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해 연중 제 30주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리코 소경의 치유

1. 말씀읽기:마르10,46-52

2. 말씀연구

한 소경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소경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이 있다면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직접 바라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그런데 어느 날 그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소경의 처지가 그러하듯이 그는 거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청하는 이의 청을 물리치지 않으시는 예수님. 제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2.1. 자비를 청하는 소경 바르티매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에 예리코에 들르십니다. 그런데 예리코는 헤로데가 쾌락의 도시로 만든 곳으로서 많은 저택이 즐비하고 극장과 경마장, 그리고 수영장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환락의 도시 안에 고통 받고 있는 한 소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장님의 소원이 다 그렇듯이 바르티매오의 소원도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였기에 사람들의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통해 예수님에 관한 소식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병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나병환자를 치유해 주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시는 분. 그리고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벙어리들이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실 수 있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소식을 들었을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으로써 생겨납니다. 그렇게 바르티매오도 믿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기쁜 소식이 주어집니다. 그날도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10,47)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리코를 떠나고 계신 중이십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소경에게는 어쩌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 앞을 지나고 계신 분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마르10,46)라는 말을 듣고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마르10,48) 그는 오히려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10,48)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를 조용히 시키려고 하였지만 그는 더 큰 소리로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습니다.

 

② 바르티매오의 처지에 관심없는 사람들

많은 이들이 바르티매오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 이유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을 들으면서 그들이 불안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에 메시아가 나타났다면 백성들은 당연히 로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폭동세력으로 바뀔 것이고, 로마 군인들은 당연히 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것입니다. 또한 “다윗의 자손”은 언제든지 폭동세력의 핵심으로 급부상할 수 있기에 점령자들은 “다윗의 자손과 주변 인물들”을 제거하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점령군의 무자비함을 알고 있는 이들은 위협을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바르티매오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또한 백성의 지도층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다는 것을 “율법도 모르는 하찮은 존재들”의 외침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눈에 가시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없애버리려고 작당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눈먼 거지의 외침에 귀가 따가워 귀찮아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이들이 바르티매오의 불쌍한 처지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이 멀었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구걸로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바르티매오의 고통은 그들의 고통이 아니었기에 바르티매오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내 아이가 눈이 멀었다면 더 크게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제 아이를 낫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눈 뜬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지 못하지만 보지 못하는 소경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도 눈 뜬 장님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리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임을 고백할 때, 작은 것 하나에서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느낄 수 있는 눈을 갖게 될 것입니다.

 

③ 예수님의 부르심에 달려가는 바르티매오

바르티매오의 자비를 청하는 소리에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그를 불러오너라.”(마르10,49)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마르10,49)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바르티매오는 너무 기쁜 나머지 “겉옷을 벗어 던지고”(마르10,50) 예수님께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티매오에게 있어서 겉옷은 특별한 것입니다. 앉아서 구걸을 하는 거지에게 겉옷은 추위를 견디게 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입니다. 아마도 이제 그는 눈을 뜨게 될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겉옷을 벗어 던져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그는 눈을 뜰 것이고, 그러면 더 이상 구걸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이 담겨 있는 행동이 아닐까요?

 

나도 버릴 것은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예전의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내 안에서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나는 새로운 신분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품위에 맞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받아들일 것은 기쁘게 받아들이고, 해야 하는 것들은 즐겁게 행해야 합니다.

 

④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10,51) 이것은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바르티매오는 먹어서 없어질 것을 요구하지도 않고, 가지고 있어도 도움이 안 되는 그런 것들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청합니다. 바르티매오는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10,46)라고 청합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그것을 청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청한 것입니다.

 

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진 것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10,52)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이고, 그 순간 바르티매오를 보았을 것입니다.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생겨라”하니 “생겼다”는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고,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⑥ 예수님안에서 기뻐하는 바르티매오

눈을 뜨게 된 바르티매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주님과 함께 머물고 싶었고, 그 기쁨은 주님을 따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주님만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주님만 눈에 들어오니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복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지금 주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믿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갈등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선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고, 그래야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바르티매오처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굳게 믿읍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힘차게 걸어 나갑시다. 행복한 이 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갑시다.

 

3.나눔 및 묵상

① 오늘 말씀 중에서 나에게 기쁨으로 다가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왜 그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② 소경의 주변에 있는 이들은 소경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만일 내가 그 소경의 옆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그리고 내 주변의 병자들에게 나는 어떤 관심을 기울이고 이을까요?

 

③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자신을 치유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 믿음대로 치유를 받았습니다. 만일 내가 바르티매오였다면, 그래서 내 믿음대로 될 것이라면 나는 과연 치유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혹시 내 마음 안에는 “설마 예수님이 나를 고치실 수 있겠어?”라는 의심이 조금도 없었을까요?

 

4. 실천사항

① 굳은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매달리기

② 다른 이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관심 갖기

③ 주님과 함께 기쁨의 길을 걷기

 

5. 말씀으로 기도하기

이 글은 카테고리: jubonara, 나해 21-30주일, 연중시기(나해), 주보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나해 연중 제 30주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에 1개의 응답

  1. 관리자 님의 말: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10,46)

    한 소경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소경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이 있다면 눈을 뜨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창조하신 모든 것들을 직접 바라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그런데 어느 날 그 앞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소경의 처지가 그러하듯이 그는 거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청하는 이의 청을 물리치지 않으시는 예수님. 제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10,51)

    바르티매오는 가장 간절한 것을 청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10,46)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의 간절한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진 것을 보셨습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10,52)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르티매오를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생겨라하니 생겼다는 말씀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고,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었다면 예수님께서 바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눈을 뜨게 된 바르티매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주님과 함께 머물고 싶었고, 그 기쁨은 주님을 따르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주님만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주님만 눈에 들어오니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행복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지금 주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믿는 것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믿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갈등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선택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고, 그래야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바르티매오처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굳게 믿읍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을 힘차게 걸어 나갑시다. 행복한 이 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갑시다.

  2. 관리자 님의 말: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십니까?

    첫째,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5-37)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본성을 취하신 일을 강생또는 육화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바치시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강생구속(降生救贖)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나이다.”

     

    한 처음부터 계셨던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강생하셨고,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요한1,14-15)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에 의해 쫓겨나면서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외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백인대장의 입에서 고백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그리고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마르15,37-39)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크신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 주셨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누구십니까?”하고 누군가가 질문을 한다면 먼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3. 관리자 님의 말:

    예수님께서는 누구십니까?

    둘째,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말로서 메시아또는 구세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36)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그 중의 하나가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 하고 말하였습니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언자, 사제, 왕들이 즉위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행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시고, 대사제 중의 대사제이시며, 왕 중 왕으로서 하느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고, 인류 구원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신 구세주’(救世主)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셨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16,13) 하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태16,14) 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이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공통된 생각은 특별하신 분임에는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비롯하여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라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습니다. 당시 군중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바로 정치적, 군사적으로 힘이 있는 메시아로써, 힘으로 로마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주실 메시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명을 부여받고 세상에 오신 메시아가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세상 모든 이들을 구원하실 메시아이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이 되신 예수님께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하러 오셨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마태26,42)

    이런 유약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영웅적인 모습으로 인간을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아니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생활 하면서 힘들고 지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친다 할지라도 힘을 내라고 모범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몸소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 큰 희생제사를 통하여 세상을 용서하시고 새로운 계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닫힌 하늘의 문을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희생제사를 완성하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습니다.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더 이상 성전과 사제들의 직무가 이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제들의 사제직은 아무 소용이 없는 사제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사용되는 성전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전 휘장은 거룩함과 속된 것을 가로막아 거룩함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성전 휘장이 두 갈래로 찢어졌기에 가로막은 것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 휘장은 죄 많은 인간이 지극히 거룩하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상기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그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를 통하여 찢어짐으로써 모든 이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해 주셨기에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주님을 믿는 이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이제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

  4. 관리자 님의 말: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셋째,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다른 칭호는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구원자”, “사람의 아들등입니다.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시어 다시 하느님께로 귀환하는 분으로서의 정체가 이 칭호로써 표현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39)

    하느님의 어린양은 예언자들이 예고한 하느님의 종을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하는 존재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죄의 노예살이에서 끄집어내어 자유로운 삶으로 인도하러 오셨습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고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려 몸소 인간이 되셨고, 당신 몸을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기도하고자 할 때 자신들이 귀중히 여기는 것을 사제에게 가져갔습니다. 대부분이 양을 치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은 대개 양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면 사제는 양을 제단으로 끌고 가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양을 제단 위에 올렸습니다. 양을 봉헌한 이들은 그 양을 바라보며, “주님, 이 양을 저와 같이 여기소서.”하며 기도하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양을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제단 위에 올려지셨고, 지극한 괴로움에 짓눌리셨으며, 마침내 아버지의 손에 맡겨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단 위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높이 들어 올려진 우리의 새로운 어린양이십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1,29)라고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영성체 직전에 사제가 성체를 쪼갤 때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평화를 주소서.”라고 노래합니다. 모든 이가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 영성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안에 하나가 됩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이 세상에 강생하셨고, 당신 몸을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 어린양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어 당신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5. 관리자 님의 말: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영예로운 호칭입니다. 이러한 호칭으로 불리신 분은 요셉성인이시고, 다른 유일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가장 훌륭한 왕은 다윗이었고, 유다인들은 다윗의 자손 중에 한 사람이 일어나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을 위로하고, 다시금 자유와 평화를 주시는 메시아가 오실 것임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약속된 다윗의 후손이심을 족보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1,1-16)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또 자비를 청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씁니다. 예리코의 소경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르며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는 이스라엘에 다윗의 자손이 나타났다고 하면 즉각 군대가 출동하여 토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이십니다. 그리고 야곱의 집안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 위에 하느님의 자비와 다스림이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즉 메시아가 다스릴 대상이 야곱의 피를 받은 자손 뿐 아니라, 히브리인, 이방인을 불문하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맺어진 교회, 나아가 온 인류를 말하고,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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