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전 기사 수도회 聖殿騎士修道會 Templerorden
십자군 운동과 관련해서 성지 예루살렘에는 순례객을 보호하고 환자를 돌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기사 수도회가 창설되었다. 1168년 프랑스의 기사들에 의해 성전 기사 수도회가 창설되었다. ꡐ성전ꡑ이라는 이름은 프랑스의 기사들이 거주하던 곳의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던 ꡐ살로모스 성전ꡑ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아비뇽의 유배 기간 동안 이러한 수도회는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필립(Philipp) 국왕이 프랑스를 지배하던 기간에 교황은 프랑스 정부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국왕 필립은 교황 클레멘스 5세(1305~1314년)에게 성전 기사 수도회를 해체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해체 요구의 동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성전 기사 수도회는 엄청난 토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막강한 경제력을 과시하곤 하였다. 필립 국왕은 성전 기사 수도회에 입회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비도덕적인 의식을 실천한다는 명목으로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를 요구하였다.
1307년 10월 13일 국왕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의 모든 성전 기사 수도회에 속하는 수도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는 교황에게 제출할 문서를 인정하도록 강요받았다. 이 문서를 토대로 해서, 그리고 필립 국왕의 강압에 못 이겨 교황은 모든 국가의 성전 기사 수도회 소속 수도자들을 체포하여 구금시키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이 문서가 어떻게 작성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황은 1308년 2월에 자신의 명령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필립 국왕은 교황에게 더 세찬 압력을 가하였고, 교황은 다시금 명령의 취소를 철회하였다. 그리고는 수도자들로 하여금 비엔나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소환하였다. 1311년 10월에 개최된 비엔나 공의회는 주로 성전 기사 수도회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소집되었다. 교황은 국왕의 입장을 고려하여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공의회 참석자들은 성전 기사 수도회에 대한 고소 내용은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회 스스로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 국왕의 압력에 못 이겨 성전 기사 수도회는 1312년 3월 22일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 해체는 공의회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교황이 4월 3일에 개최되었던 제3차 회기에서 발표한 행정적 행위에 의해 해체된 것이었다.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로 말미암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엄청난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진행은 교황의 무기력함과 프랑스 국왕의 요구에 교황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상황은 아비뇽의 유배 기간 내내 별다른 변화 없이 계속되었다.

■ 성전 기사 수도회 聖殿騎士修道會 Templerorden
십자군 운동과 관련해서 성지 예루살렘에는 순례객을 보호하고 환자를 돌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기사 수도회가 창설되었다. 1168년 프랑스의 기사들에 의해 성전 기사 수도회가 창설되었다. ꡐ성전ꡑ이라는 이름은 프랑스의 기사들이 거주하던 곳의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던 ꡐ살로모스 성전ꡑ으로부터 유래하였다.
아비뇽의 유배 기간 동안 이러한 수도회는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필립(Philipp) 국왕이 프랑스를 지배하던 기간에 교황은 프랑스 정부에 강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국왕 필립은 교황 클레멘스 5세(1305~1314년)에게 성전 기사 수도회를 해체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해체 요구의 동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성전 기사 수도회는 엄청난 토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막강한 경제력을 과시하곤 하였다. 필립 국왕은 성전 기사 수도회에 입회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비도덕적인 의식을 실천한다는 명목으로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를 요구하였다.
1307년 10월 13일 국왕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의 모든 성전 기사 수도회에 속하는 수도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는 교황에게 제출할 문서를 인정하도록 강요받았다. 이 문서를 토대로 해서, 그리고 필립 국왕의 강압에 못 이겨 교황은 모든 국가의 성전 기사 수도회 소속 수도자들을 체포하여 구금시키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교황은 이 문서가 어떻게 작성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황은 1308년 2월에 자신의 명령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필립 국왕은 교황에게 더 세찬 압력을 가하였고, 교황은 다시금 명령의 취소를 철회하였다. 그리고는 수도자들로 하여금 비엔나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소환하였다. 1311년 10월에 개최된 비엔나 공의회는 주로 성전 기사 수도회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기 위해 소집되었다. 교황은 국왕의 입장을 고려하여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대다수의 공의회 참석자들은 성전 기사 수도회에 대한 고소 내용은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회 스스로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립 국왕의 압력에 못 이겨 성전 기사 수도회는 1312년 3월 22일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 해체는 공의회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교황이 4월 3일에 개최되었던 제3차 회기에서 발표한 행정적 행위에 의해 해체된 것이었다.
성전 기사 수도회의 해체로 말미암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엄청난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의 진행은 교황의 무기력함과 프랑스 국왕의 요구에 교황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이러한 상황은 아비뇽의 유배 기간 내내 별다른 변화 없이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