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분열 Schisma

  교회 분열 敎會分裂  Schisma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함으로써 아비뇽의 유배는 종식되었다. 약 70여 년간 계속된 교황의 아비뇽 유배는 교회의 조직을 그 기초부터 상처입힌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비뇽의 유배가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에 의해 구성된 당파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이로써 아비뇽은 교회 분열의 뿌리로 작용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추기경들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교황 우르바노 6세를 3개월 동안 인정하였으나, 갑자기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불만을 느껴, 프랑스 왕가 출신 가운데 어느 친척을 천거하여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하였다.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즉시 프랑스의 영향권에 속하는 아비뇽으로 갔다. 이렇게 해서 두 교황이 대립하게 되었고, 두 교황은 서거 후 각기 다른 후임자를 남겼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교황과 아비뇽의 교황, 두 교황을 동시에 모시는 분열의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의 상태는 교구, 수도회, 심지어는 가정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누가 적법한 교황인지에 대해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 외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도 가중되었다. 두 교황이 각기 따로 교황청 기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립의 위기를 어느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무렵 교회 개혁을 논구하던 많은 저술들은 – 개혁의 중심지는 파리 대학이었다 – 보편 공의회만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여 교회의 일치를 도모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마침내 두 교황 진영의 추기경들은 1409년 파리에서 보편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의하였다. 파리 공의회는 기존의 두 교황을 퇴위시키고 대신 새로운 교황 – 알렉산데르 5세 – 을 선출하여 교회의 일치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기존의 두 교황은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그 결과 두 명의 교황이 대립하던 상황에서 세 명의 교황이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5세의 후임으로 반교회적인 인물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공의회가 소집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독일의 국왕 지기스문트(Siegmund)는 교황 요한 23세를 움직여 독일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가 소집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요한 후스의 이단설과의 논쟁을 거쳐 후스를 단죄하였다. 특히 공의회는 분열의 종식, 즉 교회의 일치를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였다. 이 시기에 자주 현안으로 떠오른 교회의 개혁이라는 과제와 관련해서 공의회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안이 뜻밖에도 해결되었다. 즉 교황 요한 23세와 베네딕토 13세 – 아비뇽에 거주 – 두 교황이 퇴위하였고, 그레고리오 12세 교황 – 로마 거주 – 은 자발적으로 교황직에서 물러났다.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 지상주의를 선언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랜 시간을 거쳐 교회는 다시금 일치를 회복하였고, 서구 교회의 분열은 종식되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는 그리스 정교 부분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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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uest 님의 말:

      교회 분열 敎會分裂  Schisma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함으로써 아비뇽의 유배는 종식되었다. 약 70여 년간 계속된 교황의 아비뇽 유배는 교회의 조직을 그 기초부터 상처입힌 결과를 초래하였다. 아비뇽의 유배가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출신 추기경들에 의해 구성된 당파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다. 이로써 아비뇽은 교회 분열의 뿌리로 작용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추기경들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선출된 교황 우르바노 6세를 3개월 동안 인정하였으나, 갑자기 교황 우르바노 6세에게 불만을 느껴, 프랑스 왕가 출신 가운데 어느 친척을 천거하여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하였다.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즉시 프랑스의 영향권에 속하는 아비뇽으로 갔다. 이렇게 해서 두 교황이 대립하게 되었고, 두 교황은 서거 후 각기 다른 후임자를 남겼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교황과 아비뇽의 교황, 두 교황을 동시에 모시는 분열의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의 상태는 교구, 수도회, 심지어는 가정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누가 적법한 교황인지에 대해 아무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 외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도 가중되었다. 두 교황이 각기 따로 교황청 기구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립의 위기를 어느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무렵 교회 개혁을 논구하던 많은 저술들은 – 개혁의 중심지는 파리 대학이었다 – 보편 공의회만이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여 교회의 일치를 도모할 수 있다고 설파하였다. 마침내 두 교황 진영의 추기경들은 1409년 파리에서 보편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결의하였다. 파리 공의회는 기존의 두 교황을 퇴위시키고 대신 새로운 교황 – 알렉산데르 5세 – 을 선출하여 교회의 일치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기존의 두 교황은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그 결과 두 명의 교황이 대립하던 상황에서 세 명의 교황이 대립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5세의 후임으로 반교회적인 인물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공의회가 소집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갔다. 독일의 국왕 지기스문트(Siegmund)는 교황 요한 23세를 움직여 독일에서 공의회를 소집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년)가 소집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요한 후스의 이단설과의 논쟁을 거쳐 후스를 단죄하였다. 특히 공의회는 분열의 종식, 즉 교회의 일치를 위해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였다. 이 시기에 자주 현안으로 떠오른 교회의 개혁이라는 과제와 관련해서 공의회는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안이 뜻밖에도 해결되었다. 즉 교황 요한 23세와 베네딕토 13세 – 아비뇽에 거주 – 두 교황이 퇴위하였고, 그레고리오 12세 교황 – 로마 거주 – 은 자발적으로 교황직에서 물러났다.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공의회가 교황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 지상주의를 선언하였다. 이렇게 해서 오랜 시간을 거쳐 교회는 다시금 일치를 회복하였고, 서구 교회의 분열은 종식되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는 그리스 정교 부분을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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