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의회 지상주의 公議會至上主義 Konziliarismus
이 개념은 1400년경 공의회와 교황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를 의미한다. 물론 공의회 지상주의는 이미 중세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공의회 지상주의는 교황 베네딕토 13세와 그레고리오 12세의 적법성을 둘러싼 논쟁과 관련해서 부각되었다. 두 교황의 대립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양 진영의 추기경들은 1409년 피사(Pisa)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추기경들은 처음으로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선한다는 오컴(Wilhelm von Occam)의 주장을 공식화시켰다.
이에 따라 교회의 개혁상 필요할 경우 교황을 배제하거나 거부하여 어떤 결정을 내릴 권한을 공의회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오컴의 주장은 특히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 사이에 대단한 지지를 받았다. 교회의 많은 구성원들은 오래 계속되고 있는 분열에 직면하여 오로지 공의회만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럽의 군주들 역시 이러한 의견을 표명하였다. 피사에서 개최되었던 공의회(1409년)는 교황 베네딕토 13세와 그레고리오 12세의 퇴위를 결정하였고, 그 결과 새로운 교황, 즉 알렉산데르 5세가 선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열의 상황은 종식되기는커녕 더욱더 악화되었다. 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은 지기스문트(Siegmund) 왕이 교황 요한 23세와 함께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소집해야 할 만큼 비극적이었다. 공의회는 1414년 11월 5일에 개최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제4회기(1414년 3월 30일)와 제5회기(1414년 4월 6일)에서 공의회 지상주의와 관련된 주요 명제를 결정하였다.
즉 공의회는 자신의 권한을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부여받기 때문에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황은 신앙에 관한 문제, 교회 재일치 문제 그리고 교회의 개혁 문제와 관련해서 공의회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18년 4월 22일에 공의회를 폐회하였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지위를 거듭 확인하였다. 1418년 5월 10일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교황에 반대하는 항소가 공의회에 제기될 수도 있다는 명제를 단죄하였다(하지만 교황 마르티노 5세의 후계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확인하지 않았다).
1431년 바젤에서 새로운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1년 말 볼로냐(Bologna)로 공의회의 장소를 옮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젤에서는 회의가 계속되었고, 유럽의 많은 군주들의 지지를 받아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듭 확인하였다. 바젤 공의회에 참석한 자들은 그사이 페라라(Ferrara)로 장소를 옮긴 공의회는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바젤 공의회는 1439년 5월에 ꡒ공의회는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 교황은 공의회의 장소를 옮기거나 연기할 수 없다ꡓ는 명제를 신앙의 명제로 확정 지었다.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 지상주의의 이념은 요한 후스(Johannes Hus)의 주장은 물론, 갈리아주의와 얀세니즘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러한 이념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1870년 바티칸 제1차 공의회가 교황의 무류성을 결정함으로써 이러한 논의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었다.

■ 공의회 지상주의 公議會至上主義 Konziliarismus
이 개념은 1400년경 공의회와 교황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하기 위한 일련의 시도를 의미한다. 물론 공의회 지상주의는 이미 중세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공의회 지상주의는 교황 베네딕토 13세와 그레고리오 12세의 적법성을 둘러싼 논쟁과 관련해서 부각되었다. 두 교황의 대립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양 진영의 추기경들은 1409년 피사(Pisa)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추기경들은 처음으로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선한다는 오컴(Wilhelm von Occam)의 주장을 공식화시켰다.
이에 따라 교회의 개혁상 필요할 경우 교황을 배제하거나 거부하여 어떤 결정을 내릴 권한을 공의회가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오컴의 주장은 특히 파리 대학을 중심으로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 사이에 대단한 지지를 받았다. 교회의 많은 구성원들은 오래 계속되고 있는 분열에 직면하여 오로지 공의회만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럽의 군주들 역시 이러한 의견을 표명하였다. 피사에서 개최되었던 공의회(1409년)는 교황 베네딕토 13세와 그레고리오 12세의 퇴위를 결정하였고, 그 결과 새로운 교황, 즉 알렉산데르 5세가 선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열의 상황은 종식되기는커녕 더욱더 악화되었다. 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은 지기스문트(Siegmund) 왕이 교황 요한 23세와 함께 콘스탄츠에서 공의회를 소집해야 할 만큼 비극적이었다. 공의회는 1414년 11월 5일에 개최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제4회기(1414년 3월 30일)와 제5회기(1414년 4월 6일)에서 공의회 지상주의와 관련된 주요 명제를 결정하였다.
즉 공의회는 자신의 권한을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부여받기 때문에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황은 신앙에 관한 문제, 교회 재일치 문제 그리고 교회의 개혁 문제와 관련해서 공의회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1418년 4월 22일에 공의회를 폐회하였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교황에 대한 공의회의 지위를 거듭 확인하였다. 1418년 5월 10일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교황에 반대하는 항소가 공의회에 제기될 수도 있다는 명제를 단죄하였다(하지만 교황 마르티노 5세의 후계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확인하지 않았다).
1431년 바젤에서 새로운 공의회가 개최되었고,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1년 말 볼로냐(Bologna)로 공의회의 장소를 옮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젤에서는 회의가 계속되었고, 유럽의 많은 군주들의 지지를 받아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거듭 확인하였다. 바젤 공의회에 참석한 자들은 그사이 페라라(Ferrara)로 장소를 옮긴 공의회는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바젤 공의회는 1439년 5월에 ꡒ공의회는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 교황은 공의회의 장소를 옮기거나 연기할 수 없다ꡓ는 명제를 신앙의 명제로 확정 지었다.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 지상주의의 이념은 요한 후스(Johannes Hus)의 주장은 물론, 갈리아주의와 얀세니즘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러한 이념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1870년 바티칸 제1차 공의회가 교황의 무류성을 결정함으로써 이러한 논의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