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교인 박해 ~敎人迫害 Christenverfolgungen
교회는 예수께서 걸어가신 운명에 동참하기 마련이다. ꡒ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그들은 또한 여러분들을 박해할 것이다ꡓ(요한 15,20). 이러한 예고는 우선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의 직접적인 삶의 공간에 해당하였다.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은, 예수께서 이미 예고하신 것처럼(요한 16,2), 회당으로부터의 추방이라는 처벌을 초래한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 생전에도 눈을 뜨게 된 소경의 경우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요한 9,35). 예수 승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는 박해를 받았다. 이 박해로 말미암아 부제 스테파노가 순교당했고(사도 7,57 이하),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유다와 사마리아로 흩어졌다(사도 8,1 이하). 바오로 역시 박해에 가담하였으나, 다마스커스를 향해 가는 도중 회심하게 되었다(사도 9,1 이하).
교황의 역사와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로마에서 일어났던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박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의 한 종파로 취급되었다. 유다인들은 자유로운 신앙의 권리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 역시 신앙 생활에 있어서 별다른 박해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은 64년 로마 전체를 폐허로 만들어 버린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방화의 혐의를 뒤집어씌움으로써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네로 황제는 자신을 방화의 장본인으로 지목하여 격분한 로마 시민들의 주의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쏠리게 하려고 의도하였다. 곧 이어 불어닥친 박해로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희생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추측컨대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 고백을 금지하고, 그것을 위반할 경우 사형에 처형하는 법령을 반포했을 것이다. 이 법령은 네로가 살해당한 후에도 여전히 효력을 발생하였다. 이러한 법령의 반포는 그리스도교인들을 겨냥하여 퍼뜨린 헛소문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즉 그리스도교인들은 예배 때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봉헌하고, 인육을 먹는 수치스러운 행위를 일삼는 무신론자들이라는 헛소문이 유포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역 불경의 죄를 짓고 있다는 헛소문도 법령 반포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들은 로마 제국이 당하는 온갖 재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고가 만연했었다.
황제 네로의 후계자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별다른 적대감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95년 도미티아누스(Domitian) 황제 때 길지는 않았지만 매우 혹독한 박해가 있었고, 이 박해로 황제의 친척들도 희생되었다. 이 이후 잠시 박해가 없는 시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네로 황제가 반포한 법령은 여전히 효력을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위 공직자들의 기분이나 생각에 따라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 내에서는 항상 박해가 계속되었다.
트라야누스(Trajan, 98~117년) 황제는 비티니아의 총독 플리니우스(Plinius)의 문의에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을 색출해서는 안 되나, 고발이 있을 경우 재판에 회부하고 만일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사형에 처하라고 회신하기도 하였다. 황제 트라야누스 통치 때 순교한 유명한 인물로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를 들 수 있겠고,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 Aurel, 161~180년) 통치 때 순교한 저명한 인물로는 유스티노를 들 수 있다.
2세기가 끝날 무렵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선입견도 점점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네로 황제의 법령은 여전히 폐기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드문드문 박해가 발생했고, 특히 황제 데치우스(Dezius, 249~251년) 통치 때에는 박해가 극도에 달하기도 하였다. 데치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근절을 국정의 주요 정책으로 삼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로 인해 신들이 진노하여 로마 제국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였고, 이 위협은 옛 로마의 제신 숭배 의식을 강화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로마의 그리스도교는 안정을 회복했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신자들의 수도 늘어났다. 이 무렵 그리스도교인들의 수는 대략 3만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리고 교계 제도도 격식을 갖추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46명의 성직자들이 교계 제도의 선두를 구성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7명의 부제와 7명의 차부제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100여 명의 하위 성직자들의 협력을 받고 있었다. 황제 데치우스는 이러한 교계 제도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 253~260년)는 그리스도교의 성찬 전례에 참석할 경우 사형에 처할 것이라며 이를 금지시켰고, 모든 주교, 신부 그리고 부제들을 체포하여 처형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이 박해 때 순교한 유명한 인물들은 교황 식스토 2세와 부제 라우렌시오였다.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Galienus) 통치하에서 그리스도교는 상당히 오랜 기간 평온을 누렸다. 그러나 303년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kletian, 284~305년)는 마지막이자 가장 혹독한 박해를 일으켰다. 303년 2월 23일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모든 교회 건물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서적을 폐기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노예로 팔렸고, 나머지는 국가의 모든 공직으로부터 추방되었다. 드디어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4년 모든 그리스도교인들로 하여금 배교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그 측근들은 마치 야수처럼 광란했고 대량 학살도 드물지 않게 자행하였다. 로마의 동쪽 정보지에서 잔학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서쪽 지역의 경우 306년 콘스탄티누스가 군대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전기 작가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왕의 계승을 위해 서로 각축을 벌렸던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Maxentius)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에서 하늘로부터 ꡒ이 표지를 통해 승리하라!ꡓ라는 글씨가 새겨진 빛나는 십자가가 콘스탄티누스에게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밤 그리스도께서 콘스탄티누스에게 발현하시어 십자가 표지를 군인들의 방패에 새겨 넣을 것을 요구하셨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10월 28일 로마 근교의 밀비히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그리스도교를 위해서는 이 전투에서의 승리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313년 2월 이른바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었고, 이 칙령은 그리스도교로의 개종과 그리스도교의 종교 신봉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박해 시대는 – 가끔은 평온을 유지한 시기도 없지 않았다 – 로마 교회에 신앙의 시련기를 가져다 주었다. 한편으로 교회는 짧은 시간 동안에 자신의 지도자들을 잃어버렸다. 박해 시대의 거의 모든 주교들은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른 편으로 교회는 ꡐ순교의 피는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위한 씨앗ꡑ이라는 격언이 지니고 있는 진리를 체험하기도 하였다. 박해를 통해 그리스도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였다. 그리고 순교자들은 각별한 공경의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순교자들은 성인으로 칭송을 받았고, 그들의 순교일 – 영원한 생명을 위한 탄생일이기도 하다 – 은 묘지에서 기념되었다. 이러한 순교자들 이외에도 비록 죽음을 통해서는 아니지만 혹독한 고문과 투옥을 통해 신앙을 증거한 이른바 ꡐ고백자ꡑ들도 있었다. 이들 역시 교회의 각별한 경의를 누렸다.
순교와 죽음의 순간에 직면하여 신앙을 충실하게 고백하고 증거한 수많은 증인들 이외에,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고 박해자들에게 신앙의 서적들과 전례서들을 넘겨주었던 일단의 무리들도 없지 않았다. 나중에 이러한 무리들 때문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논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즉 이른바 이들 배교자들이 회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교회 공동체 안으로 수용될 수 있는가, 아니면 교회 공동체로부터 제외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한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논쟁은 교회가 극복해야 할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교회의 전 역사와 함께 항상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십자군 전쟁 후, 세계 선교의 역사 안에서, 우리 시대에 와서는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 안에서, 그리고 교회가 식민지 통치자들과 결탁했던 제3 세계의 나라들 안에서 박해는 계속되어 왔다. 최근의 교황들은 거듭 이러한 박해에 대해 언급했고, 모든 민족을 위한 종교 자유를 호소하였다. 수년 전부터 교회는 해마다 부활 후 제6주일을 ꡐ박해받는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ꡑ로 제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 그리스도교인 박해 ~敎人迫害 Christenverfolgungen
교회는 예수께서 걸어가신 운명에 동참하기 마련이다. ꡒ사람들이 나를 박해했으면 그들은 또한 여러분들을 박해할 것이다ꡓ(요한 15,20). 이러한 예고는 우선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의 직접적인 삶의 공간에 해당하였다. 예수께 대한 신앙 고백은, 예수께서 이미 예고하신 것처럼(요한 16,2), 회당으로부터의 추방이라는 처벌을 초래한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 생전에도 눈을 뜨게 된 소경의 경우를 통해 확인된 바 있다(요한 9,35). 예수 승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는 박해를 받았다. 이 박해로 말미암아 부제 스테파노가 순교당했고(사도 7,57 이하),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유다와 사마리아로 흩어졌다(사도 8,1 이하). 바오로 역시 박해에 가담하였으나, 다마스커스를 향해 가는 도중 회심하게 되었다(사도 9,1 이하).
교황의 역사와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로마에서 일어났던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박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의 한 종파로 취급되었다. 유다인들은 자유로운 신앙의 권리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 역시 신앙 생활에 있어서 별다른 박해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은 64년 로마 전체를 폐허로 만들어 버린 대화재가 발생했을 때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방화의 혐의를 뒤집어씌움으로써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네로 황제는 자신을 방화의 장본인으로 지목하여 격분한 로마 시민들의 주의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쏠리게 하려고 의도하였다. 곧 이어 불어닥친 박해로 수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희생되었고, 그 가운데에는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추측컨대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신앙 고백을 금지하고, 그것을 위반할 경우 사형에 처형하는 법령을 반포했을 것이다. 이 법령은 네로가 살해당한 후에도 여전히 효력을 발생하였다. 이러한 법령의 반포는 그리스도교인들을 겨냥하여 퍼뜨린 헛소문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즉 그리스도교인들은 예배 때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봉헌하고, 인육을 먹는 수치스러운 행위를 일삼는 무신론자들이라는 헛소문이 유포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인들은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역 불경의 죄를 짓고 있다는 헛소문도 법령 반포의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인들은 로마 제국이 당하는 온갖 재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고가 만연했었다.
황제 네로의 후계자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별다른 적대감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95년 도미티아누스(Domitian) 황제 때 길지는 않았지만 매우 혹독한 박해가 있었고, 이 박해로 황제의 친척들도 희생되었다. 이 이후 잠시 박해가 없는 시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네로 황제가 반포한 법령은 여전히 효력을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위 공직자들의 기분이나 생각에 따라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 내에서는 항상 박해가 계속되었다.
트라야누스(Trajan, 98~117년) 황제는 비티니아의 총독 플리니우스(Plinius)의 문의에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을 색출해서는 안 되나, 고발이 있을 경우 재판에 회부하고 만일 그리스도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사형에 처하라고 회신하기도 하였다. 황제 트라야누스 통치 때 순교한 유명한 인물로는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를 들 수 있겠고,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 Aurel, 161~180년) 통치 때 순교한 저명한 인물로는 유스티노를 들 수 있다.
2세기가 끝날 무렵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선입견도 점점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네로 황제의 법령은 여전히 폐기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드문드문 박해가 발생했고, 특히 황제 데치우스(Dezius, 249~251년) 통치 때에는 박해가 극도에 달하기도 하였다. 데치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의 근절을 국정의 주요 정책으로 삼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로 인해 신들이 진노하여 로마 제국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였고, 이 위협은 옛 로마의 제신 숭배 의식을 강화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로마의 그리스도교는 안정을 회복했고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신자들의 수도 늘어났다. 이 무렵 그리스도교인들의 수는 대략 3만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리고 교계 제도도 격식을 갖추어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46명의 성직자들이 교계 제도의 선두를 구성하고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7명의 부제와 7명의 차부제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100여 명의 하위 성직자들의 협력을 받고 있었다. 황제 데치우스는 이러한 교계 제도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황제 발레리아누스(Valerian, 253~260년)는 그리스도교의 성찬 전례에 참석할 경우 사형에 처할 것이라며 이를 금지시켰고, 모든 주교, 신부 그리고 부제들을 체포하여 처형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이 박해 때 순교한 유명한 인물들은 교황 식스토 2세와 부제 라우렌시오였다.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Galienus) 통치하에서 그리스도교는 상당히 오랜 기간 평온을 누렸다. 그러나 303년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kletian, 284~305년)는 마지막이자 가장 혹독한 박해를 일으켰다. 303년 2월 23일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모든 교회 건물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서적을 폐기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그리스도교인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노예로 팔렸고, 나머지는 국가의 모든 공직으로부터 추방되었다. 드디어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4년 모든 그리스도교인들로 하여금 배교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그 측근들은 마치 야수처럼 광란했고 대량 학살도 드물지 않게 자행하였다. 로마의 동쪽 정보지에서 잔학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서쪽 지역의 경우 306년 콘스탄티누스가 군대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전기 작가 에우세비오에 의하면, 왕의 계승을 위해 서로 각축을 벌렸던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Maxentius)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에서 하늘로부터 ꡒ이 표지를 통해 승리하라!ꡓ라는 글씨가 새겨진 빛나는 십자가가 콘스탄티누스에게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밤 그리스도께서 콘스탄티누스에게 발현하시어 십자가 표지를 군인들의 방패에 새겨 넣을 것을 요구하셨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10월 28일 로마 근교의 밀비히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그리스도교를 위해서는 이 전투에서의 승리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313년 2월 이른바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었고, 이 칙령은 그리스도교로의 개종과 그리스도교의 종교 신봉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박해 시대는 – 가끔은 평온을 유지한 시기도 없지 않았다 – 로마 교회에 신앙의 시련기를 가져다 주었다. 한편으로 교회는 짧은 시간 동안에 자신의 지도자들을 잃어버렸다. 박해 시대의 거의 모든 주교들은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른 편으로 교회는 ꡐ순교의 피는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위한 씨앗ꡑ이라는 격언이 지니고 있는 진리를 체험하기도 하였다. 박해를 통해 그리스도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였다. 그리고 순교자들은 각별한 공경의 대상으로 부상하였다. 순교자들은 성인으로 칭송을 받았고, 그들의 순교일 – 영원한 생명을 위한 탄생일이기도 하다 – 은 묘지에서 기념되었다. 이러한 순교자들 이외에도 비록 죽음을 통해서는 아니지만 혹독한 고문과 투옥을 통해 신앙을 증거한 이른바 ꡐ고백자ꡑ들도 있었다. 이들 역시 교회의 각별한 경의를 누렸다.
순교와 죽음의 순간에 직면하여 신앙을 충실하게 고백하고 증거한 수많은 증인들 이외에,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고 박해자들에게 신앙의 서적들과 전례서들을 넘겨주었던 일단의 무리들도 없지 않았다. 나중에 이러한 무리들 때문에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논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즉 이른바 이들 배교자들이 회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교회 공동체 안으로 수용될 수 있는가, 아니면 교회 공동체로부터 제외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한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논쟁은 교회가 극복해야 할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교회의 전 역사와 함께 항상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십자군 전쟁 후, 세계 선교의 역사 안에서, 우리 시대에 와서는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 안에서, 그리고 교회가 식민지 통치자들과 결탁했던 제3 세계의 나라들 안에서 박해는 계속되어 왔다. 최근의 교황들은 거듭 이러한 박해에 대해 언급했고, 모든 민족을 위한 종교 자유를 호소하였다. 수년 전부터 교회는 해마다 부활 후 제6주일을 ꡐ박해받는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ꡑ로 제정하여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