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교의사적인 전개
세례의 역사에는 교회의 역사가 반영되어 나타난다. 세례의 실천과 실학은 (규범을 이루는 초기 교회 외에도) 항상 그 당시 교회의 시대적인 모습과 자의식이 영향을 끼쳤고, 그 밖에도 개인적인 신앙 결단과 사회적인 통념도 영향을 미쳤다.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세례 예식에 반영되어 나타났고, 이는 다시금 세례 이해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특별히 초기의 수세기 동안에 해당되는데, 이 때에 세례 신학은 세례를 위한 교리교육과 밀접한 연관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세례에 대해 교의사적으로 다룰 때에는 적어도 윤곽만이라도 시대적인 배경, 교회상 그리고 전례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
3.1. 고대교회: 종말의 구원공동체에로의 이행 (移行)으로서의 세례
콘스탄틴 시대의 전환까지 교회는 작은 공동체들로 구성되어 전체 사회 안에서 여기 저기 흩어져서 있었다(Diaspora 상황).
교회는 1세기의 대단한 선교적인 충동에 따라서 자라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방랑 설교자를 통해서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 그냥 있으면서 증거를 통해서 사회에 영향을 주었다. 교회상은 종말론적이고 성령론적으로 각인되었다: 다가오는 종말의 세계에 대한 희망과 성령의 체험은 對照的(alternativ)인 삶의 형태를 가능케 했다. 교회는 자신을 강력하게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각인된 종말의 구원 공동체로 이해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법적 질서와 제도에는 상당히 충실하게 대했으나, 사회 자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회의적인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
그리스도교로 회심하는 것은 대조사회에로 입문하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바깥 사회에서 당연시되는 생활 형태를 거부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세례는 칼로 자른 듯한 단절로, 많은 요구를 포함한 삶의 전환으로 체험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히뽈리뚜스(Hippolitus)는 2세기 말경의 로마에서 교회 입문에 관한 사항을 전하는 <사도전승 Traditio Apostolica> (215년경 저술)에서 상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세례지원자는 예비신자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세례 받고자 하는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검투사들과 그들을 훈육하는 사람들, 騎士와 장교들, 神像을 만들어 내는 이들, 창녀들이 신자가 되려면 그들의 직업을 버리든지, 아니면 예비자 교리를 포기해야 한다. (이방인의 국가에 봉직하는) 교사들은 그들의 교사직을 중단하도록 권유받았다. 3년 동안 지속되는 예비자 기간동안 지원자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살도록 연습하고 익혀야 한다. 그들이 세례 준비의 마지막 단계에 받아들여지기 전에 교회 공동체는 그들의 삶이 바뀌었는지를 조사한다: “예비자로 있는 동안 그들이 성실하게 살았는지, 과부들을 공경했는지 병자들을 방문했는지, 온갖 종류의 선행을 했는지 (물어 볼 것이다).”1)
삶의 전환은 전례적 행동에서도 강조된다: 2 세기 경에 “나는 믿나이다”라는 세례 고백 전에 “나는 끊어 버립니다”라는 선언이 들어오게 된다. 여러 번의 구마예식과 도유는 악의 세력의 영향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 입문의 전 과정은 장기간에 걸쳐서 옛 생활을 버리고 서서히 교회 공동체의 삶으로 옮아가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이 입문과정은 부활성야 때에 정점에 이른다. 함께 밤을 지새우고 동이 틀 무렵에 (가능한 흐르는) 물에 기도를 한 다음에 세례 지원자는 그들의 옷을 벗는데, 여자들의 경우에는 금이나 은으로 된 장식품까지도 내려놓는다. “왜냐하면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물에 갖고 들어가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사제는 모든 세례자를 손으로 잡고 “사탄아, 너와 너에 대한 모든 예배와 모든 (미신적인) 행위를 끊어 버린다”고 말하도록 한다. 물가에서 세례 집전자는 세례자에게 세번 질문형식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신앙을 묻는데, 매번 “나는 믿습니다”라는 대답이 있은 후에 세례를 준다. 세례자들이 물에서 나와 다시 옷을 입은 후에 주교는 교회 내에서 그들에게 안수를 하고 감사의 기름을 바른다. 그 다음에 그들은 처음으로 전체 공동체와 함께 기도를 바치고 평화의 입맞춤을 하게 된다 (이는 그때까지 허락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입맞춤은 아직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성사에 이어서 바로 성찬례가 거행된다.2)
세례가 전면적인 삶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세례 신학은 전례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세례는 무엇보다도 옛 것을 버리고, 홍해바다를 건너서, 새로운 땅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삶에 이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물을 거쳐서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以前의) 삶의 죽을 운명을 벗어버리지 않고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자로써 물 속 잠기고, 살아 있는 자로써 물에서 나온다.”3) 오리게네스(+254 경)는 세례를 출발, 지금까지의 것에서 떠남, 강 건너편으로 건너감이라고 표현한다. 교회론과 마찬가지로 세례신학도 강력하게 종말론적-성령론적으로 정향되었다: 세례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 비추이고 움직이는 공동체에로 옮아가는 것인데, 이 공동체는 다가오는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집단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옛 것을 씻어 버림, 새로운 삶에로 태어남 그리고 성령의 비추임이라는 성서적 주제들이 즐겨 사용되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상당히 강조된 성령론적인 교회와 세례 이해는 이단자에 의한 세례의 유효성에 관한 논쟁으로 이끌었다: 이단적 혹은 분파적인 종파에서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에 들어오고자 할 때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2세기 이후부터 이 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르게 실행해 왔다: 아프리카와 동방의 많은 지역에서는 이단자는 성령을 지닐 수 없고, 그래서 성령을 전할 수도 없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베푼 세례는 무효이고, 가톨릭 교회로 올 때에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반면에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성령의 선물을 비교적 약하게 강조하고, 세례 받는 이에게 말해진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더 강조한다. 그래서 교회 밖에서 베풀어진 세례를 인정하고, 개종자들에게는 안수만을 주어서 받아들였다. 후에 아우구스티노(+430)는 세례의 유효성과 효과를 구분하게 되는데, 이와 함께 서방교회에서는 로마의 실천이 관철되었다.

3. 교의사적인 전개
세례의 역사에는 교회의 역사가 반영되어 나타난다. 세례의 실천과 실학은 (규범을 이루는 초기 교회 외에도) 항상 그 당시 교회의 시대적인 모습과 자의식이 영향을 끼쳤고, 그 밖에도 개인적인 신앙 결단과 사회적인 통념도 영향을 미쳤다. 세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세례 예식에 반영되어 나타났고, 이는 다시금 세례 이해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특별히 초기의 수세기 동안에 해당되는데, 이 때에 세례 신학은 세례를 위한 교리교육과 밀접한 연관 속에 있었다. 그러므로 세례에 대해 교의사적으로 다룰 때에는 적어도 윤곽만이라도 시대적인 배경, 교회상 그리고 전례를 함께 다루어야 한다.
3.1. 고대교회: 종말의 구원공동체에로의 이행 (移行)으로서의 세례
콘스탄틴 시대의 전환까지 교회는 작은 공동체들로 구성되어 전체 사회 안에서 여기 저기 흩어져서 있었다(Diaspora 상황).
교회는 1세기의 대단한 선교적인 충동에 따라서 자라났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방랑 설교자를 통해서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 그냥 있으면서 증거를 통해서 사회에 영향을 주었다. 교회상은 종말론적이고 성령론적으로 각인되었다: 다가오는 종말의 세계에 대한 희망과 성령의 체험은 對照的(alternativ)인 삶의 형태를 가능케 했다. 교회는 자신을 강력하게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영에 의해서 각인된 종말의 구원 공동체로 이해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의 법적 질서와 제도에는 상당히 충실하게 대했으나, 사회 자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회의적인 태도로 거리를 두었다.
그리스도교로 회심하는 것은 대조사회에로 입문하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바깥 사회에서 당연시되는 생활 형태를 거부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세례는 칼로 자른 듯한 단절로, 많은 요구를 포함한 삶의 전환으로 체험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히뽈리뚜스(Hippolitus)는 2세기 말경의 로마에서 교회 입문에 관한 사항을 전하는 <사도전승 Traditio Apostolica> (215년경 저술)에서 상세하게 증언하고 있다: 세례지원자는 예비신자로 받아들여지기 전에 세례 받고자 하는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검투사들과 그들을 훈육하는 사람들, 騎士와 장교들, 神像을 만들어 내는 이들, 창녀들이 신자가 되려면 그들의 직업을 버리든지, 아니면 예비자 교리를 포기해야 한다. (이방인의 국가에 봉직하는) 교사들은 그들의 교사직을 중단하도록 권유받았다. 3년 동안 지속되는 예비자 기간동안 지원자들은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살도록 연습하고 익혀야 한다. 그들이 세례 준비의 마지막 단계에 받아들여지기 전에 교회 공동체는 그들의 삶이 바뀌었는지를 조사한다: “예비자로 있는 동안 그들이 성실하게 살았는지, 과부들을 공경했는지 병자들을 방문했는지, 온갖 종류의 선행을 했는지 (물어 볼 것이다).”1)
삶의 전환은 전례적 행동에서도 강조된다: 2 세기 경에 “나는 믿나이다”라는 세례 고백 전에 “나는 끊어 버립니다”라는 선언이 들어오게 된다. 여러 번의 구마예식과 도유는 악의 세력의 영향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 입문의 전 과정은 장기간에 걸쳐서 옛 생활을 버리고 서서히 교회 공동체의 삶으로 옮아가는 과정이라고 하겠다.
이 입문과정은 부활성야 때에 정점에 이른다. 함께 밤을 지새우고 동이 틀 무렵에 (가능한 흐르는) 물에 기도를 한 다음에 세례 지원자는 그들의 옷을 벗는데, 여자들의 경우에는 금이나 은으로 된 장식품까지도 내려놓는다. “왜냐하면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물에 갖고 들어가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사제는 모든 세례자를 손으로 잡고 “사탄아, 너와 너에 대한 모든 예배와 모든 (미신적인) 행위를 끊어 버린다”고 말하도록 한다. 물가에서 세례 집전자는 세례자에게 세번 질문형식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신앙을 묻는데, 매번 “나는 믿습니다”라는 대답이 있은 후에 세례를 준다. 세례자들이 물에서 나와 다시 옷을 입은 후에 주교는 교회 내에서 그들에게 안수를 하고 감사의 기름을 바른다. 그 다음에 그들은 처음으로 전체 공동체와 함께 기도를 바치고 평화의 입맞춤을 하게 된다 (이는 그때까지 허락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입맞춤은 아직 거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례성사에 이어서 바로 성찬례가 거행된다.2)
세례가 전면적인 삶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세례 신학은 전례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세례는 무엇보다도 옛 것을 버리고, 홍해바다를 건너서, 새로운 땅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삶에 이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물을 거쳐서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以前의) 삶의 죽을 운명을 벗어버리지 않고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은 자로써 물 속 잠기고, 살아 있는 자로써 물에서 나온다.”3) 오리게네스(+254 경)는 세례를 출발, 지금까지의 것에서 떠남, 강 건너편으로 건너감이라고 표현한다. 교회론과 마찬가지로 세례신학도 강력하게 종말론적-성령론적으로 정향되었다: 세례는 하느님의 영에 의해 비추이고 움직이는 공동체에로 옮아가는 것인데, 이 공동체는 다가오는 세상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집단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옛 것을 씻어 버림, 새로운 삶에로 태어남 그리고 성령의 비추임이라는 성서적 주제들이 즐겨 사용되었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상당히 강조된 성령론적인 교회와 세례 이해는 이단자에 의한 세례의 유효성에 관한 논쟁으로 이끌었다: 이단적 혹은 분파적인 종파에서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에 들어오고자 할 때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2세기 이후부터 이 점에 대해서는 서로 다르게 실행해 왔다: 아프리카와 동방의 많은 지역에서는 이단자는 성령을 지닐 수 없고, 그래서 성령을 전할 수도 없다는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베푼 세례는 무효이고, 가톨릭 교회로 올 때에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반면에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성령의 선물을 비교적 약하게 강조하고, 세례 받는 이에게 말해진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을 더 강조한다. 그래서 교회 밖에서 베풀어진 세례를 인정하고, 개종자들에게는 안수만을 주어서 받아들였다. 후에 아우구스티노(+430)는 세례의 유효성과 효과를 구분하게 되는데, 이와 함께 서방교회에서는 로마의 실천이 관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