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밖에 모르시는 예수님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님께 보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기뻐하십니다. 제자들의 수고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로 밀려오니 제자들을 쉬게 하기 위해서 외딴곳으로 가시려 합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곳으로도 사람들은 밀려오니 예수님께서는 또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1. 기쁨을 보고하는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이제 파견 받은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습니다(마르6,30). 자신들의 사명을 수행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왔을 때, 제자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믿음을 가지고 마귀들에게 호령하고, 병자를 일으켜 세우고, 말씀을 전하고, 회개시키고…, 제자들은 모두 기쁨에 넘쳐서 예수님께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람들에게도 환영받았을 것입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 말씀에 기적을 따르게 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니, 사람들은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였고, 그들을 통하여 믿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기쁨에 넘쳐서 자신들이 한 일을 예수님께 보고하였습니다. 나 또한 제자들처럼 그렇게 부여받은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기쁨에 넘쳐서 주님께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저녁기도 시간은 기쁨의 기도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보고할 것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주님! 저는 오늘 한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하려고는 했는데…,”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주님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려움이고, 피하고 싶어집니다. 또한 저녁기도하기가 부담스러워집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주님께 말씀 드릴 것이 없다는 것만큼 부담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기쁘게 한 신앙인들이 저녁기도를 바칠 때, 주님 앞에서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2.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보고를 흐뭇하게 들으셨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 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의 말을 기쁘게 들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코6,31)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좀 쉬어야 또 힘을 내어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제자들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밀려오기에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바쁘다보면 밥 먹을 시간조차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당에는 주일에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니, 이것저것, 이 단체, 저 단체, 이 일, 저 일 하다보면 밥 먹을 시간을 놓칠 때도 있습니다. 어느 신부님이 주일에 그렇게 바쁘게 일을 처리하시고 점심을 드시려 하시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며 “신부님! 이 묵주 축성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십자가를 그으며 이렇게 기도해 주셨습니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 주신 이 음식과….”(식사 전 기도를 하신 거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걱정하십니다. 아무리 기쁜 일이라 할지라도 힘이 빠지면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이 기쁘기 위해서는 내 안에 힘이 넘쳐야 합니다(내적 평화, 기도). 내 안에 힘이 없으면 결국 조그만 충격에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본당에서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봉사만 하면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외딴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 제자들과 함께 기도 하시려 했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을 쫓아가는 군중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좀 쉬시려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분명 예수님도 지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염려하시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의 행선지는 알지 못하였지만 배가 동북을 향하였기 때문에 벳사이다로 가는 것이라고 짐작하고 약 8키로의 거리를 달려서 예수님을 앞질러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마르6,33).
그런데 군중들이 욕심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잠시도 그냥 두지 않고, 예수님께 매달리고 있으니…, 하지만 군중들 편에서는 지금의 기회밖에 없습니다. 그들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께로 달려가야 합니다. 내일이면 늦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드셔도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고, 외면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매달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나도 주님께 매달릴 수 있어야 하고, 주님께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께로 달려갈 때, 주님께서는 나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4.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는 예수님
군중들은 길이 멀든, 괴롭든, 먹을 것이 있든 없든, 오직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달렸을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기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니 그런 마음으로 달려온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 길 잃은 양을 발견한 착한 목자는 이제 자신의 양들을 돌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로 달려온 사람들은 결코 외면 받지 않는다는 것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사랑하시는 참된 목자이십니다. 내가 예수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달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반겨 주십니다. 나의 청을 들어 주십니다. 예수님께 매달리십시오. 예수님께 달려가십시오.
5. 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➁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돌아온 제자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자신들이 한 일들을 기쁘게 말씀드리는 제자들의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봅시다.
➂ 당신께로 달려온 군중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봅시다.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환하게 반겨 주시는 예수님의 이 마음을 이야기 해 보며, 예수님께 느끼는 사랑을 함께 이야기 해 봅시다. 또한 군중들의 기쁨을 함께 느껴 봅시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율법을 모른다고 하여 죄인 취급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치유해 주시니 군중들의 기쁨은 어땠을까요?
6. 실천사항
➀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고, 예수님 안에서 쉬려고 노력해 보기
➁ 예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기
➂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기
7. 말씀으로 기도하기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어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님께 보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기뻐하십니다. 제자들의 수고를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쁨에 넘친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흐뭇하셨을 것입니다. 기쁨에 넘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코6,31)
큰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이 좀 쉬어야 또 힘을 내어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제자들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밀려오기에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걱정하십니다. 아무리 기쁜 일이라 할지라도 힘이 빠지면 못하게 됩니다. 봉사가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내 안에 힘이 넘쳐야 합니다(내적 평화, 기도). 내 안에 힘이 없으면 결국 조그만 충격에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바쁘다보면 밥 먹을 시간조차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당에는 주일에 많은 일들이 이루어지니, 이것저것, 이 단체, 저 단체, 이 일, 저 일 하다보면 밥 먹을 시간을 놓칠 때도 있습니다. 어느 신부님이 주일에 그렇게 바쁘게 일을 처리하시고 점심을 드시려 하시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며 “신부님! 이 묵주 축성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십자가를 그으며 이렇게 기도해 주셨습니다. “주님! 은혜로이 내려 주신 이 음식과….” 이렇게 바쁘시다보니 식사 전 기도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축성을 받은 신자는 당황했는지 “감사합니다.” 대신에 “잘 먹겠습니다.”하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좀 쉬시려고 배에 오르셨습니다. 분명 예수님도 지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염려하시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외딴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 제자들과 함께 기도 하시려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그렇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지만 밤에는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본당에서 봉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봉사만 하면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려 하다가 주저앉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결국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을 얻어야 만이 다시 기쁨에 넘쳐서 봉사할 수 있습니다.
내 주변에도 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나의 칭찬과 격려와 기도는 그들에게 휴식이 되고, 작은 나의 도움은 그들에게 큰 기쁨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내 옆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사랑해 줍시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께로부터 사랑받는 내가 됩시다. 예수님 안에서 힘을 얻는 내가 됩시다.
휴식
창세기 1,1-2,4의 말씀은 하느님의 “휴식”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이 휴식은 세상이 창조된 과정을 과학적으로 진술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휴식은 이스라엘이 종살이를 벗어나 주님의 휴식을 함께 맛보게 되었음을 경축하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신명기5,13-15)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존엄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존엄성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존엄성을 찾는 행위인 것입니다.
인간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일에만 집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노예”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 안에서 쉬는 순간, 나는 하느님의 귀한 자녀로서 존엄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풍요로움이 주어져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면 엿새 동안은 일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합니다. 쉴 시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어야 한다는 것을 꼭 실천해야 합니다.
안식일에 하느님께서 하신 세 가지 행동은 쉬시고,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안식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는 인간이 원죄로 말미암아 깨뜨린 하느님과의 조화를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시 회복시키신 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일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어떤 때는 대부분 주일을 미사참례하고 남은 시간은 평소에 못했던 것을 보충한다거나, 다음 한 주간을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한 휴식이나 기분전환 내지 스트레스 해소의 날로 생각해 왔습니다. 즉 평일의 연장이나 보충, 혹은 평일을 위하여 존재하는 날로 주일을 생각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안식일)은 주간의 수단이 아니고 주간의 목적입니다. 이 날을 성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시간 속에서 영원을 준비하는 방법임과 동시에 우리의 삶에 창조의 질서와 하느님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거룩히 지내며 주님 안에서 쉬는 내가 되어 봅시다. 잠시 멈추고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봅시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만드는 방법을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알려주고, 함께 주님 안에서 휴식을 취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예수님께 몰려든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가셨지만 많은 사람이 예수님 일행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의 행선지는 알지 못하였지만 배가 동북을 향하였기 때문에 벳사이다로 가는 것이라고 짐작하고 약 8키로의 거리를 달려서 예수님을 앞질러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군중들이 욕심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예수님을 잠시도 그냥 두지 않고, 예수님께 매달리고 있으니…, 하지만 군중들 편에서는 지금의 기회밖에 없습니다. 그들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일이면 늦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드셔도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을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고, 외면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매달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군중들은 왜 예수님께로 몰려들까요?
첫째,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목자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더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길이 멀든, 괴롭든, 먹을 것이 있든 없든, 오직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는 일념으로 예수님께로 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니 달려온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길 잃은 양을 발견한 착한 목자는 자신의 양들을 돌보십니다. 목자 없는 양들 같은 군중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셨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로 달려온 사람들은 결코 외면 받지 않는다는 것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달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나를 반겨 주십니다. 나의 청을 들어 주십니다. 예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예수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 함께 예수님께 매달립시다. 우리 함께 예수님께로 달려갑시다. 주님께서는 나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자매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누구나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이 열려 있다는 것이고, 몸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며,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고, 나를 통해 상대방에게 큰 기쁨과 위안 등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기에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기에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고, 사랑하기에 그와 함께 있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이 말은 “나는 모든 이에게 빚진 것을 갚아야 한다.”는 것이고,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살아가면서 많은 빚을 지게 됩니다. 형제자매들로부터 받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은 사실 빚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은 조건 없이 내어 줍니다. 그러므로 갚을 수 없는 사랑은 받아들이며 감사하면 되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있을 만큼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의 빚”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상대방에게 빚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온전히 갚아야 한다면 세상 그 누구도 갚을 수 없고, 그것이 채무라면 온전히 빚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록 상대방이 갚을 수 없다 할지라도 사랑을 베풀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가 갚을 수 없지만, 나는 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삶이 바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고, 율법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라는 말씀처럼, 율법의 목표는 이웃사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해 주셨습니다(마태22,37-40). 그러므로 하느님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는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간음, 살인, 도둑질, 탐욕은 나 자신과 이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내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형제자매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되고, 그를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게 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웃에게 “간음, 살인, 도둑질, 탐욕” 등의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가장 쉽게 저지르는 것들은 “저 사람도 나와 같으려니”하면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잘못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밀을 지키지 않고, 더 나아가 말을 만들어서 퍼뜨리는 것입니다. 내가 갑자기 강도나 살인마로 변하여 이웃에게 다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부주의한 말”은 상대방을 철저하게 파멸시키고, 더 나아가 생명까지도 빼앗아 버립니다.
또한 용서하지 못함입니다. 그가 나에게 잘못을 하고, 용서를 청하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용서해주지 않으면, 그는 그 고통으로 더 큰 죄에 빠질 수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자매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는 결코 참되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늘 고민하며, “이웃에게 쉽게 저지르는 악”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라는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 말은 쉽지만 결코 행동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고, 이해해 줄 수 있고, 받아들여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구원여정에서 힘의 원천”이고, 그 사랑을 통해 예수님의 크신 사랑의 물줄기를 온 세상으로 끌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사랑은 그저 말 뿐”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늘 고민하면서 내 옆에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참된 사랑이란 어떤 사랑을 말할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은 무엇일까?”
이것을 고민하면서 살아가고, 기도하면서 행동으로 옮길 때, 우리는 주님의 계명 안에서 주님의 계명을 완성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관상(觀想 contemplatio, contemplation) 1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본성에 참여하여 친밀한 친교를 누리도록 부르셨습니다. 그 친교의 온전한 형태는 천국에서 지복직관(至福直觀)을 통하여 이루어지나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직관능력의 씨앗을 받게 됩니다. 관상은 그 씨앗을 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싹트게 하여 꽃피우게 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교회내 많은 성인들이 영성생활의 일치의 단계에 도달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이를 실천하였습니다.
관상은 염경기도나 일반적 묵상기도와 달리 단순 본질의 직관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본질적인 것의 터득에서 오는 것이므로 직관의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의 친교가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일치로 발전한 나머지 하느님을 단순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특별히 긴밀한 양식으로 내재하는 하느님을 본질적으로 바라보고 직접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느님과 친교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언어와 개념과 이미지 등에 매개수단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친교가 깊어지고 하느님이 사람에게 가까이 현존하심에 따라 그러한 매체가 불필요해지며 마침내 하느님의 영(靈)이 사람 안에 직접 내재하여 활동하실 때에는 사람의 사고와 감정과 상상은 하느님과의 ‘침묵의 일치‘를 방해하는 소음이 되기에 이릅니다. 더우기 인간의 언어와 개념 등은 하느님이 인간 안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계시하고 활동하시려는 자유를 제한하기에 이릅니다. 관상은 이러한 단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상자는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을 모두 침묵시키고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합니다. 이처럼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과 친밀한 친교를 체험하는 가운데 사람은 자신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존재가 본질적인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내 삶의 주체요, 내 삶의 내용이며, 내 생명의 원리라고 고백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