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점혜(아가다)

 

  윤점혜(아가다)는 신유 대교난 때 순교한 여러 동정녀들 중에서도 그 행적이 가장 뛰어난 여성이었다. 경기도 광주 양근 지방에서 향반(鄕班)의 딸로 출생한 그녀는 북경을 세 번 오아래하여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모셔오고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尹有一․바오로)의 사촌 누이였다. 또한 그녀의 동생 윤운혜(尹雲惠)는 당시 조선 교회 안에서 크게 활약했던 정광수(鄭光受)의 아내로서 부부가 함께 서울 벽동에 살면서 조선 교회의 집회를 주관하였다.


  그녀의 교명은 ‘아가다’이며,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교리를 배워 천주교의 신심 생활이나 교리를 알게 되면서부터 그녀는 오로지 신앙 생활에만 전념코자 하는 원의(願意)를 품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나이 17,8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결심이 방해 받을 것을 염려하여 몰래 남자 옷을 지어 입고 삼촌집으로 도망갔다. 그녀의 모친은 그녀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줄로 알고 슬퍼했으나, 얼마 후 그녀는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녀의 영웅적인 결심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은 그녀를 회유하며 불평하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을 바꿔 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럴수록 오히려 동정녀로서 하느님에게 헌신하리라 더욱 굳게 다짐했으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신앙과 복음의 은혜를 전할 것만을 생각하였다.


  1795년경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상경하였다. 그런데 아직 영세를 하기 전에 사촌 오빠 윤 바오로가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입국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되었기 때문에 그녀 역시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강완숙(姜完淑)의 집으로 옮겨 10여 년 동안 함께 살면서 최선을 다해 강완숙을 도와 조선 교회의 일에 전력하였다.


  또한 윤점혜 등은 하나의 공동체를 조직하여 체계적으로 교리를 배워 익히고 강완숙에 못지않게 전교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 외에도 그녀는 강완숙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한결같이 보좌하고 매월 여러 차례 첨례를 지내면서 선교 활동과 특히 처녀들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당시 조선 교회안에서 강완숙과 함께 매우 널리 알려진 여인이었으며 ꡒ천주학을 고집하는 마음을 고치기가 불가능하다ꡓ고 할 만큼 굳센 신앙심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남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지칠줄 모르고 포교 활동을 했던 윤 아가다는 몰론 자기 자신의 성화에 더욱 힘써서 매우 엄격한 생활과 잦은 금식(禁食), 엄한 극기(克己),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으로 나날을 보냈다. 또 여러 종류의 교회 모임도 주관했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은 그녀가 매우 높은 덕행을 닦았다고 말했으며, 종종 그녀는 성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영적 체험을 하는 일도 있었다.


  일례로, 그녀는 항상 자신의 모친이 성직자를 만날 수가 없어서 성사(聖事) 한 번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을 몹시 한탄했는데, 하루는 그녀의 모친이 동정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현시(顯示)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현상을 꿈이나 악귀(惡鬼)의 요술이 아닌가 염려하여 그 발현(發現) 이야기를 주문모 신부에게 하였고, 주 신부는 그것을 좋게 해석하여 그녀에게 평화를 주었던 일이 있었다.


  또 한번은, 동정 성모의 발현을 보았다. 성령이 성모의 머리위에 내려와 그 성심 위에 앉는 것같이 보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지극한 겸손으로 이러한 현시를 실제적인 것이라고 감히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주문모 신부가 그녀가 보았던 것과 거의 같은 사진을 보여 주어 그녀의 걱정을 해소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분명히 그 발현 사실을 환상으로 돌렸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녀는 자신의 보호자 성녀를 틀별히 공경하였으며, 주위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도록 힘썼다. 그녀는 ꡒ나도 아가다 성녀처럼 순교(殉敎)한다면 얼마나 좋을까ꡓ하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드디어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즉, 1801년 5월 말경, 대박해가 일어난 초기에 그녀는 강완숙과 함께 체포되어 석 달 동안 옥에 갇혀 신문과 갖은 고문을 받는 등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에 관한 문초를 기록한 관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ꡒ그녀가 강완숙의 집에 살았던 세월이 10년이나 되며, 강완숙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것을 모두 배웠다. 신부를 접대한 일은 처음에는 없다고 했으나 강완숙의 집에 유숙하면서 주 신부와 함께 내방(內方)에서 남녀가 한데 모여 첨례(瞻禮)를 보고 자주 송경(誦經)을 하였는데, 그녀도 역시 그 가운데 첨례하였고 사학(邪學 : 천주교)을 매우 열심히 하여 비록 형벌로 살육을 당하더라도 마음을 고쳐 먹을 뜻이 없다고 말했다. 그녀가 사학에 고혹된 모양은 포청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비록 고향을 떠나 유리하고 있지만 본래는 양반의 딸로서 지난 을묘년(乙卯年)에 처녀를 보전하기 위하여 몸을 상처내어 그 동생과 함께 짜고서 집을 떠나 도암쳐 나왔던 것이다. 이것이 사학 무리들의 소행이다. 비록 그려나 모친에게서 사학을 배웠다고 하나 모든 것을 강완숙에게서 영향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처음에 그녀는 적당히 내세울 사람이 없어서 과부로 자칭하였다. 이것은 천주학을 하는 여자들이 많이 하 는 상투적 방법이며, 네거리를 쏘다니고 남의 집에 더불어 살며 처녀도 아니요 과부도 아니면서 허씨(許씨)의 아내로 보이게 하였다. ꡒ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은 인간의 큰 도리[人之大倫]인데 작고 어린 한 여자가 그러한 행동응ㄹ 하여 풍속을 상하게 하고 부패시키며, 분명히 시집을 가지 않았는데도 시집간 사람처럼 하니 이 어찌  천지간에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ꡓ


  결국 윤점혜는 사형의 결안(結案)을 받게 되었고, 또 10년을 같이 생활했으며 3개월 동안 옥고를 같이 치렀던 강완숙과 함께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기를 원했음에도 강완숙은 서울 서소문 밖에서, 그리고 윤점혜는 고향인 양근 땅으로 송치되어 각각 참수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심은 순교의 순간에도 이적(異蹟)을 보였으니, 윤 아가다의 목이 떨어질 때 목에서는 젖과 같이 흰 피가 솟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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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점혜(아가다)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윤점혜(아가다)는 신유 대교난 때 순교한 여러 동정녀들 중에서도 그 행적이 가장 뛰어난 여성이었다. 경기도 광주 양근 지방에서 향반(鄕班)의 딸로 출생한 그녀는 북경을 세 번 오아래하여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모셔오고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尹有一․바오로)의 사촌 누이였다. 또한 그녀의 동생 윤운혜(尹雲惠)는 당시 조선 교회 안에서 크게 활약했던 정광수(鄭光受)의 아내로서 부부가 함께 서울 벽동에 살면서 조선 교회의 집회를 주관하였다.

      그녀의 교명은 ‘아가다’이며,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교리를 배워 천주교의 신심 생활이나 교리를 알게 되면서부터 그녀는 오로지 신앙 생활에만 전념코자 하는 원의(願意)를 품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나이 17,8세가 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결심이 방해 받을 것을 염려하여 몰래 남자 옷을 지어 입고 삼촌집으로 도망갔다. 그녀의 모친은 그녀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줄로 알고 슬퍼했으나, 얼마 후 그녀는 다시 어머니에게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녀의 영웅적인 결심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은 그녀를 회유하며 불평하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마음을 바꿔 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그럴수록 오히려 동정녀로서 하느님에게 헌신하리라 더욱 굳게 다짐했으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신앙과 복음의 은혜를 전할 것만을 생각하였다.

      1795년경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상경하였다. 그런데 아직 영세를 하기 전에 사촌 오빠 윤 바오로가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입국시켰다는 죄목으로 사형되었기 때문에 그녀 역시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강완숙(姜完淑)의 집으로 옮겨 10여 년 동안 함께 살면서 최선을 다해 강완숙을 도와 조선 교회의 일에 전력하였다.

      또한 윤점혜 등은 하나의 공동체를 조직하여 체계적으로 교리를 배워 익히고 강완숙에 못지않게 전교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그 외에도 그녀는 강완숙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한결같이 보좌하고 매월 여러 차례 첨례를 지내면서 선교 활동과 특히 처녀들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당시 조선 교회안에서 강완숙과 함께 매우 널리 알려진 여인이었으며 ꡒ천주학을 고집하는 마음을 고치기가 불가능하다ꡓ고 할 만큼 굳센 신앙심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남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지칠줄 모르고 포교 활동을 했던 윤 아가다는 몰론 자기 자신의 성화에 더욱 힘써서 매우 엄격한 생활과 잦은 금식(禁食), 엄한 극기(克己), 그리고 끊임없는 기도와 묵상으로 나날을 보냈다. 또 여러 종류의 교회 모임도 주관했다. 따라서 주위 사람들은 그녀가 매우 높은 덕행을 닦았다고 말했으며, 종종 그녀는 성녀들에게서 볼 수 있는 영적 체험을 하는 일도 있었다.

      일례로, 그녀는 항상 자신의 모친이 성직자를 만날 수가 없어서 성사(聖事) 한 번 보지 못하고 죽은 것을 몹시 한탄했는데, 하루는 그녀의 모친이 동정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현시(顯示)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현상을 꿈이나 악귀(惡鬼)의 요술이 아닌가 염려하여 그 발현(發現) 이야기를 주문모 신부에게 하였고, 주 신부는 그것을 좋게 해석하여 그녀에게 평화를 주었던 일이 있었다.

      또 한번은, 동정 성모의 발현을 보았다. 성령이 성모의 머리위에 내려와 그 성심 위에 앉는 것같이 보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지극한 겸손으로 이러한 현시를 실제적인 것이라고 감히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주문모 신부가 그녀가 보았던 것과 거의 같은 사진을 보여 주어 그녀의 걱정을 해소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분명히 그 발현 사실을 환상으로 돌렸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그녀는 자신의 보호자 성녀를 틀별히 공경하였으며, 주위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도록 힘썼다. 그녀는 ꡒ나도 아가다 성녀처럼 순교(殉敎)한다면 얼마나 좋을까ꡓ하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드디어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즉, 1801년 5월 말경, 대박해가 일어난 초기에 그녀는 강완숙과 함께 체포되어 석 달 동안 옥에 갇혀 신문과 갖은 고문을 받는 등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에 관한 문초를 기록한 관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ꡒ그녀가 강완숙의 집에 살았던 세월이 10년이나 되며, 강완숙에게서 천주교에 관한 것을 모두 배웠다. 신부를 접대한 일은 처음에는 없다고 했으나 강완숙의 집에 유숙하면서 주 신부와 함께 내방(內方)에서 남녀가 한데 모여 첨례(瞻禮)를 보고 자주 송경(誦經)을 하였는데, 그녀도 역시 그 가운데 첨례하였고 사학(邪學 : 천주교)을 매우 열심히 하여 비록 형벌로 살육을 당하더라도 마음을 고쳐 먹을 뜻이 없다고 말했다. 그녀가 사학에 고혹된 모양은 포청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그녀가 비록 고향을 떠나 유리하고 있지만 본래는 양반의 딸로서 지난 을묘년(乙卯年)에 처녀를 보전하기 위하여 몸을 상처내어 그 동생과 함께 짜고서 집을 떠나 도암쳐 나왔던 것이다. 이것이 사학 무리들의 소행이다. 비록 그려나 모친에게서 사학을 배웠다고 하나 모든 것을 강완숙에게서 영향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처음에 그녀는 적당히 내세울 사람이 없어서 과부로 자칭하였다. 이것은 천주학을 하는 여자들이 많이 하 는 상투적 방법이며, 네거리를 쏘다니고 남의 집에 더불어 살며 처녀도 아니요 과부도 아니면서 허씨(許씨)의 아내로 보이게 하였다. ꡒ남녀가 부부가 되는 것은 인간의 큰 도리[人之大倫]인데 작고 어린 한 여자가 그러한 행동응ㄹ 하여 풍속을 상하게 하고 부패시키며, 분명히 시집을 가지 않았는데도 시집간 사람처럼 하니 이 어찌  천지간에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ꡓ

      결국 윤점혜는 사형의 결안(結案)을 받게 되었고, 또 10년을 같이 생활했으며 3개월 동안 옥고를 같이 치렀던 강완숙과 함께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기를 원했음에도 강완숙은 서울 서소문 밖에서, 그리고 윤점혜는 고향인 양근 땅으로 송치되어 각각 참수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심은 순교의 순간에도 이적(異蹟)을 보였으니, 윤 아가다의 목이 떨어질 때 목에서는 젖과 같이 흰 피가 솟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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