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의 역사적 변천

1. 초대교회의 전례
초대 교회에서는 전례가 미사와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례는 항상 식탁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AD 150년경 전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성찬례와 식사가 구별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성찬례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유대교의 전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선 빠스카 축제가 부활축제의 배경이 되고 오슨절(Pentecoste)이 부활 축제 마감하는 성신강림절이 되었습니다.
빠스카는 출애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빠스카축제를 민족의 해방을 기념하는 최대의 축제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50일 뒤 추수감사제를 지내는 날을 오순절로 불렀습니다. 빠스카 축제-오순절의 유대교 전례문화가 그리스도교에 와서 부활절 -성령강림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7일을 한 주간으로 세는 도식도 유대인을 비롯한 셈족의 계산법이었는데 그리스도교 전례에 도입되고 전세계에 퍼졌습니다.
미사의 성찬례 역시 빠스카 만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제1독서 후 시편을 읽는 관습도 유대교 전례에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알렐루야(야훼를 찬미하라는 뜻의 환호)’, ‘아멘(동의를 표시하는 말)’도 히브리어로써 유대교 전례에서 쓰이던 말입니다. 하루를 계산하는 것도 아침부터 저녁이 아니라 저녁부터 다음 날 낮까지로 잡는 것도 해넘이에서부터 해지기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던 유대교의 전례의 영향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하루의 일정 시각마다 바치는 성무일도 기도도 유대교의 시간경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2. 고전시대의 전례(3-4세기)
고전시대에 오면 유대교 전례에서 유래된 요소들이 로마문화의 여향을 받아 로마식으로 토착회되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부터 대형화된 성전을 로마의 건축 기술로 축조하게 되어 교회으분야가 개척되었습니다. 미사중에 라틴어를 쓰고 미사의 제의도 로마의 축제 복장을 응용하였습니다. 실내복은 장백의가 되었으며, 목도리는 개두포가 되었고, 외투는 제의가 되었으며, 세수수건은 영대가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궁중예식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는데, 성체나 십자가 앞에서 부복자세를 취한다든지 행렬시에 시종을 두명세운다는지 향을 앞세우는 것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의 제대와 기도할 때의 방향은 태양이 뜨는 동쪽으로 향하는 것도 당시 종교문화의 영향입니다.
오늘날 널리쓰이는 ‘미사’라는 말은 “Ite missa est”라는 파견사의 ‘missa’에서 나왔습니다. “Ite missa est”는 ”가시오, 당신을 파견합니다.“라는 뜻이고, ‘missa’는 파견이라는 뜻인 ‘missio’의 현재 분사형입니다. 모든 교리 교육은 미사 전례중에 실시 되었고, 미사는 주일에만 거행하였습니다. 평일에는 아침, 저녁으로 말씀의 전례를 신자들이 거행하였고, 시편기도가 보편화되었습니다. 미사중의 봉헌제물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으로써 중시되었습니다. 미사전례는 공동체가 주체가 되어 신자들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4세기 이후 신앙의 자유가 공인되고 로마제국의 국교가된 후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미사 전례는 각 지역 공동체의 다양한 모습과 생동적인 모습이 점차로 제도화되고, 규율화되어 갔습니다. 당시는 서방교회만 해도 로마전례(현재의 전례형태), 프랑스 북부와 갈리아 전례, 이태리 밀라노지방 전례, 암브로시오 전례, 스페인 지방의 모자라비 전례 등이 있었고, 동방교회는 오늘날 거의 소멸된 예루살렘전례, 안티오키아 전례,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전례 등이 있었습니다.
5-6세기 경에는 로마 주교가 교회의일치를 위하여 각 지역 공동체를 순회하며 미사를 거행하면서 미사의 테스트(예식서)가 규정되게 되었다.

3. 중세기 전례
중세기에는 프랑크 왕국을 통일한 샤를르 대제가 각지역의 영주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갈리아전례에 로마 전례를 도입하였고, 이 때에 생긴 로마적 갈리아 전례가 다시 로마로 되돌아와 10세기 이후 전 유럽에 전래되었습니다.
각 지역 공동체의 전례가 성문화되고, 단일화됨으로써 전례안에 살아있던 공동체의 의식은 개인주의화 되고,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던 형태에서 사제 혼자 역할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정신에 따라 상당히 완화된것입니다.) 이러한 성직자 중심의 전례는 공동체 없이도 사사로이 미사를 거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또한 화폐의 발달로 신자들이 빵과 포도주를 비롯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현물을 봉헌하던 관습에서 현금을 봉헌하는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밖에 미사전례에 성가, 제구, 장식 등 예술적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초기 교회의 공동체적이고 역동적인 성격이 개인적이고 정적인 성격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의 교회 분열 이후 이러한 현상은 가속화되었습니다. Protestant 교회의 출현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에서 전반적인 교리가 정리되었고, 여기서 100여가지가 넘게 행해지던 성사를 칠성사로 정리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전례를 통한 교회의 쇄신노력이 있었으나 교황 주도하에서 전례서를 개정, 보급함으로써 통일된 전례서를 개정하는데 그쳤습니다. 이로써 교회의 건축과 성음악은 크게 발전하였으나 전례의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고착화된 전례속에서 제단과 신자들 좌석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라틴어가 일사언어가 아닌데도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는 성직자 중심의 전례일 수 빆에 없었고 이는 미사에 대한 몰이해 현상을 초래하여 미사가 아닌 사사로운 신심행위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4. 전례의 중앙 집권적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17세기부터 전례부흥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복음이 전파된 지역에서 로마 전례의 토착화는 불가능했고, 전례의 모방은 복음화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황청의 제재를 받게되고 따라서 음성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5. 19세기에는 계몽사상이 일반화 되면서 전례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 구원을 위한 실질적 효과에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전례를 간소화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 성을 강조하며, 공동체의식을 중요시하여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하게 되었습니다.

6. 20세기의 전례
20세기에 와서는 교황 비오 10세도 이같은 취지에 찬동하여 전례쇄신을 위한 국제모임(1951-1960)이 열리게 되었고, 이러한 전례운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전례헌장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전례헌장은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극단적으로 규율화되고 개인화 된 전례를 추기 교회의 모범을 따라 공동체의 신앙 문화로 회복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이는 17세기 이후 지속되어 온 전례 개혁운동의 성과를 정리한 것으로 공동체적인 전례에로의 개혁과 촉진을 위한 일반적인 원칙을 제시한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전례가 그 때까지 규율화 개인화됨에 따라 신앙생활의 관심밖으로 밀려난 전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례는 교회의 모든 사도직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전례헌장 10항],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항목을 할애하여 전례 교육을 강화하자고 촉구하였습니다.[14-20항] 그리고 전례개혁의 일반규정을 제시함으로써[21-40항], 각 지역 공동체의 특성에 맞추어 전례를 개혁할 수 있도록 전례 토착화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다만 로마 전례의 본질적 통일성을 보존하는 한도내에서 개혁 가능성을 제한함으로써 전례개혁의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혼란을 예방하는 한편, 본격적인 전례개혁을 위해서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전례가 토착화되어 한국교회와 사회의 복음화에 적중하는 공동체 문화로써 성숙하자면 한국인의 정신적 전통과 현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한국교회의 공동체적인 변화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전례개혁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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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1. 초대교회의 전례
    초대 교회에서는 전례가 미사와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례는 항상 식탁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AD 150년경 전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성찬례와 식사가 구별되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성찬례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유대교의 전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우선 빠스카 축제가 부활축제의 배경이 되고 오슨절(Pentecoste)이 부활 축제 마감하는 성신강림절이 되었습니다.
    빠스카는 출애급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빠스카축제를 민족의 해방을 기념하는 최대의 축제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50일 뒤 추수감사제를 지내는 날을 오순절로 불렀습니다. 빠스카 축제-오순절의 유대교 전례문화가 그리스도교에 와서 부활절 -성령강림으로 바뀌었습니다. 또한 7일을 한 주간으로 세는 도식도 유대인을 비롯한 셈족의 계산법이었는데 그리스도교 전례에 도입되고 전세계에 퍼졌습니다.
    미사의 성찬례 역시 빠스카 만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제1독서 후 시편을 읽는 관습도 유대교 전례에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알렐루야(야훼를 찬미하라는 뜻의 환호)’, ‘아멘(동의를 표시하는 말)’도 히브리어로써 유대교 전례에서 쓰이던 말입니다. 하루를 계산하는 것도 아침부터 저녁이 아니라 저녁부터 다음 날 낮까지로 잡는 것도 해넘이에서부터 해지기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던 유대교의 전례의 영향입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하루의 일정 시각마다 바치는 성무일도 기도도 유대교의 시간경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2. 고전시대의 전례(3-4세기)
    고전시대에 오면 유대교 전례에서 유래된 요소들이 로마문화의 여향을 받아 로마식으로 토착회되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면서부터 대형화된 성전을 로마의 건축 기술로 축조하게 되어 교회으분야가 개척되었습니다. 미사중에 라틴어를 쓰고 미사의 제의도 로마의 축제 복장을 응용하였습니다. 실내복은 장백의가 되었으며, 목도리는 개두포가 되었고, 외투는 제의가 되었으며, 세수수건은 영대가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궁중예식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는데, 성체나 십자가 앞에서 부복자세를 취한다든지 행렬시에 시종을 두명세운다는지 향을 앞세우는 것등이 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의 제대와 기도할 때의 방향은 태양이 뜨는 동쪽으로 향하는 것도 당시 종교문화의 영향입니다.
    오늘날 널리쓰이는 ‘미사’라는 말은 “Ite missa est”라는 파견사의 ‘missa’에서 나왔습니다. “Ite missa est”는 ”가시오, 당신을 파견합니다.“라는 뜻이고, ‘missa’는 파견이라는 뜻인 ‘missio’의 현재 분사형입니다. 모든 교리 교육은 미사 전례중에 실시 되었고, 미사는 주일에만 거행하였습니다. 평일에는 아침, 저녁으로 말씀의 전례를 신자들이 거행하였고, 시편기도가 보편화되었습니다. 미사중의 봉헌제물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으로써 중시되었습니다. 미사전례는 공동체가 주체가 되어 신자들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4세기 이후 신앙의 자유가 공인되고 로마제국의 국교가된 후 신자들이 증가하면서 미사 전례는 각 지역 공동체의 다양한 모습과 생동적인 모습이 점차로 제도화되고, 규율화되어 갔습니다. 당시는 서방교회만 해도 로마전례(현재의 전례형태), 프랑스 북부와 갈리아 전례, 이태리 밀라노지방 전례, 암브로시오 전례, 스페인 지방의 모자라비 전례 등이 있었고, 동방교회는 오늘날 거의 소멸된 예루살렘전례, 안티오키아 전례,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 전례 등이 있었습니다.
    5-6세기 경에는 로마 주교가 교회의일치를 위하여 각 지역 공동체를 순회하며 미사를 거행하면서 미사의 테스트(예식서)가 규정되게 되었다.

    3. 중세기 전례
    중세기에는 프랑크 왕국을 통일한 샤를르 대제가 각지역의 영주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갈리아전례에 로마 전례를 도입하였고, 이 때에 생긴 로마적 갈리아 전례가 다시 로마로 되돌아와 10세기 이후 전 유럽에 전래되었습니다.
    각 지역 공동체의 전례가 성문화되고, 단일화됨으로써 전례안에 살아있던 공동체의 의식은 개인주의화 되고, 신자들이 능동적으로 역할을 분담하던 형태에서 사제 혼자 역할을 독점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정신에 따라 상당히 완화된것입니다.) 이러한 성직자 중심의 전례는 공동체 없이도 사사로이 미사를 거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또한 화폐의 발달로 신자들이 빵과 포도주를 비롯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고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현물을 봉헌하던 관습에서 현금을 봉헌하는 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밖에 미사전례에 성가, 제구, 장식 등 예술적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초기 교회의 공동체적이고 역동적인 성격이 개인적이고 정적인 성격으로 변질된 것입니다.
    루터와 칼빈의 교회 분열 이후 이러한 현상은 가속화되었습니다. Protestant 교회의 출현으로 말미암은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트리엔트 공의회(1545년)에서 전반적인 교리가 정리되었고, 여기서 100여가지가 넘게 행해지던 성사를 칠성사로 정리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전례를 통한 교회의 쇄신노력이 있었으나 교황 주도하에서 전례서를 개정, 보급함으로써 통일된 전례서를 개정하는데 그쳤습니다. 이로써 교회의 건축과 성음악은 크게 발전하였으나 전례의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고착화된 전례속에서 제단과 신자들 좌석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라틴어가 일사언어가 아닌데도 라틴어로 진행되는 미사는 성직자 중심의 전례일 수 빆에 없었고 이는 미사에 대한 몰이해 현상을 초래하여 미사가 아닌 사사로운 신심행위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4. 전례의 중앙 집권적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17세기부터 전례부흥운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복음이 전파된 지역에서 로마 전례의 토착화는 불가능했고, 전례의 모방은 복음화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황청의 제재를 받게되고 따라서 음성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5. 19세기에는 계몽사상이 일반화 되면서 전례가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인간 구원을 위한 실질적 효과에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전례를 간소화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창의 성을 강조하며, 공동체의식을 중요시하여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하게 되었습니다.

    6. 20세기의 전례
    20세기에 와서는 교황 비오 10세도 이같은 취지에 찬동하여 전례쇄신을 위한 국제모임(1951-1960)이 열리게 되었고, 이러한 전례운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전례헌장으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전례헌장은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극단적으로 규율화되고 개인화 된 전례를 추기 교회의 모범을 따라 공동체의 신앙 문화로 회복시키는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이는 17세기 이후 지속되어 온 전례 개혁운동의 성과를 정리한 것으로 공동체적인 전례에로의 개혁과 촉진을 위한 일반적인 원칙을 제시한 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전례가 그 때까지 규율화 개인화됨에 따라 신앙생활의 관심밖으로 밀려난 전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례는 교회의 모든 사도직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전례헌장 10항],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항목을 할애하여 전례 교육을 강화하자고 촉구하였습니다.[14-20항] 그리고 전례개혁의 일반규정을 제시함으로써[21-40항], 각 지역 공동체의 특성에 맞추어 전례를 개혁할 수 있도록 전례 토착화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다만 로마 전례의 본질적 통일성을 보존하는 한도내에서 개혁 가능성을 제한함으로써 전례개혁의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혼란을 예방하는 한편, 본격적인 전례개혁을 위해서는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전례가 토착화되어 한국교회와 사회의 복음화에 적중하는 공동체 문화로써 성숙하자면 한국인의 정신적 전통과 현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한국교회의 공동체적인 변화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 전례개혁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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