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10/12)


    말씀의 초대
    남을 심판하는 자는 곧 자신을 단죄하는 자이다.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그 행실대로 환난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꾸준히 선한 행동을 하고 하느님의 영광과 불멸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제1독서). 불행한 삶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실천하지 않고 윗자리에 앉아서 인사받기 좋아하는 교만한 자들이 진정으로 불행하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2,1-11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46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중성을 지니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듯, 인간은 태어날 때 모태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두려움이 각인됩니다. 어머니와 하나 되어 지낸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이제 개별적인 존재가 되어 세상에 나오면서, 아기의 무의식 속에 자신이 내쳐질까, 버려질까 하는 두려움이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는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본디의 ‘자기 모습이 아닌 자기 모습’이 무의식적으로 계발되고 점점 자신의 진실성과 진정성을 잃어 가게 됩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결국 ‘남에게 보이는 나’와 ‘내면의 진정한 나’ 사이의 간격이 크게 벌어지게 됩니다. 홍윤숙 시인은 “가면”이라는 시(詩)에서 이렇게 썼지요. 이 나이에도 나는 아직 마음 들키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문다 / 부질없는 호감을 사기 위해 미소를 짓는다 / 수치와 굴욕을 감추기 위해 큰소리로 떠든다 / 그러다 돌아와 자신을 향해 침을 뱉는다 눈물을 쏟는다 / 무거웠던 가면 전흔의 상처 남루한 / 또 하나의 얼굴이 쓸쓸히 누워 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처럼 두껍게 ‘내가 아닌 나의 얼굴’을 하고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착각하며 살기도 합니다. 늘 세심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며 주님 앞에서 정직한 나와 마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거짓의 나와는 함께하실 수 없으며, 진실한 나와는 늘 함께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새로운 나를 지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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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중 제28주간 수요일(10/12)


      말씀의 초대
      남을 심판하는 자는 곧 자신을 단죄하는 자이다.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그 행실대로 환난과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나 꾸준히 선한 행동을 하고 하느님의 영광과 불멸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제1독서). 불행한 삶은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고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실천하지 않고 윗자리에 앉아서 인사받기 좋아하는 교만한 자들이 진정으로 불행하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2,1-11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2-46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율법 교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희까지 모욕하시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중성을 지니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듯, 인간은 태어날 때 모태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두려움이 각인됩니다. 어머니와 하나 되어 지낸 가장 안전한 장소에서 이제 개별적인 존재가 되어 세상에 나오면서, 아기의 무의식 속에 자신이 내쳐질까, 버려질까 하는 두려움이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끊임없이 관심과 사랑을 받으려는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본디의 ‘자기 모습이 아닌 자기 모습’이 무의식적으로 계발되고 점점 자신의 진실성과 진정성을 잃어 가게 됩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결국 ‘남에게 보이는 나’와 ‘내면의 진정한 나’ 사이의 간격이 크게 벌어지게 됩니다. 홍윤숙 시인은 “가면”이라는 시(詩)에서 이렇게 썼지요. 이 나이에도 나는 아직 마음 들키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문다 / 부질없는 호감을 사기 위해 미소를 짓는다 / 수치와 굴욕을 감추기 위해 큰소리로 떠든다 / 그러다 돌아와 자신을 향해 침을 뱉는다 눈물을 쏟는다 / 무거웠던 가면 전흔의 상처 남루한 / 또 하나의 얼굴이 쓸쓸히 누워 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처럼 두껍게 ‘내가 아닌 나의 얼굴’을 하고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착각하며 살기도 합니다. 늘 세심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며 주님 앞에서 정직한 나와 마주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거짓의 나와는 함께하실 수 없으며, 진실한 나와는 늘 함께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출처 매일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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