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 문 Ⅶ 크리스토퍼 켈라리우스(Christopher Cellarius)의 논문

 


논  문  Ⅶ




  크리스토퍼 켈라리우스(Christopher Cellarius)의 논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쓴 헤롯 왕가의 역사는 날조된 것이라는 존 하르뒨(John Harduin)의 주장에 대해 논박하고, 고대의 주화(鑄貨)들에 의해 역사의 진실은 밝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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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헤롯 왕가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하기 때문에 누구의 역사 자료를 근거로 할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근거로 하는 역사가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로 유대역사가 중 가장 훌륭한 역사가이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가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학자로 큰 권위를 가진 인물이다. 제롬(Jerome)은 요세푸스의 명성에 대해 그의 저서인 \’유스토키움에게 보낸 22번째 서신\'(Twenty-second Epistle to Eustochium)15장에서 극찬하기를 최고의 역사가이며 헬라의 리비(the Gre-cian Livy)라고까지 했다. 즉 그의 능력, 근면성, 충실성 등이파두아의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 못지 않게 훌륭함이 만인에 의해 칭송되고 있다고 요세푸스를 칭찬하고 있다. 티투스리비우스의 명성은 플리니(2권 서신3)와 제롬(서신103장, 1장)의 글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카디즈(Cadiz)의 한 사람이 리비우스를 보기 위해 지구 끝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곧장 떠났다. \” 그리고 매우 유명한 저술가 유세비우스(Eusebius)도 그의 \’교회사\’ 3권 9장에서 요세푸스를 \’신임할 만한 저술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에 대한 현대 학자의 견해를 추가해 볼 것 같으면, 현대의 명성높은 학자 스칼리거(Scallger)는 그의 저서 \’시간 개량론\'(Emendatlo Temporum)서문(Prolegomena)에서 요세푸스를 모든 역사가들 중 \’진실을가장 사랑한 역사가\’로 극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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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명성을 가진 학자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고 있는 요세푸스를 명망높고 학식 있는 존 하르뒨(John Harduin)이 요세푸스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를 어리석고 역사를 날조하는 허위 저술가로 혹평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다.  존 하르뒨은 플리니 주석과 고대 주화들을 통해 고대 도시와국가들의 지리적 위치를 제시한 저명한 학자이다. 그런데 그는최근에 파리에서 출간한 \’주화 연구를 통해 회복된 연대기\'(Chronology restored from Coins)\’에서 요세푸스를 어리석고역사를 날조하는 허위 저술가로 악평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고대 주화를 연구하다 보니 요세푸스가 헤롯 왕가의 역사에 대해언급한 것이 아주 모순 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있다. 필자도 고대 주화들이 역사와 연대기의 내용을 수정할 수있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에 동의하지만 하르뒨이제시한 이 주화들 때문에 요세푸스에 대한 지금까지의 유서깊은평가들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를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요세푸스의 명성을 훼손하고 경멸하는 행위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필자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하르뒨이제시한 주화들의 내력과 그의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만인앞에 밝히고 요세푸스의 역사에 대한 명성을 보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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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가 기록한 헤롯 왕가의 역사는 모든 학자들에게 널리 잘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는 모두들 내용의 진실성에 대해 찬성을 하였다. 그리고 요세푸스에게서 발췌한 필자의 저서 \’고대 역사\'(Antiqua Historia)에서도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헤롯왕가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헤롯은 이두매(Idumea)의 유명한 개종자의 가문 출신으로 안티파테르(Ant-ipater)의 아들이었다. 그는 그의 부친으로부터 팔레스틴 최고통치권을 전수받았다(헤롯은 율리우스 가이사로부터 팔레스틴통치권에 대한 추인을 받음), 그러나 파르티아인의 원조를 받은하스모네안(Hasmonaeans)의 마지막 종족인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침략을 받아 통치권을 빼앗겼다가 안토니(Antony)의 도움으로 다시 통치권을 회복한 후 왕이라는 칭호까지 얻게되었다. 이렇게 하여 헤롯은 아구스도 가이사의 후원하에 여러해동안 팔레스틴 지역과 그 주위의 수리아, 아라비아, 애굽 등을 다니며 폭정을 하였다. 혜롯의 아들인 아켈라오(Archelaus)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다가 분봉왕(Ethnarch)이라는 명분하에 골(Gaul)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그후 아켈라오의 영토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가이사가 보낸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헤롯의 다른 아들인 헤롯 안디바와 빌립은 각각 자기의 분봉국을 다스렸는데,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뢰아를 통치하고 빌립은이두레(Iturea)와 드라고닛(Trachonitis)을 통치하였다. 헤롯필립이 죽고 헤롯 안디바가 추방당하고 헤롯왕의 손자이자 헤롯왕이 죽인 그의 아들 아리스토블루스의 아들인 아그립바가 그의조부에게 속했던 전체 왕국을 글라우디오 가이사의 호의로 되찾아 다스리게 되어 로마의 속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몇년 후 아그립바가 죽은 뒤 유대는 다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그러나 그의 아들 아그립바 ll세는 칼키스왕(King of chalcis)이 되었고 후에 아빌레네 (Abylene)와 빌립 분봉국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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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덴은 앞서 제시된 역사의 여러 부분을 부정했는데 그의주장을 보면, 첫째로 헤롯은 율리우스 가이사의 도움으로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로 헤롯은 괄레스틴전 영역을 다 통치한 것이 아니고 유대와 사마리아만을 통치하였다고 보았다. 넷째로 아켈라오는 부친의 왕권과 함께 왕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계승받았으며, 갈릴리와 그밖의 지역은 분봉왕 제노도루스(Zenodorus)의 통치를 받다가 헤롯왕 생존시 그의 아들인 헤롯과 빌립에 의해 각각 분리되어 다스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넷째로 분봉왕 헤롯이 세례 요한을 살해한 장본인이며 그는 유대인도 개종자도 아니고 그저 이방인이라고 했다. 다섯째로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킨 인물로 아그립바라는 이름하의 동일 인물 분봉왕 헤롯이라고 주장했다. 여섯째로 아켈라오가 죽은 후(하르뒨은 그의 추방을 부인함) 한때로마의 속주였던 유대가 다시 왕국으로 환원되었다는 요세푸스주장과는 달리 환원된 적이 없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하르뒨의 이러한 역설적 주장을 이제 하나씩 명백히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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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 통치의 시작에 관한 하르뒨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내가 보는 바로는 유대가 헤롯에게 넘겨진 이유는 전제 군주였던 율리우스 가이사가 헤롯에게 거액의 돈을 빚졌기 때문인 것같다. 이것에 근거가 되는 것은 아티쿠스에게 한 툴리(TulIy)의다음과 같은 말(6권 1서)이다. : \”그러나 각하, 각하께서는 가이사의 아덴의 50달란트를 헤롯에게서 강탈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를 어리석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얼마나 이상한 소리인가! 이 서신은 키케로(Cicero)가 총독으로 아시아에 있을 때 쓴것인데 그때 가이사는 아직 골(Gaul)에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해서 알렉산드라 전쟁 이전에는 가이사를 알지도 못했던 이두매인 헤롯의 돈이 가이사에게 갈 수가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지명은 혼동의 여지가 많은 독법(Reading)으로 읽혀질 수 있다.어떤 이들은 헤로데스(Herodes)를 오로데스(Orodes)라고 읽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이는 게누아리오스(Genuarios)라고까지 이상하게 읽기도 한다. 그래서 게누아이오스(Genuaeos)가알로브로제스(Allobroges) 가운데 있는 한 도시라는 사실까지알아내게 되었다. 이것에 비해 요세푸스의 역사적인 해석이 얼마나 더 명확하고 지적인가! 즉 헤롯의 아버지인 안타파테르는힐카누스와외 친구였는데 힐카누스가 펠루시움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때와 그밖의 많은 전투에서 안티파테르가 애굽에서 큰원조를 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헤롯은 힐카누스왕의 보좌역이되었다가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으로서 성직에만 전념하는 동안속세적 정치업무를 혼자 감당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을 것이라는요세푸스의 분명한 역사기술이다. \’유대전쟁사\’ 1권 18장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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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헤롯 왕국의 영역을 규정해 보자, 헤롯의 부친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혜롯이 갈릴리의 총독이었다. 이때 수리아의총독인 섹스투스 가이사(Sextus Caesar)와 우정을 맺게 된다.그런데 말키우스의 음모에 의해 헤롯의 부친이 독살되자 파르티아인의 원조를 받은 안티고누스와 전쟁을 하게 되고 전쟁에서힐카누스왕은 포로로 잡혀가고 헤롯의 형제 파사엘루스(Pha-Saelus)는 감옥에서 자살하였으며 헤롯은 천신만고 끝에 이달리야로 도피하였다. 그후 헤롯은 안토니의 도움으로 로마 원로원들에 의해 왕으로 선포되었으나 유대의 왕권을 놓고 안티고누스와 분쟁이 있었다. 소시우스(Sosius)가 이는 로마군에 의해안티고누스가 패하여 포로로 잡혀가자 드디어 헤롯은 갈릴리와인근 국가들을 포함한 하스모네안 왕가의 전 영토를 차지하게되었다. 그러나 하르딘은 그의 저서 p.24에서 사마리아와 유대만이 헤롯 분봉국의 영토이었다고 엉터리 주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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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뒨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첫째로눅 1 : 15에 보면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유대를 좁은 의미로 본다면 헤롯은 사마리아를 통치하지않아야 한다. 그러나 유대를 넓은 의미로 보면 사마리아뿐 아니라 갈릴리와 베뢰아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하르뒨은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단지 유대와 사마리아만을 계승받았다는 것을 마 2 : 22의 \”부친 헤롯을 이어 통치함\”(reigned in thestead of his fathes)을 근거로 반대하고 있다. 하르뒨은 이 구절이 마치 헤롯의 전 영토가 아켈라오에게 계승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헤롯의 유언이나 아구스도같은 최고군주의 간섭이 없는 상황이라면 하르뒨의 주장처림 아켈라오가전 영토를 물려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의 유언과 아구스도 황제의 개입으로 왕국의 반은 장자인 아켈라오에게 나머지 부분은 그의 형제 안디바와 빌립에게 배분되었다. 셋째로 하르뒨은 헤롯이 로마에 대한 자기의 충성심과 존경심의 표시로 가이사랴나 세바스테 등이 도시를 건설한 것처럼 갈릴리에 도시를건설하지 않은 것을 근거로 헤롯의 영토가 사마리아와 유대뿐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롯은 이두매(Idumea)에도 그러한도시를 건설하지 않았다. 엄격히 말하면 유대에도 그와 같은 도시를 건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행 12 : 19에서 알 수 있듯이 가이사랴는 유대 변경 밖에 그같은 도시를 몇개 건설한 것으로 충분했고 모든 지역에 그러한 도시를 건설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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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뒨은 헤롯의 통치 시대에 갈릴리가 분봉왕 제노도루스(Zenodo,us)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점을 논쟁의 주요 의제로삼고 있다. 그의 주장은 헤롯의 아들들이 갈릴리를 차지하게 된것은 부친 상속이 아닌 이족간의 결혼(intermarriage)이나 그밖의 다른 직함(title)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한두 개의 고대 주화를 근거로 한 것이다. 이 고대 주화에는 옥타비안(Octavian)의 얼굴과 제노도루스(Zenodorus)의 얼굴이양면에 각각 새겨져 있는데 모두 왕관을 쓰고 있지 않은 상태로 다음과 같은 명각(銘刻)이 새겨져 있다; ZHNODWROS TETPAPCH ….TH….라고 쓰여 있으며 다른 주화에는 ZHNODOROUTETRARCOU….라고 쓰여져 있는데 다른 몇 글자는 지워져 알아볼 수가 없다. 첫번째 주화에는 헬라 연대가 알아볼 수 있게 L.BRS 즉 CLXXXII(182)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위의 사실이 과연 헤롯 왕국의 분할에 관한 논점에 어떤 영향을 미칠 큰실마리가 될 수 있겠는가?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 15권 9장에서 제노도루스의 통치 구역을 드라고닛(Trachonitis)과 인근지역으로 한정하고 갈릴리와는 분명하게 구분지어 나타내었다. 한편 이 지역은 아구스도가 제노도루스가 죽은 후 헤롯에게 수여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의 저서 54권 p.526에서 다음과 같이 확증되고 있다. \”로마시 건설 제734년에 아구스도는 제노도루스 분봉국을 헤롯에게 하사하였다.\” 이분봉국은 후에 빌립이 부친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과 동일한 지역으로 당시 파네아스(Paneas)도 포함하나 갈릴리 변경 밖의 지역이었다는 것이 요세푸스의 견해이다. 하르뒨은 그의 저서 p.30에서 \”나는 그 당시 제노도루스가 갈릴리 분봉국의 왕이었다고 믿고 싶다\”(I incline to believe that Zenodorus was atthe same time tetrach of Galilee)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의 언급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단지 그의 의향(inclination)만을 표현한 것이므로 추측(conjecture)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헤롯이 계승한] 하스모네안 왕국의 영토를 볼 때 갈릴리가 제노도루스의 관할 영토가 아니었음을 확신하고 단언할 수 있다.그리고 하르뒨이 제시한 고대주화의 양면에 [옥타비안과 제노도루스의] 얼굴이 새겨진 것은 유대인의 주화에서는 보기드문일이고 복음서에는 잘 알 수 있듯이 갈릴리는 유대인들의 거주지였다. 그러므로 제노도루스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는 갈릴리총독의 주화일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헤롯의 부친이죽고 파르티아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기간에 일어난 헤롯에 관한 사실 한 가지를 언급하겠다. 요세푸스가 \’유대고대사\’ 14권 8장 1절에 기술했듯이 이 당시 헤롯은 동생 파사엘루스와 함께분봉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힐카누스가 포로로 잡혀가고 그의 동생 파사엘루스가 죽자 헤롯은 에드나르크(ethnarch)라는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 분야에 대해서 가장 뛰어나고 박식한 학자 에제키엘 스판하임(Ezekiel Spanheim)에의해서도 입증되었다. 그는 그의 저서 \’De Praest. et. UsuNunusm\’ p.447에서  주화에 새겨진 HRSDDOU EQNAR…. 이것의 의미는 \’로마인들에게서 왕의 칭호를 얻기 전의 헤롯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그의 뛰어난 학식을 이용하여 풀이하였다. \’유대전쟁사\’ 2권 7장 3절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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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켈라오(Archelaus)에 대하여 살펴보자. 요세푸스는아켈라오의 호칭에 아구스도에 의해 수여된 왕(king)은 아니지만 분봉왕(ethnarch)이라는 존엄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전쟁. 17권. 13장). 그리고 요세푸스는 아켈라오 자신이 아구스도의 추인이 있기 전에 왕(king)으로 불리우기를 꺼려한 것으로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왕의 칭호에 관한 권한은 전적으로 가이사(Caesar)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르뒨은 마 2: 22에 아켈라오가 부친의 뒤를 이어 통치했다는 것을 근거로 아켈라오도 왕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성경 기록자들이 왕보다 직위가 약간 낮은 제후들도 왕이라고 부르는 보통 유대인들 상대로 글을 썼기 때문에 우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참작해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14장 6절, 누가복음 9장 7절에는 헤롯 안디바를 지칭할 때 로마 법령에 따라 그를 분봉왕(tetrarch)으로 불렀다. 그러나 마가(6 : 14)에서는 그를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부르는 왕(king)으로 부른 것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아켈라오는 실제로 그의 부친을 계승하여 전 왕국을 다스린것이 아니라 부분만을 통치하였다. 이것을 지적하기 위해 마태(2: 22)에서는 유대라는 지명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아켈라오는 왕의 칭호를 계승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왕의 칭호는 세습되는것이 아니라 로마가 마음대로 부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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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켈라오의 통치 기간과 사망 연대에 관해서는 현재 몇가지 이견이 있다.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17권 끝부분에서말하기를 아켈라오는 9년간 통치를 하다가 10년째 되는 해에 동생의 고소로 아구스도에 의해 골지방의 비엔나(Vienna)로 추방되었다고 했다. 이것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의 저서55권 p.567에서도 알 수 있다. \”팔레스틴의 헤롯은 형제들에게 고소를 당해 알프스 너머로 추방을 당했다. \” 아켈라오가 추방된해는 매해의 집정관들이 수를 세는 방법으로 계산하면 아구스도황제가 죽기 8년 전, 그리스도가 8세(혹은 10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계산에 의하면 아켈라오는 그리스도 나이 11세 이후에 추방된 것으로 나온다. 이것에 대해 하르뒨은 요세푸스의 주장이 성경과 모순된다고 그의 저서 p.38에서 말하고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주 그리스도는 12세가 되기 이전에 매년 성전을 방문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가 8세 때부터 성전을 방문하였다면 아켈라오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최소한 4번 성전을 방문한 셈이 되는데 이것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르뒨의 주장은 누가복음(2장) 본문에 의해서 인정받기가 어렵다.  여기에서 \”전례에 따라(according to custom)라는 표현은 아기 그리스도가 아닌 그의 부모나 절기 혹은 예식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흑 \”동행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Sup-posing him to have been in the company)라는 표현을 그리스도가 전례대로 성전에 올라간 것으로 해석하면 해석의 의미는달라질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필자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아켈라오로부터 한번 피신했어야만 했던 이유로아켈라오 생존시에는 성전에 올 수 없었으리라고 단언하는 것에찬성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모가 아기 그리스도를 데리고 애굽에서 돌와왔을 때 아켈라오가 헤롯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피신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만약 그랬다면 헤롯의 또다른 아들이통치하는 갈릴리로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의 부모는 베들레헴에 있는 그들의 거주지가 아켈라오에게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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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켈라오의 통치년도에 관해서는 필자가 별로 큰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특히 연대가 숫자로 써 있을 경우에는 오류가 흔히 발생하기 쉽다. 실제로 남아있는 진짜 아켈라오 주화는 현재 없다(본 논문 8절을 참조하라). 하르뒨이 제시한 고대 주화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단지 아켈라오가악티움(Actium)전투의 승리가 있기 39년 전에 통치권자에서쫓겨났다는 것뿐이다. 고대 주화에 풍요의 상징인 곡식 이삭(ear of corn)과 유대의 영화를 상징하는 종려나무(a palm tre-e)가 새겨져 있고, 가이사(Caesar)라는 이름과 XXXIX(39)라는 숫자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화가 왕국이나분봉국에서 제조되지 않았고 이에 속국이 된 유대에서 제조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아켈라오의 통치 년도도 이견이 많지만왕좌에서 물러나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요세푸스는 추방당했다고 했고 하르뒨은 후사없이 아켈라오가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디오 카시우스는 요세푸스 의견에 동의하면서 아켈라오에게 안디바나 아그립바에게 그랬던것처럼 헤롯 가문의 공통 이름을 붙여 \’헤롯\’으로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아켈라오가 추방되었다는 견해를 더욱 확신있게 지지할 수 있고 유대인들도 그와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벤 고리온(Ben Gorion)은 그의 저서 61장 결론부에서 \”아켈라오가 꿈을 꾼 지 50일째 되는 날 로마군대가 아켈라오를 체포하러 왔다. 로마군 대장은 아켈라오를 사슬에 묶어 로마로 압송했고 아켈라오는 로마에서 죽었다\”라고 기술하였다. 비록 아켈라오가 유배된 장소와 유배 방법에 대해서는 오류가 있기도하지만 아켈라오가 유배되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요세푸스와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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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분봉왕 헤롯과 아그립바왕에 대해 논의해 보자. 요세푸스는 이 두 인물을 각기 다른 사람으로 보았다. 즉 분봉왕 헤롯은 대헤롯의 아들로 세례 요한을 죽인 인물이며 헤롯 안디바라는 이름으로 통했고, 왕(king)은 아니고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으로 있다가 카이우스 가이사(Caius Caesar)에 의해 골(Gaul)지방으로 추방된 한편, 아그립바 헤롯은 대헤롯이 손자이고 대헤롯이 죽인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로서 카이우스 가이사 총애를 받아 왕(king)의 칭호와 빌립과 루사니아스(Lys-enins)는 두 분봉국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후에 글라우디오 황제신임을 얻어 유대와 사마리아뿐 아니라 안디바 분봉국까지받았으나 오래 다스리지 못하고 글라우디오 재위 3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르뒨은 이 두 인물을 동일 인물로 보고 분봉왕으로 오래있다가마침내 왕이 된 헤롯으로 보고 세례 요한과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인 동일 인들로 보았다. 이제 하르뒨의 견해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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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뒨은 그의 저서 p.54에서 분봉왕 헤롯이 유대인도 개종자도 아닌 이방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근거로 그의 논리를 펴나가고 있다. 헤롯은 90년 전에 유대교로 개종하고 유대에 합류한 한 민족의 후손으로 유대인 아버지를 두었고 갈릴인과 같은 유대인들을 통치하였으며 유대인의 명절에는 예루살렘에 가서 세례 요한의 말을 즐겨 듣던 인물이다. 이러한 사람을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헤롯의 아들로 태어나서 유대 율법을 지켰다는 것은 요세푸스 뿐만 아니라 마크로비우스의 \’사투르날\'(Saturnal)Ⅱ.4에 나오는아구스도의 농담, 즉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차라리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좋겠소\”라는 농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성경에는 요세푸스의 주장처럼 분봉왕 헤롯이 대헤롯의 아들이었다는 언급은 없다. 우리가 요세푸스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고대의비문이 이를 증명시켜 줄 것이다. 이것은 매우 근면한 저술가Jac. Spon.에 의해서 \’Miscell. Erud. Antlq.\’fol.338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HRWDHN !HRWDOY BASIDEWS @YOIN TETRARCHN, 헤롯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Herod the tetrarch,the son of Herod the king) 헤롯이 피를 이어받은 이두매인들은 그 당시에 개종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유대교로개종한 유대인들이었다. 스칼리거(Scaliger)는 그의 저서 \’유세비우스 혹평\'(Animadversion on Eusebius) p.165에서 대헤롯은 개종자(proselyte)의 고손자였다고 증명하고 있다. 이상의사실들을 염두해 볼 때 헤롯이 예루살렘에 경배하러 올라갔을때 하르뒨이 추측한 것과는 달리 헤롯이 헬라인들과 같은 취급을 받지 않았으리라고 본다(요 12 : 20). 헤롯은 유대 종교에 정통한 유대인으로 대우받았을 것이다. 또한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취했을 때 분봉왕 헤롯이 유대인으로서 유대종교 율법에 어긋난다고 세례 요한의 비난을 받은 사실은 그가 유대인과 동등하게 간주되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분봉왕 헤롯을 이방인으로 보는 하르뒨의 주장은 더 이상의 반증이 필요 없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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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뒨은 또한 주화에 새겨진 연도를 근거로 요세푸스가역사 위조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주화에는 헬라어로 @HRWDHS TETRARCPS MG. 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GAIW KAISA. TERM.SEB. 라고 쓰여 있다. 한편 위대한 학자 노리스(Hen. Noris)는 헤롯 안디바의 주화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주화 앞면의 월계수 위에 GAIW KAISAR GER….NIKW와 뒷면의 종려나무 둘레에는 @HRWDHS TETRARKHS라는 문구와 연대를 나타내는 MT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입증한 적이 있다. 이것을 통해서 카이우스 칼리굴라(Caiuscaligula) 통치 때에 분봉왕 헤롯이 재위43년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이것이 분봉왕 헤롯이 카이우스 황제 통치 말년에 유배되었다는요세푸스의 역사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유대고대사\’ 18권 9장을 참조하도록 하자. 위에서 언급한 학자 노리스는 연대 계산에 매우 뛰어난 사람인데 카이우스 통치 말년이 분봉왕 헤롯 재위43년과 일치한다고 했다(자세한 내용은 \’유대전쟁사\’ 1권 33장8절을 보라), 세속적인 연대 계산으로 보면 분봉왕 헤롯의 통치기간이 너무 긴 것 같아 보이는데 분봉왕 헤롯의 부친 생존시,즉 부친 사망하기 몇해 전에 분봉왕 헤롯 안디바가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은 헤롯이 그의부친 안티파테르가 살아있을 동안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후에 정권을 장악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상의 가설은 비록 분봉왕 헤롯의 통치기간 안에 분봉왕 이외에 다른 직책으로서의통치 기간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계산한 연대 계산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위의 고대 주화가 대헤롯의연대기와 완전히 일치하므로 사실상 위의 논증은 불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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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하르뒨은 분봉왕 헤롯과 아그립바왕을 동일 인물로 보았는데 두 사람이 모두다 \’헤롯\’이라는 공통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헤롯을 안디바나 아그립바 대왕으로호칭한 적이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요세푸스처럼 두 인물의이름을 구분하여 호칭하지는 않았지만 이 두 인물이 다른 사람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사도행전 12장 13절에 보면 한 헤롯은 왕(king)으로 불리웠고, 다른 헤롯은 분봉왕(tetrarch)으로구분되어 불리워졌다. 즉 직책과 직위의 구분이 명확하게 되어있어서 두 인물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다른 저술가들이 안티오쿠스 왕가(the Antiochuses)와 톨레미 왕가(the Ptolemies)를 지칭할 때 그 역대왕들이 서로 동일하지 않은데도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단지 안티오쿠스와 톨레미로 호칭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순교자 져스틴(Justin)이 \’트리포(Trypho)와의 대화\’ p.330에서 대헤롯의 아들 즉 그리스도탄생 당시의 헤롯을 왕(king)이라고 부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져스틴이 그를 유대인의 왕(king of the Jews)이자 그 부친의 후계자(his father\’s successor)로 부르는 것은 져스틴 자신이 역사에 대해 능숙하지 못한 사람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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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뒨은 또 다른 주화로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 그 주화에는 BASILEUS !@HRWD…UDIOS(글라우디오를 사랑하는 자 헤롯왕, king Herod, a lover of Claudius) 그리고 됫면에는 KLAUDIW KAISATI SEBASTW ETT.(글라우디오 가이사 아구스도께, 제3년, To Claudis Caesar Augustus, the thirdyear)라고 쓰여있다. 위의 정보를 근거로 헤롯(Herod)을 헤롯의 아들(the son of Herod)로 보아야 할 분명한 논리는 없다. 그리고필자가 매우 존경하는 학자 에제키엘 스판하임(Ez. Spanheim)이 그의 저서 p.443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는 이 주화의 헤롯을아그립바 왕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요세푸스가 증명한 대로아그립바 왕은 글라우디오가 확장시켜 준 왕국에서 3년간 살았었다(\’유대고대사\’ 19권). 또한 아그립바 왕은 글라우디오의 호의에대한 감사의 표시로 \’글라우디오를 사랑하는 자(A lover of Cla-udius)라고 주화에 표기하고 헨리 노리스(Henry Noris)가 고대주화를 통해 밝힌 것처럼 가바(Gaba)와 디베랴(Tiberias) 같은그의 왕국의 도시들을 글라우디오의 도시들(Claudian Cities)이라고까지 불렀다. 필자는 한때 이달리야 내의 게르만의 영광(the glory of the Germans in Italy)이 라고까지 불리운 루카스홀스테니우스(Lucas Holstenius)가 바르베리니 (Barberini)의보고에서 발견한 주화도 바로 이 아그립바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주화의 앞면에는 BASILEUS @HRWDHS (헤롯왕,king Herod), 뒷면에는 KLAUDIA KAIS,AREA(글라우디오의 가이사랴, the Claudian Cesarea)라고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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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헤롯은 요세푸스가 아그립바왕으로 부른 사도행전12장에 나오는 인물이다. 하르뒨이 요세푸스의 증언을 무시해 왔듯이 이번에도 요세푸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고대 수리아인 해석자의 견해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해석자라기 보다는 주석자(a paraphrast)로 활약했는데 사도행전 12장 1절의 불분명한 문맥을 설명하면서 \”아그립바라고불리우는 헤롯왕\”(Herod the king who was named Agrippa)이라고 밝혔다. 이보다 더 명확한 설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권위있는 문헌보다 더 오랜 고대의 권위있는 문헌을 찾는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 역본의 모든 사본들에서 이에 대한 이문(異文)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헌이 후대의 삽입이거나 후대의 발상일 여지는 조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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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뒨이 요세푸스의 헤롯왕가에 관한 역사를 전복할 만한어떤 제시도 전혀 하지 못하였으므로 필자는 사도행전 12장의 헤롯이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자 조부 대헤롯의 왕국을 글라우디오 가이사로부터 받은 바로 아그립바왕임을 주장하고 싶다. 아그립바는 디베료(Tiberius)황제를 저주한 죄로 투옥되었다가 카시우스 가이사 황제의 호의로 풀려나와 루사니아스와 빌립의 분봉국을 통치하는 왕으로 임명되었다. 3년 뒤 아그립바는 혜롯의 분봉국을 하사받았고 그후에 유대는 물론 사마리아까지도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그립바는 처참한 죽음을당하기 전까지 3년 동안 팔레스틴과 이스라엘 전지역을 다스렸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요세푸스뿐 아니라 누가도 기록하였는데 누가의 기록이 더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유대고대사\’ 19권 결론부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59권 p.645와 60권p.670을 참조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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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요세푸스 시대의 사람으로서 요세푸스와 원수지간인 디베랴의 유스투스(Justus of Tiberias)의 증언으로 그는 분봉왕 헤롯과 아그립바왕을 구분하여 인식하였다. 포티우스(Photius)는 그의 저서 \’비블리오테카\'(Bibliotheca)에서 크로니콘(Chronicon), 코드(Cod.)XXIII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유스투스는 모세로부터 유대의 마지막 왕이며 헤롯 왕가의 일곱 번째 왕인 아그립바왕의  죽음까지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아그립바왕은 글라우디오에게서 통치권을 수여받아 네로 시대 때에는 왕국을 확장하였고 베스파시안 시대에는 영토를 더욱 확장하였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은 트라얀 황제 재위 3년에 사망하였다. 즉 헤롯 아그립바 Ⅱ세는 헤롯 왕가의 7번째이자 마지막 통치자로 글라우디오 황제 때 통치를 시작했으며 트라얀 황제 재위 3년에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치는 요세푸스의 것과 일치한다. 순서별로 헤롯 왕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헤롯 2. 아켈라오3. 빌립 4. 안디바 5. 아그립바 I세 6. 칼키스의 헤롯(Herod ofChalcis)7. 아그립바Ⅱ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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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뒨은 사도행전에 언급된 대로 헤롯의 유대를 통치했다는 점과 로마의 속주가 왕국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러나 속주국이 다시 왕국으로 회복된 예는 아시아, 길리기아(Cilicia), 본도(Pohtus), 수리아 콤마게나(Syr-ia Commagena)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들에 대한자세한 실례는 필자의 저서 \’고대역사(Antiqua Historia)의 추가 도표에 나와 있다. 하르뒨은 그리스도를 결박해서 빌라도에게 보낸 헤롯 분봉왕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이방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가이사의 총독이 시민권에 대한 문제가 아닌 유대종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갈릴리 총독으로 잠시 예루살렘에 와있던 분봉왕 헤롯에게 사도들을 보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의도와 전혀 맞지않는다. 헤롯이 단지 예루살렘의 이방인(Stranger)이었다면 로마군들이 감옥을 잘 지키지 못했을 때 무슨 권위로 그들을 처벌할 수 있겠는가? 사도행전 12장 19절에 보면 임무에 충실치 못한 로마군들을 ejkevleuse ajpacqh\’nai , 즉 죽이라고 되어 있다. 플리니(Pliny)는 \’트라얀 황제에게 보내는 서신\'(Epistle to Trajan)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는 사람은 죽이라고 제가 명령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리아 역본에는 사도행전 12장 19절이 더욱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헤롯은 간수들을 유죄로 선언하고 죽이라고 명했다.\” 게다가 만약 헤롯이 단지 예루살렘의 이방인 정도였다면 왜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가서 마치 그곳이 자기의 왕궁인양 그 곳에 디에트리젠(divetrixen). 즉 거하였는지가 의문이다. 벨리스(Felix)와 베스도(Fes-tus)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만일 유대가 속주였다면 가이사랴는 갈릴리총독의 자리가 아니라 로마 총독의 자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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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르뒨이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주화에는 BASILEYS MELGAS AGRPIPAS QILOKLAUDIOS 글라우디오를 사랑하는자, 아그립바 대왕(The great king Agrippa the lover ofCoaudius)이라고 쓰여있는데, 이것은 요세푸스의 견해를 지지해 주고 있다. 만일 아그립바가 이 주화가 보여주는 대로 대왕(great king)이라고 한다면 하르뒨이 생각한 것과는 달리 갈릴리와 빌립 이 두 분봉국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통치하였을 것이다. 만일 겨우 두 분봉국을 다스리는 왕이었다면 대왕이라는 이름은 커녕 보통 왕(common king) 심지어는 소왕(a small king)이라는 이름도 부적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아그립바를 그 조부가 소유했던 왕국, 전 팔레스틴에 걸치는 왕국을 되찾은 인물로 묘사했다. 그래서 아그립바왕이라는 거창한 호칭이 붙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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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분봉왕 헤롯의 종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래서 사도행전 12장의 헤롯이 분봉왕 헤롯이 아님을 입증하였으므로 아그립바 헤롯의 종교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가치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분봉왕과 아그립바왕을 동일 인물로보는 하르뒨은 헤롯이 유대인 야고보를 죽인 인물임을 부인하고있다. 하르뒨은 그의 저서 p.55에서 누가의 말을 근거로 헤롯이그리스도인들과 분쟁을 일으킨 것은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고 단언하고있다. 그러면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유대인이 아니어야 한단 말인가? 하르뒨의 주장대로라면 로마 백성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호의를 사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한 소위 인기 애국자(popula patriot)들은 로마인들이 아니어야 한다는 어리석은 결론이 나온다. 더욱이 유트로피우스ut-ropius) 말에 의하면 로마인인 황제들도 로마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무척 노력했다는데 그러면 황제들도 로마인일 수가 없다는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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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2권 11장 5절에서 칼키스의 왕(king of Chalcis) 헤롯이 아그립바의 형제라고 했다. 이방면에서 전문가인 피터 세귄(Peter Seguin)은 칼키스왕 헤롯의  주화를  발견했는데,  주화의  앞면에 KLAUDIW KAISRI SEBASTW ET E 즉 제5년에 글라우디오 가이사 아구스도께(To Cla-udius caesar Augustus in the fifth year)라고 기록되어 있고뒷면에는 왕관을 쓴 얼굴 주위에 BASILEUS @HPWD…UDIOS 글라우디오를 사랑하는 자, 헤롯왕(King Herod, the lover of Cla-udius)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반면에 하르뒨은 그의 저서p.58에 칼키스의 헤롯왕이라는 인물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칼키스 왕국은 있지도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요세푸스의 역사라면 무조건 거짓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하르뒨의태도를 여실히 드러내준 예이다. 한편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19권 5장 1절에서 아그립바의 형제 헤롯이 칼키스의 통치자이었다고 기록하였고, \’유대전쟁사\’ 2권 11장 5절에서도 이 헤롯이칼키스를 다스렸다고 기술하였다. 요세푸스가 \’유대고대사\’ 20권 1장에 인용한 글라우디오 황제의 서신을 보면 헤롯은 왕(King)으로 호칭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핵심은 헤롯 아그립바가 글라우디오 황제 재위 5년에 생존 여부에 달려있다. 그러나헤롯 아그립바가 글라우디오 재위 5년에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으며, 아그립바는 글라우디오 재위 4년에 사망하였다고 크로니콘에 쓰고 있는 유세비우스의 견해와도 모순된다. 이러한 유세비우스의 견해를 스칼리거(Scaliger)는 그의 저서 \’유세비우스의 크로니콘 혹평\'(Animadversion on Chronicon)p.189에서지지하였고 피어슨(Pearson)은\’Annal Paulin\’ p.51에서 유세비우스 연대 계산을 지지하였다. 게다가 저명한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는 그의 저서 60권 p.670에서 \”글라우디오 가이사가 아그립바의 형제에게 크고도 확실한 통치권을 하사하였다\”라고 썼는데, 요세푸스는 이 아그립바의 형제가 분명히 칼키스의 헤롯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유대고대사\’ 19권 5장). 이상에서본 대로 디오(Dio)까지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요세푸스나 유세비우스의 견해를 반대할 분명한 이유가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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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도행전 25장(23장)에 언급된 아들 아그립바와 아그립바의 누이 베니게(Bernice)에 대하여 알아보자. 아들 아그립바는 부친이 사망하였을 때 17세의 젊은 나이로 로마에서 글라우디오와 함께 있었다. 글라우디오는 만일 측근들의 \”황제주위의 유대와 같은 왕국을 저렇게 어린 왕에게 맡기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라고 채근하지 않았으면 아들 아그립바에게유대를 상속하려고 하였었다. 따라서 유대는 아그립바의 다른영토들과 함께 다시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쿠스피우스 파두스(Cupius Fadus)가 유대의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제19권 결론 부분을 참조하라. 하르뒨은 유대가 다시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것을 부인한다. 그는 아구스도 이래로유대가 계속 속주이었던 것으로 간주하고 유대가 중간에 왕국으로 회복되었다가 다시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예들을 제시하였었다. 타키투스(Ticitus)의 \’역사서\’ 5권 9장에 있는 증언을보면 \”글라우디오는 속주국들이 왕들이 죽고 그 세력이 미약해지자 유대 속주국을 로마 기사들과 귀족들로 하여금 다스리게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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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립바Ⅱ세는 그 부친 사망 후 즉시로는 왕국을 이어받지 못했지만 아주 이어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요셉 스칼리거(Joseph Scaliger)는 유세비우스에 관한 그의 저서 p.189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친이 죽은 후 왕국은 즉시로 아그립바Ⅱ세에게 넘겨지지 않고 그가 성인이 되어 스스로 통치할수 있을 때까지 가이사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다스려졌다. 스칼리거는 타키투스의 말을 인용하여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적고 있다. \”이두레인들(the Iturears)과 유대인들은 자기들의왕인 소헤무스(Sohemus)와 아그립바가 죽자, 수리아의 속주에영입되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말하길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이두레인들은 영구히 수리아에 영입되었으나, 유대인들은 아그립바Ⅱ세가 통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될때까지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그립바Ⅰ세가 죽은 지 5년만에 영입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믿겠습니까?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Cornelius Tacitus)가 여러번 주장했고, 그의 \’연대기\’와 다른 나라들에 대한 그의 역사 속에서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누가 믿겠습니까?\” 필자는 타키투스와 같은 저명한 학자가 위와같은 오류를 범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타키투스는여러면에서 요세푸스와 견해를 같이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와유세비우스의 글을 통해 알아본 바와 같이 아그립바 Ⅰ세는 글라우디오 재위 제4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아그립바 Ⅱ세는 17세의 젊은 나이여서 부친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였고, 왕국은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거나 수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폼페이우스(C. Pompeius)와 베라니우스(Q. Verannius)가 집정관이었던 글라우디오 재위 제9년 초에 곧 죽을 것이 분명한 칼키스의 헤롯. 즉 아그립바Ⅱ세의 삼촌인 헤롯의 자리에 아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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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문 Ⅶ 크리스토퍼 켈라리우스(Christopher Cellarius)의 논문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논  문  Ⅶ


      크리스토퍼 켈라리우스(Christopher Cellarius)의 논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쓴 헤롯 왕가의 역사는 날조된 것이라는 존 하르뒨(John Harduin)의 주장에 대해 논박하고, 고대의 주화(鑄貨)들에 의해 역사의 진실은 밝혀지고 있다.


     1


    우리는 헤롯 왕가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하기 때문에 누구의 역사 자료를 근거로 할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근거로 하는 역사가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로 유대역사가 중 가장 훌륭한 역사가이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가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학자로 큰 권위를 가진 인물이다. 제롬(Jerome)은 요세푸스의 명성에 대해 그의 저서인 ‘유스토키움에게 보낸 22번째 서신'(Twenty-second Epistle to Eustochium)15장에서 극찬하기를 최고의 역사가이며 헬라의 리비(the Gre-cian Livy)라고까지 했다. 즉 그의 능력, 근면성, 충실성 등이파두아의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 못지 않게 훌륭함이 만인에 의해 칭송되고 있다고 요세푸스를 칭찬하고 있다. 티투스리비우스의 명성은 플리니(2권 서신3)와 제롬(서신103장, 1장)의 글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카디즈(Cadiz)의 한 사람이 리비우스를 보기 위해 지구 끝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그를 보자마자 곧장 떠났다. ” 그리고 매우 유명한 저술가 유세비우스(Eusebius)도 그의 ‘교회사’ 3권 9장에서 요세푸스를 ‘신임할 만한 저술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에 대한 현대 학자의 견해를 추가해 볼 것 같으면, 현대의 명성높은 학자 스칼리거(Scallger)는 그의 저서 ‘시간 개량론'(Emendatlo Temporum)서문(Prolegomena)에서 요세푸스를 모든 역사가들 중 ‘진실을가장 사랑한 역사가’로 극찬하였다.


     2


    훌륭한 명성을 가진 학자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고 있는 요세푸스를 명망높고 학식 있는 존 하르뒨(John Harduin)이 요세푸스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를 어리석고 역사를 날조하는 허위 저술가로 혹평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다.  존 하르뒨은 플리니 주석과 고대 주화들을 통해 고대 도시와국가들의 지리적 위치를 제시한 저명한 학자이다. 그런데 그는최근에 파리에서 출간한 ‘주화 연구를 통해 회복된 연대기'(Chronology restored from Coins)’에서 요세푸스를 어리석고역사를 날조하는 허위 저술가로 악평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고대 주화를 연구하다 보니 요세푸스가 헤롯 왕가의 역사에 대해언급한 것이 아주 모순 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있다. 필자도 고대 주화들이 역사와 연대기의 내용을 수정할 수있을 정도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에 동의하지만 하르뒨이제시한 이 주화들 때문에 요세푸스에 대한 지금까지의 유서깊은평가들을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를 아직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이 요세푸스의 명성을 훼손하고 경멸하는 행위를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필자는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하르뒨이제시한 주화들의 내력과 그의 주장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만인앞에 밝히고 요세푸스의 역사에 대한 명성을 보전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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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세푸스가 기록한 헤롯 왕가의 역사는 모든 학자들에게 널리 잘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는 모두들 내용의 진실성에 대해 찬성을 하였다. 그리고 요세푸스에게서 발췌한 필자의 저서 ‘고대 역사'(Antiqua Historia)에서도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헤롯왕가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헤롯은 이두매(Idumea)의 유명한 개종자의 가문 출신으로 안티파테르(Ant-ipater)의 아들이었다. 그는 그의 부친으로부터 팔레스틴 최고통치권을 전수받았다(헤롯은 율리우스 가이사로부터 팔레스틴통치권에 대한 추인을 받음), 그러나 파르티아인의 원조를 받은하스모네안(Hasmonaeans)의 마지막 종족인 안티고누스(Ant-igonus)의 침략을 받아 통치권을 빼앗겼다가 안토니(Antony)의 도움으로 다시 통치권을 회복한 후 왕이라는 칭호까지 얻게되었다. 이렇게 하여 헤롯은 아구스도 가이사의 후원하에 여러해동안 팔레스틴 지역과 그 주위의 수리아, 아라비아, 애굽 등을 다니며 폭정을 하였다. 혜롯의 아들인 아켈라오(Archelaus)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다가 분봉왕(Ethnarch)이라는 명분하에 골(Gaul)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그후 아켈라오의 영토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가이사가 보낸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헤롯의 다른 아들인 헤롯 안디바와 빌립은 각각 자기의 분봉국을 다스렸는데,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뢰아를 통치하고 빌립은이두레(Iturea)와 드라고닛(Trachonitis)을 통치하였다. 헤롯필립이 죽고 헤롯 안디바가 추방당하고 헤롯왕의 손자이자 헤롯왕이 죽인 그의 아들 아리스토블루스의 아들인 아그립바가 그의조부에게 속했던 전체 왕국을 글라우디오 가이사의 호의로 되찾아 다스리게 되어 로마의 속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몇년 후 아그립바가 죽은 뒤 유대는 다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그러나 그의 아들 아그립바 ll세는 칼키스왕(King of chalcis)이 되었고 후에 아빌레네 (Abylene)와 빌립 분봉국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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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르덴은 앞서 제시된 역사의 여러 부분을 부정했는데 그의주장을 보면, 첫째로 헤롯은 율리우스 가이사의 도움으로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로 헤롯은 괄레스틴전 영역을 다 통치한 것이 아니고 유대와 사마리아만을 통치하였다고 보았다. 넷째로 아켈라오는 부친의 왕권과 함께 왕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계승받았으며, 갈릴리와 그밖의 지역은 분봉왕 제노도루스(Zenodorus)의 통치를 받다가 헤롯왕 생존시 그의 아들인 헤롯과 빌립에 의해 각각 분리되어 다스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넷째로 분봉왕 헤롯이 세례 요한을 살해한 장본인이며 그는 유대인도 개종자도 아니고 그저 이방인이라고 했다. 다섯째로 헤롯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시킨 인물로 아그립바라는 이름하의 동일 인물 분봉왕 헤롯이라고 주장했다. 여섯째로 아켈라오가 죽은 후(하르뒨은 그의 추방을 부인함) 한때로마의 속주였던 유대가 다시 왕국으로 환원되었다는 요세푸스주장과는 달리 환원된 적이 없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하르뒨의 이러한 역설적 주장을 이제 하나씩 명백히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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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롯 통치의 시작에 관한 하르뒨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내가 보는 바로는 유대가 헤롯에게 넘겨진 이유는 전제 군주였던 율리우스 가이사가 헤롯에게 거액의 돈을 빚졌기 때문인 것같다. 이것에 근거가 되는 것은 아티쿠스에게 한 툴리(TulIy)의다음과 같은 말(6권 1서)이다. : “그러나 각하, 각하께서는 가이사의 아덴의 50달란트를 헤롯에게서 강탈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를 어리석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얼마나 이상한 소리인가! 이 서신은 키케로(Cicero)가 총독으로 아시아에 있을 때 쓴것인데 그때 가이사는 아직 골(Gaul)에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해서 알렉산드라 전쟁 이전에는 가이사를 알지도 못했던 이두매인 헤롯의 돈이 가이사에게 갈 수가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지명은 혼동의 여지가 많은 독법(Reading)으로 읽혀질 수 있다.어떤 이들은 헤로데스(Herodes)를 오로데스(Orodes)라고 읽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이는 게누아리오스(Genuarios)라고까지 이상하게 읽기도 한다. 그래서 게누아이오스(Genuaeos)가알로브로제스(Allobroges) 가운데 있는 한 도시라는 사실까지알아내게 되었다. 이것에 비해 요세푸스의 역사적인 해석이 얼마나 더 명확하고 지적인가! 즉 헤롯의 아버지인 안타파테르는힐카누스와외 친구였는데 힐카누스가 펠루시움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때와 그밖의 많은 전투에서 안티파테르가 애굽에서 큰원조를 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헤롯은 힐카누스왕의 보좌역이되었다가 힐카누스가 대제사장으로서 성직에만 전념하는 동안속세적 정치업무를 혼자 감당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을 것이라는요세푸스의 분명한 역사기술이다. ‘유대전쟁사’ 1권 18장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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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헤롯 왕국의 영역을 규정해 보자, 헤롯의 부친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혜롯이 갈릴리의 총독이었다. 이때 수리아의총독인 섹스투스 가이사(Sextus Caesar)와 우정을 맺게 된다.그런데 말키우스의 음모에 의해 헤롯의 부친이 독살되자 파르티아인의 원조를 받은 안티고누스와 전쟁을 하게 되고 전쟁에서힐카누스왕은 포로로 잡혀가고 헤롯의 형제 파사엘루스(Pha-Saelus)는 감옥에서 자살하였으며 헤롯은 천신만고 끝에 이달리야로 도피하였다. 그후 헤롯은 안토니의 도움으로 로마 원로원들에 의해 왕으로 선포되었으나 유대의 왕권을 놓고 안티고누스와 분쟁이 있었다. 소시우스(Sosius)가 이는 로마군에 의해안티고누스가 패하여 포로로 잡혀가자 드디어 헤롯은 갈릴리와인근 국가들을 포함한 하스모네안 왕가의 전 영토를 차지하게되었다. 그러나 하르딘은 그의 저서 p.24에서 사마리아와 유대만이 헤롯 분봉국의 영토이었다고 엉터리 주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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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르뒨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첫째로눅 1 : 15에 보면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유대를 좁은 의미로 본다면 헤롯은 사마리아를 통치하지않아야 한다. 그러나 유대를 넓은 의미로 보면 사마리아뿐 아니라 갈릴리와 베뢰아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하르뒨은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단지 유대와 사마리아만을 계승받았다는 것을 마 2 : 22의 “부친 헤롯을 이어 통치함”(reigned in thestead of his fathes)을 근거로 반대하고 있다. 하르뒨은 이 구절이 마치 헤롯의 전 영토가 아켈라오에게 계승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만일 헤롯의 유언이나 아구스도같은 최고군주의 간섭이 없는 상황이라면 하르뒨의 주장처림 아켈라오가전 영토를 물려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롯의 유언과 아구스도 황제의 개입으로 왕국의 반은 장자인 아켈라오에게 나머지 부분은 그의 형제 안디바와 빌립에게 배분되었다. 셋째로 하르뒨은 헤롯이 로마에 대한 자기의 충성심과 존경심의 표시로 가이사랴나 세바스테 등이 도시를 건설한 것처럼 갈릴리에 도시를건설하지 않은 것을 근거로 헤롯의 영토가 사마리아와 유대뿐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롯은 이두매(Idumea)에도 그러한도시를 건설하지 않았다. 엄격히 말하면 유대에도 그와 같은 도시를 건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행 12 : 19에서 알 수 있듯이 가이사랴는 유대 변경 밖에 그같은 도시를 몇개 건설한 것으로 충분했고 모든 지역에 그러한 도시를 건설할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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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르뒨은 헤롯의 통치 시대에 갈릴리가 분봉왕 제노도루스(Zenodo,us)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점을 논쟁의 주요 의제로삼고 있다. 그의 주장은 헤롯의 아들들이 갈릴리를 차지하게 된것은 부친 상속이 아닌 이족간의 결혼(intermarriage)이나 그밖의 다른 직함(title)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주장은한두 개의 고대 주화를 근거로 한 것이다. 이 고대 주화에는 옥타비안(Octavian)의 얼굴과 제노도루스(Zenodorus)의 얼굴이양면에 각각 새겨져 있는데 모두 왕관을 쓰고 있지 않은 상태로 다음과 같은 명각(銘刻)이 새겨져 있다; ZHNODWROS TETPAPCH ….TH….라고 쓰여 있으며 다른 주화에는 ZHNODOROUTETRARCOU….라고 쓰여져 있는데 다른 몇 글자는 지워져 알아볼 수가 없다. 첫번째 주화에는 헬라 연대가 알아볼 수 있게 L.BRS 즉 CLXXXII(182)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위의 사실이 과연 헤롯 왕국의 분할에 관한 논점에 어떤 영향을 미칠 큰실마리가 될 수 있겠는가?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 15권 9장에서 제노도루스의 통치 구역을 드라고닛(Trachonitis)과 인근지역으로 한정하고 갈릴리와는 분명하게 구분지어 나타내었다. 한편 이 지역은 아구스도가 제노도루스가 죽은 후 헤롯에게 수여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의 저서 54권 p.526에서 다음과 같이 확증되고 있다. “로마시 건설 제734년에 아구스도는 제노도루스 분봉국을 헤롯에게 하사하였다.” 이분봉국은 후에 빌립이 부친에게서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과 동일한 지역으로 당시 파네아스(Paneas)도 포함하나 갈릴리 변경 밖의 지역이었다는 것이 요세푸스의 견해이다. 하르뒨은 그의 저서 p.30에서 “나는 그 당시 제노도루스가 갈릴리 분봉국의 왕이었다고 믿고 싶다”(I incline to believe that Zenodorus was atthe same time tetrach of Galilee)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의 언급은 아무런 증거도 없이 단지 그의 의향(inclination)만을 표현한 것이므로 추측(conjecture)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헤롯이 계승한] 하스모네안 왕국의 영토를 볼 때 갈릴리가 제노도루스의 관할 영토가 아니었음을 확신하고 단언할 수 있다.그리고 하르뒨이 제시한 고대주화의 양면에 [옥타비안과 제노도루스의] 얼굴이 새겨진 것은 유대인의 주화에서는 보기드문일이고 복음서에는 잘 알 수 있듯이 갈릴리는 유대인들의 거주지였다. 그러므로 제노도루스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는 갈릴리총독의 주화일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헤롯의 부친이죽고 파르티아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기간에 일어난 헤롯에 관한 사실 한 가지를 언급하겠다. 요세푸스가 ‘유대고대사’ 14권 8장 1절에 기술했듯이 이 당시 헤롯은 동생 파사엘루스와 함께분봉왕으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힐카누스가 포로로 잡혀가고 그의 동생 파사엘루스가 죽자 헤롯은 에드나르크(ethnarch)라는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 분야에 대해서 가장 뛰어나고 박식한 학자 에제키엘 스판하임(Ezekiel Spanheim)에의해서도 입증되었다. 그는 그의 저서 ‘De Praest. et. UsuNunusm’ p.447에서  주화에 새겨진 HRSDDOU EQNAR…. 이것의 의미는 ‘로마인들에게서 왕의 칭호를 얻기 전의 헤롯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그의 뛰어난 학식을 이용하여 풀이하였다. ‘유대전쟁사’ 2권 7장 3절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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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아켈라오(Archelaus)에 대하여 살펴보자. 요세푸스는아켈라오의 호칭에 아구스도에 의해 수여된 왕(king)은 아니지만 분봉왕(ethnarch)이라는 존엄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한다(전쟁. 17권. 13장). 그리고 요세푸스는 아켈라오 자신이 아구스도의 추인이 있기 전에 왕(king)으로 불리우기를 꺼려한 것으로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왕의 칭호에 관한 권한은 전적으로 가이사(Caesar)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르뒨은 마 2: 22에 아켈라오가 부친의 뒤를 이어 통치했다는 것을 근거로 아켈라오도 왕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성경 기록자들이 왕보다 직위가 약간 낮은 제후들도 왕이라고 부르는 보통 유대인들 상대로 글을 썼기 때문에 우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참작해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14장 6절, 누가복음 9장 7절에는 헤롯 안디바를 지칭할 때 로마 법령에 따라 그를 분봉왕(tetrarch)으로 불렀다. 그러나 마가(6 : 14)에서는 그를 대중들이 일반적으로 부르는 왕(king)으로 부른 것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아켈라오는 실제로 그의 부친을 계승하여 전 왕국을 다스린것이 아니라 부분만을 통치하였다. 이것을 지적하기 위해 마태(2: 22)에서는 유대라는 지명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아켈라오는 왕의 칭호를 계승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왕의 칭호는 세습되는것이 아니라 로마가 마음대로 부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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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켈라오의 통치 기간과 사망 연대에 관해서는 현재 몇가지 이견이 있다. 요세푸스는 그의 저서 17권 끝부분에서말하기를 아켈라오는 9년간 통치를 하다가 10년째 되는 해에 동생의 고소로 아구스도에 의해 골지방의 비엔나(Vienna)로 추방되었다고 했다. 이것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의 저서55권 p.567에서도 알 수 있다. “팔레스틴의 헤롯은 형제들에게 고소를 당해 알프스 너머로 추방을 당했다. ” 아켈라오가 추방된해는 매해의 집정관들이 수를 세는 방법으로 계산하면 아구스도황제가 죽기 8년 전, 그리스도가 8세(혹은 10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요세푸스의 계산에 의하면 아켈라오는 그리스도 나이 11세 이후에 추방된 것으로 나온다. 이것에 대해 하르뒨은 요세푸스의 주장이 성경과 모순된다고 그의 저서 p.38에서 말하고있다. 성경에 보면, 우리 주 그리스도는 12세가 되기 이전에 매년 성전을 방문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가 8세 때부터 성전을 방문하였다면 아켈라오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최소한 4번 성전을 방문한 셈이 되는데 이것은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르뒨의 주장은 누가복음(2장) 본문에 의해서 인정받기가 어렵다.  여기에서 “전례에 따라(according to custom)라는 표현은 아기 그리스도가 아닌 그의 부모나 절기 혹은 예식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흑 “동행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Sup-posing him to have been in the company)라는 표현을 그리스도가 전례대로 성전에 올라간 것으로 해석하면 해석의 의미는달라질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필자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아켈라오로부터 한번 피신했어야만 했던 이유로아켈라오 생존시에는 성전에 올 수 없었으리라고 단언하는 것에찬성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부모가 아기 그리스도를 데리고 애굽에서 돌와왔을 때 아켈라오가 헤롯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피신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만약 그랬다면 헤롯의 또다른 아들이통치하는 갈릴리로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의 부모는 베들레헴에 있는 그들의 거주지가 아켈라오에게 발각될 것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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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아켈라오의 통치년도에 관해서는 필자가 별로 큰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특히 연대가 숫자로 써 있을 경우에는 오류가 흔히 발생하기 쉽다. 실제로 남아있는 진짜 아켈라오 주화는 현재 없다(본 논문 8절을 참조하라). 하르뒨이 제시한 고대 주화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단지 아켈라오가악티움(Actium)전투의 승리가 있기 39년 전에 통치권자에서쫓겨났다는 것뿐이다. 고대 주화에 풍요의 상징인 곡식 이삭(ear of corn)과 유대의 영화를 상징하는 종려나무(a palm tre-e)가 새겨져 있고, 가이사(Caesar)라는 이름과 XXXIX(39)라는 숫자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화가 왕국이나분봉국에서 제조되지 않았고 이에 속국이 된 유대에서 제조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아켈라오의 통치 년도도 이견이 많지만왕좌에서 물러나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요세푸스는 추방당했다고 했고 하르뒨은 후사없이 아켈라오가 죽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디오 카시우스는 요세푸스 의견에 동의하면서 아켈라오에게 안디바나 아그립바에게 그랬던것처럼 헤롯 가문의 공통 이름을 붙여 ‘헤롯’으로 불렀다. 그래서 우리는 아켈라오가 추방되었다는 견해를 더욱 확신있게 지지할 수 있고 유대인들도 그와 거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벤 고리온(Ben Gorion)은 그의 저서 61장 결론부에서 “아켈라오가 꿈을 꾼 지 50일째 되는 날 로마군대가 아켈라오를 체포하러 왔다. 로마군 대장은 아켈라오를 사슬에 묶어 로마로 압송했고 아켈라오는 로마에서 죽었다”라고 기술하였다. 비록 아켈라오가 유배된 장소와 유배 방법에 대해서는 오류가 있기도하지만 아켈라오가 유배되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요세푸스와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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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분봉왕 헤롯과 아그립바왕에 대해 논의해 보자. 요세푸스는 이 두 인물을 각기 다른 사람으로 보았다. 즉 분봉왕 헤롯은 대헤롯의 아들로 세례 요한을 죽인 인물이며 헤롯 안디바라는 이름으로 통했고, 왕(king)은 아니고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으로 있다가 카이우스 가이사(Caius Caesar)에 의해 골(Gaul)지방으로 추방된 한편, 아그립바 헤롯은 대헤롯이 손자이고 대헤롯이 죽인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로서 카이우스 가이사 총애를 받아 왕(king)의 칭호와 빌립과 루사니아스(Lys-enins)는 두 분봉국을 하사받았다. 그리고 후에 글라우디오 황제신임을 얻어 유대와 사마리아뿐 아니라 안디바 분봉국까지받았으나 오래 다스리지 못하고 글라우디오 재위 3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르뒨은 이 두 인물을 동일 인물로 보고 분봉왕으로 오래있다가마침내 왕이 된 헤롯으로 보고 세례 요한과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인 동일 인들로 보았다. 이제 하르뒨의 견해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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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르뒨은 그의 저서 p.54에서 분봉왕 헤롯이 유대인도 개종자도 아닌 이방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근거로 그의 논리를 펴나가고 있다. 헤롯은 90년 전에 유대교로 개종하고 유대에 합류한 한 민족의 후손으로 유대인 아버지를 두었고 갈릴인과 같은 유대인들을 통치하였으며 유대인의 명절에는 예루살렘에 가서 세례 요한의 말을 즐겨 듣던 인물이다. 이러한 사람을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헤롯의 아들로 태어나서 유대 율법을 지켰다는 것은 요세푸스 뿐만 아니라 마크로비우스의 ‘사투르날'(Saturnal)Ⅱ.4에 나오는아구스도의 농담, 즉 “헤롯의 아들이 되느니 차라리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좋겠소”라는 농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성경에는 요세푸스의 주장처럼 분봉왕 헤롯이 대헤롯의 아들이었다는 언급은 없다. 우리가 요세푸스의 말을 믿지 못한다면 고대의비문이 이를 증명시켜 줄 것이다. 이것은 매우 근면한 저술가Jac. Spon.에 의해서 ‘Miscell. Erud. Antlq.’fol.338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HRWDHN !HRWDOY BASIDEWS @YOIN TETRARCHN, 헤롯왕의 아들, 분봉왕 헤롯(Herod the tetrarch,the son of Herod the king) 헤롯이 피를 이어받은 이두매인들은 그 당시에 개종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유대교로개종한 유대인들이었다. 스칼리거(Scaliger)는 그의 저서 ‘유세비우스 혹평'(Animadversion on Eusebius) p.165에서 대헤롯은 개종자(proselyte)의 고손자였다고 증명하고 있다. 이상의사실들을 염두해 볼 때 헤롯이 예루살렘에 경배하러 올라갔을때 하르뒨이 추측한 것과는 달리 헤롯이 헬라인들과 같은 취급을 받지 않았으리라고 본다(요 12 : 20). 헤롯은 유대 종교에 정통한 유대인으로 대우받았을 것이다. 또한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자기의 아내로 취했을 때 분봉왕 헤롯이 유대인으로서 유대종교 율법에 어긋난다고 세례 요한의 비난을 받은 사실은 그가 유대인과 동등하게 간주되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분봉왕 헤롯을 이방인으로 보는 하르뒨의 주장은 더 이상의 반증이 필요 없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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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르뒨은 또한 주화에 새겨진 연도를 근거로 요세푸스가역사 위조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가 제시한 주화에는 헬라어로 @HRWDHS TETRARCPS MG. 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GAIW KAISA. TERM.SEB. 라고 쓰여 있다. 한편 위대한 학자 노리스(Hen. Noris)는 헤롯 안디바의 주화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주화 앞면의 월계수 위에 GAIW KAISAR GER….NIKW와 뒷면의 종려나무 둘레에는 @HRWDHS TETRARKHS라는 문구와 연대를 나타내는 MT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입증한 적이 있다. 이것을 통해서 카이우스 칼리굴라(Caiuscaligula) 통치 때에 분봉왕 헤롯이 재위43년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이것이 분봉왕 헤롯이 카이우스 황제 통치 말년에 유배되었다는요세푸스의 역사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유대고대사’ 18권 9장을 참조하도록 하자. 위에서 언급한 학자 노리스는 연대 계산에 매우 뛰어난 사람인데 카이우스 통치 말년이 분봉왕 헤롯 재위43년과 일치한다고 했다(자세한 내용은 ‘유대전쟁사’ 1권 33장8절을 보라), 세속적인 연대 계산으로 보면 분봉왕 헤롯의 통치기간이 너무 긴 것 같아 보이는데 분봉왕 헤롯의 부친 생존시,즉 부친 사망하기 몇해 전에 분봉왕 헤롯 안디바가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것은 헤롯이 그의부친 안티파테르가 살아있을 동안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가 후에 정권을 장악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상의 가설은 비록 분봉왕 헤롯의 통치기간 안에 분봉왕 이외에 다른 직책으로서의통치 기간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계산한 연대 계산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는 것이다[위의 고대 주화가 대헤롯의연대기와 완전히 일치하므로 사실상 위의 논증은 불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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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하르뒨은 분봉왕 헤롯과 아그립바왕을 동일 인물로 보았는데 두 사람이 모두다 ‘헤롯’이라는 공통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헤롯을 안디바나 아그립바 대왕으로호칭한 적이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요세푸스처럼 두 인물의이름을 구분하여 호칭하지는 않았지만 이 두 인물이 다른 사람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사도행전 12장 13절에 보면 한 헤롯은 왕(king)으로 불리웠고, 다른 헤롯은 분봉왕(tetrarch)으로구분되어 불리워졌다. 즉 직책과 직위의 구분이 명확하게 되어있어서 두 인물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다른 저술가들이 안티오쿠스 왕가(the Antiochuses)와 톨레미 왕가(the Ptolemies)를 지칭할 때 그 역대왕들이 서로 동일하지 않은데도 고유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단지 안티오쿠스와 톨레미로 호칭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순교자 져스틴(Justin)이 ‘트리포(Trypho)와의 대화’ p.330에서 대헤롯의 아들 즉 그리스도탄생 당시의 헤롯을 왕(king)이라고 부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져스틴이 그를 유대인의 왕(king of the Jews)이자 그 부친의 후계자(his father’s successor)로 부르는 것은 져스틴 자신이 역사에 대해 능숙하지 못한 사람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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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르뒨은 또 다른 주화로 자신의 주장을 펴고 있다. 그 주화에는 BASILEUS !@HRWD…UDIOS(글라우디오를 사랑하는 자 헤롯왕, king Herod, a lover of Claudius) 그리고 됫면에는 KLAUDIW KAISATI SEBASTW ETT.(글라우디오 가이사 아구스도께, 제3년, To Claudis Caesar Augustus, the thirdyear)라고 쓰여있다. 위의 정보를 근거로 헤롯(Herod)을 헤롯의 아들(the son of Herod)로 보아야 할 분명한 논리는 없다. 그리고필자가 매우 존경하는 학자 에제키엘 스판하임(Ez. Spanheim)이 그의 저서 p.443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는 이 주화의 헤롯을아그립바 왕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요세푸스가 증명한 대로아그립바 왕은 글라우디오가 확장시켜 준 왕국에서 3년간 살았었다(‘유대고대사’ 19권). 또한 아그립바 왕은 글라우디오의 호의에대한 감사의 표시로 ‘글라우디오를 사랑하는 자(A lover of Cla-udius)라고 주화에 표기하고 헨리 노리스(Henry Noris)가 고대주화를 통해 밝힌 것처럼 가바(Gaba)와 디베랴(Tiberias) 같은그의 왕국의 도시들을 글라우디오의 도시들(Claudian Cities)이라고까지 불렀다. 필자는 한때 이달리야 내의 게르만의 영광(the glory of the Germans in Italy)이 라고까지 불리운 루카스홀스테니우스(Lucas Holstenius)가 바르베리니 (Barberini)의보고에서 발견한 주화도 바로 이 아그립바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주화의 앞면에는 BASILEUS @HRWDHS (헤롯왕,king Herod), 뒷면에는 KLAUDIA KAIS,AREA(글라우디오의 가이사랴, the Claudian Cesarea)라고 쓰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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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헤롯은 요세푸스가 아그립바왕으로 부른 사도행전12장에 나오는 인물이다. 하르뒨이 요세푸스의 증언을 무시해 왔듯이 이번에도 요세푸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고대 수리아인 해석자의 견해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해석자라기 보다는 주석자(a paraphrast)로 활약했는데 사도행전 12장 1절의 불분명한 문맥을 설명하면서 “아그립바라고불리우는 헤롯왕”(Herod the king who was named Agrippa)이라고 밝혔다. 이보다 더 명확한 설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권위있는 문헌보다 더 오랜 고대의 권위있는 문헌을 찾는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 역본의 모든 사본들에서 이에 대한 이문(異文)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헌이 후대의 삽입이거나 후대의 발상일 여지는 조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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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르뒨이 요세푸스의 헤롯왕가에 관한 역사를 전복할 만한어떤 제시도 전혀 하지 못하였으므로 필자는 사도행전 12장의 헤롯이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이자 조부 대헤롯의 왕국을 글라우디오 가이사로부터 받은 바로 아그립바왕임을 주장하고 싶다. 아그립바는 디베료(Tiberius)황제를 저주한 죄로 투옥되었다가 카시우스 가이사 황제의 호의로 풀려나와 루사니아스와 빌립의 분봉국을 통치하는 왕으로 임명되었다. 3년 뒤 아그립바는 혜롯의 분봉국을 하사받았고 그후에 유대는 물론 사마리아까지도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그립바는 처참한 죽음을당하기 전까지 3년 동안 팔레스틴과 이스라엘 전지역을 다스렸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요세푸스뿐 아니라 누가도 기록하였는데 누가의 기록이 더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유대고대사’ 19권 결론부와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 59권 p.645와 60권p.670을 참조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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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요세푸스 시대의 사람으로서 요세푸스와 원수지간인 디베랴의 유스투스(Justus of Tiberias)의 증언으로 그는 분봉왕 헤롯과 아그립바왕을 구분하여 인식하였다. 포티우스(Photius)는 그의 저서 ‘비블리오테카'(Bibliotheca)에서 크로니콘(Chronicon), 코드(Cod.)XXIII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유스투스는 모세로부터 유대의 마지막 왕이며 헤롯 왕가의 일곱 번째 왕인 아그립바왕의  죽음까지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아그립바왕은 글라우디오에게서 통치권을 수여받아 네로 시대 때에는 왕국을 확장하였고 베스파시안 시대에는 영토를 더욱 확장하였다. 그리고 아그립바 왕은 트라얀 황제 재위 3년에 사망하였다. 즉 헤롯 아그립바 Ⅱ세는 헤롯 왕가의 7번째이자 마지막 통치자로 글라우디오 황제 때 통치를 시작했으며 트라얀 황제 재위 3년에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수치는 요세푸스의 것과 일치한다. 순서별로 헤롯 왕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대헤롯 2. 아켈라오3. 빌립 4. 안디바 5. 아그립바 I세 6. 칼키스의 헤롯(Herod ofChalcis)7. 아그립바Ⅱ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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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르뒨은 사도행전에 언급된 대로 헤롯의 유대를 통치했다는 점과 로마의 속주가 왕국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러나 속주국이 다시 왕국으로 회복된 예는 아시아, 길리기아(Cilicia), 본도(Pohtus), 수리아 콤마게나(Syr-ia Commagena)등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들에 대한자세한 실례는 필자의 저서 ‘고대역사(Antiqua Historia)의 추가 도표에 나와 있다. 하르뒨은 그리스도를 결박해서 빌라도에게 보낸 헤롯 분봉왕은 아마도 예루살렘의 이방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가이사의 총독이 시민권에 대한 문제가 아닌 유대종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갈릴리 총독으로 잠시 예루살렘에 와있던 분봉왕 헤롯에게 사도들을 보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의도와 전혀 맞지않는다. 헤롯이 단지 예루살렘의 이방인(Stranger)이었다면 로마군들이 감옥을 잘 지키지 못했을 때 무슨 권위로 그들을 처벌할 수 있겠는가? 사도행전 12장 19절에 보면 임무에 충실치 못한 로마군들을 ejkevleuse ajpacqh’nai , 즉 죽이라고 되어 있다. 플리니(Pliny)는 ‘트라얀 황제에게 보내는 서신'(Epistle to Trajan)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끝까지 고수하는 사람은 죽이라고 제가 명령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리아 역본에는 사도행전 12장 19절이 더욱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다. “헤롯은 간수들을 유죄로 선언하고 죽이라고 명했다.” 게다가 만약 헤롯이 단지 예루살렘의 이방인 정도였다면 왜 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가서 마치 그곳이 자기의 왕궁인양 그 곳에 디에트리젠(divetrixen). 즉 거하였는지가 의문이다. 벨리스(Felix)와 베스도(Fes-tus)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만일 유대가 속주였다면 가이사랴는 갈릴리총독의 자리가 아니라 로마 총독의 자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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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르뒨이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주화에는 BASILEYS MELGAS AGRPIPAS QILOKLAUDIOS 글라우디오를 사랑하는자, 아그립바 대왕(The great king Agrippa the lover ofCoaudius)이라고 쓰여있는데, 이것은 요세푸스의 견해를 지지해 주고 있다. 만일 아그립바가 이 주화가 보여주는 대로 대왕(great king)이라고 한다면 하르뒨이 생각한 것과는 달리 갈릴리와 빌립 이 두 분봉국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통치하였을 것이다. 만일 겨우 두 분봉국을 다스리는 왕이었다면 대왕이라는 이름은 커녕 보통 왕(common king) 심지어는 소왕(a small king)이라는 이름도 부적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아그립바를 그 조부가 소유했던 왕국, 전 팔레스틴에 걸치는 왕국을 되찾은 인물로 묘사했다. 그래서 아그립바왕이라는 거창한 호칭이 붙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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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미 분봉왕 헤롯의 종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래서 사도행전 12장의 헤롯이 분봉왕 헤롯이 아님을 입증하였으므로 아그립바 헤롯의 종교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도 가치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분봉왕과 아그립바왕을 동일 인물로보는 하르뒨은 헤롯이 유대인 야고보를 죽인 인물임을 부인하고있다. 하르뒨은 그의 저서 p.55에서 누가의 말을 근거로 헤롯이그리스도인들과 분쟁을 일으킨 것은 종교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고 단언하고있다. 그러면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사람은 반드시 유대인이 아니어야 한단 말인가? 하르뒨의 주장대로라면 로마 백성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호의를 사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한 소위 인기 애국자(popula patriot)들은 로마인들이 아니어야 한다는 어리석은 결론이 나온다. 더욱이 유트로피우스ut-ropius) 말에 의하면 로마인인 황제들도 로마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무척 노력했다는데 그러면 황제들도 로마인일 수가 없다는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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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세푸스는 ‘유대전쟁사’2권 11장 5절에서 칼키스의 왕(king of Chalcis) 헤롯이 아그립바의 형제라고 했다. 이방면에서 전문가인 피터 세귄(Peter Seguin)은 칼키스왕 헤롯의  주화를  발견했는데,  주화의  앞면에 KLAUDIW KAISRI SEBASTW ET E 즉 제5년에 글라우디오 가이사 아구스도께(To Cla-udius caesar Augustus in the fifth year)라고 기록되어 있고뒷면에는 왕관을 쓴 얼굴 주위에 BASILEUS @HPWD…UDIOS 글라우디오를 사랑하는 자, 헤롯왕(King Herod, the lover of Cla-udius)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반면에 하르뒨은 그의 저서p.58에 칼키스의 헤롯왕이라는 인물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칼키스 왕국은 있지도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요세푸스의 역사라면 무조건 거짓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하르뒨의태도를 여실히 드러내준 예이다. 한편 요세푸스는 ‘유대고대사’19권 5장 1절에서 아그립바의 형제 헤롯이 칼키스의 통치자이었다고 기록하였고, ‘유대전쟁사’ 2권 11장 5절에서도 이 헤롯이칼키스를 다스렸다고 기술하였다. 요세푸스가 ‘유대고대사’ 20권 1장에 인용한 글라우디오 황제의 서신을 보면 헤롯은 왕(King)으로 호칭되어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핵심은 헤롯 아그립바가 글라우디오 황제 재위 5년에 생존 여부에 달려있다. 그러나헤롯 아그립바가 글라우디오 재위 5년에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으며, 아그립바는 글라우디오 재위 4년에 사망하였다고 크로니콘에 쓰고 있는 유세비우스의 견해와도 모순된다. 이러한 유세비우스의 견해를 스칼리거(Scaliger)는 그의 저서 ‘유세비우스의 크로니콘 혹평'(Animadversion on Chronicon)p.189에서지지하였고 피어슨(Pearson)은’Annal Paulin’ p.51에서 유세비우스 연대 계산을 지지하였다. 게다가 저명한 디오 카시우스(Dio Cassius)는 그의 저서 60권 p.670에서 “글라우디오 가이사가 아그립바의 형제에게 크고도 확실한 통치권을 하사하였다”라고 썼는데, 요세푸스는 이 아그립바의 형제가 분명히 칼키스의 헤롯이라고 주장하고 있다(‘유대고대사’ 19권 5장). 이상에서본 대로 디오(Dio)까지도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요세푸스나 유세비우스의 견해를 반대할 분명한 이유가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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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사도행전 25장(23장)에 언급된 아들 아그립바와 아그립바의 누이 베니게(Bernice)에 대하여 알아보자. 아들 아그립바는 부친이 사망하였을 때 17세의 젊은 나이로 로마에서 글라우디오와 함께 있었다. 글라우디오는 만일 측근들의 “황제주위의 유대와 같은 왕국을 저렇게 어린 왕에게 맡기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라고 채근하지 않았으면 아들 아그립바에게유대를 상속하려고 하였었다. 따라서 유대는 아그립바의 다른영토들과 함께 다시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 쿠스피우스 파두스(Cupius Fadus)가 유대의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 제19권 결론 부분을 참조하라. 하르뒨은 유대가 다시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것을 부인한다. 그는 아구스도 이래로유대가 계속 속주이었던 것으로 간주하고 유대가 중간에 왕국으로 회복되었다가 다시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예들을 제시하였었다. 타키투스(Ticitus)의 ‘역사서’ 5권 9장에 있는 증언을보면 “글라우디오는 속주국들이 왕들이 죽고 그 세력이 미약해지자 유대 속주국을 로마 기사들과 귀족들로 하여금 다스리게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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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그립바Ⅱ세는 그 부친 사망 후 즉시로는 왕국을 이어받지 못했지만 아주 이어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요셉 스칼리거(Joseph Scaliger)는 유세비우스에 관한 그의 저서 p.189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친이 죽은 후 왕국은 즉시로 아그립바Ⅱ세에게 넘겨지지 않고 그가 성인이 되어 스스로 통치할수 있을 때까지 가이사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다스려졌다. 스칼리거는 타키투스의 말을 인용하여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적고 있다. “이두레인들(the Iturears)과 유대인들은 자기들의왕인 소헤무스(Sohemus)와 아그립바가 죽자, 수리아의 속주에영입되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말하길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이두레인들은 영구히 수리아에 영입되었으나, 유대인들은 아그립바Ⅱ세가 통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될때까지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그립바Ⅰ세가 죽은 지 5년만에 영입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믿겠습니까?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Cornelius Tacitus)가 여러번 주장했고, 그의 ‘연대기’와 다른 나라들에 대한 그의 역사 속에서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누가 믿겠습니까?” 필자는 타키투스와 같은 저명한 학자가 위와같은 오류를 범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타키투스는여러면에서 요세푸스와 견해를 같이했기 때문이다. 요세푸스와유세비우스의 글을 통해 알아본 바와 같이 아그립바 Ⅰ세는 글라우디오 재위 제4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아그립바 Ⅱ세는 17세의 젊은 나이여서 부친의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였고, 왕국은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거나 수리아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폼페이우스(C. Pompeius)와 베라니우스(Q. Verannius)가 집정관이었던 글라우디오 재위 제9년 초에 곧 죽을 것이 분명한 칼키스의 헤롯. 즉 아그립바Ⅱ세의 삼촌인 헤롯의 자리에 아그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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