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사순 제4주간 수요일(4/06)


    말씀의 초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신 백성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멈출 수 없고 애절하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당신 자녀들에게 이런 사랑은 지금도 계속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적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다. 그분과 예수님께서는 하나이시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켜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8-1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TV에 나온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이디(ID)가 ‘나무’라고 했습니다. 식물 나무가 아니라 ‘나 무(無)’라는 것입니다. ‘나는 없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비우고 무화(無化)하는 것은 무아(無我)의 경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무화(無化)하시어 거룩한 몸(성체)이 되셨듯이, 우리 자신이 없어지고 온전히 그분과 하나 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비움’과 불교의 ‘비움’은 이런 의미에서 다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비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려는 비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신 것처럼 우리를 비운 자리에 주님께서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했습니다. 결국 비움은 단순히 집착과 탐욕을 끊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 것을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보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비움의 의미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비운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내 것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그냥 비워서는 곧바로 다른 것이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도 누구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는 일을 할 때 비움이 시작됩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나를 이끄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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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 제4주간 수요일(4/06)


      말씀의 초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당신 백성을 향한 주님의 사랑은 멈출 수 없고 애절하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당신 자녀들에게 이런 사랑은 지금도 계속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과 행적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다. 그분과 예수님께서는 하나이시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신다(복음).
      제1독서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켜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9,8-1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TV에 나온 어떤 사람이 자신의 아이디(ID)가 ‘나무’라고 했습니다. 식물 나무가 아니라 ‘나 무(無)’라는 것입니다. ‘나는 없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비우고 무화(無化)하는 것은 무아(無我)의 경지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무아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무화(無化)하시어 거룩한 몸(성체)이 되셨듯이, 우리 자신이 없어지고 온전히 그분과 하나 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비움’과 불교의 ‘비움’은 이런 의미에서 다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비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려는 비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신 것처럼 우리를 비운 자리에 주님께서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했습니다. 결국 비움은 단순히 집착과 탐욕을 끊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한 세상 것을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보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비움의 의미는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냥 비운다고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함으로써 내 것이 비워지는 것입니다. 그냥 비워서는 곧바로 다른 것이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도 누구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생명을 주는 일을 할 때 비움이 시작됩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나를 이끄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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