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프리드리히 2세(1212~1250년)
1212년 12월 5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었던 선거는 뉘른베르크의 결정을 재확인하였다. 그래서 1212년 12월 9일 프리드리히 2세는 마인츠에서 왕으로 등극하였다. 황금 문서를 통해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에게 감사를 표하였다(1213년 7월 12일). 아울러 프리드리히 2세는 예전에 교황에게 했던 약속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1215년 7월 프리드리히 2세는 아헨에서 쾰른의 대주교 엥겔베르트(Engelbert)에 의해 재차 왕으로 등극하는 예식을 치렀다. 1215년에 개최되었던 라테라노 공의회는 최종적으로 프리드리히 2세의 선출을 승인하였다. 교황 호노리오 3세 재임시 십자군이 출정하여, 1219년 다미테(Damitte) 성
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카이로를 향한 진군은 실패로 끝났다. 이 실패의 책임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돌아갔다. 왜냐하면 프리드리히는 십자군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계속 미루었기 때문이었다.
1220년 8월 말경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부인 콘스탄체와 함께 로마에 도착하였고, 1220년 11월 23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프리드리히 2세는 거듭 십자군 운동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시칠리아에 대한 통치권 확보에 몰두하였으므로 약속의 이행을 연기하였다. 1225년 7월 프리드리히 2세는 1227년 8월까지 십자군을 출정시킬 것을 서약으로 약속하였고, 만일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파문의 처벌까지도 감수할 것을 천명하였다. 교황 호노리오 3세의 후임자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와의 협력을 자신의 각별한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사이에는 예전부터 돈독한 우정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자신의 교황 선출을 프리드리히 2세에게 통고하였고, 다시금 십자군 운동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사이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운동에 동참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1227년 9월 9일 프리드리히 2세의 막강한 군대가 출정하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병을 얻어 회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황은 황제의 질병 소식을 듣고서 이것은 단지 프리드리히 2세가 자신의 약속 이행 의무를 회피하기 위한 꾀병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1227년 9월 29일 프리드리히 2세에게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이 제기한 모든 항의를 기피하였고, 십자군 동참 약속을 재확인하였다. 1228년 5월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의 출정 준비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1228년 성목요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내린 파문의 처벌을 반복하였다. 1228년 6월 28일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을 출정시켰다. 1228년 9월 7일에 아콘에 도착하였고, 1229년 2월 18일 술탄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을 차지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베들레헴과 나자렛은 물론 성지에 대한 순례자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받았다. 1229년 3월 17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여전히 파문의 처벌을 받고 있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는 성지 전체를 파문시켰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성지를 떠나 1229년 5월 1일 이탈리아에 도착하였다. 그사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겨냥한 조치를 취하였다. 예를 들어 교황은 황제의 신하들이 이행해야 할 충성서약 의무를 해체시켰다. 이에 대응하여 황제에 의해 임명된 제국의 특사는 교회 국가를 침략하였고, 교황 역시 군대를 동원하여 그사이 브린디시(Brindisi)에 도착해 있던 황제와 싸워 처음에는 승리하였으나 끝내는 황제에 의해 퇴패당하였다. 하지만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회 국가 국경지역에 머물렀다. 그 결과 쌍방간이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230년 7월 23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회의 지시에 순종하고, 교회 국가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고 보장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은 1230년 8월 28일 황제에게 내린 파문의 처벌을 철회하였다. 교황과 황제 사이의 평화는 9년간 지속되었다.
1239년 3월 20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다시금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왜냐하면 황제의 대 교회 정책이 1230년에 약속한 보증에 위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교황과 슈타우퍼 가문 사이에는 다시금 불화가 시작되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회 국가를 점령하였고 로마를 포위하였다. 그래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41년 부활 대축일을 기해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였으나 개최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국외에 거주하는 시노드 참석자들을 출발하기 전 거의 모두 체포하여 구금시켰기 때문이었다. 8월 초순경에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로마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41년 8월 21일에 서거하였다. 교회 역사상 최초의 봉쇄 교황 선거를 통해 교황 첼레스티노 4세가 선출되었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서거하였다. 교황 첼레스티노 4세의 후임자로서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선출되었고,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인노첸시오 4세의 교황 선출을 환영하였다. 왜냐하면 인노첸시오 4세는 황제에 대해 항상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자신에게 내려진 파문의 처벌을 철회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파문의 처벌을 받은 자와는 교섭을 가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의 특사를 영접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교황이 황제에게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1244년 3월 31일 잠정적인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1244년 6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리옹으로 도피하여 서거할 때까지 거기서 머물렀다. 계속 이어진 갈등과 불화 그리고 성지의 실지 등은 교황과 황제 사이에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던 현안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1245년 리옹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원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직접 또는 대리자를 파견하여 공의회에 참석하고자 하였다. 리옹의 공의회는 1245년 6월 26일 소집되었고,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궁정 대법관 타데오(Thaddaeus von Suessa)를 자신의 대리자로 공의회에 파견하였다. 타데오는 황제의 이름으로 십자군 운동에 동참할 것과 교회 국가 내에서 점령한 모든 지역을 반환할 것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이러한 선언의 진실성을 신뢰하지 않았다. 공의회의 두 번째 회기에서 황제를 거슬러 중대한 고발이 제기되자, 황제의 대리자인 타데오는 황제가 직접 공의회에 참석하기를 기다려 세 번째 회기를 7월 17일로 연기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아직 토리노(Turin)에 머물고 있었다.
사람들은 비밀 회담을 통해 황제의 퇴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7월 17일 교황은 황제의 퇴위 문서를 공표하였다. 황제는 모든 명예와 품위를 박탈당하였고, 신하들은 충성 서약의 의무로부터 면제되었으며, 황제에 대한 지지는 파문으로 처벌되었다. 이에 대해 황제의 대리자인 타데오는 공의회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황제를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의회의 적법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또한 교황이 고발의 내용이 입증되기도 전에 판결을 내렸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황제를 포함하여 모든 제후들이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기 때문에 공의회는 적법하다고 응수하였다. 황제의 퇴위 선언으로 교황과 황제 사이에는 결정권을 둘러싼 시비가 발생하였다. 교황은 황제의 퇴위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을 촉구하였다. 양 진영은 이제 서로의 입장을 여론에 호소하였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를 심판하고 퇴위시키는 교황의 권한에 대해 시비를 걸었다. 그러면서 교회의 개혁과 사도적인 삶의 방식에로 교회가 되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1246년 초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교황은 천부적으로 황제와 왕을 지배하는 권한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황제와 왕을 퇴위시킬 수도 있고 또 즉위시킬 수도 있다고 응답하였다. 이러한 대립의 상황 아래에서는 어떠한 의견의 일치에 도달할 수 없었다.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한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독일의 제후들이 새로운 대립 왕을 옹립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한 최종적인 결정이 내리기도 전에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50년 12월 13일 아풀리아(Apulien)에서 별세하였다. 황제가 별세하기 전 그의 친구가 황제에게 내려졌던 파문의 처벌을 해제시켜주었다.
6) 콘라트 4세(1250~1254년)
교황은 슈타우퍼 가문 출신 가운데 어느 누구도 왕 또는 황제로 승인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다. 그 결과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아들인 콘라트 4세가 시도한 교황과의 화해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1254년 4월 5일 교황은 콘라트 4세가 시칠리아를 교회에 반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콘라트 4세에게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콘라트 4세는 1254년 5월 21일 별세하였다.
7) 콘라딘(1254~1268년)
부친 콘라트 4세가 별세할 당시 겨우 두 살이었던 콘라딘을 위해서 콘라트 4세의 이복 형제 만프레드(Manfred)가 섭정을 맡았다. 콘라딘은 시칠리아의 반환을 거부한 이유로 교황으로부터 파문의 처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267년 이탈리아로 원정을 나섰다. 1268년 8월 23일 콘라딘은 자신의 군대와 함께 참패하였다. 콘라딘은 도주 중 체포되어 1268년 10월 28일 나폴리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이로써 슈타우퍼 가문은 혈통이 끊어지게 되었다.

5) 프리드리히 2세(1212~1250년)
1212년 12월 5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었던 선거는 뉘른베르크의 결정을 재확인하였다. 그래서 1212년 12월 9일 프리드리히 2세는 마인츠에서 왕으로 등극하였다. 황금 문서를 통해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에게 감사를 표하였다(1213년 7월 12일). 아울러 프리드리히 2세는 예전에 교황에게 했던 약속을 다시금 확인하였다.
1215년 7월 프리드리히 2세는 아헨에서 쾰른의 대주교 엥겔베르트(Engelbert)에 의해 재차 왕으로 등극하는 예식을 치렀다. 1215년에 개최되었던 라테라노 공의회는 최종적으로 프리드리히 2세의 선출을 승인하였다. 교황 호노리오 3세 재임시 십자군이 출정하여, 1219년 다미테(Damitte) 성
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카이로를 향한 진군은 실패로 끝났다. 이 실패의 책임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돌아갔다. 왜냐하면 프리드리히는 십자군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계속 미루었기 때문이었다.
1220년 8월 말경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부인 콘스탄체와 함께 로마에 도착하였고, 1220년 11월 23일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프리드리히 2세는 거듭 십자군 운동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시칠리아에 대한 통치권 확보에 몰두하였으므로 약속의 이행을 연기하였다. 1225년 7월 프리드리히 2세는 1227년 8월까지 십자군을 출정시킬 것을 서약으로 약속하였고, 만일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파문의 처벌까지도 감수할 것을 천명하였다. 교황 호노리오 3세의 후임자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와의 협력을 자신의 각별한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사이에는 예전부터 돈독한 우정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자신의 교황 선출을 프리드리히 2세에게 통고하였고, 다시금 십자군 운동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사이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 운동에 동참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
1227년 9월 9일 프리드리히 2세의 막강한 군대가 출정하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병을 얻어 회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교황은 황제의 질병 소식을 듣고서 이것은 단지 프리드리히 2세가 자신의 약속 이행 의무를 회피하기 위한 꾀병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1227년 9월 29일 프리드리히 2세에게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이 제기한 모든 항의를 기피하였고, 십자군 동참 약속을 재확인하였다. 1228년 5월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의 출정 준비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1228년 성목요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 내린 파문의 처벌을 반복하였다. 1228년 6월 28일 프리드리히 2세는 십자군을 출정시켰다. 1228년 9월 7일에 아콘에 도착하였고, 1229년 2월 18일 술탄과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을 차지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베들레헴과 나자렛은 물론 성지에 대한 순례자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받았다. 1229년 3월 17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여전히 파문의 처벌을 받고 있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총대주교는 성지 전체를 파문시켰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성지를 떠나 1229년 5월 1일 이탈리아에 도착하였다. 그사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겨냥한 조치를 취하였다. 예를 들어 교황은 황제의 신하들이 이행해야 할 충성서약 의무를 해체시켰다. 이에 대응하여 황제에 의해 임명된 제국의 특사는 교회 국가를 침략하였고, 교황 역시 군대를 동원하여 그사이 브린디시(Brindisi)에 도착해 있던 황제와 싸워 처음에는 승리하였으나 끝내는 황제에 의해 퇴패당하였다. 하지만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회 국가 국경지역에 머물렀다. 그 결과 쌍방간이 평화 조약을 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230년 7월 23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회의 지시에 순종하고, 교회 국가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고 보장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은 1230년 8월 28일 황제에게 내린 파문의 처벌을 철회하였다. 교황과 황제 사이의 평화는 9년간 지속되었다.
1239년 3월 20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다시금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왜냐하면 황제의 대 교회 정책이 1230년에 약속한 보증에 위배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교황과 슈타우퍼 가문 사이에는 다시금 불화가 시작되었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회 국가를 점령하였고 로마를 포위하였다. 그래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41년 부활 대축일을 기해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하였으나 개최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국외에 거주하는 시노드 참석자들을 출발하기 전 거의 모두 체포하여 구금시켰기 때문이었다. 8월 초순경에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로마를 향해 진군하였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1241년 8월 21일에 서거하였다. 교회 역사상 최초의 봉쇄 교황 선거를 통해 교황 첼레스티노 4세가 선출되었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서거하였다. 교황 첼레스티노 4세의 후임자로서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선출되었고,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인노첸시오 4세의 교황 선출을 환영하였다. 왜냐하면 인노첸시오 4세는 황제에 대해 항상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자신에게 내려진 파문의 처벌을 철회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파문의 처벌을 받은 자와는 교섭을 가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의 특사를 영접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교황이 황제에게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1244년 3월 31일 잠정적인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1244년 6월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리옹으로 도피하여 서거할 때까지 거기서 머물렀다. 계속 이어진 갈등과 불화 그리고 성지의 실지 등은 교황과 황제 사이에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던 현안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1245년 리옹 공의회를 소집하였고, 원래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직접 또는 대리자를 파견하여 공의회에 참석하고자 하였다. 리옹의 공의회는 1245년 6월 26일 소집되었고,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궁정 대법관 타데오(Thaddaeus von Suessa)를 자신의 대리자로 공의회에 파견하였다. 타데오는 황제의 이름으로 십자군 운동에 동참할 것과 교회 국가 내에서 점령한 모든 지역을 반환할 것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이러한 선언의 진실성을 신뢰하지 않았다. 공의회의 두 번째 회기에서 황제를 거슬러 중대한 고발이 제기되자, 황제의 대리자인 타데오는 황제가 직접 공의회에 참석하기를 기다려 세 번째 회기를 7월 17일로 연기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아직 토리노(Turin)에 머물고 있었다.
사람들은 비밀 회담을 통해 황제의 퇴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7월 17일 교황은 황제의 퇴위 문서를 공표하였다. 황제는 모든 명예와 품위를 박탈당하였고, 신하들은 충성 서약의 의무로부터 면제되었으며, 황제에 대한 지지는 파문으로 처벌되었다. 이에 대해 황제의 대리자인 타데오는 공의회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황제를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의회의 적법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또한 교황이 고발의 내용이 입증되기도 전에 판결을 내렸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황제를 포함하여 모든 제후들이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되었기 때문에 공의회는 적법하다고 응수하였다. 황제의 퇴위 선언으로 교황과 황제 사이에는 결정권을 둘러싼 시비가 발생하였다. 교황은 황제의 퇴위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할 것을 촉구하였다. 양 진영은 이제 서로의 입장을 여론에 호소하였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를 심판하고 퇴위시키는 교황의 권한에 대해 시비를 걸었다. 그러면서 교회의 개혁과 사도적인 삶의 방식에로 교회가 되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1246년 초에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교황은 천부적으로 황제와 왕을 지배하는 권한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황제와 왕을 퇴위시킬 수도 있고 또 즉위시킬 수도 있다고 응답하였다. 이러한 대립의 상황 아래에서는 어떠한 의견의 일치에 도달할 수 없었다.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한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독일의 제후들이 새로운 대립 왕을 옹립하였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한 최종적인 결정이 내리기도 전에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1250년 12월 13일 아풀리아(Apulien)에서 별세하였다. 황제가 별세하기 전 그의 친구가 황제에게 내려졌던 파문의 처벌을 해제시켜주었다.
6) 콘라트 4세(1250~1254년)
교황은 슈타우퍼 가문 출신 가운데 어느 누구도 왕 또는 황제로 승인하지 않을 것을 결심하였다. 그 결과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아들인 콘라트 4세가 시도한 교황과의 화해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1254년 4월 5일 교황은 콘라트 4세가 시칠리아를 교회에 반환하지 않았기 때문에 콘라트 4세에게 파문의 처벌을 내렸다. 콘라트 4세는 1254년 5월 21일 별세하였다.
7) 콘라딘(1254~1268년)
부친 콘라트 4세가 별세할 당시 겨우 두 살이었던 콘라딘을 위해서 콘라트 4세의 이복 형제 만프레드(Manfred)가 섭정을 맡았다. 콘라딘은 시칠리아의 반환을 거부한 이유로 교황으로부터 파문의 처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267년 이탈리아로 원정을 나섰다. 1268년 8월 23일 콘라딘은 자신의 군대와 함께 참패하였다. 콘라딘은 도주 중 체포되어 1268년 10월 28일 나폴리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되었다. 이로써 슈타우퍼 가문은 혈통이 끊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