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해성사
*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죄인들과 함께한 식사)을 통해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셨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은 죄인이 자기 죄때문에 죽는 것을 바라시지 않고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죄사함에 있어서 예수에게는 구약과는 다른 독특함이 드러난다. 구약에서는 머리에 재를 쓰고 베옷을 입고 회개를 한 사람에게만 용서가 가능했다(요나). 그런데 예수께서는 놀랍게도 미리 이런 저런 보속을 행하지 않는 사람도 서슴없이 용서해주셨다. 간음한 여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요한 8,2-11). 그러나 전제조건 없이 죄가 사해졌지만 사후조건이 있었다. 즉 용서받은 사람에 맞갖게 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보내시면서 더 이상 죄 짓지 말라고 하신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그에 상응한 행동에 관해서는 마태오 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이 잘 설명해준다. 이 비유에서 왕은 일만 탈란트을 빚진 종에게 전 재산을 팔아서 당장 빚을 값으라고 독촉한다. 그러자 종은 조금만 참아 달라고 하소연을 하고, 왕은 이를 가엾게 여겨 빚을 모두 탕감해 준다. 여기에서 왕은 하느님이고 일만 탈란트라는 많은 돈을 빚진 종은 큰 죄를 지은 죄인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통회하는 죄인에게 관대하게 지은 죄를 용서해주신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18장의 비유에서 많은 빚을 탕감받은 종은 자신에게 얼마 안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그가 조금만 참아달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집어 넣고 빚을 악착같이 다 받아 낸다. 그러자 이것을 본 다른 종들이 분개하여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왕은 악한 종을 다시 부른다. 왕은 “이 몹쓸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그를 꾸짖고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형제, 자매들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 보속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께 받은 용서를 다시 한번 깊이 깨닫고 그 큰 용서를 조금이나마 본받아 이웃을 용서하고자 하는 데에 보속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 고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란 죄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죄에서의 해방이란 무슨 의미인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못을 했으면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뉘우치고 통회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잘못에 계속 마음을 매어두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잘못을 범하고 움추려들어서 고개를 못들고 의기소침해서 사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신다. 엎어졌다고 주저 않아서 울기만 하면 상책이 아니라, 일어서서 계속 길을 가야한다.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으면 그 다음은 거기에서 떠나야 한다. 그런데 열심하고 경건하다는 사람일수록 과거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 자주 되새기고, 그에 대한 통회와 보속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에게로의 집착이고 아집인 경우가 많다. 마르틴 부버가 쓴 『인간의 길』이란 책에 보면 자기 잘못만 붙잡고 맴도는 사람들을 경고하는 말이 나온다. “잘못을 저기르고 나서 줄곧 그 잘못에 대한 말만 하고 생각만 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저열한 그것을 마음에서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사람이란 생각이 가 있는 거기에 자신도 갇혀 있고, 사람 영혼이란 생각하는 그것에 온통 잠겨 있게 마련이므로, 그런 자는 저열한 것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돌아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 어쩌자는 말입니가? 똥은 이리 쓸고 저리 쓸어 본들 똥은 똥입니다… 성서에도 <악을 떠나 선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악에설랑 아예 돌아서서 더는 거기 마음을 쓰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그대는 잘못을 저질렀읍니까? 그렇다면 선을 행함으로써 이에 대처하십시오” (42쪽). 잘못과 죄를 과소평가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악을 떠나 선을 행하라는 것인만큼, 선에다 촛점을 맞추라는 얘기다. 이는 예수께서 세번이나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 사도를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살펴보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요한 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만나는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같이 아침식사를 하신 후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시고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매번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당부하신다. 초대 교부들은 이 귀절을 두고 예수께서 베드로가 세번 스승을 배반한 것을 기워갚도록 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 나를 배반했지’하고 몰아세우신 것이 아니다. ‘네가 배반한 것을 새삼 얘기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더 가슴 아파할 것이나. 이제부터는 더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목숨바쳐 아끼던 양떼들을 돌보아라’ 이런 말씀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잘못을 부여잡고 애태우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죄에서의 해방이란 죄와 잘못에 묶인 손과 발, 정신과 마음이 자유롭게 될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된 손과 발, 정신과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5) 병자성사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신체적인 질병이란 죄의 댓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병자는 바로 죄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그런 잘못된 생각에 거스려서 병자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그들을 고쳐주셨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병자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그들을 방문하여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주었다. 오늘날 병자를 더 이상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병자를 비롯하여 약한 사람, 늙고 쓸모없는 사람, 불구자를 사람들을 천시하면서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구석에 모아 놓고 그들끼리만 살다가 죽어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병자성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은 병자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병들고 허약한 이들도 하느님은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이 병자성사의 은혜이다. 병들고 허약하게 되어서 비록 가족 친지들이 나를 버릴지라도 하느님은 버리지시 않는다는 것을 안다함은 우리를 소외와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시킨다. 실상 이런 두려움에서 저지르는 악행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런 은혜는 신자들이 병든 이들을 찾아보고 위로하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전달된다. 우리 스스로 그런 은혜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교회 공동체 전체가 그런 은혜를 실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젊고 건강하고 예쁜 것만을 숭상하고 그 반대되는 것은 보려하지 않는 세상의 그릇된 풍조를 생각할 때 병자성사의 의미가 새롭게 부각된다(병원 영안실이 나 장애자 시설이 주택지역에 인접해서 건립될 때의 해당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를 생각해보라). 진정한 공동체는 인간적 눈으로 볼 때 허약하고 쓸모없는 사람까지도 감싸안으면서 그들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공동체이다.
6) 혼배성사
어느 문화권에서나 청춘 남녀가 짝을 이루어 한가정을 꾸미는 것을 특별한 형태로 축복해준다. 예수께서는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셨는데, 이를 통해서 혼인의 품위를 간접적으로 높이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남녀의 사랑을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베푸신 사랑에 비유한다. “성서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에페 3,31-32). 결혼한 남녀의 사랑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해주는 고귀한 역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베푸신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랑이고 변함이 없는 사랑이다.
남녀가 하느님의 제단 앞에서 결혼을 서약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고자 하는데에 있다고 하겠다. 자신들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헌신적인 사랑이 될 수 있기를 청원하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실상은 이기심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또 처음에는 변치않을 것같은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흔들거리고 심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서로 원수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거짓되기 쉽고 항구하지 못한 인간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서 헌신적이고 변치않기를 청하는 것이 바로 혼배성사의 의미라고 하겠다. 이런 맥락에서 혼인서약문은 참으로 뜻깊다고 하겠다: “나는 당신을 내 아내/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혼인성사는 그리스도의 자기 헌신의 지속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성사이다. 이런 사랑을 배우자 서로 간에 체험한다는 것은 큰 은혜일 것이다. 특히 자신의 이기심을 사랑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하는 거짓 사랑, 그리고 지속적이지 못한 사랑이 증가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부가 된 사람들의 과제도 적지 않다. 자신들이 받은 혼인성사의 은혜를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 거짓 사랑, 깨지기 쉬운 사랑이 아니라 자기 헌신적, 지속적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한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의 모범을 통해서 사람답게 자라나듯이 한 가정도 공동체 속에서 다른 가정을 보고 배우며 성장해 나간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깨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모범적인 가정이 그만큼 적기 때문이 아닐까?
7) 신품성사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당신 뜻에 맞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이끄셨다. 이 과정에서 항상 지도자를 보내주셨다. 모세, 여호수아, 판관들, 다윗, 솔로몬, 예언자.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교회도 하나의 공동체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교회는 공동체를 지도할 사제를 신품성사를 통해서 축성한다. 첫째로 이들은 스스로 교회 공동체에 속해있으면서도 그 공동체를 향해서 복음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고 권위있게 선포해야 한다. 세례를 받은 신자들 모두는 예외없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니지만, 이들은 그에 앞서서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그들 신앙과 삶의 기준이 되는 하느님 말씀을 분명하고 권위있게 전하는 사람이다. 두번째로는 사제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루도록 이끌어야 한다. 교회 구성원은 개개인이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 딸로 태어나는 고귀한 품위를 지니고 나름대로의 고유한 카리스마(은혜)를 지닌다(일반사제직). 그러나 그 고유한 카리스마가 충돌되지 않고 잘 조화되고, 남용되지 않고 제대로 사용되어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도록 해야하는 데, 이를 위해서 특별한 임무를 맡은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인 사제이다. 세번째로는 사제는 이렇게 일치를 위해서 애쓰는 사람으로서 일치의 성사인 성찬례를 집전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일치를 표현하고 더 깊게 한다. 그리고 다른 성사를 집전하면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한다.
사제는 신품성사를 통해서 복음선포자, 공동체의 지도자, 성사의 집전자가 된다. 이는 은혜인 동시이 과제이다. 하느님 말씀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게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고,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의 무한한 신뢰를 받게 되며, 성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힘과 위로와 용서를 체험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스스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실천해야 하며, 신자들의 무한한 신뢰를 깨트리지 않도록 이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고, 성사를 그 의미에 맞도록 올바로 집전해야 의무와 과제를 지닌다. 더 많은 받은 사람은 더 많은 과제를 지니고, 잘못하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제는 양들에게 목자가 되야지 한마리의 늑대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4) 고해성사
* 예수께서는 말씀과 행동(죄인들과 함께한 식사)을 통해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셨다. 이를 통해서 하느님은 죄인이 자기 죄때문에 죽는 것을 바라시지 않고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죄사함에 있어서 예수에게는 구약과는 다른 독특함이 드러난다. 구약에서는 머리에 재를 쓰고 베옷을 입고 회개를 한 사람에게만 용서가 가능했다(요나). 그런데 예수께서는 놀랍게도 미리 이런 저런 보속을 행하지 않는 사람도 서슴없이 용서해주셨다. 간음한 여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요한 8,2-11). 그러나 전제조건 없이 죄가 사해졌지만 사후조건이 있었다. 즉 용서받은 사람에 맞갖게 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보내시면서 더 이상 죄 짓지 말라고 하신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그에 상응한 행동에 관해서는 마태오 복음 18장 23절 이하에 나오는 비유의 말씀이 잘 설명해준다. 이 비유에서 왕은 일만 탈란트을 빚진 종에게 전 재산을 팔아서 당장 빚을 값으라고 독촉한다. 그러자 종은 조금만 참아 달라고 하소연을 하고, 왕은 이를 가엾게 여겨 빚을 모두 탕감해 준다. 여기에서 왕은 하느님이고 일만 탈란트라는 많은 돈을 빚진 종은 큰 죄를 지은 죄인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통회하는 죄인에게 관대하게 지은 죄를 용서해주신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 18장의 비유에서 많은 빚을 탕감받은 종은 자신에게 얼마 안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서 빚을 갚으라고 독촉한다. 그가 조금만 참아달라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집어 넣고 빚을 악착같이 다 받아 낸다. 그러자 이것을 본 다른 종들이 분개하여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왕은 악한 종을 다시 부른다. 왕은 “이 몹쓸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고 그를 꾸짖고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한다.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도 형제, 자매들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 보속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께 받은 용서를 다시 한번 깊이 깨닫고 그 큰 용서를 조금이나마 본받아 이웃을 용서하고자 하는 데에 보속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 고해성사를 통한 죄의 용서란 죄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죄에서의 해방이란 무슨 의미인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잘못을 했으면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뉘우치고 통회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잘못에 계속 마음을 매어두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잘못을 범하고 움추려들어서 고개를 못들고 의기소침해서 사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신다. 엎어졌다고 주저 않아서 울기만 하면 상책이 아니라, 일어서서 계속 길을 가야한다. 잘못을 깨닫고 뉘우쳤으면 그 다음은 거기에서 떠나야 한다. 그런데 열심하고 경건하다는 사람일수록 과거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 자주 되새기고, 그에 대한 통회와 보속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에게로의 집착이고 아집인 경우가 많다. 마르틴 부버가 쓴 『인간의 길』이란 책에 보면 자기 잘못만 붙잡고 맴도는 사람들을 경고하는 말이 나온다. “잘못을 저기르고 나서 줄곧 그 잘못에 대한 말만 하고 생각만 하는 자는 자기가 행한 저열한 그것을 마음에서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사람이란 생각이 가 있는 거기에 자신도 갇혀 있고, 사람 영혼이란 생각하는 그것에 온통 잠겨 있게 마련이므로, 그런 자는 저열한 것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돌아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 어쩌자는 말입니가? 똥은 이리 쓸고 저리 쓸어 본들 똥은 똥입니다… 성서에도 <악을 떠나 선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악에설랑 아예 돌아서서 더는 거기 마음을 쓰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그대는 잘못을 저질렀읍니까? 그렇다면 선을 행함으로써 이에 대처하십시오” (42쪽). 잘못과 죄를 과소평가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악을 떠나 선을 행하라는 것인만큼, 선에다 촛점을 맞추라는 얘기다. 이는 예수께서 세번이나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 사도를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살펴보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요한 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를 만나는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같이 아침식사를 하신 후 베드로에게 물으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시고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매번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당부하신다. 초대 교부들은 이 귀절을 두고 예수께서 베드로가 세번 스승을 배반한 것을 기워갚도록 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 나를 배반했지’하고 몰아세우신 것이 아니다. ‘네가 배반한 것을 새삼 얘기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네가 더 가슴 아파할 것이나. 이제부터는 더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목숨바쳐 아끼던 양떼들을 돌보아라’ 이런 말씀을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잘못을 부여잡고 애태우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죄에서의 해방이란 죄와 잘못에 묶인 손과 발, 정신과 마음이 자유롭게 될 뿐만 아니라 자유롭게 된 손과 발, 정신과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5) 병자성사
예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은 신체적인 질병이란 죄의 댓가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병자는 바로 죄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그런 잘못된 생각에 거스려서 병자 또한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그들을 고쳐주셨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병자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그들을 방문하여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주었다. 오늘날 병자를 더 이상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병자를 비롯하여 약한 사람, 늙고 쓸모없는 사람, 불구자를 사람들을 천시하면서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는다. 어느 구석에 모아 놓고 그들끼리만 살다가 죽어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병자성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은 병자까지도 포함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병들고 허약한 이들도 하느님은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것이 병자성사의 은혜이다. 병들고 허약하게 되어서 비록 가족 친지들이 나를 버릴지라도 하느님은 버리지시 않는다는 것을 안다함은 우리를 소외와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시킨다. 실상 이런 두려움에서 저지르는 악행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런 은혜는 신자들이 병든 이들을 찾아보고 위로하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통해서 전달된다. 우리 스스로 그런 은혜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교회 공동체 전체가 그런 은혜를 실현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젊고 건강하고 예쁜 것만을 숭상하고 그 반대되는 것은 보려하지 않는 세상의 그릇된 풍조를 생각할 때 병자성사의 의미가 새롭게 부각된다(병원 영안실이 나 장애자 시설이 주택지역에 인접해서 건립될 때의 해당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를 생각해보라). 진정한 공동체는 인간적 눈으로 볼 때 허약하고 쓸모없는 사람까지도 감싸안으면서 그들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공동체이다.
6) 혼배성사
어느 문화권에서나 청춘 남녀가 짝을 이루어 한가정을 꾸미는 것을 특별한 형태로 축복해준다. 예수께서는 완성된 하느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셨는데, 이를 통해서 혼인의 품위를 간접적으로 높이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남녀의 사랑을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베푸신 사랑에 비유한다. “성서에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참으로 심오한 진리가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말해 준다고 봅니다.”(에페 3,31-32). 결혼한 남녀의 사랑은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해주는 고귀한 역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베푸신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랑이고 변함이 없는 사랑이다.
남녀가 하느님의 제단 앞에서 결혼을 서약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고자 하는데에 있다고 하겠다. 자신들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헌신적인 사랑이 될 수 있기를 청원하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고 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실상은 이기심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또 처음에는 변치않을 것같은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흔들거리고 심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서로 원수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거짓되기 쉽고 항구하지 못한 인간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아서 헌신적이고 변치않기를 청하는 것이 바로 혼배성사의 의미라고 하겠다. 이런 맥락에서 혼인서약문은 참으로 뜻깊다고 하겠다: “나는 당신을 내 아내/남편으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일생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혼인성사는 그리스도의 자기 헌신의 지속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성사이다. 이런 사랑을 배우자 서로 간에 체험한다는 것은 큰 은혜일 것이다. 특히 자신의 이기심을 사랑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하는 거짓 사랑, 그리고 지속적이지 못한 사랑이 증가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부가 된 사람들의 과제도 적지 않다. 자신들이 받은 혼인성사의 은혜를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 거짓 사랑, 깨지기 쉬운 사랑이 아니라 자기 헌신적, 지속적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한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의 모범을 통해서 사람답게 자라나듯이 한 가정도 공동체 속에서 다른 가정을 보고 배우며 성장해 나간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깨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모범적인 가정이 그만큼 적기 때문이 아닐까?
7) 신품성사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당신 뜻에 맞는 공동체를 이루도록 이끄셨다. 이 과정에서 항상 지도자를 보내주셨다. 모세, 여호수아, 판관들, 다윗, 솔로몬, 예언자.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 교회도 하나의 공동체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교회는 공동체를 지도할 사제를 신품성사를 통해서 축성한다. 첫째로 이들은 스스로 교회 공동체에 속해있으면서도 그 공동체를 향해서 복음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고 권위있게 선포해야 한다. 세례를 받은 신자들 모두는 예외없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니지만, 이들은 그에 앞서서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그들 신앙과 삶의 기준이 되는 하느님 말씀을 분명하고 권위있게 전하는 사람이다. 두번째로는 사제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 조화와 일치를 이루도록 이끌어야 한다. 교회 구성원은 개개인이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 딸로 태어나는 고귀한 품위를 지니고 나름대로의 고유한 카리스마(은혜)를 지닌다(일반사제직). 그러나 그 고유한 카리스마가 충돌되지 않고 잘 조화되고, 남용되지 않고 제대로 사용되어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도록 해야하는 데, 이를 위해서 특별한 임무를 맡은 이들이 교회의 지도자인 사제이다. 세번째로는 사제는 이렇게 일치를 위해서 애쓰는 사람으로서 일치의 성사인 성찬례를 집전하면서 교회 공동체의 일치를 표현하고 더 깊게 한다. 그리고 다른 성사를 집전하면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한다.
사제는 신품성사를 통해서 복음선포자, 공동체의 지도자, 성사의 집전자가 된다. 이는 은혜인 동시이 과제이다. 하느님 말씀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보게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고,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의 무한한 신뢰를 받게 되며, 성사를 통해서 사람들이 힘과 위로와 용서를 체험하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스스로 하느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실천해야 하며, 신자들의 무한한 신뢰를 깨트리지 않도록 이에 합당하게 살아야 하고, 성사를 그 의미에 맞도록 올바로 집전해야 의무와 과제를 지닌다. 더 많은 받은 사람은 더 많은 과제를 지니고, 잘못하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제는 양들에게 목자가 되야지 한마리의 늑대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