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1. 말씀읽기: 루카 5,17-26
2. 말씀연구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에 눕혀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그렇게 환자를 예수님께로 내려 보냈는데…,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바로 예수님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7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율법학자들은 언제나 구약성서와 조상전통을 근거로 율법을 가르친 데 반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과 양상이 매우 새롭고 힘이 있었다. 또한 구마와 치유가 뒷받침 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언제나 권위와 힘이 있었습니다.
율법학자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원전 450년경 예루살렘에서 활약한 에즈라를 율법학자의 시조로 꼽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은 바리사이파에 속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언제나 예수님의 반대자로 등장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 가운데 힐렐학파와 샴마이 학파가 양대 산맥을 이루고 맞섰으나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부터는 힐렐 학파가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주로 규범(히브리어로 할라카)과 사화(하가다)를 익히고 전하기를 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전설을 학당이나 회당에서 가르쳤습니다.
18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중풍 걸린 사람의 가족인지 아니면 친구들인지 모르겠지만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예수님께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만져주시거나, 한 말씀만 하시면 병이 낫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19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
지붕을 벗긴다는 것은 우리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나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를 감안하면 납득이 갑니다. 흔히 방 한 칸에 흙벽을 쳤는데 방바닥은 널찍하지만 흙벽은 올라갈수록 좁아져서 지붕 면적이래야 두 평방미터 남짓했습니다. 밑은 넓고 위는 보은 나지막한 굴뚝같은 집입니다. 지붕에는 흔히 나무막대기를 걸쳐놓고 나뭇가지나 갈대 같은 것을 깔았습니다. 그러니 쉽게 벗길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옥외에는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루카복음의 독자는 그리스 사람들이었기에 루카복음사가는 “지붕을 벗기고”(마르2,4)를 “기와를 벗겨내고”로 고쳤습니다. 로마식, 그리스식 가옥에는 기와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중풍병자를 내려 보내는 사람들의 믿음도 대단합니다. 내 믿음 또한 그런 믿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 믿음을 보이고,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해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삶. 그 삶이 내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20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병자의 치유와 죄의 용서는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유대의 사고방식에는 인과적 연관성이 있는데, 그들은 위중한 병을 “죄의 결과”로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말씀을 하실 때,맨 먼저 악의 보다 깊은 뿌리가 제거되는 것입니다. 육체적인 질환으로부터의 해방은 치유의 완성을 의미하며, 동시에 인간의 죄가 용서받는다는 증거를 의미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예수님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는 유대의 사고방식, 즉 “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에로”라는 법칙에서 나온 결론에 따라 시도됩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중풍병자를 고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다면 죄의 용서는 말할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만세!” 하고 외쳐야 하는데 한편에서는 불신의 목소리가 마음속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2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잘못된 생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들이 학수고대한 메시아나 인자조차 사죄를 선언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죄인들을 멸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는 범죄 하지 않도록 선도할 임무를 띠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잘못된 생각은 편견을 만들고, 편협하게 생각하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에서 결국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22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읽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주시겠는가?
23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둘 다 쉽지 않습니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의 자비에서 오는 것이니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고, 기적적 치유는 하느님의 전능에서 오는 것이니 그것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결과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면에서 보면, 중풍 병자에게 걸으라고 하기보다는 “네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편이 훨씬 쉽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가서 그 말씀대로 죄의 용서를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명령을 했다면, 그 명령자는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4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에 걸린 이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하시면서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죄를 용서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거라”하는 이 두 가지 말을 같은 사람, 즉 예수님께서 하셨기에 체험할 수 있는 중풍의 치유가 이루어졌다면 체험할 수 없는 죄의 용서도 증명되는 것입니다.
25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 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병자는 일어나 곧 침상을 들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모든 이들이 넋을 잃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26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두려움에 차서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의 청도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어느 병자의 청도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너무도 자비로우셔서, 너무도 사랑이 많으셔서 불쌍한 이들, 고통당하는 이들의 청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기한 것을 보았다고 감탄만 하지 말고 나도 그렇게 예수님께 청해서 구원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3. 나눔 및 묵상
1.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행동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남을 치유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남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2. 말씀 한마디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집으로 갔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예수님 앞에 까지 데려다 준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려다 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습니까?

3. 나눔 및 묵상
1.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행동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남을 치유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남의 아픔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욕심많게 말도 잘하고 싶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도 되고 싶네요.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듯이 저의 말 한마디가
아프고 춥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남의 아픔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주님께 자비를 청해야겠습니다.
2. 말씀 한마디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일어나 요를 걷어들고
집으로 갔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중요합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그를 예수님 앞에 까지 데려다 준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려다 주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습니까?
함께 주님을 찬미하는 형제자매라고 하면서 진정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예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였습니다. 주위의 형제 자매나 그들의 자녀들이 아프다는
소식을 접하면 바로 이름과 세례명을 물어 보아’ 화살기도와 병자들을 위한 기도’를 해
주는 것으로 저의 할일을 다 한 듯 안일한 삶에 젖어 살아온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속의 형제들처럼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 그들의 아픔이
곧 나와 내 형제자매들의 아픔이라 여길 수 있도록, 제 안에 뿌리내린 사리사욕 대신에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 채워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