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자 중 한 사람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1756년에 태어난 이승훈의 호는 만천(晩泉 혹은 蔓川)이다. 그는 당대의 석학이었던 이가환의 생질이며 정약용의 매부이기도 하였다. 178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승훈은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이벽에게 천주교를 배우고 1783년 말 이벽의 권유로 영세를 하기 위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들어갔다. 그 곳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초 중국에서 입수한 교리 서적, 십자고상, 상본(像本)을 몰래 감추어 귀국한 이승훈은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 공동체를 형성한 후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1785년 을사 추조 적발사건이 일어나자 친척과 가족들의 탄압에 못 이긴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운 후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786년 자신의 배교를 뉘우친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하였으며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등 성사를 집전하며 1787년에는 정약용과 함께 반촌(泮村, 지금의 혜화동)에서 교리를 연구하던 중 1789년 평택 현감으로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790년 이승훈과 권일신의 편지를 가지고 조선 교회의 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하는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령을 전하자 이승훈은 다시 조상 제사 문제로 곤혹을 치렸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평택현감 재직시 향교(鄕校)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878년 정약용과 함께 반촌에서 서학서를 공부했던 사건(丁未泮會事件)이 밝혀져 문제가 되자 또다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1794년 12월(음)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이듬해 6월(음)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한 죄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있던 이승훈도 다시 예산으로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이승훈은 의금부(義禁府)의 국청(鞠廳)에서 수차례의 고문과 신문을 받고 4월 8일(음 2월 26일) 정약종, 홍낙민, 홍교만 등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이승훈은 비록 여러 번 박해에 흔들렸던 신심과 회개가 엇갈리는 생애를 살았지만 끝까지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해 왔고 또 가성직 제도를 주도했던 인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장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크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이승훈으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은 그의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는 1866년에 순교하였고, 증손 이연구와 이균구는 1871년에 순교하여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승훈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자 중 한 사람으로 한국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인물이다.
1756년에 태어난 이승훈의 호는 만천(晩泉 혹은 蔓川)이다. 그는 당대의 석학이었던 이가환의 생질이며 정약용의 매부이기도 하였다. 1780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승훈은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이벽에게 천주교를 배우고 1783년 말 이벽의 권유로 영세를 하기 위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북경에 들어갔다. 그 곳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교리를 배운 후 그라몽(Jean Joseph de Grammont, 1736~1812)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아 이승훈은 한국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1784년 초 중국에서 입수한 교리 서적, 십자고상, 상본(像本)을 몰래 감추어 귀국한 이승훈은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일신 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 최인길, 김종교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 공동체를 형성한 후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1785년 을사 추조 적발사건이 일어나자 친척과 가족들의 탄압에 못 이긴 그는 천주교 서적을 불태운 후 벽이문(闢異文)을 지어 자신의 배교를 공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786년 자신의 배교를 뉘우친 그는 다시 교회로 돌아와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하였으며 신자들에게 세례와 견진 등 성사를 집전하며 1787년에는 정약용과 함께 반촌(泮村, 지금의 혜화동)에서 교리를 연구하던 중 1789년 평택 현감으로 등용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790년 이승훈과 권일신의 편지를 가지고 조선 교회의 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던 윤유일이 돌아와 가성직 제도와 조상 제사를 금하는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명령을 전하자 이승훈은 다시 조상 제사 문제로 곤혹을 치렸다. 17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권일신과 함께 체포되어 평택현감 재직시 향교(鄕校)에 배례하지 않았던 사실과, 1878년 정약용과 함께 반촌에서 서학서를 공부했던 사건(丁未泮會事件)이 밝혀져 문제가 되자 또다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가 석방되었다. 그러나 1794년 12월(음)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후 이듬해 6월(음) 최인길, 윤유일, 지황 등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한 죄로 처형되자 이에 연루되어 있던 이승훈도 다시 예산으로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3월 22일 이가환, 정약용, 홍낙민 등과 함께 체포된 이승훈은 의금부(義禁府)의 국청(鞠廳)에서 수차례의 고문과 신문을 받고 4월 8일(음 2월 26일) 정약종, 홍낙민, 홍교만 등 6명과 함께 참수되었다.
이승훈은 비록 여러 번 박해에 흔들렸던 신심과 회개가 엇갈리는 생애를 살았지만 끝까지 초기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해 왔고 또 가성직 제도를 주도했던 인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장을 열었다는 의미에서 크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이승훈으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은 그의 아들 이신규와 손자 이재의는 1866년에 순교하였고, 증손 이연구와 이균구는 1871년에 순교하여 신앙을 증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