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 실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성서의 말씀, 그리고 해방신학자들의 신학적인 이론을 통하여 물질적 가난, 정신적 가난, 자발적 가난, 청빈으로서의 가난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날 가난을 과연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현대의 세계를 일컬어 물질문명 시대, 혹은 황금만능 시대라 부른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그로인한 인간생활수준의 향상은 인간 생활양식에 대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 변화의 영향력은 인간의 사고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행복의 척도는 생활의 풍족함이나 안락함의 정도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며, 생활의 방향은 더욱 더 풍족하고 편안함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현재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기보다 낮은 상태의 것들에는 관심을 표명하지 않게 되며, 보다 나은 상태에로의 시도만 추구하게 한다. 이러한 시대의 조류는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가난에 대한 두 가지 점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정신적 가난’이라는 신앙의 목표가 불분명하다. 이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활동을 하면서도 교회 안에는 비복음적인 갈등이 많이 있다. 이것은 사회 현실에 육화하지 못하고 추상적으로 관념화된 신앙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발적 가난’이 거의 없어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못함으로 ‘가난함의 순환’1)이 장애를 받고 있다. 그 결과 주목할 만한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활력이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 안에서 천주교 신자를 발견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못할 때 비구원의 처지에 놓이는 것은 가난한 이들만이 아니다. 교회도 그리스도를 떠나서 복음적 활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1. 경제적 가난의 현실
경제적으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는 우리 사회에서 왜 가난한 이들이 생겨났고 또 늘어나고 있는가? 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첫째, 급격한 농민층 분해와 도시화에 의해 일시적으로 막대한 과잉 인구의 풀(Pool)이 형성되었다. 둘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와는 달리 실업 상태에 대한 사회보장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소득을 올리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각종 영세한 경제활동이 일어나게 된다. 셋째, 무허가 정착지는 도시 빈민이 도시에서 생존하기 위해 건축한 주거지이지만 국가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노동력 재생산 확보의 기능을 한다. 따라서 노동력 재생산의 위기와 연결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사회의 도시 빈민은 이미 자본주의적 축적 구조 안에서 형성, 재생산되고 있으며, 도시 빈민의 생존과 생활양식 문제 역시 노동자 계급 전체의 경제 조건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2)
우리 사회에서는 도시 빈곤 문제에 대하여 6,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경제 개발에 의한 성장 자체가 바로 빈곤 대책의 훌륭한 무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부정 부패, 생명 경시, 집단 이기주의, 계층간 위화감, 소외, 아노미3) 등 각종 사회문제가 부의 축적 과정에서 생겨남으로써 사회는 불안해지고 여전히 빈곤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오히려 박탈감 속에서 상대적 빈곤이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우리 교회의 교세가 급성장한 80년대는 바로 이러한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비인간화 시기와 같은 때이다. 바로 그 시기에 본당 위주의 사목구조로 획일화 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이 교회와 멀어지게 했으며, 함께 나누는 이웃이 아니라 불우 이웃돕기의 대상이 되게 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하기는 했으나’ ‘함께 하지는 못한’ 결과가 오늘날 점점 늘어만 가는 냉담자 문제, 교회의 중산층화로 인한 가난한 이들의 소외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결국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이 복음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물질을 나누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정신적 가난’이 우리 삶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이들을 통해서 물질을 나눔으로 가난한 이들을 ‘대상화’ 시키지 않고 ‘복음화’시킬 수 있다.
2. 영적가난의 추구 – 겸손한 삶
교만한 사람을 당신 팔로 흩어 버리시는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을 자비로운 은총으로 돌보신다(루가 1, 52 참조). 예수님의 잉태는 성모님의 겸손한 순명 때문에 가능했고, 성인들은 이점을 먼저 깨달았다. 교회가 공경하는 수많은 성인들은 성모님의 이 겸손한 순명에서 영적 가난의 모토를 발견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영적 가난의 모토로써 ‘겸손한 자기이탈’을 설정하였다.4)
‘나의 가난’을 사는 ‘자기 중심적 가난’은 영적으로 교마하고 이기적이고 율법주의적인 것이므로, 그 자체가 이미 마음의 가난과 대립되어 가난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예수의 가난’을 사는 ‘그리스도 중심적 가난’은 겸손하고 자기 봉헌적이며 자기 양도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므로, 그것이야말로 참되고 온전한 가난인 것이다.5)
성인들의 가난은 하느님 아닌 것에 대한 아집과 애착을 버림으로써 온전히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완덕으로 나아가기 위해 소유의 포기가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온갖 집착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삶은 철저한 자기이탈에서 온다고 하였다. 또한 데레사 성녀는, 이러한 영적 가난은 겸손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영적 가난은 자기 취향과 편리함의 포기가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탈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겸손을 살 수 있을 때 이탈이 성취되고, 이탈이 성취될 때 참으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적 가난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먼저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집착에서 벗어날 때 더 큰 풍요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재물을 아끼고 모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말이다. 예를 들면 돈 한 푼 없는 사람이 돈에 집착하여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생각할 때 그는 이미 영적 가난에서 멀어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재화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 재화의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가난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6)
3. 물질적 가난의 극복 – 소유와 나눔
참된 가난은 사물을 죄악시하거나 무시하고 경멸하지 않고, 오히려 사물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에 있다. 사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변해지고 쇠퇴하고 멸망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지만, 이를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인간이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만큼 귀중하고 값진 것이다. 따라서 사물이 창조된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선익을 위해 사용하는 데에 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이를 섬기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7)
예수께서는 가난의 정신적 면뿐만 아니라 물질적 가난을 결코 소홀히 하신 분이 아니다. 실제로 물질적인 가난은 정신적인 가난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기에 초대교회이래 교회는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을 사는 교구공동체나 수도공동체의 영적인 도움 속에서 교회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서 가난을 제대로 살겠다는 교구공동체나 수도공동체가 많을 때에는 교회의 성장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반면에 교구공동체나 수도공동체가 영신적으로는 어떻든 현실적이고도 물질적인 판단 속에 살았을 때는 교회의 내적인 영성과 외적인 성장은 눈에 띌 정도로 마이너스 성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검증이 역사의 교훈으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의 교회 역시 이에 대한 해결책을 주님의 말씀에서 찾고자 노력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나 자신이 마음으로 가난한 자 되겠다는 결심이 없다면 우리의 열성은 겉꾸미는 바리사이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물질적인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자녀적인 신뢰심으로, 예수의 가난을 따르겠다는 원으로, 잉여의 재화를 가난한 이웃과 나누어 자선의 기회로 삼으려 할 때로 때 성화의 은총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교회의 많은 교우들은 가난한 이와의 나눔에 인색하면서도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8)
예수께서 재물로부터 내적인 해방을 요구하셨다는 말씀의 이면에는 소유의 공동체성이라는 커다란 가르침이 있다. 즉 소유한 것에 집착하기보다 주고 나누는 데서 모두가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정의는 이 세상의 재물이 합리적으로 분배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세상은 인류의 공동소유물이고, 또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 그렇기에 세상과 재화의 분배에 있어서도 인류는 일종의 평등권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에서 자기 생명을 보존할 만큼의 소유권을 가지는 것은 인류의 기본적인 생존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화의 나눔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정의의 문제이며 인류가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이다. 주님은 이 진리를 위해 가난하게, 종으로 사셨다.
물질과 가난의 문제는 모두에게 민감하면서도 복잡하여 다루기 난처한 주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누구나 복음적 의미를 깨닫고 생활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행복의 첫째 조건(마태 5, 3)이고, 모든 이가 하느님 대전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초대받았을 뿐 아니라(마태 5, 48; 『교회헌장』38 참조) 완전한 자 되려면 부유함과 가난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9)
4.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성
오늘날 ‘가난한 자들의 외침’은 우리 주위에 많이 들려오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 중노동에 종사하면서도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 복지시설에서 학대와 착취를 당하고 있는 정신 및 신체 장애자들, 적절한 시설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장애자들, 그리고 극빈자, 철거민 등등 이들은 모두 아무런 정신적 종교적인 바탕과 대책없이 발전해 가는 물질 문화와 경제 성장으로 인해 빚어진 희생자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나라, 여러 사회에서 들려오는 ‘가난한 자들의 외침’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로서, 항상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려고 한다. 수도회도 가난한 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된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가난한 자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가난한 자들과의 유대를 긴밀히 하는 노력을 계속한다. 신앙인으로 구성된 여러 단체도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를 돌보고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가난한 자들과 연대를 촉진시켜야 할 것이다.10)
그런데 교회의 임원과 수도회의 후원자들은 흔히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들과 자주 만나고 일을 함께 하다 보면, 자연히 부유층과는 더 친숙함을 느끼게 되는 반면 빈민층과는 멀어지게 되어 쉽게 남의 오해와 비판을 받게 될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성직자 수도자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평소에 서민들과 자주 접촉할 기회를 갖고, 특히 보다 가난하고 불쌍한 소외된 자들과 함께 지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와의 유대는 금품을 베푸는 일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함께 고민하고 아픔을 느끼고, 그들의 상황에 共鳴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고 인내하기 위해 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11)
5. 노동과 봉사
일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거나 악용하게 되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쓸데없는 일을 하게 되거나 죄를 범하게 된다. 게으름을 피우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직자 수도자와 모든 그리스도인은 게으름을 피우는 ‘부자’가 되지 말고, 오히려 매일 부지런히 일을 해서 먹고사는 ‘근로자’, ‘서민’이 되어야 한다.12)
누구나 기꺼이 도와주려는 자세는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 준다는 의미에서 복음적 가난의 정신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방관만 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서 도와주어야 한다. 남에 대한 무관심과 냉담, 남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무사주의’를 타파하여 누구에게나 관심과 호의를 보이고 누구와도 쉽게 어울릴 줄 알아야 한다. 남의 부탁을 쉽게 받아 주고, 남의 청을 가볍게 들어주는 사람이 곧 “마음이 가난한 자”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남의 부탁을 ‘부득이한 사정’으로 쉽게 거절하지만, 실은 약간의 성의만 지녔으면 거의 다 들어 줄 수 있는 것이다.
6. 종말론적인 삶의 증거
종말이 올 때, 세상의 모든 사물은 멸망하지만, 사랑과 사랑이 만든 것은 영원히 남는다. 사물은 멸망함으로써, 사물을 소유한 자도 소유하지 못한 자도 무조건 사물에서 떠날 수밖에 없으며, 사물에 욕심을 부리는 자든 부리지 않는 자이든 사정없이 사물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참으로 언젠가는 멸망할 물질적 사물이라 할지라도, 이를 남을 위해 제대로 사용한다면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될 만큼 값진 것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물은 진정 영원한 가치를 내포한다고 해야 한다.13)
다만, 멸망할 재물에서 불멸의 가치를 끌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직 재물을 취급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다. 재물에 대한 마음 자세가 우리를 성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악인으로 만들 수도 있다.
수도자는 이러한 의미에서 재물로 인하여 죄를 범하게 될 가능성을 미리 버리고, 재물에 대한 그릇된 욕망을 미리 포기하기 위해 정당한 소유권과 소유욕까지도 포기하여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14)
수도자들의 이러한 삶은 재물이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 지라도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이 가난한 자”는 먼저 체득하면서 모든 이에게 알려 주고 또 증거 하는 것이다. 이 가난한 자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재물에 얽매여 재물을 자기 욕심대로 악용해 온 것을 반성하고, 하느님과 다른 이를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선용해야 함을 상기하게 된다.
종말 때 구원받은 자는 모든 재물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富로 온전히 충만해진다. 이것이 천국이요 구원이요 영원한 행복이다. 성직자 수도자가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으로만 충만하여 사는 모습은 바로 구원받은 자가 종말 때 누리게 될 상태를 미리 준비하고 체득하고 실현하려는 것이다.

현대적 실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성서의 말씀, 그리고 해방신학자들의 신학적인 이론을 통하여 물질적 가난, 정신적 가난, 자발적 가난, 청빈으로서의 가난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날 가난을 과연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현대의 세계를 일컬어 물질문명 시대, 혹은 황금만능 시대라 부른다. 과학 기술의 발달과 그로인한 인간생활수준의 향상은 인간 생활양식에 대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 변화의 영향력은 인간의 사고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오늘날 행복의 척도는 생활의 풍족함이나 안락함의 정도에 의해 결정되고 있으며, 생활의 방향은 더욱 더 풍족하고 편안함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현재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기보다 낮은 상태의 것들에는 관심을 표명하지 않게 되며, 보다 나은 상태에로의 시도만 추구하게 한다. 이러한 시대의 조류는 한국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가난에 대한 두 가지 점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정신적 가난’이라는 신앙의 목표가 불분명하다. 이 때문에 그토록 열심히 활동을 하면서도 교회 안에는 비복음적인 갈등이 많이 있다. 이것은 사회 현실에 육화하지 못하고 추상적으로 관념화된 신앙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둘째, ‘자발적 가난’이 거의 없어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못함으로 ‘가난함의 순환’1)이 장애를 받고 있다. 그 결과 주목할 만한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활력이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 안에서 천주교 신자를 발견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지 못할 때 비구원의 처지에 놓이는 것은 가난한 이들만이 아니다. 교회도 그리스도를 떠나서 복음적 활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1. 경제적 가난의 현실
경제적으로 선진국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는 우리 사회에서 왜 가난한 이들이 생겨났고 또 늘어나고 있는가? 학자들의 연구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첫째, 급격한 농민층 분해와 도시화에 의해 일시적으로 막대한 과잉 인구의 풀(Pool)이 형성되었다. 둘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와는 달리 실업 상태에 대한 사회보장이 거의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소득을 올리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이에 따라 각종 영세한 경제활동이 일어나게 된다. 셋째, 무허가 정착지는 도시 빈민이 도시에서 생존하기 위해 건축한 주거지이지만 국가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노동력 재생산 확보의 기능을 한다. 따라서 노동력 재생산의 위기와 연결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사회의 도시 빈민은 이미 자본주의적 축적 구조 안에서 형성, 재생산되고 있으며, 도시 빈민의 생존과 생활양식 문제 역시 노동자 계급 전체의 경제 조건 문제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2)
우리 사회에서는 도시 빈곤 문제에 대하여 6,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경제 개발에 의한 성장 자체가 바로 빈곤 대책의 훌륭한 무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었으나 부정 부패, 생명 경시, 집단 이기주의, 계층간 위화감, 소외, 아노미3) 등 각종 사회문제가 부의 축적 과정에서 생겨남으로써 사회는 불안해지고 여전히 빈곤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오히려 박탈감 속에서 상대적 빈곤이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우리 교회의 교세가 급성장한 80년대는 바로 이러한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비인간화 시기와 같은 때이다. 바로 그 시기에 본당 위주의 사목구조로 획일화 된 교회는 가난한 이들이 교회와 멀어지게 했으며, 함께 나누는 이웃이 아니라 불우 이웃돕기의 대상이 되게 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하기는 했으나’ ‘함께 하지는 못한’ 결과가 오늘날 점점 늘어만 가는 냉담자 문제, 교회의 중산층화로 인한 가난한 이들의 소외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결국 가난한 이들을 위한 나눔이 복음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물질을 나누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정신적 가난’이 우리 삶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이들을 통해서 물질을 나눔으로 가난한 이들을 ‘대상화’ 시키지 않고 ‘복음화’시킬 수 있다.
2. 영적가난의 추구 – 겸손한 삶
교만한 사람을 당신 팔로 흩어 버리시는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을 자비로운 은총으로 돌보신다(루가 1, 52 참조). 예수님의 잉태는 성모님의 겸손한 순명 때문에 가능했고, 성인들은 이점을 먼저 깨달았다. 교회가 공경하는 수많은 성인들은 성모님의 이 겸손한 순명에서 영적 가난의 모토를 발견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영적 가난의 모토로써 ‘겸손한 자기이탈’을 설정하였다.4)
‘나의 가난’을 사는 ‘자기 중심적 가난’은 영적으로 교마하고 이기적이고 율법주의적인 것이므로, 그 자체가 이미 마음의 가난과 대립되어 가난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예수의 가난’을 사는 ‘그리스도 중심적 가난’은 겸손하고 자기 봉헌적이며 자기 양도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므로, 그것이야말로 참되고 온전한 가난인 것이다.5)
성인들의 가난은 하느님 아닌 것에 대한 아집과 애착을 버림으로써 온전히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완덕으로 나아가기 위해 소유의 포기가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온갖 집착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성녀 예수의 데레사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삶은 철저한 자기이탈에서 온다고 하였다. 또한 데레사 성녀는, 이러한 영적 가난은 겸손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영적 가난은 자기 취향과 편리함의 포기가 우선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탈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겸손을 살 수 있을 때 이탈이 성취되고, 이탈이 성취될 때 참으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적 가난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을까? 먼저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집착에서 벗어날 때 더 큰 풍요를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재물을 아끼고 모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말이다. 예를 들면 돈 한 푼 없는 사람이 돈에 집착하여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생각할 때 그는 이미 영적 가난에서 멀어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재화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 재화의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가난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6)
3. 물질적 가난의 극복 – 소유와 나눔
참된 가난은 사물을 죄악시하거나 무시하고 경멸하지 않고, 오히려 사물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데에 있다. 사물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 물론, 언젠가는 변해지고 쇠퇴하고 멸망할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지만, 이를 바르게 사용함으로써, 인간이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만큼 귀중하고 값진 것이다. 따라서 사물이 창조된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선익을 위해 사용하는 데에 있다.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이를 섬기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7)
예수께서는 가난의 정신적 면뿐만 아니라 물질적 가난을 결코 소홀히 하신 분이 아니다. 실제로 물질적인 가난은 정신적인 가난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기에 초대교회이래 교회는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을 사는 교구공동체나 수도공동체의 영적인 도움 속에서 교회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서 가난을 제대로 살겠다는 교구공동체나 수도공동체가 많을 때에는 교회의 성장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반면에 교구공동체나 수도공동체가 영신적으로는 어떻든 현실적이고도 물질적인 판단 속에 살았을 때는 교회의 내적인 영성과 외적인 성장은 눈에 띌 정도로 마이너스 성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검증이 역사의 교훈으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의 교회 역시 이에 대한 해결책을 주님의 말씀에서 찾고자 노력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나 자신이 마음으로 가난한 자 되겠다는 결심이 없다면 우리의 열성은 겉꾸미는 바리사이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물질적인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자녀적인 신뢰심으로, 예수의 가난을 따르겠다는 원으로, 잉여의 재화를 가난한 이웃과 나누어 자선의 기회로 삼으려 할 때로 때 성화의 은총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교회의 많은 교우들은 가난한 이와의 나눔에 인색하면서도 열심히 산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8)
예수께서 재물로부터 내적인 해방을 요구하셨다는 말씀의 이면에는 소유의 공동체성이라는 커다란 가르침이 있다. 즉 소유한 것에 집착하기보다 주고 나누는 데서 모두가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정의는 이 세상의 재물이 합리적으로 분배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세상은 인류의 공동소유물이고, 또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평등하다. 그렇기에 세상과 재화의 분배에 있어서도 인류는 일종의 평등권을 갖는다. 왜냐하면 이 지구상에서 자기 생명을 보존할 만큼의 소유권을 가지는 것은 인류의 기본적인 생존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재화의 나눔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정의의 문제이며 인류가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이다. 주님은 이 진리를 위해 가난하게, 종으로 사셨다.
물질과 가난의 문제는 모두에게 민감하면서도 복잡하여 다루기 난처한 주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누구나 복음적 의미를 깨닫고 생활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행복의 첫째 조건(마태 5, 3)이고, 모든 이가 하느님 대전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초대받았을 뿐 아니라(마태 5, 48; 『교회헌장』38 참조) 완전한 자 되려면 부유함과 가난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9)
4.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성
오늘날 ‘가난한 자들의 외침’은 우리 주위에 많이 들려오고 있다. 여러 나라에서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 중노동에 종사하면서도 정당한 보수를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 복지시설에서 학대와 착취를 당하고 있는 정신 및 신체 장애자들, 적절한 시설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장애자들, 그리고 극빈자, 철거민 등등 이들은 모두 아무런 정신적 종교적인 바탕과 대책없이 발전해 가는 물질 문화와 경제 성장으로 인해 빚어진 희생자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나라, 여러 사회에서 들려오는 ‘가난한 자들의 외침’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로서, 항상 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려고 한다. 수도회도 가난한 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된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가난한 자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가난한 자들과의 유대를 긴밀히 하는 노력을 계속한다. 신앙인으로 구성된 여러 단체도 우선적으로 가난한 자를 돌보고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가난한 자들과 연대를 촉진시켜야 할 것이다.10)
그런데 교회의 임원과 수도회의 후원자들은 흔히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들과 자주 만나고 일을 함께 하다 보면, 자연히 부유층과는 더 친숙함을 느끼게 되는 반면 빈민층과는 멀어지게 되어 쉽게 남의 오해와 비판을 받게 될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성직자 수도자가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평소에 서민들과 자주 접촉할 기회를 갖고, 특히 보다 가난하고 불쌍한 소외된 자들과 함께 지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자와의 유대는 금품을 베푸는 일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과 같은 입장에 서서 함께 고민하고 아픔을 느끼고, 그들의 상황에 共鳴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고 인내하기 위해 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11)
5. 노동과 봉사
일하지 않는 사람은 시간을 낭비하거나 악용하게 되고, 게으름을 피우거나 쓸데없는 일을 하게 되거나 죄를 범하게 된다. 게으름을 피우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직자 수도자와 모든 그리스도인은 게으름을 피우는 ‘부자’가 되지 말고, 오히려 매일 부지런히 일을 해서 먹고사는 ‘근로자’, ‘서민’이 되어야 한다.12)
누구나 기꺼이 도와주려는 자세는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 준다는 의미에서 복음적 가난의 정신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방관만 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서 도와주어야 한다. 남에 대한 무관심과 냉담, 남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무사주의’를 타파하여 누구에게나 관심과 호의를 보이고 누구와도 쉽게 어울릴 줄 알아야 한다. 남의 부탁을 쉽게 받아 주고, 남의 청을 가볍게 들어주는 사람이 곧 “마음이 가난한 자”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남의 부탁을 ‘부득이한 사정’으로 쉽게 거절하지만, 실은 약간의 성의만 지녔으면 거의 다 들어 줄 수 있는 것이다.
6. 종말론적인 삶의 증거
종말이 올 때, 세상의 모든 사물은 멸망하지만, 사랑과 사랑이 만든 것은 영원히 남는다. 사물은 멸망함으로써, 사물을 소유한 자도 소유하지 못한 자도 무조건 사물에서 떠날 수밖에 없으며, 사물에 욕심을 부리는 자든 부리지 않는 자이든 사정없이 사물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참으로 언젠가는 멸망할 물질적 사물이라 할지라도, 이를 남을 위해 제대로 사용한다면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될 만큼 값진 것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물은 진정 영원한 가치를 내포한다고 해야 한다.13)
다만, 멸망할 재물에서 불멸의 가치를 끌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직 재물을 취급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다. 재물에 대한 마음 자세가 우리를 성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악인으로 만들 수도 있다.
수도자는 이러한 의미에서 재물로 인하여 죄를 범하게 될 가능성을 미리 버리고, 재물에 대한 그릇된 욕망을 미리 포기하기 위해 정당한 소유권과 소유욕까지도 포기하여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14)
수도자들의 이러한 삶은 재물이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 지라도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나는 것이므로, 누구든지 이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음이 가난한 자”는 먼저 체득하면서 모든 이에게 알려 주고 또 증거 하는 것이다. 이 가난한 자의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재물에 얽매여 재물을 자기 욕심대로 악용해 온 것을 반성하고, 하느님과 다른 이를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선용해야 함을 상기하게 된다.
종말 때 구원받은 자는 모든 재물의 원천이신 하느님의 富로 온전히 충만해진다. 이것이 천국이요 구원이요 영원한 행복이다. 성직자 수도자가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으로만 충만하여 사는 모습은 바로 구원받은 자가 종말 때 누리게 될 상태를 미리 준비하고 체득하고 실현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