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자세
<말씀연구>
인간의 가장 큰 욕망 중의 하나가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내가 한 것을 자랑하고 싶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다면 과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참된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 참된 자세는 바로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입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자선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십니다.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그런데 참 쉽지 않습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 남을 도와주는 것은 많이 봅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볼 때와, 누가 보지않을 때의 행동이 다르면 안되는데…
유다에서는 일정한 단체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단체는 매 토요일 마다 회당에서 예식이 끝난 다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부금을 거두었고, 기부를 한 사람들의 이름을 공포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은인이라고 불러 주는 것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기부한 금액이 많을 대에는 회당에서 회당장이라는 명예 있는 좌석에 앉게 된다는 특전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릇된 목적을 위하여 자선을 베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선을 베풀지 말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자선을 베풀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칭찬받으려고 자선을 베푸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말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참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잘하면 그것에 대해서 보상을 받고 싶어 합니다. 열심한 유다인들은 그들의 자선이 사람들에게는 드러나지 않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드러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러한 보상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라고, 그래서 보상해 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이런 마음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들이 보니까 선행을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선의 방법을 말씀해 주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자선을 나타내는 말의 본래의 뜻은 경건, 자선,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일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자비를 뜻하기 전에 먼저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른손이 하는 일이 왼손이 모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자선이라는 아름다운 행위를 어떻게 조심하여 은밀히 해야 할 것인가를 나타내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즉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피하고, 자기 자신조차도 자기가 한 행위에 마음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선은 나의 덕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도할 때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열심한 유다인들은 하루에 두 차례(아침 9시경, 오후 3시경)에 반드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2세기 경부터는 그 밖에 저녁 기도라는 또 하나의 기도가 규정되었습니다. 저녁기도 시간이 되면, 집에 있거나 노상에 있거나, 밭에 있거나 침대에 있거나, 반드시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기도하였습니다. 현재도 회교도는 옛날의 유다인과 마찬가지로 기도 시간을 엄수하고, 어떠한 장소에 있거나, 외투를 땅바닥에 깔고 신발을 벗고, 성도(聖都) 메카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선과 마찬가지로 이 기도까지도 허영심의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경건한 일이어야 할 이 기도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것만이 그 단 하나의 동기여야 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일부러 사람들이 보는 장소를 택하여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시간에 회당이나 길에 나가 있으려고, 일부러 그 시간을 맞추어서 외출하는 사람까지도 있었다고 합니다.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들보다 더한 이들이 네팔에 있다고 합니다. 네팔 절간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담긴 원통(기도물레)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고 합니다. 신도들이 예불하러 와서는 기도물레들을 빙빙 돌립니다. 한 번 돌릴 때마다 원통들 속에 적혀 있는 무수한 기도를 다 바친 셈이라고 합니다. 이거 성당에서 팔면 잘 팔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
골방은 작은 방이 아니라 창문이 없는 방을 골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기도를 오직 골방에서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답시고 남들 앞에서 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좋아하실 분들도 있습니다.
“내가 그래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성호 안 긋고 밥 먹는 거야. 내 입으로 나발 불기 싫어서…”이것은 자기 합리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으면서 “공동기도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둘이나 셋 있는 곳에 나 또한 거기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공동기도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단식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지 말아라. 그 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그 기색을 하고 다닌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구약성경에서 명한 단식일은 일년에 단 한 차례 속죄의 날 뿐입니다(레위 23,26-32;16,29). 그 밖에 온 나라에 불행이 닥치면(요나서 참조) 거국적으로 단식하는 수가 더러 있었습니다. 공적으로 단식하는 날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목욕하지도 화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단식은 열심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자주 하는 단식을 의미합니다. 바리사이들은 개인적으로 매주 두 차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을 했고 그리스도인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단식을 하는 것이 뭐 자랑하거나 뭔가를 요구하기 위해 한다면 차라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할 때의 자세를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단식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그리하여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유다인들 중에는 24시간 음식을 먹지 않고, 옷도 아무렇게나 걸치고, 면회나 인사까지도 사절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수도 하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않고 창백하고 슬픈 얼굴로 “나는 오늘 단식중이유!”하고 광고하고 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조작된 슬픈 듯한 얼굴과 허름한 옷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내가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굳이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모두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내 마음안에는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만이 “그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2. 유다인들은 비록 받을 상은 다 받았다 하더라도 열심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렇게 열심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긴 시간동안 봉사활동을 하시는 분들도 있고, 지향을 두고 기도하시는 분들도 있고, 희생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는데 내가 몰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더 큰 가치는 행동뿐만 아니라 드러내지 않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의 그런 모습의 형제 자매를 찾아 보고, 그분들 경쟁상대로 삼아서 보이지 않는 보화를 쌓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결심해 봅시다.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몇해 전 주일 교무를 할 때입니다.
경험도 없이, 수녀님도 안 계신 가운데 얼떨결레 맡은 교무라는 직책 거기에 지난 교무보다는 잘 하겠다는 오만 그런 까닭이었을까요 일을 하고자 할때 같이 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모든일이 교무인 저의 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떠한 행사를 진행 할때는 사람이 있고 준비하는 과정 중에는 바빠서 한 둘이 참여하게 되더군요 거기에 실수와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이 행사가 있을때마다 일도 제대로 안되면서 실성한 사람모양 허둥데고 있었습니다 정말 사람이 싫어지고 저의 마음에는 미움이 가득해 견딜 수 없어 교무를 1년만에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교무에게 이 보란 듯이 복수라도 하듯이 대충 대충 할 것만 해 주고 함께 하지 않는 방관자가 되어버린 저를 발견하게 되었을때의 그 자괴감이란…..
참 어리석죠?
주님! 값없이 하느님은 당신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로 삼으셨고 예수님은 정말 사랑으로 이 어리석은 저를 위해 피땀 흘리시는 고통중에도 산 제물 되셨는데 저는 저의 힘겨움을 사람들에게 받으려 알아 주지 않는 신부님께 교사들에게 미움과 비난을 쏟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어리석은 것은 하느님께 제게 주신 달란트라 하면서 하느님께 순종 한다하면서 하느님과 이야기 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조차 들으려 하지 않은 당연한 결과 였습니다.
주님 제게 다시 주신 교사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칭찬들으려 하지 않고 정말 작은 영혼 하나에게 라도 주님의 사랑을 잘 전수 할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당신은 참으로 사랑이십니다.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몇해 전 주일 교무를 할 때입니다.
경험도 없이, 수녀님도 안 계신 가운데 얼떨결레 맡은 교무라는 직책 거기에 지난 교무보다는 잘 하겠다는 오만 그런 까닭이었을까요 일을 하고자 할때 같이 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모든일이 교무인 저의 차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어떠한 행사를 진행 할때는 사람이 있고 준비하는 과정 중에는 바빠서 한 둘이 참여하게 되더군요 거기에 실수와 잘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이 행사가 있을때마다 일도 제대로 안되면서 실성한 사람모양 허둥데고 있었습니다 정말 사람이 싫어지고 저의 마음에는 미움이 가득해 견딜 수 없어 교무를 1년만에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교무에게 이 보란 듯이 복수라도 하듯이 대충 대충 할 것만 해 주고 함께 하지 않는 방관자가 되어버린 저를 발견하게 되었을때의 그 자괴감이란…..
참 어리석죠?
주님! 값없이 하느님은 당신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로 삼으셨고 예수님은 정말 사랑으로 이 어리석은 저를 위해 피땀 흘리시는 고통중에도 산 제물 되셨는데 저는 저의 힘겨움을 사람들에게 받으려 알아 주지 않는 신부님께 교사들에게 미움과 비난을 쏟아 버렸습니다 그런데 더 어리석은 것은 하느님께 제게 주신 달란트라 하면서 하느님께 순종 한다하면서 하느님과 이야기 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조차 들으려 하지 않은 당연한 결과 였습니다.
주님 제게 다시 주신 교사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칭찬들으려 하지 않고 정말 작은 영혼 하나에게 라도 주님의 사랑을 잘 전수 할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당신은 참으로 사랑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