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하느님께서는 기묘하신 섭리로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셨고, 그 씨앗을 신앙의 선조들이 목숨으로써 증거하며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열매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학자들 몇몇이 “학문적 연구”(서학)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천주교가 학문이 아니라 신앙임을 알게 되고,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한국 천주교회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신해박해(1791년)를 시작으로 병인박해(1866년) 때까지 1만여 명이 순교를 하셨습니다. 이 땅의 순교자들 가운데 103위가 1984년에 성인의 반열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며 순교자들의 믿음을 본받고, 순교자들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않으신 분들이 계십니다. 1만여 명이 순교하셨는데, 겨우 103위가 성인품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품에 오르신 분들만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아직 성인품에 안 오르신 분들도 기억하면서 그분들의 믿음을 본받고, 그분들을 공경해야 할 것입니다.

 

2.1.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들이 해야 하는 것 두 가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부활이 있기 전에 수난과 죽음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나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만이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장애되는 모든 것들을 이겨내고, 주님만을 향해야 만이 부활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①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것.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이 걷고 싶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하며 한 생을 주님위해 살아가신 어머니 마리아의 삶을 내 삶으로 만다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이제는 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을 버리는 것은 “기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고, “주님 안에서,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감”이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성인들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순교자들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나”를 버리고, “유혹에 빠져드는 나”를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② 자기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

또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 시대의 사형방식으로, 그 당시 사람들은 “죽음”을 떠 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신 이 후에는 그 의미가 변화됩니다.

첫째, 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받기 위해 자신의 사형 틀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사형을 언도받고 죽음을 당한다.”는 것으로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몸소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타에 오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는 형벌의 도구가 아니라 구원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셋째,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짊어진 것처럼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짊어지는 것”입니다. 시몬은 그 때는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십자가의 귀함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넷째, 이제 십자가는 믿는 이들에게 형벌의 도구가 아니라 “구원의 도구”이기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구원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다”라는 것은 이제 죄인으로 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내 삶으로 하고, 나를 온전히 비우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신앙생활을 어렵게 만들고, 나를 힘들게 만드는 사람이나 상황들은 나에게 “십자가”라기보다는 내가 만든 장애물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쉽게 넘어설 수 있습니다. 결코 버릴 수 없는 것, 어떻게 해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장애물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는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믿음의 힘이 없기에 내가 만들어 놓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며, 그것을 내 십자가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내가 넘어서야 할 장애물들이고, 내 손과 마음에서 놓아야 할 집착들입니다. 내가 구원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때, “만들어지는 장애물들은 점점 더 줄어들고, 유혹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로부터 점차 자유로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③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짊어질 십자가는 우선은 나에게 주어진 것, 내 십자가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내 십자가는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내려놓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구원입니다. 내 구원을 내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내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갈 때, 내 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들이나 시련들은 이겨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향한 내 믿음은 그 장애물들이나 시련 앞에서 언제나 지치지 않는 힘을 내기 때문입니다. 목숨을 내 놓을 각오로 한다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더 나아가 순교자들의 후손인 우리들은 “우리가 받은 신앙이 피로써 물려받은 신앙”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시며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그분들은 굳은 믿음을 가지셨고,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코 자신의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피를 흘리며 목숨까지 내어 놓아야만 하는 큰 장애물이 있었지만 결코 자신들의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비록 현세에서는 목숨을 잃는다 해도 그것이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굳게 믿고 있던 그분들은 박해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할 차례입니다.

 

2.2. 자기 목숨을 구하는 사람들과 잃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9,24)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 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만족과 육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박해라는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기꺼이 자신의 십자가(구원)를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원을 내려놓는 사람들은 결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박해라는 장애물을 만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구원)를 기꺼이 지고 그 장애물에 당당히 맞서 나아가는 사람은 현세에서 목숨을 잃겠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순교자들의 기록을 보면서 나 또한 그렇게 신앙을 증거 하기 위해 노력하고, 기도하고, 순교성인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합시다.

 

① 순교자 원 베드로에 관한 기록 중

관장은 그를 결박하여 물을 퍼부어 추운 밤중에 밖에 내 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원 베드로는 굵은 밧줄로 묶였고 온 몸에 물을 뒤집어 썼다. 이미 그의 온 몸에 얼음이 뒤덮였다. 이 형벌 가운데에서 그는 오직 주의 수난만을 생각하였다. “나를 위하여 온 몸에 매를 맞으시고 내 구원을 위하여 가시관을 쓰신 예수여! 당신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내 몸이 얼음에 덮여 있는 것을 보십시요.” 그런 다음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다. 닭이 두 홰 째 울 때에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② 순교자 이 여삼 바오로에 관한 기록 중

그는 아직 예비신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크게 십자를 긋고, 자기 자신에게 성세를 주노라고 하며 머리에 물을 부었다. 그런 다음 눈이 동그래진 관원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저는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 여태껏 때린 모양으로 때리면 아직도 죽을 길이 아득합니다. 제가 죽기를 원하시면, 여기를 치도록 하십시오.”

그러면서 몸 옆구리의 어떤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데를 두 번 치니, 그는 그만 숨을 거두었다. 그 때 그의 나이 43세 가량이었다.

 

③ 순교자 조 용삼 베드로에 관한 기록 중

아버지와 함께 포졸들에게 잡혀서 길을 가는 동안 조 베드로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였다.

“이번에 나는 천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했으니, 나는 틀림없이 순교자가 될 것이다.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 물으니, 조용삼 베드로는

“아무도 자기 결심과 자기 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약하고 불쌍한 제가 어떻게 감히 순교하기를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관장 앞에 끌려갔는데, 첫 번 신문에서부터 아버지는 그의 어리석은 자만과 자신의 힘을 너무 믿은 데 대하여 벌을 받아 슬프게도 굴복하였다. 관장은 베드로에게 너도 배교하라고 말하니 조 베드로는 “저는 배교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아니 네 아비가 목숨을 보전하려고 하는데 너는 죽기를 원한단 말이냐?”라고 관장은 말했지만, 조 용삼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늘에는 두 임금이 없고 사람은 두 마음이 없습니다. 이제 제가 원하는 것은 다만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뿐입니다. 제게 더 이상 물어 보시는 것은 무익한 일이며, 저는 다른 말씀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는 어떻게나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였던지 하루나 이틀 후 2월 14일 옥중에서 성세를 받은 후 숨을 거두었다. 그때까지 그는 예비신자에 불과하였었다.

 

2.3. 참된 이익

나는 매일 매순간 선택을 합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하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향한 선택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9,25)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선택은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수도 있고, 멸망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멸망에 떨어지는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세상에서 이익을 얻을지언정 하느님 나라에는 멸망할 것입니다. 묘비에는 “돈 많이 벌고 죽은 사람…, 그러나 영생은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 놓는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는 목숨을 잃을지언정 하느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문에 선택을 잘 해야 하고, 선택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며, 선택한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기쁘게 실천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세상에서는 손해를 보고, 더 나아가 순교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이득이라는 것입니다.

 

2.4. 구원과 멸망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이들은 어떠한 장애물이 나타난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구원)를 내려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신앙인들은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구원)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9,26)라고 말씀하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짊어진 구원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고,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 어떤 믿음을 드리고, 신앙생활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버린다면 “심판의 날에 사람의 아들(심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굳게 믿고, 그 믿음에 대해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선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말입니다.

 

나는 주님을 믿고 있음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래서 다른 이를 앞에서 당당하게 신앙인임을 고백하고, 다른 사람들과 식사할 때 당당하게 성호경을 그으며, 도움이 필요로 하는 이들의 청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며, 핑계를 대면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생각과 말과 행위와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주님의 자녀요,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있는 주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나해 21-30주일, 연중시기(나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나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생애와 영성

    한국교회의 최초 신부님이신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1821821일 충청도 솔뫼에서 김제준 이냐시오와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출생하셨습니다. 1836711일 모방(Maubant)신부님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셔서 1836123일 마카오로 유학길에 오르신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마카오 파리 외방 전교회의 대표부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시고 1842년 조선으로 입국하기 위해 에리곤(Erigone)호의 세실(Cecille)함장의 통역사 자격으로 승선하였으나 세실 함장의 마닐라 행 결정으로 하선하여 어려차례 조선 입국을 시도하십니다.

    그해 1223, 가난한 나무꾼으로 변장하여 단독으로 입국 시도하여 국경선을 넘어 의주를 통과할 수 있었으나 위험을 느끼고 다시 돌아가십니다. 도중에 눈 위에 쓰러져 동사할 뻔 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백가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1845817, 상해 진쟈샹(金家基)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 받으시고 824일 헝탕(橫塘) 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하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831일 라파엘호에 페레올 주교, 다블뤼(Daveluy) 신부를 태우고 상해 출발하여 제주 용수리 포구에 표류하셨다가 1012일 강경(江景) 부근 황산포(黃山浦)에 상륙하셨습니다.

    184648, 은이공소에서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신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주교님의 지시로 선교사 영입을 위한 새 통로의 개척을 위해 514일 마포 출발하시어 연평도를 거쳐 백령도에 이르러 청국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지도를 보내고 순위도(巡威島)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 65, 관헌에게 체포되셨습니다.

    해주 감영으로 이송되셨다가 서울로 압송되어 포청에 갇히신 신부님께서는 스승 신부님들과 페레올 주교님, 그리고 교우들에게 하직 편지를 쓰시고 916일 군문효수형으로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192575, 비오 11세에 의해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순교자 79명과 함께 시복되셨고, 19491115, 한국 성직자들의 주보성인으로 결정되셨습니다. 그리고 198456,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한국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되셨습니다.

     

    이제 김대건 신부님의 영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영성은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서간 교우들 보아라.”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언제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생각하는 삶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천주무시지시로부터 천지 만물을 배설(配設)하시고, 그중에 우리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위자(慰藉)와 그 뜻을 생각할지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살아가면서 나를 창조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주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삶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온갖 세상 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이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배주 배은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하면 아니남만 어찌 같으리요.”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며 인생의 의미를 찾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씨를 심는 농부를 보건대, 때를 맞추어 밭을 갈고 거름을 넣고 더위에 신고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씨를 가꾸어, 밭 거둘 때에 이르러 곡식이 잘 되고 염글면, 마음에 땀낸 수고를 잊고 오히려 즐기며 춤추며 흠복할 것이요, 곡식이 염글지 아니하고 밭 거둘 때에 빈 대와 껍질만 있으면, 주인이 땀낸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에 거름 내고 들인 공부로써 그 밭을 박대하나니, 이같이 주 땅을 밭을 삼으시고 우리 사람으로 벼를 삼아, 은총으로 거름을 삼으시고 강생 구속하려 피로 우리를 물 주사, 자라고 염글도록하여 계시니, 심판 날 거두기에 이르러 은혜를 받아 염근자 되었으면 주의 의자로 천국을 누릴 것이오. 만일 염글지 못하였으면 주의 의자로서 원수가 되어 영원히 마땅한 벌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3060100배의 열매는 맺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넷째, 역경 속에서도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는 삶입니다.

    박해속에서도 용감히 싸우며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또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위주 광영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여기 있는 자 20인은 아직 주은으로 잘 지내니 설혹 죽은 후라도 너희가 그 사람들의 가족들을 부디 잊지를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움 속에서 나만 생각하는 삶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형제자매들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순교영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우리는 언제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생각하는 삶,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주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삶, 열매 맺는 삶, 역경 속에서도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로 더욱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순교하시기 전에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주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치셨습니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나의 하느님과 종교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으며 이제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후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신봉하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신부님께서는 형리에게 편하게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자세를 묻고 그의 주문대로 자세를 취해 주셨습니다. 삶의 가치를 온전히 하느님께 두고,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대로 받아들이고, 온 삶으로 고백하신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온 마음으로 본받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2. 관리자 님의 말:

    선교사들의 출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은 그대들이 원하던 날.

    그 어떤 것도 그대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네. 떠나라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형제들이여! 이 세상에 하직 인사를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먼 곳으로 떠나라.

    그리스도의 병사들이여! 세상 모든 땅이 복음을 듣도록 십자가의 깃발을 도처에 꽂아라.

    하느님께 그대들의 땀을 바쳐라.

     

    그대들은 포승으로 묶일 것이고, 그대들의 시신은 형장에 버려질 것이다.

    사나운 폭군들의 칼 아래에서 그대들의 승리를 나눠라.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죽으리라. 그대들 뒤를 곧 따라가리라.

    한 영혼을 개종시키기 위해 땅 끝까지 찾아가리라..”

     

    이 노래는선교사 파견식에서 발에 입 맞추는 예식때 후배 신학생들이 불러주던 노래입니다. 참석한 이들, 사제들과 스승, 부모, 친척들은 차례대로 앞으로 나아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파견 선교사들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또한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순교했기 때문에 파견되는 선교사를 이미 미래의 성인으로 예우를 갖추면서 경의를 표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낯선 땅으로 복음을 선포하러 떠나는 모든 선교사들은 이 노래를 들으며, 부모의 입맞춤을 받고 파견되셨습니다. 그리고 양떼를 떠나지 않고,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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