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사순 제3주간 토요일(3/21)


    말씀의 초대
    세리는 애절한 기도를 바친다. 그의 기도는 ‘죄 많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한마디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바리사이는 자신과 세리를 비교하며 기도한다. 주님 앞에서의 자랑이다. 세리는 어른의 기도를 바쳤고, 바리사이는 어린이의 기도를 바쳤다(복음).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9-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의 감곡성당은 ‘매괴 성모 순례지 성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원래 충주 목사(牧使)였던 ‘민응식’의 집터입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가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신해 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이곳이 성당으로 바뀐 데에는 한 선교사의 간절한 기도와 헌신이 있었습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는 장호원을 지나면서 동쪽 언덕 아래 커다란 기와집 한 채를 봅니다. 순간 그는 이끌리듯 성모님께 기도합니다. 저 대궐 같은 집을 주신다면 ‘성모님을 주보로 모시는 성전’을 짓고 평생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던 이 일은 ‘일 년 뒤’에 현실이 됩니다. 1895년 10월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민응식의 집에 불을 질러 버린 것입니다. 이듬해 부이용 신부는 잿더미가 되어 버린 그 땅을 매입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고는 한식과 양식을 절충하여 80평의 성당을 지었습니다. 오늘날의 감곡성당입니다. 애절한 기도는 주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잊더라도 ‘때가 되면’ 들어주십니다. 세리는 불쌍히 여겨 달라는 한마디 말만 되풀이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는 기도가 아니라 자랑을 드러냅니다. 그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입니다. 그러기에 어린아이의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어른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아버지여 이 죄인을
 

이 글은 카테고리: 오늘의독서·묵상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사순 제3주간 토요일(3/21)


      말씀의 초대
      세리는 애절한 기도를 바친다. 그의 기도는 ‘죄 많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한마디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바리사이는 자신과 세리를 비교하며 기도한다. 주님 앞에서의 자랑이다. 세리는 어른의 기도를 바쳤고, 바리사이는 어린이의 기도를 바쳤다(복음).
      복음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9-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의 감곡성당은 ‘매괴 성모 순례지 성당’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은 원래 충주 목사(牧使)였던 ‘민응식’의 집터입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가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신해 있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인 이곳이 성당으로 바뀐 데에는 한 선교사의 간절한 기도와 헌신이 있었습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는 장호원을 지나면서 동쪽 언덕 아래 커다란 기와집 한 채를 봅니다. 순간 그는 이끌리듯 성모님께 기도합니다. 저 대궐 같은 집을 주신다면 ‘성모님을 주보로 모시는 성전’을 짓고 평생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이루어질 것 같지 않던 이 일은 ‘일 년 뒤’에 현실이 됩니다. 1895년 10월 ‘명성 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민응식의 집에 불을 질러 버린 것입니다. 이듬해 부이용 신부는 잿더미가 되어 버린 그 땅을 매입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고는 한식과 양식을 절충하여 80평의 성당을 지었습니다. 오늘날의 감곡성당입니다. 애절한 기도는 주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우리는 잊더라도 ‘때가 되면’ 들어주십니다. 세리는 불쌍히 여겨 달라는 한마디 말만 되풀이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는 기도가 아니라 자랑을 드러냅니다. 그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입니다. 그러기에 어린아이의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어른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아버지여 이 죄인을
     
    
    
    

  2. guest 님의 말:


    사순 제3주간 토요일(3/21)


      말씀의 초대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리라.” 호세아 예언자는 백성을 다그친다.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지 못했기에 시련이 왔음을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신의를 원하신다(제1독서).
      제1독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6,1-6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 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 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게 되리라. 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에프라임아,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 같다.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들을 찍어 넘어뜨리고, 내 입에서 나가는 말로 그들을 죽여, 나의 심판이 빛처럼 솟아오르게 하였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아버지여 이 죄인을
     
    
    
    

  3. guest 님의 말:

     

    얼마전 노란 개나리가 살포시 고개를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좋아서 코를 갖다 대었습니다.

    무슨 향이 난다고~~~ 그쵸?

    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묻고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나올 시기에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참으로 멋있다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누가 보든 보지않던 그저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본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아버지께로 나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한 날이었기도 했습니다.

    오늘 아버지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시지요.

    말씀을 묵상하다가 얼마전에 일이 떠 올랐답니다.

    하찮은 식물들이지만 진정 세리의 모습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그 모습에 비추어

    고개를 들고 할 것을 다했다며 자랑하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제 모습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본인 스스로 다했음을 말하는 바리사이들의 그 교만이

    저의 교만은 아니었는지요.

    꼬마가 무엇을 갖기 위해 보여주기 위한 일시적인 변화로 부모에게 다가가듯,

    바리사이의 모습이 그러함을 느낍니다.

    제가 바로 그 바리사이의 모습은 아닌지요.

    “이정도로 하면 잘하는 거지 뭐. 누가 이렇게 하겠어?

    나나 하니까 이정도로 하지~ 기도도 이정도면 뭐~”

    모든 것에 ‘이정도면~’ ‘잘못한게 없지 뭐~’라는 옹알이로

    저 자신을 철이 없는 상태에서 멈추게 한 신앙생활은 아니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가슴으로 애절하게 기도하고

    저를 낮추며, 제 가슴을 칠 수 있는 저였어야 했는데~~

    바로 세리의 모습이 저였어야 했는데~~

    그치요?

    전 어느쪽일까요?

    아무리 세리라 할지라도 변할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구원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압니다.

    자캐오가 아버지를 만나 변했던 것처럼~~

    저역시 마음을 열고 늘 겸손한 자세로 저를 낮추고

    말씀에서 저를 변화시켜 제 가슴을 칠 수 있어야 함을 다짐해 봅니다.

    사실 아버지를 만나고 저가 조금은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든 오로지 아버지만을 바라볼 힘이 생겼습니다.

    어떤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고

    아버지 앞에 앉을수 있게 되었기에 기쁨이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를 아버지께 솔직히 고백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습니다.

    그러기에 늘 기쁨과 희망에 찬 모습으로 섭니다.

    삶의 조연으로 주연을 도와 힘차게~~ ㅎㅎ

    바로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한 제삶의 물들이기 랍니다.

    그래야만 세리의 모습이 제 모습이 되어

    지금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회개하여 변화된 저가 될 수 있겠지요.

    지금의 기쁨보다 더 기쁘게

    아버지 앞에서 저를 고백할 수 있도록 맘과 몸이 하나되게 하렵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오늘 아버지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드시며 말씀하시지요.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중 저는 어느 쪽일까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 스스로 다했음을 말하는 교만의 바리사이인지,

    아니면 자신을 낮추며 제 가슴을 치는 세리인지~~

    늘 “니탓이야” 라고 하면서 저를 돌아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를 반성해 봅니다.

    아버지!

    누가 뭐래든 사랑의 기쁨으로 늘 새로 나게 하시어

    겸손의 간절한 기도로 고백하며

    제 가슴을 칠 수 있는 저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입으로가 아니라 의로움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저가 되게 하소서.

    아멘.

  4. user#0 님의 말:

     

    얼마전 노란 개나리가 살포시 고개를 들고 나오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좋아서 코를 갖다 대었습니다.

    무슨 향이 난다고~~~ 그쵸?

    자연의 흐름에 자신을 묻고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나올 시기에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참으로 멋있다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누가 보든 보지않던 그저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본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아버지께로 나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한 날이었기도 했습니다.

    오늘 아버지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말씀하시지요.

    말씀을 묵상하다가 얼마전에 일이 떠 올랐답니다.

    하찮은 식물들이지만 진정 세리의 모습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그 모습에 비추어

    고개를 들고 할 것을 다했다며 자랑하는 바리사이의 모습이

    제 모습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본인 스스로 다했음을 말하는 바리사이들의 그 교만이

    저의 교만은 아니었는지요.

    꼬마가 무엇을 갖기 위해 보여주기 위한 일시적인 변화로 부모에게 다가가듯,

    바리사이의 모습이 그러함을 느낍니다.

    제가 바로 그 바리사이의 모습은 아닌지요.

    “이정도로 하면 잘하는 거지 뭐. 누가 이렇게 하겠어?

    나나 하니까 이정도로 하지~ 기도도 이정도면 뭐~”

    모든 것에 ‘이정도면~’ ‘잘못한게 없지 뭐~’라는 옹알이로

    저 자신을 철이 없는 상태에서 멈추게 한 신앙생활은 아니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가슴으로 애절하게 기도하고

    저를 낮추며, 제 가슴을 칠 수 있는 저였어야 했는데~~

    바로 세리의 모습이 저였어야 했는데~~

    그치요?

    전 어느쪽일까요?

    아무리 세리라 할지라도 변할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구원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압니다.

    자캐오가 아버지를 만나 변했던 것처럼~~

    저역시 마음을 열고 늘 겸손한 자세로 저를 낮추고

    말씀에서 저를 변화시켜 제 가슴을 칠 수 있어야 함을 다짐해 봅니다.

    사실 아버지를 만나고 저가 조금은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든 오로지 아버지만을 바라볼 힘이 생겼습니다.

    어떤 관계에도 얽매이지 않고

    아버지 앞에 앉을수 있게 되었기에 기쁨이 저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를 아버지께 솔직히 고백할 수 있는 용기도 생겼습니다.

    그러기에 늘 기쁨과 희망에 찬 모습으로 섭니다.

    삶의 조연으로 주연을 도와 힘차게~~ ㅎㅎ

    바로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한 제삶의 물들이기 랍니다.

    그래야만 세리의 모습이 제 모습이 되어

    지금보다 더 멋진 모습으로 회개하여 변화된 저가 될 수 있겠지요.

    지금의 기쁨보다 더 기쁘게

    아버지 앞에서 저를 고백할 수 있도록 맘과 몸이 하나되게 하렵니다.

     

    사랑이신 아버지!

    오늘 아버지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를 드시며 말씀하시지요.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시면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바리사이와 세리 중 저는 어느 쪽일까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저 스스로 다했음을 말하는 교만의 바리사이인지,

    아니면 자신을 낮추며 제 가슴을 치는 세리인지~~

    늘 “니탓이야” 라고 하면서 저를 돌아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를 반성해 봅니다.

    아버지!

    누가 뭐래든 사랑의 기쁨으로 늘 새로 나게 하시어

    겸손의 간절한 기도로 고백하며

    제 가슴을 칠 수 있는 저가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입으로가 아니라 의로움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저가 되게 하소서.

    아멘.

  5. guest 님의 말: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세리의 모습이 저의 모습이었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감히 당신을 쳐다 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마음이 예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일헌금이라도 더 내는 날이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봉헌하러 나가는 교만한 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교무금을 낼 때도 저 보다 적게 내는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단정을 짓기도 하고 생각보다 많아 내는
    교우들을 볼 때는 형편이 어려운데 주제넘은 것이 아닌가?
    하는 교만한 생각까지...
    주제넘은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바로 저 였습니다
    무슨 권한으로 판단하고 단죄하고 무시하고 ...
    신앙인이 어떻게 세속적인 생각으로 판단을 할수 있는지...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동안의 저의 신앙생활이 보였습니다
    교만하고 거만하고 신앙인이 아닌 신앙가의 모습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감히 당신을 가까이 쳐다보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세리의 모습과 비교가 되었습니다
    죄인이면서 의인인척하며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했던 비겁한
    저의 모습이보였습니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말씀을 깊이 새기며
    세리의 겸손과 믿음을 본받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기도해봅니다
    사랑이신 당신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멘


    ♬ 아버지여 이 죄인을

  6. user#0 님의 말: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세리의 모습이 저의 모습이었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감히 당신을 쳐다 뵐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마음이 예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일헌금이라도 더 내는 날이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봉헌하러 나가는 교만한 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교무금을 낼 때도 저 보다 적게 내는 사람들은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단정을 짓기도 하고 생각보다 많아 내는
    교우들을 볼 때는 형편이 어려운데 주제넘은 것이 아닌가?
    하는 교만한 생각까지...
    주제넘은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바로 저 였습니다
    무슨 권한으로 판단하고 단죄하고 무시하고 ...
    신앙인이 어떻게 세속적인 생각으로 판단을 할수 있는지...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동안의 저의 신앙생활이 보였습니다
    교만하고 거만하고 신앙인이 아닌 신앙가의 모습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감히 당신을 가까이 쳐다보지도
    못하고 멀찍이 서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세리의 모습과 비교가 되었습니다
    죄인이면서 의인인척하며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했던 비겁한
    저의 모습이보였습니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말씀을 깊이 새기며
    세리의 겸손과 믿음을 본받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기도해봅니다
    사랑이신 당신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리라는 믿음으로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멘


    ♬ 아버지여 이 죄인을

  7. guest 님의 말:

     


    하느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1. 말씀읽기: 루카 18,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2. 말씀연구

     의로운 사람은 누구이고, 죄인은 누구입니까? 나 스스로 나를 의롭다고 말한다면 그 자체로 의로운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스스로 죄인이라면 비록 내가 중죄인이라 할지라도 나는 적어도 나의 모습을 아는 사람이니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목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에게 두 사람의 모습을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였고, 다른 하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세리였습니다.


    9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 스스로 나팔을 불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 빠지면 참으로 볼품없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면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종종 봉사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합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그래!”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삶을 보면 그는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열심히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엉성하고, 기도의 맛을 모르며, 책임감도 없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고 겸손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아서 그래!”라는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고,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당하지만 표현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을 모르고 더 기고만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죽을 때 까지 모를 수 있습니다.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사이였고 또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사이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로서 예수님 시대에 그 수효가 육천 명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리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사람인데 세리들은 으레 부정축재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고, 당시 로마의 식민지 상황에서 유다인들의 세금을 걷어서 로마에 바치니 매국노와 같은 처지에 있었습니다. 또 무역을 담당하며 세금을 징수하는 세관원들은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하기 때문에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좌우지간 누가 보더라도 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처럼 보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죄인처럼 보입니다.


    11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서서 저 혼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에~ 나는 강탈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따위의 다른 인간들과는 같지 않을 뿐더러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에~ 나는 한 주간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내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 올바른 사람임을 자처합니다. “꼿꼿이 서서”라는 표현은 그가 얼마나 교만에 차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를 돌아다보면서 자신은 세리와 같은 죄인이 아님을 강조하는 그의 얼굴에는 교만과 멸시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시위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12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선행들을 나팔 불기 시작했습니다. 매주 두 번 단식, 율법에 따라 가축과 땅의 수확에서 거둔 이익의 십 분지 일을 바치면 되었으나 그는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랑하는 것은 외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는 내적 의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13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있던 세리. 그는 멀리 서서 감히 얼굴도 쳐들지 못하고 통회의 표시로 가슴을 칩니다. 이는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값진 겸손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필요한 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이 탄식 외에 또 어떤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내가 나를 알면 알수록, 내가 내 자신을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자신의 가슴을 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혹시 기도한다면서 죄를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사 중 고백의 기도를 하며 가슴을 칠 때 이 세리의 마음이 되어 가슴을 치며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내가 하느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이고, 그분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요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물 속에서 잠수를 하다가도 숨이 차면 위로 올라와야 합니다. 신선한 공기를 마셔야 만이 다시 물 아래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쁜 일상생활이 물 속이라면 나는 숨을 쉬기 위해서 수면 위로 올라와야 합니다. 그렇게 숨을 쉬지 않으면 나는 결국 죽어버릴 것입니다. 즉 하느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인은 하느님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시지만 내가 듣지를 않으면 나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1. 왜 기도해야 합니까?

    만일 기도하지 않으면 갑자기 숨이 막히고, 배가 고프고······ 그러면 기도 안하고 못 배길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지 않아도 표시가 안나니 기도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도 안하는 것이 표시가 안 나지는 않습니다. 꼭 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말이 다르고 행동이 다릅니다. 생각이 다릅니다.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자 조용한 시간에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왜 저희들은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기도를 하셨습니다. 즉 하느님 아버지와 밤을 새워서 대화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① 기도는 좋으니까 해야 합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좋은 것처럼, 기쁨이 밀려오고, 축복이 밀려오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랑하는 이의 말을 듣고 있으면 얼마나 행복합니까?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느님께로 가 있고,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지극한 사랑을 쏟아 주시니 주님 앞에 머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무 좋으니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늘 산으로 향합니다. “왜 이리 힘든 등산을 매일 하세요?” “힘들긴요. 제가 좋아서 하는 것인데요. 산이 좋아서 매일 산에 옵니다. 하루라도 산에 안 오면 몸이 아픕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해 본 사람만이 하는 것이고, 맛을 아는 사람만이 그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매일 성체 앞에서 기도하는 형제님께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어떻게 이렇게 매일 기도하세요?”그분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좋아서요.”


    ②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즉 나 자신이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루카22,40)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도는 나 자신을 위해 해야 합니다.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합니다. 운동을 하던 사람이 운동을 하지 않으면 대번 표시가 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를 안 하면 대번 표시가 납니다. 강론준비 안하면 대번 표시나지 않습니까?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힘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힘쓸 때는 “내가 먼저 나서야 할 때, 양보해야 할 때, 아니라고 말해야 할 때, 옳다고 인정하고 따라야 할 때, 용서해야 할 때, 내 것을 나눠야 할 때” 등 입니다. 그런데 이때 자연스럽게 배려하고 양보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 이해하고 나눠주기 위해서는 평상시에 늘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힘이 없으면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매 순간, 선택의 순간에 신앙의 힘이 없으면 예수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갈 수 없고, 내가 의롭게 살고자 하는 방식으로 대처할 수 없습니다.


     사목회 일을 마치고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한 형제에게 “미사에 빠지지 않고 나오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기가 막혔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봤기에…,”신자가 미사에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안 나올 줄 알았는데 나왔네요.”라는 식의 말을 듣고 화가 안 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지만 이 형제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형제님! 관심 가져줘서 감사합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말씀으로 기도하고 있는 그를 모르기에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냥 사목회장 맡았으니 그러려니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기도했기에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봐 주고,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망가집니다. 그러니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③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얘기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 주기 위해 땀을 흘리는 것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느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기도 하셨습니다.


     나 또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위해서 작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쉬운 것도 있지만 어려운 것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에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하기 싫고, 보기만 해도 역겨운 것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지만, 하느님을 위해서 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그렇게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④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옳은 일을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어려움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살아가기에 양보해야 할 것도 있고, 용서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또, 기도는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침상에 누워있는 중풍병자를 고쳐 주실 때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를 침상에 뉘어서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서 치유해 주셨습니다.

    죽은 라자로를 살리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자로는 죽음에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라자로의 동생들이 예수님께 믿음을 보였습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나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힘이 없으면 결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데려가지 못합니다. 신앙의 힘이 없으면 결코 냉담자를 방문하거나 병자를 방문하여 기도를 해 줄 수 없습니다.


    ⑥ 용서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형제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내 돈을 떼먹고 도망간 사람을 기도하지 않고도 용서할 수 있을까요? 나에게 상처를 입힌 사람이나, 내 가족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기도하지 않고도 용서할 수 있을까요?

     기도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2. 기도의 효과

     예수님의 게세마니에서의 기도.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상황이 바뀌었나요? 아니지요.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승리하셨지요.


    노벨 생리학상 수상자인 알렉시스 카렐은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기도가 인간의 영혼과 육체에 미치는 영향은 인체 내부의 선을 통해 호르몬과 같은 물질(내분비물)의 분비 작용이 증진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의사인 나는 심한 우울증 환자나 어떠한 의학으로도 도저히 치료 불가능한 환자들이 고요히 기도를 함으로써 자신의 병마와 투쟁하여 승리하는 모습들을 종종 보았다…”

    그런데 효과를 보려면 스스로 노력을 기울이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약을 먹어야 만이 약 효과를 보지 않겠습니까?

    바리사이의 기도와 같은 엉뚱한 소리가 아니라, 세리의 기도처럼 참된 기도를 바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해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하느님의 판단은 사람의 판단과는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스스로 올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겸손한 기도, 자신을 낮추는 이를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죄를 뉘우치는 이에게는 용서를 베풀어 주십니다. 아무리 큰 죄의 늪에 빠졌다 하더라도 깊이 뉘우친다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나눔 및 묵상

    ① 바리사이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면서 내가 하느님께 기도드릴 때의 모습을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② 세리는 하느님께 어떤 특별한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치면서 죄 많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내가 가슴을 칠 일은 무엇이며,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user#0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