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오순절이 되어 신자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기도하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오시기 전까지,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골방에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들에게 불길처럼 임하시어 그들을 변화시켰습니다. 가장 먼저 변화된 것은 바로 당당함입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나를 잡으러 올까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당당하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 대축일은 교회의 생일이라고 합니다. 교회의 탄생일이라고 합니다.
또한 더욱 놀라운 것은 사도들의 말이 모두 자기네 말로 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가장 큰 은사는 바로 굳건히 나의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는 힘과 공동체를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가는 나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기에 당당하게 신앙생활을 합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찾지 않고, 하느님의 자녀들을 바라봅니다. 계산하지 않고,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공동체와 하나되어 살아갑니다.
1.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20,21)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파견 받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간직하고, 그 평화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불평과 불만 속에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면 기쁨이 솟아나야 하고, 예수님의 일을 하면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통 근심 걱정과 불만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파견 받은 제자들은 섬기기 위해서 겸손해 져야 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그 기쁨을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용서하는 삶을 살기 위해 먼저 용서받았음을 깊이 인식하고 용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갈 때,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예수님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파견 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성령을 받아라(요한20,2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요한20,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넣는 모습은 마치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어 내시고 숨을 불어 넣으시어 생명을 주시는 것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도들은 이제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굳게 닫고 숨어 있던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나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내려오셨을 때 제자들이 당당하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것은 그들이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했기에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는 바로 내 욕심을 버리게 만들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힘입니다. 기도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비우게 만들고, 주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채울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성령께서는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변합니다.
① 하느님을 공경하고,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관심을 갖는 슬기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② 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통달하여 그대로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변화됩니다.
③ 선과 악을 구분하여 구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문제에 대해 의견이 있는, 생각이 있는, 그래서 어떻게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분별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④ 성령께서 주시는 신앙의 힘으로 죄악과 악마를 거슬러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는 순교까지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신앙을 굳세게(굳셈) 증거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⑤ 교리와 성경의 뜻을 잘 알아듣는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 믿어야 하는 것과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생겨납니다.
⑥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모시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온 마음으로 신뢰하며, 하느님께 효성을 다하는(효경)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⑦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혜의 시초이니 하느님을 경외(공경하면서 두려워 함)하는 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다듬게 됩니다. 두려워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주님께 큰 기쁨과 즐거움을 드리고,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지 않게 노력하게 됩니다.
이렇게 슬기와 통달함과 의견과 굳셈과 지식과 효경과 두려워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참된 신앙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삶으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내가 받은 은사들을 더욱 풍요롭게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여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 평화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얻으신 것입니다. 그 평화를 주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그리고 파견 받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성령 안에서 살아 가야만이 용서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용서의 삶이 나 자신도 구하고, 상대방도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온전히 나를 내어 드리는 삶을 통해 주님께서 주신 평화를 온 세상에 전하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성령세례를 매 순간 체험하는 그리스도인
성령 쇄신 운동은 신앙 쇄신을 위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새로 성사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세성사 때 이미 받은 은총을 새롭고 분명한 방법으로 확실히, 그리고 의식적으로 체험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마 8,15)라고 부르며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등 성령의 열매(갈라 5,22)를 맺게 되는 일과 주 예수님을 증거하는 힘과, 은사적 선물(1코린 2,4-11)등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성령쇄신에서 “성령세례”란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신학적 의미로서 교회의 각 구성원은 모두 입문성사를 받았기 때문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체험적 의미입니다. 이것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입문성사) 때 받은 성령이 의식적으로 체험되는 계기 또는 성장과정을 가리킵니다. 가톨릭 성령 쇄신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성령세례를 말할 때는 일반적으로 의식적 체험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체험적 의미입니다. 안수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자신이 누구인지 자각하고, 성령께서 자신을 이끄실 수 있도록 내어 드리며, 온전히 이끄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성령께서는 각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십니다. 그러나 그 은사는 각 개인의 영적인 그릇의 크기만큼, 성령께서 원하시는 만큼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각 개인이 느끼게 될 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보지 않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보지 않고 공동체를 바라보며,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노고를 마다하지 않게 됩니다.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기를 주저하지 않게 됩니다.
성령강림 후 베드로 사도는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들과 또 멀리 있는 모든 이들, 곧 주 우리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사도2,38-39)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 코르넬리우스와의 만남이 성령의 이끄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10,34-35)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펼쳐져 있음을 깨닫고 예수님에 대해서 그들에게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그 모든 일의 증인임을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이들은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을 듣고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할 때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습니다. 이들은 베드로 사도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굳게 믿으며, 믿는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 감격하며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던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며, 하느님을 찬송하였던 것입니다.
청중들에게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린 이유는 베드로 사도의 말이 옳음을 성령께서 보증해 주시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차별대우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 다는 것을 그 자리에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렸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의 구원을 미리부터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베드로 사도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습니다.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사도10,47)
성령쇄신이 시작된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성령세례란 말이 성령쇄신 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한편, 이 말의 통용과 성경적 기원에 있어서는 약간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성령세례”라고 하지 않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음은 은사적인 현시(顯示)들과 이상한 언어와 예언을 동반하였습니다.
성령세례는 준비과정을 거쳐 성령안수를 받음으로써 성령세례를 받게 됩니다. 성령안수를 받음으로써 체험하게 되는 결과는 다양합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식, 하느님이 곁에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현존의식, 기도의 성장, 성경봉독의 열망 및 깊은 묵상, 치유와 예언 등의 갖가지 은사체험, 교우들과의 일체감, 이웃 간에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게 되는 힘의 쇄신, 선교와 봉사에 대한 열의와 용기 및 그 능력 등입니다.
성령의 체험과 자기체험(自己體驗)
성령께서는 원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현존의 체험은 그 사람의 자기체험 속으로 들어옵니다. 이 때 자기체험은 지워지지 않고 승화됩니다. 자기체험이 정지되고 성령체험이 시작되는 지점을 엄밀하게 결정짓기란 불가능합니다. 성령체험은 이렇게 친밀하게 자기체험 속으로 들어옵니다. 자기체험과 성령체험은 분리할 수 없지만, 또한 양자를 혼돈(混沌)해서도 안 됩니다. 성령쇄신은 성령의 어떤 선물들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어떤 새로운 상태를 표현하기는 하지만, 성령들을 식별할 수 있는 성령쇄신 특유의 기준은 없습니다. 봉사적 선물들이 종교적 체험에 따르는 한, 그들에 대한 식별 기준은 전통적 신비신학에서 찾아야 합니다.
일차적으로 종교적 체험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들에게 사랑을 드러내시고,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한 체험은 주님을 갈망하게 만들며 주님 안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악령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영적지도자로부터 분별 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감정이 표출됩니다. 그런데 좋은 감정들이 모두 성령께로부터 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충동과 순간의 열정이 성령의 역사하심이라고 생각하고, 그 모든 감정이 성령의 이끄심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최면에 걸린 것을 마치 영적으로 깊이 있는 단계, 성덕에 진보한 사람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령께서는 열매를 맺도록 하십니다. 진실함과 항구함의 열매는 성령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회적인 충동이나 그 순간으로 끝난 체험들은 아무리 황홀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성령께로부터 오지 않을 확률이 많습니다. 열매를 맺지 않고, 공동체와 일치하지 않으며, 자기 중심적이거나 복음선포 없는 체험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잘못된 신앙자세를 알아내는 방법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팎에 예수님 신앙과는 아주 다른 잘못된 신앙에 현혹되고, 전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하느님의 교회가 제 역할을 못할수록 이 같은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입니다.
첫째, 언제 세상이 끝마칠 것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니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입만 떼면 하느님, 성령, 성모 마리아를 들먹이고 치유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 행동은 가족관계, 이웃관계를 해치고, 심지어 자신의 가정을 외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셋째, 개인체험(마음의 상처, 보상심리 등이 하느님 이름으로 투사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성당과 인연이 없으면 무당의 잡귀잡신의 이름으로 투사됩니다)을 덮어놓고 하느님 계시라고 믿고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넷째,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의나 부정, 인권탄압 등을 외면하고, 개인의 깊은 상처, 죄책감등을 자극하여 헌금이나 금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시생 부모를 상대로,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을 상대로, 부모와 화해하지 못하고 부모를 먼저 보낸 형제자매들을 상대로 그들의 아픔을 자극합니다. 이러한 자극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응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또 참된 자유에로 부르시는 주님보다 연옥, 지옥, 형벌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불안, 공포의 신앙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다섯째, 복음정신인 ‘가난의 삶’을 싫어하고, 하느님, 성령, 성모의 이름으로 돈을 모아 거창한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개 이들은 하느님 계시로 이 사업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권력자나 부자와 유착하여 친밀을 유지하고 자신의 사업을 펼쳐나갑니다.
여섯째, 예수님의 삶, 죽음, 부활엔 별 관심이 없고, 성령, 성모마리아에 대한 개인주의적 신심만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곱째,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웃과 세상을 위한 희생제사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고통을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라고 우기며 자신이 예수님을 대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성령쇄신의 잘못된 열성들의 특징도 있습니다.
첫째, 미사보다는 성령기도회에 더 관심을 갖는 것.
둘째, 다른 사람의 상담을 듣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하거나 비밀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 더 나아가 상대방의 상담을 듣고 물건을 사도록 권고하거나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행위.
셋째, 미사예물을 소원성취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미사예물을 강조하고, 상대방의 아픈 상처를 다시 건드려서 그것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라고 강요하는 것.
넷째, 신병과 마귀들림을 구별하지 못하고 치유하려는 자세.
다섯째, 심령기도를 하면서 무당처럼 말을 하는 것. 예를 들면 심령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성모상 앞에 있는 조화를 뽑아가지고 “성모님은 조화를 안 좋아해”라며 버리는 행위, 또는 상대방의 앞날을 예언하면서 길흉을 점쳐주는 행위 등.
올바른 신앙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참된 열성을 가지고 기도하며 열매를 맺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갑시다.
영적 지도자의 자세
교회 안에는 은사가 풍부합니다. 그 은사들은 교회 공동체를 풍요롭게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만 그것은 성령의 인도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더러 ‘주님, 주님’한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7,21)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언자나 교사들이 모두 다 자동적으로 진정한 예언자와 교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입에 올리면서 얼마나 많은 이단들이 퍼져 나가고 있습니까?
“그들의(은사들의) 진정성과 올바른 행사에 대한 판단은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속한다. 성령을 끄지 않고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좋은 것을 보존하는 것은 그들의 특별한 권한에 속한다.”(교의헌장, 12항).
영적지도자는 항상 자신에게 대화를 청해오는 사람에게 어느 면으로든 영향을 미치는데, 그 영향이 건설적일 수도 있고, 혹은 파괴적일 수도 있으며, 성숙을 향한 자극이 될 수도 있고, 혹은 그 성숙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지도자는 훌륭한 말씀의 씨를 뿌리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농사꾼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영적지도자는 말씀대로 살아야 하며, 땅(피지도자)의 성격도 알아야 하고 뿌릴 씨앗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올바른 영적지도를 하기 위해 먼저 영적지도자는 내담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또한 내담자는 영적지도자에게 자신의 상태를 정확하게 알려야 합니다. 영적지도자는 대화에 앞서 내담자의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개인의 심리, 사회적 수준 혹은 발전을 알아야 하며, 영적지도를 청하는 그 개인이 가진 요구 또는 기대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영적지도자인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낼 수 있는 자세와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지도는 어떤 종류의 주제에 관한 것이거나 서로의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전하거나, 혹은 서로 간에 우정을 깊이 있게 하는 데 목적을 둔 만남이 아닙니다. 또한 상대를 열등한 상태로 있도록 은연 중 강요하거나, 개인의 죄책감을 인정하게 하는 그런 관계도 아닙니다. 영적지도는 지도자와 내담자와의 하나의 관계로서 이것을 통해 내담자가 자신에 대한 지식을 깊이 하고, 또 하느님과의 성숙된 관계를 발전시켜가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열망하는 한 신자가 성성(聖性)에 이르기 위해, 자신을 비추어 주고 지지해 주는 영적 도움을 받으며 하느님의 뜻을 식별할 수 있도록 지도를 받는다면 이것을 바로 영적지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적지도자가 줄 수 있는 도움은 내담자로 하여금 매일의 사건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쉽게 읽어내고 듣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주도권을 쥐고 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계획을 알고 가능한 한 더 적절한 방식으로 협력하는 것이 영적지도자의 임무입니다.
성령쇄신에 심취된 내담자인 경우 그의 기도의 단계를 정확히 짚어 주고, 그가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은사를 받아서 치유나 말씀의 봉사를 하고 있을 경우는 그가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 하며, 그가 받은 영(靈)을 분별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내담자의 평판이나 신심 등을 고려하여 적절히 지도하여야 합니다.
이상한 언어
심령기도(心靈祈禱)는 초대교회에서도 행해졌고, 오늘날 성령쇄신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한 언어 은사의 핵심적 기능은 기도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상한 언어는 찬양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44 베드로가 이러한 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성령께서 내리셨다. 45 베드로와 함께 왔던 할례 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이 다른 민족 사람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면서 하느님을 찬송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47 “우리처럼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48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였다.”(사도10,44-46)
대부분의 은사는 성령쇄신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언어의 은사만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상한 언어의 은사를 기도의 범위 안에서 이해하지 않는 한, 성령쇄신 밖에서 시도하는 이상한 언어 은사의 평가는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기도의 은사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차원에서 기도를 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은사는 기도은사 안에 표현된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은사를 존중하는 것은 기도를 더 잘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며, 또 사실 이 이상한 언어의 은사는 바로 더 좋은 기도를 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성령쇄신은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이상한 언어의 기도를 실천하도록 인도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지 않습니다. 또한 심령기도의 은사를 받지 않은 것이 성령쇄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는 이상한 언어로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의 단계를 정확히 분별해 주고 그것이 자신의 교만에서 나오거나 마귀로부터 나올 경우는 그것을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심령기도의 은사를 받으셨습니까?
심령기도에 대한 생각
① 받았다 (63%) ② 안 받았다(37%)
① 좋다고 본다(68%)
② 모르겠다(21%)
③ 좋지 않다(11%)
사도행전에서는 성령강림 때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 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습니다(사도2,1-3).
성령께서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사도2,4).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습니다.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습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참조: 사도2,5-8)
제자들은 그 동안에는 두려워서 말 못했던 것들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더러는 “새 포도주에 취했군.” 하며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못 알아들으니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이끄심대로 말하였고, 군중은 알아들었습니다. 사도들은 두려움을 버리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였는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각자 자기네 말로 들었습니다. 그러니 사도들은 이상한 언어로 말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알아듣는 말로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니 예언 활동인 것입니다.
성령강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고 행동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이것을 증거 했던 것처럼 신앙인들도 세상의 많은 유혹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과 함께 하는 삶인 것이고, 이것이 성령의 은사인 것입니다.
고요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우리는 열왕기를 읽으면서 엘리야 예언자와 바알 예언자 450명과의 대결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1열왕18,16-40). 바알의 예언자들이 신접한 모습으로 날뛰었지만 바알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황소를 데려다가 준비해 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바알이시여, 저희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절뚝거리며 자기들이 만든 제단을 돌았습니다. 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놀리며 말하였습니다. “큰 소리로 불러 보시오. 바알은 신이지 않소. 다른 볼일을 보고 있는지, 자리를 비우거나 여행을 떠났는지, 아니면 잠이 들어 깨워야 할지 모르지 않소?” 그러자 그들은 더 큰 소리로 부르며, 자기들의 관습에 따라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들 몸을 찔러 댔습니다. 한낮이 지나 곡식 제물을 바칠 때가 되기까지 그들은 예언 황홀경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대답도 응답도 없었다. 바알은 헛된 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기도하였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주님,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당신의 말씀에 따라 제가 이 모든 일을 하였음을 오늘 저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37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대답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 이 백성이 당신이야말로 하느님이시며, 바로 당신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셨음을 알게 해 주십시오.”(1열왕18,36-37)
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번제물과 장작과 돌과 먼지를 삼켜 버리고 도랑에 있던 물도 핥아 버렸습니다.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부르짖었습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십니다.”(1열왕18,39)
그리고 우리는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났을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제벨을 피해 엘리야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거기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그곳에서 밤을 지내는데,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습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엘리야는 “저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당신의 계약을 저버리고 당신의 제단들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저 혼자 남았는데, 저들은 제 목숨마저 없애려고 저를 찾고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와서 산 위, 주님 앞에 서라.”(1열왕19,11)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 어귀로 나와 섰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엘리야야,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열왕19,13)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부드러운 소리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성령쇄신
교회의 역사 안에는 다양한 영성과 쇄신 운동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성령께서는 자연스럽게 그러한 열정들이 불타오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운동은 교회의 쇄신 운동으로 성령께서 이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교회를 쇄신시키기 위해 이끄신다 하여 성령쇄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쇄신의 목적은 성령을 뜨겁게 체험함으로써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윤리와 종교적 가치가 무너지는 현 사회 안에서 유혹으로 다가오는 세상의 몸짓들 속에서도 매순간 성령과 함께 함으로써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내 삶이 그리스도화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쇄신을 통하여 각 개인l 나아갈 방향 중의 하나는 공동체를 지향한 움직임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전하고 봉사할 때 그 공동체는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신앙의 성장과 성숙은 선교를 향한 열망으로 불타오르게 됩니다. 제자들이 두려움 속에서 골방에 숨어 지내다고 성령을 받고 용감하게 사람들에게 나아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 것처럼, 성령쇄신을 통해 좀 더 확고한 신앙은 내 안에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에게 하느님을 전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① 성령쇄신과 은사쇄신
가톨릭에서의 성령운동은 ‘성령쇄신’이라고 부르는데 성령안에서의 쇄신(刷新)이란 말은 성령께서 쇄신을 역사(役事)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즉 성령의 능력으로 쇄신이 일어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쇄신’을 ‘성령쇄신 운동’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운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인간이 조직하고 노력하는 결과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운동’이라는 용어를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은사는 교회의 발전과 쇄신을 위해 유용한 은총입니다. 성령께 초대교회처럼 은사를 청하면서 개방했을 때 사람들은 은사를 체험하면서 기도가 쇄신함을 보게 되었고 초대교회에만 있었다고 생각되었던 예언, 이상한 언어, 치유의 은사들까지 경험하면서 은사 현상이 쇄신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성령쇄신은 ‘은사쇄신’(Carismatic Renewal)이라고도 합니다.
쇄신이라는 것은 묵은 것이나 폐단을 없애고 새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전교구에서 경감룡 요셉 주교님은 “오소서! 성령님!”하고 인사를 하면 “새로 나게 하소서!”하고 온 신자들이 답을 하게 하셨습니다.
은사쇄신이라는 용어는 은사들을 교회생활 전체에 통합시켜 준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쇄신에 직접 투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은사적”이라는 단어가 특별한 선물만을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또한 은사쇄신이라는 용어는 교회 안에서의 어떤 특별한 운동에 속한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하므로 이 용어를 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우기 어떤 나라에서는 이 용어대신에 ‘영적쇄신’(The Spiritual Renewal) 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영적 운동과 혼돈을 줄 뿐 아니라 ‘영적 쇄신’이 과연 이 운동 하나 뿐인가라는 반감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은사쇄신’ 또는 ‘영적쇄신’ 이라는 말 대신에 ‘성령쇄신’이라는 말을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② 성령쇄신의 효과 중 하나는 타인에게 대한 증거와 봉사
성령쇄신은 개인적으로 또는 공동체적으로 초대교회 때의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하는 것에 그 본질적 요소가 있습니다. 신자들이 입문성사(세례, 견진 성사) 때 받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능력을 각자가 “의식적으로 체험한다.”는 것을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성령쇄신은 효과 중 하나는 타인에게 대한 증거와 봉사입니다. 그러므로 체험은 체험 자체에 목표를 두지 않으며, 개인의 풍요를 유일한 목적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 내향적 의미가 전무한 것처럼 개인적 성격을 공동체적 특성과 대립시키지도 않습니다.
또한 성령쇄신은 교회의 쇄신이라는 목적을 지향하고 있으면서, 신자들에게는 단 한 번의 체험에 그치지 않고,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각자의 생활을 전진시켜 계속적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쇄신은 ‘입문성사의 쇄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