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연중 제23주간 금요일(9/12)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는 자신의 의무이며 그 대가는 오직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또한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어떤 처지라도 감수하며 그 목적만을 바라볼 것이라고 선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비유를 드시며 섣불리 인도자나 스승 노릇을 하지 말라고 이르신다.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야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는 법이다(복음).
    제1독서
    <나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9,16-19.22ㄴ-27 형제 여러분,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9-42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밝히며, 복음을 선포하는 이에게 정당하게 허락되어 있는 물질적 사례의 권리조차도 사양하였다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의 존재 방식에 대한 심오한 차원이 암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가 자신에게 자랑거리나 업적이 될 수 없을뿐더러 그 대가를 요구할 수 없는 이유가, 복음 선포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며 순전히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두 가지 논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여기서 ‘어찌할 수 없는 의무’란 외적 강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아낭케’라는 그리스 낱말이 뜻하듯 ‘필연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필연성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필연성인 것이며, 사실은 그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께 사로잡힌 이가 강렬히 체험하는 필연성입니다. 이러한 필연성은 바오로 사도가 밝히듯 ‘밖으로부터’ 본다면 내가 가진 선택의 자유를 위태롭게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 사로잡힌 필연성을 체험하는 이는 사실 가장 깊은 차원의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자유와 복음 선포의 의무 사이의 외적 대립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주님과 만나며 체험하는 필연성 속에서 해소됩니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자유와 사명이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 인식, 그것 자체가 복음을 선포하는 이가 얻게 되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상급이자 선물일 것입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모든이에게 모든것 (Omnibus Om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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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연중 제23주간 금요일(9/12)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는 자신의 의무이며 그 대가는 오직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또한 복음 선포를 위해서는 어떤 처지라도 감수하며 그 목적만을 바라볼 것이라고 선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비유를 드시며 섣불리 인도자나 스승 노릇을 하지 말라고 이르신다. 먼저 자신의 눈에서 들보를 빼내야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는 법이다(복음).
      제1독서
      <나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9,16-19.22ㄴ-27 형제 여러분,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39-42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밝히며, 복음을 선포하는 이에게 정당하게 허락되어 있는 물질적 사례의 권리조차도 사양하였다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를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이의 존재 방식에 대한 심오한 차원이 암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가 자신에게 자랑거리나 업적이 될 수 없을뿐더러 그 대가를 요구할 수 없는 이유가, 복음 선포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며 순전히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두 가지 논점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여기서 ‘어찌할 수 없는 의무’란 외적 강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아낭케’라는 그리스 낱말이 뜻하듯 ‘필연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필연성은 자신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필연성인 것이며, 사실은 그 깊은 곳에서부터 하느님께 사로잡힌 이가 강렬히 체험하는 필연성입니다. 이러한 필연성은 바오로 사도가 밝히듯 ‘밖으로부터’ 본다면 내가 가진 선택의 자유를 위태롭게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 사로잡힌 필연성을 체험하는 이는 사실 가장 깊은 차원의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자유와 복음 선포의 의무 사이의 외적 대립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주님과 만나며 체험하는 필연성 속에서 해소됩니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 안에서 자유와 사명이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 인식, 그것 자체가 복음을 선포하는 이가 얻게 되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상급이자 선물일 것입니다.
     
    -출처 매일 미사-
    
    
    
    
    저녁노을(모니카)
    
    ♬ 모든이에게 모든것 (Omnibus Omnia)
    
    
    

  2. guest 님의 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눈먼 소경이 되고 싶었습니다
    눈먼 소경이 되어 당신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고…
    눈먼 소경이 되어 욕심도 버리고 모든 고민과 미움도 버리고…
    위선도 버리고 눈먼 소경이 되어 ….
    그렇게 하고 싶었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세속의 모든 욕심과 고민 이기심 미움등…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순수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께서 주신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서 새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번민도 미움도 욕심도 이기심도 모두 다…
    버리고 깨끗하게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주님!
    오늘복음을 묵상하면서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말씀을 성찰하며
    위선적인 저의 모습에서 벗어나 순수하고 깨끗한모습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눈먼 소경이 된다해도…
    아멘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묵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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