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자



1. 말씀읽기: 마태21,33-43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마르 12,1-12 ; 루카 20,9-19)

2.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악의를 품고 있는 유다인들을 향하여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포도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종들은 예언자들이며, 아들은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포도밭 주인을 인정하지 않고(하느님을 경배하지 않고), 도조를 내기 싫어하는(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는 것을 싫어하는) 유다인들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죽음에 넘기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아들의 순명과 수난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들의 불충을 바라보면서 내 모습을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소작인인지를…,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어떤 밭 임자는 바로 하느님이시고, 포도밭은 세상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인간들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유의지”라는 크나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제 알아서 하기를 바라십니다. 물론 책임은 내가져야 합니다.

“확”은 현재 팔레스티나의 밭에서는 볼 수 없으나, 옛날의 것으로써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대개는 포도송이를 짓이기는 평평한 돌에 구멍을 낸 것이며 그 곳에서 포도즙이 나오고, 그 밑에 그릇을 놓아 흘러나오는 포도즙을 받게 되어 있었습니다. “망대”는 언덕위에 석조로 만든 집으로 지붕은 밀짚으로 덮었고 거기에 밭지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지주는 스스로 농사를 짓지 않고 소작인에게 밭을 맡겼습니다. 소작의 계약은 각 지방의 관습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릅니다. 소작인은 수확의 3분의 1, 혹은 반, 혹은 4분의 1을 지주에게 바쳤습니다. 지불은 거둔 농작물로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포도 철은 바로 결실을 맺는 시기이고, 주인께 감사를 드려야 하는 시기입니다. 주인은 당연히 받을 권한이 있고, 소작인들은 당연히 소작료를 바칠 의무가 있습니다. 종들은 몇 세기를 지나는 동안에 차례차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진 예언자들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도조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 “억만금”을 바치라는 말씀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적어도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감사하고, 그것을 혼자만 갖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바쳐야 할 도조는 바로 그것입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 말씀은 이렇게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도조로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했는데 사람들이 그 도조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을 보내어 도조(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찬미와 감사)를 드리게 했는데 오히려 종(예언자들)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아들)까지 보내신 것입니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소작인들이 종에 대한 태도는 상식 밖의 일입니다. 이 세상에 지주의 종을 이처럼 잔인하게 다룰 소작인은 없습니다(예전에 공산당들이 그랬던가요?). 그런데 종들을 거느리고 있는 주인이라면 당연히 못된 종들을 응징할 수 있는 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종들이 이스라엘 예언자들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주인이 복수를 안 하셨는지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기회를 주셨습니다. 돌아오기만을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소작인들(나)이 예언자들을 박해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들(예언자들)도 참 불쌍했던 것 같습니다. 박해를 받을 것을 알면서도 하느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니 가서 전하는 그들의 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어떻습니까? 신자들한테 가기 귀찮아서 주저앉아 있고, 누가 성당에 나오지 않아도 관심도 없고…, 그래도 돌로 쳐 죽이지는 않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이 종(예언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힘내서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돌 맞을 짓을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본당 신자들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는 금방 드러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지, 신자들을 위해서 하는지, 열심히 하는지, 대충 하는지.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이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아들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종들의 운명을 알고 있는 주인은 아들까지도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에게는 자기 아들의 목숨보다도 밭의 도조가 더 중요했을까요? 아들보다도 밭에다 더 애정을 쏟았던 것일까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바라본다면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느님(주인)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도 알 수 있습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라고 저희끼리 모의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붙잡아 죽여 버렸습니다.

빛을 싫어하는 어둠에 속한 사람들은 자꾸만 어둠 속으로만 들어가려 하고, 빛을 꺼 버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유다인들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였습니다.

포도밭 주인은 마지막까지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기회를 주십니다. 이제 내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예”하고 응답하고 축복의 길을 걷던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막가는 삶”을 살아갈 것인지를…,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 말씀은 “그러니 하느님께서 오시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와 영광을 드리지 않고,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인 나 까지도 죽이려하고, 마침내 죽이는 너희를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말씀으로 바꾸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을 백성의 지도자들이 알아 차려야 하는데, 그들은 눈과 귀를 모두 막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껴야 하는데, 그리고 지금 눈앞에 계신 분이 바로 아드님이심을 알아 차려야 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백성의 지도자들은 포도밭 주인이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실”힘을 가지신 하느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신 이 악한 소작인들이 이스라엘의 포도밭을 짓밟은 로마인이라고 오해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것은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결국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를 심판한 것입니다. 이 백성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을까요? “바로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데…”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버려진 돌이란 하느님 나라의 머릿돌이 되실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이 돌은  하느님께서 세우시는 새로운 건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앉습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심판하실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돌이기도 합니다. 집짓는 자들(백성의 지도자들과 불신자들)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고 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버린 돌),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버린 돌)이 하느님 나라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볼 눈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해서 버렸는데 알고 보니 보석중의 보석이여서 정말 귀하게 쓰인다면 얼마나 배가 아프겠습니까? 필요 없는 땅이라고 버렸는데 갑자가 노른자 땅이 되었다면 얼마나 속이 아프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는 그런 일이 닥칠 것입니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살인자 소작인들은 벌을 받게 되고, 포도원은 다른 충실한 소작인의 손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살인자 소작인들은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그 지도자인 바리사이파 사람과 사두가이파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소중히 여기시고 있는 수확이란 선택하신 백성에게 기대하고 있던 영광입니다. 보낸 종들은 예언자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내신 아들은 바로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외아들을 죽음의 땅으로 보내신 그 주인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 이십니다. 슬픈 사명을 받은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그 슬픈 사명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시고 말씀을 전하셨지만 결국 소작인들은(백성의 지도자들)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아버지는 배은망덕한 소작인들을 벌하시고 포도원을 빼앗으셨습니다. 기원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에 함락되고 맙니다.



 이제 하느님 나라는 당신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리게 되었고, 그 중심에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 돌(예수님) 밑에 깔리는 사람(죄인으로 단정 받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말 것입니다(지옥에 떨어져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3.나눔 및 묵상

① 내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소작료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나는 하느님께 소작료를 잘 내고 있습니까?



② 소작료(찬미와 감사와 영광)를 충실히 내고 있는 형제 자매를 칭찬해 보며, 그의 신앙적인 삶을 칭찬해 봅시다.

이 글은 카테고리: 오늘의독서·묵상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자에 1개의 응답

  1. 엘리사벳 님의 말:

    아니유~~ ^*^ 아직 마이너스지유~~ ㅎㅎ
    늘 드린다 하면서 영 시원찮음을 압니다.
    자식을 키우면서 은근 슬쩍 기대를 하기도 합니다.
    하물며 늘 말없이 사랑만을 주시는 아버지는 생각하지 않지요.
    정말 이기적이지요? 그 소중한 자식도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가장 큰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저는 소작료는 커녕 “키워보고 난뒤에요.” 라고 한적은 없는지를 반성해 보게 하시는군요.
    더 깊이 사랑하는 모습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찬미와 감사와 흠숭을 드릴겁니다.
    그래서 마이너스를 벗어나렵니다. ㅎㅎ^*^

    멋있지요. 하지만 아직은 그리 많이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것도 교만이고 제 완고함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ㅎㅎ
    하지만 몇분은 있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늘 감사에 젖어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에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과 행동에서 젖어납니다.
    되려 하느님을 입에 달고 살지 않고 가슴으로 말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리고 다른이에게 “기도 부족이야” 라는 말은 하지 않는 그런 모습으로
    늘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니 늘 편안해 보이지요.

엘리사벳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