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유일(바오로)

 

  윤유일은 1760년, 경기도 여주 고을의 양반 집에서 태어나 유학에 힘쓰던 선비였다. 그는 여주 고을 가까운 양근 땅 본향을 자주 출입하던 권일신과 평소부터 교분이 있었다. 한국 초대 교회의 중심 인물이며 교회의 영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권일신의 인도로 천주 신앙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1784년 김범우의 집을 신앙실천의 거점으로 삼고, 종교 집회를 가지게 됨으로써 창설을 본 한국 천주교회는 성직자를 모시지 못한 목자 없는 교회였고, 따라서 미사 성제의 거행이 없는 평신도들만의 교회 탄생이었다. 서적을 통한 학문적 접촉에 의한 자율적인 천주 신앙에의 도달이었고, 교회 창설에 의한 천주 신앙의 실천이었기에 기본 교리에 대한 이해는 상당한 것이었으나 초대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교회법적 지식은 미흡한 것이었다.


  교회 창설 후의 천주 신앙의 실천적 봉행이 시작된 후에 그들은 성직자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1787년에 이벽, 이승훈 등을 중심으로 이른바 임시 준성직자단을 이루고 활발한 교회 활동을 펴게 되었다. 임시 준성직자단에 의한 교회 사목이 1년여 계속되는 동안에 교리 지식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유항검(아오스딩) 등은 임시 준성직자단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그에 대한 교권적 해석을 북경 주교에게 구하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초대 한국 천주교회 지도자들도 찬동하여 교회의 밀사를 쇄국 조선 왕국에서 청국으로 밀파하기를 결의하였다. 이에 필요한 자금은 유관검과 이가환이 거출하였다. 이 때에 중대한 사명을 띠고 북경에 파송된 이가 윤유일이었다.


  윤유일은 초기 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꼬)으로부터 교리 교육을 받던 예비신자였다. 그는 매우 침착하고 자상하면서도 대담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기에, 권일신이 그에게 이 사명을 수행해 주기를 교섭하였던 것이며, 이를 쾌히 승낙하고 조선 교회의 밀사로 왕복 5천 리의 험난한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국가적 사명을 띠지 않은 사람의 외국 여행이 법으로 금지되었었고, 이를 어기는 일은 곧 사형을 초래하는 것이 되는 국법 위반이었다. 조선 왕국의 이처럼 철저한 쇄국 정책하에서 대륙과의 유일한 공적 통로는 해마다 청국에 파견되는 사신 일행의 사대 사행이었다. 일행 3백여 명으로 편성되는 이 사신 일행의 하졸배 또는 수행 상인으로 가장하여 북경을 다녀오는 이외에는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윤유일은 유관검과 이가환의 재정적 도움을 얻어, 사신 일행의 수행 상인의 한 사람 자리를 사들여 1789년 10월에 조선 왕국을 떠날 수 있었다. 어느 한때나 안심할 수 없는 위기를 침착하게 대처하여 마침내 그는 북경 북당을 방문하여 이승훈, 권일신 등의 이름으로 된 조선 교회의 밀서를 북당의 프랑스 성직자인 로오 신부(Raux : Lazarist회원이며, 당시 북경주재 프랑스 선교단 책임자였다)에서 전할 수 있었다. 이 때의 감격을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서한에 적고 있다.


  ꡒ윤 바오로의 도착은 생각지 못했던 일로 북경의 전 교회는 환희에 젖었습니다. 아직 선교사도 찾아가지 않았더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가르쳐 준 일이 없는 나라로부터 놀라운 복음 전파의 사실을 듣고 온 교회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새로이 생겨난 이 교회로부터의 편지를 읽고, 또 이 신자로부터 사정을 듣고 한 통의 답신서를 썼습니다. 새로 태어난 교우들이 전능하시고 무한히 선하신 주님의 영생의 은혜를 받고, 신앙에 대한 그들의 사명에도 무한한 은총을 입어, 믿음을 위하여 온갖 것을 인내하도록 권고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특별한 수단을 강구해 줄 것을 전해 주었습니다.ꡓ


  성직자 파견의 약속을 받은 예비 교우 윤유일은 스스로 자청하여 영세하였고, 이에 성체성사를 영하고, 견진성사마저 받고 귀국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북경 주교의 임시 준성직자단 해체의 명령과 전교 활동의 지속적 추진의 지시는 조선 교회로 하여금 성직자 영입 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윤유일은 1790년 9월에 다시금 조선 교회의 밀사로 어려운 사명을 담당하고, 또다시 건륭제 탄신 80년 축하를 위한 사신인 진하사 일행에 끼어들어 북경에 들어갔다. 그는 이때 ‘우’라는 성을 가진 예비 교우와 동행하였으며, 그의 사명은 성직자 파송을 촉구하는 한편 그때 조선 교회에서 문제로 제기된 조상 제사문제에 관한 의문점을 질의하는 일이었다. 조선 교회의 발전과 교리 해석상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교권적 해석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북경 주교는 성직자 파견을 약속하는 한편 영입 준비를 서둘 것을 지시하고 성직자 입국 후에 사용되어야 하는 미사경본, 성작, 십자가 등을 가지고 귀국토록 조치하였고, 조상 제사는 교황의 잠정적 조치에 의해 금지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조상 제사의 금지 조치는 보유론적 천주 신앙에 입각해 있던 한국 초대교회에 중대한 시련이 되었다. 유교적 체질의 천주 신앙을 청산하고, 순종교적 의식에 터전한 천주 신앙으로의 승화가 요구되는 이 문제로 초대 한국 교회의 지식인 교우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혼선이 빚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신해 사건이 일어나 윤지충, 권상연이 순교하고, 교회가 조상제사 문제로 박해를 받아 많은 교우들이 수난케 되었다.


  1791년 북경 주교는 약속대로 한 성직자를 조선에 잠입시키고자 국경까지 파송하였으나, 조선교회측의 영접 대책이 없어 실패로 돌아갔다. 이를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 일을 기필코 이루어야 할 것이라 열망한 사람은 윤유일이었다. 윤유일은 새로이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 올라서게 된 최인길, 최창현과 의논한 끝에 기필코 성직자를 모셔 들이기 위해 다시금 조선 교회의 밀사를 북경교회에 파송하기로 하였다.


  이 때에 파송된 밀사는 지 황(사바)과 예비교우인 우 요한이었다. 이들을 통해 신해박해의 진상이 북경에 알려졌고, 기어이 성직자를 시련의 조선 왕국으로 파송하여야 할 북경 주교의 결심을 촉구하게 되었다. 이들의 귀국 보고에 의해 주문모 신부가 1794년 2월에 조선 왕국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접한 윤유일은 최인길 총회장과 의논하여 시기가 적합치 못하여 연말로 영입을 연기하기로 합의하고, 그 스스로 몇 교인을 인솔하여 국경선에 나가 주문모 신부 일행과 접선하고, 주 신부의 입국을 연기케 하였다. 그리고 연말에 다시금 지황을 이끌고 국경 도시인 의주에 영접차 나타났다. 지 황을 국경 넘어 잠입시켜 주문모 신부와 회동시켜 결빙한 압록강을 넘어 12월 23일 주 신부를 조선 왕국으로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 교회가 창설된 지 10년만에 맞아들인, 조선 교회를 위한 이 귀한 성직자를 무사히 서울로 안내하여 역관이며 교우인 최인길(마지아)이 마련한 계동 은신처에 안착케 하고, 1795년 성 토요일에 미사 성제를 올릴 수 있게 하였으니, 그들의 기쁨은 어떠하였으랴! 이처럼 윤유일은 초대 한국 교회의 밀사로서, 한국 교회의 영적 성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순교적 각오로 사명을 다하였고, 마침내 한국 교회의 성직자 영입을 위한 행동대로서의 책임을 다하여 천주의 영광을 이 땅에 더하게 했던 것이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활동이 시작되면서 윤유일은 그가 추진해 온 성직자 영입이 일단락 지어지자 고향이 s여주 고을의 본가로 내려가 그 나름대로 지방에서 전교에 힘썼다. 주문모 신부는 때로 지방 사목 여행 때 그의 집을 들르기도 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사목 활동으로 한국 교회에 큰 발전이 기대되던 때에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서울 포교들이 신부의 은신처인 최인길(마지아)의 집을 급습하는 긴급 사태가 벌어졌다.


  이 때에 주문모 신부는 간일발의 차로 여성 교우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긴급 피신할 수 있었으나, 주 신부 도피에 협조하여 대신 체포된 최인길에 의해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는 1795년 6월에 을묘사건이 일어났다. 최인길이 체포당한 같은 날인 6월 27일에 주문모 신부 영입에 주역을 담당했던 윤유일도 지 황과 같이 포졸들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었고, 좌포도청으로 연행되었다.


  박해 관료들은 이들로부터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사정없이 고문을 가하며, 그들의 자백을 강요했다. 매를 몹시 때리고 팔과 다리를 뒤틀고, 무릎을 으스러뜨리는 등 갖은 악형을 더해 가며 그들을 괴롭혔으나 끝내 그들의 자백을 들을 수 없었고, 천주를 향한 굳은 신앙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확신하고 있는 믿음의 기쁨으로 살을 에이고 뼈를 깎는 고문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쳤다 한다. 그러기에 포도청의 박해자들 기록에 ꡒ죽음을 기뻐하고, 삶을 미워하며, 곤장 맛보기를 마치 엿 맛보듯이 하고, 입을 꼭 다물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ꡓ고 적혀 있다.


  이러한 그들의 굳건한 믿음과 몸가짐은 박해자들을 더욱 자극하여 고문은 더욱 혹독해졌다. 마침내 그들을 포도청 뜰에서 장살에 처하라는 결안이 내려졌고, 그날 밤중에 사정없이 내려치는 곤장 아래서 목숨을 거두고 순교하였다. 이들 세 분 순교자의 고귀한 시신은 박해 당국자에 의해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던져졌다 하니, 그들의 시신조차 이 땅에 남겨 놓지 않은 참혹함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상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즉결처분한 이 일에 박해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났다. 아직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을 그 밤중에 때려죽인 것이 사건을 마무리함에 현명치 못한 처사이니, 마땅히 포장을 문책하여야 한다는 대사헌 권 유의 상소가 있어 묘당에서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36세의 나이로, 이 땅에 성직자를 모셔들이기 위해 국내외를 넘나들며 헌신한 윤유일의 사람됨은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의 감탄과 눈물을 자아내게 할 만큼 늠름하고 열성적이었다. 구베아 주교는 그의 서한에서 ꡒ북경교회와 나는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을 내왕한 두 번 여행에 보여준 신심과 정성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는 북경에서 견진과 고백과 성체성사를 놀라운 열성으로 하였고, 우리 교우들중 여러 사람이 이 신입 교우에게서 복음 실천에 통달한 오래 된 교우와 같은 모범적인 겸손과 말과 덕행을 봄으로써 느낀 기쁨과 감탄으로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ꡓ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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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유일(바오로)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윤유일은 1760년, 경기도 여주 고을의 양반 집에서 태어나 유학에 힘쓰던 선비였다. 그는 여주 고을 가까운 양근 땅 본향을 자주 출입하던 권일신과 평소부터 교분이 있었다. 한국 초대 교회의 중심 인물이며 교회의 영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권일신의 인도로 천주 신앙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1784년 김범우의 집을 신앙실천의 거점으로 삼고, 종교 집회를 가지게 됨으로써 창설을 본 한국 천주교회는 성직자를 모시지 못한 목자 없는 교회였고, 따라서 미사 성제의 거행이 없는 평신도들만의 교회 탄생이었다. 서적을 통한 학문적 접촉에 의한 자율적인 천주 신앙에의 도달이었고, 교회 창설에 의한 천주 신앙의 실천이었기에 기본 교리에 대한 이해는 상당한 것이었으나 초대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교회법적 지식은 미흡한 것이었다.

      교회 창설 후의 천주 신앙의 실천적 봉행이 시작된 후에 그들은 성직자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1787년에 이벽, 이승훈 등을 중심으로 이른바 임시 준성직자단을 이루고 활발한 교회 활동을 펴게 되었다. 임시 준성직자단에 의한 교회 사목이 1년여 계속되는 동안에 교리 지식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유항검(아오스딩) 등은 임시 준성직자단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고, 그에 대한 교권적 해석을 북경 주교에게 구하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초대 한국 천주교회 지도자들도 찬동하여 교회의 밀사를 쇄국 조선 왕국에서 청국으로 밀파하기를 결의하였다. 이에 필요한 자금은 유관검과 이가환이 거출하였다. 이 때에 중대한 사명을 띠고 북경에 파송된 이가 윤유일이었다.

      윤유일은 초기 교회 지도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꼬)으로부터 교리 교육을 받던 예비신자였다. 그는 매우 침착하고 자상하면서도 대담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기에, 권일신이 그에게 이 사명을 수행해 주기를 교섭하였던 것이며, 이를 쾌히 승낙하고 조선 교회의 밀사로 왕복 5천 리의 험난한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국가적 사명을 띠지 않은 사람의 외국 여행이 법으로 금지되었었고, 이를 어기는 일은 곧 사형을 초래하는 것이 되는 국법 위반이었다. 조선 왕국의 이처럼 철저한 쇄국 정책하에서 대륙과의 유일한 공적 통로는 해마다 청국에 파견되는 사신 일행의 사대 사행이었다. 일행 3백여 명으로 편성되는 이 사신 일행의 하졸배 또는 수행 상인으로 가장하여 북경을 다녀오는 이외에는 기회를 얻을 수가 없었다.

      윤유일은 유관검과 이가환의 재정적 도움을 얻어, 사신 일행의 수행 상인의 한 사람 자리를 사들여 1789년 10월에 조선 왕국을 떠날 수 있었다. 어느 한때나 안심할 수 없는 위기를 침착하게 대처하여 마침내 그는 북경 북당을 방문하여 이승훈, 권일신 등의 이름으로 된 조선 교회의 밀서를 북당의 프랑스 성직자인 로오 신부(Raux : Lazarist회원이며, 당시 북경주재 프랑스 선교단 책임자였다)에서 전할 수 있었다. 이 때의 감격을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서한에 적고 있다.

      ꡒ윤 바오로의 도착은 생각지 못했던 일로 북경의 전 교회는 환희에 젖었습니다. 아직 선교사도 찾아가지 않았더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가르쳐 준 일이 없는 나라로부터 놀라운 복음 전파의 사실을 듣고 온 교회는 기쁨의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는 새로이 생겨난 이 교회로부터의 편지를 읽고, 또 이 신자로부터 사정을 듣고 한 통의 답신서를 썼습니다. 새로 태어난 교우들이 전능하시고 무한히 선하신 주님의 영생의 은혜를 받고, 신앙에 대한 그들의 사명에도 무한한 은총을 입어, 믿음을 위하여 온갖 것을 인내하도록 권고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특별한 수단을 강구해 줄 것을 전해 주었습니다.ꡓ

      성직자 파견의 약속을 받은 예비 교우 윤유일은 스스로 자청하여 영세하였고, 이에 성체성사를 영하고, 견진성사마저 받고 귀국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북경 주교의 임시 준성직자단 해체의 명령과 전교 활동의 지속적 추진의 지시는 조선 교회로 하여금 성직자 영입 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했다.

      윤유일은 1790년 9월에 다시금 조선 교회의 밀사로 어려운 사명을 담당하고, 또다시 건륭제 탄신 80년 축하를 위한 사신인 진하사 일행에 끼어들어 북경에 들어갔다. 그는 이때 ‘우’라는 성을 가진 예비 교우와 동행하였으며, 그의 사명은 성직자 파송을 촉구하는 한편 그때 조선 교회에서 문제로 제기된 조상 제사문제에 관한 의문점을 질의하는 일이었다. 조선 교회의 발전과 교리 해석상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교권적 해석을 구하려는 것이었다. 북경 주교는 성직자 파견을 약속하는 한편 영입 준비를 서둘 것을 지시하고 성직자 입국 후에 사용되어야 하는 미사경본, 성작, 십자가 등을 가지고 귀국토록 조치하였고, 조상 제사는 교황의 잠정적 조치에 의해 금지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조상 제사의 금지 조치는 보유론적 천주 신앙에 입각해 있던 한국 초대교회에 중대한 시련이 되었다. 유교적 체질의 천주 신앙을 청산하고, 순종교적 의식에 터전한 천주 신앙으로의 승화가 요구되는 이 문제로 초대 한국 교회의 지식인 교우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혼선이 빚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신해 사건이 일어나 윤지충, 권상연이 순교하고, 교회가 조상제사 문제로 박해를 받아 많은 교우들이 수난케 되었다.

      1791년 북경 주교는 약속대로 한 성직자를 조선에 잠입시키고자 국경까지 파송하였으나, 조선교회측의 영접 대책이 없어 실패로 돌아갔다. 이를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이 일을 기필코 이루어야 할 것이라 열망한 사람은 윤유일이었다. 윤유일은 새로이 한국 교회의 지도자로 올라서게 된 최인길, 최창현과 의논한 끝에 기필코 성직자를 모셔 들이기 위해 다시금 조선 교회의 밀사를 북경교회에 파송하기로 하였다.

      이 때에 파송된 밀사는 지 황(사바)과 예비교우인 우 요한이었다. 이들을 통해 신해박해의 진상이 북경에 알려졌고, 기어이 성직자를 시련의 조선 왕국으로 파송하여야 할 북경 주교의 결심을 촉구하게 되었다. 이들의 귀국 보고에 의해 주문모 신부가 1794년 2월에 조선 왕국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접한 윤유일은 최인길 총회장과 의논하여 시기가 적합치 못하여 연말로 영입을 연기하기로 합의하고, 그 스스로 몇 교인을 인솔하여 국경선에 나가 주문모 신부 일행과 접선하고, 주 신부의 입국을 연기케 하였다. 그리고 연말에 다시금 지황을 이끌고 국경 도시인 의주에 영접차 나타났다. 지 황을 국경 넘어 잠입시켜 주문모 신부와 회동시켜 결빙한 압록강을 넘어 12월 23일 주 신부를 조선 왕국으로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 교회가 창설된 지 10년만에 맞아들인, 조선 교회를 위한 이 귀한 성직자를 무사히 서울로 안내하여 역관이며 교우인 최인길(마지아)이 마련한 계동 은신처에 안착케 하고, 1795년 성 토요일에 미사 성제를 올릴 수 있게 하였으니, 그들의 기쁨은 어떠하였으랴! 이처럼 윤유일은 초대 한국 교회의 밀사로서, 한국 교회의 영적 성화에 기여하기 위하여 순교적 각오로 사명을 다하였고, 마침내 한국 교회의 성직자 영입을 위한 행동대로서의 책임을 다하여 천주의 영광을 이 땅에 더하게 했던 것이다.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전교 활동이 시작되면서 윤유일은 그가 추진해 온 성직자 영입이 일단락 지어지자 고향이 s여주 고을의 본가로 내려가 그 나름대로 지방에서 전교에 힘썼다. 주문모 신부는 때로 지방 사목 여행 때 그의 집을 들르기도 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사목 활동으로 한국 교회에 큰 발전이 기대되던 때에 배교자의 밀고에 의해 서울 포교들이 신부의 은신처인 최인길(마지아)의 집을 급습하는 긴급 사태가 벌어졌다.

      이 때에 주문모 신부는 간일발의 차로 여성 교우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긴급 피신할 수 있었으나, 주 신부 도피에 협조하여 대신 체포된 최인길에 의해 주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는 1795년 6월에 을묘사건이 일어났다. 최인길이 체포당한 같은 날인 6월 27일에 주문모 신부 영입에 주역을 담당했던 윤유일도 지 황과 같이 포졸들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었고, 좌포도청으로 연행되었다.

      박해 관료들은 이들로부터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사정없이 고문을 가하며, 그들의 자백을 강요했다. 매를 몹시 때리고 팔과 다리를 뒤틀고, 무릎을 으스러뜨리는 등 갖은 악형을 더해 가며 그들을 괴롭혔으나 끝내 그들의 자백을 들을 수 없었고, 천주를 향한 굳은 신앙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이 확신하고 있는 믿음의 기쁨으로 살을 에이고 뼈를 깎는 고문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기쁨이 넘쳤다 한다. 그러기에 포도청의 박해자들 기록에 ꡒ죽음을 기뻐하고, 삶을 미워하며, 곤장 맛보기를 마치 엿 맛보듯이 하고, 입을 꼭 다물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ꡓ고 적혀 있다.

      이러한 그들의 굳건한 믿음과 몸가짐은 박해자들을 더욱 자극하여 고문은 더욱 혹독해졌다. 마침내 그들을 포도청 뜰에서 장살에 처하라는 결안이 내려졌고, 그날 밤중에 사정없이 내려치는 곤장 아래서 목숨을 거두고 순교하였다. 이들 세 분 순교자의 고귀한 시신은 박해 당국자에 의해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던져졌다 하니, 그들의 시신조차 이 땅에 남겨 놓지 않은 참혹함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천상에서 영생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너무나 급작스럽게 즉결처분한 이 일에 박해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났다. 아직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을 그 밤중에 때려죽인 것이 사건을 마무리함에 현명치 못한 처사이니, 마땅히 포장을 문책하여야 한다는 대사헌 권 유의 상소가 있어 묘당에서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36세의 나이로, 이 땅에 성직자를 모셔들이기 위해 국내외를 넘나들며 헌신한 윤유일의 사람됨은 북경교구 구베아 주교의 감탄과 눈물을 자아내게 할 만큼 늠름하고 열성적이었다. 구베아 주교는 그의 서한에서 ꡒ북경교회와 나는 윤 바오로가 1790년에 북경을 내왕한 두 번 여행에 보여준 신심과 정성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는 북경에서 견진과 고백과 성체성사를 놀라운 열성으로 하였고, 우리 교우들중 여러 사람이 이 신입 교우에게서 복음 실천에 통달한 오래 된 교우와 같은 모범적인 겸손과 말과 덕행을 봄으로써 느낀 기쁨과 감탄으로 눈물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ꡓ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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