodorus)의 아들, 데오도투스(Theodotus)\’는 사본에 나오는 \’데오도루스(Theodorus)의 아들 데오도시우스(Theodosius)\’대신 듀몽(Dumont, 라이나흐의 주에서 인용)에 의해 추정된 본문이다. 이는 동시대의 비문에 기초한 것이다.] 테오도투스(Theodotus)의 건의안을 통하여이 힐카누스라는 인물이 그가 할 수 있는 한 아덴인들에게 최   대한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으며 그가 다스리는 백성들의 미덕에 관하여서도 언급을 하고 있다. 이 건의안에  는 또한 힐카누스에게 법률에 의거한 포상 조치로서 금면류관을  수여할 것과 그의 동상을 만들어 데모스(Demos)와 그라케스   (Graces) 신전에다[㈜ 이 신전은 아고라(Agora)근처에 있었다. 참). H. Welter, \’Athens and its Monuments\’, 1913, p.81, \’파우사니아스(Pausanias)가 언급하지 못한 작은 관할구역은 데무스(Demus)와 그라케스(Graces)의 관할구역인 콜로누스 아고라이우스(Colonus Agoraeus)의 북단 철길 간선도로에서 밝혀졌다.…우리는 다양한 청동상들이 여기에 서 있었다는 문서들의 언급으로 알았다\’. W. Judeich, \’Topographie v. Athen\’, 제2판 p.363을 보라.] 세울 것이며, 그에게 금면류관을 수여하겠다는 사실을 신작 비극이 상연될 디오니시아 절기(Oionysianfestival)와 파나데나이아 절기(Panathenaean festival), 그리고 엘류시니아 절기(Eleusinian festival) 극장에서, 그리고운동 경기장에서[㈜ 본문은 확실치 않다. 아마도 이것은 본래 \’파나데나이아(Panathenaea)와 엘류시니아(Eleusinia)축제 때 운동경기에서\’로 이에 근거한 본문이다. 또는 라이나흐가 제안한 것처럼 동시대의 비문에 기초하면 \’파나데나이아와 엘류시니아와 톨레미 절기의 운동경기에서\’이다.] 공포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아덴의 지도자들은 힐카누스가 우의를 변치 않는 한 그가 열정적이고 관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가능한 모든 영예와호의를 베풀기로 결의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곧 우리 아덴인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잘 받아들이며 또한 얼마나 잘 갚는지를 보여 주는 한편 우리에게 열정을 보여 이미 영예를 받은 사람들을 경쟁시키고자 하기 위함이다.[㈜ 분문과 마지막절의 의미는 약간 확실치 않다.] 이에 우리 아덴인들은 그가 이러한 영예를 기꺼이 받아들여 줄 것과 앞으로도 언제나 우리에게 변함 없는 호의를 보여 줄 것을 요구할 사신을 온 백성 가운데서 선출하여 우리의 모든 결의 사항들을 전달하기로 결정하였다. 로마인들과 아덴의 백성들이 힐카누스에게[㈜  P사본은 \’대제사장\’을 첨가한다.] 부여한 영예에 관해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그에게 정중하게 대했던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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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권 제 8장 가이사가 애굽과 싸울 때 유대인들은 그와 동맹을 한것과 안티파데르의 빛나는 활동과 가이사와의 친분에 대하여, 또한 유대인들이 로마인과 아덴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8 장


    가이사가 애굽과 싸울 때 유대인들은 그와 동맹을 한것과 안티파데르의 빛나는 활동과 가이사와의 친분에 대하여, 또한 유대인들이 로마인과 아덴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에 대하여.


    1. 안터파테르와 힐카누스가 애굽에서 가이사를 돕다[㈜ (127-155)와 전쟁 1권. (187-200)에 내용에 나오는


      폼페이에게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리고 폼페이가 사망한 후[㈜ 가이사(Caesar)는 주전 48년 8월(율리우스의 계산에 따름)에 파르살루스 (Pharsalus)에서 폼페이를 물리쳤다. 폼페이는 주전 48년 9월 애굽에 상륙할 무렵 죽음을 당하였다.] 가이사가 애굽에서 싸우고 있을 무렵, 힐카누스의[㈜ 힐카누스는 전쟁. 1권.(187)에 나오는 병행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참).주 194를 보라.] 명령에 따라 유대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통치자[㈜ (139)에 나오는 스트라보의 인용문에서 안티파테르에게도 붙여졌던 이 칭호 (ejpimeletvh”)는 고대. 18권.(89)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의) 총독의 의미를 지닌다. 17권.(6)에서는 이 칭호가 수리아 총독이었던 사투르니누스(Saturninus)에게도 붙여졌다. 전쟁. 1권.(225)에 보먼 헤롯이 전수리아의 ejpimeletvh”로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고대. 14권.(280)의 병행구에 그는 strathgov”로 불린다. 이 본문에서는 안티파테르가 가이사에 의해 주 전 48년에 혹은 더 일찍(참). (108))가비니우스에 의해 특별한 직책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전 47년이 되어서야 유대의 총독(procurator, ejpivtropo”)이 되었다. 쉬러 (Shi’rer), i . 343 주 14에서 가비니우스가 그를 총독으로 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이 직책은 특별한 직책(extra ordinem)인 것이 분명하다. 모미글리아노(Momigliano)가 ‘Ricerche’, p.207에서 지적하듯이 유대는 가비니우스가 4구역으로 분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세푸스는 본문에서 앞질러 말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가이사는 주전 48년 겨울에 애굽에 왔으나 주전 47년 봄이 되어서야 미드리다테스와 안터파테르의 도움을 받았다. 이 원정에 관해 W. Judeich의 ‘Casar im Orient’, 1885를 보라.] 안티파테르는 가이사의 애굽 원정에 여러모로 유익한 존재임을 보여 주었다. 버가모(Pergamum)의 미드리다테스가 원군을[㈜ 수리아에서 파병된 37군단과 함께.] 끌고 가이사를 도우려고 하였으나 펠루시움(Pelusium) 주민들의 방해로 진로가 막혀 아스글론에[㈜ 택커래이 박사가 전쟁. 1권.(187)에서 지적한 대로 아스글론(Ascalon)은 펠루시움(Pelusium)에서 6일간 행군하여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미드리다테스(Mithridates)는 이 행로를 거절하기 이전에 충분히 경고를 받았음에 틀림없다.]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때 안티파테르는 유대인무장병사 약 3,000명을 거느리고 미드리다테스를 도왔다. 안티파테르는 또한 아라비아의 세력가들을 설득하여 원군을 보내게 하였다. 이에 가이사를 사모하는 마음에 있어서 안티파테르에게 뒤질세라 원군을 자청하고 나셨다. 그들의 이름을 살펴보면 리바누스 산에 거주하는 얌블리쿠스(Jamblichus) 방백과 레바논(Leb-anon) 산과 거의 모든 성읍에서 거주하였던 소에무스(Soemus)의 아들[㈜ 본문이 다소 불확실히다. 이 톨레미는 같은 지역의 멘나우스(Mennaus)의 아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톨레미와 얌블리쿠스(Jamblichus)는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자서(52)에 언급되어 있는 소에무스(Soemus)가 이 지역의 지배자였을 것이다. 그 이름은 페트라(Petra)와 이두매(Ituraea)에서 발견되는 아랍어와 나바타이아어이다. 참), 고대. 15권.(185), 17권.  (54), 20권. (158).] 톨레미(Ptolemy) 등이었다. 이에 미드리다테스는 수리아에서 펠루시움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주민들이 그를 환영해 주지 않자 미드리다테스는 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하였다.여기에서 안티파테르는 그의 명성을 발휘하였다. 즉 그는 제일 먼저 성벽의 일부를 허물고 성에 진입하여 아군이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고 그리하여 성을 함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오니아스(Onias)에[㈜ 오니아스(Onias)의 신전의 위치로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멤피스(Memphis)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함. 참). 고대. 13권.(65) 각주, 쉬러(Schurer) iii. 97. 주 25.] 거하는 유대인들이[㈜ 다른 본문에는 ‘애굽의 유대인들’.]  안티파데르와 미드리다테스의 군대가 가이사에게 가는 길을 또 다시 가로막고 나섰다. 이에 안티파테르가 다시 나서서 그들을 설득시켜 우방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다.[㈜ 병행본문인 전쟁. 1권.(190)의 내용에는 안티파테르가 힐카누스의 이름을 사용하여 애굽 유대인들의 지원을 받았던 것에 대한 언급은 없다. 참). 주194.] 안티파테르가 성공한 것은 그들과 같은 민족이었다는 점에도 그 이유가 있었겠으나 대제사장 힐카누스의 편지에 더 큰 원인이있었다. 힐카누스는 이 편지에서 그들에게 가이사와 친선 관계를 맺고 돈과 그 밖의 물자로 가이사를 도와 줄 것을 권면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힐카누스의 서신을 보고 안티파테르와 힐카누스의 생각이 같다는 점을 깨닫고 안티파테르가 요구하는 대로 움직여 주었다. 한편 멤피스(Memphis) 주변에 거하는 유대인들은 이 유대인들이 가이사의 원군이라는 것을 알고 미드리다테스를 초청하였다. 이에 미드리다테스는 이 초청에 응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자기의 군대에 편입시켜 주었다.


      2. 가이사가 애굽 전투에서 용맹스럽게 싸운 안티파테르를 칭찬하다


      미드리다테스는 델타(Delta)라고 불리우는 지역을 지나면서 이른바’유대인의 진영’이라고[㈜ 참). 주 201.] 하는 곳에서 적과 일대접전을 벌이게 된다. 미드리다테스는 우측 군사들을 통솔하였고 안티파테르는 좌측 군대를 맡았다. 그런데 접전이 벌어지자 오른편에 있던 미드리다테스의 군대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반면 좌측 편에 있던 안티파테르의 군대는 벌써 전투를 승리로마치고 미드리다테스의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서 강둑을 따라 오고 있었다. 만일 안티 파테르의 군대가 아니었더라면 미드리다테  스의 군대는 큰 재앙을 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안티파  테르가 와서 패전 직전의 미드리다테스의 군대를 구조해 주었으며 애굽의 군사들은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안티파테르는 적 진영을 장악하고 계속해서 도망가는 적을 추격했다. 그후 그는 패배하여 한참 뒤로 물러나 있던 미드리다테스에게로 돌아왔다.[㈜ 다소 수정된 본문. 다른 사본들에는 ‘소집되었다(called)’로 나온다.] 이 전투에서 미드리다테스의 부하는 800명이 전사한 반면에 안티파테르의 부하는 불과 50여명[㈜ 다른 본문에는 ‘4명’ ; 전쟁. 1권.(192)에는 ’80명’으로 나와 있다.] 밖에 전사하지 않았다. 미드리다테스는 이 전쟁의 전말을 가이사에게 보고하면서 전쟁 승리의 주역은 안티파테르이며 그가 자기의 목숨까지도 구해 주  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에 가이사는 안티파테르를 극찬하였으며 전 전쟁에 걸쳐 어려운 고비마다 그를 기용하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안티파테르는 몇몇 전투에서 부상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 안티파테르의 용감성에 대한 이러한 찬사는 전쟁. 1권.(192, 193)에 나와 있는 병행귀절의 것에 못지않는 것이다.]


     3. 가이사는 애굽에서의 전투시 원조해 주었던 힐카누스에게 보답하다


     더우기 마침내 전쟁을 종식하고 수리아로[㈜ 가이사는 보스포루스(Bosporus)의 왕인 파르나케스(Pharnaces)를 공격하기 위해 주전 47년 봄에 수리아로 항해해갔다. 파르나케스는 소아시아의 로마군인들을 위협했었기 때문이었다. 이 연대기에 관하여 알고자하면 유데이크(Judeich)의 책 p.108 이하를 보라.] 배를 타고 가서안티파테르를 극진하게 대우해 주었고 힐카누스에게는 대제사장직을 재확인해 주었다.[㈜ 전쟁. 1권.(194)에 보면 가이사가 안티파테르를 기쁘게 하기 위해 이렇듯 시민권을 주었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힐카누스는 주전 63년에 있었던 아리스토불투스의 투옥 이후 대제사장의 직무를 재개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참). (7)의 각주.] 또한 안티파테르에게 로마의 시민권을 주면서 어디에서든지 면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힐카누스가 이 전쟁에[㈜ 약간 수정된 본문이다. 다른 사본들에는 ‘군대’로 되어 있다.] 참전하여 애굽에까지 왔었다는 사실이[㈜ 이 진술과 뒤이어 나오는 스트라보의 인용구문은 전쟁. 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전해져 내려오고 했다. 저자의 이러한 진술은 갑바도기아의 스트라보(Strate of Cappadocia)가 아시니우스(Asinius)의[㈜ 율리우스 가이사와 동시대인물인 아시니우스 폴리오는 주전 60-40년까지의 역사를 상술한 하나의 역사서 ”History’를 서술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단지 부분적인 단편 외에 모두 분실되었다.]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언급에 의해서 그 사실성이 증명되어진다 : ‘미드리다테스가 애굽을 침략하였을 때에 유대의 대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가 동행하였다. ‘ 또한 다른 구문에서 스트라보는 힙시크라테스(Hyp-Sicrates)라는[㈜ 스트라보보다 더 나이가 든 동시대 인물 : 그의 저서는 지극히 부분적인 단편을 제외하고는 소실되어 버리고 없다. 이 저서는 근동지역과 아프리카  지역의 역사와 인종학을 다루었다.] 사람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미드리다테스는 처음에는 혼자 출정하였으나 유대의 통치자[㈜ 참. 주 197.] 안티파테르를 아스글론에서 불렀다. 이에 안티파테르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3,000명의[㈜ 가이사의 포고문에는 단지 1,500명으로만 언급되어 있다. 참). (193).] 병사들을 이끌고 직접 왔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지배자들을 설득하여 전투에[㈜ 약간 수정된 본문이다. 다른 본문에는 ‘군대’로 되어 있다.] 합세하게 하였다. 이때 대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도 이 원정에 가세하였다’ 이상이스트라보 자신이 증언한 내용이다.


    4. 아리스토불루스 Ⅱ세의 아들 안티고누스가 힐카누스의 권리침해를 가이사에게 고소하다.


      그러나 그때 당시[㈜ 다른 본문에는’그당시’라는 말을 빠뜨리고 있다.]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었던 안티고누  스(Antigonus)는 가이사에게 나아가 그의 아버지의 비참한 운  명을[㈜ 다른 ‘죽음’으로 나와 있다.] 통곡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저희 아버  지인 아리스토불루스가 독살되었던 것이나 저의 형이 스키피오  에 의하여[㈜ 참). (124, 125).] 참수형을 당했던 것은 가시아 때문이었습니다. 황제께서는 부당하게 왕국에서 쫓겨나 버린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티파테르와 힐카누스는 나라를 무력으로 다스리고 있으며 제게도 수많은 해를 가했습니다.’ 이때 그 자리  에 참석하고 있던 안티파테르는 안티고누스의 고소에 대해 자기  입장을 변호하였다.[㈜ 고대사는 안티파테르(Antipater)와 힐카누스(Hyrcanus)에 대한 그의 공격에 대한 안티고누스의 비난(분명하게 다메섹의 니콜라스에서 반복됐다)을 빠뜨리고 있다.] 이것은 전쟁. 1권.(195) 병행구에 표현되었다. 이것은 또 그의 적대자들이 선한 뜻으로가 아니라 두려움으로 애굽에서 가이사(Caesar)를 지지했다는 안티고누스의 비난을 빠뜨리고 있다.

      그는 안티고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변  혁을 좋아 하는 반란의 무리임을 강조하었다.[㈜ 안티파테르(Antipater)는 전쟁. 1권. (197)에서 더 생동감있게 자신을 변호한다 ; 그는 자기의 상처를 보이려고 옷을 벗었으며 아리스토불루스의 가적의 반역적인 경향에 대해서 더 수사학적으로 말한다.] ‘제가 황제를  대신하여 전쟁에서 어떤 고생을 하였는지에[㈜ 이것은 그의 상처들을 암시하는 것이다. (참). 앞의 주). 다른 사람들은 번역은 ‘그가(가이사) 증인이었다고 말하면서’.] 대하여는 황제께서 친히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아리스토불루스가 로   마로 잡혀간 것은 정당한 것입니다. 그는 로마의 적이었고 도저히 그는 로마의 편이 되기에는 어려운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티고누스의 형이 스키피오에게 생포된 것은[㈜ 다른 본문에는 ‘잡힌 것은’.] 강도짓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폭력을 휘두르고 불의를 일삼다가 스키피오에 의해 죄값을 치른 것뿐입니다. ‘


     5. 가이사와 로마의 원로원은 안티파테르와 힐카누스를 영예롭게 함


      안티파테르가 이처럼 변명을 마치자 가이사는 힐카누스를 대제사장으로[㈜ 190 이하에 인용된 법령에 의하면 지배자. 유대인에 의해 그는 왕이라 불리워진 것 같다. 참). (157).] 임명하였고 안티파테르에게는 그가 원하는 어떠한 자리에서든지 그로 하여금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때에 안티파테르는 이러한 지위의 결정을 가이사에게 맡기었기때문에 가이사는 그로 하여금 유대의 행정 장관의 자리에[㈜ 참). 주197.] 임명하였다. 가이사는 또한 폼페이가 허물어 버린 이후로 폐허인채로 남아 있던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할 수 있도록[㈜ 전쟁.1권.(199)에서 이 호의는 안티파테르가 부여한 것이다. 사람들의 변화에서 Laqueur, p.165에서는 요세푸스가 시도한 전쟁사의 ‘체계적이며 정치적인 변역’의 또다른 예를 본다.] 허락해 줄 것을 힐카누스가 청원하자 그에게 성벽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는 로마의 집정관들에게 이같은 사실들을 사람을 보내어 알리고 원로원 의사당에[㈜ 고대. 13권. 과 14권 .에서 인용한 다양한 로마와 헬라적인 법령에 대해서 부록에 있는 목록의 작품을 보라.] 새겨 놓을 것을명하였다. 원로원에 의해 제정된 법령은 다음과 같았다.[㈜ 다음의 법령은 그 연대(年代)를 알 수 있다. 이는 힐카누스 Ⅱ세 때가 아니라 (가이사 자신을 위해 발효시킨 법령은 (190) 이하에 인용되어 있다) 시몬(Simon)의 때로 생각된다. 더 정확히는 주전 139년이다. 참). 마카비 1서 15 : 16-21. 여기서는 로마인 집정관 루키우스(Lucius)의 유사한 편지가 인용된다. 참) 부록에는 자세하게 작품들이 인용되었다.] ‘집정관[㈜ 또는 ‘호민관’, 이는 라틴어 번역이다 : ‘치안관’과 ‘호민관’이라는 의미의 strathgov”는 Magie, pp. 84, 81을 보라.] 부키우스(Lucius)의 아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LuciusValerius)는 콩코드[㈜ Schurer, i. 251 주 22. 에서는 이것이 주전 121년에 세워진 것보다 더 일찍 세운 콩코드 신전(Temple of Concord)일 것이라고 한 몸센(Mommsen ‘Hermes’ix’ 1875, 281이하)에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그래서 주전 139년으로 법령의 연대를 추정하는 것을 배제시키지 않는다.] 신전(the Temple of Concord)에서 12월13일에 원로원에 이같이 보고한다. 이 법령을 작성할 때에 참석했던 자들은 콜리네족(the tribe of Colline) 출신의 루키우스(Lucius)의 아들 루키우스 코포니우스(Lucius coponius)와 퀴리네족(the tribe of Quirine)출신의 파피리우스(Pagirius)였다. 법령의 내용은 유대의 사신인, 야손(Jason)의 아들 알렉산더(Alexander)와[㈜ 리츨(Ritschl)은 마카비 1서 14 :22과 부합되게 하려고 발효시킨 ‘안티파테르(Antipater)’라는 본문을 제안한다. 그곳에는 안티오쿠스의 아들 누메니우스와 야손의 아들 안티오쿠스라는 사신 이름이 나온다.] 안티오쿠스(Antiochus)의 아들 누메니우스(Numenius)와 도시데우스(Dositheus)의 아들 알렉산더(Alexagder)가 제안한 로마와 유대 간의 기존 우호동맹의 갱신에 관한 것이다. 유대 사신들은 우정의 표시로 금화 50,000의 가치가 나가는 금방패를[㈜ 참). 마카비 1서 14 : 24, 15 : 18, 여기서는 1,000미나(minae) 즉 50,000디드라크므스(didrachms) 또는 스타테르스(staters)인 금방패를 언급한다.] 가져왔으며 모든 자유 도시들의 지배자들과 열왕에게[㈜ 그런 왕들은 마카비 1서 15 : 22에서 열거된다.] 유대 나라를 해하거나 침략하지 말 것을 명하는 서신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원로원은 유대와우호 동맹을 갱신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유대를 들기로 결정하고 유대국이 보낸 금방패를 받았다.’ 이는 민족의 통치자이자대제사장이었던 힐카누스 제 9년 파네무스(Panemus)월(月)에[㈜ 요세푸스의 자료가 마게도냐(Macedonia)력으로 로마 법령의 날짜를 기록한 이유는 없다. 더구나 그 법령은 국내적으로는 12월의 13일로 발효한다. 반면 파네무스(Panemus)는 6, 7월이다. 본문은 다음의 아델(Athen)법령을 언급한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힐카누스 I세 때로 연대가 추정된다(다음의 주를 보라) 그러므로 호몰레(Homolle)가 제안한 것처럼, ‘9 ‘를’29’로 수정해야 한다. 이것은 주전 106/5년이 된다. 이는 아가도클레스(Agathocles)의 집정관직의 연대와 일치한다. 또한 ‘통치자’라는 것은 삭제해야만 한다. 이 단어는 힐카누스 I세에게 적용시키기가 어렵다.] 결정되었던 사실이다. 힐카누스는 또한 여러모로 아덴인들은 힐카누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한 결정 사항을서신으로 보내왔다. ‘아스클레피아데스(Asclepiades)의 아들인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최고 지도자이자 대제사장으로있을 당시, 파네무스 월이 끝나기 5일 전에 아덴 사람들의 법령이 행정장관들에게 넘기워졌다.[㈜ 라이나흐(Reinach)가 지적한 것처럼 첫째 문장은 서론이고 몇몇 헬라 도시에서 유대인들에게 법령을 전달한 것을 언급한 것이 다.] 아가도클레스가 집정관으로 재임할 당시,[㈜ 주전 106/5년. W. B. Dinsmoor, ‘The Archons of Athens in the Hellenistic Age’, 1931, pp.275-277과, W. Pritchett와 B. D. Meritt, ‘The Chronology of Hellenistic Archons’1941, p. 34를 보라.] 이 당시에는 크세난더(Xenander)의 아들유클레스(Eucles)가 아이달리드(Aithalidean) 시(市)의[㈜ 라이나흐(Reinach)의 추정, 이는 사본, ‘메난더(Menander)의 아들, 알리무시안(Alimusian) 도시의’에 대한 동시대의 비문(‘CIA’,ii’. 2984)에 근거한 것이다.] 서기관으로 있을 때인데, 무니키온(Munychion)월(月)[㈜ 그러므로 그 법령은 힐카누스가 수령하기 두달 전에 통과되었다, 참). 위 각주 234.] 11일에[㈜ 사본에 빠져 있는 prytany의 날은 딘돌프(Dindorf)에 의해 제공된 것이다.] 에르키아(Erchia)시를[㈜ 본문이 다소 수정됨. ‘에르키아 시’의 통치자,즉, !Ercieu;”는 사본에는 ‘대제사장’, 즉 ajrciereuv”로 되어있다.] 통치하는 도로데우스(Dorothe-us)와 그의 동료 관료들은 디오니시우스(Dionysius)의 아들 디오니시우스(Dionysius)의 의안을 통과시킨[㈜ 사본에 빠져있는 이 단어는 보엑(Boeckh)이 제공한다] 투표를 감독하였다.[㈜ eipeyhvfixe는  ejpestavtei와 동일하다. 참). W. Larfeld, ”Griechigche Epigraphik’, 1914, p.333.] 그 의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앞의 형식은 아덴(Athen) 법령의 일반적인 형태와 완전히 일치한다. 참),   Larfeld, 앞의 책.] ‘대제사장이자 유대 백성의 지도자인[㈜ ‘알렉산더와 아들'(얀나아우스, Jannaeus)이란 단어는 요세푸스나 그의 자료에 의해 침가된 것이다. 이는 힐카누스 I세 대신에 힐카누스 Ⅱ세를 의미하는 인상을 준다.] 알렉산더의 아들 힐카누스는[㈜ ‘그리고 지도자’란 단어는 첨가된 것이 분명하다. 주 234를 보라.] 우리 민족 모두에게 뿐만 .아나라 국민 개개인에게도 끊임 없이 호의와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아덴인들이 공적인 임무를 지니고 사신으로 가든지 아니면 개인적인 자격으로 가든지 간에 그는 그들을 매우 다정다감하게 영접해 주었으며, 또한 그들이 안전하게 귀국 하도록 도와주었다. 우리는 이러한 선례를 여러 차례 보아왔다.  특히 이러한 사실들은 수니안(Sunian)성의 디오도루스(Dio-   dorus)의 아들[㈜ ‘디오도루스(Diodorus)의 아들, 데오도투스(Theodotus)’는 사본에 나오는 ‘데오도루스(Theodorus)의 아들 데오도시우스(Theodosius)’대신 듀몽(Dumont, 라이나흐의 주에서 인용)에 의해 추정된 본문이다. 이는 동시대의 비문에 기초한 것이다.] 테오도투스(Theodotus)의 건의안을 통하여이 힐카누스라는 인물이 그가 할 수 있는 한 아덴인들에게 최   대한 호의적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으며 그가 다스리는 백성들의 미덕에 관하여서도 언급을 하고 있다. 이 건의안에  는 또한 힐카누스에게 법률에 의거한 포상 조치로서 금면류관을  수여할 것과 그의 동상을 만들어 데모스(Demos)와 그라케스   (Graces) 신전에다[㈜ 이 신전은 아고라(Agora)근처에 있었다. 참). H. Welter, ‘Athens and its Monuments’, 1913, p.81, ‘파우사니아스(Pausanias)가 언급하지 못한 작은 관할구역은 데무스(Demus)와 그라케스(Graces)의 관할구역인 콜로누스 아고라이우스(Colonus Agoraeus)의 북단 철길 간선도로에서 밝혀졌다.…우리는 다양한 청동상들이 여기에 서 있었다는 문서들의 언급으로 알았다’. W. Judeich, ‘Topographie v. Athen’, 제2판 p.363을 보라.] 세울 것이며, 그에게 금면류관을 수여하겠다는 사실을 신작 비극이 상연될 디오니시아 절기(Oionysianfestival)와 파나데나이아 절기(Panathenaean festival), 그리고 엘류시니아 절기(Eleusinian festival) 극장에서, 그리고운동 경기장에서[㈜ 본문은 확실치 않다. 아마도 이것은 본래 ‘파나데나이아(Panathenaea)와 엘류시니아(Eleusinia)축제 때 운동경기에서’로 이에 근거한 본문이다. 또는 라이나흐가 제안한 것처럼 동시대의 비문에 기초하면 ‘파나데나이아와 엘류시니아와 톨레미 절기의 운동경기에서’이다.] 공포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아덴의 지도자들은 힐카누스가 우의를 변치 않는 한 그가 열정적이고 관대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가능한 모든 영예와호의를 베풀기로 결의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곧 우리 아덴인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호의를 잘 받아들이며 또한 얼마나 잘 갚는지를 보여 주는 한편 우리에게 열정을 보여 이미 영예를 받은 사람들을 경쟁시키고자 하기 위함이다.[㈜ 분문과 마지막절의 의미는 약간 확실치 않다.] 이에 우리 아덴인들은 그가 이러한 영예를 기꺼이 받아들여 줄 것과 앞으로도 언제나 우리에게 변함 없는 호의를 보여 줄 것을 요구할 사신을 온 백성 가운데서 선출하여 우리의 모든 결의 사항들을 전달하기로 결정하였다. 로마인들과 아덴의 백성들이 힐카누스에게[㈜  P사본은 ‘대제사장’을 첨가한다.] 부여한 영예에 관해서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그에게 정중하게 대했던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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