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14주일; 나자렛에서 환영받지 못하신 예수님

예언자는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는 환영하였지만 메시지를 전하는 예수님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만 정말로 어두웠습니다. 기뻐해야 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하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상대방을 깎아 내린다고 해서 내가 올라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상대방을 높여주면 내가 더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의 모습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을 버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성실하게 봉사하며 신앙생활 하는 이들을 존중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고향을 방문하시는 예수님과 제자들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유의 손길을 베푸시고, 율법학자들이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는 배척을 받으셨던 예수님. 예수님을 받아들이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구원 받은 사람들이 있었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고향으로 가시는데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보기 위해서 고향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제자들과 함께 고향을 방문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내가 만일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분명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온 마음으로 존경을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2.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안식일 집회는 기도와 성경 낭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율법서(모세오경)는 언제나 낭독되었으나 예언서의 구절을 선택하는 일은 낭독자의 소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누구나 낭독할 권리가 있었고, 해설을 덧붙이거나 다른 훈계의 말을 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이 권리를 행사하기 원한다는 표시로 예수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 낭독을 포함한 그 의식이 시작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례 규정을 완벽하게 지키셨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경건하고 공손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해설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기 시작하였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마르코6,2) 그들은 “①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었을까? ② 어디서 저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얻었을까?”생각하였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보고 믿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듣고 믿어야 하는데 믿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자렛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불렀습니다. 옳은 말씀을 하시고, 자신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치심과 능력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하고 굳게 믿으며 실천하면 되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같은 동네에서 자랐는데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3. 믿지 않는 고향 사람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에는 관심 많았지만 예수님의 출신(인성)에는 부정적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 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6,3)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봐서 다 알고 있는데 어디서 뭔 얘기 주워들은 것 아닐까?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데…, 아버지는 누구고…,”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초라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단한 분이심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높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였다면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라는 것이 그들을 더욱 명예롭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는 환영하였지만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 예수님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 보세요. 당신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일부분입니다.“보시고 믿으세요!”하시면서 기적을 베풀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그런 표징들을 원했습니다.

 

4.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예언자의 삶(무지와 교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6,4)고향 사람들은 예언자의 어린 시절을 지켜보았고, 친척과 집안사람들도 지켜보았으나, 그들 눈에 보여 지는 것과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 바라보기에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부여하신 참된 모습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나자렛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면 되는데,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니 결국 못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촌 형제들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보고 “공적으로 드러내서 활동하시기를 권고”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 외에는 그 누구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었고, 그렇게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5. 나자렛에서의 예수님의 행적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고향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으셨고, 모든 이가 구원받게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참조: 마르6,5).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구세주이심을 드러낼 아무런 표징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고향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무런 표징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을 바꾸어 믿기를 원하십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당신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그 영원한 생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으니 우리는 당신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갑니다.”(사도13,46).

 

기적은 내가 원하는 만큼 일어납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믿는 대로” 해 주십니다. 억지로는 주시지 않습니다. 나자렛에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던 이유는 기적을 청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적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몇몇 병자 외에는 아무도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픈 상황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자신들의 교만을 조금이라도 버렸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예수님을 동네의 한 청년으로 보았고, 예수님보다 자신들이 못하지 않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혹시 나도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마음이 전혀 없고,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방해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6.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눈으로 본 것이나, 귀로 들은 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을 때 나는 어떻습니까? 그분께 마음을 활짝 열던지, 걸림돌에 걸려서 닫던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나자렛 사람들은 “교만과 질투, 시기심”의 걸림돌에 걸려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걸려 넘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걸림돌 때문에 넘어진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정작 내 마음은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는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나의 닫힌 마음은 오늘도 나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7.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➁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 가시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고향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할 때의 예수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예수님의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고, 만일 내가 예수님의 고향 사람이었다면 나는 예수님께 어떻게 대해 드렸을까요? 그리고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➂ 불신자들의 무리에서 믿음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고 있지만 불신자들의 눈을 의식해서 자기 마음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나에게 어떤 변화가 있어야 내 주변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변화를 요구할까요? 어떻게 설득하여 예수님을 믿게 만들까요?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나해 11-20주일, 연중시기(나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나해 연중 제 14주일; 나자렛에서 환영받지 못하신 예수님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에 기쁜 소식을 전하셨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문제삼으며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6,4)

    고향 사람들은 예언자의 어린 시절을 지켜보았고, 친척과 집안사람들도 지켜보았으나, 그들 눈에 보여 지는 것과 그들이 보고자 하는 것만 바라보기에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부여하신 참된 모습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나자렛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버리면 되는데,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하니 결국 못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촌 형제들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보고 공적으로 드러내서 활동하시기를 권고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 외에는 그 누구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었고, 그렇게 판단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고향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으셨고, 모든 이가 구원받게 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마르6,5) 그들이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구세주이심을 드러낼 아무런 표징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들이 마음을 바꾸어 믿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기적은 내가 원하는 만큼 일어납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믿는 대로해 주십니다. 억지로는 주시지 않습니다. 나자렛에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던 이유는 기적을 청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기적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몇몇 병자 외에는 아무도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아픈 상황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자신들의 교만을 조금이라도 버렸다면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예수님을 동네의 한 청년으로 보았고, 예수님보다 자신들이 못하지 않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혹시 나도 그렇게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마음이 전혀 없고, 다른 사람들도 못 들어가게 방해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2. 관리자 님의 말:

    나자렛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마르6,2) 안식일 집회는 기도와 성경 낭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율법서(모세오경)는 언제나 낭독되었으나 예언서의 구절을 선택하는 일은 낭독자의 소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누구나 낭독할 권리가 있었고, 해설을 덧붙이거나 다른 훈계의 말을 할 권리도 있었습니다. 이 권리를 행사하기 원한다는 표시로 예수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 낭독을 포함한 그 의식이 시작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례 규정을 완벽하게 지키셨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경건하고 공손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해설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디서 저런 지혜를 얻었을까? 어디서 저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얻었을까?”를 생각하였습니다.(마르6,2)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을 보고 믿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듣고 믿어야 하는데 믿지를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나자렛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불렀습니다. 옳은 말씀을 하시고, 자신들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치심과 능력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뻐하고 굳게 믿으며 실천하면 되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같은 동네에서 자랐는데 자신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는 환영하였지만 메시지를 전하고 계신 예수님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의 지혜로운 가르침과 놀라운 기적을 보았다면 믿으면 됩니다.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닫힌 마음은 놀라움믿음을 갈라놓고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어떤 표징을 보더라도 그들은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할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놀라움이 나를 흔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자렛 사람들은 교만과 질투, 시기심의 걸림돌에 걸려 마음의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걸려 넘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걸림돌 때문에 넘어진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정작 내 마음은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는가를 반성해야 합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활짝 열고 변함없는 믿음을 주님께 드리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3. 관리자 님의 말:

    엘리사와 나아만의 나병(2열왕5,1-27)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입니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습니다. 한번은 아람군이 약탈하러 나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곁에 있게 되었습니다. 소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하였습니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2열왕5,3)

     

    그래서 나아만은 자기 임금에게 가서 말을 전했고, 아람 임금은 예물과 함께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이 편지가 임금님에게 닿는 대로, 내가 나의 신하 나아만을 임금님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십시오.”(2열왕5,6)

    그런데 이스라엘 임금은 이 편지를 읽고 옷을 찢으면서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하며 탄식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임금이 옷을 찢었다는 소리를 듣고, 임금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습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2열왕5,8)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에게 왔습니다.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하였습니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2열왕5,10)

     

    그러자 나아만은 화가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하며 성을 내며 발길을 옮겼습니다.

    그러자 그의 부하들이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고 권하였고,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습니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돌아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5,15)

     

  4. 관리자 님의 말:

    엘리야와 사렙타의 과부

    엘리야 예언자는 아합 임금에게 가뭄을 예언했습니다. 아합은 자신의 아내 이세벨과 함께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을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섬기는, 살아 계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 말이 있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1열왕17,1)

     

    그런데 이것은 목숨을 건 도전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분명 엘리야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를 이끄십니다.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습니다.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는 시내의 물이 말라 버렸습니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까마귀가 내 것을 훔쳐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엘리야에게 해 드린 것을 기억하면서 좀 더 너그럽게 대해 주며 웃어 봅시다. 훔쳐갔는데 쫓아가서 잡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습니다.

    일어나 시돈에 있는 사렙타로 가서 그곳에 머물러라. 내가 그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해 놓았다.”(1열왕17,9)

     

    엘리야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사렙타로 갔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성읍에 들어서는데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여자를 부르고는, “마실 물 한 그릇 좀 떠다 주시오.” 하고 청하였습니다. 그 여자가 물을 뜨러 가는데 엘리야가 다시 불러서 빵도 한 조각 들고 오면 좋겠소.” 하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는 한, 구운 빵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단지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이 조금 있을 뿐입니다. 저는 지금 땔감을 두어 개 주워다가 음식을 만들어, 제 아들과 함께 그것이나 먹고 죽을 작정입니다.”(1열왕17,13)

    순간 엘리야는 당황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하느님께서 다 준비해 놓으셨다고 했는데, 전혀 엉뚱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 과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당신 말대로 음식을 만드시오. 그러나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 그런 다음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드시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주님이 땅에 비를 다시 내리는 날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1열왕17,13-14)

     

    하느님께서는 가뭄으로 모든 것이 부족한 사렙타에서 엘리야가 살아갈 수 있도록 작은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 과부의 밀가루 단지와 기름병이 늘 넘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말을 들을 수 있도록 그 과부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과부는 마음이 열려 있기에 엘리야의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만일 그 과부가 마음을 열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는 억지로 그녀에게 기적을 베풀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또한 엘리야는 아주 작은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빵 과자 하나를 만들어 내오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제 부족하지 않은 단지에서 밀가루를 꺼내고, 마르지 않는 기름병에서 기름을 둘러서 먼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셨기에 하느님께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예언자는 주님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주님께서 내려 주신 복을 전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단지에는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병에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하느님의 사람을 받아들이니, 하느님의 은총이 하느님의 사람을 통하여 넘치도록 다가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믿음을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집주인 여자의 아들이 병들게 되었는데, 병이 매우 심해져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엘리야에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시여! 어르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한테 오셔서, 제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1열왕17,18)

    엘리야는 황당했을지도 모릅니다. 병들어 죽은 아들을 엘리야 책임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엘리야가 들추어냈다고 말하였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부모들은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리는데, 이 여인도 그런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들을 이리 주시오.” 하며, 과부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안고 자기가 머무르는 옥상 방으로 올라가서, 자기 잠자리에 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제가 머물고 있는 이 집 과부에게까지 재앙을 내리시어 그 아들을 죽이셨습니까?”(1열왕17,20)

    그리고 그는 아이 위로 세 번 자기 몸을 펼친 다음 주님께 다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주 저의 하느님, 이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1열왕17,21)

    주님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하시자, 아이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엘리야는 그 아이를 안고 옥상 방에서 집 안으로 내려와, 아이 어머니에게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보시오, 당신 아들이 살아 있소.” 그러자 여자가 엘리야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제야 저는 어르신께서 하느님의 사람이시며, 어르신 입으로 전하신 주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1열왕17,24)

  5. 관리자 님의 말:

    대송(代誦)

    신자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주일미사에 참례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법상으로 신자들이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그런데 주일의 의무를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그것을 대신하여 기도를 바치게 하는데 이 기도를 대송이라고 합니다.

    박해시대 때 한국 교회에서는 사제(司祭)를 만나거나 공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대송으로 주일과 축일의 의무를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후에도 사제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공소에 사는 신자들이 많아서 대송은 그 뒤에도 계속 이어져왔습니다. 신자들이 공소에 모여서 공소예절을 통해 대송을 하였습니다.

    대송방법은 1995년에 발표한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에서는 대송의 방법을 다음과 같이 변경하였습니다. “미사나 공소예절에도 참례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에는 그 대신에 묵주기도, 성경봉독, 선행 등으로 그 의무를 대신할 수 있다”(744).

    그런데 이런 부득이한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요? 먼저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거동을 못하여 집에 있는 환자들의 경우입니다. 둘째로, 어쩔 수 없이 일을 하게 되거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으로서 주변의 미사에 참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경우입니다. 셋째로, 천재지변으로 미사에 참례하지 못할 상황입니다. 기타 다양한 상황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만 마음만 먹는다면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미사에 참례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먹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라고 말하며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행을 가서 근처에 성당이 없다고 하면서 대송을 바치는 것, 운동을 하면서 미사 참례할 수 없다고 대송을 바치는 것…, 이런 것들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지…, 혹시 이 다음에 하느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자네는…,”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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