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권 제 7장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것과 아그립바Ⅱ세와 그의 누이들에 대하여

 


 제 7 장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것과 아그립바Ⅱ세와 그의 누이들에 대하여



1. 벨릭스(Felix)가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팔라스(Pallas)의[㈜ 안토니아의 자유민<참). 고대. 18권. 6 : 6(182)에서 그는 안토니아의 노예들 중 가장 신실한 자로 언급된다>으로 글라우디오황제가 사랑하는자, 그는 아마 그의 애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그립피나(Agrippina)의 소송을 찬성했을 것이다. 벨릭스가 임명되기 얼마 전인 52년 1월에 팔라스(Pallas)는 원로원에 의해 호위관의 장비(ornamenta praetoria)와 아주 많은 돈을 수여 받았을 때, 권력의 절정에 도달했었다. 참). Pliny, \’Hist. Nat\’ vii. 29. 2, vii. 15.3 ; Suet. \’Claud\’ 28. 전해진 바에 의하면, 네로(Nero)가 팔라스의 재산 때문에 그를 62년에 죽였다고 한다.] 형제 벨릭스를[㈜ 세명의 사마리아인들이 처형되었다<전쟁. 2권. 12 :7(245)>. 이것은 발췌문의 본문이다. 사본들은 \”그가 이제 글라우디오에게 벨릭스를 보냈다\”고 나온다. 그러나 타키투스는 \’Hist.\’ v.9에서 그를 안토니우스 벨릭스(Antonius Felix)로 부르고 있는데, 그는 비문에서도 역시 그렇게 불리고 있다(C.I.L. v.34)그러므로 글라우디오(Klauvdio\”)로의 수정을 지지하는 쉬러(Schurer)의 I.571-572를 보라. 폰 로덴(P. von Rohden)이 \”Antonius\”, no. 54 Pauly Wissowa, I. 1894, p.2617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자기 형 팔라스처럼 아마도 글라우디오의 모친 안토니아(Antonia)에 의해 해방되었던 것 같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글라우디오\’28에서 벨릭스에 대한 높은 경의를 말하고 있다.그는 주후 약 52년 경에 총독이 되었고, 바울이 행 24 : 1이하에서 고소당할 때 그 앞에 있었던 이가 벨릭스였다. 벨릭스에 대한 요세푸스의 설명은 타키투스의 설명과 모순되는 것 같은데, 타키투스는 \’연대기\’ xii. 54에서 쿠마투스가 갈릴리를 맡고 있는 동안, 벨릭스는 이미 사마리아를 통치하고 있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레이크(Kirsopp Lake)가 앞 글, p.465에서 주목했던 것처럼 행 24 : 10은 타키투스의 설명을 지지해 주고 있는데, 왜냐하면 바울은 벨릭스가 여러 해 동안 \”이 민족의 재판장\”이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쿠마누스와 벨릭스는 강도떼들이 모은 약탈품들을 같이 나눴으나 소요를 진압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자 곧 수리아의 총독 쿠아드라투스(Ummidius Quadratus)는 그들을 데리고 와서 벨릭스를 판사들 중의 한명으로 제시하면서 쿠마누스에게는 형을 선고한다. 요세푸스와 타키투스의 설명들을 화해시키려는 독창적인 시도를 보여주는 아버베치(Aberbach), pp. 4-6은 고대. 20권. 6 :1(118-124)에 기술된 소요가 일어났을 때 쿠마누스는 실제로 유대와 사마리아의 총독이었고, 반면 벨릭스는 갈릴리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66년의 그 사건 이전에 요세푸스는 갈릴리에 별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같은 기간에 글라우디오가 벨릭스를 총독으로 파견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해에 있었던 다른 총독들의 파견도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다(예). 보르기오 베스도(Porcius Festus), 8 :9(182)>. 그리고 벨릭스가 이미 팔레스틴에서 임무를 맡고 있었다면, 요세푸스가 그 사실을 언급해서는 안되었으며, 글라우디오를 유대 지역을 통치하도록 그를 \”보냈다\”(\”앞으로 보냈다\”, 전쟁. 2권. 12 : 8(247)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반면에 한 인물이 유대의 총독이 되도록 보내진 것으로 말하는 요세푸스는 벨릭스가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그리고 페리이아(Peraea)의 총독으로 보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데<(전쟁. 2권. 12 :8(247)>, 이것은 아마 예전에 이 지역들 중의 한 지역을 그가 맡고 있었다는 것과 일치함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보내유대 정세를 돌보게 하였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통치한 지[㈜ 주후 53년.] 이미 12년이 다 되었을때 그는 아그립바에게 빌립(Philip)의[㈜ 고대. 18권. 2 : 1(27, 28), 4: 6(106) 등. 전쟁. 2권. 12 : 8(247)에 의하면, 아그립바(Agrippa)도 또한 바루스(Varus)를 분봉(分封)받았다.] 영토와 바타나이아(Batanaea)와 아빌라(Abila)와 함께[㈜ 혹은 다메섹(Damascus) 북서쪽의 아르벨라. 참). 고대. 19권. 5 : 1(275) 눅 3 : 1에 의하면 루사니아(Lysanias)는 디베료(Tiberius) 통치시절 아빌레네(Abilene)의 분봉왕이었다.] 드라고닛(Thachonites)을[㈜ 눅 3 : 1에서 드라고닛(Trachonitis)은 빌립의 분종의 일부라고 말해준다. 따라서 헝킨(J.W.Hunkin)은 \”St. Luke and Josephus\”, \’Church Quart. Rev.\’ 1xxx viii, 1919, p.100에서 누가는 고대서(Antiquities)의 이 본문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온당하다고 본다.] 주었다. 이들 중 아빌라는 루사니우스(Lysanius)의 영토였다. 그러나 글라우디오 황제는 자신이 4년간 칼키스(Chalcis)총독으로 있었을 때 칼키스를 루사니우스로부터 되찾았다. 아그립바왕은 이들 나라를 가이사가 주었을 때 자신의 누이 드루실라(Drusilla)를[㈜ 참). 헤롯 가문의 족보에서 그녀의 위치를 보려면 고대. 18권. 5 : 4(132) 참조. 고대. 19권. 9: 1(354)에서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 아그립바 I세가 죽었을 때 6살이었다고 언급한다. 그녀는 행 24 : 24의 벨릭스의 유대인 아내이다. Suetonius의 \’글라두디오\’28에 의하면, 그녀는 벨릭스가 결혼했던 세 왕비들 중 하나로 추정된다.] 할례받겠다는 동의하에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와 혼인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안티오쿠스(Antiochus)왕의 아들 에피파네스(Epi-phanes)가 그녀와의 혼인을[㈜ 혹은 \”그녀와 결혼한 것을 변명했었다.\”] 거절했기 때문이었고 이전에[㈜ 고대. 19권. 9 : 1(355).] 유대 종교를 수용하겠다고 부친과 약속한 후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그립바왕은 마리암메(Maria-mme)를 그녀의 부친 아그립바왕이 이전에 약혼했었던 헬키아스(Helcias)의 아들 아르켈라우스(Archelaus)와[㈜ 고대. 19권. 9 : 1(355).] 혼인시켰다. 이러한 혼인으로 인해 베레니케(Berenice)라고 하는 딸이 태어났다.



  2. 벨릭스가 구부로의 마법사를 통해 아그립바의 누이 드루실라(Drusilla)와 혼인할 것을 종용받다



 그러나 드루실라와 아지주스의 결혼은 그후 오래가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파경에 이르렀다.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드루실라를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타키투스의 고대. 5권. 1 : 2(9)에 의하면 벨릭스는 안토니(Antony)와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손녀였던 드루실라이며 고대. 20권. 7 : 2(143)에서 그가 결혼했던 그 드루실라는 아니다. 참). Stein, \”Drusilla\” no. 2. Pauly-Wissowa, v.1905, p.1741에서 슈타인은 약간의 혼란이 있다고 말힌다)와 결혼했다. 따라서 그는 글라우디오가 손자인 것처럼, 벨릭스는 안토니의 손자 사위가 된다. 타키투스는 벨릭스가 온갖 종류의 만행과 육욕\”에 빠졌다고도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드루실라는 미(美)에 있어서는 어느 여자보다도 훨씬 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의 친구 중[㈜  이것은 가장 좋은 사본과 발췌문의 본문이다. 다른 두 중요 사본과 가장 좋은 사본의 난외주, 그리고 라틴 역본판은 그 이름을 시몬(Simon)은 누구인가? 크렝켈(M. Krenkel)은 \’Josephus und Lukas\’ 1894, p.178 이하에서 시몬 베드로(Simon Peter)에 대립되는 거짓 시몬(the false Simon)으로 간주했으며 모세의 법은 폐기되었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렸던 사도 바울을 그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슈미텔(P.W.Xchmiedel)이 \”Simon Magus\”, Ency. Bibl.\’ iv. 1903, p.4556에서 그리고 바이츠(H.Waitz)가 \”Simon Magus in der altehristlichen Literatur,\” \’Zeitsch. f.d. Neutest. Wiss.\’ v. 1904, p.127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이 그렇게 불렸다는 어떤 증거도 없으며, 또한 바울이 여기서 언급된 마술사인 구브로 사람(Cyprian) 바울이라는 증거도 없다. 바이츠는 계속해서 교회 교부(the Church Father)였던 시몬으로 동일시하려 하지만, 그는 구브로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다. 시몬이라는 이름은 이 시기에 아주 흔했고 마술사도 많았었다.] 한 명인 아토무스(Atomus)를 그녀에게 보내었는데, 시몬은 유대인으로 구브로(Cyprus)태생이었고 마법사[㈜ 유대 마술사에 관해서, 바론(S.W.Baron)은 \’A Social and Religious History of the Jews\’, ii, 1952, p.21에서 루키안(Lucian)의 \’Tragodopodagra\’, 173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루키안은 \’발의 통풍\'(痛風, podagra) 때문에 고생하는 한 사람을 풍자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온갖 처방을 해 본 후에 결국 어떤 유대인의 마법에 호소하게 되는 내용이다. 참). 바론은 ii. 336 주 25에서 노아(Noah)는 천사들로부터 마술적인 치료 기술을 얻어, 자기 아들 셈(Shem)에게 전수했다고 한다.] 행세를 하는 사람이었다. 시몬은 드루실라를 설득하여 현 남편을 버리고 벨릭스와 혼인할 것을 종용하였고 만일 드루실라가 자신의 청을 거절하지 않는다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아마 태커레이(Thackeray)가 \’Selections from Josephus\’, p.95주 2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는 \’행복한\’을 의미하는 벨릭스(Felix)라는 이름으로 언어 유희를 한 것이다.] 약속했다. 결국 드루실라는 악행을 범하고 말았다. 그것은 자매 베레니케의 시기를 피하고자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드루실라는 자신의 미모로 인해 냉대받았으므로[㈜ 여기서 채택된 본문은 초판(editio princeps)을 따른 것이다. 마튜-헤르만(Mathieu-Hermann)은 사본들의 본문을 다소 수정하여 \”벨릭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를 초대했는데, 그 아름다움 때문에 그녀가 베레니케(Berenice)에게 많은 고통을 당했다고 믿었다\”로 번역한다.] 조상의 율법을 범하고 벨릭스와 혼인하였다.그후 벨릭스는 드루실라를 통하여 아들을 얻고 이름을 아그립바라 하였다. 아그립바는 가이사 티투스 치세 때[㈜ 주후 79년.] 그의 아내와 함께 베수비우스(Vesuvius) 화산이 폭발하여 죽고 말았다는 내용은 이후에[㈜ 요세푸스의 현존하는 작품들에는 이것에 대한 어떤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 언급될 것이다.



3. 헤롯이 죽은 후 베레니케(Berenice)가 길리기아(Cilicia)왕 폴레모(Polemo)와 혼인하다



 베레니케는 남편이자 숙부였던 칼키스의 왕 헤롯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과부로 살았다. 그러나 베레니케가 오라비인[㈜ 쥬베날(Juvenal) vi.156-160도 마찬가지로 \”야만인\” 아그립바가 ?음란한\” 그의 여동생에게 주었던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에 관해 말할 때, 이 소문에 대해 넌지시 말하고 있다. 매커디(G.H. Macurdy)는 ?Julia Ber-enice\”,\’Am. Jour. of Philol.\’lxi, 1935, p.251에서 그 소문은 베레니케가 결코 결혼하지 않았던 아그립바의 법정을 주재했기 때문에 발생했었을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다. 그녀에 대한 티투스(Titus)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는 수에토니우스(Tit. 7), 타키투스(?Hist.? ii .2)와 디오(Dio Ixvi. 15와 18)는 강력히 주장된 아그립바와의 근친 성교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참). 헤이우드(R. M. Haywood)는 \”A Note on the Dia-logus of Tacitus\”,\’Class. Weekly\’, xxxvi, 1942-1943, p.255에서 마테르누스 메데아(Maternus Medea) 타키투스의 \’대화편\’. 3)가 티투스가 결혼하고 싶어했던 베레니케라고 말한다. 외국인과의 그러한 결혼에 대한 생각을 로마인들은 혐오스럽게 여겼다. 아그립바와 베레니케 사이의 근친 성교에 대한 소문온 아마 요세푸스가 로마에 있을 때(자서. 65.(364-367))오랫동안 편지 교환을 했던 아그립바가 이 이야기가 쓰여진 93년이나 94년에 죽었다(고대. 20권. 12 : 1(267))는 것을 지시하는 것 같다. 참). Mac-urdy, p250, J.A crook, \”Titus and Berenice\”\’Am. Jour. of Philol.?1xxii , 1951.p.163. n.9.] 아그립바 Ⅱ세와 간통했다는 소문이 유포되자 그녀는 길리기아(Cilicia)의 왕인 폴레모(Polemo)를[㈜ 고대. 19권. 8 : 1(338)의 폴레모(Polemo)는 아님. D. Magie, ·Ronman Rule in Asia Minor\’, ii , 1950, p.1407을 보라.] 설득하여 할례를 받고 자신과 결혼해 줄 것을 종용하였다. 이러한 조취를 취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에 관한 이러한 소문이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폴레모는 설득당하였으며 베레니케의 재물로[㈜ 그러한 개종은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효력이 없다. 바벨론 탈무드, \’Gerim\’i..7을 보라 : \”결혼, 두려움, 사랑때문에 개종하는 자는 누구든지 개종자가 아니며‥‥ 하느님을 위하여 개종하지 않는 자도 또한 개종자가 아니다. \”] 인하여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혼생활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결국 베레니케는 폴레모를 떠나게 되었는데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불순한 의도로 인한 것이었다. 베레니케는 이러한 결혼생활을 청산함과 동시에 유대종교도 저버렸다. 그와 같은 때에 마리암메는 아르켈라우스를 버리고 혈통이나 재산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 중의 지배자이며 당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행정장관이었던[㈜ 군대장관(alabarch)의 직무에 관해서는 고대, 18권.6 : 3(159)를 보라.] 데메트리우스(Demetrlus)와 혼인하였다. 마리암메는 데메트리우스와의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이름을 아그립피누스(Agrippinus)라 하였다[㈜ 현존하는 사본에는 그러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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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권 제 7장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것과 아그립바Ⅱ세와 그의 누이들에 대하여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제 7 장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것과 아그립바Ⅱ세와 그의 누이들에 대하여


    1. 벨릭스(Felix)가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다


     글라우디오 황제는 팔라스(Pallas)의[㈜ 안토니아의 자유민<참). 고대. 18권. 6 : 6(182)에서 그는 안토니아의 노예들 중 가장 신실한 자로 언급된다>으로 글라우디오황제가 사랑하는자, 그는 아마 그의 애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그립피나(Agrippina)의 소송을 찬성했을 것이다. 벨릭스가 임명되기 얼마 전인 52년 1월에 팔라스(Pallas)는 원로원에 의해 호위관의 장비(ornamenta praetoria)와 아주 많은 돈을 수여 받았을 때, 권력의 절정에 도달했었다. 참). Pliny, ‘Hist. Nat’ vii. 29. 2, vii. 15.3 ; Suet. ‘Claud’ 28. 전해진 바에 의하면, 네로(Nero)가 팔라스의 재산 때문에 그를 62년에 죽였다고 한다.] 형제 벨릭스를[㈜ 세명의 사마리아인들이 처형되었다<전쟁. 2권. 12 :7(245)>. 이것은 발췌문의 본문이다. 사본들은 “그가 이제 글라우디오에게 벨릭스를 보냈다”고 나온다. 그러나 타키투스는 ‘Hist.’ v.9에서 그를 안토니우스 벨릭스(Antonius Felix)로 부르고 있는데, 그는 비문에서도 역시 그렇게 불리고 있다(C.I.L. v.34)그러므로 글라우디오(Klauvdio”)로의 수정을 지지하는 쉬러(Schurer)의 I.571-572를 보라. 폰 로덴(P. von Rohden)이 “Antonius”, no. 54 Pauly Wissowa, I. 1894, p.2617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자기 형 팔라스처럼 아마도 글라우디오의 모친 안토니아(Antonia)에 의해 해방되었던 것 같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는 ‘글라우디오’28에서 벨릭스에 대한 높은 경의를 말하고 있다.그는 주후 약 52년 경에 총독이 되었고, 바울이 행 24 : 1이하에서 고소당할 때 그 앞에 있었던 이가 벨릭스였다. 벨릭스에 대한 요세푸스의 설명은 타키투스의 설명과 모순되는 것 같은데, 타키투스는 ‘연대기’ xii. 54에서 쿠마투스가 갈릴리를 맡고 있는 동안, 벨릭스는 이미 사마리아를 통치하고 있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레이크(Kirsopp Lake)가 앞 글, p.465에서 주목했던 것처럼 행 24 : 10은 타키투스의 설명을 지지해 주고 있는데, 왜냐하면 바울은 벨릭스가 여러 해 동안 “이 민족의 재판장”이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타키투스에 의하면 쿠마누스와 벨릭스는 강도떼들이 모은 약탈품들을 같이 나눴으나 소요를 진압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러자 곧 수리아의 총독 쿠아드라투스(Ummidius Quadratus)는 그들을 데리고 와서 벨릭스를 판사들 중의 한명으로 제시하면서 쿠마누스에게는 형을 선고한다. 요세푸스와 타키투스의 설명들을 화해시키려는 독창적인 시도를 보여주는 아버베치(Aberbach), pp. 4-6은 고대. 20권. 6 :1(118-124)에 기술된 소요가 일어났을 때 쿠마누스는 실제로 유대와 사마리아의 총독이었고, 반면 벨릭스는 갈릴리를 책임지고 있었는데, 66년의 그 사건 이전에 요세푸스는 갈릴리에 별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같은 기간에 글라우디오가 벨릭스를 총독으로 파견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해에 있었던 다른 총독들의 파견도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다(예). 보르기오 베스도(Porcius Festus), 8 :9(182)>. 그리고 벨릭스가 이미 팔레스틴에서 임무를 맡고 있었다면, 요세푸스가 그 사실을 언급해서는 안되었으며, 글라우디오를 유대 지역을 통치하도록 그를 “보냈다”(“앞으로 보냈다”, 전쟁. 2권. 12 : 8(247)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반면에 한 인물이 유대의 총독이 되도록 보내진 것으로 말하는 요세푸스는 벨릭스가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 그리고 페리이아(Peraea)의 총독으로 보냄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데<(전쟁. 2권. 12 :8(247)>, 이것은 아마 예전에 이 지역들 중의 한 지역을 그가 맡고 있었다는 것과 일치함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보내유대 정세를 돌보게 하였다. 글라우디오 황제가 통치한 지[㈜ 주후 53년.] 이미 12년이 다 되었을때 그는 아그립바에게 빌립(Philip)의[㈜ 고대. 18권. 2 : 1(27, 28), 4: 6(106) 등. 전쟁. 2권. 12 : 8(247)에 의하면, 아그립바(Agrippa)도 또한 바루스(Varus)를 분봉(分封)받았다.] 영토와 바타나이아(Batanaea)와 아빌라(Abila)와 함께[㈜ 혹은 다메섹(Damascus) 북서쪽의 아르벨라. 참). 고대. 19권. 5 : 1(275) 눅 3 : 1에 의하면 루사니아(Lysanias)는 디베료(Tiberius) 통치시절 아빌레네(Abilene)의 분봉왕이었다.] 드라고닛(Thachonites)을[㈜ 눅 3 : 1에서 드라고닛(Trachonitis)은 빌립의 분종의 일부라고 말해준다. 따라서 헝킨(J.W.Hunkin)은 “St. Luke and Josephus”, ‘Church Quart. Rev.’ 1xxx viii, 1919, p.100에서 누가는 고대서(Antiquities)의 이 본문을 기록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 것은 온당하다고 본다.] 주었다. 이들 중 아빌라는 루사니우스(Lysanius)의 영토였다. 그러나 글라우디오 황제는 자신이 4년간 칼키스(Chalcis)총독으로 있었을 때 칼키스를 루사니우스로부터 되찾았다. 아그립바왕은 이들 나라를 가이사가 주었을 때 자신의 누이 드루실라(Drusilla)를[㈜ 참). 헤롯 가문의 족보에서 그녀의 위치를 보려면 고대. 18권. 5 : 4(132) 참조. 고대. 19권. 9: 1(354)에서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 아그립바 I세가 죽었을 때 6살이었다고 언급한다. 그녀는 행 24 : 24의 벨릭스의 유대인 아내이다. Suetonius의 ‘글라두디오’28에 의하면, 그녀는 벨릭스가 결혼했던 세 왕비들 중 하나로 추정된다.] 할례받겠다는 동의하에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와 혼인하게 하였다. 왜냐하면 안티오쿠스(Antiochus)왕의 아들 에피파네스(Epi-phanes)가 그녀와의 혼인을[㈜ 혹은 “그녀와 결혼한 것을 변명했었다.”] 거절했기 때문이었고 이전에[㈜ 고대. 19권. 9 : 1(355).] 유대 종교를 수용하겠다고 부친과 약속한 후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그립바왕은 마리암메(Maria-mme)를 그녀의 부친 아그립바왕이 이전에 약혼했었던 헬키아스(Helcias)의 아들 아르켈라우스(Archelaus)와[㈜ 고대. 19권. 9 : 1(355).] 혼인시켰다. 이러한 혼인으로 인해 베레니케(Berenice)라고 하는 딸이 태어났다.


      2. 벨릭스가 구부로의 마법사를 통해 아그립바의 누이 드루실라(Drusilla)와 혼인할 것을 종용받다


     그러나 드루실라와 아지주스의 결혼은 그후 오래가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이유로 파경에 이르렀다.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있을 때 드루실라를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타키투스의 고대. 5권. 1 : 2(9)에 의하면 벨릭스는 안토니(Antony)와 클레오파트라(Cleopatra)의 손녀였던 드루실라이며 고대. 20권. 7 : 2(143)에서 그가 결혼했던 그 드루실라는 아니다. 참). Stein, “Drusilla” no. 2. Pauly-Wissowa, v.1905, p.1741에서 슈타인은 약간의 혼란이 있다고 말힌다)와 결혼했다. 따라서 그는 글라우디오가 손자인 것처럼, 벨릭스는 안토니의 손자 사위가 된다. 타키투스는 벨릭스가 온갖 종류의 만행과 육욕”에 빠졌다고도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드루실라는 미(美)에 있어서는 어느 여자보다도 훨씬 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의 친구 중[㈜  이것은 가장 좋은 사본과 발췌문의 본문이다. 다른 두 중요 사본과 가장 좋은 사본의 난외주, 그리고 라틴 역본판은 그 이름을 시몬(Simon)은 누구인가? 크렝켈(M. Krenkel)은 ‘Josephus und Lukas’ 1894, p.178 이하에서 시몬 베드로(Simon Peter)에 대립되는 거짓 시몬(the false Simon)으로 간주했으며 모세의 법은 폐기되었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렸던 사도 바울을 그 사람으로 본다. 그러나 슈미텔(P.W.Xchmiedel)이 “Simon Magus”, Ency. Bibl.’ iv. 1903, p.4556에서 그리고 바이츠(H.Waitz)가 “Simon Magus in der altehristlichen Literatur,” ‘Zeitsch. f.d. Neutest. Wiss.’ v. 1904, p.127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이 그렇게 불렸다는 어떤 증거도 없으며, 또한 바울이 여기서 언급된 마술사인 구브로 사람(Cyprian) 바울이라는 증거도 없다. 바이츠는 계속해서 교회 교부(the Church Father)였던 시몬으로 동일시하려 하지만, 그는 구브로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다. 시몬이라는 이름은 이 시기에 아주 흔했고 마술사도 많았었다.] 한 명인 아토무스(Atomus)를 그녀에게 보내었는데, 시몬은 유대인으로 구브로(Cyprus)태생이었고 마법사[㈜ 유대 마술사에 관해서, 바론(S.W.Baron)은 ‘A Social and Religious History of the Jews’, ii, 1952, p.21에서 루키안(Lucian)의 ‘Tragodopodagra’, 173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루키안은 ‘발의 통풍'(痛風, podagra) 때문에 고생하는 한 사람을 풍자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는데, 이것은 온갖 처방을 해 본 후에 결국 어떤 유대인의 마법에 호소하게 되는 내용이다. 참). 바론은 ii. 336 주 25에서 노아(Noah)는 천사들로부터 마술적인 치료 기술을 얻어, 자기 아들 셈(Shem)에게 전수했다고 한다.] 행세를 하는 사람이었다. 시몬은 드루실라를 설득하여 현 남편을 버리고 벨릭스와 혼인할 것을 종용하였고 만일 드루실라가 자신의 청을 거절하지 않는다면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아마 태커레이(Thackeray)가 ‘Selections from Josephus’, p.95주 2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는 ‘행복한’을 의미하는 벨릭스(Felix)라는 이름으로 언어 유희를 한 것이다.] 약속했다. 결국 드루실라는 악행을 범하고 말았다. 그것은 자매 베레니케의 시기를 피하고자 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드루실라는 자신의 미모로 인해 냉대받았으므로[㈜ 여기서 채택된 본문은 초판(editio princeps)을 따른 것이다. 마튜-헤르만(Mathieu-Hermann)은 사본들의 본문을 다소 수정하여 “벨릭스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녀를 초대했는데, 그 아름다움 때문에 그녀가 베레니케(Berenice)에게 많은 고통을 당했다고 믿었다”로 번역한다.] 조상의 율법을 범하고 벨릭스와 혼인하였다.그후 벨릭스는 드루실라를 통하여 아들을 얻고 이름을 아그립바라 하였다. 아그립바는 가이사 티투스 치세 때[㈜ 주후 79년.] 그의 아내와 함께 베수비우스(Vesuvius) 화산이 폭발하여 죽고 말았다는 내용은 이후에[㈜ 요세푸스의 현존하는 작품들에는 이것에 대한 어떤 더 이상의 언급이 없다.] 언급될 것이다.


    3. 헤롯이 죽은 후 베레니케(Berenice)가 길리기아(Cilicia)왕 폴레모(Polemo)와 혼인하다


     베레니케는 남편이자 숙부였던 칼키스의 왕 헤롯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과부로 살았다. 그러나 베레니케가 오라비인[㈜ 쥬베날(Juvenal) vi.156-160도 마찬가지로 “야만인” 아그립바가 ?음란한” 그의 여동생에게 주었던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에 관해 말할 때, 이 소문에 대해 넌지시 말하고 있다. 매커디(G.H. Macurdy)는 ?Julia Ber-enice”,’Am. Jour. of Philol.’lxi, 1935, p.251에서 그 소문은 베레니케가 결코 결혼하지 않았던 아그립바의 법정을 주재했기 때문에 발생했었을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말하고 있다. 그녀에 대한 티투스(Titus)의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는 수에토니우스(Tit. 7), 타키투스(?Hist.? ii .2)와 디오(Dio Ixvi. 15와 18)는 강력히 주장된 아그립바와의 근친 성교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참). 헤이우드(R. M. Haywood)는 “A Note on the Dia-logus of Tacitus”,’Class. Weekly’, xxxvi, 1942-1943, p.255에서 마테르누스 메데아(Maternus Medea) 타키투스의 ‘대화편’. 3)가 티투스가 결혼하고 싶어했던 베레니케라고 말한다. 외국인과의 그러한 결혼에 대한 생각을 로마인들은 혐오스럽게 여겼다. 아그립바와 베레니케 사이의 근친 성교에 대한 소문온 아마 요세푸스가 로마에 있을 때(자서. 65.(364-367))오랫동안 편지 교환을 했던 아그립바가 이 이야기가 쓰여진 93년이나 94년에 죽었다(고대. 20권. 12 : 1(267))는 것을 지시하는 것 같다. 참). Mac-urdy, p250, J.A crook, “Titus and Berenice”‘Am. Jour. of Philol.?1xxii , 1951.p.163. n.9.] 아그립바 Ⅱ세와 간통했다는 소문이 유포되자 그녀는 길리기아(Cilicia)의 왕인 폴레모(Polemo)를[㈜ 고대. 19권. 8 : 1(338)의 폴레모(Polemo)는 아님. D. Magie, ·Ronman Rule in Asia Minor’, ii , 1950, p.1407을 보라.] 설득하여 할례를 받고 자신과 결혼해 줄 것을 종용하였다. 이러한 조취를 취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에 관한 이러한 소문이 거짓임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결국 폴레모는 설득당하였으며 베레니케의 재물로[㈜ 그러한 개종은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효력이 없다. 바벨론 탈무드, ‘Gerim’i..7을 보라 : “결혼, 두려움, 사랑때문에 개종하는 자는 누구든지 개종자가 아니며‥‥ 하느님을 위하여 개종하지 않는 자도 또한 개종자가 아니다. “] 인하여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이 결혼생활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결국 베레니케는 폴레모를 떠나게 되었는데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불순한 의도로 인한 것이었다. 베레니케는 이러한 결혼생활을 청산함과 동시에 유대종교도 저버렸다. 그와 같은 때에 마리암메는 아르켈라우스를 버리고 혈통이나 재산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 중의 지배자이며 당시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의 행정장관이었던[㈜ 군대장관(alabarch)의 직무에 관해서는 고대, 18권.6 : 3(159)를 보라.] 데메트리우스(Demetrlus)와 혼인하였다. 마리암메는 데메트리우스와의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이름을 아그립피누스(Agrippinus)라 하였다[㈜ 현존하는 사본에는 그러한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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