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공의회(16-18) Allgemeine

 (16) 열여섯 번째 공의회〔제1차 콘스탄츠 공의회, 1414~1418년〕: 서방 교회를 지배하던 분열은 교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혼란을 가중시켰다. 교황과 대립 교황이 동시에 공존하여 서로의 퇴위를 선언하였으나, 교황직을 그대로 고수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래서 누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교황인지를 판단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가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406년 그레고리오 1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이미 1394년 이래로부터 교황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12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만일 베네딕토 13세가 교황직을 사임한다면 자신도 사임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1407년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레고리오 12세 편에 가담하였다. 베네딕토 13세가 1408년 페르피냔(Perpignan)의 공의회를 소집하였을 때 그의 지지자들조차도 공의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교회의 일치를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공의회의 개최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 공의회는 1409년 피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교황에 의해 소집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일치 문제를 염려하고 있던 추기경들에 의해 소집되었다. 페르피냔에서 개최되었던 공의회에서 베네딕토 13세는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자신이 기울였던 노력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하지만 교황직 사임을 거부하였다.


  1409년 3월 26일 페르피냔의 공의회는 중단되었다. 왜냐하면 3월 25일 피사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공의회에는 100여 명에 이르는 주교들, 주교들에 의해 파견된 100여 명에 이르는 사절들, 대수도원 원장 및 총장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첫 번째 회의에서 밀라노의 총대주교는 추기경들에 의해 공의회가 소집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옹호하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즉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 두 교황이 교황직을 사임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추기경들이 공의회를 소집할 의무와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옹호하였다. 5월 4일 현안의 문제를 연구할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두 교황은 공의회에 소환되어 1409년 6월 5일 열다섯 번째 회의에서 분열의 원인 제공자, 이단자 그리고 서원 파기자 등의 명목으로 퇴위당하였다.


  그리고 1409년 6월 26일 밀라노의 추기경을 알렉산데르 5세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 결과 ꡐ저주받을 둘ꡑ에서 ꡐ저주받을 셋ꡑ이 되었다. 대부분의 공의회 참석자들은 서둘러 떠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떠나기 전 개혁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서서히 진행되어야 할 교회 개혁은 진로를 제대로 찾지 못하였다. 1409년 8월 7일 피사의 공의회는 폐막되었다. 피사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데르 5세는 볼로냐에 정좌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5세는 그리스도교의 대부분으로부터 인정받았으나 독일의 국왕은 그레고리오 12세를 지지하였다. 베네딕토 13세 역시 자신의 위치를 견고하게 굳혔다. 1410년 5월 알렉산데르 5세 교황이 서거하자 요한 23세가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독일의 국왕 지기스문트는 1413년 10월 30일 독일에서의 공의회 개최를 예고하였다. 12월 5일 교황은 이 공의회를 소집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공의회가 풀어야 할 과제로서 분열의 해소, 교회 개혁 그리고 이단의 극복 등이 열거되었다.


  1414년 10월 28일 교항 요한 23세는 콘스탄츠에 도착하였다. 11월 5일 공의회 개막 미사에서 교황은 콘스탄츠 공의회는 피사 공의회의 결정을 확인하고 계승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특히 두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에 대한 대응 조치를 마련할 것을 촉구하였다. 11월 16일 개막 회의에서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되풀이하였다. 공의회에는 단지 16명의 추기경과 32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11월 중순경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읱 특사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특사들이 교황 문장을 사용할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라는 문제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공의회에 참석한 자들은 모든 교황들의 사임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의회가 이 문제 해결에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1414년 12월 말경 독일의 국왕 지기스문트도 콘스탄츠에 도착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독일 국왕 지기스문트에게 만일 다른 두 교황이 사임한다면 자신도 사임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모든 교황들의 사임만이 문제 해결의 첩경이라는 것이 공의회의 분위기를 지배하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매우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사임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사임은 성대한 절차를 거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한 23세는 비밀리에 샤프하우젠(Shaffhausen)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라우펜부르트(Laufenburg)로 도피하였다.


  1415년 3월 30일 요한 23세는 공의회에 약속한 사임은 강요에 의한 것으로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사임을 철회하였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5년 4월 6일 속개되었던 다섯 번째 회의에서, 공의회는 교회 전체를 대표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권한을 위임받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교황까지도 포함하여, 신앙, 분열의 해소 그리고 교회 개혁에 관한 공의회의 결정에 순종해야 한다는 내용을 결의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에 출두하기를 계속 거부하였기 때문에 공의회는 1415년 5월 14일 그의 퇴위를 결의하였다. 요한 23세는 결국 이 퇴위 결의에 승복하였고, 1415년 5월 29일 실제로 교황직으로부터 퇴위당하였다. 그레고리오 12세는 이미 사임의 각오가 되어 있었으며, 이 사실을 특사를 통해 1415년 7월 4일 공의회에서 천명하도록 하였다. 베네딕토 13세와의 담판이 제일 어렵게 진행되었다. 1415년 12월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하던 대부분의 지지자들이 공의회의 결정에 복종할 것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정작 베네딕토 13세는 자신의 선출이 적법하다는 것을 고집하였다. 드디어 1417년 7월 26일 베네딕토 13세는 퇴위당하였다. 그전에 베네딕토 13세는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을 파문시킨 바 있었다. 하지만 베네딕토 13세는 자신의 퇴위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분열의 상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1423년 5월 23일에 베네딕토 13세가 서거하자 클레멘스 8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클레멘스 8세는 1429년 7월 26일 교황직을 포기하였다. 그 결과 분열은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공의회는 새로운 논쟁에 휘말려 들었다. 즉 먼저 새 교황을 선출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 개혁을 진행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발생하였다. 1417년 10월 9일 이미 5개의 개혁 법령이 준비되어 발표된 바 있었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 공의회는 5년간, 그 다음 공의회는 7년간 그리고 세 번째의 공의회는 10년간의 간격을 두고 개최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개혁 법령에 입각해서 파비아-시에나(Pavia-Siena) 공의회(1423년)와 바젤(Basel) 공의회(1431년)가 소집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츠 공의회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1512년에 이르러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소집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개혁 법령은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는 데 주력하였고, 교황 중심주의에 반대하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40차 회의에서 새로 선출될 교황은 교회의 개혁 문제를 공의회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1417년 11월 11일 마르티노(Martin)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거의 40여 년 만에 교회는 모든 이로부터 인정을 받는 교황을 모시게 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요한 후스(Johannes Hus)를 심문하여 단죄하기도 하였다.     


  (17) 열일곱 번째 공의회〔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 1431~1445년〕: 1418년 4월 22일에 폐막된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황 마르티노 5세는 다음 공의회를 1423년 파비아(Pavia)에서 개최한다고 예고하였다. 1418년 5월 10일 마르티노 5세 교황은 교황에 대항하여 공의회에 제소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 금지는 공의회 지상주의에 대한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파비아 공의회는 이미 예고된 대로 1423년 3월 23일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창궐한 전염병 때문에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장소를 시에나(Siena)로 옮겼다. 장소 이동의 결정을 전달한 교황의 특사들은 아직 반교황의 분위기가 감돌기 전에 공의회를 해산시킬 수 있었다. 파비아와 시에나의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불과 몇몇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 개혁에 관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였다. 공의회가 해산되기 전 파비아에 모였던 참석자들은 새로운 공의회의 장소로 바젤을 결정하였다. 그래서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서거하기 얼마 전(1431년 2월 20일) 바젤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의 후임자 에우제니오(Eugen) 4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자신의 전임자가 지명한 공의회의 의장 체사리니(Cesarini) 추기경을 승인하였다.


  1431년 7월 23일 공의회는 바젤에서 개최되었다. 바젤의 공의회에도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참석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1년 11월 12일 공의회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18개월 후 볼로냐에서 새로운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발표하였다. 1431년 12월 18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공의회 해산을 위한 칙서를 발표하기 전에 바젤 공의회는 12월 4일에 첫 번째 회의를 시작하였다. 공의회 의장은 공의회의 해산 칙서를 발표하기를 거부하였고, 1423년 2월 15일 공의회에 참석한 자들은 공의회 해산을 처로히할 것을 교황에게 청원하였다. 이 청원을 통해 참석자들은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상기시켰고, 교황은 물론 추기경들도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3년 12월 15일 공의회 해산 명령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개혁 문제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교황과 공의회 사이에는 불화가 발생하였다. 즉 공의회는 교황 선거와 관련해서 새로운 규정을 결정하였고, 추기경의 숫자를 24명으로 제한하였다.


  동방 교회와의 일치 문제는 공의회와 교황 사이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대다수의 공의회 참석자들은 바젤 또는 아비뇽에서 일치 공의회를 개최하기를 원하였다. 이와는 달리 교황을 지지하던 소수의 참석자들은 공의회의 개최 장소를 이탈리아 내에서 물색할 것을 주장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7년 5월 30일 후자의 주장을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교황이 1437년 9월 18일 공의회를 페라라로 옮기자, 바젤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자들은 교황을 자신의 법정에 소환할 것을 결의하였다. 교황이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위반하였다는 것이 소환의 이유였다. 독일의 국왕 지기스문트와 유럽의 다른 제후들은 새로운 분열을 우려하여 공의회는 교황을 적대시하는 조치를 취하지 말고, 교황은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의회를 페라라로 옮기는 것을 취소할 것을 요청하였다. 교황과 공의회는 이러한 중재안을 수용하였다. 독일의 국왕 지기스문트가 1437년 11월에 서거하자 교황은 더 이상 약속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1437년 12월 30일 페라라의 공의회 개최 일자를 1438년 1월 28일로 확정하여 발표하였다. 페라라의 공의회는 예고되었던 날짜에 개최되었다. 하지만 동방 교회의 특사들은 3월에 도착하였다. 이들 특사들은 제후들의 도착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므로 공의회는 4개월이나 연기되었다.


  1438년 1월 말경부터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직접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다가 공의회는 1439년 1월 10일 다시 장소를 피렌체(Florenz)로 옮겼다. 피렌체가 공의회의 개최에 따른 비용을 부담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선언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랜 논의 끝에 1439년 7월 6일 일치 교령 Latantur Coeli가 발표되었다. 동방 교회의 특사들이 떠나고 난 후에도 공의회는 계속되었다. 1439년 11월에는 아르메니아 교회와의 일치가 이루어졌고, 1492년에는 에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콥트파와도 일치가 이루어졌다.


  1443년 2월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공의회를 라테라노으로 옮겼고 교황 자신도 로마로 귀환하였다. 이곳에서 1444년 9월에 동시리아의 콥트파와, 1445년 8월에 네스토리우스파와, 그리고 단의론주의자들과도 일치를 이루었다. 그사이 바젤의 공의회는 교황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1438년 1월 24일에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퇴위를 결의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은 바젤 공의회 참석자들을 파문시켰다. 공의회의 처사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고, 공의회의 의장이었던 체사리니 추기경과 니콜라오(Nikolaus von Cues) 추기경은 공의회를 저버리고 일치 공의회편에 가담하였다. 독일의 선제후들은 바젤 공의회와 교황 사이를 중재하려고 모색하였고, 그 결과 불화를 종식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제삼의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하였다. 바젤 공의회는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였고, 교황은 공의회를 다른 장소로 옮길 경우 동방 교회와의 일치가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모든 중재의 모색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점점 더 첨예화되어 갔다.


  1439년 5월 16일 바젤 공의회 참석자들은 다음과 같은 가톨릭 신앙의 진리를 선언하였다. 즉 보편 공의회는 교황보다 더 우위에 서 있으며, 교황은 공의회를 해산시키거나 다른 장소로 옮겨서는 안 된다. 이러한 진리를 배척하는 자는 이단자이다. 이러한 선언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공식적으로 퇴위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고, 교황이 이러한 가톨릭 신앙의 진리를 거부할 경우 이단자로 만들기 위한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의 진리를 선언할 당시 단지 19명의 주교들만이 참석하고 있었고, 추기경 니콜라오는 이러한 신앙의 진리가 아직은 불투명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젤 공의회는 1439년 6월 25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이 바젤 공의회의 참석자들을 파문시키자 바젤 공의회는 대립 교황으로 펠릭스(Felix) 5세를 선출하였다(1439년 11월 5일). 하지만 몇몇 소수만이 펠릭스 5세 교황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처사 때문에 바젤 공의회는 점점 그 호응도와 지지도를 잃어 갔다. 1447년 2월 5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제3의 공의회 소집, 보편 공의회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교회의 개혁 등을 약속하였다. 나중에 교황은 병으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를 철저하게 다룰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사도좌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았으며, 교부들의 가르침을 파기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였다.


  1447년 2월 23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서거하자 공의회 지상주의는, 교황들에게 많은 어려운 상황을 야기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극복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후임자로는 니콜라오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니콜라오 5세 교황은 대립 교황 펠릭스 5세의 퇴위를 압박하였다.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린 바젤 공의회는 마지막 회의에서 니콜라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고, 1449년 4월 25일 자진해서 해산하였다.    


  (18) 열여덟 번째 공의회〔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1512~1517년〕: 교황 식스토 4세(1471~1484년)는 자신의 선거 공약으로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482년 3월에 뮌스터(Münster)의 대주교 안드레아(Andreas Zamometic)는 바젤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대주교 안드레아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그리고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바젤 이외에 어느 누구도 공의회의 소집에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대주교 안드레아는 교황의 퇴위와 교황청의 개혁을 계획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은 바젤 시를 파문하였다. 그래서 공의회는 소집될 수 없었다. 하지만 공의회에 대한 이념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정치적인 권력과 위협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국왕 루이 12세는 프랑스의 추기경들에게 1511년 9월 10일 피사의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루이 12세는 공의회의 소집은 통상적으로 교황의 권한에 속하기는 하지만 교황이 고소되어 법정에 소환된 경우 또는 이단의 혐의를 받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없을 경우 추기경들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교황 율리오(Julius) 2세가 1512년 4월 19일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하자 피사에서 개최될 공의회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었고, 1511년 12월에는 밀라노로, 1512년 6월에는 아스티로 그리고 후에는 리옹으로 장소를 옮겼다. 마침내 프랑스는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교황 율리오 2세는 1512년 5월 3일 라테라노에서 공의회를 개막하였다. 이 공의회 참석자들 대다수는 이탈리아인들이었다.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일련의 개혁 프로그램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실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교황청의 개혁, 주교들의 정주 의무 그리고 성직록의 증대 등의 시급한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조차도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해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마지막 개혁의 시도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더욱이 공의회가 폐회되기도 전에 1517년 2월 20일 교황 율리오 2세는 서거하였다. 그의 후임 교황 레오 10세가 공의회를 계속하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공의회 지상주의를 단죄하였다. 오로지 교황만이 공의회의 소집, 장소 이동 그리고 해산을 결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1517년 3월 16일에 공의회는 폐회되었고 교회 개혁의 가능성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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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16) 열여섯 번째 공의회〔제1차 콘스탄츠 공의회, 1414~1418년〕: 서방 교회를 지배하던 분열은 교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혼란을 가중시켰다. 교황과 대립 교황이 동시에 공존하여 서로의 퇴위를 선언하였으나, 교황직을 그대로 고수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그래서 누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교황인지를 판단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가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1406년 그레고리오 1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이미 1394년 이래로부터 교황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오 12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 만일 베네딕토 13세가 교황직을 사임한다면 자신도 사임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1407년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레고리오 12세 편에 가담하였다. 베네딕토 13세가 1408년 페르피냔(Perpignan)의 공의회를 소집하였을 때 그의 지지자들조차도 공의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교회의 일치를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공의회의 개최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 공의회는 1409년 피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교황에 의해 소집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일치 문제를 염려하고 있던 추기경들에 의해 소집되었다. 페르피냔에서 개최되었던 공의회에서 베네딕토 13세는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기 위해 자신이 기울였던 노력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하지만 교황직 사임을 거부하였다.

      1409년 3월 26일 페르피냔의 공의회는 중단되었다. 왜냐하면 3월 25일 피사에서 공의회가 개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공의회에는 100여 명에 이르는 주교들, 주교들에 의해 파견된 100여 명에 이르는 사절들, 대수도원 원장 및 총장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첫 번째 회의에서 밀라노의 총대주교는 추기경들에 의해 공의회가 소집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옹호하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즉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 두 교황이 교황직을 사임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추기경들이 공의회를 소집할 의무와 권리를 행사해야 한다고 옹호하였다. 5월 4일 현안의 문제를 연구할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두 교황은 공의회에 소환되어 1409년 6월 5일 열다섯 번째 회의에서 분열의 원인 제공자, 이단자 그리고 서원 파기자 등의 명목으로 퇴위당하였다.

      그리고 1409년 6월 26일 밀라노의 추기경을 알렉산데르 5세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 결과 ꡐ저주받을 둘ꡑ에서 ꡐ저주받을 셋ꡑ이 되었다. 대부분의 공의회 참석자들은 서둘러 떠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떠나기 전 개혁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서서히 진행되어야 할 교회 개혁은 진로를 제대로 찾지 못하였다. 1409년 8월 7일 피사의 공의회는 폐막되었다. 피사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데르 5세는 볼로냐에 정좌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5세는 그리스도교의 대부분으로부터 인정받았으나 독일의 국왕은 그레고리오 12세를 지지하였다. 베네딕토 13세 역시 자신의 위치를 견고하게 굳혔다. 1410년 5월 알렉산데르 5세 교황이 서거하자 요한 23세가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독일의 국왕 지기스문트는 1413년 10월 30일 독일에서의 공의회 개최를 예고하였다. 12월 5일 교황은 이 공의회를 소집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공의회가 풀어야 할 과제로서 분열의 해소, 교회 개혁 그리고 이단의 극복 등이 열거되었다.

      1414년 10월 28일 교항 요한 23세는 콘스탄츠에 도착하였다. 11월 5일 공의회 개막 미사에서 교황은 콘스탄츠 공의회는 피사 공의회의 결정을 확인하고 계승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특히 두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에 대한 대응 조치를 마련할 것을 촉구하였다. 11월 16일 개막 회의에서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되풀이하였다. 공의회에는 단지 16명의 추기경과 32명의 주교들이 참석하였다. 11월 중순경 그레고리오 12세와 베네딕토 13세읱 특사들이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이때 특사들이 교황 문장을 사용할 권리를 지니고 있는가라는 문제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공의회에 참석한 자들은 모든 교황들의 사임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첩경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의회가 이 문제 해결에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1414년 12월 말경 독일의 국왕 지기스문트도 콘스탄츠에 도착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독일 국왕 지기스문트에게 만일 다른 두 교황이 사임한다면 자신도 사임할 용의가 있음을 천명하였다. 모든 교황들의 사임만이 문제 해결의 첩경이라는 것이 공의회의 분위기를 지배하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매우 상이한 반응을 보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사임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사임은 성대한 절차를 거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요한 23세는 비밀리에 샤프하우젠(Shaffhausen)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라우펜부르트(Laufenburg)로 도피하였다.

      1415년 3월 30일 요한 23세는 공의회에 약속한 사임은 강요에 의한 것으로 무효라고 선언하면서 사임을 철회하였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1415년 4월 6일 속개되었던 다섯 번째 회의에서, 공의회는 교회 전체를 대표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권한을 위임받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교황까지도 포함하여, 신앙, 분열의 해소 그리고 교회 개혁에 관한 공의회의 결정에 순종해야 한다는 내용을 결의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에 출두하기를 계속 거부하였기 때문에 공의회는 1415년 5월 14일 그의 퇴위를 결의하였다. 요한 23세는 결국 이 퇴위 결의에 승복하였고, 1415년 5월 29일 실제로 교황직으로부터 퇴위당하였다. 그레고리오 12세는 이미 사임의 각오가 되어 있었으며, 이 사실을 특사를 통해 1415년 7월 4일 공의회에서 천명하도록 하였다. 베네딕토 13세와의 담판이 제일 어렵게 진행되었다. 1415년 12월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하던 대부분의 지지자들이 공의회의 결정에 복종할 것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정작 베네딕토 13세는 자신의 선출이 적법하다는 것을 고집하였다. 드디어 1417년 7월 26일 베네딕토 13세는 퇴위당하였다. 그전에 베네딕토 13세는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을 파문시킨 바 있었다. 하지만 베네딕토 13세는 자신의 퇴위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분열의 상태는 여전히 계속되었다.

      1423년 5월 23일에 베네딕토 13세가 서거하자 클레멘스 8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클레멘스 8세는 1429년 7월 26일 교황직을 포기하였다. 그 결과 분열은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공의회는 새로운 논쟁에 휘말려 들었다. 즉 먼저 새 교황을 선출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 개혁을 진행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발생하였다. 1417년 10월 9일 이미 5개의 개혁 법령이 준비되어 발표된 바 있었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 공의회는 5년간, 그 다음 공의회는 7년간 그리고 세 번째의 공의회는 10년간의 간격을 두고 개최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개혁 법령에 입각해서 파비아-시에나(Pavia-Siena) 공의회(1423년)와 바젤(Basel) 공의회(1431년)가 소집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츠 공의회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1512년에 이르러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소집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개혁 법령은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는 데 주력하였고, 교황 중심주의에 반대하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40차 회의에서 새로 선출될 교황은 교회의 개혁 문제를 공의회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1417년 11월 11일 마르티노(Martin)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거의 40여 년 만에 교회는 모든 이로부터 인정을 받는 교황을 모시게 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요한 후스(Johannes Hus)를 심문하여 단죄하기도 하였다.     

      (17) 열일곱 번째 공의회〔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 1431~1445년〕: 1418년 4월 22일에 폐막된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황 마르티노 5세는 다음 공의회를 1423년 파비아(Pavia)에서 개최한다고 예고하였다. 1418년 5월 10일 마르티노 5세 교황은 교황에 대항하여 공의회에 제소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 금지는 공의회 지상주의에 대한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파비아 공의회는 이미 예고된 대로 1423년 3월 23일에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 창궐한 전염병 때문에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장소를 시에나(Siena)로 옮겼다. 장소 이동의 결정을 전달한 교황의 특사들은 아직 반교황의 분위기가 감돌기 전에 공의회를 해산시킬 수 있었다. 파비아와 시에나의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불과 몇몇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 개혁에 관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하였다. 공의회가 해산되기 전 파비아에 모였던 참석자들은 새로운 공의회의 장소로 바젤을 결정하였다. 그래서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서거하기 얼마 전(1431년 2월 20일) 바젤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의 후임자 에우제니오(Eugen) 4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자신의 전임자가 지명한 공의회의 의장 체사리니(Cesarini) 추기경을 승인하였다.

      1431년 7월 23일 공의회는 바젤에서 개최되었다. 바젤의 공의회에도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참석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1년 11월 12일 공의회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18개월 후 볼로냐에서 새로운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발표하였다. 1431년 12월 18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공의회 해산을 위한 칙서를 발표하기 전에 바젤 공의회는 12월 4일에 첫 번째 회의를 시작하였다. 공의회 의장은 공의회의 해산 칙서를 발표하기를 거부하였고, 1423년 2월 15일 공의회에 참석한 자들은 공의회 해산을 처로히할 것을 교황에게 청원하였다. 이 청원을 통해 참석자들은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상기시켰고, 교황은 물론 추기경들도 공의회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3년 12월 15일 공의회 해산 명령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교회의 개혁 문제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교황과 공의회 사이에는 불화가 발생하였다. 즉 공의회는 교황 선거와 관련해서 새로운 규정을 결정하였고, 추기경의 숫자를 24명으로 제한하였다.

      동방 교회와의 일치 문제는 공의회와 교황 사이를 파국으로 몰고 갔다. 대다수의 공의회 참석자들은 바젤 또는 아비뇽에서 일치 공의회를 개최하기를 원하였다. 이와는 달리 교황을 지지하던 소수의 참석자들은 공의회의 개최 장소를 이탈리아 내에서 물색할 것을 주장하였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1437년 5월 30일 후자의 주장을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교황이 1437년 9월 18일 공의회를 페라라로 옮기자, 바젤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자들은 교황을 자신의 법정에 소환할 것을 결의하였다. 교황이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을 위반하였다는 것이 소환의 이유였다. 독일의 국왕 지기스문트와 유럽의 다른 제후들은 새로운 분열을 우려하여 공의회는 교황을 적대시하는 조치를 취하지 말고, 교황은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의회를 페라라로 옮기는 것을 취소할 것을 요청하였다. 교황과 공의회는 이러한 중재안을 수용하였다. 독일의 국왕 지기스문트가 1437년 11월에 서거하자 교황은 더 이상 약속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교황은 1437년 12월 30일 페라라의 공의회 개최 일자를 1438년 1월 28일로 확정하여 발표하였다. 페라라의 공의회는 예고되었던 날짜에 개최되었다. 하지만 동방 교회의 특사들은 3월에 도착하였다. 이들 특사들은 제후들의 도착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므로 공의회는 4개월이나 연기되었다.

      1438년 1월 말경부터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직접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그러다가 공의회는 1439년 1월 10일 다시 장소를 피렌체(Florenz)로 옮겼다. 피렌체가 공의회의 개최에 따른 비용을 부담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선언하였기 때문이었다. 오랜 논의 끝에 1439년 7월 6일 일치 교령 Latantur Coeli가 발표되었다. 동방 교회의 특사들이 떠나고 난 후에도 공의회는 계속되었다. 1439년 11월에는 아르메니아 교회와의 일치가 이루어졌고, 1492년에는 에집트와 에티오피아의 콥트파와도 일치가 이루어졌다.

      1443년 2월에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공의회를 라테라노으로 옮겼고 교황 자신도 로마로 귀환하였다. 이곳에서 1444년 9월에 동시리아의 콥트파와, 1445년 8월에 네스토리우스파와, 그리고 단의론주의자들과도 일치를 이루었다. 그사이 바젤의 공의회는 교황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고, 1438년 1월 24일에는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퇴위를 결의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은 바젤 공의회 참석자들을 파문시켰다. 공의회의 처사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고, 공의회의 의장이었던 체사리니 추기경과 니콜라오(Nikolaus von Cues) 추기경은 공의회를 저버리고 일치 공의회편에 가담하였다. 독일의 선제후들은 바젤 공의회와 교황 사이를 중재하려고 모색하였고, 그 결과 불화를 종식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제삼의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하였다. 바젤 공의회는 이러한 제안을 거부하였고, 교황은 공의회를 다른 장소로 옮길 경우 동방 교회와의 일치가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모든 중재의 모색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점점 더 첨예화되어 갔다.

      1439년 5월 16일 바젤 공의회 참석자들은 다음과 같은 가톨릭 신앙의 진리를 선언하였다. 즉 보편 공의회는 교황보다 더 우위에 서 있으며, 교황은 공의회를 해산시키거나 다른 장소로 옮겨서는 안 된다. 이러한 진리를 배척하는 자는 이단자이다. 이러한 선언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를 공식적으로 퇴위시키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고, 교황이 이러한 가톨릭 신앙의 진리를 거부할 경우 이단자로 만들기 위한 조건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의 진리를 선언할 당시 단지 19명의 주교들만이 참석하고 있었고, 추기경 니콜라오는 이러한 신앙의 진리가 아직은 불투명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젤 공의회는 1439년 6월 25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이 바젤 공의회의 참석자들을 파문시키자 바젤 공의회는 대립 교황으로 펠릭스(Felix) 5세를 선출하였다(1439년 11월 5일). 하지만 몇몇 소수만이 펠릭스 5세 교황을 지지하였다. 이러한 처사 때문에 바젤 공의회는 점점 그 호응도와 지지도를 잃어 갔다. 1447년 2월 5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제3의 공의회 소집, 보편 공의회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교회의 개혁 등을 약속하였다. 나중에 교황은 병으로 말미암아 모든 문제를 철저하게 다룰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은 사도좌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았으며, 교부들의 가르침을 파기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였다.

      1447년 2월 23일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서거하자 공의회 지상주의는, 교황들에게 많은 어려운 상황을 야기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극복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후임자로는 니콜라오 5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니콜라오 5세 교황은 대립 교황 펠릭스 5세의 퇴위를 압박하였다. 그 의미를 상실해 버린 바젤 공의회는 마지막 회의에서 니콜라오 5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고, 1449년 4월 25일 자진해서 해산하였다.    

      (18) 열여덟 번째 공의회〔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1512~1517년〕: 교황 식스토 4세(1471~1484년)는 자신의 선거 공약으로 공의회를 소집할 것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1482년 3월에 뮌스터(Münster)의 대주교 안드레아(Andreas Zamometic)는 바젤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대주교 안드레아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그리고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바젤 이외에 어느 누구도 공의회의 소집에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대주교 안드레아는 교황의 퇴위와 교황청의 개혁을 계획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은 바젤 시를 파문하였다. 그래서 공의회는 소집될 수 없었다. 하지만 공의회에 대한 이념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정치적인 권력과 위협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프랑스의 국왕 루이 12세는 프랑스의 추기경들에게 1511년 9월 10일 피사의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요구하기도 하였다. 루이 12세는 공의회의 소집은 통상적으로 교황의 권한에 속하기는 하지만 교황이 고소되어 법정에 소환된 경우 또는 이단의 혐의를 받아 공의회를 소집할 수 없을 경우 추기경들이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교황 율리오(Julius) 2세가 1512년 4월 19일 라테라노 공의회를 소집하자 피사에서 개최될 공의회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었고, 1511년 12월에는 밀라노로, 1512년 6월에는 아스티로 그리고 후에는 리옹으로 장소를 옮겼다. 마침내 프랑스는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교황 율리오 2세는 1512년 5월 3일 라테라노에서 공의회를 개막하였다. 이 공의회 참석자들 대다수는 이탈리아인들이었다.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일련의 개혁 프로그램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실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교황청의 개혁, 주교들의 정주 의무 그리고 성직록의 증대 등의 시급한 문제에 대해서는 논의조차도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해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마지막 개혁의 시도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더욱이 공의회가 폐회되기도 전에 1517년 2월 20일 교황 율리오 2세는 서거하였다. 그의 후임 교황 레오 10세가 공의회를 계속하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공의회 지상주의를 단죄하였다. 오로지 교황만이 공의회의 소집, 장소 이동 그리고 해산을 결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1517년 3월 16일에 공의회는 폐회되었고 교회 개혁의 가능성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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