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15주일


아모스가 베텔에서 쫓겨나다

(아모7,10-17)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예언직을 수행하는 아모스. 두 사람 모두 하느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마츠야는 하느님을 위해 살아간다고 말하지만 사실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아모스에게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하느님의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귀가 닫혀 있으면 결국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를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귀가 열려 있고, 다른 이가 틀린 말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하느님을 등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하느님을 등진 사람일 수 있습니다.

 

1.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와 이스라엘의 죄

아모스는 우상숭배로 물든 이스라엘에 하느님의 진노를 선포합니다. 빚돈을 빌미로 무죄한 이를 팔아넘기고, 신 한 켤레를 빌미로 빈곤한 이를 팔아 넘기는 이들, 불륜을 저지르고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하느님의 성소를 더럽히는 이들,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나즈르인들에게 술을 먹이고, 예언자들에게 예언을 하지 못하게는 이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진노를 내리실 것을 아모스 예언자를 통하여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이스라엘 임금 예로보암에게 사람을 보내어 “아모스가 이스라엘 집안 한가운데에서 임금님을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습니다.”(아모7,10)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모스가 선포한 말 “예로보암은 칼에 맞아 죽고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갈 것이다.”(아모7,11)을 전합니다.

 

그런데 베텔의 사제는 이 백성이 저지르는 악을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 예로보암도 자신들이 저지르는 죄를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죄를 밝히는 아모스의 입을 닫아 버리려고 합니다. 아모스의 말에 귀를 막습니다.

 

아모스는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죄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 했을 뿐입니다. 아모스는 결코 음모를 꾸민 것이 아닙니다. 그저 멸망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할 뿐입니다.

 

그런데 내가 만일 베텔의 사제였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백성들의 죄악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그들과 동조하여 한 생을 살았을까요? 아니면 아모스가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을 미리 선포하여 백성들을 바꾸어 놓았을까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의 잘못을 눈감아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죄는 참으로 큽니다.

 

2. 거짓 예언자 아마츠야(베텔의 사제)

아마츠야는 아모스에게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아모7,12-13)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 안에서 아마츠야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예언을 하면서 밥을 벌어 먹어라.” 라는 말은 자신이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물질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하니 남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아마츠야는 베텔이 임금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마츠야 자신이 있으니 아모스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곳에 있는 아마츠야가 가장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곳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 때문에 결국 아무 쓸모없는 곳이 되어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츠야의 모습이 내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있는 곳을 더욱 거룩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3. 아모스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

아모스는 결코 예언을 해서 밥을 빌어먹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마음도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① 아모스의 신원

이제 아모스는 자신이 누군지를 밝힙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아모7,14) 그런데 이런 아모스를 하느님께서 붙잡으셔서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7,15) 그래서 아모스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아마츠야와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말씀

이제 아모스는 거짓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는 아마츠야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먼저 주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을 거슬러 예언하지 말고 이사악의 집안을 거슬러 설교하지 마라.”(아모7,16) 아마츠야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죄악으로 빠져드는데도 방관했고, 동조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왕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아모스를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모스가 하는 모든 말을 더 이상 참아 낼 수가 없다고 왕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정말 견디기 어려우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거슬러 예언자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이사악의 집안을 거슬러 설교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아모스는 아마츠야에게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벌을 알려 줍니다. “네 아내는 이 성읍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딸들은 칼에 맞아 쓰러지며 네 땅은 측량줄로 재어 나누어지고 너 자신은 부정한 땅에서 죽으리라. 이어서 이스라엘이 받게 되는 벌을 알려 줍니다. “이스라엘은 제 고향을 떠나 유배를 가리라.”(아모7,17ㄴ)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저버리고, 그 사랑을 외면하면 다가올 벌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민족에게 짓밟히고,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아야만 하는 고통, 자신의 삶의 자리를 뒤로 하고 유배지에서 종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고통. 이 고통을 생각해 본다면 회개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나해 11-20주일, 연중시기(나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나해 연중 제 15주일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자세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마르6,8-9) 고 이르셨습니다.

    제자들은 선교여행을 하면서 오로지 주님께만 믿음을 두고, 다른 것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물질에 대해 집착하거나, 편안한 잠자리나 음식 등에 집착을 하면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것에는 온 열정을 쏟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은 오직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자유로워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유롭게 열정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 가난한 사람들도 지팡이쯤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빈한 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팡이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결코 사치는 아닙니다. 그렇게 청빈한 삶으로 하느님 나라를 전할 때, 사람들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순수성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 탈무드에 의하면 유다인은 속옷을 두 벌씩 입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만 입는 사람은 아주 가난한 사람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절대적 청빈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교여행을 하면서 그 고장의 어떤 집에 머물게 되면 끝까지 그 집에 머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마르6,10)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3일 정도는 그 집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받아들인 주인에게 실례가 되지 않도록 떠날 때까지 옮기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또 더 좋은 음식, 더 편안한 잠자리를 찾아서 이집 저집 옮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사람을 잘 못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신앙이 있고,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서 보면 앞에서만 그렇게 보이고, 뒤에서는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집에 머물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다른 집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2. 관리자 님의 말: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파견하신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다른 것들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1.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심(마르6,7)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마르6,7) 그리고 복음을 선포할 의무도 아울러 주십니다(마태10,7).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받은 권한으로 자기들의 일을 입증할 것입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더러운 영들을 쫓아낼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런데 그런 더러운 영보다 더 더럽게 살아간다면 누가 누구를 쫓아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올바르게 살아가야 합니다. 올바른 이라야 찬미가 어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의 말에 더러운 영들은 꼼짝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러운 영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더러운 영들이 하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을 자신의 도구로 만들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게 하고, 해야 될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고, 방관하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옳지 않아.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야. 너 그렇게 하면 안 돼.”

     

    2. 둘씩 짝지어 보내심(마르6,7)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마르6,7) 사실 혼자는 어렵습니다. 둘이 힘을 합하면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데, 둘이 하나씩 되면 그 힘은 별 볼일 없어집니다. 그런데 동료가 잘할 때, 과연 칭찬하고 존경할 수 있느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와 함께 하는 동료가 일을 너무 잘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 동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잘하면 나에게는 득이 됩니다. 그가 못해야 만이 내게 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옆에 있는 동료가, 친구가, 팀원이 자신의 능력을 200배 발휘한다면 나는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자들이 둘 씩 짝지어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를 쫓아낸 것을 기억하면서 나도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가 잘하면 칭찬해주고, 그를 본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런 역할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존중할 수 있고,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알고 있고, 능력 있는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3. 내 옆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기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마태오와 토마스, 소야고보와 타대오, 시몬과 유다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했을 때,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분은 누구실까? 물론 예수님께서 마음이 가장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도 아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왜냐하면 자신과 함께 다니던 동료가 배반을 했기에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혹시 내가 잘못해서 유다가 잘못된 마음을 가지지는 않았던가? 내가 유다에게 잘못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유다가 그렇게 흔들릴 때 나는 뭐 했던가?” 하면서 말입니다.

     

    둘씩 짝지어 파견 받은 것은 이제 사도들만이 아니라 가정생활을 하는 부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배우자를 짝지어 주시고,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혹시 나 때문에 배우자가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배우자에게서 힘을 빼앗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되었고,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임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엉뚱한 것을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파견하시는 예수님과 파견 받은 사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를 부르신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봅시다.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은 무엇이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나는 예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님께로부터 파견 받은 사람입니다. 어제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살아왔고, 오늘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도 파견 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만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도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고 파견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이 길을 가며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함께 합시다. 그렇게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해 나갑시다. 그렇게 우리를 파견하신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3. 관리자 님의 말: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 대한 자세.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조롱하거나 야유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선교를 할 때 냉담자들 보다는 오히려 비신자가 훨씬 수월할 때가 있습니다. 냉담자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오히려 화가 나고 가슴이 답답해지고, 죄만 짓는 경우도 있습니다.

     

    냉담자들과 길을 잃은 이들과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가 싫어서 집을 나갔는데, 저 멀리서 부모가 자신을 찾으러 오는 것을 보면 달아나 버립니다. 그러나 부모와 함께 공원에 갔다가 길을 잃은 아이라면 저 멀리서 부모가 보이면 엄마하고 부르면서 달려갑니다. 그리고 울면서 엄마 품에 안겨 안도합니다. 착한 목자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길 잃은 아이가 부모를 만난 바로 그 모습입니다.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말씀을 거부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잘 살지 못하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발의 먼지를 털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린다는 것은 내가 당신들에게 할 만큼 한 것 아시죠? 그런데도 당신들이 믿지 않는 이유는 저희들 탓이 아니라 당신들 탓입니다. 우리들 때문에 못 믿게 되었다는 얘기는 하지 마세요. 이제 당신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린다는 것은 그 불신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불신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나도 모르게 가지게 되는 이런 저런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서서히 내 삶에서 나타나게 되면 나도 변질되어 버리고,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신의 어떠한 것도 내 몸에 붙어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 몸에 묻어 있는 불신의 먼지들을 털어 버릴 때, 나는 내 옆에 있는 이들에게 믿음을 더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동차는 주기적으로 엔진오일을 교환해야 합니다. 그래야 엔진에 무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으로 완전히 바꾸니 엔진에 손상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것들은 완전히 비울 수가 없고, 바꿀 수도 없습니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흙탕물이 되고, 다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분노가 화산이 폭발하는 것 이상으로 터져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고해성사를 통해서 비워내야 하고 연결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두툼하게 기도와 은총으로 덮어 놔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나는 더 기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누구라 할지라도 사랑스럽게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세상 모든 이들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께로 향하는 이가 될 수 있도록 삶으로 보여주고 이끌어주며, 언제나 평화롭게 사랑스럽게 대하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4. 관리자 님의 말: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수행하는 제자들

    주님께로부터 파견받은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습니다.(마르6,12)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보기 위해서는 마땅히 보는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마음을 돌려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마음을 돌려 보는 방식을 바꾸어야 만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고, 내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먼저 변화되어 다가가니 변화된 나를 보고 그들의 마음이 열리게 되고,

    회개하고 내 마음을 열어 보이니 내 마음은 거울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비추어주네.

    오로지 주님만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니 그 발걸음에서는 향기가 나고,

    그 향기를 맡은 이들은 나를 따라 주님께로 나아가네.

     

    열 두 사도들은 환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말씀에는 힘이 있었고,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온 마음으로 믿음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나의 모습은 환영받는 주님 제자의 모습일까요? 지팡이 하나가 아니라 모든 것을 움켜쥐고 삶은 변함없이 그저 입으로만 복음을 선포한다면 내 말에 청중들은 귀를 기울일까요? 겸손한 삶, 청빈한 삶, 열정적인 삶, 용서하는 삶, 베푸는 삶에 주님의 말씀을 담아서 전할 때 그 메시지를 받은 이들이 더더욱 뜨거운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이 되어야 신앙이 전해지지 생활이 없는 신앙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나 자신의 뜨거운 신앙생활이 없다면 선교는 남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자기도 못하면서 남에게 하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온 몸으로 보여줄 때, 내 옆에 있는 이들도 그 기쁨 안으로 들어오려고 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의지하고,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마르6,13) 그리고 사도들이 일으키는 표징으로 사람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 또한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과 내가 전하는 복음의 기쁨을 온 몸으로 보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더욱 크게 확장하실 것입니다.

     

  5. 관리자 님의 말:

    성직자들의 평상복 수단

    성직자들이 평상복으로 입는 긴 옷을 수단이라고 하는데, 수단이란 말은 밑에까지 내려오는 옷이란 뜻의 프랑스어(soutane)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제는 전례를 거행하기 전에 수단을 입고, 그 위에 제의를 입게 됩니다. 수단이란 말 그대로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옷으로 하얀 로만 칼러에 20-30개의 단추가 달려 있습니다. 3세기까지는 성직자들의 고정된 복장이 없었는데 6세기부터 로마인들의 복장을 본따서 성직자들의 특수한 복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단의 색깔은 검은 색으로, 하느님과 교회에 봉사하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고 세속에서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복장은 트리엔트 공의회(1546-1563)에서 규정되었습니다. 수단은 성직자의 지위에 따라 그 색깔이 다른데, 사제는 검정색이나 흰색을, 주교는 진홍색을, 추기경은 적색을, 교황은 항상 흰옷을 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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