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공경”
요한은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부모님께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우리 저기 올라가서 기념촬영해요!”
그러나 거동이 불편하셨던 아버지는 거절하셨습니다.
“난 차를 지키고 있으마!”
아버지의 이 말씀에 요한은 화가 났습니다.
“아버지! 누가 차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닌데 같이 올라가요. 조금만 걸어가면 되요.”
하지만 아버지는 또 거부하셨습니다.
“다리가 아파서 그러니 너희들이나 다녀오렴.”
그제야 요한은 “아버지가 그렇게 나이가 드셨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서운함이 밀려왔습니다.
“조금만 걸으시면 같이 가족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요한은 계속되는 아버지의 거부에 차츰 화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족 여행이 그리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미사에 참례했다가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날 독서와 복음의 말씀이 계명에 관한 것이었는데, 특히 “부모를 공경하여라.”는 계명을 듣고서 자신의 죄가 떠올랐습니다.
“아! 내가 부모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부모님께 화를 내기 위해서 여행을 했구나! 아버지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부모님을 내 틀에 맞추는 것은 분명 효도가 아닌데…,”
그 후로 요한은 부모님께 더욱 정성을 다하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1. 계명을 지키는 삶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고 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계명은 당신백성들을 괴롭히거나 옭아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이 계명을 지켜야 하고, 이 계명을 지키는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은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이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고, 지켜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깊이 성찰해 보고, 계명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할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2.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탈출기20,8-11).
구약의 백성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은 쉬셨고, 그날을 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셨기에 안식일 다음날을 주님의 날로 고백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던 백성들은 쉬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강제노역을 해야 했고, 고통 속에서 시달려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안식일을 제정하시어 그날 쉬며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해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날 입니다. 하느님께서 안 계셨다면 그 안식일은 없는 것이고, 쉴 수 있는 시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를 쉬면서 자신들이 쉴 수 있음에 감사드리고,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림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종살이를 기억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 종들과 집짐승들과 이방인들도 쉬게 해 주어야 합니다. 주인이 쉬어야 종들도 쉴 수 있고, 종들이 쉬어야 집짐승들도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쉬면서 그 쉼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님의 날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날 입니다. 한 주간을 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복을 주신 주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내가 주일을 지킬 때, 내 옆에 있는 이들이 주일을 지키고, 내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낼 때, 내 옆에 있는 이들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주일은 자녀들과 함께 밀린 일들을 하는 날이 결코 아닙니다. 그걸 가르치면 어느 순간 자녀들이 주일을 지키지 않게 됩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방법은
① 경건하게 미사에 참례하고,
② 함께 기도하며,
③ 한 주간 동안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하고,
④ 한 주간의 나의 모습과 가족의 모습을 돌아보며,
⑤ 가족과 함께하며 가족에게 사랑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⑥ 내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꺼운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
⑦ 다시 새롭게 한 주간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을 지낼 때, 내 옆에 이는 이들은 “역시! 신앙인들의 삶은 다르구나!”를 깨닫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고자 하는 마음을 키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라면 결코 신앙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바칠 때 반드시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
십자가의 길을 바치면서 각 처에서 묵상할 수 있는 것들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를 제시할 수 있는데, 이 외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한 것, 하기 싫어하는 것 등에 대해서 묵상해 보며, 주님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묵상해 나가야 합니다. 또한 다음의 것들을 마음에 간직하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첫째,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기.
둘째,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인간에게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예수님의 고통과 겸손을 배우기.
셋째,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타에 오르시는 예수님의 고통의 길을 묵상하며 일상 삶에서 주어지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렇게 매일의 삶 안에서 주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는 삶을 통하여 주님의 고통을 위로해 드리려고 다짐하기.
넷째,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짊어짐을 묵상하며, 제 십자가만이 아니라 제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의 십자가도 기꺼이 짊어질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움직이기
다섯째, 십자가에 처절하게 못 박히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음을 기억하기.
여섯째, 성모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기에 “어머니께 청하오니! 제 맘 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전구를 청하기.
일곱째, 십자가의 길 아래에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라고 고백하며 주님께 참된 경배와 찬송을 드리기.
은총의 사순시기에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주님을 따르는 삶을 더욱 완성시켜 나아갑시다.
예루살렘 성전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과 함께 현존하고 계시다는 표징을 나타내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고, 각종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성전은 거룩한 곳이며, 인간이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성전에 머무시면서 당신 백성에게 은총과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어 희생제사를 드리신 다음부터는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과 교회라는 의미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은 세 차례에 걸친 성전 건축과 파괴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1. 솔로몬 성전
솔로몬 성전은 오늘날 예루살렘의 옛 도시 동쪽에, “하람 에슈 셰리프)라고 불리는 지역 안에 있었습니다. 비록 그 위치를 자세히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성경 시대의 세 성전, 즉 솔로몬 성전과 즈루빠벨 성전과 헤로데 성전이 같은 자리에 들어서 있던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 그곳에 서 있는 모스크(Mosque)가 그 자리로 추정됩니다. 엘 아삭 모스크(el Aqsa Mosqu)로 불리는 이 이슬람교 성전은 638년에 완공되었는데, 이 모스크 안에 있는 바위 위가 지성소나 성소 밖의 제단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2역대3,1). 이 바위는 다윗이 은 50세켈(2사무24,24;1역대21,25절에 의하면 금 600세켈)을 주고 아라우나에게서 산 “타작 마당의 일부분“이었을 것입니다. 현재 솔로몬 성전 건축물의 어떤 부분도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은 헤로데 성전의 건축 과정에서 그 이전에 건축된 성전의 기초가 파괴되고 다져졌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고대 성전들은 국고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국력의 여하에 따라 성전의 보물로 다른 나라에 조공을 바쳤고, 국력이 강해져서 전쟁에 승리하면 그 전리품으로 성전 창고를 채우고 장식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성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 성전에 모아 두었던 보물들이 이집트의 시삭 왕에 의해 약탈당하였으며(1열왕14,26), 아사 왕은 시리아와 우호 동맹을 맺기 위해 시리아 왕에게 보내는 예물로 성전의 보불을 사용하였습니다(1열왕15,18). 아하즈 왕도 다른 나라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하여 아시리아 왕에게 보내는 예물로 성전의 보물을 사용하였습니다(2열왕16,8). 또 기원전 621년에 요시아 왕은 종교 개혁을 단행하여 성전을 수리하였는데, 이 성전은 결국 기원전 587년에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BC605-562)에 의해 파괴되고 약탈되었습니다(2열왕25,9.13-17). 그러나 파괴 이후에도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제사를 드리곤 하였습니다(예레41,5).
2. 즈루빠벨 성전
BC 539년에 바빌론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BC539-529)는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와 있던 사람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래서 기원전 537년부터 귀환하기 시작한 포로들은 기원전 587년에 네브카드네자르에게 빼앗겼던 성전 기물을 가지고 돌아와 성전 재건을 시도하였지만(에즈1;3,2-3.8-10) 곧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즈루빠벨과 여호수아 시대, 즉 하까이와 즈카르야가 예언 활동을 하던 시기에(BC520년 경) 다시 공사를 재개하여 BC 515년에 완공하였는데, 이 성전은 약 500년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이 성전의 크기와 세부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명백히 알 수 없지만, 길이가 60암마에 높이가 60암마였다고 전해집니다. 성소 둘레에는 창고와 제사장들의 방들이 있었습니다. 이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해 그 규모는 매우 축소된 것이었으나 완공 이후 기원전 63년까지 500년을 존속했었습니다.
마카베오서에는(1마카1,21;4,49-51) 성전 기물에 관한 일련의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계약의 궤는 이미 포로기에 없어졌고, 그 후에 다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이 성전의 성소에는 솔로몬 성전의 10개의 등잔대 대신 일곱 개의 가지를 가진 한 개의 등잔대가 있었고, 제사상과 분향 제단이 있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BC 175-164)는 BC 167년에 이러한 기물들을 탈취해 간 뒤에 가증스러운 제우스 신상과 제단을 가져다 놓았습니다. BC 164년에는 마카베오가 성전에서 이런 것들을 치워 버린 뒤 성전을 정화하고 제단을 새로 쌓았는데, 이것이 유대인들의 중요한 축제 가운데 하나인 성전 정화를 기념하는 축제 “하누카“의 기원입니다.
3. 헤로데 성전
이두메아 출신의 왕 헤로데는 BC 19년에 유대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본래의 목적은 상당히 정치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헤로데는 이 성전이 성스러운 자리가 되도록 성소를 짓는데 석공으로 참여할 제사장 1천 명을 훈련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주요 구조물은 10년도 안된 기원전 9년경에 다 지어졌지만 공사는 서기 64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70년에 로마 병사들에 의해 이 성전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거의 80년이 넘게 걸려 세워진 이 헤롯성전은 완공된 지 불과 수 년 후인 AD 70년에 로마군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성전에 있던 금들이 화재로 녹아 돌 사이에 스며들었고, 로마 군인들이 이 금을 찾기 위해 모든 돌을 다 헤쳐버려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헤로데 당시 성전의 바깥 벽 중 일부 약 450m 정도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를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유대인이 이곳에 와서 성전이 파괴된 것과 나라를 잃은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여 통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이곳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오스만 시대부터 이스라엘은 물론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곳에 순례 차 와서 소원이 적힌 쪽지를 벽의 돌 틈새에 끼워 가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성전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말라키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느냐?”(말라키3,1)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보시니 성전이 아니라 완전히 시장바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자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인정할 만한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생각하고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사람들은 돌로 지은 성전,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성전을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이 성전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맞이하실 때도 이런 말로 모욕을 당하였습니다(마태27,39-40)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27,40)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더 이상 성전과 사제들의 직무가 이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제들의 사제직은 아무 소용이 없는 사제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사용되는 성전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 휘장은 죄 많은 인간이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상기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그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찢어짐으로써 모든 이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셨기에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주님을 믿는 이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이제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 현존의 표지로서 제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몸이 바로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 주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래서 돌로 지은 성전이 폐기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야만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영적 성전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퉁잇돌이시요 머리이며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지은 교회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에페2,14-22)
또한 주님의 자녀요, 주님의 거룩한 성체를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몸에 딸린 지체로서 하느님의 성전이며(1코린6,15;12,27), 성령의 궁전입니다(1코린3,16;로마8,11). 그러므로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않은 궁극적인 성전이 곧 교회이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인간과 하느님이 만나는 장소이고 지상에서의 하느님 현존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리고 옛 성전은 불완전하고 이미 지나간 일시적인 것이며, 새 성전의 예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마르13,1)
예수님 시대에 아직 건축 중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은(기원전20/19년–기원후 63년) 고대 세계의 일곱 가지 경이(驚異 놀랍고 신기하게 여김)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하얀 대리석 건물은 화려하게 빛났고, 그 예물, 특히 성소의 문을 덮고 있는 황금 포도덩굴은 장관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헤로데 왕이 바친 황금 포도나무는 가장 유명한 것인데, 황금 포도송이는 한 사람의 부피와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영광 가득한 예루살렘을 보지 못한 사람은 일생에 아무런 기쁨을 보지 못한 사람이다. 한껏 장식된 성소를 보지 못한 사람은 즐거움을 주는 도시를 도대체 보지 못한 사람이다.”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는 과장일지는 모르지만 돌 하나의 길이가 약 12미터 반, 높이가 4미터, 폭이 5미터 정도였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지만,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야 하지만 사람들은 성전의 아름다움에만 취해 있습니다. 나 또한 세상의 화려한 것들을 보고서 넋이 나가서 그것에만 관심을 돌리고 있지 않습니까? 좋은 옷, 좋은 차, 좋은 건물, 좋은 집, 멋진 백화점, 맛있는 음식점에…,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고 있는 그에게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그의 감탄을 진정 시키십니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13,2)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매료되어서 하느님을 등지고 있습니까? 물론 삶의 어려움으로 바빠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바쁜 사람들은 더욱 하느님께 매달리려 하는데, 한가하고 여유로운 사람들, 무엇인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왜 그리도 바빠서 신앙생활을 할 시간이 없을까요? 예루살렘 사람들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멸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군의 공격으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